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무자
사직(司直) 정호(鄭澔)가 상소하기를,
"신은 나이가 80에 이르러 질병이 고질이 되었는데,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이미 정신이 없어서 세상일을 도무지 살필 수가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새로 큰 처분(處分)을 내리시어 선조(先朝)에서 예우(禮遇)하던 대신(大臣)들을 모두 축출하였고, 아래로 일을 말하던 신하들과 태학(太學)의 선비들이 처형(處刑)당하지 않으면 귀양가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신은 향곡(鄕曲)에 있었으므로 진실로 무슨 사단(事端)으로 인하여 심한 죄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사위(嗣位)한 이후에 없던 일일 뿐만 아니라, 실은 전적(典籍)에서도 듣지 못한 일이니, 어찌 가슴속의 혈성(血誠)을 다 기울여 조금이나마 광구(匡救)하는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신 또한 선조(先朝)의 구물(舊物)일 따름이니, 출척(黜陟)과 영욕(榮辱)을 의리상 혼자서만 달리할 수는 없으므로, 움츠리고 엎드려 떨리는 마음으로 삼가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국본(國本)001) 을 동요시키려는 조짐이 있어 자성(慈聖)께서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고 하는데, 어찌 성세(聖世)에 갑자기 이런 일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가슴이 무너지고 뼈에 사무쳐 차라리 죽고만 싶은 심정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 왕성하신 때이지만, 종사(螽斯)002) 의 경사가 아직 더디니, 인심을 통괄할 사람은 왕세제(王世弟) 말고 누구이겠습니까? 지난번 저사(儲嗣)로 세울 적에 자전(慈殿)의 하교에 이르기를, ‘효종(孝宗)의 혈맥(血脈)과 선왕(先王)의 골육(骨肉)은 오직 주상과 연잉군(延礽君)003) 뿐이다.’ 하였는데, 이 하나의 하교는 천지에 질정하여 귀신을 울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일종의 무엄한 무리들이 감히 불만스런 마음을 품고 교대로 나아와 선동하여 국본을 동요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하고 있으니, 삼성(三聖)004) 의 혈맥이 어찌 끊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정에 있는 대소 신료(臣僚)로서 누군들 삼성(三聖)의 덕화(德化)를 입지 않았기에 어찌 차마 종사(宗社)가 단절되게 되었는데도 모른 체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한두 환첩(宦妾)이 갑자기 서로 죄에 얽어 넣으려는 계책을 이루고자 했으니, 그 요악(妖惡)함을 상형(常刑)에 처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또한 이것이 어찌 보통 무식(無識)한 자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자성(慈聖)께서 내리신 수교(手敎)의 지의(旨意)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일이 이미 크고 그 의리 또한 중요하니, 으레 신료들에게 반시(頒示)하여 모두 환히 알게 했어야 할 것인데, 대신(大臣)된 이가 도리어 안에서부터 수교를 저지하여 서둘러 봉환(封還)시킴으로써 자성의 애통하고도 절박한 뜻을 덮어버리고 드러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등대(登對)할 때에는 당연히 국청(鞫廳)을 설치해서 엄중히 핵실하여 정절(情節)을 알아내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도리어 앞질러 사형(死刑)에 처할 것을 같은 목소리로 극력 진달했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입니까? 다행히 전하의 성단(聖斷)이 혁연(赫然)함을 힘입어 참적(讒賊)들이 죄를 얽어 무함하려는 자취가 남김없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이제 궁위(宮闈) 사이에 왕래하며 난을 야기시키는 걱정이 그치게 되었습니다만, 우매한 신이 아직도 지나치게 우려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우리 전하께서는 친애(親愛)하는 인정과 참소(讒訴)를 미워하는 현명함에 있어 의당 사람들이 이간할 수 없을 것 같기는 하나, 예로부터 소인배들이 남의 골육(骨肉)을 이간하고 남의 국가(國家)를 혼란시킬 적에는 그 정절(情節)이 혹 탄로가 난다고 해도 곁에서 틈을 노려 독기를 부리려는 마음은 반드시 그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시종 알뜰하게 여기에 마음을 기울이시어 간참(奸讒)이 이미 제거되었다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 효우(孝友)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시어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들고 저위(儲位)를 편안하게 해주시면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에게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진실로 이 한 마디 말이 입에서 나가면 시휘(時諱)에 크게 저촉될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돌아보건대 어떻게 차마 제 한 몸의 화복(禍福)만을 헤아린 채 선왕(先王)을 잊고 전하(殿下)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도리에 있어 의당 연하(輦下)에 나아가 조금이나마 혈성(血誠)을 진달해야 하겠습니다만, 병으로 몸져 누워있어 사생(死生)이 급박한 상황이므로, 부득이 간략하게 짧은 소장(疏章)을 가동(家僮)을 시켜 보내니, 더욱 황송할 따름입니다."
