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4권, 경종 1년 1721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2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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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신묘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신무일(愼無逸)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한림(翰林)으로 천거된 사람인 유필원(柳弼垣)을 파격적으로 6품에 올려 준 것은 후폐(後弊)와 크게 관계되니, 청컨대 그 명을 거두어 주소서. 또 덕산 현감(德山縣監) 최창억(崔昌億)을 공조 낭관(工曹郞官)으로 잉임(仍任)시킨 것은 잘못이니, 청컨대 공조의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한림으로 천거된 뒤에 혹 말썽이 있으면 변통하여 품계를 올려서 천직(遷職)시키는 것은 바로 구례(舊例)이므로 완천(完薦) 여부에 상관이 없는 일이다. 상신(相臣)이 이유(李瑜)의 일로 6품에 승진시킬 것을 진달하니, 어떤 이가 ‘유필원을 차별함은 마땅치 않다.’고 말하여 상신이 부득이 다시 사뢴 것인데, 대신(臺臣)이 기어코 차별을 두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세력 있는 음관(蔭官)이 피폐한 고을은 싫어하여 회피하고 잉임을 꾀함은 실로 고질적인 폐해이다. 덕산(德山)은 가난한 고을이고 공조 낭관도 긴요한 자리는 아니지만, 최창억은 중신(重臣)의 아들로서 잉임을 도모하여 얻었다는 비방이 있었기에 대관(臺官)이 논급한 것이다.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맨 먼저 가뭄이 극히 참혹한데 명특(螟螣)192)  마저 자주 발생하고 있음을 말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신칙(申飭)하여 무릇 강상(綱常)에 관계된 중죄인(重罪人) 이외의 모든 죄수를 석방하여 재이(災異)를 덜 수 있는 도리를 다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삼현 사우(三賢祠宇)의 영건(營建)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양역(良役)193)  의 폐단을 진달(陳達)하고 전조(銓曹)194)  로 하여금 특별히 양리(良吏)를 가려 보내어 백성의 곤궁을 덜어줄 것을 청하였고, 또 북병사(北兵使) 김중기(金重器)는 임명된 지 이미 오래이나 아직까지 부임하지 않고 있으니 교묘히 회피해 보려는 심산임이 틀림없고 게으르고 교만한 형적마저 보이니,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독촉하여 부임케 할 것을 논하였으며, 훈련 도정(訓鍊都正) 윤취상(尹就商)은 한강 밖에 물러나 있으면서 새로이 별장을 짓고 원림(園林)을 널리 차지함으로써 강촌(江村)에 폐를 끼치고 있으니, 마땅히 파직(罷職)시켜 경책(警責)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였다. 끝으로 경연(經筵)을 오래 폐지했던 것과 대관(臺官)의 계청(啓請)에 대한 윤허에 인색했던 점을 말하고, 이제부터는 자주 경연에 납시고 대관의 말을 빨리 윤허하여 온 나라 신민(臣民)의 큰 희망에 부응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하고, 묘당과 전조(銓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시행케 하였으며, 윤취상은 추고(推考)하도록 하였다.

 

6월 2일 임진

새벽부터 묘시(卯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임금이 홍문 관원(弘文館員)을 소대(召對)하였다

 

세초(歲抄)195)  를 행하였다. 임금이 전(前) 판서(判書) 이현일(李玄逸)과 전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등의 직첩을 되돌려 줄 것을 명하니, 승정원에서 작환(繳還)196)  하면서 아뢰기를,
"목내선과 이현일 등이 범한 바를 전하께서는 어떠한 죄명으로 여기시기에 이렇듯 뜻밖의 전교를 내리십니까? ‘불경(不敬)스럽고 불공(不恭)하다.’함은 목내선이 지어낸 말이며, ‘불순(不順)하여 스스로 인연을 끊었다.[自絶]’는 말은 이현일의 패역(悖逆)한 말입니다. 그들이 선후(先后)197)  를 무구(誣構)하고 핍박하여 죄가 윤기(倫紀)와 의리(義理)에 관계된 것은 실로 국인(國人)이 다 함께 절치 부심(切齒腐心)하는 바이므로, 선대왕(先大王)께서도 그들의 죄를 익히 아셨기에 여러 차례 대사(大赦)를 내렸으나 끝내 직첩을 되돌려 주는 은전(恩典)을 아끼셨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도 마땅히 준수(遵守)하실 바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겨울에는 대계(臺啓)를 바로 윤허하시기에 선지(先旨)198)  를 받들어 백성에게 이륜(彝倫)을 심는 성의(盛意)를 볼 수 있겠구나 하였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러한 명을 내리시니, 어찌 선후(先后)를 위하여 난적(亂賊)을 치죄(治罪)하는 의리에 부족한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그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록 관계된 바는 지극히 중하나 이미 백골(白骨)이 되어버린 사람이고 또 여러 차례 대사(大赦)도 겪었으니, 직첩을 되돌려 주는 것이 무슨 안될 일이 있겠는가? 빨리 정론(停論)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훈련 도정(訓鍊都正) 윤취상(尹就商)을 논핵하기를,
"윤취상은 자신이 무직(武職)을 맡고 있는데도 강교(江郊)에 편히 쉬면서 높은 정자(亭子)를 새로 세우고 원림(園林)을 넓게 개척하였습니다. 동성(東城)의 부석(浮石)은 바로 나라에서 유사시에 쓸 물건인데도 훈련원(訓鍊院)의 배와 수레를 사사로이 이용하여 공공연히 실어다가 몇 층계의 뜰을 쌓고, 또 주민들을 함부로 부림으로써 강촌(江村)에 해독을 끼치고 종들을 시켜 사람을 구타함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으니, 추고(推考)의 박벌(薄罰)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실어갔던 동성의 돌도 빨리 해당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전량을 찾아내도록 하소서."
하고, 또 목내선·이현일의 직첩을 되돌려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이어 해당 부서로 하여금 세초(歲抄) 때에 영구히 거론하지 말도로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으며 윤취상은 그의 함사(緘辭)199)  를 보고서 처리하겠다고 답하였다. 윤취상은 본래 노당(老黨)에 붙어서 빨리 장임(將任)에까지 임명되었는데, 중간에 다시 남과 뒤틀려 다소의 기미가 보이자 시정(時政)을 맡은 이들이 마음대로 하려고 하므로 윤취상이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조정을 피하여 남의 강변 농막을 사들여 기둥과 주춧돌을 수리하였다. 사헌부에서 계론(啓論)하고 김창집(金昌集)은 잡아다가 핵실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치석공(治石工)을 가두기까지 하였으나 모두 근거가 없었다. 이정소(李廷熽)가 또 딴 일을 논하였지만 의금부(義禁府)에서 범죄가 모두 무죄(無罪)로 돌아갔음을 복주(覆奏)하니, 임금이 의논하여 방송(放送)으로 처리토록 명하였다.

