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경인
사헌부에서 황해 수사(黃海水使) 이여적(李汝迪)의 파직을 논핵하기를,
"그는 일찍이 안동(安東)의 영장(營將)으로 있으면서 도둑 잡기에 싫증이 생겨 부모의 나이 70세라고 핑계하여 마침내 체직하기에 이르렀으니, 본 수사를 제수함에 있어서 마땅히 법에 따라 사면(辭免)했어야 옳았을 것인데 영화를 탐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부임하니 소문이 해괴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취상(尹就商)의 일은 정론(停論)하였다.
평안도의 영변(寧邊) 땅에서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몸통은 하나에 머리가 두 개였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7월 2일 신묘
사시(巳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김창흡(金昌翕)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대마도(對馬島) 구도주(舊島主)의 아들 암환(巖丸)의 아명 도서(兒名圖書)303) 를 구례(舊例)에 의하여 발급해 줄 것을 장청(狀請)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였다. 대개 대마 도주(對馬島主)는 구도주의 아우로서 임시 대행한다 칭하고, 암환이 나이가 어려서 사립(嗣立)치 못했으나 도주가 사주(嗣主)로 정했기에 따로 서계(書契)를 올리고 전례(前例)를 들어 청해 왔기에 마지못해서 이를 허락하였다. 왜인(倭人)의 심성은 교활하고 간사하여 모든 그들의 소청을 처음에는 거절하다가도 수년을 끌면서 요구하면 거의 들어주었기에 그러한 습성이 상례가 되어 기어코 이기고야 말았으며, 역관(譯官)의 무리들도 그들의 돈을 받고 수신(守臣)에게 겁을 주기도 하고 혹은 조정을 설득하기도 하여 번번이 그들에게 꺾이게 되었으니, 식자(識者)들이 깊이 걱정하였다.
7월 3일 임진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여 일을 논했는데, 맨 먼저 양역(良役) 4조(條)의 행할 수 없음을 진달하고, 절용(節用)과 애민(愛民)의 훈계를 마음속에 체념(體念)하여 먼저 궁내(宮內)로부터 절검(節儉)에 힘써 백성을 구호하고 비용을 줄이는 성의(盛意)를 보이게 하며, 각사(各司)의 긴요치 않은 비용도 모두 줄일 것을 청하였다. 또 양정(良丁)으로 군역(軍役)을 기피하는 자와 교생(校生)·원생(院生), 각 역보(驛保), 감영(監營)·병영(兵營)의 군관의 무리들은 통틀어 군역에 편입하고 즉시 편입치 않은 수령은 도신으로 하여금 적발되는 대로 논죄케 할 것을 말하였다. 또 각 군문의 은화를 혹은 친구에게 빌려줬다느니 혹은 장사치에게 내주었다느니 하고 몇 해를 받지 않아 저축이 바닥이 났으며 이속(吏屬)들이 또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것을 말하여, 각 아문(衙門)에 분부(分付)하여 법에 따라 무겁게 다스리되, 많은 자는 형조에 이송(移送)하여 엄격히 가두고 받아내며 사적으로 빌려준 주장(主將)은 추고(推考)하여 경책(警責)할 것을 청하였다. 또 무리하게 송사를 좋아하는 자의 소송 중인 전답(田畓)을 궁가(宮家)에 잠매(潛賣)하거나, 혹은 내수사(內需司)에 투탁(投托)하기를 원하는데 궁가에서 값이 헐함을 탐내어 사서 자기 물건으로 만드는 것은 실로 좋은 일이 아니니,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되돌려 주어 민원(民怨)을 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문관(文官)이 너무 많아 까닭없이 정체(停滯)되어 있으니, 무겸(武兼)304) 중에서 10과(窠)305) 만 덜어내어 문겸(文兼)306) 을 만드는 것이 마땅함을 말하여 병조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처리케 할 것을 청하였다. 또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을 간곡히 불러올 것을 청하였다. 또 구성 부사(龜城府使) 양익표(梁益標)는 전일에 북쪽 변방의 수령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그 곳에 머물러 있기를 싫어하다가 과연 웅부(雄府)를 얻게 되었고, 정평 부사(定平府使) 박동추(朴東樞)는 본래 변방의 용열한 무변(武弁)이었는데 갑자기 관북(關北)의 명부(名府)에 승진되었으며, 남원 현감(南原縣監) 이의린(李宜麟)은 전임(前任)이 양천(陽川)이었는데 정령(政令)이 소홀하고 오활(迂闊)하여 온 경내가 원망하고 있음을 논핵하여 3읍의 수령을 모두 파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겠다. 3읍의 수령들은 치적(治績)을 알아본 뒤에 처리하여도 안될 것은 없는데, 앞질러 파직을 청함은 매우 타당치 못하다. 간민(奸民)들이 바친 것을 내탕(內帑)에 넣었다는 말은 듣기에도 몹시 놀랄 일이니 내가 마땅히 신칙하겠다."
하였다.
