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3권, 경종 1년 1721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2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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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신유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창집(金昌集) 등이 입진(入診)을 계청(啓請)하기를,
"신 등이 입진을 계청할 때마다 언제나 ‘현재 나타나는 증후(症候)가 없다.’고 하교(下敎)하시니, 비록 감히 번번이 억지로 청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야흐로 더운 절기(節氣)라 조리(調理)하고 보전(保全)하는 도리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즉시 여러 의관(醫官)과 함께 입진하여 맥도(脈度)를 자세히 진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아무런 일이 없다는 구실로 허락하지 않았다. 김창집 등이 다시 청하니, 임금이 이튿날 입진하라고 명하였다.

 

5월 2일 임술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창집이 여러 의관(醫官)들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여 증후를 진찰하고 침을 맞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김창집이 이어 임형(任泂)이 청주(淸州)와 덕산(德山) 두 고을의 수령(守令)을 소론(疏論)한 것을 들어 파출(罷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친정(親政) 때의 주서(注書) 및 상서원(尙瑞院)의 관원(官員)은 관례상 6품(品)으로 승진되는데도 이번에 전교(傳敎)가 없었음을 말하니, 임금이 6품으로 승진하도록 명하였다.

 

5월 3일 계해

미시(未時)에 햇무리하고, 유시(酉時)에 햇무리하였다.

 

좌승지(左承旨) 이정익(李禎翊)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선롱(先壠)139)  으로 돌아서 간다며 서계(書啓)하니, 임금이 온화한 유시(諭示)로 답을 내리고 이어 말[馬]과 요전상(澆奠床)을 주도록 명하였다.

 

5월 4일 갑자

진시(辰時)부터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사직단(社稷壇)에서 비를 빌었다.

 