 

6월 3일 계사

새벽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김제겸(金濟謙)을 사간(司諫)으로, 박치원(朴致遠)을 장령(掌令)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응교(應敎)로, 이기진(李箕鎭)을 교리(校理)로, 이관명(李觀命)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태좌(李台佐)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현(縣)과 도(道)를 통해 상소하여 겸무(兼務)하고 있는 제거(提擧)의 해직(解職)을 청하고, 월봉(月俸)과 천장(遷葬)의 모든 비용을 제급(題給)200)  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 청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려 윤허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서 함께 오도록 하였다.

 

6월 4일 갑오

대사간(大司諫)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연복 절목(練服節目)의 간략하고 소홀한 잘못을 논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다시 품달(稟達)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에서 개부표(改付標)201)  하여 복주(覆奏)하였으나, 더러는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아니하므로 김재로가 앞서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다시 해조(該曹)에 내려 복계(覆啓)케 하여 시행할 것과 포대(布帶)의 마전202)   여부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절목에 이르기를,
"전하는 최복(衰服)과 상(裳)을 갈아 입되 일곱 새[七升]의 대공포(大功布)를 쓰고 마전은 않는다."
하였는데, 김재로의 소(疏)에 이르기를,
"상복의 제도는 본디 상하(上下) 귀천(貴賤)의 차별이 없는 바 친자(親子)일 경우의 상복에는 ‘마전하지 않은 최복(衰服)과 상(裳)을 갈아 입는다.’라고만 말하고, 새수[升數]는 말하지 않았으며, 문무 백관의 상복에는 ‘최복과 상을 갈아 입는다.’라고만 말하고 새수나 ‘마전하지 않는다[不練]’는 두 글자가 없으니, 원절목(元節目)에 당초 분명히 밝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의혹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하니, 예조에서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改付標)하여 복계(覆啓)하였다.
"전하의 요질(腰絰)은 갈(葛)을 쓰고 삼중 사교(三重四絞)203)  한다."
하였는데, 김재로의 소에 이르기를,
"숙마(熟麻)란 말이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있기는 하나 갈(葛)이 없을 경우 대용(代用)한 물건이니 마땅히 먼저 고례(古禮)를 말하고 다음에 대용(代用)을 말해야 합니다. 비록 숙마를 대용한다 하여도 마땅히 삼중 사고(三重四股)204)  라 하여야 하는데, 이번에는 친자(親子)와 백관(百官)의 상복에 갈질(葛絰)은 말하지도 않고 바로 숙마 요질(熟麻腰絰)이라 썼으며, 또한 삼중 사고(三重四股)는 말하지도 않았으니, 마땅히 숙마를 갈(葛)이라 고치고, 또 삼중 사고와 갈(葛)이 없을 때 숙마를 쓴다는 말 등을 주(註)에 달아야 한며, ‘교자(絞字)’는 잘못된 것이니 ‘고자(股字)’로 고쳐야 합니다. 갈질(葛絰)을 다듬어 쓰느냐 생갈(生葛)로 쓰느냐 하는 것은 선유(先儒)들의 의논이 각기 다르지만 예(禮)의 본뜻으로 생각해 보면 치갈(治葛)을 씀이 생갈을 쓰는 것보다는 점차 경(輕)하여지는 뜻이 있으므로 치갈을 쓴다는 말이 옳을 듯하니, 마땅히 상하(上下)의 상복에 ‘치자(治字)’를 써넣어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는 합니다마는, 사교(四絞)의 ‘교자(絞字)’는 《예서(禮書)》에도 있고 전후의 등록(謄錄)에도 모두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대로 두어도 크게 잘못이 없으며, 전하의 요절(腰絰)은 갈(葛)을 쓴다는 그 ‘갈자(葛字)’ 위에 ‘치자(治字)’를 써넣어야 한다는 점은 친자목(親子服) 이하는 이미 숙마를 쓴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써넣지 않아도 되리라 봅니다."
하였으나, 뒤에 김재로의 재소(再疏)로 인하여 모두 소사대로 개부포(改付標)하였다. ‘관영(冠纓)’에 대하여 김재로의 상소에 이르기를,
"《예경(禮經)》에는 다만 참최(斬衰)의 관영(冠纓)은 승영(縄纓)으로 한다고만 하였지 관을 마전하고 관영을 바꾼다는 문귀는 없으며, 교대(絞帶)205)  를 연제(練祭)206)  를 치루고는 베[布]로 바꾼다는 것도 경문(經文)이 아닙니다. 그러니 소설(疏說)207)  에만 의거한다면 승영(縄纓)을 포영(布纓)으로 바꾼다는 것은 충분히 방조(傍照)208)  가 되지만 베를 마전하는지의 여부는 대신(大臣)들이 수의(收議)할 때에 거론도 되지 않았는데 절목에는 연포(練布)로 한다 하였으니, 관을 이미 마전했다면 관에 딸린 것도 아마 마땅히 마전하여야 할 것이며, 관을 바치고 있는 베도 관영과 같이 마전하여야 할 것으로 보는데, 절목(節目)에는 원래 나오는 곳이 없으니, 마전하는지의 여부를 명백히 강정(講定)하여 연관(練冠) 밑에 주(註)를 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예조의 복계(覆啓)에는 소사에 따라 연포(練布)로 한다고 첨주(添註)하였다. ‘관의 승수(升數)’에 대하여 김재로의 소사(疏辭)에 이르기를,
"고례(古禮)에는 ‘관포(冠布)의 승수(升數)는 참최와 상(裳)보다는 약간 가느다란 베[細布]로 한다.’고만 하였고, 지금은 비록 우제(虞祭)를 치른 뒤에 변제(變制)한다는 한 대목이 없기는 하나 소상(小祥) 때의 참최와 상(裳)에 기왕 칠승포(七升布)를 썼으니, 마땅히 연관(練冠) 아래에 ‘팔승포를 쓴다[用八升布]’는 네 글자를 첨주(添註)하여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다만 ‘약간 가는 생포(生布)209)  를 쓴다.’고만 하였지만, ‘전하(殿下)의 관포(冠布)는 팔승포(八升布)를 쓴다.’고 개부표합니다."
하였다.
‘참최의 교대(絞帶)’에 대해서 김재로의 소사(疏辭)에 이르기를,
"교대(絞帶)를 마(麻)에서 포(布)로 바꾼다는 것은 본디 《의례(儀禮)》의 경문(經文)이 아니고 소가(疏家)210)  의 말로 본문(本文)에는 연포(練布)를 쓴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며, 또 참최나 상을 마전하지 않는다면 대(帶)도 따라서 마전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절목안에는 ‘연포로 대(帶)를 한다.’ 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강정(講定)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하기를,
