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6월 1일 경신
비가 내렸다.
윤6월 3일 임술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을 적간(摘奸)하여 죄가 가벼운 죄인을 석방하라 하였다.
강원도 통천군(通川郡)에 우박이 내렸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종묘 부봉사(宗廟副奉事) 김만규(金萬奎)는 행신(行身)이 더러운데 차지한 자리가 외람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부총관(副摠管) 조이건(趙爾健)은 나이도 늙고 품계와 이력도 얕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윤6월 4일 계해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실록(實錄)을 찬수(纂修)하는 자리는 외인이 감히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도 전(前) 판관(判官) 박필몽(朴弼夢)이 마음대로 실록 당상관(實錄堂上官)을 사알(私謁)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사인(士人) 홍우창(洪禹昌)이 간통(奸通)한 이극(李極)의 여종은 정실(正室)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과부를 능멸했으므로, 대관(臺官)이 차인(差人)을 보내어 잡아 오려고 하니, 홍우창이 손으로 헌리(憲吏)를 치고 빼앗아서 몰래 숨겨버렸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가두게 하고 과죄(科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홍우창의 일만 따랐다.
윤6월 5일 갑자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은 다만 김만규(金萬奎)의 일만 윤허하였다.
임형(任泂)을 집의(執義)로, 홍치중(洪致中)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만성(李晩成)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취로(金取魯)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절(申晢)을 이조 좌랑(吏曹佐卽)으로 삼았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운택(金雲澤)이 상소하여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을 떼어 본부(本府)로 이속(移屬)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 신묘년271) 에 본부의 수신(守臣)272) 이 장단(長湍)의 황폐(荒廢)한 한 면(面)을 본부로 떼어줄 것을 청하고, 조사한 도형(圖形)까지 올린 뒤에 묘의(廟議)에서 구정현(口井峴)까지 떼어줄 일을 복계(覆啓)하여 결정을 보았었는데, 대계(臺啓)가 갑자기 일어나자 성명(成命)을 도로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본부에서는 이미 겸하여 관리(管理)해 오고 있는 처지임에도 〈장단의〉 경내(境內)를 빌어 조련장(操鍊場)을 설치하고 있으니 구간(苟簡)273) 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장단에서 한 면의 반절을 잃은 것은 원래 큰 영향이 없는 바이니, 전일의 성명(成命)대로 이속(移屬)을 특별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 하니, 비국(備局)에서 그 윤허해야 할 상황을 다시 아뢰고 도신(道臣)274) 과 송도(松都)의 수신으로 하여금 피차의 형세(形勢)를 살피고 넓고 좁은 것을 참작하여 다시 장문(狀聞)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도(松都)에 관리 독영(管理獨營)을 설치한 것은 한갓 열읍(列邑)의 폐단만 될 뿐 조금도 관방(關防)에는 도움됨이 없는데도, 송도 백성들의 분묘나 전답이 장단 경내에 많이 있으므로 조련장을 핑계삼아 기필코 이속시키려 한 것이다. 송도 사람들은 본래부터 돈이 많았는데 김창집(金昌集)이 그들의 부탁을 받고 뒤따라 찬성하였으나 마침 대의(臺議)가 있어 중지된 것인데, 김운택이 또 부민(府民)들의 부탁을 받고 번거롭게 장청(狀請)하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다.
윤6월 6일 을축
밤 1경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윤6월 7일 병인
어유룡(魚有龍)을 사간(司諫)으로, 이민영(李敏英)을 승지(承旨)로, 홍용조(洪龍祚)를 헌납(獻納)으로, 김조택(金祖澤)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장령(堂令) 김담(金墰)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다시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홍원익(洪元益)은 관아(官衙)에 앉아 있는 일이 거의 없어 송사가 적체되어 있고 또 경내의 사인(士人)과 인척을 맺고 대소 정사를 모두 그의 말만 따르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우승지 이교악(李喬岳)은 전번에 군직(軍職)을 띠고 나라의 연제(練祭)의 반열(班列)에 따라와서 숙취(宿醉)가 덜 깨어 차서(次序)도 모르고 갈팡질팡 하였으니,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이교악의 일만 따랐다. 조정 반열이 엄숙치 못하여 전연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해학(諧謔)과 훤화(喧譁)로 여러 사람의 듣고 보는 데에 해괴한 바가 있었으며, 이교악의 경우는 본래 주정(酒酲)이 있어 사람들의 말이 많았으므로 대신(臺臣)이 마지못해서 논계(論啓)한 것인데도 죄가 문비(問備)275) 에 그치니, 여론이 해괴하게 여겼다.