5월 5일 을축

부교리(副校理) 조문명(趙文命)이 소를 올려 붕당(朋黨)의 폐단을 논하기를,
"신이 들으니 사람을 잘 치료하는 자는 먼저 그 상해(傷害)를 받는 근본을 다스리고, 나라를 잘 치료하는 자는 먼저 병을 얻게 된 근원을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나라가 병을 얻게 된 근원을 찾아본다면 오로지 붕당이 바로 그것이니, 오늘을 위한 계책으로서 붕당을 타파하는 한 가지 일보다 나은 것이 없을 따름입니다. 대저 붕당의 해(害)가 되는 것에는 그 조목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시비(是非)가 참되지 않음, 사람을 씀이 넓지 않음, 기강(紀綱)이 서지 않음,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음, 염치(廉恥)가 깡그리 없어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제(救濟)하는 길은 임금이 그 표준을 세움에 지나지 않으니, 신은 청컨대 조목별로 진달하고 풀어서 말하고자 합니다.
무엇을 일러 시비(是非)가 참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당론(黨論)이 생긴 이래로 논의(論議)마다 각각 존숭(尊崇)하는 바가 있어서 갑(甲)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을(乙)이 그르다고 하고 을이 옳다고 하는 것은 갑이 그르다고 하며, 그 옳다고 하는 바에 대해서는 한 가지 선(善)으로써 백 가지 허물을 가리고 그 그르다고 하는 바에 대해서는 하잘것 없는 허물로 큰 덕(德)을 버립니다. 따라서 오늘날 의리(義理)는 어두워 막히고 인심(人心)은 좋지 못한 데 빠져 각각 피차(彼此)가 다투는 바를 전적으로 득실(得失)의 기관(機關)으로 삼으니, 한편이 나아가면 한편이 물러나 가면 갈수록 격화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각자 한때의 왕언(王言)을 권위로 빙자하고, 혹은 경전(經傳)의 가르침을 쓸모없는 것처럼 버리며 새로운 학설(學說)을 지어내어 개도(開導)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억지로 국시(國是)를 단정해 뭇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이를 주장한 자가 먼저 표지(標識)를 세워 〈벼슬길이〉 통하기도 하고 막기도 하면서 위세를 부리고 꾸짖고 욕하면서 협박하므로,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확 쏠리지 않음이 없습니다. 간혹 스스로 〈명절(名節)을〉 좋아할 줄 아는 자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추조(推助)140)  하는 가운데 들어가지 않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색목(色目)이 한 번 정하여진 뒤부터는 다시는 하나의 길로 출입할 수가 없어서 견문(見聞)에 가리워지기 때문에 그 호오(好惡)의 본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드뭅니다. 따라서 언의(言議)의 교격(矯激)141)  은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풍속의 괴패(乖敗)142)  는 지금 이때도 다르거니와 달을 넘기면 또 더욱 같지 않으니, 참으로 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일러 사람을 씀이 넓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옛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재능에 따라 사람을 썼고 한 가지 규례(規例)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론이 생긴 이래로 문호(門戶)를 나누고 갈라 어떤 사람은 등용하고 어떤 사람은 물러나게 하며 이쪽 사람이 들어오게 하고 저쪽 사람은 나가게 합니다. 취하고 버림을 전형(銓衡)할 즈음에 그 사람의 현명 여부는 묻지 않고, 단지 언의(言議)가 자기와 다르냐 같으냐만 헤아릴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한 집안에서도 마치 화외(化外)143)  와 같이 보고, 중대한 공기(公器)를 손아귀에 쥐고 제 물건처럼 여깁니다. 여태까지의 배대 쌍집(配對雙執)하는 규정은 진실로 이미 놀랄 만한 것이었으나, 지금 입장에서 본다면 곧 상고(上古)의 일과 같습니다. 승진 발탁된 사람은 서로 관련이 있는 친속(親屬)이 아닐 경우 거개 그 문(門)에 드나드는 사람에서 나오고, 대각(臺閣)에 혹시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섞여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물색(物色)하여 배의(排擬)144)  하니, 모두 묘리(妙理)가 있습니다. 그 치켜세우고 깎아내림이 모두 한 무리의 약속에서 나오는 까닭에 낮은 품계(品階)와 보통 벼슬의 임용은 응견(鷹太)의 무리를 위한 것이 되어 방자하게 요로(要路)에서 설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문학(文學)과 재화(才華)로서 인망(人望)이 높은 사람은 전야(田野)에서 살며 방황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 논의(論議)의 본령(本領)을 구명(究明)한다면 중도(中道)를 벗어나 마땅함을 잃은 것은 피차가 다를 것이 없고, 그 입심(立心)의 편파(偏陂)를 논한다면 취멱(吹覔)145)  과 경알(傾軋)이 꼭같은 투식(套式)입니다. 번갈아 나아가고 벌갈아 물러나는 즈음에 그 득실(得失)이 나타난 흔적을 찾아본다면 간혹 이쪽이 저것보다 나은 경우가 있으나, 요컨대 악역(惡逆)에 관계되거나 윤상(倫常)을 범한 것이 지난날의 사람과 같지 않다면 일반의 사류(士類)가 되는 데 해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영화를 탐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가 힘써 스스로 은총(恩寵)과 작록(爵祿)을 독차지하고자 하며 오로지 다른 사람이 움켜 빼앗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드디어 억지로 명목(名目)을 만들고 사(邪)와 정(正)으로 서로 이름을 지어 반드시 나라의 절반의 사람을 들어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로 돌리려 한 것입니다. 진실로 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일러 기강(紀綱)이 서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당론이 생긴 이래로 애증(愛憎)이 편벽되어 사의(私意)가 이기게 되고 요행(僥倖)의 문이 열려 공도(公道)가 끊어졌으며 상벌(賞罰)이 밝지 못하여 호오(好惡)가 정상(正常)을 잃었습니다. 오늘날 윗사람은 능히 통섭(統攝)하지 못하고 아랫사람은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고을 백성은 수재(守宰)에 대하여 곧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있는데도 방자하게 구타(毆打)하고, 도적이 대낮에 횡행하되 혹 군병(軍兵)의 위세를 부리며 살인과 약탈을 자행합니다. 세상에서 일컫는 유상(儒相)을 일개 무부(武夫)가 어린애처럼 부르고, 나라의 대신(大臣)은 합계(合啓)하는 것이 아닌데도 노예(奴隷)처럼 꾸짖습니다. 관절(關節)146)  은 공공연히 행해지고 간촉(干囑)147)  은 풍습을 이루어, 각사(各司)의 조례(皂隷)는 지극히 미천(微賤)한데도 한 자리의 결원(缺員)이 있으면 대신(大臣)이 그것을 구걸하고, 어사(御史)의 염문(廉問)은 지극히 엄비(嚴秘)한데도 수계(修啓)148)  할 즈음에 사사로운 서찰(書札)이 혹 오고 갑니다. 