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갑자
한세량(韓世良)을 승지(承旨)로, 김진상(金鎭商)을 지평(持平)으로, 신절(申晢)·김제겸(金濟謙)을 교리(校理)로, 이중협(李重協)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덕수(李德壽)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청하기를,
"경기(京畿) 각 고을의 군향(軍餉)에 대하여 예전의 미수(未收)는 수봉(收捧)을 정지하고, 새로 분급(分給)한 것은 모두 수봉하여 본소(本所)에 수납(收納)하게 하소서. 고양(高陽)은 산릉(山陵)이 있는 지방관(地方官)으로서 온갖 책응(責應)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갑절이 되니, 봄에 낼 대동미(大同米) 3두(斗)를 양감(量減)하여 덕의(德意)를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청하기를,
"남병사(南兵使)는 이미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북청(北靑)은 마땅히 분목(分牧)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판관(判官) 권부(權孚)는 직임과 품질(品秩)이 서로 맞지 않지만, 듣건대 그 치적(治績)이 가장 우수(優秀)하여 백성들 중에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히 여기는 자가 많다 하니, 권부를 그대로 부사(府使)로 승차(陞差)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사로 승차함이 옳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임금께서 너무 지나치게 침묵하는 것에 대해 《주역(周易)》의 천지 교태(天地交泰)183) 의 의(義)를 인용하여 졸곡(卒哭) 후에 강연(講筵)을 열어 대신과 유신(儒臣)으로 더불어 문의(文義)를 논난하고 치도(治道)를 강구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발락(發落)이 없었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시탄(柴炭)을 감제(減除)하도록 이미 허락하셨다가 도로 예전대로 환원(還元)하시니, 듣는 자들이 두려워하며 의혹하고 있습니다. 또 선혜청(宣惠廳) 문서를 보니, 현종 대왕전(顯宗大王殿)의 시탄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올리고 있어 사체가 지극히 미안합니다. 그 한 가지를 감제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대신에게 순문(詢問)하기를 청하였는데, 김창집과 이건명이 모두 두 가지 가운데에서 한 가지는 감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숫자가 적은 것을 감제함이 옳다."
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영휘전(永徽殿)의 나인[內人]에게 쌀과 찬(饌)을 예전대로 지급하는 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니, 신규(新規)를 만들어 시행함은 옳지 못합니다. 이는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본조(本曹)에 있을 때에 혁파하기를 청하여 즉시 따랐던 것인데, 이제 또 다시 예전대로 올리라는 명이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바야흐로 조태구를 돈소(敦召)하셨는데, 그가 건청(建請)한 바를 이미 따랐다가 도로 정침(停寢)한다면 아마도 성덕(聖德)에 부족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절반을 감제함이 옳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의 수납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미납(未納)이 1백 석(石) 이상 되는 수령(守令)은 나문(拿問)하고, 군문(軍門)의 월과 조총(月課鳥銃)184) 값은 다시 임시로 감손하였다가 풍년을 기다려 출급(出給)하게 하소서. 진휼청(賑恤廳)의 전곡(錢穀)을 수령들이 진자(賑資)로서 대출(貸出)을 받고 기한 안에 도로 바치지 않은 경우에는 기한을 정하여 상환(償還)을 독촉할 것이며, 한만하게 명령을 받들지 않는 자는 또한 각별히 논죄(論罪)하소서."
하니,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임형(任泂)이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삼(李森)은 젊고 명망이 가벼우며 또 이력(履歷)이 얕으므로 제수한 후에 곧 논박(論駁)이 나왔는데, 급급히 사조(辭朝)했으니, 더욱 지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삼은 원래 재능이 많았는데 그 당(黨)에 아부하지 않았으므로, 임형이 탄핵한 것이었다.
11월 3일 병인
졸곡제(卒哭祭)를 거행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유중무(柳重茂)가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첫째 옥당(玉堂) 완록(完錄)의 섬홀(閃忽)함과, 둘째 도당록(都堂錄) 회권(會圈)의 망급(忙急)함을 논하였으며, 셋째 우의정 조태구(趙泰耉)에게 개유(開諭)할 것과, 넷째 이광좌(李光佐)를 신리(伸理)할 것을 청하였다. 소를 올린 지 여러 날 만에 비로서 비답하기를,
"관록(館錄)이 이미 완결된 뒤에 따라서 물색(物色)을 더하여 대신을 헐뜯으니, 지극히 미안한 일이다. 아래 조항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유중무의 소는 그 말이 반드시 그르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시기(時期)는 논하면 불가한 것이다. 대개 시배(時輩)들은 바야흐로 의심과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었고 여항(閭巷)에서는 떠들썩하게 뜬소문이 나돌아 시국(時局)이 조석간(朝夕間)에 마땅히 변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마침 꼭 이때에 이 상소가 들어왔고, 또 당록(堂錄)이 겨우 완성된 날에 해당했으니, 유중무의 마음이 탐시(探試)하고 엿보는 데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누가 믿겠는가? 사부(士夫)로서 참으로 얻는 데는 심려(心慮)를 쓴다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태항(朴泰恒)이 소를 올려 임금의 마진(痲疹)185) 이 평복(平復)된 데 대한 경과(慶科)를 내년 봄으로 물려 시행할 것을 청하고, 또 논하기를,
"과거(科擧)가 너무 잦아 오로지 변려문(駢儷文)186) 을 숭상하는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과제(科製)는 드물게 시행하고 간혹 부(賦)와 책문(策文)으로 시취(試取)하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11월 4일 정묘
경기 유학(京畿幼學) 김행진(金行進) 등이 소를 올려 윤지술(尹志述)을 참(斬)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춘추(春秋)》에 아들이 어미를 끊는 도리가 없고 아들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으니, 전하의 사친(私親)은 전하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슬프다! 부모님은 나를 낳으시고 수고하셨네, 그 은혜 갚고자 해도 저 하늘같이 한량없구나.’ 하였으니, 부모가 자식에게 베푼 수고와 돌보아 준 은혜는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일반입니다. 어찌 아들이 임금이 되어 그 낳아 준 어머니의 은혜를 끊고 돌아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에는 도리와 사체가 전날과 판이하게 다른데, 이제 윤지술은 감히 말하기를, ‘전하께서 사친(私親)에 대하여 다시 돌볼 수 없는 것은 의리에 비추어 분명하다.’ 하였으니, 이런 도리가 어느 전기(傳記)에서 나왔습니까?
