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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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임인

이홍술(李弘述)을 하옥(下獄)시켰다. 대관(臺官)이 육현(陸玄)을 때려 죽인 일 때문에 이홍술과 포청(捕廳)의 군관(軍官) 현덕명(玄德明) 등을 나문(拿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6일 신해

왕세제(王世弟)를 책봉(冊封)한 데 대한 주청사(奏請使) 이건명(李健命)의 선래(先來)029)  가 아뢰기를,
"정월 20일 청주(淸主)가 주본(奏本) 때문에 태학사(太學士) 마제(馬齊) 등에게 물어본 뒤에 그 내용에 대해 태학사들로 하여금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을 모아 놓고 국왕의 병증(病證)을 상세히 물어서 주문(奏聞)하게 하였습니다. 22일 청주(淸主)가 남해자(南海子)에 간 뒤에 제독(提督)이 와서 말하기를, ‘사신은 내일 아침 오문(午門) 밖으로 와서 모이도록 하라.’ 하므로, 23일 새벽에 신 등이 당상(堂上)과 역관(譯官) 3인을 데리고 궐중(闕中)으로 나아갔습니다. 조금 늦게야 각로(閣老) 송주(松柱) 이하 내각(內閣)의 학사(學士)와 예부(禮部)의 상서(尙書)·시랑(侍郞) 이하 모두 11인이 오문(午門) 밖에 벌여 앉았습니다. 신이 앞으로 나아가니 내지(內旨)를 써서 내주면서 묻기를, ‘국왕은 몇 살이고 무슨 병증에 걸렸고 병세는 어떠한가, 후사(後嗣)를 이을 길이 어찌하여 끊어졌는가, 본래부터 생육(生育)을 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낳았는데도 기르지 못한 것인가, 무슨 의약(醫藥)을 쓰고 있는가, 왕의 아우는 연잉군(延礽君) 한 사람뿐인가, 아니면 여러 명의 아우가 있는가, 연잉군은 몇 살이고 국왕과 어머니가 같은가?’ 하였으므로, 신 등이 써서 답하기를, ‘국왕은 금년에 35세이다. 병증에 대한 형세는 이미 주본(奏本)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배신(陪臣)으로서는 감히 덧붙여 진달할 것이 없다. 국왕은 어려서부터 병이 많아서 기운이 매우 쇠약하였는데, 오랫동안 병을 치료하면서 널리 후사(後嗣)를 이을 수 있게 하는 약을 시험하여 보았으나, 끝내 효험(效驗)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후(前後)의 두 왕비(王妃)와 좌우(左右)의 잉첩(媵妾)들 가운데 하나도 잉태한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서 사속(嗣續)의 기대가 끊긴 실상을 알 수가 있다. 국왕의 친아우는 원래 영잉군(延礽君)과 연령군(延齡君) 이헌(李昍)이 있었는데, 연령군은 이미 기해년030)   겨울에 병으로 작고(作故)했고, 지금은 연잉군 한 사람뿐인데 나이는 29세이다. 국왕과는 어머니를 달리한 아우이다. 국왕은 자신의 질병이 깊어져서 고질이 되는 것을 걱정하고 대를 이을 후사(後嗣)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이에 선조(先祖) 때 아우를 책봉(冊封)했던 구규(舊規)를 거행하였는데, 우러러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사랑하는 지극한 덕을 믿고 진심으로 간청하는 사연을 갖추 진달하면서 은전(恩典)을 받기 바란다. 이런 등등의 정상(情狀)으로 보아 의당 긍휼(矜恤)히 여김을 받아야 할 것인데, 이제 특별히 문의하는 것은 실로 곡진히 생각해 주는 데에서 나온 조처이니, 배신(陪臣)들은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주달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각신(閣臣)이 또 묻기를, ‘연잉군은 누구의 소생이고 그의 어머니는 살아 있는가?’ 하므로, 신 등이 답하기를, ‘연잉군은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인 최씨(崔氏)의 소생인데. 최씨는 이미 무술년031)  에 병으로 졸서(卒逝)하였다.’ 했습니다.
2월 초3일에 비로소 해부(該部)의 의주(議奏)에 대한 하지(下旨)가 있었고, 21일에 의제사(儀制司)에서 말을 만들어 방색(防塞)하였으며, 23일 문서(文書)를 유중(留中)했습니다. 24일에 태학사(太學士)를 인견하고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주본(奏本)을 예부에서 방색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태학사 마제(馬齊)가 답하기를, ‘외국(外國)의 간절한 정상이 이와 같이 긴박하니, 처분을 내리기에 달려 있다.’고 하였는데, 청주(淸主)가 즉시 특별히 준허(準許)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의 이 볼일은 실로 더없이 중대한 일인데, 처음에는 순조롭게 이루어지다가 중간에 와서 저지당했기 때문에 일행(一行)의 상하(上下)가 모두 송구스럽고 안타까워 어찌할 줄을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각신(閣臣)이 중지(中旨)에 잘 대답한 덕분에 특지(特旨)로 특별히 준허(準許)받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말할 수 없는 기행(奇行)인 것으로 모두 선왕(先王)의 영령이 도와 주신 것입니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백흥석(白興錫)을 가두었는데, 육현(陸玄)의 옥사(獄事)에 사련(詞連)되었기 때문이었다. 백흥석은 곧 백망(白望)이다.

 

3월 27일 임자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하여 무옥(誣獄)을 일으켰다. 박상검(朴尙儉)이 이미 복주(伏誅)되어 왕세제를 동요(動搖)시킬 계책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또 주청사(奏請使)가 일을 끝내고 선래(先來)가 이미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천례(賤隷)인 목호룡을 모집한 다음 상변(上變)하도록 사주하여 일대(一隊)의 제인(諸人)의 자제(子弟)·문객(門客)과 왕세제(王世弟)의 겸속(傔屬), 겸속들과 연관된 나인(內人), 빈궁(嬪宮)의 친질(親姪), 사저(私邸)의 차지 중관(次知中官)을 고발하였으므로, 모두 옥에 갇혀 단련(鍛鍊)을 받았다. 이는 왕세제를 무함하기 위한 계책이었으나, 결국 그들의 흉악한 모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실록(實錄)의 구본(舊本)에 이르기를,
"목호룡(睦虎龍)이란 자가 상변(上變)하여 역적을 고발하기를, ‘성상을 시해(弑害)하려 도모한 자가 있었는데, 칼이나 약으로 하려 하기도 하고, 또 내쫓으려 모의하기도 하였으니, 국가가 있어온 이래로 없던 역적(逆賊)입니다. 청컨대 급히 토죄(討罪)하여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역적 가운데 동궁(東宮)을 팔아서 씻기 어려운 욕을 끼친 자가 있으니, 적정(賊情)을 철저히 추구하여 누명(累名)을 씻음으로써 국본(國本)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승지 김치룡(金致龍) 등이 변서(變書)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여 왕옥(王獄)032)  에 내리고 대신(大臣)을 불러 조처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내병조(內兵曹)에 정국(庭鞫)을 설치하게 되었다.
