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3권, 경종 1년 1721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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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계해

밤 1경(一更)부터 5경까지 건방(乾方)과 곤방(坤方)과 손방(巽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3일 갑자

김연(金演)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완(李浣)을 장령(掌令)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유척기(兪拓基)를 교리(校理)로, 서종섭(徐宗燮)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홍치중(洪致中)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시환(金始煥)을 승지(承旨)로, 송필항(宋必恒)을 집의(執義)로, 김용경(金龍慶)을 지평(持平)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내승(內乘) 양익표(梁益標)를 탄핵하기를,
"양익표는 성품이 본디 광패(狂悖)하여 허물과 비방이 쌓여 있는 것을 조정에서 바야흐로 또 하자를 씻어 수용(收用)하였는데, 연경(燕京)에서 먼저 와 옛 버릇을 고치지 않고 해괴한 거조가 많이 있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두 공주방(公主房)의 일 때문에 특명(特命)하기를,
"자성(慈聖)께 여쭈었더니, ‘선조(先朝)의 전교(傳敎)가 명백하고 엄절(嚴切)할 뿐만이 아니니, 이제 와서 다시 제기함은 매우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결코 윤종(允從)할 수 없다.’고 하교(下敎)하셨다.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내탕(內帑)이 옛 제도가 아니고 무후(無後)한 공주방에 면세(免稅)하는 것은 더욱 의의가 없으니 대론(臺論)이 진실로 대체(大體)를 얻었는데도, 임금이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자교(慈敎)를 핑계로 거절하니,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이번 사마 방목(司馬榜目) 안에 묵명(墨名)의 벌089)  을 받은 자가 있는데, 과거에 나아가 참방(參榜)한 자가 나왔으니, 사습(士習)의 해괴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사핵(査覈)해 내어 뽑아버리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3월 4일 을축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3월 6일 정묘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다.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밑에는 이(履)가 있었으며, 빛은 모두 겉은 붉고 안은 푸르렀다.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3월 7일 무진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티끌이 내리는 것 같았다.

 

회환(回還)하는 동지사(冬至使)의 선래 군관(先來軍官)이 장계(狀啓)를 가지고 나왔다. 이르기를,
"황제가 제위(帝位)에 있은 지 60년이 되어 태학사(太學士)와 구경(九卿) 등이 여러번 아뢰어 칭경(稱慶)의 예(禮)를 행하기를 청한 나머지 겨우 허락을 얻어 3월 18일에 설행(設行)하기로 하였으나, 반사(頒赦)의 한 가지 일은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하여 그 날이 되어 다시 진청(陳請)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8일 기사

밤 1경(一更)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5경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홍석보(洪錫輔)를 승지(承旨)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3월 9일 경오

