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을묘
정언 정수조(鄭壽朝)가 아뢰기를,
"이의현(李宜顯)·황귀하(黃龜河) 등은 모두 흉역(凶逆)들의 혈당(血黨)입니다. 이의현은 역적 이홍술(李弘述)과 서로 안팎이 되어 호응했는데, 그 여론(餘論)을 계승하고 그 여의(餘意)를 부연(敷演)하여 온갖 말로 권장하고 추켜 세웠으며, 이를 빙자하여 권당(捲堂)함으로써 성궁(聖躬)에 무욕(誣辱)을 가하고 아래로 군심(群心)을 의혹 혼란시키면서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마음이 없었으니, 그가 윤의(倫義)를 무시하여 무엄하고도 불경(不敬)한 죄를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귀하는 무식한 무리로서 남의 사주를 받아 외람되게 초기(草記)를 진달하면서 겸하여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임금을 협박함으로써 성명(成命)을 환수하게 할 계책을 세웠으니, 그의 심술(心術)을 논한다면 또한 너무도 통분합니다. 이의현은 원찬(遠竄)시키고 황귀하는 삭출(削黜)시키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3일 병진
장령 이경열(李景說)이 아뢰기를,
"신이 엊그제 국청(鞫廳)에 참여했을 적에 목호룡(睦虎龍)과 김용택(金龍澤)이 면질(面質)한 문안(文案)을 보았더니, 목호룡이 김용택에게 말하기를,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는 단지 6, 7인이 함께 모사했지만 임금을 폐위시키려는 모의는 참여하여 안 사람이 많았다. 김진상(金鎭商)·홍용조(洪龍祚)는 외영(外影)이다.’ 했고, 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부자(富者) 박창윤(朴昌潤)이 황해 수사가 되었을 적에 사람들의 말이 많으니, 이희지(李喜之)가 은밀히 대간 홍용종(洪龍祚)를 사주(使嗾)하여 박창윤이 미워하는 사람을 탄핵하게 했기 때문에 박창윤이 바야흐로 4백 석(石)의 조미(租米)를 배로 운반하여 올려 왔다고 했는데, 이것이 네가 한 말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박창윤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조미를 운반해 온 한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구문(究問)할 곳이 없어져 버렸습니다만, 박창윤이 황해 수사로 있었을 적에 옹진 현감(瓮津縣監) 신혼(申混)과는 세상이 다 아는 혐의가 있었으며, 홍용조가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과연 신혼을 탄핵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목호룡의 한 말이 실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외영’이라고 말한 것은 그 정범(情犯)을 논한다면 삼수(三手)의 흉적들과 견주어 보건대 내외(內外)와 심천(深淺)의 구별이 없지 않기는 합니다. 그러나 통탄스러운 것은 명색이 임금의 이목(耳目)이면서 실제로는 흉당의 외원(外援)이 되어 마치 그림자가 몸체를 따르듯이 그들의 뜻을 받들어 좌우로 치고 몰고 하면서 시키는 대로 함으로써 흉역배(凶逆輩)들로 하여금 먹은 마음을 더욱 멋대로 부리게 하고 성세(聲勢)를 더욱 왕성하게 만들었으니, 그 정상(情狀)은 전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역적들이 법에 의거하여 복주(伏誅)된 뒤이니, 외영이 되어 서로 호응한 무리를 차례로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진상은 이미 다른 범죄 때문에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가 있습니다만, 홍용조는 범죄한 것이 더욱 현저하여 일각(一刻)이라도 연곡(輦轂)069) 아래에서 목숨을 보전하고 있게 할 수 없습니다. 홍용조를 아주 먼 변방에 안치(安置)시키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4일 정사
서명백(徐命伯)을 영암군(靈巖郡)에, 【서덕수(徐德修)의 아비이다.】 유경유(柳慶裕)를 무장현(茂長縣)에 유배하고, 조상경(趙尙絅)을 안주목(安州牧)에, 김제겸(金濟謙)을 부령부(富寧府)에 찬적(竄謫)하였다.