목호룡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비록 미천한 몸이지만 뜻은 왕실(王室)을 보존하는 데 있는데, 흉적들이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에 미끼를 던져 은밀(隱密)한 실정을 알아내었으므로, 감히 이렇게 상변(上變)하였습니다. 역적은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기지(李器之)·이희지(李熙之)·심상길(沈尙吉)·홍의인(供義人)·홍철인(洪哲人)·조흡(趙洽)·김민택(金民澤)·백망(白望)·김성행(金省行)·오서종(吳瑞鍾)·유경유(柳慶裕)입니다. 신(臣)이 감여술(堪輿術)033)  을 대략 알고 있기 때문에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산을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희지를 만나서 함께 시(詩)를 논하게 되었는데, 이희지가 자신의 낙일시(落日詩)를 외어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때 당시 선왕(先王)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한 상황이었는데, 그 시의 뜻이 음참(陰慘)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그대가 이미 감여술을 알고 있다면 또한 둔갑술(遁甲術)도 아는가?」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나의 친구 가운데 둔갑술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그 사람의 성명(姓名)이 무엇인가?」 하므로, 신이 입속에서 만들어 대답하기를, 「담이(談爾)이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이희지가 다시 신을 방문하고 담이의 거주처(居住處)를 묻고, 또 말하기를, 「내가 방금 연동(蓮洞)의 상공(相公)인 숙부(叔父)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그대가 나를 방문한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나의 친구인 마전(麻田)에 사는 정인중도 기사(奇士)인데, 그대를 만나보면 반드시 크게 기뻐할 것이니, 어쨌든 내방하여 만나 보라.」 하므로, 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별한 뒤 5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희지가 나귀를 보내어 신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연동(蓮洞)의 김용택(金龍澤)의 집으로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기지 등이 벌려 앉아 있었으며, 평소 다정한 사이처럼 기꺼이 대하면서 모두들 담이(談爾)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둔갑우보서(遁甲禹步書)》를 구득하여 달라고 하므로, 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둔갑술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책에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 하니, 이기지와 정인중 등이 크게 기이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과는 마음을 논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인하여 묻기를, 「그대가 사는 여염(閭閻)에 지금 세상에도 형가(荊軻)와 섭정(攝政)034)   같은 부류들로 도시(屠市)035)   사이에 숨어 사는 자가 있는가?」 하므로, 신이 이미 묵묵히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서 답하기를, 「나의 친구 가운데에는 협객(俠客)의 부류들이 많이 있다.」 하자, 좌객(坐客)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 뒤로 자주 왕래하였으나, 깊은 말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어느 날 정인중이 김용택의 집에 도착하여 신을 부르기에 신이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 모두 있었습니다. 정인중이 묻기를, 「그대는 현학 산인(玄鶴山人) 이태화(李泰華)라는 성명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사람이 거문고를 타면 현학(玄鶴)이 내려와서 앉고 능히 백 리 밖의 일을 알아내는데, 그대가 말하는 담이(談爾)라는 사람은 이 사람과 견주어 어떠한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담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에게 천서(天書)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주고 싶다.」 하니, 정인중의 미간(眉間)에 기쁜 빛이 가득했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문밖에 와서 스스로 이태화라고 하면서 둔갑술을 잘한다고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시무(時務)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들에게 있는 것인데, 둔갑술을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니, 이태화가 말하기를, 「당금의 호걸(豪傑)이 누구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정인중이 당금의 방통(龐統)036)   같은 부류이다.」 하였습니다.
다음날 정인중이 신을 방문(訪問)하고, 인하여 도시(屠市) 사이에 있는 협객(俠客)을 찾았습니다. 그때 마침 백망(白望)이 일 때문에 신의 집에 왔었는데, 그의 형모(形貌)가 희멀쑥하고 풍신(風神)이 헌앙(軒昂)하므로, 정인중이 눈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도 협객의 부류인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 사람은 협객 가운데 제 일인자이다. 그의 용맹은 당해 낼 사람이 없다.」 하자, 정인중이 백망의 거주지를 상세히 물어본 다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신이 백망을 머무르게 하고 말하기를, 「그대의 집을 물은 사람이 앞으로 그대의 용맹을 쓰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다루기가 쉽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이희지란 자가 있는데 모계(謀計)가 깊은 사람이다. 그가 그대를 만나면 반드시 나의 심사(心事)에 대해 말을 할 것이니, 그대는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은 사이라고 답하라.」 하였습니다. 백망은 본래 교활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므로, 신의 말을 듣고는 이미 그들이 장사(壯士)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정인중이 당나귀를 끌고 백망의 집에 도착하여 백망을 태워가지고 갔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백망이 돌아왔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큰 봉탁(縫槀) 속에 들어갔었다.」 했는데, 봉탁이란 국청(鞫廳)에서 죄인의 머리를 자루로 뒤집어 씌우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백망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 김용택의 집에 갔더니, 김용택·이천기·정인중이 벌려 앉아 있었는데, 자신의 신수(身手)가 좋은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용력(勇力)을 묻기에 자신의 용맹은 옛사람에 뒤질 것이 없다고 하자, 드디어 술을 마시고 맹약(盟約)하여 사생지우(死生之友)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백망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나를 쓰려고 한다면 내가 의당 힘을 다할 것이다. 지금 주상(主上)의 병환(病患)이 날로 위중해지고 있는데, 만일 불휘(不諱)037)  하는 일이 있게 되면 세상에 유비(劉備) 같은 이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유비는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그런 사람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각기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심사(心事)를 보였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썼고, 다른 사람은 신(信)자를 쓰기도 하고 의(義)자를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망이 양(養)자를 썼더니, 좌우에서 서로 돌아보며 그 뜻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이천기만은 그 뜻을 깨닫고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양(養)자는 양숙(養叔)을 말하는데, 이이명(李頤命)의 자(字)가 양숙이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었습니다.
