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계사
진시(辰時)에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국장(國葬) 때 총호사(摠護使) 이하 당상(堂上)·낭청(郞廳) 및 집사(執事)한 인원(人員)에게 상(賞)을 차등 있게 내렸다.
12월 2일 갑오
세초(歲抄)209) 에 임하여 죄인 이연(李㮒)210) ·이환(李煥)211) ·이혁(李爀)212) 등과 목내선(睦來善)·이현일(李玄逸)·이봉징(李鳳徵)에게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도록 명하였다. 정원에서 복역(覆逆)213)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다.】 에서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전(前) 승지(承旨) 유중무(柳重茂)는 백발(白髮)의 나이에도 오히려 환득(患得)214) 하는 마음이 있어, 남의 사주(使嗾)를 받아 한 소장(疏章)을 올렸습니다. 그가 정소(呈疏)하던 날은 어떠한 날이었습니까? 졸곡(卒哭)이 겨우 끝나자 마자 즉시 참서(讒書)를 올렸으니, 유중무만 유독 선왕의 신하가 아니란 말입니까? 어찌 차마 이날 이런 거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城門) 밖으로 출송(黜送)하소서.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세형(李世馨)은 칙사(勅使)를 배종(陪從)하는 직책에 차출되자, 감히 모면할 계획을 짜내어 몰래 저들에게 청촉하다가, 마침내 도신(道臣)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니, 국법으로써 논하건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율에 의하여 감단(勘斷)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다시 차자를 올려 호차(胡差)가 종실(宗室)을 만나 보기를 요구하는 일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또 영접 도감(迎接都監) 및 비국(備局)의 계사를 보니, 모두 이르기를, ‘칙사(勅使)가 황지(皇旨)라 일컫고 국왕(國王)이 아우와 자질(子姪) 및 종실을 만나 보기를 청하였고, 비국에 이르러서는 왕자가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이며, 어느 성씨를 취(娶)했다는 것까지 써 보였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이미 보여준 글을 이제 빼앗을 도리는 없으나, 같이 오라고 보내신 승지(承旨)가 보여 준 바 정원(政院)의 소보(小報) 가운데 이른바 황지(皇旨)의 등본(謄本)을 가만히 보니, 그 말단에 다만, 이 표장(表章)을 조선 국왕에게 전하여 아내와 자질(子姪)에게 고루 유시(諭示)하라.[這表章傳於朝鮮國王妻子姪均諭]’는 무릇 14자(字)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일찍이 ‘아우와 종실’ 등의 말이 있으며, 또한 어찌 ‘왕자가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이며, 어느 성씨를 취(娶)했느냐?’는 글이 있었습니까? 승지가 신에게 보여 준 초본(草本)을 등전(謄傳)할 즈음에 어찌 결문(缺文)과 오자(誤字)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만약 결문과 오자가 없다면 객사(客使)가 영접 도감과 비국에 보여 준 바 황지(皇旨) 가운데 ‘아우와 종실[弟宗室]’ 3자(字) 및 ‘왕자가 어느 비빈(妃嬪)의 소생이며 어느 성씨를 취(娶)했느냐?’는 것은 어디에 의거하여 한 말입니까? 어찌 황지 가운데에 없는 바라 하며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설혹 그 말이 황지에 참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방편의 도리가 없어서 한결 같이 그 말만 따라 써 보여 주었단 말입니까?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심히 크니,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선처(善處)할 도리를 강구하여 나라의 체통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저들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써서 보여 준 일은 영상(領相)이 재삼 굳게 거절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으므로 부득이했던 것이다. 누누이 진언(進言)했으니, 어찌 명심(銘心)하지 않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태항(朴泰恒)이 또한 소를 올려 그 일을 논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객사(客使)가 황지(皇旨)라 일컫고 역관들에게 말한 것은 비록 소상히 알지는 못하나, 그 마음이 지극히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는 국조(國朝) 이래에 없었던 일이니, 어찌 한갓 구전(口傳)하는 말을 끝내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듯 당연히 묻지 않을 일도 물었으니, 이는 모두 역관의 무리들이 잘 인도(引導)하지 못한 탓입니다. 만약 하는 말만 있으면 감히 어기지 못하고 순종한 것이 습관이 되어 점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통분할 일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우선 호행 역관(護行譯官)을 엄중히 가두고 특별히 극형(極刑)에 처한 후에야 객사의 마음을 돌릴 수 있고 조정이 체통이 높아질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우상(右相)의 비답에 모두 말했다."
하였다.
