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묘
묘시(卯時)에서 진시(辰時)까지 햇무리하였는데, 안개가 끼었다.
세제(世弟)에게 명하여 효령전(孝寧殿)의 제사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윤연(尹㝚)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두 대신(大臣)이 명(命)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아뢰자, 임금이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케 하였으며, 또 김일경(金一鏡)에게도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기사관(記事官) 윤광익(尹光益)이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에게 성지(聖旨)를 전선(傳宣)하니, 영상과 우상이 말하기를,
"신 등은 명을 받들어 옥사(獄事)를 안찰(按察)하고 있다가 갑자기 죄수(罪囚)의 망극한 무고(誣告)를 당하였으니, 이는 실로 3백 년 동안 없던 변고(變故)입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어찌 감히 하루라도 천지(天地) 사이에 누워서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은명(恩命)을 받았으나, 감히 태연스레 물러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 승지(鞫廳承旨)가 아뢰기를,
"백망(白望)의 취초(取招) 때 허다하게 황란(荒亂)하여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말들이 모두 문목(問目) 밖의 말이었습니다. 국옥(鞫獄)을 안찰(按察)하던 두 대신(大臣)을 거론하며 차마 들을 수도 없는 말을 더하였으므로, 대신들이 즉시 물러나가 명(命)을 기다리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백망이 죽음 속에서 살길을 찾고자 하여 옥사(獄事)를 저패(沮敗)시키는 계책에 불과하니, 예전에도 없던 변고입니다. 빨리 처분(處分)을 내리시어 국사(鞫事)를 완결짓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친필(親筆)로 답하기를,
"당한 바 흉언(凶言)에 스스로 지나치게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다. 안심하고 국사(鞫事)에 참여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와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당한 망극한 정상을 서계(書啓) 가운데 갖추어 진달하였더니 개석(開釋)하시는 전교(傳敎)가 극진하여 남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흉언(凶言)은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듣지 못할 바이니, 어찌 감히 죄수의 죽음 가운데 살 길을 찾는 말이라 하여 ‘혐의할 것이 못된다.’고 여겨 태연하게 옥사(獄事)를 안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차자를 보고 경(卿)의 간절한 마음을 모두 알았다. 흉인(凶人)이 침공(侵攻)한 말은 깊이 혐의할 것이 못되니, 경(卿) 등은 안심하고 국문에 참여하여 나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집의(執義) 서명우(徐命遇)와 헌납(獻納) 윤회(尹會)가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백망(白望)이 차마 듣지 못할 말을 국옥(鞫獄)을 안찰하던 두 대신(大臣)에게 더하자, 대신들이 즉시 물러가 명(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망은 육옥(陸獄)119) 의 긴요한 죄수로서 또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한 데에 나왔습니다. 처음 공초(供招)에서는 먼저 김일경(金一鏡)을 쫓아내고 두 번째 공초에서는 또 국사(鞫事)를 저패(沮敗)시킬 계책을 내어 갑자기 두 대신을 거론하였습니다. 그밖에 금오(金吾)120) 의 수당(首堂)121) 과 온 조정의 경재(卿宰)들 또한 많이 침핍(侵逼)하여 그 자리에서 편안하게 옥사를 안치(按治)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정절(情節)이 너무 통탄스럽습니다. 막중한 국사(鞫事)가 이로 인해 정지되었으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느 사이에 한심스럽습니다. 두 대신이 바야흐로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이니, 별도로 돈면(敦勉)하여 안치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상소를 보고 모두 알았다. 그대들에게는 모두 혐의할 바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펴서 하라."
하였다.
4월 2일 병진
매상(昧爽) 때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서렸고, 신시(申時)에서 유시(酉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두 대신을 불러 국옥(鞫獄)을 안찰(按察)하도록 명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직(司直) 신임(申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건대 국옥(鞫獄)을 처음 베풀었을 때 금오(金吾)의 관원이 죄인의 입에서 나오자 물러나 명(命)을 기다렸는데, 국청(鞫廳)에서 나문(拿問)을 청하지도 않은 채 본부(本府)로 국청을 옮겨서 일이 상규(常規)와 다르게 되었고, 국옥(鞫獄)을 안찰하는 대신(大臣)이 또 명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국사(鞫事)는 엄중하게 비밀히 해야 하는데, 곡절을 알지 못하겠지마는, 비록 승선(承宣)의 계사(啓辭) 안에 있는 차마 들을 수 없다는 말로써 보더라도 죄인의 초사(招辭)에서 긴급히 나왔음을 알 수 있으니, 허실(虛實)을 변정(辨正)하는 일은 그만두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후사(喉司)와 대각(臺閣)에서는 국사(鞫事)의 엄중함을 생각지 아니하고 돈면(敦勉)하여 옥사를 완결짓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죄인이 한 번 죽고 난 뒤에는 끌어댄 여러 신하들이 비록 변명(辨明)하려고 할지라도 다시는 그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도 명신(名臣)·석보(碩輔)가 억울하게 무함(誣陷)을 받으면 한 번 변명하여 곧 벗어나는 것이 저절로 평인(平人)과 같았으니, 이는 옥체(獄體)를 중요하게 여긴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억울함을 신설(伸雪)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삼사(三司)에서는 한 마디도 쟁집(爭執)하는 말이 없으니, 오로지 성명(聖明)께서는 엄하게 물리치셔서 군신(君臣)의 의리를 면려하게 하소서. 이에 삼가 생각하건대 춘궁(春宮)께서 여러 차례 망극한 변고(變告)를 당하셨으나, 다행히 전하의 효우(孝友)하신 덕에 힘입었고 위안하는 방도를 지극히 쓰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신민(臣民)들이 누군들 흠송(欽頌)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이후로 보호(保護)하는 방도를 사왕(邪枉)을 엄하게 막는 데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이 빈청(賓廳)에 나아와 청대(請對)하였는데, 신임(申銋)이 상소하여 국사(鞫事)에 관한 일로 대신(大臣)을 침척(侵斥)하였으므로, 도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니, 임금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이 청대(請對)하여 진수당(進修堂)에 입시(入侍)해 아뢰기를,
"윤기(倫紀)와 강상(綱常)이 해이해지고 끊어져서 난적(亂賊)이 방자하게 날뛰어 시역(弑逆)의 음모가 권문(權門)에서 나왔으니, 오늘날 신하된 자라면 마땅히 그 살을 씹고 가죽을 깔기를 기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임(申銋)의 상소는 시역을 모의한 난역(亂逆)에 대해서는 조금도 경동(驚動)함이 없이 도리어 역수(逆竪)의 난초(亂招)로 조신(朝紳)을 제함(擠陷)하여 옥사(獄事)를 저패(沮敗)시킬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아! 흉도(凶徒)와 역당(逆黨)이 그의 당여(黨與)가 아님이 없으니, 오로지 단서가 완전히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시조(市朝)의 현륙(顯戮)을 늦추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몰래 적(賊)의 공초(供招)를 빙자해서 대옥(大獄)을 힘써 저지하여 안치(按治)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니, 현저하게 화응(和應)하는 자취가 있습니다. 위로 대신(大臣)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일필(一筆)로 구단(句斷)하여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하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그 마음을 추구해 보면 곧 하나의 백망(白望)인 것입니다. 임금을 저버린 채 역적을 도운 죄를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신임을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122)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답하지 않다가 승지(承旨) 황이장(黃爾章)이 이사상과 더불어 힘껏 간쟁(諫爭)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이사상이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백망(白望)의 초사(招辭)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진소(陳疏)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갖추 알았다. 침공(侵攻)하는 말을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으니, 경(卿)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3일 정사
남취명(南就明)·박희진(朴熙晉)을 승지(承旨)로, 이제(李濟)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뜻밖에 망극한 무함(誣陷)을 당하자, 마음속으로 놀라 아픔이 뼈에 사무쳐서 물러나 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거듭 근시(近侍)의 임유(臨諭)를 받았는데, ‘흉언(凶言)에 대하여 스스로 지나치게 인혐할 필요가 없다.’고 하교하시기에 이르렀으므로, 대략 짧은 차자를 올려 작은 성심(誠心)을 우러러 드러내었더니, 비지(批旨)로 개유(開諭)하심이 정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엄하게 부르심을 다시 욕되게 했으니, 패초(牌招)123) 를 받들고 대궐로 나아가 합문(閤門)을 두드려 청대를 구한 뒤, 옥사(獄事)를 환하게 진달함으로써 피눈물을 흘리며 면할 계책을 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즈음에 신임(申銋)의 상소가 마침 후사(喉司)에 도착하여 신 등이 국옥(鞫獄)을 잘못 안찰하였음을 깊이 공격하였는데, 심지어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들어간 사람을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지 않은 채 본부(本府)로 국청(鞫廳)을 옮긴 것은 또 상규(常規)와 다르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신이 죄인의 초사에서 긴급하게 나왔으니, 허실(虛實)을 변정(辨正)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일에 따라 그 일을 논하는 데 비할 바가 아니니, 옥사(獄辭)가 비록 엄중하여 비밀히 해야 한다 할지라도 어찌 감히 대략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김일경(金一鏡)의 이름이 애당초 상변(上變)한 사람인 목호룡(睦虎龍)의 초사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죄인 백망(白望)이 도리어 목호룡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 바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목호룡에게 다시 공초(供招)를 받았더니, 백망의 말은 완전히 허망한 것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옥체(獄體)로 헤아려 보건대 나문(拿問)을 청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부(本府)로 옮길 것을 청한 데 이르러서는 대개 또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릇 역옥(逆獄)은 일이 급박한 데 관계되면 내정(內庭)에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이 전례(前例)인데, 당초에 올린 바가 바로 급서(急書)였으니 국청을 설치한 것은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사(爰辭)를 받고 보니 여러 죄인들의 음흉하고 부도(不道)한 정절은 모두 연전(年前)의 일을 이제 와서야 비로소 발고(發告)한 것이었고, 죄인을 잡아오는 날짜가 조금 사이가 떴으므로 정국(庭鞫)하는 날을 허송한다면 일이 미안한 데 관계되겠기에 본부로 옮겨 설치했던 것이니, 옥체(獄體)가 본래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말을 하니, 어찌 뜻밖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은 양조(兩朝)의 은우(恩遇)를 입고 몸을 바쳐 이에 이르렀으니, 보잘것없는 단심(丹心)을 천일(天日)이 조림(照臨)할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역수(逆竪)가 죽음 가운데에서 살길을 찾으려고 한 말이 어찌 터무니없이 무함하여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마는, 중신(重臣)이 이에 허실(虛實)이라는 말을 하며 마치 신 등의 허실(虛實)을 대변(對辨)하게 함으로써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바가 있으니, 원통함과 억울함이 지극하여 곧장 죽고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갖추 알았다. 경(卿)이 무함받은 것이 이미 소석(昭釋)되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편안하기 어려운 단서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전일의 교지(敎旨)를 체념(體念)하여 국청에 참석해 나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兪)하고, 두 대신을 부르라고 명하였으나 나오지 아니하였다. 승정원에서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여러 차례 개석(開釋)하였으니 지나치게 인혐할 필요가 없다. 안심하고 국청에 참여할 일을 다시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4일 무오
가주서(假注書) 이태시(李泰始)가 성지(聖旨)를 영상·우상에게 전선(傳宣)하였는데, ‘감히 명을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서계(書啓)하자, 모두 ‘알았다.’고 답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다시 부를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또 나오지 아니하니, 전교하기를
"승지(承旨)를 보내어 같이 오게 하라."
하였다. 승지가 전유(傳諭)하니, 영상과 우상이 모두 명을 받들고 들어왔는데, 영상이 중로(中路)에 이르러 숙질(宿疾)인 비증(痞症)124) 이 갑자기 심해져 길 옆의 여사(閭舍)에 실려 들어 간 뒤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였다. 승정원에서 병이 났다고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액례(掖隷)를 보내어 문병(問病)하고 어의(御醫)로 하여금 병을 살피게 하였다. 우상이 청대(請對)하여 수진당(修進堂)에서 입시(入侍)하고, 백망(白望)을 우선 다시 추문(推問)하지 말고 곧장 목호룡(睦虎龍)과 면질(面質)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승지 황이장(黃爾章)이 말하기를,
"대소(大小)의 옥사(獄事)는 원래 문목(問目) 밖의 것을 기록하는 일이 없는데, 백망은 문목 밖의 어지러운 초사(招辭)로써 옥관(獄官)을 무욕(誣辱)하며 지연시킬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이후로는 문목 외의 것은 쓰지 말게 하고, 비록 다시 옥관을 침범한다 하더라도 인혐(引嫌)할 수 없다는 뜻을 신칙(申飭)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옳지만,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빙자한다면, 신하로서 어찌 감히 난초(辭招)라고 둘러대며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교(下敎)하여 정탈(定奪)125) 한 뒤에야 마음놓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은 애초에 백망의 초사에 나왔으므로, 감히 국청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지금 신 등이 이미 나왔으니, 김일경이 어찌 감히 나오지 못하겠습니까? 패초(牌招)하여 국청에 참여케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황이장이 말하기를,
"국사(鞫事)는 지극히 엄중하므로 외인(外人)은 진실로 알 수가 없고, 설령 타당하지 않은 일이 있다 해도 양사(兩司)의 국옥(鞫獄)에 참여한 사람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후 국외인(局外人)이 상소하여 옥사(獄事)를 논하는 경우 승정원(承政院)에서 물리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최석항이 말하기를,
"국외인(局外人)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런 일을 일으켰으니, 이러고서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4월 5일 기미
박필몽(朴弼夢)을 지평(持平)으로, 구명규(具命奎)·여선장(呂善長)을 정언(正言)으로, 이명언(李明彦)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이명언은 평소에 경학(經學)으로 일컬어지지 않았는데, 만윤(灣尹)126) 에서 곧바로 경악(經幄)의 장관(長官)에 임명되니, 물정(物情)이 자못 옳게 여기지 않았다.
