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임진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2월 2일 계사
임금이 내관(內官) 함희춘(咸熙春)과 김하서(金夏瑞)를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도록 특명(特命)하였다. 승지(承旨)가 그 죄목(罪目)을 내리기를 청하니, 즉시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할 것을 명하였다. 이튿날 도승지(都承旨) 이조(李肇) 등이 아뢰기를,
"두 환관(宦官)이 범한 죄가 반드시 작은 허물이 아님을 아는데도 잠깐 사이에 곧 도로 정지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군주의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은 나라의 사책(史冊)에 써서 사방에 전하는 것이온데, 갑자기 명했다 곧 정지시킨 것은 일이 전도(顚倒)에 속합니다. 청컨대 유사(有司)에 내리시어 조율(照律)하여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죄가 가볍다고 하교(下敎)하고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이성룡(李聖龍)이 소(疏)를 올려 군주의 덕을 논하면서, 강단(剛斷)을 분발(奮發)하고 강연(講筵)을 열며 대간(臺諫)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끝머리에 여러 신하들의 소명(召命)을 어김과 향관(享官)032) 이 더디게 나아가는 폐단을 진달하였다. 또 수의(繡衣)033) 를 나누어 보낼 것을 청하고, 또 대간을 전망(前望)으로 제수(除授)하는 것은 일정한 격식을 어김이 있는데도 후사(喉司)에서 품복(稟覆)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경책(警責)을 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답하였다.
2월 4일 을미
이광좌(李光佐)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유척기(兪拓基)를 교리(校理)로, 최진한(崔鎭漢)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이홍술(李弘述)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이홍술은 성품이 본디 음흉하고 간특하며 재능과 기국(器局)이 전혀 없었고 이익을 좋아하여 권세를 붙좇았다. 늙어갈수록 더욱 예민(銳敏)하여 김창집(金昌集)에게 붙어서 외람되게 팔좌(八座)034) 의 반열(班列)에 올랐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다.
여러 도(道)의 이앙(移秧) 및 소의 도살을 금하였다. 대사성(大司成) 김운택(金雲澤)의 건백(建白)으로 인한 것인데, 묘당(廟堂)에서 아뢰어 시행하였다.
2월 5일 병신
김시환(金始煥)을 승지(承旨)로, 이만성(李晩成)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 및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은화(銀貨)가 바닥이 났으니, 참으로 딱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은(銀)을 캐는 곳은 지금 거의 막혀버렸으니, 청컨대 선조(先朝)의 정탈(定奪)에 의해 은을 산출하는 곳 및 군문(軍門)의 연점(鉛店)을 모두 본조(本曹)에 귀속시키되, 연철(鉛鐵)을 각 군문에 나누어 보내고 외읍(外邑)의 수령(守令)은 절대로 설점(設店)하는 것을 금하지 말며 양서(兩西) 이외 다른 도의 감영(監營)은 따로 은점(銀店)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2월 7일 무술
묘시(卯時)에 검은 구름 한 줄기가 간방(艮方)에서 일어나 곧장 남방(南方)을 가리켰다. 길이는 10여 장(丈)이고 넓이는 한 자 남짓하였는데, 한참만에 사라졌다. 오시(午時)에 햇무리하였다.
2월 8일 기해
유척기(兪拓基)를 교리(校理)로, 이중협(李重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서명연(徐命淵)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정언(正言) 김고(金槹)가 소를 올려 논하기를,
"소유(疏儒) 안중렬(安重烈)이 소를 다시 고쳐 지어 바쳤는데, 말이 극히 흉패(凶悖)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후사(喉司)에서 능히 엄한 말로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안중렬을 엄중하게 사핵(査覈)하게 하고, 승지를 견책(譴責)하여 파직하소서."
하고 이어 이이명(李頤命)이 무함을 입었는데도 즉시 처분하지 않은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개납(開納)035) 을 내리지 않았다.
2월 9일 경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성룡(李聖龍)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 유봉명(柳鳳龍)은 관청 일을 완전히 팽개치고 술에 빠져 있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신씨(愼氏) 성을 가진 향소(鄕所)036) 의 임원(任員)을 심복으로 만들어 크고 작은 송사(訟事)의 판결(判決)에 한결같이 그 말만 들으니, 원망하는 소리가 온 지경(地境)에 넘쳐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형조 정랑(刑曹正郞) 홍가상(洪可相)은 비루하고 자질구레한 일이 많고, 염근(廉謹)이 아주 결핍되어 청탁과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으며, 청단(聽斷)이 공정하지 못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이튿날 곧 윤허하였다.
