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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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묘

사직 신임(申銋)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듣건대 국옥(鞫獄)을 처음 설치했을 적에 금오(金吾)의 관원 이름이 죄수(罪囚)의 입에서 나왔으므로, 물러나 나아가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국청에서 나추(拿推)할 것을 청하지 않았고, 국청을 본부(本府)에 옮겨 설치했다고 하니, 이는 상규(常規)에 벗어난 처사였습니다. 그리고 옥사를 다스리던 대신(大臣)이 또 왕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추구하는 일은 엄중하고 비밀스러운 것이므로, 곡절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승선(承宣)050)  의 계사(啓辭) 가운데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살펴본다면, 죄인의 공초에서 나온 얘기가 긴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허실(虛實)을 변정(辨正)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는데도 후사(喉司)와 대각(臺閣)에서는 국사(鞫事)의 엄중함은 생각하지 않은 채 돈면(敦勉)하여 옥사(獄事)를 완결짓게 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죄인이 일단 죽고난 뒤에는 끌어들였던 제신(諸臣)들이 변명(辨明)하려 해도 다시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명신(名臣)·석보(碩輔)들도 잘못 무함을 받았다가, 한 번의 변명에서 평인(平人)과 같이 즉시 벗어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옥체(獄體)를 중히 여긴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신원(伸冤)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삼사(三司)에서는 한 마디도 쟁론하여 고집하는 사람이 없으니, 성명(聖明)께서는 엄중히 지척(指斥)하여 군신(君臣)의 분의를 면려시키소서. 인하여 삼가 생각건대 춘궁(春宮)께서 누차 망극(罔極)한 변(變)을 당하였는데, 다행히 전하(殿下)의 효우(孝友)하는 덕과 위안(慰安)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힘입었으니, 신민(臣民)으로서 누군들 흠송(欽頌)하지 않겠습니까? 이 뒤로 보호(保護)하는 방도는 사왕(邪枉)을 엄중히 막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이 와서 빈청(賓廳)에 나아가 정대(請對)했다가, 신임(申銋)이 상소하여 국사(鞫事)로써 대신(大臣)을 침척(侵斥)하였으므로, 도로 나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대사간 이사상(李師尙)이 청대(請對)하여 진수당(進修堂)에 입시하였다. 아뢰기를,
"윤강(倫綱)이 멸절되어 난적(亂賊)들이 멋대로 횡행하면서 시해(弑害)를 모의한 역적이 권문(權門)에서 나왔으니, 오늘날 신하된 사람들은 마땅히 그들의 살점을 먹고 가죽을 벗겨서 깔 것을 기필해야 됩니다. 그런데 신임(申銋)의 소장에서는 시역을 모의한 난적에 대해 조금도 경동(警動)하는 마음이 없이 이에 역수(逆竪)의 난언으로 된 공초를 가지고 조정의 진신(縉紳)들을 함정으로 밀어넣고, 옥사를 저패(沮敗)할 계책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아! 이는 흉도(凶徒)와 역당(逆黨)들이 모두 그의 당여(黨與)이므로, 단서가 모두 드러나게 될까 두려워해서 한 짓입니다. 시조(市朝)에서 드러내어 처형하는 것을 늦추게 하기 위해 은밀히 역적의 공초를 빙자하여 대옥(大獄)을 극력 저지시킴으로써 옥사를 다스리는 길을 끊어버리려고 한 것이니, 역적과 화응(和應)한 자취가 현저합니다. 위로 대신(大臣)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일필(三筆)의 문구(文句)로 단정하여 기필코 나라를 텅 비게 하고야 말려 하였으니, 진실로 그의 마음을 추구해 보면 한 명의 백망(白望)을 위하여 군주를 잊고 역적을 편든 것으로, 그 죄를 엄중히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임을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離安置)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오래도록 답하지 않았다. 