윤6월 8일 정묘
채응복(蔡膺福)을 장령(掌令)으로, 한세량(韓世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교악(李喬岳)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장령(掌令) 김담(金墰)이 인피(引避)하여 그 일을 다시 다루게 되었다.
윤6월 9일 무진
새벽에는 안개가 끼고 미시(味時)·신시(申時)에는 햇무리하였다.
윤6월 10일 기사
임금이 자전(慈殿)의 하교(下敎)한 뜻을 승정원에 전하면서 이르기를,
"엊그제 연중(筵中)에서 좌상(左相)이 계달한 일로 자성(慈聖)에게 앙품(仰稟)하였더니 작년에 유교(遺敎)를 받들어 모든 일을 반드시 검약(儉約)해야겠다는 뜻으로 하교하려고 하셨다 한다. 또 대내(大內)에도 국휼(國恤) 때의 등록(謄錄)이 모두 있고 평상시 찬수(饌需)마저 절약하시던 성의(聖意)를 따르려고 제향(祭享) 등의 일에도 전보다 많이 줄여왔으며, 이전 같아서는 연제(練祭) 때에 사궁(四宮)276) 에서 각각 호조로부터 돈을 실어오는 전례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궁에 하교하여 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한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제물인들 어떻게 풍부히 마련했겠느냐? 진연(進宴)할 때 배치(排置)한 화룡촉(畵龍燭)이 궁중에 남아 있기에 탄일(誕日)이나 다례(茶禮) 및 대내(大內)에서 진향(進香)할 때에 당겨다 썼으며 새로 만든 일은 없었으며 홍촉(紅燭)에 있어서도 다만 명일(名日)에만 쓰도록 하교하셨다 한다. 또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진달한 첩금의 일도 지금 처음 들이게 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대내(大內)에서 쓸 데가 있어서 그랬다 하며, 황랍(黃蠟)은 제사에만 쓰인 게 아니라 또한 이날마다 쓰이는 것이니, 불사(佛事)란 말은 천만 뜻밖이라 하셨다."
하였다. 이때에 내수사(內需司)의 수용(需用)이 크고 번다한 데다 저축이 탕진되어 잇대지 못하니, 경상비(經常費)에서 끌어다 쓰는 것이 또한 잦아 더러는 ‘혼전(魂殿) 제향의 제수(祭需)가 전보다 배로 늘었고 산릉(山陵)에 육찬(肉饌)을 쓰는 것도 구례(舊例)에 없었던 일이라서 비용이 점점 늘게 된 것이며, 또 궁속(宮屬)들이 여러 명찰(名刹)을 나누어 찾아가게 되어서 불공(佛供)이 너무 성대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건명(李健命)과 민진원(閔鎭遠)이 전번 제향의 찬품(饌品)을 자전(慈殿)에게 앙품할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거절하는 전교를 내렸으니, 탄식을 견딜 수 있겠는가?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실록청(實錄廳)과 비국의 당상관이 일제히 출석하지 못하여 나랏일이 민망한 실상을 아뢰고, 이어 말하기를,
"갖가지 법도가 해이해진데다 모든 일은 번다하여지고 기강(紀綱)은 날로 허물어져서 체통(體統)은 날로 무너져가는데, 기근(飢饉)과 역병(疫病)은 겹쳐 이르러 도산(逃散)함이 서로 줄을 잇는데도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또 깊이 들어앉아 공묵(恭默)만 하시고 아예 국사에는 유념치 않으시며, 여러 신하들은 다만 자기 몸만 받들어 물러나기를 생각하고 팔짱만 끼고 예사로 보고 있으니, 신이 비록 계획하려고 하는 일이 있어도 함께 국사를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최규서(崔奎瑞)는 선조(先朝) 때부터 물러나 있은 지 오래이고, 정호(鄭澔)·권성(權𢜫)·이만성(李晩成)·김흥경(金興慶)·이광좌(李光佐) 등 여러 사람은 혹 신병(身病)을 핑계대고 혹은 친병(親病)을 핑계대고서 물러나 자수(自守)하면서 조정에 나올 뜻이 없으며, 홍치중(洪致中)은 성묘(省墓)하러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이재(李縡)는 해직(解職)하자마자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조정의 자리는 채워지지 못하고 사무는 오랫동안 폐지되고 있으니, 어찌 개탄하고 애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사위(嗣位)하신 후로 정령(政令)을 펼침에 있어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려 보려는 뜻이 없어 경연의 