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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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계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대비전(大妃殿)에 존호(尊號)를 올리니, 백관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삼성(三聖)을 받들어 태묘(太廟)에 승향(升享)하니 남은 슬픔이 간절한데, 두 글자 존호를 올려 높이는 것은 구전(舊典)을 따른 것이다. 윤음(綸音)을 팔도의 백성들에게 선시(宣示)하고 산 같은 수(壽)를 자애로운 하늘에 축원하노라. 삼가 생각건대 태모(太母)의 온화하고 인자하심은 우리 선왕(先王)을 신극(宸極)119)  에 배필하셨다. 궤범(軌範)은 이후(二后)120)  에 따라 국풍(國風)121)  을 칭송하면서 그와 같이 아름답게 하였고, 은의(恩義)가 육궁(六宮)122)  에 미치도록 가도(家道)를 굳게 지켜 진실로 바르게 하였다. 20년 동안 교화(敎化)를 도우니 음덕(陰德)이 나라 안에 가득하고, 3년 동안 복상(服喪)하니 지극한 행실이 규달(閨闥)에 드러났도다. 중월(中月)의 예제(禮制)를 겨우 마치자마자 동조(東朝)의 예(禮)로 높이게 되었다. 옥간(玉簡)과 금장(金章)이 어떻게 그 성덕(盛德)의 만분의 일이나마 찬술(撰述)할 수 있겠는가? 청사(靑史)와 동관(彤管)123)  이 천백 년을 두고 길이 선양(宣揚)하기를 기다리노라. 이에 사방에 널리 고하여 온 나라 사람과 아름다운 경사를 함께 한다. 만백성이 기뻐하여 자애로운 은덕을 우러러 일제히 환희하니, 사명(赦命)을 반사(頒賜)하여 나의 성심(誠心)을 표해 기쁨을 기록하는 바이다. 이달 초1일 새벽 이전부터……하도록 하라. 아! 가까운 데에서 멀리 퍼져가는 것이므로 살리기 좋아하는 깊은 인덕(仁德)을 펴고, 효도를 미루어 충성으로 옮겨 가게 하는 것이므로 석류(錫類)124)  의 지극한 뜻을 본받는 바이다. 때문에 교문(敎文)을 반시(頒示)하는 것이니, 마땅히 죄다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김일경(金一鏡)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3면
【분류】왕실(王室)


[註 119] 신극(宸極) : 왕위(王位).[註 120] 이후(二后) : 인경 왕후와 인현 황후임.[註 121] 국풍(國風) : 《시경(詩經)》의 편명.[註 122] 육궁(六宮) : 후궁(後宮)들을 가리킴.[註 123] 동관(彤管) : 붓대가 붉은 붓인데, 여사(女史)가 공과 허물을 기록할 때 씀.[註 124] 석류(錫類) : 효자(孝子)가 계속 이어져 간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장(旣醉章)에 "효자가 다하여 그치지 않으니 길이 너에게 선한 복을 주리라. [孝子不匱永錫庸類]"한 데서 온 말.

 

9월 3일 을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단의 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를 추후 책봉(冊封)하였는데, 백관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賜)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과매(寡昧)한 내가 진위(震闈)125)  에 있을 적에 찬조하였으므로, 의덕(懿德)을 추후 생각하게 되고, 곤극(坤極)126)  의 위호(位號)를 바루게 되었으므로 이에 이장(彝章)을 거행하노라. 따라서 내 마음이 실로 슬프니, 이에 국가의 경사를 반시(頒示)하는 바이다. 옛날 내가 오직 어린 나이였을 적에 배필의 요조(窈窕)한 덕을 힘입었었다. 고가(故家)의 유규(遺規)를 이어받아 일마다 범측(範則)을 준행하였고, 영고(寧考)를 만년(晩年)에 공경히 섬겨 은자(恩慈)를 많이 받았는데, 어찌 갑자기 선령(仙齡)을 인색하게 할 줄을 생각했겠는가? 끝내 거창(巨刱)127)  을 함께 하지 못했음이 탄식스러웠다. 저장(苴杖)과 마복(麻服)을 벗자 삼전(三殿)의 부례(祔禮)가 이루어졌고, 금옥(金玉)이 바야흐로 빛나게 되니 양궁(兩宮)의 성대한 의식(儀式)을 거행하였다. 의물(儀物)의 채색(彩色)은 청금(靑禁)에 환히 빛나고 법도(法度)의 예복(禮服)은 황상(黃裳)128)  으로 진열하였다. 층관(層觀)129)  에서 눈물을 흘리니 우러러 그리는 남은 감회를 어떻게 감내하겠는가? 장추궁(長秋宮)의 지위에 나아가니 이에 원근(遠近)이 모두 함께 축복(祝福)하였다. 희비(喜悲)의 교차가 가슴속에 간절한 것은 옛정을 잊지 못해서이고, 특별히 유은(宥恩)을 내려 하민(下民)에게 미치게 하는 것은 함께 유신(維新)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달 초3일 새벽 이전부터……하도록 한다. 아! 효경(孝敬)하고 유순(柔順)한 행실은 지난날의 양좌(良佐)임을 아직도 생각하게 되고, 자상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은 이에 오늘날 큰 은혜로 추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교문(敎文)을 반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죄다 알고 있어야 한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 김일경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3면
【분류】왕실(王室)


[註 125] 진위(震闈) : 세자궁(世子宮).[註 126] 곤극(坤極) : 왕후(王后).[註 127] 거창(巨刱) : 숙종의 국상(國喪).[註 128] 황상(黃裳) : 왕후의 복색.[註 129] 층관(層觀) : 높은 궁전.

 

9월 4일 병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책봉했는데, 백관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군자(君子)의 도(道)는 부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바야흐로 나라를 다스리는 교화를 힘쓰게 되었고, 예(禮)는 곤위(壼位)130)  에 임어하는 데에서 높아지는 것이므로, 이에 책봉(冊封)하는 의식(儀式)을 정제하였다. 이에 알리는 글을 널리 선양(宣揚)하여 아름답고 기쁘게 여기는 뜻을 보이노라. 생각건대 왕후(王后)는 훌륭한 곤덕(坤德)을 지니고 부족한 나의 배필이 되었는데, 정일(靜一)한 마음과 단아하고 장중한 의표(儀表)는 육궁(六宮)이 그 아름다운 규범에 감복하였고, 온화한 마음가짐과 효경(孝敬)스런 행실은 이성(二聖)께서 그 순일한 정성을 사랑하시었다.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시탕(侍湯)했으며, 지난친 애통으로 상담(祥禫)131)  의 예(禮)를 극진히 하였다. 좌우에서 협찬(協贊)하기는 삼조(三朝)132)  를 시작하고서부터이고 시종 치제(治齊)133)  를 도운 것은 국운이 백세(百世)토록 오래가기를 바라서인 것이다. 황상(黃裳)이 진실로 길(吉)하게 되니, 단의(丹扆)에 임어한 자태가 엄연하도다. 관저(關雎)134)  의 노래가 일어나니 본받음을 온 나라에 보인 것을 점칠 수 있고, 휘작(翬翟)135)  의 광채가 번뜩이니, 경사를 사방(四方)에 함께하는 것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팔음(八音)136)  의 음악을 연주하니 화기(和氣)가 천지 사이에 도출되고, 사유(赦宥)의 은전(恩典)을 반사하니 신민(臣民)에게 관대히 하는 은전을 내리는도다. 이달 초4일 새벽 이전부터……하도록 한다. 아! 실가(室家)를 화목하게 하여 어렵게 이룩한 큰 서업(緖業)을 지키고 우리 방역(邦域)을 보호하여 혜택(惠澤)이 만백성에게 젖도록 할지어다. 그래서 이에 교문(敎文)을 반시(頒示)하는 것이니, 마땅히 죄다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 김일경(金一鏡)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73면
【분류】왕실(王室)


[註 130] 곤위(壼位) : 왕후(王后).[註 131] 상담(祥禫) : 소상(小祥)·대상(大祥)·담제(禫祭).[註 132] 삼조(三朝) : 세자(世子)가 하루에 세 번씩 부왕(父王)에게 문안(問安)을 행하는 것.[註 133] 치제(治齊) : 제가(齊家) 치국(治國).[註 134] 관저(關雎) :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篇名).[註 135] 휘작(翬翟) : 왕후 수레의 치장.[註 136] 팔음(八音) : 여덟 가지 악기(樂器).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土)·혁(革)·목(木)으로 곧 종(鐘)·경(磬)·현(絃)·관(管)·생(笙)·훈(壎)·고(鼓)·축어(祝敔)를 가리킴.

 

9월 11일 계사

이광좌(李光佐)를 이조 판서로, 이조(李肇)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4일 병신

부제학 박필몽(朴弼夢)이 조태채(趙泰采)를 형률(刑律)에 의거해 다스려야 된다는 일을 가지고 반복하여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박필몽이 분연한 자세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이 역적을 오랫동안 베지 않고 남겨 두고 있는데, 오늘날 주저하여 망설이는 것이 이미 풍습(風習)으로 굳어졌습니다. 신은 이 풍습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르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승지 이명언(李明彦)은 아뢰기를,
"박필몽의 말은 격분해서 한 말입니다. 역적을 징토하는 대의(大義)를 지금 사람들이 어찌 다 알지 못하여 갑자기 풍습으로 굳어졌겠습니까?"
하였다. 박필몽이 아뢰기를,
"이명언의 말은 그릇된 것입니다. 지난번 2품 이상의 관원들이 청대(請對)했을 적에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것이 모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두 역적과 이건명(李健命)의 일을 논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조태채(趙泰采)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한 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대체적인 풍습이 난적(亂賊)에 대해 주저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으므로 신은 삼가 분개하고 있습니다."
하고, 정언 조익명(趙翼命)은 아뢰기를,
"박필몽의 말은 충분(忠憤)에 격발되어 난역(亂逆)의 처벌을 고식적으로 하는 것을 걱정해서 한 것이고, 이명언은 그 말이 역적을 비호한다는 데로 귀결되는 혼동이 있을 까 우려했기 때문에 이렇게 쟁론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난적의 죄를 쾌히 바루신다면 박필몽의 말처럼 풍습이 이미 굳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변경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윤성시(尹聖時)가 이상(李翔)의 일을 아뢰었으나, 임금이 묵묵히 있었다. 이명언이 발락(發落)을 내려 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노하여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계사(啓辭)가 너무 지리하다. 헌납 윤성시(尹聖時)를 우선 체차(遞差)시키라."
하였다. 이명언이 환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 이명언을 우선 파직(罷職)시키라."
하였다. 이명언이 빠른 걸음으로 나가니, 박필몽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전에 없던 지나친 일을 하십니까? 대간(臺諫)이 논계하는 것은 바로 그 직분일 따름인데, 어떻게 지리하다는 것으로 견책을 가하고 파직시킬 수 있겠습니까? 승지가 임금의 지나친 거조를 눈으로 직접 보고서 감히 작환(繳還)하려는 의리를 본받을 것인데, 더구나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환수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임금이 미안해 하는 뜻이 있는데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단 말인가? 부제학은 소견대로 대답해 보라."
하니, 박필몽이 아뢰기를,
"옛날의 임금은 용삼(龍衫)137)  이 땀에 젖어도 싫증을 느낄 줄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지리하다고 해서 대각을 체차시키고 명을 환수하기를 청한 승지를 특별히 파직시키셨습니다. 전하의 이 거조는 대단히 중도에 지나친 처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부제학 박필몽을 우선 파직시키라."
하니, 박필몽이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체(事體)에 있어 무엄하다."
하니, 부교리 이명의(李明誼)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신하로서 옷자락을 끌어당기고138)  , 난간을 부러지게 한 사람139)  도 또한 있었습니다. 오늘 세 신하의 일에 무슨 처벌할 만한 단서가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희로(喜怒)가 중도에 어긋난 것을 우려하여 감히 진청(陳請)하는 것입니다. 세 신하를 체파(遞罷)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명의의 영구(營救)함이 매우 무엄하다."
하니, 이명의가 아뢰기를,
"임금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권면(勸勉)하는 것을 공(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영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경악(經幄)에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전하로 하여금 이런 잘못된 거조가 있게 하였으니, 이는 신 등의 죄입니다. 대간은 언책(言責)을 임무로 삼고, 경악은 논사(論思)를 맡고, 후사(喉司)는 왕명의 출납을 맡고 있는데, 이제 이 세 신하가 간한 것은 모두 그들의 직분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죄란 말입니까? 신 등을 파직시키고 세 신하를 체파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여러 신하들도 잇따라 환수하기를 청하였다. 기사관(記事官)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사관이란 군주의 언동(言動)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입니다. 직금 전하의 이 거조를 사책(史冊)에 기록한다면 후세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였다. 승지 윤행교(尹行敎)가 추후 입시했다가 또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8일 경자

왕세제(王世弟)가 입학(入學)하였는데, 대제학 조태억(趙泰億)을 박사(博士)로, 조귀명(趙龜命)을 장명(將命)으로 삼았다.

 

9월 19일 신축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교문(敎文)을 반포(頒布)하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동위(銅圍)140)  가 종사(宗祀)를 주관하게 되니 경사가 이미 저사(儲嗣)를 정한 데에서 넘쳐 흘렀고, 벽소(璧沼)141)  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니 예(禮)가 다시 주연(冑筵)에 융성하였다. 이에 삼대(三代)의 유제(遺制)를 따르게 되었으니 만백성들과 경사(慶事)를 함께하게 된 것을 가상하게 여긴다. 생각하건대 우리 국조(國朝)에서 유술(儒術)을 숭상한 방도를 생각해 보건대 군사(君嗣)가 입학(入學)하는 전례(典禮)가 있었으니, 현릉(顯陵)142)   때 처음 거행한 성대한 의식(儀式)은 성조(聖朝)에서 사문(斯文)을 숭상할 때 있었던 일이요, 효묘(孝廟)143)  께서 장년(壯年)에 거행한 것도 종번(宗藩)으로서 책봉받은 뒤에 있었다.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근본이 여기에 있었으므로, 학업을 숭상하고 스승을 친애(親愛)하는 일을 반드시 먼저 돌아보게 된 것이다. 이극(貳極)144)  은 어질어서 진실로 중륜(重輪)145)  의 송축에 합당하여 효성과 우애를 하늘에서 타고났으므로 더욱 삼조(三朝)를 삼가 거행하고, 날로 학문이 성취되니 사보(四輔)146)  의 도움을 받을 것이 없다. 국상(國喪)을 당했을 적에 미리 저사(儲嗣)로 세웠고 입학(入學)하는 법규는 복상(服喪)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서 상례(常禮)를 거행하게 되었다. 교문(橋門)에 임하여 연(輦)에서 내려 제일 먼저 성사(聖師)147)  를 배알하였으며, 함장(函丈)148)  을 따라 옷자락을 걷고 나아가서 아래로 유사(儒士)들과 같이하였다. 쇄소(灑掃)·응대(應對)의 절차는 소학(小學)의 나이를 이미 넘었으며,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요점은 이제 대인(大人)의 도리를 강론하게 되었다. 진실로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善)을 알게 된다는 것149)  은 열성조(列聖朝)를 거쳐 오면서 겨우 아홉 번 있었던 일이다. 인륜(人倫)을 밝히는 데 의의가 있으니 실로 세상에 드문 경사이고, 의식과 예문이 잘 갖추어졌으니 원근(遠近)에서 서로 기뻐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한때 사람들이 바라보고 용동(聳動)할 뿐이겠는가? 속히 이를 미루어 팔역(八域)에 은택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달부터……하도록 한다. 아! 우리 왕가(王家)의 제도가 있으니 감히 조종(祖宗)의 이모(貽謀)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모두 나의 아우가 학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리는 바이다. 이에 마음을 드러내어 고하여 백성들이 목을 길게 빼고서 기다리는 정성에 답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 조태억(趙泰億)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74면
【분류】왕실(王室)


[註 140] 동위(銅圍) : 왕세제를 가리킴.[註 141] 벽소(璧沼) : 태학을 가리킴.[註 142] 현릉(顯陵) : 문종(文宗).[註 143] 효묘(孝廟) : 효종(孝宗).[註 144] 이극(貳極) : 왕세제를 가리킴.[註 145] 중륜(重輪) : 천자(天子)의 수레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임금이 되는 것의 뜻으로 쓰였음.[註 146] 사보(四輔) : 임금의 전후 좌우에서 보좌하는 네 가지 벼슬, 즉 좌보(左輔)·우필(右弼)·전의(前疑)·후승(後丞)을 말함.[註 147] 성사(聖師) : 공자(孔子).[註 148] 함장(函丈) : 선생(先生).[註 149] 진실로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善)을 알게 된다는 것 : 이 말은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오는 말로, 한 가지 일은 세자가 태학(太學)에 입학하는 것이고, 세 가지 선을 알게 된다는 것은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장유유서(長幼有序)를 말함.

 

