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무자
박휘등(朴彙登)을 승지(承旨)로, 권첨(權詹)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장령 정해(鄭楷)와 지평 박필몽(朴弼夢)이다.】 에서 논핵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홍우전(洪禹傳)은 등과(登科)하던 날 자매(姊妹)의 상(喪)을 듣고서도 노모(老母)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린다는 핑계로 은밀히 발애(發哀)하지 않고 편안하게 응방(應榜)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얼(嶺臬)079) 로 부임하자 짐바리가 잇따라 추잡한 소문이 낭자하였습니다.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숙종 대왕의 상기(喪期)를 마쳤으므로 장차 태묘(太廟)에 부묘(祔廟)080) 할 것인데, 왕대비(王大妃)와 왕비(王妃)는 존숭(尊崇)하고 책봉(冊封)하는 예(禮)가 있어야 마땅하다며 도감(都監)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차임(差任)하여 미리 의물(義物)을 갖출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5일 경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이 상소하여 병을 핑계대어 부묘 도감 도제조(祔廟都監都提調)를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3월 8일 계사
햇무리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청하기를,
"여러 승지로 하여금 하루씩 걸러 입시(入侍)하게 하여 여러 신하들의 장소(章疏)를 읽게 하고, 성교(聖敎)를 받아 비답(批答)을 써서 내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그 뒤에 승지들이 비록 입시하여 상소를 읽더라도 임금이 혹은 끝내 응답이 없었으므로, 승지들이 가끔 문서(文書)를 임금 앞에 남겨둔 채 물러나오곤 하였다.
3월 10일 을미
밤 1경(一更)에 달이 헌원 좌각성(軒轅左角星)으로 들어갔다.
3월 11일 병신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전후로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여러 차례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원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삼리혈(三里穴)에 뜸을 뜨게 되자, 조태구가 바야흐로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로서 대궐에 나아가 입시(入侍)하여 스스로 지난날 자교(慈敎)를 봉환(封還)했던 곡절을 진달하고, 또 정호(鄭澔)와 송상기(宋相琦)의 소어(疏語)가 거짓임을 변론(辯論)하니, 임금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조태구가 또 말하기를,
"자지(慈旨) 가운데에, ‘차라리 선왕(先王)께서 내리신 작호(爵號)로 바깥으로 나가고자 한다.’는 말씀 때문에 왕세제(王世弟)께서 실로 망극(罔極)한 경우를 겪으셨던 것입니다. 선왕(先王)의 혈속(血屬)으로는 전하와 세제(世弟)가 있을 뿐입니다. 또 전하의 효우(孝友)하심이 독실하고 지극하시니, 어찌 소신(小臣)의 면계(勉戒)를 기다리겠습니까마는, 지금 세제(世弟)께서 시좌(侍坐)해 계신 것을 보건대 화목하여 서로 막힘이 없으니, 신은 너무 기쁜 나머지 감격스런 눈물이 절로 흘러나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우애(友愛)의 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시고, 동궁(東宮)께서는 받들어 섬기는 정성을 더욱 다하신다면 동조(東朝)081) 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겠으며, 선왕의 척강(陟降)하신 혼령(魂靈) 또한 명명(冥冥)한 가운데 어찌 기꺼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3월 12일 정유
정제두(鄭齊斗)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유명응(兪命凝)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권중경(權重經)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박태항(朴泰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하원(李夏源)을 집의(執義) 겸필선(兼弼善)으로, 윤연(尹㝚)을 교리(校理)로 삼고, 황이장(黃爾章)·박희진(朴熙晉)을 모두 대신(大臣)의 천의(藨擬)로 호조와 형조의 참의(參議)에 승진 임명하였다. 유명응은 재능이 없었으나, 다만 이진유(李眞儒)와 이웃에 살면서 서로 친하다는 이유로 웅번(雄藩)에 임명되었고, 황이장과 박희진 또한 물망(物望)이 부족한데도 갑자기 승진 발탁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해괴하게 여겼다. 정제두는 단중(端重)하고 온아(溫雅)한데다가 재주와 식견이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헌직(憲職)에 제배(除拜)되었고, 숙종 말년에는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과 최석항(崔錫恒)이 번갈아 힘써 천거하여 방백(防伯)에 발탁 임명되었지만, 끝내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학술(學術)이 왕양명(王陽明)을 종주(宗主)로 삼았으므로 세상에서 이단(異端)이라 하여 허물로 여겼다.
3월 13일 무술
밤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홍정필(洪廷弼)을 사간(司諫)으로, 조태억(趙泰億)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았다.
경상좌도 암행 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 서종섭(徐宗燮)이 서계(書啓)하기를,
"도내(道內) 열읍(列邑)의 병기(兵器)들이 쇠붙이는 무디어지고, 근각(筋角)은 부서지고 좀먹었는데, 그 가운데 동래(東萊)·영해(寧海)·풍기(豐基)·하양(河陽)·울산(蔚山)·인동(仁同)·다대포(多大浦)·서생포(西生浦) 등의 읍진(邑鎭)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좌수사(左水使) 김시태(金時泰)가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 정세흡(鄭世潝)이 군기(軍器)를 수치(修治)하였다고 장계(狀啓)를 올려 포상(褒賞)할 것을 청하니, 비변사(備邊司)에서 같은 날 복계(覆啓)하여 읍재(邑宰)와 변장(邊將)을 추고(推考)하고, 정세흡에게는 숙마(熟馬)를 상으로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정세흡은 한 사람인데 어사(御史)는 벌주기를 청하였고, 수사(水使)는 상주기를 청하였으니, 공(功)과 죄(罪) 가운데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묘당(廟堂)에서는 같은 날 상과 벌을 모두 시행하였으니, 어리석도다."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99면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기(軍器)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정세흡은 한 사람인데 어사(御史)는 벌주기를 청하였고, 수사(水使)는 상주기를 청하였으니, 공(功)과 죄(罪) 가운데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묘당(廟堂)에서는 같은 날 상과 벌을 모두 시행하였으니, 어리석도다."
선천(宣川)의 수군 방영(水軍防營)을 육군 방영(陸軍防營)으로 고치고, 청천강(淸川江) 남북의 아홉 영장(營將)을 혁파하여 다만 다섯 영(營)만 남겨 두되 모두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주(定州)·귀성(龜城)·영변(寧邊) 등의 읍수(邑守)는 모두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게 하였다. 처음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업(權𢢜)이 도내(道內) 수군(水軍)의 두 방영(防營)을 혁파할 것을 청하자, 묘당(廟堂)에서 아뢰기를,
"삼화영(三和營)은 해서(海西)에 가까와서 접응(接應)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경솔하게 혁파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며, 선천영(宣川營)은 해방(海防)에는 이로울게 없지만 육로(陸路)에 있어서는 요해처(要害處)가 되니, 수군영(水軍營)을 혁파하고 오로지 육로의 수비에만 뜻을 기울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청컨대 다시 권업에게 편부(便否)를 물어보소서."