먼동이 틀 무렵부터 묘시(卯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이기익(李箕翊)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승지(承旨)로, 임징하(任徵夏)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시환(金始煥)이 상소(上疏)하여 소유(疏儒)를 해벌(解罰)할 일을 거듭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병신년090)  에 소유(疏儒)가 좌죄(坐罪)된 것이 무슨 일이었습니까? 백대(百代)에 산처럼 우러르는 유종(儒宗)이 마구잡이로 천고(千古)에 없는 악명(惡名)을 입었으니, 사문(斯文)의 저상(沮喪)과 세도(世道)의 역패(斁敗)091)  가 다시 여지가 없었습니다. 처음 간기(奸基)가 【유상기(兪相基)이다.】 이 일을 시작하더니 중간에 적신(賊臣) 신구(申球)가 뛰어들고 끝에 가서는 또 상신(相臣)이 조술(祖述)하여 성조(聖祖)를 위해 변무(辨誣)한다고 핑계대었는데, 그 수미(首尾)로 배포(排布)한 것과 앞뒤로 화응(和應)한 것이 모두 문자(文字)를 따내어 죄안(罪案)을 얽어 만든 데 지나지 않았으니, 바로 유자광(柳子光)의 옛일과 같은 수법입니다. 비록 기세(氣勢)가 한창 펼쳐져 시의(時議)가 한덩어리가 되었지만 그때의 성비(聖批)가 해나 별처럼 밝아서 ‘본문(本文)의 위아래의 문리(文理)가 그 유소(儒疏)와 근사(近似)한 것을 볼 수가 없는데, 어찌 무훼(誣毁)로 지목하여 곧장 망측(罔測)한 곳으로 몰아넣는가?’는 등의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밝고 밝으신 성조께서 애초 어찌 일찍이 억울함을 변명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진이를 해치기에 급급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에 미치기까지 하였으니, 만약 일분(一分)이라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방자하고 무엄함이 어찌 이처럼 심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 사화(士禍)를 만들어 낸 뒤로 다만 흉계(凶計)가 탄로날까 두려워 중외(中外)의 선비로서 궁궐(宮闕)을 지키면서 진변(陳辨)하는 자를 겉과 안이 부동(符同)하여 일체 막고 가리웠으니, 이는 역적 유자광도 일찍이 하지 못하던 바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변괴(變怪)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한때의 선류(善類)가 일망 타진(一網打盡)되고 선비의 기개(氣槪)가 침체되어 다시 살 뜻이 없었는데, 유생(儒生) 등이 창도(倡導)해 동지(同志)를 이끌고 곧장 임금께 부르짖고자 한 것이 혹은 어진이를 높이고 도(道)를 보위(保衞)하는 성의(誠意)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정인(正人)을 부지(扶持)하고 참인(讒人)을 물리치는 의리(義理)에서 나오기도 했으니, 이는 진실로 장려할지언정 죄줄 수 없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죄를 받을 일이 무슨 일인지요? 산림(山林)에서 이미 백골(白骨)이 된 사람은 본디 세로(世路)에 관계하지 않았는데도 이 소인배(小人輩)이 해독(害毒)을 받아 참혹하게도 무욕(誣辱)당했으니, 시비(是非)를 확연히 가리고 원왕(寃枉)을 깨끗이 씻는 것은 진실로 사론(士論)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대론(臺論)이 시끌시끌하고 한편에서는 유벌(儒罰)이 낭자했으니, 만일 선대왕(先大王)께서 북돋아 기르고 애호(愛護)하신 성덕(盛德)이 아니었다면 허다한 명성이 높은 선비가 몇 사람이나 영해(嶺海)에서 죽었을지 모릅니다. 큰 은택(恩澤)이 곧 내리어 정거(停擧)의 벌을 모두 풀어 주게 하였는데도 인순(因循)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끝내 군주의 명령을 폐지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니, 사체(事體)의 미안함이 어느 것이 이보다도 심하겠습니까? 전후(前後)에 유생(儒生)으로서 벌을 받고도 풀리지 못한 자가 적지 않은데, 혹 자신이 죽었음에도 그대로 벌의 이름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침 칭경(稱慶)하여 과거(科擧)를 베푸는 날 감히 진달했던 것이며, 신이 논한 바는 비단 임상극(林象極)과 오명윤(吳命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김운택(金雲澤)은 단지 이 두 사람만을 들어 마치 벌을 받아 과거를 폐한 자가 이 사람에게만 그칠 뿐인 것처럼 한 것이 있으니, 그것도 또한 심히 무망(誣罔)한 것입니다. 거조(擧條)가 이미 내려져 성명(成命)을 장차 행하려 하는데도 급급하게 투소(投疏)하여 근거없는 말로 상시(嘗試)하고 과거 기일이 하룻밤을 사이에 두어 사세(事勢)가 이미 급박해지자 비로소 한 장의 초기(草記)로 재임(齋任)이 나오지 않았음을 핑계로 색책(塞責)하고 미봉(彌縫)하여 마침내 저해(沮害)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사(攸司)의 신하가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 할 만하니, 방자하다는 배척은 저기에 있지 여기에 있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미 김운택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 유시(諭示)하였으니, 사직(辭職)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3월 10일 신미