7월 5일 갑오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황해 수사(黃海水使) 이여적(李汝迪)은 대론(臺論)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는데, 그 뒤에 대신(臺臣)이 사실을 잘못 알았다고 인피(引避)하였습니다. 대론이 이미 사실과 틀렸다면 그 사람을 마땅히 잉임(仍任)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삼남(三南) 지방에 양전(量田)을 한 후에 농사가 흉작이어서 작년의 실결(實結)은 전에 비하여 더욱 줄었습니다. 계해년307) 에는 경차관(敬差官)308) 을 보내지 않고, 다만 전답의 본주(本主)로 하여금 본인의 재탈(災頉)을 면임(面任)에게 단자(單子)로 올려서 차차로 상부 관청에 올리게 하였는데 금년에도 이대로 거행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수어사(守禦使) 권상유(權尙游)가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만직(李萬稷)은 치적(治績)의 효과가 매우 두드러지니 4월까지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창고를 고쳐 지으려면 물력(物力)을 판출하기가 어려우니 관서(關西)309) 의 세곡(稅穀) 4, 5천 석을 만약 발매(發賣)하도록 허가하여 주시면, 본전(本錢)은 호조(戶曹)에 납입하고 그 이익을 창고 공사에 보태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니, 청컨대 대신과 호조에 하문하소서."
하니, 김창집과 민진원이 적당히 헤아려 허락하여 줄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재상(災傷)이 있으면 전답을 조사하는 것은 나라의 대정(大政)이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하여도 사사(私事)가 공사(公事)를 이기지 못하는 것인데, 수령(守令)들은 함부로 허재(虛災)310) 를 보고하여 미혹한 짓으로 백성에게 칭찬을 받고 경차관은 정분의 친소(親疏)에 따라 재해의 다소(多少)를 매기니, 한갓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하는 폐해만 끼칠 뿐이고 조사의 효과는 전연 없었다. 그래서 여론은 차라리 경차관을 보내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하니, 그러면 조종조(祖宗朝)에서 법을 만들었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관서(關西) 지방의 세곡(稅穀)을 실어내지 않고 본도(本道)에 남겨둔 것은 심원(深遠)한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데, 근년에는 경비가 바닥이 나서 손댈 곳이 없으면 호조에서 간간이 발매한 일이 많았고 감사도 또한 사기를 원했으며, 각 군문(軍門)에서도 덩달아 신청하여 시끄럽게 굴었다. 사인(私人)을 보내어 싼 값으로 팔도록 하면 돈의 태반은 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기 마련인데, 근래 몇 년 동안 저축이 남김없이 탕갈(蕩竭)되었으니, 재부(財賦)를 맡은 자의 죄를 이루 다 말하겠는가?
이교악(李喬岳)을 승지(承旨)로, 이정소(李廷熽)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판윤(判尹) 권성(權𢜫)이 밖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어 양역(良役)의 4조(條)의 일을 논하기를,
"호포(戶布)와 구전(口錢)은 지금에는 행하기가 어렵고 결포(結布)에 있어서는 정부나 민간(民間)이 다같이 폐해를 받아 왔으니 균일하게 1필(疋)씩을 감하면 이익이 생기는 반면 손해도 따르고, 다만 침징(侵徵)311) 만을 막으면 재정은 줄어도 효과는 빠를 것이니, 시험삼아 유포(游布)나 결포(結布) 두 가지 중에서 조금씩만 더 받아서 운용을 잘하면 양역의 폐해를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의 급무(急務)는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사치를 금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니, 청컨대 신의 소(疏)를 묘당(廟堂)에 내리어 좋도록 변통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稟處)케 하였다.
7월 8일 정유
이날은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무너졌는데, 8도(八道)가 다 그래서 감사의 장계가 잇따라 들어왔다. 갖가지 곡식이 모두 손상을 입었는데 함경도에서는 민가(民家)가 침몰하여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한다.
박치원(朴致遠)·김담(金墰)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7월 10일 기해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헌(李瀗)이 74석(石)의 곡식을 사용(私用)한 죄는 마땅히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대조하고 조사하여야만 하는데, 율문을 살펴보면 감수(監守)하는 자가 스스로 도용(盜用)한 경우와 재물을 받은 경우와 위법(違法)으로 뇌물을 받았을 경우 죄를 논함에 있어서 경중(輕重)이 각각 다르니, 청컨대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이 모두 경한 쪽으로 따라 헌의(獻議)하였다. 이헌은 일찍이 여주(驪州)에 부임하여 수없이 많은 전결(田結)을 숨겨 도용(盜用)하고, 사사로이 조곡(糶穀)을 퍼내어 배에 싣고 돌아오니 소문이 낭자(狼藉)하여 금오(金吾)312) 에서 아뢰었는데, 가볍게 감죄(勘罪)함이 마땅하다 하므로 여론이 괴이하게 여겼다.
