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3권, 경종 1년 1721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2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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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해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월 2일 갑자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위에 관(冠)이 있었다.

 

김운택(金雲澤)·조관빈(趙觀彬)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월 3일 을축

심택현(沈宅賢)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상소(上疏)하여 신정(新政)의 요무(要務)를 진술했는데, 그 조목이 일곱 가지였다. 이르기를,
"성학(聲學)에 힘쓰시어 덕성(德性)을 기르고, 효우(孝友)에 독실(篤實)하여 궁위(宮闈)를 화락(和樂)하게 하고, 청단(聽斷)하는 데 부지런하여 만기(萬機)에 응하고, 기강을 세워 국세(國勢)를 진작시키고, 현능(賢能)한 이를 거용(擧用)하여 직사(職事)를 맡기고, 언로(言路)를 열어 총명(聰明)을 넓히고, 민은(民隱)을 구휼(救恤)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소서."
하고, 이어 두루 논하기를,
"전하께서는 동궁(東宮)에 계실 때부터 이미 전학(典學)001)  의 공효(功效)를 나타내셨는데, 사복(嗣服)한 초기에 더욱 이것을 급무로 삼으셔서 공제(公除)002)  가 겨우 지나자, 곧 소대(召對)의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공부는 한갓 장구(章句)나 따지는 말단에 있지 않으니, 삼가 원하건대 자주 경연(經筵)에 나가셔서 토론하고 문난(問難)하여 몸과 마음에 체득(體得)하시고, 일에 발휘하여 성덕(聖德)의 근본으로 삼으소서. 주 문왕(周文王)의 시선(視膳)의 예절003)  과 등 문공(滕文公)이 여막(廬幕)에 거처하던 때의 매우 검은 얼굴004)  을 이미 전하께서 어버이를 섬기는 지극한 효성에서 우러러 뵈었는데, 우애(友愛)란 것 또한 효도에서 미루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는 다만 한 아우만 있을 뿐이니, 더욱 친애를 도탑게 하여 구족(九族)에 미친다면, 그 효우로 정사(政事)를 베푸는 도리에 있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우리 효종(孝宗)께서 장렬 대비(莊烈大妃)005)  를 받들어 그 효양(孝養)을 다하고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대우하여 그 우애를 다하셨으니, 삼가 원하건대 반드시 효종을 본받으시어 그 효도와 우애를 다하소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지 4기(紀)006)   동안 서정(庶政)에 우근(憂勤)하며 감히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공거(公車)007)  에 보류해 둔 소장이 없었고 궤안(几案)에는 정체된 문안(文案)이 없었으니, 영고(寧考)의 안정을 남기신 아름다움이야말로 어찌 성자(聖子)께서 마땅히 계승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년에 소장의 비답을 간혹 한 달이 넘도록 내리지 않기도 하십니다. 삼가 원하건대 더욱 청단(聽斷)에 부지런하시어 국사(國事)를 다행하게 하소서.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천하의 근본은 인군(人君)이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여 기강(紀綱)을 세우는 데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승평(升平)한 날이 오래 되어 대소(大小)의 인원이 나태함을 일삼아 문관과 무관이 직무를 게을리하므로, 이것이 점점 변하여서 권강(權綱)이 해이해지고 법기(法紀)에 문란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심술의 은미(隱微)한 데서부터 우선하여 구체적인 일의 말단에 드러내어 군공(群工)을 신칙(申飭)하고 면려(勉勵)하여 온갖 법도를 닦아 바로 세워서 국체(國體)를 높이소서. 어진이에게 맡기고 재능이 있는 이를 부리는 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선무(先務)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말세(末世)라 인재가 매우 적은데다가 색목(色目)에 구애되어 폐고(廢錮)된 자가 거의 3분의 2가 되니, 성대(聖代)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공평하게 듣고 보아 모두 거두어 기르되 붕당(朋黨)에 구애되지 말고, 오직 어진이는 들어 쓰되 피차를 논하지 말고, 오직 유능하면 뽑아서 재언(才彦)008)  으로 하여금 모두 나아가게 하여 직사(職事)가 실추(失墜)됨이 없게 하소서.
순(舜)은 하잘것없는 말도 살폈고 우(禹)는 도리에 합당한 말을 들으면 절하며 받아들였습니다. 성인(聖人)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이보다 밑에 가는 경우이겠습니까? 지금 공거(公車)에 오르는 것은 거개 당동 벌이(黨同伐異)009)  하는 말이 많고, 성상께 진언(進言)하는 것은 정직한 말이 드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또한 일찍이 그 공(公)·사(私)를 감정(鑑定)하고 분별하여 그 취사(取舍)를 명백히 보이지 않으시니, 나라를 위한 아름답고도 확고한 계책은 이미 알려지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이어 시행하심도 일찍이 많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반드시 순과 우를 모범으로 삼으소서. 나라의 흥망(興亡)은 백성의 향배(向背)에 달려 있는데 근년 이래로 백성의 곤궁함이 극도에 달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거듭 흉년이 들어 단지나 항아리에 저축한 곡식이 없는데다가 해마다 질역(疾疫)010)  으로 사망자가 잇달아 발생하여 백성이 모두 서로 이끌고 도적이 되니, 나라의 근본을 위한 근심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선대왕(先大王)께서는 금품(金品)을 내어 여러 도(道)의 진휼(賑恤)에 보태시고, 배로 곡식을 운반하여 섬 백성의 기근(饑饉)을 구제하셨으므로,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恩澤)이 사람마다 골수에 젖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위로 선대왕의 뜻을 본받으시고 아래로 유사(有司)에게 신칙하시어 어진 정사(政事)를 베푸시되, 반드시 환(鰥)011)  ·과(寡)012)  에게 먼저하시고, 곤궁한 백성을 건지고 굶주린 백성을 진구(賑救)하기를 마치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듯 하시어, 이것으로 인심을 결속시켜 나라의 근본으로 하여금 길이 힘입게 하소서.
돌아보건대 이제 삼남(三南)에서 겨우 양전(量田)을 행하고 양서(兩西)는 거듭 객사(客使)013)  를 맞았으며 기전(畿甸)은 막 산릉(山陵)의 큰 역사(役事)를 겪어 여러 도(道)의 곤궁함과 초췌함이 더욱 심하니, 대동미(大同米)를 양감(量減)하고 묵은 포흠(逋欠)을 견제(蠲除)하여 눈썹을 태우는 듯한 위급함을 늦추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크고 작은 수용(需用)을 힘써 더 절약하여 한결같이 백성을 구하는 일에 뜻을 두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을 내리고 아래 조항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으며,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이때 조태구가 교야(郊野)에 물러나 있으면서 세수(歲首)014)  에 진계(陳戒)한 것이 당시의 병폐(病弊)를 절실히 맞추었으나, 말만 허비하고 보탬이 없었다. 대동미를 양감(量減)하는 일도 또한 상신(相臣)의 복주(覆奏)로 인해 막혀 시행되지 않았다.

