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기미
새벽녘에 안개가 끼었다.
8월 2일 경신
사은사(謝恩使) 조태채(趙泰采)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8월 4일 임술
사간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 하기를,
"경리청(經理廳)의 군관(軍官) 김우태(金遇兌)는 기해년336) 의 관무재(觀武才)337) 때에 기추(騎蒭)의 2중(二中)338) 으로 감히 과거를 도적질 할 꾀를 내어 거짓말을 드렸는데, 해조(該曹)의 복계(覆啓)에는 사제(賜第)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대신의 연주(筵奏)로 즉시 빼버리기는 하였으나 그가 과거를 차지할 목적으로 임금의 총명을 기폐(欺蔽)한 죄는 버려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김우태를 나문(拿問)하고, 해조(該曹)의 복계(覆啓)하였던 당상관(堂上官)도 모두 파직하소서. 또 서명균(徐命均)의 상소가 이조(吏曹)를 뒤흔들고 있는 일로써 3사(三司)를 합쳐 논척(論斥)하여 괴란(壞亂)하고 경알(傾軋)의 계책을 했으니, 청컨대 그를 파직하소서."
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기를,
"지평(持平) 이중협(李重協)이 바야흐로 대관(臺官)의 직임을 맡고 있으나 미처 서경(署經)339) 도 하기 전에 임의(任意)로 고향에 내려갔으니, 청컨대 체직(遞職)하소서. 또 괴원 분관(槐院分館)340) 의 권점 기록이 공정치 못하여 한이조(韓頤朝)·성대열(成大烈)이 빠지고, 여광헌(呂光憲)·김성용(金聖鎔)·이인흥(李麟興)·정유일(鄭惟一)·이강(李鋼) 등이 남입(濫入)되었으니, 청컨대 행 수장무관(行首掌務官)을 추고(推考)하여 여광헌(呂光憲) 등을 선출자(選出者) 중에서 빼버리고 한이조(韓頤朝)·성대열(成大烈)을 괴원(槐院)의 예에 따라 조용(調用)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최석항(崔錫恒)이 전조(銓曹)의 장(長)이 되니, 박치원(朴致遠)의 저격(狙擊)에 급급한 정상이 밉살스러운데다가 서균명(徐均命)이 진소(陳疏)하여 규탄하고, 이어 전조의 사람씀이 공정치 못함과 3사(三司)의 임명이 외잡(猥雜)스러움에까지 미쳤다가 도리어 경알(傾軋)한다는 지척(指斥)을 받게 되었다. 이정소(李廷熽)의 무리들이 당(黨)을 두호(斗護)한 거짓되고 편벽된 말이 이와 같은 것은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한이조·성대열 등의 용렬(庸劣)·세쇄(細瑣)하고 미천(微賤)한 무리들까지 또한 인지(人地)와 재망(才望)을 허여(許與)하면서 청선(淸選)에 조용(調用)하고자 하니, 견식이 있는 이는 이를 해괴하게 여겼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일의 가부를 논하기를,
"지금 백 리(百里)의 고을이라면 호수(戶數)가 천(千)이 못되지는 않지만, 마포(麻布)를 내어 공상(供上)을 하고 과수(戈殳)를 잡고 나라를 지키고 있는 양민은 10분의 2, 3에 지나지 못하고, 양반(兩班)·중인(中人)·서얼(庶孽)로서 한유(閒遊)의 무리들이 10분에 8, 9를 차지하고 있으니, 양민은 살을 깎아 뼈에까지 이르고 족징(族徵)을 하다가 인징(隣徵)에까지 미쳐 심지어는 아들을 낳아서도 기르지를 못하고 곤궁이 심하여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 있습니다. 선왕께서는 이러한 폐단을 깊이 아시고 여러 번 측은히 여기는 교서를 내리셨는데, 교서에 이르기를, ‘어린아이가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려 하는데 어떻게 구원할 길이 없다 핑계하고서 편히 앉아 태연히 하면서 구제할 것을 생각치 않겠는가?’ 하셨고, 또 이르기를, ‘일이 어떻게 십분 완전한 게 있겠는가? 만약 7, 8분이 좋게 된다면 2, 3분의 지장이 있더라도 나는 따르겠다.’ 하셨으니, 이는 실로 성인(聖人)의 애민(愛民)하는 마음이요, 천지의 호생(好生)하는 인(仁)인 것이니, 잘 계술(繼述)하는 바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4책(四策)을 순문(詢問)하여 편부(便否)를 살피려 하셨는데, 조령(朝令)이 겨우 내려지자 쓸데없는 의논만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일 이 일로 인하여 중지하신다면 국체(國體)의 손상이 다시 여지(餘地)가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결포(結布)의 법으로 우선 한두 고을에 시험해 보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선대왕께서는 사복(嗣服)하신 초기에 신해년341) 이전의 쌓인 포흠(逋欠)은 견감(蠲減)해 줄 것을 명하시니, 민심이 흡족해 하고 국세(國勢)는 더욱 공고(鞏固)해졌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고 행례(行禮)하신 지 이미 돐이 되었는데도 한 번도 덕음(德音)을 베풀어 백성들의 위급을 돌봐주셨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선조(先朝)의 예에 따라 계사년342) 이전의 포흠(逋欠)은 군향(軍餉)·정공(正供)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탕척(蕩滌)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시정(時政)을 걱정하여 진언(進言)하였으니, 명심(銘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고 하유(下諭)하였다.