흥양(興陽)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한 죄인 이건명(李健命)을 본현(本縣) 나로도(羅老島)에 이배(移配)하였다. 앞서 유배하였던 사도(蛇島)는 바다를 격(隔)하고 있는 땅이 아니었으므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이배(移配)시킬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대신(大臣)이 임금에게 국사(國事)를 환히 익히게 하려고 하루걸러 입시(入侍)하는 규정을 아뢰어 정하였는데, 그 실제로 입시(入侍)하는 날에는 다만 장계(狀啓) 몇 장에 ‘계(啓)’자만 찍을 뿐이었고, 임금으로부터 별다른 수작(酬酢)이나 강론(講論)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곧 문구(文具)가 되어 버렸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0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대신(大臣)이 임금에게 국사(國事)를 환히 익히게 하려고 하루걸러 입시(入侍)하는 규정을 아뢰어 정하였는데, 그 실제로 입시(入侍)하는 날에는 다만 장계(狀啓) 몇 장에 ‘계(啓)’자만 찍을 뿐이었고, 임금으로부터 별다른 수작(酬酢)이나 강론(講論)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곧 문구(文具)가 되어 버렸다."
경기도(京畿道)에 기근(飢饉)이 들었으므로, 진청(賑廳)의 쌀 2천 석을 획급(劃給)하였는데, 감사(監司) 조태억(趙泰億)의 청을 따른 것이다.
여러 도(道)에 비·우박·서리·눈이 내렸고, 영남(嶺南)에는 충해(蟲害)가 발생하였으며, 호남(湖南)에는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4월 6일 경신
국청(鞫廳)에서 이천기(李天紀)와 그 겸인(傔人)인 노미(老味)를 잡아 가두었다.
4월 7일 신유
평안도(平安道)에 눈과 우박이 쏟아졌는데, 우박은 달걀만 하였다.
우변 포도청(右邊捕盜廳)에서 백망(白望)의 집에 두었던 단검(短劒)·갑구(匣具) 및 은(銀) 1봉(封)을 수색해 내어 바쳤다.
국청(鞫廳)에서 이희지(李喜之)를 가두고 문서(文書)를 수색해 바쳤다. 이희지는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고, 이이명(李頤命)의 조카이다.
4월 8일 임술
임금이 효령전(孝寧殿)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심상길(沈尙吉)을 잡아 가두었다.
4월 9일 계해
묘시(卯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우이(右珥)가 있었으며, 진시(辰時)부터 오시(午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청대(請對)하여 진수당(進修堂)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아뢰기를,
"왕세제(王世弟)께서 지난번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 말단의 말을 불안한 단서로 여기셔서 심지어 궁료(宮僚)들에게 하령(下令)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신이 청대하여 아뢴 말을 삼가 생각하건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서연(書筵)의 소대(召對)를 오랫동안 정지하고 계시니, 어찌 전날 일에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이번에 청대한 것은 오로지 이 일 때문입니다. 대개 예전부터 제왕가(帝王家)에서 알지 못하는 일을 빙자하여 그 사계(私計)를 이룬 요악(妖惡)한 무리들이 많이 있었으나, 오늘날의 일이 어찌 왕세제께서 털끝만큼이라도 불안(不安)해 하실 단서가 되겠습니까? 동궁(東宮)은 곧 전하의 개재(介弟)127) 이신데, 옛말에 이르기를,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兄弟)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효우(孝友)128) 하신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지금 만약 ‘안심하고 서연(書筵)을 열라.’는 뜻으로 간곡하게 개유(開諭)하신다면, 동궁께서 어찌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각별히 유념(留念)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미처 발락(發落)129) 하기 전에 조태구가 또 말하기를,
"병판(兵判) 이광좌(李光佐)와 예판(禮判) 이태좌(李台佐)가 모두 바야흐로 인입(引入)130) 하고 있는데, 두 신하가 당한 바는 신과 대략 똑같습니다. 역수(逆竪)의 무함과 욕을 추후에 들었기 때문에, 동시에 명(命)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지금 비로소 인입(引入)한 것인데, 신 등이 모두 출사(出仕)하였으니 두 신하도 별달리 편안하지 못한 점이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패초(牌招)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조태구가 이어 동궁(東宮)으로 나아가서 청대(請對)하고, 내일부터 궁료(宮僚)를 소대(召對)할 것을 힘써 청하니, 다음날 비로소 소대를 행하였다. 그리고 강원(講院)의 달사(達辭)131) 에 대하여 내린 답 가운데 ‘마음이 오히려 불안하다.[心猶不安]’라는 네 글자를 친히 스스로 지워버렸으니, 또한 조태구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조태구는 나라의 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어지러운 날을 당하여 능히 목숨을 버리고 종사(宗社)를 부지하였으며, 정성을 다 바쳐 국본(國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옥사(獄事)를 의논할 즈음에 관서(寬恕)를 지키고 추보(追報)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올바른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사류(士流)들이 의뢰하여 중시(重視)하고 있었다. 다만 식견과 사려(思慮)가 소홀하여 자기 견해를 확고하게 지키며 부의(浮議)를 진정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병폐(病弊)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04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친(宗親) / 역사-편사(編史)
[註 127] 개재(介弟) : 남의 아우의 존칭.[註 128] 효우(孝友) : 부모에게 효성이 있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음.[註 129] 발락(發落) : 결정지어 끝냄.[註 130] 인입(引入) : 인혐(引嫌)하고 들어감.[註 131] 달사(達辭) : 왕세제에게 아뢰는 말.
사신은 논한다. "조태구는 나라의 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어지러운 날을 당하여 능히 목숨을 버리고 종사(宗社)를 부지하였으며, 정성을 다 바쳐 국본(國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옥사(獄事)를 의논할 즈음에 관서(寬恕)를 지키고 추보(追報)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올바른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사류(士流)들이 의뢰하여 중시(重視)하고 있었다. 다만 식견과 사려(思慮)가 소홀하여 자기 견해를 확고하게 지키며 부의(浮議)를 진정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병폐(病弊)로 여겼다."
4월 10일 갑자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고, 묘시(卯時)부터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이제(李濟)·헌납(獻納) 윤회(尹會)·정언(正言) 여선장(呂善長)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왕옥(王獄)의 죄수가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지난날 현덕명(玄德明)은 스스로 목을 찔렀고, 백망(白望)은 월옥(越獄)132) 하였으니, 일이 지극히 한심합니다. 입직(入直)한 도사(都事)가 방수(防守)를 삼가지 아니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적발하여 나문(拿問)하고, 나졸(羅卒) 등도 각별히 엄중하게 구문(究問)하도록 하소서. 국옥 죄인(鞫獄罪人)을 빨리 나래(拿來)하는 것은 법의 뜻이 있는 바인데도 이번 죄인을 나래할 때 대부분 지체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도사(都事)를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말단의 두 건의 일은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이광좌(李光佐)·이태좌(李台佐)에게 명(命)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였다. 대신(大臣)이 경연(經筵)에서 아뢰어 패초(牌招)한 뒤에도 또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자,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를 계품(啓稟)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全羅道)의 뱃사람 9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자, 임금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업이(業伊)를 잡아 가두었는데, 백망(白望)의 처(妻)인 이영(二英)의 어머니이다.
국청에서 김성행(金省行)을 잡아 가두었는데, 김창집(金昌集)의 손자이고 김제겸(金濟謙)의 아들이다.
4월 11일 을축
국청에서 조흡(趙洽)과 묵세(墨世)를 잡아 가두었는데, 조흡은 조이중(趙爾重)의 아들이고 묵세는 나인[內人]이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권중경(權重經)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기사년의 일133) 은 나라의 큰 변고(變故)였습니다. 그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피차(彼此)를 논할 것 없이 울부짖으며 분주(奔走)하였고, 합사(合辭)134) 하여 힘껏 간쟁(諫爭)하였지만, 끝내 능히 군부(君父)께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특히 당일 여러 신하들의 지극한 불행이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마음이 있어 윤순(尹淳)·심공(沈珙)이 말한 바와 방불(彷彿)하였겠습니까? 더욱이 신의 조부(祖父) 권대운(權大運)은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가슴속의 열성(熱誠)을 다 쏟아 내었지만, 천청(天聽)은 아득하기만 하였습니다. 입대(入對)할 때에 이르러서는 감히 견거(牽裾)135) 의 충성을 본받고자 하였으나, 천위(天威)를 두려워하여, 명령에 핍박되어 물러나왔으며, 박태보(朴泰輔) 등이 항소(抗疏)하여 고문(拷問)을 받게 되자, 천노(天怒)가 더욱 떨치고 성교(聖敎)가 더욱 엄하였으므로, 뇌정(雷霆)의 아래에서 꺾이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창졸간에 본정(本情)에 어긋난 것이 많아 정유(廷籲)136) 를 중간에서 그만 정지하고, 고심(苦心)을 다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의 조부는 언제나 천심(天心)을 돌이키지 못하였던 것을 평생의 지극한 한으로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대개 신의 조부가 자송(自訟)137) 한 뜻입니다. 간책(簡冊)을 상고하고 의리(義理)에서 찾아보건대 윤순과 심공의 말처럼 정쟁(廷爭)하여 천심을 돌이키지 못한 것을 혹 ‘역(逆)’이라 하거나 혹 ‘무모(無母)’라 한 경우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절목(節目)에 대하여 하순(下詢)하시자, 신의 조부가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신은 삼가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사제(私第)로 돌려보내라.」는 명을 보고 지극한 놀라움과 아픔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전(內殿)께서 사기(辭氣)138) 에 설령 허물이 있더라도 비려(媲侶)139) 의 은혜를 우러러 바라고 포용하시는 덕을 믿어 스스로 인복(仁覆)의 아래에서 거듭 죄를 얻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상(聖上)의 천지와 같은 넓은 도량으로 어찌 선처(善處)할 도리가 없겠습니까? 그만둘 수 없으시다면 별궁(別宮)에 거처하게 하며 명호(名號)를 그대로 두고 의물(儀物)을 예전대로 사용하게 하소서. 그러면 성명(聖明)께서 처변(處變)하는 도리가 이에 극진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성실한 혈성(血誠)을 이 한 장의 차자에 의거하여 넉넉히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이 신의 조부를 구원하여 변명하는 상소에서 또한 이 차자에 의거하여 증거로 삼았던 것입니다. 가령 신의 조부에게 진실로 말할 만한 허물이 있었다면, 윤지완이 취미(臭味)가 같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어찌하여 기꺼이 신구(伸救)한 것이 이에 이르렀겠습니까? 신의 조부는 세 조정을 두루 섬겼는데, 선조(先朝)에 이르러 의비(倚毗)함이 더욱 높았습니다. 갑술년140) 에 잠시 은혜로운 견책(譴責)을 내렸으나 곧 패택(霈澤)141) 을 내렸으며, 흉음(凶音)이 위에 들리자 즉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청백(淸白)을 가장(嘉奬)하고 옛 직질(職秩)을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진실로 신의 조부의 죄가 윤순·심공의 말과 같은 것이 있다면, 선대왕(先大王)께서 시종 권고(眷顧)하심이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윤순·심공의 너무 터무니없음을 이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또 신에게 더욱 놀랍고 가슴 아픈 바가 있으니, 기사년142) 여러 신하들이 죄를 입던 초기에 간흉배(奸凶輩)들이 심지어 정인홍(鄭仁弘)·정조(鄭造)·윤인(尹訒)의 죄로 몰아넣었던 것으로, 그 말이 윤서(倫序)가 없었습니다. 을해년143) 에 신의 조부가 용서받자, 영상(領相)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폐모(廢母)를 청하는 논의를 주장하였으나, 기사년(己巳年)의 일은 곧 성상의 과거(過擧)144) 이고, 여러 신하에게는 힘써 간(諫)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니,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기사년의 일을 어찌 광해군(光海君) 때에 견줄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시의 여러 신하들을 범중엄(范仲淹)·공도보(孔道輔)와 같은 죄인145) 으로 여긴다면 혹 가(可)하겠지만, 어찌 마땅히 견줄 수 없는 처지에 견줄 수야 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돌을 던져 쥐를 잡고 싶으나 그릇을 깰까 두려워한다.[投鼠忌器]」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다만 이 한 번의 하교에서도 기사년의 여러 신하들의 본심(本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선왕의 신하된 자로서 만약 조금이나마 군신(君臣)의 의리를 이해하고 투서(投鼠)의 두려움을 안다면, 어찌 감히 다시 기사년(己巳年)의 일을 이처럼 무엄하게 계속하여 그만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조(先朝) 때에도 감히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늘날 전하의 앞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윤순·심공 등은 이와 같이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아주 어두워 한갓 목전(目前)의 구기(口氣)만 시원하게 하고자 하여 오로지 다른 사람을 꾸짖고 모욕하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신의 이 글을 묘당에 내리시어 신의 말의 허실(虛實)과 시비(是非)를 평정(平定)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한 달이 넘어 비답을 내리기를,