승지 황이장(黃爾章)이 이사상(李師尙)과 극력 쟁론하자,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신임(申銋)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安置)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敎耉)와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억울하게 망극한 무함을 받고 나서는 가슴이 떨리고 분이 뼈에 사무쳐 즉시 물러나가 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근시(近侍)를 보내어 돈유(敦諭)하면서 흉언(凶言) 때문에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다고 하교하셨으므로, 대략 짧은 차자(箚子)를 올려 우러러 가슴속의 정성을 폭백(暴白)하였던 바 비지(批旨)에 개유(開諭)하신 내용이 정녕(丁寧)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엄한 소명(召命)이 다시 이르렀으므로, 패초(牌招)051)  를 받들어 예궐(詣闕)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합문(閤門)을 두드려 청대(請對)하여 옥사(獄辭)를 환히 진달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면죄(免罪)되기를 빌 계획으로 있었습니다. 이럴 즈음에 신임(申銋)의 소장(疏章)이 마침 이르렀는데, 신 등이 옥사(獄事)를 다스린데 대한 잘못을 후사(喉司)에 극심하게 공격하면서 그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된 사람을 나추(拿推)하기를 청하지 않았는가 하면 정국(庭鞫)을 본부(本府)로 옮긴 것은 상규(常規)에 벗어난 것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이름이 죄인의 공초에 긴요하게 거론되었으니, 허실을 변정(辨正)하는 일을 그만 둘 수 없다.’ 하였는데, 이는 일에 따라 일을 논하는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옥사(獄辭)가 비록 엄중하고 비밀스러운 것일지라도 어찌 감히 대략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김일경(金一鏡)의 이름이 처음 상변(上變)한 목호룡(睦虎龍)의 공초(供招)에 나오지 않았는데, 죄인 백망(白望)이 도리어 목호룡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 있었으므로, 다시 목호룡에게 공초를 받았더니 백망의 말은 전부 허망(虛妄)한 것이었습니다. 옥체(獄體)로써 헤아려 보건대 이런 것을 나추(拿推)하라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정국을 본부로 옮기기를 청한 것에 이르러서도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릇 역옥(逆獄)은 일이 급박한 데에 관계되면 내정(內庭)에다 국청을 설치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당초에 상변(上變)한 것은 바로 급서(急書)였으니, 그곳에다 국청을 설치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원사(爰辭)052)  를 받기에 이르러서는 죄인들이 음흉하고 부도(不道)한 짓을 한 절차가 모두 연전(年前)의 일이었음이 이제 와서 비로소 발고(發告)되었고, 죄인을 나치(拿致)하자면 날짜가 좀 지나야 되는데, 정국에 시일을 허비하는 것은 일이 미안한 데에 관계가 되니, 본부로 옮겨 설치하는 것은 옥체(獄體)가 진실로 그러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말을 하니 어찌 뜻밖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두 조정(朝廷)의 은혜로운 대우를 받아 자신이 이런 위치에 이르렀으니, 구구한 일편 단심은 임금께서 환히 내려다보고 계실 것입니다. 저 하찮은 역수(逆竪)가 죽음 가운데에서 살길을 찾지 위해 한 말을 가지고 어떻게 생판으로 무욕(誣辱)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중신(重臣)에 대해 허실(虛實)을 가지고 말함으로써 마치 신 등의 허실로 대변(對辨)해야 알 수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너무 원통하여 바로 죽고만 싶은 심정입니다."
하였다. 신임(申銋)은 젊어서부터 강직(剛直)하여 일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김일경(金一鏡)이 무옥(誣獄)을 일으켜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살해했다는 말을 듣고 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왕세제(王世弟)가 반드시 보전 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상소(上疏)했다가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되었다. 그때 나이가 이미 80여 세였는데도 노기(怒氣)가 왕성하여 빈객(賓客)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신임이 비록 귀양을 갔지만 왕세제가 끝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신임의 힘이었다.