6월 6일 기미
하교(下敎)하기를,
"진주 겸 주청 정사(陳奏兼奏請正使) 이건명(李健命)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匹), 노비(奴婢) 4구(口), 전(田) 15결(結)을, 부사(副使) 윤양래(尹陽來)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노비 3구(口), 전(田) 10결을, 서장관(書狀官) 유척기(兪拓基)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노비 2구(口), 전(田) 7결(結)을 상으로 하사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삼가 상전(賞典)을 보건대 이건명(李健命)에게도 똑같이 논상(論賞)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건명은 죄명(罪名)이 매우 중하여 바야흐로 안치(安置)되어 있고, 지금 대관(臺官)이 합사(合辭)로 그의 죄를 성토하면서 극률(極律)로 논죄하고 있으니, 진실로 공이 있다는 이유로 죄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그곳에서 정문(呈文)하고 수작한 말 가운데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이 있었으니, 그가 임금을 속인 부도(不道)한 죄는 당연히 징토(懲討)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에 대해 상주는 은전을 뒤섞어 시행함으로써 사방(四方) 사람들의 귀를 놀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지난번 단자(單子)를 봉입(捧入)할 적에 대략 천견(淺見)을 진달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내린 비망기(備忘記)의 내용은 감히 준례에 따라 봉승(奉承)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명에게 논상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11일 갑자
수찬 이세덕(李世德)이 상소하기를,
"근년 이래로 대악인(大惡人)이 요직에 앉아 있고 군간(群奸)들이 함께 행악(行惡) 하면서 신의 망사(亡師)인 신(臣) 윤증(尹拯) 부자(父子)의 죄상을 날조한 것이 지극히 흉악하고 공교로워 패려(悖戾)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이 처음에는 위판(位板)을 철훼(撤毁)하기를 청하였고, 끝에 가서는 추삭(追削)하기에 이르렀으며, 아울러 소장(疏章)도 금하게 하여 영원히 중외(中外)의 송변(訟辨)을 막아버리는 등 온갖 수단으로 농간을 부리면서 자신들의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아! 그 또한 참혹스럽습니다.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어려서부터 학업(學業)을 청하여 정이 깊고 의리가 돈독했던 사람으로 가슴에 큰 통분을 품고 있으니, 사리상 묵묵히 있기가 어려워 피눈물을 흘리면서 대궐을 향하여 울부짖었습니다만, 끝내 상달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가 없어 격고(擊鼓)070) 하여 옥(獄)에 수금되어 사실에 의거해서 공초(供招)를 바침으로써 한 번 신의 스승 부자(父子)의 평일의 심사(心事)와 사망한 뒤의 원왕(冤枉)에 대해 폭백(暴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었습니다만, 사람이 미천하고 식견이 천박하여 또한 성청(聖聽)을 감격시키지 못했던 탓으로 도배(島配)하라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휘지(徽旨)071) 는 사의(辭意)가 엄준하여 신자(臣子)로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점이 있었으므로, 황공스럽고 놀란 나머지 죽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싶었습니다. 3년 동안 바닷가에서 장독(瘴毒)에 시달리면서 구차하게 한가닥 목숨을 이어왔었는데, 좋은 지방 가까운 곳으로 적소(謫所)를 옮겨 주었으니, 사사로운 분의에 이미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어 구학(丘壑)에 묻히기 전에 선대왕(先大王)의 조정에서 잘못되었던 억울함이 신리(伸理)되기를 기대했었습니다만, 흐르는 세월 속에 억울한 죄명을 회복시키지 못한 채 갑자기 궁검(弓劍)을 정호(鼎湖)에 남겨두었습니다.072) 신(臣)은 진실로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였으나, 고소(告訴)할 데가 없으므로 그저 억울함만 증가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보위(寶位)에 오른 처음에 제일 먼저 석방시키는 은전을 받았는데, 신의 스승 부자(父子)는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그 단서(丹書)073) 를 씻지 못한다면 사생(師生)이 존몰(存沒) 사이에 영욕(榮辱)이 매우 다르게 되니, 차마 홀로 무슨 마음으로 의젓이 정장을 갖추고 양양하게 반열에 나아가 설 수 있겠습니까? 스승의 무함이 신리되기 전에는 신이 나아가기가 어렵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아! 신의 스승에 대한 본말(本末)은 선대왕(先大王)께서 환하게 알고 계시는 바였습니다. 단지 송시열(宋時烈)에게 미움받았으므로, 송시열을 편드는 자들이 서로 다투어 참소하고 무함하여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인년074) 경연(經筵)에서 있었던 아비와 스승의 경중에 대한 하교가 단청(丹靑)처럼 찬연히 빛났는데, 이는 실로 3백 년 동안 바꿀 수 없는 의리였으므로, 김창집(金昌集) 같은 사람도 감히 경중이 없다고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조상건(趙尙健)이 비로소 경중이 없다는 의논을 주창(主倡)하여 아비가 없는 자라는 엄중한 하교를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의(聖意)가 굳게 확정되어 동요시키기 어려웠었기 때문에 김창집의 무리가 이에 감히 극력 계교를 짜내어 오랫동안 경영(經營)하여 오면서 기필코 부사(父師)의 경중론(輕重論)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실에 관해서는 선후(先後)를 변환(變幻)시켰고, 문자(文字)에 관해서는 수미(首尾)를 절단(截斷)시켜 참독(慘毒)한 술책을 성취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송시열이 신의 스승의 아비인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에게 무욕(誣辱)을 가하기를, ‘부노(俘奴)라’느니 ‘잔인한 사람이라’느니 ‘물가에 가서 물어보라’느니 ‘윤휴(尹鑴)보다 먼저 법에 의거하여 복주(伏誅)되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그가 추악하게 비난한 것은 전혀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스승이 송시열과 절교(絶交)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것이 송시열에게는 악행(惡行)이요 이치에 어긋난 말이기 때문에 숨기고 논하지 않으면서 이에 말하기를, ‘서로 절교한 것은 묘문(墓文)을 지어준 데에 있었던 것이다.’