12월 3일 을미
승지(承旨)로 하여금 전옥(典獄)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청하기를,
"목내선(睦來善)·이현일(李玄逸)·이봉징(李鳳徵) 및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 등의 직첩을 환급(還給)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칙사가 말하기를, ‘사은 사행(謝恩使行)의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의 조어(措語)가 돌아가 주달(奏達)할 말과 혹시라도 어긋나면 대단히 미안한 일이니, 그 대략의 뜻을 기록하여 보여 달라.’ 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신으로 하여금 친히 관소(館所)에 전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묘당에서 청하기를,
"그 말에 의하여 기록하여 보여 주게 하소서."
하였다. 도감에서 또 아뢰기를,
"역관으로 하여금 표문과 자문의 조어를 전해 보였더니, 칙사가 말하기를, ‘이는 두 나라에 관련된 일이니, 좌상(左相)과 도승지(都承旨)가 친히 와서 전하고, 피차 충분히 상의한 다음 각기 종이의 말미에 서명(署名)하기 바란다.’ 하고, 또 별증(別贈)을 요청했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청컨대 역관으로 하여금 전례에 없었던 일이라 하여 거절하고, 별증은 참작하여 증급(贈給)하소서."
하였다. 두 칙사에게 별증으로 각기 은(銀) 5백 금(金)을 주니 칙사가 적게 여겨 역관에게 말하기를,
"금번 두 가지 일은 모두 황지에 있는 말인데 귀국의 소청대로 굽혀서 들어주었으니, 이제 우리들의 공로는 허사(虛事)가 되었다. 국왕이 이미 관대(欵待)를 베풀어 주고 또 노자(路資)를 증급(贈給)하니,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전별연(餞別筵) 때에 친히 증단(贈單)을 돌려보내고 받지 않겠다."
하였다. 도감에서 또 이로써 계청(啓請)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선처(善處)할 방책을 미리 강구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에서 또 더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입대(入對)를 청하고, 아뢰기를,
"이제 칙사는 황제의 특명을 받고 나와 치제(致祭)했으니, 접대하는 도리를 전보다 더하여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교외(郊外)에 나가 전송하소서."
하니, 임금이 바람이 차가와 나가기 어렵다고 사절하였다.
12월 4일 병신
청사(淸使)가 서울을 출발하였다. 역관이 말을 전하기를,
"임금이 신병이 있어 교외(郊外)에 나가 전송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하니, 상칙(上勅)이 불순한 말을 내뱉고 회복(回覆)하는 바도 없었다. 묘당에 사람이 없음을 식자(識者)들이 저으기 한탄하였다.
12월 5일 정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의 연명(連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의 소척(疏斥)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왕의 아우와 조카를 만나 보기를 요청한다는 말은 당초 빈신(儐臣)의 장계에서 나왔는데, 지레 앞질러 왕복한다면 갈등만 일으키기 쉽고, 또 중로(中路)에서 빈신이 비록 말을 하더라도 들어주기 어려울 듯하였으므로 우선 관소(館所)에 당도하기를 기다려 조처하고자 하였습니다. 관소에 당도한 후 저들이 또 발언하므로 요상(僚相)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신 등이 또한 결코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질병을 핑계삼아 그 말을 굳게 거절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관소에 친림(親臨)하신 날 저들이 황지가 이와 같다는 뜻으로 비록 말한 바가 있었으나, 또한 강력히 요청하는 뜻은 없어서 그 일은 이내 정침(停寢)되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말이 반드시 황지에서 나왔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이미 그렇게 말을 하였으니, 곧바로 황명(皇命)을 거짓으로 돌려서 그들을 격동시켜 야료(惹鬧)를 일으키는 환난(患難)을 만들 필요가 없었으므로 창졸간에 방편(方便)의 도리가 자연히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릉(山陵)의 제전(祭奠)에 있어서도 또한 문자에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황지의 진위(眞僞)를 따지지 않고 다만 예절과 사리(事理)로써 다투었으니, 이는 모두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왕자가〉 어느 비빈의 소생이며 어느 성씨를 취(娶)했느냐?’의 한 구절 말에 이르러서도 황지의 유무(有無)를 추측하기 어려움이 앞에 말한 바와 같았고, 만나 보기를 요청하는 일에 비교한다면 비단 중대한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산릉의 일로부터 일마다 서로 다투어 지모(智謀)와 힘이 아주 다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바야흐로, ‘이 일을 받들어 봉행(奉行)하지 않는다면, 대궐에 나아가지 않고 곧장 회정(回程)하겠다.’고 하기에 도감(都監)에서 성상께서 앉아서 접견(接見)을 기다리는 정상을 누차 말했으나, 끝내 저희들의 고집만 내세워 변동할 뜻이 없었으니, 그 곤욕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실로 한 가지의 반드시 다툴 의(義)가 있었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배척하여 사단을 일으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어떠한지도 헤아리지 않고 다만 말단의 지엽(枝葉)으로 인하여 이미 주선해서 완결된 일까지도 한데 싸잡아 말했으니,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우상이 차자에 논한 말은 한결같은 마음으로서 다른 뜻이 없었다. 경 등의 나라를 위한 충성은 내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 개의하지 말고 함께 나라 일을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정택하(鄭宅河)가 소를 올려 청하기를,
"김행진(金行進) 등의 유소(儒疏)를 도로 내주고, 이어 처분을 내려 엄중하게 징토(懲討)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병조(兵曹)에 입직(入直)한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에게 신칙하여 시골 유생들의 소장(疏章)을 일체 물리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렸는데, 별달리 명백한 분부는 없었다.