 

4월 4일 무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진수당(進修堂)에 입시하였는데, 청하기를,
"백망(白望)은 우선 다시 형추(刑推)하지 말고 곧바로 목호룡(睦虎龍)과 면질(面質)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승지(承旨) 황이장(黃爾章)이 아뢰기를,
"대소(大小)의 옥사(獄事)에 있어 원래 문목(問目) 이외의 것은 기록하는 일이 없습니다. 백망(白望)은 문옥 이외의 난언(亂言)을 공초(供招)하여 옥관(獄官)들에게 무욕(誣辱)을 가함으로써 목숨을 연장시킬 계책을 세웠습니다. 이 뒤로는 문목 이외의 내용은 기록하지 말고 다시 옥관을 침핍하더라도 인혐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으로 신칙(申飭)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승지(承旨)의 말이 옳습니다. 중요한 것을 감히 말할 수 있는 바탕이 없다면 신자(臣子)가 어떻게 감히 난언으로 된 공초(供招)라고 핑계대고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하교(下敎)하여 정탈(定奪)한 뒤에야 마음놓고 일을 할 수 있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일경(金一鏡)은 처음 백망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므로, 감히 국청(鞫廳)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신 등이 이미 나아가 참여하고 있으니, 김일경이 어찌 감히 나오지 못하겠습니까? 마땅히 패초(牌招)하여 국청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황이장이 아뢰기를,
"국사(鞫事)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므로, 외부의 사람으로서는 진실로 알 수가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만일 정당한 데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국청에 참여한 양사(兩司)의 사람들이 스스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뒤로는 국외(局外)의 사람이 상소(上疏)하여 옥사에 대해 논하는 경우에는 승정원에서 퇴각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최석항은 아뢰기를,
"국외(局外)의 사람들은 사실(事實)을 모르고 이같은 일을 하게 되니, 퇴각시켜야만 국사(國事)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4월 8일 임술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청대(請對)하여 진수당(進修堂)에 입시하였다. 아뢰기를,
"왕세제(王世弟)께서 지난번 목호룡(睦虎龍)의 공초(供招) 말단에 있었던 말 때문에 불안(不安)한 단서로 여겨 궁료(宮僚)들에게 하령(下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신이 청대하여 진달한 말을 삼가 생각건대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연(書筵)의 소대(召對)를 오래도록 철폐한 것은 어찌 전일의 일을 아직도 석연하게 풀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지금 청대한 것은 오로지 이 일 때문인 것입니다. 대개 예로부터 요악(妖惡)한 무리들은 제왕가(帝王家)에서 알지 못하고 있는 일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사심(私心)을 성취시킨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일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왕세제에게 미안한 단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동궁(東宮)은 전하(殿下)의 개제(介弟)이신데, 옛말에도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라고 했으니, 삼가 성상께서는 효우(孝友)하고 친애하는 마음에서 이제 안심하고 서연을 열라는 뜻으로 자상하게 개유(開諭)하소서. 그러면 동궁께서도 어찌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각별히 유념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미처 발락(發落)하기도 전에 조태구(趙泰耉)가 또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광좌(李光佐), 예조 판서 이태좌(李台佐)가 모두 인입(引入)053)  하였습니다. 두 신하가 변을 당한 것이 신과 대략 같았습니다만, 역수(逆竪)의 무함과 비난을 추후에 들었기 때문에 동시에 명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제야 비로소 인입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모두 출사(山仕)했고, 두 신하는 별로 곤란할 것이 없으니, 모두 패초(牌招)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러라고 하였다. 조태구가 이어 동궁으로 나아가서 청대(請對)하여 내일부터 궁료(宮僚)들을 소대(召對)하도록 극력 청하였는데, 다음날 비로서 소대를 행하였다. 시강원(侍講院)의 달사(達辭)에 대한 하답(下答)에서 ‘마음이 아직도 불안하다[心猶不安]’는 네 글자를 직접 지워버렸는데, 이는 또한 조태구의 말을 따른 것이다.

 

4월 11일 을축

이광좌(李光佐)를 대제학으로, 김일경(金一鏡)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원임(原任) 문형(文衡) 강현(姜鋧)이 천망(薦望)을 주관하여 김일경을 수천(首薦)했는데,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가 천차(薦次)를 넘어 이광좌를 수천(首薦)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김일경이 분한을 품고 대관(臺官)에게 넌지시 일러 탄핵하게 하였다.