9월 21일 계묘

태묘(太廟)에 토역(討逆)한 사실을 고하였는데, 진하(陳賀)하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천지에 용납하지 못할 죄는 난역(亂逆)이 으뜸이 된다. 그래서 《춘추(春秋)》에 무장(無將)150)  의 주벌(誅罰)이 있어서 그 전형(典刑)이 후세에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에 추악한 역적을 잡았으므로, 이런 명명(明命)을 선시(宣示)한다. 돌아보건대 나는 일찍이 험난함을 갖추 겪고 외람되게 어렵고도 중대한 서업(緖業)을 이어받았다. 이사명(李師命)·홍치상(洪致祥)이 유언 비어를 날조했는데, 그 요악(妖惡)함이 무진년151) 연매(燕禖)152)  의 일이 있은 처음부터 시작되었고, 적신(賊臣) 임창(任敞)·최규서(崔奎瑞)가 흉악한 짓을 했는데 그 음사(陰邪)는 신사년153)   고변(告變)의 일이 있을 즈음부터 있어 온 것이다. 쳐서 흔들어 위태로움을 충동질할 계책을 백방으로 획책했고, 온갖 핍박하고 무함하는 말을 다했지만, 선대왕(先大王)의 자애한 인은(仁恩)이 만고에 뛰어남을 힘입어 불초(不肖)하여 덕이 없는 나 소자(小子)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심(異心)을 품은 계획이 조금 저지되었는가 여겼었는데, 적정(賊情)이 헤아릴 수 없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흉모(凶謀)를 빚어온 지 30년이나 오래 되었으므로, 흉도(凶徒)들이 번성하게 되었으니 한두 명의 신하를 누가 꺼리겠는가? 그리하여 교기(驕氣)를 더욱 멋대로 부리게 되었다. 공광(孔光)·급암(汲諳)·구남(仇覽)·순숙(筍淑) 같은 직신(直臣)인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商運)·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이 죽었고, 양기(梁冀)·곽현(霍顯)·왕망(王莽)·조조(曹操) 같은 간신(奸臣)인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가 멋대로 날뛰게 되었다. 왕실(王室)의 우익(羽翼)을 잘라내어 조정에 사람이 없이 텅 비게 만들었고, 복심(腹心)인 사당(私黨)을 요로에 배포시켜 관작을 팔아 사람을 모집하였다.
홍수(紅袖)154)  와 연줄을 트고 황문(黃門)155)  과 체결하여 은화(銀貨)와 전재(錢財)로 거리낌없이 금액(禁掖)에 뇌물을 뿌렸고, 요인(妖人)과 검객(劍客)을 모두 궁장(宮墻) 안에 데려다 놓았다. 한 자루 비수(匕首)를 끼고 깊은 궁궐로 들어간 것은 밖으로 예양(豫讓)156)  이 변소를 수리하던 방법을 모방한 것이고, 천금(千金)을 가지고 대국(大國)에 가서 구매(購買)한 것은 안으로 곽현(霍顯)157)  이 술잔에 독을 탄 것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진(秦)나라의 이사(李斯)가 조고(趙高)158)  와 깊은 교계(交契)를 맺었고, 진(晉)나라의 왕돈(王敦)이 전봉(錢鳳)159)  의 찬조를 얻었으니, 누군들 가슴이 떨리고 통분이 뼈에 사무치지 않겠는가? 만대의 모든 죄악을 죄다 모아 놓았으니, 모두 살점을 먹고 가죽을 벗겨 깔기를 원하고 있다.
돌아보건대 팔역(八域)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모두 답답해 하고 있는데, 변서(變書) 내용이 분명하고 역절(逆節)의 자취가 환히 드러나 있다. 이이명(李頤命)은 손바닥에 양(養)자를 썼다는 글에서 추대(推戴)하기로 한 약속이 이미 드러났다. 주머니 속에 있었던 교조(矯詔)의 초고(草稿)에서 폐출시키려는 정상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은어(隱語)를 써서 제거하기 위해 은밀히 국구(國舅)의 성명을 불렀고, 맹세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일변(日變)의 길흉(吉凶)을 점험(占驗)하였다. 이들은 진실로 유자(猶子)160)  나 총아(冡兒)161)  가 아니면 모두 사사(死士)162)  나 숙장(宿將)163)  들이었다. 기일 전 엄수(閹竪)164)  에게 글을 얻어내어 독대(獨對)할 시기를 알았고, 밤중에 주사(籌司)165)  에서 머리를 맞대고 모여 은밀한 모의(謀議)를 정하였다.
김용택(金龍澤)은 인아(姻婭)의 친밀함을 맺었기 때문에 한결같이 그의 지휘를 따랐다. 이천기(李天紀)는 향리(鄕里)의 친구임을 핑계대어 은밀히 약속을 받았다. 김일관(金一觀)의 발언에 이르러서는 더욱 역적들이 귀심(歸心)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창집(金昌集)은 김창도(金昌道)를 시켜 정우관(鄭宇寬)을 인하여 교통하게 하였고, 상궁(尙宮)은 은밀히 김성행(金省行)을 사주하여 서덕수(徐德修)와 서로 교결하게 하였다. 이소훈(李昭訓)을 먼저 살해하고 나서 내옥(內屋)의 척속(戚屬)으로 하여금 동정을 살펴 위세를 이룩했고, 중권(中權)을 종처럼 부려서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하여 위세(威勢)를 확립하였다. 한 장의 서찰로 다시 중신(重宸)을 도모하면서 그에 대한 지속(遲速)을 장세상(張世相)을 통하여 자주 정탐했고, 삼목(三木)166)  을 반드시 외곤(外閫)167)  에 내보내어 이만성(李晩成)에게 조종하도록 요청하였다. 만일 궁성(宮城)에 군대를 진열(陳列)하는 일이 이루어졌다면 금정(禁庭)에서 피를 흘리는 일을 어떻게 면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선경(先庚)에 개기(改紀)하였으니 신감(神鑑)이 밝게 비추었고, 소망(小望)을 기다렸으나 길이 지체되자, 이지(異志)를 실행하려 하였으니, 아! 또한 참혹하도다.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건명(李健命)은 한 집안에서 이이명(李頤命)은 형이 되고 그는 동생이 되니 성행(性行)이 특히 비슷하였으며, 김창집은 영의정에 있고 자신은 좌의정으로 자리를 연해 있으면서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였다. 그리고 이국(異國)에 가서 감히 우리 나라의 사정을 날조하여 말했는데도 잔얼(殘孽)들이 방자하게 떠들면서 수악(首惡)으로 지척(指斥)하는 것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조태채(趙泰采)는 본디 벼슬자리만 탐내어 못할 짓이 없는 비루한 사람으로 은밀히 찬역(簒逆)하려는 흉당(凶黨)들에게 빌붙어 도모했으므로, 인정(人情)이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다고 분노하고 있으니, 네가 어디로 가겠는가? 삼척(三尺)의 왕법(王法)은 지엄한 것이므로, 또한 용서할 수가 없다.
대저 사흉(四凶)의 연차(聯箚)는 실로 삼수(三手)의 음모(陰謀)에서 시작된 것이니, 임부(林溥)가 시해(弑害)를 모의했다고 진달한 내용은 본디 근거없는 맹랑한 말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잠(李潜)이 칼날을 향하고 있다고 우려한 것은 사신(徙薪)168)  하는 무릉(茂陵)169)  이라 할 수 있다. 대대(大憝)가 복주(伏誅)되니 마침내 인심이 기뻐 용동(聳動)하게 되었고, 잔당들이 감옥에 가득하니 천망(天網)은 도망하기 어렵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전후 승복한 자가 20여 인이었고, 차례로 안문(按問)한 기간이 7, 8개월이나 되었는데, 요망한 난적들의 허리와 목을 동쪽 시장에서 베어도 변명할 말이 없고, 독사 같은 혀와 올빼미 같은 목소리로 하늘을 우러러 속일 수가 없었다. 이미 역적 김창집·이이명·이건명·이홍술·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이희지(李喜之)·이기지(李器之)·이영(二英)·심상길(沈尙吉)·장세상(張世相)·이헌(李瀗)·정우관(鄭宇寬)·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서덕수(徐德修)·이우항(李宇恒)·유취장(柳就章)·김성절(金盛節)·우홍채(禹洪采)·심진(沈榗)·김일관(金一觀)·김극복(金克復)·양익표(梁益標)·이명좌(李明佐)는 잡아다가 정법(正法)에 의거하여 처치(處置)하였다. 모의(謀議)는 모두 대가(大家)·거실(巨室)에서 나왔고, 화물(貨物)은 모두 여러 지방의 곤수(閫帥)들에게서 조달되었다. 수백 개의 비장(祕藏)된 것을 찾아내면서 갑궤(匣櫃)에 들어 있는 패검(佩劍)도 찾아내었고, 16명의 간세(奸細)한 자들을 원찬(遠竄)했는데, 모두 은냥(銀兩)을 써서 지름길을 찾던 자들이다. 계동(季冬)에 독약(毒藥)을 쓰려는 계책이 행해지지 않자 독성이 맹렬하지 못함을 탄식했고, 초하(初夏)에 은밀히 기회를 엿볼 적에는 지은 밥이 이미 뜸이 든 데에 비유했었다. 나는 팔다리 같은 구신(舊臣) 때문에 낭패가 되었고, 저들은 도리어 근밀(近密)에서 급변(急變)을 만들었다. 선조(先朝)에서 돌보아 총애하던 은혜를 차마 저버리고 역심(逆心)을 멋대로 품고 있었던 것인데, 오늘날 형장(刑章)을 용서할 수 없으니, 내 마음이 분하고도 상심된다. 그러나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므로 이미 화색(禍色)이 소멸됨을 보았고, 경사(慶事)가 신민(臣民)에 흡족한데 어떻게 덕음(德音)을 내리는 것을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이달 21일부터……하도록 한다. 아! 온갖 간흉(奸凶)이 숨어버리고, 많은 잔당(殘黨)들을 깨끗이 쓸어버리니, 천기(天氣)가 깨끗이 맑아서 물과 함께 엄숙하게 되었고, 흡족한 은택이 골고루 퍼져서 많은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 김일경(金一鏡)이 지어 올렸다.】  사신은 논한다. "조태억(趙泰億)은 대제학으로서 사명(辭命)에 관한 글을 지어 올리지 않고 이에 제학 김일경(金一鏡)으로 하여금 교서(敎書)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관각(館閣)의 고사(故事)에는 제학이 찬술한 반교문(頒敎文)을 대제학이 고열(考閱)하여 산정(刪正)한 후에야 입계(入啓)하게 되어 있다. 김일경이 찬술한 반교문에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이 있었는데도 조태억이 끝내 산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조태억이 부도한 말로 임금을 무함한 것으로서, 곧 김일경의 손을 빌린 것뿐이다.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김일경은 복주(伏誅)되었으나 조태억은 방에서 명대로 살다 죽었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4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150] 무장(無將) :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서는 임금에 대해 신하가 장차 난(亂)을 일으켜 시역(弑逆)하겠다는 불충(不忠)한 마음조차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임.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 장공(莊公) 32년 조(條)에 이르기를, "임금의 친척에게는 장(將)이 없어야 하고, 장이 있으면 반드시 벤다.[君親無將 將而必誅]"라고 하였음.[註 151] 무진년 : 1688 숙종 14년.[註 152] 연매(燕禖) : 세자 탄생을 바란 일.[註 153] 신사년 : 1701 숙종 27년.[註 154] 홍수(紅袖) : 궁인(宮人).[註 155] 황문(黃門) : 내시(內侍).[註 156] 예양(豫讓) : 전국 시대(戰國時代)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기의 주군(主君)인 지백(智伯)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살해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칼을 품고 변소에 숨어 해치려다 실패하였음.[註 157] 곽현(霍顯) :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곽광(霍光)의 아내임. 한 선제(漢宣帝) 때 허후(許后)가 임신(姙娠)하자 여의(女醫) 순우연(淳于衍)을 시켜 독약(毒藥)을 먹여 죽이게 하였음.[註 158] 이사(李斯)가 조고(趙高) : 이들은 모두 진 시황(秦始皇) 때의 간신(奸臣)으로, 시황이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죽자, 거짓 조서(詔書)를 만들어 차자 호해(胡亥)를 태자로 세우고 장자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을 사사(賜死)하였음.[註 159] 왕돈(王敦)이 전봉(錢鳳) : 왕돈은 진(晉)나라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권신으로 두 번이나 모반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개조 참군(鎧曹參軍)으로 있는 전봉의 말을 많이 따랐었음.[註 160] 유자(猶子) : 조카를 말함.[註 161] 총아(冡兒) : 큰아들.[註 162] 사사(死士) : 죽음을 맹세한 선비.[註 163] 숙장(宿將) : 노련한 장수.[註 164] 엄수(閹竪) : 환관(宦官).[註 165] 주사(籌司) : 비변사(備邊司).[註 166] 삼목(三木) : 이삼(李森)을 가리킴.[註 167] 외곤(外閫) : 지방의 병사.[註 168] 사신(徙薪) : 우환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뜻. 옛날 어떤 사람의 집에 부엌 구조가 직돌(直突)로 되어 있고 곁에 나무가 쌓여 있었는데, 이를 본 과객(過客)이 곡돌(曲突)로 고치고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화재(火災)를 미리 방지하라고 한 말임.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 무릉(茂陵)의 서복(徐福)이 자주 상서(上書)하여 곽현(霍顯)의 변란(變亂)을 미리 방지하였음.[註 169] 무릉(茂陵) : 서복(徐福)을 가리킴.
사신은 논한다. "조태억(趙泰億)은 대제학으로서 사명(辭命)에 관한 글을 지어 올리지 않고 이에 제학 김일경(金一鏡)으로 하여금 교서(敎書)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관각(館閣)의 고사(故事)에는 제학이 찬술한 반교문(頒敎文)을 대제학이 고열(考閱)하여 산정(刪正)한 후에야 입계(入啓)하게 되어 있다. 김일경이 찬술한 반교문에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이 있었는데도 조태억이 끝내 산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조태억이 부도한 말로 임금을 무함한 것으로서, 곧 김일경의 손을 빌린 것뿐이다.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김일경은 복주(伏誅)되었으나 조태억은 방에서 명대로 살다 죽었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4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150] 무장(無將) :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서는 임금에 대해 신하가 장차 난(亂)을 일으켜 시역(弑逆)하겠다는 불충(不忠)한 마음조차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임.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 장공(莊公) 32년 조(條)에 이르기를, "임금의 친척에게는 장(將)이 없어야 하고, 장이 있으면 반드시 벤다.[君親無將 將而必誅]"라고 하였음.[註 151] 무진년 : 1688 숙종 14년.[註 152] 연매(燕禖) : 세자 탄생을 바란 일.[註 153] 신사년 : 1701 숙종 27년.[註 154] 홍수(紅袖) : 궁인(宮人).[註 155] 황문(黃門) : 내시(內侍).[註 156] 예양(豫讓) : 전국 시대(戰國時代)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기의 주군(主君)인 지백(智伯)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살해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칼을 품고 변소에 숨어 해치려다 실패하였음.[註 157] 곽현(霍顯) :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곽광(霍光)의 아내임. 한 선제(漢宣帝) 때 허후(許后)가 임신(姙娠)하자 여의(女醫) 순우연(淳于衍)을 시켜 독약(毒藥)을 먹여 죽이게 하였음.[註 158] 이사(李斯)가 조고(趙高) : 이들은 모두 진 시황(秦始皇) 때의 간신(奸臣)으로, 시황이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죽자, 거짓 조서(詔書)를 만들어 차자 호해(胡亥)를 태자로 세우고 장자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을 사사(賜死)하였음.[註 159] 왕돈(王敦)이 전봉(錢鳳) : 왕돈은 진(晉)나라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권신으로 두 번이나 모반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개조 참군(鎧曹參軍)으로 있는 전봉의 말을 많이 따랐었음.[註 160] 유자(猶子) : 조카를 말함.[註 161] 총아(冡兒) : 큰아들.[註 162] 사사(死士) : 죽음을 맹세한 선비.[註 163] 숙장(宿將) : 노련한 장수.[註 164] 엄수(閹竪) : 환관(宦官).[註 165] 주사(籌司) : 비변사(備邊司).[註 166] 삼목(三木) : 이삼(李森)을 가리킴.[註 167] 외곤(外閫) : 지방의 병사.[註 168] 사신(徙薪) : 우환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뜻. 옛날 어떤 사람의 집에 부엌 구조가 직돌(直突)로 되어 있고 곁에 나무가 쌓여 있었는데, 이를 본 과객(過客)이 곡돌(曲突)로 고치고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화재(火災)를 미리 방지하라고 한 말임.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 무릉(茂陵)의 서복(徐福)이 자주 상서(上書)하여 곽현(霍顯)의 변란(變亂)을 미리 방지하였음.[註 169] 무릉(茂陵) : 서복(徐福)을 가리킴.
사신은 논한다. "조태억(趙泰億)은 대제학으로서 사명(辭命)에 관한 글을 지어 올리지 않고 이에 제학 김일경(金一鏡)으로 하여금 교서(敎書)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관각(館閣)의 고사(故事)에는 제학이 찬술한 반교문(頒敎文)을 대제학이 고열(考閱)하여 산정(刪正)한 후에야 입계(入啓)하게 되어 있다. 김일경이 찬술한 반교문에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이 있었는데도 조태억이 끝내 산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조태억이 부도한 말로 임금을 무함한 것으로서, 곧 김일경의 손을 빌린 것뿐이다.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김일경은 복주(伏誅)되었으나 조태억은 방에서 명대로 살다 죽었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뒤 영종(英宗)을사년170)   3월 15일 소결(疏決)할 적에 우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신 등이 성교(聖敎)에 의거하여 임인년171)  의 옥안(獄案)을 고열(考閱)하여 보았는데, 목호룡(睦虎龍)의 상변(上變) 가운에 있는 허다한 사설(辭說)들은 모두 허공에서 꾸며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대저 정인중(鄭麟重)의 무리가 문인(文人)이라고 자칭하였고, 목호룡 또한 문자(文字)로 이름을 얻었기 때문에 함께 교유(交遊)하게 된 것인데, 목호룡은 실상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심복(心腹)이었습니다. 따라서 기필코 이이명(李頤命) 및 그와 친한 사람들에게 벌이 미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인중의 영형가시(咏荊軻詩) 같은 것은 곧 정인중이 젊었을 때 지은 시(詩)로서 한 시대에 널리 전파되었던 것인데, 목호룡이 이를 끌어다가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을 구한다는 증거로 만들었으며, 이희지(李喜之)의 낙조시(落照詩) 같은 것은 경물(景物)을 읊으면서 지은 것에 불과한데, 목호룡이 이를 부도(不道)한 이야기로 만들었으니, 이런 종류의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처음 공초(供招)에서 이희지가 자신에게 둔갑술(遁甲術)에 대해 문의했다는 것은 곧 처음 목효룡을 만났던 날이었습니다. 그뒤 계묘년172)  에 목호룡이 공초에서 또한 말하기를, ‘이희지를 봉안역(奉安驛)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으니, 한 마디 말이라도 입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나라에 화(禍)를 끼칠 말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또, ‘정인중 등이 목호룡에게 형가(荊軻)·섭정(聶政)의 부류에 대해 물어본 것과, 김용택(金龍澤) 등이 백망(白望)을 대면하여 세상에 유비(劉備)가 없다는 말을 한 것과, 각각 손바닥에다 글자를 쓴 것과, 이천기(李天紀)가 목호룡을 대하여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라는 말을 한 것은 모두 초면으로 처음 만났을 적에 문답(問答)했던 이야기였었다.’고 했는데, 이희지 등이 풍병(風病)을 앓아 실성(失性)한 사람이 아니라면 설사 불궤(不軌)를 도모할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둔갑술과 나라에 화(禍)를 끼칠 말로 자객(刺客)을 구하고, 유비(劉備)를 추대하며, 대급수·소급수라는 등의 말을 갑자기 처음 만나는 날에 한다는 것은 그럴 이치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임인년 옥사의 근저(根柢)는 오로지 여기에 있었으니, 이밖에 지엽적인 수없이 많은 말들은 모두 허망(虛妄)한 것이었음을 이것으로 살펴보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의 이른바 삼수(三手)라는 것은 하나는 칼이고 하나는 독약이고 하나는 국상(國喪)을 이용하여 교조(矯詔)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은 의금부(義禁府)의 추안(推案)을 보관하고 있는 궤갑(櫃匣) 속에 있었기 때문에 지난번 국청(鞫廳)에 좌기(坐起) 했을 적에 가져다가 보았더니, 자루가 부러지고 녹이 슬어 있는 하나의 보통 칼로서 곧 근세의 행객(行客)들이 말 안장에다 달고 다니는 보통 칼이었습니다. 금오(金吾)의 당상(堂上)들과 참좌(參坐)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며 웃지 않은 사람이 없엇으니, 이것을 비수(匕首)라고 한다는 것은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이 처음에는 두 자가 되는 칼이라고 했다가 뒤에 찾아내어 가지고 와서 보고는 또 말하기를, ‘본래 한 자가 되는 칼이었다.’고 하여 그 말이 때를 따라 바뀌었으니, 더욱 웃을 만한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물건을 서로 빌려주는 것은 본디 으레 있는 일인데 이것을 가지고 역모(逆謀)라고 한다면 세간(世間)에 칼을 빌려 주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별다른 절박(節拍)이 없이 단지 칼 하나를 수색하여 찾아낸 것을 가지고 장물(贓物)을 현착(現捉)했다고 하면서 곧바로 김용택에게 처형(處刑)을 청하는 단서를 삼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렇게 사리에 어긋나는 역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대급수(大急手)가 허망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약(藥)에 대해서는 이헌(李瀗)이 공초(供招)에서 말하기를, ‘이이명이 독약을 사가지고 와서 둘로 나누어 주었는데, 하나는 서덕수(徐德修)이고 또 하나는 이기지(李器之)와 이천기(李天紀)의 무리이다.’ 하였고, 서덕수는 공초에서 말하기를, ‘은(銀) 3백 냥을 장세상(張世相)에게 보냈는데 장세상이 2백 냥을 백망(白望)이 샀던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에게서 샀다.’고 했습니다. 서덕수가 이미 장성의 역관에게서 샀다고 하였으니, 이는 ‘정유년173)  에 사가지고 왔다.’는 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헌의 공초에서 이른바 이이명이 가지고 온 것을 둘로 나누어 그중 하나를 서덕수에게 주었다는 것은 허망한 말로 귀결되었습니다. 김성절(金盛節)의 공초에 의하면 정유년에 사행(使行)으로 갔을 때 이기지 부자(父子)가 역관 장 판사(張判事)란 사람을 시켜 사가지고 오게 했다고 했습니다만, 그 사행에는 원래 장성(張姓)의 역관이 없었습니다. 또 장성의 역관이 사가지고 온 약을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하여 1차 시험해 써 보았더니 곧 누런 물을 토해 냈다고 했는데, 누런 물을 토해 낸 것이 장성의 역관이 가지고 온 약 때문이었다면, 장성의 사람은 원래 없었고, 이이명이 사가지고 온 약 때문이었다면 누런 물을 토해 낸 것은 경자년174)   겨울에 있었으며, 이이명의 사행은 신축년175)   봄에 돌아왔습니다. 김성절의 공초에 또 말하기를, ‘누런 물을 토해 낸 뒤에 이기지의 무리가 말하기를, 「약이 독하지 않아서 그러니 다시 은(銀)을 모아 다른 약을 사가지고 와야 된다.」고 했다.’ 했는데, 그때 이기지는 자기 아비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었으니, 이는 허망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장성의 역관은 이미 그런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런 내용에 대해 다시 김성절을 형추(刑推)하니, 김성절은 또 홍순택(洪舜澤)을 가리켜 약을 사가지고 온 역관이라고 했으나, 홍순택이 과연 약을 사가지고 온 사람이었다면, 처음에 무엇 때문에 장성(張姓)의 사람이라고 현고(現告)했다가 뒤에 홍순택이라고 바꾼단 말입니까? 포청(捕廳)에서 또 홍순택의 종인 업봉(業奉)을 찾아내어 꾀어서 자복을 받아냈는데, 종에게 주인의 죄를 증거하게 하다는 것은 원래 법전(法典)에서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오히려 이러하니 다른 것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홍순택이 끝내 자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그의 숙부 홍성주(洪聖疇)까지 아울러 엄중한 형신(刑訊)을 가하면서 철저히 캐어 물었으나, 결국 자복을 받아내지 못하였으니, 홍순택이 약을 사왔다는 말도 역시 허망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약은 목호룡의 말에 의하면 작기가 소합원(蘇合元)만하다고 했고, 정우관(鄭宇寬)은 크기가 대두(大豆)만하다고 했고, 업봉은 크기가 계란(鷄卵)만한데 조금 작다고 했습니다. 목호룡은 빛깔이 청색(靑色)이라고 했고, 이영(二英)은 황색(黃色)이라고 했고, 업봉은 황흑색(黃黑色)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한 가지 약인데도 크기와 빛깔이 어찌하여 이렇게 각기 다르단 말입니까? 약에 대한 일은 이제야 허공에서 떨어진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이른바 약을 썼다고 한 한 가지 조항에 대해 이정식(李正植)의 공초에는 11월 무렵이라고 했고, 장세상(張世相)은 소훈(昭訓)이 독약을 마시고 바야흐로 절명(絶命)하려 했다고 했으니, 이는 소훈이 11월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서덕수의 공초에는 6월 무렵에 은(銀) 3백 냥을 장세상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독약을 구득하게 하여 동궁(東宮)의 주방 나인(廚房內人) 이씨(李氏)를 시켜 음식(飮食)에 타서 쓰게 했다고 했으니, 이는 소훈이 6월에 죽은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6월과 11월로 상반되고, 더구나 신축년 6월에는 전하께서 바야흐로 잠저(潛邸)에 있을 때이니, 어찌 동궁에 주방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허망한 것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서덕수의 공초에서는 장세상을 시켜 은(銀) 2백냥으로 독약을 구득하게 했다고 했으니, 이것은 약을 장세상이 도모하여 구득한 것이요, 밖에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정우관의 공초에는 서덕수·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이 궤(櫃) 속에서 물건이 들어 있는 봉지 하나를 꺼내어 자신을 시켜 장세상에게 전해 주게 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이 약봉(藥封)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궐내(闕內)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없을 때를 기다려 장세상에게 전해 주었다고 했으니, 이것은 약을 밖에서 보내 온 것이 됩니다. 두 사람의 공초가 이렇게 서로 어긋나니, 이것이 허망한 것의 두 번째 증거인 것입니다.
이른바 약을 썼다는 김 상궁(金尙宮)과 소훈을 살해했다는 이궁인(李宮人)은 끝내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허망한 것의 세 번째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소급수(小急手)가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평지수(平地手)라는 것에 이르러서는 처음에는 국상(國喪)을 이용하여 교조(矯詔)로 폐출시키는 일을 하려 했다고 발고(發告)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주장한 사람은 지열(池烈)이라고 했지만 그는 죽은지 이미 오래된 사람이었고, 뒤에는 백열(白烈)이라고 하였으나, 백열은 자복하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그 뒤에는 또 갑자기 궁성의 호위에 대한 일을 꾸며내어 은연중 이것으로 폐출(廢黜)에 대한 일을 입증하려 했으니, 당시 군흉(群凶)들이 청정(聽政)하게 하자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찬역(簒逆)하는 일이라고 몰아붙인 것에 대해서는 많이 변병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김창도 등의 공초에서 처음에는 소론(少論)을 구축(驅逐)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 그들의 소장(疏章)을 막기 위한 계책이었다고 했으니, 이는 본디 역적 모의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국청에서는 기필코 역모에 몰아넣으려 했고, 죄인(罪人)들도 그들의 풍지(風旨)를 받들어 모역으로 자복한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가지고 대신(大臣)들을 죄에 얽어 넣음으로써 자신들이 죽음 가운데에서 살길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그 사이의 절차는 이삼(李森)이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나아갔고 유취장(柳就章)이 중군(中軍)이 된 이 한 가지 조항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삼이 충청 병사가 된 것은 실로 자신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이는 온 조정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역모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과연 유취장을 중군으로 끌어들여 동모(同謀)하려고 했었다면, 당연히 유취장과 미리 계책을 모의하여 분명히 서로 약속한 뒤에야 이삼을 내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삼이 나가고 난 뒤 유취장이 청탁한 다음에야 비로소 유취장을 차임(差任)했겠습니까? 또 무엇 때문에 곧바로 유취장을 평안 병사(平安兵使)에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했겠습니까? 주도 면밀하게 포치(布置)한 계획이 과연 이럴 수 있겠습니까? 유취장의 공초에 의하면 12월 초5일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이건명(李健命)의 집에 모여서 호위에 대한 일을 모의했다고 했는데, 12월 초5일은 곧 이건명이 국경(國境)을 나간 뒤입니다. 이것은 당시 국청에서도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다시 유취장을 형문하자, 유취장이 즉시 거짓이었음을 자복했으니,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다른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옥사의 핵심은 삼수(三手)에 벗어나지 않는데, 그 가운데 칼에 대한 일과 교조(矯詔)에 대한 일은 처음부터 이미 귀착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들도 허다한 지엽적인 일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독 독약에 대한 일을 가지고 시종 3년 동안 기필코 단련(鍛鍊)하고자 하여 전하께서 사위(嗣位)하신 뒤에도 김성의 궁인(宮人)에 대한 일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만, 전하께서 실지로 그런 사람이 없다고 명백하게 하교한 후에야 비로소 정계(停啓)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한 가지 조항도 마침내 또한 허망한 데로 돌아갔으니, 그 사이에 있었던 허다한 절박(節拍)도 모두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은(銀)을 모은 한 가지 일은 그들이 이를 하나의 큰 관건으로 여겨 천만가지 지엽(枝葉)을 만들어 내었으므로 낱낱이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우홍채(禹洪采)가 승복한 공초에 의하면, 황해 병사(黃海兵使)가 성을 축조할 적에 물력(物力)을 얻기를 청한 보장(報狀)을 김성행(金省行)의 말에 의해 그의 조부에게서 제급(題給)받았으나 서목(書目)은 조송(趙松)이 어느 곳에서 성첩(成帖)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이는 더욱 매우 맹랑한 말입니다. 그때 신이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대죄(待罪)하고 있었으므로, 이 일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제일 처음 물력을 얻기를 청했을 적에 대신(大臣)들이 지급할 물자가 없다는 것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신이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할 적에 황해 병영(黃海兵營)의 물력을 차용(借用)했는데, 그 대신으로 양남(兩南)176)  에다 수천 석(石)을 작미(作米)해 놓은 것이 있으니, 이 쌀을 지급하면 된다.’고 했더니, 대신들이 좋다고 하면서 신의 말대로 제급할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 뒤에 또 물력이 이미 고갈되어 급하다고 고하여 왔으므로, 대신들이 다시 신에게 문의하였습니다만, 신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국(備局)에 달리 제급할 만한 재력(財力)이 없으니, 방제(防題)하는 외에 다른 계책이 없다.’ 하였더니, 대신이 신의 말대로 방제하여 보냈습니다. 포목(布木) 20동(同)과 쌀 수백 석(石)을 비록 제급하고 싶었으나 실제로 염출할 곳이 없었으니, 대신이 어떻게 제급을 허락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서목(書目)을 써서 보낼 적에는 반드시 당상의 서명을 받고 나서 여러 당상들에게 두루 보인 뒤에야 돌려 보내는 것이 비국(備局)의 규례(規例)입니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단지 이 한 가지 일만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그 허망함이 이와 같으니, 다른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인(各人)이 공초에서 모두 은(銀)을 모은 것은 국면(局面)을 바꾸려 도모한 것이라고 했으니, 그 죄는 진실로 사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역모는 아닌 것이니 자신이 직접 저지른 자 이외에 실정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자의 경우에는 의당 사죄(死罪)에 이르지는 않으므로, 사람들이 이렇게 승복하면 혹시 살아날 수 있는 방도가 있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상들의 풍지(風旨)를 받들어 더러 어지럽게 거짓 공초하기도 했었습니다만, 승복한 뒤에 이르러서는 승복한 조건이 어떠한 것인지 묻지도 않은 채 모두 모역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조율(照律)했으니, 이와 같은 옥체(獄體)는 전고에 없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 등이 전후의 옥안을 상세히 상고하여 보니, 고발한 자의 말에 대단히 어긋나는 것이 있어도 일체 목호룡에게 힐문(詰問)하지 않고 오직 고발당한 자에게만 협박하여 신문하는 것만을 일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한 가지 문목을 첨가하고 내일 또 한 가지 문목을 첨가하여 좌우에서 교대로 신문하였는데, 그 단서가 한결같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형장(刑杖)의 참독(竄毒)함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주장(朱杖)으로 좌우에서 마구 내리쳤기 때문에 전후에 형장 아래 죽은 사람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창자가 삐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옥사를 다스린 참독함이 이미 이러했으니, 이런 옥사에 걸려든 사람은 비록 백 개의 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누가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때문에 3년 동안의 옥사에서 살아서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고, 죽은 사람이 40인이나 되기에 이르렀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옥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선왕(先王)께서는 이런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간혹 한재(旱災)를 이유로 죄수들에게 사명(赦命)을 내리기도 했고, 노론(老論)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계책이라하여 엄중히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두 대신(大臣)177)  이 화(禍)를 당할 적에도 환수(還收)한다는 명을 내렸었으니, 선왕의 본심은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딱하게 여긴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군흉들은 극력 이의를 내세워 간쟁하여 마침내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성덕(聖德)을 막아서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상세히 진달하였다. 금오 당상(金吾堂上)과 삼사(三司)의 의견도 모두 같은가?"
하였다. 동의금 김유경(金有慶)이 아뢰기를,
"이 옥사의 큰 줄거리는 진달한 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고, 동의금 박사익(朴師益)은 아뢰기를,
"소신(小臣)은 새로 금오에 차임되었기 때문에 허다한 국안(鞫案)을 상세히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대체적인 의견은 대신과 같습니다. 대신이 진달한 것이 이미 상세하니, 신이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고 판의금 홍치중(洪致中)은 아뢰기를,
"신 등의 의견은 대신이 진달한 것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대저 우리 국조(國朝)는 개국한 이래 전해 오는 규모가 있어 명분(名分)과 예법(禮法)이 매우 엄절(嚴截)합니다. 그러므로 역심(逆心)을 품은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감히 칼을 가지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마치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사람처럼 멋대로 흉역을 저지를 수는 없는 것인데, 이것으로 사람을 무함했으니, 이미 말이 조금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목호룡이 이른바 김용택(金龍澤)이 증여한 칼을 사람들이 보검이라고 하기도 하고, 비수(匕首)라고 하기도 했다 하였는데, 이번 국청에 좌기(坐起)하였을 때 비로소 보았습니다만, 참으로 가소로웠습니다. 그것은 다만 자루가 부러지고 녹이 슨 하나의 연도(鉛刀)일 뿐이었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여행할 때 쓰기에도 감당하지 못할 그런 것이었는데, 더구나 시역(弑逆)을 도모하여 흉악한 짓을 행할 비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장물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이치에 근사하지 않은 말입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이 칼은 이른바 김용택이 백망에게 빌려 주었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김용택이 공초에서 말하기를, ‘목호룡과 백망이 모두 이 칼을 구하여 여행할 적에 쓸 목적으로 준비하려 했는데, 내가 백망에게 빌려 주었기 때문에 목효룡이 원한을 품은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고, 집의 송필항(宋必恒)은 아뢰기를,
"소신(小臣)도 국안을 열람하여 보았습니다만, 문서가 호번(浩繁)하여 모두 이해(理解)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저 이른바 삼수 옥사(三手獄事)라는 것은 이치에 근사하지 않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대신의 차록(箚錄)은 핵심을 조목별로 분명하게 나누어 상세히 변파(辨破)한 것인데, 신의 의견도 대신이 진달한 것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응교 신방(申昉)은 아뢰기를,
"임인년(壬寅年) 옥사(獄事)에서 단련(鍛鍊)한 정상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직사 때문에 바쁘게 뛰다 보니 추안을 상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습니다만, 대신이 진달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도 분명하여 조금도 빠뜨린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이 무슨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동의금 이기익(李箕翊)은 아뢰기를,
"역적 목호룡이 고변하고 역적 김일경이 옥사를 다스렸으니, 그때 일을 꾸며낸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독약을 쓰려고 했다는 조항에서 이소훈(李昭訓)이 이를 마시고 갑자기 졸서(卒逝)했다고 했으며, 또 이 약은 소훈에 그칠 것이 아니었다고 했으니, 그 말이 매우 흉참(凶慘)합니다. 대내(大內)에서 약을 쓴 사람은 이성(李姓)의 궁인이라고 했으니, 이성의 궁인이 사실 이라면 곧바로 이성의 궁인을 청했어야 옳을 것인데, 이에 김성(金姓)의 궁인에게 내어주도록 누차 청하였으니, 그들의 무함하고 기망한 정상을 절절이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이 옥사에 대한 본말(本末)을 대신이 이미 남김없이 변파(辨破)했으니, 신이 무엇을 다시 진달하겠습니까?"
하고, 동의금 김유경은 아뢰기를,
"오늘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 의하면 이미 다 통촉하셨고, 대신이 진달한 내용도 매우 상세하니, 이 옥사의 대체(大體)는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밖에 무슨 다시 진달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고, 장령 김담(金墰)은 아뢰기를,
"임인년 무옥(誣獄) 때 온갖 계책을 다 써서 단련(鍛鍊)했던 정상에 대해 공심(公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면 누군들 마음 아파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그 문안(文案)을 상세히 열람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또한 그 경개(梗槪)는 대략 엿보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궐내에서 대신이 차록(箚錄)한 것을 얻어 살펴 보았더니, 매우 명백하였습니다. 이른바 삼수(三手)의 흉설(凶說)은 모두 허망한 것이었음이 다시 의심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다시 무슨 다른 의논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장령 이휘진(李彙晉)은 아뢰기를,
"임인년 옥사의 억울함에 대해서는 비록 여대(輿儓)와 부유(婦孺)라 하더라도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삼수(三手)의 설에 명백하게 변파(辨破)되었으니, 소신의 소견 또한 같습니다."
하고, 지평 권적(權𥛚)은 아뢰기를,
"소신은 새로 아랫 지방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미처 추안(推案)을 상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단련(鍛鍊)이 망측하여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까지 언급되었다고 하니, 일국(一國)의 인심이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대신이 진달(陳達)한 차록(箚錄)을 보니 명백하고도 통쾌하여 다시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밖에 다시 무슨 진달(陳達)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교리 서종섭(徐宗燮)은 아뢰기를,
"임인년의 옥사는 천고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비록 문안(文案)을 상세히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대신이 진달한 내용에서 남김없이 변파(辨破)되었으니, 이밖에 다시 무엇을 앙달(仰達)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교리 홍현보(洪鉉輔)는 아뢰기를,
