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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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 정사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았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영상의 의견은 이미 초봄에 올린 차자(箚子)에서 진달하였는데, 지금도 바꾸어 고친 의견이 없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사우(詞宇)를 세우고 호칭을 만들려면 칭호(稱號)를 강정(講定)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미 칭호를 강정했으면 신주(神主)를 고쳐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명언(李明彦)의 소장에서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칭호를 정하자는 말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논한 것이 진실로 전거가 있으니, 이로써 정해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사우(詞宇)는 반드시 다른 장소에 따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본궁(本宮) 안에 기지(基址)가 조금 넓다고 하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서 영건(營建)하게 하소서. 묘소(墓所)의 수직군(守直軍)은 15명을 배정해서 잡역(雜役)을 면제시키고 급복(給復)하게 하고, 제수(祭需)는 신비(愼妃)231) 인빈(仁嬪)232)  의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무릇 녹훈(錄勳)하는 규례는 성상께서 원훈(元勳)을 결정하신 뒤에 원훈이 기록된 사람을 감정(勘定)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하(啓下)233)  하게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상변(上變)한 사람 이외에 달리 기록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중종조(中宗朝) 때에도 단지 상변한 사람만 기록했었으니, 지금도 마땅히 목호룡(睦虎龍)만 녹훈(錄勳)하여 자급(資級)을 뛰어올려 부직(付職)시켜야 합니다. 이는 전해오는 구례(舊例)가 있는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고열(考閱)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길일경(金一鏡)이 말하기를,
"신이 국청(鞫聽)에 참여하였을 적에 이삼석(李三錫)의 공초(供招)를 들었는데, 그가 목호룡의 말을 듣고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234)  에게 전하기를, ‘사도(使道)께서는 국가에 대해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할 의리가 있는데, 이렇게 가국(家國)이 함께 망하게 될 화(禍)가 조석(朝夕) 사이에 박두했는데, 어찌하여 마음을 움직여 역변(逆變)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하니, 함원(咸原)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조항은 이석삼을 조당(朝堂)에다 불러다가 물어본다면 저절로 기록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노영손(盧永孫)만 단록(單錄)했던 전례를 끌어대어 서둘러 목호룡 한 사람만 녹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최석항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훈부(勳府)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이삼석을 불러다가 물어서 그 허실을 알아보게 하는 것 또한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10월 6일 무오

김유경(金有慶)을 숙천부(肅川府)에, 어유룡(魚有龍)을 영암군(靈巖郡)에, 이중협(李重協)을 해남현(海南縣)에, 박치원(朴致遠)을 고성현(固城縣)에 찬배(竄配)하였다.

 

10월 10일 임술

장씨(張氏)를 추존(追尊)하여 옥산 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삼았는데, 장씨는 임금의 생모(生母)이다. 예조에서 추보(追報)하는 일의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조목별로 열거하여 올리기를,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주(神主)를 고쳐 써야 하겠으니, 승문원으로 하여금 제주관(題主官)을 차송하게 하소서. 사우(詞宇)의 간가(間架)와 제도는 일체 신비(愼妃)의 사우와 똑같게 하도록 하되, 물력(物力)은 호조·병조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고, 특별히 감역관(監役官)을 정하여 조성(造成)하게 하소서. 사중삭(四仲朔)과 시제(時祭)는 초정일(初丁日)을 쓰게 하고, 기제(忌祭)와 함께 사우에서 병행(倂行)하게 할 것이며, 사절일제(四節日祭)는 묘소(墓所)에서 행하게 하되 모든 제사는 전부 내시(內侍)로 하여금 축문(祝文) 없이 설행(設行)하게 하고, 제수(祭需)는 해조(該曹)·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인빈(仁嬪)의 예(例)에 의거하여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묘소(墓所)의 수직군(守直軍)은 15명으로 정하여 급복(給復)하고 잡역(雜役)을 면제시키소서."

 

이명회(李明會)를 부안현(扶安縣) 위도(蝟島)에 정배(定配)하였다.

