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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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을유

어유귀(魚有龜)를 수충 분의 갈성 효력 부사 일등 공신(輸忠奮義竭誠效力扶社一等功臣)으로 삼았다. 초복(初覆) 때에 도승지 김일경(金一鏡)이 아뢰기를,
"신이 상참 때에 전(前) 인의(引儀) 이삼석(李三錫)을 맹부(盟府)에서 불러다가 물어보게 할 것을 앙달(仰達)한 바 있었습니다만, 오래도록 조용하기만 하여 마음속으로 늘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일전에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가 처음 이삼석을 불러다가 물어보았는데, 이삼석이 말하기를, ‘경자년241)   무렵에 목호룡(睦虎龍)이 전하는 말로 인하여 역당(逆黨)들의 흉참(凶慘)한 모의를 듣고서는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에게 고하였습니다. 작년 겨울 궁성에 군병을 배치한다는 밀계(密計)에 이르러서도 또한 함원(咸原)에게 보고하여 알리면서 말하기를, 「나라를 부지(扶持)하고 몸을 보전하는데 있어 어떻게 완만히 하거나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함원이 매우 옳은 말이라고 거듭 말하였습니다.’ 했고, 이삼석이 또 말하기를, ‘여러 차례 고달(告達)한 뒤에는 무슨 거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했다 합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다시 군졸들을 시켜 차비문(差備門)을 수직(守直)하게 한 것과 무예 별감(武藝別監)을 합번(合番)하게 한 등의 일을 국구(國舅)와 문답한 하단(下端)에서 이야기한 것은 가리키는 것이 있어서 말한 것입니다. 다만 이삼석이 고한 것을 살펴보건대 자세한 데에는 조금 흠이 있는 듯합니다만, 국구가 3년 전부터 흉역들의 정상을 익히 들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폐부(肺腑)처럼 가까운 신하로서 나라의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의리를 돌아보았다면, 종사(宗社)를 부위(扶衞)하는 방도에 있어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이 사단(事端)을 상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엎드려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원훈(元勳)을 삼을 만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특별히 밝게 명을 내려서 즉시 원훈으로 결정하고, 그로 하여금 녹훈(錄勳)하게 한다면 그 가운데 녹훈할 만한 사람은 원훈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공(功)의 고하에 따라 3등(三等)으로 나누어 결정한다면, 국가의 사체(事體)가 광명 정대할 것이고, 녹훈(錄勳)하는 법례(法禮)에도 휴흠(虧欠)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일경이 아뢰기를,
"함원 부원군 어유귀를 원훈으로 삼도록 이미 하교하였으니, 회맹제(會盟祭)를 물려서 거행할 것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어유귀는 폐부처럼 가까운 신하로서 명릉(明陵)242)  의 알아줌을 받았는데, 경종(景宗)이 저사(儲嗣)를 세울 적에 아들을 세우자고 의논한 자들이 모두 어유귀를 구시로 삼았으니, 진실로 이와 같다면 어떻게 후세(後世)의 의혹을 풀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삼석이 어유귀와 문답한 말이 국청(鞫廳)에서 나왔는데도 영종(英宗)이 어유귀를 보존시켰으니, 매우 성대한 덕이었다.

 