"이미 지나간 일이니, 혐의할 필요가 없다. 경(卿)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가서 공경히 일을 받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옥당(玉堂)의 심공·윤순이 상소하여 기사년(己巳年) 사람들을 높이 임용(任用)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논하며 혹은 ‘역(逆)’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무모(無母)’라 하기도 하였다. 권중경은 곧 기사년 후비(后妃)를 폐출(廢黜)하던 날 반나절 동안 정청(定請)했던 수상(首相) 권대운(權大運)의 손자인데, 조부를 위해 변무(卞誣)한다는 핑계로 이와 같이 진소(陳疏)하고, 심지어 선대왕의 ‘투서기기(投鼠忌器)’란 하교를 빙자하여 언관(言官)을 배척하였으니,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있어서 또한 무엄(無嚴)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기사년(己巳年)의 일을 군상(君上)의 과거(過擧)라고 말하며 광해군(光海君) 때에 견주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지 못하나, 만약 군하(群下)가 종용(慫慂)하고 영합(迎合)한 죄일 경우에는 진실로 정조(鄭造)·윤인(尹訒)의 폐모(廢母)를 주장한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민암(閔黯)·이의징(李義徵)의 죄악은 더욱 커서 적(賊) 허균(許筠)보다 거의 더 심할 것이다. 신사년146) 뒤 이봉징(李鳳徵)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죄가 하늘까지 도달했으니, 이것이 선조(先朝)께서 매우 미워하시어 통렬히 배척하시고 일체 폐고(廢錮)한 까닭이다. 그러나 오늘날 조정에서 혹 흉당(凶黨)을 끌어 쓰며 점차 제방(隄防)을 느슨하게 하고, 그것이 선왕의 유지(遺旨)를 저버리고 선후(先后)의 수적(讎賊)을 잊게 되는 것인 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심공·윤순 두 신하가 분연히 항장(抗章)하였으니, 말과 의리가 엄정(嚴正)하여 후세에 할말이 있게 되었다. 권중경은 기사년(己巳年)의 여얼(餘孽)로서 허물을 가릴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거듭 죄루(罪累)가 있게 되었고, 번얼(藩臬)에 총애하여 임명하였으니, 이미 공기(公器)를 욕되게 하였는데, 감히 또 거짓으로 꾸민 말로 스스로 변명하며 공의(公議)와 힘써 싸웠다. 인용한 바 권대운(權大運)의 상소 가운데, ‘설령 허물이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라는 등의 문자(文字)는 분수를 범하고 의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왕안석(王安石)의 일록(日錄)147) 에 스스로 거짓과 패리(悖理)한 것을 베껴 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권중경이 이에 감히 효도로 다스리는 치하(治下)에서 비방하여 말하였으니, 방자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조정에서 논척(論斥)하는 일이 있었음을 들을 수 없으니,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다고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05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역사-편사(編史)
[註 133] 기사년의 일 : 숙종 15년(1689) 왕자(王子) 이윤(李昀:景宗)의 세자 책봉 문제로 기사 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을 때, 장희빈(張禧嬪)의 무고로 민비(閔妃)가 폐위(廢位)되었던 일을 말함.[註 134] 합사(合辭) : 임금에게 주청(奏請)할 때 여러 관사(官司)나 여러 관원(官員)이 글을 합하여 연명(聯名)해서 상소하던 일. 교장(交章).[註 135] 견거(牽裾) : 옷깃에 매달려 끝까지 간(諫)한다는 말로, 《위지(魏志)》 신비전(辛毗傳)에, 문제(文帝)가 신비(辛毗)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노하여 일어나자 신비가 옷깃에 매달리며 강력히 간했다는 고사(故事). 인거(引裾).[註 136] 정유(廷籲) : 조정에서 호소함.[註 137] 자송(自訟) : 자책(自責).[註 138] 사기(辭氣) : 말씨.[註 139] 비려(媲侶) : 짝. 부부.[註 140] 갑술년 : 1694 숙종 20년.[註 141] 패택(霈澤) : 대단히 큰 은택.[註 142]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143] 을해년 : 1695 숙종 21년.[註 144] 과거(過擧) : 과실(過失).[註 145] 범중엄(范仲淹)·공도보(孔道輔)와 같은 죄인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곽 황후(郭皇后)가 후궁(後宮)인 상미인(尙美人)을 질투하여 다투다가 말리는 인종의 얼굴에 잘못하여 손톱자국을 내었는데, 인종이 이를 빌미로 곽 황후를 폐출(廢黜)하자, 중승(中丞) 공도보(孔道輔)와 간관 어사(諫官御史) 범중엄(范仲淹) 등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음. 여기에서는 이 두 사람이 목숨을 내걸고 극간(極諫)하여 인종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이 죄가 된다는 뜻으로 쓰였음.[註 146] 신사년 : 1701 숙종 27년.[註 147] 왕안석(王安石)의 일록(日錄) : 왕안석이 구법당(舊法黨)에 의해 실각하자 자신이 집권(執權)하였을 때 선정(善政)을 베푼 것이 없음을 후회하여 이에 신종(神宗)의 일록(日錄)을 찬(撰)하였는데, 잘못된 점은 죄다 임금에게로 돌리고 잘된 것은 모두 자기 공(功)으로 삼았다 함. 즉 거짓 기록이라는 뜻임.
사신은 논한다. "기사년(己巳年)의 일을 군상(君上)의 과거(過擧)라고 말하며 광해군(光海君) 때에 견주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지 못하나, 만약 군하(群下)가 종용(慫慂)하고 영합(迎合)한 죄일 경우에는 진실로 정조(鄭造)·윤인(尹訒)의 폐모(廢母)를 주장한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민암(閔黯)·이의징(李義徵)의 죄악은 더욱 커서 적(賊) 허균(許筠)보다 거의 더 심할 것이다. 신사년146) 뒤 이봉징(李鳳徵)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죄가 하늘까지 도달했으니, 이것이 선조(先朝)께서 매우 미워하시어 통렬히 배척하시고 일체 폐고(廢錮)한 까닭이다. 그러나 오늘날 조정에서 혹 흉당(凶黨)을 끌어 쓰며 점차 제방(隄防)을 느슨하게 하고, 그것이 선왕의 유지(遺旨)를 저버리고 선후(先后)의 수적(讎賊)을 잊게 되는 것인 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심공·윤순 두 신하가 분연히 항장(抗章)하였으니, 말과 의리가 엄정(嚴正)하여 후세에 할말이 있게 되었다. 권중경은 기사년(己巳年)의 여얼(餘孽)로서 허물을 가릴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거듭 죄루(罪累)가 있게 되었고, 번얼(藩臬)에 총애하여 임명하였으니, 이미 공기(公器)를 욕되게 하였는데, 감히 또 거짓으로 꾸민 말로 스스로 변명하며 공의(公議)와 힘써 싸웠다. 인용한 바 권대운(權大運)의 상소 가운데, ‘설령 허물이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라는 등의 문자(文字)는 분수를 범하고 의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왕안석(王安石)의 일록(日錄)147) 에 스스로 거짓과 패리(悖理)한 것을 베껴 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권중경이 이에 감히 효도로 다스리는 치하(治下)에서 비방하여 말하였으니, 방자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조정에서 논척(論斥)하는 일이 있었음을 들을 수 없으니,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다고 이를 만하다."
전경 문신 전강(專經文臣殿講)148) 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김열(金冽)에게 반숙마(半熟馬) 한 필을 내려 주었다.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진수당(進修堂)에 입시(入寺)하여 여러 도(道)의 재이 장계(災異狀啓)를 읽고 아뢰기를,
"옛날 한(漢)나라 위상(魏相)이 언제나 사방의 재이(災異)를 아뢰었던 것은 대개 인주(人主)로 하여금 경동(驚動)하는 바가 있어 치리(治理)에 더욱 힘쓰도록 하려고 한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때아닌 서리와 눈이 내리고 이처럼 가뭄이 드니, 민사(民事)가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각별히 척념(愓念)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발락(發落)하지 않았다.
이광좌(李光佐)를 대제학(大提學)으로, 김일경(金一鏡)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윤연(尹㝚)을 수찬(修撰)으로, 이하원(李夏源)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김일경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경박했지만, 문예(文藝)가 약간 있었다. 지난 겨울 한 장의 상소로 인하여 외람되게도 아전(亞銓)149) 에 제수되자 기사년150) 의 당인(黨人)을 끌어다 씀으로써 그 성세(聲勢)를 확장하고 추보(追報)하자는 의논을 창도하였는데, 권세와 총애를 믿고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이때 문형(文衡)을 천거(薦擧)할 때가 되자 강현(姜鋧)이 그 천망(薦望)을 주관하였는데, 빌붙던 묵은 습관으로 공의(公議)를 생각하지 않은 채 김일경을 수망(首望)으로 천거하였고,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는 천거하는 차서를 뛰어넘어 이광좌를 수의(首擬)하였으니, 인망(人望)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김일경을 두려워하여 홍문관 제학으로 처리하니, 김일경이 크게 앙심과 원한을 품고 대소(臺疏)가 이루어지도록 사주하여 이광좌가 그 직임에 오래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0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註 149] 아전(亞銓) : 이조 참판(吏曹參判).[註 15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사신은 논한다. "김일경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경박했지만, 문예(文藝)가 약간 있었다. 지난 겨울 한 장의 상소로 인하여 외람되게도 아전(亞銓)149) 에 제수되자 기사년150) 의 당인(黨人)을 끌어다 씀으로써 그 성세(聲勢)를 확장하고 추보(追報)하자는 의논을 창도하였는데, 권세와 총애를 믿고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이때 문형(文衡)을 천거(薦擧)할 때가 되자 강현(姜鋧)이 그 천망(薦望)을 주관하였는데, 빌붙던 묵은 습관으로 공의(公議)를 생각하지 않은 채 김일경을 수망(首望)으로 천거하였고,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는 천거하는 차서를 뛰어넘어 이광좌를 수의(首擬)하였으니, 인망(人望)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김일경을 두려워하여 홍문관 제학으로 처리하니, 김일경이 크게 앙심과 원한을 품고 대소(臺疏)가 이루어지도록 사주하여 이광좌가 그 직임에 오래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4월 12일 병인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역적 백망(白望)에게 무고당한 정상을 진달하고, 죄다 분변(分辨)하여 끝까지 핵실(覈實)할 것을 원하니, 비답하기를,
"무함받은 말에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다. 경(卿)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황해도(黃海道) 장연(長淵) 땅 천불사(千佛寺)의 금불상(金佛像)이 땀을 줄줄 흘리다가 하루를 지나고 그쳤는데, 땀이 흐른 자국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역적 정인중(鄭麟重)이 복주(伏誅)되었다. 정인중이 잡혀오자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저는 시골 구석에서 자라났는데, 마침 서울에 올라왔다가 한 번 김용택(金龍澤)의 집을 지나치려 하니, 목호룡이 거기 있다가 반가운 낯으로 맞이하며, ‘그대는 아무아무 시(詩)를 지은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목호룡의 시(詩)를 들었는데, 간혹 가다가 기이한 귀절이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몹시 기특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인하여 작별한 뒤 마전(麻田)으로 내려갔는데, 전정(前程)이 닥침은 면하지 못하는 바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음관(蔭官)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본래 거처할 집이 없었는데, 군자창(軍資倉) 앞에 있을 때 목호룡이 찾아와 새집이 황량한 것을 보고는 돌아가 양식과 찬거리를 보내 왔습니다. 그 뒤 마침 그 근처를 지나다가 들렀더니, 목호룡이 한 사나이를 데리고 와서 말하기를, ‘시와 문장에 능한데, 성명(姓名)은 백망(白望)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인하여 같이 술을 마시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이른바 ‘둔갑(遁甲) 등의 책을 얻기를 원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설령 이 따위의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야기 하는 중간에 말한 것에 지나지 않고, ‘섭정(聶政)을 얻기를 원한다.’고 하였다는 것은 원래 이런 말이 없었으며, 백운 산인(白雲山人)에 관한 말은 더욱 허황한 것입니다. 백망은 목호룡의 집에서 한 번 본 후에 또 제용감(濟用監)에서 서로 만났으며, 원래 김용택의 집에서 서로 만난 일은 없었으니, 그 용력(勇力)을 묻고 술잔을 돌리며 서로 약속했다는 말은 모두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소급수(小急手)에 얼굴을 찡그렸다는 등의 말은 여러 말로 변명할 것도 못되며, 이기지(李器之) 등과 더불어 백망에게 은(銀)을 주고 약에 타서 흉악한 일을 하게 했다는 등의 말은 조금도 근사하지 아니합니다. 이희지(李喜之)·이기지·홍의인(洪義人)·홍철인(洪哲人)은 모두 면분(面分)이 있고 김용택은 척분(戚分)이 있으므로, 서로 알았을 뿐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초사(招辭)가 상반(相反)된다 하여 다시 목호룡(睦虎龍)을 추문(推問)하니, 목호룡이 대답하기를,
"정인중(鄭麟重)이 용사(勇士)를 구하고 백망(白望)과 약조를 맺은 일은 밝게 증거가 있으며, 또 은(銀)을 낸 여러 사람들이 있고 은을 받을 때 저도 나누어 가진 일이 있었으니, 정인중이 비록 말을 거침없이 잘하는 구변(口辯)이 있다 할지라도 저와 한 번 면질(面質)한다면, 형신(刑訊)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반드시 바른대로 고(告)할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또 처음 초사 가운데 긴요한 말로 다시 정인중을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저는 목호룡을 김용택의 집에서 처음 만났는데, 연월(年月)은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개 그날 목호룡이 먼저 김용택의 집에 와 있었는데, 좌중(坐中)의 사람들이 제가 시(詩)를 잘 짓는다고 하면서 목호룡에게 머물러 기다렸다가 서로 만나게 한 것이니, 그가 기쁘게 맞이했던 것은 반드시 시명(詩名)을 듣고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전정(前程)’이라고 한 것은 제가 팔자(八字)가 몹시 나빠서 보잘것없는 벼슬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다가, 이런 화망(禍網)을 당한 까닭에 말한 것일 뿐입니다. 목호룡이 일찍이 자기의 원림(園林)을 자랑하며 찾아오라고 요구하였으므로, 과연 지나다가 들러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둔갑(遁甲)에 관한 책을 보기를 원하였다.’고 하는 것은 부잡(浮雜)한 사람들이 수작할 때 으레 하는 말이므로 잊어버려 기억할 수 없는데, 목호룡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 강교(江郊)에 있을 때에는 목호룡이 양식을 보내 주었으므로 우연히 그의 집에 들어갔을 뿐이며, 자주 왕래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그 집에 갔다면 목호룡이 술대접을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형섭(荊聶)151) 을 얻기를 원하고 술잔을 돌리며 서로 맹약(盟約)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너무나도 애매합니다. 목호룡의 집에 갔을 때 백망(白望)이 자리에 있었는데, 목호룡이 그가 시(詩)를 잘 짓는다고 하였으나 말하는 사이에 보니 또한 시를 잘 짓는 자가 아니었으며, 제용감(濟用監)에 입직(入直)하였을 때 백망이 또 한 번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 ‘소급수(小急手)’란 곧 고변(告變)하는 말인데, 너무 애매합니다."