"포대(布帶)를 마전하여 쓰게 된 것은 지난 경자년211)  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헌의(獻議)에 의하여 쓰게 된 것으로 그후 을묘년212)  에도 준용(遵用)한 바가 있으니, 이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다시 상소하기를,
"고례(古禮)에는 다만 ‘관을 마전하고 포의(布衣)를 마전한다.’고만 말했고, 주소(註疏)에 교대를 마(麻)에서 포(布)로 바꾸어 쓴다는 말이 있기는 하였으나, 원래 교대를 연포로 쓴다는 글귀는 없으며, 도식(圖式)에도 다만 마(麻)를 바꾸어 포(布)로 쓰되 칠승포(七升布)로 한다 하였으니, 지금 만약 연포로 최복과 상(裳)을 한다면 교대도 따라서 연포를 씀이 옳다 할 것이지만 참최와 상(裳)은 이미 마전하지 않는데 유독 교대만 마전한다면 이는 예(禮)의 본뜻이 아닐 것입니다. 선정신 송준길의 헌의에도 이르기를 ‘연제(練祭) 때에 요질(腰絰)을 고례(古禮)에 따라 갈(葛)을 썼다면 교대는 마땅히 연포를 써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예의 본뜻일 것입니다. 다만 숙마(熟麻)의 교대가 예절에 어긋남을 말하면서 마땅히 고례를 따라 연복(練服)의 포대(布帶)로 바꿔 써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애당초 연포를 써야 하느냐의 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나온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 한 대목은 본래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나온 말이지마는 《상례비요》에는 ‘연자(練字)’가 없는데 선정(先正)이 연자 하나를 놓은 것을 신은 그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와 군신(群臣)들은 다만 관(冠)만 마전하고 대비전(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에서는 다만 교대(絞帶)만 마전하며, 정복(正服)은 모두 마전하지 않는 것은 머리와 허리를 중히 여기는 뜻에 실제로 부합합니다. 그렇다면 외복(外服)인 관이나 대(帶)를 함께 마전하는 것은 이런 뜻에 어긋남이 아니겠습니까? 순문(詢問)하여 강정(講定)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하기를,
"경자년213)   연제(練祭) 때의 등록(謄錄)을 찾아서 보니, 선정신 송준길의 헌의를 놓고 여러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한 후에 절목 안에 부표(付標)를 하였습니다. 선정의 이른바 ‘이미 이와 같이 전후의 국제(國制)에도 모두 준용(遵用)했다.’고 했으니, 대신들과 유신(儒臣)에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왕대비전(王大妃殿)이나 중궁전(中宮殿)은 요대(腰帶)를 버리고 마전하지 않은 최복과 상(裳)으로 갈아 입되 칠승(七升)의 대공포(大功布)를 쓰고, 백포(白布)의 대수 장군(大袖長裙)214)  을 입되 연포(練布)를 쓰며, 연포의 개두(盖頭) 두수(頭𢄼) 및 대(帶)를 쓴다’란 대목에 대하여 김재로의 소에 이르기를,
"이미 마전하지 않은 최복이나 상(裳)으로 갈아 입는다 말하고서 또 백포의 대수 장군(大袖長裙)을 말하였는데, 이른바 대수 장군은 바로 성복(成服)할 때의 최상(衰裳)인데 모르기는 하나 연제(練除)215)   때에 대수 장군 이외에 성복 때에 없었던 최상(衰裳)이 따로 또 있겠습니까? 이미 백포의 대수 장군이라 해놓고서 또 연포를 쓴다고 주를 붙였으므로 혹은 백포(白布)라 하고 혹은 연포(練布)라 하니, 모두 자세히 살펴서 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의 대수 장군을 입는다.’라고 하였는데, 작년 초상 때에 절목을 마련하면서 졸곡 후에는 변제(變除)의 절차가 없기에 이 조목을 연제(練祭) 아래에다 옮겨 놓았습니다. 이번 절목은 작년에 마련한 절목을 그대로 준용하였기에 마전하지 않은 최상(衰裳)과 백포(白布) 대수 장군(大袖長裙)을 뒤섞어 마련하였으며, 소주(小註)에 연포(練布)를 쓴다 한 것도 백포와는 아주 다르므로 개정치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改付標)합니다."
하였다.
제시 절목(祭時節目) 중에서 ‘대비전·중궁전은 악차(幄次)에 나아가 요대(腰帶)를 버리고 마전하지 않은 최복(衰服)과 띠[帶] 및 연포(練布)의 개두(盖頭)·두수(頭𢄼)와 연포의 장군(長裙)으로 고쳐서 입으며 내명부(內命婦) 및 빈(嬪) 이하도 같다.’ 한 대목에 대하여 김재로의 소에 이르기를,’
"이 대목은 변제 절목(變除節目)과는 서로 어긋나 마전하지 않은 최복 아래에 상(裳)이 있는데 여기에는 없으며, 원절목(元節目)에는 대수(大袖)가 있는데 여기에는 없고, 원절목 안에는 연포대(練布帶)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마전하지 않은 포대(布帶)라 하였으니 개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하기를,
"이는 갑인년216)   연제(練祭) 때의 절목을 따른 것으로 갑인년 등록이 소루(疏漏)하였던 탓인 듯합니다. 이제는 소사에 의하여 개부표(改付標)는 하되 연포(練布)를 쓰기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생원·진사·유학(幼學)·생도(生徒)·갑사(甲士)·정병(正兵)은 백립(白笠)·백의(白衣)·포대(布帶)로 한다.’ 한 대목에 대하여 김재로의 소에 이르기를,
"이른바 포대(布帶)는 마땅히 생포(生布)·연포(練布)·백포(白布)의 구별을 분명히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예조에서는 연포로 개부표하여 복계하였다.
1.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마전하지 않은 최복으로 바꿔 입는다.’란 대목에 대하여 김재로의 소에 이르기를,
"파산관(罷散官)217)  이나 전직 당하관(堂下官)의 조항과 궐내에 입직(入直)한 제관(諸官)의 조항에는 ‘연복(練服)으로 바꿔 입는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필시 문장을 생략하고 간략함을 따르는 데서 온 소치이니, 두 조항을 모두 개부표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소사대로 개부표하여 복계하였다. 김재로의 소에 또 이르기를,
"교대(絞帶)를 이미 포대(布帶)로 바꾸기로 하면 연제(練祭) 후의 상복(常服)의 띠는 응당 포(布)를 써야 하는 것은 병조(兵曹)나 도총부(都摠府)의 시위 장사(侍衞將士)들도 또한 다름이 없을 듯한데 절목 중에는 ‘흰 천익(天翼)218)  에 숙마(熟麻)의 세대(細帶)를 띤다.’라 하였는데, 시위신(侍衞臣)만이 유독 숙마의 세대를 씀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니, 또한 마땅히 다시 강정(講定)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예조에서는 포대(布帶)를 써야 한다고 개부표하여 복계하였다.