옛날 송 환공(宋桓公) 부인이 송 양공(宋襄公)을 낳고 버림받아 위(衛)나라로 돌아갔는데, 송양공이 즉위하자, 부인이 애끊는 마음으로 하광(河廣)의 시(詩)187) 를 지었습니다. 선유(先儒)의 말에, ‘천하(天下)에 어찌 어머니가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송양공의 입장으로는 살아 있을 때에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예절(禮節)을 다할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송 양공의 그 어머니는 그 아비에 의해 쫓겨났는데 선유의 논이 이와 같았으니, 그 천리(天理)를 미루어 넓히고 인정을 곡진하게 하는 것이 어찌 어머니의 도리는 끝내 끊을 수 없고 생육(生育)의 은혜는 반드시 갚는 데에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만약 이 의리를 미루어 말한다면 전하께서 사친께 추보(追報)하는 바와 신자(臣子)로서 성정(聖情)을 우러러 본받은 것이 각기 마땅한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윤지술은 감히 말하기를, ‘전하는 사친에 대하여 은휘(隱諱)할 것이 없고 신자(臣子)도 은휘할 의(義)가 없다.’고 하였으니, 아! 이는 장차 전하로 하여금 사친을 죄인으로 대접하여 그 낳아준 큰 은혜를 끊어버리고, 전하의 신자(臣子)된 자에게도 또한 모두 욕설을 퍼부어 거리낌이 없는 연후에야 그 마음에 시원하게 여긴다는 것입니까?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는 남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니, 비록 자신과 대등(對等)한 이하의 사람에게도 또한 감히 드러나게 말하며 곧장 배척하여 효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윤지술은 감히 말하기를, ‘밝게 법을 시행하여 여러 사람의 울분을 풀게 하라.’고 하여, 마치 전하의 망극한 변고(變故)를 다행하게 여기고 국가의 불행한 일을 시원하게 여기는 것처럼 했으니, 그 윤리(倫理)를 무너뜨리고 군부(君父)를 멸시함이 여지(餘地)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우선 윤지술을 유사(有司)에 맡겨 나라의 형법을 바르게 하여 윤리가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하였다. 충청도 유학 홍흡(洪潝) 등이 또한 소를 올려 윤지술을 참할 것을 청하였는데, 김행진의 소와 함께 들어갔으나 모두 궁중(宮中)에 보류해 두고 내리지 않았다.
장령(掌令) 임형(任泂)이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김행진·홍흡 등을 논박하기를,
"지난번 조중우(趙重遇)의 소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특별히 도로 출급(出給)하게 하여 엄중히 징계를 가하셨고, 그 후에 또 이러한 소장(疏章)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下敎)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조최수(趙最壽)가 소를 올려 시험해 본 후로부터 성상께서 다시 엄척(嚴斥)하지 않으셨으므로, 이 무리들이 갑절이나 기가 올라 거리낌없이 무뢰배(無賴輩)들을 불러모아 흉측한 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후설(喉舌)188) 을 맡은 자로서는 성교(聖敎)를 밝게 보이고 준엄한 말로써 물리침이 옳은데, 이제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제멋대로 받아들였으니, 그 성명(成命)을 아랑곳하지 않고 흉당(凶黨)을 몰래 두둔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오늘 사진(仕進)한 승지(承旨)는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승지 이익한(李翊漢)과 심수현(沈壽賢)은 일직(日直)을 비우고 흩어져 나갔다. 윤지술의 패악(悖惡)하고 임금을 멸시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데, 기사년189) 의 여당(餘黨)들이 틈을 타서 시골 유생을 사주하여 밖으로는 윤지술을 거짓 공격하는 체하고 안으로는 임금의 마음을 격동시켜 기사년의 윤리에 어긋난 흉도(凶圖)를 재연(再演)하려 한 것이었다. 하광(河廣)의 석의(釋義)에 이르러서는 그 반을 잘라버리고 어머니의 은혜를 주장하는 의논으로 굽혀 이루었으니, 그 패악한 정상은 또한 준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만 윤지술을 핑계대어 말을 했으니 후사(喉司)에서 또한 어떻게 물리칠 수 있겠는가? 임형과 같은 자는 시론(時論)을 떠받들어 몰래 윤지술을 위하는 체하면서 도리어 흉당(凶黨)을 도와 승선(承宣)을 무함했으니, 또한 해괴한 일이었다.
11월 5일 무진
헌부(憲府)에서 또 논하기를,
"승지(承旨) 임수간(任守幹)이 대관(臺官)을 출접(出接)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처음에 만약 함께 참여했다면 어찌 감히 소패(召牌)를 받고 안연히 입직(入直)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6일 기사
이재(李縡)를 도승지(都承旨)로, 김진상(金鎭商)을 수찬(修撰)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장령(掌令)으로, 정택하(鄭宅河)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징휴(李徵休)에게 가선(嘉善)의 계급(階級)을 더했으니, 치적(治績)과 진정(賑政)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11월 7일 경오
밤 2경(二更)에 달무리가 졌다.
헌부(憲府)에서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승지(承旨) 임수간(任守幹)의 파직을 논청(論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리니,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렸다. 이 때 당인(黨人)들이 속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관망(觀望)하여 오래 있을 뜻이 없었으니, 조태채(趙泰采)·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조도빈(趙道彬) 등이 모두 휴가를 청하여 시골로 내려갔고, 이건명도 또한 인입(引入)하였다.