 

4월 17일 신미

대사간 이사상(李師尙), 헌납 윤회(尹會), 장령 이경열(李景說), 지평 박필몽(朴弼夢)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했다. 이사상이 합계(合啓)한 주본(奏本)을 읽기를,
"사흉(四凶)의 죄는 이루 주벌(誅罰)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은밀히 역적 조성복(趙聖復)을 사주하여 마음을 시험하는 소장(疏章)을 불쑥 올리게 했고, 갑자기 정청(庭請)을 철회했는가 하면, 겸하여 협박하는 소장을 올렸으니, 그들의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변서(變書)를 상문(上聞)한 데 이르러서는 흉괴(凶魁)의 자지(子枝)들이 뒤엉켜 연류되었는데, 칼이나 약으로 해칠 계획에 의거하여 배포(排布)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비(劉備)의 유무(有無)를 가지고 문답(問答)하는 사이에 먹은 마음을 드러내었으며,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은밀한 약속을 맺었습니다. 역적 백망(白望)이 쓴 양(養)자는 곧 이이명(李頤命)의 자(字)였으니, 이는 은밀히 임금으로 추대(推戴)하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기(李天紀)가 깨닫고는 웃게 되었고, 정인중(鄭麟重)이 결안(結案) 때에 감히 실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역적은 이사명(李師命)의 아우로 국가를 원망한 것이 골수에 사무쳐 도리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여 30년 동안 화기(禍機)를 빚어 낼 마음을 품어왔는데, 이는 오늘날 찬탈(簒奪)할 계획을 위한 것이었으니, 어찌 일각인들 목숨을 부지시켜 종사(宗社)에 헤아릴 수 없는 화(禍)를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이명을 처참(處斬)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박필몽·윤회·이경열이 계속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이사상이 또 주본(奏本)을 읽기를,
"김창집(金昌集)은 더없이 큰 간특(奸慝)한 사람으로서, 국본(國本)을 동요시키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는 데 관계된 일이면 극력 주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 역적의 초사(招辭)에 분명히 나온 것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가 아니면 곧 인친(姻親)이나 문객(門客)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음흉한 정절(情節)을 서로 내통하였는데, 더구나 그의 아들 김제겸(金濟謙)은 미리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할 것을 우려하여 은밀히 이홍술(李弘述)을 사주해서 때려 죽여서 입을 봉할 계책을 세우기까지 했으니, 그가 불궤(不軌)를 도모한 정상(情狀)은 덮어 숨기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인중은 말할 수 없는 흉역(凶逆)인데 낙점(落點)을 내리지 않고 있을 적에 억지로 청하여 승천(陞遷)시켰습니다. 그가 마음을 함께하여 역모(逆謀)한 다음 힘을 다해 추천한 정상을 모든 사람이 지적하고 있는데,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 역적이 진 죄를 논한다면, 그가 극력 고묘(告廟)하는 것을 저지시킨 것과 차자(箚子)로 절목(節目)을 정하기를 청한 이외에도 사사건건 용서하기 어려운 대역(大逆)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루 동안 목숨을 살려두면 반드시 하루 동안 종사(宗社)에 걱정을 끼칠 것이니, 김창집을 정형(正刑)에 처하소서."
고,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결단코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경열이 주본(奏本)을 읽기를,
"이건명(李健命)은 이이명과 이사명의 종제(從弟)로 김창집의 혈당(血黨)이므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은밀히 이지(異志)를 축적해 오면서 삼흉(三凶)들과 협동한 정절(情節)이 주도 면밀하였습니다. 지난 겨울 예사롭지 않은 전교(傳敎)에 대해 오눌날 신자(臣子)로서 누군들 피눈물을 삼키면서 구정(救正)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건명은 유독 무슨 심장(心腸)을 지녔길래 전지(傳旨)의 환수(還收)를 청한 데 대해 분한을 품고 칼날을 옮겨 급히 공격하였는가 하면, 여러 재신(宰臣)들의 항쟁(抗爭)에 분노하여 멋대로 꾸짖어 욕하였으며, 차자(箚子)를 올려 절목(節目)을 정하기를 청하면서 군부(君父)를 협박했습니다. 지난번 주청(奏請)하는 사신(使臣)에 충차(充差)되었을 적에 양잉(兩媵)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어 성궁(聖躬)을 무함했으니, 임금을 속인 부도(不道)한 죄는 진실로 이미 용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족당(族黨)과 인아(姻婭)가 이제 또 역모(逆謀)에 가담한 것이 분명히 거론되었는데, 더구나 평지수(平地手)를 주장한 역적이 근족(近族)인 자질(子姪) 사이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추대하려 한 계책이 동당(同堂)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여 찬탈(簒奪)을 위한 역적 모의가 스스로 일문(一門)의 일이 되고 말았는데도 감히 범죄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전후에 범한 죄를 논하건대 실로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 역적인 것입니다.
