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기축
삼사(三司)와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날마다 되풀이 되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연이어 소장(疏章)을 올려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9월 2일 경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권상하(權尙夏)가 청풍(淸風)의 시골 집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애도의 윤음(綸音)을 내리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예장(禮葬)케 하였으며, 또 관판(棺板)과 제수(祭需)도 지급케 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3년을 한하여 그대로 월름(月廩)을 지급케 하였다. 권상하는 어려서부터 명유(名儒)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언론이 좋아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 때부터 이름이 있었다. 송시열이 윤증(尹拯)과 서로 절교하게 되자 문인 중에 후사(後事)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급속하게 추허(推許)하여 송시열이 별세할 때에는 매우 은근한 부탁을 받았었다. 갑술년397) 이후에는 그 문도(門徒)들이 더욱 서로 추중(推重)하였고 조정에서도 유현(儒賢)으로 대접하였으며, 여러 번 징초(徵招)에 응하여 마침내 대배(大拜)398) 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권상하는 학문이 정심(精深)하지 못하고 주워모아 외고 말하는 것이 다만 송시열의 여서(餘緖) 뿐이어서 이 때문에 김창협(金昌協) 형제(兄弟)가 매우 경멸하였다. 숙종(肅宗)이 온천(溫泉)에 거동할 때에 권상하는 좌찬성(左贊成)으로 조정에 나왔는데, 임금에게 말한 바가 성학(聖學)을 권면하고 치도(治道)를 도울 만한 것이 없고 다만 송시열이 항상 말한 바 ‘천지간(天地間)에는 오직 「직(直)」자 한 글자만이 있을 뿐이다.’와 ‘대의(大義)를 위하여 설치(雪耻)를 하여야 한다.’는 것뿐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듣고 비웃었다.
9월 5일 계사
홍계적(洪啓迪)을 도승지로, 이희조(李喜朝)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의 하교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대신이 국외로 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써 이건명(李健命)의 정사(正使)를 바꾸어 종실(宗室)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이 주원(厨院)399) 의 직을 맡고 있으면서 끝내 간계(奸計)를 부리고 폐해를 끼치는 환관(宦官) 하나도 규정(糾正)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신이 주원(厨院)에서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선혜청(宣惠廳)의 당상관도 겸무[兼帶]하고 있습니다마는, 공물인(貢物人)이 환시(宦寺)의 뇌물 요구에 시달려 응역(應役)을 못하는데도 좌시(坐視)만 하고 있으므로 곧 흩어지게 될 것이니, 이는 선혜청에서 소임을 못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두 소임을 체직(遞職)시켜 줄 것을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그 불가함을 강력하게 아뢰고 체직(遞職)하지 말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다시 이건명의 말을 따르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이 어떻게 이러한 설리(薛里)와 함께 일할 수가 있습니까? 경중(輕重)은 논할 것도 없이 책벌(責罰)이 있는 연후에라야 신은 공무(公務)를 집행하겠습니다."
하니, 이건명이 먼저 설리를 바꾸고 이어서 책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선선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민진원과 이건명이 잇따라 말하기를,
"이미 책벌을 윤허하셨으니, 마땅히 파직을 시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와 양사(兩司)에서 유봉휘 등의 일을 탑전(榻前)에서 거듭 아뢰었으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창집·이건명·민진원 등이 말하기를,
"유봉휘의 죄를 원찬(遠竄)으로 말감(末減)400) 하면 인심을 진정 시킬 수가 없습니다. 주상께서 만일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 극형에 처하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마땅히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천극(栫棘)401)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민진원이 이 뒤로 건저(建儲)에 관하여 말한 자는 역률(逆律)로 단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답하지 않았다.