11월 8일 신미
신방(申昉)을 지평(持平)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영빈(寧嬪)의 제택(第宅)을 개조(改造)하여 줄 것을 명하였는데, 영빈은 선조(先朝)의 후궁(後宮) 김씨이었다. 졸곡(卒哭)을 지낸 후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선조의 후궁이 사제(私第)로 나가 사는 것은 이미 전부터 정해진 규례가 있다. 영빈이 이제 나가 사는데, 예전에 사제가 있기는 하지만, 후궁의 제택으로는 합당하지 않으니, 개조하여 줄 일을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국(局)을 설치하여 선왕(先王)의 《실록(實錄)》을 찬수(纂修)할 것을 명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총재관(摠裁官) 이하 관원을 차출하게 하였으니, 춘추관(春秋館)의 계품으로 인한 것이었다.
11월 9일 임신
이정신(李正臣)·정형익(鄭亨益)·조관빈(趙觀彬)을 승지(承旨)로 삼고, 김창집(金昌集)에게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을 겸임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총재관이 되어 각청(各廳)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을 차출하는데, 도청(都廳)과 낭청(郞廳)은 극선(極選)임에도 그 아들 김제겸(金濟謙)을 차출하니, 물의(物議)가 비웃었다.
금부(禁府)에서 의언(議獻)하여 아뢰기를,
"부윤(府尹) 이정주(李挺周)는 그 죄가 장(杖) 80도(度)에 해당되는데, 속전(贖錢)을 바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정주는 장물죄(贓物罪)가 낭자하여 숨길 수가 없는데도 본도(本道)에서는 사실대로 사핵(査覈)하지 않았고, 금부에서는 또 사정(私情)에 이끌려 가볍게 감죄(勘罪)하였으므로, 여정(輿情)이 해괴하게 여겼다.
11월 10일 계유
밤 1경(一更)에 달무리가 졌고, 5경(五更)에 번개가 쳤다.
청사(淸使) 내각 학사(內閣學士) 액화납(額和納)과 부사(副使) 일등 시위(一等侍衞) 의도액(宣都額) 진덕록(眞德祿)이 조제(弔祭)의 일 때문에 나왔는데,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치문(馳聞)하니, 유명웅(兪命雄)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각참 영위사(各站迎慰使) 이정주(李挺周)·안중필(安重弼) 등이 병을 핑계대어 끝내 나오지 않으므로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여 모두 파직을 명하였으니, 기강(紀綱)이 여지없이 무너졌음을 이에서 볼 수 있다.
11월 11일 갑술
이진검(李眞儉)을 승지(承旨)로, 윤각(尹慤)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다. 윤각은 양국(兩局)의 장임(將任)을 거치지 않고 외람되게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니, 이는 대개 김창집의 무리가 심복(心腹)으로 삼아 발탁한 것이었다.
11월 12일 을해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종실 전강(宗室殿講)190) 을 거행하고, 거수(居首) 2인은 모두 가자(加資)했으며, 그 이하는 차등이 있게 말을 주었다.
11월 13일 병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유중무(柳重茂)가 소를 올려 당록(堂錄)을 배척한 데 대하여 차자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유중무는 요망하다 하여 체직(遞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정형익(鄭亨益)이 소를 올려 산릉(山陵)에 전알(展謁)191)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이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날을 가려 거행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박태항(朴泰恒)의 소론(疏論)으로 인하여 경과(慶科)를 내년 봄으로 물려 거행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1월 14일 정축
새벽부터 사시(巳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약방(藥房)에서 대비전(大妃殿)에 아뢰어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안으로부터 도달(導達)하여 자전(慈殿)께서 마음을 돌려 청허(聽許)하시도록 기필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고부사(告訃使) 이이명(李頤命) 등이 연경(燕京)에서 언문(諺文)으로 쓴 서신을 인편에 부쳐 아뢰기를,
"칙행(勅行)이 말한 바 봉전(封典)에 관한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예부(禮部)에 올렸더니, 낭중(郞中)이 당상(堂上)의 뜻으로 묻기를, ‘세자(世子)는 미처 황지(皇旨)를 받들어 왕에 봉(封)하지 않았는데, 추봉(追封)과 요봉(邀封)192) 을 어찌 한꺼번에 아울러 거청(擧請)하였는가?’ 하므로, 전례가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후 오랫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회동관 제독(會同館提督) 상숭탄(尙崇坦)이 처음부터 자못 은근한 눈치를 보이면서 시랑(侍郞) 경일진(慶一陳)이 지은 바 복주(覆奏)를 몰래 보여 주었는데, 그 결어(結語)에 ‘왕비(王妃)의 책봉(冊封)은 이름을 들어 주청(奏請)하는 날을 기다려 봉(封)할 것을 다시 의논하겠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상숭탄이 이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일을 잘못하였는데, 내가 힘을 써서 그 마음을 돌리겠다.’ 하여 드러나게 뇌물을 바라는 뜻이 있으므로, 역관(譯官)들로 하여금 꾸며대어 적당히 대답하게 하였습니다. 갑인년193) 사행(使行) 때에도 이러한 탈을 잡은 일이 있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쟁변(爭辨)하기에 이르렀는데, 특지(特旨)로 주청(奏請)한 일을 준허(準許)하였으니, 다른 길로 주선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그 흠점을 집어내는 것이 통분하나 사세가 이와 같으니, 갑인년의 전례를 참용(參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11월 16일 기묘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2품(品)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 대비전(大妃殿)에 아뢰어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청하고 재차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곁에서 간곡히 권면한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힘을 다하여 간청했으나 자전(慈殿)의 마음을 돌릴 수 없으니, 민망함을 어찌 다 이르겠는가?"
하였다.
남도규(南道揆)를 승지(承旨)로, 어유룡(魚有龍)을 지평(持平)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수찬(修撰)으로, 김민택(金民澤)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심택현(沈宅賢)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문신(文臣)에게 강(講)을 시험보이고 거수(居首)에게 말을 주라고 명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나아가 말하기를,
"종신(宗臣)과 문신(文臣)의 전강(殿講)에 연달아 친림하셨으니, 이는 실로 재예(才藝)를 권장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졸곡(卒哭)이 이미 지나갔고 정사(政事)를 보살피는 일이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이런 일은 원래 제일 가는 급무가 아닙니다. 오늘날 시급한 바는 유신(儒臣)을 친근히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서사(書史)을 강론하는데 성의(聖意)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또 청하기를,
"몸을 조섭하는 데 각별히 유의하시고 가끔 삭망(朔望)의 제전(祭奠)을 몸소 거행하소서."