〈포대(布帶)의 마전 여부에 대하여〉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은 헌의하기를,
"《의례(儀禮)》의 소(疏)219)  에 이르기를, ‘소상(小祥)에는 마전한 관(冠)과 마전한 중의(中衣)를 입는다. 그래서 연(練)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옷을 마전할 것은 이것뿐인 것 같습니다. 대(帶)와 같은 경우는 정복(正服)에 딸린 것이니, 중의(中衣)와 같이 마전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고례(古禮)에는 졸곡(卒哭)에 옷을 받아 입을 때 대(帶)는 이미 마복(麻服)에 포대(布帶)로 바꾸고 소상(小祥)에는 따로 다시 변제(變除)하여 마전한다는 글이 없기 때문에 연복도(練服圖)에도 또한 교대(絞帶)는 미상(未詳)이라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졸곡을 옷을 바꿔 입던 절차를 이제는 소상(小祥) 때에 행하게 되었으니 대(帶)를 마(麻)에서 포(布)로 바꾸는 것은 이미 종길(從吉)220)  의 뜻이 있는 것인데, 하필 다시 대(帶)를 마전해야만 변제(變除)가 된다 하겠습니까? 최씨(崔氏)221)  의 변제설(變除說)에도 다만 ‘참최는 13개월만에 마전하고 포대를 띤다.’라고만 말했고 또한 반드시 연포(練布)로 대(帶)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포대를 마전하는지의 여부는 끝내 명증(明證)된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경솔하게 고쳤다가 혹 실수나 있으면 전의(傳疑)222)  의 실수 없음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은 헌의하기를,
"지금 변제(變除)할 때의 포대(布帶)에 관한 한 절목은 예서(禮書)에 기재되어 있지만 마전하고 안하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중의(中衣)와 관질(冠絰) 외에는 모두 정복(正服)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에 따르느라 그랬습니까? 다만 경자년223)   헌의할 때에 선정신 송준길은 포대를 마전한다고 이미 말했는데 그때에 여러 유현(儒賢)들이 조정에 있었지만 이의(異議)를 제기했단 말은 듣지를 못했고, 갑인년224)   국휼(國恤) 때에도 또한 이 예절을 썼으니 이때부터 조가(朝家)의 정제(定制)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와서 고례(古禮)에 명백히 말하지 않았다 하여 새로운 준례(準例)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혹시 정제(定制)를 준용하여 큰 과오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성상(聖上)께서 널리 물어서 상심(詳審)해 처리하소서."
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권상하(權尙夏)는 헌의하기를,
"관에 연포(練布)를 쓴다면 교대(絞帶)에 연포를 쓰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요질(腰絰)에 숙갈(熟葛)이나 숙마(熟麻)를 쓴다면 교대는 요질을 바치는 것인데 연포를 쓰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문정공(文正公) 신 송준길은 신의 스승입니다. 그가 경자년에 헌의한 교대(絞帶)를 연포(練布)로 쓴다는 것은 이미 정론(定論)이 되어 있습니다. 이미 스승의 말이 있었는데 신이 어찌 배반하고서 시론(時論)에 꺾여 들겠습니까?"
하고, 전(前) 승지(承旨) 김간(金榦)은 헌의하기를,
"상복 도식(喪服圖式)을 삼가 상고해 보면, ‘교대(絞帶)는 우제(虞祭) 후에는 마(麻)를 바꾸어 포(布)로 하되 칠승포(七升布)로 한다.’ 하였고, 또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을 상고해 보면, 그 전(傳)에 ‘관(冠)은 육승(六升)을 쓰되 단(鍛)은 하고 회(灰)는 아니한다.’ 하였는데, 소(疏)에는 ‘단은 하고 회는 아니한다는 것은 물에 빨기는 하되 잿물을 쓰지 않을 뿐이다. 육승(六升)에 잿물을 아니쓴다는 것은 칠승(七升) 이상이기 때문에 잿물을 쓴다는 말이다.’ 하였으며, 또 《예기(禮記)》의 간전(間傳)을 살펴보면, ‘참최에 우제와 졸곡을 마치면 관은 칠승(七升)으로 한다.’ 하였으니, 이 세 가지 설[三說]로 살펴본다면 우제 후의 교대(絞帶)나 관포(冠布)는 같은 칠승포(七升布)인 것입니다. 지금 이미 칠승포로 한다 하였으니, 소주(疏註)의 칠승 이상이기에 잿물을 쓴다는 말에 꼭 맞게 되는데, 이른바 잿물을 쓴다는 것은 마전하는 그런 유(類)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이른바 대공 칠승포(大功七升布)란 것은 참최장 소(疏)의 ‘칠승 이상은 잿물을 쓴다.’는 말과, 대공장(大功章) 주(註)의 ‘대공포(大功布)는 단치(鍛治)한다.’는 말 및 소(疏)의 ‘단치에는 잿물을 넣어도 된다.’는 말과 복문(服問)225)  의, ‘연제(練祭)를 지내면 공최(功衰)226)  를 입는다.’는 말이든지, 장자(張子)227)  의 ‘단련(鍛練)한 대공포로 옷을 한다.’는 말이나, 주자(朱子)의 ‘대공포를 익혀서 쓴다.’는 말들을 종합해 살펴본다면 대공 칠승포가 연포(練布)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니, 대개 대공 칠승(大功七升)이라면 이미 마전은 하였기 마련입니다. 신이 또 문정공(文正公) 송준길의 경자년 헌의를 살펴보건대 그가 교대(絞帶)에 마전한 베를 쓴다는 말이 명백할 뿐만이 아니고, 신의 스승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도 연포를 씀이 옳다고 한 대목이 친구간의 문답에서 많이 나타나 있으니, 두 선정(先正)이 이 점에 대해서 어찌 소견이 없이 말을 했겠습니까? 대저 연제(練除)의 상복은 점차 낮추어 가벼운 것을 쓰면서 더 깨끗하게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초상에는 마질(麻絰)을 쓰고 연제(練祭) 뒤에는 변제(變除)하여 갈(葛)을 쓰며 갈도 치갈(治葛)을 쓰게 된 것이며, 초상에는 마교(麻絞)를 썼던 것을 연제에는 바꾸어 베를 쓰게 된 것이니, 베를 연포(練布)로 쓴 것은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연포를 쓴다는 말이 이미 십분 명백하지를 못했었지만, 연포를 아니 쓴다는 말도 단적으로 증거할 수가 없었기에 사람마다 자기의 의견대로 행하고 일정한 준칙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연포를 쓴다는 것은 간전(間傳)·주(註)·소(疏)의 여러 학설과 도식(圖式) 및 선정(先正)들의 말로써 넉넉히 증거가 되는 바이니, 이른바 ‘마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번의 최(衰)와 상(裳)을 고쳐 짓는데 불련포(不練布)를 써야 한다는 말이 교대(絞帶)에까지 추급(推及)하게 된 것에 불과한 듯합니다. 이에 의거하면 마전하고 안하는 점에 있어서 아마 취사(取舍)의 분간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권 판부사(權判府事)의 헌의에 따라 시행하라 명하였다.