"신은 이 옥사에 대해 실로 응당 피혐(避嫌)해야 할 친혐(親嫌)이 있어 감히 여러 신하들과 일체로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금 천하에 어찌 임인년의 옥사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진달한 이외에 다시 더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정언 한덕전(韓德全)은 아뢰기를,
"소신은 새로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추안(推案)을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비록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이 옥사의 대체(大體)가 무옥(誣獄)이라는 것은 다만 성명께서 통촉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여대(輿儓)·하천(下賤)일지라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옥사의 실정을 비밀스럽게 했기 때문에 그 사이의 곡절을 외인(外人)으로서는 상세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신의 차록(箚錄)을 보건대 이 옥사의 단련한 정상과 어긋난 단서를 하나하나 가지와 마디까지 남김없이 변파했는데, 여러 신하들의 의견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소신이 또한 어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치중(洪致中)은 아뢰기를,
"인심은 그다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옥사를 다스리던 사람 가운데 어찌 마음속으로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김일경의 기세가 매우 강성했고, 조금이라도 이의(異議)를 제기하면 그때마다 역적을 비호한다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신 등의 말을 옳게 여기신다면, 특별히 번안(飜案)할 것을 허락하소서. 그런 후에야 인심이 비로서 기뻐하여 복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의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미 대체적인 내용은 언급했다. 임인년(壬寅年)의 일은 말하기에도 입이 더럽다. 목호룡이 상변(上變)한 뒤 궁료(宮僚)들을 인견한 일이 있었는데, 그뒤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악한 말이 많았었다. 비록 필부(匹夫)일지라도 자신에게 오욕(汚辱)을 가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인데, 더구나 나는 선조(先朝)의 유체(遺體)를 받은 몸으로 어찌 차마 이런 오욕스런 이름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당론(黨論)이 어느 세대엔들 없었겠는가마는, 천하 만고에 어찌 임인년의 일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는가? 만일 대행왕(大行王)의 지극한 인애(仁愛)와 성대한 은덕(恩德)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조정의 신하 가운데 어찌 온전히 보존된 자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목호룡이 변서(變書)에 말하기를, ‘동궁(東宮)의 씻기 어려운 무함을 씻어준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가 씻기 어려운 이름을 나에게 더한 것이다. 그때 나는 스스로 결심을 굳히고 상서(上書)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궁료(宮僚)들도 보지 못하였다. 역적 목호룡이 이미 나에게 음흉한 말을 가하였으면, 옥사를 다스리는 신하는 치죄하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단지 이 한 단락을 발거(拔去)해야 한다 하여 발거하자고만 청했다. 이것이 밖으로는 좋게 말한 것이 되겠지만, 실상은 나를 암담한 가운데에 두려는 것으로서, 더욱 교묘하였으니, 어찌 매우 절통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때의 이조 참의 심공(沈珙)도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목호룡의 말이 나를 핍박한 것은 진실로 말할 것도 없다. 대대로 국은(國恩)을 받고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로서는 당연히 돌아보고 자중(自重)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데, 만일 철저히 캐어내려 한다면 옥사(獄事)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우선 발거(拔去)하기를 청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작년에 이에 대해서 이미 말하였다. 비록 사책(史冊)에 이런 말이 있더라도 나는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나의 몸에 직접 이런 망극한 무함을 받게 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나 나의 마음에는 혐의할 바가 없으니, 흉언(凶言)을 어찌 돌아볼 것이 있겠는가?
김일경의 신축년 상소는 목호룡의 고변서(告變書)와 같은 것이었다. 진신(搢紳)의 상소란 것은 온 조정의 신하들이 동참(同參)한 것을 이름인데, 다만 7인뿐인데도 진신의 상소하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들 또한 어찌 흉참한 것을 몰랐겠는가마는, 김일경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한 사람도 그 그릇됨을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일경의 신축년의 소장(疏章)에 이르기를, ‘동궁(東宮)을 위해서 소장을 올리는 것이다.’고 했는데, 이는 곧 요사한 박상검(朴尙儉)이 농간을 부리기 위해 한 말이다. 이것이 내가 대행조(大行朝)께 죄를 청한 이유인데, 만약 대행왕(大行王)의 우애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박상검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변서가 나왔는데, 이는 한편의 정신(廷臣)을 모두 도륙(屠戮)하고 나서야 그만두려는 계책이었으니, 그지없이 참혹한 짓이었다.
삼수(三手) 가운데 이른바 칼로 하려 했다는 것은 어찌 이것을 가지고 역모를 했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지난번 추안을 열람하면서 칼을 빌려 준 조항을 보고 진실로 의심이 짙었었다. 그런데 이제 대신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사람들은 서로 칼을 빌려 주는 경우가 많은 법인데, 이것도 김용택이 우연히 백망에게 칼을 빌려 준 것에 불과한 것을 역적 목호룡이 마구 끌어대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로써 말하여 본다면 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 약(藥)에 대한 일로 말하여 본다면 실상과 어긋나는 것이 너무도 심한 편이다. 서덕수의 말은 참으로 괴이하게 여길 만하나, 이 한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내가 혼자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설사 서덕수가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이 옥사의 기괄(機括)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소훈이 죽었을 적에 혹시 의심스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이에 대해서는 말을 했다. 혹시라도 의심스런 일이 있었다면 어찌 설파(說破)하지 않았겠는가? 원래 의심스런 단서가 없었으니, 너무 허망한 말이었다. 지열(池烈)에 이르러서는 바로 선조(先朝) 때의 노상궁(老尙宮)이었는데, 그가 늙은 궁인으로서 무엇을 바랄 것이 있기에 역모를 저지르겠는가? 그저 목호룡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끌어대어 증거로 삼았을 따름이다. 그가 어떻게 감히 국상(國喪)을 이용하여 교조(矯詔)를 내릴 수 있겠는가? 그의 사람됨을 내가 알고 있는데, 결코 역모를 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죽어서 뼈가 되어 버린 뒤인데, 역모를 하려 한들 되겠는가? 궁성을 호위했다는 이야기는 물의(物議)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이미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또 들어 보니 더욱 허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誣告)한 자가 그들의 풍지(風旨)를 받들어 망령되이 살아나기를 바라고 오로지 죄를 여러 신하들에게 돌려서 벗어날 계책을 삼았다고 하니, 그 정태(情態)가 절통하다. 오늘 소결(疏決)함에 있어 무복(誣服)한 사람은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무복한 사람 가운데 그 정상을 조사하여 보면 각자가 같지 않으니, 또한 일률적으로 논죄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상세히 진달하겠습니다."
하고, 박사익은 아뢰기를,
"무고(誣告)와 무복(誣伏)은 본디 다른 것입니다. 무고란 죽음 가운데에서 살길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을 무함하여 해친 것을 말하고, 무복이란 그 말에 경중(輕重)과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으나, 요점은 모두 혹독한 매질을 견디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 이는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 문목(問目)에 지만(遲晩)이라고 말한 경우는 승복(承服)했다고 말할 수 없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결안(結案)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이것이 이른바 김용택의 결안(結案)입니다. 연좌되어 적몰(籍沒)당한 것을 모두 환수(還收)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정인중(鄭麟重)은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미처 말하지 못했었다. 손바닥에 ‘위국(爲國)’이라는 글자를 쓴 것이 어찌 역모가 되겠는가?"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무고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상길(沈尙吉)은 죄를 삼을 것이 단지 숙부(叔父)를 위해 벼슬을 구하려고 은(銀) 1백 냥을 이천기(李天紀)에게 주었는데, 이천기가 그것을 궁금(宮禁)과 체결하기 위해서 썼다는 그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무고율(誣告律)로써 혼동하여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당상관들이 소견은 어떠한가?"
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
"김성절(金盛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용택과 잘못 교유했다고 한 것은 이것이 정인중의 공초인가? 이것은 무고(誣告)가 아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상길도 무고가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또 이르기를,
"체결했다고 한 것은 은(銀)을 이기지(李器之)에게 주었는데, 이기지가 이것을 체결하는 데 썼다는 것이다. 이는 무고가 아니니, 당상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기익(李箕翊)이 말하기를,
"이는 과연 무고가 아닙니다."
하고, 김유경은 아뢰기를,
"심상길과 정인중은 모두 무고가 아닙니다."
하고, 박사익은 말하기를,
"이는 무고가 아닙니다."
하고, 송필항(宋必恒)은 말하기를,
"정인중은 조흡(趙洽)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신방은 말하기를,
"정인중이 이른바 잘못 난신 적자(亂臣賊子)와 교유했었다고 한 것은 살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하고, 김유경은 말하기를,
"조흡·김성절·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는 의당 무고로 논단(論斷)해야 합니다. 신 등이 밖에 있을 적에 이미 상의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다음을 차서에 따라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민택(金民澤)의 일은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논할 것이 없다. 방(放)자를 쓰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정인중·심상길·김용택 이 세 사람의 이름 밑에 방(放)자를 써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천기(李天紀)의 이름 밑에도 방(放)자를 쓰라."
하고, 또 이르기를,
"무고한 사람들의 이름 밑에는 각기 해당 율(律)을 쓰도록 하라."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무고율(誣告律)은 주륙(誅戮)이 당사자에게서 그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백망은 어떻게 조처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논할 것이 없다. 방(放)자를 쓰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 다음은 장세상입니다. 장세상이 죽은 뒤에 승복했다는 말을 사람들이 자자하게 떠들었으니, 이졸(吏卒)을 추문(推問)하면 그 허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대사헌의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다 말하였다. 나졸(邏卒)을 추문한 뒤에 처치(處置)하는 것이 신중하게 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 밑에 우선 나졸을 추문한 뒤에 처치하겠다고 써놓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옥안에 명목(名目)과 색목(色目)이 기입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이런 옥안이 있겠는가?"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지열에 대한 일은 어떻게 조처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방(放)자를 쓰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영(二英)은 어떻게 조처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심상길과 같이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연좌된 것을 소방(疏放)시키면 적몰(籍沒)한 것을 되돌려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승복이라는 것은 백망이 주머니에다 약을 넣는 것을 보았다고 한 그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고로 논단(論斷)할 수는 없다. 연좌에서 소방시키고 적몰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 말하기를,
"이정식·김창도는 무고율(誣告律)을 시행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초사(招辭)를 상세히 진달하라."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궁성을 호위하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는 스스로 부도(不道)한 말을 한 것이다. 무고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김유경이 말하기를,
"연좌는 소방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승복한 자들부터 차례로 진달하도록 하라."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지열은 죽은 지 이미 오래인데도 연좌시켜 적몰(籍沒)하는 율(律)을 시행했으니,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서덕수의 초사는 매우 허탄한데 이를 무고로 논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고임을 면하기 어렵다."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무고율에는 이미 연좌가 없는 것이니, 그의 아비는 소방(疏放)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고로 논단했으면 연좌가 없는 것이니 그의 아비는 방송(放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김유경이 말하기를,
"서덕수도 역시 문목 이외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괴이하다. 또한 문목 이외에 한 말이 있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정우관(鄭宇寬)은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정우관도 옥중(獄中)에서 고변했는데, 그 고발당한 사람들에게 한 번 공초받은 뒤에는 대질(對質)시키지 않고 즉시 방송(放送)했습니다. 그러나 정우관에게는 잇따라 형신을 가하여 결국은 취복(取服)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런 옥체(獄體)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을 무고로 논단한다면 처음 고한 내용을 가지고 무고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고로 논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가 이른바 승복했다는 데에는 별로 다른 말이 없었는가?"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정식 등이 지급해 준 약봉지를 장세상에게 전해 주었다고 했습니다만, 고변한 공초에 의하면 윤취상(尹就商)·심단(沈檀) 등이 불궤(不軌)를 도모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이른바 승복했다고 한 것은 역시 그의 처음 공초에서 자복한 것을 가지고 무고라고 한 것이다. 지금은 무고로 조처할 수 없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연좌에서 방송시키고 적몰했던 가산(家産)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일관(金一觀)의 일은 단지 창문 틈으로 이기지가 김성행을 힐책하는 밀어(密語)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들었다고 하는 것이 역적 모의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면, 무고로 시행해서는 안될 것 같다. 판의금(判義禁)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홍치중이 말하기를,
"무고로 논단한다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우관과 똑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심단이 죽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이른바 행형(行刑)이란 것은 죽은 뒤 육시(戮屍)하는 것이고, 이른바 승복했다는 것도 그가 공초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고, 홍치중은 말하기를,
"좌죄(坐罪)된 것이 심상길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똑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헌(李瀗)의 승복에는 다만 김성절이 전한 말로 인하여 교통(交通)한 일을 들었다고 했으니, 역시 무고로 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김성절과 다르다."
하였다. 김유경이 말하기를,
"이헌 때문에 김성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성절이 나오게 된 것이 이헌 때문이란 말인가? 김성절은 이미 무고로 처리했으니, 이헌은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는가?"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헌의 공초는 김성절의 공초와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단서도 있지 않은데 단지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면 마땅히 정우관과 똑같이 시행해야 된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유취장(柳就章)은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헌과 다르다."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무고로 시행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극복(金克復)의 죽음이 가장 불쌍합니다. 그의 공초에는 원래 다른 말이 없었고, 단지 이우항(李宇恒)이 성후(聖候)를 걱정하고 대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대해 묻는 데 따라 대답했을 뿐 원래 성상을 범한 말이 없었는데도 난언(亂言)으로 성상을 범했다는 것으로 조율(照律)하여 행형(行刑)했으니, 어찌 매우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신원(伸冤)시켜야 될 뿐만 아니라, 휼전(恤典)을 시행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 추안(推案)을 열람해 보고 이미 알았다.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적몰된 가산은 돌려주게 하라. 휼전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우항의 최후 공초에 말하기를, ‘김창도가 말하기를, 「이기지가 은(銀) 2백 냥을 조송(趙松)을 시켜 장세상에게 전해 주게 하라.」 했다.’ 했는데, 이로써 지만(遲晩)한다고 했습니다. 그에 앞서 목호룡의 공초에는 말하기를, ‘이지사(李知事)가 은 2천 냥을 모아서 장세상에게 전해 주게 했다.’ 하였으니, 피차의 말이 이미 서로 어긋났습니다. 그때 국청에서 이우항은 병이 위중하니 죄인들을 잡아올 동안 형신(刑訊)을 정지하기를 계청(啓請)했었는데, 겨우 하루가 지나자 죄인들도 잡아오기 전에 갑자기 지만(遲晩)으로 취조하고, 곧바로 물고(物故)되었다고 아뢰었습니다. 이른바 지만 취초했다는 것은 죽으려 할 즈음에 억지로 받아 낸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그의 아들 이헌과 함께 같이 신원(伸冤)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졸(邏卒)들에게 추문하여 본 뒤에 다시 계품(啓稟)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사익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나졸들을 추문해 본 뒤에야 변백(辨白)할 수 있는 것인데, 신도 그때의 조보(朝報)를 보았습니다. 첫날에는 이미 다른 죄인들을 잡아올 동안 형신(刑訊)을 정지한다고 썼었는데, 다음날에는 또 승복(承服)했다고 써내었고, 그 아래에는 물고(物故)로 입계(入啓)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은 다른 죄인을 잡아오기 전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의심하는 이유가 더욱 여기 한 조항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만(遲晩)으로 논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동의금의 말이 옳다. 당연히 김극복과 같게 해야 한다. 그러나 복관(復官)시키는 것은 급작스러운 것 같다."
하자, 이기익이 말하기를,
"이우항은 지위가 정경(正卿)의 반열(班列)에 이르렀는데, 그의 죽음은 너무도 원통하였습니다. 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 등과 똑같이 복관시켜야 바야흐로 신원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미 지만했다고 했으니, 가산은 돌려줄 수 있으나 복관시킬 수는 없다. 나졸들에게 추문하여 통쾌하게 무죄(無罪)하다는 사실이 드러나 뒤에야 복관시킬 수 있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성절의 공초에 이르기를, ‘신축년 겨울 여러 대신들을 발배(發配)하기 전에 정우관이 말하기를, 「다시 환국(換局)해야 마땅하다.」고 했기 때문에 여러 대신들이 머뭇거리면서 떠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결국 좋은 기별이 없은 후에야 부득이 발행(發行)했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의금부(義禁府)에는 압거(押去)할 낭청(郞廳)이 없어서 여러 날 지체하였고, 가랑청(假郞廳)을 차출한 뒤에야 비로소 발행하였으니, 신도 그때 그렇게 했었습니다. 어찌 공공연히 머뭇거리면서 지체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이 허망함이 모두 이러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명좌(李明佐)는 은(銀)을 내어 궁금(宮禁)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승복했는데, 이것은 역모했다고 자복한 사람과는 다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그가 이 일로 승복했는가?"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고라고 하는 것은 문목 이외에 잡언(雜言)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고와는 다르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우홍채(禹洪采)가 승복한 허망한 정상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진달했습니다만, 그의 공초에서 또 황해 감영(黃海監營)의 쌀에 대한 일을 거론했기 때문에 김유경이 그 일로 하여 옥사에 말려 들어갔습니다."
하고, 김유경은 말하기를,
"그의 공초의 허망한 것으로써 살펴본다면 그가 무복(誣服)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연좌(緣坐)에서 방송(放送)하고 적몰한 가산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양익표(梁益標)는 말만 전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홍채와 똑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창언(金昌彦)은 궁금(宮禁)과 내통한 실정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공초했는데, 이를 무고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임인 무옥(壬寅誣獄)에서 자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이미 신설(伸雪)시킬 것을 허락했으니, 복관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누구누구인지 모두 진달하도록 하라."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김민택(金民澤)·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김시태(金時泰) 등인데, 그 나머지 미천(微賤)한 자일지라도 직명(職名)이 있는 경우에는 모두 복관을 허락해야 합니다."
하고, 김유경은 말하기를,
"그 가운데 백시구와 이상집은 모두 선조(先朝) 때의 숙장(宿將)으로 억울하게 화망(禍網)에 걸려 참혹한 형신(刑訊)을 받았지만, 조금도 사기(辭氣)를 굽히지 않았으니, 이들은 그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말한 대로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조송(趙松)은 초사(招辭)에서 홍계적(洪啓迪)의 이름을 거론했는데, 이는 그를 끌어넣으려는 말이 아니었으나, 홍계적이 그 때문에 죽었으니, 복관시킬 수 없습니다."
하고,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조송은 자신의 공초에서 홍계적을 끌어넣음으로써 자신은 죽음에서 면하려는 계교를 세웠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홍계적을 죽이는 한 가지 옥안을 더 만들게 되었으니, 자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의 경우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복관(復官)할 사람들과 다르다. 조송은 복관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홍순택(洪舜澤)은 비록 미천한 사람입니다만, 역시 직첩(職牒)을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말한 대로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홍순택의 죽음에 대해 국인(國人)이 더욱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사행(使行)에 함께 갔었다는 이유로 곤장(棍杖)을 맞다가 죽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당연히 휼전(恤典)이 있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말한 대로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오서종(吳瑞鐘)의 일은 거론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윤각(尹慤)이 은(銀)을 냈다는 말은 조흡(趙洽)이 무고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각과 유성추(柳星樞)의 일은 비록 당시에 옥사를 다스리던 대신이 한 말을 가지고 말해도 원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각은 지난번에 이미 복관시켰는가?"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이미 복관시켰습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이수민(李壽民)은 선조(先朝)의 구장(舊將)으로 아주 먼 지역에 귀양가 있다가 죽었습니다. 엊그제 금오(金吾)에서 사좌(赦坐)할 때 이미 방송(放送)되었으니, 마땅히 이상집 등의 예(例)에 따라 똑같이 복관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복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조흡은 무고로 논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흡의 무고는 흉악하고 참혹스럽다. 그가 내응(內應)이라고 한 것은 더욱 허탄한 말이었다. 무고로 논단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임인 옥사(壬寅獄事)는 그것이 사람을 함해(陷害)하기 위해 날조한 것임을 알았으니, 삭훈(削勳)하는 한 가지 조항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비록 목호룡만의 단록(單錄)이어서 녹훈(錄勳)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안(飜案)한 뒤 삭훈하는 한 가지 일은 순차에 따른 당연한 일인 것이다. 말한 대로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회맹제(會盟祭) 때 가자(加資)된 사람들도 당연히 환수(還收)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환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그때 있었던 이른바 토역과(討逆科)라는 것도 삭제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명실(名實)이 있는 법인데, 이미 그 공훈을 삭제시켰으면 그 실상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과방(科榜)만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치중은 말하기를,
"임인 옥사에 대해 삭훈이 이미 있었으면 삭과(削科)하는 한 가지 일은 본디 순차대로 해야 할 일입니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가죽이 있지 않은데 털이 어디에 붙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훈명(勳名)을 이미 삭제했으면 과명(科名)이 어찌 홀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장령 이휘진(李彙晉)은 말하기를,
"공자(孔子)께서도,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상이 없는데 명칭만 있는 것은 사리에도 어긋나고 법에도 어긋납니다. 지금 원옥(冤獄)을 이미 신설하였고 위훈(僞勳)을 이미 삭제했으니, 과방(科榜)도 응당 파방(罷榜)해야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결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망설일 일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과방에 참여한 사람은 국가에서 과거를 설행(設行)한다는 말을 듣고 와서 참여했다가 합격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어찌 모두 토역을 다행하게 여긴 것이라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에는 또한 옥사의 곡절(曲折)이 이와 같다는 것을 전연 모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모두 삭파(削罷)시킨다는 너무 지나친 것이 될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으나, 대신(臺臣)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한다.’는 말이 좋다. 역시 삭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이른바 토역과(討逆科)라는 것을 이미 삭파시켰다면, 그 가운데 직부(直赴)178)  했던 사람은 내년의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말한 대로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임인 무옥에 대해 전후 옥사를 다스리던 여러 신하들이 죄인을 단련(鍛鍊)하여 옥사(獄事)를 만든 죄를 분명하게 바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후에야 처분이 비로소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형정(刑政)이 문란해질 것입니다."
하고, 서종섭(徐宗燮)은 말하기를,
"이 옥사(獄事)를 이미 신설(伸雪)하였다면,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에 대해서도 어찌 그 죄를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현보는 말하기를,
"임인 무옥을 이미 신원(伸冤)하였다면 옥사(獄事)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에 대해서도 결단코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신방(申昉)은 말하기를,
"그들의 죄를 다스리자고 하는 것은 뒷사람을 징계시키는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사류(士類)를 신원시킨 뒤에는 흉당(凶黨)들의 죄를 통쾌히 바루는 것이 사리에 있어 정당한데, 더구나 그들의 마음먹음이 사류(士類)들을 장살(戕殺)하려 했을 뿐만이 아닌 것이겠습니까?"
하고, 이휘진은 말하기를,
"신 등은 장료(長僚)의 소장 때문에 피해야 할 혐의가 있었으므로, 발계(發啓)하여 소회를 앙달하지 못했습니다. 임인년에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이 얽어 무함하고 단련(鍛鍊)한 끝에 선류(善類)들을 장살한 정상이 이미 너무 참독(慘毒)하였습니다. 더구나 목호룡의 변서(變書)는 더할 나위 없이 흉악하고 간사하여 멋대로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무핍(誣逼)하였으니, 그것이 옥사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당연히 놀란 마음으로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감싸줄 마음으로 그 죄를 불문에 붙이자고만 청했으니, 이루 주벌(誅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정신(廷臣)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성심을 다 기울여 성상께서 무함받은 것을 신설(伸雪)할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인데, 갑자기 하교를 받들고 보니 성명(聖明)께서도 진실로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의 정상을 이미 통촉하고 계셨습니다. 대저 신자(臣子)가 되어 저이(儲貳)께서 무함받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난적(亂賊)들과 더불어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국가에 삼척법(三尺法)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마는, 만일 법이 있다면 이런 등류의 죄악(罪惡)에다 시행하지 않고 어떤 곳에 시행하겠습니까?"
하고, 홍현보는 말하기를,
"이미 알고 나서도 다스리지 않으시니, 성의(聖意)의 소재를 신은 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알고 모른 것은 논할 것이 없다. 임인년에 국청에 있던 여러 신하들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휘진이 말하기를,
"어떻게 삭탈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죄가 삭탈에 그칠 뿐이라면 오늘날 정신(廷臣)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극력 간청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반좌율(反坐律)을 시행한다면 원찬(遠竄)도 가벼운 것이 된다. 나는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번거롭게 진달하지 말라."
하자, 이휘진이 말하기를,
"통쾌하게 반좌율은 비록 시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삭탁만 하고 그만 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역적(逆賊) 김일경은 이미 복주(伏誅)되었고, 소하(疏下)179)  의 6인도 이미 원찬(遠竄)시켰으니, 그 가운데 휩쓸려 따른 사람이야 어찌 깊이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휘진이 말하기를,
"원옥(冤獄)을 단련(鍛鍊)하여 성립시키고 성상께서 받은 무함을 덮어 숨겼으니, 이는 실로 역적 김일경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역적 김일경은 곧 하나의 사령(使令)일 뿐이요 흉당의 괴수는 아닙니다."
하고, 신방은 말하기를,
"성교(聖敎)에서 매양 김일경을 괴수로 여기고 있는데 김일경은 괴수가 아닙니다. 앉아서 지시하여 부린 사람이 참괴수인 것입니다."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변서(變書)에 있는 말 가운데 전하를 핍박한 것이 있으니,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그 죄를 분명하게 바루지 않으면 앞으로 오래도록 암담(黯黮)한 가운데 두게 됨을 면할 수 없고, 따라서 끝내 변백(辨白)할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권적은 말하기를,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을 받는 것이 법에 있어 당연한 것인데, 임인 옥사에 이르러서는 3년 동안 단련하여 온갖 방법으로 죄를 날조하여 선류(善類)들을 도살(屠殺)함으로써 자신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려 힘썼으니, 그 정상을 논한다면 죽여도 죄가 남습니다. 그런데 삭출(削黜)이라는 가벼운 형벌을 가지고 어떻게 그 죄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말감(末減)의 형벌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먼 변방으로 쫓아내는 율(律)을 적용시킨 뒤에야 바야흐로 조금이나마 왕법(王法)이 신장(伸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문(鞫問)에 참여한 승지(承旨)와 문랑(問郞)180)  에 이르러서는 그 죄가 경중의 구별이 없지 않지만 역시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랑을 어떻게 그 사이에 참여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필항이 말하기를,
"당시에 옥사를 다스리던 여러 신하들은 사대신(四大臣)을 죄에 얽어넣어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목호룡의 변서(變書)에서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다 무함을 가하였으니, 너무도 흉악하고 패리(悖理)합니다. 그런데도 끝내 목호룡을 구문(鉤問)하지 않은 채 다만 무함하여 핍박한 말을 발거(拔去)하기만 청하였으니, 그 의도는 이를 암담(黯黮)한 죄과(罪科)에 두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상을 논한다면 결단코 용서할 수 없으니, 삭출(削黜)시키는 가벼운 형벌로 어떻게 그 죄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한덕전(韓德全)은 말하기를,
"기사년181)  에 흉당(凶黨)들이 얽어 만든 옥사는 임인년(壬寅年)에 견주어보면 역시 조금 차이가 납니다. 갑술년182)   초에 숙종(肅宗)께서 제일 먼저 처분을 내리면서 즉시 역적 민암(閔黯)을 수금(囚禁)하고 이어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도 차례로 논죄하였었는데, 더구나 이 옥사이겠습니까? 어떻게 삭출(削黜)만 시키고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신방은 말하기를,
"반드시 처분을 엄명하게 해야 후세에 전해도 길이 할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관전(寬典)을 적용하는 것이 한때에는 평온하여 좋을 것 같지만, 후세 사람들은 성상께서 특별히 법 밖의 어진 마음을 미루어서 내린 조처라는 것은 모른채 다만 처분이 엄중하지 않았던 것만 보고 도리어 이 일의 처분이 여기에 그쳤는가고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김담은 말하기를,
"이 옥사를 신설(伸雪)시키고, 흉도(凶徒)들을 주참(誅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원(伸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덕(聖德)이 지극히 커서 악인(惡人)의 성품을 비록 감화(感化)시키려 하십니다만, 어떻게 갑자기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한덕전은 말하기를,
"《대학(大學)》에도 이르기를, ‘오직 어진 사람이라야 악인(惡人)을 유방(流放)시켜 사이(四夷)의 사는 곳으로 내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저 내쫓긴 죄인(罪人)은 당연히 의(義)에 굴복한 것인데도 도리어 어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인(仁)이란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것의 명칭이므로, 형상(刑賞)을 지공 무사하게 하는 것은 오직 어진 사람이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전적으로 관용(寬容)만을 힘쓴다면 도리어 사심(私心)에 관계가 되는 것으로 어진 사람의 용심(用心)이 아닌 것입니다. 임금의 도(道)에 있어 어찌 이런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처분을 내리시는 것이 아마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김담은 말하기를,
"이것이 어떠한 죄악인데, 다만 삭출(削黜)하는 형벌만 시행하고 그치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하고 그만둔다면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낫겠습니다."
하고, 홍현보는 말하기를,
"이 옥사의 참독(慘毒)함은 우리 국조(國朝)에서 없던 것일 뿐만 아니라, 실은 전사(前史)에서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단련하여 날조한 죄를 논한다면, 주륙(誅戮)에 처해도 가벼운 것이 되는데,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을 끝내 삭탈하는 것으로 감정(勘定)한다면, 난신 적자가 어떻게 징계되어 두려워하겠습니까?"
하고, 권적은 말하기를,
"지금 이 무옥(誣獄)은 다만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장살(戕殺)했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으니 그 죄는 위로 하늘에 사무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들을 단지 문외 출송하는 율(律)을 시행하는 데에 그칠 뿐이라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앞으로 어떻게 징계될 수 있겠습니까? 삼척법(三尺法)은 지극히 엄중한 것이니,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고, 서종섭은 말하기를,