고 하였습니다만, 묘문에는 욕설(辱說)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의서(擬書)라는 것은 오로지 학술(學術)의 수박(粹駁)을 논하고 사생(師生)의 충규(忠規)를 극진히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이야말로 신의 스승의 고심(苦心)이요 혈성(血誠)인 것입니다. 어찌 조금이나마 잘못되었거나 어긋난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송시열은 본원(本源)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이에 말하기를, ‘이는 원한을 갚으려는 것이라.’ 하고 ‘이는 절교를 고한 것이라.’고 하면서 시비(是非)를 전도시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였으며, 흉패한 말이 갈수록 더욱 이상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중외(中外)의 많은 선비들이 신의 스승을 위해 신변(伸辨)하는 소장(疏章)을 올리면, 이를 번번이 모두 막아버리고 봉입(捧入)하지 않았으니, 베를 짜던 자모(慈母)가 세 사람의 말을 듣고는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고075) 한 참소는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지난번 양쪽의 말을 모두 저지시키지 않고 함께 주달했다면,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성신(聖神)함과 총명(聰明)스러움으로 끝에 가서 내리신 처분(處分)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온 나라의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도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슬피 울면서 끝없이 원한을 품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윤선거의 강도(江都)에서 있었던 한 가지 일에076) 이르러서는 성조(聖祖)의 비지(批旨)에 진동(陳東)과 윤의(尹毅)077) 에게 견준 유시(喩示)가 참으로 만세(萬世)토록 고칠 수 없는 정론(定論)이니, 송시열이 찬술한 일성(一星)이요 지주(砥柱)라는 말과 삼학사(三學士)078) 와 함께 전하여 갈 것이라고 한 발문(跋文)은 오히려 군더더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유 의서(己酉擬書)079) 뒤라고 추후 실증하면서 노여움에 북바쳐 서로 무순되는 말을 날조하여 함부로 비난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성조(聖祖)를 무함했다는 것은 역적 신구(申球)의 소장(疏章)이 나온 처음에 선대왕(先大王)께서도 이르기를, ‘근사한 것을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곧바로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고 하교하였습니다. 귀역(鬼蜮)들의 정상(情狀)을 이렇게 남김없이 통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흉(行凶)을 교사(狡詐)한 김창집으로서도 감히 곧바로 비난을 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말하기를, ‘그의 본심(本心)은 성조(聖祖)를 무함하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마치 신구(申球)를 배척하는 것처럼 했다가는 끝에 가서 여러 번 그 말을 바꾸어 얕은 데서부터 점차 깊은 데로 들어가 결국은 역적 신구(申球)와 함께 뒤섞여 마구 공격했는데, 오히려 더 극심하게 했습니다. 아! 신(臣)의 전번 공사(供辭)에 송시열(宋時烈)의 사서(私書)에 오로지 군신(群臣)을 탓한 것과 능침(陵寢)에 전알(展謁)한 것과 해마다 온천(溫泉)에 거둥하는 것을 폐기했다는 설(說)에 대해 대략 논술했습니다만, 그때의 성교(聖敎)는 억지로 들추어내는 문자(文字)라는 것으로 신의 죄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의 서한은 진실로 현종(顯宗)을 기핍(譏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이 일을 원용(援用)한 것은 또한 죄주기를 청할 의도가 없었던 것인데, 전하(殿下)께서 이미 신을 죄주셨습니다. 지금 이 윤선거의 서한에 있는 두거(杜擧)와 강왕(康王)080) 이 같이 환란(患亂)을 겪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털끝만큼이라도 성조(聖祖)를 핍박한 데에 관계되는 것이 무엇이 있으며, 송시열의 서한에서 운운한 것과 견주어 보건대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죽은 뒤에 혹독한 무함을 당하여 선조(先朝)께서 예우하던 은권(恩眷)으로 하여금 종말(終末)이 좋지 못하게 했으니, 신은 삼가 절통하게 여깁니다. 의뢰할 것은 성명(聖明)께서 사위(嗣位)하시어 치화(治化)가 바야흐로 새롭기 때문에 뜬구름이 오래도록 끼어 있을 수가 없고, 사문(斯文)이 끝내 저상(沮喪)될 수 없다는 그것이었는데, 이제 다행하게도 하늘이 종방(宗邦)을 도와 군흉(群凶)들이 복주(伏誅)되고 선류(善類)들이 무리지어 나오고 있으므로, 조정이 청명(淸明)하여졌습니다. 따라서 신의 스승 부자(父子)의 신리(伸理)가 진실로 제일의 시급한 일인데도 반 년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성상(聖上)께서는 아직껏 처분(處分)이 있지 않고 군하(群下)들 또한 진청(陳請)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신은 더욱 답답하여 민망하고 가슴이 막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현인(賢人)·군자(君子) 가운데 선왕(先王)에게 죄를 얻고 사군(嗣君)에게도 죄를 얻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어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국조(國朝)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 등이 죄를 받은 것은 중종(中宗)기묘년081) 에 있었는데, 인종(仁宗)이 사위(嗣位)하여 즉시 신설(伸雪)시켜 주었고, 고(故) 상신(相臣) 유관(柳灌) 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은 명종(明宗)을사년082) 에 있었는데, 선조(宣祖) 초년에 즉시 소설(昭雪)시켜 주었고, 선정신 성혼(成渾)의 추탈(追奪)은 선조(宣祖)임인년083) 에 있었는데 인조(仁祖) 초년에 즉시 복관(復官)시켜 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진실로 한때의 처분(處分)을 엄중하게 내렸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군소배(群小輩)들이 속이고 참소하여 얽어낸 데에서 연유된 것이요 단연코 세 분 성조(聖祖)의 본심은 아니었으므로, 문득 사왕(嗣王)의 변리(辨理)를 받음에 있어 의심하거나 어렵게 여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신의 