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6권, 경종 2년 1722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2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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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정해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1월 2일 무자

박희진(朴熙晉)을 집의(執義)로, 김석연(金錫衍)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행 사직(行司直) 정호(鄭澔)가 향리(鄕里)에서 상소하여, ‘자교(慈敎)를 봉환(封還)하고 역엄(逆閹)을 곧장 정법(正法)하도록 청한 것’을 정신(廷臣)의 죄라고 하여 무고하고 날조한 것이 모두 지극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1월 3일 기축

남취명(南就明)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문유도(文有道)와 박상검(朴尙儉)이 연일 형신(刑訊)을 당하였으나, 기꺼이 자복(自服)하지 아니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또 자교(慈敎) 안에 있는 ‘나인[內人]이 환시(宦寺)와 체결(締結)한 일’과 ‘박상검이 처음 초사(招辭)에서 전언(傳言)한 동료의 성명’에 대하여 추문(推問)하였더니, 문유도가 공칭(供稱)하기를,
"저는 나인과 체결하지 않았으니, 저 내관(內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저 내관’이란 박상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박상검은 공칭하기를,
"안팎의 구별이 있는데, 내관이 어찌 나인과 체결할 수 있겠습니까? 전언(傳言)한 내관은 곧 박찬문(朴贊文)과 김몽상(金夢祥)입니다. 김몽상이 비망기(備忘記)를 쓰고 박찬문이 비망기를 전하였는데, 김몽상이 비망기를 썼기 때문에 성상께서 파직(罷職)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였다.

 

1월 4일 경인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문유도(文有道)가 네 차례 형신(刑訊)을 받고 죽었다.

 

1월 5일 신묘

임금이 친히 효령전(孝寧殿)의 춘향(春享)을 거행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박찬문(朴贊文)과 김몽상(金夢祥)을 나문(拿問)하였다. 박찬문이 공칭(供稱)하기를,
"본래 귀가 먹어 두 환관(宦官)의 말을 애초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흉인(凶人)이 죽음 가운데에서 살길을 찾으려고 남을 헤아리지 못할 곳으로 빠뜨린 것입니다."
하고, 김몽상은 공칭하기를,
"지난해 12월 아무 날 2경(二更)에 왕세제(王世弟)께서 여러 내관(內官)들을 모두 부르시어 청음정(淸陰亭)으로 들어오라고 하시고는 하령(下令)하시기를, ‘내관 두 사람이 나인[內人]과 체결하여 상궁(上躬)을 기롱(欺弄)하고 있다.’ 하셨습니다. 여러 내관들이 우러러 그 이름을 지적하실 것을 청하자, 문유도(文有道)·박상검(朴尙儉)이라고 하령하시고, 이어 대조(大朝)001)                  께 품(稟)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써서 승정원(承政院)에 내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저희들이 다시 저하(邸下)께, ‘이미 친히 우러러 품하셨으니, 저희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왕세제께서 친히 들어가 대전(大殿)께 품청(稟請)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러나 승정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박상검이 승정원에 들어와 지난밤의 일에 대해 묻기에, 제가 ‘동류(同類) 가운데 시비(是非)가 있어도 오히려 공무를 집행하기 어려운데 더욱이 왕세제의 하령(下令)이 지극히 엄중하니, 네가 어찌 감히 공무를 집행할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외에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또 세 환관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면질(面質)시키자, 박찬문이 말하기를,
"그날 약방(藥房)에서 문안(問安)하는 일에 애쓰다가 조금 늦게 병으로 귀가(歸家)하였으므로, 끝내 박상검의 면목(面目)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박상검의 말문이 막혔고, 김몽상의 대답 또한 처음의 초사(招辭)와 같았다. 박상검이 형신(刑訊)을 다섯 차례 받고 위엄(威嚴)을 보이니, 비로소 자복(自服)하기를,
"필정(必貞)과 과연 서로 체결하였는데, 성상께서 크게 노하시어 여러 환관들을 내쫓거나 벌주는 일이 잦았기에 틈을 타서 상달(上達)하여 그 직임을 튼튼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찰(書札)을 서로 통해 대전(大殿)의 수라(水剌)의 많고 적음과 잠자리의 안부(安否)를 알고자 하였으므로, 말이 잗달았던 것입니다. 청휘문(淸輝門)은 곧 왕세제께서 문안(問安)하실 때 왕래하는 문인데, 문을 열도록 하령(下令)하셨으나 때맞춰 문을 열지 아니하여 일찍이 동궁(東宮)에게 죄를 지은 일이 있었으므로 후환(後患)이 있을까 두려워서 필정과 더불어 제거(除去)하려는 마음을 가졌을 뿐이고, 다른 절차(節次)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박상검은 결안(結案)002)                  하여 정형(正刑)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김몽상은 전언(傳言)한 바가 양궁(兩宮)까지 무고(誣告)하였으므로 죄가 박상검과 같다 하여 형추(刑推)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김몽상이 공초(供招)한 바 청음정의 일은 세제(世弟)가 양품(仰稟)한 뒤 내관에게 말했던 일에 불과하니, 진실로 부도(不道)한 말이 아니다. 다시 물을 만한 단서가 없으니, 박찬문과 함께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1월 6일 임진

밤에 통명전(通明殿)행각(行閣)003)  에 불이 났으므로, 숙위(宿衞)하고 있던 군사를 불러들여 끄도록 명하였다.

 

역엄(逆閹) 박상검(朴尙儉)이 복주(伏誅)되었다. 법에 정해진 대로 노적(孥籍)004)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논핵하기를,
"윤지술(尹志述)이 글로 소회(所懷)를 진달한 것이 성궁(聖躬)을 침핍(侵逼)하여 욕되게 하였는데, 그 당시 사유(師儒)의 직임에 있던 자가 예삿일로 여겨 전례에 따라 봉입(捧入)하였고, 공당(空堂)005)  을 핑계대어 말을 꾸며 계품(啓稟)하였으니, 군부(君父)를 조절(操切)하며 조금도 꺼림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동지관사(同知館事)와 대사성(大司成)을 모두 먼 곳으로 찬축(竄逐)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1월 7일 계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궁위(宮闈)에서의 이야기는 대단히 비밀스런 것인데, 김몽상(金夢祥)은 사사로이 서로 말을 전하며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림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감사(減死)하여 변방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8일 갑오

조원명(趙遠命)을 지평(持平)으로, 김동필(金東弼)을 수찬(修撰)을 삼았다.

