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경신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증시(贈諡)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가만히 생각건대 두 현신(賢臣)의 도덕과 학문, 행의(行誼)와 지절(志節)은 실로 누대의 조정에서 존경하고 예우(禮遇)했던 바이고, 일대(一代)에서 우러러 받들었던 바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얽어 무함하는 말이 오로지 흉적 신구(申球)와 역적 김창집(金昌集)의 무리가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기 위한 은밀한 계책에서 나오자, 경외(京外)의 장보(章甫)들이 전후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였으니, 이는 모두 온 나라의 공변된 여론(輿論)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개진(開陳)하여 변석(辨釋)한 것은 너무도 명백하고 통쾌하여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므로, 신 등은 다시 조목별로 열거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수십 년 동안 부사(父師)의 경중(輕重)에 대한 하교를 시종 견지하고 있으면서 좌우의 미혹시키는 자들에게 동요되지 않으셨으니, 지극하고도 극진합니다. 재신(宰臣)의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도 ‘유소(儒疏)에서 말한 것과 근사한 것을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곧바로 무훼(誣毁)하는 죄목(罪目)에 몰아넣을 수 있겠느냐?’고 하교하신 것이 해와 별처럼 환히 게시(揭示)되어 있으니, 끝에 가서 내린 처분은 우리 선왕(先王)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연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역적 김창집도 두 현신(賢臣)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감히 무훼(誣毁)의 지척(指斥)을 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얕은 데서 점차 깊은 데로 들어가 기필코 올바른 사람을 해치기 위한 계책을 이루고자 세 번 전하는 말을 하여 자모(慈母)가 베짜던 북을 던지는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일월(日月) 같으신 총명이 하루아침에 돌이켜 깨닫게 될까 두려워하여 송변(訟辯)하는 장소(章疏)를 올리지 못하도록 방금(邦禁)을 설치하여 일체 퇴각시켰으므로, 중외(中外)의 억울함이 오래갈수록 더욱 깊고 간절해지게 되었습니다.
아! 한 번 사문이 윤상(淪喪)되면서부터 인심과 세도가 회맹(晦盲)되고 고색(錮塞)되어 흉역이 엄청난 역모를 저지르는 상황을 순치(馴致)시켜 종사가 거의 망할 뻔하였으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로 말하더라도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모두 간신들의 무함을 받아서 중종(中宗)·선조(宣祖) 두 세상에서 후명(後命)099) 의 화(禍)와 추탈(追奪)의 원통함을 면하지 못했는데, 효릉(孝陵)100) 과 장릉(長陵)101) 께서 설원(雪冤)시켜 주고 복관시켜 줌에 있어 일찍이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다는 것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쾌히 공의(公議)를 따랐었습니다.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은 양성(兩聖)께서 이미 시행하신 의전(懿典)에 있습니다. 송(宋)나라의 신하인 사마광(司馬光)이 논한 바, ‘왕안석(王安石)·여혜경(呂惠卿)이 건의한 선제(先帝)의 본의가 아닌 것은 불에 타는 것을 구하듯 물에 빠진 것을 건지듯이 고쳐야 된다.’고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을 위하여 준비한 말인 것입니다. 한결같이 경외의 유신(儒臣) 윤선거·윤증에게 모두 관작을 회복시키고 증시(贈諡)하고 서원의 사액(賜額)을 되돌려 주고 문집의 간행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해조(該曹)와 해도(該道)에 분부하여 즉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傳敎)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선대왕(先大王)의 엄중한 병신년102) 의 처분은 사문을 위한 일일 뿐만 아니라, 실은 세도의 오륭(汚隆)에 관계가 되는 것인데, 흉당(凶黨)들이 장황하게 신변(伸辨)하여 결국 뒤집어 고치고야 말았으니, 너무도 기탄없는 짓이라고 할 수 있다.
8월 10일 계해
임금이 직접 대가(大駕)를 타고 거둥하여 효령전(孝寧殿)에서 제사지내고, 드디어 숙종 대왕(肅宗大王)·인경 왕후(仁敬王后)·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신주(神主)를 봉안(奉安)하였다. 연(輦)을 타고 태묘(太廟)로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조복(朝服)을 입고 수행하였다. 이날 저녁 임금이 재궁(齋宮)에서 유숙(留宿)하였다.
