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묘
이정익(李禎翊)을 승지(承旨)로, 김흥경(金興慶)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4월 3일 계사
식년 별시(式年別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文科)에서는 오성유(吳聖兪) 등 34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는 이홍정(李弘禎) 등 86인을 뽑았다.
4월 4일 갑오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다.
이중협(李重協)을 사간(司諫)으로, 김고(金槹)를 장령(掌令)으로, 남도규(南道揆)를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황선(黃璿)을 승지(承旨)로, 유척기(兪拓基)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4월 6일 병신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4월 8일 무술
밤 1경(一更)에 달이 여귀성(輿鬼星)을 범하였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이완(李浣)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무장 현감(茂長縣監) 이사덕(李師德)은 크고 작은 결송(決訟)을 한결같이 뇌물의 많고 적음을 보아서 하고, 전정(田政)·군정(軍政)을 오로지 감관(監官)과 색리(色吏)의 환롱(幻弄)에 맡겨 두며, 또 국휼(國恤) 날을 당하여서는 산사(山寺)에 모여 도재(屠宰)110) 가 낭자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보안 찰방(保安察訪) 이하연(李夏演)은 역말을 조발(調發)하여 판재(板材)를 운반하고, 마필(馬匹)을 다시 세울 때 한결같이 사사로운 청촉(請囑)에 따라 강제로 사서 세우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4월 10일 경자
밤 1경(一更)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고, 달무리하였다.
조성복(趙聖復)을 집의(執儀),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김중기(金重器)를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세종(世宗) 때에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본감(本監)에 두었는데, 병화(兵火) 끝에 깨어져 없어졌습니다. 이번 절사(節使)의 행차 때 혼천의의 가본(假本)을 얻어 왔는데, 만든 모양이 정묘(精妙)하니, 청컨대 모양에 따라 1건(件)을 만들어 바치게 하여 본감에 보관해 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4월 11일 신축
조상경(趙尙絅)과 이진망(李眞望)을 승지(承旨)로, 김제겸(金濟謙)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김고(金槹)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사역원(司譯院)의 전(前) 주부(主簿) 김홍희(金弘禧)는 그 숙부(叔父)와 재물을 다투며 싸우다 치고 몰아 죽게 하였습니다. 해당 부(部)에서 그 동임(洞任)111) 을 추문(推問)하고 형조(刑曹)에서 그 문안(文案)을 안핵(按覈)하였으나 지금까지 시간을 질질 끌어 아직도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다시 엄중히 핵실(覈實)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말단(末端)의 4건의 일만 따르고, 전(前) 승지(承旨) 김일경(金一鏡)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는 계청은 정지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다시 소를 올려 정세(情勢)를 진달하고, 또 재해(災害)를 만나 책면(策免)한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정승의 직위를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어 선영(先塋)에 귀성(歸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이어 말[馬]과 요전상(澆奠床)112) 을 내려 주었다.
지평(持平) 이성룡(李聖龍)이 소를 올려 군덕(君德)을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5일마다 차대(次對)하는 규식(規式)은 곧 우리 나라의 근정(勤政)하는 미덕(美德)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전일(專一)한 마음으로 능히 부지런하셨고, 감히 혹시라도 게으르지 않으셨으니, 진실로 대단히 위예(違豫)113) 한 때가 아니면 일찍이 그만두지 않으셨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여 휴명(休命)114) 을 맞이하셨으니, 오직 정사(政事)를 시의(時宜)에 맞게 처리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인데, 처음 시작하는 때에 점점 게을리하는 거조(擧措)가 있어 일차(日次)를 때때로 간혹 공연히 정폐(停廢)하더니, 뒷날 와서 모이라는 하교(下敎)가 또 어제 저녁에 내려졌습니다. 슬프고 괴로우신 가운데 성후(聖候)가 간혹 편안하지 않으심은 형세로 보아 본디 그럴 것이겠지만, 진실로 억지로 하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 않는다면 어찌 갑자기 성법(成法)을 폐하여 군하(群下)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열성(列聖)의 좋은 법도를 따르시고 영고(寧考)의 근정(勤政)을 본받으시어 무릇 일차(日次)에 있어 혹시라도 정폐하지 마시며, 초복(初服)115) 에 힘써 정신을 가다듬는 다스림을 나타내소서."