 

1월 10일 병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경리청(經理廳)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구관(句管)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인데, 재물을 소모시키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폐단이 많으니, 청(廳)의 이름을 없애고 요리(料理)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되,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한 사람으로 하여금 북한산성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공물가(貢物價)를 점차 감하고 깎아내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지금 또 10분의 1을 감하자 백성들이 많이 억울하다고 하니, 대계(臺啓)를 따라 예전대로 복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정청(庭請)006)  을 의논하여 파(罷)했을 때 경재(卿宰)로서 앞서 귀가(歸家)한 자가 많이 있었는데, 대관(臺官)이 단지 좌목(座目)에만 의거하여 죄를 청해 죄적(罪籍)에 뒤섞어 넣었으며, 또한 혹 이미 순문(詢問)하는 데 참석하고서도 요행히 면한 자가 있기도 하니, 마땅히 더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여양 부부인(驪陽府夫人)은 여러 아들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멀리 귀양가기도 하여 가사(家事)가 방락(旁落)007)  되었고, 경은 부부인(慶恩府夫人)은 남편이 죽은 뒤로 병이 더욱 깊어졌으니, 마땅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제빈(世弟嬪)의 아버지 고(故)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는 청컨대 전례에 의거하여 의정(議政)을 증직(贈職)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천승(千乘)의 지위에 계시니 사천(私親)이 낳아 기르신 은혜에 대하여 마땅히 추보(追報)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날 조태구(趙泰耉)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에 ‘지난날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비통(悲痛)함을 깨닫지 못하겠다.’고 하신 하교가 있었으니, 신하된 자라면 누군들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최석항은 따로 사우(祠宇)와 칭호(稱號)를 세워 사체(事體)를 무겁게 하고, 또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김일경이 또 대신이 헌의(獻議)한 뒤에 2품(品) 이상의 관원을 조당(朝堂)에 모아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게 할 것을 청하고, 판서(判書) 한배하(韓配夏)·김연(金演), 승지(承旨) 김시경(金始慶), 간관(諫官)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 서로 잇따라 ‘재신(宰臣)의 말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진실로 부합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부터 제왕가(帝王家)의 사친(私親)에 대한 전례(典禮)는 인주(人主)가 높이고 신하들이 쟁론(爭論)한 경우는 있었으나, 앞질러서 스스로 진청(陳請)하기를 오늘날처럼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한 경우가 있었음은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신사년008)  의 처분(處分)이 지극히 엄중하고 명릉(明陵)의 분토(墳土)가 미처 마르지도 않았음에랴! 가령 임금이 사사로운 은혜에 끌려 지나치게 높이려는 뜻이 있다 하더라도, 신하된 자는 오히려 인경(引經)009)  하고 쟁론하여 의리(義理)로 절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임금에게 이런 일이 없는데도 곧바로 추보(追報)할 것을 청하였고, 별묘(別廟)를 세우고 칭호를 만드는 일이 또 인빈(仁嬪)의 고사(故事)010)  보다 훨씬 더 지나치게 되었으니, 선왕(先王)을 잊고 당저(當宁)011)  를 저버림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또 스스로 천리와 인정에 부합된다고 하였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월 11일 정유

이사상(李師尙)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태억(趙泰億)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1월 13일 기해

밤에 달무리가 생겼다.

 

1월 14일 경자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조신(朝臣)들의 차자(箚子)나 상소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신(大臣)의 장주(章奏)와 차자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합니다. 양전(兩銓)012)  의 장관(長官)은 그 임무가 더욱 긴요한데, 사무(事務)를 처리하지 아니하여 대정(大政)013)  이 지연되고 있어서 추조(秋曹)·경조(京兆)·수령(守令)·곤수(閫帥)의 자리를 모두 차출(差出)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외의 폐단 또한 어찌 낱낱이 번거롭게 아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평소에 청단(聽斷)을 게을리하였으나, 정국(政局)이 뒤바뀐 이후 며칠 동안은 장주·상소에 대한 수답(酬答)이 물흐르듯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다시 적체(積滯)시키고 계하(啓下)하지 아니하므로, 여러 신하 가운데 인혐(引嫌)하는 자들이 모두 ‘비답을 받지 못하여 사무가 폐지된다.’고 하였으므로 이런 아룀이 있었던 것이다.

 