헌납(獻納)        조성복(趙聖復)이 김시환(金始煥)의 상소 때문에 인피(引避)하여 말하기를,
"윤선거(尹宣擧)의 유집(遺集) 가운데 틀리고 망령된 문자(文字)는 이미 양조(兩朝)의 예람(睿覽)을 거쳤고 성고(聖考)께서 본말(本末)의 패로(敗露)를 통찰하시어 그 판본(板本)을 깨뜨려 버리라 명하셨으며, 마침내 그 관직을 추삭(追削)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김시환이 선어(仙馭)가 빈천(賓天)한 뒤 변란(變亂)하고 현혹시키는 계책을 부리고자 앞뒤의 성교(聖敎)는 전부 없애버리고 다만 최초의 처분이 채 정해지기 전의 비지(批旨)를 빙자하여 온 세상의 사류(士類)를 남을 악역(惡逆)에 빠뜨리는 죄과(罪科)로 모두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선조(先朝)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혹은 소를 올리고 혹은 아뢰어 성조(聖祖)를 위해 변파(辨破)하고 소란을 일으킬 유생(儒生)을 죄주기를 청한 까닭이니, 이것이 홀로 공의(公議)가 아니겠습니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아 많이 변명하고자 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명하여 사직하지 말게 하니,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를 청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을 돈면(敦勉)하기를 청하고, 끝에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셨으니, 또한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비록 양암(諒闇)092)  의 날이라 하더라도 강학(講學)을 선무(先務)로 삼지 않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하신 법도를 본받으시어 날마다 유신(儒臣)을 부르시어 경전(經傳)을 토론하시고 치도(治道)를 강마(講磨)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을 내렸다.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지금 국사(國事)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영상(領相)뿐인데, 이몽인(李夢寅) 등이 허구 날조하여 반드시 쫓아버리고자 함은 아마도 영상이 자리를 떠나면 흉도(凶徒)가 틈을 타 사의(私意)를 이룰 기회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시고 성의(誠意)를 다해 나오기를 면려(勉勵)해 함께 나랏일을 해나가도록 하소서.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북사(北使)가 왕자(王子)와 여러 종친(宗親)을 만나 볼 것을 청했다고 듣자 곧장 가동(家僮)을 달려보내어 한 장의 소(疏)를 올리고 마치 비상(非常)한 변고(變故)가 호흡지간에 닥친 것처럼 하였는데, 그 이른바 ‘배신(陪臣)이 받는 것은 혐의를 무릅쓰는 것이 된다.’느니 ‘왕자와 여러 종친이 또한 어찌 감히 이에 편안하랴?’느니 한 것은 더욱 극히 위험합니다. 대개 저 사람이 만나보기를 청한 것은 다만 고루 유시(諭示)한다는 뜻일 뿐이니, ‘혐의를 무릅쓴다.’는 등의 말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요? ‘어찌 감히 편안하랴[豈敢安]’는 세 글자에 이르러서는 기간(惎間)093)  의 뜻을 띠고 있으니, 만일 대신(大臣)에게 조금이라도 지난날을 추념(追念)하는 뜻이 있다면 어찌 과연 이것을 참겠습니까? 나라 사람의 말이 떠들썩하고 열 손가락이 모두 가리키게 되자, 또 ‘효(孝)·우(友)’ 두 글자를 찾아내어 도리어 ‘다만 한 아우가 있으니, 더욱 친애(親愛)를 도탑게 하여야 한다.’는 등의 말로 무단히 진달하여 찧고 까불었으니, 손발이 드러남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이 같은 정태(情態)는 진실로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몽인 등은 이미 처분하였으니 이제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 우상(右相)은 성실하여 딴 뜻이 없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헤아리지 않고 말을 늘어놓으며 침범하고 핍박하는가? 진실로 이상하다."
하였다. 지난해 겨울 청나라 사신이 나왔을 때, 황지(皇旨)라고 핑계하며 혹은 산릉(山陵)으로 곧장 가서 조전(弔奠)의 예(禮)를 설행(設行)할 것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국왕의 아우와 조카를 만나보고 돌아갈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오랑캐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는데도 묘당(廟堂)에 있는 자는 태연히 마음에 두지도 않고서 허락하느냐 마느냐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태구의 소(疏)가 나와서 나라 사람의 말이 떠들썩한 뒤에야 비로소 두루 가리고 미봉하여 감히 혼취(婚娶)094)  한 나이를 열서(列書)하여 전해 주었으니, 그 불경(不敬)하고 무엄함이란 도피할 수 없을 정도의 죄였다. 그럼에도 헌관(憲官)은 능히 그 죄를 엄중히 성토(聲討)하지 못하고 도리어 조태구를 제함(擠陷)하려고 그 자구(字句)를 따내어 기간(惎間)의 죄목을 날조하였다. 그 소어(疏語)는 지나치게 염려했다는 점에서 실수를 범한 것이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근거없는 말을 거짓으로 꾸며 퍼뜨린 것이 지극히 심각하고 참혹하여 이어 죽은 뒤에 참소하여 죄를 얽어 만드는 죄안을 이루었으니, 심하다! 소인(小人)이 사람을 무함하는 수법이여.