2월 10일 신축
김제겸(金濟謙)을 사간(司諫)으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서종섭(徐宗燮)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2월 11일 임인
청(淸)나라 사신(使臣) 사가단(査柯丹)과 나첨(羅瞻) 등이 도성(都城)에 들어오니, 임금이 길복(吉服)을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맞았다. 궁궐로 돌아와 칙서(勅書)를 받고 명정전(明政殿)에서 행례(行禮)를 마치자, 시사복(視事服)으로 갈아 입고 청나라 사신과 서로 보고서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그 조칙(詔勅)에 이르기를,
"황제(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성(姓) 휘(諱)에게 칙유(勅諭)한다. 주본(奏本)을 보건대 그대의 부왕(父王) 휘(諱)가 훙서(薨逝)하였다 하니, 짐(朕)의 마음이 슬프다. 왕비(王妃) 김씨(金氏)가 아뢴 말에 의거하면 그대는 어릴 때부터 총명이 뛰어나고 또 남의 윗사람이 될 덕이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추대(推戴)하기를 원하는 바 되었다 한다. 책봉(冊封)을 받아 승습(承襲)037) 하기를 청하였기로, 짐은 여정(輿情)에 따라 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允許)한다. 이에 관원(官員)을 보내 조칙을 가지고 가서 그대의 나라에 널리 고하고, 그대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 국정(國政)을 이어 다스리게 하며, 그대의 계처(繼妻) 어씨(魚氏)를 봉하여 국왕비(國王妃)로 삼아 내치(內治)를 좌리(佐理)하게 한다. 아울러 그대와 비(妃)의 고명(誥命)과 채폐(彩幣) 등의 물품을 내리노니, 그대는 마땅히 길이 정공(靖共)038) 을 맹세하여 후복(侯服)039) 에서 찬승(纂承)040) 할 것을 힘쓰고 충순(忠順)을 다하여 천가(天家)041) 에 병한(屛翰)042) 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대는 삼가서 짐(朕)의 명을 어기지 말라. 그러므로 유시(諭示)한다."
하였다. 그 별칙(別勅)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칙(詔勅)한다. 모토(茅土)를 나누고043) 토지를 주어 만국(萬國)이 거서(車書)044) 를 같이하는데, 수성(守成)을 힘써 일방(一方)의 민사(民社)045) 가 깊이 안정되었다. 더욱이 충정(忠貞)이 대대로 독실하여 대려(帶礪)046) 가 항상 존재하고, 예의(禮義)로 기업(基業)을 열어 번병에서 으뜸이 됨을 생각하니, 이에 이전(彛典)을 상고해 새로운 사륜(絲綸)을 내린다. 고(故) 조선 국왕 성(姓) 휘(諱)는 전유(前猷)047) 를 능히 이어받아 신하의 직분을 더욱 공손히 하였고 삼한(三韓)을 보장(保障)하여, 방공(方貢)048) 이 단침(丹忱)049) 과 함께 무거웠다. 팔도(八道)에 왕화(王化)를 펴서 천위(天威)가 정삭(正朔)과 존엄을 함께 했고 익대(翊戴)050) 의 정성을 다해 오랫동안 충근(忠勤)의 절조를 드러냈으므로, 바야흐로 장수(長壽)를 기약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늙은 나이로 세상을 버렸도다. 사자(嗣子) 성 휘는 가정에서 효우(孝友)를 전하고 성품은 현량(賢良)을 지켰으며, 어릴 적부터 신민(臣民)의 기대에 흡족하였으므로, 특별히 주청(奏請)을 받아들이고 습봉(襲封)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노니, 총명(寵命)이 새로워 큰 경사(慶事)가 시작되리라. 산하(山河)를 어루만지고 왕법(王法)을 펴서 동번(東藩)을 굳건히 하고, 천택(天澤)051) 을 밝히고 신하된 마음을 면려(勉勵)하여 북극(北極)052) 에다 정성을 다 바치라. 특별히 이에 조칙(詔勅)하여 보이노니, 모두 듣고 알게 하라."
