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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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갑인

원임 부제학 김운택(金雲澤)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김운택의 자(字)는 중행(仲行)인데, 문충공(文忠公) 김만기(金萬基)의 손자이다. 젊어서 고제(高弟)로 급제했는데, 임금이 시권(試券)을 뜯어보고는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쳐 흘렀었다. 아우는 김민택(金民澤)인데, 자(字)가 치중(致仲)이다. 또한 고제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김운택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자상하여 문예(文藝)를 좋아했다. 김민택은 사람됨이 침심(沈深)하여 큰뜻이 있었으며, 용모가 풍만하고 미목(眉目)이 훤해서 바라보면 엄숙하였다. 그의 아망(雅望)은 김운택만 못하였지만 마음속의 기변(機變)은 더 나았으므로, 사람들이 공보(公輔)248)  의 기국이라고 여겼었다. 경종(景宗)이 병이 있어 저사(儲嗣)가 없고 환관이 용사(用事)하게 되자, 김운택은 사직(社稷)이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을 알고 이에 김민택과 함께 이정소(李廷熽)에게 소장을 올려 저사를 세우기를 청하도록 권고하였는데,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공경(公卿)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충헌공(忠憲公) 김창집(金昌集)·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가 경(卿)들을 인솔하고 들어와 경종을 뵙고 대비(大妃)에게 아뢰어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밤 시각(時刻)이 끝나게 되자 경종이 대전(大殿)에 나와서 대비가 내린 휘지(徽旨)를 내어 영종(英宗)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제(王世弟)로 삼았으니, 이는 본디 김운택 형제의 계모에 의한 것이었다. 김운택은 처음 영변부(寧邊府)에 찬배(竄配)되고, 김민택은 선천부(宣川府)에 찬배되었는데, 목호룡(睦虎龍)이 무옥(誣獄)을 크게 일으키자, 김운택이 체포되었다. 최석항(崔錫恒)이 국문(鞫問)하는 일을 위임 받았는데,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일에 대해 신문하니 김운택이 정색하고 최석항을 책망하기를,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이 일을 묻는 것은 다만 무함이 선왕에게 미칠 뿐만이 아니다. 천하 후세에서 성상을 어떻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최석항이 기운이 꺾여서 이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김운택을 비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선왕에게 관계되어 신자(臣子)로서는 감히 물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도성(都城)을 나갔다. 다시 소장을 올려 극력 영구(營救)하였지만 끝내 구제하지 못하였다. 김운택이 마침내 옥중에서 죽으니, 그때 나이 50세였다. 그리고 장령 윤회(尹會)가 김민택이 실상 거괴(巨魁)라고 논했기 때문에 드디어 체포되어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고 옥중에서 죽었는데, 그때 나이 45세였다. 김민택이 죽음에 임하여 옷소매를 찢어 절명서(絶命書)를 지어 아우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 나야 죽은들 무슨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영변(寧邊)의 길이 멀어서 나의 혼백(魂魄)이 꿈에서나마 중씨(仲氏)를 만나고 싶었지만 또한 갈 수가 없으니, 매우 슬프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종(英宗) 원년에 하교(下敎)하기를,
"적신(賊臣)이 천총(天聰)을 속여 가리고 나라의 군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둘러 선인(善人)과 양사(良士)들을 매우 많이 죽였으니, 그 봉인(鋒刃)의 참독함을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그들을 모두 복관(復官)시키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운택이 비로소 복관되어 이조 판서겸 대제학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김민택도 복관되어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2월 16일 정묘

부음(訃音)을 전하는 칙사(勅使) 액진나(額眞那)와 오이태(吳爾泰)가 서울에 왔다. 강희(康熙)249)  의 유조(遺詔)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천하를 얻은 정당함이 우리 조정의 태조(太祖)·태종(太宗)과 같은 경우가 없었다. 처음에는 천하를 취할 마음이 없었는데, 군병(軍兵)이 경성(京城)에 이르자 대신들이 모두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는, ‘명(明)나라와 우리 나라는 본디 화호(和好)를 맺은 사이가 아니므로 지금 취하려고 하면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명나라가 중국의 주재(主宰)임을 생각하여 차마 취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뒤에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을 공파(攻破)하고 숭정(崇禎)250)   황제가 스스로 목매어 자결(自決)하자 신민(臣民)들이 서로 인솔하고 와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틈적(闖賊)251)  을 공격하여 멸하고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은 것이다. 그리고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숭정(崇禎)을 안장(安葬)하였다.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이었고, 명 태조(明太祖)는 황각사(皇覺寺)의 중이었는데, 항우(項羽)가 군대를 일으켜 진(秦)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천하는 결국 한(漢)나라에 돌아갔으며, 원(元)나라 말기에 진우량(陳友諒) 등이 벌떼처럼 많이 일어났으나, 천하는 결국 명(明)나라에 돌아갔다. 우리 조정에서는 전공(前功)을 바탕으로 하여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따라 계속해서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런 것을 가지고 보면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진주(眞主)에 의해 구제(驅除)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저 제왕(帝王)은 천명을 타고난다는 것을 짐(朕)이 어렸을 적부터 글을 읽었기 때문에 고금의 도리(道理)에 대해 대강 깨달아 알고 있다. 또 젊은 나이 때에는 50석(石)의 활을 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평생에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이 삼번(三藩)252)  을 평정하고 한북(漢北)을 소탕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마음의 운주(運籌)에서 나온 것이었다. 호부(戶部)의 탕금(帑金)도 군대의 동원과 흉년의 구제가 아니면 감히 함부로 허비하지 않았으며, 행궁(行宮)을 순수(巡狩)할 적에는 비단으로 치장하지 않았다. 짐의 자손(子孫)이 1백여 인이고 짐의 나이 70세인데, 제왕(諸王)·대신(大臣)과 몽고인(蒙古人)이 모두 사랑하여 떠받들고 있다. 짐이 이제 천수(天壽)를 누리고 마치게 되니 짐도 기쁜 마음이다. 옹친왕(雍親王)인 넷째 아들 윤진(胤禛)은 짐을 너무도 잘 닮았으니, 반드시 대통(大統)을 잘 이어받을 것이기에 짐을 이어 황제위(皇帝位)에 나아가게 하노라. 이런 사실을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여 모두 들어서 알게 하라."
하였다

 

12월 22일 계유

청(淸)나라 사신(使臣)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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