 

3월 11일 임신

오시(午時)에 햇무리하였다.

 

유숭(兪崇)을 승지(承旨)로, 김민택(金民澤)을 교리(校理)로, 조문명(趙文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3월 12일 계유

진시(辰時)와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김시환(金始煥)의 소척(疏斥)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윤선거(尹宣擧)는 남이 자기를 비평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 허물을 가리고자 감히 광명(光明)하여 티 없는 효종(孝宗)을 끌어다 그 자신에 비유했고 몰래 역적 윤휴(尹鑴)와 함께 낭자하게 창화(唱和)하여 문자(文字)가 모두 있으니,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선왕(先王)께서 정상을 간파하신 뒤로 여러번 엄중한 교지(敎旨)를 내리시어 처분을 밝고 바르게 하셨습니다. 김시환이 비록 ‘승하(昇遐)하신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독 성명(聖明)이 혁연(赫然)하게 조림(照臨)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실로 세도(世道)를 위하여 슬퍼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3월 13일 갑술

사시(巳時)에 곤방(坤方)에서 간방(艮方)에 이르기까지 지진이 일어났다.

 

이정주(李挺周)를 승지(承旨)로, 신사철(申思喆)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시환(金始煥)이 다시 소를 올려 김창집(金昌集)을 배척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상신(相臣)의 차사(箚辭)가 신에게 화를 내고 신을 욕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역적 신구(申球)와 부동(符同)하여 사화(士禍)를 빚어낸 정상에 대하여 스스로 변명할 말이 없게 되자 한 편(篇)의 주된 뜻이 또 전일에 유현(儒賢)을 무함하던 수단을 답습했으니, 성명(聖明)의 시대에 이런 흉악하고 교활한 큰 간특(奸慝)이 있을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아! 상신(相臣)에 대해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가 임금을 잊고 어버이를 저버리며 나라를 해치고 세상을 그르친 정상은 한두 마디 말로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권력을 주상에게서 옮겨 가지고 죄는 종사(宗社)에 관계되어 전후로 부범(負犯)한 것에 대해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는데도 아직도 서울 안에 편안히 쉬고 있으니, 왕법(王法)이 너무 너그럽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 감히 사람들 사이에 끼어 넣어 사론(士論)의 옳고 그름에 대해 함께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위로하고 도우신 까닭에 제멋대로 굴고 탐욕과 교활이 가면 갈수록 더하여 전하를 우롱하는 것이 필적(匹敵)095)  과 같이 여김이 있으니, 신이 비록 못났기는 하지만 윤상(倫常)을 어기고 의리(義理)를 멸한 한 상신과 더불어 이러니저러니 다투고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독 신이 놀라고 한탄하는 것은 근래에 일종의 무엄하고 불경한 풍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밝고 밝게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어찌 조신(朝臣)의 쟁변(爭辨)에 관계하시기에, 사람을 협지(脅持)하기에 급하면 언제나 반드시 감히 말하지 못할 곳에 중대한 핑계를 대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협제(脅制)할 계책으로 삼는 것인지요? 신의 상소에 진달한 바는 그들 무리가 사화(士禍)를 양성(釀成)한 실상을 논척(論斥)한 데 지나지 않을 뿐이며, 일언 반사(一言半辭)도 주상의 처분에 미친 것은 없으니, 신은 교무(矯誣)했다는 것이 무슨 일이며 현혹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정태(情態)를 신은 저윽이 통분(痛憤)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상신(相臣)을 침범하고 핍박한 것이 어찌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는가? 나는 실로 개연히 여긴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김시환은 평소 일찍이 풍론(風論)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는데,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갈수록 점점 격분하여 권병(權柄)을 잡은 상신을 배척하며 논하되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지 않았으니,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말에 분박(噴薄)함이 많았고 뜻이 꾸짖어 욕하는 데 있었으며 능히 전후의 죄상을 지적하여 공격하지 못하여 대강(大綱)만 있고 세목(細目)은 없었으므로, 의논하는 자가 애석하게 여겼다.