하였다. 목호룡과 면질(面質)하게 되자, 목호룡이 정인중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교의(交誼)가 어떠한가? 그러나 이는 대의멸친(大義滅親)152) 하는 경우이므로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덕명(玄德明)이 잡혀들어가고 백망(白望)이 잡혀들어가자, ‘내가 장차 화살을 줄 것[遺矢]이다.’라는 말을 그대 또한 하였는가? 그리고 주상(主上)께서 등극(登極)하신 뒤에 곧 이르기를, ‘내가 이미 그 사람을 도모하였으니, 또 어찌 그 녹(祿)을 먹으며 그 사람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 나는 장차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갈 것이다. 지난날 우리 무리들이 한 일은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밤낮으로 우리 집에 와서 서로 너라고 부른 것이 무릇 몇 차례였던가?’라고 하였다."
하니, 정인중이 말하기를,
"내가 언제 밤에 너의 집을 찾아갔었느냐? 이러한 말들이 무슨 말이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대가 처음 우리 집에 와서 사백(士白)153) 을 통하여 우보법(禹步法)154) 을 구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 우보서(禹步書)를 구하였느냐?"
하니, 정인중이 말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상주(尙州)·청주(淸州) 사이에 절이 있고, 절에는 도사(道士)가 있다.’고 하였다. 우보서(禹步書)에 관한 일은 또한 물었던 것 같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형(荊) 섭(聶)의 일은 네가 끝내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정인중이 말하기를,
"그때 우연히 너에게 물었던 것은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대는 조흡(趙洽)의 은(銀)을 보고 기뻐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대는 은을 내는 일 때문에 웃을 만한 일이 있었는데, 알고 있느냐? 또 이태화(李太華)가 은을 내는 일은 그때 홍의인(洪義人)이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가 되어 본감(本監)의 도장을 찍은 뒤 호조의 둔장첩(屯將帖)을 발급(發給)해 주기로 했던 것인데, 일이 성사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다. 너는 또 이태화의 관상(觀相)을 지적하며, ‘이는 곧 용(龍)이 되지 못한 상(相)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그대가 농판(弄板)하지 않았는가?"
하니, 정인중이 말하기를,
"이태화가 아니다. 바로 이상건(李尙建)으로서, 철원(鐵原) 땅에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가 귀신을 접하며 환술(幻術)로 아무 물건이든지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과연 둔장첩(屯將帖)에 도장을 찍어주고 아무 물건이나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였다. 국청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목호룡의 말은 사리가 분명하여 근거가 있으나, 정인중은 하나도 변파(辨破)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근거가 없다.’ ‘허언(虛言)이다.’ ‘없다.’ ‘아니다.’라는 등의 말로 범연(泛然)하게 말하여 말마다 실패하였습니다. 청컨대 한 차례 형추(刑推)하게 하소서."
하였다. 공초(供招)하기를,
"저는 손바닥에다 ‘의(義)’자를, 김용택(金龍澤)은 ‘충(忠)’자를, 백망은 ‘양(養)’자를 쓴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그 정절(情節)을 끝까지 물으며 잇따라 형신(刑訊)하였는데, 4차 제17도(度)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직고(直告)하였다. 그 결안(結案)한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저는 앞서의 초사에 ‘이천기(李天紀)·김용택·백망 등과 서로 모여 약조를 맺었을 때 저는 손바닥에 ‘의(義)’자를, 김용택은 ‘충(忠)’자를, 백망은 ‘양(養)’자를 썼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손바닥에 재상(宰相) 이이명(李頤命)의 자(字)를 쓴 것은 무식한 데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역적이라 한다면 참지 못할 바가 있어서 당초에 즉시 직고(直告)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이태화에게 환술(幻術)이 있어 도장 찍힌 종이만 얻으면 은전(銀錢)을 많이 모을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이천기·홍의인과 서로 의논하였으며, 홍의인이 바야흐로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가 되었으므로 도장이 그 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지(白紙)에다 도장을 찍어 이천기에게 주었는데, 김용택이 목호룡·백망 무리들과 함께 은을 모아 내폐(內幣)에 널리 쓴 일이 없지 않았으므로, 제가 마음속으로 매우 달갑게 여기지 않고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지 상궁(池尙宮)에 관한 한 부분은 이면(裏面)의 일을 깊이 알 수는 없지만, 이른바 ‘소급수(小急手)’란 곧 독약(毒藥)을 쓰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들은 것은 곧 이천기의 집에 왕래할 때 평소에 이런 말이 있었으므로, 자연히 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목가(睦哥)는 지상궁의 집에 들어가 마치 그 자식과 같았고, 또 목가(睦哥)는 항상 이천기의 집에 거처하였으므로 그 왕래하고 교통(交通)한 정상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목호룡과 면질(面質)했을 때 목호룡이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등극(登極)하신 뒤 정인중이 저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시해(弑害)하려고 모의하였으니, 또 어찌 그 녹(祿)을 먹으며 그 사람을 섬기겠는가? 나는 장차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려 한다.」고 하기에 제가 범연하게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 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목호룡의 더욱 격렬한 말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마는 이 한 가지 조건은 너무 애매합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인 김용택·이천기 등과 교유(交遊)하며 정절(情節)을 알고서도 고하지 아니한 죄를 지만(遲晩)155) 하였음이 확실합니다."
하였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처자(妻子)를 거두어 노비로 삼고 가산(家産)을 몰수하였다.
4월 13일 정묘
이경열(李景說)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역적 백망(白望)이 물고(物故)되었다. 백망이 잡혀오자,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저는 글을 모르기 때문에 목호룡과 교유하여 글을 빌면서 여러 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목호룡이 일찍이 말하기를, ‘너의 인물이 아까와 문자(文字)를 가르치려고 한다. 마전(麻田)에 사는 은사(隱士) 정인중(鄭麟重)은 성격이 소탈하고 시율(詩律)을 잘하며 귀천(貴賤)을 가리지 아니하는데, 우리 집 원림(園林)에 찾아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네가 와서 만날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불려가 정인중과 서로 사귀고 심상하게 왕래하였던 것입니다. 목호룡이 또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은 단아(端雅)하여 사귈 만하다.’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사귀었고, 그 집에 가서 글을 논하였을 뿐이었으니, 한 마디도 용력(勇力)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여러 사람과 서로 사귀었다.’든가, ‘유비(劉備)·환약(丸藥)·손바닥의 글씨’ 따위의 말은 지금에야 비로소 들었습니다. ‘나인[內人]이 말한 바를 모두 따랐다.’고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나 지난 내력은 있으니, 연잉군(延礽君) 댁(宅)에 나가 사는 방자(房子)인 이영(二英)을 제가 첩(妾)으로 삼았으므로, 김용택이 언제나 농담을 하였던 것입니다. ‘전병 군관(全兵軍官)’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그가 떠날 때에 스스로 속이기를, ‘글을 잘하였으므로 결교(結交)하여 막비(幕裨)를 얻을 수 있었다.’ 하였던 것이고, 저는 태어난 이래 평안도 땅을 밟은 적이 없으니, 더욱 대답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아랫조항에다 목호룡의 말을 핑계대며 ‘소론(小論)과 남인(南人)이 세제(世弟)를 모해(謀害)하려 했다.’는 말을 끼워 넣었다. 국청에서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니, 대답하기를,
"백망의 지극히 흉악한 실정은 천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으므로, 근거 없는 말과 어지러운 말로 옥사(獄事)를 다스리던 여러 신하들을 불안하게 하여 그 옥사를 늦추고자 했던 것이니, 더욱 간교하고 흉악합니다. 김용택 등과 서로 사귀며 술을 마시거나 모의(謀議)한 일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한 번 웃을 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기해년156) ·경자년157) 두 해 사이에 날마다 술을 마시며 친밀하게 지내면서 매번 시군(弑君)에 대해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유비(劉備)란 말과 손바닥에 ‘양(養)’자를 쓴 것에 이르러서는 바로 그가 김용택 등과 처음 만난 날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후 제가 백망과 함께 여러 적(賊)들을 만났을 때 말한 바는 이 말보다 중대한 것이 몇 천 몇 만 마디의 말인지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말에는 각각 근거가 있고 증거에는 각각 사람이 있으니, 자세하게 조사해 낸다면 끝내 가리어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김용택이 보검(寶劒)을 준 일은 보검이 그때 방 가운데 있었고, 나인[內人]과 많이 결탁했다고 하는 것은 백망이 스스로 말한 바이며, 이름은 죄다 기억하지 못하나 적배(賊輩)들은 이미 각각 실컷 들었습니다.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라고 말하는 데 이르러서는 모두 백망이 만들어낸 말이고, ‘환약(丸藥) 값 5백 금(金)’ 등의 말은 적(賊)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백망이 도리어 저를 물어뜯으려는 것은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잡쳐 놓은 꼴입니다. 저는 동궁(東宮) 저하(邸下)께 많은 은덕(恩德)을 입어 하늘처럼 우러러보고 있으니, 그 말한바는 너무나도 이치에 가깝지 않습니다.
25일에 서로 만나 이야기한 데에 이르러서는 과연 곡절이 있습니다. 백망은 다만 나라를 도모하고 군상(君上)을 시해(弑害)하려 한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찍이 까닭없이 사람을 무함(誣陷)하여 독장(毒杖) 아래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상이 막바지에 이르면 혹은 도리어 고변(告變)하는 짓을 할까 두려워 제가 다른 말로 달래며 행동거지를 살폈던 것입니다. 그 장살(杖殺)당한 자는 호중(湖中) 사람 육덕명(陸德明)인데, 스스로 육현(陸玄)이라고 하며 백망과 서로 사귀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수(術數)에 밝았으므로 백망이 은밀한 일을 많이 모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육현은 내수사의 고지기[庫直]인 손만(孫萬)의 집으로 옮겨가 지내며 백망과는 서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망이 육현의 음사(陰事)를 김용택(金龍澤)에게 알리기를, ‘육현이 무인(武人) 조엄(趙儼)·김중기(金重器)와 환국(換局)에 관한 일을 손만의 딸인 나인[內人]에게 사통(私通)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용택이 김민택(金民澤)에게 전하여 이홍술(李弘述)을 사주해 포청(捕廳)으로 잡아들이게 한 뒤, 백망이 여러 적(賊)들에게 말하기를, ‘육현이 만약 난언(亂言)하면 누(累)가 반드시 나에게 미칠 것이니, 몰래 죽여 입을 막는 것이 좋겠다.’ 하자, 여러 적들이 누(累)가 백망에게 미쳐서 그 동모(同謀)한 정절(情節)이 탄로날까 크게 두려워하여 백망을 위해 육현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발각이 되어 이홍술을 구문(究問)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므로, 제가 백망에게 ‘네가 말하기를, 「일찍이 육현과 서로 사귈 때 관왕묘(關王廟)에서 점을 쳤더니, 그 결과, 『손(孫 방(龐)의 사귐158) 』이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점(占)이 이미 징험이 되었다. 네가 이미 육현의 발을 잘랐으니, 육현은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백망이, ‘나와 오서종(吳瑞鍾)이 남인(南人)과 체결(締結)하자 모두 환국(換局)의 공(功)을 나에게 돌렸는데, 네가 남인들에게 나를 많이 헐뜯었으므로 남인들이 믿지 않는다. 이 옥사(獄事)가 만약 일어나면 나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나, 오서종이 「많은 이들이 호의(好意)를 가지고 완협(緩頰)159) 하게 할 것이다.」고 하였고, 판의금(判義禁)도 나의 일을 엄하게 다스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혹 엄하게 다스린다면 나는 마땅히 남인(南人)·소론(小論)의 여러 사람들을 죄다 싸잡아 넣어 나의 옥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옥사는 육현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불과하니 깊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으나, 또 적반하장(賊反荷杖)일 것을 두려워하여 25일 아침에 가서 동정(動靜)을 엿보았더니, 백망이 그의 처남(妻娚)인 이중이(李重伊)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오서종에게서 와서 전하기를, 「네가 우리들이 범(犯)한 바를 남인에게 누설하였으므로, 유경유(柳慶裕)는 하려고 하던 일이 허망한 데로 돌아가게 될 것을 염려하여 여러 가지로 헐뜯어 말하였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이른바 제가 남인(南人)들 중에 횡행(橫行)하였다는 따위의 말과 선래(先來)가 오기를 기다려 도모(圖謀)한다고 한 것은 이치에 가깝지 않은 일입니다.