12월 6일 무술
헌부(憲府)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다.】 에서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일전에 칙사의 행차가 고양(高陽)의 참소(站所)215) 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으나 능히 만류하지 못했으니, 청컨대 원접사(遠接使) 유명웅(兪命雄)을 추고(推考)하소서. 칙사가 곧장 산릉(山陵)에 간다고 한 것은 전에 없었던 일인데도 범연히 수작(酬酢)하였고, 또 능호(陵號)와 노정(路程)에 대하여는 반드시 역관과 통사(通事) 무리들이 전했을 것입니다. 청컨대 수역(首譯)은 중형(重刑)에 처하고, 통사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가장 간악한 자를 조사해 내어 율에 의해 치죄하소서."
하였으나, 다만 신계(新啓)만 윤허하였다.
12월 8일 경자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병으로 체직되고, 송상기(宋相琦)를 후임(後任)으로 삼았다.
12월 9일 신축
밤 1경(一更)과 2경에 달무리가 졌다.
12월 10일 임인
이재(李縡)를 도승지(都承旨)로, 박휘등(朴彙登)을 승지(承旨)로, 권상유(權尙游)를 지돈녕(知敦寧)으로, 이광좌(李光佐)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제겸(金濟謙)을 집의(執義)로, 임형(任泂)을 사간(司諫)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장령(掌令)으로, 김고(金槹)를 정언(正言)으로, 유척기(兪拓基)를 교리(校理)로, 홍현보(洪鉉輔)를 수찬(修撰)으로, 홍치중(洪致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12월 11일 계묘
밤 1경(一更)과 2경에 달무리가 졌다. 5경에 목성(木星)이 항성(亢星)의 제4성(星)을 범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다시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고, 이어 호차(胡差)에게 글을 써 준 일에 대하여 거듭 논하기를,
"청대(請對)한 설화(說話)를 보니, 이른바 아우와 조카를 만나 보기를 요청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당초 거절하자는 청이 없었고, 다만 ‘어찌 해야 옳겠습니까?’ 하고 품고(稟告)했을 뿐이었습니다. 칙사가 관소(館所)에 당도한 후 거절한 것을 신이 어떻게 미리 알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레 앞서 왕복하기 어려웠던 것은 형세가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석(筵席)에서 품정(稟定)할 즈음에 어찌 갈등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굳게 거절할 뜻을 곧장 진달하지 못하고 범연히 품고한단 말입니까? 그 후 이른바 황지(皇旨)의 등본(謄本)을 본 다음에야 처음부터 조종(操縱)한 것의 태반이 황지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았는데, 저들은 ‘고루 유시하라[均諭]’는 두 글자를 빙자하여 뜻밖에 무리한 거조가 있었으니, 어찌 몹시 통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황지 가운데에 있는 말이 아니라면 종척(宗戚)의 많고 적은 것과 〈왕자가〉 누구 소생이며 누구를 취(娶)했는지가 중대한 데 관계되는지의 여부를 물론하고 어찌 공연히 써서 저들에게 보여 줄 수가 있겠습니까? 곧장 황지 가운데 없는 바라고 명백히 말하고 사리에 의거하여 준엄하게 배척했다면, 저들이 다시 무슨 말로써 괴롭혔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허다한 군말을 써 주었으니, 이 길을 한 번 터놓으면 지금부터 저들이 더 무리하게 요청해도 다시 어떻게 어기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훗날의 좋은 대책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쌍방을 화해(和解)하게 하였다. 이어 같이 오라고 보낸 승지(承旨)를 불러들였다.
12월 12일 갑진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밤 1경부터 3경까지 달이 필성(畢星) 가운데 들어가 달무리가 졌으며, 4경에도 달무리가 졌다.