하였다. 그 봉칙(封勅)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는 제(制)한다. 홍도(鴻圖)053) 가 가이없으니 바다 밖 나라까지 성교(聲敎)를 베풀었고, 총명(寵命)이 새로워서 동토(東土)에 회유(懷柔)를 폈다. 대대로 충정(忠貞)의 아름다운 도리를 독실히 하여 직공(職貢)을 부지런히 닦았으며, 누대(累代)의 황제께서 공순(恭順)한 성의를 가상하게 여기시어 이장(彛章)을 거듭 내렸었다. 이제 찬복(纘服)054) 한 처음에 윤발(綸綍)을 펴노라. 그대 조선 국왕의 사자(嗣子) 성(姓) 휘(諱)는 기량과 식견이 깊고 몸소 행함이 순수하고 부지런한데다 일찍이 영특하고 뛰어났다는 칭예(稱譽)를 혼자 차지하여 가성(家聲)을 잘 이어받았고, 예의(禮義)의 풍속에 따라 전열(前烈)을 계승하였는지라, 이처럼 어진이를 본받은 이의 맏아들임을 생각하여 이에 봉작(封爵)을 내리는 글을 융숭히 하고 특별히 그대를 조선 국왕에 봉하니, 동번(東藩)의 병한(屛翰)을 이루어 삼가 정삭(正朔)을 받들고 그대의 나라를 편안히 하여 길이 황가(皇家)를 돕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천실(天室)에 대양(對揚)055) 하도록 하라. 삼가 짐의 명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그 왕비(王妃)를 추봉(追封)하는 조칙(詔勅)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는 제한다. 집안 식구들을 화목하게 하고 배필(配匹)을 이루어 일찍이 여종(女宗)056) 으로 크게 일컬어졌으며 사복(嗣服)으로 인해 추봉(追封)되니, 실로 조가(朝家)의 전례(典禮)를 널리 편 것이다. 아리따운 의형(儀型)이 크게 드러났으니 사람은 이미 떠났지만 잊지 못하고, 명을 내림이 바야흐로 새로우니 은전(恩典)을 여러 번 베풀어 더욱 우악(優渥)하였다. 그대 조선 국왕 성(姓) 휘(諱)의 고실(故室)057) 심씨(沈氏)는 어려서는 순조(紃組)058) 를 익히고 커서는 빈번(蘋蘩)059) 을 맡았도다. 정숙하고 조심스러우며 아름다운 의표(儀表)를 갖추었으니 옥(玉)과 같은 규범(閨範)이 완연히 있었고, 유순하고 아름다운 내칙(內則)060) 을 기술(記述)했으니 동관(彤管)061) 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에 차례에 따라 선업(先業)을 이어받고 글을 올려서 청하였다. 나라를 세운 것이 오래이니, 처음 옥책(玉冊)을 대정(大廷)에 반사(頒賜)하였고, 아름다운 짝을 비(妃)라고 이르니, 멀리 유양(幽壤)062) 에 조칙(詔勅)을 내렸다. 그대를 특별히 추증(追贈)하여 조선국 왕비로 삼아서 그 유순(柔順)의 부덕(婦德)을 빛내노라. 아! 난혜(蘭蕙)063) 가 일찍 꺾였으나 지아비의 영귀(榮貴)에 힘입어 황홀하게 계가(䈂珈)064) 가 빛나니, 그 아름다운 행적(行迹)을 밝혀서 성예(聲譽)를 깊이 후세에 전하노라."
하였다. 그 왕비를 책봉하는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는 제한다. 대명(大命)을 받아 선업을 이음은 진실로 임금의 임무이고, 국운(國運)을 도와 계책을 바로잡음은 실로 어진 부인의 내조(內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전하여서 번봉(藩封)이 능히 그 성대한 덕치(德治)를 이었으며, 지아비가 아내에게 미쳐 국전(國典)이 그 영귀(榮貴)함을 따른다. 그대 조선 국왕 성(姓) 휘(諱)의 계처(繼妻) 어씨(魚氏)는 아름다운 집안에서 빼어나게 자라나 덕이 부도(婦道)에 익숙한지라 빈번(蘋蘩)·온청(溫凊)065) 의 예절에 힘썼고, 엄숙하고 화목함을 용의(容儀)로 삼았는지라 닭이 울면066)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 삼가고 공손함이 성품을 이루었다. 생각하건대 그대의 번병(藩屛)이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충정(忠貞)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게다가 곤덕(壼德)을 부지런히 수양했으니, 총명(寵命)을 마땅히 받을 것이다. 이에 특별히 그대를 책봉하여 조선국 왕비로 삼으니, 공경과 충성을 게을리하지 말고 유순(柔順)한 덕을 어기지 않고 밝힌다면 항려(伉儷)067) 의 빛을 더하여 깊이 나라의 경사(慶事)를 도탑게 할 것이다. 삼가 짐(朕)의 명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2월 12일 계묘
사시(巳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햇무리하였다. 밤 3경(三更)과 4경에 달무리하였다.