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4월 12일 임인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문신(文臣)을 시강(試講)하였다.
4월 13일 계묘
밤 1경(一更)에서 4경까지 달무리하였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공조 판서(工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의 진달로 인해 개인적으로 진휼(賑恤)한 사람 및 그 밖의 승전(承傳)을 봉행(奉行)하던 사람으로서 죽은 자에게 증직(贈職)하는 일을 모두 대신(大臣)에게 물어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은 의논하기를,
"지난해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품달(稟達)하여, 승전하는 사람으로서 벼슬에 임명되지 못하고 죽은 자는 각각 걸맞는 직첩(職牒)을 주고, 출신(出身)인 경우는 사대부(士大夫)와 중서(中庶)를 구별해 선전관(宣傳官)과 수문장(守門將)의 첩(帖)을 주고, 6품(品)은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판관(判官) 등의 첩을 주고,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의 경우 벼슬을 제수하는 차례에 들어갔지만 미처 수용(收用)되지 못하고 죽은 자는 또한 일명(一命)116) 의 벼슬을 추급(追給)하는 일을 이미 정탈(定奪)하였으니, 진실로 마땅히 이에 의하여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진휼한 사람 및 승전 중 출신이 아닌 자가 유독 거론하는 가운데에서 빠졌는데, 이런 무리 역시 걸맞는 벼슬을 일체(一體)로 추급(追給)하는 것이 그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도리에 있어 균등(均等)하지 않다는 탄식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도 영의정과 의논이 같으니, 임금이 영의정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사간(司諫) 김제겸(金濟謙)이 상신(相臣)의 아들로서 공직(供職)하기 어려움을 혐의로 삼아 소(疏)를 올려 체직(遞職)을 원하고, 이어 논하기를,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워 양민(良民)이 괴로와하고 원망하며, 기근(飢饉)이 겹쳐 도적이 마구 날뛰니, 청컨대 성상께서 날마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더불어 구제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시어 한결같이 이 백성을 구제하는 일로 마음을 먹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에 탐묵(貪墨)의 풍습을 금하고 억제할 수 없으며, 백성들의 곤궁과 괴로움 또한 이에 말미암고 있습니다. 청컨대 특별히 후사(喉司)로 하여금 윤음(綸音)을 내리고 도신(道臣)을 위엄으로 신칙해 이들로 하여금 염찰(廉察)하여 물리차게 하며, 어사(御史)도 또한 즉시 내보내어 장죄(贓罪)를 범한 사람이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말아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터전으로 삼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먼 고을의 백성이 무관(武官)의 가렴 주구에 시달려서 문관 수령(文官守令)을 얻기를 생각하는 것은 이치상 진실로 마땅히 그러한 것이나, 종전에 문관으로서 불초(不肖)한 자는 간혹 도리어 무관보다도 심하였습니다. 이제 큰 고을의 한 자리가 있는데, 뭇사람의 다툼이 이곳으로 모여 전하는 말이 낭자하니, 신은 선부(選部)에 특명(特命)하시어 우선 문관으로 차견(差遣)하지 말도록 하여 이름 있는 고을의 분경(奔競)117) 의 풍습을 막게 할 것을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염치는 땅을 쓴 듯 흔적도 없었고 분경이 풍습을 이루었다. 김제겸의 상소가 말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요로(要路)를 차지하여 권력(權力)을 구하고 뇌물을 바쳐 청탁(請托)이 공공연히 행하여졌으므로, 탐비(貪鄙)를 논하는 자는 김제겸을 첫머리로 삼았다. 그럼에도 겉으로 폐단을 바로잡는 의논을 핑계하고 몰래 사욕(私慾)을 이룰 계책을 꾸몄으니, 사람이 모두 놀라고 비웃었다.