이민영(李敏英)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전번에 지평(持平) 홍현보(洪鉉輔)의 소청(疏請)으로 인하여 삭망(朔望)의 은전일(殷奠日)에 산반(散班)의 회곡(會哭)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은 이르기를, ‘정문(情文)에 합당할 듯하니 시행함이 옳다.’ 하였고,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은 이르기를, ‘인산(因山) 전에 한하여 시행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이르기를, ‘졸곡(卒哭)으로 한정함이 옳다.’고 하였는데, ‘영상(領相)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졸곡 후에 이르러 어떤 이는, ‘영상의 의논에 한정된 말이 없으니 상기(喪期)를 마칠 때까지 그대로 시행함이 옳다.’ 하고, 어떤 이는 ‘여러 대신의 수의(收議)에 모두 졸곡으로 한정함이 옳다고 했다.’ 하니, 시행의 여부에 대하여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궐외(闕外)의 산반(散班)은 비록 정반(庭班)과는 다르나 이미 조가(朝家)에서 명령한 바이니, 명백하게 일정한 예(禮)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인산(因山) 전으로 한정함이 옳다 하고 여러 대신의 의논도 같으니, 임금이 다시 그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3일 을사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다시 차자를 올려 우상(右相) 조태구(趙泰耉)의 소어(疏語)에 대하여 변명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2월 14일 병오
밤 2경부터 5경까지 달무리가 졌다.
12월 15일 정미
밤 1경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이정주(李挺周)를 승지(承旨)로, 송필항(宋必恒)을 사간(司諫)으로, 김만주(金萬冑)를 정언(正言)으로, 김용경(金龍慶)을 지평(持平)으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이만성(李晩成)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조도빈(趙道彬)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으니, 고부사(告訃使)의 장계에 조제 칙사(弔祭勅使)가 다음달에 나온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6일 무신
밤 1경부터 5경까지 달무리가 졌다. 2경부터 3경까지 월식(月食)이 있었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상(僚相)의 앞뒤 차자에 대해 이미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는데, 또 향유(鄕儒)들이 뒤를 이어 일어나 또한 이 일로 신의 죄를 삼았으니, 상소의 대략에 논열(論列)한 바가 너무나도 음험하였습니다. 이에 병조(兵曹)에서 그들이 궐문(闕門)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자, 병기(兵器)를 가지고 금중(禁中)에 난입(亂入)하기까지 하였으니, 진실로 그 원인을 따져본다면 신이 머뭇거리며 떠나지 아니하여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라건대 먼저 적출(斥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등철(登徹)되지 않은 유소(儒疏)는 개의할 필요가 없다."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하유(下諭)하였다. 이때 호서(湖西)의 유생(儒生) 이몽인(李夢寅) 등이 소를 올려 김창집이 윤지술(尹志述)을 구해(救解)하여 모자(母子)의 윤리(倫理)를 아주 끊어버린 것과 호차(胡差)에게 글을 써 주어 군부(君父)에게 욕을 끼친 것을 죄목으로 삼아 도끼를 가지고 궐문 아래에 엎드리니, 병조의 당상과 낭청이 꾸짖고 금지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몽인 등이 이에 도끼와 소본(疏本)을 가지고 궐문으로 난입하니, 병조에서 근장 군졸(近仗軍卒)216) 을 시켜 소함(疏凾)을 깨뜨리고 소본을 찢어버린 뒤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이어 치죄(治罪)를 청하고 아울러 세 사람을 가두었으니, 김창집이 먼저 계책을 쓴 것이었다.
12월 17일 기유
밤 4경에 달무리가 지고, 5경에 달이 여귀성(輿鬼星)을 범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박휘등(朴彙登)이 소를 올려 군덕(君德)을 논하되, 큰 뜻을 분발하여 계술(繼述)의 근본을 삼을 것을 말하였고, 또 퇴폐하여 진흥(振興)하지 않는 폐단을 진달하였으며, 대소(大小)의 소차(疏箚)에 대해서 그 즉시 비답을 내리고, 도목 정사(都目政事)217) 와 계복 문서(啓覆文書)218) 같은 것은 군신(君臣)을 책려(責勵)하여 광폐(曠廢)함에 이르게 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윤지술(尹志述)에게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에게 저지(沮止)되었습니다. 