8월 11일 갑자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부제(祔祭)를 지내고 인정전(仁政殿)으로 돌아오니, 왕세제(王世弟)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한 다음 반사(頒赦)하였다.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왕은 이르노라. 영원히 뵐 수 없으니 선장(仙仗)103) 이 길이 동위(彤圍)104) 를 떠났고, 길일(吉日)을 잘 가리니 신감(神龕)105) 이 이에 청묘(淸廟)106) 로 올라갔다. 삼전(三殿)의 성대한 의식을 일제히 거행하게 되었으므로, 팔도에 윤음(綸音)을 선포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50년 동안 크고도 성대한 공렬(功烈)을 이룩하셨고, 후사(後嗣)에게도 진실로 천백세토록 편안하게 할 홍모(弘謀)를 전하여 주셨다. 보단(報壇)107) 에 아름답고, 향기로운 제물을 올리니 우리의 의기(義氣)가 배로 증가되었고, 장릉(莊陵)108) 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니 사람들의 충간(忠肝)을 격동시켰다. 일찍이 일식(日蝕)·월식(月蝕)처럼 잘못을 고침에 있어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누가 다시 천지(天地) 같은 그 도량에 유감을 품을 수 있겠는가? 침질(寢疾)이 여러 해를 끌었는데도 백성들을 위한 걱정은 갈수록 더하였고, 예라(禮羅)를 다시 베푸니, 정성은 암혈(巖穴)의 선비에게 쇠폐(衰廢)하지 않았다. 성사(盛事)는 서루(西樓)의 발자취를 답습하니 악해(嶽海)의 축하가 바야흐로 깊었고, 유제(遺制)는 장릉(長陵)의 오른쪽을 비워둔 장법(葬法)을 본받았으니 영령(英靈)의 그림자를 비궁(閟宮)에 모셨다. 어느덧 상기(喪期)가 지나 저장(苴杖)109) 을 버리게 되었고 갑자기 궤연(几筵)을 태묘(太廟)로 옮기게 되었다. 상률(商律)110) 이 가을을 알리니 하늘의 월성(月星)처럼 빠른 세월이요, 은례(殷禮)111) 에 의지하여 제사하니 묘중(廟中)의 분향(焚香) 연기가 처연하다. 삼가 성모(聖母)의 신주를 함께 받드니 소자(小子)의 추모하는 감회가 깊어지도다. 천수(天壽)를 길게 누리지 못하였으니 복리(福履)가 면면하지 못하였음이 한스럽고, 옥도(玉度)112) 가 한없이 곧으니 성덕(聖德)이 광복(光復)113) 의 경사에서 드러났다. 금여(金輿)와 옥련(玉輦)은 치도(馳道)의 동서(東西)에서 빛났고 작선(雀扇)과 우모(羽旄)는 신악(神幄)의 앞뒤에 나누어 호위하였다. 의장(儀章)이 엄숙하고도 위엄이 있으니 변두(籩豆)가 정갈하고도 아름다웠다. 이에 금년 8월 11일 갑자일(甲子日)에 삼가 황고(皇考) 숙종 현의 광륜 예성 영렬 장문 헌무 경명 원효 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과 황비(皇妣) 광렬 효장 명현 인경 왕후(光烈孝莊明顯仁敬王后), 황비(皇妣) 효경 의열 정목 인현 왕후(孝敬懿烈貞穆仁顯王后)를 태묘(太廟)에 승부(升祔)하였다. 승배(升配)하는 이전(彝典)이 이미 성취되니 온 세상에 가득한 큰 경사(慶事)를 보게 되었다. 몸소 제물을 진설하여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갱장(羹墻)114) 에 붙이고, 귀에 악기(樂器) 소리 가득하여 즐겁지 않음을 종고(鍾鼓)에서 듣게 되었다. 아득한 황천길이 끝이 없으니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을 훔치고, 곤면(袞冕)이 어찌 편안하랴 생각하니, 가슴속에 개연(慨然)한 마음이 가중된다.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에 흠결이 없으니, 제사지내는 일이 잘 갖추어졌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교계(敎戒)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옥술잔을 받들어 올림에 경건한 마음이고, 성대하게 마치 신(神)이 위에 있는 듯이 느껴지니 옥궤(玉几)에 기대어 임종(臨終)의 명(命)을 도양(導揚)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깊은 정성으로 선왕(先王)을 받드는 마음을 미루어 큰 은전(恩典)을 널리 천하에 베푸는 바이다. 이달 11일 새벽 이전부터 ……하도록 하라. 아! 온 나라에 효도가 흥기되지 않는 데가 없는 것은 선조(先朝)께서 감싸 어루만져 준 깊은 은혜를 생각한 것이고, 만백성들은 똑같이 천성(天性)을 타고났을 터이니, 오늘날 함육(涵育)한 지극한 뜻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죄다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 김일경(金一鏡)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2면
【분류】왕실(王室)
[註 103] 선장(仙仗) : 임금의 의장(儀仗).[註 104] 동위(彤圍) : 대궐(大闕).[註 105] 신감(神龕) : 신주(神主).[註 106] 청묘(淸廟) : 종묘(宗廟).[註 107] 보단(報壇) : 명(明)나라의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祠堂). 대보단(大報壇).[註 108] 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註 109] 저장(苴杖) : 상장(喪杖).[註 110] 상률(商律) : 가을을 나타내는 음률.[註 111] 은례(殷禮) : 성대한 제례(祭禮).[註 112] 옥도(玉度) : 왕후의 법도.[註 113] 광복(光復) : 복위(復位).[註 114] 갱장(羹墻) : 늘 사모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 옛날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의 상(喪)을 당했을 적에 3년 동안 담장을 바라보거나 국을 먹을 때에 늘 요임금의 모습이 거기에 나타나 보였다고 함.