4월 17일 정미
장령(掌令) 이완(李浣)이 소(疏)를 올려 양맥(兩麥)118) 이 흉년이 든 상황을 진달하고, 이어 논하기를,
"여러 해를 내리 굶주린 백성들이 모여 군도(群盜)가 되니, 여러 도(道)의 장문(狀聞)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조정의 계책은 무부(武夫)를 차견(差遣)하여 초포(勦捕)한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단지 위세(威勢)만 보이지 말고 또한 마땅히 은혜로써 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조(銓曹)에 특별히 명하시어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논할 것 없이 자애롭고 어진 관원을 골라 보내어 편안하게 하는 정사에 힘쓰게 하소서. 그리고 이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진구(賑救)의 방도(方道)를 미리 강구하게 하소서. 난전(亂廛)의 금법(禁法)을 비록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으나 경조(京兆)에서 채소 난전(菜蔬亂廛)까지 나와 징속(徵贖)이 낭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실로 전에 없던 바이니, 해당 당상관에게 마땅히 책벌(責罰)을 더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의논하여 시행하고 경조의 당상관을 적발하여 추고(推考)하라고 비답을 내렸다.
4월 18일 무신
먼동이 틀 무렵에 안개 기운이 있었고,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4월 19일 기유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이병상(李秉常)을 부제학(副提學)으로, 홍정필(洪廷弼)을 부응교(副應敎)로, 신방(申昉)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4월 20일 경술
밤 4경(四更)과 5경에 달무리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소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삼춘(三春)119) 의 심한 가뭄이 여름에 와서 더욱 혹심하며 여기(癘氣)120) 에 감염되어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도적이 나라 안에 두루 가득차 곳곳에서 몰래 일어나 말을 타고 포(砲)를 쏘며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변고까지 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이 장차 호흡지간에 결판나려 합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궁궐의 깊은 곳에 계시며 신료(臣僚)를 만나보기를 싫어하시고, 여러 신하들도 또 차례로 물러가서 제 한 몸의 보전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정에 있는 자도 역시 거개가 병으로 말미를 받거나 인혐(引嫌)하여 직사(職事)를 생각하지 않고 아문(衙門)은 늘 폐인(閉印)121) 을 일삼아 조의(朝儀)122) 는 반행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향관(享官)123) 을 임명하여 채우지 못하고 시관(試官)을 의망(擬望)할 수가 없는데도 비국(備局)이란 중요한 곳은 달을 넘기도록 개좌(開坐)하지 못하고, 빈청(賓廳)에서 일차(日次)에 비록 간혹 인원(人員)을 갖추기는 하지만 전하(殿下)께서 때로 사대(賜對)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가뭄을 만나 비를 비는 것은 관례를 따라 응당 행해야 할 일인데도 또한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대충대충 세월만 보내거나 허둥지둥대는데도 오히려 천명(天命)을 이어서 그 나라를 보전해 지킬 수가 있겠는지요?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날마다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시되 친히 옥음(玉音)으로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하시지 않으십니까? 날마다 이와 같이 하고 또 날마다 이와 같이 하시되, 또한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여러 신하들에게 포고(布告)하기를, ‘그대들이 선조(先朝)의 옛 신하로서 어찌 차마 나를 버리겠는가? 비록 나를 부족하다 여길지라도 다만 선조의 은우(恩遇)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며 성의(誠意)를 열어 보이고 되풀이하여 효유(曉諭)하시며, 또 날마다 강연(講筵)을 열어 유신(儒臣)을 친근하게 대하시고, 고금(古今)의 일을 끌어다 증거로 삼아 치도(治道)를 강마(講磨)하소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여러 신하들이 비록 기모(奇謀)와 이책(異策)은 없을지라도 위태로움을 안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뜻이 자연히 통하여 대소 신료가 각각 심사(心思)를 다해 무릇 나라에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반드시 쓰지 않는 계책이 없을 것이니, 이제부터의 급무(急務)는 이 한 가지 일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윽이 살펴보건대 중외(中外)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서 경사(京司)는 제향(祭享)과 어공(御供)124) 의 값을 채워 주기 못하는 경우가 많고, 백관(百官)의 반록(頒祿)과 군병(軍兵)의 방료(放料)125) 도 구차하고 간략하기 짝이 없습니다. 