하니, 또한 받아들였다. 또 말하기를,
"영빈(寧嬪)의 제택(第宅)을 개조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일찍이 후궁(後宮)의 제택을 개조해 준 전례는 없고, 다만 참작하여 값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천금(千金)을 지급하고 내사(內司)194) 로 하여금 간검(看檢)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7일 경진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비전(大妃殿)에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정청(庭請)하고, 재차 아뢰었으나 또 따르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힘써 정청하였는데, 자성(慈殿)이 비로소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종신(宗臣)들도 또한 서로 이끌고 와서 권도를 따를 것을 계청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올린 상소 내용에 청국(淸國) 사신(使臣)과 더불어 피혐(避嫌)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최석항(崔錫恒)으로 대신하였다. 유숭(兪崇)을 승지(承旨)로, 유명홍(兪命弘)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11월 19일 임오
집의(執義) 홍우전(洪禹傳)이 소를 올려 일에 대하여 논하기를,
"빨리 강연(講筵)을 열고 자주 유신(儒臣)을 인접하여 전학(典學)에 공력을 다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의 장주(章奏)에 대하여는 즉시 비답을 내려 정체(停滯)되는 한탄(恨歎)이 없게 할 것이며, 대소 신료(臣僚)들이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가는 일이 너무 빈번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신칙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게 하였으며, 여러 신하의 상소에 대해서도 곧 비답을 내렸다.
11월 20일 계미
밤 5경(五更)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김창집(金昌集)의 상소에 있는 말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매복(枚卜)한 뒤에 김창집이 갑자기 한 장의 차자를 올려 이르기를,
"저번 매복한 후에 외의(外議)에 말이 많아 좌상(左相)이 당연히 인혐(引嫌)할 것이라 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과연 그러했습니다. 매복은 사체가 중대하여 진실로 행공(行公)하는 대신이 있다면 반드시 아울러 명초(命招)하여야 하는데, 그날 신만 홀로 명을 받들었고 또 명초를 청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일이 상례(常例)에 어긋났으니, 사람들이 의혹을 품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는 실로 성명(聖明)께서 우연히 살피지 못한 데에서 나왔으니, 요상(僚相)은 조금도 불안해 할 단서가 없는 것입니다. 또 깊은 밤 갑작스러워 미처 왕복(往復)하여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했으니, 이는 신이 혼모(昏耗)하여 그르친 실수입니다. 요상이 이 때문에 정고(呈告)하였으니, 신이 또한 어떻게 안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당초에 여러 차례 가복(加卜)한 나머지 김창집이 임금의 뜻을 알아차리고 조태구로 복입(卜入)하여 낙점(落點)을 받기에 이르렀으나, 이에 김창집은 속으로 불평을 품은 채 겉으로는 옛 규례를 빙자하여 짐짓 의혹이니 올바르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해서 조태구로 하여금 불안하게 한 것이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업(權𢢜)과 원접사(遠接使) 유명웅(兪命雄) 등이 장계(狀聞)하기를,
"안주(安州)에 있을 때 역관(譯官) 장문익(張文翼) 등이 와서 상칙(上勅)의 말을 전하기를, ‘내가 연경(燕京)을 떠날 때에 황제의 분부가 있었는데, 나로 하여금 곧장 산릉(山陵)에 가서 조전(弔奠)의 예(禮)를 설행하라 하셨으니,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유숙(留宿)하고 다음날 능소(陵所)에 가서 행례(行禮)하겠다.’ 하였습니다. 역관 등에게 신칙하여 좋은 말로 거절하게 하였는데 칙사는 앞서 한 말을 고집한다 하니, 이는 이 일을 빙자하여 뇌물을 요구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여러 역관들에게 엄중히 신칙하여 힘을 다해 다투어 기필코 회청(回聽)하게 하고, 우선 치계(馳啓)합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을 거느리고 입대(入對)를 청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기축년195) 국상(國喪) 때에 칙사(勅使)가 또한 곧장 산릉(山陵)에 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체(事體)가 유별하다고 대답하고 돌아갈 때 산릉에 배알(拜謁)하는 청이라면 허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따로 중신(重臣)을 보내어 적당히 개유(開諭)함이 적절한데, 이관명(李觀命)이 바야흐로 관반(館伴)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청컨대 일을 잘 아는 역관(譯官)을 대솔(帶率)시켜 내려 보내소서."