8월 5일 계해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은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이 나이가 많고 병세가 심하니 체직(遞職)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은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재로(金在魯)가 처사에 자상하고 밝으며 봉공(奉公)에 근실하니 그 직을 바꾸어 비국(備局)의 당상관으로 차출하여 군역(軍役)을 변통시킬 계책을 강구(講究)케 할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속오(束伍)343) 는 모두 공사천(公私賤)으로 구차하게 채워졌으므로 정작 난리를 당하면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관서(關西) 양민의 두 필(疋)의 양역을 한 필로 감해 준 것은 참으로 큰 혜택입니다. 만일 이번 기회에 감영(監營)·병영(兵營)과 각 아문(衙門)의 소속(所屬)을 막론하고 베 한 필을 바친 양민은 모두 장정(壯丁)으로 가려서 속오군(束伍軍)에 충원하여 무학(武學)이라 이름을 붙이고, 공사천(公私賤)으로 일찍이 속오군이 된 자는 무학(武學)의 보인(保人)을 만들어 각각 한 보(一保)만 주어 3두의 쌀을 비급(備給)하여 조련(操鍊) 때 식량을 돕게 한다면 양역이나 무학이 다같이 쓸 만한 병졸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외방(外方) 영문(營門)의 군액(軍額)344) 은 시초(始初)의 폐단이 없지 않으니, 양민의 장정으로 채우기 어려운 것이 이 때문이며, 또 각 고을에서 그 정수(定數)를 모르는 데에서도 연유되고 있습니다. 이제 제도를 정한 뒤에는 각 해당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어떤 군정(軍丁)이 몇 명인가를 조열(條列)하여 책으로 꾸며 각 고을에 주고 1부는 비국(備局)에 올리게 하며, 그 정원 안에 도망(逃亡)과 사고(事故)는 해당 고을에서 대정(代定)케 하고 그 이외에는 영문에서도 가정(加定)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이르기를,
"이헌(李瀗)은 뇌물을 받은 더러운 행위로 소문이 퍼져 있는데도 특히 몇 섬의 곡식을 채우지 못한 사고만을 들어 사형에서 면제되었고, 형률(刑律)을 적용하면 삼천 리(三千里) 밖의 유배(流配)에 해당되지만 공감(功減)으로 도형 정배(徒刑定配)가 되었으니, 풀려난 뒤에 만약 다시 조용(調用)한다면 장리(贓吏)가 어떻게 징계되어 두려워하겠습니까? 청컨대 영구히 폐고(廢錮)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다만 윤취상(尹就商)의 일과 괴원 분관(槐院分館)의 일만 윤허하였다.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가 연경(燕京)에 다녀올 때 경유한 연도(沿途)의 민막(民瘼)을 차자(箚子)로 진달하고, 양서(兩西)345) 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는 제반 신포(身布)와 각 아문(各衙門)의 채무를 금년을 한하여 정봉(停捧)할 것과 경기(京畿)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는 남한(南漢)·북한(北漢)의 진휼청(賑恤廳)에서 가져간 곡식도 모두 정봉(停捧)해 줄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명언(李明彦)이 읍치(邑治)를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길 것을 소청(疏請)하였기에 신도 가서 형편을 보았더니 참으로 천작(天作)의 땅으로 힘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니, 청컨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장문(狀聞)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서 ‘차자(箚子)로 진달한 것이 타당한 일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겠다.’고 하유(下諭)하였다.
8월 6일 갑자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박치원(朴致遠)이 이미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을 저격(狙擊)하여 최석항이 바야흐로 사면(辭免)하고 나오지 아니하니, 헌납(獻納) 서명균(徐命均)과 교리(校理) 조문명(趙文命)이 잇따라 상소하여 박치원을 논척(論斥)하고, 이어 전조(銓曹)의 용사(用舍)가 공정하지 못함을 논핵하니, 참의(參議) 황귀하(黃龜河)가 이 일로 인혐(引嫌)하여 소명(召命)을 어겼으므로 파직(罷職)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공석 중인 참판(參判)을 차출(差出)할 것을 차청(箚請)하였으니, 대개 황귀하가 체직되면 최석항이 혹시 나올까 염려한 것이다.
8월 7일 을축
의금부(義禁府)에서 윤취상(尹就商)의 죄범이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써 분간(分揀)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8일 병인
홍계적(洪啓迪)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집의(執義)로, 조영복(趙榮福)·권이진(權以鎭)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행 사직(行司直) 유명웅(兪命雄)이 졸(卒)하였다. 유명웅은 솔직하고 꾸밈새가 없었으나 다만 재주도 없고 덕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경(卿)의 반열(班列)에 올랐으니, 사람들이 자못 비난하였다.
8월 9일 정묘
임금이 각질(脚疾)로 진수당(進修堂)에서 다리의 삼리혈(三里穴)에 뜸을 떴다.
8월 10일 무진
이홍술(李弘述)을 판윤(判尹)으로, 이집(李㙫)을 대사성(大司成)으로, 홍치중(洪致中)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8월 15일 계유
이때에 동북로(東北路)346) 에 큰 물이 져서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헌주(尹憲柱)가 문천(文川)과 고원(高原) 두 고을에서 사람이 85명이나 빠져 죽었다고 치계(馳啓)하였고,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상원(金相元)은 삼척(三陟) 등지에서 인가(人家) 표몰(漂沒)이 82호, 압사(壓死) 31인, 익사(溺死) 13인이라 치계(馳啓)하였다. 김상원은 또 금성(金城)의 품관(品官) 박창덕(朴昌德)의 아내 임씨(任氏)는 그의 남편이 범에게 물려 죽었는데 자기 몸을 범의 입에 맡기고 남편의 시체를 빼앗았으니 그 정렬(貞烈)이 정표(旌表)할 만하다고 장청(狀請)하므로,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다.