송성명(宋成明)·조최수(趙最壽)에게는 당초 우악한 비답을 내렸으나, 곧 대계(臺啓)로 인하여 마침내 파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마다 모두 자유스럽지가 못하니, 신은 저으기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누누이 진계(陳戒)한 말이 매우 절실하니, 어찌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 18일 경술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윤양래(尹陽來)를 승지(承旨)로, 최석항(崔錫恒)을 겸 판의금(兼判義禁)으로, 조도빈(趙道彬)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유척기(兪拓基)를 교리(校理)로, 김민택(金民澤)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숭(兪崇)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초복(初覆)219) 을 시행한 살옥 죄인(殺獄罪人) 2명을 삼복(三覆)을 기다려 다시 상의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김만주(金萬冑)·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 등이 목내선(睦來善)의 직첩을 환수(還收)할 일을 진청(陳請)하고,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도 또한 말을 하니, 임금이 다만 목내선·이현일(李玄逸)의 직첩을 돌려 주게 한 일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9일 신해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참지(參知) 황선(黃璿)이 소를 올려 비지(批旨)를 개정(改正)하도록 청한 일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김일경(金一鏡)에 대한 소비(疏批)가 정원에 내려왔으므로, 요원(僚員)과 더불어 품백(稟白)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이미 품달하면 회답을 받들기 전에는 조지(朝紙)에 등출(謄出)하지 않는 것이 본래 정원의 정해진 전례이니, 처음 비답을 반시(頒示)하지 못했던 것은 그 형세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비지(批旨)를 개정하여 내림에 미쳐 신이 즉시 하리(下吏)로 하여금 미품(微稟)220) 한 일과 아울러 써서 김일경에게 보냈으니, 그때의 사정이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송성명(宋成明)의 소에 이르기를, ‘은밀하게 사알(司謁)을 부르고 몰래 이서(吏胥)에게 경계했다.’고 하며, 마치 신이 한두 명의 사인(私人)과 더불어 으슥하고 은밀한 곳에서 귀를 맞대고 주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고의로 숨기고 비밀로 한 듯이 말했으니, 그 말의 음험함이 어찌 이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12월 20일 임자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정택하(鄭宅河)를 지평(持平)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사간(司諫)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헌납(獻納)으로, 신절(申晢)을 교리(校理)로, 홍현보(洪鉉輔)를 수찬(修撰)으로, 김상직(金相稷)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2월 21일 계축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已地)에 나타났다.
12월 22일 갑인
밤 4경(四更)에 달무리가 져 목성(木星)을 둘러쌌다.
정형익(鄭亨益)을 승지(承旨)로, 이기진(李箕鎭)을 헌납(獻納)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삼복(三覆)을 시행한 살옥 죄인(殺獄罪人) 2명을 율에 의해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아뢰기를,
"유월의 도정(都政)을 이제 장차 물려 시행해야 되는데 두 도목정(都目政)을 합설(合設)하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니, 청컨대 대신에게 순문(詢問)하소서."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조태채(趙泰采)는 불가하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은 무방하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이 다만 전최(殿最)221) 한 수령(守令)의 과궐(窠闕)만 차출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궁각(弓角)222) 은 일본(日本)에서 전혀 나오지 아니하여 수용(需用)이 지극히 곤란하므로, 묘당에서 무역(貿易)해 올 일을 정탈(定奪)하였습니다. 재자관(䝴咨官)223) 이 연경(燕京)에 들어간 뒤 고부사(告訃使)가 이르기를, ‘이때 이런 일을 번거롭게 요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자문(咨文)을 올리지 않고 돌려보내 왔습니다. 금번 사은사(謝恩使)의 행차에 자문을 보내어 무역해 오는 것이 마땅한데, 역관 김경문(金慶門)이 일찍이 이런 일을 잘 주선했으니, 만약 이 사람으로 전적으로 맡겨 주선하게 한다면 거의 순조로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 정형익(鄭亨益)이 말하기를,
"오늘 사형(死刑)으로 감단(勘斷)한 죄수가 다만 두 사람뿐인데, 이는 경외(京外)의 사형수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근래에 제도(諸道)의 사형수를 추관(推官)들이 한만하게 방치해 두고 거행하지 아니하여 즉시 취복(取服)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도의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매양 월말(月末)에는 동추(同推)224) 한 도수(度數)를 계문(啓聞)하게 하고, 정수(定數)에 준하지 못한 자는 각별히 논죄(論罪)할 일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23일 을묘
