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기축
이정신(李正臣)을 도승지(都承旨)로, 어유룡(魚有龍)을 사간(司諫)으로, 채응복(蔡膺福)을 장령(掌令)으로, 이자(李滋)를 정언(正言)으로, 권업(權𢢜)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집의(執義)로, 이희조(李喜朝)를 찬선(贊善)으로, 김창흡(金昌翕)을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집(李㙫)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인군(人君)에게 깊은 병이 없는데도 즉위한 원년이 갑자기 정무를 놓기를 명하는 것은 사첩(史牒)에 있지 아니한 바입니다. 전일에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지자 온 나라 인심이 물이 끊어오르듯 불이 타오르듯 하였습니다. 만약 도로 거두기를 조금이라도 늦추었다면 안정시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이 극도에 이르면 하늘이 어기지 못하는 법인데, 다행히도 전하께서는 멀지 아니하여 회복하셨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聖意)를 굳게 정하셔서 다시는 전도(顚倒)되는 일을 하지 마시고, 또 반드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각고 면려(刻苦勉勵)하시어 하늘과 조종(祖宗)의 뜻에 보답하소서.
최석항이 홀로 먼저 입대(入對)한 것이 과연 무슨 죄이며 말하고자 한 것은 얼마나 큰 일입니까? 몸이 이미 대궐에 이르렀다면 오직 마땅히 즉시 호소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침묵하며 다른 사람과 지체하여 기다리는 것이 어찌 분의(分義)에 마땅한 바이겠습니까? 만일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진실로 주책(誅責)535) 해야 할 만한데도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아니한 것을 죄로 삼으니, 이는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후(先後)를 물론하고 다만 천의(天意)를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은 이에 지극한 다행이었습니다. 홀로 이룩한 것이나 함께 이룩한 것을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태구(趙泰耉)는 전하의, ‘시속의 태도를 쾌히 씻고 마음을 돌이켜 곧 들어와서 장차 망하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라.’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앉아서 상규(常規)만 지키겠습니까? 출입을 동궐(東闕)536) 로 한 것은 단지 병이 위중하여 행보가 조금 가까운 곳을 취하였을 뿐이며, 선인문(宣仁門)537) 역시 시어소(時御所)538) 의 정문(正門)이므로, 비록 병이 있지 않아도 이곳을 경유하여 출입한 것이 옛부터 한정없이 많았습니다. 그 행차할 적에 도로에서 소리를 치고 들어와서는 후사(喉司)에 입대하기를 청하였으며, 그 말한 바는 성상께서 정무를 놓고자 하는 명을 돌이키려고 한 것인데, 이제 그 죄를 성토하여 혹은, ‘돌입(突入)하였다.’고 하고, 혹은 ‘몰래 진현(進見)하기를 도모하였다.’라고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저 인견(引見)의 명이 바로 내려진 것이 또 어찌 상신(相臣)이 감히 아는 바이겠습니까? 그때의 곡절을 전하께서 이미 명백하게 하교하셨는데도, 오히려 구실을 삼아 마음을 쾌하게 하려고 하여 잠시 사이에 삭출(削黜)로부터 원찬(遠竄)에 이르렀고, 이튿날은 원찬에서 국문(鞫問)으로, 또 그 이튿날에는 국문에서 다시 원찬이 되었습니다. 막고 낮추고 올리는 것을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아! 너무나 꺼리는 바가 없습니다. 대신이 비록 죄나 허물이 있을지라도 나문(拿問)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선왕(先王)의 하교가 명백해 있는데도 오히려 변모(弁髦)539) 로 여기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상신(相臣)의 평생 행신(行身)을 나라 사람이 아는 바이니, 환시(宦寺)와 교통(交通)하였다는 말이 어찌 근사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터무니없이 죄를 마구 더하며 조금도 어려워함이 없습니다. ‘환첩(宦妾)이 이름을 아는 사람에게 복상(卜相)하였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이는 성간(聖簡)540) 하신 일까지 아울러서 속이는 것이니, 어찌 통분(痛憤)하지 않겠습니까?