 

1월 4일 병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김만주(金萬冑)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진검(李眞儉)을 삭출(削黜)할 것을 논청(論請)하기를,
"대상(大喪)이 있고 난 이래로 부정(不靖)015)  한 무리들이 때를 타 괴란(壞亂)하는 것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으나, 어찌 이진검같이 패망(悖妄)하기 짝이 없는 자가 있었겠습니까? 정유년016)   독대(獨對) 때의 일은 선대왕(先大王)께서 즉시 깨우치시어 곧 사륜(絲綸)017)  을 내리셨으므로 두 분 사이에 자애(慈愛)와 효성이 간격이 없었으니, 어찌 차마 이 일을 뒤미처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진검은 심지어 ‘입진(入診) 때에 발단되었다.’는 등 말을 방자하게 글에 썼고, 끝머리에 다시 ‘이미 광구(匡救)라고 했다면 반드시 이 일이 없다고 이를 수 없다.’고 하여 처음에는 대신(大臣)의 죄를 얽어 만드는 것 같았지만 그 귀결처는 오로지 선조(先朝)의 한때 그릇된 거조(擧措)를 들추어 내고 오늘날 일깨워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기회를 얻어 선조의 크고 작은 처분(處分)을 뒤집고자 했던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인심(人心)이 있다면 어찌 그 패란(悖亂)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허구 날조로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은 다만 그 작은 일일 뿐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만주는 특히 한 마리 이[蝨]처럼 빌붙은 무리일 뿐이니 제함(擠陷)018)  하는 말은 진실로 책망할 것도 없지만, 이진검이 이이명을 논척(論斥)하며 독대 때의 일을 추급(追及)한 것 또한 알고(訐告)019)  의 혐의를 면하지 못하니, 논하는 자가 이를 과실로 여겼다.