습상(習尙)149)  은 물결처럼 무너지고 변괴(變怪)가 백출하니, 이와 같은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실로 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일러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무릇 정령(政令)이 시행되는 사이에 있어서는 반드시 대각(臺閣)으로 하여금 논하게 하고 초야(草野)로 하여금 말하게 하여 가부(可否)를 서로 가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론이 생긴 이래로 국정(國政)을 맡은 사람은 거개가 자용(自用)150)  하기를 좋아하고 여러 사람에게 묻기를 꺼리며,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남이 나를 비평함을 싫어하여, 위에서 제멋대로 호령하되 다른 사람은 감히 그 장점과 단점을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날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진실로 이미 앞을 가리고 있는데다 강한 이웃과 굳센 적(敵)이 좌우에서 엿보며, 득실(得失)의 염려가 또한 뒤에서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절이나 단속을 더해 마치 계엄(戒嚴)하는 것처럼 하고, 혹시라도 지적하여 배척하는 말이 국외자(局外者)에게서 나오면 ‘경알(傾軋)이다.’, ‘괴란(壞亂)이다.’ 하며 칼날을 드러내어 맞고 화살을 한 곳에 모아 겨냥하는데, 오로지 그것이 혹시라도 불현듯 뛰쳐 들어올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장(疏章)을 봉입(捧入)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새로 만들고는 이것을 빙자해 가로막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나라를 망치는 첫째 조짐입니다. 지금은 가로막고 저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관사(官師)151)  가 서로 규간(規諫)하는 것도 아울러 없애버렸으니, 어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일러 염치(廉恥)가 모두 없어졌다고 하겠습니까? 당론이 생긴 이래로 예양(禮讓)이 점점 무너지고 경탈(傾奪)152)  이 풍습을 이루어 무릇 모두 진퇴(進退)에 관계되는 바와 득실(得失)이 있는 바에는 꺾어 빼앗지 않음이 드뭅니다. 오늘날 온 세상 사람들은 미친듯 눈을 부라리며 악착같이 굴다가 구하는 것을 못하게 되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엿보며 기회를 노리고 때를 타려 하는데, 이익이 성상의 뜻을 격동시키는 데 있으면 임금의 뜻을 맞추고, 이익이 당로(當路)를 쳐서 쫓는 데에 있으면 당로를 공격합니다. 따라서 무릇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면 그 극도의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습니다. 한편 잃는 것을 근심하게 되면, 왼쪽으로 주먹질을 하고 바른쪽으로 발길질을 하며 앞을 막고 뒤를 가리는데, 이익이 아첨하여 군상(君上)을 기쁘게 하는 데 있으면 종기(腫氣)와 치질(痔疾)도 빨고, 이익이 총명(聰明)을 막아 가리는데 있으면 언로(言路)를 막습니다. 따라서 다만 얻고 잃음이 있는 것만 알 뿐 사대부(士大夫)에게 염우(廉隅)란 한 가지 절조(節操)가 있음은 알지 못합니다. 아!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근심하는 자가 진실로 소인(小人)이라면 〈얻은 다음에〉 그것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도 또한 소인이 아니겠습니까? 췌마(揣摩)153)  하고 경영(經營)해 반드시 빼앗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진실로 좋은 풍습이 아닙니다만, 염치없는 것도 무릅쓰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조금도 꺼림이 없는 것 또한 일을 벌여 놓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공 부자(孔夫子)의 두 글자의 제목(題目)154)  에서 모두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시비(是非)를 억지로 정하자 공의(公議)가 막히고, 용사(用舍)가 지나치게 편벽되자 어진이를 등용하는 길이 막혔으며, 기강이 서지 않자 군주의 위엄이 능히 밑에서 펴지지 않고, 언로가 열리지 않자 아랫사람의 뜻이 능히 위로 통하지 못했으며, 염치의 절조(節操)가 없어지자 한 세상의 풍화(風化)가 크게 무너졌습니다. 무릇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정치를 해치는 큰 좀이자 나라를 병들게 하는 밑뿌리입니다. 그 이유를 구명한다면 오로지 하나의 ‘사(私)’ 자가 빌미가 되는데, 이른바 붕당이란 바로 사의(私意)의 소굴입니다.
아! 붕당의 화(禍)가 옛날엔들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거개는 모두 어진이와 간사한 자가 유유 상종(類類相從)하여 그 구분이 확실하였으니, 한(漢)나라의 남부(南部)·북부(北部)155)  와 송(宋)나라의 원우(元祐)·희풍(熙豐)156)  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오늘날의 당(黨)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선악(善惡)과 우열(優劣)이 그다지 다름이 없고 음양(陰陽)과 흑백(黑白)이 그다지 분별이 없어서 장차 한 당을 들어서 모두 쓰더라도 반드시 모두 현인(賢人)은 아닐 것이며, 한 당을 들어서 모두 버리더라도 반드시 악인(惡人)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두 편의 사람을 섞어 써서 균등하고 공평하도록 하는 데 힘쓴다면, 범 충선공(范忠宣公)의 조정(調停)의 의논157)  이 또 구차한 결과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끝내 표준을 세우는 방도(方道)를 다함만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른바 표준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방도가 없고 다만 성학(聖學)에 힘쓰는 데 있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소서. 신은 이 일이 반드시 나라를 망치는 여계(厲階)158)  가 될 것임을 깊이 알고 있기에 감히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만일 성상(聖上)께서 신의 소(疏)를 조당(朝堂)에 내려 보이시고, 이어 밝은 유지(諭旨)를 내려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함으로서 상하(上下)의 신서(臣庶)들이 환하게 성상의 뜻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면, 표준이 서는 곳에 뭇사람들이 모두 빨리 내달려 바람이 움직이듯 신속할 것이니, 얼마 안가 〈악인(惡人)이 변하여 선인(善人)이 되는〉 경사(慶事)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로 진달함이 지극히 간절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니, 어찌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조문명의 시폐(時弊)를 소진(疏陳)한 것은 대체(大體)로 좋은 편입니다만 별다른 기이한 계책이 없으니, 또한 복주(覆奏)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범연(泛然)히 ‘알았다’고 답하였다. 붕당(朋黨)의 화(禍)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에서 비롯되었는데, 숙종(肅宗)경신년159)   이후 또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명칭이 생겨나더니, 다시 회니(懷尼) 사생(師生)의 논변(論辨)160)  으로 바뀌어 각각 표방(標榜)을 세워 서로가 공격하고 이어 국면(局面)이 진퇴(進退)하는 바탕을 이루었으니, 춘추(春秋)에 의전(義戰)이 없다161)  고 이를 만하다. 근년 이래로 시배(時輩)가 먹은 마음과 처리한 일은 변모(弁髦)162)  의 본색(本色)으로 오로지 소인(小人)의 수단을 썼으므로, 음양과 흑백이 환하여 분변(分辨)하기 쉬웠다. 그런데 조문명은 평일의 지론(持論)이 화평을 위주로 하는 데 힘써 깊이 붕당을 배척했기 때문에 그 폐단을 낱낱이 논하고 근원을 파헤쳐서 말이 매우 정확하였으며, 그 피차(彼此)의 정태(情態)를 지적해 낸 것은 더욱 절실하였다. 다만 헤아려 비교하기를 매우 괴롭게 여긴 듯하여 시배가 제멋대로 굴며 나라를 그르친 죄를 능히 지적하여 진달하며 통렬하게 배척하지 못하였으니, 제류(儕流)가 애석(哀惜)하게 여겼다.