백망이 돌아올 즈음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바로 연잉군(延礽君) 첩(妾)의 오라비이다.」 하니, 좌우가 놀라서 얼굴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목호룡(睦虎龍)이 우리들의 일을 엿보기 위한 것이다.」 했는데, 이천기가 말하기를 「목가(睦哥)는 이미 상인(常人)이니 이(利)로써 협박할 수 있다.」고 했다 합니다. 그리하여 정인중을 시켜 편지를 써서 신을 초청하므로, 신이 이천기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천기가 신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깊은 말을 하려고 하자, 정인중이 발을 밟으면서 중지시켰습니다. 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이 백가(白哥)와 함께 모의한 말을 내가 모두 들었는데, 다시 숨길 것이 뭐 있겠는가?」 하니, 이천기가 드디어 신에게 묻기를, 「백가가 말하기를 많은 나인[內人]들과 교결하고 있기 때문에 급수(急手)를 쓸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어떠한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급수(急手)란 것은 어떤 약(藥)을 쓰는 것인가?」 하니, 이천기가 말하기를, 「백망의 말에 의하면 은(銀) 5백 냥으로 중국의 환약(丸藥)을 사다가 쓰면 되는데, 한 번 마시면 즉사(卽死)한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즉사한다고 할지라도 그 약을 오늘날에 쓸 경우 주상(主上)이 반드시 노하여 좌우를 구문(鉤問)할 것인데, 혹독한 형장(刑杖) 아래에서 여인들이 반드시 자복(自服)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들은 장차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성상(聖上)의 만세(萬歲)038)   뒤에 백가를 시켜 잘 조처하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 하니, 이천기는 옳게 여겼으나, 김용택은 홀로 소매를 떨치면서 급히 백가와 교결하여 역적을 모의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홍의인(洪義人) 형제는 이천기의 이웃에 사는데, 그들의 하는 것을 엿보고서는 스스로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여기고서 다방면으로 아첨하면서 그들 속으로 느닷없이 불쑥 들어가자, 김용택이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목숨을 내어 걸고 세운 계책은 천고의 대사업(大事業)으로 그 성패가 이번 거사에 달려 있는데, 저 홍가(洪哥)는 어떤 사람이길래 들어와서 매화점(梅花點)을 놓는가?」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용택·정인중·백망이 동심 협력하게 되었고, 홍의인·이천기·이기지는 신과 좋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으며, 이희지는 양쪽을 왕래하였는데, 이기지가 상술(相術)을 가지고 신을 헐뜯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얼굴이 검은데다가 말을 달콤하게 하니 믿기가 어렵다. 차라리 멀리하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이천기가 그 말을 신에게 전하였으므로, 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당거(唐擧)039)  의 새끼로다.」 하고 서로 웃고 헤어졌습니다. 그런에 이기지가 자못 푸대접하는 기색(氣色)이 있자, 홍의인이 이기지를 협박하기를, 「목호룡이 이미 언문(諺文)으로 된 유서(流書)를 가지고 있고, 또 폐립(廢立)에 대한 조서(詔書)의 초본(草本)을 보았으니, 그대 집안의 멸족(滅族)은 그의 혀를 놀리는 데 달려 있다. 잘 대우하는 것이 낫다.」 하니, 이기지가 두려워하여 드디어 홍의인과 서로 교결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희지가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에서 숨기고 있는 실정을 남인(南人)에게 누설하였는가?」 하므로, 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혀가 붙어 있는 것을 보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기를 기다릴 것인가? 내가 부귀(富貴)를 취하려고 한다면 그대들을 고발하는 것은 잠시 동안의 일일 따름이다. 그대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니, 이희지가 말하기를, 「서관(西關) 사람 장사방(張四方)이 귀신 같은 말을 잘하는데, 그대가 반드시 남인게게 누설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옛말에 귀신의 말을 따르면 망한다고 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무당[巫堂]의 말을 곧이듣는가?」 하니, 이희지가 크게 웃었습니다. 그런대 그뒤 신이 실사(實事)를 알리지 않았다고 의심하고, 은밀히 백망과 결탁하여 국상(國喪)에 임하여 손을 쓰려고 했습니다만, 신이 백망을 협박하기를, 「그대가 불궤(不軌)한 일을 하게 되면 내가 반드시 그대를 고발할 것이다.」 했더니, 백망이 신을 두려워하여 감히 적해(賊害)하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국상(國喪)이 지난 뒤 역적들이 비로소 신이 안에서 저지시켰다는 것을 알고는 심상길(沈尙吉)로 하여금 신을 전라 병영(全羅兵營)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신이 심진(沈榗)의 막하(幕下)에서 어미가 병들었다고 핑계대고 곧바로 돌아오니, 역적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신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일을 그대가 모두 알고 있다. 지금 이기지(李器之)·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 등이 모두 두렵게 여겨 이홍술(李弘述)을 사주해서 그대를 체포하려 하고 있으므로, 내가 이헌(李瀗)을 시켜 포장(捕將)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가까스로 면하게 만들었다. 그대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주면 이것을 가지고 김용택·이기지에게 질정(質正)하여 그대를 살릴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몸소 직접 범한 일일지라도 고변(告變)하면 반드시 무사(無事)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편지를 쓰겠는가?」 하니, 이천기가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알지만 저들은 모두 믿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하겠는가? 써서 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약(藥)을 쓰는 데 참섭하는 일에 대해 써서 주었더니, 이천기와 이희지가 매양 전고(前古)의 고변자(告變者)를 거론하면서 신을 위협하기를, 「고변자는 반드시 죽는다. 이는 필연의 이치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가 한 일을 큰 공로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의심하여 노여움을 품는가? 지금 주상이 새로 즉위하여 그대들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으니, 그 덕량(德量)이 천지와 합치된다. 그대들이 나에게 저지당하지 않고 품은 마음을 실행에 옮겼다면, 하늘이 반드시 주멸(誅滅)했을 것이다. 그때에는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니, 정인중이 말하기를, 「그대는 과연 기재(奇才)이다.」 하였습니다. 정인중은 소급수(小急手)에 대한 약속을 맺을 적에 매양 얼굴을 찡그리면서 난색(難色)을 표했는데, 김용택에게 몰려서 들어간 것입니다.