군부(君父)가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내리시자 정성을 다해 돌이키려 하고 뭇사람의 마음이 함께 분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혹시 다른 사람이 능히 하기도 하고, 상례(常例)로 할 수 없는 것은 혹 파격적으로 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일이 지나간 뒤에도 서로 하례(賀禮)하는 바탕이 되기에 꼭 적합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 오히려 함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신은 진실로 세도(世道)를 위하여 개탄합니다. 마음에 품은 바의 장소(章疏)를 승정원에서 마음대로 퇴각(退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옛 법인데, 지난번 정청(庭請)을 정지하던 날 중신(重臣)이 상소를 승정원에 와서 올렸으나, 공공연히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국가에 관한 일은 경중을 물론하고 모두 위에 아뢸 길이 없어질 것이고,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될 것입니다. 엄하게 신칙(申飭)을 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광구(匡救)하고자 올린 말을 내가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시사(時事)가 개탄스러운 것은 진실로 나의 박한 덕이 밝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니, 아! 누구를 허물하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경은 뒤미처 다시 제기하지 말고, 공경히 가서 일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한중희(韓重熙), 부제학(副提學) 홍계적(洪啓迪),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 사간(司諫) 어유룡(魚有龍)이 모두 이집(李㙫)의 상소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소를 올려 피혐(避嫌)함이 서로 잇따라 분분하였다.
11월 3일 경인
경상도 가덕진(加德鎭)해척(海尺)541) 이석벽(李石碧) 등 18명이 익사[渰死]하였다. 통제사(統制使)가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니,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신묘
등극(登極)한 경사로 증광과(增廣科)를 베풀었는데, 이날 전시(殿試)에서 신처수(申處洙) 등 33명을 뽑았다.
집의(執義) 이중협(李重協)이 상소하여 사직하며 말하기를,
"신이 전번에 올린 한 차자(箚子)는 그 말이 비록 광망(狂妄)할지라도 그 마음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서, 성조(聖朝)의 처분이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여 안팎이 밝게 통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전석(前席)의 대계(臺啓)를 윤허하시어 승전색(承傳色)을 나문(拿問)하라는 명까지 내리셨으니, 나라 사람이 그날의 인대(引對)에 어찌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으며, 신이 근심하고 분하여 어찌 한 마디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의 박한 덕이 밝지 못하여 임금을 업신여기고 무엄한 논의가 뜻밖에도 나왔다. 알지 못하겠지만, 환첩(宦妾)이 이름을 아는 사람을 몇 사람이나 제배(除拜)하였는가? 시사(時事)가 이와 같으니, 저절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11월 5일 임진
이교악(李喬岳)을 승지(承旨)로, 성진령(成震齡)을 정언(正言)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대사성(大司成)으로, 한중희(韓重熙)를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서명균(徐命均)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홍치중(洪致中)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부응교(副應敎) 신절(申晢)이 이중협(李重協)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미안한 하교를 거두기를 청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고쳐서 내릴 것을 잇따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동강(東江)의 뚝섬[纛島] 마을에 불이 나서 30여 호가 불타고 죽은 백성이 세 사람이었는데,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6일 계사
비변사(備邊司)에서 황해도의 흉년과 굶주림 때문에 진휼(賑恤)하는 일이 바야흐로 급하다며 전 감사(監司) 김유경(金有慶)을 잉임(仍任)542) 시킬 것을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7일 갑오
황귀하(黃龜河)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신방(申昉)을 교리(校理)로, 유숭(兪崇)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정석오(鄭錫五)를 문학(文學)을 삼았다.