7월 11일 경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이다.】 에서 논핵하기를,
"당진 현감(唐津縣監) 김주현(金冑賢)은 정사(政事)를 간리(奸吏)에게 맡겨 두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입고 있으며, 또 청렴스럽지 못하다는 비평이 많아 경내(境內)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꾸짖어 이웃 고을에서도 대부분 침을 뱉고 비루(鄙陋)하게 여겼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황해 병사(黃海兵使) 조세망(趙世望)은 본디 청렴하다는 명성(名聲)이 없는데다 곤임(閫任)에는 합당치 못한 사람이었기에 제수(除授)하라는 왕명이 내리자 여론이 더욱 놀라와하였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윤은서(尹殷瑞)는 자신이 창관(倉官)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비루한 일을 많이 행하여 면박(面駁)을 당한 일까지 있었는데도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태연하게 눌러 앉았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엊그제 후사(喉司)313) 에서 이헌(李瀗)의 일은 법에 의거하여 품계(稟啓)를 하면서도 윤취상(尹就商)을 방송(放送)하라는 명에 대해서는 잠잠히 한 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일심(一心)으로 봉공(奉公)하고 일마다 소임을 다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대개 〈범죄에 대하여〉 의언(議讞)314) 하는 규정은 죄범의 경중을 막론하고 으레 수금(囚禁)하라고 하여 왔는데, 이번의 판부(判付)315) 는 비록 너그럽게 봐주는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무부(武夫)의 교만하고 교활한 습성을 북돋아주고 나라에서 옥사 다루는 체통만 손상시키는 처사이니, 청컨대 윤취상을 방송하라는 명을 거두시고 해당 승지를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문신(文臣)들에게 전강(殿講)을 시키고 우수한 사람 5인을 뽑아서 말[馬]을 주었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이 상소하여 숙묘조(肅廟朝)의 어필(御筆) 간본(刊本)을 올리면서 운각(芸閣)316) 으로 하여금 인출(印出)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소사(疏辭)를 살펴보고, 이어 선조(先朝)의 어필(御筆)을 살펴보고서 경건하게 받드니 추모(追慕)의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경(卿) 등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영세(永世)의 보배가 되도록 하였으니, 경 등의 충정(忠貞)을 내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긴다."
하고, 이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모두 가자(加資)를 명하고 교서관(校書館)에 내려 간행(刊行)하도록 하였다.
7월 12일 신축
밤 2경과 3경에 달무리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의현(李宜顯)이 사직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捲堂)한 일로 누차 상소하여 굳이 사직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만성(李晩成)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신무일(愼無逸)을 정언(正言)으로, 이기익(李箕翊)·이인복(李仁復)을 승지(承旨)로, 김재로(金在魯)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유성추(柳星樞)를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평안도 감사가 또 우박의 재해를 장문(狀聞)하였다.
7월 13일 임인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형조의 죄인 애환(愛環)을 방송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엄중히 형벌을 가하여 정상을 밝히게 할 것과 해당 당상관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과 홍우창(洪禹昌)을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케 할 것 등을 청하니, 임금이 다만 말미(末尾)의 두 가지 일만 따랐다.
7월 15일 갑진
사시(巳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이 투소(投疏)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석항(崔錫恒)을 저격(狙擊)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최석항이 오랫동안 서전(西銓)317) 을 맡아 오면서 숱하게 남의 비평을 들었고 그의 진용(進用)한 바는 거의가 아유(阿諛)하거나 사적(私的)으로 가까운 사람들뿐이어서 중외(中外)의 의심과 비방이 매우 낭자(狼藉)하여 전후로 대간(臺諫)의 논박을 당함이 여러 차례였으나 아직껏 쭈구리고 앉아 버티어 왔습니다. 그런데 동전(東銓)318) 으로 이배(移拜)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대개 동전(東銓)은 인물을 전형(銓衡)하는 일이 서전(西銓)보다 휠씬 중한데 최석항은 연전에도 서전(西銓)을 맡아 보면서 의주(擬注)하는 즈음에 마음대로 사정(私情)을 썼으니, 그 취사(取舍)의 치우침과 마음씀의 무엄(無嚴)함이 선대왕(先大王)의 밝으신 지감(知鑑) 앞에 낱낱이 드러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정(大政)이 막 열리자마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그 관직을 파하기까지 하였는데, 막중한 전형의 소임을 어떻게 다시 이런 사람의 손에 주어 탁란(濁亂)에 일임(一任)하려 하십니까? 제수하는 왕명이 한 번 알려지자 여론이 크게 놀라와하니 마땅히 빨리 그 관직을 바꾸어 공론이 더욱 격렬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이명(李頤命)은 충정(衷情)을 드러내 보이지도 못하고 도성 밖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당초 이진검(李眞儉)이 아무 까닭없이 날조(揑造)한 것은 이미 허투(虛套)가 되었으니, 이진검은 마땅히 남을 무함한 형률(刑律)에 자복(自伏)했어야 함에도 대간(臺諫)의 계사를 올린 지가 해가 지나도록 아직껏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이진검의 원찬(遠竄)을 윤허하시고 이어 명지(明旨)를 내려 대신으로 하여금 즉일로 조정에 나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동전(東銓)의 장(長)을 헐뜯음이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으니, 내가 매우 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깊이 개탄한다. 바꾸라는 청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상스럽다. 나는 나라의 휴척(休戚)을 함께 한 원로(元老)를 전후로 개유(開諭)하기에 온갖 정곡(情曲)을 다했으나 정과 뜻이 믿음을 얻지 못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니, 내가 심히 부끄러워 할 말이 없다."