8월 16일 갑술
사옹원(司饔院)의 감선 제조(監膳提調) 민진원(閔鎭遠)이 설리 내관(薛里內官)347) 이 공물(貢物)을 바치는 사람에게 뇌물을 요구하다가 되지 않으니 어공(御供)의 생선을 점퇴(點退)348) 하였다 하여 내관의 죄를 다스리고 이제부터는 정식(定式)을 삼아서 주원(厨院)349) 에서 받아들인 물건을 설리가 감히 다시 물리치지 못하도록 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일찍이 계청(啓請)하였던 군포(軍布) 두 필(疋)을 낸 자는 한 필을 감해 주고 각 고을의 전결(田結)에 따른 잡역 가조(雜役價租)로 감포(減布)를 대충(代充)해 주며, 읍중(邑中)의 결역(結役)350) 은 연호(煙戶)351) 에게서 이징(移徵)352) 하는 일을 우선 삼남(三南)의 영하읍(營下邑)353) 과 호서(湖西)의 임천(林川), 호남(湖南)의 남원(南原), 영남(嶺南)의 의령(宜寧)에 시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뒤에 이건명이 화를 입어,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8월 17일 을해
신사철(申思喆)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8월 18일 병자
이성룡(李聖龍)을 정언(正言)으로, 이정신(李正臣)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이중협(李重協)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8월 19일 정축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태좌(李台佐)가 본부의 민인(民人) 19명이 익사(溺死)하였다고 치계(치계)하였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과천(果川)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0일 무인
신절(申晢)을 사간(司諫)으로, 이집(李㙫)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강도(江都)의 장녕전(長寧殿) 공사를 감독한 사람들에게 상전(賞典)을 행하였는데, 유수(留守) 홍계적(洪啓迪)과 경력(經歷) 최성서(崔星瑞) 등에게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기를,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아직껏 저사(儲嗣)354) 가 없으시니 다만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만이 근심스럽게 걱정하고 탄식할 뿐만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거창한 애구(哀疚)355) 중이신데도 반드시 더 걱정을 하실 것이요, 우리 선왕의 하늘에 계신 혼령께서도 반드시 돌아보시고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하신 영전(令典)이 있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준행(遵行)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바야흐로 국세는 위태롭고 인심은 흩어져 있으니, 더욱 마땅히 나라의 대본(大本)을 생각하고 종사(宗社)의 지계(至計)를 꾀해야 할 것인데도 대신들은 아직껏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청하는 일이 없으니, 신은 이를 개탄하는 바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빨리 이 일을 자성(慈聖)께 상품(上稟)하시고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시는 것이 바로 사직(社稷)의 대책(大策)을 정하는 것이며, 억조(億兆) 신민의 큰 소망을 매두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명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빈청(賓廳)에 나가 원임 대신(原任大臣)·육경(六卿)·정부 서벽(政府西壁)356) ·판윤(判尹)·삼사 장관(三司長官)을 불러 회의하여 품정(稟定)할 것을 청하였는데,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 예조 판서 송상기(宋相琦),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은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 밤 2경(二更)에 김창집·이건명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 판윤(判尹) 이홍술(李弘述), 공조 판서 이관명(李觀命),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 우참찬 임방(任埅), 형조 판서 이의현(李宜顯), 대사헌 홍계적(洪啓迪), 대사간 홍석보(洪錫輔), 좌부승지(左副承旨) 조영복(趙榮福), 부교리(副校理) 신방(申昉)과 더불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신데도 아직껏 저사(儲嗣)가 없으시니, 신은 부끄럽게도 대신으로 있으면서 주야로 걱정이 됩니다. 다만 사체(事體)가 지중(至重)하기 때문에 감히 앙청(仰請)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대신(臺臣)의 말이 지당(至當)하니 누가 감히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하니, 조태채가 말하기를,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두 황자(皇子)를 잃으니 춘추(春秋)는 비록 늦지 않았지만 간신(諫臣) 범진(范鎭)이 건저(建儲)357) 를 소청(疏請)하고 대신 문언박(文彦博) 등이 힘써 찬성하여 대책(大策)을 정한 바 있습니다. 이제 대신(臺臣)의 말이 이미 나왔으니 오래 끌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자성(慈聖)의 하교(下敎)에 매양 이르시기를, ‘국사가 걱정이 되어 억지로 미음(米飮)을 든다.’ 하셨으니, 비록 상중[哀疚]이라도 종사(宗社)를 위한 염려가 깊으신 것입니다. 이 일은 일각(一刻)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므로 신 등이 감히 깊은 밤중에 소대(召對)를 청한 것이니, 원컨대 전하의 생각을 더하시어 빨리 대계(大計)를 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차례로 진청(陳請)하고 진정이 끝나자, 김창집·이건명·조태채가 다시 청하여 마지 않았다.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이 말하기를,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니, 청컨대 속히 윤종(允從)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종한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종사(宗社)의 무강(無彊)한 복입니다."
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말한 바 조종의 영전(令典)이란 공정 대왕(恭靖大王)358) 때의 일을 가리킨 듯합니다. 성상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모시고 계시니, 자전께 들어가 사뢰어 수필(手筆)을 받은 연후에야 봉행(奉行)하실 것입니다. 신 등은 합문(閤門) 밖에 나가서 기다릴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대내(大內)로 들어갔는데 오래도록 나오지 않자, 김창집 등이 승전 내관(承傳內官)을 불러 구계(口啓)359) 하여 임금을 재촉하여 인대(引對)를 허가하도록 하였다. 새벽 누종(漏鍾)이 친 뒤에야 임금이 낙선당(樂善堂)에서 인대(引對)할 것을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벌써 자성(慈聖)께 품계(稟啓)하셨습니까?"
하니, 임금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꼭 자전(慈殿)의 수찰(手札)이 있어야만 거행할 수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책상 위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봉서(封書)는 여기 있다."
하니, 김창집이 받아서 뜯었다. 피봉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었는데, 한 장에는 해서(楷書)로 ‘연잉군(延礽君)’이란 세 글자가 써 있었고 한 장은 언문 교서(諺文敎書)였는데, 이르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오?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읽어 보고는 울었다. 이건명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해자(楷字)로 언문 교서를 번역해서 승정원에 내리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전지(傳旨)를 쓰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조영복(趙榮福)이 탑전(榻前)에서 전지를 썼는데, 전지에 이르기를,
"연잉군 【휘(諱).】 을 저사(儲嗣)로 삼는다."
하였다. 이어 예조 당상관을 불러 거행할 것을 청하고, 여러 신하들은 물러갔다. 임금은 평소에 병이 많아 계사(繼嗣)를 두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국세(國勢)는 위태하기가 철류(綴旒)360) 와 같았다. 삼종(三宗)361) 의 혈맥으로는 다만 주상과 아우 한 분이 있으니 천명(天命)과 인심의 스스로 귀착(歸着)되는 바가 저군(儲君)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이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가 이미 정해졌으니 명명(明命)362) 이 한 번 내려지자 온 나라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당일 대신들은 조정에 모여 의논을 꺼내려 하지 않았고, 또 교외(郊外)에 있는 동료 대신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다만 4, 5인의 재정(在廷) 동료와 함께 깊은 밤중에 청대(請對)하여 광명 정대한 일로 하여금 전도(顚倒)와 솔략(率略)함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임금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서 반드시 자성(慈聖)의 수필(手筆)을 얻은 후에라야 봉행(奉行)하겠다고 말한 것이 어찌 연석(筵席)에서 주사(奏事)하는 체통이라 하겠는가? 이때에 임금은 오래도록 혼전(魂殿)의 향사(享祀)에 친제(親祭)치 않았고, 상제(祥祭) 후에도 아직껏 산릉(山陵)에 전알(展謁)하지도 못했으므로 군신들이 여러 번 말을 하였었는데, 이날은 갑자기 명릉(明陵)363) 을 전알(展謁)하겠다는 명을 내렸었다. 이것은 마땅히 여러 사람의 마음에 함께 기뻐하여야 할 일인데도 김창집은 정섭(靜攝)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써 탑전(榻前)에서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사람들이 이 일로써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집의(執義) 홍용조(洪龍祚)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법령은 이미 갖추어졌지만 징포(徵布)는 잡역(雜役)에 넘기고 신역(身役)은 연호(煙戶)에게 넘기면 결국은 조삼 모사(朝三暮四)364) 의 결과 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천재(天災)와 흉년이 겹쳤으니 이러한 변통하는 거조는 우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천천히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라 명하였다. 홍용조는 또 민진원(閔鎭遠)이 일찍이 설리 내관(薛里內官)의 죄를 논하였다가 채택되지 못한 일을 듣고 내관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엄중한 비지(批旨)를 내리니, 홍용조가 인피(引避)하였다.