1월 15일 신축

예조(禮曹)에서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는 일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는 바야흐로 인혐(引嫌)하고 걸면(乞免)하는 중이었으므로 헌의(獻議)하지 아니하였고, 영부사(領府事)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성상의 지극하신 인자(仁慈)와 융성하신 성덕(聖德)은 언제나 선조(先朝)를 본받으셨습니다. 작년 향유(鄕儒)가 진소(陳疏)하였을 때 전하께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셨는데, 말은 엄숙하고 뜻은 정대하여 성상께서 선지(先志)를 준수하심과 사정(私情)을 억제하는 뜻을 볼 수가 있었으니, 오늘날 신하된 자라면 진실로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순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경전(經傳)에 반대되는 논의가 갑자기 연중(筵中)에서 나오고, 심지어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의 지극한 덕과 달효(達孝)로써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를 추보(追報)하시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르지 않는 바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어찌 군하(群下)의 청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리고 즉위하신 이래 일찍이 제기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어 가볍게 의논하기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예전의 사우(祠宇)를 그대로 두고 제수(祭需)를 풍성히 하되, 향사(享祀)하는 의절(儀節)을 극진히 갖추어 추보하는 정성을 갖춘다면, 선지(先志)를 계술(繼述)하고 사정(私情)을 펴는 도리에 있어서 거의 둘 다 온전히 하여 어긋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우를 짓고 칭호를 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신의 얕은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니니, 오로지 성명(聖明)께서 깊이 의리를 생각하시어 시종 흔들리지 마시고 후세의 비난이 없도록 하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가 외방(外方)에 있었는데,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문의(問議)한 뒤에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사직(司直) 정형익(鄭亨益)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낳아주신 사친(私親)에 대하여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시고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시는 것은 진실로 인정(人情)입니다. 다만 즉위하신 이래 숭봉(崇奉)하는 한 가지 일을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한 것은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만 선왕(先王)의 처분(處分)이 지극히 엄절(嚴截)하였으므로, 의리가 있는 바 정(情)이 가리워졌을 뿐입니다. 생각하건대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선왕의 신하가 아니었던 자가 없는데,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있어서 어찌 감히 제멋대로 오늘날 전하의 앞에서 번거롭게 청할 수 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3년 동안 아버지의 도(道)를 고치지 않아야 효(孝)라고 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돌아가신 뒤에도 생전에 섬기듯 한다.’ 하였는데, 이를 풀이하는 자가, ‘계지술사(繼志述事)014)  하는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경전(經傳)을 충분히 읽으셨고, 계지술사하여 3년 동안 고치지 않는 도리에 있어서도 대개 일찍이 체험하고 실천하셨는데, 어찌 조정의 의논에 이끌려 갑자기 계지술사하는 성의(盛意)를 변개(變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대내(大內)에서 예전에 세운 사우(祠宇)에다 그 공향(供享)하는 의절(儀節)을 풍성하게 한다면, 사정(私情)을 펼 수 있고 선왕의 뜻에도 어긋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우(祠宇)를 세우고 칭호를 정하는 것을 공조(公朝)에서 창도(唱導)하고, 제향(祭享)과 모든 제수(祭需)를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봉(供奉)하게 하되, 단지 ‘정례(情禮)에 있어서 그만둘 수가 없다.’ 하며 대의(大義)가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생각하건대 마침내 선왕(先王)의 뜻을 준수하는데 부족함이 있게 될 듯합니다. 아! 선침(仙寢)을 아직 거두지 않았고 옥음(玉音)이 여전히 들리는 듯한데, 입대(入對)한 여러 신하들은 다만 전하에게 아첨하려고만 하여 선조(先朝)를 경계하고 꺼릴 줄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요행히 듣기에 좋도록만 바라고 총애를 굳히려 하고 있습니다. 저 김일경(金一鏡) 이하는 진실로 말할 것도 못됩니다만, 선왕(先王)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오늘날 대신(大臣)이 된 자들도 따라서 부화뇌동하여 주달(奏達)하는 즈음에 한 마디 위복(違覆)015)  함이 없었으니, 훗날 지하(地下)에서 장차 무슨 말로 선왕께 대답하겠습니까?"
하고, 설서(說書)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기를,
"아들이 어머니에게 작위(爵位)를 줄 수 없음은 예경(禮經)의 대방(大防)이니, 칭호(稱號)는 마땅히 추가(追加)할 수 없습니다. 제후(諸侯)는 두 묘우(廟宇)를 세울 수 없음은 성인(聖人)의 명백한 가르침이니, 묘우는 마땅히 따로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예법(禮法)이 엄격함은 백대(百代) 왕들의 누습(陋習)을 죄다 씻어버렸는데, 선조(宣祖)의 창빈(昌嬪)에 대해서016)  와 인조(仁祖)의 인빈(仁嬪)에 대한 은의(恩義)의 중대함이 어찌 낳아준 분과 차이가 있었겠습니까마는, 또한 모두 예전 칭호를 그대로 따르고 추가하지 않았으며, 사묘(私廟)에 제향(祭享)하고 또한 따로 묘우를 세운 것이 없었으니, 성조(聖祖)의 아름다운 법규(法規)야말로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우러러 본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3년 동안 고칠 수 없는 의리가 더욱 특별한 것이 있으니, 명현(名賢)의 의논을 또한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사정(私情)으로 말한다면 그 보답을 극진히 하는 것이 옳으나 공의(公義)로 말한다면 융숭하게 보답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안에서 말한다면 그 받드는 일을 극진히 하는 것이 옳으나 바깥에서 말한다면 융숭하게 보답하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전하께서는 성대한 덕과 지극한 효성으로 예(禮)의 뜻을 깊이 알고 계시므로 그 낳아준 은혜에 대하여 어찌 추보(追報)하는 정성을 소홀히 하시겠습니까마는, 사정(私情)을 억제하셔서 처분(處分)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애모(哀慕)하고 슬퍼하시는 마음을 조용히 침묵하고 계시는 가운데 항상 드러내신 채 외정(外廷)을 번거롭히려고 하지 않으시고 대내(大內)에서 보사(報祀)하는 전례(典禮)에 성의(誠意)를 다하려고 하셨으니, 선유(先儒)의 이른바, ‘정(情)에서 나와 예의(禮義)에 그쳤다.’고 한 데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선왕을 따르는 덕에 빛이 나지 않겠으며, 다함이 없는 생각에 흠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깝습니다. 사람들의 견해는 같지 않고 의리(義理)는 무궁한데, 이에 유독 사친(私親)을 추보하는 것을 천리와 인정에 부합된다고만 여기고, 뜻과 행동을 살펴보고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음이 바야흐로 참된 천리와 인정이 됨을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하시고 가법(家法)을 삼가 지키시어, 안으로는 사정(私情)을 온축(蘊蓄)하시고 밖으로는 공의(公義)을 헤아리시어 후세의 공의(公議)를 초래하지 않게 하소서."