하였는데,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정호(鄭澔)는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손자이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사사(師事)하여 훌륭한 제자가 되었는데, 젊어서부터 강직(剛直)하여 그의 이름이 조정에서 중히 여김을 받았다. 박상검(朴尙儉)의 역변(逆變)이 있었을 때를 당하여 80세의 기구신(耆舊臣)으로 동궁(東宮)을 위하여 피하지 않고 과감히 말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용감한가? 문청공이 훌륭한 손자를 두었다.
1월 3일 기축
사직(司直) 남도규(南道揆)가 상소하기를,
"병이 들어 궁벽한 시골에 엎드려 있는 탓으로 늦게서야 춘궁(春宮)께서 궁료(宮僚)를 대하여 내린 영(令)과 자성(慈聖)께서 약원(藥院)에 내린 하교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놀랍고 황공스럽고 통분한 나머지 눈물이 흘러 차라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아! 이번 궁위(宮闈)의 변(變)을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역수(逆竪)가 춘궁(春宮)에게 흉독을 부렸고 요녀(妖女)가 동조(東朝)005) 께 패악을 부려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면서 온갖 계책으로 모해(謀害)하여 화기(禍機)가 호흡하는 사이에 달려 있었는데, 다행히도 선대왕(先大王)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도와주심과 우리 성명(聖明)의 마음에서 우러난 우애를 힘입어 죄인을 잡게 되었고,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하된 사람으로서 진실로 조금이나마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그 정절(情節)을 핵실하여 흉역을 엄중히 토죄(討罪)하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도리어 완만하게 하여 건성으로 다스려 마치 보통의 죄수를 다스리듯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 명의 궁비(宮婢)가 잇따라 스스로 죽게 하였고, 두 명의 환관(宦官)이 아직도 실정을 자복하지 않게 만들었으니, 흉역을 징토(懲討)한다는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효우(孝友)를 천성(天性)에서 타고나셨는데, 동조(東朝)께서 사랑하시는 뜻을 우러러 본받고 춘궁(春宮)께서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을 굽어 생각하시어 쾌히 건단(乾斷)을 발휘하시고, 특별히 명교(明敎)를 내리시어 저 두 명의 환수(宦竪)를 이미 국문(鞫問)하게 하셨으니, 이제부터는 요얼(妖孽)이 영원히 종식되어 양궁(兩宮) 사이에 인애(仁愛)가 넘쳐 흐르고 화기(知氣)가 흡족하여져 진실로 만에 하나라도 다른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역적을 토죄하는 방법이 원악 대대(元惡大憝)는 혹 정법(正法)006) 에 처하지만, 그 나머지 잔당들은 끝까지 조사하여 다스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마침내 반드시 자신들의 계책을 이룬 뒤에야 그만두는 법입니다. 후사(喉司)007) 와 빈청(賓廳)의 논계(論啓)에서 이미 ‘체결(締結)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한두 부시(婦寺)가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는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기기 어렵습니다. 만일 징토를 엄중히 하지 않고 구핵(鉤覈)을 명백하게 하지 않아서 난신 적자(亂臣賊子)로 하여금 조금도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한다면, 신은 이 뒤로도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이 역수(逆竪)뿐만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그 잔당들을 일일이 핵실(覈實)해 내어 밝게 전형(典刑)을 바로 잡으소서.