이른바 칼로 하려고 했다는 것은 김용택이 백망에게 보검(寶劍)을 주어 선왕(先王)의 국상(國喪)에 임하여 담장을 넘어 궁궐로 들어가서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려 했던 것을 말합니다. 약(藥)으로 하려고도 했다는 것은 이기지·정인중·이희지·김용택·이천기·홍의인·홍철인이 은(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약을 타서 행흉(行凶)하게 하려 한 것인데, 이는 경자년040)  에 반 년 동안 경영(經營)해 온 일로서, 이를 소급수(小急手)라고 합니다. 내쫓으려 모의했다고 한 것은 이희지가 언문(諺文)으로 된 가사(歌詞)를 지어 궁중으로 유입(流入)시킨 것인데, 모두 성궁(聖躬)을 무함하고 비난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조(矯詔)를 초하여 나인[內人] 지열(池烈)과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을 시켜 국상(國喪)에 임하여 내리게 했었는데, 기억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첫머리에는 「불곡(不穀)041)  이 외람되이 보위(寶位)에 올랐다.」는 등의 글자가 있었고, 중간에는, 「폐세자(廢世子) 아무가 덕양군(德讓君)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조서의 초본을 볼 적에 신이 바야흐로 김용택의 집에 가서 서벽(西壁)에 앉아 있었는데, 이희지·김용택·백망이 머리를 맞대고 촛불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희지가 글을 들고 다 읽기 전에 이기지가 후원(後園)에서 들어왔으므로, 잘못 다른 사람인가 의심하여 이희지가 주머니에 넣어버렸는데, 이는 신이 실제로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조흡(趙洽)이 은(銀) 2천 냥을 백망과 김용택·이천기에게 주면서 나인(內人) 지열(池烈)·이영(二英)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고, 홍의인이 은 50냥을 내놓고, 심상길(沈尙吉)이 은 2백 냥을 내놓았으며, 이희지가 은 70냥을 내놓았습니다. 김민택은 은을 내놓기는 하였으나, 백망(白望) 및 신과 상면(相面)하지 않고 단지 김용택·이천기로 하여금 왕래하면서 상의(相議)하게 하였습니다. 백망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은(銀)을 이영(二英)에게 주어 그의 사촌인 궁인(宮人) 이씨(李氏)와 동성(同姓)인 궁인 백씨(白氏)에게 주게 한 다음 지 상궁(池尙宮)과 함께 도모하여 약(藥)을 쓰는 일을 성사시키게 했다.」 하므로, 신이 사리에 의거하여 금지하기를, 「역적들이 비록 이런 일을 하지만 왕자(王者)는 죽지 않는 법이다. 그대가 이런 짓을 한다면 반드시 귀신(鬼神)에게 주벌(誅罰)을 당하게 될 것이다. 단지 은(銀)만 보내고 손을 쓰지 못하게 한다면 부귀(富貴)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적들이 은밀히 지 상궁(池尙宮)과 교결하였을까 염려스럽다.」 하였습니다. 신이 백망을 통하여 지 상궁과 만나 설득시킴으로써 마침내 그 모의를 중지시켰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실로 신이 목숨을 걸고 주선(周旋)한 공이었습니다.
동궁(東宮)의 명예를 욕되게 했다는 것은 심상길(沈尙吉)과 김성행(金省行) 등이 저위(儲位)로 세운 것은 자신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겨 서로 공로를 다투었는데, 오서종(吳瑞鍾)이 유경유(柳慶裕)와 함께 모의하여 백망에게 많은 은냥(銀兩)을 주고 말을 퍼뜨리게 했으니, 그 말은 「동궁이 이소훈(李昭訓)의 상(喪)으로 인하여 노론(老論)이 약으로 살해했다고 노여움을 발하여 힘써 정국(政局)을 뒤집어 다시 남인(南人)을 불러들이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목호룡의 공초(供招) 끝에 있는 말은 동궁(東宮)에게 핍박되는 단서가 있다 하여 국청(鞫廳)의 추안(推案)에 산삭(刪削)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목호룡은 남인의 천얼(賤孽)로서 백망(白望)과 체결하여 김용택·이천기·오서종·유경유 등의 사이를 기웃거리며 노닐다가 흉역스럽고 비밀스런 모의에 활개치며 참섭(參涉)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과 다시 투합(投合)하여 동궁(東宮)을 위태롭게 하기 위한 계책을 모의하여 변서(變書) 가운데에서, 「나의 마음은 임금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 말과 공사(供辭) 가운데에, 「동궁의 심사(心事)를 환히 밝히겠다.」고 한 말을 들추어 내었으니, 지의(旨意)가 너무도 흉악하고 참혹스럽다. 아! 저 역적들이 스스로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에서 역모를 꾀하게 된 것인데, 그것이 동궁과 무슨 관계가 있고, 또 무슨 밝혀야 할 심사(心事)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기필코 이런 말을 한 것은 이들이 김일경·박상검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이리저리 묘한 말을 만들어 동궁을 무함하여 위핍(危逼)시키려는 계책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옥사(獄事)를 다스리던 신하들이 처음 변서(變書)에 있는 말 가운데 동궁을 핍박하는 내용은 산삭(刪削)시키기를 청했으니, 이는 진실로 사체에 맞는 조처였다. 그렇지만 정실(情實)을 철저히 핵실하여 그 죄를 성토(聲討)하지 못한 채 준례에 따라 책훈(策勳)하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중한 것은 옥사의 실정(實情)에 있다고 하지만 사핵(査覈)이 끝난 뒤 유독 그들이 동궁을 무함하고 핍박한 죄를 분명히 바룰 수는 없었는가? 식자(識者)들이 모두 한스럽게 여겼다. 국청(鞫廳)에서 도사(都事)를 보내어 고발된 역적들을 잡아오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지열(池烈)은 사망(死亡)한 지 이미 오래라고 하교(下敎)하였다."