9월 6일 갑오
왕세제와 빈궁(嬪宮)이 입궁(入宮)하였다. 세제는 사저(私邸)에서 베로 싼 익선관(翼善冠)과 백포(白袍)와 베로 싼 서대(犀帶)를 갖추고 나왔다. 여연(輿輦)을 타려 할 때에도 흐느끼며 굳이 사양하다가 궁관(宮官)402) 이 강청(强請)한 뒤에야 탔다. 홍화문(弘化門) 동쪽 협문(夾門)에 이르러 연에서 내려 연을 물리치고 걸어가려 하니, 궁관이 또 연에 탈 것을 역청(力請)한 뒤에야 탔다. 명정문(明政門) 밖에서 연에서 내려 전정(殿庭)으로 들어갔다. 대비전(大妃殿)·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의 승전 내관(承傳內官)을 청하여 문안(問安)하고는 이내 효령전(孝寧殿)의 재실(齋室)로 들어가 최질(衰絰)로 갈아 입고 전전(殿前)에 들어가 전배(展拜)를 마쳤다. 세제가 궁관에게 ‘어찌 곡례(哭禮)가 없느냐?’고 물으니, 궁관이 대답하기를,
"해조(該曹)의 절목(節目)이 소루(疏漏)한 것 같으나, 창졸간에 지금은 대조(大朝)403) 에 품정(稟定)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우선 의주(儀註)에 따라 행례(行禮)할 것을 청하였다. 세제가 또 전내(殿內)에 들어가 살펴보려 하자, 궁관이 역시 예관(禮官)의 마련을 거치지 않았으니 행할 수 없다 하므로, 세제가 그대로 따랐다. 나와서 시사복(視事服)으로 갖추어 입고 빈양문(賓陽門)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사간원 【정언(正言) 유복명(柳復明)이다.】 에서 아뢰기를,
"조정에서 양역(良役)의 네 가지 방도를 제도(諸道)에 물어 보았는데,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호포(戶布)·유포(游布)·구전(口錢)의 세 가지는 이미 중지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마는, 결역(結役)만은 아직도 강구(講究) 중에 있으니 신은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전세(田稅)는 대동법(大同法)이 만들어진 뒤로는 매결(每結)마다 쌀 12두(斗)를 내고, 또 세(稅)로 쌀이나 콩 10두를 내며, 또 삼수량(三手粮)404) 별수미(別收米)가 있으니 전역(田役)이 가볍다고는 할 수가 없는데, 이제 또 별역(別役)을 덧붙인다면 불쌍한 우리 궁민(窮民)들은 장차 어디서 이것을 취판(取辦)할 것입니까? 비록 넉넉할 때에 4결(結)당 1필(疋)도 오히려 의심을 가졌었는데, 하물며 지금처럼 곤란할 때에 1결당 1필을 어떻게 경솔히 시행하겠습니까? 하물며 결역(結役)은 베를 내던 군액(軍額)이나 공사천(公私賤)으로 2필을 내던 것까지 모두가 통징(通徵)405) 중에 들어오게 되니, 그 하나는 감해주고 하나는 받아내는 것이 이른바 조삼 모사(朝三暮四)와 같은 것으로, 군민(軍民)도 힘을 펴지 못하게 되므로 온 나라의 원망은 장차 10분의 9가 더하게 될 것입니다. 또 백성들 중 1결을 가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10호의 마을에서 밭을 가진 자는 하나나 둘도 못되고, 반수(半數)는 남의 밭을 빌려 경작하는 사람들로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을 하여도 상세(常稅)도 내지 못하는데 그 반은 전주(田主)에게 실어보내야 하고 또 응당 공사채(公私債)를 갚아야 하니, 이제 또 별징(別徵)을 요구한다면 결국은 양전(良田)을 분토(糞土)처럼 버리고 묵혀서 황폐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라, 인족(隣族)에 침징(侵徵)하는 폐단은 양역(良役)보다도 훨씬 심할 것입니다.