8월 21일 기묘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신은 어리석고 불초(不肖)하여 지금의 작위(爵位)에 끼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분수에 넘치는 일이옵니다. 그래서 여느 때에도 늘 부끄럽고 두려워 못이나 골짜기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절대로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을 갑자기 내릴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이 명령을 듣고 심담(心膽)이 함께 떨어진 듯하여 놀랍고 두려워 울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성질은 본래부터 소활(疎闊)하여 오직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성세(聖世)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만이 마음속에서 항상 계획했던 바입니다. 신의 충정(衷情)은 다만 천지 신명께 질정(質正)할 수 있을 뿐아니라, 선대왕의 척강(陟降)하는 혼령도 밝게 아시는 바로 성상께서 위에 계신데서 어떻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성자(聖慈)께서는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하여 빨리 성명(成命)365) 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미리 저사(儲嗣)를 정한 것은 종사(宗社)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변변치 못하여 이미 30세가 지났는데도 아직껏 후사(後嗣)가 없으며, 또 기질(奇疾)마저 있으니 국사를 생각해 보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자성(慈聖)께 앙품하고 군신들의 청에 따라 저이(儲貳)의 중명(重命)을 맡기는 바이니 소심 익익(小心翼翼)366) 하고 근근 자자(勤勤孜孜)367) 하여 백성들의 큰 희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승지를 보내어 선지(宣旨)를 전하였다.
예조에서 연잉군(延礽君)이 이미 저사(儲嗣)로 정해졌으니 그대로 사제(私第)에 거처함은 미안한 일이라 하여 빨리 대궐 안에 들어와 거처케 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연잉군은 윤서(倫序)로 말한다면 비록 아우이지만 자리로 말한다면 저사(儲嗣)가 되는데,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보면 정종(定宗)께서 태종(太宗)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라 하였으니, 어쩌면 제왕가(帝王家)에서는 계서(繼序)를 중히 여기고 윤서(倫序)는 도리어 경하게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때에 태조(太祖)께서 상왕위(上王位)에 계셨으니 임금의 자리가 눌림을 당한 처지라서 세자의 칭호에 무방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오늘날의 사세(事勢)는 그때와는 같지를 않고, 또 옛날부터 역대(歷代) 군주가 아우를 세워서 후사를 삼았을 때에는 모두 태제(太弟)로 봉하였으니, 지금 이 분의 명호(名號)도 세제(世弟)로 정하면 명의(名義)나 예절에 다 맞을 것 같습니다마는, 사체(事體)가 지중(至重)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사세(事勢)는 정종(定宗) 때와는 다른 바가 있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이 인종(仁宗)께서 편치 못하실 때에 명종(明宗)은 대군(大君)으로 있었는데 세제(世弟)로 봉하여 국본(國本)으로 정하자는 의논을 한 일이 있습니다. 연잉군의 위호(位號)는 마땅히 왕세제(王世弟)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창집의 의논에 따라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22일 경진
왕세제가 재차 상소하기를,
"아뢰건대 못나고 불초(不肖)한 이 몸이 외람되이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을 받고 보니, 신의 마음은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감히 한 통의 상소를 올려 천일(天日)의 보살핌을 바라고자 합니다. 삼가 비지(批旨)를 받들고 보니 어의(語意)가 너무나도 간절하고 지극하시어 더욱 신이 받들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 신의 재주와 역량이 비록 감당할 수 있는 형세가 있더라도 결단코 이 자리에 함부로 있어서는 안될 것이데, 더구나 신은 본디 어리석고 재주와 식견도 없으면서 성명(成命)에 몰려서 억지로 나아간다면 신의 일신의 낭패는 진실로 돌볼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종사(宗社)와 국사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아도 절대로 함부로 나아갈 형편이 못되니, 삼가 원하건대 위로 종사를 생각하시고 아래로 신민의 뜻에 부응하셔서 빨리 자성(慈聖)께 품하시고 성명(成命)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서 하유하기를,
"어제의 비지(批旨)에 이미 상세히 말했는데 다시 무엇을 더 고(誥)하겠는가? 다시 사양하지 말고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과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모두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하여 건저(建儲)를 하례하고 아울러 사직을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우비(優批)만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에서 왕세제가 입궁(入宮)할 때의 관복과 교자(轎子)나 호위하는 절차를 대신에게 의논케 할 것을 청하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말하기를,
"저사(儲嗣)가 사제(私第)에서 대궐에 들어가는 것이 비록 책례(冊禮) 이전에 있을지라도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졌으니, 의절(儀節)을 마련하지 아니할 수는 없습니다. 연여(輦輿)와 의장(儀仗)은 모두 본래 있는 것으로 마련함이 쉬울 듯하니, 빨리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거행케 하여야 시기에 미치지 못하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관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옷은 시복(時服)을 입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에서는 을유년368) 에 효종(孝宗)이 저사(儲嗣)로 책정되었을 때의 예에 따라 도감(都監)의 초군(哨軍)을 대략 정하여 사저(私邸)를 숙위(宿衞)케 하고 또 숙직할 인원도 차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이휘(李暉)와 유취장(柳就章)을 분 부총관(分副總管)으로, 조명겸(趙鳴謙)과 한세량(韓世良)을 분 병조 참의(分兵曹參議)로 삼았다.
8월 23일 신사
김창집(金昌集)을 세제사(世弟師)로, 이건명(李健命)을 세제부(世弟傅)로, 송상기(宋相琦)를 좌빈객(左賓客)으로, 최석항(崔錫恒)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이관명(李觀命)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만성(李晩成)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이희조(李喜朝)를 찬선(贊善)으로, 박사익(朴師益)을 보덕(輔德)으로, 김제겸(金濟謙)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신절(申晢)을 겸필선(兼弼善)으로, 조문명(趙文命)을 문학(文學)으로, 윤순(尹淳)을 사서(司書)로, 황재(黃梓)를 설서(說書)로, 유숭(兪崇)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정필(洪廷弼)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덕수(李德壽)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책례 도감 도제조(冊禮都監都提調)에서 사체(辭遞)시키고 영의정 김창집에게 이를 대신케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기를,
"나라에서 저사(儲嗣)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시임(時任) 대신으로 한강 밖에 있었던 사람마저 까마득히 알지 못하였고 원임(原任) 경재(卿宰)로 처음에 불러서 나가지 않은 사람은 재차 부르지도 않고서 졸급하고 바쁘게 굴면서 조금도 국체(國體)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신은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중전[中壼]을 재차 맞이하고 약을 드시며 걱정하시고 계속 상중[諒闇]에 계시니 후사(後嗣)의 있고 없음을 아직 논할 수도 없는 것이고, 전하의 보산(寶算)369) 이 한창 젊으시고 중전께서도 나이 겨우 계년(筓年)370) 을 넘으셨으니 일후(日後)에 종사(螽斯)371) 의 경사가 있기만을 온 나라 신민들은 크게 바라고 있는 중입니다. 혹자는 양궁(兩宮)께서 병환이 있어 탄육(誕育)에 지장이 있다고 말합니다만, 그렇다면 보호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의약(醫藥)에 정성을 다하여 최대한 힘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도 이에 생각이 미친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결국은 즉위[即祚]하신 원년에 갑자기 이러한 거조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된 까닭입니까?