 

10월 14일 병인

대제학 조태억(趙泰億)을 명초(命招)하였으니, 훈호(勳號)를 찬정(撰定)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태억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10월 20일 임신

원임 대사헌 홍계적(洪啓迪)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홍계적의 자(字)는 혜백(惠伯)이고, 본관(本貫)은 남양(南陽)이다. 사람됨이 준엄하고 결백하여 기이한 기상이 있었다. 젊어서 진사(進士)에 응시하여 제일인(第一人)으로 입격(入格)하였고, 숙종(肅宗) 3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에 들어가 정언이 되었다. 마침 숙종이 군신(群臣)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고 있던 참에 홍계적이 대궐에 나아왔다가 금중(禁中)에서 노래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에 상소(上疏)하기를,
"예의(禮儀)에 어긋난 음악은 인주(人主)가 들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금액(禁掖)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야흐로 봄을 당하여 눈이 내리는 때에 연회를 벌려 탐락(耽樂)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정성(鄭聲)235)  을 물리친 의의가 아닙니다."
하니, 숙종이 가상하게 여겨 호피(虎皮)를 하사하여 권장(勸奬)하였으며, 홍문관 부제학에 승진시켰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여서는 사헌부에 들어가 대사헌이 되었다. 다음해에 흑산도(黑山島)에 안치(安置)되었고, 또 다음해에 체포되어 한 달 남짓하게 있으면서 고문(拷問)을 받아 옥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43세였다. 영종(英宗) 원년에 홍계적의 관작을 추복하고 특별히 이조 판서에 추증했으며, 호조에 명하여 홍계적의 계모(繼母)인 박씨(朴氏)에게 종신토록 매달 늠미(廩米)를 지급하게 하고, 그의 아들 홍주해(洪疇海)에게는 벼슬을 주게 하였다.

 

10월 21일 계유

정호(鄭澔)를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에 안치(安置)하고, 유하기(兪夏基)를 기장현(機張縣)에 정배(定配)하였다.

 

왕세제의 책봉 칙서에 뒷날 국왕(國王)이 아들을 얻는 경사(慶事)가 있으면, 다시 주달(奏達)하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다시 주문(奏文)을 지어 사행(使行)에 부쳐 보내었다. 주문에 대략 이르기를,
"칙유(勅諭)의 말단에 있는 다시 주달(奏達)하라는 성교(聖敎)는 이것이 곡진하게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감격스럽고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저사(儲嗣)는 국가의 근본이므로, 명호(名號)가 일단 정하여지면 묘사(廟社)와 신인(神人)의 부탁이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뒷날에 혹시 성의(聖意) 가운데 운운한 것과 같은 것이 있더라도 어찌 다시 진주(陳奏)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리(道理)로 헤아려 보아도 다시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저사(儲嗣)를 세울 적에 진실로 원손(元孫)이 없으면, 반드시 형이 사망할 경우 아우가 뒤를 잇는 법례(法禮)에 의거하여 나라를 전하는 것이 천리(天理)와 인정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경종(景宗)이 저사(儲嗣)를 세울 때를 당하여 또한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다. 천하에 지극히 인자한 대성(大聖)이 아니면 정책(定策)할 수 없는 것인데, 경종께서는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고 영조(英祖)를 왕세제(王世弟)로 책립(冊立)하였다. 이는 ‘나의 친아우는 바로 선왕(先王)의 개자(介子)이고 효종(孝宗)의 증손(曾孫)인데, 나에게 이미 후사(後嗣)가 없고 또 친조카도 없으니, 어떻게 나의 친아우를 버리고 반드시 종실(宗室)의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겨서 내린 결단이었다. 청인(淸人)이 세제(世弟)를 책봉한 칙서(勅書)에 운운한 것은 이것이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는 빌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종(景宗)은 처음의 마음을 굳게 지켜 끝내 고치지 않았으니, 왕비(王妃)가 비록 원자(元子)를 낳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경종(景宗)이 저사(儲嗣)를 세운 것은 진실로 성대한 일이었다. 청인의 칙서에 답한 데 이르러서도 사의(辭義)가 엄정하여 결연하게 고치지 않을 뜻이 있었다. 이로부터 동궁(東宮)이 비로소 아주 확고하게 되었으니, 영조(英祖)가 50년 동안 치평(治平)의 공을 이룩한 것은 실로 경종(景宗)이 열어준 것이다.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85면
【분류】왕실(王室) / 외교(外交) / 역사(歷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저사(儲嗣)를 세울 적에 진실로 원손(元孫)이 없으면, 반드시 형이 사망할 경우 아우가 뒤를 잇는 법례(法禮)에 의거하여 나라를 전하는 것이 천리(天理)와 인정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경종(景宗)이 저사(儲嗣)를 세울 때를 당하여 또한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다. 천하에 지극히 인자한 대성(大聖)이 아니면 정책(定策)할 수 없는 것인데, 경종께서는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고 영조(英祖)를 왕세제(王世弟)로 책립(冊立)하였다. 이는 ‘나의 친아우는 바로 선왕(先王)의 개자(介子)이고 효종(孝宗)의 증손(曾孫)인데, 나에게 이미 후사(後嗣)가 없고 또 친조카도 없으니, 어떻게 나의 친아우를 버리고 반드시 종실(宗室)의 아들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겨서 내린 결단이었다. 청인(淸人)이 세제(世弟)를 책봉한 칙서(勅書)에 운운한 것은 이것이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는 빌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종(景宗)은 처음의 마음을 굳게 지켜 끝내 고치지 않았으니, 왕비(王妃)가 비록 원자(元子)를 낳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경종(景宗)이 저사(儲嗣)를 세운 것은 진실로 성대한 일이었다. 청인의 칙서에 답한 데 이르러서도 사의(辭義)가 엄정하여 결연하게 고치지 않을 뜻이 있었다. 이로부터 동궁(東宮)이 비로소 아주 확고하게 되었으니, 영조(英祖)가 50년 동안 치평(治平)의 공을 이룩한 것은 실로 경종(景宗)이 열어준 것이다.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10월 27일 기묘