또 이른바 원가(元哥)·장가(張哥) 등의 말과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이미 제 입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절대 꿈속에서도 이르지 아니한 일입니다. 그리고 백망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오서종으로 하여금 심 판서(沈判書)에게 도모하게 하였으나, 그 중에서 참판 김일경(金一鏡)이 담당하여 옥사를 안치(按治)하고 있으니, 내가 만약 한 번 잡혀들어가면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만약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나는 반드시 김 참판(金參判)을 구무(講誣)할 것인데, 이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 요악(妖惡)한 적(賊)이 옥사를 늦추려는 계책입니다. 이 옥사는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 관계된 것이니, 보잘것없는 적인(賊人)의 어지러운 말은 여러 가지로 변석(辨析)할 것이 못됩니다. 먼저 군상(君上)을 시해(弑害)하려 한 한 가지 일과 은화(銀貨)의 사용처에 대해 구문(究問)한 뒤에 조목마다 캐묻는다면 전후의 사상(事狀)을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면질(面質)함에 이르러 목호룡이 말하기를,
"은(銀)을 가진 일을 너는 끝내 알지 못하느냐?"
하니, 말하기를,
"콩 1석(石)과 돈 다섯 냥을 너의 형으로부터 가져간 것 이외에 은(銀)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이 만약 칼을 준 일을 바른대로 공초(供招)한다면 네가 어찌 발명(發明)할 수 있겠느냐?"
하니, 말하기를,
"김용택과 면질시켜 준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주었을 때 아무아무 사람에 대한 말이 있었는데, 너는 끝내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하니, 말하기를,
"네가 상궁의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고, 상궁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양자(養子)인 창귀(昌貴)와 더불어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그 집에 가서 그 원림(園林)을 구경하였더니, 상궁이 주식(酒食)을 대접하였고, 또 신발을 너에게 주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상궁이 또한 신발을 너에게도 주었다."
하니, 말하기를,
"너는 상궁과 함께 방안에 앉아서 비밀한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말이었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내가 상궁과 서로 만나고 있을 때 너도 또한 같이 참석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말하기를,
"이것은 절대로 근거가 없는 말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너는 육현(陸玄)과 함께 같이 관왕묘(關王廟)에 가서 점을 쳐서 육륙괘(六六卦)를 얻었는데, ‘이것은 곧 손(孫) 방(龐)의 사귐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육현이 이미 죽었으니, 내 점이 과연 징험되었다."
하니, 말하기를,
"목호룡은, 육현이 난장(亂杖)을 맞고 죽었기 때문에 그 일을 근사(近似)하게 만들려고 이런 말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백망은 한 마디도 변파(辨破)하는 단서가 없고 하는 말마다 실패하였다 하여 형문(刑問)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형문이 네 차례 행해진 뒤에도 한결같이 저뢰(抵賴)160) 하였으나, 김용택이 칼을 준 일에 대해서는 그 공초에 이르기를,
"제가 비록 차고 오지는 않았으나 김용택이 이미 저에게 보냈고, 보검(寶劒)을 저의 거처에서 수색해 내었으니, 이것은 발명(發明)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추문(推問)하는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김용택이 칼을 준 한 가지 조항을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은을 모은 일 또한 감히 은휘(隱諱)할 수가 없는데, 은화(銀貨)에 대한 내력을 오가(吳哥) 한 사람 외에는 끝내 이름을 지적하여 현고(現告)하지 않았으며, 이영(二英)의 족속(族屬)으로서 나인[內人]이 된 자를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인 묵세(墨世)가 공초(供招)하기를, ‘재차 가서 이영(二英)을 만났고 백망과 서로 만나 수작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전후로 거짓말을 하며 꾸민 정상이 조목마다 탄로되었다."
하였는데, 형문(刑問)이 여덟 차례에 이르렀지만 시종일관 형장(刑杖)을 참고 맞다가 죽었다. 백망은 흉역(兇逆)의 주모자로서 끝내 사실을 털어놓지 아니하여 인정(人情)이 모두 분개하였으므로, 책시(磔屍)161) ·노륙(孥戮)162) 의 법을 추가로 시행하였다.
역적(逆賊) 김용택(金龍澤)이 물고(物故)되었다. 잡혀온 초기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제가 백망(白望)을 알게 된 것은 목호룡이 백망과 친한 때문이었고, 백망이 목호룡과 서로 친하게 된 이유는 그가 여항(閭巷)에서 시문(詩文)을 잘하고 감여술(堪輿術)을 이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인중(鄭麟重)·이희지(李喜之)·이천기(李天紀) 등은 모두 백망·목호룡과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신수(身手)가 좋고 용력(勇力)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두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술잔을 돌리며 술을 마셨다 하나 이것은 보통 일이요, 사생(死生)을 맹약(盟約)했다는 것은 허망(虛罔)한 말입니다. ‘세상에 유비(劉備)가 없다.’고 한 것은 더욱 망령되고 패리(悖理)하며 무상(無狀)한 말이고, ‘충(忠)’자를 손바닥에 쓴 것은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른바 ‘급수(急手)’ 및 ‘5백 냥으로 약(藥)을 산다.’는 말은 목호룡의 참독(慘毒)하고 음험(陰險)한 말로서, 이천기가 스스로 마땅히 앙대(仰對)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호룡의 말에 제가 몰래 백가(白哥)와 결탁하여 많은 은화(銀貨)를 뇌물로 주어 역적질을 도모했다고 하였는데, 아! 통탄스럽습니다. 또 ‘이 일은 우리 무리들이 만 번 죽더라도 한 번 살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데서 나왔다.’고 한 것 또한 목호룡의 망령된 말입니다. 홍의인(洪義人)이 이천기와 이웃에 살았던 것은 곧 사실이나, ‘여러 가지로 아첨하였다.’는 것은 그 정분이 친밀하였기 때문이지 아첨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매화점(梅花點)’이란 말은 친구들 사이에서 홍의인이 정분이 다소 소원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보검을 백망에게 주었다는 것은 말안장에 걸어두는 피초(皮鞘)163) 의 보통 칼이었습니다."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말도 모두 허망하게 얽어 무고(誣告)한 것으로 돌렸다. 국청(鞫廳)에서 김용택의 초사(招辭)가 서로 어긋난다 하여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니, 목호룡이 대답하기를,
"김용택은 곧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자제(子弟)이고, 백망은 곧 여항(閭巷)의 하천(下賤)이니, 지분(地分)이 저절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김용택은 정인중으로 하여금 나귀를 보내어 맞이하게 하고는 손을 잡으며 서로 기뻐하였으며, 말은 너나들이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에는 반드시 몰래 은밀한 방으로 들어가 흉언(凶言)·패담(悖談)이 이르지 아니한 바 없었으며, 언제나 ‘우리들의 일이 만약 노출(露出)된다면 남아(男兒)가 한 번 죽는 것은 진실로 보통 일이니, 비록 백 번 죽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어 승복(承服)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맹약(盟約)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이른바, ‘백망이 힘을 다하겠다.’고 한 것은, 만약 힘을 다하는 것으로 서로 허여(許與)하지 않는다면 한 번 만나본 날에 어찌 멸족(滅族)이 될 수 있는 밀담(密談)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비(劉備)’란 말에 이르러서는, 백가(白哥)는 지극히 간교하고 흉악하여 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의심하는 사람이므로, 혹 김용택의 무리가 하는 일이 뜻이 오왕(吾王)의 자손에게 있지 아니하고 이이명(李頤命)을 추대(推戴)할까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비(劉備)를 물었던 것은 곧 그의 의심이었고, ‘양(養)’자를 썼던 것은 이이명(李頤命)의 자(字)가 양숙(養叔)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용택의 무리는 애초에 저에게 장사(壯士)를 구하기는 하였지만 저의 성(姓)이 목(睦)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성은 생각을 되풀이해 보아도 깊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는 것을 들은 뒤로는 감히 은휘(隱諱)하지 못하고, 대략 그 하는 일들을 저에게 알렸으니, ‘유비’ 및 ‘손바닥의 글자’에 관한 말은 아주 명백하고, 이른바 ‘소급수(小急手)·대급수(大急手)·평지수(平地手)·봉객(縫客)’ 등의 말은 적배(賊輩)들이 날마다 서로 입으로 전하여 외던 말입니다.
김용택은 흉악하고 강퍅하며 좁고 준혹(峻酷)한 성질로 한평생 동안 원하는 것은 나라를 도모하고 종사(宗社)를 뒤엎어 그 아내를 위해 사사로운 원수를 갚는 것이었는데, 그 아내는 곧 이사명(李師命)의 딸이었습니다. 여러 적들이 둘러앉아 모의할 즈음에는 그 아내가 반드시 창구멍으로 이를 보고는 그 말을 참견해 들었는데, 김용택은 언제나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처(妻)는 여자 중에서 영웅(英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가(白哥)를 몹시 신임하여 반드시 그 힘을 얻기를 기약하였으나, 이기지·이천기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용택이 언제나 소매를 떨치며 꾸짖기를, ‘사력(死力)을 다할 자를 얻었으면 단지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계원(啓元)의 무리는 사람을 너무 깊이 의심하니, 대사(大事)를 이루기가 어렵다." 하였는데, 계원(啓元)은 곧 이천기의 자(字)입니다. 김용택은 언제나 지위가 정승(政丞)에 이를 것이라고 자부(自負)하고, 백망에게는 양계(兩界)의 병사(兵使) 및 총융사(摠戎使)를 허락하였는데, 홍의인이 곁에서 마음속으로는 그 말을 비웃었지만 입으로는 거짓말로 칭찬하기를, ‘구야(久也)의 영웅(英雄)스런 자질은 비록 양국(兩局)의 대장(大將)이라도 좋을 것이니, 양계(兩界)의 병사를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하였으니, 구야(久也)란 곧 백망의 자가 자구(子久)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만 번 죽더라도 한 번 살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데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매화점(梅花點)이란 말과 일관된 일입니다. 홍의인이란 자는 스스로 공명(功名)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여 이천기(李天紀)를 통해 그 가운데 들어가 은밀한 일을 모의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김용택은 성질이 본래 성급하고 편협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크게 화를 내며, ‘우리들이 만 번 죽더라도 한 번 살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이런 좋은 일을 만들어 내었는데, 저 홍(洪)은 어떠한 사람이길래 이미 아무 공로(功勞)도 없으면서 감히 들어와 매화점(梅花點)이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매화점이란 매화 다섯 점 가운데 또 중앙의 점이 있으므로, 홍의인은 중앙에 더 찍은 점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 무리 다섯 사람 가운데에 홍의인을 들이는 것을 꺼림칙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보검(寶劒)이란 은(銀)으로 장식한 단검(短劒)이었는데, 그 길이가 두 자로서 그 날카로움은 보물이 될 만하였습니다. 그래서 몰래 백망에게 주어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삼게 했던 것인데, 제가 그것이 백망의 방 안에 걸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백망이 또 보도(寶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길이는 바느질 자[尺] 한 자의 길이였고, 그 너비는 검(劒)과 같았으며, 가시나무[加時木]로 자루를 만들었고 은으로 목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절의정충(節義精忠)’이란 네 글자를 새겼는데, 또한 한 자루의 보도(寶刀)였습니다. 언제나 이 두 가지 물건을 그 장수(長手)로 삼았는데, 적배(賊輩)들이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독약(毒藥)을 쓰는 일을 비록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구야(久也)가 대급수(大急手)에 있으니, 아주 손쉽게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구야(久也)’라고 일컬으며 높였으니, 마치 연단(燕丹)164) 이 형가(荊軻)를 기르듯 하였습니다. 그 사이의 정절(情節)이 이처럼 밝은데, 그가 어찌 감히 은휘(隱諱)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것을 가지고 다시 김용택을 추문(推問)하였는데, 그 공초(供招)는 또 전적으로 목호룡이 구무(構誣)한 데로 돌리고, 그 말단에 이르기를,
"매화점(梅花點)이란 말은 친구들끼리 시(詩)를 짓고 술을 마실 즈음에 우연히 농담한 말입니다. 책과 칼을 서로 주는 것 또한 시인(詩人)의 일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김용택이 반은 털어놓고 반은 숨겨 말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청컨대 목호룡과 면질(面質)시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목호룡이 김용택에게 말하기를,
"숙휴(叔睢)165) 가 그대의 나귀를 보내 백망을 데려가지 않았는가?"