또 시역(柴役)·빙역(氷役) 등 잡역(雜役)을 넘긴 뒤에는 결역(結役)이 조금은 풀릴 것 같기도 하지만, 이른바 잡역의 수합가(收合價)라는 것이 다과(多寡)가 이미 다르고 가감(加減)이 현수(懸殊)하며 읍(邑)마다 같지 않고 도(道)마다 다르게 되니, 다만 연호(煙戶)의 잔성(殘盛)에 매였을 뿐 아니라 사실은 물종(物種)의 귀천(貴賤)에서도 연유한 것입니다. 결국 일례(一例)로 평준(平準)할 방도가 없고, 각 고을 잡역의 규례(規例)도 또한 결역(結役)에 부가하지 않고 연호(煙戶)에게 징수한 것이 많은데, 이러한 고을은 또 앞으로 어디에다 부과할 것입니까? 이 법의 행하기 어려움을 꼭 먼저 시험을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병민(兵民)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펴주려 하다가 팔역(八域)의 백성들을 모두 수탄(愁歎) 가운데로 몰아넣는 것이니, 이는 환산 궤멸(渙散潰滅)406) 의 방책입니다. 아! 그 대대적인 변통의 방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청컨대 빨리 결역(結役)을 강행(講行)한다는 영을 거두시고 즉시 사방에 알려 민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숙종(肅宗) 때부터 양역(良役)을 변통할 적의책(適宜策)을 강구(講求)하려고 하였으나, 의자(議者)들은 마침내 좋은 계책이 없었던 것이다. 김유(金楺)가 일찍이 ‘결포 사의(結布私議)’라는 글을 저술하여 꼭 시행해볼 만한 것이라고 여겼었다. 이건명(李健命)이 김유의 말을 믿고 있다가 정국(政局)을 담당하게 되자 건의(建議)하여 시행코자 하였다. 조정 의논은 모두 그것이 불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한 사람도 이해(利害)를 통쾌하게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유복명의 계사(啓辭)만이 유독 명백하게 분석하였으니, 시론(時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9월 7일 을미
밤에 번개가 쳤다.
9월 8일 병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유복명(柳復明)의 계사(啓辭)로 상소하여 인혐(引嫌)하고 체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9일 정유
햇무리하였다.
이유(李瑜)를 지평(持平)으로, 이의현(李宜顯)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도빈(趙道彬)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어유룡(魚有龍)을 사간(司諫)으로, 조태억(趙泰億)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았다.
헌납(獻納)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여 유봉휘를 국문(鞫問)하자는 청에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0일 무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영은군(靈恩君) 이의천(李義天)이 양가(良家)의 여자를 강간(强奸)하였음을 논핵하여 법에 따라 정죄(定罪)할 것을 청하였으며, 부총관(副摠管) 신익하(申翊夏)가 이름이 토역(討逆)을 청하는 글 속에 들어 있는데도 유봉휘(柳鳳輝)가 대명(待命)하고 있는 곳에 나가서 만나봤기에 여론이 이상하게 여기고 있음을 들어 삭직(削職)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상소하여 결포(結布)의 폐단과 속오군(束伍軍)에서 쌀을 거두면 반드시 군제(軍制)를 파괴할 것임을 극론(極論)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은 비록 결포(結布)의 의견을 고집하고 있었지만 전후로 말한 사람들이 매우 강력하게 반대하니 이건명도 스스로 시행키 어려움을 알고 이에 김창집(金昌集)과 더불어 임금께 아뢰기를,
"이제는 이미 가을도 깊어졌으니, 청컨대 앞으로 시일을 두고 천천히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9월 12일 경자
신절(申晢)을 집의(執義)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상유(權尙游)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최석항(崔錫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종신(宗臣)을 주청사(奏請使)로 차송(差送)하는 것은 그 일을 소중히 여기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고, 이건명이 이어 자기가 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9월 15일 계묘
왕세제가 효령전(孝寧殿)의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하였다. 이 뒤로는 삭망(朔望)에는 번번이 모두 제사를 섭행하여 언제나 폐지한 적이 없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은 인견(引見)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임금의 기후(氣候)가 조금 나을 때에는 경연(經筵)을 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령(掌令) 송도함(宋道涵)이 상소하여 7조(條)의 급무(急務)를 논하였으니, ‘1. 입지(立志), 2. 면학(勉學), 3. 경천(敬天), 4. 휼민(恤民), 5. 임현(任賢), 6. 호문(好問), 7. 무실(務實)’이었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칭찬하였다.
