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1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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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계미

경연관(經筵官)을 소대(召對)001)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환관(宦官)은 황의(黃衣)를 입고 늠식(廩食)을 먹으면서 문을 지키고 청소하는 것 등의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 내관(內官) 최홍(崔泓)은 임금을 배알(排軋)하였으니, 매우 무상(無狀)하다. 나문(拿問)하여 엄단(嚴斷)하라."
하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진유(李眞儒)가 아뢰기를,
"전후 내관의 일 때문에 엄한 하교를 내려 잡아다가 다스린 것이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습니다만, 감죄(勘罪)할 적에는 결국 매양 그런 실상이 없었던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으니, 이는 징계하고 면려시키는 방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최홍(崔泓)이 범한 죄의 경중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심지어 임금을 배알(排軋)했다는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너무 중대(重大)한 것 같으니, 의당 상량(商量)하여 적당한 데로 귀결짓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아무런 발락(發落)002)  이 없었다. 임금이 또 사관(史官) 신치운(申致雲)의 걸음걸이가 완만하여 자못 거만한 모습이 있다 하여 처음에는 파직(罷職)을 명하였다가, 다시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진유(李眞儒)가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월 7일 정해

이희조(李喜朝)를 영암군(靈巖郡)에 찬배(竄配)했는데, 이진유(李眞儒)의 청을 따른 것이다.

 

1월 10일 경인

김조택(金祖澤)을 남해현(南海縣)에, 김복택(金福澤)을 거제부(巨濟府)에, 김정택(金廷澤)을 진도군(珍島郡)에, 김연택(金延澤)을 지도(智島)에, 김덕재(金德材)를 제주목(濟州牧)에, 김선재(金善材)를 정의현(旌義縣)에, 김준재(金俊材)를 흑산도(黑山島)에, 김후재(金厚材)를 금갑도(金甲島)에, 김위재(金偉材)를 신지도(薪智島)에, 김양재(金養材)를 부안현(扶安縣)에, 김성재(金聖材)를 진도군(珍島郡)에, 김용재(金用材)를 부안현(扶安縣)에, 김기손(金騏孫)을 추자도(楸子島)에, 김해득(金海得)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流配)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김춘택(金春澤)의 아우·아들·조카들로 이진유(李眞儒)의 청을 따른 것이다. 역옥(逆獄)에 연좌(緣坐)된 사람들 가운데 2, 3세의 아이는 정배(定配)하지 말라는 수교(受敎)가 있었는데도 이제 아울러 절도(絶島)에 유배시켰기 때문에 어미와 자식이 서로 헤어지느라고 울부짖는 울음소리에 화기(和氣)가 손상될 지경이었으니, 이는 왕정(王政)에 있어서는 그릇된 일이었다. 당시의 사관(史官)도 이를 풍자하여 평했으니, 그래도 한 가닥 공의(公議)는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흉당(凶黨)들이 율법(律法)의 적용을 참혹하게 했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다.

 