신민들은 바야흐로 눈을 닦고 새로운 교화(敎化)를 바라고 있는데 대간(臺諫)들은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인심은 흩어졌다.’고 말하고 있으니, 무슨 근거로 이러한 말들을 꺼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당국(當局)한 대신으로는 마땅히 조정의 의사를 널리 물어서 조용하게 사뢰어 중외(中外)로 하여금 명백히 무슨 사연 무슨 까닭이란 것을 알게끔 하여야 할 것인데도, 이번에 그렇게 하지 않고 이정소(李廷熽) 같은 어리석고 못나고 무식한 자로 하여금 초초(草草)하게 소청하여 마치 상시(嘗試)372) 하는 것처럼 하다가 품처하겠다는 전교를 얻고서는 곧 밤이 이미 깊어진 뒤에 등대(登對)를 힘껏 청하여 기필코 따르게 하고서야 그만두었으니, 이정소(李廷熽)와 화응(和應)한 정상이 분명하여 숨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일을 자성(慈聖)께 앙품(仰稟)하지 않을 수 없는 것에 있었다면 마땅히 품정(稟定)해야 한다는 뜻으로 전하에게 앙달(仰達)하고서 물러나 하교(下敎)를 기다리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 것인데도, 이미 입품(入稟)을 청해 놓고 바로 나와서 선포하기를 청한 것이 마치 명령하듯 자못 독촉하듯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무진년373) 에 전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는 오래도록 후사(後嗣)가 없었습니다. 그때에도 주사(主嗣)가 급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건만 전석(前席)에서 하문 하실 즈음에 여러 신하들은 우선 수년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면서 정궁에서 득남(得男)의 경사가 없다 하더라도 왕자(王子)가 나이 장성하면 유사(有司)에서 마땅히 세자(世子)를 세울 것을 청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국본(國本)374) 을 소중히 여기고 국체(國體)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인데도 이번에는 너무 급하게 서둘러 마치 한 시각도 넘겨서는 안되는 것처럼 하면서 한밤중의 근엄히 해야 할 여막(廬幕)에서 한 번 청하고 두 번 청하여 이보다 중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끝내 초솔(草率)한 결과로 만들고 말았으니, 인심의 의혹은 오래 되어도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신은 참으로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그 성명(成命)은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신이나 여러 신하들의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제부터라도 모든 일을 반드시 전하의 의사대로 결단하여 행하시어 위복(威福)을 아랫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신 이하의 죄과를 바로잡아 온 나라 사람에게 사과(謝過)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소가 승정원에 이르자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청대(請對)하여 소를 가지고 진수당(進修堂)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한중희에게 유봉휘의 소를 읽으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고 한중희가 말하기를,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졌고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졌으니, 신하된 자가 감히 용이하게 말할 일이 못되는데도 유봉휘의 이러한 상소가 있으니 주상께서는 준례에 따라 비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대신과 삼사(三司)의 관원을 불러 물어보고 처분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자성(慈聖)에게 품하고서 처분하겠다고 하교하고 한중희에게 상소를 두고 나가라 하였다. 한중희가 대신 이하의 관원을 부르기를 굳이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신들과 삼사(三司)의 관원들이 합문(閤門) 밖에 들어왔으나 오래도록 입대(入對)시키지 않다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일월(日月)같은 밝으심으로 나의 후사가 없음을 매우 염려하셨다. 이제와서는 나의 병이 점점 더하여 득남(得男)할 희망이 없으니 삼가 부탁의 중함을 받들고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히 지낼 겨를이 없었다. 엊그제 대간(臺諫)의 상소는 종사(宗社)를 위하여 국본(國本)을 정하려 한 것이니, 선왕의 성려(盛慮)와 나의 우탄(憂歎)하는 마음에 바로 일치한 것이기에 자성(慈聖)에게 앙품한즉 이르시기를 ‘효종(孝宗)의 혈맥(血脈)과 선왕의 골육(骨肉)은 다만 주상과 연잉군(延礽君) 뿐이다.’ 하셨으니, 자교(慈敎)가 지극히 간절하였으므로, 나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내게 조금이라도 사속(嗣續)할 희망이 있다면 어찌 이러한 하교(下敎)가 있었겠는가? 이미 저사(儲嗣)를 정했으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무궁(無窮)한 복이요, 또 내가 크게 바라던 바였다.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천만 뜻밖에 나와 말이 광망(狂妄)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어떤 사람이기에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는 것인가? 이를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경(卿) 등이 의논하여 계달(啓達)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健命)·대사헌 홍계적(洪啓迪)·대사간 유숭(兪崇)·사간(司諫) 신절(申晢)·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부교리(副校理) 신방(申昉)·정언(正言) 이성룡(李聖龍) 등이 아뢰기를,
"전하의 사속(嗣續)의 근심은 다만 전하께서만 이를 근심하신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성지(聖旨)를 받들고 보니 선왕께서도 깊이 염려하신 바였고, 자성(慈聖)께서도 하교(下敎)하신 바이니, 오늘날 대소(臺疏)의 건청(建請)과 여러 신하들의 역찬(力贊)은 오히려 늦었다 할 것입니다. 무슨 급히 서두른 잘못이 있기에 유봉휘(柳鳳輝)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우롱하고 협박하였다.’는 등의 말은 다분히 여러 신하들을 성토(聲討)할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군주의 존엄으로써 군하(群下)의 우롱과 협박을 받았다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명위(名位)가 이미 결정이 되고 신인(神人)이 의탁(依托)하는 바인데도 우롱하고 협박하여 이 대계(大計)를 이루었다고 말한다면 춘저(春邸)375) 의 마음은 과연 편안하겠습니까?