하고, 사과(司果) 박필정(朴弼正)도 또한 상소하여 추보하는 것은 예(禮)에 어긋난다고 논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김일경(金一鏡)이 맨먼저 숭봉(崇奉)해야 한다는 의논을 건의(建議)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쏠려서 따르며 감히 바른 말로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송인명이 이에 분개하여 이미 자리를 벗어나 진소(陳疏)하고 또 《사묘사의(私廟私議)》를 저술하였는데, 문답(問答)하는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숭봉(崇奉)하는 의절(儀節)을 논하는 자는, ‘아들이 천승(千乘)의 지위에 있으니 낳아준 사친(私親)에게 어찌 작명(爵命)을 더할 수가 없겠으며, 아들이 한 나라를 누리고 있으니 낳아준 사친에게 어찌 묘우(廟宇)를 세워 봉공(奉供)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그 말은 진실로 인정에 가깝지만, 경전(經傳)을 고구(考究)하고 성현(聖賢)에게 질정(質正)해 보면,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서 풍자의 대상이 되고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별묘(別廟)를 세움이 예에 어긋남은 ‘아들은 부모에게 작명(爵命)을 더할 수 없다.’는 말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오고, ‘작질(爵秩)의 명(命)은 폐하(陛下)께서 감히 더하실 것이 아닙니다.’는 말이 정자(程子)의 상소에 보이며, ‘서모(庶母)는 마땅히 사실(私室)에서 제사지내야 한다.’는 말이 예경(禮經)의 가르침에 나타나 있고, ‘제후(諸侯)에게는 두 사람의 적실(嫡室)이 없으니 응당 묘우(廟宇)를 세울 수 없다.’는 말이 선유(先儒)의 설(說)에 나오니, 이에서 작호(爵號)를 마땅히 추가할 수 없음과 묘우를 마땅히 따로 세울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저 작호를 추가하고 묘우를 세워 사친(私親)을 숭봉하는 것은 과연 자식된 도리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나, 인정에 마땅하고 천리에 부합된다면, 성현(聖賢)이 어찌하여 꼭 이런 설을 세워서 억지로 높고 아득하여 행할 수 없는 인정을 거스르고 천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만들었겠는가? 진실로 사람에게는 두 가지 근본이 없으니, 의리에 있어서 압제(壓制)받는 바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효(孝)란 성례(誠禮)를 귀하게 여기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명(爵命)을 더함이 이미 본분(本分)에서 벗어났다면 더럽히는 데 관계되니 존숭(尊崇)하는 바가 아닌 것이며, 묘우를 세움이 도리어 두 묘우가 있게 된다는 혐의가 있다면 참람스러운 데 가깝게 되니 예에 어긋나는 것이다. 작명이 나에게서 나와 사친(私親)에게 더해진다면 신하와 같은 경우가 아닌데, 군명(君命)으로 사친에게 영화로움을 미루어 주는 것이 되며, 사사롭게 제사지내지 않고 공적으로 봉공(奉供)한다면 첩모(妾母)임을 면하지 못하면서도 대대로 제사를 지내어 아들에게서 그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정당하게 정해진 이름이 없이 존숭하여 도리어 성실하지도 못한 채 의리를 해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본분을 그대로 지켜 신하로 대우하지 않는 의리를 밝힘이 나을 것이며, 마땅히 세울 수 없는 묘우에 제사지내어 도리어 혐의를 무릅쓴 채 예를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실(私室)에다 제사지내며 두 가지 근본이라는 혐의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부터 명철(明哲)한 임금도 사친(私親)을 존숭하여 「황(皇)」이니 「후(后)」이니 하며 태묘(太廟)에 올려 합사(合祀)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가벼운 경우 또한 모두 따로 작호(爵號)를 더하고 그 옛날 그대로 하며 전혀 변동이 없는 자가 있지 아니하였으니, 저들 또한 어찌 예(禮)를 전혀 몰라서 그러하였겠는가?’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예라는 것이 어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으며, 또한 어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삼대(三代)017)  이후로 세도(世道)가 점점 강하(降下)되어 예교(禮敎)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으니, 시군 세주(時君世主)가 비록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이 있고 세상에서 뛰어난 행실이 있다 할지라도 옛 성인(聖人)께서 예를 제작한 본뜻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진실을 다 알아낼 수가 없었으니, 사정(私情)을 따르며 이치로 스스로 극복(克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한(漢)나라 소제(昭帝)·선제(宣帝)의 명철(明哲)함과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현철(賢哲)함으로도 예를 어겨서 숭봉(崇奉)하여 선유(先儒)의 「두 근본」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삼대(三代)의 성치(盛治)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광무제(光武帝)가 사친의 묘우(廟宇)를 세우지 아니하였던 것018)  과 장제(章帝)가 단지 적수(赤綬)019)  만을 더하였던 것과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착한 것을 밝힌 법령에 기록한 것과 송나라 영종(英宗)이 「백부(伯父)」라고 일컬었던 것020)  과 같은 경우들은 그 당시에 은혜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후세 사람들도 모두 예(禮)를 알았던 것이라고 일컬었다.
우리 선조(宣祖)께서 창빈(昌嬪)을 대우하신 것과 인조(仁祖)께서 인빈(仁嬪)을 대우하신 것에 이르러서도 어찌 근본에 대하여 보답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였겠는가마는, 추가(追加)하는 전례(典禮)가 있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 인주(人主)가 스스로 기필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신하들이 그 임금에게 기대하는 것도 어찌 그 예에 합당한 것을 버리고 예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취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창빈(昌嬪)과 인빈(仁嬪)은 선조와 인조에 대하여 친속(親屬)이 조모(祖母)의 관계가 되니, 참으로 나를 낳아준 친모(親母)와는 같이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창빈은 참으로 선조의 조모이나, 인빈은 유독 원종(完宗)의 어머니가 아니란 말인가?’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원종(元宗)은 이미 추숭(追崇)하여 왕(王)이 되었으니, 또 어찌 다시 그 사친(私親)을 추존(追尊)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당저(當宁)021)  께서 낳아주신 분을 추보(追報)하려고 하는 바와는 너무나도 같지 않은 경우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예(禮)란 것은 천서(天敍)022)  요 천질(天秩)023)  이니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도 없고 구구(區區)한 사의(私意)로 올리거나 낮출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인군(人君)의 사친(私親)에게 과연 작위(爵位)를 추가하고 묘우를 따로 세울 수 있는 것이 바야흐로 숭봉(崇奉)하는 도리에 합당하다고 한다면, 원종(元宗)은 추숭(追崇)한 뒤에 또한 한 사람의 인군이 되었으니, 인빈(仁嬪)은 곧 군주의 사친(私親)이므로, 오늘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어찌 추숭한 임금이라 하여 감쇄(減殺)하는 바가 있고 당저(當宁)의 임금이라 하여 높이는 바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아니하여 사친을 숭보하는 것이 반드시 예에 합당하지 않다면, 원종께서 인빈에게 더하지 못하였던 것을 당저(當宁)께서도 아마 마땅히 낳아준 분에게 더하지 못하였을 듯하다. 만약 반드시 「원종은 추숭하여 임금이 되었으므로 마땅히 그 사친(私親)께 추보(追報)하지 못하였으나, 당저(當宁)께서는 자신이 군위(君位)에 계시니, 어찌 낳아준 분을 숭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추보(追報)하는 한 의절(儀節)을 선군(先君)에게는 박하게 하고, 현재의 임금에게는 후하게 하는 것이니, 사정(私情)을 따르고 천리(天理)를 멸절(滅絶)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어린아이의 견해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덕흥(德興) 또한 선조(宣祖)의 사친이지만 퇴도(退陶)024)  가 이미 대원군(大院君)으로 추가함을 긍정하였고, 율곡(栗谷)025)  도 사친을 끊을 수 없음을 대단히 말하였으니, 선유(先儒)가 추보하는 것에 대하여 논한 바가 또한 어찌 언제나 그 박한 것만을 따랐겠는가?’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덕흥군(德興君)은 덕흥(德興)이란 본래 있던 작호인데, 「대(大)」 한 글자를 더하여 여러 종친(宗親)들과 조금 구별했던 것이니, 곧 그 사정(私情)을 펴면서도 천리(天理)를 해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정자(程子)의 의논에서 얻은 바가 있는 것이니, 어찌 예를 어겨서 작호를 추가하는 것과 같은 말이겠는가? 고봉(高峰)026)   등 여러 사람들이 친제(親祭)해야 한다는 의논을 다툰 것은 참으로 중도(中道)에 지나친 데 가까우니, 율곡(栗谷)의 이른바 「사친은 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인 것이다.
한편 나는 당저(當宁)의 낳아준 분에 대한 관계는 선조의 덕흥(德興)에 대한 관계와 그 친속(親屬)의 명칭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마땅히 「첩모(妾母)」라고 해야 하고 「사친(私親)」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으며, 마땅히 첩모의 예를 써서 대우해야 하고 사친의 예를 써서 대우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궁중(宮中)의 작명(爵命)은 곧 선군(先君)께서 은혜를 참작하시어 베푸신 것이니, 후왕(後王)이 어찌 마음대로 높이거나 낮출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예전부터 인군의 사친(私親)에게 오늘날처럼 전혀 칭호가 없었던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혹시 예전대로 하고 더하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마음에 편안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희빈(禧嬪)이란 옛 칭호를 그대로 쓰고자 한다면 선조(先朝)의 처분에 방애(妨礙)되는 바가 있게 되고, 그냥 두고 논하지 않는다면 곧 한 사람의 서인(庶人)이 될 것이니, 실로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혹은 「빈(嬪)」이라 하고 혹은 「군(君)」이라 하며 따로 추가(追加)하려고 하는 까닭이다. 또, 가령 당저(當宁)께 덕흥(德興)의 하원군(河原君)처럼 같은 어머니에서 난 친아우가 있다면, 진실로 사사(私祠)에다 제사지내게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와 같지 못하여 시사(尸祀)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또 따로 묘우를 두자는 의논이 있게 된 까닭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예(禮)를 논하는 자는 마땅히 예의 타당성 여부만을 살펴보아야 하니, 그 당한 바의 행(幸)·불행(不幸)은 마땅히 헤아릴 바가 아닌 것이다.