아! 전하께서는 형제가 드물어 단지 우리 춘궁 저하(邸下)만 있는데, 불행하게도 요얼(妖孽)이 궁중에서 일어나 기필코 위태롭게 하려 모의하였으니, 이제 엄중한 징토를 가하여 그 뿌리를 통렬하게 끊지 않는다면, 반드시 말하기 어려운 화변(禍變)이 있게 되어 춘궁을 보호할 수 없고, 또한 춘궁을 위안(慰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선대왕(先大王)의 혼령께서도 반드시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또 삼가 살피건대 근일에 여러 신하들이 춘궁을 보호하는 방도와 흉역을 징토하는 의의에 대해 소장을 올려 진달하면서 일제히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아직껏 윤허한다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덕음(德音)을 내려 처분을 분명하게 보이소서."
하였다.
1월 5일 신묘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문유도(文有道)와 박상검(朴尙儉)은 누차 엄중히 국문했으나, 장형(杖刑)을 참으며 자복하지 않고 있으니, 정상이 매우 흉녕(凶獰)스럽습니다. 모두 형신(刑訊)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죄인 박찬문(朴贊文)의 초사(招辭)에 의하면, 본디 귓병을 앓아 귀머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들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박상검이 감히 죽음 가운데에서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계책을 내어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린 것이니, 박상검에게 이것으로 문목(問目)을 내어 다시 추국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박상검을 다시 추국하였더니, 그의 원정(原情)에, ‘자신과 박찬문을 면질(面質)시켜 주면 허실(虛實)을 알 수 있다.’고 납초(納招)했습니다. 박상검과 박찬문 등을 한 곳에서 면질시키소서. 박상검에게 형신을 가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렇게 되면 경폐(徑斃)008) 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우선 면질하고 난 뒤에 형신을 가하게 하소서. 그리고 죄인 김몽상(久夢祥)의 공초(供招)에는, ‘나인(內人) 등과 체결했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는 박상검의 처음 공초에는 없던 말입니다. 그가 양궁(兩宮)을 무함한 요악(妖惡)하고도 부도(不道)한 말은 박상검보다 더한 점이 있으니, 그 정상이 매우 절통합니다. 형추(刑推)를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찬문과 김몽상을 박상검과 먼저 면질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역환(逆宦) 문유도(文有道)가 죽었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박상검을 박찬문·김몽상 등과 이미 면질시켰으니, 박상검은 전에 계청(啓請)한 대로 형신을 가하게 하소서. 김몽상의 말은 박상검의 말과 대체로 서로 부합되었는데, 양조(兩朝)를 무함한 데 이르러서는 요악하고도 부도한 말이 박상검보다 더하였으니, 전일에 계청한 대로 형추(刑推)하게 하소서. 박찬문은 박상검과 면질할 적에 박상검이 변파(辨破)하지 못하고 그저 허망(虛妄)한 것이라고만 일컬었으며, 박찬문은 끝내 말이 막히는 단서가 없었으니, 지금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결말을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몽상과 박찬문의 초사(招辭)를 살펴보건대 박상검의 모해(謀害)한 역절(逆節)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는데도 감히 인용해서는 안될 말을 멋대로 공초에 올렸는가 하면, 시종 장형(杖刑)을 참으며 자복(自服)하지 않고 있으니, 더욱 지극히 흉녕스럽다. 다시 처음 공초 때의 문목(問目) 가운데 심상(尋常)한 것은 제외하고 각별히 엄중하게 형신을 가하여 기어이 실토하게 하라. 김몽상은 다시 박상검의 초사를 살펴보고 난 뒤에 조처할 것이니, 우선 형추하지 말라."
하였다.