법강(法講)도 줄곧 정폐(停廢)하고 계시니, 중외(中外)의 인심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모두 국사는 이제 더 해볼 수가 없다고 여겨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밀쳐버리고 모두가 물러갈 생각만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당(唐)나라〉 육지(陸贄)는 덕종(德宗)에게 권하여 죄기조(罪己詔)277) 를 내리게 하니 교만한 장수와 사나운 병졸들도 감읍(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또한 원컨대 전하께서도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든지 혹은 승정원을 시켜 말을 만들어 별도로 하유(下諭)하시어 허물은 자기에게 돌리고 스스로 책망하면서 힘써 격절(激切)하게 하시면 여러 신하들이 어찌 감격하여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도 마땅히 스스로 격려(激勵) 분발하셔서 전철(前轍)을 통절(痛切)히 고치신다면 단 한 번의 호령으로 풍속이 완전히 바뀌고 기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전하께서 모든 일에 줄곧 무기력하신 것은 다만 한 가지 병 때문이시니 화열(火熱) 습담(濕痰)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기세를 부림으로써 만사가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날로 의원을 가까이 하시고 서둘러 치료를 하셔야 함에도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겠다는 청을 절대로 허락치 않고 계십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지주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진찰케 하시되, 침구(鍼灸) 탕환(湯丸)은 법제(法劑)가 아니면 들지 마시고 기어코 효험을 보시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이어 승정원으로 하여금 대찬(代撰)케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별유(別諭)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충청 수사(忠淸水使) 박찬신(朴纘新)이 조정에 하직한 뒤에 대사간(大司諫) 조관빈(趙觀彬)이 수원(水原)의 임소(任所)에 있으면서 중로(中路)에서 말을 전하여 그로 하여금 제일을 제가 처리하도록 했으니, 그가 소계(疏啓)하지도 않으면서 사사로이 스스로 분부(分付)한 것은 경망함을 면치 못합니다. 또 근래에 수령이나 곤임(閫任)278) 을 제수할 때에 대관(臺官)들이 이따금 경저리(京邸吏)를 불러다가 부임치 못하게 한 것이 문득 잘못된 준례(準例)가 되어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신칙하여 이런 폐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어부(漁夫)나 공인(貢人)들의 탕패(蕩敗)하고 잔폐(殘弊)함과 내관(內官)과 주원(厨院)279) 의 하배(下輩)들이 여러 가지로 뇌물을 뜯어오고 있음을 갖추어 아뢰고, 내관들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과 각별히 엄칙(嚴飭)을 더하되 뇌물 받은 자를 고발케 하고, 고발을 하면 선혜청(宣惠廳)에서 후한 상을 주게 할 것과 또 그들 중 부채자(負債者)는 형조와 한성부로 하여금 10년을 한정하고 점차로 받게 하여, 그들을 보존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조군(漕軍)을 변법(變法)으로 변통한 뒤로는 복호미(復戶米)280) 와 신포(身布)를 조창(漕倉)에 받아두게 되었는데, 그 법이 매우 편리하고 민폐(民弊)도 덜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감사·수령·변장(邊將)들은 사사로 대출을 허락해 주고 한갓 헛문서만 가지고 있습니다. 조군(漕軍)도 미리 꾸어 써버리고는 배[船]를 타게 되어서는 원곡(元穀)을 갖다 먹기 때문에 포흠(逋欠)이 생기고 있으며, 또 집물(什物)을 수리하지 않기 때문에 패선(敗船)이 태반입니다.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강명(剛明)한 관원을 따로 정하여 창고를 뒤져 적발케 하고, 계문(啓聞)하여 논죄(論罪)할 곳으로 삼으소서."