도목정(都目政)을 25일로 정하도록 명하고, 친히 정사하겠다고 하였는데, 이조(吏曹)에서 계품(啓稟)하기를, ‘당상과 낭청이 채 갖추어지지 아니하여 포폄(褒貶)의 개탁(開拆)과 승륙(陞六)의 고강(考講) 등의 일을 미처 주선할 도리가 없다.’고 하니, 내년 초봄으로 물려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일전에 또 대제학(大提學)을 불러 장차 감제(柑製)225) 를 설행하려 하였는데, 대제학 이관명(李觀命)이 옥당(玉堂)이 모두 비어 대독(對讀)할 사람이 없다고 소를 올려 진달하니, 또한 물려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광좌(李光佐)가 소를 올려 대관(臺官)의 소척(疏斥)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 가을에 소명(召命)을 받들었던 것이 당초 전일의 경계를 잊어버린 채 염의를 무릅쓰고 나아갈 계획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송종(送終)은 대사(大事)이므로 신자(臣子)로서 정성을 다 바쳐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소명이 있었으니, 분의상 감히 사피(辭避)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말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 소어(疏語)와 피사(避辭)가 비록 지극히 장황했으나 그 요점은 신이 내반(內班)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인신(人臣)의 극죄(極罪)로 삼은 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에 만약 감히 사피(辭避)할 수 없는 소명이 있었다면, 신의 빨리 달려감이 어찌 복토(復土)226) 의 날과 달랐겠습니까? 그때 감히 조반(朝班)에 나아가지 못한 일로 인하여 아울러 소명이 있는 복토까지 사피(辭避)한다면, 이 어찌 신의 분의에 감히 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일찍이 미안한 하교(下敎)를 입었다고 말하여 은연중에 원망하고 불평한 죄목으로 몰아넣어 사람을 멸절(滅絶)시키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아! 또한 너무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조(吏曹)의 차석(次席)에 제배(除拜)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니, 빨리 올라와 대정(大政)을 천연(遷延)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5일 정사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고, 신시(申時)에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남도규(南道揆)를 승지(承旨)로, 남세진(南世珍)을 장령(掌令)으로, 김제겸(金濟謙)을 교리(校理)로, 정석오(鄭錫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2월 26일 무오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2월 27일 기미
조성복(趙聖復)을 집의(執義)로, 이정소(李廷熽)을 지평(持平)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2월 28일 경신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진검(李眞儉)이 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했는데, 소장(疏章)이 들어간 지 한 달 남짓 지난 뒤 비로소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위 조항(條章)에 관한 일은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경솔하게 논할 수 없다. 영선(瀛選)227) 에 관한 일은 공론이 완정(完定)된 뒤 유중무(柳重茂)의 요망한 말을 그대로 답습(踏襲)하며 허물을 적발하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 온당함을 알지 못하겠다. 이 판부사(李判府事)228) 의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과 앞뒤의 근간(懃懇)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도 온갖 욕설로 침척(侵斥)했으니, 매우 무엄(無嚴)한 일이다. 누누이 진계(陳戒)한 것은 어찌 유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 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근일에 인심이 험악하고 세도(世道)가 물결처럼 흔들리어 기회를 틈타 엿보는 자가 감히 의논하지 못할 일을 거론하여 유인(誘引)하고,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부리고자 하며, 권세를 농락하는 자는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뒤좇아 제기(提起)하여 감히 조종(操縱)하고 협박하는 풍습을 자행했으니, 조중우(趙重遇)와 윤지술(尹志述)은 곧 그 사주(使嗾)를 받은 자들입니다. 조중우의 소는 은혜를 빙자하여 의(義)에 어긋났고 윤지술의 말은 의를 가탁(假托)하여 은혜를 저버렸으니, 이들은 모두 전하의 죄인이요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저 조중우란 자는 망령되게 성상의 뜻을 억측(臆測)하고 틈을 엿보아 불쑥 일어나 대의(大義)의 소중함도 돌보지 않고 요행(徼倖)을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는데도, 논의하는 자들은 꼭 죽이는 것은 과중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혹 성상(聖上)의 뜻이 제방(隄防)을 주로 하되 차라리 과중한 데에 실수를 하겠다고 하시는 듯한데, 참으로 이와 같다면 국가의 행복입니다. 전하께서 시조(施措)하는 사이에 털끝만치도 다툴 만할 단서가 없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 또한 지난 일을 다시 제기(提起)하지 않고 휘친(諱親)의 의를 돌보아 전하의 마음을 상(傷)하지 않게 해야함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 윤지술은 홀로 무슨 심장(心膓)을 가졌길래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오직 척언(斥言)하는 것만을 시원하게 여긴단 말입니까? 이 어찌 차마 할 일입니까?