스승 부자(父子)가 화(禍)를 당한 것은 처음에는 송시열의 시기(猜忌)에서 연유되었고, 끝에 가서는 김창집의 무리들이 무함하여 배척한 데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송시열의 문고(文稿)는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으니 그의 연추(姸醜)와 진위(眞僞)를 성감(聖鑑) 아래에서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김창집의 무리가 또 송시열의 심법(心法)을 보호하고 정신을 전수하여 이제 그들의 죄역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왕안석(王安石)이 한 번 다시 전하여 여혜경(呂惠卿)과 채확(蔡確)이 된 정도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원우(元祐)084) 때 여러 현인(賢人)들이 여혜경과 채확에게 무함을 받았는데, 여혜경과 채확이 죄를 받은 뒤에는 모두 다시 끌어들임에 있어 아무런 구애가 없었으니, 지난 일을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들의 죄악은 여혜경·채확보다도 더하니, 신의 스승 부자(父子)가 받은 극심한 무함은 마땅히 즉시 일각도 지체없이 탕척(蕩滌)시켜 주어야 합니다. 대저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흉역(凶逆)을 모의하려면 반드시 먼저 사화(士禍)를 일으켜 선량(善良)들을 모두 물리친 뒤 일세(一世)를 말을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품고 있는 마음을 멋대로 행하는 것이 고금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김창집의 무리가 죄를 만들어 얽어서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전가시켰는데, 그뒤부터 위세(威勢)가 성립되었고, 태아(太阿)085) 를 거꾸로 쥐고 방자하게 흉역을 저질렀으니, 아! 원통합니다. 그들의 죄를 이루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거괴(巨魁)는 이미 복주(伏誅)되었습니다만, 도당(徒黨)들은 역적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논설을 그대로 지키면서 일찍 고치지 않고 신의 스승으로 하여금 길이 지하(地下)에서 있게 하고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게 될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차 다투는 시비(是非)는 흑백(黑白)을 구분하는 것과 같아서 본디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말로 번거롭게 진달하지 않더라도 고신(考信)할 수 있는 문자가 많이 있습니다. 신의 공사(供辭)와 병신년086) 이후 고(故) 현감(縣監) 조태징(趙泰徵) 등의 변장(辨章)을 위시해 경외(京外)에서 올린 여러 소장(疏章) 가운데 상달된 것과 상달되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십통이나 되니, 이제 모두 가지고 오라고 명하여 살펴보신다면, 그것의 억울함과 정직함이 절로 성감(聖鑑)의 권도(權度)에 환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로 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아첨하는 것이 아니고, 곧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의논인 것입니다. 만일 조용히 연거(燕居)하시는 여가에 성의(聖意)에 깊이 유념하신다면, 반드시 두렵고 안타깝게 여겨 특별히 탕척시키는 명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69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註 070] 격고(擊鼓) : 원통한 일을 임금에게 호소하기 위해 북을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것으로 호소(呼訴)의 뜻임.[註 071] 휘지(徽旨) : 왕세자가 대리(代理) 중에 내리는 명령.[註 072] 궁검(弓劍)을 정호(鼎湖)에 남겨두었습니다. : 임금이 승하(昇遐)한 것을 가리킴. 옛날 황제(皇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적에 궁검(弓劍)을 정호에 남기었다고 한 데서 온 말임.[註 073] 단서(丹書) : 죄상(罪狀)을 기록한 문서.[註 074] 무인년 : 1698 숙종 24년.[註 075] 베를 짜던 자모(慈母)가 세 사람의 말을 듣고는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고 : 증자(曾子)의 어머니가 베를 짤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아들 증자가 살인을 했다고 하였을 적에는 믿지 않다가 세 번째 사람이 말을 하자 결국 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났었다는 고사(故事)로,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참소하면 결국 넘어가게 된다는 뜻. 증자는 동명 이인(同名異人)이었음.[註 076] 윤선거의 강도(江都)에서 있었던 한 가지 일에 :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 호란 때 강화도(江華島)가 청(淸)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었을 적에 윤선거(尹宣擧)의 아내는 자살(自殺)하였는데 자신은 죽지 않았던 일.[註 077] 진동(陳東)과 윤의(尹毅) : 진동은 송(宋)나라 때 사람으로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었는데, 이강(李綱)의 복직(復職)을 위해 소장을 올려 간쟁하다가 구양철(歐陽澈)과 함께 처형당했음. 윤의도 송나라 때 사람으로 몽고(蒙古)의 군대가 쳐들어 갔을 적에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온 집안이 다 죽었음.[註 078]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註 079] 기유 의서(己酉擬書) : 현종(顯宗) 10년(1669)에 윤선거(尹宣擧)가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려고 지어 놓았던 서찰을 말하는데, 그 내용에 "예론(禮論)에 관계된 윤휴(尹鑴)·허목(許穆) 등과 화해하여 그들이 감복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음.[註 080] 두거(杜擧)와 강왕(康王) : 두거(杜擧)는 두궤(杜簣)가 들었던 술잔이란 뜻으로 두궤를 이름인데,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 평공(晉平公)이 대부(大夫) 지도자(知悼子)의 상(喪)을 치르기 전에 술을 마시고 음악을 즐기다가 재부(宰夫)인 두궤의 직언(直言)으로 인해 벌주(罰酒)를 자청한 일이 있음. 강왕(康王)은 송 고종(宋高宗)의 초봉(初封)했던 명칭인데, 북쪽의 금(金)나라가 점점 강성하여 맹약(盟約)을 어기고 송나라 도성 임안(臨安)을 공략할 때 고종이 건강(建康)으로 피신한 일이 있음. 