하였다. 이때에 와서 권업이 아뢰기를,
"선천(宣川)이 이미 육군 방영이 되었으니, 삼화(三和)·함종(咸從)·강서(江西)·용강(龍岡)에 있는 방군(防軍)·요군(遼軍)은 모두 본부(本府)로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마땅하고, 본부 산성(山城)의 작대군(作隊軍) 및 수군(水軍)·사수(射手)·포수(砲手)·능로군(能櫓軍)과 비국(備局) 소관으로 본부(本府)에 있는 별무 군관(別武軍官)과 액수(額數) 외의 군관(軍官) 또한 획급(劃給)하되, 장건(壯健)한 자를 뽑아 대오(隊伍)를 만들어 때때로 연습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약자(老弱者)는 신포(身布)를 거두어 군병(軍兵)의 상사(賞賜)와 약환(藥丸)을 마련하여 갖추는 비용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오를 만든 원군(元軍)은 만약 승진하거나 강등하는 보장이 없다면 막혀서 방해가 되는 것이 있을 듯하니, 수포군(收布軍) 가운데에서 절차에 따라 장건한 자를 뽑아 바꾸어 정함으로써 노약자를 구차하게 채우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전에 관할하던 안주(安州)·용천(龍川)·정주(定州) 등 12고을의 수군 및 방병선(防兵船)은 일체 이를 삼화 방영(三和防營)에 소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선사진(宣沙鎭)은 육군 첨사(陸軍僉使)를 삼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청천강 북쪽에 있는 영장(營將)이 넷이고 청천강 남쪽에 있는 영장이 다섯인데, 지금 그 네 영(營)을 혁파한다면 남쪽 북쪽을 통틀어 다섯 영(營)을 만들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천(宣川)으로 용천(龍川)·철산(鐵山)·미곶이[彌串]·청강진(淸江鎭)을 관할하게 하여 전영(前營)으로 삼고, 중화(中和)로 평양(平壤)·삼등(三登)·상원(祥原)·강동(江東)·보산진(保山鎭)을 관할하게 하여 후영(後營)으로 삼으며, 순천(順川)으로 자산(慈山)·은산(殷山)·성천(成川)·양덕(陽德)·맹산(孟山)·덕천(德川)·영원(寧遠)·개천(价川)·토산진(兎山鎭)을 관할하게 하여 우영(右營)으로 삼고, 가산(嘉山)은 효성로(曉星路)를 마주 대하고 있으니 박천(博川)·곽산(郭山)·태천(泰川)·운산(雲山)·고성진(古城鎭)을 관할하게 하여 좌영(左營)으로 삼으며, 숙천(肅川)은 두 영(營) 사이에 끼어 있으니 영유(永柔)·함종(咸從)·증산(甑山)·용강(龍岡)·강서(江西)·순안(順安)을 관할하게 하여 중영(中營)으로 삼으소서. 정주(定州)에 이르러서는 관서(關西)의 직로(直路)를 마주 대하고 있고, 귀성(龜城)은 창성(昌城)·삭주(朔州)의 요해처(要害處)가 되는 데 모두 성지(城池)가 있으며, 영변(寧邊)은 중진(重鎭)으로서 약산 산성(藥山山城)의 험준함은 서쪽 변방에서 으뜸가니, 희천(熙川)·천수진(天水鎭)을 영변(寧邊)에 소속시키고, 안의(安義)·식송진(植松鎭)을 귀성(龜城)에 소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정주(定州)는 독진(獨鎭)을 만들어 모두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西路)에 기근이 거듭 들어 절발(竊發)082) 의 근심이 많으니, 다섯 영(營)으로 하여금 토포(討捕)의 임무를 겸하여 살피게 하는 것 또한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복계(覆啓)하니, 허락하였다.
3월 14일 기해
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조태채(趙泰采)의 죄는 삼흉(三凶)083) 과 차이가 없는데, 대간(臺諫)의 감률(勘律)에는 차등을 두었으니,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답하지 아니하였다. 헌납(獻納) 김계환(金啓煥)·장령(掌令) 정해(鄭楷)·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 등이 이사상의 상소 때문에 인피(引避)하자, 장령 유만중(柳萬重)이 ‘당초에 구별한 것은 뜻이 참작하여 헤아리는 데 있었다.’ 하여 출사(出仕)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그러나 박필몽·정해가 다시 ‘유만중의 처치(處置)는 마땅함을 잃어 시비가 뒤바뀌었으므로 태연하게 무릅쓰고 출사할 수 없다.’ 하고, 스스로 인책(引責)하여 체임(遞任)시켜 주기를 청하니, 유만중 또한 인피(引避)하였다. 헌납(獻納) 윤회(尹會)가 유만중·박필몽·정해를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5일 경자
이광좌(李光佐)를 세제 우빈객(世弟右賓客)으로 삼았다. 이때 세제(世弟)가 학문에 뜻을 단단히 두고 있었는데, 일찍이 《심경(心經)》 한 부(部)를 겸설서(兼說書) 조현명(趙顯命)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그대가 심학(心學)으로 나를 면려(勉勵)하였으므로, 《심경》을 그대에게 주는 것이니, 그대의 말을 저버림이 있겠는가? 《심경》이 여기에 있다."
하고, 날마다 부지런히 강토(講討)하였다. 그러나 강관(講官)과 빈객(賓客)이 외잡(猥雜)한 자들로 구차하게 많이 채워져 계발(啓發)·훈도(薰陶)의 책임을 맡길 만한 사람이 부족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는데, 이광좌가 빈객(賓客)이 되자 엄중하여 위의(威儀)와 문학(文學)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3월 16일 신축
흉년 때문에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의 군사 및 송도(松都)와 경도(京都) 군사의 봄 조련(操鍊)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니, 수신(帥臣)의 청을 따른 것이다.