김일경(金一鏡)이 조태채(趙泰采)에게 사사(賜死)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태채의 자(字)는 유량(幼亮)이고 그 선조(先祖)는 양주(楊州) 사람이다. 젊어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숙종(肅宗) 말년에 의정부 우의정에 제배(除拜)되었고,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경종 원년에 정언 이정소(李廷熽)가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청할 적에 조태채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우의정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갔다. 김창집이 조태채의 의향을 알고 싶어서 거짓 묻기를,
"이 일을 장차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조태채가 정색하고 말하기를,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으니, 사직(社禝)의 복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돌아와서 집안의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공(趙公)은 진실로 위인(偉人)이다."
하였다. 밤에 조태채가 김창집과 함께 대책(大策)을 결정하고, 또 세 대신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왕세제(王世弟)에게 국정(國政)을 대리시킬 것을 청하였다. 다음해에 진도군(珍島郡)에 안치(安置)하였는데, 태연하게 여유 있는 태도를 가지면서 슬퍼하는 안색이 없이 시(詩)를 짓기를, ‘원통한 눈물을 흘리는 선조의 세 늙은 신하요, 슬픈 노래를 부르는 밤중의 한 외로운 신하로다. [冤淚先朝三老相 悲歌半夜一孤臣]’ 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그러나 신기(神氣)가 태연 자약 하였는데, 그가 죽고 나자 풍뢰(風雷)가 갑자기 일어나면서 천지가 캄캄하여지고 집 모퉁이에 긴 무지개가 뻗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조태채가 죽을 때의 나이는 63세였다. 영종(英宗) 원년에 관작(官爵)을 추복(追復)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강가에 묘우(廟宇)를 세우게 했다. 조태채가 죽음에 임박하자 집안 사람들이 울면서 조금 기다릴 것을 청하니, 조태채는 정색하고 사자(使者)를 재촉하여 약을 타서 들여오게 하였다. 자기 한 몸 죽어 사직(社稷)을 보존 하였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목호룡(睦虎龍)의 무옥(誣獄)이 이미 이루어지자, 예문관 제학 유봉휘(柳鳳輝)가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조선 국왕 신(臣) 아무는 삼가 아뢰건대 소방(小邦)이 불행하여 대신이 모역(謀逆)한 일에 대해 주토한 전말을 낱낱이 진달하여 우러러 황람(皇覽)을 번거롭게 하는 일입니다. 의정부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3월 27일 한산인(閑散人) 목호룡이 고변(告變)하기를, ‘역적이 혹은 칼이나 혹은 독약이나 혹은 폐출(廢黜)로써 하기로 은밀히 역적 모의를 했으니, 놀랍고 황공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상변한 사람을 데려다가 구문(究問)하여 사실을 알아내야 한다고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즉시 의정 대신(議政大臣)을 차임하여 그 입회하에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과 양사(兩司)의 장관(長官)이 회좌(會坐)하여 추문(推問)하게 하였습니다.
목호룡의 공사(供辭)에 의하면, ‘칼로써 한다’고 한 것은 용사(勇士)를 시켜 비수(匕首)를 가지고 궁중에 들어가 도측(塗厠)236)  하는 것을 말하는데, 역적들은 이를 자기들끼리 대급수(大急手)라고 호칭한다고 합니다. 약으로 한다는 것은 독약을 궁녀(宮女)에게 주어서 음식 속에다 타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소급수(小急手)라고 호칭한다고 합니다. 이른바 폐출한다는 것은 금(金)을 가지고 내수(內竪)들과 체결하여 죄목(罪目)을 얽어 만들어 방출(放黜)시키기 위한 계책인데, 이를 평지수(平地手)라고 호칭한다고 합니다. 