진휼청(賑恤廳)의 오래 묵은 저축은 이미 경외(京外)의 주진(賙賑)에 이미 바닥이 났고, 외읍(外邑)의 경우 8도(八道) 조적(糶糴)의 곡식을 통산하여 본디 수백 만 곡(斛)이었으나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수십 만 곡에 지나지 않는데, 보리가 나오기 전에 이미 모두 주었으니, 가을에 만약 수확(收穫)이 없다면 백성은 장차 무슨 곡식으로 살아 나갈 방도를 세우며, 또한 장차 무슨 계책으로 밀가루가 없는 밀국수를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굶어 죽고 있다는 소식이 날마다 들리고 떠돌아다니는 거지의 무리가 구렁을 메우는데, 신이 일찍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구제할 만한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쩔 수 없다고 핑계대고서 태연하게 생각을 짜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과연 능히 지성(至誠)으로 몹시 가엾게 여기시어 날마다 구제하는 방도를 강구하신다면, 비록 형세가 궁박하고 힘이 다 빠져 능히 구제할 수가 없을지라도 구렁을 메운 귀신이 또한 반드시 유감(遺憾)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몇 건(件)의 품정(稟定)할 일이 있어 홀(笏)에 써서 기다린 지가 이미 두 달에 이르렀습니다만, 번잡하고 좀스러워 감히 모두 진달하지 못하고 다만 성덕(聖德)과 조정(朝政)에 관계되는 큰 것만을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누누이 진언(進言)한 것이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항상 병을 앓고 있어서 강연(講筵)을 오랫동안 폐지(廢止)하였고 사대(賜對)가 드물었다. 간혹 신료(臣僚)를 인접(引接)해도 연묵(淵默)이 너무 지나쳐서 수답(酬答)이 매우 드물고 품결(稟決)할 즈음에도 우불(吁咈)126) 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었으므로,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백사(百事)가 폐이(廢弛)하였다. 그러나 보상(輔相)127) 의 책무를 맡은 자가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편사(偏私)를 제거하기에 힘써 인재를 등용하고 군덕(君德)을 보도(輔導)한다면 소강(小康)의 정치는 넉넉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당론(黨論)을 일삼아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자를 경알(傾軋)하고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을 한쪽 가로 밀쳐 놓았으니, 그 죄는 스스로 돌아가는 데가 있을 것이다.
4월 21일 신해
이조(李肇)를 도승지(都承旨)로, 김진상(金鎭商)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4월 22일 임자
먼동이 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신사철(申思喆)을 승지(承旨)로, 김제겸(金濟謙)을 응교(應敎)로, 신방(申昉)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어유룡(魚有龍)을 장령(掌令)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헌납(獻納)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4월 25일 을묘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 및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맨먼저 오랜 가뭄으로 보리가 손상되어 앞으로 진휼(賑恤)에 저축한 곡식이 이미 바닥이 나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도적이 곳곳에서 몰래 일어나 서흥(瑞興)에서는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있었으니, 청컨대 따로 포도 군관(捕盜軍官)을 보내어 수포(搜捕)하게 하소서."
하고, 이어 말하기를,
"서흥은 일찍이 현리(縣吏) 조대엽(趙大燁)이 본 고을의 원을 총으로 쏘아 죽인 일로 인해 지금까지 고을 이름을 낮추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 해가 지났고 도적의 근심이 이와 같으니, 도로 고을 이름을 승격(陞格)시키고 무신(武臣)을 차견(差遣)하소서. 안악군(安岳郡)도 또한 도적의 근심이 많으니, 무신을 보내 도적을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접때 칙사(勅使)가 차비 역관(差備譯官)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만약 폐단이 있다면 내가 바야흐로 예부(禮部)에 있으니 마땅히 주선하여 변통(變通)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신이 대신과 의논하고, 세폐목(歲幣木)128) 을 은(銀)으로 환산하여 정할 것과 사행(使行) 때 머무는 곳에 사람의 출입을 막지 말 것 및 문서(文書)는 날을 정하여 판하(判下) 할 것 등의 일을 시험삼아 탐문(探問)하게 하였더니, 칙사가 이자(移咨)하면 마땅히 주선할 것을 허락하고, 이어 종이 묶음과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3, 4종의 물건을 청구하였습니다. 다른 나머지 일은 반드시 이자할 것이 없으나, 세폐(歲幣)를 만약 싼 값으로 은(銀)으로 환산한다면 진실로 다행이겠습니다. 다만 환산하여 정할 때에 값의 높고 낮음을 다툼 또한 심히 괴로우니, 이자하는 일의 당부(當否)를,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국휼(國恤)의 초상(初喪) 때 백관(百官)의 최복(衰服)을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에서 제급(題給)하였으니, 연복(練服)도 또한 갖추어 주어야 하겠습니까?"