하였다.

 

이제야 왕옥(王獄)에 향양(桁楊)042)  을 갖추게 되었고, 초독(楚毒)이 말할 수 없이 혹독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단련(鍛鍊)하여 죄에 얽어 넣는 일이 3년이나 되도록 계속되었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도 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억지로 지만(遲晩)043)  한 사람도 있고, 이미 죽었는데도 죄를 얽어 결안(結案)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장형(杖刑)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 자복한 사람도 있었으니, 이렇게 허황한 옥안(獄案)은 예전에 없던 것이었다. 이른바 공사(供辭)니 결안(結案)이니 하는 것은 구본(舊本)의 실록(實錄)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는데, 영종(英宗)께서 보위(寶位)에 오른 데 이르러 차례로 신리(伸理)되었다.

 

그 옥사(獄事)에 들어간 사람 가운데 정인중(鄭麟重)은 바로 고(故) 충신(忠臣)인 정발(鄭撥)의 손자이고, 김용택(金龍澤)은 곧 김만중(金萬重)의 손자이자, 이이명(李頤命)의 사위이다. 이천기(李天紀)는 곧 이사영(李思永)의 아들로 김춘택(金春澤)의 처제(妻弟)이고, 심상길(沈尙吉)은 곧 심진(沈榗)의 조카이고, 이희지(李喜之)는 곧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다. 홍의인(洪義人)은 곧 홍언도(洪彦度)의 아들이고, 이기지(李器之)는 곧 이이명(李頤命)의 아들이다. 서덕수(徐德修)는 곧 서종제(徐宗悌)의 손자이고, 김성행(金省行)은 곧 김창집(金昌集)의 손자이다.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조성복(趙聖復)·김제겸(金濟謙)·홍석보(洪錫輔)는 문신(文臣)들로서 현직(顯職)에 오른 사람들이고, 이홍술(李弘述)·윤각(尹慤)·이우항(李宇恒)·이상집(李尙)·백시구(白時耉)·유취장(柳就章)·심진(沈榗)·이헌(李瀗)·김시태(金時泰)는 무신(武臣)들 가운데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고, 유성추(柳星樞)·양익표(梁益標)·이명좌(李明佐)·조흡(趙洽)·유후장(柳厚章)은 무가(武家)의 사람들이다. 이정식(李上植)·이만성(李晩成)은 문서(門庶)인데, 이건명(李健命)과는 내외 형제(內外兄弟)이다. 김창도(金昌道)는 곧 김창집(金昌集)의 서종형제(庶從兄弟)이고, 조송(趙松)은 곧 조영복(趙榮福)의 서숙(庶叔)이고, 김성절(金盛節)은 곧 김성적(金盛迪)의 서제(庶弟)이며, 이세복(李世福)은 곧 조송(趙松)의 생질이다. 그리고 이상건(李尙建)·김수천(金壽天)·이삼석(李三鍚)·김극복(金克復)·우홍채(禹洪采)·전인좌(錢仁佐)·현덕명(玄德明)·김진석(金震錫)·형의빈(邢儀賓)·홍순택(洪舜澤)은 곧 상역(象譯)044)  이다. 백망(白望)은 곧 잠저(潛邸) 때의 겸속(傔屬)이고, 정우관(鄭宇寬)·김일관(金一觀)이 있으며, 업봉(業奉)은 여인(女人)이다. 이영(二英)은 백망(白望)의 처이고, 업이(業伊)는 곧 이영의 어미이다. 백열(白烈)은 곧 궁인(宮人)으로 백망의 족속인 자이고, 묵세(墨世)는 곧 이영의 족속으로 궁인이 되었는데 나이 겨우 14세였다. 일정(一貞)은 곧 장세상(張世相)의 비(婢)인 일업(一業)이고, 장세상은 곧 잠저(潛邸) 때의 차지 중관(次知中官)이다. 김덕기(金德器)는 곧 장세상의 양자(養子)이다. 또 최홍(崔泓) 등이 있는데 모두 60여 인이 전후 체포되었다. 그러나 생존자는 10인도 못되었다.

 

3월 29일 갑인

세제(世弟)가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께서 국청(鞫廳)의 초사(招辭)를 내려서 보여 주셨는데, 말단의 두 가지 일은 나에 대한 악명(惡名)이었다. 수개월 사이에 또 이런 변괴(變怪)스런 일을 당하였는데, 겨울 무렵에 있었던 일에 견주어 보면 몇 배나 더할 뿐만이 아니다. 이런 악명을 지고 어찌 차마 일시인들 천지 사이에 숨을 쉬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겨울 무렵에 사위(辭位)할 적에 사람들이 만류하는 바람에 아직도 이렇게 눌러 앉아 있는데, 이 때문에 이런 변괴가 있게 된 것이다. 이 뒤로 또 몇 층계의 경계(境界)가 있을지 알 수가 없으니 일찍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면목(面目)으로 지하(地下)에 돌아가 선대왕(先大王)을 뵐 수 있겠는가? 사위(辭位)하려 한다."
하고, 이어 소초(疏草)를 내어 보이니, 궁관(宮官)들이 아뢰기를,
"이러한 요악(妖惡)스러운 말은 개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장(疏章)을 올려 사위(辭位)하는 것은 과중한 처사입니다."
하였으나, 시종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천만 마디의 하령(下令)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심각하고 통절한 말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목이 메이고 가슴이 막혀 말이 이치에 닿지 않는 정도였다. 악명(惡名)이라는 두 글자를 말할 적마다 했는데, 궁관들이 누누이 진달했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사빈(師賓)을 인접(引接)하는 일 때문에 물러가기를 청하여 나오니, 밤이 이미 사경(四更)이 되었다.