여기에서 윤선거(尹宣擧)가 두궤에게 본인을, 강왕에게 효종(孝宗)을 비유하여 권시(權諰)·윤휴(尹鑴)와 서신 왕복이 있었던 내용을 말함.[註 081] 기묘년 : 1519 중종 14년.[註 082] 을사년 : 1545 명종 즉위년.[註 083] 임인년 : 1602 선조 35년.[註 084] 원우(元祐)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註 085] 태아(太阿) : 옛날의 보검(寶劍). 제왕의 권한을 말함.[註 086]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신(臣)은 진실로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였으나, 고소(告訴)할 데가 없으므로 그저 억울함만 증가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보위(寶位)에 오른 처음에 제일 먼저 석방시키는 은전을 받았는데, 신의 스승 부자(父子)는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그 단서(丹書)073) 를 씻지 못한다면 사생(師生)이 존몰(存沒) 사이에 영욕(榮辱)이 매우 다르게 되니, 차마 홀로 무슨 마음으로 의젓이 정장을 갖추고 양양하게 반열에 나아가 설 수 있겠습니까? 스승의 무함이 신리되기 전에는 신이 나아가기가 어렵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아! 신의 스승에 대한 본말(本末)은 선대왕(先大王)께서 환하게 알고 계시는 바였습니다. 단지 송시열(宋時烈)에게 미움받았으므로, 송시열을 편드는 자들이 서로 다투어 참소하고 무함하여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인년074) 경연(經筵)에서 있었던 아비와 스승의 경중에 대한 하교가 단청(丹靑)처럼 찬연히 빛났는데, 이는 실로 3백 년 동안 바꿀 수 없는 의리였으므로, 김창집(金昌集) 같은 사람도 감히 경중이 없다고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조상건(趙尙健)이 비로소 경중이 없다는 의논을 주창(主倡)하여 아비가 없는 자라는 엄중한 하교를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의(聖意)가 굳게 확정되어 동요시키기 어려웠었기 때문에 김창집의 무리가 이에 감히 극력 계교를 짜내어 오랫동안 경영(經營)하여 오면서 기필코 부사(父師)의 경중론(輕重論)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실에 관해서는 선후(先後)를 변환(變幻)시켰고, 문자(文字)에 관해서는 수미(首尾)를 절단(截斷)시켜 참독(慘毒)한 술책을 성취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런 짓도 차마 하는데,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송시열이 신의 스승의 아비인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에게 무욕(誣辱)을 가하기를, ‘부노(俘奴)라’느니 ‘잔인한 사람이라’느니 ‘물가에 가서 물어보라’느니 ‘윤휴(尹鑴)보다 먼저 법에 의거하여 복주(伏誅)되어야 한다.’느니 하면서 그가 추악하게 비난한 것은 전혀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스승이 송시열과 절교(絶交)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것이 송시열에게는 악행(惡行)이요 이치에 어긋난 말이기 때문에 숨기고 논하지 않으면서 이에 말하기를, ‘서로 절교한 것은 묘문(墓文)을 지어준 데에 있었던 것이다.’고 하였습니다만, 묘문에는 욕설(辱說)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의서(擬書)라는 것은 오로지 학술(學術)의 수박(粹駁)을 논하고 사생(師生)의 충규(忠規)를 극진히 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이야말로 신의 스승의 고심(苦心)이요 혈성(血誠)인 것입니다. 어찌 조금이나마 잘못되었거나 어긋난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송시열은 본원(本源)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이에 말하기를, ‘이는 원한을 갚으려는 것이라.’ 하고 ‘이는 절교를 고한 것이라.’고 하면서 시비(是非)를 전도시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였으며, 흉패한 말이 갈수록 더욱 이상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중외(中外)의 많은 선비들이 신의 스승을 위해 신변(伸辨)하는 소장(疏章)을 올리면, 이를 번번이 모두 막아버리고 봉입(捧入)하지 않았으니, 베를 짜던 자모(慈母)가 세 사람의 말을 듣고는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고075) 한 참소는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지난번 양쪽의 말을 모두 저지시키지 않고 함께 주달했다면,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성신(聖神)함과 총명(聰明)스러움으로 끝에 가서 내리신 처분(處分)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온 나라의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도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슬피 울면서 끝없이 원한을 품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윤선거의 강도(江都)에서 있었던 한 가지 일에076) 이르러서는 성조(聖祖)의 비지(批旨)에 진동(陳東)과 윤의(尹毅)077) 에게 견준 유시(喩示)가 참으로 만세(萬世)토록 고칠 수 없는 정론(定論)이니, 송시열이 찬술한 일성(一星)이요 지주(砥柱)라는 말과 삼학사(三學士)078) 와 함께 전하여 갈 것이라고 한 발문(跋文)은 오히려 군더더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유 의서(己酉擬書)079) 뒤라고 추후 실증하면서 노여움에 북바쳐 서로 무순되는 말을 날조하여 함부로 비난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성조(聖祖)를 무함했다는 것은 역적 신구(申球)의 소장(疏章)이 나온 처음에 선대왕(先大王)께서도 이르기를, ‘근사한 것을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곧바로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고 하교하였습니다. 귀역(鬼蜮)들의 정상(情狀)을 이렇게 남김없이 통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흉(行凶)을 교사(狡詐)한 김창집으로서도 감히 곧바로 비난을 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말하기를, ‘그의 본심(本心)은 성조(聖祖)를 무함하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마치 신구(申球)를 배척하는 것처럼 했다가는 끝에 가서 여러 번 그 말을 바꾸어 얕은 데서부터 점차 깊은 데로 들어가 결국은 역적 신구(申球)와 함께 뒤섞여 마구 공격했는데, 오히려 더 극심하게 했습니다.
