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6권, 경종 2년 1722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2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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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병진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2월 2일 정사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 3일 무오

김흥경(金興慶)을 도승지(都承旨)로, 이태좌(李台佐)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태억(趙泰億)을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이광좌(李光佐)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진유(李眞儒)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서명균(徐命均)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홍만우(洪萬遇)·심공(沈珙)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이진유는 성격이 강인(剛忍)하고 당론(黨論)에 용감하게 뜻을 얻은 뒤에는 시론(時論)을 주장하였는데, 인물의 진퇴(進退)를 한결같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 따라 하고, 삼사(三司)의 탄핵(彈劾)은 죄다 그에게 품(稟)하여 지휘를 받으니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두려워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전첩(專輒)056)  한다고 비난하였다.

 

2월 5일 경신

영남(嶺南) 사람 노세재(盧世梓)란 자가 투소(投疏)하여 서명균(徐命均)을 공격하고 아울러 조태구(趙泰耉)를 배척하였는데, 장령(掌令) 정운주(鄭雲桂)도 또한 서명균을 사직(史職)에 잉임(仍任)시킨 데 대하여 상소하고 조태구를 배척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비국(備局)의 차대(次對) 때 임금에게 엄중한 말로 힘껏 배척하여 수규(首揆)057)  를 안심시킬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세제(世弟)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는 사친(私親)의 신주(神主) 방제(旁題)058)  에, ‘효자 모 봉사(孝子某奉祀)’라고 썼었지만, 이제 이미 저위(儲位)에 오르셨으니, 마땅히 고쳐 쓰도록 명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이 말하기를,
"각도(各道) 각읍(各邑)에서 지부(地部)059)  에 응당 납부해야 할 물건을 얻을 것을 청하고 방납(防納)060)  하여 이익을 취하기 때문에, 세입(歲入)이 크게 줄어들고 경비(經費)가 바닥이 났습니다. 이후로 평안(平安)·황해(黃海)·영남(嶺南) 등의 도(道)에서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는 미두(米豆)와 노비 공포(奴婢貢布) 및 양남(兩南)의 염세(鹽稅)·선세(船稅)를 각 아문(衙門)이나 각도의 청으로 인하여 서로 바꾸어 방납(防納)하는 것을 일체 방색(防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관(臺官) 조원명(趙遠命)이 좌윤(左尹) 황일하(黃一夏)가 조정 신하들은 구함(構陷)한 죄를 논핵하여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고, 또 김운택(金雲澤) 등 16인을 원배(遠配)하기를 다시 거듭 청하였다. 대신(大臣)과 교리(校理) 이정제(李廷濟)도 또한 그렇게 말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원명이 또 논하기를,
"정운주의 상소는 묘당(廟堂)을 경알(傾軋)하고, 전지(銓地)를 쳐서 뒤흔드는 것이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2월 6일 신유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유봉휘(柳鳳輝)를 판윤(判尹)으로, 윤순(尹淳)을 헌납(獻納)으로, 정해(鄭楷)를 장령(掌令)으로, 남일명(南一明)을 수찬(修撰)을, 이세최(李世最)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김동필(金東弼)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김운택(金雲澤) 등 16인을 변방 먼 곳으로 나누어 유배시켰다.

 

2월 8일 계해

권중경(權重經)을 승지(承旨)로, 유봉휘(柳鳳輝)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사상(李師尙)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2월 9일 갑자

임금이 동가(動駕)061)  하여 명릉(明陵)을 전알(展謁)하였는데, 왕세제(王世弟)가 따라갔다. 수릉관(守陵官)인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과 시릉관(侍陵官)인 오두흥(吳斗興)에게 자급(資級)을 올려 주라고 명하고, 포시(晡時)062)  에 환궁(還宮)하였다.

 

2월 10일 을축

밤에 달이 여귀성(輿鬼星)을 범하였다.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2월 11일 병인

밤에 목성(木星)이 동함 제3성(東咸第三星)을 범하였다. 종각(鍾閣) 서쪽 행랑(行痕) 65간이 불탔다.

 

2월 12일 정묘

햇무리하였다.