11월 5일 병술

영돈녕부사 어유귀(魚有龜)가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김일경(金一鏡)의 거짓말 때문에 갑자기 신의 이름을 녹훈(錄勳)하는 거조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녹훈은 사체(事體)가 엄중한 것이므로, 그 사람과 그 공이 명백하게 드러나서 암매(暗昧)한 점이 없는 후에야 바야흐로 녹훈할 수 있는 것이고, 받는 사람도 사양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단록(單錄)하는 것을 빈약하게 여기고 녹훈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싫어하며, 국안(鞫案) 밖의 일을 사주하여 날조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가운데에서 어렵게 찾아내었으니, 오래도록 헤아려보고 주야로 생각하여 보아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을 의의(儗議)한 것이므로, 천일(天日) 아래에서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요컨대 〈그 저의는〉 훈권(勳券)을 확대하여 청문(聽聞)을 의란(疑亂)시키기 위한 것이니, 그 계책이 교묘하고 주밀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빙의(憑依)하여 끌어댄 이유는 오로지 이삼석의 무망(誣罔)한 말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변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상참 때문에 인견(引見)했을 적에 김일경이, 이삼석이 옥중에서 한 적이 없던 말을 지어 내어 이삼석이 신에 대해 말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신이 또한 여기에 대해 답한 바가 있었고, 대신도 그것이 옥안(獄案)과 서로 틀리다는 것을 아뢰어 애초에 대변하여 말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렇게 되자 또 말을 바꾸어 갑자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다시 목호룡이 일찍이 아무의 집에 간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목호룡에 대해 그의 형상을 본적도 없고, 그 또한 신의 문전에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한 번의 핵실(覈實)로 즉시 변백(辨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김일경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우물쭈물 말을 만들어 참으로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말을 하면서 이삼석을 불러다가 물어볼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윤허하는 성교(聖敎)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이만하면 그만 그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온갖 방법을 짜내어 은밀히 훈부 당상(勳府堂上)에게 촉탁하고 또 이삼석이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면서 날뛰고 있는 정상을 탐지하고서는 갑자기 훈부의 뜰에다 잡아다가 놓고는 주로 신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힐문(詰問)했으니, 신의 몸에 오욕을 끼치게 한 것은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한배하(韓配夏)가 사체를 모른 것이 너무도 심했습니다. 성명(成命)을 기다리지도 않고 은밀히 김일경의 지휘를 받들어 다방면으로 유도하여 물어서 억지로 한 장의 문서(文書)를 만들었고, 김일경은 또 그가 공초한 한 장의 종이를 가지고 멋대로 진장(珍藏)243)  을 빼앗아 그의 말에 따라 기술(記述)하여 천청(天聽)에 진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 이삼석이란 자는 다만 하나의 미련하고 무식(無識)한 사람일 뿐인데, 한 번 국청을 출입한 뒤부터 문득 공을 노리는 어리석고 망령된 마음을 품고 당로자(當路者)에게 빌붙어 헛말을 만들어 과장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신이 불러서 물을 적에 대답한 내용을 얻어 보았는데, 허실(虛實)을 변환(變幻)시킨 것으로 모두 사실과 틀리는 것이었습니다. 국청에서 올린 공초에서는 신이 약방(藥房)에 있었고 의막(依幕)에는 있지 않았으므로 이야기한 것이 없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신을 면대해서 위언(危言)을 고했다고 하면서 마치 신이 저를 면대하여 수답한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무망(誣罔)입니다.
그가 평생 친밀하게 지낸 사람은 곧 유취장(柳就章)과 유정장(柳貞章) 등으로서, 마침 기영(畿營)의 독책(督責)에 시달리다가 빌어먹기 위해 유취장의 곤영(閫營)에 자취를 의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화(禍)를 두려워하여 도피한 것이고 신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의 무망(誣罔)입니다.
지난번 국옥(鞫獄)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을 적에 이삼석의 이름이 국초(鞫招)에 거론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침 신이 통솔하고 있는 어영청(御營廳)에 부료(付料)244)  되었기 때문에 그 곡절을 물어보았더니, 그의 말이, ‘목호룡이 일찍이 말한 것이 있었는데, 반드시 이 일 때문일 것이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대가 일찍이 나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야 비로소 들었다. 설혹 나문(拿問)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대가 이미 나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고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뒤 잡혀 갔을 적에 과연 신이 의막(依幕)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지(告知)한 것이 없었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말하기를, ‘겁내지 말고 직고(直告)하도곡 면려하였다.’ 하면서 마치 신이 지휘(指揮)한 것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의 무망(誣罔)입니다.
경자년245)   국휼(國恤)을 당했을 적에 이르러서 별감(別監)·포수(砲手)로 특별히 수위(守衞)했다는 등의 말은 더욱 매우 음흉하고 간교한 것입니다. 이는 군문(軍門)에서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한 것인데, 이제 뒤섞어 말을 만들어 마치 신이 품달(稟達)하여 주선한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무망(誣罔) 가운데 더욱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난해 겨울 위기(危機)를 고했다고 한 것은 전혀 맹랑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의 허망함이 이와 같았고 그 일의 중대함이 이와 같았으니, 조정의 사체에 있어 즉각 신에게 빙문(憑問)하여 그 허실을 살펴보고 진실로 훈부(勳府)에서 함문(緘問)했어야 옳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러다가 힐문해도 도고 잡아다가 핵문(覈問)하기를 청해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실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다만 꾸며서 만들어 낸 헛말만을 물어보고 갑자기 진품(陳稟)하여 억지로 공이 있다고 하면서 훈명(勳名)을 가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목호룡은 이미 이삼석과 친밀하고, 이삼석은 일찍이 아무의 문하에 출입한 적이 있는 사람이니, 그 말을 전했든 전하지 않았든 그 일을 알든 모르든 그것을 따지지 않고 이 사람을 빙자하여 말을 만들어 공이 있다고 뒤집어 씌운다면, 천청(天聽)을 현혹시키고 일세(一世)를 속일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를 불러다가 교사하여 꾀어 이리저리 광란(狂亂)시킨 정상을 보면 그가 방자하고 무엄했다는 것을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신의 정적(情跡)이 안정되지 못하여 남에게 미움을 받아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녹권(錄券)의 일을 가차(假借)하여 목호룡과 이삼석의 투과(套科)에다 몰아넣고 있으니, 신의 오욕은 진실로 말할 겨를이 없지마는, 조정을 욕되게 한 것이 큽니다. 원컨대 이 소장(疏章)을 왕부(王府)246)  에 내려 이삼석을 잡아다가 가두고, 이 몇 가지 조항에 대해 다시 다방면으로 힐문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가운데 군병으로 수위 했다는 말은 더욱 매우 중대하니, 신이 어느 때를 당하여 품백(稟白)했으며 누구로 인하여 주선했는가 하는 등의 조항에 대해서도 특별히 엄중하게 핵실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신이 속이거나 숨긴 것이 있으면 신의 물충(不忠)한 죄를 다스리고, 이삼석의 말이 과연 허망한 것이면 특별히 무겁게 감죄(勘罪)하여 무망을 일삼는 무리들을 징계하소서. 위록(僞錄)을 삭제하기 전에는 모두 죄를 기다리는 날이므로, 어영(御營)의 밀부(密符)를 풀어 장교(將校)를 시켜 대신 봉납(捧納)하게 하고 이어 고향길을 찾아 떠나겠습니다. 신궐(宸闕)을 우러러 바라보니 송구하고 서운한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녹훈(錄勳)하라는 명은 경(卿)의 재덕(才德)으로 진실로 그 훈망(勳望)에 적합하다. 뜻밖의 저척(詆斥)은 혐의할 것이 못되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고, 곧바로 소명(召命)을 내려 속히 들어오게 하였다.