3월 17일 임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입진이 끝나자 도승지(都承旨) 김시환(金始煥)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나아가 읽었는데 잠시 후에 임금의 화열(火熱)이 갑자기 오르고 심기(心氣)가 폭발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사신은 논한다. "김창집(金昌集)이 임금의 병을 가탁(假託)하고 공의(公議)를 빙자하여 사계(私計)를 이루려 한 것은 그 죄가 진실로 매우 컸는데, 시배(時輩)들은 또 ‘임금에게 원래부터 질병이 없었다.’고 하며 다만 온 세상을 기만하고 부귀(富貴)를 훔쳐 차지하려고 하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0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김창집(金昌集)이 임금의 병을 가탁(假託)하고 공의(公議)를 빙자하여 사계(私計)를 이루려 한 것은 그 죄가 진실로 매우 컸는데, 시배(時輩)들은 또 ‘임금에게 원래부터 질병이 없었다.’고 하며 다만 온 세상을 기만하고 부귀(富貴)를 훔쳐 차지하려고 하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보다 앞서 옥천인(沃川人) 육현(陸玄)이란 자가 술수(術數)를 가지고 사대부(士大夫)들과 교유(交遊)하여 일찍이 김창집(金昌集)의 집에 객(客)이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경자년084) 여름에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홍술(李弘述)이 육현을 잡아가두고 박살(撲殺)하니, 사람들이 모두 ‘육현이 김창집의 은밀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창집이 이홍술을 사주(使嗾)하여 죽임으로써 멸구(滅口)085) 한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계(臺啓)로 인하여 이홍술 및 포청 군관(捕廳軍官) 현덕명(玄德明), 종사관(從事官) 박종영(朴宗榮)·유일기(兪一基), 서원(書員) 김우태(金遇兌)·김진석(金震錫) 등을 나문(拿問)하였는데, 현덕명 등이 바친 공초(供招)에 대하여 의금부(義禁府)에서 ‘현덕명의 말에 군둔(窘遁)086) 함이 많다.’고 하며 형추(刑推)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19일 갑진
예조에서 숙종 대왕(肅宗大王)을 장차 부묘(祔廟)해야 하는데, 원종(元宗)은 세차(世次)로 보아 천묘(遷廟)함이 마땅하다 하며 대신(大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대신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 등이 예관(禮官)이 말한 대로 헌의(獻議)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3월 20일 을사
수찬(修撰) 남일명(南一明)이 상소하여 전주(銓注)의 용사(用舍)가 편계(偏係)087) 되었음을 논척(論斥)하자,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참판(參判) 김일경(金一鏡)·참의(參議) 이진유(李眞儒)가 각각 상소하여 진변(陳辨)하였는데, 이진유는 상소하기를,
"한쪽편 사람으로서 제외된 자는 권중경(權重經) 한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근시(近侍)의 신하를 간혹 주(州)·부(府)에 차임(差任)하는 것은 본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전조(銓曹)를 관장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객(主客)의 구별을 조금 두고 준엄하게 그 출입(出入)을 막았다면 어찌 큰 죄가 되는 데 이르겠습니까? 그런데 남일명이 이를 핑계대어 말을 만들어 죄를 성토하는 수단으로 삼으니, 그 또한 이상합니다. 기사년088) 사람들이 적체(積滯)되고 폐고(廢錮)된 것이 지금 몇 해가 되었습니다마는, 경화(更化)한 뒤에 선부(選部)에서 우러러 성의(聖意)를 본받아 함께 유신(維新)하자 탄관(彈冠)089) 하고 나온 자가 몇 사람이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제방(提防)이 느슨한 것은 병통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아첨하여 말하였다가 도리어 영원히 금고(禁錮)090) 될 것을 근심하고 있으니, 신은 가만히 이를 비웃을 뿐입니다."
하였다.
3월 21일 병오
햇무리하였다. 김치룡(金致龍)·조경명(趙景命)을 승지(承旨)로, 유봉휘(柳鳳輝)를 참찬(參贊)으로, 서명우(徐命遇)를 집의(執義)로, 이정신(李正臣)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계환(金啓煥)을 사간(司諫)으로, 심공(沈珙)을 교리(校理)로, 이정제(李廷濟)을 부응교(副應敎)로, 윤회(尹會)를 헌납(獻納)으로, 윤순(尹淳)을 부교리(副校理)로, 신치운(申致雲)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신치운은 신면(申冕)의 증손(曾孫)이다. 신면은 김자점(金自點)에게 아부하다가 역옥(逆獄)에 연좌되어 형장(刑杖)을 맞고 죽었는데, 그 후에 신면의 아들 신종화(申宗華)가 적(賊) 허견(許堅)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 아비를 신설(伸雪)시켰다. 그리고 그 아들 신노(申輅)는 또 골육(骨肉)끼리 재산을 다툰다는 비방이 있어 대대로 이어가는 덕이 대개 또한 몹시 더러웠기에 사류(士類)에게 버림받은 지 오래 되었다. 신치운은 비록 재화(才華)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갑자기 사군자(士君子)의 반열(班列)에 낄 수가 있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얼룩소의 새끼가 붉고 뿔이 바르면[騂且角], 산천(山川)의 신이 이를 버리겠는가?’091) 라고 하였다. 신치운은 묘년(妙年)092) 에 등제(登第)하여 용모가 옥설(玉雪)같고 또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그 재주를 사랑하는 자가 차마 끝내 버리지 못하겠다면, 마땅히 힘써 조호(調護)하여 재망(材望)을 쌓고 길러서 반드시 그 이름과 행실이 모두 드러나 사람들이 모두 성각(騂角)의 실상이 있는 줄 알게 한 연후에 점차 청화(淸華)의 선발에 통의(通擬)해도 진실로 불가함이 없을 것인데, 입신(立身)한 초기에 차례를 뛰어넘어 권장해서 발탁하여 오늘은 사국(史局)에 천거하고 내일은 강관(講官)에 충원하는 등 명도(名途)의 극선(極選)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뛰어넘게 하였으니, 아! 무릇 오늘날의 사람들이 누가 사람을 덕으로 사랑하는 뜻을 알겠는가? 신치운 또한 망령되게 스스로 자기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나가서 담당하였으니, 군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0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091] 얼룩소의 새끼가 붉고 뿔이 바르면[騂且角], 산천(山川)의 신이 이를 버리겠는가?’ :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제자 중궁(仲弓)이 출신의 미천함을 한탄하자, 공자가 "얼룩소 새끼로 털이 붉고 뿔이 바르면 희생(犧牲)으로 쓰지 않으려 해도 산천(山川)의 신(神)이 버리겠는가?"라고 하였음. 즉 출신에 관계없이 본인의 훌륭함은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임.[註 092] 묘년(妙年) : 스물 안팎의 나이.
사신은 논한다. "신치운은 신면(申冕)의 증손(曾孫)이다. 신면은 김자점(金自點)에게 아부하다가 역옥(逆獄)에 연좌되어 형장(刑杖)을 맞고 죽었는데, 그 후에 신면의 아들 신종화(申宗華)가 적(賊) 허견(許堅)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그 아비를 신설(伸雪)시켰다. 그리고 그 아들 신노(申輅)는 또 골육(骨肉)끼리 재산을 다툰다는 비방이 있어 대대로 이어가는 덕이 대개 또한 몹시 더러웠기에 사류(士類)에게 버림받은 지 오래 되었다. 신치운은 비록 재화(才華)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갑자기 사군자(士君子)의 반열(班列)에 낄 수가 있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얼룩소의 새끼가 붉고 뿔이 바르면[騂且角], 산천(山川)의 신이 이를 버리겠는가?’091) 라고 하였다. 신치운은 묘년(妙年)092) 에 등제(登第)하여 용모가 옥설(玉雪)같고 또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그 재주를 사랑하는 자가 차마 끝내 버리지 못하겠다면, 마땅히 힘써 조호(調護)하여 재망(材望)을 쌓고 길러서 반드시 그 이름과 행실이 모두 드러나 사람들이 모두 성각(騂角)의 실상이 있는 줄 알게 한 연후에 점차 청화(淸華)의 선발에 통의(通擬)해도 진실로 불가함이 없을 것인데, 입신(立身)한 초기에 차례를 뛰어넘어 권장해서 발탁하여 오늘은 사국(史局)에 천거하고 내일은 강관(講官)에 충원하는 등 명도(名途)의 극선(極選)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뛰어넘게 하였으니, 아! 무릇 오늘날의 사람들이 누가 사람을 덕으로 사랑하는 뜻을 알겠는가? 신치운 또한 망령되게 스스로 자기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나가서 담당하였으니, 군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3월 22일 정미
햇무리하였다.