 

왕세제(王世弟)가 시강원(侍講院)에 하령(下令)하여 군신(群臣)들의 숙배(肅拜)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진달(進達)하기를,
"숙배 단자(肅拜單子)를 도로 내린다는 영(令)은 실로 뜻밖에서 나온 조처이십니다. 도로 입달(入達)하겠다는 내용으로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이러하지만 결단코 봉입(捧入)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또 진달(進達)하기를,
"누누이 번거롭게 진달하는 것이 매우 황공스러운 줄 알고 있습니다만, 신 등은 감히 봉류(捧留)시킬 수 없어 다시 도로 입달(入達)하겠다는 내용으로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바야흐로 황공스러운 중에 있으므로 감히 받을 수 없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삼수(三手)의 역안(逆案)045)                          은 3, 4명의 대신(大臣)을 무함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의도는 실로 동궁(東宮)을 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칼로 해친다고 한것은 목호룡의 말에 의하면 김용택(金龍澤)이 백망(白望)에게 보검(寶劍)을 주어 궁중으로 숨어 들어가서 거사(擧事)하게 하려 했다는 것으로, 곧 이른바 대급수(大急手)인 것이다. 그 칼을 수납(搜納)한 것은 실지로 포청(捕廳)에서 한 것이니, 그에 대하나 허실(虛實)은 원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역적 목호룡의 이른바 2척(尺)의 비수(匕首)라는 것이 변하여 자루가 부러지고 이끼가 낀 작은 칼이 되어 가죽 칼집에 들어 있다는 것은 조금도 근사(近似)한 점이 없는 것이 되니, 이른바 대급수라는 것은 이미 허황된 공론(空論)인 것이다. 이른바 폐출(廢黜)시킨다고 한 것은 목호령의 말에 의하면 이희지(李喜之)가 교지(矯旨)를 초하여 나인(內人) 백열(白烈)·업이(業伊)와 환자(宦者) 장세상(張世相)으로 하여금 국상(國喪)에 임하여 폐출시키는 일을 행한다는 것으로 곧 이른바 평지수(平地手)인 것이다. 이 일의 핵심은 지열(池烈)에게 달려 있는데, 국청(鞫廳)에서 잡아들이기를 청하자, 지열(池烈)은 이미 사망한 지 오래라고 하교하였다. 이른바 장세상(張世相)의 결안(結案)에 의하면 은밀히 이상궁(李尙宮) 열이(烈伊)와 내통하여 교지(矯旨)를 들여보냈다고 하였는데, 그때 국청에서 다시 이열(李烈)을 잡아들일 것을 청하니, 본래 이상궁(李尙宮) 열이(烈伊)는 없다고 하교하였다. 이는 지(池)가 변하여 이(李)가 된 것인데, 하나는 사망하고 하나는 본래 없었으니, 이른바 평지수(平地手)라는 것은 도무지 허망(虛妄)한 것이었다. 이른바 약(藥)으로 해친다고 한 것은 목호룡의 말에 의하면 백망(白望)이 은(銀) 5백 냥으로 중국의 환약(丸藥)을 사들였다고 했고, 또 약을 쓰는 일을 위해 정인중(鄭麟重) 등 7인이 은을 백망에게 주어 지열(池烈)에게 건네주게 했다고 했고, 또 이는 경자년046)                          에 반년 동안 경영해 온 것이라는 것으로 곧 이른바 소급수(小急手)인 것이다. 이 옥사(獄事)를 단련(鍛鍊)하여 죄를 얽어 만든 것은 오로지 약을 쓰려 했다는 한 가지 일에 있었던 것인데, 사설(辭說)이 여러 번 바뀌어 어긋나는 단서가 잇따라 나왔으니, 없는 죄를 날조한 정상(情狀)이 곳에 따라 탄로가 났다. 목호룡은 말하기를, ‘5백 냥으로 사들였다.’ 했는데, 서덕수(徐德修)는 공초(洪招)하기를, ‘2백 냥으로 이름을 모르는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에게서 샀다.’고 했으니, 이는 냥수(兩數)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정우관(鄭宇寬)은 말하기를, ‘환약의 크기는 큰 콩만 하다.’고 했는데, 업봉(業奉)은, ‘크기가 계란만 하다.’고 했으니, 대소(大小)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목호룡은 말하기를, ‘환약의 빛깔은 청색(靑色)이다.’ 했는데, 이영(二英)은 황색(黃色)이라고 하고 업봉(業奉)은 황흑색(黃黑色)이라고 했으니, 약을 빛깔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조흡(趙洽)은 말하기를, ‘약을 쓰는 것은 서덕수의 무리가 주관하여 먼저 동궁(東宮)의 별실(別室)에게 시험하였다.’ 했고, 목호룡은 말하기를, ‘경자년(庚子年)에 반 년 동안 경영했다.’고 했는데, 조흡(趙洽)은 신축년047)                           겨울에 이소훈(李昭訓)이 죽은 것을 가지고 말했으니, 두 말이 서로 모순이 되고, 이는 선후(先後)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소훈의 상(喪)에 대해 서덕수는 말하기를, ‘신축년 6월 무렵에 은자(銀子) 3백 냥을 장세상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독약(毒藥)을 구득하게 했고, 2백 금(金)으로 백망(白望)이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에게서 산 것을 구득하여 동궁(東宮)의 주방 나인(廚房內人) 이씨(李氏)를 시켜 음식에 타서 썼다.’고 했는데, 저사(儲嗣)를 책립(冊立)한 것은 그해 8월에 있었으니 저사를 책립하기 3개월 전에 어찌 이른바 주방(廚房)이란 것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사실이 허망한 것이다. 김성절(金盛節)의 공초(供招)에 말하기를, ‘서덕수의 말을 듣건대 정유년048) 금평위(錦平尉)가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이기지(李器之) 부자(父子)가 역관(譯官)            장 판관(張判官)을 시켜 약을 사가지고 오게 했었다.’고 했는데, 국청(鞫廳)에서 철저히 조사하였으나, 알아내지 못하였다. 심지어 사역원(司譯院)의 부경안(赴京案)을 가져다 조사했지만, 원래 장성(張姓)의 역관은 없었다. 그리하여 대계(臺啓)에 의거 수년 동안 연경(燕京)의 사행에 동행한 역관들을 적발(摘發)하여 보았지만, 장성(張姓)을 가진 사람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 이른바 약을 사왔다는 역관은 본디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약을 사왔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가죽이 없는데 털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언증(言證)이 허망한 것이다. 김성절이 또 말하기를, ‘장세상이 수라간(水剌間)의 차지(次知)인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하여 약을 썼다.’고 했는데, 국청(鞫廳)에서 잡아서 내어보내도록 계청(啓請)하니 없다고 하교(下敎)하였다. 약을 쓴 것은 동일한데 혹은 지열(池烈)이라고도 하고 혹은 김 상궁(金尙宮)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렇다면 안에서 약을 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이는 더욱 매우 허망한 일이다. 