신절(申晢)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덕수(李德壽)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청(淸)나라 사신이 황제(皇帝)의 명으로 혼전(魂殿)에 제전(祭奠)을 드리니, 임금이 전(殿) 뜰에 나가서 맞았다. 청나라 사신이 먼저 제문(祭文)을 읽고자 하므로, 승지(承旨)가 통관(通官)을 시켜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다투게 하자, 청나라 사신이 그제야 먼저 전작(奠爵)068)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황제는 정사 내대신 겸 관난의 위관군사사 세습아달합합번 겸 관좌령(正使內大臣兼管鑾儀衞冠軍使事世襲阿達哈哈番兼管佐領) 사가단(査柯丹)과 부사(副使) 세습일등아달합합번 우일타사라합번 좌령관정남기만주부도통사 예부 우시랑(世襲一等阿達哈哈番又一拖沙喇哈番佐領管正藍旂滿洲副都統事禮部右侍郞) 나첨(羅瞻)을 보내어 조선 국왕 성(姓) 휘(諱)의 영(靈)에 유제(諭祭)한다. 짐(朕)이 환우(寰宇)069) 에 임어(臨御)하고 만방(萬方)을 회유(懷柔)하여 두터운 은택(恩澤)을 더함이 안팎이 차이가 없었다. 하물며 왕위(王位)를 누리는 때에 이르러 익대(翊戴)가 더욱 은성(殷命)하고 세월이 깊어질수록 정성스런 뜻이 더욱 나타남이랴? 살아서는 작명(爵命)을 높이고 죽어서는 다시 애영(哀榮)070) 을 갖추니, 은전(恩典)이 우악(優渥)한 것이다. 그대 조선 국왕 성휘는 동쪽 바다 위의 나라에서 젊은 나이로 책봉을 받았고 선인(先人)의 서업(緖業)을 계승하여 황실(皇室)의 번병(藩屛)을 이루었다. 해마다 직공(職貢)을 이행(履行)하였으니 오직 공경하고 삼가는 조심스런 마음이었고, 대대로 훈로(勳勞)를 쌓아 충근(忠勤)의 큰 절조(節操)를 나타낸 것이 이에 4기(紀)이라 모든 나라를 창도(倡導)하였다. 중조(中朝)에 공순(恭順)하고 하토(下土)에 온화(溫和)하니, 변경(邊境)이 편안하고 조용해졌으며 어린이와 늙은이가 덕을 기려 노래한다. 생각건대 역년(歷年)071) 의 많음이 건국(建國) 이래로 없던 바라서, 구덕(舊德)을 돌아보고 짐(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는데, 어쩌다 슬픈 부음(訃音)이 갑자기 들리니 실로 도상(悼傷)함을 그칠 수 없다. 그래서 바치는 방물(方物)을 도로 가지고 돌아가게 하고 다시 대신(大臣)을 보내어 가서 조문(弔問)의 뜻을 펴게 한다. 다시 명하여 이전(彛典)을 자세히 상고하여 진념(軫念)에 부응하게 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내려 시호(諡號)를 희순(僖順)이라 한다. 이어 왕의 사자(嗣子) 성(姓) 휘(諱)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 승습(承襲)을 법제(法制)대로 하게 한다. 아! 대려(帶礪)로 맹세하니 대대로 영원히 이어져 편안할 것을 기약하며, 이 사륜(絲綸)을 내려 특별한 은전(恩典)을 충성이 변함 없는 이에게 보이노니, 영혼이여! 삼가 받기 바란다."
하였다.
지평(持平) 어유룡(魚有龍)이 상소하였다. 첫머리에 성학(聖學)에 면려하라는 뜻을 진달하고, 끝에 이진검(李眞儉)의 부범(負犯)은 관계가 매우 중대하므로 투비(投畀)072) 를 명하여 참간(讒奸)073) 을 막음이 마땅함을 논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한다고 비답하고, 이진검을 귀양보내라는 청은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3일 갑진
봉전(封典) 때문에 반사(頒赦)하고 백관(百官)의 자급(資級)을 올렸다.