"국옥(鞫獄)이 있어 온 이래로 이와 같이 흉악한 옥사는 없었습니다. 3년 동안 단련하였던 그 의도는 선류(善類)들을 장살(戕殺)하는 데에 있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삭출시키는 것만으로 그들의 죄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그들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형정(刑政)이 분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승지 이교악(李喬岳)은 말하기를,
"옥사를 다스렸던 신하들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원찬(遠竄)을 청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고, 신방은 말하기를,
"군흉(群凶)들을 과연 중하게 죄줄 것이 없다고 한다면, 옥사 또한 변동(變動)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그들이 단련하여 죄를 만들어낸 정상이 밝혀져 옥사가 이미 허망한 것으로 결말이 났는데, 유독 옥사를 다스린 간흉(奸凶)들만 당연히 받아야 할 율(律)을 더하지 않는다면, 옥사가 어찌 도로 의심스러운 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현보는 말하기를,
"임금이 지니고 있는 너그럽고 엄격한 위엄은 하늘이 가진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너그럽게 할 곳에 혹시 엄격하게 한다든가 엄격하게 할 곳에 혹시 너그럽게 하여 당연함을 어긴다면, 시기(時氣)가 상도(常道)를 어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중도에 맞아야 바야흐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만일 처치가 각각 마땅함을 잃게 된다면, 인심을 어떻게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매양 너그럽게 용서하기를 힘쓰시는데, 그렇게 하면 신은 왕장(王章)이 펴질 수가 없어 여정(輿情)이 더욱 답답해 할까 우려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서종섭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너그럽게 용서하여 가볍게 하는 쪽을 따르라는 뜻으로 하교(下敎)하십니다만, 임인년의 옥관(獄官)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마음의 소재가 진실로 매우 흉참(凶慘)하였으니, 어떻게 관대한 법만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송필항은 말하기를,
"역적 목호룡을 엄호한 죄를 삭출시키는 율로 다스린다면 성궁(聖躬)의 무함을 신설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억울함을 신리시키는 것은 본디 여사(餘事)인 것인데, 그들의 죄를 어떻게 삭출시키는 데에만 그칠 수 있겠습니까? 먼 변방으로 찬배(竄配)시키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그때의 위관(委官)이었던 판의금(判義禁)은 결코 삭출시키는 데에서 그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삭출이 가벼운 조처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옥사를 다스린 신하가 전후에 몇 사람인지 모르는데, 원찬(遠竄)시키거나 정배(定配)시키더라도 죄를 징계시킬 수가 없겠지만, 그 기상(氣像)이 어찌 수참(愁慘)스럽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더욱 절통한 것은 정국(庭鞫)을 본부(本府)로 옮겨 설치한 것인데, 이는 마음대로 단련하기 위한 것으로 그 의도가 더욱 흉참하였다. 정국할 적에 옥사를 다스렸던 여러 신하들은 모두 먼 변방에 원찬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정국을 본부로 옮겨 설치한 뒤에 옥사를 다스렸던 여러 신하들은 임인년 겨울을 기한으로 모두 관직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을 이미 먼 변방에 원찬시키라고 하였으니, 그때의 위관(委官)은 지금 죽었더라도 추탈(追奪)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의 위관이 잘 조제(調制)하지 못했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죽은 사람에게 추탈을 가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더구나 대신은 일반 관료(官僚)들과는 다른 것인데, 어떻게 차마 추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김담이 말하기를,
"선인문(宣仁門)으로 몰래 들어갈 적에 이미 흉심(凶心)을 품고 있었으니, 이제와서 추탈하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현보는 말하기를,
"국법은 극히 엄중한 것인데, 어찌 대신이라 하여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조태구(趙泰耉)에게 추탈하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신방은 말하기를,
"예로부터 사화(士禍)를 일으킨 자들은 죄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김안로(金安老)는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사사(賜死)했고, 남곤(南袞)·심정(沈貞)은 모두 추탈했는데, 이는 곧 우리 국조(國朝)의 열성(列聖)들께서 간흉(奸凶)을 징토(懲討)한 전례인 것입니다. 실로 이것은 오늘날 성상(聖上)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들의 죄는 사림(士林)의 화(禍)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니, 추탈하는 법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한덕전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상소(上疏)하여 이기(李芑) 등의 관작을 추탈하게 한 뒤에도 당시 사람들이 오히려 정형(正刑)에 처하지 못했다 하여 한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선정(先正)의 정론(定論)에서 이미 추후 전형(典刑)을 바루는 것을 옳게 여겼으니, 조태구 등에게 추탈하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지난번 하교(下敎)에서 목호룡이 전하에게 누명(累名)을 가했는데도 징토할 것을 청하지 않고서 이에 ‘묻지 말라[勿問]’는 두 글자를 가지고 암담(黯黮)한 죄과(罪科)에 두려고 했다는 것은 이것이 신하로서 어떠한 죄인데 그래도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나 자신에 관한 일이므로, 다스리고 싶지 않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자신의 일이라고 하시지만, 신 등의 처지에서는 임금을 위해 역적을 징토하는 의리에 있어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봉휘(柳鳳輝)를 이미 토죄(討罪)하지 못했는데, 조태구 등을 또 추탈하지 않으려 하시니, 참으로 민망하고 답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이 토죄하기를 청하는 의리는 진실로 옳지만, 나도 주견(主見)를 지키는 것이 있다. 그리고 유봉휘의 소장은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역심(逆心)을 품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과연 역심이 있었다면 임인년에서 갑진년183)  에 이르기까지 어찌 자신의 계책을 성취시키지 못했겠는가?"
하였다. 김담이 말하기를,
"그 계책을 성취시키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인신(人臣)이 역심(逆心)을 품으면 베는 것입니다."
하고, 홍현보는 말하기를,
"유봉휘의 죄악을 어떻게 하루라도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으로 논한다면 장심(將心)을 먹어도 베는 것입니다. 더구나 유봉휘의 모역에 대한 절차가 이미 드러났는데, 어떻게 당론(黨論)이라는 것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조정에 있는 군신(群臣)들이 차마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조태구를 추탈하자는 법과 유봉휘를 정형(下刑)에 처하자는 아룀에 모두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의 처분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번의 간흉(奸凶)들이 없는 죄를 날조하고 단련하여 대신들을 주살(誅殺)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시비(是非)를 밝히고자 이 처분이 있게 된 것이요, 조금이라도 유봉휘의 소장(疏章)에 노여움을 품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영종 원년 8월 11일(병자)에 위훈(僞勳)을 삭거(削去)하고 태묘(太廟)에 고한 다음 교문(敎文)을 반사(頒賜)했는데, 그 교문에 이르기를,
"왕(王)은 이르노라. 아! 지난해에 있었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간흉(奸凶)들이 죽 늘어서서 꾸민 계모(計謀)가 참담하고 교묘하였는데, 결국 큰 옥사를 얽어내어 사류(士類)를 풀베듯이 죽였다. 진실로 그들의 마음이 극도에 이르렀던 것을 찾아보면 여기에서 그칠 뿐만이 아니었다. 이에 전후의 사단(事端)에 대해 그 원인과 곡절을 환히 거슬러 밝혀 만백성에게 포유(布諭)하니, 분명히 듣고 시끄러운 일이 없기 바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인자하고 명민하고 강직하고 정대하셔서 천명(天命)을 스스로 헤아리셨으므로, 사문(斯文)에 대한 일과 윤의(論義)에 대한 소중함에 더욱 삼가 마음을 기울이셨다. 따라서 신사년184)  과 병신년185)  에 있었던 두 번의 처분186)  은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엄하여 천지(天地)에 어그러지지 않는 도(道)를 일으켰다 할 수 있는데, 저 흉당(凶黨)들의 마음은 이와 배려(背戾)되어 진실로 평소 품은 마음이 있었으니, 어찌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원한을 품고 원망을 쌓아오면서 한 번 흉모(凶謀)를 이루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선왕(先王) 초년에 저위(儲位)가 비어 있어 인심이 의지할 데가 없고 서업(緖業)을 부탁할 데가 없자, 종사(宗社)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여 보잘것없는 나를 책립(策立)하였는데, 간당(奸黨)들은 이러한 시기를 이용하여 흉악한 계획을 부리기 위해 혐의를 무릅쓴 말을 장본(張本)으로 삼고 의혹스러운 이야기로 잇따라 동요하여 위태롭게 만들었으니, 한밤중에 합문(閤門)을 두드린 것과 북문(北門)으로 몰래 들어갔던 일은 그 의도가 지극히 흉악하고 그 계책이 지극히 은밀하였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은밀히 왕위(王位)를 옮기려 한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지극히 참독(慘毒)한 말이었다. 마침내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6명의 역적을 이끌고 와서는 흉악한 소장(疏章)을 선창(先倡)하여 올려 밖에서 전모(前茅)를 만들었고, 요사한 박상검(朴尙儉)은 김일경의 손발이 되어 은밀한 기회를 몰래 주선하여 안에서 해적(害賊)이 되어 안팎에서 선동하였으므로, 화(禍)가 경각에 박두해 있었으나, 다행히 선대왕(先大王)의 우애가 지극한 것을 힘입어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박상검은 곧바로 주륙(誅戮)을 당하였다. 이로부터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크게 의심하고 겁을 내어 계책을 세운 것이 날로 심각해져서 드디어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서둘러 변서(變書)를 올리게 하였다. 변서의 내용에 무함이 나에게 언급되었는데, 말이 매우 음흉하고 간사했으므로, 지의(旨意)의 목적한 바는 길가는 사람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상변(上變)이 앞서지도 않고 처지지도 않고 사행(使行)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에 기필코 있었으니, 그들의 속셈이 여기에서 더욱 남김없이 드러났던 것이다.
옥사가 일어나자마자 정국(庭鞫)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신들의 간사한 정상이 쉽사리 드러날까 우려한 나머지 조급하게 청대(請對)하여 국청을 본부(本府)로 옮기고, 옥사의 정황(淸況)을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또 묻지 말 것과 쓰지 말 것을 청하여 나를 암담(黯黮)한 가운데 두고, 인하여 다시 삼수(三手)라는 말을 창출해 내었다. 이른바 삼수란 하나는 칼이고, 하나는 독약이고, 하나는 국상(國喪)을 이용해서 교지(矯旨)를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칼이라는 것은 자루가 부러지고 녹이 슨 보통 칼에 불과하였는데, 이를 비수(匕首)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근사하지도 않았고, 약은 그것을 샀다는 사람의 성자(姓字)가 틀리고 썼다는 날짜가 어긋났으며, 교지(矯旨)에 이르러서는 이삼(李森)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낸 것을 하나의 큰 관건으로 삼았지만, 대신 제수받은 자를 또 외직(外職)에 의망(擬望)하여 내어보냈으니, 그 말이 저절로 파탄되고 말았다. 또 궁성(宮城)을 호위하려 했다는 말을 만들어 내어 하나의 긴요한 관건으로 만들었으나, 그들이 이른바 같이 의논했다는 대신은 실상 이미 사명(使命)을 받들고 국경(國境)을 나간 지 한 달이 되었으니, 없는 사실을 날조한 정상이 여기에서 더욱 드러나고 말았다. 저들이 지적하여 역적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삼수(三手)를 일컫는 것인데, 이 세 가지 일은 대부분 근거할 데가 없는 것이었고, 승복했다고 한 것도 죽은 뒤에 억지로 압서(押署)하게 한 것이 많았다. 예로 부터 난옥(亂獄)이 한없이 많았지만, 어찌 이렇게 허망한 옥사가 있었겠는가?
아! 사대신(四大臣)은 선조(先朝)의 덕망 있는 구신(舊臣)으로서 한 몸의 생사(生死)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몸바쳐 충성을 다할 것만을 힘썼는데, 위의(危疑)한 때에 정책(定策)한 데에서 참된 정성이 환하게 빛났으니, 이는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과 견주어 논할 수 있다. 억울하게 죄에 걸려 참옥한 화를 당하면서 굳은 의지로 변치 않은 자에 이르러서도 모두 정량(貞亮)하고 충순(忠純)한 신하인데, 온갖 음형(淫刑)을 가하여 차례대로 살육(殺戮)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욱 통분스러운 것은 토역(討逆)을 칭탁하여 역적 목호룡을 훈적(勳籍)에 기록하고 억지로 천승(千乘)의 지존(至尊)에게 강요(强要)하여 천례(賤隷)와 함께 피를 마시고 맹세하도록 함으로써 임금을 모롱(侮弄)하고 하늘을 속이면서도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것이 없다는 그것이다. 역적 김일경이 찬술한 문자(文字) 가운데 ‘종무(鐘巫)’와 ‘접혈(蹀血)이라는 등의 말은 더욱 흉참하고 패역(悖逆)스럽고 사리에 어긋나니, 더없이 흉악(凶惡)함이 어쩌면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는 그들이 다져먹은 마음이 실은 헤아릴 수 없는 죄안(罪案)을 날조하여 보호하는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살해하고, 인하여 임금을 침핍(侵逼)할 계제를 만들어 처음 먹었던 음계(陰計)를 통쾌히 시행하려는 데 있었으며, 문생 국로(門生國老)187)  라는 비유는 그 지의(指意)가 패만(悖慢)하여 더욱 신자(臣子)로서는 감히 할말이 못되는 것이었다.
아! 대순(大舜)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공효에 미더움이 있었던 것이 이와 같았는데, 돌아보건대 나는 평일에 자수(自修)하는 공부가 없어서 덕이 미더움을 받기에 부족하고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했으므로, 시랑(豺狼)같은 마음을 고치게 하지 못하여 독사 같은 혀가 갈수록 더욱 널름거리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충현(忠賢)들이 나란히 운명(殞命)하고 국맥(國脈)이 모두 끊어져서 넘어질 듯한 경복(傾覆)의 형세에 놓여 있었고, 내 몸도 조석(朝夕) 사이의 위태롭고 두려운 지경에 있게 되었다. 지난날 우리 조종(祖宗)께서 묵묵히 위에서 도와주고 선대왕(先大王)의 지극한 인애(仁愛)와 성덕(盛德)으로 안전하게 부지하여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어떻게 오늘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근본을 캐어 논해 보면 이 일종의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는 모두 숙종께서 사문을 크게 바로잡은 뒤에 기척(棄斥)했던 자들로서, 온갖 계책을 부려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능핍(淩逼)하여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만듦으로써 묵은 원한을 풀려고 했던 것이니, 그들이 주야로 경영(經營)한 것은 다만 이것뿐이었다. 이렇게 죄악이 큰 것은 실로 전사(前史)에서도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아!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인자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여 살생(殺生)을 꺼리는 뜻이 사륜(絲綸)에 애연히 넘쳐 흘렀었다. 그리하여 두 대신(大臣)이 참혹한 화(禍)을 입었을 적에도 환수(還收)하라는 윤음(綸音)을 내렸었고, 또 간간이 재구(災咎)를 이유로 자주 소방(疏放)시키라는 명을 내렸으니, 성의(聖意)의 소재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었다. 지난번의 화변(禍變)은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어찌 이로써 우리 선왕(先王)의 성덕(盛德)에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
이에 선왕의 유의(遺意)에 따라 이미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을 신원(伸冤)시키고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조성복(趙聖復)·이홍술(李弘述)·윤각(尹慤)·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김시태(金時泰) 등에게는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벼슬과 품계를 초증(超贈)하였다. 역적 김일경·목호룡 등은 모두 법에 의거하여 정형(正刑)에 처하였고, 이사상(李師尙)은 우선 말감(末減)의 율(律)에 따라 참작하여 교형(絞刑)에 처하여, 부사 공신(扶社功臣)을 혁파(革罷)하고 녹권(錄券)을 환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 흉적(凶賊)들은 혹은 찬출(竄黜)하기도 하고 혹은 수국(囚鞫)하기도 하였다. 주토(誅討)하는 법이 비록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체되었으나, 역(逆)·순(順)에 대한 분변은 신인(神人)을 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탕척(蕩滌)시키는 여지(餘地)를 당하여 파고(播告)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 중외의 신서(臣庶)들은 모두 나의 뜻을 알아서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올바른 자를 도와서 길이 자신들의 마음을 다해서 방가(邦家)를 보전하여 다스려지게 하라. 아! 신원(伸冤)과 토죄(討罪)를 천리의 공변됨에 따라서 하였으니, 국가(國家)를 계승하여 감에 있어 길이 소인(小人)의 화(禍)를 근절시켜야 하겠다. 이에 교문(敎文)을 반시(頒示)하니, 마땅히 죄다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의현(李宜顯)이 지어 올렸다.】 영종 원년 3월 1일에 우의정 정호(鄭澔)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사대신(四大臣)의 참화(慘禍)는 오로지 저사(儲嗣)를 세우고 정사를 대리하게 한 일에서 나왔는데, 새로운 의도를 부연해 내어 또다른 죄안(罪案)을 날조하였던 것은 궁성(宮城)을 호위하는 일과 양(養)자에 대한 일과 위(痿)자에 대한 일에 불과했습니다. 대체로 궁성을 호위하려 했다고 한 것에 대해 저들이 증거를 댄 것은 이삼(李森)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낸 것과 유취장(柳就章)을 중군(中軍)에 차임한 것에 불과한데, 이삼이 스스로 요구한 정상에 대해서는 온 조정이 함께 아는 것이고, 유취장이 중군이 된 것에 이르러서는 차제(差除)된 지 오래지 않아 곧 평안 병사(刑安兵使)에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했으니, 저들의 말과 같다면 어찌 곧바로 다시 이처럼 외직(外職)에 임명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그 밖에 회의(會議)했다고 한 날과 습조(習操)가 기약에 뒤졌다고 한 말은 그 날짜가 어긋나니, 그것이 허위임이 남김없이 탄로났습니다. 그리고 손바닥에 양(養)자를 쓴 것을 추대(推戴)하려 한 것으로 돌렸는데, 그것이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근사한 점이 있습니까? 그 당시 최석항(崔鍚恒)의 차자를 가지고 보더라도 이르기를, ‘추대한 사람에 대해 세 번이나 그 말을 바꾸었다.’고 했는데, 어찌 추대한 사람이 세 번이나 바뀌는 역옥(逆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조항만 가지고서도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판별할 수가 있습니다. 위(痿)자에 이르러서는 더욱 말이 사리에 맞지 않았으니, 위자에 어찌 별달리 깊은 뜻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손발이 마비된 사람도 위비(痿痺)라고 하는데, 이 하나의 글자로 어찌 선왕(先王)을 무폄(誣貶)하는 데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제혁(帝奕)188)  에다가 견주었으니, 저들이 도리어 임금을 무함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명(李健命)의 화(禍)는 세 신하에 견주어 보면 가장 혹독했으니, 거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신으로 가기를 자청(自請)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혹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 세 신하를 무함한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남김없이 허위임이 드러났으니, 다른 것이야 또 무엇을 논하겠습니까?"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그때 단련하여 없는 죄를 날조해 낸 것은 오로지 독약을 썼다는 한 가지 조항에 있었습니다. 김창집(金昌集)의 경우는 그의 손자 김성행(金省行)이 서덕수(徐德修)와 수작(酬酌)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김창집은 원래 거론된 일이 없었습니다. 이이명(李頤命)은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갔을 적에 독약을 사다가 이것으로 행흉(行凶)하여 누런 물을 토해 내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누런 물을 토해 낸 것은 경자년189)   12월에 있었는데 이이명의 사행(使行)이 돌아온 것은 신축년190)   정월에 있었으니, 이것이 이미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 아뢰기를, ‘정유년191)  에 금평위(錦平尉)가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에게 부탁하여 약을 사가지고 오게 했다.’고 했는데, 그 사행에는 장성의 역관이 원래 없었습니다. 그러자 장가(張哥)를 홍가(洪哥)로 바꾸어 자복(自服)하지 않고 장하(杖下)에서 죽었습니다. 대내(大內)에서는 김성(金姓)의 궁인(宮人)을 통하여 약을 써서 행흉(行凶)하려 했다고 했는데, 김성의 궁인이 대행조(大行朝)에 원래 없다고 하교(下敎)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근거없이 날조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서덕수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신축년(文丑年) 6월에 약을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여보냈고 동궁의 주방 나인을 통하여 이소훈(李昭訓)을 독살(毒殺)했다.’고 했으나, 신축년 6월에는 전하께서 바야흐로 사저(私邸)에 계실 때인데, 어찌 동궁의 주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책봉사(冊封使)의 선래(先來)가 나온 뒤에 변서(變書)가 즉시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내가 그때 변서를 보았는데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여 밤중에 창황하게 궁료(宮僚)들을 인접(引接)했었다. 추안에는 비록 흉언(凶言)을 발거(拔去)하였다 하나, 깊이 생각하여 보면 이것이 어떠한 지경에 이르는 말인가? 이제 내가 털끝 만큼이라도 스스로 혐의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신설(伸雪)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종사(宗社)를 소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며, 또한 대행조(大行朝)께서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던 뜻을 본받는 것이 아니다. 원통함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누명(陋名)을 씻어 준다면, 어찌 대행조의 덕의(德意)가 빛나지 않겠으며, 또한 선조(先朝)에서 사대신(四大臣)을 우러러 받드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국안(鞫案)을 고열(考閱)할 것도 없이 이미 그들이 역적이 아닌 것을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순문(詢問)을 일삼겠는가마는, 사체(事體)가 중대하기 때문에 널리 순문하는 것이다. 무함을 받은 사대신은 특별히 복관(復官)시키고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고, 이어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이홍술(李弘述)도 똑같이 복관(復官)시키라고 명하였다. 영종 원년 3월 7일(을사)에 우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은 이미 복관시켰는데, 그의 형 조성집(趙聖集)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더욱 슬퍼하고 있습니다. 율문(律文)에 형이 아우를 죽였을 경우에는 본래 사죄(死罪)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효종(孝宗) 때 형이 아우를 포살(炮殺)한 경우가 있었는데,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아우를 잡아서 불태울 때의 심술(心術)을 상상하면 너무도 절통(絶痛)하다.’ 하시고 드디어 처참(處斬)하라 명하고, 이어 이 뒤로도 정리(情理)가 절통한 경우에는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인하여 형이 아우를 죽인 경우 그대로 사율(死律)을 적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인하여 형이 아우를 죽인 경우 그대로 사율(死律)을 적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조성집의 마음은 진실로 자기 아우가 장차 극형(極刑)을 받게 될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그 사정이 딱합니다. 그런데도 형이 아우를 포살(炮殺)한 것과 같은 율문(律文)을 적용했으니, 원통한 일입니다. 신원(伸冤)시키고, 휼전(恤典)을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황하신(黃夏臣)의 죽음은 더욱 참독(慘毒)합니다. 그때 위조[僞作]한 조지(朝紙)192)  가 원근(遠近)에 전파된 것은 호중(湖中)의 인사(人士)로서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황하신은 이 때문에 항양(桁楊) 아래에서 죽었습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황하신은 충효(忠孝)로 일컬어진 사람이라 하니, 결코 거짓 비답(批答)을 만들어 낼 사람이 아닙니다. 의당 복관(復官)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영종 원년 4월 7일(갑술)에 금오(金吾)의 서례(胥隷)인 이만준(李晩俊)을 국문(鞫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승복하였다고 의계(議啓)하였다가 물고(物故)되었다고 아뢰고 뒤따라 올린 자는 장세상(張世相)이었는데, 장세상은 여러 차례 형신(刑訊)받아 정신이 황란(慌亂)하여 문목(問目)에 의거하여 여런 번 물었으나, 끝내 앙대(仰對)하지 못하고 목구멍 사이로 겨우 지만(遲晩)한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목과 지만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주의(主意)를 삼아서 초사(招辭)를 작성하였습니다. 다른 죄인(罪人)들을 잡아올 동안 정형(停刑)하기를 아뢰었다가 곧바로 승복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써서 낸 사람은 이우항(李宇恒)이었습니다. 그때 다른 죄인인 김극복(金克復)은 미처 잡아오기 전에 그의 병세(病勢)가 위중하여 경폐(徑斃)할까 우려하였는데, 즉시 지만(遲晩)으로 취초(取招)하면서 죄인은 기식(氣息)이 끊어질 듯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또한 문목과 지만이란 두 글자로 초사(招辭)를 만들었으나, 미처 결안(結案)하지 못한 채 물고(物故)되었습니다." 하였다. 영종 원년 4월 13일(경진)에 사간(司諫) 박치원(朴致遠)이 아뢰기를, "지난번 군간(群奸)들이 무옥(誣獄)을 구성한 일과 여러 신하들을 장살(戕殺)한 정상에 대해서는 성명(聖明)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십니다. 신도 그때 오랫동안 죄수로 갇혀 있었으므로, 한두 가지 목견(目見)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장세상의 일을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공초를 받기 위해 하옥(下獄)했을 때를 당하여 이미 산 사람의 모양이 아니었으므로, 본부(本府)의 서례(胥隷)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미 죽었다고 답하였습니다. 군명(君命)을 받들어 옥사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차마 이에 죽은 사람에게 결안 취초(結案取招)한 것으로 거짓 만들어 그것을 빙자하여 도륙(屠戮)할 계책을 성취시켰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서도 나머지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망스런 궁비(宮婢)와 역적인 환관(宦官)의 죄악이 환히 드러나서 전지(傳旨)가 내려졌는데, 즉시 봉행(奉行)하지 않은 채 석열(石烈)과 필정(必貞)을 혹은 집에서 자진(自盡)하게 하기도 했고, 혹은 철저히 구문(鉤問)하지 않고 즉시 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문유도(文有道)와 박상검(朴尙儉)을 신문(訊問)할 적에 그들이 화응(和應)한 정절(情節)을 실토하려고 하자, 급히 이졸(吏卒)을 꾸짖어 문득 입을 내리치게 하고 경골(脛骨)을 몹시 때려 빨리 죽기를 바랐는데, 이것은 신이 직접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도 외부(外部) 사람에게 알리지 말게 하라는 말이 궁료(宮僚)들에게서 나왔고, 바로 정형(正刑)에 처하자고 청하는 일이 또한 전석(前席)에서 발론되었으니, 그들의 안팎에서 체결하여 모의한 자취가 환히 드러나서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 원년 7월 16일 부사과 서종일(徐宗一)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덕수(徐德修)는 곧 신의 망형(亡兄)으로 부원군(府院君)에 추증(追贈)된 서종제(徐宗悌)의 장손(長孫)입니다. 앞으로 제사(祭祀)를 계승해야 될 사람인데, 그의 죄명(罪名)이 씻겨지지 않는다면, 예법(禮法)으로 헤아려 보건대 후사(後嗣)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망형의 후사를 계승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정(私情)이 애통하고 절박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그 가운데 이른바 결안(結案)이라는 것을 살펴보니, 독약을 썼다는 한 가지 조항은 더욱 위태롭고 두려운 일이었는데, 이것은 시일(時日)이 서로 어긋나서 사증(詞證)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연석(筵席)에서 그것이 허망한 일이었음을 통촉하고 계시다는 하교(下敎)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망형 집의 남모르는 원통을 신설(伸雪)할 수가 있을 것인데, 끝내 명백하게 반시(頒示)하는 거조가 없으니, 신은 의아스럽고 답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무고했다는 죄명(罪名)에 이르러서는 끝내 변해(辨解)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무고와 무복은 정절이 현격하게 다르고 따라서 죄명도 각기 다른 것입니다. 무고란 곧 죄없는 사람을 무함하여 죄에 얽어 넣음으로써 공상(功賞)을 바라는 것이고, 무복이란 곧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허망(虛妄)한 것을 사실이라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전대의 역사를 두루 열람하여 보면, 선량(善良)들 가운데 고문당한 끝에 억지로 자복한 경우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구별하여 무고로 결단하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 일에 대한 처분은 의도하는 바가 있다. 지난날 무옥(誣獄)을 단련하여 얽어낼 때 그 가운데 빠져서 무복한 사람은 또한 슬픈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신이 세가(世家)에 태어나서 일찍이 경전(經傳)을 배웠을 것인데, 어떻게 그 사이에 굽힐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마다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문목(問目) 이외에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정신(廷臣)에 이르기까지 악역(惡逆)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그뒤 삼사(三司)의 논계(論啓)에서 무슨 말을 인용하여 쟁론했겠는가? 지금 와서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고 뼈에 사무친다. 또 서덕수가 선조(先祖)의 충근(忠謹)한 기풍(氣風)을 실추시켰으니, 이것이 내 마음을 절통하게 하는 것이다. 대저 혈기(血氣)가 안정되지 않았을 적에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두서없는 난언(亂言)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무복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무고(誣告)의 율을 적용하도록 특별히 명한 것은 하나는 당일의 일을 절통하게 여겨서이고, 또 하나는 죽음에 임하여 무복하는 것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대의 소장을 보니 나도 슬픈 마음이 든다. 따라서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해서 그대 형의 영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무복으로 논하게 하라." 하였다. 영종 원년 7월 22일(정사)에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지난번 서종일(徐宗一)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서덕수(徐德修)에게 무고(誣告)의 율을 적용하지 말고 무복으로 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조흡(趙洽) 이외의 여러 사람들도 서덕수의 예(例)에 따라 똑같이 무복으로 논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 서덕수와 김성절(金盛節)의 무복으로 인하여 허다한 죄 없는 사람이 참혹하게 도륙을 당했다. 내가 그것이 무복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특명으로 무고의 율을 적용하라고 한 것은 내 마음에 몹시 미워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덕수를 이미 무복으로 논했으니, 여러 사람들도 다르게 할 수는 없다. 조흡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덕수와 똑같이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영종 원년 8월 3일(무진)에 사간 이의천(李倚天)이 상소(上疏)하기를, "지난번에 칼과 은(銀)으로 무옥의 사증(詞證)을 꾸며 만든 것은 오로지 흉적 이삼(李森)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흉적 이삼이 칼과 은을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한 것은 임인년193)   4월 초7일에 있었고, 국청에서 칼과 은을 문목(問目)에 첨입시킨 것은 임인년 4월 초10일에 있었습니다. 설령 백망(白望)이 덕사(德寺)에 묻어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미 직고(直告)하여 지시하지 않았다면, 포장(捕將)이 아무리 기찰(譏察)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묻혀 있는 곳을 알고서 곧바로 달려가서 마치 자신의 집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오듯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칼의 모양의 장단(長短)이나 자표(字標)가 목호룡(睦虎龍)이 말로 형용한 것과는 크게 서로 달랐고, 은화(銀貨)를 받아서 숨겼다는 근각(根脚)도 여러 죄수들이 공초(供招)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수색하여 찾아내었으니, 그들이 스스로 숨겼다가 스스로 찾아낸 자취가 마치 불을 보듯이 명백합니다. 독약에 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약을 사온 것처럼 스스로 원사(爰辭)194)  를 만들어 거짓으로 다짐을 받아낸 정상이 이미 업봉(業奉)의 공초에서 드러났습니다. 또 삼수(三手)라는 것을 조작해 내어 무옥을 얽어 만든 것은 오로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흉당(凶黨)들이 그를 원훈(元勳)으로 밀어올린 것은 이러한 때문입니다. 총융청(摠戎廳)·어영청(御營廳)의 은전(銀錢) 가운데 간곳이 없는 것이 수만여 냥(兩)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환관(宦官)·궁첩(宮妾)들과 체결하여 음흉한 계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자금(資金)으로 다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무릇 이런 정절(情節)들을 모두 신문해야 될 것인데, 어찌하여 구핵(究覈)하지 않은 채 곧바로 먼저 감단(勘斷)하여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흉적 이삼 등 여러 죄수들을 참작하여 조처하라는 명을 특별히 정지하시고 다시 국청으로 하여금 구핵(究覈)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이 진달한 칼과 은 등 네 조항의 일도 문목에 첨입시켜 간사한 정상을 알아냄으로써 형정(刑政)이 어긋나지 않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영종 16년195)   3월 2일(계사)에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임인 옥사(壬寅獄事)는 오로지 목호룡(睦虎龍)이 흉도(凶徒)들과 체결하여 무옥(誣獄)을 꾸며내어 일망타진할 계책을 시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근본을 구명(究明)하여 보면 바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무리들이 한 짓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목호룡(睦虎龍)이 감여술(堪輿術)로 나에게 써주기를 요구했는데, 내가 그를 만나보니, 형상(形狀)이 괴이하게 생겼고, 목가(睦哥)의 얼족(孽族)이란 말을 듣고 물리쳤다. 그랬더니 목호룡이 도리어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에게 빌붙어 역적 김일경과 체결하고 또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와도 친교를 맺었었다. 경(卿) 등은 김용택·이천기를 위해서 번안(翻案)시키려는 것인가?" 하자,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천기 등이 역적 목호룡과 서로 친했기 때문에 그의 속임수에 빠져들었으니, 참으로 천박해서 미워할 만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적이라는 이름에 이르러서는 어찌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유척기는 말하기를, "이천기 등이 목호룡의 고발을 받아 결국 김일경·박필몽(朴弼夢)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함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상길(沈尙吉)이 종부랑(宗簿郞)으로 있을 적에 나를 잠저(潜邸)에서 만나 본 일이 있었는데, 목호룡의 변서(變書)에 의하면 심상길·김성행(金省行)이 잠저로 찾아와서 나를 만났다고 말을 했다. 김성행은 목호룡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함께 추축(追逐)했으니,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의 행동이 이미 무상(無狀)하였으나, 역적이라는 이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억울합니다." 하고, 유척기는 말하기를, "김성행은 아홉 차례의 형신(刑訊)을 받았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장형(杖刑)을 참지 못하고 함부로 공초하는 데 이르렀다면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종사(宗社)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김성행의 힘이었습니다." 하였다. 영종 16년 3월 8일(기유)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우의정 유척기(兪拓基) 등이 임인 무옥(壬寅誣獄)에 대해 논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추대(推戴)하려 했다는 거짓 공초(供招) 때문에 국안(鞫案)에 쓰지 말라고 하기에 이르렀고, 끝내 처참한 살육(殺戮)을 행하였는데, 내가 어찌 정책(定策)을 사은(私恩)으로 여겼겠는가? 서로 윽박지르던 역당(逆黨)들은 모두 북면(北面)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또 마땅히 신리(伸理)시켜야 한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기를, "삼종(三宗)196)  의 혈맥(血脈) 가운데 단지 전하 한 분만 계셨는데, 일종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은밀히 이심(異心)을 품고 있었습니다. 김일경과 목호룡의 헤아릴 수 없는 계책은 실제로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으니, 어찌 몸서리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수(三手)의 설(說)은 일찍이 을사년197)   번안(翻案)할 적에 이미 전부 허위임이 탄로났고, 모두 분명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감히 다시 이에 대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김일경과 목호룡이 이미 주참(誅斬)되었는데도 무안(誣案)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희지(李喜之)의 영정시(永貞詩)198)  를 물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시(詩) 가운데 ‘꼭두각시 줄 끊어지니 참모습이 드러났다.[傀儡索絶露眞面]’고 한 글귀는 곧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 뜻은 군간(群奸)들이 성후(聖候)가 미령(未寧)하신 때를 틈타 내환(內宦)들과 체결하여 위권(威權)을 희롱하다가 마침내 패로(敗露)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역적 김일경이 억지로 주해(註解)를 붙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돌린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정행(永貞行)을 짓게 된 이유를 경이 어떻게 알겠는가? 