하자, 김창집이 말하기를,
"초상이 갑작스레 났을 때는 백관이 스스로 갖추기 어려웠으므로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제급하게 한 것입니다. 연복은 스스로 갖추게 하고 능히 갖추지 못하는 자는 부판(負版)과 벽령(辟領)과 최(衰)를 떼어 버리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윤허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이 아뢰기를,
"무변(武弁)129) 중에는 의지하여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청컨대 대신에게 물으시어 사인(士人)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군직(軍職)에 임명하여 무예(武藝)를 권장하게 하소서."
하였다. 김창집이 구일(具鎰)의 손자 구성익(具聖益)과 장봉익(張鵬翼)의 아들 장태소(張泰紹)를 천거하고, 이홍술도 또한 신계(申啓)가 합당한 정상(情狀)을 말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지평(持平) 이성룡(李聖龍)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탄핵하기를,
"황해 도사(黃海都事) 구익형(具益亨)은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처사(處事)가 전도(顚倒)되고 망령되며, 또 문자(文字)에 소홀하므로 결코 시험을 맡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수찬(修撰) 서종섭(徐宗燮)이 경연(經筵)을 열어 강학(講學)해야 한다는 뜻으로 진달하고, 김창집과 민진원 등이 서로 잇따라 말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오랜 가뭄으로 삼각산(三角山)과 목멱산(木覔山)과 한강(漢江)에 기우제(祈雨祭)를 설행(設行)하였다.
4월 26일 병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다시 소를 올려 견벌(譴罰)을 청하였으니, 소가 들어간 지 거의 4개월이 되도록 답이 없었고 승지(承旨)가 또한 보류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김창집(金昌集)이 연중(筵中)에서 진달하여 오늘은 답을 내려 줄 것을 청하기까지 하니, 임금이 비로소 답을 내리기를,
"경(卿)의 인혐(引嫌)이 너무 지나치니 마음속으로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외에 무어라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시간을 끈 지 오래 되었으니 더욱 매우 낯이 뜨겁다. 경은 나라와 한 몸이 되는 성의(誠意)를 가졌음에도 선대왕(先大王)이 특별히 대우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서 나를 버림이 이와 같이 무정하단 말인가? 이 또한 내가 박덕(薄德)하고 불민(不敏)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4월 28일 무오
친정(親政)을 행하였다. 이재(李縡)를 도승지(都承旨)로, 이관명(李觀命)을 판윤(判尹)으로, 김운택(金雲澤)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신광하(申光夏)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박찬신(朴纘新)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이튿날 이어 친정을 행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수찬(修撰)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부교리(副校理)로, 남도규(南道揆)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고(金槹)를 헌납(獻納)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정언(正言)으로, 신무일(愼無逸)을 지평(持平)으로, 송도함(宋道涵)을 장령(掌令)으로, 이중협(李重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제겸(金濟謙)을 사간(司諫)으로, 윤양래(尹陽來)를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유척기(兪拓基)를 응교(應敎)로 삼았다.