조태채(趙泰采)는 음흉하고 간교한 자로서 권세를 탐하였는데, 지난해에는 대체로 삼흉(三凶)과 의견을 달리함을 보였었으나, 현관(顯官)·청직(淸職)으로써 그의 아들 조관빈(趙觀彬)에게 이익을 주어 꾀는 데 이르러서는 드디어 삼흉(三凶)과 한편이 되었고, 주도 면밀하게 투합(投合)하여 도리어 군부(君父)를 저버렸습니다. 지난번 역적 조성복(趙聖復)이 소장을 올렸을 적에 갑자기 예사롭지 않은 하교(下敎)가 있자, 진신(縉紳)과 여대(輿臺)054)  로서 눈물을 흘리고 뛰어다니면서 반한(反汗)055)  하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조태채는 임시 방편의 말로 농간을 부려 여러 재신(宰臣)을 맞대놓고 속여 정청(庭請)을 엄준하게 방색(防塞)한 다음 밤을 틈타 차자(箚子)를 올려 절목(節目)을 정할 것을 청하였으니, 음흉한 마음과 반역(反逆)을 획책한 정상(情狀)을 삼흉(三凶)과 견주어 보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흉역의 변고가 이미 측근에서 발생했고, 사련(辭連)된 부류들도 모두가 혈당(血黨)들인데, 조태채가 홀로 어떻게 하루인들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명과 조태채를 형률(刑律)에 의거 처단(處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또 윤종(允從)해야 된다는 뜻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이사상이 다시 합계(合啓)를 읽어서 아뢰었고, 여러 신하들도 각기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임금은 그래도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박필몽이 아뢰기를,
"지금 위망(危亡)한 정상이 조석(朝夕)에 박두해 있는데, 신 등은 교목 세신(喬木世臣)으로서 나라가 망한 뒤에 어떻게 차마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비록 밤이 새더라도 윤허하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극력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이경열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진달하고 홍우전(洪禹傳)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따르지 않았다. 새로 아뢰었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는 모두 이미 자복하였으니, 역률을 시행하는 것은 왕법(王法)에 있어 당연한 것이므로,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했을 적에 논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역적 백망(白望)은 아직 승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의 의논이 있었던 것뿐이요, 삼역(三逆)에게 경중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처분(處分)은 이에 윗조항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세 사람의 시신(屍身)을 찢는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망은 홀로 사형에 처했는데, 김용택·이천기에게는 육형(戮刑)을 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왕장(王章)이 한쪽만 폐기되어 여정(輿情)이 모두 격분하고 있으니, 김용택·이천기를 모두 육시(戮屍)에 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박희진(朴熙晉)이 아뢰기를,
"그때 윗조항에 의거하여 시행하라는 하교가 명백할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들이 상세히 살피지 않은 탓으로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은 채 시신(屍身)을 유치(留置)하고 있습니다. 백망(白望)의 예(例)에 의거하여 육시(戮屍)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홍술(李弘述)이 육현(陸玄)을 박살(撲殺)한 정절(情節)이 다 드러났습니다. 지금 목호룡의 공초(供招)를 보건대 여러 역적들이 역적 모의를 한 절차에 대해 목호룡이 참여하고 알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홍술이 그가 상변(上變)할까 우려해서 역적들이 서로 의논하여 기어이 장살(杖殺)하여 입을 봉해 버리려 했습니다. 이천기(李天紀)가 힘을 쓴 것으로 인하여 계책이 드디어 중도에 중지되기는 했습니다만, 만일 이홍술이 애초부터 역모에 간여하지 않았다면 목호룡의 상변이 자신에게 무슨 절박한 우려가 있기에 흉도(凶徒)들과 협심하여 기필코 제거해서 발설되는 길을 단절시키려 했겠습니까? 그가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비밀히 군흉(群凶)들과 체결하였으니, 음모(陰謀)와 비계(祕計)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번 비망기(備忘記)에, ‘은밀히 불측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신 하교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증험되었습니다. 이러한 악역(惡逆)을 저지른 부류들은 결단코 금오(金吾)에 맡겨 등한(等閑)하게 다스려서는 안됩니다. 