고(故) 판결사(判決事) 서종일(徐宗一)이 명릉 참봉(明陵參奉)으로 있을 적에 이런 꿈을 꾸고 나서 사람들과 수작(酬酌)했기 때문에 이희지가 얻어듣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신이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만, 시를 짓는 사람이 가설(假說)한 말로 생각됩니다." 하였다. 영종 16년 13일(임오)에 임금이 삼수(三手)의 역안(逆案)을 고치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임인 국안(王寅鞫案)에, 계묘년199)   역적을 주토(誅討)하고 정시(庭試)를 보였는데, 이를 별과(別科)라고 했다. 이 때문에 김일경과 박필몽에게 단련(鍛鍊)을 받아 이름이 단서(丹書)에 기재되어 있는 사람도 모두 유사(攸司)에 명하여 소석(疏釋)하도록 하라." 하니,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 옥사는 한편으로 선조(先祖)에 간범(干犯)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에 간범이 되므로, 한 마디의 말이 어긋나면 양쪽 어딘가에 걸려 문득 사죄(死罪)로 의논하게 되니, 이것이 입을 열기가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신이 한림(翰林)으로 있었을 때 마침 목호룡이 고변(告變)하는 날 김일경이 패초(牌招)를 기다리지도 않고 판의금 심단(沈檀)과 함께 미리 입궐(人闕)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신은 그것을 역적 김일경의 무리들이 미리 알고 있었는가 의심했었습니다. 김용택(金龍澤)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오자 김용택과 신은 팔촌(八寸)의 친척이므로, 그의 인품이 잔열(孱劣)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목호룡이 고변한 것이 부실(不實)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옥사(獄事)가 이루어진 데에 이르러서는 외람되이 살해된 죄인이 많게 되자, 신은 마음속으로 무옥(誣獄)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감히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였다. 영종 17년200)   9월 14일(병자)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신이 이제 이정(釐正)하는 것으로 인하여 임인 국안(壬寅鞫案)을 상세히 살펴 보았는데,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는 의도와 귀취(歸趣)가 오로지 미천한 두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는 잠저(潜邸)에서 일을 보던 궁임(宮任)이었고, 또 하나는 후궁(後宮)의 족속이었는데, 대개 이 두 사람의 입을 빌어 성궁(聖躬)에 위핍(危逼)을 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역적 목호룡의 흉계가 이러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신 등은 분의(分義)에 있어 두 사람의 이름을 잠시라도 국안(鞫案)에 남겨 두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 17년 9월 23일(을유)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인 무안(壬寅誣案)을 고쳐야 할 일을 말했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다음의 일이다. 내가 세도(世道)를 진정시키려 하나 그 요점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사위(嗣位)한 뒤에 국시(國是)를 크게 밝혔다면,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신자로서 나를 버리고 누구를 섬기겠는가?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분당(分黨)이 처음에는 상대에게 이기기를 힘쓰는 것에 불과했으나, 병신년201)  에 한쪽 편 사람을 억제(抑制)한 것이 너무 심했던 탓으로 신축년202)  ·임인년203)  의 살육(殺戮)이 있기에 이르렀었는데, 을사년204)  에 내가 진정시키지 않았더라면 또 한마당 큰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목호룡의 처음 공초를 경 등이 보았는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재로와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 등이 모두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뒤에 마땅히 말하겠다. 설사 김용택과 이천기(李天紀)의 무리가 참으로 역적을 모의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 내 몸에 핍박된 것이 있으면, 당시 옥사를 다스리던 신하는 당연히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말하고서 먼저 목호룡을 다스렸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내가 그때 묵묵히 그들의 소위를 살펴 보건대 결코 그렇게 할 이치가 없었으므로, 사위(辭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先朝)의 혈속(血屬)으로는 단지 경종(景宗)과 나뿐이었으니, 태백(泰伯)과 중옹(仲雍)205)  의 고사(故事)와 같이 하려 해도 또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경자년206)   대상(大喪)이 있은 뒤 저들이 와서 조문(引問)할 적에 내가 처음에는 나가서 참여하려 했었지만, 혐의를 무릅쓴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병을 핑계대고 참여하지 않았었다. 종부시(宗簿寺)의 서리(胥吏)가 등본(謄本)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고, 조태구(趙泰耉)도 이 일 때문에 와서 나를 만났는데, 되풀이하여 말을 하였으므로 내가 웃었었다. 그뒤 조태구가 그 일을 발명(發明)하기 위해 구차스럽게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하였는데, 내가 사위(辭位)한 뒤 또한 목호룡의 형신(刑訊)을 청했어야 하나 하지 않았다. 신축년·임인년의 살육이 있었을 적에 경종께서 어찌 한 장의 판부(判付)라도 내린 적이 있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때에 하나의 판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한쪽을 모두 죽이려는 것인가?’ 하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나의 판부에서는 평소 홍계적(洪啓迪)을 미워하는 내용의 하교가 있었는데, 마음대로 하도록 맡긴다는 하교와 같은 것이었다. 원경하(元景夏)가 국안(鞫案)을 손에 쥐고 물에 던져버렸다는 말과 오광운(吳光運)이 이른바 보훈(寶訓)이라는 말은 모두 옳은 말이었다. 육현(陸玄)도 목호룡의 부류였으므로 이홍술(李弘述)이 이를 장살(杖殺)했던 것이다. 목호룡의 상변(上變)이 있기에 이르러서는 백망(白望)과 혼시(閽寺)207)  를 잡아들였고, 또 나의 처족(妻族)이라는 것을 이유로 서덕수(徐德修)를 잡아들였는데, 서덕수가 무엇을 알고 있었겠는가? 김용택의 무리가 의지하고 따르면서 추대한 자가 누구이겠는가? 내가 이미 임금의 자리에 있으니 어떻게 천지 사이에 이런 무안(誣案)을 남겨 둘 수 있겠는가? 만일 김용택의 무리를 역적으로 여긴다면, 따로 옥안(獄案)을 만들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김원재(金遠材)에 대한 일도 당연히 그 죄를 따로 다스려야 한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물과 불에 던졌다는 것은 원경하가 이미 말한 바 있고, 성상(聖上)께서도 불태워 없애라는 것으로 하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세(末世)의 통변(通變)시키는 방도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묵세(墨世)는 아무의 족인(族人)인데 또한 몰아붙여 박살(撲殺)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효장(孝章)208)  까지도 아울러 제거하기 위한 짓이었는데, 당시에는 경종(景宗) 이외에는 오직 나와 효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供招)에 임금의 마음을 도발시켰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것은 내가 이미 무함을 받은 것으로 추대하는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국안(鞫案)을 어떻게 지금까지 남겨 둘 수 있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른바 국안(鞫案)이라는 것을 근래에 비로소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오광운이 이른바 흉안(凶案)이라고 한 말이 옳습니다. 당시에 옥사를 다스리던 신하들이 선처할 방도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탓인데, 이것은 식견과 사리가 천단(淺短)했던 것 이외에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조태구가 혐의를 무릅썼다고 한 말은 진실로 경솔한 짓인데, 종부시(宗簿寺)의 서리(胥吏)를 불러서 말한 일 또한 어찌 대신들로서 할 수 있는 짓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이희지·김용택·이천기는 모두 인아(姻婭)요 지친(至親)이며, 심상길(沈尙吉)·정인중(鄭麟重)은 또 함께 공부한 사우(死友)입니다. 위시(僞詩)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섯 사람이 똑같은 심장(心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그들이 무상(無狀)하였으나, 이미 달리 드러난 사적(事跡)이 없는데도 그들의 마음을 미리 예측하여 이들이 반드시 역모를 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역적을 다스리는 방도이겠습니까? 만일 이 때문에 뒤섞어 역적에 몰아넣는다면 이는 목호룡의 무안(誣案)을 사실로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이른바 삼수(三手)란 말은 신이 믿지 않고 있습니다.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은밀하게 서로 체결하여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서로 전수(傳授)하듯이 계체(繼體)한 것을 광명 정대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으니, 이들의 죄안(罪案)을 명백하게 바룬다면 이른바 삼수(三手)라는 무안(誣案)은 그 유무(有無)가 그다지 관계될 것이 없는데, 신 등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그 국안(鞫案)에 들어 있는 사람을 탕척(蕩滌)시키고 싶습니다만, 김용택·이천기의 무리를 역적으로 죄를 준다면 이 죄안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삭제해 버리는 것은 일이 상규(常規)에 어긋나므로, 신은 감히 경솔하게 봉승(奉承)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백망(白望)은 칼로 하고 장세상(張世相)은 독약으로 했다는 것은 모두 단련하여 부회(傅會)한 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대저 김용택·이천기의 무리가 핑계하여 의지해 따랐기 때문에 목호룡이 이를 구실삼아 흉언(凶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호룡의 흉악한 무함이 있었기 때문에 무신년209)  에 역적들이 또 구실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들은 백도(白徒)210)  요 포의(布衣)로서 망령되게 참섭(參涉)하려고 했으니, 이것이 무상(無狀)한 짓이었다. 무신년의 역변(逆變)이 어찌 이 때문에 발생했다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실상 경(卿) 등을 위한 뜻이다. 경자년211)   대상(大喪)이 있은 뒤 받은 유교(遺敎)가 있었는데, 자전(慈殿)께서 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전하게 했으므로 내가 명을 받들고 나가서 전하였더니, 그때 여선장(呂善長)이 사관(史官)으로서 유교의 여부에 대해 물었었다. 지금 이 처분은 이것이 하나의 큰 추기(樞機)인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것은 큰 거조이니 초솔(草率)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경재(卿宰)들을 불러 모아서 순문(詢問)한 뒤에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이들에게는 역안(逆案)을 따로 만들어 두고, 삼수(三手)의 죄안(罪案)을 영원히 삭제해 버린다면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상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단지 의논을 올바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찌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이를 삭제할 뿐이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또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날 임금이 또 하교(下敎)하기를, "경자년(庚子年) 이후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라고는 단지 황형(皇兄)과 나뿐이었다. 목호룡의 흉서(凶書)에 비록, ‘동궁(東宮)을 위해 설원(雪冤)한다.’고 하였지만, 그 가운데는 군심(君心)을 도발시켰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나를 추대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내가 사위(辭位)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때의 조신(朝臣)들은 아무도 경동(驚動)하는 자가 없이 단지 흉언(凶言)을 국안에 쓰지 말도록 했을 뿐이었다. 나의 생각에는 그때의 대신(大臣)은 마땅히 정청(庭請)을 해서 먼저 목호룡을 토죄하리라고 여겼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그저 당론(黨論)에만 골몰했으니, 어찌 다른 일을 알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흉안(凶案)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장차 어떤 구실을 가지고 나를 섬길 수 있겠는가? 과거에 유판부(兪判府)212)  가 말하기를, ‘옥안(獄案)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내가 과연 엄하고도 굳센 임금이었다면 그때의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살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니, 어찌 옥안을 삭제하고 삭제하지 않은 것을 논할 것인가? 김용택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포의(布衣)로서 감히 분수에 넘친 소망을 품었던 탓으로 도리어 흉초(凶招)의 빙자거리가 되었다. 위시(僞詩)가 나오는 데 이르러서는 또 세 조정을 속이고 무함한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따로 죄안을 만들어 그 죄를 바루어야 한다. 여러 신하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무안(誣案)을 이정(釐正)만 할 뿐이라면 일이 구간(苟簡)한 데에 관계되니, 아주 불태워 없애어 근본을 단절시키소서.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에 거론되어 나온 부류들은 일체 모두 소설(昭雪)시키고 다른 죄를 시행한다면, 어찌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병상(李秉常)은 말하기를, "신이 승정원에서 임인 옥안(壬寅獄案)을 본 적이 있는데, 단락에 따라 베어내었으므로, 이미 목호룡의 흉언(凶言)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문안(文案)은 남겨 두어도 참고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의란(疑亂)의 자료만 될 뿐이니,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따로 죄안(罪案)을 만드는 데 이르러서는 신은 누구를 무슨 죄로 따로 논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목호룡이 역적이라면 목호룡의 무함을 받은 사람은 역적이 아닌 것이고, 목호룡이 역적이 아니라면 이들은 역적이 되는 것이니, 이 두가지에서 이 옥사를 결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목호룡은 이미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였는데, 목호룡의 무고에 들어 있는 사람을 또다시 논죄한다면, 이는 형정(刑政)이 뒤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윤양래(尹陽來)는 말하기를, "역적 목호룡의 공초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다는 것은 실로 신민(臣民)의 통분을 자아내는 것이니, 아주 삭제해 버리라는 성교(聖敎)가 매우 타당합니다." 하고, 김시형(金始炯)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대신과 함께 국안(鞫案)을 이정(釐正)할 적에 말하기를, ‘끝내 구간(苟簡)한 데에 관계된다.’고 했었으니, 이제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김용택의 무리에 대해서 따로 역안(逆案)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처분입니다." 하고, 이기진(李箕鎭)은 말하기를, "신이 지난봄에 하문하실 적에 물이나 불에 던져버리자고 청하였으니, 지금도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무고를 받아 죽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신이 일찍이 그들의 처지에서는 죽을 곳을 잘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호룡의 공초에 의해 무함당한 사람들을 일제히 소설(昭雪)시켜 준다면, 다른 죄를 범한 자들은 비록 죽이고 또 죽인다고 하더라도 신은 반드시 간쟁하지 않겠습니다만, 혹시라도 다 소설시켜 주지 못할 경우에는 도리어 국안(鞫案)을 불태우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중신(重臣)이 이른바 죽을 곳을 잘 얻은 것이라는 말은 너무 억양(抑揚)이 심하다." 하였다.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경자년(庚子年) 이후 삼종(三宗)의 혈맥은 오직 경종(景宗)과 전하(殿下)뿐이었으니, 신민(臣民)으로서 마땅히 한마음으로 우러러 추대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단지 당론(黨論) 때문에 이 당(黨)에서는, ‘이 분이 우리 임금이다.’ 하고 저 당(黨)에서는, ‘이 분이 우리 임금이다.’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경종과 전하께서는 놀림을 받은 것이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목호룡을 이미 주참(誅斬)했으니, 국안을 불태우는 것이 진실로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나 김용택의 무리에 대한 무역죄(誣逆罪)는 반드시 분명하게 바룬 뒤에야 후세(後世)에 변명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연석(筵席)의 체통은 지극히 엄중한 것인데, 박문수의 언어가 추솔하였으니, 추고(推考)하소서."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피차(彼此) 모두 까마귀입니다. 김용택과 이천기의 죄를 명백하게 바루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후세에 비난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석오(鄭錫五)가 말하기를, "하문하신 두 가지 일은 성교(聖敎)가 지당하십니다." 하고, 서종옥(徐宗玉)은 말하기를, "신임 옥사(辛壬獄事)는 오직 전하께서만이 공안(公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직접 대고(大誥)를 지어 목호룡·김일경·이천기 등의 역절(逆節)을 근원을 거슬러 논단(論斷)해서 팔방(八方)에 반고(頒告)한 후에 이 무안(誣案)을 쾌히 삭제한다면, 후세에 변명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김성응(金聖應)은 말하기를, "두 건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고, 서종급(徐宗伋)은 말하기를, "특별히 분명한 전교(傳敎)를 내리시어 삭제하는 의리에 대한 이유를 밝힌 후에 불태워 버리는 것이 진실로 옳겠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일체 모두 소설(昭雪)시키고 다른 죄로 죄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구성임(具聖任)은 말하기를, "이제 하교를 받드니 진실로 국가의 복입니다. 김용택의 무리들에게 죄를 줄만한 단서가 있다면, 그 죄로 죄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민응수(閔應洙)는 말하기를, "신이 의금부(義禁府)의 문안(文案) 가운데 고친 것을 보았더니, 매우 구간(苟簡)하였으니, 불태워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에 의해 죄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미진한 점이 있다면 장차 의혹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반드시 일체 소설(昭雪)시킨 후에야 그 몇 사람에 대한 일을 다시 의논할 수 있겠습니다." 하고,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이 일은 전하께서 이미 신충(宸衷)으로 결단을 내리셨으며, 또 세 대신에게 순문(詢問)하셨으니, 어찌 회의(會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정우량(鄭羽良)의 말은 잘못입니다."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삭제시키든지 보존시키든지 성교(聖敎)가 지당한 것인데, 누가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특별히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려 무안(誣案)을 불태워 없앤다는 뜻을 온 세상에 효유(曉諭)한 다음 불태워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신의 종형 신(臣) 김재로의 의논과 같습니다." 하고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신의 의견은 박문수와 다름이 없습니다. 전하의 효제(孝悌)한 덕은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시니, 저 효경(梟獍) 같은 무리가 하늘을 비난하는 말이 어찌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때때로 임금을 무함했다고 하는 하교가 있으셨고, 여러 신하들도 성상을 무함한 데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무슨 무함을 받으셨습니까? 주공(周公)은 관숙(管叔)·채숙(蔡叔)213)  의 망극한 무함을 받았지만, 후세에서 주공이 무함을 받았다고 한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하고, 이병상은 말하기를, "오광운(吳光運)의 소장 가운데 이미 이 말이 있었는데, 이제 이종성이 또 이런 말을 하니, 이는 무(誣)자의 본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무(誣)란 그런 일이 없는데도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인(聖人)일지라도 진실로 없었던 일을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무(誣)인 것입니다. 주공에게 어찌 본디 무함받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관숙·채숙이 주공을 무함한 것뿐입니다." 하자, 오광운은 말하기를, "이 국안(鞫案)이 역적의 원두(源頭)이니, 어떻게 유치(留置)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축년214)  의 사람들은 목호룡을 토죄(討罪)했고, 을사년215)  의 사람들은 이희지와 김용택을 국안에서 베어냈으니, 세도(世道)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경종(景宗)과 전하는 바로 한몸이니, 경종(景宗)에게 불궤(不軌)한 것이면 이는 전하에게도 불궤한 것이고, 전하에게 불궤한 것이면 이는 경종에게도 불궤한 것입니다. 이희지·김용택·김일경·목호룡은 동일한 역적입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역적은 하나이므로, 나누어서 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오광운이 전에 올린 소장(疏章)에서 대조(大朝)의 역적이고 동궁(東宮)의 역적이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 그의 대답이 전의 소장 내용과 다르니, 반드시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하자, 오광운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소장은 과연 잘 짓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은 말하기를, "이제 전하께서 의리(義理)를 분명히 바루어 김일경과 목호룡의 역적을 토죄하였고, 또 이희지와 김용택의 죄를 단정(斷定)하셨으니, 이는 실로 공정(公正)한 일입니다." 하고, 정준일(鄭俊一)은 말하기를, "목호룡의 흉초(凶招)를 제거하고 이희지·김용택의 죄상(罪狀)을 밝혀 의리를 일정(一定)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을 마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에게 이의(異議)가 없으니 한 가닥 의리가 진실로 없어지지 않았다. 대고(大誥)는 내가 마땅히 지어서 보이도록 하겠다. 임인년(壬寅年)에 다시 고묘(告廟)했었으니, 지금도 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고묘(告廟)할 것을 명하였다. 영종 17년 9월 25일(정해)에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목호룡(睦虎龍)이 무고(誣告)한 옥안(獄案)을 불태우게 하고,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임인년(壬寅年)의 국안(鞫案)은 지난 역사에 없었던 것이므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도리에 있어서 비상(非常)한 거조를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본받을 것이 못되니, 뒷사람들은 감히 사의(私意)로써 이를 전례(前例)로 원용(援用)하여 우리의 구장(舊章)을 혼란시켜서야 되겠는가? 이 하교를 사각(史閣)에 넘겨 주어서 뒷날의 훈계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영종 22년216)   9월 2일(을미)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소장(疏章)이 나온 뒤에 조정에서 역모라 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했는데, 그때 신이 겸설서(兼說書)로 숙직하고 있었습니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보덕(輔德)의 직책으로서 와서 신에게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노론(老論)들에게 의심받은 나머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데, 이를 역모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습니다. 신의 당초의 소견은 이와 같았는데, 신축년217)  에 이르러서는 출처(出處)가 무상(無狀)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유봉휘는 자신의 심사를 저군(儲君)에게 미처 폭백(暴白)하지 못하였으니, 의리상 당연히 문을 닫고 자수(自守)함으로써 본심을 스스로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방자하게 행공(行公)하면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서로 안팎이 되었는데, 그의 처지와 인망(人望)이 김일경·박필몽에게 견줄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습니다. 그때의 청론(淸論)이 김일경과 박필몽을 토죄할 수 없었던 것은 유봉휘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의 형이 마음속으로 늘 분통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또한 이러한 곡적을 통렬하게 진달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스스로 불충(不忠)했음을 자책한 하나의 단락이기도 합니다. 무신년218)  의 역변(逆變)이 있은 뒤 신이 안죽(安竹)에서 돌아와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에게 말하기를, ‘유상(柳相)의 소장은 그 본심을 따져보면 그것이 역모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인(南人)·소론(少論)이 국가를 저지한 것은 실지로 이 소장이 창도한 것이니, 역란(逆亂)이 끝난 뒤에는 의당 본심을 조사하여 추론(追論)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였더니, 해은(海恩)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신이 유봉휘를 논한 것은 이러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였다. 영종 42년219)   10월 26일(임술)에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서종일(徐宗一)이 서덕수(徐德修)의 신설(伸雪)을 청할 적에 고(故)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서덕수는 무복(誣服)입니다.’ 했는데, 그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었다. 김용택(金龍澤)은 처지가 어떠했는가? 심상길(沈尙吉)은 괴이한 모양이었고 정인중(鄭麟重)은 떠벌이였다. 비록 대훈(大訓)220)   중에서는 영원히 고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서덕수와 백망(白望)을 소설(昭雪)시켰으니, 김용택도 소설시켜야 한다. 김용택은 위의 네 사람과는 처지가 더욱 다르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다섯 사람의 마음은 모두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감추고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성모(聖母)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용택을 대훈(大訓)에 남겨 두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책비(責備)하는 마음에서 대훈(大訓)을 남겨 둔 것이지 처음에 역모를 했다고 해서 남겨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복택(金福澤)의 죽음은 억울한 것으로서 아무 허물이 없었다. 김용택을 소설(昭雪)시켰으니, 삼전(三殿)에 배알할 수 있게 되었다. 우상(古相)에 임명된 것은 오히려 말절(末節)이다." 하고, 도승지 윤득우(尹得雨)를 시켜 대훈(大訓)을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황형(皇兄)의 마음도 오늘날 나의 마음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읽어가다가 ‘모두 역모로 결단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 글귀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성의(聖意)는 역률(逆律)로 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김용택이 우두머리인데다 지처(地處)가 높았던 탓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지처 때문이지 그의 죄는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중대한데 경 등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김치인이말하기를, "이미 그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오늘날의 처분을 어찌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서지수(徐志修)는 말하기를, "그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처분이 진실로 지당합니다." 하고, 제조 박상덕(朴相德)은 말하기를, "이름이 이미 대훈(大訓) 속에 기재되어 있으니, 어떻게 해야 신설할 방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이름을 베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정인중의 무리들은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였는데, 김치인이 말하기를, "선신(先臣)이 매양 말하기를, ‘바라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했었고, 이 일을 성상께 아뢴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대훈(大訓) 가운데 모두 역모로 결단하라는 하교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그가 역모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절로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신은 선신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오늘날 대답했습니다." 하고, 박상덕은 말하기를, "모두 나라를 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고, 서지수는 말하기를, "좌상이 아뢴 역모가 아니라는 말이 옳습니다. 실은 역모가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공심(公心)이다. 경의 말이 옳다."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신이 감히 공심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선신(先臣)에게서 들은 것이 그러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선경(先卿)들의 마음을 알았다. 을해년221)   이전에도 알고 있었는가?" 하자, 서지수가 말하기를, "단지 바란다고 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고, 박상덕은 말하기를, "하늘의 공을 탐냈다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역적은 아니었습니다." 하고, 김치인은 말하기를, "대훈(大訓)의 끝에다 따로 다섯 줄의 성교(聖敎)를 적어서 이들을 신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글자를 긁어내고 다른 글자로 보완함이 옳다." 하였다. 김치인은 말하기를, "긁어내고 보완한다면 택배(澤輩)라는 택(澤)자를 차(此)자로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정인중의 무리들도 모두 대훈(大訓) 속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겠는가?" 하자, 서지수가 말하기를, "이들이 모두 벗어나는 것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김치인은 말하기를, "대훈(大訓) 가운데, ‘가탁(假托)하여 의지해 따랐고 속이고 무함하는 패역(悖逆)한 짓을 하였으므로, 모두 역모로 결단한다.’고 한 등류의 자구(字句)는 마땅히 긁어내고 보완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이 헤아려서 긁어내고 보완하도록 하라."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아래에서 산개(刪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성상께서 조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국시(國是)’라는 자구(字句)를 쓰라고 말을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국시(國是)’라는 두 글자는 당초 시비(是非)를 논할 것이 없었던 것이니, 의리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참으로 좋겠습니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아! 을해년222)   이후 의리가 더욱 밝아져 대훈(大訓)의 구어(句語) 가운데 또한 이정(釐正)할 것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김용택은 이희지·심상길·이천기·정인중의 무리와는 처지(處地)가 다르다. 오늘 시임(時任)과 원임(原任) 대신에게 이미 나의 마음을 유시(諭示)하였다. 따라서 원래의 대훈(大訓) 가운데 있는 여기에 관계된 글귀에 부표(付標)하여 내리니, 이에 의거하여 긁어내고 보완 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종 42년 10월 27일(계해)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훈(大訓) 가운데 정인중 무리들의 명자(名字)는 그대로 두고 싶다." 하니, 좌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어제의 연석(筵席)에서 이미 바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역모가 아닙니다. 긁어내고 보완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기 의견을 진달하라." 하였는데, 좌참찬 홍성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는 말하기를, "김용택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나머지 4인도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여사(餘事)일 뿐입니다. 그리고 대체(大體)를 살필 적에 소소한 것은 생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정밀하게 말하겠다. 이 무리들이 조금은 본의 아니게 빠져든 점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大體)를 가지고 말한다면 한모퉁이 청구(靑丘)223)  에 오늘날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삼종(三宗)의 혈맥 가운데 단지 황형(皇兄)과 내가 있다는 것을 누가 몰랐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참으로 지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를 배반한 자는 달아날 곳이 없을 것이다." 하고, 남태제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이르기를, "경의 말은 준론(峻論)이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남태제가 네 사람이 전혀 바라는 마음이 없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앙달(仰達)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네 사람을 일례(一例)로 김용택에게 견준 것은 남태제의 말이 지나쳤다." 하였다. 남태제가 말하기를, "다섯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대체(大體)만 논하고, 그들의 행신(行身)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형조 판서 심수(沈鏽)는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용택은 처지가 나라와 휴척(休戚)을 같이해야 할 위치이다." 하였다. 남태제는 말하기를, "이희지의 처지도 나라와 휴척을 같이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단지 삼종(三宗)의 혈맥만 가지고 하교하셨습니다. 만일 해동(海東)의 신자(臣子)들이 과연 모두 오늘날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찌 무신년224)  의 역란(逆亂)이 발생했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다섯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면 저절로 명백해질 것입니다." 하고, 김치인은 말하기를, "신도 이희지가 국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는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달리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합문(閤門) 밖에서 남태제와 수작(酬酌)할 적에 신도 전부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하고, 행 사직(行司直) 구선행(具善行)은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판윤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처분이 이미 내렸는데 신도 여러 신하들의 의견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과 나라를 위한다는 것을 나누어 말한다면, 나라를 위한 것이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하고, 승지 심관(沈鑧)은 말하기를, "바랐다는 것은 그들의 행신(行身)에 관계된 것이고 나라를 위했다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하고, 교리 정창순(鄭昌順)은 말하기를, "어제의 하교는 이것이 진실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미혹(迷惑)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남태제가 주달한 ‘다섯 사람은 구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말이 옳습니다. 바란 것이 있는지의 여부는 비교하여 논할 필요가 없고, 다만 나라를 위한 충성만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덕수·백망·김용택 세 사람은 나라와 함께 죽었으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를 배반한 자를 어떻게 조선(朝鮮)의 신자(臣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다시 정창순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이르기를, "네 사람의 일이 과연 어떠한가?" 하자, 정창순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위하여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반드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수보(酬報)하는 도리는 성취한 것이 어떠한가를 살폈습니다. 따라서 충성을 바치려 한 정성만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창순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정창순이 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역안(逆案)으로 결단한다는 것은 반드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정창순의 말이 옳다. 한(漢)·당(唐)·송(宋)의 여러 명신(名臣)들 또한 어찌 바라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소(簫)·조(曹)·마(馬)·등(鄧)225)  의 반부(攀附)226)  를 어찌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처분에 이미 바라는 것이 있다고 하교하셨으니, 대훈(大訓) 가운데 역안(逆案)에 관계되는 말은 일일이 긁어내고 보완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편차(編次)하는 사람인 조명정(趙明鼎)에게 명하여 여러 구절(句節)을 독주(讀奏)하게 하고, 역안(逆案)에 관계되는 말은 다시 고쳐 보완하게 하였는데, 이를 마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미 대훈(大訓)을 모두 이정(釐正)했으니, 끝내 첨부되어 있는 고묘문(告廟文)과 반교문(頒敎文) 등도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옳은 말이다. 발거(拔去)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순문(詢問)하실 적에 여러 신하들이 앙대(仰對)한 데에서 공의(公議)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고, 조명정은 말하기를, "신은 대훈(大訓)을 처음 간행하였을 때 주서(注書)로서 입시했었고 또 편차(編次)했었는데, 이제 고쳐 보완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훈(大訓)을 긁어내고 보완한 뒤 한 건을 대내(大內)에 들이고, 즉시 반포(頒布)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임인년(壬寅年) 군흉(群凶)들의 죄를 어떻게 이루 주살(誅殺)할 수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천신(薦紳)으로부터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저사(儲嗣)를 세워 대리하게 하자는 데에 관계되어 연루되었으면, 한 사람도 주륙(誅戮)이나 찬축(竄逐)을 혹시라도 면하지 못하였었다. 