조성복(趙聖復)을 헌납(獻納)으로, 백시광(白時光)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신창 현감(新昌縣監) 김광운(金光運)을 파직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첨정(簽丁)할 적에는 다만 뇌물만 볼 뿐이고, 군포(軍布)를 수봉(收捧)할 때는 정채(情債)를 덧붙여 거두며, 양전(量田)할 때는 강제로 전부(田夫)에게 쌀을 내도록 하여,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어서 원망하는 소리가 들끓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2월 14일 을사
이때 청(淸)나라 사신의 탐독(貪黷)이 한정이 없어서 요구하는 것이 전에 비해 갑절이나 많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계책을 써서 막고자 역관(譯官)을 시켜 글을 써서 청나라 사신에게 보였는데, 이에 ‘칙사(勅使)는 반드시 청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역관(譯官) 무리가 가탁(假托)하여 농간을 부린 데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을 꾸몄다. 청나라 사신이 호부 상서(戶部尙書)와 마주 대면하여 사변(査辨)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민진원이 서연청(西宴廳)에 들어갔는데, 청나라 사신이 만나지 않고 통관(通官) 등을 시켜 힐문(詰問)하게 하자, 민진원이 어쩔 수 없이 임시 변통의 말로 대답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이내 청구서에 기록한 바가 모두 자필(自筆)임을 말하니, 민진원이 능히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주청 정사(奏請正使)와 부사(副使) 이하 역관 등에게 상격(賞格)을 내렸는데, 차등(差等)이 있게 하였다.
2월 15일 병오
밤 1경(一更)부터 4경까지 달무리하였다.
서종섭(徐宗燮)을 교리(校理)로, 윤혜교(尹惠敎)를 수찬(修撰)으로, 이봉익(李鳳翼)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국휼(國恤) 때에 조신(朝臣)과 사서(士庶)의 연거대(燕居帶)를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여 마대(麻帶)로 정식(定式)하였습니다. 그런데 무릇 공복(公服)이란 연거복(燕居服)과는 다름이 있어 조사(朝士)는 이미 포단령(布團領)·포과모(布裹帽)·포과 각대(布裹角帶)가 있으니, 이번의 생원(生員)·진사(進士)의 방방(放榜) 때 착용하는 복색(服色)은 마땅히 생포 두건(生布頭巾)·생포 단령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띠는 그전대로 쓸 수가 없으니, 연거마대(燕居麻帶)는 마땅히 한결같이 조사의 포과 각대의 제도에 의하여 생포대(生布帶)로 참작하여 정식(定式)하는 일로써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의논하기를,
"옷은 공복을 쓰고 띠는 연거의 띠를 쓰는 것은 매우 반박(斑駁)074) 스러우니, 한결같이 조사의 포단령과 포과 각대의 예에 의하여 마땅히 포대로써 정식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진형(李震亨)은 고을 기생에게 고혹(蠱惑)된 나머지 법을 굽혀 청탁을 들어주었고 간사한 향임(鄕任)에게 위임하여 정령(政令)을 전관(專管)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재령 군수(載寧郡守) 이만춘(李萬春)은 도임(到任)한 이후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을 괴롭힘을 일삼고 있습니다. 집이 순안(順安)에 있는데 짐바리가 길에 끊이지 않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양성 현감(陽城縣監) 조한위(趙漢緯)는 남몰래 고을의 계집종을 간통하여 그가 말하는 것이라면 모두 따랐고, 전정(田政)을 간사한 아전에게 일임하여 쇄가(刷價)로 민결(民結)을 마구잡이로 거두어들였으며, 봄 이후로 환곡(還穀)을 독촉하여서 한 지경이 소란을 일으켰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2월 16일 정미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칙사(勅使)가 청구하는 잡물(雜物)이 전의 칙사에 비하여 더욱 많으므로, 을묘년075)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그 수량을 더하고 역관(譯官)의 무리를 시켜 전해 보였더니, 두 칙사가 아주 불만스런 기색이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예조(禮曹)의 낭청(郞廳)이 와서 제사를 지낼 날짜를 전하자, 이로 인해 말썽을 부렸는데 거조(擧措)가 해괴하였으며, 작은 종이 조각에 써 보이기를, ‘17일에 제사하고 18일에 떠날 예정이오. 듣건대 왕가(王駕)가 나오신다고 하니, 결단코 감당할 수 없으면 혹시 강림(降臨)한다 하더라도 감히 만날 수 없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주선을 잘하지 못하여 이런 역경(逆境)이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신을 보내 머물기를 권유하는 것이 접대하는 도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신이 머물기를 권한 뒤에 또 아뢰기를,
"칙사가 통관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전일 관소(館所)에서 조그만 종이조각에 글을 써서 보인 것은 경시(輕視)하는 뜻이 드러나게 있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큰 일로서 마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반드시 명백한 말을 들어야만 결정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큰 일이란 지난해 겨울 칙행(勅行) 때의 밀증(密贈)을 가리킨 것인 듯하기에, 신이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은 한결같이 등록(謄錄)에 따르고 있으니, 이번의 봉전(封典)에는 다만 기해년076) 과 을묘년077) 의 등록을 사용했을 뿐이고, 밀증에 이르러서는 곧 전례(前例)에 없던 일이므로 결단코 변경하여 고치기 어렵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마음을 돌려 듣지 않으니, 내일 제사를 지낸 뒤 마땅히 다시 전석(前席)에서 여쭙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비답하였다.