1월 14일 갑오

박징빈(朴徵賓)을 내보내어 이성 현감(利城縣監)에 보임(補任)시켰다. 박징빈이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윤순(尹淳)을 논핵하자 조정의 의논이 갈수록 더욱 괴려되었기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박징빈을 내쫓아 외직에 보임한 것인데, 이는 조정(調停)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날 승지(承旨) 이진유(李眞儒)가 아뢰기를,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이 김동필(金東弼)의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批答)이 내려지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계속 위축되어 들어앉아 있습니다. 김일경에게 병통이 있기는 하지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은 그가 본디부터 간직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김동필이 만약 사서(私書)에 관한 한 조항 때문에 혐의를 멀리하지 못한 것을 논했다면, 이는 실로 김일경이 주착(做錯)을 저지른 것이라 해도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평생을 거론하여 구단(句斷)하면서 탐탁(貪濁)하다고 지목하였고, 또 문자(文字)를 지적해 내어 비난을 가하였으니, 김동필의 소장이 진실로 무상(無狀)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미 이 때문에 견책을 받고 파직되었으니, 그의 소장에 대해 비답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그 상소를 도로 내어 주소서. 그리고 김일경의 소장에 대해서는 즉시 비답을 내려 출사(出仕)하도록 면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윤순(尹淳)은 신축년003)   겨울 김일경이 소장을 진달할 때를 당하여 마침 성묘(省墓)를 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고의로 규피(規避)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 언의(言議)하는 사이에 또한 비방을 자초하는 단서가 없지 않았습니다만, 대부분 정외(情外)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징빈이 그의 평생의 일을 거론하여 논핵하면서 심지어는 소인이라고 지목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한 조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전하께서 왕위(王位)에 오른 초두(初頭)이니, 조정이 의당 화협(和協)하기를 힘써야 하는데,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경박한 무리들이 갑자기 시끄러움을 야기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윤순의 문한(文翰)과 재망(才望)은 동류(同流)들 가운데 뛰어나고 공의(公議)도 이미 대계(臺啓)를 그르다고 하고 있으니, 계속 그대로 폐기시킬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수서(收敍)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 임금이 미령하여 수답(酬答)을 권태롭게 여겼으므로 제신(諸臣)의 장주(章奏)가 거의 모두 유중(留中)004)  되었는데, 간혹 수개월이 지나도록 회보(回報)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김동필이 소장을 올려 김일경이 지은 교문(敎文)을 논한 일에 대해서도 제때에 비답을 내리지 않았었다. 의자(議者)들은 오히려 그가 명백하게 통렬히 배척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진유(李眞儒)는 구해(救解)하기에 급급하여 도리어 그의 소장을 무상(無狀)하다고 하면서 맞바로 비답을 내리지 말고 도로 내어 줄 것을 청하였으니, 그의 당여(黨與)를 비호하는 무엄한 습성을 이루 다 주토(誅討)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때 사신(史臣)의 논의이니, 역적 김일경의 사나움과 이진유의 방자함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1월 17일 정유

헌납(獻納) 권익관(權益寬)이 아뢰기를,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의 역적은 오랫동안 국병(國柄)을 훔쳐 전적으로 추류(醜類)들을 결집시켜 당여들을 배포(排布)하고 확장(擴張)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주(伏誅)된 뒤 그들의 복심(腹心)과 혈당(血黨)들이 우러러 기대할 곳을 잃게 되자 은밀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화란(禍亂)을 일으킬 계책을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문출(門黜)005)  한 죄인 김재로(金在魯), 전 도승지(都承旨) 신사철(申思喆), 전 대장(大將) 장붕익(張鵬翼), 전 부사(府使) 김취로(金取魯), 전 사간(司諫) 김고(金槹), 전 현감(縣監) 김영행(金令行), 전 경력(經歷) 김희로(金希魯)·강욱(姜頊), 빙고 별제(氷庫別提) 구정훈(具鼎勳) 등은 어떤 자는 온 집안을 시골로 내려보내고 자신은 서울의 집에 혼자 있기도 하고, 어떤 자는 교여(轎輿)를 타고 자취를 숨긴 채 주도 면밀하게 왕래하기도 하고, 어떤 자는 부자(富者)로서 재물(財物)을 아끼지 않고 쓰기도 하며, 어떤 자는 최복(衰服)을 입고 몰래 은밀한 자리에서 어두운 밤에 모이기도 하여 정적(情跡)이 은밀하고 비밀스러웠기 때문에 여정(輿情)이 의구심을 품어 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북자(北咨)006)  가 온 것을 빙자하여 근거없는 말을 지어낸 다음 돌려가면서 전파하여 중외(中外)를 선동시키고 있으니, 근래 낙하(洛下)007)  가 소란스러운 것은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나라를 원망하고 화란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려는 것으로 이야말로 진실로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 형체를 볼 수가 없으면 그 그림자를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무리는 그 처지를 논하면 본디 역적들의 혈당(血黨)이고, 행적(行跡)을 말한다면 실로 모든 사람들이 다 가리키고 있는 바이니, 어찌 그림자를 살펴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모두 극변(極邊)에 찬배(竄配)시키고, 오늘 즉시 압송(押送)하여 화근(禍根)을 근절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기해