삼가 상고하건대 《시경(詩經)》 위풍(衞風) 하광장(河廣章) 주(註)에 풍성 주씨(豐城朱氏)가 송 환공(宋桓公) 부인의 일에 대하여 논하기를, ‘어미가 쫓겨나 종묘(宗廟)와는 끊어졌으나 어미와 아들 사이에는 당초 끊는 도리가 없으니, 종묘에서는 은혜로써 의(義)를 가리지 않고 규문(閨門)에서는 의(義)로써 은혜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송 양공(宋襄公)은 종묘에 정성을 다하여 밖으로는 승중(承重)의 의를 잃지 말고 자모(慈母)에게 효성을 다하고, 안으로는 애친(愛親)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거의 은혜와 의리를 모두 보전하여 유감됨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아들이 어머니와 끊어질 수 없는 의가 이미 경전(經傳)에 환히 실려 있는 것입니다. 천하(天下)에 휘친(諱親)할 수 없는 의는 이미 공자(孔子)로부터 시행되었으니, 《춘추(春秋)》에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거나 어머니를 끊을 수는 없는 의가 해와 별같이 밝혀져 있습니다. 과연 윤지술의 말과 같다면 전하로 하여금 낳아 준 은혜를 끊게 한 뒤에야 바야흐로 마음에 시원하겠습니까? 조중우에 이르러서는 처분이 이미 준엄하였고 그 자신이 이미 죽였으니 논평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해 보려고 앙화를 전가(轉嫁)시키는 무리들로서 잇따라 일어난 자가 장차 얼마나 될지 알지 못하니, 이는 전하께서 더욱 제방(隄防)을 굳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윤지술의 죄는 여정(輿情)이 모두 분통하게 여기는 바이며, 전하께서도 이미 엄교(嚴敎)를 내렸는데, 벌이 원방(遠方)에 정배(定配)하는 데 그쳤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라면 입을 모아 준엄한 말로써 배척하여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음이 마땅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신구(伸救)하는 데 안간힘을 써서 마침내 군부를 조절(操切)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게 하고야 말았으며, 반드시 전하로 하여금 치욕을 감수(甘受)하고 수족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무슨 심술이며 이 무슨 의리입니까? 신의 생각에는 윤지술이 군부를 욕보인 죄를 다시 바로잡고, 인하여 그 신구(伸救)한 당여(黨與)를 엄중히 다스려 앞날을 경계해야 할 듯합니다. 김고(金槹)는 자신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으면서 패악(悖惡)한 말이 윤지술과 다름이 없었으니, 윤지술을 정죄(定罪)한 후에는 오직 두려워하며 움츠리고 인죄(引罪)해야 마땅할 것인데, 도리어 신구(伸救)하는 데 앞장서서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윤지술과 함께 죄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 무리들이 징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을 듯합니다.
조최수(趙最壽)의 소장(疏章)은 말과 의리가 엄정하였으나 대계(臺啓)가 맞아 공격했으니, 그 기습(氣習)이 너무나도 통탄스럽습니다. 하물며 조최수에게 배척을 받은 여러 대간(臺諫)들이 사람들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염의를 무릅쓰고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신은 아울러 체척(遞斥)하여 대각(臺閣)의 체통을 소중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행진(金行進)과 홍흡(洪潝)의 소어(疏語)는 비록 협잡(挾雜)의 뜻이 있었으나, 다만 윤지술에 대한 일을 논했을 뿐이요, 조중우의 소와는 조관(條貫)229) 이 같지 않은데, 이제 터무니없이 죄를 얽어 여러 승지들을 모조리 축출했습니다. 하물며 지난해 적신(賊臣) 임창(任敞)의 소 가운데 있는 부도(不道)한 말을 여러 사람들이 파다하게 전파(傳播)하자, 그의 숙부(叔父) 임홍망(任弘望)은 앙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소를 올려 전말(顚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는데, 그의 종제(從弟) 임형(任泂)은 홍흡(洪潝)의 소에 임창의 죄를 아울러 논박했음을 듣고 감히 두호할 꾀를 짜내어 정원을 공격하여 체척(遞斥)시키고야 말았으니, 그 방자하고 무엄함이 어찌 그렇게 극도에 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임형을 준엄하게 징계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신이 정유년230) 독대(獨對) 때의 일에 대하여 일찍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 일은 이미 입진(入診)할 때에 발단되었으니, 독대의 연유는 입대(入對)하는 대신이 응당 암암리에 헤아린 바가 있었을 것인데, 승지와 사관이 앞을 인도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연영전(延英殿)의 지척 지지(咫尺之地)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이미 인신(人臣)의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도리가 아닙니다. 입대했을 때의 설화(說話)는 사관이 쓸 수 없었으니 외인(外人)으로서는 감히 알 바가 아니나, 이미 광구(匡救)한다고 말했으면 이 일이 없었다고 기필하지는 못할 것이니, 지금에 이르도록 4년 사이에 중외(中外)의 인심이 이로써 대신의 죄악으로 삼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갑자기 독대한 것이 죄가 되는 것이지, 입시(入侍) 이후의 일에 대하여는 억지로 죄를 더하여 인서(仁恕)의 도리를 상(傷)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대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에 차자를 올려 가지고 갈 은화(銀貨)를 청하면서 감히 병자년231) 사행(使行) 때에 저들이 끌어댄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일을 말한 것은 실로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말할 바가 아닙니다. 《대명회전》의 일은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니, 전하께서 어떻게 소상히 알 수가 있겠습니까?