하였다. 대개 관원을 진퇴(進退)하는 권한은 오로지 전조(銓曹)에 달려 있었으므로 당인(黨人)들이 혹시나 색목(色目)이 다른 자가 뒤섞이지나 않을까 하여 일체 막아 왔었는데, 최석항이 바야흐로 서전(西銓)을 맡고 있었기에 묘당(廟堂)에서는 마지못하여 준례대로 의망(擬望)에 올렸고, 임금의 낙점까지 나타나게 되니 크게 의구심이 생겼다. 박치원은 사주(使嗾)를 받고 영격(迎擊)에 급급한 나머지 아무 까닭없이 날조하여 무함(誣陷)하자니 거조(擧措)가 해괴하고 패악스러움으로 저들 중에서도 조금 식견이 있는 자는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고, 임금도 또한 그의 정상을 익히 알았으나 끝내 시비를 분명히 가려 엄중한 벌을 가하지 않았으니, 여러 사람들이 이 일로써 더욱 억울하게 여겼다.
7월 16일 을사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이 엄중한 하교를 받자 인피(引避)하여 최석항(崔錫恒)을 무함 훼방(毁謗)하기에 더욱 주력하니 옥당(玉堂)의 이중협(李重協)이 처치하여 체직(遞職)하기를 청하면서 ‘전장(銓長)을 지레 논핵하여 그침이 없이 너무 과격하다.’고 말을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19일 무신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이의현(李宜顯)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영복(趙榮福)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7월 20일 기유
밤에 돈화문(敦化門)의 동쪽 부연(付椽)의 위아래층이 무너졌다. 병조에서 자문감(紫門監)으로 하여금 빨리 고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금년에는 가뭄이 심한 나머지에 사나운 바람마저 연달아 불어 각종 곡물이 거의 말라 죽으니 앞으로 백성들의 일이 염려스러운 정상을 진달하고, 이어 또 말하기를,
"돌아오는 사은사(謝恩使)가 장문(狀聞)하기를, ‘사신의 행차가 거류하(巨流河)의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우리쪽 역졸(驛卒)이 저쪽 사람과 외[瓜]를 갖고 다투다가 맞아서 죽었으므로, 사신이 이 일로 심양(瀋陽)에 글을 보내서 정범(正犯)을 잡아서 법에 따라 처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니, 죽은 사람은 본도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題給)케 하여 은휼(隱恤)하는 은전(恩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재해(災害)가 있는 고을의 수령이 곧바로 대간(臺諫)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부(馬未)와 말이 지체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여러 차례 그 집에 갔어도 만나지 못하였을 때에는 자지(刺紙)만 남겨두고 오게 하며, 또 비록 명관(名官)이 자리에 있더라도 들어가서 만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각도(各道)의 수륙(水陸) 조련(操鍊)은 잇따라 흉년을 만난 탓으로 중지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군정(軍政)이 참으로 소홀(疎怱)해진 듯합니다. 경기(京畿)만은 올 가을 조련을 비록 행할 수 없겠지만, 다른 도(道)에 있어서는 청컨대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로 하여금 조련을 실시케 하고 그 영장(營將)이 순행하면서 점호(點呼)하던 것은 정지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근래에 수령들의 위법한 일이 많은데 저치미(儲置米)나 환곡(還穀)을 관리한다고 핑계하고서 마음대로 손을 대기 때문에 모축(耗縮)의 폐단이 대체로 다 그러합니다. 일찍이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각 고을의 수령이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는 장부(帳簿) 1부를 더 꾸며 감영(監營)에 보내주기로 결정을 하셔야겠습니다. 그래야만 감사가 각 고을의 장부를 보고 그 수령이 유능한지 무능한지 청렴한지 탐욕스러운지를 알게 될 것이며, 수령들도 조심하는 마음이 생겨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할 듯하니, 청컨대 다시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품계가 높고 일에 경험이 있는 의관(醫官) 한 사람씩을 윤번(輪番)으로 직숙(直宿)케 하고 자주 입시(入侍)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금년의 재해(災害) 복심(覆審)은 한결같이 계묘년319) 의 예에 따라 거행키로 결정하였습니다. 삼남(三南)은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어 한 도는 도사(都事)가, 또 한 도는 경관(京官)이 맡고 타도(他道)는 도사로 하여금 제비를 뽑아 부정(不正)을 조사케 하고 바로 들어오도록 하여 경차관(敬差官)처럼 열읍(列邑)을 두루 다니는 일이 없이 문서를 마감함이 좋을 듯합니다. 계해년320) 에는 읍호(邑號)에 낙점(落點)하여 부정(不正)을 조사를 하였었는데 지금도 그 예대로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진계(陳戒)하기를,
"주상께서 사복(嗣服)321) 하신 처음에는 조금도 흠잡을 수 없는 정사였는데, 대한(大旱)과 풍재(風災)가 근년에 볼 수 없었을 만큼 심했고, 궁궐의 정문(正門)이 또한 무너졌으니, 이는 인애(仁愛)하신 하늘의 경고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상께서는 법연(法筵)을 자주 열어 신하들을 인견하시고 글의 뜻을 강론하며 군덕(君德)의 궐실(闕失)과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으시면서 부지런히 치도(治道)를 구하시면 또한 하늘의 마음도 감동시켜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해마다 겹쳐서 흉년이 든 뒤라서 국용(國用)이 거의 탕갈(蕩竭)되었는데 다만 절약하는 길만이 실로 나라를 넉넉케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근본이 될 것이니, 즉 검덕(儉德)을 밝히는 데 힘쓰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였다. 