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산릉에 배알하기를 청한다면 거절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황제의 분부라고 일컫고 반드시 산릉에 간다고 한다면 표석(表石)에 쓴 ‘숭정(崇禎)196) ’ 두 글자가 매우 불편합니다. 판벽(板壁)197) 으로 막고 저들이 설혹 묻더라도 복어물(服御物)198) 을 간직한 곳이라고 대답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1월 22일 을유
원접사(遠接使) 유명웅(兪命雄)과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유경(金有慶) 등이 다시 치계(馳啓)하기를,
"수역(首譯) 김홍지(金弘祉)가 산릉에 가서 제전(祭奠)을 올리는 것은 이미 전례(前例)가 아니며 또 황지(皇旨)의 문자도 없으니, 결코 창행(創行)199) 하기 어렵다며 누누이 말했으나, 황제의 명령이 있다 하고 전번의 말을 고집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황제가 특별히 우리를 보내어 산릉에 가서 제전(祭奠)을 올리게 하고, 또 무릎을 꿇고 곡(哭)하며 절하게 한 것은 모두 전에 없었던 특별한 은혜이다. 우리들이 산릉에 갈 때에는 그대 나라 임금도 또한 백관을 거느리고 산릉에 나아가 황은(皇恩)에 사례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봉산(鳳山)에 있어서는 칙사가 말하기를, ‘별도로 황지(皇旨) 1도(度)가 있는데 산릉에 제전(祭奠)을 올린 다음 국왕과 서로 만났을 때에 비로소 친히 전하겠다.’ 하며 끝내 뿌리치고 먼저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다시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칙사가 반드시 곧장 산릉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저들의 풍속이 산릉을 소중히 여겨 그런 듯하니, 다시 개유(開諭)하여 끝내 회청(回廳)하지 않는다면 허락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저들이 산릉에 갈 때에 성상께서는 비록 거둥하실 수 없으나 마땅히 대신을 보내어 접대해야 할 것이니, 대신과 도승지가 홍제원(弘濟院)으로 나갔다가 그대로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저들이 혼전(魂殿)에 조제(弔祭)한 일이 없으니, 성상께서 그들을 접견(接見)하는 한 가지 절차는 지극히 곤란합니다. 또 이미 주객(主客) 사이에 조위(弔慰)의 예(禮)가 없었으니, 칙사가 관소(館所)에 머물러 있을 때에 또한 무단히 찾아가 보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저들은 세가(世子)와 종실(宗室)의 자질(子姪)도 만나 보고자 한다고 하는데, 이런 허다한 불편한 절목을, 청컨대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반복하여 강정(講定)한 후에 빨리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저들은 아직 책봉한 일이 없으므로 세자(世子)라고 이르며, 또 종실(宗室)을 만나 보고자 하니, 이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민진원(閔鎭遠)이 아울러 빈신(儐臣)에게 분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유생의 전강(殿講)을 시험보였다. 거수(居首) 이근(李根)은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나머지는 각기 급분(給分)200) 하였다. 이건명이 다시 아뢰기를,
"저들의 다투어 고집하는 일이 점차 크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들의 도리에 있어서는 이미 황제의 ‘가서 조문(弔問)하라.’는 말을 받들었으면 혼전(魂殿)에 와서 조문하는 것이 예(禮)인데, 반드시 능소(陵所)에서 만나 보고자 하는 것은 자못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 청컨대 빈신(儐臣)으로 하여금 다시 다투어 고집하게 하소서."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능소에서 조문을 받는 것은 예가 아니요, 조문을 하지 않고 제사에 참여하는 것도 또한 예가 아니니, 예가 아닌 일은 들어줄 수 없다는 뜻으로 개유(開諭)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건명이 또 청하기를,
"곡장(曲墻)201) 뒤로부터 정자각(丁字閣)202) 앞에 이르기까지 훈국 도감(訓局都監)으로 하여금 좌우로 나누어 포장(布帳)을 설치하여 비각(碑閣)을 가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친림(親臨)하여 전강(殿講)을 설행하고, 또 혼전(魂殿)의 제전(祭奠)을 섭행(攝行)하게 하니, 청컨대 저번에 진달한 말을 살펴서 평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덕의(德義)를 빛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11월 23일 병술
밤 1경(一更)에서 3경까지 손방(巽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의 전교에 의하면, ‘자전에 진상할 각도의 삭선(朔膳) 및 물선(物膳)은 전일 중궁전(中宮殿)으로 있을 때의 예에 의하여 봉진(封進)하고, 방물 진상(方物進上)은 전례에 의하여 봉진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전의 전교가 이에 이르러 받들어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를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유중무(柳重茂)가 전조(銓曹)를 소척(疏斥)하였다 하여 소를 올려 체직(遞職)을 간청했는데, 오랫동안 회보(回報)가 없더니, 이에 비로소 비답을 내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1월 25일 무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아뢰기를,
"신이 홍제원(弘濟院)에 나가서 현관례(見官禮)를 거행한 후에 저들이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하므로, 서로 만나 보고 인하여 능소에 제전(祭奠)을 올리는 것은 원래 예의 뜻이 아니며, 반우(返虞)한 후에는 혼전(魂殿)이 소중하다는 뜻으로 누누이 개유(開諭)했더니, 칙사가 과연 허락할 뜻이 있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오직 산릉(山陵)을 소중히 여기므로 이런 별다른 은전(恩典)이 있었는데, 이제 만약 능소에 제전을 올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명을 어긴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朝鮮)의 대신이 만약 이에 대해 글을 지어 준다면 돌아가서 황제에게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세가 미처 앙품(仰稟)할 겨를이 없었고, 또 심히 중대한 일도 아니므로 신이 과연 칙사에게 써 주었습니다. 또 그들의 말에, ‘어첩(御帖)으로 오기를 청한다면 내일 마 땅히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하였으니, 청컨대 예조 낭관(禮曹郞官)으로 하여금 어첩을 받들고 오기를 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칙서(勅書)는 비록 없으나 이미 향(香)과 폐백(幣帛)이 있으니, 마땅히 칙사를 맞이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를 올려 전장(銓長)의 체직을 허락할 것을 청하고, 또 논하기를,
"문례관(問禮官) 정석오(鄭錫五)가 의주(儀註)를 전해 준 뒤 급급히 돌아갔으니, 경책(警責)을 더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이 빈청(賓廳)에 와서 모였는데, 후일에 와서 대기(待期)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한가하고 안일(安逸)한 데에 빠지지 말도록 각별히 유의(留意)하시고, 자주 신료(臣僚)를 접견(接見)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받아들였다.
11월 26일 기축
청사(淸使)가 서울로 돌아오니,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맞이하였다.