9월 16일 갑진
조성복(趙聖復)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9월 19일 정미
성균관(成均館)의 상순(上旬) 윤차(輪次)에 장원한 생원(生員) 유시모(柳時模)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9월 22일 경술
경기(京畿)의 유생 윤태두(尹泰斗)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품처(稟處)하라 명하였다. 송시열 등을 종사(從祀)하자는 논의는 숙종(肅宗) 말년에 처음으로 일어났으나 시론(時論)이 이미 그 지나침을 비난하였는데, 이제 한 사람의 향유(鄕儒)의 상소로 인하여 갑자기 품처(稟處)하라는 명을 내리므로 임금의 마음이 장소(章疏)의 득실(得失)과 전례(典禮)의 경중(輕重)을 살펴서 처리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이날도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9월 23일 신해
임금이, 예조의 절목(節目)에 세제(世弟)와 빈(嬪)이 책봉(冊封) 뒤에는 삼전(三殿)407) 에 조알(朝謁)하는 예(禮)는 있으나 효령전(孝寧殿)에 전알(展謁)하는 절차가 없어서 정리(情理)와 예의(禮儀)에 미안한 일이니, 마땅히 책봉일에 길복(吉服)으로 효령전에 먼저 전알하고 대궐 안으로 들어와 대비(大妃)와 내전(內殿)께 조알(朝謁)하여야 한다 하여, 예조로 하여금 그 당부(當否)를 대신에게 의논케 하였으나, 자성(慈聖)의 교지(敎旨)를 따랐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도 세제와 빈(嬪)이 책례일(冊禮日)에 각전(各殿)에 조알하면 각전에서도 길복으로 인사를 받아야 하며, 왕세제는 이어서 길복으로 효령전부터 전알하는 것이 정리와 예의에 합당할 것 같다고 말하니, 보덕(輔德) 박사익(朴師益) 등이 상소하여 쟁론(爭論)하기를,
"최마(縗麻)로 곡읍(哭泣)하는 곳에서 바로 길복을 입는 것은 마땅치 못하니, 청컨대 다시 예(禮)를 아는 유신(儒臣)에게 널리 물으소서."
하여, 일이 도로 예조로 내려졌다. 예관(禮官)이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대신의 의논을 거쳤고, 받아놓은 날짜도 임박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어보기가 어려우니, 그만두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책례(冊禮)에 길복을 입는 것은 이미 국조(國朝)의 전장(典章)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혼전(婚殿)에 전알하고 다시 길복으로 행례를 하니, 실례(失禮) 중에서도 또 실례인 것이다. 대신과 예관이 처음에 이미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내지(內旨) 앞에서 쟁론(爭論)을 하지 못하였고, 또 궁관(宮官)의 박순(博詢)하자는 청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으니, 그 무식함이 이와 같았으나 세제는 영명(英明)하여 그것이 예절에 어긋난 것을 깨닫고 책례일(冊禮日)에 임금께 청하여 시사복(視事服)으로 전알(展謁)하였었다.
큰 바람이 불어 헌릉(獻陵)408) 의 홍살문[紅箭門] 안의 두 큰 나무를 쓰러뜨렸다.
9월 24일 임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완(李浣)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연(金演)은 빈청(賓廳)에서 계청할 때에 참가하지 않고서 남몰래 양천(陽川)으로 갔으며,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세근(李世瑾)은 정령(政令)이 가혹(苛酷)하고 흉년에 진휼(賑恤)할 뜻이 없었으며, 경기 수사(京畿水使) 신광하(申光夏)는 일찍이 호곤(湖閫)409) 으로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불법이 많았으니, 모두 파직시킬 것을 청합니다.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하원(李夏源)은 경솔하고 비열하여 자목(字牧)410) 으로 합당치 못하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다만 전일에 계청한 신익하(申翊夏)의 삭직(削職)할 일만 따랐다. 이완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무식하여 사람의 축에도 끼지 못하였는데, 대대로 호중(湖中)411) 에 살면서 호강(豪强)하여 불의(不義)가 많았었다. 지금 탄핵한 바도 혹은 남의 사주(使嗾)를 받았거나 혹은 사원(私怨)을 갚으려는 것이므로 공론이 모두 놀라와하였다. 그 며칠 뒤에 지평(持平) 이유(李瑜)가 이완의 모든 계청을 정지시키고 그를 박론(駁論)하여 체직시켰다.
9월 25일 계축
송상기(宋相琦)를 판돈녕(判敦寧)으로, 이의현(李宜顯)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신절(申晢)을 응교(應敎)로, 조도빈(趙道彬)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채지홍(蔡之洪)을 자의(諮議)로 삼았다. 채지홍은 청주(淸州) 사람으로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이[虱]처럼 들러붙어 있었는데, 학술(學術)은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음에도 권상하의 아우 권상유(權尙游)가 전권(銓權)을 잡고 있으면서 낭료(郞僚)들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 선임(選任)에 주의(注擬)하니, 공론(公論)이 크게 놀라와하였다.