정인중(鄭麟重)·이기지(李器之)·이희지(李喜之)·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심상길(沈尙吉)·조흡(趙洽) 등이 주도 면밀하게 모의하였는데, 김용택이 백망(白望)에게 보검(寶劍)을 주어 국상일(國喪日)에 담장을 넘어 궁궐에 들어가서 대급수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인중·김용택·이천기·이기지·이희지·홍의인(洪義人)·홍철인(洪哲人) 등이 백망을 시켜 궁인(宮人) 이영(二英)을 통하여 사촌인 궁녀에게 은(銀)을 바쳐 약을 쓰는 일을 성공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희지가 언문(諺文)으로 가사(歌辭)를 지어 궁중으로 유입(流入)시켜 주상(主上)을 무훼(誣毁)하려 도모하였고, 또 교령(橋令)을 지어 환자(宦者) 장세상(張世相)을 시켜 국상(國喪)에 임하여 내리게 하였는데, 그 교초(矯草)의 내용에 세자를 폐하여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김민택(金民澤)·조흡·심상길·홍의인·이희지 등은 차등 있게 은을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공초에 의거하여 즉시 피고인(被告人)들을 잡아다가 차례대로 안문(按問)하였습니다.
정인중의 공초에 의하면, ‘이천기가 서한을 보내어 은화를 요구하였으므로, 제가 은 1백 냥을 내어주고 또 정묘하게 만든 부채 50병(柄)도 보냈는데, 이천기가 이것을 궁금과 체결하는 데에 썼으니, 저도 은을 내어 체결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했습니다.
백망의 공초에 의하면, ‘어느 날 정인중과 함께 김용택의 집에 갔더니. 이희지와 이천기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드디어 술을 따라 마시면서 서로 사생지교(死生之交)를 체결할 것을 맹세하였는데, 제가 말하기를 「주상의 병세가 날로 위중해지고 있는데, 만일 불휘(不諱)237)  하면 세상에 유비(劉備)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본디 적임자가 있다.」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기 손바닥에다 글자를 써서 심사를 보였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썼고, 다른 사람은 의(義)자도 쓰고 신(信)자도 썼는데, 저는 양(養)자를 썼습니다. 좌우의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는데 이천기가 그 뜻을 깨닫고 크게 웃었습니다. 양(養)자는 정승 이이명(李頤命)의 자(字)가 양숙(養叔)이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는 간교하고 악랄하고 음흉한 사람으로 김용택이 이이명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것인가 의심했기 때문에 유비에 대해 문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은 은화는 포청(捕廳)에서 이영의 이장(移莊)에 가서 수색하여 찾아냈고, 김용택이 준 칼은 또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즉시 찾아내었으니, 이는 대단한 장물(贓物)입니다.
이천기의 공초에 의하면, ‘이른바 대급수·소급수·평지수라는 세 가지 건사(件事)는 제가 김용택·이희지·이기지·백망 등과 서로 은화를 모아 자세히 상의(相議)했으므로,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함께 같이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 김용택의 집에 갔을 적에 백망의 신수가 좋은 것을 보고 그의 용력(勇力)을 물어 보았으며, 드디어 술을 따라 마시고 사생지교를 맺었습니다. 백망이 손바닥에 양(養)자를 섰는데, 이는 정승 이이명의 자(字)가 양숙(養叔)이기 때문에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좌우의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만, 저는 깨닫고 크게 웃었습니다. 백망이 은 5백 냥으로 한 번 먹으면 즉사(卽死)하는 중국의 환약(丸藥)을 샀고, 조흡은 은(銀) 20냥을 내어 약을 쓸 일이 성취되도록 도모했습니다. 저의 수찰(手札) 가운데 이른바 혈신(穴臣)이란 곧 환관 장세상을 가리킨 것이고, 구(久)가 들어가서 무슨 들은 것이 있다고 한 것이 구(久)는 곧 백망의 자(字)인데, 이는 변복(變服)하고 대궐에 들어가서 독약을 쓰는 일을 독촉한 것입니다.’ 했으니, 음흉한 정절이 여기에서 다 드러났습니다.