아! 신(臣)의 전번 공사(供辭)에 송시열(宋時烈)의 사서(私書)에 오로지 군신(群臣)을 탓한 것과 능침(陵寢)에 전알(展謁)한 것과 해마다 온천(溫泉)에 거둥하는 것을 폐기했다는 설(說)에 대해 대략 논술했습니다만, 그때의 성교(聖敎)는 억지로 들추어내는 문자(文字)라는 것으로 신의 죄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의 서한은 진실로 현종(顯宗)을 기핍(譏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이 일을 원용(援用)한 것은 또한 죄주기를 청할 의도가 없었던 것인데, 전하(殿下)께서 이미 신을 죄주셨습니다. 지금 이 윤선거의 서한에 있는 두거(杜擧)와 강왕(康王)080) 이 같이 환란(患亂)을 겪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털끝만큼이라도 성조(聖祖)를 핍박한 데에 관계되는 것이 무엇이 있으며, 송시열의 서한에서 운운한 것과 견주어 보건대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죽은 뒤에 혹독한 무함을 당하여 선조(先朝)께서 예우하던 은권(恩眷)으로 하여금 종말(終末)이 좋지 못하게 했으니, 신은 삼가 절통하게 여깁니다.
의뢰할 것은 성명(聖明)께서 사위(嗣位)하시어 치화(治化)가 바야흐로 새롭기 때문에 뜬구름이 오래도록 끼어 있을 수가 없고, 사문(斯文)이 끝내 저상(沮喪)될 수 없다는 그것이었는데, 이제 다행하게도 하늘이 종방(宗邦)을 도와 군흉(群凶)들이 복주(伏誅)되고 선류(善類)들이 무리지어 나오고 있으므로, 조정이 청명(淸明)하여졌습니다. 따라서 신의 스승 부자(父子)의 신리(伸理)가 진실로 제일의 시급한 일인데도 반 년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성상(聖上)께서는 아직껏 처분(處分)이 있지 않고 군하(群下)들 또한 진청(陳請)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신은 더욱 답답하여 민망하고 가슴이 막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현인(賢人)·군자(君子) 가운데 선왕(先王)에게 죄를 얻고 사군(嗣君)에게도 죄를 얻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어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국조(國朝)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 등이 죄를 받은 것은 중종(中宗)기묘년081) 에 있었는데, 인종(仁宗)이 사위(嗣位)하여 즉시 신설(伸雪)시켜 주었고, 고(故) 상신(相臣) 유관(柳灌) 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은 명종(明宗)을사년082) 에 있었는데, 선조(宣祖) 초년에 즉시 소설(昭雪)시켜 주었고, 선정신 성혼(成渾)의 추탈(追奪)은 선조(宣祖)임인년083) 에 있었는데 인조(仁祖) 초년에 즉시 복관(復官)시켜 줄 것을 명하였습니다. 진실로 한때의 처분(處分)을 엄중하게 내렸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군소배(群小輩)들이 속이고 참소하여 얽어낸 데에서 연유된 것이요 단연코 세 분 성조(聖祖)의 본심은 아니었으므로, 문득 사왕(嗣王)의 변리(辨理)를 받음에 있어 의심하거나 어렵게 여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신의 스승 부자(父子)가 화(禍)를 당한 것은 처음에는 송시열의 시기(猜忌)에서 연유되었고, 끝에 가서는 김창집의 무리들이 무함하여 배척한 데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송시열의 문고(文稿)는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으니 그의 연추(姸醜)와 진위(眞僞)를 성감(聖鑑) 아래에서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김창집의 무리가 또 송시열의 심법(心法)을 보호하고 정신을 전수하여 이제 그들의 죄역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왕안석(王安石)이 한 번 다시 전하여 여혜경(呂惠卿)과 채확(蔡確)이 된 정도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원우(元祐)084) 때 여러 현인(賢人)들이 여혜경과 채확에게 무함을 받았는데, 여혜경과 채확이 죄를 받은 뒤에는 모두 다시 끌어들임에 있어 아무런 구애가 없었으니, 지난 일을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들의 죄악은 여혜경·채확보다도 더하니, 신의 스승 부자(父子)가 받은 극심한 무함은 마땅히 즉시 일각도 지체없이 탕척(蕩滌)시켜 주어야 합니다. 대저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흉역(凶逆)을 모의하려면 반드시 먼저 사화(士禍)를 일으켜 선량(善良)들을 모두 물리친 뒤 일세(一世)를 말을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품고 있는 마음을 멋대로 행하는 것이 고금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김창집의 무리가 죄를 만들어 얽어서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전가시켰는데, 그뒤부터 위세(威勢)가 성립되었고, 태아(太阿)085) 를 거꾸로 쥐고 방자하게 흉역을 저질렀으니, 아! 원통합니다. 그들의 죄를 이루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거괴(巨魁)는 이미 복주(伏誅)되었습니다만, 도당(徒黨)들은 역적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논설을 그대로 지키면서 일찍 고치지 않고 신의 스승으로 하여금 길이 지하(地下)에서 있게 하고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게 될 이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차 다투는 시비(是非)는 흑백(黑白)을 구분하는 것과 같아서 본디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말로 번거롭게 진달하지 않더라도 고신(考信)할 수 있는 문자가 많이 있습니다. 신의 공사(供辭)와 병신년086) 이후 고(故) 현감(縣監) 조태징(趙泰徵) 등의 변장(辨章)을 위시해 경외(京外)에서 올린 여러 소장(疏章) 가운데 상달된 것과 상달되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십통이나 되니, 이제 모두 가지고 오라고 명하여 살펴보신다면, 그것의 억울함과 정직함이 절로 성감(聖鑑)의 권도(權度)에 환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로 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아첨하는 것이 아니고, 곧 온 나라의 공공(公共)의 의논인 것입니다. 만일 조용히 연거(燕居)하시는 여가에 성의(聖意)에 깊이 유념하신다면, 반드시 두렵고 안타깝게 여겨 특별히 탕척시키는 명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6월 15일 무진
장령 이기성(李基聖)이 아뢰기를,
"전 통제사(統制使) 이수민(李壽民)은 성행(性行)이 거칠고 교활한데다 지벌(地閥)과 명망(名望)이 미천한 자인데,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의 문하에 이[虱]처럼 빌붙어 외람되게 곤수(閫帥)의 자리를 더럽혔으며, 그들의 지시를 받아서 심복이 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겨온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가 통영(統營)에 있을 적에 권세를 빙자하여 탐오한 짓을 더욱 방자하게 하였으므로, 당시 어사(御史)가 올린 계사(啓辭)에 군무(軍務)를 전폐하고 오직 윗사람의 비위만 맞추는 것을 일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사당(私黨)으로서 짐작하여 말감(末減)해 주었는데도 오히려 말이 이러하였으니, 그가 탐오하고 비루한 짓을 하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죄를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권흉(權凶)들이 주선하여 미봉한 탓으로 끝내 죄를 적용하는 일이 없었으니,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습니까?