병자년 세자 책봉(世子冊封)을 청할 때 고(故) 상신(相臣) 서문중(徐文重)이 상사(上使)의 사명을 띠고 연경에 들어갔을 때에 저들이 말하기를, ‘《대명회전》 가운데에 제후(諸侯)는 나이 만 50세에 정실(正室)에서 자손이 없을 경우에만 비로소 승중손(承重孫)으로써 사왕(嗣王)을 삼는다는 말이 있다.’ 하고 봉전(封典)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다시 주청(奏請)하여 겨우 준허(準許)를 얻었으니, 지금까지 생각해 보아도 우리 나라의 신자(臣子)된 자라면 모두 분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 되어 정무(政務)를 대리(代理)하였고 여러 차례 북사(北使)를 접대하였으니, 비록 저들이라도 그 사이에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이 저들이 마음에 두지도 않은 일을 미리 억측하고 그 일을 차마 오늘날에 이끌어 대어 공동(恐動)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이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하물며 금번에 저들에게 청하는 일은 응당 시행할 상전(常典)으로서, 비록 1문(文)의 돈을 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순조롭게 성사될 것인데, 6만여 냥(兩)의 은화를 장차 어디에 쓸 작정인지요? 그리고 지문(誌文)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해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당초에 드러내어 말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휘친(諱親)의 의(義)에서 나온 것인데, 마침내 사행(使行)의 도중(途中)에서 봉장(封章)을 올려 스스로 물의를 일으킨 것입니다. 또 각자(刻字)의 공역(工役)이 시작된 후에 문자의 개정을 청한 것은 마치 윤지술의 오늘날 일을 열어준 것처럼 되었으니, 인심의 의혹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끝에 당록(堂錄)의 일을 논하였는데, 심지어 말하기를,
"자취는 돌진(突進)하는 멧돼지와 같고 일은 움켜쥐는 솔개와 비슷하여 권점(圈點)을 주관한 자도 김춘택(金春澤)의 아우요, 당록에 피선(被選)된 자도 또 김춘택의 아우이며 김익훈(金益勳)의 손자이니, 즉시 당록에서 삭제하여 한 시각도 구차하게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12월 29일 신유
대사간(大司諫) 유숭(兪崇)이 소를 올려 군덕(君德)에 대하여 논하고, 이어 청하기를,
"혼전(魂殿)의 제향(祭享)을 몸소 거행하여 성효(聖孝)를 더욱 빛나게 하고,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를 자주 접견(接見)하여 경학(經學)을 강론하고, 대계(臺啓)를 빨리 좇아 언로(言路)를 넓히고, 현혹(眩惑)된 말을 통렬히 물리쳐 선훈(先訓)에 따르는 뜻을 쾌히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2월 30일 임술
효령전(孝寧殿)의 사향 대제(四享大祭)를 친행(親行)하고 삭망(朔望)의 은전(殷奠)을 섭행(攝行)할 일을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교리(校理) 김제겸(金濟謙)이 차자를 올려 논하기를,
"전하께서 여러 해 동안 애타게 고민하신 끝에 갑자기 이 거창(巨創)232) 을 당했으니, 질병이 생기는 것도 사세와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매양 제일(祭日)을 당하여 섭행의 명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은 모두 놀라 성체(聖體)의 미령하심을 걱정하였습니다. 환후(患候)가 있어 억지로 행하기 어렵다면 비록 사향 대제(四享大祭)라도 혹 친행(親行)하지 못할 때가 있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삭망의 은전(殷奠)만 어찌 유독 섭행하여 제사(祭祀) 지내지 않은 것 같다는 탄식(歎息)을 끼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미리 이와 같은 규식을 정한다면, 신은 아마도 원근(遠近)의 청문(聽聞)이 만족하지 못할 듯하니,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성후(聖候)가 억지로 행할 수 없는 데에 이르지 않았다면, 내일의 은전(殷奠)은 친행(親行)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김제겸의 차본(箚本)을 보니, 친행하기를 힘써 청하여 종이에 가득히 늘어 놓았으니, 사체(事體)에 매우 미편하다.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남도규(南道揆)·정형익(鄭亨益) 등이 복역(覆逆)하여 다투자, 답하기를,
"갑자기 생각하니, 김제겸이 차자를 올려 진달함은 진실로 충애(忠愛)에서 나왔다. 내가 실로 부끄럽다. 그대들의 말이 더욱 절실(切實)하니,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제겸의 말이 참으로 옳은데 처음에 특히 체차(遞差)를 명했으니, 지나친 거조가 됨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즉시 뉘우쳐 깨달아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었으니, 전환(轉圜)의 아름다움이 거룩하다.
이 해의 호구(戶口) 총수(總數)는 1백 56만 3천 8백 8호(戶)요, 【서울이 3만 7백 23호(戶)요, 외방(外方)이 1백 53만 3천 85호이다.】 인구(人口)는 6백 80만 8백 8명이다. 【서울이 19만 1천 8백 38명이요, 외방이 6백 60만 8천 9백 70명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46면
【분류】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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