 

5월 7일 정묘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조문명(趙文命)의 소어(疏語) 때문에 서로 잇따라 차자(箚子)를 올려 해면(解免)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유시하였다.

 

대신(大臣)을 보내어 태묘(太廟)와 종사(宗社)에 비를 빌었다. 비를 비는 일을 친히 행하는 것은 구례(舊例)인데, 임금이 병이 있어 대신 거행하게 하였으니, 뭇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억울하게 여겼다.

 

5월 8일 무진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소결(疏決)163)  하였으니, 가뭄을 근심했기 때문이었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최석항(崔錫恒)이 시수안(時囚案)164)   및 도류안(徒流案)165)  을 가지고 이름을 하나하나 주달(奏達)하니, 임금이 그 죄범(罪犯)의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혹은 용서하고 혹은 그대로 두었다. 최석항이 김시환(金姶煥)의 일을 진품(陳稟)하고 소석(疏釋)을 청하자, 이건명이 물리치고 이어 말하기를,
"김시환이 과연 소회(所懷)가 있었다면 이해(利害)를 계산하지 않고 마땅히 바른 대로 진달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날의 일은 솔직한 도리에 매우 부족함이 있었으며, 배소(配所)에 이른 지도 또한 몇 달 지나지 않았으니, 경솔하게 놓아주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전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최석항이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김시환의 전후의 소(疏)가 국시(國是)를 변란(變亂)하였는데도 좋은 곳에 편배(編配)하였으니, 이미 투비(投畀)의 본의(本意)에 어긋납니다. 그런데도 최석항이 근거없는 말로 구해(救解)하여 감히 용서해 놓아주기를 청하였으니,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경상도(慶尙道)의 김해(金海) 땅에 신(愼)가 성(姓)을 가진 사람의 아내 강씨(姜氏)는 일찍 홀로 되어 의지할 데 없이 단지 아들 하나만을 두고 길쌈으로 호구(糊口)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김대진(金大進)의 아내가 삼베짜는 일로 유인(誘引)하여, 강씨(姜氏)가 삼을 받아 가지고 돌아올 즈음에 김대진이 길에서 기다리다가 불쑥 튀어나와 핍박하며 욕을 보이려 하였습니다. 강씨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마을 사람이 소리를 듣고 나와 구(救)하였으므로 겨우 그 욕을 면하였습니다. 강씨가 관청(官廳)에 보고하여 처치할 것을 청했는데, 본고을 형리(刑吏)의 무리가 김대진의 뇌물을 많이 받아 중간에서 가로막고 스스로 호소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강씨가 분하고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돌아가 그 아이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내가 구차하게 살아 있는 것은 너 때문인데, 이제 이런 변을 당하여 죽지 않는다면 나의 심사(心事)를 드러내 보일 수가 없다.’ 하고, 그 아이를 친족에게 맡긴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온 도(道)의 사람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고 그 절개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듣건대 지금 김대진을 김해의 옥(獄)에 가두었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관리의 무리가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일부러 그 옥사(獄事)를 늦춘다고 하니, 마땅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따로 강명(剛明)한 관원을 정하여 엄중히 구핵(究覈)을 더하여 그 원통함을 씻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 여러 도(道)에서 죄수(罪囚)를 빨리 판결해 체옥(滯獄)의 폐단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수찬(副修撰) 이중협(李重協)이 양역(良役)의 폐단을 상세히 진달하고, 이어 자주 강연(講筵)을 열어 치도(治道)의 계책을 자문하여 덕(德)으로 나아가고 도(道)를 세우는 근본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마음에 유의하겠다고 답하였다. 이중협이 다시 말하기를,
"효령전(孝寧殿)의 제향(祭享)을 섭행(攝行)한 것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이 일에 대해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전하(殿下)의 성효(誠孝)로써 꼭 아랫사람의 권면(勸勉)을 기다릴 것은 없고, 이 일은 전하(殿下)께 반드시 억지로 하기 어려운 질환(疾患)이 있기 때문이었겠지만, 인군(人君)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은 만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바이고 후사(後嗣)의 준칙(準則)이 되는 것이니, 진실로 절목(節目) 사이의 일이라 하여 넘겨 버릴 수가 없습니다. 또 외인(外人)은 전하의 질환을 알지 못하여 실로 억울하게 여기고 의혹(疑惑)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니, 금후로는 삭망(朔望)의 은전(殷奠)166)  은 또한 반드시 몸소 행하시고, 만약 질환이 있어 억지로 하기 어려운 때에는 또한 명백히 하교(下敎)하시어 의혹을 풀게 하소서."
하고, 김창집 등도 또한 이 일에 대해 말하니, 임금이 유의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이튿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효령전은 은전(殷奠)을 섭행하게 한 것은 실로 다리가 아팠기 때문에 몸소 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 항상 슬프고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어제 연중(筵中)에서 부수찬 이중협은 옥서(玉署)167)  의 승후(承候)168)  하는 신하로서 나의 병 증세를 알지 못한 나머지 누누이 번거롭게 진달했는데, 말이 지극히 정성스러웠기에 나의 마음이 매우 부끄러웠고, 비록 억지로 하고자 하였으나 그 형세상 할 수가 없었다. 이 같은 나의 허물을 중외(中外)의 여러 신하들은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구례(舊例)에 소결(疏決)하는 날은 의금부(義禁府)와 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이 모두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날 형조 판서(刑曹判書) 유집일(兪集一)이 신병(身病)이 있다는 핑계로 소명(召命)을 어기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형조의 소결을 행할 수가 없었다.

 

5월 10일 경오

밤 2경(二更)에 달무리하였다.

 