 

3월 14일 을해

밤 1경(一更)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이덕수(李德壽)를 지평(持平)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3월 15일 병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성룡(李聖龍)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김시환(金始煥)을 탄핵하기를,
"사문(斯文)의 대론(大論)은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졌고 선왕(先王)의 처분이 밝기가 해와 별과 같아 전하께서 준봉(遵奉)해 계승하심이 금석(金石)처럼 굳은데, 근래에 음흉하고 패악(悖惡)한 소장(疏章)이 모습을 바꾸어 번갈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감히 이런 일을 제기해 말하지 못한 것은 선왕(先王)을 두려워하고 공의(公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접때 김시환이 평일에 쌓아온 노여워하고 원망하는 뜻으로, 뭇 소인이 기세(氣勢)를 올려 일어나는 때를 타서, 처음에는 유벌(儒罰)을 풀어주기를 청하며 성의(聖意)를 넌지시 떠보다가 마침내는 본 일에 미쳐 천청(天聽)을 형혹(熒惑)해 반드시 시비를 현요(眩撓)096)  하고 흑백을 변란(變亂)하고야 말려고 합니다. 을미년097)  ·병신년098)  이후의 소유(疏儒)는 선조(先朝) 때 이미 풀어준 것으로 인정하였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터무니없이 지어내 방자하게 기만한 것으로, 그가 선왕의 뜻을 거짓으로 꾸며 공의(公議)에 죄를 얻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감히 두서 없는 말과 위험하고 두려운 설(說)로 대신(大臣)을 얽어 무함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하물며 그의 재차의 상소는 천고(千古)의 흉패(凶悖)한 문자(文字)를 모아 졸지에 마구잡이로 더하여 오로지 제뜻대로 하고자 하였으니, 만약 속히 무거운 견책(譴責)을 베풀지 않는다면 참소와 간특을 막아 제방(隄防)을 엄중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고 다만 김시환만 파직시켰다.

 

우의정 조태구가 이정소(李廷熽)에게 배척당했다 하여 진소(陳疏)하고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신(臺臣)의 상소는 말의 뜻이 지극히 깊고 치밀하였으니, 어찌 사람의 말이 다시 이 지경에 이를 줄 헤아렸겠습니까? 전날 북사(北使)가 알려온 문자 안에 황지(皇旨)를 가탁(假托)한 말은 매우 괴이하고 이치에 어긋났고, 아우와 자질(子姪)을 보기를 청한 것은 실로 그와 같은 사리(事理)가 없었으며, 이때는 이른바 고루 유시(諭示)한다는 황지(皇旨)도 또한 미처 나오지 않았으니, 그날의 연품(筵稟)한 말은 본디 정해진 계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잘못이 생긴다면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고 실례(失禮)도 또한 클 것이었으니, 신이 외람되게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만 늦더라도 일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니, 또 어찌 시급하게 진달하여 아뢰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저들의 가탁한 말은 본디 우리 나라 사람이 아는 바가 아니었으되, 우리 나라가 평소에 예의를 지켰으므로 그 예의와 분수의 사이에서 신중하게 살피려 했던 것은 그 뜻이 매우 밝았으니, 말하는 자가 무엇을 돌아보아 생각하며 왕자(王子)와 제종(諸宗)이 또한 어찌 말한 자를 싫어했겠습니까? 이제 해를 넘긴 뒤에 갑자기 끌어들여서 ‘기간(惎間)’ 등의 차마 듣지 못할 말로 제멋대로 발설하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신의 몸을 없는 사실로써 무함하기에 급급할지라도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이 두 글자를 혀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아! 통분스럽습니다. 또 요(堯) 순(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따름이니, 세수(歲首)의 진언(陳言)에 이것을 버리고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 구구하게 성심(誠心)을 다한 말이 또한 허물을 들추어내어 없는 사실을 속여 만드는 속으로 들어갔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전후에 말한 바가 각각 의의(意義)가 있으므로 본디 털끝만큼도 상관이 없는데 그가 날조해 모아 말을 만들어 처비(萋菲)의 계책099)  을 만들고자 하니, 아! 가소로워서 족히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수찬(修撰) 홍현보(洪鉉輔)가 말을 더듬거린다며 진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김시환의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그의 처음 상소를 가지고 말한다면 선왕(先王)을 안중에 두지 않은 것이고, 그 뒤의 상소를 가지고 말한다면 곧 하나의 무고(誣告)입니다. 유벌(儒罰)을 핑계하고서 처음에 선조(先朝)의 이미 정해진 처분을 변란(變亂)시키려고 하여 천고(千古)의 망칙한 패설(悖說)을 날조해 모아 제멋대로 얽어 무함하였으니, ‘그 죄가 종사에 관계된다.[罪關宗社]’는 네 글자 같은 것은 곧 변서(變書)로서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제함(擠陷)에 급급하다 해도 유독 조정(朝廷)의 높음과 체통(體統)의 엄함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 대상(大喪)이 있고 난 뒤로 뜻을 잃은 불령한 무리가 남몰래 서로 엿보며 취한 듯 미친듯 저쪽에서 부르짖으면 이쪽에서 화답하여 그 모습을 바꾸어 가며 온갖 계책으로 뚫고 나가고 있습니다. 꺼리는 것은 오직 한(漢)나라 조정의 급암(汲黯)100)  일 뿐이니, 그가 반드시 공격하여 제거하려 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우와 쥐 같은 무리를 엄중히 징치(懲治)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뒤를 이어 날뛰어 마침내 남의 나라와 집을 망친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북으로 투비(投畀)하시고 또 대각(臺閣)이 즉시 들어 탄핵하지 않음을 배척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일하는 데 민첩하고 말하는 데 더듬거리는 것은 부자(夫子)101)  께서도 칭찬하셨다. 김시환의 일은 대각의 의논이 이미 나왔으니, 반드시 겹쳐서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때 김시환의 상소 때문에 삼사(三司)에서 혹은 소를 올리고 혹은 인피(引避)하며 좌우에서 공격하고 배척하였는데, 홍현보는 말더듬는 병이 거의 벙어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영록(瀛錄)에 참여하여 시론(時論)에 투합(投合)하였고, 더욱이 방자하게 비방하였다. 심지어 김창집(金昌集)을 급암에게 비기기까지 했으니, 그 분별이 없는 것이 심한 편이다.