 

6월 5일 을미

신방(申昉)을 헌납(獻納)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의 상소 내용을 채택(採擇)하여 시행할 것을 진달하니,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양역(良役)의 폐해(弊害)는 수화(水火)보다 심하여 백성들은 모두 도산(逃散)하고 마을들은 이미 텅 비어 버렸습니다. 도둑들이 극성을 부린 것도 모두 이것 때문이므로 변통할 방도를 숙의(熟議)하여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만, 혹자는 호포(戶布)228)  로, 혹자는 구전(口錢)229)  으로, 혹자는 결포(結布)230)  로, 혹자는 유포(遊布)231)  로 대신하자 하여 각자 자기 소견을 고집하기 때문에 끝내 의견 일치를 못보았습니다. 신이 생각 같아서는 각도(各道)의 감사와 각읍(各邑)의 수령들로 하여금 최선책을 강구케 하고 백성의 의견도 수렴하되, 그 일을 논열(論列)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한다면 거의 변통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은 아뢰기를,
"묘당에서 먼저 구분하고 계획하여 외방(外方)에 반포해 보이는 것이 사체(事體)에 맞는 일인데, 줄곧 미뤄오기만 하니 언제 결정될지 모르는 일이므로 민진원의 말이 좀 구차하기는 하지만 각도(各道)로 하여금 곧바로 장문(狀聞)케 하고, 또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별도로 삼남(三南)232)  의 어사(御史)들에게 하유(下諭)하여 이 안(案)의 편부(便否)를 잘 알아보고 돌아와 아뢰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아뢰기를,
"황당선(荒唐船)233)  의 출몰은 해마다 있는 일이지만, 금년처럼 방사(放肆)한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연달아 올라온 황해 수사(黃海水使)의 장계(狀啓)를 보면, 쫓아버리려 하면 더러는 칼을 뽑아 사람을 찌르기도 하고 더러는 장막을 치고 솥을 걸어놓고 달아날 뜻이 없다 하며, 또 황해도 수령들의 말을 들으면 촌가(村家)에 드나들면서 약탈(掠奪)하는 일까지 있어 해변의 주민들은 농사를 걷어치우는 일까지 있다 하니,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마땅히 역관(譯官) 한 사람을 차송(差送)하여 잘 타이르게 하고 또 그들의 자문(咨文)에 이미 총포(銃砲)를 쏘는 것을 일삼는 말이 있었으니, 이런 식으로 아울러 공갈(恐喝)하는 기색(氣色)을 보이면서 그래도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시 이런 사실을 가지고 그들의 관원에게 통보하여 금지시킴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解弛)하여지니 백성들의 습성이 흉패(凶悖)하여져서 토주(土主)234)  에게 꾸짖어 욕을 보임이 다만 태인(泰仁)과 회인(懷仁) 두 고을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영천(榮川)에도 이런 변고(變故)가 생겼는데 토민(土民)235)  인 이태익(李台翊)·이무익(李茂翊) 등이 한 고을에 통문(通文)을 돌려 조곡(糶穀)236)  을 받지 못하게 하고 무뢰배(無賴輩)들을 이끌고 능장(稜杖)237)  을 갖고서 창고마당에 갑자기 뛰어들기도 하며, 향소(鄕所)238)  를 쫓아냈다 합니다. 본관(本官)이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바야흐로 수포(搜捕)중이라 합니다. 대개 송사(訟事)에 패소(敗訴)한 데 대한 원한을 품고 그랬다 하지만 태인이나 회인 두 고을 백성들의 죄과(罪過)에 비한다면 휠씬 심한 점이 있습니다. 비록 효수(梟首)의 형률을 적용한다 하여도 조금도 과중(過重)할 것이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기어코 잡아서 각별히 중죄로 다스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안동(安東)의 화재는 매우 참혹하였다 합니다. 감사의 장계에 따라 불에 탄 곡식은 탕감(蕩減)해 주고 다른 고을의 곡식 5, 6백 석을 옮겨 실어다가 구호케 하였습니다만, 환수할 것인지 거저 줄 것인지를 구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제 절반씩은 거저 주기로 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신역(身役)이 있는 자는 특별히 견감(蠲減)의 혜택을 입고 신역(身役)이 없는 무리들은 고른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이니, 물에 빠져 죽은 자에게 내리는 구호의 예(例)에 따라 매호(每戶)마다 피곡(皮穀) 한 섬[石]씩을 제급(題給)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校理) 이중협(李重協)이 아뢰기를,
"판부사(判府事) 권상하(權尙夏)는 양조(兩朝)에서 예우(禮遇)했던 신하로 삼사(三事)239)  까지 벼슬이 올랐으니, 마땅히 예(例)에 따라 추은(推恩)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정자(程子)240)  가 봉전(封典)을 청하지 않았던 일을 인용하면서 나라에서 추은 증직(增職)을 특명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엊그저께부터 연일 소대(召對)의 명을 내리시니, 이는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무릇 듣고 보는 이에 있어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옛날부터 훌륭했던 군주는 모두 어진이를 존경하고 선비를 예우(禮遇)함으로써 선치(善治)의 효과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지금 밖에 있는 유신(儒臣) 권상하(權尙夏)·이희조(李喜朝)·정제두(鄭齊斗)·김간(金榦)·김창흡(金昌翕)·어유봉(魚有鳳) 등은 모두 나라에서 예우했던 신하들입니다.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각별히 문장을 만들어 간곡하게 하교(下敎)하여 도움을 청하는 뜻을 보이면 저들이 모두가 대대로 국록(國祿)을 타는 신하로서 어찌 끝내 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연제(練祭) 때에는 반드시 서울 근처에 올라올 듯하니, 주상께서 특별히 불러서 바로 인견(引見)하시고 강학(講學)과 다스리는 방편을 물으시면서 그대로 머물면서 강연(講筵)에 출입하라 하시면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경주 토포사(慶州討捕使) 최도장(崔道章)은 재차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파직의 명을 내렸습니다만, 신이 듣기로는 최도장은 도둑을 잘 다스리기로 큰 명성을 얻고 있다 합니다. 대계(臺啓)의 탄핵을 받은 자를 사체(事體)로 보아 그대로 잉임(仍任)시킬 수는 없는 일이나 경솔히 파직시키는 것도 애석한 일이니, 청컨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자, 김창집(金昌集)도 잉임시킴이 마땅하다고 말하므로 임금이 윤허하였다. 집의(執義) 김고(金槹)가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김고가 이봉징(李鳳徵)·이연(李㮒)241)  ·이환(李煥)242)  ·이혁(李爀)243)  ·이찬(李燦)244)  과 목내선(睦來善)·이현일(李玄逸) 등의 직첩을 환수(還收)하는 일로 대신을 통하여 진달하여 이미 윤종(允從)을 허락받았었는데 이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교(下敎)하셨음을 말하니, 임금이 비로소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과 이건명 등이 조금전 연석(筵席)에서 환수할 것을 힘껏 청하여 임금이 윤종한다고 답하였기 때문이다. 또 논핵(論劾)하기를,
"관리가 서울에 올라와 비어(蜚語)를 퍼뜨려서 본쉬(本倅)245)  를 쫓아낸 것은 전고에 없었던 변고(變故)인데, 뜻을 이룬 자가 자못 많다고 합니다. 흥양(興陽)의 아전 신백원(申百源) 등이 본관에게 죄를 범하게 되자 대관(臺官)의 하인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본관의 허물과 비방을 모조리 말하여 탄핵을 도모하다가 마침 발각이 되어 추조(秋曹)246)  로 이송되었으나 아직 자백을 않는다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형(嚴刑)으로 실상을 캐어 법에 따라 처단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7일 정유