이홍술을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하여 여러 역적들과 똑같이 엄중히 국문하여 사정을 조사해 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홍철인(洪哲人)의 이름이 변서(變書)에 거론되었을 적에 금오랑(金吾郞)이 즉시 그의 집으로 달려갔더니, 홍언도(洪彦度)가 감히 숨겨 줄 계책을 내어 바야흐로 홍의인(洪義人)의 적소(謫所)에 갔다고 방자하게 기만(欺瞞)하면서 왕명(王命)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금오랑으로 하여금 헛되이 명천(明川)으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홍철인은 그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나돌아다니면서 흉당(凶黨)들과 교통(交通)하여 멋대로 모의한 정상이 오랜 뒤에 저절로 드러나고 말았으니, 그의 정상이 절절이 흉패스럽기만 했습니다. 망명(亡命)한 한가지 조항을 문목(問目)에 첨입시켜 엄중한 형신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그의 아비 홍언도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역적들이 승복한 뒤 정형(正刑)을 행하기도 전에 일시에 갑자기 죽어버렸으니, 이는 실로 전에 있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지난번 백망(白望)이 담장을 넘고 현덕명(玄德明)이 스스로 목을 찌른 것은 모두 수졸(守卒)들이 마음을 함께한 소치인데, 이것을 이미 엄중하게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전수(典守)하는 무리들이 징계(懲戒)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제 이 세 명의 죄수가 같은 날 갑자기 죽은 것은 의심을 야기시킬 단서가 없습니다. 이처럼 국사(鞫事)가 바야흐로 벌어져 죄수가 감옥에 가득 찬 때를 당하여 특별히 엄중히 방지하고 징계하고 면려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으니, 그때의 구료관(救療官)과 옥간(獄間)을 담당했던 군졸을 수금(囚禁)시켜 철저히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잇따라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인중(鄭麟重)이 승복(承服)한 뒤 단지 실정을 알고 있었다는 데 대한 형률(刑律)만 시행하고 노륙(孥戮)056)  하는 법은 적용하지 않았는데, 신은 이 점에 대해 의혹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저 실정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모의에는 참여하지 않고 단지 실정만 알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인중은 역적 모의를 한 정상이 낭자하고 손바닥에 글자를 쓴 것과 독약을 쓴 정절(情節)이 서로 상통되는 점이 있는데도 이제 억지로 실정을 알고 있었다는 데 대한 죄과에 두었으니, 실형(失刑)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간쟁하여 고집하지 못한 여러 대관(臺官)들이 이미 모두 인피(引避)했다가 체직(遞職)당했으니, 공의(公議)가 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자(妻子)를 노예로 삼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역적 모의를 한 죄인 정인중을 한결같이 이천기·김용택 등의 예(例)에 의거하여 쾌히 감률(勘律)을 내리시어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김제겸(金濟謙)·김민택(金民澤)·이기지(李器之)는 모두 흉얼(凶孽) 집안의 자지(子枝)들로서 친당(親黨)이 되어 서로 체결했으므로 세력이 뜨겁게 치솟았고, 생살권(生殺權)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역적 모의를 한 정절(情節)을 목호룡이 많이 참여하여 알고 있었으므로, 상변(上變)할까 염려스러워서 이홍술과 모의하여 기필코 때려 죽여서 그 입을 봉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비록 이천기가 이헌(李瀗)을 보낸 것으로 인하여 일이 드디어 중지되기는 했습니다만, 행흉(行凶)한 정절(情節)은 여기에 이르러 숨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김민택(金民澤)이 은(銀)을 모아가지고 모의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옥안(獄案)에 드러나 있고, 말할 때마다 치중(致仲)의 일은 반드시 치중(致仲)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이 목호룡의 공초에 낭자했는데, 치중은 김민택의 자(字)입니다. 그의 정범(情犯)을 논한다면 실로 그가 괴수(魁首)입니다. 이기지는 이미 잡아다 가두었으니, 김제겸과 김민택도 잡아다가 이기지와 똑같이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역적 조성복(趙聖復)이 올린 한 장의 소장(疏章)은 실로 연차(聯箚)의 효시(嚆矢)가 되어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천위(天位)를 동요시켰으니, 죄역(罪逆)이 가득 찼고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제 대역(大逆)을 바야흐로 토주(討誅)하는 때를 당하여 서로 체결한 정절(情節)이 저절로 드러났으니, 흉모(凶謀)를 비밀히 사주한 자도 조사하여 잡아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문하는 일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되는데, 단지 대옥(大獄)이 완결되지 않았다는 데 구애되어 성명(成命)이 아직도 지체되고 있으니, 간와(奸囮)를 깨뜨리기도 전에 여정(輿情)의 분노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죄인 조성복을 안핵(按覈)하여 정법(正法)하도록 속히 국청에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사상(李師尙)이 아뢰기를,