5월 11일 신미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성묘(省墓)하고 교서(郊墅)169)  로 돌아와 다시 소를 올려 해면을 원하였다. 이어 기호(畿湖)의 민폐(民弊)를 진달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제 신이 경유(經由)한 각 고을은 마을이 폐허가 되어 쓸쓸해졌고, 평소 부유하고 충실하던 마을이 아주 쇠잔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물어보면, ‘모두 죽었습니다.’, ‘도망가 흩어졌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계사년170)   이후로 기근(飢饉)이 든 끝에 무술년171)  의 혹독한 여역(癘疫)이 겹쳐 거의 모든 백성이 없어졌는데도, 도고(逃故)한 군민(軍民)에게서 거둘 것을 모두 일족(一族)에게서 거두고, 족징(族徵)으로도 그치지 않아 이징(里徵)에 이르니, 강자(强者)는 흩어져 도적이 되고 약자(弱者)는 중이나 노비가 되어 양민(良民)이 거의 절종(絶種)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삶을 즐기는 뜻이 없어 양전(良田) 미답(美畓)을 분토(糞土)처럼 버리니, 한 사람이 열 사람의 역(役)에 응하는데 그 형세상 어찌 이렇게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는 별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절생(節省)에 힘쓰시고 서울의 각 관사(官司)의 용도를 적절하게 헤아려 수량을 줄인 연후에 족징(族徵)의 정령(政令)을 조금 늦추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행하지 말도록 각별히 수령(守令)을 신칙(申飭)해 농사를 권장(勸奬)하는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놀고 먹는 무리가 모두 논밭에서 일하고 물고(物故)의 대역(代役)이 점차 보충되어 세월이 흘러간다면, 그래야 복구(復舊)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각 고을의 진정(賑政)은 곡식이 적은데도 백성은 많아, 보리가 채 수확되기도 전에 진휼이 먼저 끝이 납니다. 보리 수확 뒤의 진휼도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각 고을의 곡식이 바닥이 나서 손댈 곳이 없으니, 바라는 것은 오직 저치미(儲置米) 중에서 남아 있는 것 및 채 상납(上納)하지 않은 대동미(大同米) 중에서 진휼을 위해 남겨둔 것뿐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량(商量)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환상(還上) 보리는 결코 정해진 대로 거둘 수 없으니, 청컨대 반을 갈라 벼로 환산하고 가을을 기다려 거두어 들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진달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전부터 위로는 어공(御供)에서 아래로는 여러 관사(官司)에 이르기까지 용도(用度)를 이미 많이 줄이고 절약했는데도 징포(徵布)의 폐단은 오히려 전일과 같으니, 위 문공(衞文公)의 대포(大布)·대백(大帛)172)  과 같은 일대 경동(警動)과 일대 변통(變通)이 없다면, 사소한 재감(裁減)으로는 끝내 실효(實效)가 없을 것입니다. 대저 양역의 폐단은 말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잘 변통하는 계책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물고(物故)의 대역(代役)을 만약 즉시 충정(充定)하지 못하다면 백골 징포(白骨徵布)의 폐단도 구제하여 바로잡을 수 없으니, 또한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폐단의 근원을 깊이 구명(究明)하소서. 또 역대(歷代)의 규제(規制)를 상고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자문하시어 반드시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을 생각하신 뒤에야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과 지방의 저축이 먼저 이미 바닥나서 달리 추이(推移)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상납하지 않은 대동미는 본청(本廳)의 형세(形勢)로 보아 결코 남겨 두기를 허락하기 어려우나, 저치미(儲置米)는 앞으로 수요(需要)에 응(應)하는 것 외에 혹 남는 수량이 있다면 개색(改色)하여 나누어 주고 가을에 이르러 거두어 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모맥(牟麥)의 환상(還上)은 본디 민간(民間)의 종자를 위한 것이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의 전결(田結)을 참작하고 헤아려 종자로 만들 만한 것을 덜어낸 뒤 그 밖의 것은 혹은 절반을 혹은 3분의 1을 벼로 환산하여 거두어 들이게 하는 것이 또한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태억(趙泰億)이 소(疏)를 올려 영남(嶺南)의 인재(人才)를 거두어 쓰기를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남은 본디 인재의 부고(府庫)로 일컬어졌으니, 국조(國朝)의 융성(隆盛)한 시대에 조정에 가득한 공경(公卿)이 대부분 영남 사람이었습니다. 근래에 인재의 배출(輩出)이 진실로 옛만 같지 못하지만 국가에서 거두어 쓰는 것도 또한 매우 드물어서, 영남 사람으로 문과(文科)에 오른 자가 많은 경우 80여 명에 이르는데도 벼슬을 얻어 녹(祿)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마땅히 선조(先朝) 때의 거두어 녹용(錄用)하라는 명을 본받아 속히 전조(銓曹)로 하여금 널리 찾아 물어서 재질(才質)에 따라 조용(調用)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고려(高麗)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주서(注書) 길재(吉再)는 모두 영남 사람이며, 선정신(先正臣)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종직(金宗直)·정구(鄭逑)·정온(鄭蘊)·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의 자손이 대대로 영남에 살고 있으니, 또한 마땅히 조금 존문(存問)하여 찾고 속히 수용(收用)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이언적의 후손을 세우고,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곽준(郭䞭)의 후손을 거두어 쓰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신라(新羅) 때의 여러 능(陵)이 황폐해져 풀이 무성하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마음이 상(傷)하게 만들며, 48 왕릉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대부분입니다. 신라왕의 시조전(始祖殿)의 경우는 곧 우리 세종(世宗) 때에 세운 것으로, 봄·가을의 중월(仲月)173)  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경건하게 향사(享祀)하니, 성조(聖祖)의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가 지극하였습니다. 유독 한스러운 것은 전수(典守)할 사람이 없어 매양 향사(享祀) 때면 시골 사람을 시켜 일을 맡아 보게 하니, 사체(事體)에 미안합니다. 평양(平壤)에 있는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과 마전(麻田)의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숭의전(崇義殿)의 경우 모두 그 자손을 참봉(參奉)에 임명하여 그제사를 받들되 옛날 삼각(三恪)174)  의 의전(儀典)과 같이 했습니다. 세종 때의 사당을 세워 치제(致祭)한 것은 성의(聖意)를 둔 바 있는데, 왕자(王者)의 사당에 시골 사람이 일을 맡으니, 끝내 구간(苟簡)한 데로 돌아갑니다. 만약 숭인전과 숭의전의 규례(規例)에 의해 전호(殿號)를 게시(揭示)하라 명하고, 참봉 두 사람을 차출(差出)하되, 혹은 신라왕의 자손으로 채우거나 혹은 유식(有識)한 선비로 임명하여 관원(官員)의 복색(服色)으로 전묘(殿廟)에 천헌(薦獻)175)  하게 한다면, 또 이들로 하여금 때때로 여러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고 추목(芻牧)을 금하게 하며, 또한 경순왕(敬順王)의 유묘(遺廟)도 보살피게 한다면, 국가에서 경건하게 하는 도리에 더욱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사(疏辭)가 진실로 매우 마땅함을 얻었다. 전조(銓曹)와 예조(禮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영남의 문관 및 선현(先賢)의 후예들은 매번 재질(才質)에 따라 조용(調用)하게 했지만 정관(政官)이 색목(色目)에 구애받고 또 사사로운 청탁(請托)을 따라 끝내 실효가 없었으며, 조태억의 소청(疏請)도 또한 빈말로 돌아갔으니, 정말 개탄스럽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명웅(兪命雄)이 소를 올려 해면(解免)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조(工曹)에 예전부터 강선(江船)에 수세(收稅)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유명웅이 일을 까맣게 알지 못하고 있다가 몇 달 동안 다시 그 세금을 거두었다. 그런데 낭관(郞官)을 보내어 강의 위아래를 따라가며 있는 수대로 샅샅이 찾아내니, 고깃배나 작은 배 같은 것도 또한 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리(下吏)가 이를 빌미로 농간을 부리고 세전(稅錢)을 마구 거두어 모두 사용(私用)으로 돌리니, 사람들이 떠들썩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연중(筵中)에서 그 정상(情狀)을 아뢰어, 당랑(堂郞)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유명웅이 소를 올려 변명한 것이다.