함경도 경성(鏡城) 군민(軍民)이 몰래 청국 국경으로 넘어가 사슴을 사냥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북병사(北兵使)가 계문(啓聞)하자, 비변사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수창자(首唱者) 두 사람은 국경에서 효시(梟示)하고, 그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정배(定配)하고 결곤(決棍)하되, 도망한 자는 남북관(南北關) 각 고을로 하여금 정탐해 잡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8일 을미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인복(李仁復)이 앞서 이미 상소하여 승정원에서 옹폐(壅蔽)543) 한 죄를 크게 논하였는데, 이집(李㙫)에게 논척(論斥)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 이집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하여 대각(臺閣)에 나아가 인피(引避)하고, 물러가서 기다리지 않은 채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이어서 논하기를,
"이인복이 앞에서 주창하고 이집이 뒤에서 잇따라 조정에 있는 신하를 모함하며 논박을 입은 사람을 신구(伸救)하고, 공의(公議)와 힘써 싸워 당(黨)을 위해 죽는 것을 마음속으로 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한배하가 잇따라 한 상소를 올렸는데, 말이 심히 흉패(凶悖)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파직하고,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1월 9일 병신
정택하(鄭宅河)를 헌납(獻納)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지평(持平)으로, 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도승지(都承旨) 이정신(李正臣)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나랏일은 몹시 위태롭다 할 수 있습니다. 인주(人主)의 형세는 위에서 외롭고 당여(黨與)는 밑에서 이루어졌으며, 승정원은 전적으로 막고 가리기에만 힘쓰고, 대간(臺諫)은 오직 공격해 내쫓기에만 일삼고 있으니, 군부(君父)의 교령(敎令)은 지척(咫尺)에 통하지 않고, 군하(群下)의 정성스러운 마음은 진달할 길이 없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우상(右相)에게 별도로 유시(諭示)하여 도움을 구한 뜻이 말에 애연(藹然)하였으나, 두 번이나 막아 조금도 어려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청대(請對)는 보통 격식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다만 정청(庭請)을 갑자기 그만두어 성명(成命)을 돌이킬 수 없었으므로, 광구(匡救)하는 데 급하여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즉각 품계(稟啓)하여 혹시라도 천의(天意)를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란 것은 인정이 같이한 바였습니다. 그런데 극력 저지하여 위에서 알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최규서(崔奎瑞)는 초야(草野)의 중신(重臣)으로 나라를 근심하여 분개해서 상소하였는데, 상소가 막 승정원에 이르면 곧 퇴각하였고, 최석항(崔錫恒)은 정청(庭請)을 정지할 때를 당하자 개연(慨然)히 상소하여 왕복하기를 서너 번이나 하였으나 마침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어제 승선(承宣)의 소비(疏批)에 성상의 뜻이 지극히 엄하시어, ‘시비(是非)와 출척(黜陟)은 임금이 알아서 하는 바이다.’라고까지 하교하셨으니, 출납하는 자리에 있는 자는 마땅히 두려워하여 마음을 고쳐야 할 것인데도 조금도 징계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오히려 전과 마찬가지였으며, 한배하(韓配夏)의 상소를 퇴각하는 데 와서는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지 아니하면, 국가의 위망(危亡)이 호흡지간(呼吸之間)에 닥칠지라도 충성스런 바른 의논이 위에 전달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후 승지를 일체 모두 견책하여 파면한 뒤에야 조금이나마 징계할 수 있으며, 한배하의 상소도 받아들여 재결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번에 예사롭지 않은 하교는 다행하게도 한 중신(重臣)의 청대(請對)에 힘입어 반한(反汗)하셨는데, 삭출(削黜)의 청이 대각(臺閣)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비망기(備忘記)를 재차 내리셔서 우상(右相)이 입대(入對)하며 울며 광구(匡救)하여 천청(天聽)을 감회(感回)하였으니, 조정에 있는 군료(群僚)는 마땅히 낯빛을 바꾸며 서로 하례해야 할 것인데, 먼저, ‘환시(宦寺)와 교통(交通)하였다.’는 말로 죄안(罪案)을 억지로 만들고, 끝에는, ‘환첩(宦妾)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성간(聖簡)을 아울러 속였습니다. 대신에게 국문(鞫問)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것은 선조(先朝)의 법인데 쉽게 변모(弁髦)로 만들고, 승전색(承傳色)이 성상의 하문으로 인하여 앙대(仰對)하였음을 성상의 하교에서 명시(明示)하였는데도 더욱 힘써 버티니,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남김없이 끊어지고 사라졌습니다.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유복명(柳復明)이 강개(慷慨)하여 다투어 고집하자 고의로 다른 일을 빙거(憑據)하여 반드시 중상(中傷)하려 하였고, 박태항(朴泰恒) 등은 조성복(趙聖復)을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는데 일체 모두 죄주기를 청하여 혹시라도 면한 사람이 없으며, 한배하(韓配夏)의 상소를 한편으로는 승정원에서 막고 한편으로는 대각(臺閣)에서 공격하니, 전하의 조정은 도리어 이 무리들이 뒤흔들고 농락하는 곳이 되어 장차 누가 감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차라리 죽고 싶을 뿐입니다. 대각(臺閣)의 여러 신하를 아울러 견책하여 파면한 뒤에야 국가의 체통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것인데, 전하께서 어질게 용서하심이 지나치고 덕을 지키심이 굳지 못하시므로, 이 무리들이 조금도 꺼림없이 오직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우악하고 관대하게 용서하여 일체 그 하는 대로 맡겨두고 금하지 않으십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권강(權綱)544) 을 거두어 잡아 혹시 흔들리거나 빼앗김이 없도록 하여 임금의 위엄이 높아지고 나라의 형세가 떨쳐지게 하소서."