9월 26일 갑인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제(王世弟)와 세제빈(世弟嬪)의 책봉례(冊封禮)를 행하였다. 세제가 책봉 받기를 마치고 효녕전(孝寧殿)을 전알(展謁)하였다.
사포서(司圃署)에 불이 나서 서사(署舍)와 전곡(錢穀)이 죄다 탔다.
9월 27일 을묘
백관(百官)들이 길복(吉服)을 입고 인정전(仁政殿)의 뜰에서 하례를 드렸다. 임금은 전(殿)에 나오지 않았으나 왕세제는 전정(殿庭)에 나와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고 돌아와서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백관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중외(中外)에 반교(頒敎)하기를,
"임금은 이르노라. 금중(禁中)412) 에서 대책(大策)을 정하니 경사(卿士)도 따르고 서민(庶民)도 따르며, 저이(儲貳)의 이름이 정해지니 국본(國本)이 정해지고 만품(萬品)413) 도 안정되었다. 이에 마음을 펴보이는 고문(誥文)을 가지고 연경(延頸)414) 의 바람에 답하노라. 생각해 보건대 옛날 선왕(先王)415) 께서 하늘의 경명(景命)416) 을 받으니, 조공 종덕(祖功宗德)417) 의 높고 빛남은 삼대(三代)418) 의 융성할 때보다 뛰어났고, 문소(文昭)·무목(武穆)419) 의 계승은 백세(百世)의 경사(慶事)에 널리 퍼졌다.
나의 고독한 시대에 이르니 항상 깊은 진념(軫念)에 잠기게 되었다. 주창(主鬯)420) 의 자리가 오래 비었으니 누구와 종묘(宗廟)의 일을 받들 것이며, 감국(監國)421) 의 소임(所任)을 물려줄 곳이 없으니 수많은 백성의 마음을 매둘 곳이 없었다. 이 개번(介藩)422) 의 현명함을 돌아보니, 다행하게도 횡경(橫庚)423) 의 길경(吉慶)에 부합하였다. 총명하고 효우(孝友)하여 영예(令譽)가 일찍부터 드러났으며, 검약하고 온공하여 아조(雅操)를 더욱 신칙했도다. 자달(紫闥)424) 에 주선(周旋)하면서 몇해나 상약(嘗藥)425) 을 함께 걱정했으며, 청위(靑闈)426) 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어릴 때 삭엽(削葉)427) 으로 희롱도 했다. 친(親)으로 말한다면 영고(寧考)428) 의 사랑을 받은 바요, 명령으로서는 자성(慈聖)께서 밝게 선포한 바이다. 이는 나의 뜻에도 잘 맞는 일이요, 또한 중모(衆謀)가 끝까지 협찬한 바이다.
중리(重离)429) 가 드러낸 빛은 신명(神明)의 묵우(默佑)한 휴경(休慶)을 힘입었고, 보록(寶籙)430) 에 미치는 상서는 또한 사직(社稷)이 영장(靈長)431) 할 기회로다. 이미 욕의(縟儀)432) 의 행사를 치루었으니, 어찌 패택(霈澤)433) 의 방류(旁流)434) 를 늦출 수 있겠는가? 본월(本月) 27일 새벽으로부터 그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제죄(除罪)435) 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되 자궁(資窮)436) 이 된 자는 대가(代加)437) 해 주도록 하라. 아!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귀속(歸屬)하니 많은 백성의 향대(嚮戴)가 모두 간절하고, 별이 빛나고 바다도 윤택(潤澤)하니 팔역(八域)의 구가(謳歌)가 한창 이는구나. 마땅히 동경(同慶)의 은택을 미루어 무강(無彊)한 복을 함께 누리리라. 그러기에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모두가 자세히 알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관명(李觀命)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73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註 412] 금중(禁中) : 대궐 안.[註 413] 만품(萬品) : 만물.[註 414] 연경(延頸) : 목을 늘이고 기다림.[註 415] 선왕(先王) : 숙종을 가리킴.[註 416] 경명(景命) : 하늘의 큰 명.[註 417] 조공 종덕(祖功宗德) : 조유공 종유덕(祖有功宗有德)의 준말로, 묘호(廟號)를 정함에 있어서 공(功)이 있는 이를 조(祖), 덕(德)이 있는 이를 종(宗)이라 함을 이른 것임.[註 418]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의 삼대(三代).[註 419] 문소(文昭)·무목(武穆) :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즉 좌소(左昭)·우목(右穆)을 이른말.