 

2월 13일 무진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전(前) 현감(縣監) 조경명(趙景命) 등 9명을 뽑았다. 조경명은 앞서 이미 자궁(資窮)063)  이 되었기 때문에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품계(品階)를 올렸다.

 

2월 14일 기사

해에 겹친 햇무리가 있었다.

 

이하원(李夏源)을 수찬(修撰)으로, 심단(沈檀)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2월 15일 경오

햇무리하였다. 밤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2월 18일 계유

햇무리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바야흐로 추보(追報)하는 일로 임금에게 아첨하고 있었는데, 남인(南人)들은 등급(等級)을 더하는 의논을 내어 총애를 구하고 권세(權勢)를 다투려고 하였다. 정운주(鄭雲桂)가 이미 맨 먼저 조태구(趙泰耉)를 공격하다가 탄핵받아 체직(遞職)되자, 승지(承旨) 김시경(金始慶)이 상소하여 정운주를 구원하고 서명균(徐命均)을 배척하기를,
"저 서명균이란 자는 윤지술(尹志述)을 편들어 성궁(聖躬)을 업신여기고 모욕하고, ‘사죄(私罪)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군부(君父)께 억지로 더하는 데 이르렀고,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었다.’는 등의 말로 요적(妖賊)을 애도(哀悼)하였습니다. 전하의 사친(私親)께서 모욕을 받으면 이는 전하께서 그 모욕을 받는 것이고, 전하께서 모욕을 받으면 무릇 전하의 신하된 자라도 다른 사람이 이를 죽일 수 있는데, 사죄(私罪)라고 핑계대며 반드시 곡호(曲護)하려고 하는 자는 전하의 신하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적(賊)이 있은 이래로 모자(母子)의 천륜(天倫)이 무너지고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사라졌습니다. 이 적이 복법(伏法)되어 선비의 기풍이 저상(沮喪)되었다면 이 적이 군부를 업신여기고 모욕한 날에는 과연 선비의 기풍이 흥기(興起)되었다는 것입니까? 신은 적(賊)을 가리켜 선비라 하는 자 또한 하나의 적(賊)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죄는 다만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하는 데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먼 변방으로 내쫓는 법을 시행하여 천륜을 멸절하고 윗사람을 거스리는 의논이 다시는 성명(聖明)의 세상에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또 삼사(三司)의 관원(官員)들이 행공(行公)하지 아니함이 많아 토역(討逆)에 대한 계사(啓辭)를 오랫동안 합유(合籲)064)  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배척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청주(淸州) 사람 허벽(許璧)이 또 사주(使嗾)를 받아 상소하여 신사년065)  의 옥사(獄事)를 신설(伸雪)할 것을 청하였는데, 도승지(都承旨) 김시환(金始煥)이 이를 물리치고 아뢰기를,
"허벽이 상소하여 신사년의 일을 말하며 선조(先朝)를 간범(干犯)하였는데,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아! 전하께서 지난날 당하신 바는 진실로 망극한 변고(變故)이었는데 전하께서 오늘날 대처하시는 도리에 있어서 결단코 털끝만한 의논이라도 이 일에 미치는 것을 용납하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의 신하가 된 자 또한 어떻게 차마 지난날의 일을 뒤좇아 제기하여 전하의 마음을 슬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 허벽이란 자가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귀역(鬼蜮)의 무리들이 행적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긴 채 은밀히 사주하여 몰래 지시하고 탐시(探試)하여 엿보면서 감히 의논할 수 없는 일을 의논하여 우리 전하의 3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고치지 않아야 하는 효성을 고치려고 하였으니, 그 정상(情狀)을 논하건대 너무나 절통(絶痛)합니다. 또 이덕배(李德培) 등이 소를 올려 또한 신사년의 일을 들추어내려고 하였는데, 의도(意圖)는 현혹시키는 데 있었으니 용의(用意)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장소(章疏)는 모두 마땅히 물리쳐야 할 것이나, 신이 외람되게 출납(出納)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깊이 느낀 나머지 우러러 계품(啓稟)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김치룡(金致龍)을 승지(承旨)로, 김계환(金啓煥)을 헌납(獻納)으로, 홍만조(洪萬朝)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삼았다.