아! 건단(乾斷)087) 을 한 번 내리자 국운(國運)이 다시 편안하여졌으니, 우리 신민(臣民)들이 누군들 환희하면서 서로 경하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수민(李壽民)만은 홀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흉적(凶賊)이 적소(謫所)로 달려가는 날에 원문(轅門)088) 에서 나와 영송(迎送)하려고 했습니다. 통제사가 사사로이 원문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은 법례(法例)가 그러한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만류하여 계획이 중지되기는 했습니다만, 심기(心氣)가 부합하여 역괴(逆魁)를 위해 편든 정상이 절절이 분명합니다. 두 흉적이 안치(安置)되기에 이르러서는 배로 운반하여 오는 것이 계속 잇따랐었으니, 오로지 흉적을 환양(豢養)하기만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아! 삼척(三尺)089) 은 더없이 엄한 것이고 사람들의 눈은 속이기 어려운 것인데, 그가 어떻게 감히 조금도 돌아 보아 꺼리는 마음이 없이 흉역(凶逆)을 돌보기를 이토록 방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국사(鞫事)가 끝나지 않아 인심이 위의(危疑)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흉적의 여얼(餘孽)을 하루도 연곡(輦轂) 아래에서 편안히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원찬(遠竄)시키소서.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죄인(罪人) 이정소(李廷熽)는 인품이 요악하고 처사(處事)가 비루합니다. 일찍이 영우(嶺郵)에 있을 적에는 불법한 짓을 많이 행하였는데 일기(馹騎)의 봉퇴(捧退)를 오직 뇌물의 많고 적은 데 따라 했습니다. 그의 아비 이상휴(李相休) 또한 우관(郵官)으로 임소(任所)에서 죽었는데, 부의(賻儀)라고 핑계하고서 강제로 거두어 들였으므로 두 우소(郵所)의 우졸(郵卒)들이 지금도 원망하며 욕하고 있으니, 그의 욕심이 많고 비루한 작태는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의 할아비의 분묘가 공주(公州) 땅에 있는데, 혈(穴)이 짧고 땅이 좁기 때문에 그의 제부(諸父)와 종형제(從兄弟)들이 항상 할아비 분묘에 가깝게 장사지내는 것을 경계하여 절대로 계장(繼葬)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정소는 다만 산욕(山慾)을 내어 기필코 자기 아비를 입장(入葬)시키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장일(葬日)을 굳게 숨기고 몰래 스스로 투장(偸葬)하여 할아비의 분묘에 핍근(逼近)시켰기 때문에 무덤 앞의 계체석(階砌石)을 헐어버렸고 부형(父兄)과 지친(至親)들을 모두 하관(下棺)할 때에 임하지 못하게 했으니, 어쩌면 이토록 무식(無識)하고 패륜(悖倫)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대각(臺閣)에 들어왔을 적에 있었던 놀랍고도 통분스러운 것을 말하여 보면, 그가 경주(慶州)의 적당들에게 많은 뇌물을 받고서 그때의 영장(營將)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자는 장계(狀啓)를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뒤 적당의 공초에서 인연을 통하여 대관(臺官)에게 뇌물을 주고 포사(捕使)의 파직을 도모했다는 정상을 낱낱이 실토하였는데, 그 적당의 공초가 아직도 있어서 눈이 있는 사람은 모두 보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루한 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언관(言官)이 되어 외람되게 적당의 뇌물을 받고 도적을 치죄(治罪)하는 관원을 탄핵하여 제거하려 하면서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청조(淸朝)를 수치스럽게 하고 대각(臺閣)을 욕되게 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불법(不法)을 자행한 사람은 문외 출송시키는 가벼운 처벌에 그칠 수 없으니, 원찬(遠竄)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19일 임신
사간 정해(鄭楷)가 아뢰기를,
"국본(國本)을 미리 세우는 것은 종묘(宗廟)를 중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따라서 사신(使臣)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은 사리에 의거해서 진주(陳奏)하여 기어이 준허(準許)를 받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자문(咨文)을 찬술하여 들여올 적에 감히 위약(痿弱)하다는 두 글자로써 방자하게 성궁(聖躬)에 가하였는가 하면, 그들과 문답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다시 위질(痿疾)이라는 말로 진술(陳述)했습니다. 그리고 좌우(左右)의 잉첩(媵妾) 등이라는 말을 날조하여 꾸며서 임금을 마구 무함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먹을 수 있는 것이며 입에서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 형으로서 아우에게 주는 것은 명분도 바르고 말도 순한데 진청(陳請)할 즈음에 어찌 할말이 없을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필코 환온(桓溫)090) 이 제혁(帝亦)에게 ‘위(痿)’자를 주자(奏咨)에 썼고 문답할 적에도 거듭 말하였으며, 그러고도 부족해서 잉어(媵御) 등의 말을 부연해서 그 거짓을 실증하기에 이르렀으니, 아! 너무도 통분합니다. 설사 우리 성상(聖上)께서 과연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은 질환이 참으로 있다 하더라도 신자의 도리에 있어 진실로 외인(外人)에게 말하여 누설시키는 것은 부당한 짓인데, 더구나 없는 것을 있다고 날조하여 우리 임금을 무함하는 말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가서 드러내면서 돌아보고 꺼리는 마음이 없었으니,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임금을 무시한 부도(不道)한 언행으로 국가를 욕보인 무례한 짓을 한 죄를 엄중히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돌아온 주청 부사(奏請副使) 윤양래(尹陽來)와 서장관(書狀官) 유척기(兪拓基)를 아주 먼 변방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20일 계유
윤양래(尹陽來)를 갑산부(甲山府)에, 유척기(兪拓基)를 동래부(東萊府)에 안치(安置)시켰다.