8월 13일 병인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명언(李明彦)이 이건명(李健命)을 정형(正刑)해야 한다는 계사(啓辭)를 읽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조태채(趙泰采)를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다스리라는 계사(啓辭)를 읽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 판서 이광좌(李光佐)가 고집하여 간쟁(諫爭)했는데, 그것이 끝나기 전에 임금이 갑자기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사관 송인명(宋寅明)은 어전(御前)의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너무 자주 우러러 보고 있으니, 매우 무엄하다. 우선 파직(罷職)시키라."
하니, 송인명이 창황하게 달려서 나갔다. 이때 경종(景宗)은 기(氣)가 바야흐로 치솟아 올라 병이 다시 발생하였기 때문에 성난 목소리로 송인명을 파직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송인명은 동궁(東宮)에서 시강(侍講)하고 있으면서 구설(口舌)로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기 때문에 영종(英宗) 3년에 유악(帷幄)에 있으면서 조정책(調停策)을 도와 이룩하여 총애가 군신(群臣)의 으뜸이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송인명을 당세(當世)의 능신(能臣)이라고 하였다.
8월 15일 무진
원임(原任) 이조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이만성의 자(字)는 사추(士秋)이고 우봉인(牛峯人)이다. 아버지는 이숙(李䎘)인데, 숙종(肅宗) 때 우의정을 지냈고,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다. 이만성은 큰 키에 아름다운 수염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신채(神彩)가 훤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운을 믿고 우뚝한 자세로 남에게 구속받기를 싫어하였는데, 커서는 의지(意志)를 굽히고 글을 읽었다. 인현 왕비(仁顯王妃) 민씨(閔氏)가 폐위(廢位)되자, 이만성은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있었다. 처음 참봉에 보임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왕비(王妃)가 복위(復位)된 뒤 3년이 지나 갑과(甲科)로 급제하였고, 사헌부(司憲府)로 들어가 지평이 되었다. 처음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고시(考試)를 주관하여 그의 아들 유봉휘(柳鳳輝)를 급제시키자, 이만성이 상소하여 그 정상을 아뢰었다. 이 때문에 유봉휘가 마침내 삭과(削科)되고 말았다. 이조에 선발되어 들어가서는 죄랑이 되었고, 이어 응교로 승진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해구(海寇)가 나타났다는 경보(警報)가 있었으므로 이만성에게 호서 지방(湖西地方)을 순무(巡撫)하면서 항금진(杭金鎭)과 안흥진(安興鎭)을 설치하고 상당성(上黨城)115) 을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유(李濡) 등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니, 이만성이 유창(劉敞)116) 의 말을 인용(引用)하여 임금에게 존호를 받지 말기를 청하고는 인하여 백관(百官)의 정청(庭請)에 나가지 않았다.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본생(本生) 대부인(大夫人)의 상(喪)을 당하였으며, 복제(服制)를 마치고 나서 병조 판서를 역임했다. 숙종(肅宗)의 병세(病勢)가 위독(危篤)할 때 이만성이 금중(禁中)에서 숙직(宿直)하고 있었는데, 이때를 당하여 위의(危疑)한 단서가 수없이 많았고 유언 비어(流言蜚語)가 번갈아 일어났으나, 이만성이 의연히 대처하였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아침저녁으로 뜰에 나아가 여러 관원들이 곡(哭)할 적마다 유독 이만성은 단정히 앉아 하루종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 이삼(李森)이 이만성을 만나보고 호서 절도사(湖西節度使)가 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만성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해 겨울 적신 김일경(金一鏡)이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동궁(東宮)을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모의를 하고 급서(急書)를 올렸으므로 조정이 텅 비게 되었고, 이만성도 부안현(扶安縣)에 찬배(竄配)되었는데, 명령을 듣고 귀양길에 올라서도 낌새를 나타내는 기색(氣色)이 없었다. 부안현에 이르러서는 날마다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화기(禍機)가 점차 자신에게 핍박되어 와도 오히려 책을 걷어치우지 않고 말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다. 다음해에 옥사(獄事)가 일어나니 이만성이 이삼을 호서 절도사로 내어보낸 데에 좌죄(坐罪)되어 드디어 체포되었다. 이만성은 떠나갈 적에 임하여 신기(神氣)가 태연 자약하였고, 한 마디도 자손(子孫)을 위한 계책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가족(家族)이 이만성과 결별(訣別)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색(正色)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취대(就對)하게 되자 김일경(金一鏡)도 말하기를, ‘물을 것이 없다.’ 하였다. 이만성이 옥에 갇혀 있다가 죽었는데, 나이 64세였다. 영종(英宗) 원년에 복관(復官)시키라고 명하고, 또 하교(下敎)하기를, ‘여러 신하들 가운데 오직 이만성(李晩成)이 가장 원통하였으니, 그의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8월 19일 임신