 

5월 12일 임신

임금이 삼리혈(三里穴)과 절골혈(絶骨穴)에 침(鍼)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하의 관원들이 여러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여 다시 침맞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3일 계유

사간(司諫) 김제겸(金濟謙)이 소를 올려 조신(朝臣)이 소명(召命)을 어기는 잘못을 논하였다. 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 유집일(兪集一)을 파직할 것과, 봉교(奉敎) 권적(權𥛚)과 여선장(呂善長)을 논책(論責)할 것과, 전조(銓曹)를 신칙하여 경조(京兆)의 추관(秋官)을 택차(擇差)할 것과 예조(禮曹)로 하여금 능관(陵官)이 수직(守直)을 궐하는 폐단을 달마다 검찰(檢察)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묘당(廟堂) 및 전조(銓曹)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고 비답을 내리고, 유집일을 파직시키라 명하였다.

 

5월 15일 을해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를 해면(解免)하고, 이의현(李宜顯)으로 대신하였다.

 

5월 16일 병자

어사(御史) 어유룡(魚有龍)·조영세(趙榮世)·권익관(權益寬)·서종섭(徐宗燮)·이성룡(李聖龍)·조문명(趙文命)을 삼남(三南)의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어 보냈다.

 

5월 17일 정축

묘시(卯時)에서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5월 18일 무인

진시(辰時)와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다.

 

황일하(黃一夏)를 도승지(都承旨)로, 송상기(宋相琦)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관명(李觀命)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정소(李廷熽)를 지평(持平)으로, 이유(李瑜)를 정언(正言)으로, 박사익(朴帥益)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취로(金取魯)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척기(兪拓基)를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황일하는 용렬하고 비루하며 늙어 정신이 없는데도 분에 넘치게 재신(宰臣)의 반열(班列)에 올라 외람되게 청현(淸顯)에 통하니, 물정(物情)이 놀랍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 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답하였다. 그 소의 주된 뜻은 오로지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호소하고 공공연하게 제멋대로 무함하고 더럽히는 데 있었으니, 옳지 않음이 심하였다.

 

5월 19일 기묘

이에 앞서 제주(濟州)에서 청(淸)나라 사람 18명이 대정현(大靜縣)에 표박(漂泊)한 사실을 장계(狀啓)로 알리자, 비국(備局)에서 본도(本道)로 하여금 관례에 따라 차원(差員)을 정해 서울로 압송(押送)시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제 비로소 올라왔다. 또 청하기를,
"남별궁(南別宮)에 받아 두되, 금군(禁軍) 한 사람이 위군(衞軍)을 거느리고 따로 방비(防備)하여 지키며, 공궤(供饋) 및 입는 의복을 만들어 주는 일 등은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관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본사(本司)의 낭청(郞廳) 1원(員)과 말을 아는 역관(譯官) 몇 사람을 따로 정해 보내어 표류하여 온 실정(實情)을 다시 자세히 사문(査問)하고, 북경(北京)으로 들여보낼 때에는 반전은(盤纏銀)176)  을 관서(關西)로 하여금 예(例)에 의해 제급(題給)하게 하며, 의주(義州)에서 미리 봉성(鳳城)에 알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형조(刑曹)의 소결(疏決)을 행하였으니, 판서(判書) 이관명(李觀命)이 이제 비로소 명을 받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관명이 본조(本曹) 및 제도(諸道)의 죄인의 문안(文案)을 읽자 의금부(義禁府)의 전례와 같이 혹은 용서하고 혹은 그대로 두게 하였다.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충청 수사(忠淸水使) 박찬신(朴纘新)은 일찍이 군읍(郡邑)을 거치면서 오로지 탐도(貪饕)177)  만을 일삼았는데, 외람되게도 곤임(閫任)에 제수되니,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여덟 차례 비를 빌었으나 끝내 비가 오지 않았으므로, 북교(北郊)에서 또 기도하고 모화관(慕華館)의 못가에서 석척 동자 기우제(蜥蝪童子祈雨祭)을 지냈으며, 여염(閭閻)에서는 병류(甁柳)178)  하여 사흘 만에 그쳤다.