권상유(權尙游)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물러나와 시골집에 돌아오고부터 묘당(廟堂)의 범사(凡事)를 찾아와 묻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아득하여 들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늦게야 비로소 북사(北使)의 이른바 지회(知會)203) 하는 문자의 등본(謄本)을 얻어 보니, 그 뜻은 대략, ‘의례적으로 대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것 외에 특지(特旨)로 근어 대신(近御大臣)을 가려 보내어 조문(弔問)하겠다.’는 것으로, 이는 곧장 산릉에 가서 제전(祭奠)을 올린다는 뜻이었습니다. 또 그 아래에, ‘세자(世子)와 그 아우와 종실(宗室)의 자질(子姪)을 만나 본 후에 급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참된 소식이라면, 그 뜻을 추측할 수 없으니, 어찌 놀랄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데도 만약 거절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사리(事理)로써 말한다 하더라도 상국(上國)에서 열국(列國)의 임금을 조문(弔問)함에 있어 그 배신(陪臣)이 된 아우와 조카에까지 아울러 미친다면, 이는 옛날에 없었던 일로, 상국에서 시행함은 실례(失禮)가 되고, 배신이 받는 것은 혐의를 무릅쓰는 것이 됩니다. 저들을 비록 예의(禮義)로써 책망할 수는 없다 하나, 오늘날 왕자와 여러 종실들이 어찌 감히 이를 편안하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릉(山陵)에 제전(祭奠)을 올리는 것은 다툴 수가 없다면 그래도 부득이 따르겠지마는, 이 일에 이르러서는 결코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묘당에 각별히 신칙하여 빈접(儐接)하는 여러 신하와 더불어 전례에 의거하여 엄중히 거절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 거절하는 방법에 대하여는 사유(事由)가 없음을 걱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의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고, 이어 빨리 길을 떠나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11월 27일 경인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니,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어전 통사(御前通事) 김재로(金在魯) 등이 입대(入對)를 청하였다. 김창집이 아뢰기를,
"칙사가 황지(皇旨)라 일컫고 특별히 대신을 보내어 산릉에 치제(致祭)하고 종실(宗室)의 자질(子姪)을 만나 본 후에 급급히 돌아간다고 말하였으므로,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이 소식을 듣고 차자(剳子)를 올렸습니다. 칙사가 만나기를 청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하겠으나, 종실을 만나 보는 것은 원래 전례가 없었으니,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거절해야 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 ‘지금 종실은 모두 소원(疏遠)한 친족이요, 다만 왕제(王弟) 한 사람이 있으나, 병세가 위중하여 출입을 하지 못하니, 오늘 제전(祭奠)을 베푸는 데에도 또한 병을 무릅쓰고 와서 참여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하고, 준엄한 말로 막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당초 원접사(遠接使)의 장계에 이 말이 있었는데, 만약 막으려면 왕복할 즈음에 반드시 말이 많을 것입니다. 칙사가 와서 조문(弔問)할 때에 만약 과연 물을 경우에, ‘왕자는 다만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병 때문에 제전에 참여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면, 이는 전례에 따른 문답(問答)이 되어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요, 설혹 강제로 청하더라도 또한 사리에 의거하여 다투고 고집할 뿐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청하기를,
"칙사를 접견할 때에 성상께서 친히 하교하시고 통사(通事)로 하여금 칙사에게 전유(傳諭)하게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자, 이건명이 이어 말하기를,
"연접(延接)할 때에 일동 일정을 저들이 살피지 않는 것이 없으니, 청컨대 수응(酬應)할 때에 범홀(泛忽)히 하지 마소서."
하였다. 김재로가 또한 선조(先朝) 때 칙사를 접대한 절차를 진달하고, 이어 청하기를,
"신 등을 돌아보고 홀기(笏記)204) 에 의해 가서 전달할 뜻을 친히 하교하여 저들로 하여금 전하께서 친히 말하는 것을 보게 하소서."
하였다. 이건명 등이 또 청하기를,
"다례(茶禮) 및 연향(宴享)할 때에 친히 수저를 드시어 저 사람들이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울러 허락하였다. 대개 임금이 지나치게 침묵하니, 대리(代理)를 맡았을 때에 교영(郊迎)205) 을 섭행(攝行)하여 호차(胡差)를 접견(接見)하였는데, 통사(通事)가 왕복할 즈음에 한 마디 말이 없어서 아래에서 홀기(笏記)에 의해 말을 전했을 뿐이므로, 김창집 등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청사(淸使)가 향(香)과 폐백(幣帛)을 받들고 들어와 혼전(魂殿) 안에 있는 탁자(卓子) 위에 안치(安置)하였다. 임금이 전정(殿庭)에 서자 청사가 임금에게 함께 전작(奠酌)에 참여하기를 청하였는데, 김창집이 예가 아니라고 쟁변(爭辨)하였다. 청사가 비로소 세 번 향을 올리고 곡배(哭拜)하니, 임금이 또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곡(哭)하며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 전내(殿內)에 들어가서 동쪽을 향하여 서자, 청사가 황지(皇旨)를 받들고 임금의 앞에 놓으니, 임금이 무릎을 꿇고 받았다. 이건명이 황지를 펴들고 읽었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훙서(薨逝)한 연유를 주문(奏聞)하고 또한 표문(表文)을 올려 황지(皇旨)를 청하였다. 그 봉지(奉旨)에 의하면 조선 국왕이 봉작(封爵)을 승습(承襲)한 지 거의 50년이 되었으니, 그대의 나라가 옛날부터 이와 같이 장구한 역년(歷年)을 누린 적이 없었다. 또 국왕이 지극히 근신(謹愼)하여 공물(貢物)을 바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고, 공직(供職)한 지 거의 50년 동안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나라의 변방을 방어하여 태평 세월이 계속되어 털끝만큼도 사고(事故)가 없었으니, 온 나라 백성들이 감격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듣건대 병으로 훙서(薨逝)했다고 하니, 짐(朕)의 마음 애통함을 금할 길 없다. 파견된 신하가 치제(致祭)하는 곳은 해부(該部)로 하여금 전례에 비추어 주문(奏聞)함을 덜어주고, 짐(朕)이 문부(聞訃)하던 날에 드디어 대신을 시켜 역마(驛馬)로 달려가서 조문하게 하였다. 이 표장(表章)을 조선 국왕에게 전하고 처(妻)·자(子)·질(姪)에게 고루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통사(通事)에게 사은(謝恩)의 뜻을 전하게 하였다. 청사가 또 국왕의 아우와 조카를 만나 보고자 한다고 말하니, 승지(承旨) 이정신(李正臣)이 다시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건명이 청사를 편전(便殿)에서 접견(接見)하기를 청하였는데, 청사가 사양하고 나갔다.