인군(人君)이 그 사친에 대하여 진실로 추존(追尊)할 수가 있다면, 다시 그 평소의 귀현(貴顯) 여부를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며, 그렇지 않다면 또한 어찌 그 지위가 없는 것에 상심하여 갑자기 예에 맞지 않는 명칭을 더할 수 있겠는가? 지금 작호(爵號)가 있지 아니하고 예에 있어서 또 추존할 수 없는 것이 곧 우리 당저(當宁)의 불행이니, 오로지 그 불행을 생각하여 항상 매우 슬픈 마음을 품고 그 예에 안심하여 영원히 지나치게 높이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애모(哀慕)의 정(情)을 펼 수 있는 날에 펴게 되고, 봉공(奉供)하는 의절(儀節)을 다할 수 있을 때 다하게 될 것이니, 또 어찌 반드시 규례(規例)을 어기고 의리를 범하면서 헛된 이름으로 존숭한 뒤에야 바야흐로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또 오늘날 조정의 의논이 작호(爵號)에 대하여 말하는 데 서둘고 있지마는, 오히려 감히 드러내놓고 예전 작호를 마땅히 회복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선조(先朝)의 처분을 능히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은 지키고 있는 것은 어찌 그 일이 적후(嫡后)에 관계가 있어 첩모(妾母)의 사은(私恩)을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실로 이 의리를 알지 못한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이 의리를 안다고 한다면, 이는 선조(先朝)의 처분 전에는 빈호(嬪號)를 감히 더하지 못하는 날이 아님이 없다. 그리고 보사(報祀)하는 한 가지 의절(儀節)에 이르러서 정동(貞洞)의 옛 궁(宮)에는 이미 사옥(祠屋)이 있어 따로 꾸밈을 더하였고, 제도(制度)를 조금 사치하게 하였으니, 봄·가을의 제사 때 반드시 정성을 다해 혹은 재결(齋潔)하여 자성(粢盛)을 올리고 혹은 첨망(瞻望)하여 애모(哀慕)의 정을 편다면 또한 그 정(情)을 다하고 예를 넘지도 않을 것인데, 또 어찌 반드시 예방(禮防)을 두지 않고 별묘(別廟)를 창건(創建)한 뒤에라야 바야흐로 효(孝)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이 의논을 내세운 자에게는 그 설(說)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옛날의 인군은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는데, 혹은 타당하기도 하고 혹은 지나치기도 하였으나, 요체(要諦)는 모두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일체 예전대로만 하고 추가(追加)하는 바가 없다면, 나는 아마도 효성에 부족함이 있고 은혜에 소홀할 듯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당저(當宁)께서 낳아준 분에 대하여 어찌 숭봉(崇奉)하려는 생각이 없겠는가마는, 감추어 두고 꺼내지 않은 채 군하(群下)의 공의(公議)를 기다리려고 하다가 기다린 지 이미 오래 되어 한결같이 서로 잊어버린다면, 반드시 장차 군하의 성실하지 못함을 의심하게 되어 도리어 위노(威怒)를 더하실 것이고, 한결같이 자신의 사정(私情)에 맡겨 지나친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지금 만약 숭봉하는 의절(儀節)을 조금 정하고, 지나치게 높이는 일을 천천히 쟁론(爭論)하여 사은(私恩)을 조금이나마 펴게 하고, 공의(公議)도 어긋나지 않게 한다면, 위로는 격발(激發)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아래로는 죄를 면하는 다행스러움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모자(母子)의 은혜는 천성(天性)에 근원하고 있으며, 어버이를 높이는 정성은 억지로 시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니, 항상 예에 지나칠까 두려워하는 것이지 은혜에 야박(野薄)하게 할 것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당저(當宁)의 인효(仁孝)로써 낳아준 분에 대하여 추보(追報)하고자 하는 바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러나 성인(聖人)의 「뜻을 살펴본다.」는 가르침을 좇아 대통(大統)의 관계된 바가 중대함을 생각하고, 예(禮)를 고구(考究)하여 헛된 이름의 무익함을 알고 의리를 참작하여 사은(私恩)의 펴기 어려움을 안다면, 남몰래 가슴 아파하고 슬픔을 감춘 채 참고서 나타내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유(先儒)가 이른바 「정(情)에서 나와 예의(禮義)에 그친다.」고 한 것에 들어맞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이미 그 좋은 점을 받들어 순종하지도 못하면서 이에 혹 그 은혜에 소홀할까 의심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임금을 천리(天理)의 밖에다 두고 의심하는 것이므로, 불경(不敬)스러움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 은혜란 위에서 펼 수 있는 것이고, 예란 아래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지금 성상께서 명을 내리시지 않았는데 아래에서 먼저 청하였으니, 이는 은혜를 펴는 아름다움이 위로 돌아가지 않고 예를 잃었다는 비난이 도리어 아래에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또 속으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밖으로는 그 자취를 감추고 군하(群下)의 희지(希旨)027)  를 바라며 잠자코 시험해 보다가, 공의(公議)가 정론(正論)을 지키는 데 노하여 위세를 떨치는 것은 말세에 술수를 부리는 자의 소행이니, 어찌 당저(當宁)의 성명(聖明)으로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령 당저(當宁)께서 참으로 이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신하된 자가 또 어찌 망령되게 천심(天心)을 엿보며 뒷날을 염려하겠는가마는, 지나치게 높이는 일을 반드시 뒤에서 다투지 아니하고 숭봉하는 의절을 앞에서 도리어 창도(唱導)하고 있으니, 아첨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뜻에 순종하는 무리들이 공(功)을 헤아려 이익을 도모하는 습관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앞의 말을 따른다면 임금의 잘못을 조성(助成)하여 역적(逆賊)이 되는데 가깝게 되고, 뒤의 말을 따른다면 임금의 사정(私情)에 따라 아첨하는 데 관계된다. 생각건대 아첨과 역적질은 신하의 의리가 아니니, 두 가지 중에 하나도 옳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당저(當宁)께서는 낳아준 분에 대한 대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라면 방법은 있다. 한(漢)나라 장제(章帝)의 적수(赤綬)를 더한 규례(規例)를 본받아 그 의물(儀物)을 더하고, 선유(先儒)의 사실(私室)에서 제사지낸다는 가르침을 준수하여 옛 궁(宮)에서 봉공(奉供)하며, 율곡(栗谷)의, 「친림(親臨)하여 제사지낸다는 논의」에서 상량(商量)하여 혹 그 슬픔을 펴기도 하고, 백사(白沙)028)  의 「관에서 공봉한다는 의논」에서 짐작하여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의리를 해치는 작호(爵號)와 어긋나는 별묘(別廟)의 경우는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일찍이 좌윤(左尹) 황일하(黃一夏)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하고, 또 말하기를,
"일전에 역엄(逆閹)·요비(妖婢)의 예사롭지 않은 변고(變故)는 대개 측근의 신하가 편닐(便昵)하여 스스로 서로 무고하고 선동한 데에서 말미암는데, 궁위(宮闈)의 교화(敎化)에 누가 됨이 큽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자신을 돌이키시어 스스로 반성하시고 하늘이 낸 효성으로 더욱 힘쓰셔서 인심(因心)029)  의 우애(友愛)에 힘을 기울이시며, 한 마음으로 통촉하셔서 깊고 아득한 곳에도 차별이 없게 하시어 삼궁(三宮) 안에 화락(和樂)한 기운이 가득해진다면, 비록 역수(逆竪)·요비(妖婢) 천백 명이 있을지라도 그 사이에서 어찌 무지개처럼 현혹(眩惑)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아! 형제란 천현지친(天顯之親)030)  으로서 몸은 달라도 기(氣)는 같으니, 조금이라도 간극(間隙)이 있으면 천륜(天倫)이 무너지고 가도(家道)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의 원량(元良)은 종조(宗祧)의 부탁이 무겁고 신민(臣民)의 여망에 매인 바이니, 애중(愛重)하며 보호하심에 있어서 극진하게 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탐락(湛樂)031)  하는 뜻에 진념(軫念)하시고 주창(主鬯)032)  의 중요함을 생각하셔서 정성스런 뜻을 미루어 은애(恩愛)에 전일하신다면 자성(慈聖)께서도 또한 반드시 위에서 기뻐하실 것이니, 어찌 종사(宗社)의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고 위유(慰諭)하였다.