하였다.
11월 11일 무술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11월 12일 기해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이정신(李正臣)의 상소가 들어간 지 나흘 만에 임금이 비로소 답하기를,
"상소에 대개를 내가 이미 알았다."
하고, 인하여 한배하(韓配夏)의 상소를 들이라고 명하였다.
11월 13일 경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밤에 달무리하였다.
조영세(趙榮世)를 집의(執義)로,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김재로(金在魯)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11월 14일 신축
한배하(韓配夏)의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지평(持平) 서종급(徐宗伋)이 상소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의 상소가 나오자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마치 기화(奇貨)를 본 듯 반드시 조정을 비우고 나라에 화(禍)를 끼치고야 말려 하는데, 전하께서는 언제나 너그럽게 용서하고 계십니다. 이집(李㙫)의 비답(批答)에 이르러서는 석연(釋然)하지 못한 뜻이 있는 듯하니, 충성하기를 원하는 신하로 하여금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한배하(韓配夏)·이인복(李仁復)은 감히 전하의 천심(淺深)545) 을 엿보아 연달아 상소하였고, 구성한 뜻이 음흉하고 쓴 말이 절패(絶悖)함은 이정신(李正臣)과 같은 자가 없으니, 삭출(削黜)하는 법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조성복의 상소가 비록 지극히 망령되고 패악하였으나, 박필정(朴弼正)·박치원(朴致遠) 등은 모두 군함(軍銜)546) 으로서 연소(聯疏)에 급급하였으니, 한쪽편 사람들이 빙자해 구실로 삼은 것은 진실로 책할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평소에 스스로 이르기를, ‘시비(是非)의 마음에 어둡지 않다.’고 한 자도 동일한 투식(套式)으로 귀착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깨우쳐 꾸짖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살펴보지 않고 돌려주니 승정원에서 도로 들여 비답을 내리기를 청하자, 임금이 비로서 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뜻밖에 뒤미처 제기하니 자못 화평(和平)을 잃었다."
하였다.
11월 15일 임인
밤에 월식(月食)하였다.
충청도 연산(連山)·은진(恩津)·부여(扶餘) 등의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집이 흔들렸다. 전라도 진산(珍山) 등지에는 하루에 두 차례 지진이 일어났는데, 도신(道臣)이 모두 장계(狀啓)하였다.