2월 17일 무신
신시(申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밤 5경(五更)에 유성(流星)이 하늘 한가운데의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다. 모양은 바리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자였으며, 빛깔은 희고 빛이 땅에 비쳤다.
청(淸)나라 사신이 또 혼전(魂殿)에서 별제(別祭)를 지내니, 임금이 전(殿) 뜰에 나가서 영접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다시 먼저 제문(祭文)을 읽고자 하였으므로, 승지(承旨)가 또 사리에 의거해 다투었으나, 청나라 사신이 끝내 듣지 않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 성(姓) 휘(諱)의 영(靈)에 유제(諭祭)한다. 직책은 번병(藩屛)을 맡아 다스려 나라의 법을 봉행했고, 매우 삼갔으며, 은전(恩典)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융숭하여 총명(寵命)을 반행(頒行)하고 거듭한다. 그대 조선 국왕은 뜻을 지킴이 편안하고 곧으며 몸가짐을 정성스럽게 하고 삼가서 북궐(北闕)078) 에 성심(誠心)을 바쳤고, 또 동쪽 변방에 오랫동안 힘을 폈다. 선업(先業)을 계승한 것이 50년에 가까왔으되 더욱 공순(恭順)함을 나타내었고, 변방을 보전함이 수천 리에 미쳤으되 승평(昇平)을 함께 즐겼다. 덕화(德化)가 뭇백성에게 젖었으니, 몸소 무한한 복을 받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서거(逝去)함을 들으니 슬픔이 깊고도 절실하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에 두터운 은전(恩典)을 베풀고 제사를 더함에 예절을 다시 융숭히 한다. 아! 물결이 동해 바다에 맑으니, 익대(翼戴)의 노고를 잊을 수 없고, 조칙(詔勅)이 궁궐(中震)에서 나가 다시 형향(馨香)의 제전(祭奠)을 드린다. 그대 영혼이 앎이 있거든 와서 흠향하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과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입대(入對)를 청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이건명이 아뢰기를,
"칙사(勅使)가 호조(戶曹)에 청구한 것을 제감(除減)한 일로 인해 화를 내고, 또 별증(別贈)을 얻고자 일부러 말썽을 부립니다. 역관(譯官)의 무리가 ‘응당 행할 봉전(封典)이니 기해년과 을묘년의 것에 비해 더하거나 덜함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더니 칙사가 더욱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이런 즈음에 욕을 당함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습니다. 듣건대 부칙사(副勅使)는 매양 담을 넘어 남몰래 뇌물을 줄 것을 청하면서 상칙사(上勅使)는 알지 못하게 하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사체(事體)와 도리(道理)로써 책망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약간의 은화(銀貨)를 잃을지언정 그들과 더불어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이 실로 체면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을묘년에도 일찍이 이런 예(例)가 없었으니 진실로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주지 않아야 마땅하나, 부칙사가 스스로 우리 나라의 문서를 관장(管掌)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갈하며 뇌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단지 부칙사에게만 주어 말썽을 부려 마지 않는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상칙사와 부칙사에게 각각 백금(白金) 1천 냥(兩)을 주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은 처음에 능히 요량(料量)하지 못해 일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흔단(釁端)을 빚어내었는데, 오로지 미봉(彌縫)만 하려고 허다한 공화(公貨)를 허비한 것이다. 오랑캐가 반드시 우리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여길 것이니, 마음 아픈 일이다.
2월 18일 기유
임금이 시사복(視事服) 차림으로 친히 관소(館所)에 가서 청(淸)나라 사신에게 머물기를 권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제릉 참봉(齊陵參奉) 이지인(李志仁)은 그 며느리를 핍박해 내쫓아 향리(鄕里)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새 계청(啓請)만 윤허하였다.