[註 420] 주창(主鬯) : 울창주(鬱鬯酒)를 맡는다는 뜻으로, 세자를 말함.[註 421] 감국(監國) : 왕세자.[註 422] 개번(介藩) : 큰 덕이 있는 사람이 울이 된다는 뜻으로,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篇) 판장(板章)에서 나온 말임.[註 423] 횡경(橫庚) : 한(漢)나라 대왕(代王)이 "점괘(占卦)에서 거북 등에 크게 가로놓인 무늬가[大橫庚庚] 있었으니, 내가 천자가 될 것이라."고 한 고사(故事)를 인용한 말임. 문제기(文帝紀)에 보임.[註 424] 자달(紫闥) : 대궐.[註 425] 상약(嘗藥) : 어버이가 먹을 약을 먼저 맛보는 것. 곧 약시중.[註 426] 청위(靑闈) : 동궁.[註 427] 삭엽(削葉) : 주(周)의 성왕(成王)이 어려서 임금이 되어 희롱으로 오동나무잎을 잘라서 규(珪)를 만들어 아우 숙우(叔虞)에게 주면서 ‘너를 이것으로써 봉한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우연히 이를 보고 ‘왕자는 희롱이 없는 법이오.’ 하고, 숙우를 당후(唐侯)로 봉하게 하였다는 고사(故事).[註 428] 영고(寧考) : 아버지.[註 429] 중리(重离) : 임금과 신하의 밝은 덕.[註 430] 보록(寶籙) : 왕의 자리에 오를 조짐.[註 431] 영장(靈長) : 영묘하고 오래감.[註 432] 욕의(縟儀) : 성례(成禮).[註 433] 패택(霈澤) : 은택.[註 434] 방류(旁流) : 널리 미침.[註 435] 제죄(除罪) : 면죄.[註 436]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品階)가 다시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당하 정3품(正三品)이 됨을 말함.[註 437] 대가(代加) : 경우에 따라, 품계(品階)를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하여 그 자·서·제·질(子婿弟姪)에게 품계를 올려 주는 것.
9월 28일 병진
대사헌 이희조(李喜朝)가 현도(縣道)를 거쳐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동궁(東宮)을 보좌 지도할 방책을 아뢰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윤허하지 않았으며, 그 소를 동궁에게 보이도록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상소하여 책례(冊禮)를 하례하고 또 사직을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9일 정사
예조에서 왕세제의 책례(冊禮)를 경축(慶祝)하여 별시(別試)를 열어 사람을 뽑을 것을 청하니,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려 흉년이 든 이유로써 정시(庭試)로 바꿀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무과(武科)의 규식에 육량(六兩)438) 의 보수(步數)는 너무 멀므로 먼 데까지 쏘지 못한 자는 대부분 기회를 엿보아 차사(借射)를 하니, 과장(科場)을 엄중히 다스리는 방도가 못됩니다. 마땅히 보수(步數)는 줄이고 겸하여 사서(四書)와 무경(武經)을 강(講)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무과 시험에서 대사(代射)하는 폐단은 참으로 김창집의 말과 같았으나, 사서(四書)와 무경(武經)의 강(講)인들 유독 시관(試官)과 거자(擧子)가 서로 짜고 수작하는 버릇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다만 경중(京中)의 세력있는 자제(子弟)들의 요행(僥倖)한 계제만 만들어 줄 뿐이요, 먼 시골의 무력(武力)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낙방을 안겨주어 억울함을 일컫게 할 뿐이다.
이중협(李重協)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사령(赦令)이 내린 이후의 사죄인(死罪人) 장천핵(張天翮)·장천숙(張天䎘)·조시경(趙始炅)·조세정(趙世挺)·오시복(吳始復) 등이 방면(放免)되고 이봉징(李鳳徵)·종실 이찬(李燦)439) 등의 직첩이 환급(還給)되었다는 이유로써 환수(還收)할 것을 계청(啓淸)하였고, 사헌부에서도 또한 논계(論啓)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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