11월 16일 계묘
이만성(李晩成)의 지의금(知義禁)으로, 김흥경(金興慶)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신절(申晢)을 교리(校理)로, 서종섭(徐宗燮)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1월 17일 갑진
부제학(副提學)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여 이정신(李正臣)을 배척하기를,
"예로부터 소인(小人)의 무리가 사람을 살해하려 할 때 먼저 임금의 마음을 현혹(眩惑)시키지 않으면 참소하고 모함하는 꾀를 이룰 수 없으므로, 반드시 임금이 노여워할 만한 말로 의란(疑亂)하고 공동(恐動)시켰는데, 이제 이정신이 이른바,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외롭고 당여(黨與)는 밑에서 이루어졌다.’고 한 것은 참으로 화(禍)를 일으키는 수단입니다. 합사(合辭)가 바아흐로 한창이던 날 갑자기 별유(別諭)로 힘써 나오라는 거조(擧措)가 있었으니, 만약 거행할 수 있다면 이는 대각(臺閣)을 무시하는 것이고, 대각이 무시된다면 성덕(聖德)의 누(累)가 작지 아니합니다. 출납하는 자리에 있는 자는 장차 조정을 위한 것입니까, 대신(大臣)을 위한 것입니까? 논핵을 입은 대신이 갑자기 들어와 청대(請對)한 것은 비록 이정신의 곡호(曲護)547) 하는 말로 볼지라도 또한 ‘보통 격식에 벗어났다.’ 하였는데, 이미 파격적인 일을 하면서 전례에 따라 계품(啓稟)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심히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신이 논박을 입었으면서 바로 들어왔으니 이는 예(禮)로써 진입(進入)한 것이 아니며, 전하께서 계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바로 입대(入對)하게 하셨으니 이는 예로 인접(引接)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만약 사사로이 덮음이 있고 해와 달이 만약 사사로이 비침이 있다면, 요컨대 한 개의 ‘사(私)’라는 글자는 사유(四維)548) 가 펼쳐지지 못하게 하고,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을 범하게 할 것이니, 이에 의거하여 국가의 안위(安危)를 판단할 수 있고 풍속의 성쇠(盛衰)를 징험할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음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는 바를 저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개 그 주된 뜻은 오로지 가리고 막는다는 명목으로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는 계책을 삼으려 하여 처분이 이미 정해진 뒤에 일마다 번거롭게 제기하고, 인심이 이미 안정한 뒤에 말마다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니, 아! 이정신도 대대로 녹(祿)을 먹는 신하인데, 어찌하여 차마 나라를 저버림을 마음에 달갑게 여김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요?"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사람마다 뒤미처 제기하니 진실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우며, 또한 화평(和平)을 잃었다."
하였다.
지평(持平) 서종급(徐宗伋)이 엄한 비답(批答)으로 인피(引避)하였는데, 홍문관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8일 을사
신사철(申思喆)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중협(李重協)을 부교리(副校理)로, 남세진(南世珍)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11월 19일 병오
사형수를 진수당(進修堂)에서 초복(初覆)549) 하였다. 삼사(三司)·양사(兩司)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1월 20일 정미
임금이 다시 진수당에 나아가 죄수를 복심(覆審)하였다. 삼사(三司)·양사(兩司)에서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에 앞서 지평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여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도빈(趙道彬)과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재로(金在魯)를 유임시키고 외방으로 보내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이의천의 상소를 탑전(榻前)에 복주(覆奏)하여 부임시키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조 판서 권상유(權尙游)·승지 이교악(李喬岳)·교리 신절(申晢)이 말하기를,
"정형익(鄭亨益)은 재주가 쓸 만한데 내외직(內外職)의 의망(擬望)에 언제나 은점(恩點)550) 을 아끼시니, 애석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11월 21일 무신
날씨가 추워졌으므로 형방 승지(刑房承旨)를 보내어 전옥(典獄)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11월 22일 기유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목성(木星)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이조(李肇)·한배하(韓配夏)·이인복(李仁復)·이집(李㙫) 등을 출파(黜罷)하라는 계청은 정지하였다.