하니, 김용택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손 바닥에 ‘양(養)’자를 쓰지 않았는가?"
하니, 김용택이 말하기를,
"서로 모일 때에는 사대부(士大夫)나 중서(中庶)·하천(下賤)을 물론하고 오로지 충절(忠節)을 귀하게 여긴다. 평소의 뜻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날도 손바닥에 과연 ‘충(忠)’자를 썼다. 그때 백망이 자리에 있기는 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쓴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나와 그대가 사복(士復)166) 그리고 백망과 더불어 같이 앉아 있었을 때 그대가 창 아래에서 촛불을 켜자, 사복(士復)이 조서(詔書)의 초본(草本)을 꺼내 읽었는데 그대는 나와 더불어 같이 보았고 사안(士安)167) 또한 왔으니 미처 보지 못하였다."
하니, 말하기를,
"무상(無狀)하고 맹랑한 말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대가 안국동(安國洞)에 갔을 때 언문(諺文)으로 된 가사(歌詞)를 사복으로 하여금 짓게 하고, 나를 시켜 백망에게 전해 주어 베껴서 대내(大內)로 들여보내게 하였는데, 초본은 다시 너에게 도로 전해 주었다. 어찌 감히 은휘(隱諱)하는가?"
하니, 말하기를,
"이 가사는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대가 벽장에서 은(銀)을 꺼내며 ‘안주감이다.’고 한 것을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때 ‘이것은 조흡(趙洽)의 은이다.’ 하였는데, 백망이 치부(置簿)한 것이 아직도 있다."
하니, 말하기를,
"원래 그런 일이 없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와 조흡의 집에 가자, 조흡이 자리에서 벗어나 다락 안에 있던 은 4백 냥을 가져다 주었다."
하니, 말하기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어찌하여 고변(告變)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나는 부득이하였다. 이른바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란 말은 단지 6, 7명이나, 지금 외영(外影)으로서 폐립(廢立)의 모의를 미리 알고 있는 자가 매우 많다."
하니, 말하기를,
"급수(急手) 등의 말은 지금 처음 듣는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외영(外影)도 또한 너의 말이다. 김진상(金鎭商)·홍용조(洪龍祚) 등은 항상 외영(外影)이라 일컬었는데, 대개 다만 그 모의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니, 말하기를,
"창졸간에 지어낸 허언(虛言)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너는 항상 ‘나에게 남보다 뛰어난 일이 있고 처(妻)도 또한 남보다 뛰어난 일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도 허연(虛言)인가?"
하니, 말하기를,
"이 말은 옳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데리고 안사랑으로 들어가 도배를 했을 때 ‘여자 가운데 영웅이다.’고 자랑하지 않았느냐?"
하니, 말하기를,
"내가 흡호(恰好)168) 라고 말하였으나, 그 나머지는 세월이 오래 되어 기억하지 못하겠다. 처(妻)를 자랑하는 일은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 하는 이야기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계원(啓元)·숙휴(叔睢)와 그대가 나와 같이 앉아 있었을 때 그대가 말하기를, ‘저 홍(洪)은 은(銀)을 낸 일도 없는데, 어찌하여 매화점(梅花點)이 되는가?’라고 하였다."
하니,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이 시(詩)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로 모였을 때 홍의인(洪義人)이 자못 차지(差池)169) 하였으므로 매화점이라 이른 것이니, 자못 시인의 운치가 있어 《세설신어(世說新語)》170) 에 들어갈 만한 것이다. 그 사랑방 벽에 걸어두었던 초도(鞘刀)는 너와 백망이 모두 달라고 하였는데, 네가 광양(光陽)으로 갔을 때 백망이 해서(海西)에 갔다가 돌아와 청하므로 과연 백망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네가 항상 노여운 뜻을 품고 있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 칼은 일찍이 너의 집에서는 보지 못하였고 백망의 집에서 한 번 보았다. 내가 ‘이것이 네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할 칼인가?’ 하자, 백망이 ‘덕우(德雨)171) 가 준 것인데, 내 칼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하니, 김용택(金龍澤)이 말하기를,
"약(藥)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좋은가? 누가 사왔는가?"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은 5백 냥을 가지고 산 일을 어찌 잊겠는가?"
하니, 말하기를,
"그 약은 어떤 행창(行次)에 어떤 역관(譯官)이 사왔는가?"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 약은 행차란 말은 많은 말로 변명(辨明)할 것도 못된다. 다만 약을 사는 일로 은을 준 것이 사실이 아니냐?"
하고, 또 말하기를,
"너는 아주 긴급한 일이라며 나를 오라고 청하였는데, 너는 기억하느냐?"
하니, 말하기를,
"이는 인가(人家)의 서척(書尺) 사이에 으레 하는 말인데, 세월이 오래 되어 기억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국청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김용택이 목호룡과 면질하였을 때 손바닥에 ‘충(忠)’자를 쓴 것과 단검(短劒)을 내어준 일을 지만(遲晩)하며 ‘피초(皮鞘)의 보통칼’이라 하였습니다. 이른바 단검이란 포도청(捕盜廳)에서 수색하여 바친 것으로서 목호룡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전날에 보았던 것이라 하였으며, 곧 장물(贓物)이었습니다."
하고, 드디어 엄하게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다시 추문(推問)하는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만 번 죽더라도 한 번 살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힘을 내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흉참(凶慘)한 것인가? 그런데도 목호룡의 망령된 말이라고 핑계대었다.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란 세 건(件)의 은어(隱語)를 범연(泛然)하게 목호룡 무리의 구기(口氣)에 돌렸으니, 비록 스스로 만들어낸 바는 아니라 하더라도 평상시에 익히 들어 이야기한 정상을 또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이른바 ‘지 상궁(池尙宮)과 교통(交通)하여 뇌물을 준 일은 과연 귀로 들은 것이 있으며, 소급수(小急手)라는 일뿐만 아니라 또한 내간(內間)에서 주선한 일이 많았는데, 목호룡 무리가 주장하였으므로, 저 또한 들어 알게 된 바가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이미 직고(直告)한 뒤에도 오히려 죄다 털어 놓지 아니하니, 더욱 지극히 절통(絶痛)하다……."
하였다. 형문(刑問)이 제3차에 이르러 위차(威次)를 베푸니, 공초(供招)하기를,
"지 상궁을 통하여 독약(毒藥)을 쓰는 것이 곧 소급수(小急手)이며, 이른바 내간(內間)에서 주선하는 일은 지 상궁 및 그 밖의 홍수(紅袖)172) 와 체결(締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정인중(鄭麟重)의 초사(招辭)에 반문(盤問)할 단서가 있다 하여 형신을 정지했다가, 다시 추문할 때 정인중의 초사 가운데, ‘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이 은을 내어 내폐(內嬖)173) 에 두루 썼다.’는 말과 심상길(沈尙吉)이 목호룡과 면질하였을 때의 초사 가운데, ‘은 50냥과 은 1백 냥을 이천기 등에게 보냈다.’는 말로 문목(問目)을 내었는데, 그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저와 이천기가 대궐 안의 동정(動靜)을 알고자 하여 과연 물어서 안 일이 있습니다. 그 탐지(探知)하는 길은 목호룡·백망의 두 길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궁녀(宮女)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이를 인연으로 하여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은 지 상궁이 가장 착실하였습니다. 백망의 집에서 수색해 낸 은전(銀錢)은 비록 아무아무가 몇 냥을 냈는지 알지 못하나, 요컨대 각 사람 등에게서 거두어 모은 것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형문(刑問)이 제7차에 이르러 위차(威次)를 베풀자,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였는데, 다만 말하기를,
"전후 문목(問目) 안의 사연(辭緣)을 일일이 지만(遲晩)하였습니다."
하였고, 미처 결안(結案)하기 전에 경폐(徑斃)174) 하였다.
역적(逆賊) 이천기(李天紀)가 물고(物故)되었다. 잡혀온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그 공초(供招)에 발명(發明)하기를,
"허다한 사설(辭說)은 모두 제가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절대로 근거가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승두선(僧頭扇)175) 50자루와 대간지(大簡紙) 1백 폭(幅)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전해 주었다는 말을 가지고 이천기의 청지기 노미(老味)에게 추문(推問)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재작년에 부채와 간지(簡紙)를 같이 봉한 하나의 큰 뭉치를 이천기가 시켜서 목호룡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제가 체부청(體府廳) 안의 목호룡의 집에 찾아갔더니, 목호룡은 집에 없었으므로, 그 계집종에게 주었습니다……."
하였다. 목호룡이 바친 이천기의 편지는 세 통이었는데, 그 첫 번째 것에는 대략 이르기를,
"구야(久也)가 전한 바는 어떤 말입니까? 그리고 이른바 ‘고무(鼓舞)’란 어떤 일입니까? 이른바 노사(魯史)를 보내려고 했으나, 이 책이 그대에게는 긴요하지 않기 때문에 보내지 아니합니다. 내일 일찍 모름지기 꼭 오셔서 보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용신(冗臣)이 만약 나온다면 반드시 꼭 찾아가 만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책을 읽고 시(詩)를 읊조리는 것은 결코 그 시기가 아닌데, 그대는 곧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진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하였고, 그 두 번째 것에는 대략 이르기를,
"요사이 당한 바를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은 비록 윤종(允從)하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반드시 면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정리(情理)가 절통(絶痛)합니다. 남쪽이라고 말한 것이 몹시 부럽습니다. 몸은 비록 만 리(萬里) 밖에 있어도 마음은 서로 환하게 알고 있고, 단지 이러한 따름인데, 이러한 때에 어찌 왕래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잘 있기를 바랍니다. 신중하게 하는 것은 모두 잠자코 기다리며 깨닫는 데 있으니, 남쪽으로 보내는 계책은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속히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대와 나는 아직 늙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다시 만날 날이 없겠습니까? 다른 날 한 번 웃으며 만나는 것이 묵묵히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으며, 그 세 번째 것은 겉면에다 ‘구유겸상(久儒兼上)’이라 썼는데, 대략 이르기를
"구야(久也)가 어제 잡혀들어 갔는데, 무슨 들은 바가 있습니까? 어제 알리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종일토록 묻는 바가 없었으니, 길이 질퍽거려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름답고 상냥한 두 현인(賢人) 중에서 틈을 타서 찾아오심이 어떠한지요?"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노미(老味)의 직초(直招)와 목호룡이 바친 수찰(手札)을 가지고 이천기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더니, 그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부채와 간지(簡紙)를 상궁(尙宮)에게 전해 주었다는 말은 절대로 근거가 없습니다만, 곡절은 있는 듯합니다. 두서너 해 전 여름철에 승두선(僧頭扇) 한 자루와 별선(別扇) 몇 자루, 간지(簡紙) 수십 폭을 노미(老味)를 시켜 목호룡의 집에 전해 보냈는데, 목호룡이 집에 없었으므로 그대로 두고 왔습니다. 목호룡은 이 일을 가지고 그 수를 확대시켜 역절(逆節)의 증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찰(書札)에 관한 말 또한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지금 이른바 수필(手筆)을 보았더니 자획(字劃)은 비록 대략 비슷하였으나, 요컨대 그 체법(體法)은 결코 다른 사람이 위조(僞造)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위조한 것이라면 편지 내용이 수상(殊常)한지의 여부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유배갔을 때 답한 서찰은 과연 제 필적(筆跡)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이천기를 다시 추문(推問)하였을 때 한 마디도 변명함이 없었으나, 우물쭈물하며 말하였습니다. 목호룡이 바친 수찰(手札) 세 통 가운데 첫 번째 것은 보통으로 문신(問訊)176) 하는 것이었으나, 두 번째 것은 음비(陰秘)한 말이 많았습니다. 이천기는 문신(問訊)한 첫 번째 편지는 과연 그의 글씨이고 음비(陰秘)한 두 번째 것은 곧 다른 사람의 글씨라고 생각하여 말하였으나, 필획(筆劃)이나 글자의 모양이 분명히 한 사람이 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껴내어 이천기의 초사 끝에 점부(粘付)하여 예람(睿覽)에 대비하였습니다. 또 승두선 50자루와 대간지 1백 폭을 이천기가 노미(老味)를 시켜 지 상궁에게 전해 주게 한 일을 목호룡이 명백하게 현고(現告)하였으므로, 노미를 잡아다 추문하였더니, 아무 말없이 자복(自服)하여 어긋난 단서가 닿는 곳마다 드러났습니다."
하였다. 이천기가 목호룡과 면질하자, 목호룡이 말하기를,
"간지(簡紙) 몇 폭과 부채 몇 자루를 지 상궁에게 보내어 탐문(探問)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소소한 일이다."
