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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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정사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 6일 신유

김운택(金雲澤)을 영변현(寧邊縣)에, 김민택(金民澤)을 선천부(宣川府)에, 김조택(金祖澤)을 창성부(昌城府)에, 김성절(金盛節)을 용천부(龍川府)에, 이천기(李天紀)를 남평현(南平縣)에, 이덕준(李德峻)을 부령부(富寧府)에, 형의빈(邢儀賓)을 위원군(渭源郡)에, 조송(趙松)을 진주목(晉州牧)에 찬배(竄配)하였다.

 

이기지(李器之)를 남원부(南原府)에, 이정식(李正植)을 회령부(會寧府)에, 전인좌(錢仁佐)를 이산부(理山府)에, 윤휴경(尹休耕)을 순천부(順天府)에, 이수절(李秀節)을 갑산부(甲山府)에, 이숭조(李崇祚)를 벽동군(碧潼郡)에, 안귀서(安龜瑞)를 경원부(慶源府)에, 조흡(趙洽)을 단천군(端川郡)에 정배(定配)하였다.

 

2월 9일 갑자

임금이 명릉(明陵)에 거둥했는데, 왕세제(王世弟)가 수행(隨行)하였다.

 

2월 21일 병자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이 졸(卒)하였다. 김창흡의 자(字)는 자익(子益)인데,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지기(志氣)가 탁월하여 옛 가시(歌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경(詩經)》 3백 편에서부터 아래로 성당(盛唐)011)  의 이백(李白)·두보(杜甫)와 송(宋)나라·명(明)나라의 제가(諸家)에 이르기까지 절중(折中)하지 않은 것이 없어 우뚝하게 가시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가화(家禍)012)  를 당하고서부터 상복(喪服)을 벗었어도 거적자리에서 자면서 주육(酒肉)을 먹지 않았는데, 갑술년013)  에 신복(伸復)되자 비로소 상식(常食)을 회복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외침(外寢)에서 거처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성리학(性理學)을 즐겨 읽어서 만년(晩年)에 다시 깊고도 높은 조예(造詣)를 이룩했다. 설악산(雪嶽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신(筵臣)의 말에, ‘그의 높은 풍도(風度)와 절조(節操)는 넉넉히 나약(懦弱)한 사람에게 뜻을 확립시키고, 재리(財利)를 탐내는 자의 마음을 청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있었다. 숙종(肅宗)이 임조(臨朝)하여 오랫동안 차탄(嗟歎)하던 끝에 여러 차례 집의·진선으로 승천(陞遷)시켰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동교(東郊)에서 졸하니, 나이 70세였다. 품질(品秩)을 정경(正卿)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문강(文康)이라고 내렸다.

 