1월 6일 임진
밤에 통명전(通明殿)의 행각(行閣)에 화재가 발생했다.
역환(逆宦) 박상검(朴尙儉)은 복주(伏誅)되었고, 김몽상(金夢祥)과 박찬문(朴贊文)은 방송하였다. 죄인 박상검은 나이 21세이다. 이른바 ‘서찰(書札)’이라는 것은 성상께서 노여움이 치성하여 환관(宦官)들의 출척(黜陟)이 잦았기 때문에 틈을 타서 위에 진달함으로써 자신의 직위를 공고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이른바, ‘말이 규규(規規)했다.’고 하는 것은 대전(大殿)의 진찬(進饌)에 대한 다과(多寡)와 침수(寢睡)에 대한 안부(安否)를 알려고 했던 것이었다. 동궁(東宮)이 문안하는 절차는 본디 내간(內間)의 일로서, 청휘문(淸暉門)은 바로 세제(世弟)가 문안하기 위해 왕래하는 문인데, 그날 즉시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내관(內官)으로서 어찌 반역(叛逆)하려는 마음을 품었겠는가? 일찍이 동궁에게 죄를 얻은 적이 있어서 후환(後患)이 있을까 두려웠던 까닭에 필정(必貞)과 함께 제거할 마음을 가졌던 것이었을뿐 다른 절차(節次)는 없었다. 그러나 모역(謀逆)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부대시(不待時)009) 로 능지 처참(凌遲處斬)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박상검이 이미 승복했으므로 법례(法例)에 의거하여 결안 취초(結案取招)010) 한 다음 조율(照律)하여 처단했습니다만, 판부(判付)하신 내용에 김몽상은 박상검의 초사를 본 뒤에 조처하겠으니 우선 형추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몽상이 박상검과 면질할 적에 문답(問答)한 말은 대체로 서로 부합되었고, 양궁(兩宮)을 무함한 데 이르러서는 요악(妖惡)하고도 부도(不道)한 말이 이미 박상검에게 전설(傳說)되었으니, 엄중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김몽상의 공초에 의하면, ‘청음정(淸陰亭)에서는 그때 세제(世弟)에게 앙품(仰稟)한 뒤에 내관(內官)의 일을 말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진실로 부도(不道)한 말이 아니다.’ 하였고, 박상검은 이미 승복하였으니, 다시 신문할 만한 단서가 없다. 박찬문과 김몽상을 일체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아뢰기를,
"국청(鞫廳)에 판부(判付)한 내용에, ‘앙품(仰稟)한 후에 내관의 일을 말한 것으로 부도(不道)한 말이 아니었다. 김몽상을 방송하라.’고 하교하셨기 때문에 판부에 의거하여 즉시 방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궁위(宮闈)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이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비밀스러운 것인데, 김몽상이 이에 가히 조금도 기탄없이 사사로이 전설(傳說)했으니, 무엄하고 불경스러운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진 죄를 논한다면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한데, 방송(放送)하라는 명을 갑자기 천만 뜻밖에 내리셔서 왕법(王法)이 어긋나 여정(輿情)이 놀라 의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악한 무리를 법에 의거하여 무겁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궁위를 엄중히 하여 뒷폐단을 막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감사(減死)하여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월 10일 병신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장씨(張氏)의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따로 칭호(稱號)를 정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이조 참판 김일경(金一鏡)이 아뢰기를,
"지난번 영상(領相)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에 지난일을 추념(追念)하니, 나도 모르게 비통(悲慟)스러워진다고 하신 하교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신하들 가운데 누군들 슬픈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천승(千乘)의 지위에 계시니, 사친(私親)께서 낳아 기르신 은혜에 대해 진실로 추보(追報)하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응답하지 않았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전하의 정리(情理)에 있어 낳아 길러준 은혜에 대해 추보(追報)하는 도리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신의 의견에는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수(祭需)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봉진(封進)하게 하며, 따로 칭호를 정하여 사체(事體)를 중하게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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