건원릉(健元陵)의 정자각(丁字閣)이 세월이 오래 되어 기울어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봉심(奉審)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선조(先朝) 무자년093) 에 일찍이 수개(修改)할 것을 의논한 적이 있었는데, 선왕께서, ‘이 정자각은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 불이 났으나 타지 않았으니, 신이(神異)가 있는 듯하다.’고 하시며 특별히 훼손시키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우선 금년 여름 장맛비를 보아가며 다시 살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박종영(朴宗榮)이, 이홍술(李弘述)이 옥안(獄案)을 추개(追改)하고 화적(火賊)이라고 속여서 말하며 육현(陸玄)을 장살(杖殺)한 정상에 대하여 공초(供招)하였는데, 의금부(義禁府)에서 이것을 가지고 이홍술을 다시 추문(推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3일 무신
경기 감사(京畿監司) 조태억(趙泰億)이 전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임명되었을 때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하와 춘궁(春宮)께서 원릉(園陵)을 전성(展省)하셨는데, 인주(人主)가 선조를 받드는 도리는 계술(繼述)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청컨대 선대왕(先大王)의 경천(敬天)·휼민(恤民)·무학(懋學)·근정(勤政)하시던 네 가지 일을 본받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오랫동안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기백(畿伯)에 제배(除拜)하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전의 상소와 아울러 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경(卿)은 사직하지 말고 가서 신중히 일을 처리하라."
하였다.
처음에 대신(大臣)이 위저(位著)094) 가 채워지지 않았다 하여 당하(堂下) 3품(三品) 가운데에서 당상(堂上)으로 승진·발탁할 것을 청하자, 황이장(黃爾章)·박희진(朴熙晉) 등은 이미 참의(參議)에 발탁·임명되었고, 서명우(徐命遇)와 박내정(朴乃貞) 또한 천의(薦擬) 중에 있었는데, 모두 용렬하고 무능하여 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수찬(修撰) 남일명(南一明)이 상소하여 〈이에 대해〉 말하자,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와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며 말하기를,
"서명우는 일을 당하면 거리낌없이 말하고, 박내정은 재주가 있는데도 침굴(沈屈)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거한 것입니다."
하니, 식자(識者)로서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3월 25일 경술
이조 좌랑(吏曹佐郞) 홍만우(洪萬遇)가, 당상관(堂上官)이 낭관(郞官)을 통의(通擬)하면서 서로 글을 보내어 묻지 아니한 데 노하여 정리(政吏)를 잡아가두자, 판서(判書) 이조(李肇) 등이 아뢰기를,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다. 이에 승지(承旨) 심탱(沈樘)이 상소하여 홍만우를 구원하고 전관(銓官)을 배척하였다. 이때 위저(位著)는 채워지지 않고 국사(國事)는 반환(泮渙)095) 하여 도정(都政)이 하루가 급하였는데, 기사년096) 의 당인(黨人)들이 바야흐로 틈을 엿보며 저지하여 방해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심탱의 상소가 승정원(承政院)에 도착하였으나 마침 재계(齋戒)하는 날을 당하여 미처 봉입(捧入)되지 못했는데, 옥당(玉堂)에서 급히 차자를 올려 심탱을 탄핵하고 파직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심탱이 대정(大政)을 저지하고 방해한 것은 참으로 혐오(嫌惡)할 만하나, 승정원과 옥당에서 몰래 서로 의논하여 먼저 급히 차자를 올린 것 또한 몹시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다. 비록 도정(都政)이 연기되는 것을 걱정한다 하더라도 국사는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니, 어찌 구차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0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註 095] 반환(泮渙) : 해이해짐.[註 096]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사신은 논한다. "심탱이 대정(大政)을 저지하고 방해한 것은 참으로 혐오(嫌惡)할 만하나, 승정원과 옥당에서 몰래 서로 의논하여 먼저 급히 차자를 올린 것 또한 몹시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다. 비록 도정(都政)이 연기되는 것을 걱정한다 하더라도 국사는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니, 어찌 구차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
수인(囚人) 현덕명(玄德明)은 이홍술(李弘述)의 심복(心腹)이라 하여 육현(陸玄)의 옥사(獄事)에 체포되었는데, 그 죄를 모면하지 못할 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는 아니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군졸(軍卒) 등이 방수(防守)를 삼가지 않은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황이장(黃爾章)을 승지(承旨)로, 이인징(李麟徵)을 지사(知事)로 삼았다.
우윤(右尹)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기를.
"대간(臺諫)이 민진원(閔鎭遠)을 찬축(竄逐)할 것을 청하고, 진계(陳戒)한 말을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예로부터 충신(忠臣)·직사(直士)로서 능히 이러한 제목(題目)을 면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동포(后胞)로는 단지 민진원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설령 작은 잘못이나 허물이 있더라도 전하께서는 진실로 우악하게 용납하고 관대하게 용서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물며 그 말이 지극한 정성으로 슬퍼한 데에서 나왔으므로 죄줄 것이 없고 칭찬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정형익(鄭亨益)은 단지 선왕의 뜻을 따라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자 하였을 뿐인데, 뭇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떠들며 잇따라 찬축할 것을 청하였고, ‘선왕을 빙자하였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의 무엄함이 어찌 이토록 극도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요? 어유룡(魚有龍) 등을 석방하라는 명은 성의(聖意)가 있는 바인데, 자신이 대직(臺職)에 있으면서 억지로 반한(反汗)하기를 청하여 언관(言官)을 신국(訊鞫)하도록 군부(君父)를 인도하였으니, 저 무리들이 시임(時任) 정승에게 아첨하는 계책은 이루었다 하겠지만, 유독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대각(臺閣)을 우대하던 규례는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이와 같은 무리는 통척(痛斥)을 가하여 제멋대로 당동 벌이(黨同伐異)097) 하며 죄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해칠 수 없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3월 26일 신해
정석오(鄭錫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하원(李夏源)을 응교(應敎)로, 윤혜교(尹惠敎)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김홍석(金弘錫)을 지평(持平)으로, 이봉년(李鳳年)·신유익(愼惟益)을 장령(掌令)으로, 윤취상(尹就商)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심단(沈檀)이 아뢰기를,
"경성(京城)의 10리(十里) 주위는 본부(本府)에서 관할하는 금산(禁山)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감역관(監役官)을 설치하고 금송(禁松)098) 을 순검(巡檢)케 하였으니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닌데, 근래에 장원서(掌苑署) 및 내국(內局)에서 새로 율원(栗園)을 정하여 안암동(安巖泂)·제기(祭基)·청량(淸涼)·고암(鼓巖)·석관(石串) 등의 마을을 모두 소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온수동(溫水洞)의 이사(尼舍)099) 는 연령 군방(延齡君房)에 소속시키고 탑동(塔洞)의 이사는 창의궁(彰義宮)에 소속시켜 각각 구획[界限]을 정하고, 사사로이 금표(禁標)를 세워 당도(當道) 산지기[山直]로 하여금 감히 출입하지 못하게 하니, 거주하는 백성들이 남벌(濫伐)하여 조금도 꺼려하는 바가 없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새로 정한 율원(栗園)을 혁파하고 연령 군방과 창의궁의 사표(私標) 또한 철거하라고 명하시어, 모두 당도(當道)로 하여금 구관(句管)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지금 창시(創始)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사표(私標)를 세웠으면 사산(四山)의 감역도 혁파해 버리는 것이 옳다. 심단이 이미 발계(發啓)하고서도 힘써 다투지 못하였으니, 비루하도다."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01면
【분류】농업-임업(林業) / 농업-과수원예(果樹園藝) / 사상-불교(佛敎) / 역사-편사(編史)
[註 098] 금송(禁松) : 소나무의 벌채를 금함.[註 099] 이사(尼舍) : 여승(女僧)이 거처하는 집.