 

1월 18일 갑진

대신(大臣)과 대간(臺諫)이 정청(庭請)의 의논을 거둔 날 유락(唯諾)033)  하여 죄를 입은 자 중에서 참여해 듣고도 요행히 면한 자는 자수(自首)를 허락하고 참여해 듣지 못하고 뒤섞여 죄를 입은 자는 구별할 것을 청하니, 드디어 유수(留守) 김재로(金在魯)·참판(參判) 이병상(李秉常)·호군(護軍) 오중주(吳重周) 등을 삭출(削黜)하고, 권상유(權尙游)·임방(任埅)·신임(申銋)·유집일(兪集一) 등을 삭출하라는 명은 환수(還收)하였다.

 

사간(司諫) 이진유(李眞儒)가 앞서 이미 상소하여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는 예를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김일경(金一鏡)이 탑전(榻前)에서 건백(建白)하자 이진유가 다시 잇따라 김일경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형익(鄭亨益)에게 논척(論斥)당한 일로써 인혐(引嫌)하며 아뢰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진실로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아니한데도 군부(君父)로 하여금 자신을 낳아준 분의 은혜에 대하여 완전히 잊거나 소홀히 하게 한다면, 이것이 과연 인정과 도리에 가깝겠습니까? 제사가 있으면 사옥(祠屋)이 있는 법이니 사옥을 세움에 있어서 새것이나 옛것에 무슨 구별이 있겠으며, 왕자(王者)는 사재(私財)가 없는 법이니 제수(祭需)의 공봉(供奉)에 있어서 대궐 안과 대궐 밖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추보(追報)하는 도리로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제수(祭需)를 공진(供進)하게 함에 있어서, 선왕(先王)의 도(道)에서 고친 것이 어떠한 도(道)이며 선왕의 뜻에서 계승하지 않은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정형익의 말은 감히 선왕을 빙자하여 전하를 조절(操切)하는 계책으로 삼고 전하로 하여금 낳아준 분과 관계를 끊고 돌아보지 않게 하려고 하였으니, 유독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 또한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고, 또, ‘자식은 어머니에 대하여 애초부터 관계를 끊는 도리가 없고, 종묘(宗廟)에서는 은혜로써 의리를 가릴 수 없으며, 규문(閨門)에서는 의리로써 은혜를 능가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살아서는 봉양(奉養)하는 의절(儀節)을 행하고 죽어서는 추보(追報)하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바입니다. 만약 정형익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성상으로 하여금 낳아준 분의 은혜를 끊어버리게 한 후에야 바야흐로 마음에 시원하게 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살아 생전 봉양할 때에는 반드시 궁실(宮室)이 있으니, 죽어서 제사지낼 때 어찌 사옥(祠屋)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옛것을 그대로 쓰는 것은 옳고, 새로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른바 칭호(稱號)를 세운다는 것은 따로 제주(題主)034)  의 명호(名號)를 따로 세우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개역(改易)한다는 것은 일찍이 마음먹지도 않았으니, 이것이 3년 동안 고치지 않고 계지술사(繼志述事)하는 의리에 있어서 무슨 서로 방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또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왕세자(王世子)의 이름 아래 ‘희빈(禧嬪) 소생[禧嬪出]’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신하[臣隣]에게 반사(頒賜)하여 보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형익이 일찍이 한 마디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전하께서 사복(祠服)035)  하신 뒤 칭호를 정하고 사우(祠宇)를 짓는 것은 정리(情理)에 있어서 반드시 행하여야 할 바이고, 선조의 처분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선왕의 뜻을 어겨 처분을 고치려 한다 하여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성상으로 하여금 감히 손을 쓸 수 없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상소하기를,
"거활(巨猾)036)  은 이미 베었지만 흉악한 기세는 더욱 치열해져 남은 위세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므로 온 조정이 관망(觀望)만 하고 있는데, 우러러 믿는 것은 오로지 전하께서 하늘이 주신 지혜와 용기로써 내려 주시고 명철한 슬기를 널리 비추어 주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무너진 조정의 기강(紀綱)을 두려워하여 삼가게 할 수 있고 장차 망하게 될 나라의 형세를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어느 사이에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처음과 매우 달라져 천지(天地)를 회전시키는 도량(度量)은 거두어 베풀어지지 않고, 번개와 바람처럼 힘차고 신속한 호령(號令)은 위축되어 펴지지 않고 있습니다. 좌우에서 번갈아 올리는 글에는 선악(善惡)의 분별이 없고 공경(公卿)이 으레 사양하면 비지(批旨)를 언제나 아끼시니, 정석(鼎席)037)  에는 꾀하는 바가 없고 양전(兩銓)은 거의 텅비게 되었습니다. 신은 위아래를 헤아리고 앞뒤를 돌아보며 번민하고 근심한 나머지 찡그린 얼굴로 탄식하고는 크게 울어버렸으니, 다만 깊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고 싶을 뿐입니다.
또 영부사(領府事) 김우항(金宇杭)의 상소를 구해 보았더니, 이른바 ‘작년의 향유(鄕儒)’란 대개 조중우(趙重遇)의 일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조중우의 일에 대하여 심지어 ‘서제(噬臍)038)  라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고, 또 휼전(恤典)을 거행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어찌 일찍이 듣고 알지 못하였겠습니까마는, 은연중에 ‘사의(辭義)가 엄정(嚴正)하다.’는 등의 말로 비웃고 모욕하며 우롱하여 조금도 꺼림이 없었으며, 반드시 ‘흉당(凶黨)이 조중우를 박살(撲殺)하고 성궁(聖躬)을 핍박한 것’을 마치 큰 의리가 되는 것처럼 여겼으니, 그가 비록 늙어 어긋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 진(晉)나라 왕부(王裒)가 《시경(詩經)》의 ‘슬프다. 우리 부모님. 나를 낳아주시고 수고하셨네.’라는 구절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우니, 문인(門人)들이 육아장(蓼莪章)039)  을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된 자들이 비록 왕씨의 문생(門生)만은 못하다 하더라도, 또 어떻게 차마 전하의 지극한 애통(哀痛)과 깊은 슬픔을 야기(惹起)하는 것입니까? 저 무리들이 이미 조중우를 죽이고는 전하의 마음의 깊이를 이미 엿보았다고 생각하고, 윤지술(尹志述)을 종용하여 성궁(聖躬)을 핍박하고 모욕하니, 마음에 놀랍고 보이는 광경이 참혹하여 차마 보고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저 무리들이 공상(空桑)040)  에서 나지 아니하고서야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있으며, 사친(私親)을 들어 모욕하였으니, 어떠한 수적(讎賊)이겠습니까? 다만 이 한 구절만 보아도 저 무리들이 전하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왕께서 만약 성종(成宗)께서 처분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은 것과 같은 유교(遺敎)를 내리셨다면, 군하(群下)의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감히 망령되게 진품(陳稟)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제(私第)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신주(神主)에다 ‘빈(嬪)’이라고 써서 진하로 하여금 반우(返虞) 때 가서 곡(哭)하게 하였으니, 우리 선왕께서 전하의 사의(私義)를 펼 수 있는 바탕을 삼으신 바가 진실로 자연히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일찍이 저 무리들이 논하는 바와 같이 한계를 두고 완전히 가로막았다는 것입니까? 저 재상이 지난번 망극(罔極)한 날을 당하여 허둥지둥 올린 한 차자는 책임을 다할 수가 없었는데, 사람들은, ‘이 사람은 양쪽 눈이 실명(失明)하였고 오정(五情)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보통 도리(道理)로는 책망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역적을 비호하는 차자와 오늘날의 패륜(悖倫)한 의논을 기회를 틈타 불쑥 꺼내어 제멋대로 입을 놀리는 것이 판연히 두 사람의 수단 같으니, 어찌 군부(君父)에게는 느슨하게 하고 사당(私黨)에게는 급급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신은 저윽이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지평(持平) 조원명(趙遠命)이 아뢰기를,