 

신절(申晢)을 이조 좌랑(李曹佐郞)으로 삼았다.

 

1월 5일 정묘

진시(辰時)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월 6일 무진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가서 도목 정사(都目政事)020)  를 친히 행하였다. 김운택(金雲澤)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월 7일 기사

이어 친정(親政)을 행하여 서종섭(徐宗燮)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한중희(韓重熙)·김재로(金在魯)·이인복(李仁復)을 승지(承旨)로, 박성로(朴聖輅)를 사간(司諫)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헌납(獻納)으로, 채응복(蔡膺福)을 장령(掌令)으로, 심전(沈㙉)을 정언(正言)으로, 이덕영(李德英)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유성추(柳星樞)를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친정은 성대한 거조인데도 두루 살피고 자세히 따져보는 실상이 없었고 한갓 겉모양만 아름다울 뿐이었으니,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1월 8일 경오

고부 겸 주청 정사(告訃兼奏請正使) 이이명(李頤命)과 부사(副使) 이조(李肇), 서장관(書狀官) 박성로(朴聖輅)가 돌아와 도성(都城) 밖에 이르렀다. 이이명이 이진검의 상소에 의해 배척당했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을 내렸다. 이어 사관(史官)과 승지(承旨)를 보내어 유시(諭示)하고 함께 오게 하였으나, 이이명이 여러 번 사양하고 감히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1월 9일 신미

밤 2경(二更)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청(淸)나라의 정사(政使) 사가단(査柯丹)과 부사(副使) 나첨(羅瞻)이 치제(致祭)·책봉(冊封)의 일 때문에 나오니,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치문(馳聞)하였다.

 

1월 10일 임신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친정(親政)을 채 끝마치지 못했는데 효령전(孝寧殿)의 춘향(春享) 때가 되어 재계(齋戒)하고 오늘은 밖에서 설행(設行)하라고 명하였다. 신방(申昉)을 교리(校理)로, 정수송(鄭壽松)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신광하(申光夏)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남태징(南泰徵)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1월 11일 계유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사시(巳時)와 오시(午時)에 햇무리하였다.

 

1월 12일 갑술

미시(未時)와 신시(申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유시(酉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으며, 빛은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1월 13일 을해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월 15일 정축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임금이 대신(大臣) 및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수어사(守禦使) 권상유(權尙游)와 전라 감사(全羅監司) 유명홍(兪命弘)이 춘조(春操)021)  를 정지하기를 청한 일로써 진품(陳稟)하고 이어 여러 도(道)의 수조(水操)022)  와 육조(陸操)023)  를 모두 정지하기를 허락하고 영장(營將)과 우후(虞候)를 시켜 순행(巡行)하여 점고(點考)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또 포도 대장 유성추(柳星樞)를 황해 병사에 잉임(仍任)024)  하여 황주성(黃州城)의 역사(役事)를 전관(專管)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한 허락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은사(謝恩使)를 이미 별칙(別勅) 때문에 차출(差出)하기로 기일을 정했는데, 이제 칙행(勅行)이 또 책봉(冊封)·반시(頒諡)025)  ·치제(致祭)란 3건의 일 때문에 나왔으니, 마땅히 각각 사의(謝意)를 펴야 할 것입니다. 미리 괴원(槐院)026)  으로 하여금 문서(文書)를 지어 올리게 하여야 하고, 고부사(告訃使)가 갈 때는 방물(方物)을 황제가 특별히 제감(除減)하도록 한 데 대하여 또한 마땅히 진사(陳謝)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계사년027)  에 다만 방물(方物)만 진달한 자문(咨文)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또한 이 전례에 의거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윤허하였다.

 

이삼(李森)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월 16일 무인

정언(正言) 김만주(金萬冑)가 이진검(李眞儉)의 의율(擬律)이 너무 가볍다며 인피(引避) 해 체차(遞差)되었다.

 

1월 17일 기묘

조상경(趙尙絅)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신절(申晢)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사헌(司憲) 【부장령(府掌令) 채응복(蔡膺福)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포도 대장 이삼(李森)은 기부(畿府)028)  에 제수되자마자 심한 물의(物議)를 초래하였는데, 탄핵하는 글의 먹이 아직 마르지도 않아 갑자기 내천(內遷)029)  하였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9일 신사

밤 3경(三更)부터 5경까지 달무리하였다.