하고, 또 수령이 거중(居中)281) 하였는데도 체직(遞職)을 꾀한 자는 전조(銓曹)로 하여금 규식을 정하여 절대 허체(許遞)치 못하게 하는 뜻으로 아뢰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아! 김창집(金昌集)의 죄를 어떻게 다 주책(誅責)하겠는가? 임금이 병이 있어 혹시 만기(萬機)282) 를 관섭(官攝)할 수 없으면 보호하는 직책에 있는 자가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간곡히 계도(啓導) 진달(陳達)하여 직분을 다해야 할 것인데도 한갓 유유 범범(悠悠泛泛)283) 만 일삼고 아예 조금치도 걱정하고 민망해하는 마음이 없었다. 바야흐로 또 위권(威權)을 쥐고 그 세력이 조정을 흔들며 진퇴 승출(進退陞黜)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위화(危禍)를 피하고 조정에 함께 있지 않으려고 한 것은 반드시 그의 폭위(暴威)를 떨침을 두려워하는데 연유한 것이 아님이 없는데도 도리어 모든 책임을 임금에게 돌렸으며, 심지어 ‘실망’ 등의 말로써 마치 공동(恐動) 협박하는 것처럼 한 것이 있었으니 그 무엄함이 심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직무(職務)를 벗어나도록 청하는 장본(張本)이 된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장령(掌令)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말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4책(策) 중에서 조금 편리하고 행하기 쉬운 것을 골라 상의하여 법으로 정할 것을 청하고, 이내 이교악(李喬岳)이 주정(酒酲)을 부려서 체통을 잃은 일을 신구(伸救)하니, 임금이 예비(例批)284) 를 내렸다. 이교악의 일은 여러 사람의 눈으로 함께 본 바인데 어떻게 속일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채응복은 호당(護黨)에만 마음이 쏠려 이에 감히 변명하였으니, 임금을 속인 것이 심하다 하겠다.
윤6월 11일 경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밖에 있으면서 누차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후의 비지(批旨)에 이미 내 심정(心情)을 다 말했는데도 한결같이 돌아보지도 않고서 사장(辭章)을 또 보내니 놀랍고 부끄러워 타이를 바를 모르겠다. 내가 본래 불민(不敏)한데다 침묵을 지키는 병통이 있으니, 경(卿) 등의 영영 가려는 계획을 하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 연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바라건대 경은 선조(先朝)의 특별한 대우(待遇)를 생각하고 국가의 많은 어려움을 걱정해서라도 즉일로 올라와서 공무(公務)를 집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만성은 그들의 일당 중에서는 약간의 재주와 인망이 있는 편인데, 한 번 휴가를 얻고 가서는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경연 석상에서 엄교(嚴敎)가 있었기에 화(禍)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윤6월 12일 신미
황일하(黃一夏)를 도승지(都承旨)로, 홍우전(洪禹傳)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삼았다. 홍우전은 음사(陰仕)에서 늦게 등과(登科)하였는데, 본디 재기(才器)도 모자라고 명성도 드러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큰 도(道)에 임명되니, 공론이 놀라와 하였다.
충청도 수사(忠淸道水使)가 안흥진(安興鎭)에다 황당선(荒唐船)의 선원(船員)을 구류(拘留)하고 있는 일을 장문(狀聞)하니,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배가 완전하고 또 선패(船牌)의 공문(公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등주(登州)285) 사람임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는데, 육로(陸路)로 압송(押送)하는 것은 또한 폐단이 있으니, 다시는 범경(犯境)치 말라는 취지로 엄중하게 이르고 놓아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만일 이러한 배가 우리 경내에 접근하면 잡아둘 필요가 없이 많은 병졸을 이끌고 총포(銃砲)를 쏘아 쫓아서 즉시 도망치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으니, 청컨대 이런 뜻을 본도의 감사나 수사(水使)에게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윤6월 13일 임신
안중필(安重弼)·김재로(金在魯)·서명연(徐命淵)을 승지(承旨)로, 신방(申昉)을 이조 좌랑(吏曹佐卽)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홍원익(洪元益)의 일은 정론(停論)하였다.