김용택의 공초에 의하면, ‘상변인(上變人)은 제가 백망에게 보검을 주어 선대왕의 국상 일에 궁중으로 들어가서 대급수를 행하게 했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가죽 칼집에 든 마도(馬刀)를 백망에게 내어 주었다고 공초했습니다.’ 하였습니다. 포청(捕廳)에서 백망의 방에 있는 보검을 찾아냈는데, 길이와 꾸밈새가 고발인(告發人)이 말한 것과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마도(馬刀)라는 이야기는 절로 교묘하게 꾸민 말인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장세상의 공초에 의하며, ‘정우관(鄭宇寬)·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와 서로 친하여 왕래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내린 처분에 대해 문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촉탁하여 도모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했으니, 그가 흉패(凶悖)하다는 것을 이에 의거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령에 대한 일은 이정식의 무리가 나인(內人)에게 들여보냈고, 약을 쓰는 일은 백망이 그에게 들여보냈으니, 역모를 꾀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영의 공초에 의하면, ‘백망 등이 보낸 은자를 궁녀 지씨(池氏)에게 전해 주어 그로 하여금 약을 쓰는 일을 완성시키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백망이 차고 다니는 주머니 속에 황색의 환약이 들어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아주 단단하게 봉하여져 있었습니다. 지씨가 자기 본집에 나왔을 적에 백망이 직접 그것을 주어 보냈습니다.’ 했습니다. 이정식의 공초에 의하면, ‘장세상·김창도 등과는 본디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관계되는 모든 정절을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늘 주상에게 병환(病患)이 있다고 여겼었는데, 이것이 헛소문이란 말을 듣고 모두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약을 쓰는 흉계(凶計)를 획책하였습니다. 그리고 궁성을 호위한다고 한 일은 영상 김창집(金昌集)에게서 나온 것인데 무신 이삼(李森)의 용력을 꺼려 충청 절도사로 내보냈고,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유취장(柳就章)을 부리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대장(大將)으로 차임토록 분부했으며 이홍술(李弘述)을 유취장 대신 중군(中軍)에 임명하였습니다. 이홍술은 김창집과 지의(志意)가 같아서 이런 거조를 한 것인데, 장세상이 괴수가 되었고, 정우관이 심복(心腹)이 되었으며, 저는 기괄(機括)이 되었습니다.‘고 했습니다.
김창도의 공초에 의하면, ‘이정식이 이미 직초(直招)했으므로 다시 전달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이기지가 가서 영상을 만나 보고 말하기를, 「시사(時事)가 매우 위태로우니 궁성을 호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영상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한데 이삼이 장수의 재략(才略)이 있으므로, 반드시 함께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매우 껄끄럽다.」하였습니다. 영상이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에게 말하여 이삼을 충청 절도사로 내보내고 대신으로 하여금 유취장을 중군(中軍)으로 삼을 일을 상의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대장으로 삼도록 분부하여 호위하게 한 계책에 대해서는 서로 알 수가 없었으나, 대략 이기지의 말을 듣건대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은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은을 모아 도모한 일은 그 일이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저도 그 가운데 동참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정우관의 공초는 김창도의 것과 대략 같았습니다. 김일관(金一觀)의 공초에 의하면, ‘저는 은밀히 이천기의 사주를 받아 환국(換國)할 음모(陰謀)를 계획했으므로, 정우관의 한 일과 조건이 각기 다릅니다. 일찍이 이기지의 집에 갔더니, 어떤 사람과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를, 「그대는 한 나라의 수상(首相)의 손자로서 정우관의 무리와 서로 교결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했는데, 이 사람이 김창집의 손자인 김성행(金省行)이었습니다. 저는 여러 역적들과 서로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하는 일은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했습니다.