 

1월 20일 임오

신시(申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우이(右珥)가 있었다. 밤 4경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빙 둘렀다.

 

황일하(黃一夏)를 도승지(都承旨)로, 이중협(李重協)을 사간(司諫)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정언(正言)으로, 김담(金墰)을 장령(掌令)으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덕수(李德壽)를 수찬(修撰)으로, 박필정(朴弼正)을 장령으로 삼았다.

 

1월 21일 계미

진시(辰時)에 해에 우이(右珥)가 있었다.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태백성(太白城)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밤 5경에 달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가서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빙 둘렀다.

 

박성로(朴聖輅)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집의 조성복(趙聖復)이 소(疏)를 올려 양역(良役)의 폐단을 논하기를,
"그 폐단이 발생한 이유를 구명(究明)한다면, 국용(國用)의 일정(一定)하지 않음과 군액(軍額)의 점차 번거로와짐과 신역(身役) 명목의 남잡(濫雜)이 많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만약 각 아문(衙門)과 여러 군문(軍門)의 재용(財用)을 모두 한 곳으로 돌리되, 토전(土田)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호조(戶曹)로 돌리고 군병(軍兵)이 바치는 것은 모두 병조(兵曹)로 돌려 그 수용(需用)을 헤아려 일체(一體)로 나누어 주며, 여러 군문의 놀고 먹는 군사 중에서 늙고 약하여 쓸모없는 자를 가려 태거(汰去)함으로써 액수(額數)를 양감(量減)하고 경외(京外)의 신역(身役) 명목으로서 남잡(濫雜)한 것은 크게 정돈을 더하여 수목(數目)을 확정하되 수목 이외의 것은 곧 취하여 궐액(闕額)을 보충하기를 허락한다면,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은 저절로 여유가 있어 도고(逃故)030)  를 보충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지 않고 역포(役布)도 또한 양감(量減)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칙하고 면려하고 서로 경계하여 치도(治道)를 강확(講確)해서 한결같이 그릇된 정치를 개혁하고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며 인재(人才)를 거두어 씀을 일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고 답하였다. 조성복은 무식하여 일을 잘 알지 못하지만 장자(長者)의 여론(餘論)을 주워 모았으므로 말은 취할 만했는데도 일이 견철(牽掣)받는 곳이 많아서 시행되지 못하였다.

 

1월 22일 갑신

미시(未時)와 신시(申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다. 밤 5경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빙 둘렀다.

 

1월 23일 을유

묘시(卯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좌이(左珥)가 있었다. 진시부터 신시까지 햇무리하였다. 밤 4경과 5경에 달무리하였다.

 

김고(金槹)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월 24일 병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숭릉(崇陵)031)  의 표석(表石)이 강화(江華)로부터 물길로 경강(京江)에 도착했습니다. 봄날 화창한 때 역사(役事)를 시작해야 마땅한데,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청컨대 영건청(營建廳)으로 이름을 붙이고 당상관(堂上官) 2원(員)을 차출(差出)하여 이들로 하여금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26일 무자

이조(李肇)를 도승지(都承旨)로, 김담(金墰)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장령 박필정(朴弼正)이 전망(前望)임에도 수점(受點)한 일로 인피(引避)하여 체차(遞差)되었다. 대개 대간(臺諫)은 전망이 도로 들어가 제배(除拜)되는 예가 없기 때문이었다.

 

1월 27일 기축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밤 5경에 손방(巽方)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1월 29일 신묘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를 올려 일을 논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영빈(寧嬪)의 제택(第宅)을 고쳐 지으라는 명이 있어서 호조(戶曹)에서 절급(折給)한 값이 2천 금(金)에 이릅니다. 그 제택은 곧 전일의 귀척(貴戚)의 집이니 반드시 좁거나 누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규모를 넓혀서 굉장하고 화려하게 하기에 힘쓴단 말입니까? 공사(公私)의 제택을 점점 더욱 넓혀 크게 함이 조종조(祖宗朝)의 옛 제도에 비하여 몇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니니, 식자(識者)들이 근심하고 탄식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더욱이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고, 해마다 흉년이 겹쳐서 바야흐로 진정(賑政)을 강구하고 있는데, 비빈(妃嬪)의 제택에 또 허다한 재화(財貨)를 소비하게 되니, 어찌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재용(財用)을 절생(節省)하는 뜻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구례(舊例)가 있다고 하교(下敎)하면서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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