11월 28일 신묘
심택현(沈宅賢)을 도승지(都承旨)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신방(申昉)을 수찬(修撰)으로, 조명겸(趙鳴謙)을 사간(司諫)으로, 조상경(趙尙絅)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차비 역관(差備譯官)이 와서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황지(皇旨)라 일컫고 국왕의 아우와 자질(子姪) 및 종실(宗室)을 만나 보는 일을 중로(中路)에서부터 발설하더니, 관소(館所)206) 에 들어온 후에는 매양 이 말을 한다.’ 하였습니다. 역관(譯官) 등이 신 등의 지휘(指揮)에 의하여 국왕은 아직 아들이 없고 아우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작년에 아들 없이 죽었고, 한 사람은 질병이 위독하여 출입도 못하며 역시 아들이 없으며, 종실은 원래 가까운 친족이 없다는 등의 말로 상세히 언급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말하기를, ‘왕의 아우는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반드시 만나 보고자 하며, 그는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所生)이며, 어느 성씨(姓氏)를 취(娶)하여 부인을 삼았는지 소상히 기록하여 보여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러 종친(宗親)은 오늘 편전(便殿)에서 접견할 때에 어좌(御座)의 뒤에 배시(陪侍)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역관 등이 말하기를, ‘이는 국교(國交)를 맺은 이후에 없었던 일이니 결코 봉행(奉行)할 수 없다.’고 하니, 칙사의 말이 ‘봉행할 수 없다면, 또한 봉행할 수 없는 뜻으로써 영의정이 품의(稟議)하고 상지(上旨)로 문자를 만들어 보임이 마땅하니, 영의정이 그 기록한 문자를 친히 가지고 와서 전해 준 연후에 영의정과 함께 대궐에 나아갈 것이다. 만약 이것도 봉행하지 못한다면 영상(領相)이 또한 친히 문자를 전해 줄 것이니, 우리들이 이를 받아 본 후에 대궐에 나아가지 않고 곧장 회정(回程)하겠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빨리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김창집이 장차 관소(館所)에 나아갈 즈음에 복주(覆奏)하기를,
"칙사가 반드시 우리 나라 문자를 가지고 가고자 하는 것은 돌아가 주문(奏聞)할 계획인 듯하며, 그 말에 의하여 써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문자를 얽어 써 주었습니다. 왕제(王弟)가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이며, 어느 성씨를 취(娶)한 것도 또한 그 말에 의하여 써서 보여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김창집이 칙사를 만나 본 후 대궐로 돌아와 입대(入對)를 청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김창집이 아뢰기를,
"신이 칙사를 만나 보았는데, 그 말이, ‘제전(祭奠)의 예(禮)를 거행한 후에 국왕께서 반드시 문후(問候)의 예(禮)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물러나와 기다렸는데, 끝내 이 거조(擧措)가 없었으므로 돌아왔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혼전(魂殿)은 문후할 곳이 아니므로 감히 하지 못했다. 오늘 대인(大人)이 편전(便殿)에 들어오면 국왕께서 문후의 예를 행하고자 하며, 이어 감축(祝感)의 뜻도 언급(言及)이 될 것이다. 듣건대 대인이 대신을 만나 보고 적당히 처리(處理)한 후에 들어오고자 한다 하므로 이에 찾아왔다.’ 하니, 저들이 드러나게 불쾌한 안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내일은 국왕께서 관소(館所)에 친림(親臨)하여 문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므로, 신이 임시 변통으로 대답하기를, ‘대인이 말하지 않더라도 국왕께서 내일 친림하려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또 말하기를, ‘내일 국왕과 접견(接見)할 때에 왕제(王弟)를 반드시 만나 보고자 한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병의 증세가 위중하여 출입할 수가 없다.’ 하고 한동안 다투었더니, 저들이 이에 말하기를, ‘무단히 만나 보지 않고 갈 수는 없으니, 귀국에서 만약 시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왕제의 병이 위중한 곡절을 작은 종이에 써서 나에게 달라. 그러면 내가 돌아가 주문(奏聞)할 것이다. 그리고 왕제가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이며, 어느 성씨(姓氏)를 취(娶)했는지의 사실도 또한 써 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문자를 얽어, ‘여러 대인이 국왕의 아우 및 자질(子姪)을 만나 보기를 청하는 것은 황지(皇旨) 가운데 고루 유시(諭示)하라는 성은(盛恩)으로 인한 듯한데, 국왕은 아직 아들이 없고, 선왕(先王)께서 왕자 둘을 두었으나 한 사람은 작년 겨울에 사망하고, 한 사람은 바야흐로 신병(身病)이 위중하여 출입을 하지 못하며, 종실(宗室)은 선왕과 선조왕(先祖王)이 모두 형제가 없으므로 가까운 족속(族屬)이 없다. 지금 생존해 있는 왕자는 선왕의 빈(嬪) 최씨(崔氏)의 소생이요, 처(妻)는 고(故)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이다.’라는 내용으로 이처럼 써 주었더니, 저들은 또 이 문자는 너무 호번하다며 다시 산삭(刪削)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임금의 춘추(春秋)는 몇이고, 아들은 또한 몇이며, 왕제(王弟)의 나이와 아들은 또한 몇인가?’ 하므로, 신이 낱낱이 대답했더니, 저들이 호서(胡書)로써 등록(謄錄)하였기에 신이 우리 나라 문자로써 번역(翻譯)하여 왔습니다."