 

11월 16일 정유

윤동수(尹東洙)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정언 이광도(李廣道)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에서 새로 양전(量田)한 것에 대해 민원(民怨)이 있으니, 새로 양전한 것은 버리고 전에 양전했던 것을 그대로 적용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이번에 새로 양전(量田)한 것은 이미 3년이 지났지만, 백성들의 원망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대저 양전의 어려움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기유년247)  의 양전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토품(土品)의 고척(膏瘠)과 등수(等數)의 고하(高下)를 일일이 고르게 정할 수가 없었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오늘날보다 덜하지 않았었습니다만, 50년 동안 시행하여 오면서 점차로 이정(釐正)하였습니다. 새로 양전한 것의 고르지 못함이 각도(各道)가 똑같다 하나. 백성들의 비방이 비등한 것으로 인하여 갑자기 3년 동안 이미 시행해 온 양전을 폐기한다면, 조정의 거조가 전도(顚倒)될 뿐만 아니라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폐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새로 양전한 것 가운데 가장 억울하다고 하는 곳과 산치(山菑)와 진전(陳田)이 기자(起字)에 뒤섞여 기록되어 해마다 원전(元田)과 다름없이 전세(田稅)를 징수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정(釐正)하되, 각별히 정밀하게 조사하여 허실(虛實)이 서로 혼동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삼남(三南)의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1월 17일 무술

영돈녕부사 어유귀(魚有龜)가 상소(上疏)하여 원훈(元勳)을 사양하니, 허락하였다.