 

2월 19일 갑술

사헌부(司憲府)에 논핵하기를,
"황상중(黃尙中)은 서수(西帥)066)  의 서압(書押)을 가짜로 찍고 전포 첩문(錢布帖文)을 위조(僞造)한 뒤 몰래 팔아서 돈을 모았는데, 일이 발각되어 포청(捕廳)에 갇혔으나, 한 번 추문(推問)하고는 경솔하게 앞질러 물리쳐 버렸으니, 도둑을 다스리는 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추고(推考)하고 황상중은 다시 포청에 가두어 핵실(覈實)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병자

신필회(申弼誨)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세제 시강원(世弟侍講院) 진선(進善) 김창흡(金昌翕)이 졸(卒)하였다. 김창흡의 자(字)는 자익(子益)이고, 호(號)는 삼연(三淵)인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젊은 날 협기(俠氣)를 드날렸으며 약관(弱冠)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일찍이 장자(莊子)의 글을 읽다가 마음속에 황연(怳然)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山水) 사이에 방랑하며 고악부(古樂府)의 시도(詩道)를 창도(唱導)하여 중흥조(中興祖)가 되었다. 또 선가(仙家)·불가(佛家)에 탐닉하여 오랫동안 스스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가화(家禍)를 당하자 비로소 그 형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학문에 종사하니, 그 견해가 때로 크게 뛰어났다. 만년에는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고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스스로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이르른 곳이라면 또한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괴격(乖激)한 데 가까와 무릇 시론(時論)에 대하여 혹은 팔을 걷어붙이고 장서(長書)를 지어 당로(當路)를 알척(訐斥)067)  하되, 말이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의 선조(先祖)를 범하여 자못 처사(處士)로서 의논을 함부로 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헌직(憲職)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70세였다.

 

2월 22일 정축

박내정(朴乃貞)을 장령(掌令)으로, 윤순(尹淳)을 교리(校理)로, 윤혜교(尹惠敎)를 부교리(副校理)로, 조문명(趙文命)을 천안 군수(天安郡守)로 삼았다. 조문명은 신축년068)   여름에 교리가 되었으나, 일찍이 상소하여 노론(老論)·소론(小論)의 붕당(朋黨)의 폐단을 논하고 둘 다 그르다는 논의를 폈으므로, 이진유(李眞儒)가 미워하여 마침내 외군(外郡)에 출보(黜補)한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에서 허벽(許璧)의 죄를 논핵하여 먼 곳으로 유배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2월 25일 경진

이때 궁중에 보류해 둔 채 답하지 아니한 장소(章疏)가 거의 50여 본(本)이나 되었고, 신료(臣僚)들이 인입(引入)하여 일을 보지 아니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수상(首相) 조태구(趙泰耉)가 여러 차례 다른 사람에게 저척(詆斥)받아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한 오랫동안 답하지 아니하였다. 우상(右相) 최석항(崔錫恒)이 차대(次對) 때 극진히 간(諫)하며 속히 개석(開釋)하고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하여 국사(國事)를 다행스럽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마땅히 유의하겠다.’고 답하였다. 최석항이 또 박치원(朴致遠)·어유룡(魚有龍)·이중협(李重協) 등을 다시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홍정필(洪廷弼)을 응교(應敎)로, 윤연(尹㝚)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2월 26일 신사