예로부터 간흉(奸凶)들이 단련(鍛鍊)하여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수없이 많았지만, 이 옥사처럼 참혹하고도 포악한 경우는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까지 옥례(獄隷)를 시켜 대신 서압(署押)하게 하여 결안(結案)을 만들어 낸 사례가 많았으니, 이로써 살펴보건대 이른바 승복했다고 하는 것은 모두 흉당(凶黨)들이 두찬(杜撰)한 것임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 없다. 묵세(墨世)는 대전 나인(大殿內人)으로 그때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적신(賊臣)들은 그가 어리고 나약한 것을 속여서 협박하면 무복(誣服)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으로 옥사를 실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묵세는 다만 한 마디 말이라도 성상에게 미치게 될까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다가, 결국 형틀 아래에서 운명(隕命)하고 말았는데, 전후 형신(刑訊)을 받은 것이 모두 13차례였다. 아!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天性)은 사람들이 누구나 지니고 있어 없어지지 않는 것인데, 저 옥사를 다스리던 역적들은 무슨 심장을 가졌기에 그리한단 말인가?  김성행(金省行)이 형신받을 적에 옥졸(獄卒)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의 상투를 단단히 잡아매어 조금도 동요됨이 없게 하라.’ 했는데, 이는 그때 옥사를 다스리던 사람이 죄수의 상투가 조금만 끄덕거리는 것을 보면 문득 승복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옛날의 절사(節士)인들 어찌 이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영종(英宗)이 누차 그 말을 거론하면서 그의 의열(懿烈)을 불쌍하게 여겨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그의 충성을 숭장(崇奬)하였으니, 역적들이 없는 죄를 꾸며서 법망(法網)에 끌어넣은 죄상은 더욱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백시구(白時耉)는 무과(武科)로 벼슬에 나아가 죽을 때가 가깝게 되었으니, 흉당(凶黨)들이 가장 미워한 경우가 아니었으면 기필코 죽이려는 죄과(罪科)에 두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백시구가 국옥(鞫獄)에 나아가 신문받을 적에 눈을 부릅뜨고 큰 목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숙장(宿將)들이 모두 도륙(屠戮)되었으니, 혼자서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다. 어찌하여 속히 죽이지 않는가?’ 했으므로, 흉당들이 노하여 살해한 것이다. 이광좌(李光佐)가 영종(英宗)에게 제주(提奏)한 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그때 옥사를 다스리던 여러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으니, 아! 통분스럽다. 금상(今上) 5년 신축년(辛丑年)에 원릉(元陵)에 거둥하여 사충사(四忠祠)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고, 김성행(金省行)에게 한 자급(資級)을 추증(追贈)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서덕수(徐德修)에게 집의(執義)를 증직(贈職)하게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태세(太歲)가 신축(辛丑)이 든 이 해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잠저(潜邸)에서 들어가 저위(儲位)를 계승했는데, 이제 구력(舊曆)이 되돌아왔으나, 나 소자(小子)는 잊지 못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펼 수 있는 데가 없다. 아!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열조(列朝)의 심법(心法)을 계술(繼述)하고 삼종(三宗)의 혈맥을 이어 요순(堯舜)처럼 전수(傳授)함에 있어 인의(仁義)가 극진했으므로, 우리의 4백 년 종사(宗社)가 이를 힘입어 태산(泰山)과 반석처럼 편안해졌으니, 아! 성대하도다. 당시에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같은 이들이 힘을 합하여 익대(翊戴)하다가 자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사(殉死)했으니, 그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찬란하게 번뜩이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천지(天地)에 세워놓아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어 영원히 천하 만세에 할말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행하게도 당시에 효경(梟獍)같이 사나운 무리들이 대대적인 무옥(誣獄)을 일으켜 이에 참화(慘禍)를 꾸며내었으니, 아!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 때부터 포장(褒奬)하라는 하교가 누차 사륜(絲綸)에 언급되었고, 강가에 사당(祠堂)을 지어서 사충(四忠)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렸으니, 성인(聖人)이 천하를 공변되게 다스리는 마음으로 이런 은수(恩數)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공의(公議)는 백년을 기다리지 않고 정해진다는 것이 또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거듭 구갑(舊甲)을 만나 원릉(原陵)을 배알하게 되니, 나 소자(小子)가 어찌 느낌을 표현할 방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사충사(四忠祠)에 승지를 보내어 길일(吉日)을 가려 치제(致祭)하게 하고, 그들의 자손을 선조(選曹)227)  로 하여금 녹용(錄用)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그때 고굉(股肱)228)  의 손자와 주액(肘腋)229)  의 지친으로서 사생(死生)을 가름할 즈음에 만일 동요가 있었더라면, 아! 오늘의 종사(宗社)가 편안히 모셔질 장소가 있었을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 화(禍)를 입은 사람들에게 차례로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있었는데, 한 사람만이 홀로 누락되었으므로, 여론(輿論)이 지금까지 차탄(嗟歎)하고 있다. 일찍이 내가 사위(嗣位)한 처음에 하려고 하였으나, 한 사람에게 여러 번 증직(贈職)을 내리는 것 같아서 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그때 선왕의 하교를 소자(小子)가 분명히 받들어 들었는데, 더구나 그 자손들을 녹용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어찌 표장(表章)하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증 이조 참의(吏曹參議) 김성행에게 한 자급을 추증하고, 고(故) 학생(學生) 서덕수에게는 특별히 사헌부 집의를 추증하라. 모두 오늘 하비(下批)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4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170]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171]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172] 계묘년 : 1723 경종 3년.[註 173] 정유년 : 1717 숙종 43년.[註 174]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17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76] 양남(兩南) : 전라도와 경상도.[註 177] 두 대신(大臣) : 김수항(金壽恒)과 송시열(宋時烈).[註 178] 직부(直赴) : 전시(殿試)에 나아갈 자격을 얻는 일.[註 179] 소하(疏下) : 연명(聯名)으로 올리는 소장(疏章)에서 맨 앞에 서명한 소두(疏頭) 뒤에 이어 서명한 사람.[註 180] 문랑(問郞) : 문사 낭관(問事郞官).[註 181]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182] 갑술년 : 1694 숙종 20년.[註 183] 갑진년 : 1724 경종 4년.[註 184] 신사년 : 1701 숙종 27년.[註 185] 병신년 : 1716 숙종 42년.[註 186] 두 번의 처분 : 신사년(1701)에 장희빈(張禧嬪)을 처형한 일과 병신년(1716)에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 훼판(毁板)과 선정(先正) 호칭의 금지 및 윤증(尹拯)의 선정 호칭을 금한 일.[註 187] 문생 국로(門生國老) : 당(唐)나라 말기에 환관(宦官)들이 권한을 제멋대로 휘둘러 천자(天子)를 마치 시관(試官)이 문생(門生)을 보듯이 했으므로 문생 천자(門生天子)라 했고, 천자를 마음대로 폐립(廢立)하고 국로(國老)를 칭하였으므로 정책 국로(政策國老)라 했음.[註 188] 제혁(帝奕) : 동진(東晉)의 황제인데, 환온(桓溫)에게 폐위(廢位)되어 해서공(海西公)이 되었으므로 역사에 폐제(廢帝)라고 부름.[註 189]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190]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91] 정유년 : 1717 숙종 43년.[註 192] 조지(朝紙) : 조보(朝報).[註 193]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194] 원사(爰辭) : 공사(供辭).[註 195] 16년 : 1740 경신년.[註 196] 삼종(三宗) : 효종(孝宗)·현종(顯宗)·숙종(肅宗)을 이름.[註 197]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198] 영정시(永貞詩) : 영정은 당(唐)나라 순종(順宗)의 연호(年號). 순종은 중풍(中風)을 앓아 벙어리가 되었으므로, 항상 궁궐 깊은 곳에 휘장을 드리우고 정사(政事)는 오로지 환관(宦官) 이충언(李忠言)과 소용(昭容) 우씨(牛氏)에게 맡겼음. 따라서 임금이 무능하여 권세를 아랫사람에게 의탁한 비유로 쓴 시를 말함.[註 199] 계묘년 : 1723 경종 3년.[註 200] 17년 : 1741 신유년.[註 201] 병신년 : 1716 숙종 42년.[註 20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203]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204]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205] 태백(泰伯)과 중옹(仲雍) : 태백은 주 태왕(周太王)의 장자(長子)이고 중옹은 차자(次子)였는데, 태왕의 뜻이 막내 동생인 계력(季歷)에게 있는 것을 알고 둘이 함께 왕위를 피하여 형만(荊蠻) 지방으로 달아났음.[註 206]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207] 혼시(閽寺) : 박상검을 가리킴.[註 208] 효장(孝章) : 영조의 장자. 진종(鎭宗).[註 209]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210] 백도(白徒) : 과거(科擧)를 보지 않고 관원이 된 사람.[註 211] 경자년 : 1720 숙종 46년.[註 212] 유판부(兪判府) : 유척기(兪拓基)를 이름.[註 213] 관숙(管叔)·채숙(蔡叔) : 모두 주(周)나라 때 문왕(文王)의 아들로 주공(周公)과는 형제였는데,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공을 무함하고 주왕(周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받들어 모반하였으나 결국 주공에게 피살(被殺)되었음.[註 214]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215]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216] 22년 : 1746 병인년.[註 217] 신축년 : 1722 경종 원년.[註 218]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219] 영종 42년 : 1766 병술년.[註 220] 대훈(大訓) : 영조(英祖)가 목호룡(睦虎龍)과 김일경(金一鏡)의 죄를 다스리고, 충역(忠逆)을 밝혀 백성들에게 반포한 훈유문(訓諭文)임.[註 221] 을해년 : 1755 영조 31년.[註 222] 을해년 : 1755 영조 31년.[註 223] 청구(靑丘) : 우리 나라.[註 224]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225] 소(簫)·조(曹)·마(馬)·등(鄧) : 소·조는 소하(簫何)와 조참(曹參)으로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공신(功臣)임. 마·등은 마원(馬援)과 등우(鄧禹)의 광무 황제(光武皇帝)를 도와 왕업을 이룩한 공신임.[註 226] 반부(攀附) :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는다는 뜻으로, 영주(英主)를 섬겨 공명(功名)을 세움을 이른 말.[註 227] 선조(選曹) : 전조(銓曹).[註 228] 고굉(股肱) :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註 229] 주액(肘腋) : 임금의 가장 가까운 측근.
영종 원년 3월 1일에 우의정 정호(鄭澔)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사대신(四大臣)의 참화(慘禍)는 오로지 저사(儲嗣)를 세우고 정사를 대리하게 한 일에서 나왔는데, 새로운 의도를 부연해 내어 또다른 죄안(罪案)을 날조하였던 것은 궁성(宮城)을 호위하는 일과 양(養)자에 대한 일과 위(痿)자에 대한 일에 불과했습니다. 대체로 궁성을 호위하려 했다고 한 것에 대해 저들이 증거를 댄 것은 이삼(李森)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낸 것과 유취장(柳就章)을 중군(中軍)에 차임한 것에 불과한데, 이삼이 스스로 요구한 정상에 대해서는 온 조정이 함께 아는 것이고, 유취장이 중군이 된 것에 이르러서는 차제(差除)된 지 오래지 않아 곧 평안 병사(刑安兵使)에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했으니, 저들의 말과 같다면 어찌 곧바로 다시 이처럼 외직(外職)에 임명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그 밖에 회의(會議)했다고 한 날과 습조(習操)가 기약에 뒤졌다고 한 말은 그 날짜가 어긋나니, 그것이 허위임이 남김없이 탄로났습니다. 그리고 손바닥에 양(養)자를 쓴 것을 추대(推戴)하려 한 것으로 돌렸는데, 그것이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근사한 점이 있습니까? 그 당시 최석항(崔鍚恒)의 차자를 가지고 보더라도 이르기를, ‘추대한 사람에 대해 세 번이나 그 말을 바꾸었다.’고 했는데, 어찌 추대한 사람이 세 번이나 바뀌는 역옥(逆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조항만 가지고서도 그것이 허망한 것임을 판별할 수가 있습니다. 위(痿)자에 이르러서는 더욱 말이 사리에 맞지 않았으니, 위자에 어찌 별달리 깊은 뜻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손발이 마비된 사람도 위비(痿痺)라고 하는데, 이 하나의 글자로 어찌 선왕(先王)을 무폄(誣貶)하는 데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필코 제혁(帝奕)188)  에다가 견주었으니, 저들이 도리어 임금을 무함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명(李健命)의 화(禍)는 세 신하에 견주어 보면 가장 혹독했으니, 거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신으로 가기를 자청(自請)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혹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 세 신하를 무함한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남김없이 허위임이 드러났으니, 다른 것이야 또 무엇을 논하겠습니까?"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그때 단련하여 없는 죄를 날조해 낸 것은 오로지 독약을 썼다는 한 가지 조항에 있었습니다. 김창집(金昌集)의 경우는 그의 손자 김성행(金省行)이 서덕수(徐德修)와 수작(酬酌)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김창집은 원래 거론된 일이 없었습니다. 이이명(李頤命)은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갔을 적에 독약을 사다가 이것으로 행흉(行凶)하여 누런 물을 토해 내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누런 물을 토해 낸 것은 경자년189)   12월에 있었는데 이이명의 사행(使行)이 돌아온 것은 신축년190)   정월에 있었으니, 이것이 이미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 아뢰기를, ‘정유년191)  에 금평위(錦平尉)가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에게 부탁하여 약을 사가지고 오게 했다.’고 했는데, 그 사행에는 장성의 역관이 원래 없었습니다. 그러자 장가(張哥)를 홍가(洪哥)로 바꾸어 자복(自服)하지 않고 장하(杖下)에서 죽었습니다. 대내(大內)에서는 김성(金姓)의 궁인(宮人)을 통하여 약을 써서 행흉(行凶)하려 했다고 했는데, 김성의 궁인이 대행조(大行朝)에 원래 없다고 하교(下敎)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근거없이 날조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서덕수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신축년(文丑年) 6월에 약을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여보냈고 동궁의 주방 나인을 통하여 이소훈(李昭訓)을 독살(毒殺)했다.’고 했으나, 신축년 6월에는 전하께서 바야흐로 사저(私邸)에 계실 때인데, 어찌 동궁의 주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책봉사(冊封使)의 선래(先來)가 나온 뒤에 변서(變書)가 즉시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내가 그때 변서를 보았는데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여 밤중에 창황하게 궁료(宮僚)들을 인접(引接)했었다. 추안에는 비록 흉언(凶言)을 발거(拔去)하였다 하나, 깊이 생각하여 보면 이것이 어떠한 지경에 이르는 말인가? 이제 내가 털끝 만큼이라도 스스로 혐의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신설(伸雪)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종사(宗社)를 소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며, 또한 대행조(大行朝)께서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던 뜻을 본받는 것이 아니다. 원통함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누명(陋名)을 씻어 준다면, 어찌 대행조의 덕의(德意)가 빛나지 않겠으며, 또한 선조(先朝)에서 사대신(四大臣)을 우러러 받드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국안(鞫案)을 고열(考閱)할 것도 없이 이미 그들이 역적이 아닌 것을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순문(詢問)을 일삼겠는가마는, 사체(事體)가 중대하기 때문에 널리 순문하는 것이다. 무함을 받은 사대신은 특별히 복관(復官)시키고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고, 이어 이만성(李晩成)·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이홍술(李弘述)도 똑같이 복관(復官)시키라고 명하였다.
영종 원년 3월 7일(을사)에 우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은 이미 복관시켰는데, 그의 형 조성집(趙聖集)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더욱 슬퍼하고 있습니다. 율문(律文)에 형이 아우를 죽였을 경우에는 본래 사죄(死罪)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효종(孝宗) 때 형이 아우를 포살(炮殺)한 경우가 있었는데,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아우를 잡아서 불태울 때의 심술(心術)을 상상하면 너무도 절통(絶痛)하다.’ 하시고 드디어 처참(處斬)하라 명하고, 이어 이 뒤로도 정리(情理)가 절통한 경우에는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인하여 형이 아우를 죽인 경우 그대로 사율(死律)을 적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인하여 형이 아우를 죽인 경우 그대로 사율(死律)을 적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조성집의 마음은 진실로 자기 아우가 장차 극형(極刑)을 받게 될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그 사정이 딱합니다. 그런데도 형이 아우를 포살(炮殺)한 것과 같은 율문(律文)을 적용했으니, 원통한 일입니다. 신원(伸冤)시키고, 휼전(恤典)을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황하신(黃夏臣)의 죽음은 더욱 참독(慘毒)합니다. 그때 위조[僞作]한 조지(朝紙)192)  가 원근(遠近)에 전파된 것은 호중(湖中)의 인사(人士)로서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황하신은 이 때문에 항양(桁楊) 아래에서 죽었습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황하신은 충효(忠孝)로 일컬어진 사람이라 하니, 결코 거짓 비답(批答)을 만들어 낼 사람이 아닙니다. 의당 복관(復官)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영종 원년 4월 7일(갑술)에 금오(金吾)의 서례(胥隷)인 이만준(李晩俊)을 국문(鞫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승복하였다고 의계(議啓)하였다가 물고(物故)되었다고 아뢰고 뒤따라 올린 자는 장세상(張世相)이었는데, 장세상은 여러 차례 형신(刑訊)받아 정신이 황란(慌亂)하여 문목(問目)에 의거하여 여런 번 물었으나, 끝내 앙대(仰對)하지 못하고 목구멍 사이로 겨우 지만(遲晩)한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목과 지만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주의(主意)를 삼아서 초사(招辭)를 작성하였습니다. 다른 죄인(罪人)들을 잡아올 동안 정형(停刑)하기를 아뢰었다가 곧바로 승복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써서 낸 사람은 이우항(李宇恒)이었습니다. 그때 다른 죄인인 김극복(金克復)은 미처 잡아오기 전에 그의 병세(病勢)가 위중하여 경폐(徑斃)할까 우려하였는데, 즉시 지만(遲晩)으로 취초(取招)하면서 죄인은 기식(氣息)이 끊어질 듯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또한 문목과 지만이란 두 글자로 초사(招辭)를 만들었으나, 미처 결안(結案)하지 못한 채 물고(物故)되었습니다."
하였다.
영종 원년 4월 13일(경진)에 사간(司諫) 박치원(朴致遠)이 아뢰기를,
"지난번 군간(群奸)들이 무옥(誣獄)을 구성한 일과 여러 신하들을 장살(戕殺)한 정상에 대해서는 성명(聖明)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십니다. 신도 그때 오랫동안 죄수로 갇혀 있었으므로, 한두 가지 목견(目見)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장세상의 일을 가지고 말해 보더라도 공초를 받기 위해 하옥(下獄)했을 때를 당하여 이미 산 사람의 모양이 아니었으므로, 본부(本府)의 서례(胥隷)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미 죽었다고 답하였습니다. 군명(君命)을 받들어 옥사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차마 이에 죽은 사람에게 결안 취초(結案取招)한 것으로 거짓 만들어 그것을 빙자하여 도륙(屠戮)할 계책을 성취시켰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서도 나머지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망스런 궁비(宮婢)와 역적인 환관(宦官)의 죄악이 환히 드러나서 전지(傳旨)가 내려졌는데, 즉시 봉행(奉行)하지 않은 채 석열(石烈)과 필정(必貞)을 혹은 집에서 자진(自盡)하게 하기도 했고, 혹은 철저히 구문(鉤問)하지 않고 즉시 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문유도(文有道)와 박상검(朴尙儉)을 신문(訊問)할 적에 그들이 화응(和應)한 정절(情節)을 실토하려고 하자, 급히 이졸(吏卒)을 꾸짖어 문득 입을 내리치게 하고 경골(脛骨)을 몹시 때려 빨리 죽기를 바랐는데, 이것은 신이 직접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도 외부(外部) 사람에게 알리지 말게 하라는 말이 궁료(宮僚)들에게서 나왔고, 바로 정형(正刑)에 처하자고 청하는 일이 또한 전석(前席)에서 발론되었으니, 그들의 안팎에서 체결하여 모의한 자취가 환히 드러나서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 원년 7월 16일 부사과 서종일(徐宗一)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덕수(徐德修)는 곧 신의 망형(亡兄)으로 부원군(府院君)에 추증(追贈)된 서종제(徐宗悌)의 장손(長孫)입니다. 앞으로 제사(祭祀)를 계승해야 될 사람인데, 그의 죄명(罪名)이 씻겨지지 않는다면, 예법(禮法)으로 헤아려 보건대 후사(後嗣)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망형의 후사를 계승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정(私情)이 애통하고 절박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그 가운데 이른바 결안(結案)이라는 것을 살펴보니, 독약을 썼다는 한 가지 조항은 더욱 위태롭고 두려운 일이었는데, 이것은 시일(時日)이 서로 어긋나서 사증(詞證)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연석(筵席)에서 그것이 허망한 일이었음을 통촉하고 계시다는 하교(下敎)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망형 집의 남모르는 원통을 신설(伸雪)할 수가 있을 것인데, 끝내 명백하게 반시(頒示)하는 거조가 없으니, 신은 의아스럽고 답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무고했다는 죄명(罪名)에 이르러서는 끝내 변해(辨解)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무고와 무복은 정절이 현격하게 다르고 따라서 죄명도 각기 다른 것입니다. 무고란 곧 죄없는 사람을 무함하여 죄에 얽어 넣음으로써 공상(功賞)을 바라는 것이고, 무복이란 곧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허망(虛妄)한 것을 사실이라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전대의 역사를 두루 열람하여 보면, 선량(善良)들 가운데 고문당한 끝에 억지로 자복한 경우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구별하여 무고로 결단하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 일에 대한 처분은 의도하는 바가 있다. 지난날 무옥(誣獄)을 단련하여 얽어낼 때 그 가운데 빠져서 무복한 사람은 또한 슬픈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신이 세가(世家)에 태어나서 일찍이 경전(經傳)을 배웠을 것인데, 어떻게 그 사이에 굽힐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마다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문목(問目) 이외에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정신(廷臣)에 이르기까지 악역(惡逆)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그뒤 삼사(三司)의 논계(論啓)에서 무슨 말을 인용하여 쟁론했겠는가? 지금 와서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고 뼈에 사무친다. 또 서덕수가 선조(先祖)의 충근(忠謹)한 기풍(氣風)을 실추시켰으니, 이것이 내 마음을 절통하게 하는 것이다. 대저 혈기(血氣)가 안정되지 않았을 적에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두서없는 난언(亂言)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무복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무고(誣告)의 율을 적용하도록 특별히 명한 것은 하나는 당일의 일을 절통하게 여겨서이고, 또 하나는 죽음에 임하여 무복하는 것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대의 소장을 보니 나도 슬픈 마음이 든다. 따라서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해서 그대 형의 영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무복으로 논하게 하라."
하였다.
영종 원년 7월 22일(정사)에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지난번 서종일(徐宗一)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서덕수(徐德修)에게 무고(誣告)의 율을 적용하지 말고 무복으로 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조흡(趙洽) 이외의 여러 사람들도 서덕수의 예(例)에 따라 똑같이 무복으로 논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 서덕수와 김성절(金盛節)의 무복으로 인하여 허다한 죄 없는 사람이 참혹하게 도륙을 당했다. 내가 그것이 무복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특명으로 무고의 율을 적용하라고 한 것은 내 마음에 몹시 미워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덕수를 이미 무복으로 논했으니, 여러 사람들도 다르게 할 수는 없다. 조흡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덕수와 똑같이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영종 원년 8월 3일(무진)에 사간 이의천(李倚天)이 상소(上疏)하기를,
"지난번에 칼과 은(銀)으로 무옥의 사증(詞證)을 꾸며 만든 것은 오로지 흉적 이삼(李森)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흉적 이삼이 칼과 은을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한 것은 임인년193)   4월 초7일에 있었고, 국청에서 칼과 은을 문목(問目)에 첨입시킨 것은 임인년 4월 초10일에 있었습니다. 설령 백망(白望)이 덕사(德寺)에 묻어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미 직고(直告)하여 지시하지 않았다면, 포장(捕將)이 아무리 기찰(譏察)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묻혀 있는 곳을 알고서 곧바로 달려가서 마치 자신의 집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오듯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칼의 모양의 장단(長短)이나 자표(字標)가 목호룡(睦虎龍)이 말로 형용한 것과는 크게 서로 달랐고, 은화(銀貨)를 받아서 숨겼다는 근각(根脚)도 여러 죄수들이 공초(供招)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수색하여 찾아내었으니, 그들이 스스로 숨겼다가 스스로 찾아낸 자취가 마치 불을 보듯이 명백합니다. 독약에 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약을 사온 것처럼 스스로 원사(爰辭)194)  를 만들어 거짓으로 다짐을 받아낸 정상이 이미 업봉(業奉)의 공초에서 드러났습니다. 또 삼수(三手)라는 것을 조작해 내어 무옥을 얽어 만든 것은 오로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흉당(凶黨)들이 그를 원훈(元勳)으로 밀어올린 것은 이러한 때문입니다. 총융청(摠戎廳)·어영청(御營廳)의 은전(銀錢) 가운데 간곳이 없는 것이 수만여 냥(兩)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환관(宦官)·궁첩(宮妾)들과 체결하여 음흉한 계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자금(資金)으로 다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무릇 이런 정절(情節)들을 모두 신문해야 될 것인데, 어찌하여 구핵(究覈)하지 않은 채 곧바로 먼저 감단(勘斷)하여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흉적 이삼 등 여러 죄수들을 참작하여 조처하라는 명을 특별히 정지하시고 다시 국청으로 하여금 구핵(究覈)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이 진달한 칼과 은 등 네 조항의 일도 문목에 첨입시켜 간사한 정상을 알아냄으로써 형정(刑政)이 어긋나지 않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영종 16년195)   3월 2일(계사)에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임인 옥사(壬寅獄事)는 오로지 목호룡(睦虎龍)이 흉도(凶徒)들과 체결하여 무옥(誣獄)을 꾸며내어 일망타진할 계책을 시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근본을 구명(究明)하여 보면 바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무리들이 한 짓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목호룡(睦虎龍)이 감여술(堪輿術)로 나에게 써주기를 요구했는데, 내가 그를 만나보니, 형상(形狀)이 괴이하게 생겼고, 목가(睦哥)의 얼족(孽族)이란 말을 듣고 물리쳤다. 그랬더니 목호룡이 도리어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에게 빌붙어 역적 김일경과 체결하고 또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와도 친교를 맺었었다. 경(卿) 등은 김용택·이천기를 위해서 번안(翻案)시키려는 것인가?"
하자,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천기 등이 역적 목호룡과 서로 친했기 때문에 그의 속임수에 빠져들었으니, 참으로 천박해서 미워할 만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적이라는 이름에 이르러서는 어찌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유척기는 말하기를,
"이천기 등이 목호룡의 고발을 받아 결국 김일경·박필몽(朴弼夢)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함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상길(沈尙吉)이 종부랑(宗簿郞)으로 있을 적에 나를 잠저(潜邸)에서 만나 본 일이 있었는데, 목호룡의 변서(變書)에 의하면 심상길·김성행(金省行)이 잠저로 찾아와서 나를 만났다고 말을 했다. 김성행은 목호룡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함께 추축(追逐)했으니,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의 행동이 이미 무상(無狀)하였으나, 역적이라는 이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억울합니다."
하고, 유척기는 말하기를,
"김성행은 아홉 차례의 형신(刑訊)을 받았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장형(杖刑)을 참지 못하고 함부로 공초하는 데 이르렀다면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종사(宗社)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김성행의 힘이었습니다."
하였다.
영종 16년 3월 8일(기유)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우의정 유척기(兪拓基) 등이 임인 무옥(壬寅誣獄)에 대해 논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추대(推戴)하려 했다는 거짓 공초(供招) 때문에 국안(鞫案)에 쓰지 말라고 하기에 이르렀고, 끝내 처참한 살육(殺戮)을 행하였는데, 내가 어찌 정책(定策)을 사은(私恩)으로 여겼겠는가? 서로 윽박지르던 역당(逆黨)들은 모두 북면(北面)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또 마땅히 신리(伸理)시켜야 한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기를,
"삼종(三宗)196)  의 혈맥(血脈) 가운데 단지 전하 한 분만 계셨는데, 일종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은밀히 이심(異心)을 품고 있었습니다. 김일경과 목호룡의 헤아릴 수 없는 계책은 실제로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으니, 어찌 몸서리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수(三手)의 설(說)은 일찍이 을사년197)   번안(翻案)할 적에 이미 전부 허위임이 탄로났고, 모두 분명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감히 다시 이에 대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김일경과 목호룡이 이미 주참(誅斬)되었는데도 무안(誣案)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희지(李喜之)의 영정시(永貞詩)198)  를 물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시(詩) 가운데 ‘꼭두각시 줄 끊어지니 참모습이 드러났다.[傀儡索絶露眞面]’고 한 글귀는 곧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 뜻은 군간(群奸)들이 성후(聖候)가 미령(未寧)하신 때를 틈타 내환(內宦)들과 체결하여 위권(威權)을 희롱하다가 마침내 패로(敗露)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역적 김일경이 억지로 주해(註解)를 붙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돌린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정행(永貞行)을 짓게 된 이유를 경이 어떻게 알겠는가? 고(故) 판결사(判決事) 서종일(徐宗一)이 명릉 참봉(明陵參奉)으로 있을 적에 이런 꿈을 꾸고 나서 사람들과 수작(酬酌)했기 때문에 이희지가 얻어듣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신이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만, 시를 짓는 사람이 가설(假說)한 말로 생각됩니다."
하였다.
영종 16년 13일(임오)에 임금이 삼수(三手)의 역안(逆案)을 고치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임인 국안(王寅鞫案)에, 계묘년199)   역적을 주토(誅討)하고 정시(庭試)를 보였는데, 이를 별과(別科)라고 했다. 이 때문에 김일경과 박필몽에게 단련(鍛鍊)을 받아 이름이 단서(丹書)에 기재되어 있는 사람도 모두 유사(攸司)에 명하여 소석(疏釋)하도록 하라."
하니,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 옥사는 한편으로 선조(先祖)에 간범(干犯)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에 간범이 되므로, 한 마디의 말이 어긋나면 양쪽 어딘가에 걸려 문득 사죄(死罪)로 의논하게 되니, 이것이 입을 열기가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신이 한림(翰林)으로 있었을 때 마침 목호룡이 고변(告變)하는 날 김일경이 패초(牌招)를 기다리지도 않고 판의금 심단(沈檀)과 함께 미리 입궐(人闕)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신은 그것을 역적 김일경의 무리들이 미리 알고 있었는가 의심했었습니다. 김용택(金龍澤)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오자 김용택과 신은 팔촌(八寸)의 친척이므로, 그의 인품이 잔열(孱劣)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목호룡이 고변한 것이 부실(不實)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옥사(獄事)가 이루어진 데에 이르러서는 외람되이 살해된 죄인이 많게 되자, 신은 마음속으로 무옥(誣獄)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감히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였다.
영종 17년200)   9월 14일(병자)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신이 이제 이정(釐正)하는 것으로 인하여 임인 국안(壬寅鞫案)을 상세히 살펴 보았는데, 역적 목호룡의 변서(變書)는 의도와 귀취(歸趣)가 오로지 미천한 두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는 잠저(潜邸)에서 일을 보던 궁임(宮任)이었고, 또 하나는 후궁(後宮)의 족속이었는데, 대개 이 두 사람의 입을 빌어 성궁(聖躬)에 위핍(危逼)을 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역적 목호룡의 흉계가 이러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신 등은 분의(分義)에 있어 두 사람의 이름을 잠시라도 국안(鞫案)에 남겨 두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 17년 9월 23일(을유)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인 무안(壬寅誣案)을 고쳐야 할 일을 말했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다음의 일이다. 내가 세도(世道)를 진정시키려 하나 그 요점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사위(嗣位)한 뒤에 국시(國是)를 크게 밝혔다면,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신자로서 나를 버리고 누구를 섬기겠는가?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분당(分黨)이 처음에는 상대에게 이기기를 힘쓰는 것에 불과했으나, 병신년201)  에 한쪽 편 사람을 억제(抑制)한 것이 너무 심했던 탓으로 신축년202)  ·임인년203)  의 살육(殺戮)이 있기에 이르렀었는데, 을사년204)  에 내가 진정시키지 않았더라면 또 한마당 큰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목호룡의 처음 공초를 경 등이 보았는가?"