6월 23일 병자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 유정장(柳貞章)이 자살(自殺)하였다.
6월 24일 정축
집의 이제(李濟)가 아뢰기를,
"위행(僞行)은 진실을 어지럽히고 허명(虛名)은 사실을 현란시키는 것인데, 이는 소인 가운데서도 더욱 나쁜 자입니다. 문외 출송한 죄인 이희조(李喜朝)는 변론에 능한 작은 지혜를 믿고 장구(章句)를 짓는 얄팍한 기예(技藝)로 꾸몄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 유자(儒者)로 지목하기도 했고 그 자신도 고상한 선비로 자처하였습니다만, 성품이 본디 간사하고 요사스러워 무릇 어진이를 해치고 올바른 이를 해치는 데 있어 은밀히 주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차자(箚子)를 올리면서 세세하게 기록하기에 이르렀는데, 여기에서 송시열(宋時烈)의 정신을 잘 전해 받아 잘못을 비호한 기교가 다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위로는 선왕(先王)의 총명(聰明)을 속이고 아래로는 역전 신구(申球)의 창도자(倡導者)가 되어 결국 사화(士禍)가 만연하여 선류(善類)들이 자취를 숨김으로써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뻔하였으니, 이를 말한다면 가슴이 아픕니다. 작년에 권흉(權凶)들이 국권(國權)을 장악하고 군부(君父)를 협박하면서 정청(庭請)을 곧바로 철회하였으므로, 천위(天位)가 장차 무너지려 했으니, 모든 병이(秉彝)091) 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면, 누군들 새매가 새를 박축(迫逐)하듯 하는 그 의도에 대해 용기를 내어 분기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희조는 대각(臺閣)의 장관(長官)으로 있으면서 끝내 강상(綱常)의 분의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으며,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두 역적과 함께 은밀히 정지(情志)를 맺어 성세(聲勢)를 몰래 연결시키고 있었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요 국가(國家)의 요인(妖人)인 것입니다. 아주 먼 변방에 원찬(遠竄)시키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26일 기묘
이의현(李宜顯)을 운산군(雲山郡)에 찬배(竄配)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합계(合啓)를 가지고 교대로 극력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니, 해가 이미 정오(正午)가 지났다. 또 묵묵히 있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으로 진계(陳戒)하면서 잇따라 빨리 하교(下敎)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근래에 옥당(玉堂)이 무례하다. 임금을 벙어리로 아는가? 말없이 묵묵히 있는 것이 지나치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입에서 낼 수 있단 말인가? 모두 파직(罷職)시키라."
하고, 또 노여움이 극심하여 빠른 말로 이르기를,
"말없이 묵묵히 있다고?"
하고, 또 하교(下敎)하기를,
"파직은 가벼운 처벌이므로 징계시킬 수가 없다. 모두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라."
하고, 또 손가락을 꼽으면서 이르기를,
"김시혁(金始㷜)·여선장(呂善長)·유필원(柳弼垣)·이현장(李顯章) 등 네명은 모두 잡아다가 추문하고 이명의(李明誼)는 버려두라."
하였다.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 나간 후에 지평 이거원(李巨源)이 나아가 엎드려 간쟁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평 이거원의 한 짓은 놀랍기 그지없다. 우선 먼저 체차시키라."
하였다. 집의(執義) 이제(李濟)와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이 또 간쟁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입시(入侍)했던 대관(臺官)을 일체 모두 체차시키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남취명(南就明)이 탑전(榻前)에서 복역(覆逆)092) 하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복역하려면 밖에 나가서 하라."
하였다. 이날 천둥 같은 위엄이 갑자기 나타나 소리가 전우(殿宇)를 진동시켰으므로 군신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여 부들부들 떨면서 물러갔다.
6월 29일 임오
홍봉조(洪鳳祚)를 온성부(穩城府)에 안치(安置)시키고, 이광좌(李光佐)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6월 30일 계미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지금 이 녹훈(錄勳)은 중종조(中宗朝) 때 노영준(盧永俊)의 예에 의거하되, 목호룡(睦虎龍)만 봉군(封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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