2월 19일 경술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문안(問安)하는 중사(中使)079) 및 승지(承旨)가 관소(館所)에 이르자 칙사가 반드시 친히 만나고자 하여 역관에게 강박하여 맞아들이게 하였는데, 재삼 쟁집(爭執)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려 받아들이지 않고 으르렁대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예단(禮單) 및 청구한 것이 그 뜻에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절은(折銀)080) 을 허락하지 않자 도감(都監)에 크게 화를 내고 고소(告訴)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달(啓達)로 결정하였으니, 청컨대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즉시 빨리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원에서 또 전례(前例)가 없다고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드디어 도감에서 능히 위거(違拒)081) 하지 못한 죄를 논하여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고 수역(首譯)을 나문(拿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입대(入對)하여 기내(畿內)를 순점(巡點)082) 하는 것을 특별히 정지할 것을 주청(奏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부승지(左副承旨) 김시환(金始煥)이 말하기를,
"정시(庭試)가 앞에 있고 경과(慶科) 또한 멀지 않았는데, 병신년083) 의 소유(疏儒)는 벌(罰)을 받은 지 6년 동안 줄곧 폐고(廢錮)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온 나라가 기쁨을 함께 하는 날 허다한 거자(擧子)가 향우(向隅)의 탄식084) 이 없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명하여 벌을 풀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신구(申球)라고 이름하는 자가 유현(儒賢)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 속의 문자(文字)를 따내어 어맥(語脈)을 끊고 글 뜻을 변환(變幻)시켜 효종(孝宗)을 무욕(誣辱)한 것이라며 소(疏)를 올려 죄를 얽었는데, 좋아하지 않는 자의 유혹과 사주(使嗾)에서 나온 것이었다. 근반(近班)085) 에 있는 자가 미처 듣지 못했으므로 처음에 매우 떠들썩하게 공격하고 배척했는데,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을 올려 마침내 그 일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그림자처럼 붙어서 한 조각의 의논을 이루었으니, 조신(朝紳)과 유생(儒生)이 일제히 분격(憤激)하여 번갈아 소(疏)를 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혹은 잡혀 옥(獄)에 갇히기도 하고 혹은 귀양가기도 했는데, 유벌(儒罰)을 입은 자는 이루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병신년의 죄안(罪案)인데, 김시환이 진달하여 그 벌을 푼 것이다.
2월 20일 신해
밤 1경과 2경에 곤방(坤方)에 어떤 기운이 있었는데, 불빛과 같았다.
청(淸)나라 사신이 서울을 떠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 병으로 교외(郊外)에 나가 전송(餞送)하지 못함을 전유(傳諭)로 하였다.
2월 21일 임자
김제겸(金濟謙)을 교리(校理)로,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심전(沈㙉)을 지평(持平)으로, 최석항(崔錫恒)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이어 아뢰기를,
"수진궁(壽進宮)은 곧 무후(無後)한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후궁(後宮)의 제사를 받드는 곳인데, 명선 공주(明善公主)와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두 공주방(公主房) 및 소의방(昭儀房)도 또한 무후한 궁방(宮房)입니다. 만약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두 공주방 및 소의방을 수진궁에 이속(移屬)한 뒤 전결(田結)과 노비(奴婢)로서 파(罷)할 만한 것은 파하고 둘 만한 것은 둔다면 일분(一分)의 폐단이라도 없앨 수 있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핵(論覈)하기를,
"경주 토포사(慶州討捕使) 최도장(崔道章)은 도적을 다스릴 즈음에 허실(虛實)을 분별하지 않고 경솔하게 혹독한 장형(杖刑)을 써서 죄없는 자를 억울하게 죽였고, 가깝게 지내는 요기(妖妓)의 친속(親屬)을 군관(軍官)에 차정(差定)하여 한결같이 뇌물의 많고 적음을 보아 제멋대로 그 포치(捕治)를 조종(操縱)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이몽인(李夢寅)의 공사(供辭)를 끌어다 혐의로 삼았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몽인은 신의 지난번 연주(筵奏)를 혹은 공동(恐動)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무망(誣罔)이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스스로 옛사람이 도끼를 쥐고서 궐하(闕下)에 엎드렸던 예(例)에 비하기는 하지만, 어찌 일찍이 칼날을 쥐고 마구 떠들면서 금정(禁庭)에 돌입하여 위졸(衞卒)을 구타(歐打)한 것이 이몽인 등이 한 짓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거조(擧措)의 해괴함과 패악(悖惡)함은 전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쥐고 간 작도(斫刀)가 나무가 아니고 쇠니 어찌 칼날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소본(疏本)을 바꾸어 바친 것을 능히 완전히 은휘(隱諱)할 수 없는데도 오히려 또 꾸며대어 말을 만들었으니, 전하는 말의 원본(原本)에 비한다면 상반(相反)될 뿐만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경(卿)에게는 혐의가 없으니,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호서(湖西)의 유생(儒生) 이몽인 등이 갇힌 뒤 이건명이 또 끝까지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고 원소(原疏)를 써 내게 하였는데, 이몽인 등의 공초(供招)를 바치기를,