사신은 논한다. "사표(私標)를 세웠으면 사산(四山)의 감역도 혁파해 버리는 것이 옳다. 심단이 이미 발계(發啓)하고서도 힘써 다투지 못하였으니, 비루하도다."
주청사(奏請使)인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부사(副使) 윤양래(尹陽來)가 북경(北京)에서 출발하면서 먼저 세제(世弟)의 봉전(封典)을 준청(準請)받았음을 치계(馳啓)하였는데, 임금이 먼저 온 군관(軍官) 등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정국(政局)이 뒤바뀐 이후로 동궁(東宮)이 처한 바가 지극히 위태로와서 식자들이 두려워하고 마음이 서늘하였는데, 준청되었다는 보고가 이르자 인심이 믿어 안정되었다.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정제(李廷濟)에게 자급(資級)을 올려주도록 명하였으니, 어사(御史)가 선치(善治)한 데 대하여 포상(褒賞)할 것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백흥석(白興錫)이 육현(陸玄)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갇히었다. 백흥석의 또 하나의 이름은 백망(白望)이다.
3월 27일 임자
심공(沈珙)을 교리(校理)로, 윤오상(尹五商)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조태만(趙泰萬)을 내시 교관(內侍敎官)으로 삼았다. 조태만은 고(故) 참의(參議) 조가석(趙嘉錫)의 아들이고 조태억(趙泰億)의 형이다. 방외(方外)에 노닐며 궤이(詭異)한 행동을 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였으나, 내행(內行)100) 에 독실하고 문사(文詞)를 좋아하였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술을 마시고 나면 이따금 시사(時事)를 이야기하며 비분 강개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니, 대개 기사(奇士)였던 것이다. 일찍이 돈녕 참봉(敦寧參奉)에 제배(祭拜)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또 이 직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뒤에 세제 익위사 시직(世弟翊衞司侍直)에 임명되었는데, 세제가 자신을 낮추어 현사(賢士)를 대접하고 학문을 좋아한다 하여 즉시 나아가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김일경(金一鏡)이 빈객(賓客)으로 입궐(入闕)하면 조그만 일을 핑계대어 그 겸종(傔從)을 잡아다 몽둥이질을 하였으므로, 얼마 안되어 그 당(黨)에게 공격을 받아 제거되었다.
목호룡(睦虎龍)이란 자가 상변(上變)하여 고(告)하기를,
"역적(逆賊)으로서 성상(聖上)을 시해(弑害)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이나 독약(毒藥)으로 한다고 하며, 또 폐출(廢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중에 동궁(東宮)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하는 자가 있습니다. 역적의 정상을 구명(究明)해서 누명(累名)을 씻어 국본(國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승지(承旨) 김치룡(金致龍) 등이 변서(變書)를 가지고 입대(入對)하여 왕옥(王獄)에 회부하고 대신(大臣)을 불러서 처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드디어 내병조(內兵曹)101) 에 정국(廷鞫)을 설치하였는데, 목호룡이 공칭(供稱)하기를,
"저는 비록 미천(微賤)하지만 왕실(王室)을 보존하는 데 뜻을 두었으므로, 흉적(凶賊)이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호랑이 아가리에 미끼를 주어서 비밀을 캐낸 뒤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한 것입니다. 흉적(凶賊)은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기지(李器之)·이희지(李喜之)·심상길(沈尙吉) 홍의인(洪義人)·홍철인(洪哲人)·조흡(趙洽)·김민택(金民澤)·백망(白望)·김성행(金省行)·오서종(吳瑞鍾)·유경유(柳慶裕)입니다. 저는 감여술(堪輿術)102) 을 조금 알고 있으므로, 일찍이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묏자리를 구하러 다니다가 이희지를 만나 서로 더불어 시(詩)를 논하였는데, 이희지가 그의 낙일시(落日詩)를 외며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선왕(先王)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危重)하였는데, 시(詩)의 뜻이 음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네가 이미 감여술(堪輿術)을 알고 있으니, 또한 둔갑술(遁甲術)도 아는가?’ 하므로, 제가 ‘내 친구 중에 둔갑(遁甲)을 잘 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또 그 사람의 성명(姓名)을 묻기에 제가 즉석에서 지어내어, ‘담이(談爾)란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날 이희지가 다시 저를 찾아와 담이의 거처를 묻고, 또, ‘내가 바야흐로 연동(蓮洞) 상공(相公)의 숙부(叔父)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네가 만약 나를 찾아 온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인 마전(麻田) 사는 정인중 또한 기사(奇士)이니, 너를 보면 반드시 크게 기뻐할 것이다. 다만 와서 보기만 하라.’ 하므로, 제가 응락하였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뒤 닷새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희지가 노새를 보내어 저를 부르므로 연동(蓮洞) 김용택의 집으로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기지 등이 둘러앉아 있다가 평생을 사귄 사람처럼 기쁘게 맞았고, 모두들 담이를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둔갑(遁甲)·우보(禹步)103) 에 관한 책을 얻기를 원하였는데, 제가 웃으며, ‘둔갑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어찌 책에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기지·정인중 등이 아주 기이하게 여기며, ‘이 사람은 더불어 마음을 논할 만하다.’라고 하고, 인하여, ‘네가 사는 동네에 지금 세상에도 형(荊) 섭(聶)104) 과 같은 부류가 있어 도시(屠市)105) 간에 숨어 살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이미 속으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답하기를, ‘내 친구들 중에는 협객(俠客)과 같은 부류가 많다.’라고 하였더니, 좌중의 손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 뒤로 왕래가 서로 잦았는데, 그래도 깊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인중이 김용택의 집에 가서 저를 부르기에 제가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 모두 있었습니다. 정인중이 묻기를, ‘너는 현학 산인(玄鶴山人) 이태화(李泰華)의 성명을 들어보았느냐? 이 사람이 거문고를 타면 현학(玄鶴)이 내려와 앉으며 백 리 밖의 일을 알 수 있는데, 네가 말한 담이(談爾)라는 사람은 이 사람과 비교해 보아 어떠한가?’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담이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과 서로 만나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천서(天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주고자 한다.’ 하였더니, 정인중의 눈썹이 꿈틀하며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문밖에 와서 자기가 이태화라고 하면서 스스로 둔갑술에 능하다고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시무(時務)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에게 달려 있으니, 둔갑을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태화가, ‘지금의 호걸은 누구인가?’ 하므로, 제가 ‘정인중이 지금의 방통(龐統)106) 과 같은 부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날 정인중이 저를 찾아와 도시(屠市) 간의 협객(俠客)을 구하였습니다. 때마침 백망(白望)이 어떤 일 때문에 제 집에 왔는데, 용모(容貌)와 풍신(風神)이 멀쑥하고 당당(堂堂)하였으므로, 정인중이 눈여겨 보면서, ‘이 사람 또한 협객의 부류인가?’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이 사람은 협객 중에서 제일 가는 사람으로서 그 용력(勇力)은 대적(對敵)할 자가 없다.’고 하였더니, 정인중이 백망(白望)의 거주지를 상세히 묻고 갔습니다. 