이미 말하기를, ‘백망(白望)이 모은 은(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봉납(捧納)하여 약을 쓰도록 도모했다.’고 하였는데, 백망이 체포된 뒤에 이를 덕사(德寺)에서 찾아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은을 덕사에다 묻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목호룡과 백망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포청(捕廳)에서 어떻게 알고서 곧바로 달려가서 발굴(發掘)해 내었겠는가? 또 말하기를, ‘이이명(李頤命)이 독약을 사가지고 와서 이것으로 행흉(行凶)하여 누런 물을 토해 낸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누런 물을 토한 것은 경자년(庚子年) 12월에 있었고, 이이명이 봉사(奉使)를 끝내고 돌아온 것은 신축년(辛丑年) 정월이었으니, 연월(年月)이 서로 틀린 데에서 끌어댄 증언이 거짓이라는 정상을 알 수가 있다. 대저 옥사(獄事)의 전체(全體)는 모두 삼수(三手)에 있었는데, 대급수(大急手)와 평지수(平地手)의 허망한 것이 위에서 거론한 바와 같았으니, 많이 변론(辯論)할 것도 없다. 독약을 썼다고 하는 한 가지 일은 더욱 저들이 구실로 삼아 옥사를 완성시킨 큰 단서였는데, 절절(節節)이 사리에 어긋나고 일마다 허망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옥사의 전체가 날조와 무함에 의한 것임은 머무도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른바 궁성(宮城)의 호위(扈衞)에 대한 이야기도 또한 거짓이요 망령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백세(百世) 뒤에도 삼수(三手)가 허위였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니, 목호룡의 기망(欺罔)한 정상이 드러났다. 목호룡이 기망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성명(聖明)의 무함을 환히 밝힐 수 있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65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045]              삼수(三手)의 역안(逆案) : 삼수는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를 가리키는 말로, 목호룡(睦虎龍)이 일으킨 무옥(誣獄)을 가리킴.[註 04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04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048]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사신은 논한다. "삼수(三手)의 역안(逆案)045)                          은 3, 4명의 대신(大臣)을 무함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의도는 실로 동궁(東宮)을 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칼로 해친다고 한것은 목호룡의 말에 의하면 김용택(金龍澤)이 백망(白望)에게 보검(寶劍)을 주어 궁중으로 숨어 들어가서 거사(擧事)하게 하려 했다는 것으로, 곧 이른바 대급수(大急手)인 것이다. 그 칼을 수납(搜納)한 것은 실지로 포청(捕廳)에서 한 것이니, 그에 대하나 허실(虛實)은 원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역적 목호룡의 이른바 2척(尺)의 비수(匕首)라는 것이 변하여 자루가 부러지고 이끼가 낀 작은 칼이 되어 가죽 칼집에 들어 있다는 것은 조금도 근사(近似)한 점이 없는 것이 되니, 이른바 대급수라는 것은 이미 허황된 공론(空論)인 것이다. 이른바 폐출(廢黜)시킨다고 한 것은 목호령의 말에 의하면 이희지(李喜之)가 교지(矯旨)를 초하여 나인(內人) 백열(白烈)·업이(業伊)와 환자(宦者) 장세상(張世相)으로 하여금 국상(國喪)에 임하여 폐출시키는 일을 행한다는 것으로 곧 이른바 평지수(平地手)인 것이다. 이 일의 핵심은 지열(池烈)에게 달려 있는데, 국청(鞫廳)에서 잡아들이기를 청하자, 지열(池烈)은 이미 사망한 지 오래라고 하교하였다. 이른바 장세상(張世相)의 결안(結案)에 의하면 은밀히 이상궁(李尙宮) 열이(烈伊)와 내통하여 교지(矯旨)를 들여보냈다고 하였는데, 그때 국청에서 다시 이열(李烈)을 잡아들일 것을 청하니, 본래 이상궁(李尙宮) 열이(烈伊)는 없다고 하교하였다. 이는 지(池)가 변하여 이(李)가 된 것인데, 하나는 사망하고 하나는 본래 없었으니, 이른바 평지수(平地手)라는 것은 도무지 허망(虛妄)한 것이었다. 이른바 약(藥)으로 해친다고 한 것은 목호룡의 말에 의하면 백망(白望)이 은(銀) 5백 냥으로 중국의 환약(丸藥)을 사들였다고 했고, 또 약을 쓰는 일을 위해 정인중(鄭麟重) 등 7인이 은을 백망에게 주어 지열(池烈)에게 건네주게 했다고 했고, 또 이는 경자년046)                          에 반년 동안 경영해 온 것이라는 것으로 곧 이른바 소급수(小急手)인 것이다. 이 옥사(獄事)를 단련(鍛鍊)하여 죄를 얽어 만든 것은 오로지 약을 쓰려 했다는 한 가지 일에 있었던 것인데, 사설(辭說)이 여러 번 바뀌어 어긋나는 단서가 잇따라 나왔으니, 없는 죄를 날조한 정상(情狀)이 곳에 따라 탄로가 났다. 목호룡은 말하기를, ‘5백 냥으로 사들였다.’ 했는데, 서덕수(徐德修)는 공초(洪招)하기를, ‘2백 냥으로 이름을 모르는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에게서 샀다.’고 했으니, 이는 냥수(兩數)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정우관(鄭宇寬)은 말하기를, ‘환약의 크기는 큰 콩만 하다.’고 했는데, 업봉(業奉)은, ‘크기가 계란만 하다.’고 했으니, 대소(大小)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목호룡은 말하기를, ‘환약의 빛깔은 청색(靑色)이다.’ 했는데, 이영(二英)은 황색(黃色)이라고 하고 업봉(業奉)은 황흑색(黃黑色)이라고 했으니, 약을 빛깔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조흡(趙洽)은 말하기를, ‘약을 쓰는 것은 서덕수의 무리가 주관하여 먼저 동궁(東宮)의 별실(別室)에게 시험하였다.’ 했고, 목호룡은 말하기를, ‘경자년(庚子年)에 반 년 동안 경영했다.’고 했는데, 조흡(趙洽)은 신축년047)                           겨울에 이소훈(李昭訓)이 죽은 것을 가지고 말했으니, 두 말이 서로 모순이 되고, 이는 선후(先後)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소훈의 상(喪)에 대해 서덕수는 말하기를, ‘신축년 6월 무렵에 은자(銀子) 3백 냥을 장세상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독약(毒藥)을 구득하게 했고, 2백 금(金)으로 백망(白望)이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에게서 산 것을 구득하여 동궁(東宮)의 주방 나인(廚房內人) 이씨(李氏)를 시켜 음식에 타서 썼다.’