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성명(成命)을 한 번 내리자 수많은 백성들이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고 기뻐하면서 온 나라에서 생기(生氣)를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좋아하고 손뼉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저 유봉휘(柳鳳輝)는 무슨 심장(心腸)으로 혼자만이 경황(驚惶)하고 우척(憂慼)하며 내심(內心)에 불만을 품고 현저히 국본(國本)을 흔들어 보려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그의 군주를 무시(無視)하고 도리에 어긋난 죄를 엄중하게 징치(懲治)하지 않는다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반드시 잇따라 일어날 것이니, 청컨대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訊問)하여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건저(建儲)하는 일이란 임금의 질환이 끝내 후사(後嗣)를 둘 수 없다면 윤서(倫序)대로 계승하게 되는 것은 다만 조만(早晩)이 있을 뿐이고, 지금 미리 세운 것은 더욱 국세(國勢)를 공고히 하자는 것인데도 유봉휘(柳鳳輝)의 상소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뒤에 나왔으니, 그 말이 매우 망령되다 하겠다. 그의 뜻은 비록 김창집의 무리가 경종(景宗)에게 무례(無禮)하였음을 분하게 여기고 밉게 본 데서 나왔고, 스스로 경종을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지마는 대체로 이것도 당론(黨論)이 가려진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신의 충정(衷情)은 전일의 상소에서 다 말하였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쌓인 바가 있으니, 어떻게 주광(黈纊)376) 아래에 아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 신은 불초(不肖)하고 무상(無狀)하여 붕천(崩天)377) 의 슬픔을 당하고서도 구차하게 시식(視息)을 이어오고 있으니 이미 매우 완명(頑冥)한 일인데, 세월은 흘러서 연제(練祭)도 벌써 지났으니 추모하고 호절(號絶)하면서 영영 세상에 살고 있을 생각마저 없는 터에 천만 몽상(夢想) 밖에 갑자기 신자(臣子)로선 감히 들을 수도 없는 전교가 내릴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놀랍고 황공하여 어쩔 줄을 몰라서 차라리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지만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의 타고난 성품은 용렬(庸劣)하여 백 가지에 한 가지도 잘한 일이 없으며, 저사(儲嗣)의 자리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갑자기 절대로 근사하지 않은 신의 몸에 내리게 되니, 이것이 어찌 다만 신의 마음만 조심스럽고 두려울 일이겠습니까? 아마 우리 성상께서도 적당하지 못한 사람에게 부탁함으로써 선대왕께서 간대(艱大)한 일을 물려주신 성의(盛意)를 저버릴까 두려워하실 뿐일 것입니다. 삼가 자성(慈聖)의 하교하신 바를 보건대 효종 대왕의 혈맥(血脈)과 선대왕의 골육이란 말씀이 계셨으니, 신은 실성 장호(失聲長號)하고 피눈물이 함께 쏟아짐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아! 비록 신이 몸을 선왕에게 받았다는 이유로써 특별히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행했던 전례(典禮)를 시행하시려 하나, 생각해 보면 신 같은 부재(不才)로 어떻게 감히 본분(本分)에 어긋난 소임을 함부로 차지하겠습니까? 신의 질긴 목숨이 일찍이 선왕을 지하(地下)에 따라가지 못하고 오늘 도리어 이러한 교서를 받들게 되므로 하늘을 쳐다보고 통곡함이 밤낮이 없으니, 어찌 감히 말로만 꾸미고 거짓으로 사양하면서 이토록 번거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소원은 산과 들로 도망하여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마는 이것도 또한 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지극한 정성을 살피시어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어 주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이튿날에 답하기를,
"이미 전후의 비지(批旨) 속에 상세히 말했는데 무엇을 다시 더 타이르겠는가? 자성(慈聖)의 하교가 지극히 간절하시고, 일찍이 행했던 영전(令典)도 있으니, 공경스럽게 받들고 모름지기 연장(連章)을 올리지 말라."
하고, 승지로 하여금 가서 선교(宣敎)케 하였다.
8월 24일 임오
새벽에서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고, 오시(午時)에는 햇무리하였다.
유봉휘(柳鳳輝)가 국문(鞫問)을 당하게 되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전교 하기를,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아도 유봉휘가 망령되이 소장(疏章)을 올린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므로 엄형(嚴刑)에 처해야 마땅할 것 같으나, 국문만은 정도에 지나친 듯하다."
하고, 참작하여 아주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대신과 삼사(三司)가 청대(請對)하여 쟁론(爭論)하니, 임금이 전일의 하교(下敎)대로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조최수(趙最壽)의 삭출(削黜)과 서명균(徐命均)의 파직에 관한 일을 윤허하였다.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홍계적(洪啓迪) 등이다.】 에서 건저(建儲)하던 날 이조 판서 최석항(崔錫恒)과 예조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파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처분이 이미 정해진 뒤에 유봉휘(柳鳳輝)가 이러한 진언(進言)을 하였으니 유망(謬妄)하다 할 수 있으나, 그 마음만은 나라를 위하는 단충(丹忠)으로 성실하여 딴마음이 없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는 효종(孝宗)께서 저사(儲嗣)로 오르던 날 정경(正經)을 지킬 것을 힘껏 주장하다가 비록 찬축(竄逐)을 당하였지마는 효종께서 즉위하시자 맨 먼저 등용하여 마침내 명상(名相)이 되었습니다. 무진년378) 의 여러 신하들은 나라와 동체(同體)가 되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아님이 없었으니, 어찌 한때의 쟁론(爭論)으로써 국문을 당한 일이 일찍이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전하께 충성하는 자는 뒷날에도 반드시 저군(儲君)에게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설사 말이 광망(狂妄)할지라도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려 함인데, 갑자기 국치(鞫治)를 명하시면 어찌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도리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군주를 인도하여 진언한 자를 박살토록 하는 것은 성세(聖世)의 복이 아닙니다. 원컨대 특별히 삼사(三思)를 가하시어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 경(卿)의 차자를 살펴보니, 비로소 국청(鞫廳)을 설치한 잘못을 알겠다."
하고, 다시 대신과 의논하여 품처하라 명하였다.