"다른 계사(啓辭)는 모두 윤종(允從)하셨으니,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의 일도 반드시 윤허한 뒤에야 왕법(王法)을 펼 수 있고, 옥체(獄體)를 완벽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박필몽(朴弼夢) 등도 진달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사상이 다시 사대신(四大臣)에 대한 계사(啓辭)를 진달하였는데, 박필몽이 아뢰기를,
"백망(白望) 등은 사흉(四凶)에게 견주면 그야말로 지엽(枝葉)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근본을 버려 두고 지엽을 다스리니, 왕법(王法)이 전도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국가의 끝없는 화란(禍亂)이 될 것인데, 성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십니까?"
하고, 윤회(尹會)·이경열(李景說)도 잇따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려고 하니, 박필몽이 성난 목소리로 크게 말하기를,
"오늘은 밤이 새더라도 윤허를 받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서로 번갈아 극력 간쟁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박희진(朴熙晉)이 아뢰기를,
"사흉(四凶)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만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하다."
하였다. 박필몽이 아뢰기를,
"이이명과 김창집에 대한 일은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는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이사상(李師尙) 등도 다시 똑같이 윤종(允從)하라는 내용으로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박필몽이 아뢰기를,
"이이명은 대역(大逆)인데, 잡아올 적에 단지 금오랑(金吾郞)만 보내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선전관(宣傳官)도 아울러 보내어 표신(標信)을 가지고 가서 연로(沿路)의 군사를 조발하여 호송해 오게 해야 될 것입니다."
하고, 이사상은 아뢰기를,
"외부(外部)의 의논은 모두 이역적이 잡혀 올는지 기필할 수 없다고 하니, 선전관을 함께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괄(李适)의 변란 때의 일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박필몽은 아뢰기를,
"어찌 신하로서 임금에 추대(推戴)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평소 일이 없을 적에도 찬탈(簒奪)할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마 위의 고기가 되었으니, 무슨 일인들 하지 않겠습니까? 환란을 예방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전관에게 표신(標信)을 주어 내려보낸 뒤에야 군사를 조발하여 호송해 올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파하고 나갔다. 유시(酉時) 초에 입시(入侍)했는데, 물러갈 적에는 밤이 삼경(三更)에 가까왔다.

 

4월 18일 임신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정형(正刑)에 처하라는 명을 정지시키고 이어 잡아다가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법(法)을 벗어나 곧바로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은 3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므로, 지금의 이 처분(處分)은 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가 됩니다. 잡아다가 국문한 뒤 결안 취초(結案取招)하여 전형(典刑)을 분명히 보이시면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에게 사사(賜死)를 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의 자(字)는 여성(汝成)인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은 숙종(肅宗)을 보좌하여 영의정이 되었었는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참소(讒訴)를 받고 죽었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김창집은 침착하고 굳세어 대절(大節)이 있었다. 젊어서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숙종 말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경종(景宗) 원년에 대신(大臣)들이 저사(儲嗣)를 세우려고 의논할 적에 김창집을 시민당(時敏堂)에서 불러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대비(大妃)에게 아뢰어 국본(國本)을 정할 것을 청하니, 경종(景宗)이 허락하였다. 김창집이 물러나와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임금이 다시 김창집을 불러 안탁(案卓) 위에 놓여져 있는 봉서(封書)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대비(大妃)의 휘지(徽旨)이다."
