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을유
경상도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발생했으며 서리가 내렸다.
5월 3일 정해
김일경(金一鏡)이 서명균(徐命均)을 폄출(貶黜)시켜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삼게 하였다. 처음에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김일경(金一鏡)·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권익관(權益寬)·이사상(李師尙)·이명언(李明彦) 등이 환관 박상검(朴尙儉)의 당여(黨與)로서 왕세제(王世弟)에게 이(利)롭지 못했는데, 오직 서명균만이 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박사수(朴師洙)와 함께 그 속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완소(緩少)’라고 호칭하였다. 박상검이 권병(權柄)을 도둑질하여 태학생(太學生) 윤지술(尹志述)을 살해하자, 서명균이 상소(上疏)하여 극력 구제하였는데, 훌륭한 청의(淸議)였다. 영종(英宗) 3년에 조문명·송인명이 국정의 요직에 앉게 되자, 비로소 노소(老少)와 남북(南北)의 당인(黨人)들을 조정(調停)하여 아울러 기용했는데, 이를 ‘탕평(蕩平)’이라고 호칭하였다.
5월 6일 경인
광렬 인경 왕후(光烈仁敬王后)의 휘호(徽號)를 효장 명현(孝莊明顯)으로, 효경 인형 왕후(孝敬仁顯王后)를 의열 정목(懿烈貞穆)으로 추상(追上)하였고, 혜순 왕대비전(惠順王大妃殿)의 존호(尊號)를 자경(慈敬)이라고 하였다.
숙종(肅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할 공신(功臣)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봉조하(奉朝賀)059) 남구만(南九萬),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 좌의정 박세채(朴世采),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4인을 계하(啓下)하였다.
5월 7일 신묘
이홍술(李弘述)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이홍술은 침착하고 굳세어 기사(騎射)에 능했으므로, 젊어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숙종조(肅宗朝)에 평안도 절도사가 되어서는 명망이 무신 가운데 으뜸이었다. 숙종 42년에 훈련 대장에 승진되고 형조 판서를 지냈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금병(禁兵)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였는데, 행진(行陣)을 엄중히 하여 출입자를 기찰(譏察)하였다. 비록 수보(首輔)060) 인 김창집(金昌集)의 명령도 받지 않았으므로, 궁문(宮門)이 숙연(肅然)하여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여서는 대신(大臣)과 함께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청하여 임금이 허락하였으므로, 드디어 영종(英宗)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삼았다. 그런데 김일경(金一鏡)이 은밀히 환관(宦官)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교지(橋旨)로 선전관(宣傳官)을 발견(發遣)하여 이홍술의 병부(兵符)를 빼앗았다. 처음에 이홍술이 포도 대장을 겸직하고 있을 적에 요인(妖人) 육현(陸玄)이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체포하여 장살(杖殺)하였는데, 김일경이, ‘육현은 평소 김창집의 문하에 노닐었으므로, 그들의 은밀한 일을 알게 되자, 김창집이 그를 미워한 끝에 몰래 이홍술을 시켜 때려 죽임으로써 그 입을 봉하려 했던 것이다.’고 하면서 이홍술을 하옥(下獄)시키고 고문을 가하여 힐문했으나, 이홍술이 사기(辭氣)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옥졸(獄卒)들도 경복(警服)하였다. 서덕수(徐德修)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므로 옥리(獄吏)가 결안(結案)에다 대신 압서(押署)하였다. 또 이홍술을 협박하니, 이홍술이 꾸짖어 말하기를, ‘죽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내가 어떻게 거짓 승복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승복하지 않은 채 옥중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76세였다. 영종(英宗) 원년에 이홍술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청인(淸人)이 사신을 보내어 왕세제(王世弟)를 책봉(冊封)하였다. 임금이 세제와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청사(淸使)를 맞이하고, 인정문(仁政門)으로 돌아와서 궐위(闕位)를 금자(金字)로 써서 남쪽을 향하게 진설하여 놓고 임금이 북쪽을 향하니, 청사(淸使) 아극돈(阿克敦)과 부사(副使) 불륜(佛倫)이 칙서(勅書)를 받들어 올렸다. 칙서에 이르기를,
"황제(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성휘(姓諱)에게 유시한다. 짐(朕)은 생각건대 부자(父子)가 서로 전하는 것이 나라의 상경(常經)이지만, 형제(兄弟)가 서로 이어받는 것도 한때의 권도(權道)이다. 이에 왕(王)의 주청(奏請)을 열람하여 보건대 깊은 병에 걸려 시달린 지 오래 되어 사속(嗣續)이 어렵게 되었으므로, 장차 친아우인 연잉군(延礽君) 휘(諱)를 세제(世弟)로 삼겠다는 것을 청한 정사(情辭)가 너무도 간절하였다. 그러하여 짐이 힘써 청한 바를 윤허하고 대신(大臣)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가지고 가서 휘(諱)를 봉하여 조선국 왕세제로 삼고 채폐(綵幣) 등 물건을 하사하니, 왕은 아우 휘(諱)를 권면하여 이륜(彝倫)을 돈독(敦篤)하게 하고, 길이 충순(忠順)할 생각을 지녀 본지(本枝)의 아름다운 경사를 널리 퍼지게 하여 종사(宗社)의 평안함을 보전하게 하라. 왕은 만일 상서로운 조짐이 있어 남아(男兒)를 낳는 길몽(吉夢)을 얻거든 다시 주문(奏聞)하도록 하라. 삼가 짐의 명을 어김이 없기를 바라며 유시(諭示)하노라."