4월 30일 경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연제(練祭) 뒤에는 곡(哭)이 없다는 글이 있는데도 기축년130) 과 기해년131) 두 해의 국휼(國恤) 때 대신과 의논하여 상제(祥祭) 뒤 담제(禫祭) 전까지 삭망전(朔望奠)132) 의 곡을 그대로 행하기로 정탈(定奪)하였으니, 이번 연제 뒤 혼전(魂殿)에서 제사를 행할 때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대로 곡례(哭禮)를 행하고, 산릉(山陵)에서도 또한 일체(一體)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민진원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예조에서 연복(練服)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온데, 전하의 요질(腰絰)은 칡으로 백관(百官)은 숙마(熟麻)로 하는 것은 반박(斑駁)133) 에 관계될 듯하고, 또 관(冠) 및 요질의 끈도 노끈을 쓰는지 포(布)를 쓰는지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이것도 또한 소루합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예서(禮書)를 상고하여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번의 절목(節目)은 경자년134) 과 을묘년135) 두 해의 등록(謄錄)을 취해 상고한다면 전하의 요질은 칡으로, 종친(宗親)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요대(腰帶)는 숙마(熟麻)로, 수릉관(守陵官)과 시릉관(侍陵官)의 요질은 숙마로 썼습니다. 그때 백관의 복제(服制)는 이미 고례(古禮)를 따르지 않았으니, 요질을 숙만로 했다는 말이 비록 준적(準的)하기 어려우나, 수릉관과 시릉관은 복최(服衰)의 여러 절목이 백관과 아주 구별되는데도 오히려 또 이와 같으니, 이것은 오늘날 백관의 종복(從服)의 규례(規例)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연관(練冠) 및 요질의 끈을 쓰느냐 포(布)를 쓰느냐 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단 전후의 등록(謄錄)이 모두 거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본조(本曹)의 절목에도 또한 모두 기재되지 않았으니, 오늘에 이르러 절목의 이와 같음은 형세(形勢)가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 등의 고루한 소견으로는 감히 고례(古禮)에 고거(考據)하여 재정(裁定)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대신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창집이 의논하기를,
"연제 때에 요질을 칡으로 하는 것은 고례(古禮)가 그러하고, 칡이 없으면 숙마(熟麻)도 괜찮다는 것이 이미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기재되어 있으며, 경자년과 을묘년 두 해에도 또한 이미 행한 전례가 있으니, 본조에서 숙마로 마련한 것은 과연 의거할 만한 것이 있으며, 혹은 칡으로 혹은 숙마로 그 갖춘 대로 따르는 것은 반박(斑駁)의 혐의가 없을 듯합니다. 연관 및 요질의 끈은 《의례(儀禮)》에 흰 것을 쓴다는 글이 있으며, 흰 것은 곧 포(布)의 등속이니, 포를 쓰는 것도 또한 마땅합니다. 또 예조의 절목에 관구(菅屨)를 그대로 쓴다고 마련했는데, 연제 전에는 관구를, 연제 뒤에는 승혜(繩鞋)를 쓰는 것이 또한 예서(禮書)에 있고, 상복(喪服)의 여러 절차가 모두 점점 길복(吉服)으로 되는데 유독 신[屨]에서만 변하지 않는 것은 미안(未安)한 것이 될 듯하니, 이것도 또한 승혜로 고치는 것이 혹시 마땅함을 얻을 듯합니다. 또한 마땅히 널리 물으시어 처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도 김창집의 의논과 같으니, 임금이 그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당초 국휼(國恤) 때 백관의 최복(衰服)을 갑자기 고례(古禮)대로 행하게 되자 창졸간에 능히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지 못한 채 마음대로 억단(臆斷)하였으므로 일에 어긋나고 빠진 것이 많았으니, 이미 식자(識者)들의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김창집은 배우지 못해 무식한데도 단지 수상(首相)이란 이유로 함부로 스스로 재정(裁定)하여 심지어 조신(朝臣)으로서 최복을 능히 갖추지 못한 자는 부판(負版)과 벽령(辟領)을 떼어 버리기를 청하기까지 했으니, 구간(苟簡)이 심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한강 밖으로 돌아가 또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고, 이어 성묘(省墓)하기를 원한다고 함께 온 승지(承旨)가 주문(奏聞)하였으나, 임금이 별달리 돈면(敦勉)하는 전교(傳敎) 없이 다만 의례적인 비답을 내려 들어오게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소를 올려 경리청 당상(經理廳堂上)을 사직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민진원이 연중(筵中)에서 여러번 이 임무(任務)를 갈아 주기를 호소하였으나 본청(本廳)의 도제조(都提調) 이유(李濡)가 차자(箚子)를 올려 그대로 두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민진원이 힘써 사직한 것이다. 