김재로(金在魯)를 이산군(理山郡)에, 신사철(申思喆)을 장기현(長鬐縣)에, 장붕익(張鵬翼)을 종성부(鐘城府)에, 김취로(金取魯)를 울산부(蔚山府)에, 김고(金槹)를 경성부(鏡城府)에, 김영행(金令行)을 기장현(機張縣)에, 김희로(金希魯)를 위원군(渭原郡)에, 강욱(姜頊)을 삼수부(三水府)에, 구정훈(具鼎勳)을 동래부(東萊府)에 찬배(竄配)하였다.

 

1월 21일 신축

청(淸)나라 사신(使臣) 액화납(額和納)과 광복(廣福)이 서울에 들어왔다. 임금이 서교(西郊)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환궁(還宮)하여 칙서를 받았다.

 

1월 22일 임인

청(淸)나라에서 내린 조서(詔書) 때문에 진하(陳賀)하고 교서(敎書)를 내렸으며, 반사(頒赦)하고 백관(百官)에게 가자(加資)하였다.

 

1월 25일 을사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이번의 역옥(逆獄)은 이것이 전에 없던 대옥(大獄)이었습니다만, 처음에 형찰(詗察)하거나 적발(摘發)하거나 고변(告變)한 사람이 없었고, 또 인연(寅緣)하여 상달(上達)한 일도 없었으므로, 실로 주장하여 지사(指使)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두 포장(捕將)은 진실로 기록할 만한 공이 있습니다. 대개 칼과 은화(銀貨)야말로 대단한 장물(贓物)인데, 이삼(李森)이 교묘한 술법으로 수색하여 냈으며, 신익하(申翊夏)도 그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삼수(三手)의 흉모(凶謀)에 대해서도 거의 다 핵출(覈出)하였습니다만, 독약을 쓴 한 조항에 대해서는 아직 적발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신익하가 홍순택(洪舜澤)의 종인 업봉(業奉)이란 자를 기포(譏捕)하였는데, 형신(刑訊)을 기다리지도 않고 맞바로 저들 가운데서 약을 판 사람의 성명(姓名)과 약의 형색(刑色)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홍순택도 감히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그저 ‘한 번 죽는 것 이외에는 다시 주달할 말이 없습니다.’ 했으니, 이것은 반은 승복(承服)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약에 대한 근저(根抵)가 여지없이 다 드러났으니, 그 공이 진실로 작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녹훈(錄勳)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는 아뢰기를,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인하여 역모의 정절(情節)을 찾아서 핵출(覈出)하게 되었으니, 목호룡은 녹훈(錄勳)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의논이 모두 단록(單錄)은 불가하다고 하였으며, 또 지존(至尊)께서 단지 목호룡과 함께 대맹(對盟)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니, 그 말도 또한 옳습니다. 우상(右相)이 진달한 바에 따라 두 사람을 감훈(勘勳)하는 것이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고 최석항(崔錫恒)은 아뢰기를,
"만일 순차를 논한다면 이삼(李森)이 당연히 1등이고 신익하(申翊夏)가 2등이고 목호룡이 3등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아뢰기를,
"진신(搢紳)들 사이의 의논은 기미(幾微)를 살펴 사직(社稷)을 호위한 공은 절로 돌아갈 데가 있다고 합니다. 사흉(四凶)이 연차(聯箚)를 올릴 적에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실낱 같았는데, 대신(大臣)이 의리에 입각하여 청대(請對)해서 다시 천위(天位)008)  를 안전하게 하였으니, 대신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오늘이 있을 것을 보장하겠습니까? 의당 병기위사(炳幾衞社)라는 것으로 훈호(勳號)를 만들고 아울러 녹공(錄功)한 가운데 기입해야 합니다. 지금 단지 두 포장(捕將)만으로 단촐하게 녹훈한다면 자못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닙니다. 신은 대신(大臣)을 녹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조태구(趙泰耉)가 외람스럽다고 공척(攻斥)하면서 추문(推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권규(權珪)와 이잠(李潛)에게 증직(贈職)하였다.