밤 1경(一更)에 달이 태미성(太微星)의 서원(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6월 8일 무술

밤 1경에 유성(流星)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서 곤방(坤方)의 하늘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발 같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며 빛은 희었다.

 

임금이 친히 효령전(孝寧殿)247)  에서 연제(練祭)를 지냈다. 여러 승지와 사관(史官)은 배종(陪從)하여 재실로 들어가고 백관들은 곡반(哭班)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전정(殿庭)에 들어 서쪽을 향하여 곡하고 사배(四拜)하였다. 제주(題主)248)  할 때에 임금은 전안(殿內)에 들어가서 북쪽을 향하여 섰었다. 제주가 끝나자 사자관(寫字官)이 칠(漆)을 하였다. 임금이 살펴보고 이내 내려와 제자리로 돌아왔다. 막차(幕次)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초헌례(初獻禮)를 행한 후에 전정(殿庭)으로 내려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삼헌례(三獻禮)가 끝나자,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6월 9일 기해

묘시(卯時)에서 사시(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이희조(李喜朝)·전(前) 현감(縣監) 김간(金榦) 등이 별도로 효유(曉諭)한 데 대하여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일에 아뢰었던 허물어진 둑[廢堰]에 관한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0일 경자

밤 3경(三更)에 달무리하였는데, 왼쪽에 고리 모양이 있었다.

 

6월 11일 신축

제주관(題主官) 윤양래(尹陽來)에게 가자(加資)249)  하고 그 아래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또 수릉관(守陵官)과 시릉관(侍陵官)에게도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6월 12일 임인

조관빈(趙觀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휘진(李彙晉)을 장령(掌令)으로, 김제겸(金濟謙)을 부교리(副校理)로, 서명균(徐命均)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강세윤(姜世胤)을 주서(注書)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강세윤(姜世胤)의 과방(科榜)은 세상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았는데도 사당(私黨)의 천거로 외람되이 당후(堂后)250)  의 자리에 두니, 물론(物論)이 해괴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6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250] 당후(堂后) : 주서(注書)의 이칭(異稱).
사신은 말한다. "강세윤(姜世胤)의 과방(科榜)은 세상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았는데도 사당(私黨)의 천거로 외람되이 당후(堂后)250)  의 자리에 두니, 물론(物論)이 해괴하게 여겼다."

 

황해도 용매진(龍媒鎭)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바위가 뒤집혀 일어나 저절로 서 있다고 감사가 장문(狀聞)하였다.

 

6월 13일 계묘

여러 도(道)의 감사들이 한재(旱災)와 충재(蟲災)로 연속 장계를 올렸는데, 경상도 안동(安東)·영양(英陽) 등지에는 우박의 재앙도 있다고 하였다.

 

6월 15일 을사

술시(戌時)에는 월식(月蝕)이 있었고, 밤 1경·2경에는 달무리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방 토룡 기우제(五方土龍祈雨祭)251)  는 이제 모두 마쳤으나 비가 내릴 기미는 한결같이 까마득하고 간간이 이슬비는 뿌려도 흡족한 큰 비는 끝내 오지를 않습니다. 기전(畿甸) 지방의 타는 가뭄이 가장 심한데, 전에는 선농단(先農壇)이나 전망처(戰亡處)에 여역(癘疫)이나 굶어 죽은 사람의 제사를 차리고 비를 빈 예(例)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정하여 지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여기저기 다함께 지내라 명하였다.

 

6월 16일 병오

비가 내렸다.

