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을유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난 25일 삼사(三司)에서 입시하였을 적에 사간 정해(鄭楷), 헌납 이진순(李眞淳), 정언 구명규(具命奎)·이광보(李匡輔), 교리 이명의(李明誼), 수찬 김시혁(金始㷜)이 아뢴 바로 인하여 고(故)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謙), 집의 한태동(韓泰東)이 김진상(金鎭商)에게 무함받은 것에 대해 특별히 명지(明旨)를 내려 소설(昭雪)시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조두(俎豆)093) 를 철향(撤享)했던 조지겸에 대해 속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도로 전의 서원(書院)에다 배향하게 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특별히 명지를 내린 한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신의 본조(本曹)에서 참여하여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닙니다. 거조(擧絛)를 반시(頒示)하는 이외에는 역시 다시 명지를 내려 소설시키는 일을 할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원(書院)에다 도로 배향하는 일에 대해서는 고(故)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서원이 광주(廣州)에 있는데, 임진년094) 에 고(故) 문간공(文簡公) 조복양(趙復陽)과 부제학 조지겸을 배향했었습니다. 조복양의 덕망(德望)과 경술(經術)은 사류(士流)에 으뜸이었고, 조지겸의 청풍(淸風)과 준절(峻節)은 퇴속(頹俗)의 긍식(矜式)이었습니다. 연신(筵臣)이 진달한 바에 의하면 계사년095) 에 금령(禁令)이 내린 뒤 드디어 철향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사림(士林)이 통분스럽게 여기고 여론(輿論)이 분개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 성상께서 청의(淸議)를 부호하며 억울한 무함을 소설해 주는 성대한 뜻에 대해 삼가 흠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본도(本道)에 분부하여 그 전대로 추배(追配)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황욱(黃昱)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정도(正道)가 실추되어 떨치지 못하고 사기(士氣)가 울결되어 펴지지 못하기 때문에 군자는 의지할 데가 없어 선(善)을 하는 데 게을러지고 소인(小人)은 기탄하는 바가 없어 악(惡)을 하는 데 용감하여졌습니다. 이에 윤기(倫紀)를 무너뜨리고 도리에 어긋난 말이 그 사이에 멋대로 행하여져 아무도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을 순치(馴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주를 모살(謀殺)하려는 변고가 세상에서 거실 대족(巨室大族)이라고 일컫는 자들에게서 나오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모두 지난날 권병(權柄)을 주장하고 있으면서 올바른 이를 해치고 간사한 자에게 빌붙는 의논을 팔을 걷어붙이고 기꺼이 동조했던 자들이었으니,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생긴 일이겠습니까? 대저 사람이 사람으로서 행세하게 되는 이유는 안으로는 부자(父子)가 있고 밖으로는 군신(君臣)이 있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 윤기(倫紀)가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부자 사이의 천륜(天倫)이 이미 앞에서 무너져 버린다면 군신의 대의를 어떻게 뒤에서 보존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로부터 난신 적자들이 장차 흉역(凶逆)을 도모하려 할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사화(士禍)를 빚어내어 선류(善類)들을 일망타진하고 일세를 말을 못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야 비로소 감히 흉악한 마음을 멋대로 드러내어 농간을 부리게 되는 것인데, 도(道)를 지닌 현인 군자가 불행하게도 이런 시기를 만나게 되면, 또한 반드시 먼저 참벌(斬伐)과 소삭(銷鑠)의 화(禍)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부자(父子)의 두 세대가 현인(賢人)이면서 당시 흉당(凶黨)들에게 몹시 미움받아서 마침내 추탈(追奪)되기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문(斯文)에 있어 하나의 액운(厄運)에 관계되는 것인데 흉도(凶徒)들이 온갖 계책으로 근거없는 사실을 꾸며내어 암암리에 배포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 내력이 오래 된 것입니다. 이제 다행히 하늘이 종팽(宗祊)을 도와 주시어 대악(大惡)·거특(巨慝)이 서로 잇따라 패몰되고, 선류(善類)와 준수한 많은 선비들이 일시에 무리지어 나아와서 사특한 기운을 깨끗이 청소하였으므로, 조정이 청명(淸明)하여졌습니다. 따라서 군신(君臣)의 의리가 실추되려 하다가 다시 밝아졌으니, 부자(父子)의 윤기(倫紀)도 이미 회색(晦塞)되었지만, 다시 밝혀야 됩니다. 그런데도 아직 진청(陳請)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삼가 의혹스러워 가슴이 막히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윤선거 부자는 대대로 산번(山樊)을 지키면서 도를 즐기는 것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읽은 것은 주자(朱子)의 글이요 익힌 것은 주자(朱子)의 도였으므로, 순수한 마음과 독실한 학술이 뛰어나서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덕을 함양한 지 오래 되자 지행(知行)을 겸비하게 되었으며, 일심(一心)으로 전수(傳授)한 것은 실로 오현(五賢)096) 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은 것으로 그가 있는 곳은 신처럼 교화된다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사모하여 조정에서도 이의(異議)가 없고 사림에서도 이모(異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송시열(宋時烈)만이 일세를 현란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다그쳐 몰아다가는 대의(大義)라는 이름을 거짓 꾸며서 윤선거의 주장이 그 실제인 것임을 시기하고 주자(朱子)의 외적인 부분을 빌어다가 윤선거의 학문을 힘썼음이 내적인 것임을 질투하였습니다. 더구나 흉역 김창집(金昌集)이 기아(機牙)를 널리 배포하여 놓고 사람들의 소장(疏章)을 엄금하는 한편 윤선거의 문집(文集)을 불태우고는 또 서원(書院)을 철거시켰습니다. 이렇게 낭패당하여 태양을 보지 못한 채 갑자기 선왕(先王)께서 승하(升遐)하시었으니, 신 등은 참으로 무궁한 통한의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명(离明)097) 께서 이어 사위(嗣位)하시어 문교(文敎)가 바야흐로 새로우니, 사문이 끝내 저상(沮喪)될 이치가 없고 오도(吾道)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이치가 없으므로, 선조(先朝)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은전(恩典)을 전하에게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옛날 귀산(龜山)양시(陽時)098) 가 한 통의 소장을 올려 채경(蔡京)의 죄를 통렬히 논변(論辨)하면서 왕안석(王安石)을 출향(黜享)시키고 정호(程顥)의 도(道)를 높일 것을 청하니, 시론(時論)이 훌륭하게 여겼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흉역은 채경보다 더하고 송시열의 평일 와장(窩藏)은 지금 이미 타파되어 남김이 없으니, 생각건대 오늘날 당연히 성급하게 서둘러 숭장(崇奬)하여 이것으로 선비들의 추향을 바로잡고 세도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도리어 윤증의 부자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명지(明旨)를 내려 고(故) 유신(儒臣) 윤증 부자 두 세대의 억울함을 특별히 소설(昭雪)시키는 은전을 내려 추탈한 관작을 일체 추복(追復)시키시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도 이어 즉시 거행하시며, 이미 소각한 문집도 즉시 개간(改刊)하게 하시고, 선정에 대한 금법(禁法)도 또한 환수(還收)하소서. 그리고 지난번 흉역들이 교대로 소장을 올려 옳은 이를 해치고 어진 이를 해친 죄를 일체 모두 엄중히 다스리어 성덕(聖德)을 더욱 밝게 하시면 사문에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소장(疏章)을 봉입(捧入)하자 유중(留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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