"정형익과 박필정(朴弼正)은 억지로 선조(先朝)를 끌어대며 군부(君父)를 위협하고 제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처분이 몹시 엄하였다.’는 등의 말과 같은 것은 곧 신하로서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말인데, 이 무리들은 감히 쉽사리 말하고 조금도 꺼리거나 두려워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근일에 전하의 처분이 윤지술(尹志述)을 즉각 죽였을 때와 다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흉험(凶險)한 상소와 구무(構誣)하는 글을 수십 일 동안 보류해 두고 엄중한 비지(批旨)를 내리지 않으시어 마치 관대하게 죄주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 듯하므로, 이 무리들이 성의(聖意)를 엿보아 헤아리고서 이와 같은 군부(君父)를 무시(無視)하고 핍박하여 모욕하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여항(閭巷)의 경우를 들어 말한다 할지라도, 무릇 선조(先祖)가 화변(禍變)을 당한 집안의 사람에게는 차마 그 자제(子弟)에 대하여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니, 대개 효자(孝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들추어내어 핍박하고 모욕하는 말을 하였으되 군상(君上)을 두려워하거나 공경하는 뜻이 조금도 없었으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청컨대 정형익은 먼곳으로 찬배(竄配)하고 박필정은 삭출(削黜)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생원(生員) 이기중(李箕重) 등 1백여 명이 또한 상소하여 추보(追報)하는 일을 논척(論斥)하자,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박휘등(朴彙登)·심탱(沈樘) 등이 아뢰기를,
"이기중 등의 소어(疏語)는 아주 패리(悖理)하여 정형익·박필정과 똑같습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뒤 사우(祠宇)를 짓고 칭호를 세워 고복(顧復)041)  한 은혜에 보답하려 하심은 절로 의리가 분명한 일인데, 접때부터 흉당(凶黨)이 성궁(聖躬)을 조절(操切)하고 조중우를 장살(杖殺)하며 윤지술을 영구(營救)하여, 전하로 하여금 손을 쓸 수 없게 하여 지금까지 지체시켰습니다. 모자(母子)의 천륜(天倫)은 귀천(貴賤)이 없이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저 무리들에게만 유독 낳아 준 어머니가 없단 말입니까?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이미 ‘희빈(禧嬪)’이라고 쓰고, 상장(喪葬)을 모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주관하게 한 것은 선왕의 명(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 일이 어찌 선왕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겠으며, ‘삼년 동안 아버지의 한 일을 고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어디에 근거하여 나온 것입니까? 청컨대 귀역(鬼蜮)042)  의 정상을 살피시고 특별히 명백한 교지(敎旨)를 내리시어 그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알았다고만 답하고 끝내 이기중 등을 죄주지 아니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보(追報)하자는 논의에 있어서 은정(恩情)을 적절히 참작하고 의리를 절충하는 것은 송인명(宋寅明)의 사의(私議)가 옳다. 그리고 대개 그 다투는 바는 다만 칭호와 별사(別祠)를 세우는 데 있을 뿐이니, 정형익의 상소에 이른바, ‘대내(大內)에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수(祭需)를 마련하되, 유사(攸司)로 하여금 공봉(供奉)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너무 각박하다는 점에서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변론(辨論)한 글을 살펴보건대 모두 터무니없는 억단(臆斷)이어서 족히 정형익의 기세를 꺾고 그 입을 막지 못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진유(李眞儒)는 ‘제사가 있으면 사우(祠宇)가 있으니, 새것과 옛것이 어찌 구별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저 쟁론(爭論)하는 자들 또한 사우 없이 제사지내자고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별사(別祠)가 예에 어긋난다는 점을 비난한 것일 뿐이었다. 이진유 또한 이미 새것과 옛것이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또 어찌 옛것을 그대로 수식(修飾)하지 않고 반드시 새로 짓기를 도모해 별묘(別廟)를 세운다는 비난을 범하였겠는가? 최석항(崔錫恒)이 인용한 바, ‘천하에 어찌 부모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식은 어머니에 대하여 관계를 끊을 도리가 없다.’고 한 것은 대개 《시경(詩經)》 하광장(河潢章)의 선유(先儒)의 주설(註說)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어머니와 관계를 끊을 도리가 없다.’고 한 것은 단지 문안(問安)하고 봉양(奉養)하는 의절(儀節)에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칭호와 사우를 국중(國中)에 세우는 것을 후세(後世)에 훈계(訓戒)로 삼는다는 것이겠는가? 《선원보략》은 경진년043)  에 완성하였고, 신사년044)   이후 개수(改修)할 즈음에 일찍이 품지(稟旨)하지 않았던 것은 다만 신료(臣僚)들이 두려워하고 꺼렸기 대문이었다. 그래서 예전과 같이 그대로 썼던 것인데, 지금 작호(爵號)를 그대로 쓴 것이 임금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이교악(李喬岳)이 일찍이 염문 서계(廉問書啓)에 ‘희빈(禧嬪)’이란 작호를 쓰자 무거운 견책(譴責)을 내린 일과 같은 경우는 완전히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며 한갓 품지(稟旨)하지도 않은 《선원보략》에 중점을 두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는 더욱 창광(猖狂)하고 두서가 없는데, 그가 말한 ‘신주(神主)에 빈(嬪)이라고 썼다.’는 것은 또 더욱 매우 선왕을 교무(矯誣)하는 것이다. 신사년(辛巳年) 제주(題主)하던 날 선왕께서 ‘재유장씨(在幽張氏)’라고 쓰도록 명하셨으니, 대빈(大嬪)으로 숭봉(崇奉)하기 전에 혹시 고치지 않았다면, 김일경의 말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리고 최석항의 차자에 이른바 ‘제주의 명호(名號)를 따로 세운다.’고 한 것에서 또한 제주(題主)에 일찍이 ‘빈(嬪)’이라고 쓰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두 사람의 말이 어찌 심하게 모순되는 것인가? 아! 제주하던 날 칭호를 세우고 ‘이것은 곧 제주의 칭호이지 진짜 작호(爵號)는 아니다.’라고 하였다면, 이것이 엄이투령(掩耳偸鈴)045)  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욱이 마침내 이명언(李明彦)의 불학 무식(不學無識)하고 터무니없는 불경(不經)한 말을 채용하여 ‘대빈(大嬪)’이란 칭호를 세웠으니 그 숭봉(崇奉)하는 바가 도리어 인빈(仁嬪)보다 훨씬 더하게 되었다. 전례(典禮)가 이와 같은데도 선조(先朝)의 처분과 무방(無妨)하다고 한다면, 한때의 이목(耳目)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를 도피할 수가 있겠는가? 선왕께서 막은 뜻이 전후의 사령(辭令)에 보이니 얼마나 엄중(嚴重)했던가? 그러데도 이제 ‘선왕께서 사은(私恩)을 펴도록 허락하셨다.’느니, ‘일찍이 유교(遺敎)와 처분(處分)이 성종(成宗) 때와 같은 것이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선왕을 무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을 용서한다면 무엇인들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이 무리들 또한 스스로 선조의 처분을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는 짓이 두려운 것일 줄을 알고서 사람들의 말을 듣기 싫어하였으니, 이에 ‘처분이 매우 엄하였다는 등의 말은 신하로서 제기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형익(鄭亨益)의 죄를 구성하고 말을 못하게 할 계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선조(先祖)가 화변(禍變)을 당하였으면 차마 자제(子弟)를 대하여 배척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하거나 ‘저들만 유독 낳아준 어머니가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한 말은 더욱 부녀자나 어린아이의 소견으로, 장획(臧獲)046)  의 패리(悖理)한 말에 가깝다. 저들의 선왕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높고 빛나는 자리에 있는 자도 도리어 모두 이와 같으니, 허벽(許璧)·신필회(申弼誨)·김시경(金始慶)의 무리야 도리어 어떻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당일의 일은 성주(聖主)께서 공묵(恭默)047)  하지 않고 일절 보파(報罷)048)  하였더라면, 백괴(百怪)가 간요(奸妖)를 부리는 일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1월 21일 정미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백운(白雲) 한 줄기가 서쪽에서 동쪽을 가리키며 길게 하늘을 가로질렀는데, 한참 만에야 사라졌다.