하고, 드디어 소매 속에서 작은 종이를 내어 임금 앞에 놓았다. 그 종이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세자(世子)는 금년에 33세인데 현재 자녀(子女)가 없고, 세자의 아우는 금년에 27세인데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취(娶)하였으며, 그 어머니는 최씨(崔氏)인데 현재 자녀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살펴보고 도로 내려주니, 김창집이 이내 사관(史官)에게 주었다. 또 아뢰기를,
"저들이 당초에는 종실(宗室)을 만나 보겠다는 말이 있었는데, 오늘 물어 보자 원래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으니, 저들의 정상이 황당(荒唐)하여 믿기 어렵습니다. 또 자리를 파(罷)할 때에 왕제(王弟)를 만나 보겠다는 일을 다시 제기(提起)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황제의 명이 비록 엄중하나 왕제의 실제 병이 이와 같은데, 어찌 용서할 도리가 없겠는가?’ 하니, 저들이 또 말하기를, ‘내일 국왕이 친림(親臨)할 때에 결단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내일은 반드시 친림하여 문후(問候)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청하기를,
"저들의 예증(例贈)은 전일에 비하여 넉넉히 지급(支給)하소서."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호차(胡差)가 별견 대신(別遣大臣)이라고 자칭하면서 경멸하고 농락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중로(中路)에서부터 왕제(王弟)와 여러 종실(宗室)을 만나 보겠다고 발설하여 온 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의혹하게 만들었는데, 김창집 등은 심상하게 듣고 괘념하지 않다가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로 논하자 비로소 거절할 방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또 호차(胡差)는 임금의 춘추가 몇이며, 아들의 유무(有無)와 왕제는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이고, 어느 성씨(姓氏)를 취(娶)했는가를 묻고, 인하여 써 주기를 요청했으니, 그 불손(不遜)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저들이 비록 입으로는 황지(皇旨)라고 일컬었으나 칙서(勅書)에는 이미 이런 말이 없었으니, 우리가 만약 황지 가운데 없는 말은 사신(使臣)이 마땅히 물을 바가 아니라고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엄중히 거절했다면, 저들도 반드시 이치에 굽혀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김창집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굽신거리며 그들의 말만 따라 임금에게 품지(稟旨)도 하지 않고 임의로 써 주었다. 김창집은 수상(首相)의 몸으로 국가에 욕을 끼치고 저들에게 수모(受侮)를 당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춘추(春秋)》의 법으로써 논한다면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하다. 상고하건대 정유년207) 독대(獨對) 이후에 이이명(李頤命)의 무리가 속으로 의심을 품고 선왕(先王)의 대점(大漸)208) 때에 이이명이 심지어 살 길을 지시해 주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뜻은 참으로 추측할 수가 없다. 또 혹자의 말에는, ‘이이명이 사신(使臣)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에 은화(銀貨)를 많이 가지고 가서 저들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비록 의심하고 저해(沮害)하며 지나치게 염려한 데에서 나온 말이지마는, 이즈음에 호차(胡差)가 거짓 황지(皇旨)를 빙자하여 전에 없던 일을 새삼스레 발설했으니, 인심의 놀람과 의혹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김창집의 무리는 준엄한 말로 물리칠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이건명은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거행하기를 청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이 무슨 마음인가? 또한 너무나도 거리낌이 없다고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42면
【분류】외교-야(野)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註 206] 관소(館所) : 외국 사신을 유숙(留宿)시키는 곳.[註 207] 정유년 : 1717 숙종 43년.[註 208] 대점(大漸) : 임금의 병세가 침중함.
사신은 논한다. "호차(胡差)가 별견 대신(別遣大臣)이라고 자칭하면서 경멸하고 농락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중로(中路)에서부터 왕제(王弟)와 여러 종실(宗室)을 만나 보겠다고 발설하여 온 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의혹하게 만들었는데, 김창집 등은 심상하게 듣고 괘념하지 않다가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로 논하자 비로소 거절할 방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또 호차(胡差)는 임금의 춘추가 몇이며, 아들의 유무(有無)와 왕제는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이고, 어느 성씨(姓氏)를 취(娶)했는가를 묻고, 인하여 써 주기를 요청했으니, 그 불손(不遜)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저들이 비록 입으로는 황지(皇旨)라고 일컬었으나 칙서(勅書)에는 이미 이런 말이 없었으니, 우리가 만약 황지 가운데 없는 말은 사신(使臣)이 마땅히 물을 바가 아니라고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엄중히 거절했다면, 저들도 반드시 이치에 굽혀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김창집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굽신거리며 그들의 말만 따라 임금에게 품지(稟旨)도 하지 않고 임의로 써 주었다. 김창집은 수상(首相)의 몸으로 국가에 욕을 끼치고 저들에게 수모(受侮)를 당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춘추(春秋)》의 법으로써 논한다면 그 죄는 죽여야 마땅하다. 상고하건대 정유년207) 독대(獨對) 이후에 이이명(李頤命)의 무리가 속으로 의심을 품고 선왕(先王)의 대점(大漸)208) 때에 이이명이 심지어 살 길을 지시해 주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뜻은 참으로 추측할 수가 없다. 또 혹자의 말에는, ‘이이명이 사신(使臣)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에 은화(銀貨)를 많이 가지고 가서 저들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비록 의심하고 저해(沮害)하며 지나치게 염려한 데에서 나온 말이지마는, 이즈음에 호차(胡差)가 거짓 황지(皇旨)를 빙자하여 전에 없던 일을 새삼스레 발설했으니, 인심의 놀람과 의혹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김창집의 무리는 준엄한 말로 물리칠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이건명은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거행하기를 청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이 무슨 마음인가? 또한 너무나도 거리낌이 없다고 하겠다."
11월 29일 임진
조태채(趙泰采)를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이덕영(李德英)을 부사(副使)로, 양성규(梁聖揆)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현관복(玄冠服)을 착용하고 문후례(問候禮)를 거행했으며, 시복(時服)으로 갈아 입고 청사(淸使)를 접견하였다. 청사가 다례(茶禮)를 행할 것을 청하고, 이어 말하기를,
"황제의 말씀에, ‘선왕(先王)이 50년 가까이 왕위에 있으며 정성을 다하여 직무(職務)를 받들었다.’ 하고, 우리들이 나올 때에 선왕이 백성을 애휼한 덕의(德義)를 추념(追念)하여, 이 뜻을 작은 종이에 등출(謄出)해서 연로(沿路)에 반포(頒布)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선왕의 덕의를 알게 하였으니, 이는 황제의 특지(特旨)입니다. 또 백성들이 모인 곳에는 우리들이 매양 다과(茶菓)를 흩어 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치사(致謝)하였다. 청사가 또 묻기를,
"선왕의 아들이 몇 사람입니까? 우리들이 만나 보고 이 뜻을 고루 유시(諭示)하고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전언(傳言)하기를,
"왕자는 다만 한 사람이 있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출입을 하지 못한다."
하였다. 청사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마음이 아니라 황제의 뜻입니다. 봉행(奉行)하지 못하겠다면 이 뜻으로써 돌아가 주달(奏達)할 것이니, 상세히 사유를 써 줌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다만 차만 마시고 자리를 파(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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