제가 백망을 머무르게 하고 이르기를, ‘너의 집을 물어본 것은 장차 너의 용력을 쓰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상대하기가 쉬우나 그 중에 이희지란 자가 있는데 꾀가 깊은 사람이다. 만약 너를 만난다면 반드시 나의 심사(心事)에 대하여 물어 볼 것이니, 너는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었다.」고 답하라.’고 하였는데, 백망은 본래 교활하고 구변(口辯)이 좋은 사람이므로, 제 말을 듣자 이미 그가 장사(壯士)를 구하려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아차리고 서로 약속한 뒤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새벽 정인중이 나귀를 끌고 백망의 집으로 가서 백망을 태워 갔는데, 하룻밤을 지낸 뒤 백망이 돌아와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크게 꿰맨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꿰맨 자루란 국청 죄인(鞫廳罪人)이 자루로 머리를 싸매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백망이 한 말의 내용입니다. 처음에 김용택의 집에 갔더니 김용택·이천기(李天紀)·정인중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의 좋은 신수(身手)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의 용력(勇力)을 물었습니다. 백망이 스스로 그의 용력이 고인(古人)에게 크게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부(自負)하자, 드디어 술잔에 술을 따라 맹세하고 사생(死生)을 같이할 벗으로 맺었습니다. 백망이, ‘그대들이 나를 쓰고자 한다면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할 것이다. 주상(主上)의 병환이 날로 위중(危重)해지고 있으니, 만약 불휘(不諱)한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세상에 유비(劉備) 같은 이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비록 유비는 없지만 장래에 저절로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심사(心事)를 표시하였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썼고, 다른 사람들은 혹 ‘신(信)’자나 ‘의(義)’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백망은 ‘양(養)’자를 썼으므로 좌우에서 서로 돌아보며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유독 이천기만은 알아차리고 크게 웃었으니, 대개 ‘양(養)’자는 ‘양숙(養叔)’을 이른 것으로 이이명(李頤命)의 자(字)가 양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망이 돌아오려고 할 즈음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곧 연잉군(延礽君)의 첩(妾)의 조카이다.’라고 하자, 좌우 사람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며, ‘이는 반드시 목호룡이 우리들의 일을 엿보아 탐지해 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천기가, ‘목가(睦哥)는 본래 상인(常人)이니, 이익으로 위협할수 있다.’고 하며, 정인중으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저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제가 이천기의 집에 갔더니, 이천기가 저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 장차 은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정인중이 발을 밟아 제지하므로, 제가 웃으며, ‘그대들이 백가(白哥)와 동모(同謀)한 말을 내가 모두 들었는데 다시 무엇을 감추고 속이려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천기가 마침내 저에게 묻기를, ‘백가가 「나인[內人]과 많이 결탁하고 있으므로, 급수(急手)를 쓸 수 있다.」하였는데, 그 말이 어떠한가?’라고 하므로, 제가 ‘급수(急手)란 어떤 약을 쓰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이천기가 ‘백가가 「은(銀) 5백 냥으로 중원(中原)에서 사들인 환약(丸藥)을 한 개 먹으면 즉시 쓰러져 죽게 된다.」 하였다.’고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비록 즉시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오늘 약을 쓴다면, 주상께서 반드시 노하여 좌우에 캐물을 것이고, 독장(毒杖) 아래에서 여인(女人)이 반드시 자복(自服)할 것이니, 너희들은 장차 어육(魚肉)이 될 것이다. 성상의 만세(萬歲)를 기다린 뒤에 백가로 하여금 잘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上策)이다.’라고 하자, 이천기는 옳다고 하였으나 김용택만은 유독 소매를 걷어붙이고 성급하게 백가와 결탁하여 역적질을 도모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홍의인(洪義人) 형제는 이천기와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하는 일을 엿보고서는 스스로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로 아첨하여 그 가운데에 느닷없이 끼여드니, 김용택이 노하여, ‘우리들이 매우 위태한[萬死一生] 계책을 내었으니 천고(千古)의 대사업(大事業)이 바로 이 일에 달려 있는데, 저 홍가(洪哥)는 어떤 사람이기에 들어와서 매화점(梅花點)107) 이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김용택·정인중·백망이 동심 합력(同心合力)하였고, 홍의인·이천기·이기지는 저와 더불어 서로 사이가 좋아졌으며, 이희지는 양쪽 사이에서 노닐었습니다. 그런데 이기지가 관상술(觀相術)로 저를 헐뜯기를, ‘이 사람이 얼굴은 검은데 말은 다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니 믿기 어렵다. 멀리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이천기가 그 말을 저에게 전해 주기에 제가 웃으며, ‘참으로 당거(唐擧)108) 의 새끼로다.’ 하고는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기지는 자못 푸대접하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홍의인이 이기지를 협박하기를, ‘목호룡이 이미 언문(諺文)으로 된 유서(流書)를 쥐고 있고, 또 폐립(廢立)에 관한 조서(詔書)의 초본(草本)을 보았으니, 그대 집안이 멸족(滅族)되는 것은 그가 혀를 놀리는 데 달려 있다. 잘 대우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니, 이기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홍의인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희지 저에게, ‘너는 어찌하여 요사이의 은밀한 정상(情狀)을 남인(南人)들에게 누설하였는가?’라고 하므로, 제가 웃으며, ‘내 혀가 있는가 보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내가 부귀(富貴)를 취하고자 한다면, 너희들을 고발하는 것은 다만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너는 어디에서 이런 말을 들었는가?’라고 하였더니, 이희지가 ‘서관(西關) 사람 장사방(張四方)이 귀신의 말을 잘 하는데, 네가 반드시 남인들에게 누설할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웃으며, ‘옛말에 이르기를, 「귀신에게 말을 듣고 따르면 망한다.」고 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무당의 말을 듣는가?’ 하였더니, 이희지가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저를 의심하여 실사(實事)를 알려주지 아니하고 몰래 백망과 결탁하여 국상(國喪) 때 임하여 일을 시작하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백망을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불궤(不軌)109) 한 일을 한다면, 내가 반드시 너를 고발할 것이다.’라고 하자, 백망이 저를 두려워하여 감히 역적질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국상(國喪) 뒤 여러 적(賊)들이 비로소 제가 중간에서 저지하여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는 심상길(沈尙吉)을 시켜 저를 전라 병영(全羅兵營)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심진(沈榗)의 막하(幕下)에서 어미의 병을 핑계대고 곧바로 돌아오자, 적(賊)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저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일을 네가 모두 알고 있으므로, 지금 이기지·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 등이 모두 두려워한 나머지 이홍술(李弘述)을 사주(使嗾)하여 장차 너를 체포해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헌(李瀗)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에게 보내어 겨우 면하게 해 놓았다. 