고 했는데, 저사(儲嗣)를 책립(冊立)한 것은 그해 8월에 있었으니 저사를 책립하기 3개월 전에 어찌 이른바 주방(廚房)이란 것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사실이 허망한 것이다. 김성절(金盛節)의 공초(供招)에 말하기를, ‘서덕수의 말을 듣건대 정유년048) 금평위(錦平尉)가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이기지(李器之) 부자(父子)가 역관(譯官)            장 판관(張判官)을 시켜 약을 사가지고 오게 했었다.’고 했는데, 국청(鞫廳)에서 철저히 조사하였으나, 알아내지 못하였다. 심지어 사역원(司譯院)의 부경안(赴京案)을 가져다 조사했지만, 원래 장성(張姓)의 역관은 없었다. 그리하여 대계(臺啓)에 의거 수년 동안 연경(燕京)의 사행에 동행한 역관들을 적발(摘發)하여 보았지만, 장성(張姓)을 가진 사람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니, 이른바 약을 사왔다는 역관은 본디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약을 사왔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가죽이 없는데 털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언증(言證)이 허망한 것이다. 김성절이 또 말하기를, ‘장세상이 수라간(水剌間)의 차지(次知)인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하여 약을 썼다.’고 했는데, 국청(鞫廳)에서 잡아서 내어보내도록 계청(啓請)하니 없다고 하교(下敎)하였다. 약을 쓴 것은 동일한데 혹은 지열(池烈)이라고도 하고 혹은 김 상궁(金尙宮)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렇다면 안에서 약을 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이는 더욱 매우 허망한 일이다. 이미 말하기를, ‘백망(白望)이 모은 은(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봉납(捧納)하여 약을 쓰도록 도모했다.’고 하였는데, 백망이 체포된 뒤에 이를 덕사(德寺)에서 찾아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은을 덕사에다 묻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목호룡과 백망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포청(捕廳)에서 어떻게 알고서 곧바로 달려가서 발굴(發掘)해 내었겠는가? 또 말하기를, ‘이이명(李頤命)이 독약을 사가지고 와서 이것으로 행흉(行凶)하여 누런 물을 토해 낸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누런 물을 토한 것은 경자년(庚子年) 12월에 있었고, 이이명이 봉사(奉使)를 끝내고 돌아온 것은 신축년(辛丑年) 정월이었으니, 연월(年月)이 서로 틀린 데에서 끌어댄 증언이 거짓이라는 정상을 알 수가 있다. 대저 옥사(獄事)의 전체(全體)는 모두 삼수(三手)에 있었는데, 대급수(大急手)와 평지수(平地手)의 허망한 것이 위에서 거론한 바와 같았으니, 많이 변론(辯論)할 것도 없다. 독약을 썼다고 하는 한 가지 일은 더욱 저들이 구실로 삼아 옥사를 완성시킨 큰 단서였는데, 절절(節節)이 사리에 어긋나고 일마다 허망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옥사의 전체가 날조와 무함에 의한 것임은 머무도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른바 궁성(宮城)의 호위(扈衞)에 대한 이야기도 또한 거짓이요 망령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백세(百世) 뒤에도 삼수(三手)가 허위였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니, 목호룡의 기망(欺罔)한 정상이 드러났다. 목호룡이 기망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성명(聖明)의 무함을 환히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백망(白望)이 조태구(趙敎耉)·최석항(崔錫恒)·김일경(金一鏡)·심단(沈檀)이 동궁(東宮)을 위태롭게 하기 위해 모의했다고 고발하였으니, 국청(鞫廳)에서 불문에 붙였다. 형방 승지 조경명(趙景命)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밀갑(密匣)을 받들고 국청으로 나아가 죄인들을 밤새도록 다시 추고(推考)하였습니다. 오늘 백망(白望)의 공초를 받을 적에 황란(荒亂)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허다했는데, 이는 모두 문목(問目) 이외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신(朝臣)의 명자(名字)도 많이 거론했는데,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두 대신(大臣)까지도 거론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가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두 대신이 즉시 물러가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백망이 죽음 가운데에서 살길을 찾고 옥사를 저지하여 낭패되게 하기 위한 계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의금 김일경을 축출했고, 또 판의금 심단을 침핍(侵逼)했는데, 또 이번에는 두 대신(大臣)을 모두 축출할 계책을 세워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을 텅 비게 함으로써 국옥(鞫獄)을 철회시키게 만들려고 했으니, 그 정절(情節)이 더욱 음흉하고 교활합니다. 신은 이미 밀갑(密匣)을 맏들었고 받은 공초(供招)와 문서(文書)도 아직 수정(修正)하지 못했으므로, 궐중(闕中)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우선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옥사를 다스리던 대신(大臣)이 왕명을 기다리고 있어서 막중한 국청의 좌기(坐起)를 갑자기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변괴이니, 속히 처분(處分)을 내려 조속히 옥사를 완결지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이때 조태구 등이 이미 정국(庭鞫)을 본부(本府)로 옮겨 설치하고, 백망의 공초(供招)를 난언(亂言)으로 돌렸는가 하면, 다시 나가서 옥사를 다스리다가 인하여 백망을 때려 죽임으로써 증언할 사람을 없애버렸다. 영종(英宗)을사년049)  에 비로소 그때의 문사 낭관(問事郞官)을 잡아다가 추문하였으나 입을 다물고 자복하지 않자, 묻지 말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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