청주(淸州) 사람 허벽(許璧)이 상소하기를,
"아! 선왕(先王)께서 성인(聖人)이 세우신 인륜(人倫)의 지극함에 의해 성명(成命)을 내리셨으니, 전하께서는 대순(大舜)의 천성(天性)에서 타고난 효성으로써 비록 범죄한 어버이를 등에 업고서 도망하려 해도014)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슬픔을 머금은 성정(聖情)은 삼가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이 수고로웠고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는 국인(國人)들의 가슴엔 슬픔만 더해질 뿐입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20년이 지났으니, 이제 보위(寶位)에 오른 초두를 당하여 이 일을 늦출 수 없습니다. 궁액(宮掖)에서 있었던 일은 참여하여 알지 못하겠으므로, 신은 진실로 감히 질언(質言)할 수가 없습니다만, 무고(巫蠱)의 옥사(獄事)는 예로부터 부실(不實)하였습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한(漢)나라의 현명한 임금이었지만 황후(皇后)와 태자(太子)가 명대로 살지 못하자015)                  , 호관(壺關)의 삼로(三老)인 영호무(令狐茂)의 상서(上書)는 그 내용이 너무도 비통했고, 중종(中宗)은 국조(國朝)의 성왕(聖王)이었지만 후궁(後宮)과 왕자(王子)가 모두 화(禍)를 입자016)                  , 상국(相國)인 정광필(鄭光弼)이 의심한 것은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무(妖巫)와 적비(賊婢)의 말에 의거하여 갑자기 단안(斷案)을 이루었으니, 오늘날 사람의 마음이 옛사람의 마음과 어쩌면 그리도 다릅니까? 그러나 전하의 처지에서는 반드시 지극히 원통(冤痛)함이 뭉쳐 가슴속에 서려 있을 것이고, 따라서 천지가 아득하기만 하여 보위(寶位)에 올랐어도 즐거움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전하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아! 신에게도 노모(老母)가 있는데 신이 어릴 때는 어미가 거두어 먹였고, 어미가 늙었을 때에는 신이 봉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훌륭한 교화를 힘입어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을 보전하고 있는데, 신이 이런 즐거움을 가지고 단소(丹霄)017)                  를 우러러보게 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아! 전하의 사경(四境)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모두 어미가 있으니, 누군들 신과 같은 이런 마음이 없겠으며, 누군들 신과 같은 이런 눈물이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스스로 극진히 하는 도리에 있어 의당 애통한 교서(敎書)를 내려 당일의 불행했던 변고(變故)에 대해 말을 함으로써 원통함을 머금은 지하의 혼령을 위로하고 20년 동안 품어온 원통함을 풀어야 할 것인데, 3년 동안 꾹 참아오며 아직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 선왕(先王)의 명은 고치지 말고 따라야 한다는 말에 저지당한 것입니까?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으니, 기묘년의 원통함018)                  은 선조(宣祖) 때에 신설(伸雪)하여 주었고, 기축년019)                  의 원통함을 인조(仁祖) 때에 신설하여 주었는데, 이는 모두 선조(先朝)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실로 그것이 원통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래에 있는 신하일지라도 신설하여 주었는데, 어찌하여 유독 오늘날에 있어서는 선왕(先王)의 처분(處分)이라 하여 신설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릉(貞陵)020)                  은 태종(太宗) 때 파기했지만 현종(顯宗)이 다시 봉(封)하였고, 소릉(昭陵)021)                  은 세조(世祖) 때 폐하였지만 중종(中宗)이 다시 장사지냈으며, 선대왕(先大王) 때 이르러서는 단종(端宗)을 추복(追復)시켰고 강옥(姜獄)022)                  을 추신(追伸)하여 주었습니다.
이는 비록 금궤(金櫃)에 보관하고 단서(丹書)에 기록된 것이어서 만세(萬世)토록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던 것이었으나,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된 것일지라도 실제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경우가 아니면, 세월이 흘러 여러 조정을 거치고 또 자신에게 절박한 통한이 없어도 그 정상(情狀)을 환히 알고 원통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때는 신충(宸衷)이 친진(親盡)023)                   뒤에 일어나서 반드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성대한 의식(儀式)을 거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지극한 효성으로 인륜(人倫)의 큰 변고를 당하였으니, 골수에 사무친 통한(痛恨)과 가슴을 에이는 쓰린 슬픔이 성심(聖心)에 쌓여 하루에도 아홉 번씩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비록 내가 작고(作古)시켜 마음 내키는 대로 곧바로 해버리고 싶은 경우일지라도 반드시 그 허물을 가엾게 여기고 그 정상을 애처롭게 여기는 바가 있을 것인데, 더구나 요순(堯舜)을 본받으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으라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신은 다시 또 한 가지 우려가 있어 문득 함부로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이야기를 다 진달하려 합니다. 만일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에게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전하께서 주야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시면서 지금에 이르도록 묵묵히 계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과연 그러하다면 신설(伸雪)하는 일에 대해서는 의논을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만, 추보(追報)하는 도리는 또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옛날 하우(夏禹)가 천자(天子)가 되었을 적에는 그 아버지가 숭백(崇伯)이었지만 남교(南郊)에서 제사지냈는데, 어찌 이것 때문에 대순(大舜)에게 죄를 얻어 단절당한 일이 있었습니까? 반중(班仲)이 신후(新侯)가 되었을 적에는 그 아버지가 채도(蔡度)였지만 종묘(宗廟)에서 제향을 올려 세사(世祀)를 이어갔는데, 어찌 이것 때문에 무왕(武王)에게 죄를 얻어 단절당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는 모두 예경(禮經)에 기재되어 있고 주서(周書)에 쓰여 있는 것인데, 천신(天神)도 하우(夏禹)의 정성을 흠향하였고 인귀(人鬼)도 반중(班仲)의 효성을 흠향하였습니다. 이는 성현(聖賢)을 낳아 길러서 지위가 후왕(侯王)에 있게 되면 아버지의 현우(賢愚)를 말할 것이 없이 아들의 숭봉(崇奉)함에 있어서 의당 극진히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야말로 천지의 상경(常經)이고 고금의 통의(通義)인 것입니다. 나를 길러준 은혜는 부모(父母)가 나쁘다는 것 때문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은덕을 보답하는 정성을 사친(私親)이라는 것 때문에 구별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임금을 올바른 데로 인도하는 도리는 마땅히 삼대(三代)024)                  를 정법(正法)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참조해 볼 수 있는 증거(證據)인 것입니다. 