예조에서 왕세제(王世弟)의 책례(冊禮)를 진하(陳賀)하던 날에 임금과 백관의 복색(服色)에 관한 일로 전례(前例)를 취고(取考)하였다. 경오년379) 의 책례(冊禮)도 또한 장렬 왕후(莊烈王后)380) 의 국휼(國恤) 3년 안에 있었는데, 그때의 대신이 종사(宗社)의 대례(大禮) 이니, 차길(借吉)381)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헌의(獻議)하자 면복(冕服)으로 행례하라고 하교(下敎)하였었다. 이번의 책례도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마련해야 할 듯하였으므로, 대신에게 의논케 할 것을 청하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예조의 말과 같이 헌의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상례(喪禮)가 가장 엄중하므로 국휼(國恤) 3년 안에는 가사(嘉事)나 길례(吉禮)를 거행하지 않았기에 《오례의(五禮儀)》에는 거기에 대한 의절(儀節)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만일 꼭 부득이하여 행례를 한다면 소복(素服)으로 임석(臨席)한들 무엇이 불가할 것인가? 경오년(庚午年)의 일은 그때의 대신이 무식하여 임금을 비례(非禮)로 인도한 것인데, 지금도 또 따라 계승하여 마침내 전장(典章)처럼 되고 말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새로 제수(除授)된 궁관(宮官)은 세제(世弟)의 사저(私邸)에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한 사람은 사저의 문 밖에서 직숙(直宿)하며 사부 빈객(師傅賓客)은 입궁(入宮)한 뒤에 사은할 것을 명하였는데, 예조의 청을 따른 것이다.
8월 25일 계미
3경(更)과 4경에는 번개가 쳤고, 5경에는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의 위쪽에서 나왔다.
세제(世弟)의 책봉을 장차 연중(燕中)382) 에 주청(奏請)키로 하고, 김창집(金昌集)을 정사(正使)로, 참의(參議) 조태억(趙泰億)을 승질(陞秩)시켜 부사(副使)로, 유척기(兪拓基)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남도규(南道揆)를 승지(承旨)로, 신방(申昉)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조현명(趙顯命)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영의정 김창집이 우의정 조태구(趙泰耉)의 차사에 대한 비답의 일로 헌의(獻議)하기를,
"유봉휘(柳鳳輝)는 국본(國本)을 동요코자 하였으니 죄가 악역(惡逆)에 해당되는데, 조태구의 차자에는 혹은 ‘그 마음이 나라를 위하는 단충(丹忠)에서 나왔으니 성실하여 딴 마음이 없다.’ 하였고, 혹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것인데 갑자기 국치(鞫治)를 명한 것은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도리에 손상이 있다.’ 하였으며, 혹은 ‘군주를 인도하여 진언자(進言者)를 박살(撲殺)토록 한다.’하였으니, 신은 나라에 충성을 했다 한 것이 과연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국본(國本)을 뒤흔든 자를 충성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 등은 유봉휘를 역(逆)이라 지목하고 기어코 그 부도(不道)함을 성토(聲討)하려고 하는데, 대신은 유봉휘더러 충성이라 하고 딴 마음이 없다고 추장(推奬)을 하니, 피차의 의견 차이가 천양(天壤)일 뿐만이 아닙니다. 또 인용한 바 을유년383) ·무진년384) 의 일에 있어서도 여러 신하들의 계달은 모두 하문(下問)하실 때의 일이었는데, 지금은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져 신인(神人)이 의탁하는 바이니, 진실로 병이(秉彝)385) 의 마음이 있다면 뉘라서 그 사이를 방해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유봉휘는 감히 흉패한 말로 일을 그르치려는 꾀를 부리니 그의 계획한 마음이 천만 절통(絶痛)합니다.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신문하는 것은 흉역(凶逆)을 다스리려는 것인데, 그것마저 언자(言者)를 박살하려 한다고 돌리니 사체(事體)와 의리가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혹시라도 비호(庇護)하는 말에 꺾이지 마시고 국본(國本)이 튼튼해지고 왕법(王法)이 행해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유봉휘의 말은 다만 광망(狂妄)할 뿐이니 당초부터 국문할 일은 없었고 동궁(東宮)도 불안한 일이 있을 것이니 먼 곳으로 귀양보내어 인심을 안정시킴이 좋을 것이므로 전일의 판부(判付)에 의하여 시행하라.’는 뜻으로 답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그의 조부 이경여(李敬輿)가 을유년386) 에 한 말은 오늘의 사실과는 아주 다른데도 조태구(趙泰耉)의 소에서 인유(引喩)한 것은 무언(誣言)이라고 차자(箚子)를 올려 논변(論辨)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양쪽을 다 이해시켰다.
왕세제가 상소하기를,
"신의 우둔(愚鈍)한 재질로 외람되어 이러한 자리에 눌러 있으면 조만간 실패하리라는 것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는데, 어제 유봉휘의 상소를 보니 말씨가 매우 위험스러워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고 심간(心肝)이 떨어지는 것 같았으니, 이것이 또한 신이 무릅쓰기 어려운 일단(一端)입니다. 아! 비록 미관 말직(微官末職)이라도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으면 스스로 안정을 취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결단코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하물며 저부(儲副)의 자리는 참으로 나라의 중요한 근본인데 언의(言議)가 거세게 일어나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서 엄중한 명령을 두려워하여 경솔히 덮어놓고 받아들여서 감당한다면, 신의 일신의 수치는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그것이 국가에는 어떻겠습니까? 천만 번 생각해 보아도 단연코 명령을 받아들일 길이 없으니,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정상을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위로 종사(宗社)의 중대함을 생각하시며 아래로 신의 위태로운 정상을 살피시어 여러 위사(衞司)의 무리들은 빨리 파귀(罷歸)케 하시고, 이어 성명(成命)을 거두어 신으로 하여금 본분(本分)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시면 살아서는 성세(聖世)의 신하가 될 것이고 죽어서도 눈을 감고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국가의 막중 대사를 이미 품정(稟定)하였으니, 유봉휘의 죄상만 밝히면 광망(狂妄)한 말은 무엇을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때 이러한 사람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조금도 불안해 할 까닭이 없으니, 위로 종사(宗社)를 생각하고 아래로 국인(國人)들의 큰 희망에 부응하여 다시는 공사(控辭)387) 하지 말고 빨리 글을 보내는 것을 중단하여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위속(衞屬)들도 의식(儀式)대로 할 것이다."
하고, 승지를 보내어 가서 선교(宣敎)케 하였다.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가 빈청(賓廳)에 나아가 아뢰기를,
"유봉휘의 상소는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진 뒤에 나왔으며 현저히 불평한 뜻이 있고 공공연히 절패(絶悖)한 말을 늘어놓았으니, 그 죄악을 논한다면 마땅히 상형(常刑)을 받아야 할 것인데도 국치(鞫治)가 늦어지고 왕법(王法)이 행해지지 아니하니, 왕세제가 깊이 불안을 품어 다시 상장(上章)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신하된 자가 어찌 목욕 청토(沐浴請討)388) 의 뜻을 밝혀 저궁(儲宮)의 마음을 위안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가지 조항은 하루라도 천지(天地) 사이에 그대로 살아 있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니, 청컨대 빨리 전지(傳旨)를 내려서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하소서."