 

3월 16일 정축

윤양래(尹陽來)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가 우의정 조태구의 소어(疏語) 때문에 인피(引避)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신이 그의 심술(心術)을 간파(看破)한 데 노여워하여 대단한 기세(氣勢)로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극구 분박(噴薄)하니, 신은 놀랍고 분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때 묘당(廟堂)에서 북사의 청(請)을 허락하지 않았고 여러 종친(宗親)들도 또한 나와서 본 일이 없었는데도, 급급하게 소를 올려 말은 지극히 위험했고 은연중에 현혹시키고 어지럽혀 화(禍)를 남에게 덮어씌울 계책이 있었으니, 처비 패금(萋菲貝錦)이란 바로 스스로를 말한 것입니다. 최후의 한 통의 상소는 오로지 두루 가리우고 미봉(彌縫)하려는 데서 나왔는데도, 이제 말하기를, ‘세수(歲首)의 진언(陳言)’이라 하였으니, 더욱 한 번 웃을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말이 구차하고 뜻이 껄끄러워서 가리우려고 해도 더욱 드러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폐간(肺肝)을 보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그 본정(本情)을 구명(究明)한다면 참으로 매우 애처로우니,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정의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풍습이 경박하여 소장(疏章)으로 다투어 변명하는 즈음에도 전혀 서로 공경하는 풍도(風度)가 없고 극구 욕하고 꾸짖어 사기(士氣)가 아주 패려(悖戾)하였다. 그런데도 임금은 엄하게 물리치지 않고, 조정에서도 또한 마침내 그 그릇됨을 논하지 않으니, 당의(黨議)가 사람의 심술(心術)을 질곡(桎梏)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세근(李世瑾)이 소를 올려 김시환의 일을 말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어제 사간원(司諫院)에서 승선(承宣)을 논한 계청(啓請)에 대하여 갑자기 파직(罷職)의 명을 내리셨으니, 진실로 성의(聖意)가 대신을 위안(慰安)하고 국체(國體)를 존중한 데서 나온 줄 알겠습니다. 또 우상(右相)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그때의 대소(臺疏)를 가리켜 소활(疏闊)한 의논이 있다 하셨습니다. 신은 오랫동안 궁벽한 시골에 있었으므로 실제 대소의 말뜻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대체로 여론(輿論)을 들어 보면 비록 대신(臺臣)을 편드는 자일지라도 또한 다 그르다고 말하고 있으니, 공의(公議)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성명(聖明)께서는 오히려 뚜렷하게 배척하는 뜻을 밝게 보이지 않으시고 이제 다만 소활하다고만 하교하셨으니, 저윽이 생각하건대 이 두 글자는 너무나도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윤발(綸綍)의 말은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듣는 데 부족함이 있으니, 원컨대 성명께서는 마음에 두시어 밝게 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데서 나왔으나 대언(臺言)도 또한 반드시 뚜렷하게 배척할 것이 없으니, 의아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이세근은 일찍이 시론(時論)에 눈치나 보면서 언제나 우물쭈물하는 태도가 있었으므로 제류(儕流)가 이 때문에 그를 비방하였다. 때마침 근밀(近密)에 있었기에 공의(公議)에 몰린 나머지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능히 명백하게 말하고 바르게 논하여 그 참소와 무함을 변명해 밝히지 못하였고, ‘비교(批敎)102)  ’ 두 글자를 핑계대어 대강대강 말하였다. 혹시 한 마디 말이라도 시배(時輩)의 뜻을 거슬릴까 겁을 내어 글의 첫머리에서도 끝맺음에서도 조심해 본 내용은 몇 구절만 남았을 뿐이었으니, 슬퍼할 따름이다.