윤6월 15일 갑술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태좌(李台佐)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본부(本府)의 정축년286) 사의인(死義人) 강흥업(姜興業)·구원일(具元一)·황선신(黃善身)의 자손과 황조(皇朝)287) 의 총병(摠兵) 이여매(李如梅)의 5세손 이면(李葂) 등을 채용(採用)하는 일을 선조(先朝)의 갑오년288) 에 당시의 수신(守臣)이 진소(陳疏)하여 윤허를 얻은 바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조(聖朝)에서 구은(舊恩)을 생각하고 공을 갚는다는 뜻에 있어서도 진실로 마땅히 특별한 수록(收錄)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그런데 이면(李葂)은 해도(海島)에서 고경(苦境)에 빠져 헛되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본부의 소관인 초지 만호(草芝萬戶)가 바야흐로 임기가 다 되었으니, 이제 만일 이면(李葂)을 이 자리에 임명한다면 이는 선조(先朝)의 채용하라는 명을 따름도 되고 한 지방을 격려 권장하는 방편도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시행하라 명하였으나, 병조에서 이면(李葂)이 일찍이 별장(別將)을 지낸 바 있다고 복계(覆啓)하여 시행하지 않았다.
윤6월 16일 을해
도목 정사(都目政事)289) 를 행하여 이재(李縡)를 도승지(都承旨)로, 조세망(趙世望)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이하정(李夏禎)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이사성(李思晟)을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윤6월 17일 병자
계속해서 도목 정사를 행하여 서명균(徐命均)을 교리(校理)로, 홍정필(洪廷弼)을 수찬(修撰)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헌납(獻納)으로, 이정소(李廷熽)를 지평(持平)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정언(下言)으로, 신석(申晳)을 응교(應敎)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덕수(李德壽)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심각하게 논하고 이어 신법(新法)을 만들어 시행할 수 없음을 말하였으며, 각종 명목의 부과금을 덜고 다만 베[布] 한 필씩만 받아서 절약에 힘쓰며, 몸소 솔선하여 모범이 되어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보전함을 제일의 명제(命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윤6월 19일 무인
성균관(成均館)에서 아뢰기를,
"성균관에 거재(居齋)하는 유생(儒生)들이 전조(銓曹)에서 태학(太學)의 공천(公薦)을 채용하지 않았다하여 권당(捲堂)290) 하는 일까지 있어서 유생들을 불러놓고 난처하다는 뜻으로 타이르니, 재임(齋任)291) 등이 말하기를, ‘태학에서 공천을 하는 것은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내려오는 구규(舊規)로 재임이 맡아서 여러 선비를 천거하고 권점(圈點)으로 비의(備擬)292) 까지 하여 보내는 것이니,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고 중요한 것인데도 이번의 대정(大政)에서는 폐하고 행하지도 않았으니, 이게 무슨 정사(政事)하는 격식이겠습니까? 이번에는 초사(初仕)의 자리가 꽤 많았는데도 오히려 적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어느 때에나 다시 써주게 되겠습니까? 만일 태학의 공천을 쓸 것이 못된다고 여긴다면 이러한 실상이 없는 조문(條文)은 무엇하러 두고서 한갖 여러 선비를 모욕하는 결과만 만드는 것입니까? 선비들을 경시하고 현관(賢關)293) 에게 수모(羞侮)를 끼침이 이보다 더 할 수 없으니 결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권해서 들어오도록 하라.’고 명하여 며칠 후에야 비로소 들어왔다. 태학의 재임(齋任)이 대정(大政)이 있을 때마다 입사(入仕)할 만한 사람을 뽑아서 염명(剡名)하고 권점을 쳐서 의망(擬望)에 대비하여 전조(銓曹)에 통보하는 것이 바로 구규(舊規)인 것이다. 당론(黨論)이 날로 성하여지고 사습(士習)은 경박(輕薄)해져서 성균관에 있는 유생들은 거의가 시골에 사는 무치(無恥)한 자들이고, 재임(齋任)도 사정(私情)에 따라서 천거하기 때문에 전관(銓官)들이 간혹 쓰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옛날을 규정을 정폐(停廢)한 것은 책임이 전관(銓官)에게 있지마는 유생들이 그 일을 스스로 다투어 권당(捲堂)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해괴한 일이다. 그들이 ‘현관(賢關)에게 수모(羞侮)를 끼쳤다.’고 한 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일컬은 말인 것이다.
지평(持平)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논하기를,
"장령(掌令) 김담(金墰)이 인피(引避)하면서 한 말은 말뜻이 매우 군색(窘塞)하였고 그의 처치(處置)도 잘못된 것이었는데, 그 억지로 나오라는 것을 도리어 다행하게 여겨 의기 양양하게 출사(出仕)하고 있으니, 그 처신하는 의리는 구차함을 면키 어려우므로 마땅히 그를 체직시켜 경려(警勵)의 뜻을 보여야 합니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사성(李思晟)은 얼마 전에 구성 부사(龜城府使)에 임명되었는데도 바로 사조(辭朝)하지 않고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의뢰하기를 도모하더니 과연 본직(本職)에 임명되어 다른 사람의 말이 마침내 맞게 되었으므로, 여론이 크게 놀라와합니다. 청컨대 그의 관직을 파하고 수사(水使)의 선임을 신중히 하소서."