하였으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홍계적(洪啓迪)·대사간 유숭(兪崇)·교리(校理) 신방(申昉) 등이 합사(合辭)하여 계론(啓論)하기를,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는 목욕 청토(沐浴請討)의 뜻은 생각치도 않고 한갓 사당(私黨)을 비호할 생각만 하여 소를 올려 성총(聖聰)을 기망(欺罔)하고 흉역(凶逆)에게 편들고 있습니다. 조태구의 작년 겨울의 상소 가운데 ‘모혐(冒嫌)’이란 두 글자는 이미 매우 떳떳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흉적(凶賊)을 영구(營救)하니 마음속이 다 드러난 셈입니다. 청컨대 삭출(削黜)하소서."
하고, 양사(兩司)는 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이 건저(建儲)하던 날에 소명(召命)에 응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라에 큰 경사(慶事)가 있은 뒤에도 전연 송변(頌抃)하는 말이 없었다는 이유로서 파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유봉휘의 국문을 명할 당시에 임금은 전지(傳旨)를 곧바로 내리지 않았으니, 유봉휘가 미처 취수(就囚)되지도 않았는데 조태구의 차자(箚子)가 들어왔으므로, 마침내 국문을 면하게 되었다. 그때에 삼사(三司)는 날마다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고, 대신은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엄국(嚴鞫)을 계청(啓請)했으며, 종실(宗室)과 관학(館學)389) 의 유생들도 논죄(論罪)하여 화색(禍色)이 날로 급박해졌는데도, 유봉휘는 의금부(義禁府) 앞 거리 위에서 짚자리를 깔고 명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도성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구경하였다 한다.
8월 26일 갑신
햇무리하였다.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이 다시 빈청(賓廳)에 나아가 유봉휘를 국문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신 이하의 관원과 삼사(三司)가 청대(請對)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고, 소회(所懷)를 글로 써서 들여보내라 명하였다. 대신과 삼사(三司)가 다시 각기 계론(啓論)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유봉휘의 광망(狂妄)한 말은 찬축(竄逐)하는 것은 될 수 있으나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은 정도에 지나친다. 이렇듯 시일을 미루어가면 다만 동궁의 마음만 불안할 뿐 아니라, 이러한 큰 경사(慶事)의 날을 앞두고 실로 좋은 일은 아닐 것이나, 경(卿) 등의 청을 나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빨리 멈추어 번거롭게 하지 말고 저이(儲貳)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하였다.
8월 27일 을유
김고(金槹)를 사간(司諫)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이 아뢰기를,
"성비(聖批)390) 에 이르시기를, ‘유봉휘의 광망(狂妄)한 말은 찬축(竄逐)은 될 수 있으나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은 과당(過當)하다.’ 하셨습니다. 지금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졌고 명호(名號)는 백성의 기대에 매여 있는 바인데, 제가 감히 자의(疵議)391) 를 하고 약간의 거리낌도 없으니, ‘광망(狂妄)’이란 두 글자가 과연 근사(近似)하여서 아직도 찬축(竄逐)의 형벌만을 시행하고 마는 것입니까? 성비(聖批)에 또 이르시기를, ‘동궁의 마음이 불안하므로 큰 경사(慶事)의 날에 방해가 있다.’ 하셨는데, 흉역(凶逆)의 죄를 통쾌하게 바로잡는 것은 동궁의 마음을 평안케 하려는 것입니다. 어찌 동궁이 이로 인하여 불안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유봉휘와 같은 자는 속으로 장심(將心)392) 을 품고 경례(慶禮)를 막으려 한 것이니, 만일 엄중히 징토(懲討)를 가하지 아니하면 앞으로의 염려는 장차 미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니, 신 등이 왕법(王法)을 통쾌하게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바로 큰 경사를 무사히 치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고, 삼사(三司)도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승지들이 대신과 삼사(三司)의 청에 빨리 따를 것을 계청하였고, 보덕(輔德) 박사익(朴師益) 등도 상소하여 청했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8월 28일 병술
밤에는 번개가 치고, 5경(五更)에는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왔다.
대신과 2품 이상의 관원이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이 몸이 불편하다 하여 소회(所懷)를 글로 써서 들이라 하였다. 대신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 다시 입대(入對)를 청했으나 또 윤허하지 않으므로 김창집 등이 2품 이상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소회(所懷)를 계진(啓陳)하였다. 삼사(三司)도 하루에 두 번이나 계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8월 29일 정해
신절(申晢)을 교리(校理)로, 신무일(愼無逸)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빈청(賓廳)에서 비로소 유봉휘의 국문을 청하는 계달을 정지하였다. 삼사(三司)에서는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다. 사헌부에서는 최석항(崔錫恒)·송상기(宋相琦)의 파직을 청하는 계청을 정지하고, 또 경재(卿宰)로서 합사(合辭)393) 의 계청에 참여하지 아니한 사람을 모두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8월 30일 무자
왕세제가 상소하기를,
"신이 전소(前疏)에서 유봉휘의 소에 관하여 약간 앙진(仰陳)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소가 마침 신이 황축(惶蹙)하고 민울(悶鬱)한 처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끝내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어지신 천총(天聰)에 호소치 아니할 수 없었는데 ‘위험(危險)’이란 두 글자에 있어서는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신의 말 한 마디가 유봉휘의 죄안(罪案)에 보탬이 되어 진신(縉紳)394) 과 장보(章甫)395) 들이 잇따라 역쟁(力爭)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니 신의 불안한 마음이 더욱 더하여져 갑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 굽어 살피시어 끝내 유봉휘로 하여금 큰 죄과(罪過)에 이르지 않게 하여 주신다면, 어찌 다만 신의 마음만 조금 평안할 뿐이겠습니까? 성조(聖朝)의 관대한 은전(恩典)도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소(前疏)안에 있는 ‘위험(危險)’이란 두 글자는 꼭 유봉휘를 매우 미워하여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빈청(賓廳)이나 삼사(三司)의 계청에 끝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소사(疏辭)를 살펴보니 성심하여 딴 마음이 없으니 나의 뜻에 꼭 맞는 바요, 또 살리기를 좋아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이니 유의(留意)하여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승지를 보내어 선지(宣旨)케 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수상(首相) 김창집(金昌集)이 기질(耆耋)의 나이에 나라의 원보(元輔)396) 로 있으니, 국외의 출행에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하여 자신이 대신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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