최석항(崔錫恒)이 입대(入對)하여 이건명(李健命)을 죽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의 자(字)는 중강(仲剛)으로,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아들이다. 숙종 12년에 급제하였고 43년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군간(群奸)들이 곁에서 엿보면서 유언 비어를 마구 퍼뜨렸지만, 이건명이 김창집과 함께 국정(國政)을 다스리면서 군간들의 불온한 마음을 꺾어버렸으므로, 우뚝이 강물 가운데 버티고 섰는 지주(砥柱)와도 같았다. 그때 마침 저사(儲嗣)를 세우는 데 대한 건의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건명에게 묻기를, ‘아들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건명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아드님이 아직도 있는데, 만일 이의(異議)가 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 가겠다.’ 하였다. 그리고 나서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니, 대신(大臣)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건명이 군료(群僚)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전중(殿中)에서 입대하게 되었는데, 범촉공(范蜀公)117) 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극력 진달하기를, ‘어찌 말이 간신(諫臣)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망설일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영종(英宗)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우도록 정책(定策)하였다. 이건명이 이에 삼대신(三大臣)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왕세제에게 국정을 대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태구(趙泰耉)가 선인문(宣仁門)으로 몰래 들어가 입대하여 저지하였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다. 처음 김창집이 주청사(奏請使)가 되었을 적에 이건명이 말하기를, ‘원보(元輔)118) 가 사명(使命)을 받드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이에 차자를 올려 대신 가게 해줄 것을 청하니, 경종(景宗)이 허락하였다. 3월에 이건명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적신(賊臣)이 이에 목호룡(睦虎龍)을 시켜 변서(變書)를 올리게 했고, 4월에는 이건명이 의주(義州)에서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로 안치(安置)되었다. 성산(城山)을 지날 적에 빈객(賓客)과 고구(故舊)들이 찾아와 보고 서로 눈물을 흘렸으나, 이건명은 언소(言笑)가 태연자약하였으며, 다만 종국(宗國)에 대한 걱정만 간절히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기꺼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세제(世弟)만 편안하다면 다시 무슨 한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소(遺疏)를 초(草)하기를,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대비(大妃)를 받들고 아래로 세제(世弟)를 보호하여 원대한 왕업(王業)을 공고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드디어 살해(殺害)당하니, 그때 나이 60세였다. 덕산현(德山縣) 나연(蘿淵) 위에다 장사지냈는데, 밤마다 흰 운기(雲氣)가 분묘에서 나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영종(英宗) 원년에 이건명의 관작(官爵)을 충민(忠愍)이라고 했으며, 강가에 묘우(廟宇)를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네 충신이 연차(聯箚)를 올려 대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에게 저지당하였고, 세 충신은 사사(賜死)되었는데, 유독 이건명만이 화(禍)를 당한 것이 제일 참혹했던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처음 조정에서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을 적에 이건명이 말하기를, ‘왕제(王弟)를 세우지 않으면 나는 머리를 풀고 산으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경종(景宗)이 왕세제(王世弟)를 세우기에 미쳐 이건명을 파견하여 고명(誥命)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예부(禮部)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건명이 이에 청(淸)의 각신(閣臣) 마제(馬齊)에게 가서 매우 간절하게 봉하여 줄 것을 청하니, 마제가 내용을 갖추어 주문(奏聞)하였으므로 드디어 고명을 허락하게 되었다. 최석항이 이때문에 크게 분노하여 마치 개인의 원수를 갚듯이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건명이 화를 당한 것이 가장 참혹했던 이유인 것이니, 어찌 딱한 일이 아니겠는가?
8월 29일 임오
조태억(趙泰億)을 대제학으로, 이광좌(李光佐)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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