하니, 임금이 ‘체직·파직이 모두 마땅치 않다.’고 비답하였다. 이일은 대체로 김담이 이교악(李喬岳)의 일을 논핵했던 것을 배척한 것으로 이정소도 또한 이교악에게 아부(阿附)한 사람이다. 최석항(崔錫恒)이 이때에 병조의 장관이었는데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의뢰한다.’느니, ‘다른 사람의 말이 마침내 맞았다.’느니 하는 말로써 들추고 있으니, 너무도 비통하다 하겠다.
윤6월 20일 기묘
사시(巳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집(李㙫)이 대부(大阜)에 진(鎭)을 설치할 것을 계청(啓請)한 후 전선(戰船)과 군기(軍器) 집물(什物)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점에 따라 변통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본진(本鎭)은 해로(海路)의 요충지(要衝地)에 자리 하고 있어서 이미 첨사(僉使)를 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후로는 줄곧 버려두어서 아직껏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 의논하기를, ‘화량(花梁)과 대부(大阜)는 거리가 가까운데 첨사를 겹쳐 두어보아야 위급한 경우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두 곳의 형세를 살펴서 한 진(鎭)에만 설치하면 전선·군기·방비군(防備軍)을 따로 조치 할 일이 없다.’ 하니, 청컨대 경기 수사(京畿水使)에게 명하여 두 진(鎭)의 형세를 살펴서 버리든지 쓰든지 하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청주(淸州)의 죄인 박세명(朴世命)을 효시(梟示)하라는 관문(關文)이 감영(監營)에 도착하였는데도 공공연히 버려두고 즉시 거행치 아니하니, 청컨대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양래(尹陽來)와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진망(李眞望)을 나문(拿問)하고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校理) 서명균(徐命均)이 상소하여 병신년294) 의 개록(改錄)한 일로 인혐(引嫌)하여 사직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의 정세는 모든 법도가 해이하여 날로 위망(危亡)의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당론(黨論)의 병폐가 아님이 없습니다만, 전하께서 너무나 침묵만 지키며 경책(警責)을 가하려 하지 아니하고 그 방자하게 구는 데에다 일임(一任)시키고는 마음을 쓰지 않으시는 데에도 연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신(群臣)들도 다시 때로는 행동만을 살펴보면서 제 살길만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전후로 옥당(玉堂)에 피선(被選)된 사람이 숲처럼 많건만 혹은 탄핵을 가하여 귀양을 보내 놓고도 오랫동안 풀어줄 줄도 모르며, 혹은 억측만으로 트집을 잡아 무단히 묶어두고 기망(欺罔)하는 자나 무기력한 자들로만 구차하게 수효를 채워 놓았으니, 그들의 사로 잡고 놓아 주고 두려워하고 방비하는 계책은 실수가 없는 계산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비(例批)로 답하였다.
윤6월 22일 신사
병조 판서(兵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이 병으로 사직(辭職)하고, 이어 이사성(李思晟)의 일을 변명하기를,
"신은 이사성에게 평소에 정분이 없으며 이력과 재기(才器)가 가려 쓸 만하였으니, 이번의 의망(擬望)에 어찌 조금의 사정이라도 그 사이에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부탁의 말이 이미 신의 귀에 들어온 일도 없으며 응락(應諾)의 말도 신의 입에서 나간 일이 없는데, 헌신(憲臣)은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반연(攀緣)295) 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에 옥당(玉堂)의 차사(臺官)를 살펴보니 대관(臺官)의 말이 지나쳤음과 전관(銓官)이 의망을 응락한 것을 알 수 있으니, 경(卿)은 피혐할 것이 없다."
하고는, 인하여 의원(醫員)을 보내서 간병(看病)케 하였다. 대체로 부응교(副應敎) 김제겸(金濟謙)이 이정소(李廷熽)의 체직을 차정(箚請)했는데, 그 가운데 이사성은 사무를 잘 알므로 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6월 24일 계미
황귀하(黃龜河)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평안도와 함경도 감사(監司)가 다같이 우박의 재해를 장문(狀聞)하였다.