김창집(金昌集)과 수찬(修撰) 이중협(李重協)도 잇따라 그 일에 대하여 진달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요(堯)·순(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힘써야 할 것은 다만 선대왕(先大王)의 유규(遺規)를 잘 계술하는 데 있을 뿐이니, 신민(臣民)들의 바라는 바도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잇따라 실록청(實錄廳)에 나아가 일기(日記)를 살펴보건대 선왕께서는 전후(前後) 거상(居喪)하실 때 성효(誠孝)가 지극하셔서 초상시는 곡성이 그치지 않으셨고, 성복(成服) 후에도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거나 때로는 국휼(國恤) 후에 처음 입시(入侍)하는 사람을 보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곡읍(哭泣)하여 매우 슬퍼 하셨으며, 발인(發靷)할 때나 반혼(返魂)할 때나 교외로 거동하실 때에는 끊임없이 호읍(號泣)하셔 슬퍼하심이 신하들을 감동케 하여 군신(群臣)들도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우느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으며, 삭막(朔望)의 은전(殷奠)이나 오향 대제(五享大祭)는 친히 지내지 않음이 없으셨으며, 비록 몸이 편치 못하실 때에도 섭행(攝行)을 허락하지 않아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이 두 번 세 번 힘껏 진달하였으나, 더러는 허락하시고 더러는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또 학문에도 부지런하셔서 날마다 경연을 열었고 대단한 사고가 없으면 아예 정강(停講)한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하교하시기를, ‘밤이면 책을 읽다가 4경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든다.’ 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혹시 기력이 손상될까 염려하여 조금이라도 섭양(撮養)하는 방도에 유념하실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또 일찍이 하교(下敎)하시기를, ‘매일 진강(進講)한 글은 반드시 8, 90번은 내리 읽는다.’ 하셨습니다. 무릇 효도(孝學)는 백행(百行)의 근원이요 학문은 정치하는 근본인데 선왕의 독효(篤孝)와 근학(勤學)이 이러하셨으니, 어찌 백왕(百王) 위에 우뚝 솟은 성절(盛節)이 아니었겠습니까? 이러하셨기에 그분의 향국(享國)322) 은 50년이나 되었고 치적(治績)도 두드러졌으며, 비록 한때의 실수는 있었지만 마침내 일월(日月) 같은 경신(更新)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을 영구히 잊지 못하므로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죽음으로써 전하께 보은(報恩)코자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안색의 슬픔이나 곡읍(哭泣)의 서러움이 군신(群臣)들을 감동시킨 바도 없으셨고, 대소 제향(大小諸享)를 친히 지내신 때도 한 번도 없으셨으며, 강연(講筵)도 아직 한 번도 열지 않았고 며칠 소대(召對)하시더니 즉시로 정지하고 말았습니다. 성덕(聖德)의 근본되는 바탕이 이와 같으시면 무엇으로써 신민들에게 보이실 것이며, 무엇으로써 정치를 하시겠습니까? 이런 때문에 군신들은 심신(心身)이 풀리고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다시는 봉공(奉公) 진직(盡職)하려는 뜻이 없으니 이같이 하고서 어떻게 나라를 보호하여 지키겠습니까? 조종(祖宗)의 3백 년 기업(基業)과 선왕의 50년 지사(志事)가 전하의 시대에 이르러 추절(墜絶)을 면치 못한다면 후일 전하께서 추회(追悔)하고 자신(自新)하려고 하신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전번에는 친히 연제(練祭)를 행하시고 자주 소대(召對)를 명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기뻐서 서로 하례(賀禮)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사(親祀)나 소대(召對)가 여러 신하들의 몸에 무슨 손익(損益)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런데도 이토록 서로 기뻐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다시는 더 간단(間斷)이 없으시면 성덕(聖德)에는 허물이 없게 될 것이오 나랏일에도 혹시나 희망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서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군신들의 지극히 간절한 심정을 굽어살피시지 않으십니까? 전후로 허튼 말을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매양 유의(留意)하겠다는 교지만 내리시고 채용한 사실은 보지를 못했으니, 만일 신의 말이 불가하다고 여기시면 바로 퇴척(退斥)을 명하시고 만일 옳다고 여기시면 바로 해조(該曹)에 명을 내리소서. 앞으로는 대소 제향을 모두 친히 지내도록 마련하시고 또 내일부터 경연(經筵)을 열어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용동(聳動)케 하시면 실로 종사(宗祀)와 신민(臣民)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또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조(李肇)가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죄다 면계(勉戒)의 말을 아뢰었습니다. 주상께서 어찌 조심스럽게 살피시는 뜻이 없어서 경연을 오랫동안 정지하셨겠습니까? 혹시 옥체(玉體)가 편안하지 않으셔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비록 밖으로 나타난 증상은 없으시더라도 보신하고 조섭하는 일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앞서 드렸던 곤담환(滾痰丸)을 다 드시지 않으셨다니 그러고서도 어떻게 효과를 기대하겠습니까? 