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재로와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 등이 모두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뒤에 마땅히 말하겠다. 설사 김용택과 이천기(李天紀)의 무리가 참으로 역적을 모의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 내 몸에 핍박된 것이 있으면, 당시 옥사를 다스리던 신하는 당연히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말하고서 먼저 목호룡을 다스렸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내가 그때 묵묵히 그들의 소위를 살펴 보건대 결코 그렇게 할 이치가 없었으므로, 사위(辭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先朝)의 혈속(血屬)으로는 단지 경종(景宗)과 나뿐이었으니, 태백(泰伯)과 중옹(仲雍)205)  의 고사(故事)와 같이 하려 해도 또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경자년206)   대상(大喪)이 있은 뒤 저들이 와서 조문(引問)할 적에 내가 처음에는 나가서 참여하려 했었지만, 혐의를 무릅쓴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병을 핑계대고 참여하지 않았었다. 종부시(宗簿寺)의 서리(胥吏)가 등본(謄本)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고, 조태구(趙泰耉)도 이 일 때문에 와서 나를 만났는데, 되풀이하여 말을 하였으므로 내가 웃었었다. 그뒤 조태구가 그 일을 발명(發明)하기 위해 구차스럽게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하였는데, 내가 사위(辭位)한 뒤 또한 목호룡의 형신(刑訊)을 청했어야 하나 하지 않았다. 신축년·임인년의 살육이 있었을 적에 경종께서 어찌 한 장의 판부(判付)라도 내린 적이 있었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때에 하나의 판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한쪽을 모두 죽이려는 것인가?’ 하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나의 판부에서는 평소 홍계적(洪啓迪)을 미워하는 내용의 하교가 있었는데, 마음대로 하도록 맡긴다는 하교와 같은 것이었다. 원경하(元景夏)가 국안(鞫案)을 손에 쥐고 물에 던져버렸다는 말과 오광운(吳光運)이 이른바 보훈(寶訓)이라는 말은 모두 옳은 말이었다. 육현(陸玄)도 목호룡의 부류였으므로 이홍술(李弘述)이 이를 장살(杖殺)했던 것이다. 목호룡의 상변(上變)이 있기에 이르러서는 백망(白望)과 혼시(閽寺)207)  를 잡아들였고, 또 나의 처족(妻族)이라는 것을 이유로 서덕수(徐德修)를 잡아들였는데, 서덕수가 무엇을 알고 있었겠는가? 김용택의 무리가 의지하고 따르면서 추대한 자가 누구이겠는가? 내가 이미 임금의 자리에 있으니 어떻게 천지 사이에 이런 무안(誣案)을 남겨 둘 수 있겠는가? 만일 김용택의 무리를 역적으로 여긴다면, 따로 옥안(獄案)을 만들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김원재(金遠材)에 대한 일도 당연히 그 죄를 따로 다스려야 한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물과 불에 던졌다는 것은 원경하가 이미 말한 바 있고, 성상(聖上)께서도 불태워 없애라는 것으로 하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세(末世)의 통변(通變)시키는 방도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묵세(墨世)는 아무의 족인(族人)인데 또한 몰아붙여 박살(撲殺)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효장(孝章)208)  까지도 아울러 제거하기 위한 짓이었는데, 당시에는 경종(景宗) 이외에는 오직 나와 효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供招)에 임금의 마음을 도발시켰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것은 내가 이미 무함을 받은 것으로 추대하는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국안(鞫案)을 어떻게 지금까지 남겨 둘 수 있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른바 국안(鞫案)이라는 것을 근래에 비로소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오광운이 이른바 흉안(凶案)이라고 한 말이 옳습니다. 당시에 옥사를 다스리던 신하들이 선처할 방도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탓인데, 이것은 식견과 사리가 천단(淺短)했던 것 이외에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조태구가 혐의를 무릅썼다고 한 말은 진실로 경솔한 짓인데, 종부시(宗簿寺)의 서리(胥吏)를 불러서 말한 일 또한 어찌 대신들로서 할 수 있는 짓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이희지·김용택·이천기는 모두 인아(姻婭)요 지친(至親)이며, 심상길(沈尙吉)·정인중(鄭麟重)은 또 함께 공부한 사우(死友)입니다. 위시(僞詩)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섯 사람이 똑같은 심장(心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그들이 무상(無狀)하였으나, 이미 달리 드러난 사적(事跡)이 없는데도 그들의 마음을 미리 예측하여 이들이 반드시 역모를 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역적을 다스리는 방도이겠습니까? 만일 이 때문에 뒤섞어 역적에 몰아넣는다면 이는 목호룡의 무안(誣案)을 사실로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이른바 삼수(三手)란 말은 신이 믿지 않고 있습니다.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은밀하게 서로 체결하여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서로 전수(傳授)하듯이 계체(繼體)한 것을 광명 정대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으니, 이들의 죄안(罪案)을 명백하게 바룬다면 이른바 삼수(三手)라는 무안(誣案)은 그 유무(有無)가 그다지 관계될 것이 없는데, 신 등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그 국안(鞫案)에 들어 있는 사람을 탕척(蕩滌)시키고 싶습니다만, 김용택·이천기의 무리를 역적으로 죄를 준다면 이 죄안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삭제해 버리는 것은 일이 상규(常規)에 어긋나므로, 신은 감히 경솔하게 봉승(奉承)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백망(白望)은 칼로 하고 장세상(張世相)은 독약으로 했다는 것은 모두 단련하여 부회(傅會)한 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대저 김용택·이천기의 무리가 핑계하여 의지해 따랐기 때문에 목호룡이 이를 구실삼아 흉언(凶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호룡의 흉악한 무함이 있었기 때문에 무신년209)  에 역적들이 또 구실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들은 백도(白徒)210)  요 포의(布衣)로서 망령되게 참섭(參涉)하려고 했으니, 이것이 무상(無狀)한 짓이었다. 무신년의 역변(逆變)이 어찌 이 때문에 발생했다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실상 경(卿) 등을 위한 뜻이다. 경자년211)   대상(大喪)이 있은 뒤 받은 유교(遺敎)가 있었는데, 자전(慈殿)께서 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전하게 했으므로 내가 명을 받들고 나가서 전하였더니, 그때 여선장(呂善長)이 사관(史官)으로서 유교의 여부에 대해 물었었다. 지금 이 처분은 이것이 하나의 큰 추기(樞機)인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것은 큰 거조이니 초솔(草率)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경재(卿宰)들을 불러 모아서 순문(詢問)한 뒤에 조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이들에게는 역안(逆案)을 따로 만들어 두고, 삼수(三手)의 죄안(罪案)을 영원히 삭제해 버린다면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상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단지 의논을 올바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찌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이를 삭제할 뿐이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또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날 임금이 또 하교(下敎)하기를,
"경자년(庚子年) 이후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라고는 단지 황형(皇兄)과 나뿐이었다. 목호룡의 흉서(凶書)에 비록, ‘동궁(東宮)을 위해 설원(雪冤)한다.’고 하였지만, 그 가운데는 군심(君心)을 도발시켰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나를 추대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내가 사위(辭位)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때의 조신(朝臣)들은 아무도 경동(驚動)하는 자가 없이 단지 흉언(凶言)을 국안에 쓰지 말도록 했을 뿐이었다. 나의 생각에는 그때의 대신(大臣)은 마땅히 정청(庭請)을 해서 먼저 목호룡을 토죄하리라고 여겼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그저 당론(黨論)에만 골몰했으니, 어찌 다른 일을 알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흉안(凶案)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장차 어떤 구실을 가지고 나를 섬길 수 있겠는가? 과거에 유판부(兪判府)212)  가 말하기를, ‘옥안(獄案)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내가 과연 엄하고도 굳센 임금이었다면 그때의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살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니, 어찌 옥안을 삭제하고 삭제하지 않은 것을 논할 것인가? 김용택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포의(布衣)로서 감히 분수에 넘친 소망을 품었던 탓으로 도리어 흉초(凶招)의 빙자거리가 되었다. 위시(僞詩)가 나오는 데 이르러서는 또 세 조정을 속이고 무함한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따로 죄안을 만들어 그 죄를 바루어야 한다. 여러 신하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무안(誣案)을 이정(釐正)만 할 뿐이라면 일이 구간(苟簡)한 데에 관계되니, 아주 불태워 없애어 근본을 단절시키소서.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에 거론되어 나온 부류들은 일체 모두 소설(昭雪)시키고 다른 죄를 시행한다면, 어찌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병상(李秉常)은 말하기를,
"신이 승정원에서 임인 옥안(壬寅獄案)을 본 적이 있는데, 단락에 따라 베어내었으므로, 이미 목호룡의 흉언(凶言)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문안(文案)은 남겨 두어도 참고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의란(疑亂)의 자료만 될 뿐이니,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따로 죄안(罪案)을 만드는 데 이르러서는 신은 누구를 무슨 죄로 따로 논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목호룡이 역적이라면 목호룡의 무함을 받은 사람은 역적이 아닌 것이고, 목호룡이 역적이 아니라면 이들은 역적이 되는 것이니, 이 두가지에서 이 옥사를 결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목호룡은 이미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였는데, 목호룡의 무고에 들어 있는 사람을 또다시 논죄한다면, 이는 형정(刑政)이 뒤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윤양래(尹陽來)는 말하기를,
"역적 목호룡의 공초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다는 것은 실로 신민(臣民)의 통분을 자아내는 것이니, 아주 삭제해 버리라는 성교(聖敎)가 매우 타당합니다."
하고, 김시형(金始炯)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대신과 함께 국안(鞫案)을 이정(釐正)할 적에 말하기를, ‘끝내 구간(苟簡)한 데에 관계된다.’고 했었으니, 이제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김용택의 무리에 대해서 따로 역안(逆案)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처분입니다."
하고, 이기진(李箕鎭)은 말하기를,
"신이 지난봄에 하문하실 적에 물이나 불에 던져버리자고 청하였으니, 지금도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무고를 받아 죽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신이 일찍이 그들의 처지에서는 죽을 곳을 잘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호룡의 공초에 의해 무함당한 사람들을 일제히 소설(昭雪)시켜 준다면, 다른 죄를 범한 자들은 비록 죽이고 또 죽인다고 하더라도 신은 반드시 간쟁하지 않겠습니다만, 혹시라도 다 소설시켜 주지 못할 경우에는 도리어 국안(鞫案)을 불태우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중신(重臣)이 이른바 죽을 곳을 잘 얻은 것이라는 말은 너무 억양(抑揚)이 심하다."
하였다.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경자년(庚子年) 이후 삼종(三宗)의 혈맥은 오직 경종(景宗)과 전하(殿下)뿐이었으니, 신민(臣民)으로서 마땅히 한마음으로 우러러 추대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단지 당론(黨論) 때문에 이 당(黨)에서는, ‘이 분이 우리 임금이다.’ 하고 저 당(黨)에서는, ‘이 분이 우리 임금이다.’ 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경종과 전하께서는 놀림을 받은 것이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목호룡을 이미 주참(誅斬)했으니, 국안을 불태우는 것이 진실로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나 김용택의 무리에 대한 무역죄(誣逆罪)는 반드시 분명하게 바룬 뒤에야 후세(後世)에 변명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연석(筵席)의 체통은 지극히 엄중한 것인데, 박문수의 언어가 추솔하였으니, 추고(推考)하소서."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피차(彼此) 모두 까마귀입니다. 김용택과 이천기의 죄를 명백하게 바루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후세에 비난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석오(鄭錫五)가 말하기를,
"하문하신 두 가지 일은 성교(聖敎)가 지당하십니다."
하고, 서종옥(徐宗玉)은 말하기를,
"신임 옥사(辛壬獄事)는 오직 전하께서만이 공안(公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직접 대고(大誥)를 지어 목호룡·김일경·이천기 등의 역절(逆節)을 근원을 거슬러 논단(論斷)해서 팔방(八方)에 반고(頒告)한 후에 이 무안(誣案)을 쾌히 삭제한다면, 후세에 변명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김성응(金聖應)은 말하기를,
"두 건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고, 서종급(徐宗伋)은 말하기를,
"특별히 분명한 전교(傳敎)를 내리시어 삭제하는 의리에 대한 이유를 밝힌 후에 불태워 버리는 것이 진실로 옳겠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일체 모두 소설(昭雪)시키고 다른 죄로 죄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구성임(具聖任)은 말하기를,
"이제 하교를 받드니 진실로 국가의 복입니다. 김용택의 무리들에게 죄를 줄만한 단서가 있다면, 그 죄로 죄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민응수(閔應洙)는 말하기를,
"신이 의금부(義禁府)의 문안(文案) 가운데 고친 것을 보았더니, 매우 구간(苟簡)하였으니, 불태워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공초에 의해 죄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미진한 점이 있다면 장차 의혹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반드시 일체 소설(昭雪)시킨 후에야 그 몇 사람에 대한 일을 다시 의논할 수 있겠습니다."
하고,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이 일은 전하께서 이미 신충(宸衷)으로 결단을 내리셨으며, 또 세 대신에게 순문(詢問)하셨으니, 어찌 회의(會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정우량(鄭羽良)의 말은 잘못입니다."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삭제시키든지 보존시키든지 성교(聖敎)가 지당한 것인데, 누가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특별히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려 무안(誣案)을 불태워 없앤다는 뜻을 온 세상에 효유(曉諭)한 다음 불태워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신의 종형 신(臣) 김재로의 의논과 같습니다."
하고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신의 의견은 박문수와 다름이 없습니다. 전하의 효제(孝悌)한 덕은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시니, 저 효경(梟獍) 같은 무리가 하늘을 비난하는 말이 어찌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때때로 임금을 무함했다고 하는 하교가 있으셨고, 여러 신하들도 성상을 무함한 데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무슨 무함을 받으셨습니까? 주공(周公)은 관숙(管叔)·채숙(蔡叔)213)  의 망극한 무함을 받았지만, 후세에서 주공이 무함을 받았다고 한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하고, 이병상은 말하기를,
"오광운(吳光運)의 소장 가운데 이미 이 말이 있었는데, 이제 이종성이 또 이런 말을 하니, 이는 무(誣)자의 본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무(誣)란 그런 일이 없는데도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인(聖人)일지라도 진실로 없었던 일을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무(誣)인 것입니다. 주공에게 어찌 본디 무함받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관숙·채숙이 주공을 무함한 것뿐입니다."
하자, 오광운은 말하기를,
"이 국안(鞫案)이 역적의 원두(源頭)이니, 어떻게 유치(留置)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축년214)  의 사람들은 목호룡을 토죄(討罪)했고, 을사년215)  의 사람들은 이희지와 김용택을 국안에서 베어냈으니, 세도(世道)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경종(景宗)과 전하는 바로 한몸이니, 경종(景宗)에게 불궤(不軌)한 것이면 이는 전하에게도 불궤한 것이고, 전하에게 불궤한 것이면 이는 경종에게도 불궤한 것입니다. 이희지·김용택·김일경·목호룡은 동일한 역적입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역적은 하나이므로, 나누어서 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오광운이 전에 올린 소장(疏章)에서 대조(大朝)의 역적이고 동궁(東宮)의 역적이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 그의 대답이 전의 소장 내용과 다르니, 반드시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하자, 오광운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소장은 과연 잘 짓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은 말하기를,
"이제 전하께서 의리(義理)를 분명히 바루어 김일경과 목호룡의 역적을 토죄하였고, 또 이희지와 김용택의 죄를 단정(斷定)하셨으니, 이는 실로 공정(公正)한 일입니다."
하고, 정준일(鄭俊一)은 말하기를,
"목호룡의 흉초(凶招)를 제거하고 이희지·김용택의 죄상(罪狀)을 밝혀 의리를 일정(一定)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을 마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에게 이의(異議)가 없으니 한 가닥 의리가 진실로 없어지지 않았다. 대고(大誥)는 내가 마땅히 지어서 보이도록 하겠다. 임인년(壬寅年)에 다시 고묘(告廟)했었으니, 지금도 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고묘(告廟)할 것을 명하였다.
영종 17년 9월 25일(정해)에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목호룡(睦虎龍)이 무고(誣告)한 옥안(獄案)을 불태우게 하고,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임인년(壬寅年)의 국안(鞫案)은 지난 역사에 없었던 것이므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도리에 있어서 비상(非常)한 거조를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본받을 것이 못되니, 뒷사람들은 감히 사의(私意)로써 이를 전례(前例)로 원용(援用)하여 우리의 구장(舊章)을 혼란시켜서야 되겠는가? 이 하교를 사각(史閣)에 넘겨 주어서 뒷날의 훈계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영종 22년216)   9월 2일(을미)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소장(疏章)이 나온 뒤에 조정에서 역모라 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했는데, 그때 신이 겸설서(兼說書)로 숙직하고 있었습니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보덕(輔德)의 직책으로서 와서 신에게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노론(老論)들에게 의심받은 나머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데, 이를 역모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습니다. 신의 당초의 소견은 이와 같았는데, 신축년217)  에 이르러서는 출처(出處)가 무상(無狀)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유봉휘는 자신의 심사를 저군(儲君)에게 미처 폭백(暴白)하지 못하였으니, 의리상 당연히 문을 닫고 자수(自守)함으로써 본심을 스스로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방자하게 행공(行公)하면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서로 안팎이 되었는데, 그의 처지와 인망(人望)이 김일경·박필몽에게 견줄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습니다. 그때의 청론(淸論)이 김일경과 박필몽을 토죄할 수 없었던 것은 유봉휘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의 형이 마음속으로 늘 분통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또한 이러한 곡적을 통렬하게 진달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스스로 불충(不忠)했음을 자책한 하나의 단락이기도 합니다. 무신년218)  의 역변(逆變)이 있은 뒤 신이 안죽(安竹)에서 돌아와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에게 말하기를, ‘유상(柳相)의 소장은 그 본심을 따져보면 그것이 역모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인(南人)·소론(少論)이 국가를 저지한 것은 실지로 이 소장이 창도한 것이니, 역란(逆亂)이 끝난 뒤에는 의당 본심을 조사하여 추론(追論)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였더니, 해은(海恩)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신이 유봉휘를 논한 것은 이러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였다.
영종 42년219)   10월 26일(임술)에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서종일(徐宗一)이 서덕수(徐德修)의 신설(伸雪)을 청할 적에 고(故)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서덕수는 무복(誣服)입니다.’ 했는데, 그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었다. 김용택(金龍澤)은 처지가 어떠했는가? 심상길(沈尙吉)은 괴이한 모양이었고 정인중(鄭麟重)은 떠벌이였다. 비록 대훈(大訓)220)   중에서는 영원히 고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서덕수와 백망(白望)을 소설(昭雪)시켰으니, 김용택도 소설시켜야 한다. 김용택은 위의 네 사람과는 처지가 더욱 다르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다섯 사람의 마음은 모두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감추고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성모(聖母)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용택을 대훈(大訓)에 남겨 두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책비(責備)하는 마음에서 대훈(大訓)을 남겨 둔 것이지 처음에 역모를 했다고 해서 남겨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복택(金福澤)의 죽음은 억울한 것으로서 아무 허물이 없었다. 김용택을 소설(昭雪)시켰으니, 삼전(三殿)에 배알할 수 있게 되었다. 우상(古相)에 임명된 것은 오히려 말절(末節)이다."
하고, 도승지 윤득우(尹得雨)를 시켜 대훈(大訓)을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황형(皇兄)의 마음도 오늘날 나의 마음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읽어가다가 ‘모두 역모로 결단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 글귀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성의(聖意)는 역률(逆律)로 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김용택이 우두머리인데다 지처(地處)가 높았던 탓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지처 때문이지 그의 죄는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중대한데 경 등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김치인이말하기를,
"이미 그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오늘날의 처분을 어찌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서지수(徐志修)는 말하기를,
"그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처분이 진실로 지당합니다."
하고, 제조 박상덕(朴相德)은 말하기를,
"이름이 이미 대훈(大訓) 속에 기재되어 있으니, 어떻게 해야 신설할 방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이름을 베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정인중의 무리들은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하였는데, 김치인이 말하기를,
"선신(先臣)이 매양 말하기를, ‘바라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했었고, 이 일을 성상께 아뢴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대훈(大訓) 가운데 모두 역모로 결단하라는 하교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그가 역모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절로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신은 선신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오늘날 대답했습니다."
하고, 박상덕은 말하기를,
"모두 나라를 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고, 서지수는 말하기를,
"좌상이 아뢴 역모가 아니라는 말이 옳습니다. 실은 역모가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공심(公心)이다. 경의 말이 옳다."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신이 감히 공심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선신(先臣)에게서 들은 것이 그러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선경(先卿)들의 마음을 알았다. 을해년221)   이전에도 알고 있었는가?"
하자, 서지수가 말하기를,
"단지 바란다고 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고, 박상덕은 말하기를,
"하늘의 공을 탐냈다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역적은 아니었습니다."
하고, 김치인은 말하기를,
"대훈(大訓)의 끝에다 따로 다섯 줄의 성교(聖敎)를 적어서 이들을 신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글자를 긁어내고 다른 글자로 보완함이 옳다."
하였다. 김치인은 말하기를,
"긁어내고 보완한다면 택배(澤輩)라는 택(澤)자를 차(此)자로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정인중의 무리들도 모두 대훈(大訓) 속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겠는가?"
하자, 서지수가 말하기를,
"이들이 모두 벗어나는 것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김치인은 말하기를,
"대훈(大訓) 가운데, ‘가탁(假托)하여 의지해 따랐고 속이고 무함하는 패역(悖逆)한 짓을 하였으므로, 모두 역모로 결단한다.’고 한 등류의 자구(字句)는 마땅히 긁어내고 보완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 등이 헤아려서 긁어내고 보완하도록 하라."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아래에서 산개(刪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성상께서 조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국시(國是)’라는 자구(字句)를 쓰라고 말을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국시(國是)’라는 두 글자는 당초 시비(是非)를 논할 것이 없었던 것이니, 의리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참으로 좋겠습니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아! 을해년222)   이후 의리가 더욱 밝아져 대훈(大訓)의 구어(句語) 가운데 또한 이정(釐正)할 것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김용택은 이희지·심상길·이천기·정인중의 무리와는 처지(處地)가 다르다. 오늘 시임(時任)과 원임(原任) 대신에게 이미 나의 마음을 유시(諭示)하였다. 따라서 원래의 대훈(大訓) 가운데 있는 여기에 관계된 글귀에 부표(付標)하여 내리니, 이에 의거하여 긁어내고 보완 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종 42년 10월 27일(계해)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훈(大訓) 가운데 정인중 무리들의 명자(名字)는 그대로 두고 싶다."
하니, 좌의정 김치인이 말하기를,
"어제의 연석(筵席)에서 이미 바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역모가 아닙니다. 긁어내고 보완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기 의견을 진달하라."
하였는데, 좌참찬 홍성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 남태제(南泰齊)는 말하기를,
"김용택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나머지 4인도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여사(餘事)일 뿐입니다. 그리고 대체(大體)를 살필 적에 소소한 것은 생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정밀하게 말하겠다. 이 무리들이 조금은 본의 아니게 빠져든 점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大體)를 가지고 말한다면 한모퉁이 청구(靑丘)223)  에 오늘날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삼종(三宗)의 혈맥 가운데 단지 황형(皇兄)과 내가 있다는 것을 누가 몰랐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참으로 지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를 배반한 자는 달아날 곳이 없을 것이다."
하고, 남태제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이르기를,
"경의 말은 준론(峻論)이다."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남태제가 네 사람이 전혀 바라는 마음이 없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앙달(仰達)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네 사람을 일례(一例)로 김용택에게 견준 것은 남태제의 말이 지나쳤다."
하였다. 남태제가 말하기를,
"다섯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대체(大體)만 논하고, 그들의 행신(行身)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형조 판서 심수(沈鏽)는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용택은 처지가 나라와 휴척(休戚)을 같이해야 할 위치이다."
하였다. 남태제는 말하기를,
"이희지의 처지도 나라와 휴척을 같이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단지 삼종(三宗)의 혈맥만 가지고 하교하셨습니다. 만일 해동(海東)의 신자(臣子)들이 과연 모두 오늘날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찌 무신년224)  의 역란(逆亂)이 발생했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다섯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면 저절로 명백해질 것입니다."
하고, 김치인은 말하기를,
"신도 이희지가 국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조운규(趙雲逵)는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달리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합문(閤門) 밖에서 남태제와 수작(酬酌)할 적에 신도 전부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하고, 행 사직(行司直) 구선행(具善行)은 말하기를,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판윤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처분이 이미 내렸는데 신도 여러 신하들의 의견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과 나라를 위한다는 것을 나누어 말한다면, 나라를 위한 것이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하고, 승지 심관(沈鑧)은 말하기를,
"바랐다는 것은 그들의 행신(行身)에 관계된 것이고 나라를 위했다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하고, 교리 정창순(鄭昌順)은 말하기를,
"어제의 하교는 이것이 진실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미혹(迷惑)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남태제가 주달한 ‘다섯 사람은 구별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말이 옳습니다. 바란 것이 있는지의 여부는 비교하여 논할 필요가 없고, 다만 나라를 위한 충성만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덕수·백망·김용택 세 사람은 나라와 함께 죽었으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를 배반한 자를 어떻게 조선(朝鮮)의 신자(臣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다시 정창순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이르기를,
"네 사람의 일이 과연 어떠한가?"
하자, 정창순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위하여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반드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수보(酬報)하는 도리는 성취한 것이 어떠한가를 살폈습니다. 따라서 충성을 바치려 한 정성만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창순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정창순이 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역안(逆案)으로 결단한다는 것은 반드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정창순의 말이 옳다. 한(漢)·당(唐)·송(宋)의 여러 명신(名臣)들 또한 어찌 바라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소(簫)·조(曹)·마(馬)·등(鄧)225)  의 반부(攀附)226)  를 어찌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처분에 이미 바라는 것이 있다고 하교하셨으니, 대훈(大訓) 가운데 역안(逆案)에 관계되는 말은 일일이 긁어내고 보완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편차(編次)하는 사람인 조명정(趙明鼎)에게 명하여 여러 구절(句節)을 독주(讀奏)하게 하고, 역안(逆案)에 관계되는 말은 다시 고쳐 보완하게 하였는데, 이를 마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미 대훈(大訓)을 모두 이정(釐正)했으니, 끝내 첨부되어 있는 고묘문(告廟文)과 반교문(頒敎文) 등도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옳은 말이다. 발거(拔去)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순문(詢問)하실 적에 여러 신하들이 앙대(仰對)한 데에서 공의(公議)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고, 조명정은 말하기를,
"신은 대훈(大訓)을 처음 간행하였을 때 주서(注書)로서 입시했었고 또 편차(編次)했었는데, 이제 고쳐 보완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훈(大訓)을 긁어내고 보완한 뒤 한 건을 대내(大內)에 들이고, 즉시 반포(頒布)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임인년(壬寅年) 군흉(群凶)들의 죄를 어떻게 이루 주살(誅殺)할 수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천신(薦紳)으로부터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저사(儲嗣)를 세워 대리하게 하자는 데에 관계되어 연루되었으면, 한 사람도 주륙(誅戮)이나 찬축(竄逐)을 혹시라도 면하지 못하였었다. 예로부터 간흉(奸凶)들이 단련(鍛鍊)하여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수없이 많았지만, 이 옥사처럼 참혹하고도 포악한 경우는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까지 옥례(獄隷)를 시켜 대신 서압(署押)하게 하여 결안(結案)을 만들어 낸 사례가 많았으니, 이로써 살펴보건대 이른바 승복했다고 하는 것은 모두 흉당(凶黨)들이 두찬(杜撰)한 것임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 없다. 묵세(墨世)는 대전 나인(大殿內人)으로 그때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적신(賊臣)들은 그가 어리고 나약한 것을 속여서 협박하면 무복(誣服)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으로 옥사를 실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묵세는 다만 한 마디 말이라도 성상에게 미치게 될까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다가, 결국 형틀 아래에서 운명(隕命)하고 말았는데, 전후 형신(刑訊)을 받은 것이 모두 13차례였다. 아! 상도(常道)를 지키는 천성(天性)은 사람들이 누구나 지니고 있어 없어지지 않는 것인데, 저 옥사를 다스리던 역적들은 무슨 심장을 가졌기에 그리한단 말인가?
김성행(金省行)이 형신받을 적에 옥졸(獄卒)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의 상투를 단단히 잡아매어 조금도 동요됨이 없게 하라.’ 했는데, 이는 그때 옥사를 다스리던 사람이 죄수의 상투가 조금만 끄덕거리는 것을 보면 문득 승복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옛날의 절사(節士)인들 어찌 이보다 나을 수가 있겠는가? 영종(英宗)이 누차 그 말을 거론하면서 그의 의열(懿烈)을 불쌍하게 여겨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그의 충성을 숭장(崇奬)하였으니, 역적들이 없는 죄를 꾸며서 법망(法網)에 끌어넣은 죄상은 더욱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백시구(白時耉)는 무과(武科)로 벼슬에 나아가 죽을 때가 가깝게 되었으니, 흉당(凶黨)들이 가장 미워한 경우가 아니었으면 기필코 죽이려는 죄과(罪科)에 두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백시구가 국옥(鞫獄)에 나아가 신문받을 적에 눈을 부릅뜨고 큰 목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숙장(宿將)들이 모두 도륙(屠戮)되었으니, 혼자서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다. 어찌하여 속히 죽이지 않는가?’ 했으므로, 흉당들이 노하여 살해한 것이다. 이광좌(李光佐)가 영종(英宗)에게 제주(提奏)한 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그때 옥사를 다스리던 여러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으니, 아! 통분스럽다. 금상(今上) 5년 신축년(辛丑年)에 원릉(元陵)에 거둥하여 사충사(四忠祠)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고, 김성행(金省行)에게 한 자급(資級)을 추증(追贈)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서덕수(徐德修)에게 집의(執義)를 증직(贈職)하게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태세(太歲)가 신축(辛丑)이 든 이 해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잠저(潜邸)에서 들어가 저위(儲位)를 계승했는데, 이제 구력(舊曆)이 되돌아왔으나, 나 소자(小子)는 잊지 못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펼 수 있는 데가 없다. 아!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열조(列朝)의 심법(心法)을 계술(繼述)하고 삼종(三宗)의 혈맥을 이어 요순(堯舜)처럼 전수(傳授)함에 있어 인의(仁義)가 극진했으므로, 우리의 4백 년 종사(宗社)가 이를 힘입어 태산(泰山)과 반석처럼 편안해졌으니, 아! 성대하도다. 당시에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같은 이들이 힘을 합하여 익대(翊戴)하다가 자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사(殉死)했으니, 그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찬란하게 번뜩이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천지(天地)에 세워놓아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어 영원히 천하 만세에 할말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행하게도 당시에 효경(梟獍)같이 사나운 무리들이 대대적인 무옥(誣獄)을 일으켜 이에 참화(慘禍)를 꾸며내었으니, 아!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 때부터 포장(褒奬)하라는 하교가 누차 사륜(絲綸)에 언급되었고, 강가에 사당(祠堂)을 지어서 사충(四忠)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렸으니, 성인(聖人)이 천하를 공변되게 다스리는 마음으로 이런 은수(恩數)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공의(公議)는 백년을 기다리지 않고 정해진다는 것이 또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거듭 구갑(舊甲)을 만나 원릉(原陵)을 배알하게 되니, 나 소자(小子)가 어찌 느낌을 표현할 방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사충사(四忠祠)에 승지를 보내어 길일(吉日)을 가려 치제(致祭)하게 하고, 그들의 자손을 선조(選曹)227)  로 하여금 녹용(錄用)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그때 고굉(股肱)228)  의 손자와 주액(肘腋)229)  의 지친으로서 사생(死生)을 가름할 즈음에 만일 동요가 있었더라면, 아! 오늘의 종사(宗社)가 편안히 모셔질 장소가 있었을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 화(禍)를 입은 사람들에게 차례로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있었는데, 한 사람만이 홀로 누락되었으므로, 여론(輿論)이 지금까지 차탄(嗟歎)하고 있다. 일찍이 내가 사위(嗣位)한 처음에 하려고 하였으나, 한 사람에게 여러 번 증직(贈職)을 내리는 것 같아서 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그때 선왕의 하교를 소자(小子)가 분명히 받들어 들었는데, 더구나 그 자손들을 녹용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어찌 표장(表章)하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증 이조 참의(吏曹參議) 김성행에게 한 자급을 추증하고, 고(故) 학생(學生) 서덕수에게는 특별히 사헌부 집의를 추증하라. 모두 오늘 하비(下批)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5일 정미