하였고,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奉天承運) 황제(皇帝)는 이르노라. 짐(朕)이 생각건대 제왕(帝王)은 먼 지방을 진정시켜 편안하게 하여 계체(繼體)061) 의 은혜를 크게 넓혀야 하고 예제(禮制)는 마땅함을 따라야 하므로, 형제 간의 경사로움을 돈독히 해야 한다고 여기노라. 번방(藩邦)을 돌보아 구복(舊服)을 면면히 이어가게 하니 본지(本枝)062) 가 길이 보전되고, 가호(嘉號)를 내려 전수(前修)를 잇게 하니 윤발(綸綍)063) 이 빛나도다. 그대 성휘(姓諱)는 조선 국왕의 아우로 귀한 자리에 있는 몸이요, 바탕이 본디 화충(和沖)하였다. 문물(文物)이 번성한 자리에서 생장(生長)했고 위의(威儀)의 가르침을 익혀 왔다. 생각건대 원곤(元昆)064) 이 아직도 사속(嗣續)을 얻기가 어려운데 동기(同氣) 사이에는 어진 이를 본받는 데에 매우 화협(和協)하였다. 이에 경건히 진청(陳請)한 것을 윤허하여 특별히 은혜로운 이장(彝章)을 내려 그대를 봉하여 조선국 왕세제(王世弟)로 삼노라. 아! 아우의 도리이면서 아들의 도리도 겸하게 되었으니, 효우(孝友)의 정성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형 섬기기를 임금 섬기듯이 하여 충근(忠勤)한 절개를 극진히 하도록 힘쓰라. 고명(誥命)을 잘 받들어 총휴(寵休)를 폐기(廢棄)하지 말기를 바라노라. 삼갈지어다."
하였다.
5월 28일 임자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청사(淸使)를 만나고 돌아와서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하였다.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였는데, 이는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했기 때문이었다.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아우에게 원량(元良)065) 을 부탁하니 경사(慶事)가 종팽(宗祊)에 넘쳐 흐르고, 소방(小邦)에 책문(冊文)을 내리니 은혜가 우내(宇內)에 충만하도다. 임금이 기쁨을 가지니, 만백성이 경사(慶事)를 같이하였도다. 생각건대 우리 청궁(靑宮)066) 은 일찍부터 깊은 덕이 드러났고, 총명스러움과 효우스러움을 타고났는데, 이를 어찌 다만 과궁(寡躬)만이 깊이 알 뿐이겠는가? 검소하고 겸손하며 삼가는 행실이 날로 소문이 났는데, 이 또한 실지로 국인(國人)이 함께 송축(頌祝)하는 바이었다. 그리고 온화(溫和) 문아(文雅)롭고 학문에 힘쓰는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천하의 일을 완성시키는 뛰어난 재주를 겸하였다. 이에 주기(主器)가 빈 것으로 인하여 길이 계체(繼體)의 중함을 부탁하였다. 지난번 사속(嗣續)이 점점 늦어져 하마터면 영고(寧考)께 깊은 걱정을 끼칠 뻔했는데, 이제 종사(宗社)가 귀의할 데가 있게 되었으니, 이는 열성조(列聖祖)께서 은밀히 도와 준 것을 힘입은 것이다. 민심(民心)이 매일 데가 있게 하기 위해 명호(名號)를 본국(本國)에서 정하기는 했지만, 봉전(封典)에는 상법(常去)이 있는 것이니 상국(上國)에 진청(陳請)하는 것을 감히 늦출 수 있겠는가? 엄연히 위의를 갖춘 황화(皇華)067) 가 갑자기 나아와서 찬란한 윤발(綸綍)을 분명히 전하고, 고명(誥命)과 칙서(勅書)를 함께 반포했는데, 낱낱이 모두 은혜의 내림이었고 장면(奬勉)도 겸하여 두터웠으니, 이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특전(特典)이었다. 욕례(縟禮)를 처음 이루자 기쁜 빛이 뜰에 가득 차 서로 경하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더욱 드러나니 온 나라 백성들이 목을 길게 빼고서 다투어 기뻐하고 있다. 태양도 그 빛이 더욱 빛나게 되니, 방본(邦本)이 따라서 공고해질 것이다. 어찌 허물을 탕척시키는 은혜를 아끼겠는가? 이에 큰 은혜를 베푸는 바이다. 아! 삼가 정일(精一)068) 의 전함을 전수(傳授)했으니, 만세토록 흡족히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에 이 교문(敎文)을 반시(頒示)하여 만백성과 함께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해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광좌(李光佐)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69면
【분류】왕실(王室) / 외교(外交)
[註 065] 원량(元良) : 세자(世子).[註 066] 청궁(靑宮) : 동궁(東宮).[註 067] 황화(皇華) : 중국 사신.[註 068] 정일(精一) : 옛날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전수한 심법(心法)은 윤집궐중(允執厥中)이었고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전수할 때는 유정유일(惟精惟一)이란 말을 덧붙였는데, 여기서 온 말임. 여기서는 정통을 이어 전수했다는 뜻임.
조태억(趙泰億)을 반송사(伴送使)로, 유중무(柳重茂)를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삼았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고, 아뢰기를,
"청사(淸使)가 돌아갈 적에 반송사를 차송(差送)해야 하는데, 정경(正卿)이 모자라는 때이니, 변통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경기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을 품계를 올려 차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7월 (0) | 2025.10.19 |
|---|---|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6월 (1)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4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3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2월 (0) | 2025.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