윤6월 25일 갑신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296) 을 강(講)하게 하였다.
윤6월 26일 을유
밤 5경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이광좌(李光佐)가 임금의 별유(別諭)로 인하여 사직소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연주(筵奏)의 말이나 하유(下諭)의 글을 보면 오로지 국사(國事)는 이제 어찌 할 수 없다고 여겨서 모두가 퇴둔(退遁)할 생각만 품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랫사람이 대체(大體)를 논하면서 분발을 청할 때에는 격절(激切)할수록 더욱 좋고, 위에서 대고(大誥)를 내려서 스스로를 책할 때에는 억손(抑損)297) 할수록 더욱 좋습니다. 이러한 도리로 조석으로 근간(懃懇)한다면 대저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몇몇의 신하가 물러나 있음을 들어 그것이 모두 임금 때문이라고 정직하게 말하고, 심지어는 흥원(興元)298) 의 장졸(將卒)들이 죄기조(罪己詔)를 청하여 초래(招來)되었음을 인용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사체(事體)이며, 그 말을 듣게 된 사람의 압박감이나 놀라움과 부끄러움도 도리어 어떠했겠습니까? 아! 지금의 천재(天災)·시변(時變)과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계책은 위태함이 거의 멸망될 형세가 있으니, 묘당(廟堂)에서 성상에게 진려(振厲)하기를 바라는 것은 진실로 좋은 계책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부터 마음을 깨끗이 가지고서 공도는 넓히고 사정은 버려서 지성으로 일을 보살핀 뒤에라야 바야흐로 상천(上天)이 감동할 것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편당(偏黨)은 갈수록 심한데다가 안일(安逸)은 전과 같고 혼란하고 느슨하며 혼미(昏迷)하여 회복될 줄을 모르는데, 상하(上下)를 감동시켜 〈좋은 사람이〉 모이고 〈나쁜 사람이〉 진숙(振肅)299)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신 같은 황무(荒蕪)한 재식(才識)으로 지금같은 위태로운 세도(世道)를 헤아려 볼 때에 비록 심력(心力)을 다한다 하여도 결단코 한 푼의 도움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폐복(廢伏)한 몸으로 병세(病勢)의 괴로움은 또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나마 어떻게 자력(自力)으로 달려와 벼슬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로 답하고 윤허치 않으면서 들어오게 하라고 전하였다. 이광좌는 본래부터 중망(重望)을 자부하여 숙종조(肅宗朝)에 윤선거(尹宣擧)의 일을 소변(疏辨)하다가 개석(開釋)을 얻지 못하자 곧 초야(草野)로 물러났다. 국휼(國恤)이 있은 초기에 산릉 도감 제거(山陵都監提擧)로 차임되어 비로소 한 번 나왔었는데, 서종섭(徐宗燮)이 상소하여 공격하였다. 그후로 여러번 제명(除命)이 있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윤6월 27일 병술
사시(巳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남취명(南就明)을 승지(承旨)로, 홍용조(洪龍祚)·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이유(李瑜)를 지평(持平)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윤6월 29일 무자
조태억(趙泰億)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윤6월 30일 기축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이중협(李重協) 등이 글의 뜻에 따라 삭전(朔奠)을 친행(親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으나 각환(脚患)이 있기 때문에 따르지 못하였다. 승지 남취명(南就明)이 말하기를,
"지금은 더위가 한창이고 양암(諒闇)300) 중이신데 성체(聖體)에 혹 손상(損傷)이라도 있을까 염려되니 날마다 진강(進講)할 것이 없이 만기(萬機)를 살피는 여가에 상시로 탐구(探究)를 더하시면 거의 성학(聖學)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연(法筵)은 오랫동안 폐지되고 강관(講官)은 수효만 채운 처지여서 여러 신하들의 심정(心情)이 답답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대(召對)의 명은 잇따라 내렸으나 이중협 같은 무리들만이 초초(草草)하게 강설(講說)하니, 어떻게 비보(裨補)301) 가 되며 계옥(啓沃)302) 이 될 것인가? 남취명의 말은 나왔다면 마주 대하여 아첨하는 것이니, 사람들이 그의 아첨하는 습성을 미워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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