그 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창설(創設)할 때 가부(可否)의 의논이 일치(一致)하지 않았습니다. 창사(倉舍)와 성첩(城堞)을 영건(營建)하는 때에 미쳐서는 경비(經費)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요판(料販)하여 재물을 취하였으나 일을 맡겨 부리는 무리를 대부분 적임자(適任者)를 얻지 못하였고, 사찰(寺刹)의 역사(役事)에 이르러서는 승도(僧徒)에게 전적으로 맡겼는데 승도로서 첩문(帖文)을 가지고 제물을 모으는 자가 또 외읍(外邑)에서 민폐(民弊)를 많이 끼쳐 나랏사람의 말이 들끓어오르고 온갖 비방이 몰려드니, 사람들이 본청(本廳)을 마치 기름때의 더러움에 혹 물든 것처럼 여겼습니다. 신이 외람되게 이 일을 맡아서는 다만 이미 흩어진 재물을 거두었을 뿐 영리(營利)하는 일을 베풀지 않았고, 차인(差人)을 엄중히 신칙하여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였으며, 성 안의 모든 일은 오로지 각각 그 주관(主管)하는 군문(軍門)에 독책(督責)하였는데도, 일을 하는 데 있어서의 완급(緩急)이 또한 어긋남이 많아 뭇 의혹(疑惑)을 풀어 뭇사람의 노여움에 사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내는 지난해 대장(臺章)이 준엄하게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부끄러워 몸둘 곳이 없습니다. 당초 본청을 설치할 적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수상(首相)과 사마(司馬)의 장관(長官)에게 명하시어 사무(事務)를 맡게 했으니, 성산(聖算)이 미친 바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선망의 유의(遺意)를 돌이켜 생각하고 길이 법령으로 만든 후에야 보장(保障)에 관한 모든 일을 착실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재물과 곡식과 둔전(屯田)을 한 군문에 귀속시키고 비국(備局)에서 산성(山城)의 사무를 총괄해 살피되, 이어 본청(本廳)의 명호(名號)를 혁파(革罷)하는 것이 진실로 사체(事體)에 맞고 뭇사람의 비방을 없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이유는 비록 충성스런 마음은 있었으나, 지혜가 어둡고 재주가 모자라 북한 산성의 모든 일을 맡아 보면서 오로지 요판(料販)을 일삼았다. 그래서 거간꾼의 무리가 모두 그 문(門)에 모여들었고 사방으로 나가 이익을 도모하므로 뇌물을 바치는 길이 크게 열리니, 백성이 그 폐해(弊害)를 받았으므로 민진원이 그 일을 제기하여 논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집의(執義) 임형(任泂)이 소를 올려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어떤 때로 여기십니까? 무릇 전하의 조정에 있는 사람은 두려워 위태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도 유독 전하께서 마음에 두지 않으실 뿐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왕(先王)께서 50년의 치평(治平)을 이루신 것은 정사를 부지런히 하신 데 지나지 아니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아름다운 통서(統緖)를 이어받으시자 백성들이 바야흐로 선왕께 의지하던 바로 전하께 의지하는데도, 전하께서는 다시 백성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여러 신하들의 건백(建白)에 따라 억지로 응답(應答)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위로는 묘당(廟堂)으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게을러져 그 일에 힘쓰지 않으므로, 점점 나라는 나라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막연히 서로 간섭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백성이 어찌 실망해 변란(變亂)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놀라고 두려워하시며 마치 미치지 못할 것 같이 하시어 자주 신료(臣僚)를 접견해 백성의 일을 묻고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칙려(飭勵)해 진구(賑救)의 계책을 미리 강구(講究)하게 함으로써 민간에서 환하게 성상께서 백성과 함께 같이 근심하는 뜻을 알게 한다면 민심을 수습하여 궤란(潰亂)하여 변고가 생기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삭망(朔望)의 제전(祭奠)을 섭행(攝行)한다는 분부를 듣고서 전하의 옥체(玉體)가 편안하지 않으심을 명백하게 알았습니다. 