 

이조(李肇)를 도승지(都承旨)로, 이봉익(李鳳翼)을 사간(司諫)으로, 김제겸(金濟謙)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윤취상(尹就商)을 논핵하고 다시 가두어 엄중히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윤취상은 선조(先朝)의 숙장(宿將)252)  으로 나이 칠순(七旬)이 거의 되었으니, 늙고 병들었음을 이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지금 같은 심한 더위에 풀어 보내자고 의논한 것이 잘못이라 할 수 없다. 빨리 정계(停啓)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하고, 특명의 추은(推恩)을 사양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지(批旨)로 답을 내렸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명언(李明彦)이 상소하여 성을 옮길 방략(方略)을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변(西邊)의 보장(保障)의 중지(重地)로서 본부(本府)보다 나은 곳이 없으나, 한 조각 고성(孤城)이 다른 험애(險阨)한 곳이 없고 믿는 것은 오직 장강(長江) 하나 뿐인데, 근래에는 수세(水勢)가 크게 변하여 창일(漲溢)할 때가 아니면 걸어서 물을 건널 수가 있으니, 요충지로서의 험애함을 이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강밖에는 호산(胡山)253)                  들이 죽 늘어서서 막고 있어 여느 때의 후망(候望)도 수리(數里)를 벗어나지 못하니 만일 창졸간에 포위를 당한다면 며칠 동안을 서로 버티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개 방비군을 철수한 뒤로는 본부의 윤번(輪番)하는 병졸은 수백 명도 채 못되는데 급박한 형편을 당한다면 부곡(部曲)의 원근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자들을 어떻게 전령(傳令)하여 불러들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성첩(城堞)에 올라가 있는 자는 성안의 민정(民丁)뿐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성을 지키자니 어떻게 안전을 다짐할 수 있겠습니까? 군량이 모자라는 것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성안의 우물들이 거의 말라버렸으니, 이미 후원(後援)도 끊기고 또 물과 식량도 떨어진다면 한 번 죽는 것 밖에는 딴 방책이 다시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병자년254)                  의 호란(胡亂) 때에 임경업(林慶業)이 감히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지 못하고 물러나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물러나 지킬 계책도 쓸 수가 없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임경업은 화란(禍亂)이 꼭 올 줄을 알고 미리 사사(死士)255)                  를 모집하여 저들의 경내(境內)를 정탐하고는 시기에 앞서서 성에 들어가 지켰지만, 이제는 사세(事勢)가 아주 달라져서 예측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으니, 비록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는다 해도 멀리 백마 산성까지 달려가기란 그 형세가 또한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30리쯤 되는 거리에 고성(古城)이 하나 있는데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으로 곧 고구려(高句麗)에서 5백 년간이나 도읍을 하였던 곳입니다. 형세의 편리함이 본주(本州)의 주성(州城)보다 백 배나 나을 뿐 아니라 바로 하나의 천작(天作)의 금탕(金湯)256)                  입니다. 몇겹으로 둘러쌓인 속에 저절로 일국(一局)을 이루고 있는데 옛 성터가 지금도 완연하고 밖은 험준하고 안은 평탄하여 토곽(土郭)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周回]는 3천 6백여 보(步)나 되는데 그 안에는 옛 우물이 더욱 많고 겹쳐서 간수(澗水)의 여러 줄기가 마름이 없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의 동남쪽에는 따로 산기슭 하나가 있어 옆으로 뻗어서 빙 둘러막고 있으니 하나의 외곽(外郭)을 이루어 놓았으며, 또 10여 리를 지나서 압록강의 여러 줄기가 하나로 합수된 곳이 있는데, 바로 대총강(大摠江)입니다. 또 고진강(古津江)이 있는데 대총강의 하류와 해구(海口)에서 합쳐지니, 이곳이 바로 양하진(楊下津)입니다.
구성(舊城)에서 수구(水口)에 이를려면 양쪽 골짜기가 묶어놓은 듯한데 그 가운데로 한가닥 길이 통해져서 바로 10리 장곡(長谷)을 이루고 있으니, 설사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압록강을 건너가도 한 걸음에 곡구(谷口)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 백마 산성으로 물러나 지키더라도 적들이 또한 우리의 퇴로(退路)를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니, 그 주성(州城)에 비교하여 같이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일 국내성(國內城)으로 고을을 옮기고 백마 산성과 서로 성원(聲援)을 의뢰한다면 비단 험준함을 믿어 스스로 견고하게 수비할 뿐만 아니라, 황주(黃州)와 철산(鐵山)의 통로가 두 성 사이에 있게 되니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해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본부를 이설(移設)한 뒤에는 저쪽과 우리의 사신이 곧바로 저들의 마전참(馬轉站)에서 권두(權豆)의 북쪽을 경유하여 대총강을 건너서 국내성(國內城)에 이르게 될 것이니, 아홉 개 참에서 하나의 참(站)으로 비용이 줄어들고 세 강을 따로 건너는 폐단이 일거(一擧)에 모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 국내성에서 곧바로 용천(龍川)으로 가게 되니 소관참(所串站) 하나가 없어지게 될 것이니, 비용 절감도 적지는 않습니다. 주성(州城)은 새로이 첨사(僉使)를 두어 지키게 하고 본부(本府)에는 장교들도 또한 많이 있으니 서로 협력하여 엄중히 지키는 곳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수상(水上) 6진(鎭)은 비록 바둑을 깔아놓은 형세이긴 하나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하여 정작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반드시 힘이 되지는 못할 것이니, 청수(靑水)·청성(淸城)을 합하여 1진(鎭)을 만들고, 방산(方山)·옥강(玉江)을 합하여 1진을 만들며, 수구(水口)·건천(乾川)을 합하여 1진을 만들어 토병(土兵)들을 형편에 따라 증파해 주면 점차 모양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병정들은 신설된 첨사(僉使)에게 나누어주면 3진(鎭)이 조금은 보강된 형세가 될 것이고, 신진(新鎭)도 더 모집하는 근심이 없어질 것이니, 그것이 군대 배치의 방법에 있어서 타당할 듯합니다. 또 고(故) 부사(府使)        임경업이 청천강(淸川江) 이북에 곤수(閫帥)257)                  를 두어야 한다는 상소를 보니 그 말은 매우 간절하지만, 백마 산성은 변방 끝에 치우쳐 있으므로 비록 큰 일을 하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만일 선천(宣川)이나 구성(龜城) 등지에 땅을 가려 병영(兵營)을 열고 용천 구성(龍川舊城)에다 따로 행영(行營)을 두어 여름에는 본영(本營)에서 머물고 겨울이면 행영에 나가서 주둔하여 북로(北路)258)                  의 방수 제도와 똑같이 한다면, 적을 제압하고 승리를 얻는 방법이 바로 이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변통하는 것은 폐단이 생기는 법이니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복주(覆奏)하여 시행치 못하였다. 의주(義州)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실로 위급한 사태가 있을 때 믿을 곳은 못된다. 국내성의 형편이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지마는 나라의 습성이 인순(因循)259)                  에 젖어 있어 비록 좋은 계책이 있더라도 시행되지 못하게 되니, 한스러울 뿐이다.