혹시라도 거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은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실덕(失德)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사위(嗣位)한 뒤에도 기무(機務)를 재결하신 즈음에 실수한 바는 없었으나 삭망(朔望)의 은전(殷奠)에 간혹 대행[攝行]한 일이 많았고 경연의 개강(開講)도 정폐(停廢)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효사(孝思)에 소홀하고 청단(聽斷)함에 게을러서 그랬겠는가? 다만 항상 편치 못할 때가 많아서 그랬던 것뿐이다. 일찍이 궁료(宮僚)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떠듬거리는 병이 있어서 무엇을 좀 물어 보려다 그만둘 때가 자주 있었다.’ 하였고, 또 유신(儒臣)들이 친히 제사지내기를 청할 때에 각병(脚病)이 있어서 억지로 행하기가 어렵다고 하교한 바도 있었으니, 경연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병원(病源)의 소재(所在)를 짐작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민진원(閔鎭遠)의 처지는 다른 조신(朝臣)들과는 다르니 과연 지성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측근에서 보호하고 마음을 다하여 치료하는 것이 참다운 그의 직분인데, 그 말씨가 간곡하지 못하여 임금에게 알기 쉬운 것부터 설명하여 인도하려는 뜻이 매우 모자랐으니, 듣는 이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임금이 처음으로 주강(晝講)에서 《서전(書傳)》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선조(先朝)의 구례에 따라 무신(武臣)도 함께 입시(入侍)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월 22일 신해
이조(李肇)를 도승지(都承旨)로,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홍계적(洪啓迪)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성복(趙聖復)을 집의(執義)로, 이완(李浣)·송도함(宋道涵)을 장령(掌令)으로, 유복명(柳復明)을 지평(持平)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사간(司諫)으로, 서명균(徐命均)을 헌납(獻納)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정언(正言)으로, 이기진(李箕鎭)을 교리(校理)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열도록 명하였다.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로 진계(陳戒)하여 선왕(先王)이 재변을 당하면 수성(修省)했던 일, 날마다 경연에 납셨던 일, 검박(儉朴)을 숭상하여 용도(用度)를 절약했던 일, 그리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정사에 부지런했던 일들을 본받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박치원(朴致遠)은 소원(疏遠)하고 고약(孤弱)한 사람으로 과감히 신임을 받아 임용(任用)된 전장(銓長)을 논했하였으니, 그 서슬이 있는 기풍(氣風)은 칭찬할 바가 많으며, 더욱이 논한 바도 사실이 공의(公議)를 따른 것인데, 옥당(玉堂)의 처치는 물정(物情)에 크게 어긋난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 제공(諸公)들은 참으로 박치원의 상소가 불가하다 여겨서 이러한 거조를 취했습니까? 적이 유신(儒臣)을 위하여 개석(漑惜)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옥서(玉署)323) 의 처치가 이미 공의(公議)를 따랐다면 다시 부정한 말을 제기하는 것은 나는 진실로 온당치 못하다 여긴다. 이판(吏判)의 제명(除命)이 막 내려지자마자 공격하고 물어뜯음이 이토록 극도에 이르니, 더욱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7월 23일 임자
부수찬(副修撰) 이중협(李重協)이 이정소가 소척(疏斥)한 일로 소장(疏章)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전장(銓長)을 논핵한 것은 참으로 경솔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전장이 선조(先朝)에서 이 소임을 맡아서 주의(注擬)에 편파(偏頗)함이 있다 하여 견파(譴罷)에까지 이르렀었는데, 오늘날 다시 제수(除授)한 것은 비록 성상의 옛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에 힘쓰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그의 처신하는 도리에서는 반드시 감히 나와서 왕명을 받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상소를 올리기도 전에 대신(臺臣)이 경솔하게 논척(論斥)을 가한 것은 너무 과격한 듯하여서 신이 체직(遞職)을 청하기로 처치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도리어 이판(吏判)에게 기척(譏斥)을 가하니 나는 그 말의 타당함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7월 24일 계축
새벽부터 사시(巳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헌납(獻納) 서명균(徐命均)이 박치원(朴致遠)의 일을 상소하여 논핵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붕당이 이미 나누어진 뒤로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각기 다르고 취사(取舍)가 치우친 것은 참으로 저쪽과 이쪽을 논할 것이 없겠지만, 방사(放肆)하고 기탄없음이 오늘처럼 심한 때는 일찍이 보지를 못했습니다. 