유신(儒臣)의 진계(陳戒)하는 차자(箚子)가 올라가자 전하께서 즉시 미안(未安)하다는 하교를 더하시고, 들이켜 후사(喉司)의 논계로 인하여 뉘우치시는 뜻을 쾌히 보이셨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고친다.’는 성대한 규율(規律)이 아니겠습니까? 유사(有司)의 신하는 다만 뉘우치시는 아름다운 뜻을 우러러 본받아 한때의 실언(失言)을 봉행(奉行)하지 않아야 마땅한데도, 다시 품정(稟定)하지 않고 곧 초헌관(初獻官)을 마련(磨鍊)한 것을 마치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은 것처럼 여김이 있으니, 그때의 예조 당상관(堂上官)에게 경책(警責)의 방도(方道)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에 논핵(論劾)을 당한 자가 대의(臺議)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그 관직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삼(李森)은 한낱 편녕(便佞)136) 한 무부(武夫)일 뿐인데, 대간(臺諫)이 그가 갑자기 기진(畿鎭)에 승진된 것을 논하자 드디어 발탁하여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삼았고, 대간이 그가 합당하지 않음을 논하자 또 뽑아서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중군(中軍)으로 삼았으니, 이는 탄핵과 논박이 이런 일을 성취시키기에 알맞았던 것입니다. 그는 본디 부끄러움이라곤 없었으니 어찌 족히 깊이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만, 대간이 경시(輕視)당한 것이 심합니다. 그 이유를 구명(究明)한다면 전하께서 대간을 경시하시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招來)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마음을 비우시고 이치를 살피시어 일에 따라 넉넉히 받아 들이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인심을 수습할 수가 없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성(石城)의 수신(守臣)이 돌팔매질로 곤액을 당한 것과 회인(懷仁)의 원이 움켜 잡혀 질질 끌려다니는 모욕을 당한 것과 태인(泰仁)에서 일어난 관아(官衙)의 문에 모여 통곡한 변고(變故)와 낙안(樂安)에서 일어난 관장(官長)을 구타한 일입니다. 난민(亂民)이 교화(敎化)를 막는 폐단이 실로 이에서 조짐이 나타났는데도, 두 도(道)의 신하는 즉시 치계(馳啓)하지 않고 대충 조사관을 정해 구문(究問)하였으며, 변란을 일으킨 자가 끝내 극형(極刑)을 피하였으니, 오늘의 인심(人心)을 가지고 이 흉악하고 교활한 자가 요행히 면한 것을 본다면 장차 그 무엇을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두 도(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그 수범인(首犯人)을 조사해 내어 각각 현문(縣門)에 효시(梟示)하게 하고,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각도(各道)에 알리도록 명해 이런 변괴(變怪)가 있다면 즉시 계문(啓聞)하고 엄중히 징치(懲治)를 더하게 하소서. 청주 목사(淸州牧使) 홍우정(洪禹鼎)은 문을 닫은 채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있으면서 게을러 일을 다스리지 않고, 한정(閑丁)의 추착(推捉)137) 은 오로지 하리(下吏)에게 맡겨 뇌물에 따라 놓아 주므로 끝날 때가 없습니다. 덕산 현감(德山縣監) 윤항(尹沆)은 친구를 위해 추노(推奴)하면서 조정의 금령(禁令)에 개의치 않고 소민(小民)을 침요(侵擾)해 두루 족속(族屬)에까지 미쳤습니다. 두 고을의 수령(守令)은 마땅히 즉시 파직하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누누이 진달한 바가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니, 깊이 가납(嘉納)한다. 내가 이미 이삼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데, 본디 담략(膽略)이 있어 이르는 곳마다 모두 치적(治績)이 으뜸가니, 말을 늘어놓으며 욕하고 헐뜯은 것이 온당한 줄 알지 못하겠다. 또 수재(守宰)가 봉변(逢變)한 것은 비록 기강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수목(守牧)138) 의 관원을 만약 그 적임자(適任者)를 얻는다면 도적이 양민으로 변한 일이 옛 역사에 환하게 기재되어 있다. 지금은 어진 관리를 뽑아 선치(善治)를 이루는 것이 옳지 효시를 청하는 것은 과중한 듯하다. 여타의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의논하고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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