 

5월 20일 경진

비로소 비가 조금 내렸다.

 

권이진(權以鎭)을 승지(承旨)로, 권성(權𢜫)을 판윤(判尹)으로, 박사익(朴師益)을 헌납(獻納)으로, 김민택(金民澤)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5월 21일 신사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창집(金昌集) 등이 ‘소선(素膳)을 들지 말 것’을 계청하고, 또 왕대비전(王大妃殿)에 계품(啓稟)하여 상선(常膳)을 올릴 것을 권하게 하였으나, 임금이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명하였다. 대비전에 청하니, 권하여 올리라고 분부하였다. 연제(練祭)의 달이 이미 박두하였는데도 임금이 소선(素膳)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의원(尙衣院)에서 아뢰기를,
"이번 연제(練祭) 때 성상께서 입으시는 최복(縗服)의 포(布)는 마땅히 호조(戶曹)에서 진배(進排)179)                  해야 하는데, 포의 품질이 초상(初喪) 때에 쓴 것만 조금 못합니다. 때문에 연복(練服)을 점차 가벼운 것을 따라 개비(改備)해 진배할 일을 호조에 말하였터니, 호조에서 예서(禮書)를 상고하여 ‘참최(斬衰)의 의상(衣裳)은 매우 굵은 생포(生布)를 쓰고 연제의 최상(衰裳)은 마땅히 7승포(七升布)를 써야 하는데도 초상 때 이 포를 썼으니, 예제(禮制)에 어긋남을 면하지 못하였다. 마땅히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대공복(大功服)의 7승포를 쓸 것이고 상의원에서 이에 의해 직조(織造)하여 쓰는 것이 실로 예법의 뜻에 맞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복제(服制)의 절목(節目)에 관계되므로 예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더니, 예조에서는 ‘당초의 잘못 때문에 그대로 더욱 가는 포를 써서 예법의 뜻에 더욱 어긋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호조에서 간직하고 있는 광포(廣布)180)                  의 승품(升品)이 비록 혹 부족하더라도 한결같이 을묘년181)                  2월과 8월 및 기사년182)                   8월과 갑자년183)                   12월의 연제 때의 전례에 의하여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을묘년의 전례에 의하여 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자최(齊衰)의 연복(練服)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게까지 이르나, 비록 어복(御服)184)                  일지라도 최복(衰服)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별달리 가는 베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의 연복은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의거하여 행함이 마땅하고, 만약 옷소매의 길지 않은 것을 꺼린다면,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의거하여 폭(幅)을 이어서 써도 또한 예법을 어기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에게 물으소서."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일이 너무 총망중에 있었으므로 호조의 광포(廣布)를 가져와서 썼던 것입니다. 때문에 승수(升數)가 능히 예경(禮經)가 같지 못하였으나, 이미 선대왕(先大王)의 유교(遣敎)로 상하(上下)의 복제(服制)를 한결같이 고례에 따른다면, 초상 때 비록 혹 예를 잃었을지라도 연제 때는 예문(禮文)에 기재되어 있는 승수를 써야 마땅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는 말하기를,
"이번의 연사(練祀)를 시작으로 7승포(七升布)로 예문에 의거하여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2일 임오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의 유학(幼學) 손익룡(孫翼龍) 등이 소(疏)를 올려 증(贈) 지평(持平) 조임도(趙任道)의 사당(祠堂)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임도는 함안군(咸安郡) 사람인데, 곧 조여(趙旅)의 5대손(五代孫)입니다. 인조(仁祖) 때 경술(經術)과 행의(行誼)로 두 번 징벽(徵辟)185)   받아 대군 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기까지 했고, 효종(孝宗) 때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특별히 제수되었습니다. 현종(顯宗) 때 와서는 특별히 은혜로운 선유(宣諭)가 있었는데, ‘그대는 행의로 온 도(道)의 칭송을 받아 인사(人士)들이 추숭(推崇)하고 복종하는 바 되었고, 선조(先朝) 때부터 여러번 포록(褒錄)186)  을 입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이가 더욱 높으므로 마땅히 권장(勸奬)하는 도(道)를 시행하여야 하겠기에 이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옛 사백(賜帛)187)  의 규정을 본떠 쌀과 콩을 우급(優給)해 조가(朝家)에서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니, 그대는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조임도는 특별한 은전에 감격하여 봉장(封章)하여 진사(陳謝)하였는데, 큰 요지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세도(世道)를 근심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겸하여 14조(條)의 시무(時務)를 진달했는데, 비답하기를, ‘초야(草野)에 있는 몸으로 누누이 진계(陳戒)하여 말이 절실하고 뜻이 깊으니, 간절한 정성에 깊이 감탄한다.’고 하셨으며, 그가 죽자 본도(本道)의 많은 선비의 청으로 인해 특별히 지평(持平)에 추증(追贈)하였습니다.
조임도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우니 사랑과 공경이 함께 지극했습니다. 병자년188)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나가시던 날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했고, 사우(士友)를 만나면 서로 조문(弔問)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유회(有懷)’란 시(詩)에 이르기를, ‘겨울 밤 지루해 꿈을 못 이루고 홀로 장검짚고 있노라니 이 한(恨) 달래기 어려워라. 궁궐 문 두드려 호소함이 때가 어찌 늦었을까? 바다 넘어 고래 무찌르는 그 기상 드높을테지. 황하를 건너자니 어둠이 끝없이 펼쳐졌고, 태산에 오르려니 쌓인 눈길 가파르고 험준하네. 웅장한 마음 이루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만 재촉해 머리 가의 흰 터럭에 깜짝 놀라누나.’ 하였으니, 그가 시국에 마음아파하며 감개(感慨)했던 뜻의 그 일단(一端)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세 조정에서 예우(禮遇)한 유의(遺意)를 추념(追念)하시고 일방(一方)의 장보(章甫)189)  들의 지극한 소원을 생각하시어 그가 평소 살던 곳에다 사당을 세울 것을 특별히 명하신다면, 숭장(崇奬)하는 전례(典禮)와 작흥(作興)190)  하는 방도에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부터 복주(覆奏)하자 시행을 허락하였다.