삼사(三司)의 의망(擬望)을 할 때에는 어렵게나마 힘을 쓰지만, 대성(臺省)의 통의(通擬)를 보면 거개가 함께 어울리는 무리들이 많아서 그 외잡(猥雜)스러움이 극도에 달해 있으니, 논의가 어그러지고 거조가 몹시 패악(悖惡)한 것을 진실로 탓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박치원이 전장(銓長)을 논핵한 일로써도 그 일단(一端)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수(除授)의 교지(敎旨)가 막 내려지자마자 사직 상소도 채 하지 않았는데 서둘러 소장(疏章)을 올려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죄를 구하고 출사(出仕)할 길을 미리 막으며, 심지어 ‘이 사람[此人]’이란 등의 말로써 공공연히 꾸짖어 욕설을 가하면서도 조금의 기탄도 없이 오직 그 말이 심각(深刻)하지 않아서 그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최석항(崔錫恒)이 일찍이 선조(先祖)에서 비록 한때 견파(譴罷)된 일이 있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다시 서전(西銓)에 제수되고 또 이미 왕명을 받았었으니, 지금 그가 하는 말이 과연 사리에 맞는 말입니까? 이는 저격(狙擊)하기에 성급해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게 되자 없는 일을 꾸며서 감시 선조(先朝)의 처분을 빙자한 것에 불과하니, 무엄함이 심하다 할 것입니다. 가령 전장(銓長)이 정세를 헤아리지 못하여 쉽사리 출각(出脚)324) 하고 과연 그의 주의(注擬)가 시론(時論)에 맞지 않았다면 뒤따라 박론(駁論)을 가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지레 짐작하는 정태(情態)는 ‘경론(徑論)325) ’이란 두 글자에 여지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오늘의 조정은 전하의 조정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데 어찌 감히 함부로 당동 벌이(黨同伐異)326) 하는 것이 이토록 극도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패려(悖戾)한 논의는 마땅히 징계(懲戒)하고 막아야 할 것이니, 빨리 척파(斥罷)을 내려 밝게 시비(是非)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시국을 걱정하여 올린 말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나, 척파(斥罷)의 청은 따르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이 졸(卒)하였다. 천수(天壽)는 61세요, 시호는 효간(孝簡)이니, 김주신은 숙종(肅宗) 계비(繼妃)의 아버지이었다. 천품이 염정(恬靜)하고 의도(儀度)가 단아(端雅)하였으며, 소시(少時)적부터 문사(文辭)를 좋아하여 사우(士友)들이 추앙하고 허여하였다. 국구(國舅)가 되어서는 더욱 근신하는 마음을 가져 평소에 검약(儉約)함이 한사(寒士)와 다름이 없었고, 벼슬길에 나아가 일을 처리할 적에는 자신을 낮추기에 힘썼으며, 가내(家內)의 행위도 독실하여 숙모를 어머니처럼 섬겼고, 형의 자부(子婦)를 거두어 집을 지어주고 생계를 꾸려 주었다. 조정의 일에는 일찍이 간섭함이 없었고 또한 부탁하는 일도 하지 않았으니, 시론(時論)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평소의 친구들도 혐의를 받을까봐 왕래를 끊었지만 김창집(金昌集)만은 척의(戚誼)가 있다 핑계하고 아무때나 거리낌없이 왕래하였는데, 간혹 그에게 꾀여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세상이 점점 말 못할 지경에 빠져들어 힘으로 만회(挽回)할 수가 없음을 보고서 근심과 울분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날마다 전국 술[醇酎]만 마시고 여자를 가까이 하여 수명을 재촉하였다 한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이 졸서(卒逝)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대비전(大妃殿)에서는 당연히 거애 절차(擧哀節次)가 있어야 하겠지만, 주상께서도 거애하는 예(禮)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마련하라 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전(大殿)에서 거애(擧哀)하는 절차는 예문(禮文)이나 등록(謄錄)에 모두 기록된 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327) 이 졸서하였을 때의 전례를 상고해 보라 명하였다.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이번은 그때와 차이가 있기에 마련하지 아니하였습니다만, 성교(聖敎)가 이러하시니 대내(大內)에서 거애(擧哀)하시는 것으로 《의주(儀註)》328) 를 마련하여 들입니다. 그러나 주상께서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계시기에 옷은 시사복(視事服)으로 마련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
하고, 마침내 별전(別殿)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경은 부원군은 비록 서질(署疾)은 있었으나 정력이 아직 건장(健壯)하였고 나이도 늙지는 않았으므로 신명(神明)께서 도와서 약을 쓰지 않아도 병이 낫기만을 바랐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목숨을 빼앗아 영원히 세상을 떠났다. 자전(慈殿)께서 애훼(哀毁) 중에 또 망극 지통(罔極之痛)을 당하셨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비통함을 억제 하기 어렵다. 예장(禮葬) 등에 관한 일은 해조(該曹)에서 거행하고 초상시의 모든 소용 물품은 각사(各司)의 관원이 직접 나가서 주선하라."
하고, 이어서 녹봉(祿俸)은 3년을 기한하고 그대로 지급할 것과 백목(白木)329) ·마포(麻布) 각 5동(同), 쌀 50석, 각종 비단 10필, 장생전(長生殿)의 관판(棺板) 한 벌을 실어보내라 명하였다.
7월 25일 갑인
신시(申時)경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7월 27일 병진
진시(辰時)에서 오시(午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창집(金昌集) 등이 따로 대비전(大妃殿)에 계품(啓稟)하여 나랏일을 생각해서 억지로 미음(米飮)이라도 드시고 기력을 부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위로는 나라의 제사가 있고, 다음에는 주상의 지성스런 간권(懇勸)이 있으며, 아래로는 사친(私親)께서 생시에 늘 음식에 대하여 걱정하시던 일을 생각하여 정리(情理)를 억제하고 자주 미음을 들고 있으니, 염려치 말라."