네가 만약 글 한 통을 써 준다면 이것을 가지고 김용택과 이기지에게 약속할 것이니, 너는 살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웃으며, ‘그대들은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비록 스스로 직접 범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고변(告變)하면 반드시 무시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글을 쓰겠는가?’라고 하니, 이천기가, ‘나는 비록 너를 알지만 저들이 모두 믿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쓰기만 하라.’ 하므로, 제가 독약(毒藥)을 쓰는 동안에 참섭(參涉)한 일을 써서 주자, 이천기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매번 전고(前古)의 고변자를 들어 저를 협박하기를, ‘고변자를 반드시 죽이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하므로, 제가 웃으며,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를 큰 공로자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의심하여 노하는가? 지금 주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전적으로 너희들을 임용하고 있으니, 덕과 도량이 천지(天地)와 합한다. 너희들이 만약 나에 의하여 저지당하지 않고 흉억(胷臆)을 행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몰래 죽일 것이니, 그 후회가 어떠하겠는가?’ 하니, 정인중이 ‘너는 과연 기이하다.’고 하였는데, 대개 정인중은 소급수(小急手)를 결약(結約)할 때 매번 얼굴을 찡그리면서 난색(難色)을 보였지만, 김용택에 의하여 몰려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이른바 ‘혹은 칼로써 한다.’는 것은 김용택이 보검(寶劒)을 백망에게 주어 선왕의 국애(國哀) 때 담장을 넘어서 궁궐로 들어가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려고 하는 것이고, ‘혹 약(藥)으로써 한다.’는 것은 이기지·정인중·이희지·김용택·이천기·홍의인·홍철인(洪哲人)이 은(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약(藥)을 타게 하여 흉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경자년110) 에 반 년 동안 경영한 일이었습니다. 이른바 소급수(小急手)란 폐출(廢黜)를 모의하는 것으로서 이희지가 언문(諺文)으로 가사(歌詞)를 지어 궁중(宮中)에 유입(流入)시키려 하였는데, 모두 성궁(聖躬)을 무고하고 헐뜯는 말이었습니다. 또 교조(矯詔)를 초(草)하여 나인[內人] 지열(池烈)과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을 시켜서 국상(國喪) 때 곧 내리려고 하였는데, 그 조서(詔書)를 많이 기억하지는 못하나, 첫머리에, ‘불곡첨위(不穀忝位)’ 등의 글자가 있었고, 중간에는 ‘세자(世子)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 [廢世子某爲德讓君]’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조서의 초본(草本)을 보았을 때 저는 바야흐로 김용택의 집을 찾아가 서쪽 벽에 앉아 있었고, 이희지·김용택·백망은 머리를 맞대고 촛불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이희지가 조서를 듣고 다 읽기 전에 이기지가 후원(後園)에서 들어왔으므로, 다른 사람인 줄 잘못 의심하여 이희지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는데, 제가 실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흡(趙洽)이 은(銀) 2천 냥을 백망과 김용택·이천기에게 주어 나인[內人] 지열(池烈)·이영(二英)에게 나눠 주게 하였는데, 홍의인은 은 50냥을 내었고, 심상길(沈尙吉)은 은 2백 냥을 내었고, 이희지는 은 70냥을 내었습니다. 김민택(金民澤)은 비록 은을 내기는 하였지만 백망에게 주지는 아니하였고, 저와 상면(相面)하자 다만 김용택·이천기를 시켜 왕래하며 서로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망이 저에게 ‘내가 은을 이영(二英)에게 주어서 그 사촌인 궁인(宮人) 이씨(李氏)와 동성(同姓)인 궁인 백씨(白氏)에게 바치고, 지 상궁(池尙宮)과 더불어 독약(毒藥)을 쓰는 일을 도모해 이루려고 한다.’ 하므로, 제가 이치에 의거하여 금지하기를, ‘역적(逆賊) 무리들이 비록 이 일을 하더라도 왕자(王者)는 죽지 않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런 일을 한다면 반드시 귀주(鬼誅)111) 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은(銀)만 보내고 그 수단을 행하지는 않는다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혹 적인(賊人)들이 몰래 지 상궁과 결탁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망을 통하여 지녀(池女)와 면교(面交)하여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꾀어서 끝내 그 모의를 저지하였으니, 오늘날까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제가 생명을 버리고 주선한 공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동궁(東宮)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은, 심상길·김성행(金省行) 등이 저사(儲嗣)를 세운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아 성공한 것이라 하여 서로 공을 다투자, 오서종(吳瑞鍾)이 유경유(柳慶裕)와 같이 모의하여 백망에게 많은 은냥(銀兩)을 주고 큰 소리치기를, ‘동궁이 이소훈(李昭訓)의 상(喪)이 났을 때 노론(老論)이 독약(毒藥)을 써서 죽인 데 노하여 힘을 내어 정국(政局)을 뒤집고 다시 남인(南人)을 불러들인다고 말하였다.’고 하게 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목호룡의 공초(供招) 끝에 동궁을 핍박하는 단서가 되는 말이 있었으므로, 국청(鞫廳)의 추안(推案)에는 삭제해 버리고 기록하지 않았다. 목호룡은 남인(南人)의 천얼(賤孽)로서 백망과 체결(締結)하여 김용택·이천기·오서종·유경유의 사이에서 순간순간 형적을 바꾸며 노닐어 흉역(凶逆)의 계획과 음비(陰秘)한 모의에 어지럽게 참여하여 관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또다시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과 투합(投合)하여 동궁을 위태하게 할 계책을 도모하였으니, 고변서(告變書) 가운데 있는, ‘네가 기꺼이 임금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캐냈다.’는 말과 공사(供辭) 가운데 있는, ‘동궁의 심사(心事)를 환히 안다.’는 말은 뜻이 지극히 흉참(凶慘)하였다. 여러 적(賊)의 무리가 스스로 위태하여 두렵게 여기는 마음으로 반역(反逆)을 도모하였을 뿐이니, 그 무엇이 동궁에게 관계가 있겠으며, 또 무슨 밝힐 만한 심사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반드시 이 말을 했던 것은 대개 김일경·박상검과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며 합벽(闔闢)112) 하여 말을 만듦으로써 그 무욕(誣辱)하고 더럽히며 위태롭게 하고 핍박하는 계책을 성사시키려고 했기 때문인데, 그때 옥사(獄事)를 조사하던 여러 신하들이 비로소 고변서(告變書) 가운데 동궁을 핍박하는 말을 삭제해 버릴 것을 청한 것은 진실로 체모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능히 그 정절(情節)을 끝까지 핵실(覈實)하여 그 죄를 성토(聲討)하지 못하고 전례(前例)에 따라 책훈(策勳)하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소중한 바가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옥정(獄情)을 완전히 핵실한 뒤에도 유독 그 무고하며 핍박한 죄는 밝혀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인가? 식자(識者)로서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국청에서 도사(都事)를 보내어 고발한 여러 적(賊)들을 잡아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리고 지열(池烈)은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하교하였다.
3월 28일 계축
국청(鞫廳)에서 백망(白望)·유경유(柳慶裕)·오서종(吳瑞鍾)·정인중(鄭麟重)·이영(二英) 등을 잡아 가두었다.