하니, 말하기를,
"그때 노미(老味)가 너를 따라서 부채와 간지(簡紙)를 전해 주었으니, 네가 간 곳은 곧 지 상궁의 집이었다고 하였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노미를 시켜 용뇌(龍腦)177) 를 사서 약을 만들어 상궁에게 주고, 또 은과 서찰을 주어 왕복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모른다고 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모른다. 너는 평생 동안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洋甲)의 일178) 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때 이미 이런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서양갑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언제나 이괄(李适)을 참(斬)한 자가 도리어 해(害)를 입은 일을 가지고 내가 고변(告變)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하니, 말하기를,
"네가 과연 문장(文章)을 논할 때 우연히 이 일을 언급하였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장세상(張世相)의 집에 가지 아니하였으냐? 민진원(閔鎭遠)의 집이 장가(張家)와 문을 마주하고 있으므로, 너의 동서(同婿)를 만날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숨고 피하며 왕래할 즈음에 맛돌이[唜石]를 데리고 가지 않았더냐? 그리고 네가 말하기를, ‘조송(趙松)에게 이우항(李宇恒)의 은을 보냈는데 조송이 덜어 먹을까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이헌(李瀗)이 그때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어 장세상에게 관곡(官穀)을 주자 돈 6백여 냥으로 바꾸어 주었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상집(李尙)이 은 4백 냥을 보내 오자 이헌의 모흠(耗欠)된 관조(官糶)의 수량에다 옮겨 썼는데, 이것을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집을 사는 일 때문에 장세상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이 집은 민판서(閔判書)의 집 앞에 있으므로, 이 말은 내가 또한 한 적이 있으나, 이헌이니 조송이니 은이니 관곡이니 하는 일은 맹랑한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내가 은 2백 50냥을 싸서 맛돌이를 데리고 안장에 싣고 찾아왔으므로 백망(白望)을 불러 주었었다. 그 뒤 2백 냥은 네가 김석경(金錫慶)에게 빌려 주었는데, 지금까지 갚지 못하고 있다."
하니, 말하기를,
"연동(蓮洞)의 집을 판 뒤에 김진상(金鎭商)의 집을 샀는데, 값이 본래 부족하였으므로 김석경에게 빌어서 쓴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조흡(趙洽)의 은 1천여 냥은 어디에 썼는가?"
하니, 말하기를,
"나의 친척에게 주었는데 정분(情分)은 없다."
하였다. 국청에서 군색하고 빠져 나가고자 꾸며대는 말이 많다 하여 형신(刑訊)하기를 청하였다. 두 차례 형문한 뒤 정인중(鄭潾重)의 초사(招辭)에 반문(盤問)할 단서가 있다 하여 형신을 정지하였다.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정인중의 초사에, ‘이천기·김용택이 은을 모아 내폐(內嬖)에게 두루 쓰는 일이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여 이맛살을 찌푸렸다.’고 하였는데, 만약 목호룡의 말이라면 매번 고한 것으로 핑계대겠지만, 정인중은 지극히 친밀한 교분(交分)인데도 공초한 바가 이와 같았으며, 심상길(沈尙吉)은 목호룡과 더불어 공초하기를, ‘돈 50냥과 은 1백 냥을 이천기에게 보냈다.’고 하였으며, 김용택(金龍澤) 또한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부조(扶助)로 실어 보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백망의 집에 모아둔 은자(銀子) 1천 3백여 냥과 돈 1백 40여 냥을 지금 이미 수색해 냈으니, 은을 모아 뇌물을 쓴 정상을 비록 엄휘(掩諱)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공초하기를,
"영평(永平)의 옥병 서원(玉屛書院)에 수리할 일이 있어 전라 병영(全羅兵營)에서 보낸 은 40냥을 김용택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백망은 김용택과 가장 친밀하였고 목호룡은 저와 가장 친밀하였는데, 정인중의 무리는 목호룡이 고변(告變)하였기 때문에 저에게도 반드시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정인중은 목호룡을 높여서 기이하다고 일컫고 영웅 호걸이라고 일컬으면서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말을 하였는데, 말이 이미 귀에 들어간 뒤에 갑자기 고변(告變)할 수가 없어서 인순(因循)하며 세월을 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목호룡이 이미 저와 더불어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반드시 저를 제거한 뒤에라야 발을 뻗을 수 있을 것이므로 이렇게 고변(告變)한 것이니, 그 정상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한 것은 진실로 죄가 같은 줄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말이란 스스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다시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바닥에 글자를 쓴 일은 그때 제가 압구정(狎鷗亭)에서 들어오자, 정인중이 말하기를, ‘어제 나와 이희지(李喜之)·백망이 무리가 덕우(德雨)179) 의 집에 모여 각각 손바닥에 글자를 썼는데, 백망이 손바닥에 쓴 글자가 지극히 망령되고 패리(悖理)하였다. 그리고 덕우(德雨)도 말하기를, 「나 또한 그 사람을 만난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그 음흉한 정절(情節)은 이미 자복(自服)하였지만, ‘지만(遲晩)’이란 두 글자는 유독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하여 형신(刑訊)을 더하여 6차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지만(遲晩)이란 말을 거역(拒逆)하고 경폐(徑斃)하였다. 김용택과 이천기는 김춘택(金春澤)에게 혹은 재종 형제(再從兄弟)가 되기도 하고 혹은 동생 남매(同生娚妹)가 되기도 하는데, 모두 이이명(李頤命)이 양육[卵育]하여 점염(黑染)180) 의 습관에 물들어 악역(惡逆)을 예삿일로 보았으니, 진실로 효경(梟獍)과 같은 이류(異類)이어서 교화(敎化)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경폐(徑斃)하였기 때문에 미처 정법(正法)하지 못하였으므로, 여정(輿情)이 분한(憤恨)해 하였다.
국청(鞫廳)의 위관(倭官) 최석항(崔錫恒)이 여러 금부 당상(禁堂上)·승지(承旨)·양사(兩司)를 거느리고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는 미처 결안(結案)하기 전에 경폐(徑斃)하였습니다. 노적(孥籍)181) 은 절로 율(律)에 의거함이 마땅하겠으나, 행형(行刑)하는 한 조항이 가장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시신(屍身)을 내어주는 것은 너무 관대하게 하는 잘못이고, 곧장 행형(行刑)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백망(白望)은 가장 큰 역적의 괴수가 되는데, 소급수(小急手)·대급수(大急手)를 담당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보검(寶劒)과 은화(銀貨) 또한 이미 수색해 내었는데, 이것은 곧 장물(贓物)이니 어찌 감히 발명(發明)하겠습니까마는, 지만(遲晩)을 취초(取招)하였으나, 시종일관 거역(拒逆)하다가 경폐(徑斃)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례(前例)로 본다면, 경신년182) 역옥(逆獄) 때 이태서(李台瑞)와 조성(趙䃏)은 비록 승복(承服)하지 않았지만, 선조(先朝)에서는 연좌(緣坐)의 율을 시행하였었습니다. 이천기는 수찰(手札)이 이미 포착되었으므로 비록 지만(遲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곧 자복(自服)한 것이니, 노적(孥籍)을 또한 마땅히 율에 의거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처리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백망·김용택·이천기 등은 비록 결안(結案)하지는 아니하였지만, 실정을 캐낸 문목(問目)이 이미 조보(朝報)183) 에 나왔으니, 중외(中外)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조성복(趙聖復)을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발락(發落)함이 없었다. 동의금(同義禁) 김일경(金一鏡)이 말하기를,
"삼수(三手)의 남은 음모가 조성복을 위하여 연차(聯箚)가 되었는데, 조성복이 지금까지도 드러누워 숨을 쉬고 있습니다. 주상께서 한결같이 윤허하지 않으심은 군하(群下)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그대로 따랐다. 박필몽이 또 정형익(鄭亨益)을 먼 곳에 귀양보내고 박필정(朴弼正)을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소유(疏儒) 허벽(許璧)을 먼 지방에 유배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상소한 유신을 논죄(論罪)하는 일은 이미 윤종(允從)을 받았는데, 어떤 곡절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언로(言路)를 가리고 막으며 소장(疏章)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을 결단코 태평한 기상(氣象)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일은 진실로 근거가 없었는데, 이제 또 한결같이 각하(却下)당하므로, 초야(草野)의 선비로서 심지어 소장을 태우고 시골로 내려가는 자까지 있습니다. 언로(言路)를 가리고 막는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하자, 승지 황이장(黃爾章)이 말하기를,
"허벽(許璧)의 상소는 신이 승정원(承政院)에 들어오지 아니하였을 때 있었습니다. 쓴 말이 어떠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승정원의 계사(啓辭)를 살펴보건대 소어(疏語)가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으니, 이 따위의 상소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심단이 말하기를,
"신의 말은 허벽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발락(發落)함이 없었다.
4월 14일 무진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이제(李濟)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국청 죄수(鞫廳罪囚)의 문서(文書)를 수탐(搜探)하여 봉납(封納)하는 것은 국사(鞫事)를 엄중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인 이희지(李喜之)를 잡아올 때 영암 군수(靈巖郡守) 문덕린(文德麟)은 중로(中路)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몇 장의 서찰(書札)을 덜어내려고 하였습니다. 비록 도사(都事)가 단호하게 거절함으로 인하여 끝내 내어주지는 않았지만, 문덕린이 몰래 이희지와 교통(交通)하고 그 은밀한 정상이 혹시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문서를 겁탈(劫奪)하려고 한 정상이 진실로 지극히 통완(通惋)하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자 봉사(軍資奉事) 김익량(金翼亮)은 본래 누락(漏落)된 내노(內奴)로서, 김춘택(金春澤) 형제를 의지하여 붙좇아 형적(形跡)이 괴상하고 비밀스러웠습니다. 김종서(金宗瑞)의 후손(後孫)이라고 사칭(詐稱)하여 외람되게 사적(仕籍)에 통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놀라고 분개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조성복의 일과 말단의 두 건의 일은 그대로 따랐다.
역적 심상길(沈尙吉)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이 공초(供招)하기를,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란 세 가지 일을 심상길은 정인중(鄭麟重) 등과 더불어 충분히 상의하여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알지 못하는 바가 없었고, 은(銀) 2백여 냥을 내어 독약(毒藥)을 쓸 것을 성사시키려고 도모하였습니다. 또 제가 고변(告變)할까 염려하여 심상길의 숙부인 전라 병사(全羅兵使) 심진(沈榗)의 감영(監營)에 보냈습니다."
하였는데, 국청(鞫廳)에서 이것을 문목(問目)으로 내었더니, 공사(供辭)에다 굳게 은휘(隱諱)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목호룡을 다시 추문(推問)하니, 대답하기를,
"여러 적(賊) 가운데 심상길도 또한 한 사람이었으니, 시해(弑害)를 모의한 일을 그가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은화(銀貨)에 이르러서는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제가 이천기(李天紀)의 서간(書簡)을 가지고 왕십리(往十里) 조흡(趙洽)의 정상(停喪)184) 하고 있는 곳으로 가다가 동대문(東大門) 안에서 심상길을 만나 같이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서간을 펴 보고는 같이 조흡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조흡을 데리고 서울집으로 들어왔는데, 조흡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저의 노새는 심상길이 타고 심상길의 말은 조흡이 타고 저는 걸어서 왔습니다. 먼저 심상길의 집에 도착하자 심상길이 은 1백 냥을 저에게 주었으며, 또 조흡의 거소(居所)로 가자 조흡이 은 3백 냥을 꺼낸 뒤 관상장이 박섬(朴暹)을 불러 저의 상(相)을 보게 하며, ‘이 사람은 장차 큰 일을 할 사람인데, 그 상(相)이 어떠하냐?’고 하니, 박섬이 ‘지극히 길(吉)하다.’ 하였으므로, 제가 은을 가지고 왔습니다. 백망(白望)이 심상길과 서로 만났을 때 저는 과연 만나지 아니하였으나, 이른바 백망·목호룡을 그가 항상 말하였으니, 어찌 백망을 모를 이치가 있겠으며 은을 낸 사람이 어찌 사용처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지 상궁(池尙宮) 등을 모른다는 말 또한 이치에 가깝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면질(面質)하자, 심상길이 말하기를,
"네가 독약(毒藥)을 쓰는 일을 한 번이라도 나에게 언급(言及)한 적이 있었느냐? 그리고 내가 일언반사(一言半辭)라도 독약을 쓰는 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었느냐?"
하니, 목호룡이 말하기를,
"독약을 쓰는 한 가지 사실은 은화(銀貨)에서 나왔다. 그대가 은을 내지 않았으냐? 그대가 은을 준 것은 틀림없지 않은가?"
하자, 말하기를,
"은을 준 것은 틀림없으나, 설령 은을 주었다 해도 은의 사용처는 한정이 없으니 내가 어찌 네가 장차 독약을 쓰는 데에 쓸 줄을 알았겠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독약을 쓰는 한 가지 사실은 적(賊) 가운데 이미 주모(主謀)한 자가 있었다. 너는 조흡(趙洽)을 통하여 이를 듣고서 공명(功名)을 이룰 기회라 생각하여 그 가운데 참여(參與)하였고, 이미 은을 내어 백망에게 주었으니, 똑같이 적(賊)이라 부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느냐? 너는 또 전라 병영(全羅兵營)에서 보내 온 부채 50자루를 이천기(李天紀)에게 보내어 지 상궁(池尙宮)에게 전해 준 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하니, 말하기를,
"네가 ‘은을 주었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나, ‘이천기에게 부채를 주었다.’고 한 것은 또한 묘맥(苗脈)185) 이 있다. 나는 단지 부채 몇 자루로 이천기의 요구에 응했던 것인데, 이천기가 보낸 곳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으며, 이것이 어찌 독약을 쓰는 데 참여하여 모의한 명백한 증거가 된단 말이냐? ‘행약(行藥)’이란 두 글자는 내가 진실로 꿈속에서조차 참여하여 듣지 못하였다. 나에게 죽을 죄가 있다면, 이런 말세(末世)를 당하여 교유(交遊)를 가리지 아니하고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의 무리와 서로 친하게 지내었으므로, 너에게 악역(惡逆)에 동참(同參)하였다고 고발당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요악(妖惡)한 무리들과 서로 사귄 죄이다. 오로지 너는 다만 밝히기만 하라. 내가 언제 어느 곳 누구의 집에서 며칠날 독약을 쓰는 모의에 참여(參與)하였더란 말이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항양(桁楊)186) 아래에서는 적(賊)의 실정(實情)을 쉽사리 털어놓게 될 것이니 어찌하여 나의 말을 기다리느냐?"