 

5월 24일 갑신

인시(寅時)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대신(大臣)을 보내어 사직단(社稷壇)에서 비를 빌고, 경회루(慶會樓) 못가에서 석척 동자 기우제(蜥蝪童子祈雨祭)를 지냈다.

 

5월 25일 을유

유척기(兪拓基)를 사간(司諫)으로, 김고(金槹)를 집의(執義)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명하여 대신(大臣) 및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어영청(御營廳)의 중일(中日) 시사(試射) 때 유엽전(柳葉箭)을 말을 타고 달리며 표적[芻]에 다섯 번 맞혀 입격(入格)한 무리는 일찍이 선조(先朝) 때 언제나 직부(直赴)를 허락했는데, 오늘 단자(單子)가 정례(定例)대로 내렸으나 시상(施賞)하라는 명이 달리 없으므로 향우(向隅)의 탄식이 있는 듯하니, 모두 직부를 허락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제 한재(旱災) 때문에 이미 소결(疏決)을 행하였으나, 형조(刑曹)의 죄인은 모두 살인(殺人)과 저주(咀呪)로써 죄가 중대한 데에 관계되어 거론(擧論)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억울하고 원통한 단서(端緖)가 있는데도 굳게 감히 형벌을 받는다면 어찌 화기(和氣)를 손상시키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형조의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죄수의 문안(文案)을 자세히 고찰(考察)하게 하여, 혹시라도 의심나는 단서가 있어 생의(生議)에 붙일 만한 경우는 참작하여 처치하고, 외방(外方)의 옥수(獄囚)도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추관(推官)과 더불어 그 문안을 취하고 반복해 논란(論難)한 뒤 계문(啓聞)하여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여(李畬)는 본디 청검(淸儉)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3년상을 겨우 지내자 빈곤이 더욱 성하여 가속(家屬)이 거의 능히 보존하지 못하니, 청컨대 전조(銓曹)로 하여금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봄부터 여름까지 끝내 비가 내리지 않으니, 사람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군신(君臣) 상하의 정의(情義)가 막힌 형상입니다. 전하(殿下)께서 상중(喪中)에 계시어 신료(臣僚)가 자주 입시(入侍)할 수가 없었으므로 정지(情志)가 능히 널리 통하지 못한 나머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고, 김창집·이건명 등이 잇따라 자주 신료를 접하고 시사(時事)를 강구(講究)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또 유념(留念)하겠다고 답하였다.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남포 현감(藍浦縣監) 윤이신(尹以莘)은 노쇠(老衰)하여 일을 살피지 못한 나머지 한정(閑丁)을 뒤져 찾아내는 일을 해당 색리(色吏)의 조종(操縱)에 일임(一任)하고 간악한 아전이 포흠(逋欠)진 곡식을 관계없는 백성에게 뒤섞어 거두므로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라 생기고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경주 영장(慶州營將) 최도장(崔道章)은 거칠고 패악(悖惡)한 행실과 탐오(貪汚)의 정상(情狀)을 전번의 대계(臺啓)에 이미 모두 나열[臚列]하였는데도 성상(聖上)께서 윤종(允從)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풍문(風聞)이 사실과 틀림을 염려하신 것이겠으나, 남쪽에서 오는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그가 의기 양양하게 기세(氣勢)를 부려 조금도 징계되거나 두려운 마음이 없고 대관(臺官)에게 성을 내고 욕을 하면서 방종(放縱)과 패악(悖惡)이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5월 26일 병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다만 윤이신과 최도장의 파직만 명하였다.

 

5월 27일 정해

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서산 군수(瑞山郡守) 남세운(南世雲)은 정령(政令)이 해괴하고 망령되며 징렴(徵斂)이 가혹하고 번거로와 법에 어긋나는 일과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형조 좌랑(刑曹佐郞) 안구(安絿)는 모든 처사(處事)를 한결같이 하리(下吏)의 지휘만 따르고, 사송(詞訟)의 입락(立落)도 다만 뇌물의 많고 적은 것을 보고 처리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이재(李縡)가 소를 올려 군덕(君德)을 논하였다. 또 몸소 사전(祀奠)191)  을 행하고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기기를 청하였는데, 사의(辭意)가 절실하고 거의 수백 마디의 말에 이르렀다.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그 직임의 체차(遞差)를 허락하였다.

 

5월 28일 무자

임금이 옥당(玉堂)에 소대(召對)를 내리고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오랫동안 강연(講筵)을 폐(廢)한 끝에 비로서 소대의 명을 내렸으므로 뭇신하가 기뻐서 뛰지 않음이 없었으나, 글 뜻을 응답하고 수(數)를 갖추는 일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5월 29일 기축

이재(李縡)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계적(洪啓迪)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재로(金在魯)를 대사간(大司諫)으로, 민진원(閔鎭遠)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조도빈(趙道彬)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심택현(沈宅賢)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권상유(權尙游)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에서 비를 빌고 춘당(春塘)의 못가에서 석척 기우제(蜥蜴祈雨祭)를 지냈다. 남문(南門)을 닫고 북문(北門)을 열었으며 저자를 옮겼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보내어 지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옥상(玉常)을 강화부(江華府)에서 잡아왔다. 삼성 추국(三省推鞫)을 베풀어 복초(服招)를 받은 뒤 정법(正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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