 

예관(禮官)이 추보(追報)하는 일로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를 찾아가 물으니, 최규서가 대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전하의 무궁한 효사(孝思)로써 임어(臨御)하신 지 몇 년 동안 반드시 여러 신하들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신 데에서 신중을 기하는 지극한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주달(奏達)하여 이미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도리어 즉시 예단(睿斷)을 더하지 아니하시고, 거듭 초야(草野)에 있는 천신(賤臣)에게까지 순문(詢問)하신 데에서 신중하신 중에 더욱 신중을 더하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나간다면 반드시 공사(公私)·정의(情義)의 분별에 대해 참작하실 수 있어 털끝만한 과실도 없을 것입니다. 신은 단지 성덕(聖德)을 흠앙(欽仰)할 뿐입니다."
하였다. 예관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다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최규서는 자신이 비록 외위(外位)에 있을 망정 대신(大臣)의 반열(班列)에 있으니,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말을 한다면 마땅히 명백하게 지적하여 생각한 바를 죄다 진술했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구차하게 우물쭈물하면서 말이 귀착되는 바가 없었다. 만약 최규서로 하여금 암랑(巖廊)049)  에 들어와 있으면서 논의하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면, 모두 장차 이와 같은 데 그쳤을 것이니, 어찌 뭇사람들을 크게 실망시키지 아니하였겠는가? 아! 애석하도다.

 

1월 22일 무신

이조(李肇)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심단(沈檀)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태좌(李台佐)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석연(金錫衍)을 판윤(判尹)으로, 김시환(金始煥)을 동지의금(同知義禁)으로, 권규(權珪)를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이봉상(李鳳祥)을 통제사(統制使)로, 김동필(金東弼)을 응교(應敎)로, 유술(柳述)을 사간(司諫)으로, 조최수(趙最壽)를 지평(持平)으로, 김유(金濰)를 정언(正言)으로, 김중기(金重器)를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김일경(金一鏡)을 수 어사(守禦使)로, 이진유(李眞儒)를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윤순(尹淳)을 북평사(北評事)로, 서명균(徐命均)을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삼았다.
처음 조태구(趙泰耉)가 입대(入對)하였으나, 대리(代理)하라는 명(命)이 이미 정지되었는데, 이진유·박필몽(朴弼夢) 등이 김일경을 소두(疏頭)로 추천하고 상소하여 사흉(四凶)의 죄를 논핵하려고 하자, 윤순이 말리며 말하기를, ‘지금 비망기(備忘記)가 다행히 반한(反汗)050)  되었으니, 모름지기 조용하게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사흉(四凶)의 죄는 비록 논핵할 만하다 하나, 요컨대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야지 경솔한 행동으로 후회를 초래함은 마땅하지 못하다. 또 인감(人鑑)051)  의 처신(處身)과 행사(行事)를 살펴보건대 결코 더불어 일을 같이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윤순은 그대로 장단(長湍)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진유가 처음에는 윤순의 말을 옳게 여겼지만 구언(求言)052)  하는 교지(敎旨)를 내리자 갑자기 김일경과 함께 같이 상소하여 윤순에게 편지를 보내 불렀는데 윤순은 과연 오지 않았다. 김일경이 뜻을 얻게 되자 윤순이 조정에 들어갔는데 언의(言議)가 또 맞지 아니하니, 김일경이 크게 노하여 윤순에게, ‘관망(觀望)만 하며 약속을 어기고 토역(討逆)하는 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하며 그 당여(黨與)와 더불어 힘써 배척하여 조정에서 편안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명균은 심단(沈檀) 및 김일경과 전석(銓席)에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았고 또 윤지술(尹志述)을 구원하였으므로 김일경의 무리가 더욱 미워하여 나쁜 지방으로 척보(斥補)한 것인데, 조태구가 서명균과 윤순은 외직(外職)으로 내보낼 수 없다며 아뢰어 체직시키고, 사직(史職)에 잉임(仍任)053)  할 것을 청하니, 이에 완론(緩論)과 준론(峻論)으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인감(人鑑)은 김일경의 자(字)이다.

 

1월 23일 기유

황음(黃欽)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집(李㙫)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1월 24일 경술

유성(流星)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붉은 빛이 땅에 비쳤다.

 

1월 26일 임자

임금이 대사간(大司諫) 양성규(梁聖揆)가 박치원(朴致遠) 등을 국문(鞫問)함은 부당하다고 논한 것으로써 상소문을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고 박치원 등은 정상(情狀)을 구명(究明)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작환(繳還)054)  하였다. 정언(正言) 김유(金濰)가 또한 논계(論啓)하여 금오(金吾)로 하여금 그전에 판부(判付)한 대로 엄중히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이 다시 상소하기를,
"기강(紀綱)은 해이해지고 윤상(倫常)은 무너져서 임금을 무시(無視)하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신이 연석(筵席)에서 한 번 아뢴 말 때문에 전하께서는 난적(辭賊)의 당(黨)에게 우롱과 모욕을 날마다 받으셨고, 여파(餘波)가 신에게까지 미쳐 미친개처럼 으르렁대고 돼지처럼 마구 달려들었습니다. 정형익(鄭亨益)의 한 마디 말을 모방하여 흉내낸 것으로서 앞에는 박필정(朴弼正)이 있고 뒤에는 송인명(宋寅明)이 있었는데, 이기중(李箕重) 무리에 이르러서는 제멋대로 입을 놀려 추잡하게 모욕한 것이 흡사 거간꾼과 같았으니,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데도 흉악한 무리가 제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것이 이렇게 극도에 이를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시비(是非)를 분별하시는 데 모호한 태도를 취하시고,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을 구분하시는 데 은인(隱忍)055)  하시므로, 이 번거로운 무리들이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고, 고굉(股肱)과 같은 양신(良臣)들이 혹 조금이라도 편안하지 못하게 된 것이니, 도리어 어찌 나랏일에 손을 쓰기를 바라겠습니까? 어찌 전하께서는 규모가 심원(深遠)하고 범위가 굉대(宏大)하여 조화(造化)를 운용(運用)하고 천지(天地)를 포괄(包括)하시나, 사람들이 그 시작과 끝을 헤아리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과 같이 소견이 얕고 좁은 자는 마음에 초조하고 답답함을 금하지 못하여 차라리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일경의 임금을 무시(無視)하고 인도(人道)에 어긋나는 마음은 교문(敎文)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다만 이 한두 번의 상소에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바야흐로 한결같이 숭장(崇奬)하였으나, 감히 억눌러 막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1월 28일 갑인

심단(沈檀)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태항(朴泰恒)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이진검(李眞儉)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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