금부 당상(禁府堂上) 김일경(金一鏡)이 왕명(王命)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백망(白望)이 공초(供招)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이 말하기를, ‘지금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이 세제(世弟)를 모해(謀害)하려 하는데, 소론은 청론(淸論)을 자부(自負)하지만 완론(緩論)·준론(峻論)의 구별이 있고, 남인은 온 산의 고목(枯木)에 한 잎사귀만 푸른 격으로 사환(仕宦)하는 이가 적다. 나는 남인의 서얼(庶孽)인데, 듣건대 원휘(元徽)·김 참판(金參判)·유경유(柳慶裕)·심수관(沈壽觀)·오서종(吳瑞鍾)·장우상(張宇相)의 무리가 서로 더불어 일을 모의한다고 한다. 만약 선래(先來)113) 가 나와서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인하여 조정의 권세(權勢)를 동궁에게 옮길 것이고, 일이 성사되면 내가 마땅히 고변(告變)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가 이미 상변(上變)하였으므로 나도 상변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김 참판은 곧 김일경이었다. 그래서 국좌(鞫坐)에서 나와 왕명을 기다린 것이다.
3월 29일 갑인
세제(世弟)가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 아래 조항에 핍박하는 말이 있다 하여 크게 불안해 하며 조신(朝臣)의 숙배 단자(肅拜單子)를 물리치고, 사위(辭位)하려고 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우빈객(右賓客) 심단(沈檀)·좌부빈객(左副賓客) 이광좌(李光佐)·우부빈객(右副賓客) 유봉휘(柳鳳輝)·보덕(輔德) 정석삼(鄭錫三)·필선(弼善) 정해(鄭楷)·문학(文學) 이명의(李明誼)·겸문학(兼文學) 심공(沈珙)·사서(司書) 유필원(柳弼垣)·겸사서(兼司書)·윤혜교(尹惠敎)·설서(說書) 이광보(李匡輔)·겸설서(兼說書) 신치운(申致雲) 등이 청대(請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세 번 청하자 그제야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진수당(進修堂)에 입시(入侍)하였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도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주청사(奏請使)의 선래(先來)가 나왔는데, 듣건대 봉전(封典)이 갖추어졌다 하니, 진실로 종사(宗社)의 큰 경사입니다. 어제 회환(回還)하는 사신(使臣)을 배소(配所)에 압송(押送)하는 일로 도사(都事)를 파견하였는데, 사행(使行)이 막 강을 건너자마자 즉시 나래(拿來)하면 피인(彼人)들의 청문(聽聞)을 놀라게 할 것이니, 도사(都事)로 하여금 만상(灣上)까지 가지 말고 중로(中路)에서 머물러 기다리다가 압송해 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왕세제(王世弟)께서 국옥(鞫獄)의 초사(招辭) 때문에 불안(不安)한 단서가 있어 심지어 진소(陳疏)하려 하신다 합니다. 또 조신(朝臣)의 숙배 단자(肅拜單子)를 봉입(捧入)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니, 이는 곧 지극히 편안하기 어려워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도 양옥(梁獄)114) 을 끝까지 캐지 아니한 일이 있었으니, 이번 옥사도 초사(招辭) 가운데 아래 조항은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니, 이 한 조항은 추문(推問)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최석항은 말하기를,
"처음 그 말을 들으니, 지극히 놀랍고 통탄스러웠으므로, 소설(昭雪)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 번 추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추문(推問)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들으니, 춘궁(春宮)께서 이 때문에 불안해 하셔서 진소(陳疏)하려는 뜻을 가지시기에 이르러 숙배 단자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셨다 하니, 놀라 두려워하는 속마음을 어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청대(請對)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상께서 반드시 와내(臥內)로 부르시고 여러 가지로 개유(開諭)하셔서 위안하는 도리를 다하셔야 할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신 등이 구구하게 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음사(陰邪)한 무리들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處地)를 빙자하여 이런 요사(妖邪)스러운 말을 한 것이니, 이후로 말이 동궁에 관계된 것은 문안(文案)에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김연(金演) 등도 동궁을 위안해야 한다는 뜻으로 누누이 힘써 진달하였다. 조태구와 최석항이 아뢰기를,
"백망(白望)이 의금부(義禁府)에 갇혔을 때 김일경(金一鏡)이 자못 준엄하게 다스렸으므로, 이 때문에 혐의(嫌疑)를 품고는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내어 제함(擠陷)할 계책을 삼은 것인데, 이와 같다면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이 없겠습니다. 대개 목호룡이 백망을 고발하자, 백망 또한 목호룡을 고발하여 마치 서로 보복(報復)하는 것처럼 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습성이 진실로 놀랍고 통탄스러우며, 그 말 또한 지극히 흉악하고 패리(悖理)하니, 신하로서 이런 말을 듣고 어찌 감히 참석해 앉아 있겠습니까마는, 국체(國體)로 보아 돈소(敦召)하여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발락(發落)115) 하지 않았다.
조태구(趙泰耉)는 이때 세제 사(師)가 되었는데, 진수당(進修堂)에서 물러나온 뒤 여러 빈객(賓客)과 궁관(宮官)을 거느리고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여 위안하는 뜻을 갖추 진달하고, 사위소(辭位疏)를 올리지 말고 숙배 단자(肅拜單子)를 물리치지 말 것을 청하니, 세제(世弟)가 그대로 따랐다. 설서(說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옛날 당(唐)나라 광평왕(廣平王)116) 숙(俶)이 참소와 시기로 괴로움을 당하자, 대신(大臣) 이필(李泌)117) 이 양궁(兩宮)을 조화(調和)하여 끝내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저하(邸下)께서 보호(保護)하는 책임을 대신에게 맡기신다면, 오늘의 대신이 옛날의 이필(李泌)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자, 세제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이필의 일로 청하여 대신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배사(拜謝)하고 물러갔다. 대개 신축년118) 에 진퇴(進退)한 뒤 세자가 시인(時人)을 의심하여 혹 자기에게 불리한 자가 있으면 진실로 이미 두려워하여 떨며 위태함을 생각하였는데,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서 은연중에 핍박하는 말이 나오자 세제가 위태함을 근심하여 말하기를, ‘조석(朝夕)으로 화(禍)가 닥치더니 이런 일이 있게 되었구나.’ 하였다. 그런데 송인명의 말을 듣게 되자 마침내 조호(調護)의 책임을 대신에게 맡겼던 것이니, 부탁이 간절한 것은 의심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국청(鞫廳)을 본부(本府)로 올겨 설치하였으니,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한 것이다.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와 우상(右相) 최석항(崔錫恒)이 모두 왕명(王命)을 기다렸는데, 백망(白望)이 어지럽게 공초(供招)하다가 또 목호룡(睦虎龍)의 말을 핑계대어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조만간에 반드시 위태로울 것인데, 위태롭게 하려고 하는 사류(士類)들의 의논이 각각 다르다. 선래(先來)가 오기 전에 모해(謀害)하려고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선래가 온 뒤에 위태롭게 하려고 하는 자가 있기도 하고, 그 중에는 선래의 조만(早晩)을 논할 것도 없이 별양(別樣)의 방법으로 모해(謀害)하려고 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곧 세 종류의 설(說)인 것이다. 선래가 온 뒤에 모해하려고 하는 부류는 소론(少論) 가운데 완론(緩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인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영상(領相) 조태구·우상(右相) 최석항·이태좌(李台佐)·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이다……."
하였는데, 이 때문에 국옥(鞫獄)을 조사하던 두 대신이 불안하여 명(命)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한 옥수(獄囚)가 흉언(凶言)을 지어내어 대신을 쫓아내고, 그 계책은 반드시 옥사(獄事)를 저패(沮敗)시키려고 하였으니, 또한 하나의 세변(世變)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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