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신축년009)   겨울 제신(諸臣)들 가운데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항언(抗言)한 사람은 진실로 숭장해야 하는데, 그때 고(故) 참판(參判) 권규(權珪)는 병중에 소장을 올렸다가 심지어는 엄한 형신(刑訊)을 가하여 국문(鞫問)하자는 논계(論啓)가 있었습니다. 그 뒤 즉위한 처음에 잇따라 제수(除授)하는 명을 내렸어도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같은 때에 소장을 올린 사람들은 모두 현직(顯職)에 발탁되었는데, 권규만이 먼저 졸서(卒逝)했습니다. 수립(樹立)한 것이 이런 사람은 의당 추후에라도 포증(褒贈)해야 합니다."
하자,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도 잇따라 조태억(趙穩億)의 말과 같이 진달하면서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증직(贈職)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행 부사직(行副司職) 심단(沈檀)이 아뢰기를,
"이잠(李潛)은 고(故) 참판(參判) 김하진(金夏鎭)의 아들입니다. 평생 강개한 마음으로 기절(氣節)이 있었는데,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소장을 올려 군흉(群凶)들이 전하를 모해(謀害)하는 정상을 진달하면서 전후 좌우가 모두 칼을 겨누고 있다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망(白望)의 칼이 색출되자 이잠의 말이 마치 부계(符契)처럼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선견지명은 진실로 범인(凡人)으로서는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생(死生)을 돌보지 않고 몸을 떨치고 일어나 항언(抗言)한 절개에 이르러서는 옛날의 진동(陳東)010)  과 구양철(歐陽澈)011)  이라도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소본(疏本)을 등사(謄寫)하여 올리게 해서 한 번 어람(御覽)을 거친다면, 그의 충절(忠節)을 상상할 수 있음은 물론 포증(褒贈)하는 법전(法典)도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이진급(李眞伋)·오수원(吳遂元)을 복과(復科)시켰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이헌영·이헌장·이진급을 복과(復科)시키는 일을 묘당(廟堂)에 물어보지 않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소장을 올려 진달하여 막았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미 억울한 정상을 알고 있으니 그대로 삭과(削科)시킨 채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아울러 복과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아뢰기를,
"오수원도 일체로 똑같이 복과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헌영(李獻英)과 이헌장(李獻章)은 이사상(李師尙)의 아들이고, 이진급(李眞伋)은 이진유(李眞儒)의 아우이고, 오수원(吳遂元)은 오도일(吳道一)의 아들인데, 모두 임진년012)   과거(科擧)에서 파방(罷榜)된 사람들이었다. 이진유와 이사상이 바야흐로 의논을 주도하여 용사(用事)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세가 매우 치성하였다. 때문에 선왕(先王)의 지엄한 처분(處分)을 무시하고 이와 같이 마음대로 고친 것이다.

 

이삼(李森)을 부사 일등 공신(扶社一等功臣)으로, 신익하(申翊夏)를 이등 공신(二等功臣)으로, 목호룡(睦虎龍)을 삼등 공신(三等功臣)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국구(國舅)인 어유귀(魚有龜)를 원훈(元勳)으로 삼았었으나, 어유귀가 굳이 사양했으므로 다시 이삼·신익하·목호룡을 3등으로 나누어 정하였다. 이삼·신익하가 또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는데, 대관(臺官) 김중희(金重熙)·승지(承旨) 오명항(吳命恒) 역시 구례(舊例)를 인용하여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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