 

3월 18일 기묘

밤 2경(二更)에 달이 저성(氐星)을 범하였다.

 

이재(李縡)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운택(金雲澤)을 부제학(副提學)으로, 홍우전(洪禹傳)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상참(常參)의 예(禮)를 행하였다. 이를 마치자,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김시환의 소(疏)에서 김창집(金昌集)을 꾸짖어 욕한 죄를 심하게 배척하고, 또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 승정원에 하교하여 윤선거(尹宣擧)를 신변(伸辨)하는 소를 받아 들이지 말라 하였는데도 전날 승지가 무단히 받아들였으니,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다. 이어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계청(啓請)을 윤허하기를 힘껏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삼남(三南)의 어사(御史)를 내달 보름 무렵에 내보내려 합니다. 비록 반드시 한꺼번에 팔로(八路)에 두루 보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때때로 한 도(道)를 제비로 뽑고 한 도 안에서 한두 고을을 제비로 뽑는다면, 외방(外方)의 수령(守令)에게 칙려(勅勵)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삼남에 비록 먼저 보내기는 하지만 여러 도(道) 또한 폐(廢)할 수 없으니, 우선 가을 무렵을 기다려 형세를 보아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북한 별장(北漢別將)을 관성장(管城將)으로 특별히 명호(名號)를 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또한 윤허하였다.

 

3월 20일 신사

이광좌(李光佐)를 도승지(都承旨)로, 이의현(李宜顯)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김시환(金始煥)을 태인현(泰仁縣)으로 귀양보냈다.

 

반궁(泮宮)에 귤을 반사(頒賜)하고 선비에게 시험을 보여 수위(首位)를 차지한 유생(儒生) 목천임(睦天任)에게 사제(賜第)103)  하였다.

 

3월 21일 임오

밤 1경(一更)에서 4경까지 간방(艮方)·손방(巽方)·곤방(坤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22일 계미

밤 1경에서 5경까지 간방(艮方)·손방(巽方)·곤방(坤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이민영(李每英)을 승지(承旨)로, 어유룡(魚有龍)을 헌납(獻納)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정언(正言)으로, 신절(申晢)을 교리(校理)로, 이중협(李重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3월 23일 갑신

동지사(冬至使)가 가지고 온 백은(白銀)과 필단(匹緞)을 호조(戶曹)에 내리도록 명했다.

 

3월 24일 을유

묘시(卯時)에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오시(午時)에 햇무리하였다.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안에 관(冠)이 있었으며, 햇무리 밑에 이(履)가 있었는데, 빛은 모두 안은 붉고 겉은 푸르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미시(未時)와 신시(申時)에 햇무리하였다. 유시(酉時)에 햇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 관이 있었으며, 관 위에 배(背)가 있었는데, 빛은 모두 안은 붉고 겉은 푸르렀다. 밤 1경(一更)과 2경에 손방(巽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25일 병술