하였다.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서명균(徐命均)의 상소의 말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진소(陳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박치원(朴致遠)이 전장(銓長)330) 을 논척(論斥)한 것을 신도 또한 공정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간신(諫臣)이 방금 또 ‘남을 저격(狙擊)한다.’고 논척하여 스스로 남의 편역을 드는 죄과(罪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일로 인하여 막된 소리로 헐뜯는 말이 여러 대간(臺諫)에게 뒤섞여 미쳤습니다. 신도 자신이 외잡(猥雜)한 무리임을 이미 스스로 알고 있는데, 어찌 분명히 거론하여 바로 배척하지 않고서 여러 대간들로 하여금 모두가 불안을 품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적이 간신(諫臣)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박치원의 일은 나도 사실 미워한다.’고 답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조문명(趙文命)이 진소하여 사직하면서 또 말하기를,
"신이 넉 달 동안 밖에 있다가 돌아와 조정의 형상을 보니 그다지 괄목(刮目)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박치원이 전장(銓長)을 영격(迎擊)한 상소만이 나왔는데, 이는 이른바 ‘못할 짓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다만 저 중신(重臣)은 나이는 먹었으나 슬기는 많으며 근실하고 충순(忠順)하여 주상께서 사위(嗣位)하신 처음부터 뭇사람의 지탄(指彈) 속에 홀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공사(公事)를 먼저하고 사사(私事)는 뒤로 하는 것이나, 나라를 근심하여 진췌(盡瘁)331) 하는 정성을 그가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대개 그의 마음 속에서는 이 사람만 이 땅에서 쫓아버리고 뒤를 잇는 사람이 없다면 영구히 무사함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차마 이러한 아주 부끄러운 짓을 하였을 것인데, 유독 곁에서 보던 이의 손뼉침이 없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이 일이 오로지 박치원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면 구태어 책망할 것까지도 없겠습니다마는, 그렇지 않다면 이 일을 꾸민 자는 이른바 ‘공연히 겁만 낸다.’는 것입니다. 간신(諫臣)이 척파(斥罷)를 청한 것은 지극히 정성스러운 일임에도 끝내 가부(可否)가 없으시니, 처분이 이러시고도 박치원 같은 무리가 다시 없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다만 예비(例批)만 내리고 별로 분변하는 말이 없었다.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누차 병조 판서를 맡았으나 한 사람의 사인(私人)도 없었다는 것은 유독 여러 무변(武弁)들만이 잘 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사인(私人)을 진용(進用)하고 공론을 돌보지 않은 것이 한결같이 대신(臺臣)의 인피(引避)한 말과 같았다면, 어찌 그 즉시에 공격을 아니하고 이렇듯 뒤늦게 허물하는 논란을 벌이니 어찌된 일입니까? 신은 병신년332) 에 개정(開政)333) 에서 우선 파직된 뒤에 약원(藥院)의 일로 엄지(嚴旨)가 갑자기 내려져서 황망하게 뛰쳐나가 궐하(闕下)에서 대죄(待罪)한 바 있었고, 이튿날은 바로 의주(擬注)의 일로 특파(特罷)의 명을 받았었으나 얼마 후에 대신의 연주(筵奏)로 인하여 다시 쓰라는 은전을 입기에 이르러서는 바로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제수를 받았고, 비답으로 개석(開釋)334) 을 분부한 지 겨우 일 년만에 또 서전(西銓)을 맡으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곡절은 대략 이와 같은데 지금 대신(臺臣)의 소피(疏避)함이 이 지경에 이르니, 신은 적이 그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근래의 이러한 습성을 나는 참으로 통탄하게 여기고 있으니 결단코 이러한 일로 인입(引入)하여 그의 쫓아 버리려는 계책에 빠져서는 아니될 것이니, 경(卿)은 관대한 도량으로 그다지 혐의할 필요가 없이 안심하고 공무를 집행하라."
하였다.
7월 28일 정사
전라도에는 큰 물이 지고 또 충재(蟲災)가 있으며 게[蟹]가 각종 곡식을 손상(損傷)시켰다고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7월 29일 무오
오시(午時)에서 유시(酉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졸(卒)하였다. 나이는 77세요, 시호는 혜정(惠定)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새로 또 원로(元老)를 잃었으니,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하고, 녹봉(祿俸)을 3년을 기한하고 그대로 지급하며, 관판(棺板) 한 벌을 또한 해조(該曹)로 하여금 골라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유는 마음씨가 화이(和夷)하여 각박하게 의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조정에 나와 큰 도(道)를 역임하였지만 명성과 치적이 없다가 영상(領相)의 자리에 올라서야 곧 사공(事功)이 있는 것으로 자처(自處)하면서 북한산(北漢山)에 성을 쌓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원대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라 말하였지만 재주나 모유(謨猷)가 본디 짧았으며, 식견과 사려도 어두워 일 처리에 실수가 많았고, 임용(任用)이 정당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으니,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여 해를 끼친 것이 한정이 없었다. 그가 존호(尊號) 올리기를 청한 것도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한 것으로 사대부(士大夫)의 기풍과 절의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것이니, 이로써 그의 평생을 단정할 수가 있다. 주상께서 사위(嗣位)함에 있어서 일찍이 3공(三公)의 소임을 받지 못했으니 사업은 진실로 논할 것이 없지마는, 제우(際遇)335) 도 말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다만 당인(黨人)들의 사호(私好) 때문에 묘정(廟庭)에 배식(配食)까지 하였으니, 공론이 해괴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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