"작도(斫刀)를 쥐고서 금문(禁門)으로 들어간 것은 오로지 윤상(倫常)과 의리(義理)를 밝혀 흉적(凶賊)을 치는 뜻에서 나왔는데, 승정원(承政院)과 병조(兵曹)는 모두 흉적 이홍술(李弘述)의 혈당(血黨)으로서 안팎에 반거(盤據)해 있으면서 줄곧 막고 가렸습니다. 과연 작도를 차고 발을 금문 안으로 들여놓은 것은 진실로 충분(忠憤)의 격발(激發)에서 나왔는데도 김창집의 무리가 그 일을 크게 과장(誇張)하여 천청(天聽)을 공동(恐動)시키고 망측(罔測)한 죄과(罪科)로 몰아넣었으니, 그는 얽어 죽이는 데에 급급하여 거짓말로 임금에게 고한 것이 무망(誣罔)으로 돌아감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처음에 영상(領相)이 북사(北使)와 왕복(徃復)하며 이야기했다는 것을 듣고 과연 ‘북사가 와서 황지(皇旨)를 써 보이고 여러 가지로 공갈하였으나, 전하(殿下)의 춘추가 얼마인가, 사속(嗣績)086) 이 있는가 없는가에 이르러서는 본디 황지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창집이 아무 까닭도 없이 저 사람에게 써 주어서 돌아가 탑전(榻前)에 아뢰게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건조(擧措)입니까? 김창집은 이에 바로 견양(太羊)087) 앞에서 우리 임금의 나이를 세어 고하였으니, 이와 같이 어렵게 여김이 없다면 군부(君父)의 욕됨과 조정(朝廷)의 수치가 이보다도 클 수가 없었습니다.’는 등의 말을 소(疏)의 끝에 집어넣었는데, 금졸(禁卒)에게 걷어채이고 찢기게 되자 저도 모르게 소를 안고서 통곡하였으며, 서로 함께 불에 던지고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 뒤 이 한 구절을 뽑아버렸는데, 원소(原疏)를 써 들이게 되자 그 본문(本文)을 그대로 써서 바쳤다. 소(疏) 아래에 심득우(沈得佑)와 조형(趙瀅)의 공초한 바도 대략 같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홍술(李弘述)이 모두 형신(刑訊)을 청하자 임금이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이몽인은 장(杖) 1백에 변방 먼 곳에 충군(充軍)하고 심득우 등은 장을 쳐서 귀양보냈는데, 이듬해 겨울에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놓아주었다.
2월 22일 계축
신사철(申思喆)을 승지(承旨)로, 임형(任泂)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대사성(大司成) 김운택(金雲澤)이 상소(上疏)하여 소유(疏儒)의 해벌(解罰)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소유 임상극(林象極)·오명윤(吳命尹) 등은 번갈아 서로 투서(投書)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무욕(誣辱)하였으므로 선조(先朝)에서 먼 변방으로 내쳐 엄중히 징치(懲治)을 더하였고, 해를 넘긴 뒤 사전(赦典)으로 인해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림(士林)에게 유벌을 베풂은 실로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악(邪惡)을 배척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승선(承宣)이 이 무리의 죄명(罪名)을 아주 잊고 방자하게 진달하여 풀어 주기를 청하기에 급급하니, 신은 저윽이 놀라고 의혹스레 생각합니다. 전대로 그대로 두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벌을 풀었으니 도로 정지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대사성은 관례상 유생의 해벌을 관장하기 때문에 김운택의 상소가 이 일을 제기하여 막은 것이다.
2월 23일 갑인
밤 4경(四更)에 달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였다.
남도규(南道揆)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2월 26일 정사
임금이 명릉(明陵)에 행행(行幸)하여 친히 선왕(先王)과 선후(先后)께 제사하고 익릉(翼陵)088) 에 전알(展謁)한 뒤 환궁(還宮)하였다.
2월 27일 무오
수릉관(守陵官)인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과 시릉관(侍陵官) 및 참봉(參奉)·충의(忠義) 등에게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도록 명했으니, 구례(舊例)를 따른 것이었다.
2월 28일 기미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현도(縣道)를 통해 여러번 소(疏)를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2월 29일 경신
정시(庭試)의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에서 문과는 윤심형(尹心衡) 등 7인을 뽑고 무과는 박용채(朴龍采) 등 1백 48인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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