하고, 어필(御筆)로 연잉군(延礽君) 이라고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김창집이 눈물을 흘리면서 드디어 정책(定策)하고 연잉군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으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김창집이 이에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등과 차자(箚子)를 올려 왕세제(王世弟)에게 명하여 국정(國政)을 대리(代理)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조태구(趙泰耉)가 은밀히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몰래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가 대리시키게 하는 것을 극력 저지하였다. 12월에 박상검이 용사(用事)하여 김창집을 거제부(巨濟府)에 안치시켰다. 다음해 3월에는 무옥(誣獄)이 일어났는데, 김창집이 체포되어 성주(星州)에 이르자 사사(賜死)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김창집이 종자(從子)인 김신겸(金信謙)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세제(世弟)의 안위(安危)를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한이 될 뿐이다."
하고, 뜰 아래로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그리고 나서 전지(傳旨)를 들은 뒤 또 네 번 절하고 드디어 사명(死命)을 받았는데, 이때의 나이가 75세였다. 영종(英宗) 원년에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충헌(忠獻)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강가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지냈다. 금상(今上)057)   3년에 특별히 영종(英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김창집(金昌集)의 대절(大節)은 옛날의 명신(名臣)이라 할지라도 따를 수 없다. 세상에서는 모두 영종(英宗)이 저위(儲位)에 오른 것을 김창집의 공로라 하고 있다. 그러나 신은 정유년(丁酉年)058)   독대(獨對)가 있은 뒤 인심이 의구(疑懼)스러운 때를 당하여 김창집이 입대(入對)해서 동궁(東宮)에게 대리시켜야 한다는 의논을 진달하였기 때문에 김창집이 경종(景宗)을 보우(保佑)한 그 공은 더욱 크다고 여긴다. 《실록(實錄)》의 구본(舊本)에는 ‘이이명·김창집이 패몰된 뒤에 성궁(聖躬)이 편안해졌다.’ 했으니,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이이명(李頤命)의 자(字)는 양숙(養叔)인데,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장중(壯重)하고 기도(器度)가 남보다 뛰어났다. 숙종(肅宗) 6년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선발되어 임명되었다. 숙종 9년에 차자(箚子)를 올려 예(禮)를 후하게 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부를 것을 청하였고, 송시열이 도착한 뒤에는 날마다 함께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였으며, 송시열이 떠나자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다. 송시열이 사사(賜死)된 다음 이이명은 영해부(寧海府)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남해(南海)로 옮겼으며, 숙종 20년에 이이명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숙종 31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경종이 즉위하여서는 영종(英宗)을 왕세제(王世弟)로 삼기로 정책(定策)하고 이이명이 이에 삼대신(三大臣)과 함께 차자를 올려 왕세제에게 국정을 대리시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조태구(趙泰耉)가 몰래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가 극력 저지시키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한 탓으로 이이명을 남해현(南海縣)에 안치(安置)시켰고, 다음해 4월에는 이이명이 체포되어 드디어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65세였다. 이이명이 죽고 나서 경종(景宗)이 하문하기를,
"수염이 흰 상공(相公)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좌우(左右)에서 대답하기를,
"이미 졸(卒)했습니다."
하자, 경종은 슬픈 안색으로 이르기를,
"그가 일찍이 나를 사랑하였는데……."
하였으니, 이는 경종이 이이명의 살해당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종(英宗) 원년에 이이명의 관작을 추후 회복시켰고 충문(忠文)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강가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이명이 영종을 보호하여 김창집·조태채 등과 함께 영종에게 국정(國政)을 청리(聽理)하게 하자고 하였는데, 그 자신은 불행하게도 적신(賊臣)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종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53년 간 왕위에 있게 되었고, 국가가 편안하게 되었으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신하가 왕가(王家)를 보호하여 다스린다.’ 한 것이 이이명과 같은 경우와 근사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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