한(漢)나라의 여 태자(戾太子)와 황후(皇后)와의 관계의 이르러서는 위졸(衞卒)을 출동시켜 친히 부황(父皇)의 군대와 장안(長安)의 치도(馳道)에서 싸움을 하였으므로,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 모반(謀反)했다고 특서(特書)했으니, 태자(太子) 모자(母子)의 죄는 피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선제(宣帝)는 여 태자의 혈손(血孫)으로 보위(寶位)를 이어받았고, 그와 동시에 조부(祖父)를 다시 태자로 삼고 증조모(曾祖母)를 다시 황후로 삼았으며, 모두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묘사(廟祠)를 세워 제사지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하후승(夏侯勝)의 무리가 한 마디도 간쟁(諫爭)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 뒤 정자(程子)나 주자(朱子) 같은 선유(先儒)들도 한 마디 비평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실로 인정해서 발로되어 천리에 합치된 것이니, 누가 불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부터 내려온 이야기는 절로 폐기될 수 없는 법전(法典)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법규(法揆)가 달랐지만, 끝에 가서는 또한 행할 만한 것은 반드시 행하고 행할 수 없는 것은 억지로 행하지 않는 데로 귀결되기 마련인 것이니, 양단(兩端)을 잡고 중도(中道)를 가늠해 내어 적당(的當)하게 하도록 힘쓰게 하자는 것이 신의 변변치 못한 소망인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유학(幼學) 이몽인(李夢寅)과 대략 봉장(封掌)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습니다. 군흉(群凶)을 주멸(誅滅)하기를 청하여 거듭 권흉(權凶)들의 마음을 촉범(觸犯)하는 것을 그때에는 그런 말을 진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으므로, 묵묵히 골수에 묻어둔 채 세월을 보내면서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성노(聖怒)가 혁연(赫然)하고 건단(乾斷)이 쾌연(快然)하여 지난날 전하를 우롱(愚弄)하고 조절(操切)하여 전하로 하여금 수족(手足)을 둘 데가 없게 만들었던 자들을 유방(流放)시키거나 찬극(竄極)시켜 다시는 조정에 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은 또 생각하건대 오늘날 공경(公卿)의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전하의 지극한 통한(痛恨)을 마음 아프게 여겨 전하의 지극한 효성을 찬조하여 성정(聖情)에 유감이 없게 만들 것이라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귀를 기울이고 기다린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고요히 들려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재신(宰臣)들이 진달하는 말은 이미 서로 엇갈린 의논이 많고, 날뛰는 잔흉(殘凶)들의 조짐은 다시 요사스런 혀를 놀리는 데서 드러나고 있더니, 결국 묘모(廟謨)에 대해 상의한 것에 이르러서는 전례의 고증이 합당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신의 마음이 다시 고통스럽고 신의 마음이 비통합니다. 순우의(淳于意)025)                  는 딸만 다섯을 낳고 아들은 하나도 낳지 못했는데, 죄를 짓고 갇히게 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딸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급할 적에 믿을 데가 없구나!’ 하였습니다. 어린 딸 제영(緹縈)이 아비의 간절한 말을 듣고서는 산 넘고 물 건너 천 리 길을 달려가서 대궐(大闕)에 울부짖어 호소한 끝에 결국 아비의 목숨을 보전(保全)시켰으니, 필부(匹婦)의 효성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왕가(王家)에 변고(變故)가 발생했을 때를 당하여서는 드러내기 어려운 정실(情實)과 엄절한 예법(禮法)이 실상은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보다 더한 점이 있었습니다. 당일 전하께서 성명(性命)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모두 조종(祖宗)께서 묵묵히 도와주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제영과 같은 심정을 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일과 아주 달라서 아들이 천승(千乘)의 군주가 되었는데도 자신은 구원(九原)에서 원통함을 품고 있는 채 암담한 가운데 방치되어 신설(伸雪)할 날이 없게 되었으니, 만일 제영이 이런 일을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정신(廷臣)은 지난날의 정신들과는 훈유(薰蕕)026)                  와 같아서 훨씬 다르지만 그때의 여론(餘論)을 답습하고 있는데, 이는 견문(見聞)에 익숙해져서 삼대(三代) 때의 굉규(宏規)와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를 모두 까마득히 잊어버린 소치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단서를 발론해 놓았다가 문득 물러서 버리는가 하면 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기도 하니, 독서(讀書)를 하지 않은 것이 너무도 심합니다.
신이 가만히 살펴보건대 십수년 이래로 재얼(災孽)이 거듭 내리고 변괴(變怪)가 겹쳐 발생하였으며, 잇따라 기근(飢饉)이 들고 여역(癘疫)이 가중되었으므로, 인류(人類)가 거의 다 죽어 없어질 지경입니다. 전하의 성덕(聖德)으로 보위(寶位)에 오르신 지 겨우 3년이 되었는데, 봄·여름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가을·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서 혹독한 한발(旱魃)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식(日蝕)·월식(月蝕)과 성신(星辰)의 요사(妖邪)와 음홍(陰虹)의 변괴가 달마다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 연신(燕臣)027)                  이 통곡하니 오뉴월에 서리가 내렸고, 제녀(齊女)028)                  가 원통함을 품으니 3년 동안 가뭄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은 전하를 아버지로 삼고 있는데, 전하의 지극한 통한을 아직도 위로하여 풀어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오늘날 하늘이 노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소치(所致)이겠습니까? 아!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누가 전하의 이런 마음을 본받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성하여 보소서."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봉납(奉納)하지 않았다. 이때 여러 유생(儒生)들 가운데 장씨(張氏)를 위하여 글을 올린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경종(景宗)이 한 번도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으니, 사친(私親) 때문에 대의(大意)를 엄폐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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