이희조(李喜朝)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신절(申晢)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11월 23일 경술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통제사(統制使)는 삼로(三路)를 통솔하니, 체모가 순찰사(巡察使)와 같아 수사(水使)를 겸했다하여 업신여길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감사(監司) 홍우전(洪禹傳)이 추노(推奴)551) 하는 사객(私客)을 원문(院門)에 들여보냈는데 즉시 들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통제사의 군관(軍官)을 무거운 곤장(棍杖)으로 쳐서 스스로 체모를 잃었고, 통제사 이수민(李壽民)은 장교(將校)를 시켜 감사(監司)가 좌정해 있는 곳으로 돌입(突入)하여 갇힌 하인을 빼앗아 돌아오게 하였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청컨대 홍우전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이수민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여러 승지(承旨)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6일 계축
하교하기를,
"내가 착하지 못하여 어렵고 큰 유업(遺業)을 이어받은 지 이제 2주년이 되었으나, 천재 시변(天災時變)이 달마다 거듭 일어나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농사를 실패하니, 초막집에서는 근심하는 소리가 끊임이 없고 십실 지읍(十室之邑)552) 에서는 원망하는 소리가 그대로 있다. 이는 진실로 나의 박덕(薄德)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또한 조정 관리가 서로 공경하고 같이 협력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그러한 것이다. 양월(陽月)553) 이 이미 다 지나갔는데, 설날 전에 세 번 눈이 내려 풍년이 들 것을 기약할 수 없으니, 나의 근심과 두려움이 더욱 간절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다. 팔도의 방백(方伯)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는 구제할 계책을 극진히 하여 소자(小子)가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에 부응(副應)하라."
하였는데, 승지가 대신 초(草)하여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였다.
경외(京外)의 사수(死囚)를 시민당(時敏堂)에서 삼복(三覆)하였는데, 살인(殺人)·살처(殺妻)·인신 위조(印信僞造)·가칭 어사(假稱御史) 등의 죄인으로 사형에 처한 자가 열 명이었다. 평안도 상원군(祥原郡) 토포 군관(討捕軍官) 최군필(崔君弼)이 행동이 황당(荒唐)한 자 여섯 사람을 관(官)에 보고하지 않고 모두 죽여 구덩이에 묻었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복하였는데,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최군필(崔君弼)은 그들이 도둑인 줄 알고 죽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 때문에 상명(償命)554) 한다면 뒤에 비록 잡아야 할 도둑이 있다 하더라도 장차 잡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이제 만약 살인한 자에게 사형을 용서한다면 모두 장차 ‘도적을 죽였다.’고 할 것입니다. 더욱이 한 사람이 여섯 사람을 죽였으니,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들 중에 이이명의 의논에 따르는 이가 많았으나, 임금은 김창집의 말을 따라 부생(傅生)555) 하여 사형을 감하고 다음 율(律)을 쓰게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홍천(洪川) 백성 박귀선(朴貴先)이 그 자녀를 많이 낳고 같이 살던 아내가 간부(奸夫)를 따라 도망해 숨었으므로 있는 곳을 추적하여 간부와 아울러 죽였는데, 율문(律文)에는, ‘간통하는 현장에서 잡은 것 외에는 모두 상명(償命)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살인한 형벌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해주(海州) 사람 최해운(崔海雲)의 범죄가 대략 박귀선과 같았는데 선조(先朝) 때 일찍이 사형을 감하기를 허락하였으니, 이제 선조의 처분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가하였다. 삼사(三司)와 양사(兩司)에서 각각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 최군필·박귀선 등의 사형을 감하는 명령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11월 27일 갑인
종묘(宗廟)·사직(社稷)·북교(北郊)에 기설제(祈雪祭)를 행하라고 명하였는데, 예조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11월 29일 병진
권업(權𢢜)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박사익(朴師益)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周)이 길에서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서로(西路)의 군제(軍制)를 새로 변경하였는데, 보인(保人)으로서 오(伍)에 오른 자가 복색(服色)과 기계(器械)를 스스로 마련하기가 쉽지 않으니, 본도(本道)의 세미태(稅米太) 3두를 3년을 한도로 획급(劃給)하되, 각 고을로 하여금 정한 법에 의하여 값을 호조에 바치게 하고, 그 남은 것을 취하여 무비(武備)를 수칙(修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가산(嘉山)·순천(順川) 두 고을은 영장(營將)을 겸하고 있는데, 명호(名號)가 본래 가벼워 여러 고을을 호령할 수 없으니, 청컨대 부사(府使)로 올려 과궐(窠闕)에 따라 가려서 임명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사직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상소 끝에 진달한 바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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