 

6월 17일 정미

진시(辰時)에서 사시(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남취명(南就明)과 이교악(李喬岳)을 승지(承旨)로, 권적(權𥛚)을 정언(正言)으로, 홍현보(洪鉉輔)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6월 19일 기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고, 또 수원 부사(水原府使) 서명균(徐命均)을 논핵하기를,
"조금 전에 관직(館職)260)  을 제수하고 갑작스럽게 중진(重鎭)으로 승진시키니 재구(才具)는 비록 적합하다 하더라도, 초천(超遷)261)  하는 것은 아주 갑작스러운 것을 면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지평(持平) 신무일(愼無逸)과 집의(執義) 김고(金槹) 등이 동료 대간(臺諫)으로서 서명균을 논핵하면서 소상히 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조급히 논계(論啓)한 일로 인피(引避)하며 체직을 청하고, 지평 이정소도 인피하였는데, 옥당(玉堂)에서 처치(處置)하여 이정소는 체직시키고 신무일 등은 출사(出仕)케 하였다.

 

6월 21일 신해

비가 내렸다.

 

황해도감사 김유경(金有慶)이 상정미(詳定米)262)   2천 석을 참마(站馬)263)  를 개비(改備)하는 자금으로 보용(補用)할 것을 장청(狀請)하므로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본도 감사(監司)가 조정에 청하여 사신 행차 때 쇄마(刷馬)264)  를 독촉하여 세우는 것이 폐단이 있으니, 평안도의 예에 따라 직로(直路) 5읍(邑)에 2백 50필의 말을 새로 세우고 해마다 1천 3백 석의 쌀을 마호(馬戶)265)  에게 양료(糧料)로 정해 주며, 또 군량(軍糧)을 운반하는 군관(軍官)에게서 거두어들인 베로 부족액을 보충케 하기로 정하였는데,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겨서 양료(糧料)를 잇대어 줄 수가 없으므로, 다시 더 줄 것을 청했던 것이다.

 

황주읍(黃州邑)의 성을 수축하였다. 병사 유성추(柳星樞)가 힘써 경영하여 일을 마치고 조정에 아뢰니, 상으로 간역(看役)한 장교(將校)들에게 가급(加級)을 내렸다.

 

6월 22일 임자

지사(知事) 이선부(李善溥)가 졸(卒)하니, 조정과 시전(市廛)을 하루 쉬게 하였다. 이선부는 별다른 재능은 없으나, 풍채가 숙정(肅整)한데다 지방을 잘다스려 명성이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그의 주정(酒酲)을 흠으로 여겼다.

 

6월 24일 갑인

비가 내렸다

 

김취로(金取魯)를 정언(正言)으로, 이중술(李重述)을 지평(持平)으로, 김담(金墰)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6월 25일 을묘

신석(申晳)을 헌납(獻納)으로,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집의(執義) 김고(金槹)가 상소하여 한재(旱災)를 아뢰며 임금께서 친히 기도(祈禱)할 것을 청하고, 또 전 지평(持平) 박필주(朴弼周)를 정소(旌召)266)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이만성(李晩成)을 유소(諭召)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이미 사직(社稷)에 친히 기도(祈禱)할 것을 명한 바 있었는데, 또 좋은 날을 가리지 않고 앞당겨 정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경인년·기묘(己卯) 양년의 국휼(國恤) 때에 임금이 친히 기도한 전례를 인용하면서 음악을 사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대내(大內)로부터 황랍(黃蠟) 2백 근을 바치라 명하고, 또 2월부터는 매달 첩금(貼金)을 바치라 명하여, 민간(民間)에서 더러는 불상(佛像)을 만들려고 그런다느니 또 더러는 화룡촉(畫龍燭)을 만들어 전체를 금으로 바르려고 그런다느니 하는데, 불상을 만들려고 그런다는 말은 진실로 사리(事理)에 맞지도 않거니와 3년 안에는 제향(祭享)까지도 마땅히 생시(生時)와 같이 하여야 하는데 선대왕(先大王)의 검덕(儉德)은 보통보다 휠씬 뛰어났으니, 이제 만일 금촉(金燭)을 쓴다면 참으로 생시에 섬기는 것처럼 하라는 예(禮)의 뜻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지금 나라의 재정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니 주상께서도 마땅히 비용을 아끼는 데 진념(軫念)하셔서 제사의 모든 절차를 기해년267)  ·갑인년268)  두 등록(謄錄)에 의하여 하시고 혹은 정도에 지나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언(正言) 권적(權𥛚)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청주(淸州)에서 관창(官倉)에 함부로 들어가서 조곡(糶穀)을 실어 내간 자들 중 수창인(首倡人)을 적발하여 엄형으로 다스려 실정을 캐내고 경내에 효시(梟示)하여야 하며, 도당(徒黨)들은 모두 사변(徙邊)269)  의 형률로 다스려야 한다고 논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6일 병진

제도(諸道)의 감사들이 비가 흡족히 내렸다고 장문(狀聞)하였는데, 영남(嶺南) 지방에서는 우박의 재해가 있었다.

 

6월 27일 정사

밤 2경(更)에서 5경까지 손방(巽方)과 남방(南方)·곤방(坤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6월 28일 무오

비가 내렸다. 밤에는 초경부터 5경까지 남방과 손방(巽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임금이 사직(社稷)에 장차 친히 기도(祈禱)하려 하는데 종일 비가 내리니 승정원에서 정지할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일찍이 숙종조(肅宗朝)무자년270)  에 임금이 친히 기도하려 하다가 비가 내려 그만 정지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6월 29일 기미

비가 내렸다.

 

비국(備局)에서 청주(淸州)의 관창(官倉)을 턴 죄인들의 일로 복계(覆啓)하여, 박세명(朴世命)·이순장(李舜章) 등 3인을 모두 경상(境上)에 효시(梟示)하고 박성필(朴成必) 등은 사변(徙邊)의 형률도 다스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이 상소하여 그 형률의 적용이 과중함을 논하고,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케 할 것을 청하였다. 뒤에 감사의 장문(狀聞)에 의하여 이순장은 효시하고, 박세명은 형신(刑訊)한 후 나머지와 함께 감사 정배(減死定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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