이정익(李禎翊)을 승지(承旨)로, 김제겸(金濟謙)을 교리(校理)로, 서종섭(徐宗燮)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여러번 소(疏)를 올려 사직하고, 또 홍변(虹變)104)   때문에 인구(引咎)하며 해면(解免)을 원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고가 즉위 원년(元年)에 발생했는데도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태연하여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뜻이 있었으므로, 후사(喉司)에서 으레 아뢰는 진계(陳戒)도 또한 공공연하게 폐하고 하지 않았다. 이때 용렬한 무리가 벼슬자리에 포치(布置)해 있고 온갖 법도(法度)가 번쇄(煩碎)해져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은 반드시 불러 일으킨 바가 있었는데도, 임금은 진작(振作)하여 힘씀이 없었고 일체 고식(姑息)의 정치를 일삼았으므로, 조야(朝野)가 답답하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단천(端川)으로 진(鎭)을 옮긴 뒤로 부사(府使)는 ‘본부(本府)에 새로 군제(軍制)를 설치하여 각양(各樣)의 군정(軍丁)을 마땅히 3천 6백 명을 얻어야만 모양을 이룰 수 있는데, 군정이 부족하므로 유품(儒品) 【유생(儒生)인 품관(品官)이다.】 으로 충정(充定)하여 수를 채우려고 하니, 떠들썩하게 호소하여 이산(離散)할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감사(監司) 윤헌주(尹憲柱)는 마땅히 한결같이 함흥(咸興)의 예에 의하여 규식(規式)을 정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남병영(南兵營) 소속인 친기위(親騎衞)의 호보(戶保) 외의 가솔(假率) 등 제반 색목(色目)은 본디 편오(偏伍)의 군사가 아니고 미포(米布)를 조금 거두어 병영(兵營)의 수용(需用)에 보충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이제 만약 제반 색목을 수대로 본부에 환급(還給)하여 군액(軍額)에 충당한다면 민정(民丁)이 지탱하여 보전할 길이 있을 듯하고 본부(本府)도 독진(獨鎭)의 체제(體制)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청컨대 그 장계(狀啓)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건명이 또 지진(地震)·홍관(虹貫)의 재변(災變) 때문에 수성(修省)의 방도(方道)를 진달하고 자주 강연(講筵)을 열어서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기를 청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이 잇따라 조종조(祖宗朝)의 좋은 제도를 따라 혹은 연석(筵席)을 열고 혹은 소대(召對)하여 강론(講論)하고 자방(咨訪)105)  하며 더욱 경성(警省)을 더해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할 것을 진달하니, 임금이 모두 받아들였다. 장령(掌令) 채응복(蔡膺福)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폐지한 제언(堤堰)에 경작(耕作)을 허락한 잘못을 논하여 그 명령을 정지하고 다시 신칙을 더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3월 26일 정해

밤 5경(五更)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이진형(李震亨)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3월 27일 무자

먼동이 틀 무렵부터 진시(辰時)에 이르기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이인복(李仁復)을 승지(承旨)로, 이성룡(李聖龍)을 지평(持平)으로, 심전(沈㙉)을 정언(正言)으로, 유집일(兪集一)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이완(李浣)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여산 부사(礪山府使) 오달해(吳達海)를 탄핵하기를,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법을 지키지 아니하여 전해지는 말이 떠들썩한데다가 함부로 연군(煙軍)106)  을 동원해 이웃 고을의 수령(守令)을 구타하였으니, 실로 전고(前古)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3월 28일 기축

임금이 특명(特命)하기를,
"내관(內官) 송상욱(宋尙郁)이 나의 몸을 조절(操切)107)  하니, 버릇이 가증스럽다. 심상(尋常)하게 처치할 수 없으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라."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의논하여 아뢰니, 임금이 명하여 파직하여 방송(放送)하게 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송상욱을 또한 명하여 나문하였으나 끝에 가서는 무사하였고, 이제 또 벌(罰)이 파직에 그쳤다. 임금이 응중(凝重)108)  ·간묵(簡默)109)  하고 근시(近侍)를 대우함이 매우 엄격하니, 궁위(宮闈)가 숙연(肅然)하였으나, 위노(威怒)가 간혹 중도(中道)을 잃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해면(解免)을 청했는데, 임금이 온화한 비답(批答)을 내리니, 김창집이 곧 나아가 명에 응했다. 진퇴(進退)는 신하의 법도인데도 염치(廉恥)를 내버린 것이 상신(相臣)에게서 비롯되니, 세도(世道)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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