 

11월 23일 갑진

장령 박징빈(朴徵賓)이 아뢰기를,
"전(前) 좌랑(佐郞) 윤순(尹淳)은 타고난 품성이 간사하고 마음씀이 음험하며, 조금은 슬기롭고 말도 잘하여 교힐(巧詰)하기 짝이 없고, 갑자기 숨겼다가 갑자기 드러냈다 하면서 현혹시키는 방법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속마음과 겉모양이 다르게 색태(色態)를 잘 꾸미고 오로지 시세(時勢)에 따라 행동하기를 일삼고 있으니, 그의 말을 들어보고 눈동자를 살펴보면 끝내 길사(吉士)가 아닙니다. 아첨으로 섬겨 술수를 부리므로, 세상에서 요인(妖人)이라고 이름이 났는데, 경상(卿相)의 문하에 더러운 작태로 빌붙고 부박(浮薄)한 무리들과 체결하여 마구 날뜁니다. 따라서 그가 좌우를 돌아보며 아첨하여 가늠하고 경영(經營)하는 것은 모두 사류(士類)들을 이간시키고 왕실(王室)에 해를 끼치는 계책입니다. 지난 겨울에 일곱 신하가 소장을 올릴 적에 겉으로 청류(淸流)임을 가탁하여 억지로 강개(慷慨)한 체하면서 큰소리를 쳤으나, 속으로는 의심과 겁을 품은 나머지 실제로 이쪽과 저쪽의 사세를 관망한 끝에 은밀히 익명의 서한(書翰)을 보내어 기모(機謀)를 누설시킴으로써 그 소장을 올리는 것을 저패(沮敗)시키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기(事機)가 가국(家國)이 함께 망하는 지경을 면하지 못하게 되자, 몸을 피해 숨으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정태(情態)는 참으로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요망하고 간사한 사람은 하루라도 청조(淸朝)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반열(班列)에 둘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순은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의 5세손(世孫)이다. 문학(文學)을 좋아하고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므로, 경대부들이 묘비(墓碑)와 묘표(墓表)를 세울 적에 윤순의 글씨를 받지 못하면 반드시 부끄럽게 여겼으니, 옛날의 명필(名筆)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순이 젊었을 때 김일경(金一鏡) 등 7인과 함께 사대신(四大臣)을 논척(論斥)했었는데, 그 소본(疏本)을 보고는 이에 크게 두려워하여 즉시 자기의 이름을 지워버렸으므로, 김일경이 크게 노하여 박징빈에게 넌지시 일러서 윤순이 요사하다고 탄핵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킨 것이다.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김일경이 복주(伏誅)되고 윤순은 기용되어 태학사(太學士)가 되었으며 이조 판서에 올랐는데, 이는 박징빈이 한 번 탄핵한 효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징빈이 윤순을 탄핵한 것은 다만 윤순의 영광을 매개(媒介)한 것이 되었으니, 무슨 손상될 것이 있는가? 같은 때의 조사(朝士)들 가운데 서명균(徐命均)·김동필(金東弼)·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박사수(朴師洙) 같은 이들은 김일경과 의견을 달리했다가 모두 배척당하여 조정에 벼슬하지 못했는데, 김일경이 복주된 뒤에는 전에 배척당하여 기용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두 등용되어 조정에 그 이름을 드날렸으니, 이것은 김일경이 전에 배척한 것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종의 세대에 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윤성시(尹聖時)는 모두 좌죄(坐罪)되어 복주(伏誅)되었는데, 윤순이 어떻게 혼자서 면할 수 있었겠는가?