유취장의 공초에 의하면, ‘지난해 10월에 영상을 가서 만났더니, 말하기를, 「근래에 사기(事機)가 수상하니 군문(軍門)의 장관(將官)을 친신(親信)한 사람으로 포치(布置)해야겠다. 영공(令公)은 중군을 거치지 않았으니, 만일 궐원(闕員)이 나면 차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했습니다. 그뒤 이삼이 충청 병사가 되었는데, 제가 양익표(梁益標)에게 말하기를, 「중군에 궐원이 났으니 만약 대신의 분부를 얻는다면 차임될 수 있을 것이다.」 했더니, 양익표가 영상에게 가서 알린 결과 가합(可合)하다고 했으며, 그 나머지 두 대신도 가합하다고 했습니다. 이어 대장 이홍술에게 말하여 저를 계하(啓下)하게 되었으므로, 드디어 즉시 명함을 보냈더니, 이홍술이 말하기를, 「시사가 매우 위태로우니 한편으로는 군병을 나누어 궐문(闕門)을 지키고 한편으로는 대신에게 당로(當路)에 해가 있는 환시를 죽이자고 건의하려 하는데, 군병들이 따르겠는가?」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군병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대장이 시키면 어찌 따르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했습니다. 가서 김창집을 만났더니, 묻기를, 「그대는 자주 주장(主將)을 만나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가?」 했으니, 그 의도는 제가 자주 찾아가 만나고 이러한 이야기를 수작(酬酌)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제가 이미 수작하는 말을 하였으니, 마음을 함께한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이헌(李瀗)의 공초에 의하며, ‘집이 이이명의 집 이웃에 있기 때문에 늘 왕래했습니다. 정유년238)   이후로 이이명과 김창집이 매양 동궁을 폐출시키는 일을 도모하여 왔는데, 저의 집이 장세상과 팔이 닿을 정도로 난란히 있음으로 인하여 경자년239)   무렵에 이천기·김용택의 무리가 밤낮으로 경영하는 모의에 대해 가끔 얻어들었으니, 역모에 동참한 것이 확실합니다.’ 했습니다.
양익표의 공초에 의하면, ‘제가 유취장을 중군에 차임시키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 비국(備局)에 갔더니, 김창집과 이이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이건명(李健命)은 변소에 갔다가 막 돌아왔으며, 조태채(趙泰采)는 이미 다른 곳으로 나갔었습니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그대는 우리들의 말을 대장에게 가서 전하되, 유취장을 중군에 차하(差下)하여 궁성의 호위를 즉시 거행하게 하라.」고 했으므로, 제가 그 말을 가서 전하였으니, 실정을 안 것이 확실합니다.’ 했습니다.
김성절의 공초에 의하면, ‘정우관이 약을 쓰는 일을 말했을 적에 이희지·이기지가 김운택·김민택과 전적으로 주장하여 나로 하여금 장세상에게 전해 주게 하는 계제를 만들었습니다. 이기지의 말에 의하면 자기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는데, 그의 아비는 바로 이이명입니다. 또 그 뒤에 김창집의 의막(依幕)에 갔더니 말하기를, 「김시태(金時泰)가 이홍술의 집에서 은을 얻어 가지고 장세상에게 주어 바야흐로 환국(換局)하려고 도모하고 있다.」 했습니다. 작년에 이우항(李宇恒)을 만났더니, 말하기를, 「김창도 이외에 또 장세상에게 부림을 받고 있는 사람은 우홍채(禹洪采)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돌아와서 김창집에게 말하였더니, 말하기를, 「우홍채가 장세상의 집에 왕래하면서 전하는 것이 상당히 있는데, 나는 마음이 넓다는 것을 알고 있다.」 했습니다. 제가 이미 김창집의 무리와 함께 수작을 하였으니, 모역에 동참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했습니다. 우홍채의 공초에 의하면, ‘김성행이 저에게 말하기를, 「이기지가 자기 아비가 화(禍)를 입을까 우려하여 궁중에서 약을 쓰려고 하는 일을 나도 알고 있으니, 그대가 장세상의 집에 가서 탐지해 보라.」고 하므로, 그의 말대로 가서 물어보았더니, 장세상이 말하기를, 「내간의 일은 이미 정제(整齊)되었으니, 외간의 일도 마땅히 잘 조처해야 한다. 양국(兩局)의 대장을 반드시 우리 사람으로 임명해야만 어떤 일이 발생해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그뒤 김창집이 장세상의 집에 왕래한 일에 대해 묻기에 이런 내용으로 대답하였더니, 김창집이 웃었습니다. 