왕세제빈(王世弟嬪)이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였다.
9월 27일 기유

승지 이명언(李明彦)이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영유(嶺儒) 이덕표(李德標) 등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신사년230)  의 일을 빙자하여 정신(廷臣)들에게 모욕을 가한 것이 한정없었습니다. 본원(本院)에서 당초에 봉입(捧入)하지 않을 것으로 품계(稟啓)한 것은 그 소장의 내용에 전하께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뒤 이덕표 등이 또 와서 옹폐(類蔽)한다는 뜻으로 소장을 올려 본원에 침욕(侵辱)을 가하였습니다. 계속 퇴각(退却)시키는 것 또한 미안한 데에 관계되고, 또 신 등의 생각에 한 번 예람(睿覽)을 거쳐서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사체(事體)에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봉입하도록 아뢴 것입니다. 그뒤 권서봉(權瑞鳳) 등이 또 소장(疏章)을 올려 이흉(二凶)을 뒤좇아 죽인 일과 사친(私親)의 사우(祠宇)와 묘소(墓所)를 전알(殿謁)한 일에 대해 논했는데, 그 말은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사년 일에 이르러서는 이덕표 등의 소장과 대체로 같았고, 또한 후원(喉院)을 침욕(侵辱)하는 말이 많았기 때문에 봉입(捧入)한 것입니다. 대저 저들 무리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장독(章牘)에다 등재(謄載)하였으니, 정상이 가증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추보(追報)하는 일절(一節)을 지금껏 거행하지 않았고, 대신(大臣)과 재신(宰臣)이 연석(筵席)에서 주달한 뒤에도 즉시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괴귀(怪鬼) 같은 무리들이 얼굴을 바꾸어 잇따라 나아와 이렇게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저 추보(追報)하는 일은 비록 저들의 소장이 없었다 하더라도 분한(分限) 안에 들어 있는 것이면 진실로 거행해야 하겠지만, 분한 밖에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한계를 넘어서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부제학으로 있었을 적에 추보하는 일을 논하면서 소장의 끝에 선유(先儒) 정이(程頤)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말한, ‘간사한 사람들이 은혜를 바라고 총애를 견고하게 하여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책을 세워 의(義)를 해치고 효(孝)를 손상시켜 가면서 폐하(陛下)를 불의에 빠뜨린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계속 되풀이해서 아뢴 것은, 정례(情禮)를 참작하여 사은(私恩)을 추보(追報)함으로써 이러한 간사한 자들이 분수에 지나친 것을 엿보는 말을 하는 것을 단절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에는 마땅히 추보하는 일에 대한 한 가지 조항을 조속히 거행하여 정례(情禮)를 펴게 해야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이명언(李明彦)이 승정원에서 올린 계사(啓辭) 내용의 간사하고 교활한 작태는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죄가 도리어 이덕표보다 더한데, 더구나 김일경(金一鏡)·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 등과 체결하고 복심(腹心)이 되어 사대신(四大臣)을 죽이고 동궁(東宮)에게 위핍(危逼)을 가할 적에 이명언의 계모가 대부분이었으니, 언의(言議)가 비뚤어진 것쯤이야 이명언에게 있어서는 꾸짖을 거리도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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