 

11월 25일 병오

부교리 정수기(鄭壽期)가 상소(上疏)하기를,
"공조 판서 조태억(趙泰億)의 소장에 이르기를, ‘김일경(金一鏡)이 이사상(李師尙)에게 서한(書翰)을 보내기를, 「강(姜)대감에 대한 일은 병판(兵判)·형판(刑判) 두 대감이 정수기를 사주하여 논하게 했다.」’ 했는데, 신이 이 말을 들어 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만, 처음에는 일소(一笑)에 붙이고 변명할 것도 없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중신(重臣)이 이미 소장에 드러내었으니, 신이 어떻게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의 원래의 곡절은 신이 강현(姜鋧)을 논척(論斥)한 데에서 야기된 것입니다. 신이 과거에 강현의 평생의 행사(行事)를 자세히 알고서는 마음속으로 늘 옳지 않게 여겨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이 소명(召命)을 받들고 서울에 들어왔다가, 그가 도청 당상(都廳堂上)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신은 즉시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정신이 혼란하여 편마(編摩)하는 바가 사의(事宜)에 어긋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신이 즉시 실상(實狀)을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는 큰 의논(議論)이 아니므로, 본디 제우(儕友)들에게 널리 문의(問議)할 것이 없었으며, 신이 집에 앉아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대략 해당되는 사항을 언급했으니, 그가 진실로 신에게 원한을 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무 관계가 없는 재신(宰臣)이 문형(文衡)의 기괄(機括)로 간주(看做)하고서 은밀히 농간을 부려 공공연히 추욕(醜辱)을 가하는 것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저 남에게 한을 품고 뒤에서 사람을 사주하여 공격하여 쏘게 하는 것이 얼마나 간특(奸慝)한 일이며, 남의 지시를 받고 그를 대신하여 상대를 공격하여 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행동입니까? 그리고 분노를 금하지 못하여 말을 만들어 멋대로 사람을 무함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천만 뜻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비록 흰 머리에 노쇠한 몸으로 신귀(新貴)의 아래에서 어정거리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비천(卑賤)한 짓을 하는 자를 보면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인데, 더구나 스스로 이런 작태를 하려 하겠습니까? 저 두 신하는 조정에 벼슬하면서 임금을 섬겨 온 것에 대한 본말(本末)이 갖추어져 있어 영예로운 승진이 본디 정하여져 있고, 탄탄 대로와 같아 앞에 걸리는 것이 없는데, 한 번 천망(薦望)이 조금 뒤진 것에 한을 품고서 서로 교대하여 사주해서 남의 손을 빌어 논의를 제기하여 탄핵한다는 것은 사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과연 말이 사리에 맞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1월 26일 정미

대사간 김동필(金東弼)이 상소(上疏)하기를,
"공조 판서 조태억(趙泰億)의 소장에서 김일경(金一鏡)이 글을 보내어 무함을 가한 일을 인용하여 문형(文衡)에 대한 일 때문이라고 자처(自處)했는데, 신은 참으로 청조(淸朝)의 재신(宰臣)의 반열에서 이렇게 사람을 크게 부끄럽게 하는 일이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문형은 전적으로 사명(辭命)을 관장하고 있어 일국의 많은 선비들의 표준(標準)이 되는 자리이므로, 진실로 문장(文章)과 재학(才學)에 대한 명망을 처음부터 축적하여 일세의 신복(信服)을 얻은 자가 아니면, 이 선발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일경이 갑자기 여기에 수천(首薦)되었습니다. 종래 왕언(王言)을 대찬(代撰)한 글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흉역배(凶逆輩)들의 흉악한 정절을 당초 마음을 다해 사출(寫出)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이 황잡하고 착오가 나서 사리(詞理)를 이루지 못했으며, 또 불필요한 말을 삽입시키고 인용한 것이 잘못되어 여러 사람들이 떠들고 일어나서 광괴(狂怪)라고 지적하였으니, 그가 전혀 식견이 없어서 사령(詞令)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를 미루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국조(國朝) 3백 년 동안 어찌 이러한 문형의 천망(薦望)이 있었겠습니까? 그가 스스로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을 배척하여 밀어냄으로써 기필코 전후의 문형들로 하여금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게 하고서도 뻔뻔스레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있으니, 인간에게 수치스런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중신(重臣)이 처음에 사리에 의거해서 변해(辨解)하지 않은 것은 사체로 보아 변명할 것도 못된다고 여긴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의 소견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소장에 그 내용을 올리기까지 하여 이런 놀라운 일을 일세의 사람들에게 전파시켰으니, 신은 삼가 중신을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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