유성(流星)이 기성(箕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2월 27일 임오

이의만(李宜晩)을 승지(承旨)로, 권첨(權詹)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조태구(趙泰耉)가 인입(引入)하여 오랫동안 출사(出仕)하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출사를 권면하지 아니하였고, 김시경(金始慶)의 상소가 들어갔는데도 또한 아무런 견책(譴責)이 없었다. 그러나 남인(南人)들이 희기(希覬)069)  하여,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정언(正言) 신필회(申弼誨)를 사주(使嗾)하여 대각(臺閣)에 나아가 사흉(四凶)070)  을 아뢰어 논핵하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합계(合啓)가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지금 요진(要津)071)  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거개가 다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대하여 관망(觀望)하다가 도피하려는 자들로서 오로지 고식책(姑息策)을 보신(保身)하는 묘책(妙策)으로 생각하고, 군부(君父)의 안위(安危)와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에 이르러서는 심상한 일로 여겨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당(玉堂)에서는 차자를 올려 힘써 청하거나 연명(聯名)으로 일제히 호소하지 않았고, 양사(兩司)에서도 대부분 한 번도 계사(啓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쓸데없이 세월만 보내며 계청(啓請)을 궐(闕)한채 거괴(巨魁)를 용납·비호하고 있습니다. 권업(權𢢜)은 일찍이 영번(嶺藩)으로 있을 때 보호하자는 유소(儒疏)를 저지(沮止)하며 공공연하게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고, 서명균(徐命均)은 어머니를 무시(無視)하는 요적(妖賊)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며 성궁(聖躬)을 몹시 비난하였으니, 모두 무장(無將)072)  ·부도(不道)073)  한 죄에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전형(銓衡)을 맡은 신하들이 흉염(凶焰)에 겁을 먹고, 그 지친(至親)에게 사정(私情)을 두어 지신사(知申事)074)  의 청망(淸望)과 기성(騎省)075)  의 화련(華聯)을 제멋대로 검의(檢擬)하였습니다. 청컨대 삼사(三司)의 계사에 참여하지 아니한 여러 신하들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권업(權𢢜)·서명균(徐命均)은 아주 먼 변방으로 멀리 유배(流配)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는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어유룡(魚有龍)·박치원(朴致遠)·이중협(李重協) 등이 공초(供招)를 바쳤는데, 임금이 국문(鞫問)하면서 간관(諫官)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 있었다고 하교하고 아울러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세 번 아뢰어 복역(覆逆)076)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2월 28일 계미

지평(持平) 조원명(趙遠命)이 신필회(申弼誨)를 탄핵하여 체직시키려고 하자, 신필회가 듣고는 먼저 대각(臺閣)에 나아가 논핵하기를,
"집의(執義) 박희진(朴熙晉)과 조원명은 우물쭈물 관망(觀望)만 하고 합계(合啓)에 기꺼이 동참하려 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필회가 또 박치원(朴致遠) 등을 방송(放送)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다시 더 구문(究問)케 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때 지평 조최수(趙最壽)가 한강(漢江) 밖에 있다가 새로 제명(除命)을 받았는데, 신필회가 날뛰는 데 분개하여 대궐에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이어 신필회의 틈을 타서 경함(傾陷)한 죄와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비인(匪人)077)  을 인용한 죄를 논핵하려고 하였으나, 승지(承旨) 심탱(沈樘)과 이의만(李宜晩)이 날이 저물었다 하여 들어와 사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조최수가 마침내 상소(上疏)하여 승정원(承政院)을 욕하였다. 그러자 신필회도 다시 맞서 글을 올려서 조최수를 공격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김일경은 조최수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아울러 윤순(尹淳)·이정제(李廷濟)가 조최수를 사주하여 이런 일을 한 것이라고 의심받게 되니, 이에 세 사람이 모두 김일경에게 시기받아 배척당하여 여러 차례 그 당(黨)의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

 

2월 29일 갑신

유술(柳述)을 집의(執義)로, 박필몽(朴弼夢)을 지평(持平)으로, 박희진(朴熙晉)을 사간(司諫)으로, 정석오(鄭錫五)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박필몽이 즉시 대각(臺閣)에 나아가 논핵하기를,
"신필회(申弼誨)는 겉으로 토역(討逆)한다는 의리를 핑계대고 속으로 나라를 텅비게 하려는 계책을 품어 삼사(三司)를 몰아내고 전조(銓曹)을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무함하였습니다. 조원명(趙遠命)과 조최수(趙最壽)가 모두 탄핵하려 한다는 뜻을 먼저 통지해 오자 스스로 처리하라고 하였다가, 길목을 지켜 맞이해 공격하고 상소(上疏)하여 죄를 청하여 다른 사람을 대적(對敵)하는 계책을 먼저 내었습니다. 또 도정(都政)이 임박한 날 뜻은 저지하여 훼방하는 데 있고 계책은 경탈(傾奪)078)  하는 데서 나왔으니, 만약 엄중하게 징계하여 책망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일망 타진하려는 수단은 장차 다른 사람의 집안과 나라에 화(禍)를 끼치는 데 이를 것입니다. 청컨대 신필회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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