이미 김성행과 함께 가서 장세상을 만나보았고 약을 쓰는 일을 탐지해 알았으니, 모역(謀逆)에 동참한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의정 대신을 체포하여 조사해서 아뢰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삼수(三手)의 역모는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선왕의 병환이 위중한 때를 당하여 음모가 이미 이루어졌고, 주상이 사복(嗣服)한 뒤에 이르러서는 흉악한 계획이 더욱 급박하여 난역(亂逆)의 정절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흉도(凶徒)를 붙좇는 무리가 매우 많아서 혹은 장형(仗刑)을 모질게 참으면서 경폐(徑斃)된 자도 있고, 또한 그런 내용이 있다고 승복한 자도 있습니다. 그 지류(枝流)는 산략(刪略)하고 우선 그 본원만을 뽑아서 아뢰겠습니다. 삼가 조사하건대 영의정 김창집.·영중추 이이명·좌의정 이건명·판중추 조태채 등을 모두 선조의 대신으로서 국정(國政)을 오랫동안 독점하여 왔기 때문에 부귀에 미혹(迷惑)되어 재화(財貨)를 탐하여 제택(第宅)을 지극히 크고 사치하게 했으며, 전원(田園)이 주현(州縣)에 두루 널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진이를 죽이고 올바른 이를 해쳤으며,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쳤습니다. 권세(權勢)에 탐락(貪樂)하여 의(義)를 뒤로 하고 이(利)를 앞세웠는데, 이런 본성에 어긋난 사특한 행동은 자질구레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혹시라도 잃게 될까 걱정하였으며, 끝내는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위복(威福)으로 농락하고 태아(太阿)240)  를 거꾸로 쥐고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과 신하 노릇하지 않겠다는 뜻을 품고서 먼저 조정에 당여(黨與)를 심어놓고 은밀히 여항(閭巷)의 무뢰배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조카·손자와 문얼(門孽)의 족속들로 하여금 역적인 환시들과 체결하게 하였으며, 은화를 모아 사경(私逕)을 뚫어 내간에서 독약을 쓰는 일을 주장하여 탐문하였고, 아장(亞將)을 바꾸어 놓을 즈음에는 제좌(齊坐)하여 지교(指敎)했습니다. 이천기는 이희지·이기지의 혈당(血黨)으로서 백망이 손바닥에 쓴 글자의 뜻을 헤아리고서 추대(推戴)할 사람을 이미 결정하였으며, 유취장은 이이명의 은밀한 지시를 받들어 이홍술의 진병책(陳兵策)을 도와서 폐출시키려는 계모를 행하려 했는데, 이건명도 함께 그를 위하였고, 조태채는 위협에 의해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난신 적자가 대대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처럼 극도로 흉악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역괴(逆魁) 김창집·이이명 등을 잡아다가 법으로 다스려 감처(勘處)하였는데, 그 나머지 역모에 동참한 사람과 아직 법에 의거하여 처단하지 않은 죄인 및 연좌된 족속을 경중(輕重)에 따라 의의(擬議)하여 단죄(斷罪)한 이외에는 이에 의거하여 전말을 천청(天聽)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진실로 온편하겠기에 인하여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은 사위(嗣位)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나라를 지킴에 있어 삼가지 않았던 탓으로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흉변(凶變)이 보상(輔相)의 반열에서 나왔으니, 이는 모두 환란을 예방하는 데에 어둡고 사람을 임용하는 것을 잘못한 데에서 온 결과인 것입니다. 자신을 반성하여 자책해도 그 마음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진실로 소방(小邦)의 변고(變故)를 가지고 우러러 대조(大朝)를 번독스럽게 하는 것은 불경(不敬)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신의 부덕함으로 능히 흉얼(凶孽)을 제거하여 다행히 전복(顚覆)을 면하게 된 것은 실로 황상의 성덕이 미친 결과이므로, 감히 이렇게 진주(陳奏)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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