하니, 말하기를,
"은을 준 데에는 스스로 묘맥(苗脈)이 있다.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이 나에게 이르기를, ‘너의 숙부(叔父)는 관료(官路)에 차질(蹉跌)이 심하게 나서 만년에야 전라도 곤수(閫帥)가 되었으니, 또한 매우 가련하다. 어찌하여 평병(平兵)의 통수(統帥)가 될 계책을 쓰지 않는가?’ 하므로, 내가 ‘너희들은 자못 형세(形勢)가 있으니, 돌보아 준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용택의 무리가 이미 곤수(閫帥)의 자리를 주선하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무릇 그 요구하는 바에 오로지 힘을 다해 응하였던 것이니, 김용택·이천기 무리가 사용한 바를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이천기(李天紀)의 무리는 내가 고변(告變)할까 의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네가 고변(告變)할까 의심하며 말끝마다 반드시 그대의 팔자(八字)를 일컬었다. 국상(國喪) 뒤 내가 고변(告變)할까 의심하였으나, 나를 둘 만한 곳이 없자 나를 전라 병영(全羅兵營)에 보내면서 너의 종으로 하여금 데리고 가게 한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니냐?"
하니, 말하기를,
"이천기의 무리는 다만 집이 가까운 까닭에 비록 서로 친하였으나, 나와 교분(交分)이 얕은 것을 의심하여 언제나 겉으로 친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소홀하게 대접하였었다. 내가 뒤미처 교우(交遊)하며 그 권력(權力)을 의뢰하고자 한 것은 숙부(叔父)의 곤수(閫帥) 자리를 도모하기 위해서였으니, 또한 그 무리들의 일을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본래 그 무리들이 살과 뼈속 일을 알지 못하였으니, 비록 고변(告變)하고자 하더라도 쉽사리 할 수 있겠느냐? 그때 내가 너를 남쪽으로 내려보낸 것은 네가 이미 ‘강진(康津)에서 한 일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진(康津)은 곧 병영(兵營)이었고, 나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요구하였으므로, 내가 비록 따라서 해 주기는 하였지만, 김용택(金龍澤)의 무리가 너를 깊이 의심한 것과 네가 일부러 남쪽 병영으로 피하고자 한 것을 내가 어찌 곡절을 다 알 수 있었겠느냐?"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은화(銀貨)에 관한 한 조항을 숙부를 위해 벼슬을 구하려고 한 것으로 핑계대지만, 현저하게 가리고 덮은 자취가 있다 하여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형문을 네 차례 한 뒤에 또 목호룡과 면질시키자 말이 막히었고, 형문을 가하여 5차 제1도(度)에 이르러서야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국가의 병환(病患)이 바야흐로 위중하여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미처 차임(差任)하지 아니하였을 즈음에 이천기(李天紀)가 목호룡(睦虎龍)에게 편지를 부쳐 저에게 보내며 은자(銀子)를 요구하였는데, 그 편지에 ‘긴급하게 쓸 곳이 있으니, 은자 1백 냥을 마련해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내어 주었으니, 반드시 관직을 구하는 일에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후 김용택(金龍澤)·이천기의 무리에게 현저하게 은밀한 곳에 주선하는 기색이 있었는데, 은뿐만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든 부채를 따로 가려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또한 50자루를 주었습니다. 인하여 이천기의 집에 갔더니, 이천기가 말하기를, ‘그 부채를 죄다 봉(封)하여 지 상궁(池尙宮)의 집으로 보냈다.’고 하였는데, 그때 홍의인(洪義人)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제가 ‘평안 병사를 오래지 않아 마땅히 차출(差出)한다고 비로소 들었으므로, 은화를 구하여 그대들에게 주선해 주기를 요구한 것이다. 1백 냥도 사소한 재물이 아니니, 끝내 사실이 없다면 나의 목적한 뜻은 허망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 지난번의 은화는 과연 어느 곳에 썼느냐?’ 하였더니, 이천기가, ‘그 은은 간 곳이 있다. 백냥의 은은 새발의 피와 같으니, 다만 결국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제가 비로소 묻기를, ‘목호룡은 스스로 당대의 영웅이라고 자부(自負)하고, 그대들은 「시켜서 주선할 바가 있다.」고 하는데, 주선하는 일이란 무엇이냐?’ 하자, 이천기·김용택·홍의인이, ‘이른바 백망(白望)이란 자는 목호룡에 비하여 더욱 호걸이며, 풍신(風神) 또한 괴위(魁偉)한 장부(丈夫)이다. 또 궁중의 홍수(紅袖)와도 체결(締結)하지 아니함이 없다. 들으니 지 상궁(池尙宮)이란 자는 연로한 궁인(宮人)으로서 자못 권세(權勢)를 부린다고 한다. 만약 은화의 출처(出處)가 있으면 목호룡을 통하여 쓰기도 하고 또 백망을 통하여 쓰기도 할 것이니, 이 길이 매우 긴요하다.’ 하였습니다. 제가 ‘그대들이 쓰는 곳은 내가 어떤 경로로 들어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숙부를 위해 벼슬을 도모하는 계책은 언제나 허술함이 많다. 너희들이 어떠한 것을 크게 주선하든지 1백 냥이란 많은 재물을 보람없이 쓸 수 있느냐?’ 하였더니, 이천기가, ‘백망은 당대의 호걸이니, 네가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어떠하냐?’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예로부터 천인배(賤人輩)들이 궁금(宮禁)과 교통(交通)하면 일을 그르치지 아니한 경우가 적었다. 목호룡은 내가 이미 한 번 만나보고 서로 알고 있으나, 또 백망을 만나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천기의 무리는 경상가(卿相家)의 자제(子弟)로서 권력이 자못 있으니, 혹은 은화(銀貨)나 기물(器物)을 얻어 쓰기가 어렵지 아니할 것인데, 제가 백 냥 이외에 어찌 은자(銀子)를 더 주었겠습니까? 이미 지 상궁(池尙宮)에게 썼다면, 비록 벼슬을 도모하려고 내어 주었다 하더라도 이 무리들이 궁금(宮禁)과 결탁하는 데 썼으니, 저는 은을 내어 결탁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 한 가지 조항은 지만(遲晩)함이 적실합니다."
하였다. 심상길은 젊어서부터 시명(詩名)이 있었으나, 사람됨이 약삭빠르고 아첨을 잘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불길(不吉)할 것임을 알았는데, 이때에 와서 마침내 역적으로 죽었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헌의(獻議)하기를,
"이번에 흉역배(凶逆輩)들의 정절(情節)이 낭자하게 죄다 드러났습니다.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는 이미 승복하여 역률(逆律)을 시행하였으니 진실로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역적 백망(白望)은 비록 승복하지 않았으나 칼과 은화가 실제로 있었고, 궐내(闕內)의 동정(動靜)을 탐문한 정상 또한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며, 이른바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가 모두 그의 몸에 달려 있었으니, 그 정범(情犯)을 논하건대 곧 역적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흉악함이 특히 심하여 형장(刑杖)을 참다가 경폐(徑斃)하여 정법(正法)할 수 없었으니, 더욱 지극히 절통(絶痛)합니다. 마땅히 육시(戮尸)의 법을 시행하여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어야 하겠지마는, 다만 법의 뜻으로 논하건대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두려우니, 삼사 성상께서 재결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의논한 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수상(首相)의 헌의(獻議)는 윗 조항에서는 육시(戮屍)하여 분노를 풀 것을 청하였고, 아랫 조항에서는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단정(斷定)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래에서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할 것이 있어서 감히 품(稟)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윗 조항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여선장(呂善長)·집의(執義) 서명우(徐命遇)·정언 구명규(具命奎)가 정인중(鄭麟重)에 대해 의율(議律)할 즈음에 쟁집(爭執)하지 못하여 공의(公議)에 비난을 받았다고 하며 서로 잇따라 인피(引避)하였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체직(遞職)시킬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조성복(趙聖復)을 잡아 가두었다.
국청(鞫廳)에서 홍의인(洪義人)과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을 잡아가두었다.
4월 15일 기사
효령전(孝寧殿)의 망전(望奠)을 왕세제(王世弟)가 섭행(聶行)하였다.
3월부터 지금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覔山)·한강(漢江)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국청(鞫廳)에서 이상건(李尙建)·이헌(李瀗) 등을 잡아 가두었다. 이상건의 또 다른 이름은 이태화(李泰華)이고, 이헌은 이우항(李宇恒)의 아들이다.
심상길(沈尙吉)의 아들 심재(沈載)를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4월 16일 경오
밤 1경(一更)·2경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김용택(金龍澤)의 아들 김대재(金大材)가 달아났으므로,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수색하여 잡게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춘업(春業)·하백(河白)·학손(鶴孫) 등을 잡아 가두었는데, 모두 백망(白望)의 노비(奴婢)로서 은화(銀貨)가 들고 날 때 부리던 자들이었다.
4월 17일 신미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밤 1경(一更)에 목성(木星)이 구령성(鉤鈴星)을 범하였다. 3경에 달무리하였다.
역적 이희지(李喜之)가 물고(物故)되었다. 잡혀온 초기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정유년187) 5월 지평현(砥平縣)의 선산(先山)에 갔다가 봉안역(奉安驛)에서 목호룡을 만나 보았는데, 바야흐로 이중환(李重煥)과 묏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잠깐 그 사람을 보았더니, 눈초리가 번뜩이고 말씨가 들떠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자연히 좋지 않게 여겨 모든 일을 비록 그가 묻더라도 대충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해 동안 묏자리를 보러 다녔고, 이 사람이 이미 지관(地官)이라 일컬었으므로 대략 몇 마디 말을 나누고 헤어졌으니, 함흥(咸興)·태백(太白)에 대해 문답(問答)하였다는 것은 절대 맹랑하며, ‘낙일시(落日時)’는 원래 외며 설명한 일이 없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또한 사람을 보내어 서로 묻거나 나귀를 보내어 맞아온 일이 없었으며, 그가 스스로 찾아왔으나 사양하고 만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이에 시(詩)를 예물로 삼아 만나보기를 청하므로, 마침내 숙부 집의헐소청(歇所廳)188) 에서 잠시 얼굴을 대하고 헤어졌으며, 이 이후로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미치지 아니한 지 지금 4, 5년이 되었습니다. 백가(白哥)와 교결(交結)하고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는 등의 말은 모두 듣지 못할 말이며, 흉악한 일을 하려 했다는 것과 교조(矯詔)를 초(草)하였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꿈에도 미치지 아니한 바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것을 가지고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였더니, 대답하기를,
"한 번 봉안역(奉安驛)에서 서로 만난 뒤 기해년189) ·경자년190) 두 해 사이에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의 집과 김보택(金普澤)·이기지(李器之)의 집에서 서로 만난 것이 몇 번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 서로 패도(佩刀)를 바꾸어 한 잔 술의 반을 갈라 김용택(金龍澤)의 집에서 즐거이 마신 정상은 여러 적(賊)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은휘(隱諱)하겠습니까?"
하였다. 면질(面質)하게 되자, 목호룡이 말하기를,
"덕우(德雨)의 집에서 날이 저물자 등(燈)을 밝히고 김용택(金龍澤)·백망(白望) 그리고 내가 너와 같이 앉아 있었을 때 네가 거짓 조서(詔書)의 초본(草本)을 꺼내 보였는데, 그 종이는 세 번 접혀 있었고, ‘불곡첨위(不穀忝位)’라느니, ‘세자(世子)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런데 다 읽기 전에 사안(士安)이 들어오자, 다른 사람인 줄 잘못 의심하여 주머니 속에 넣었다."
하니, 말하기를,
"이는 어느 해 몇 월 며칠인가?"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니, 물을 필요가 없다."
하니, 말하기를,
"이 물건은 어디에 쓰려던 것이며, 장차 누구에게 주려 하였는가?"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너희 무리들이 백망을 시켜 은을 주어 홍수(紅袖)들과 많이 결탁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쓰지 못하였겠느냐?"
하니, 말하기를,
"폐립(廢立)이란 어찌 대사(大事)가 아니겠느냐? 그런데 나인[內人]에게 주어 장차 어느 곳에 쓰려고 했다는 것이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국가(國家)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하여 정신을 잃고 알지 못할 때 지 상궁(池尙宮)이 안에서 조서(詔書)를 내리면, 장세상(張世相)이 밖에서 봉행(奉行)하는 일이다. 네가 이런 계획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냐? 일개 환관(宦官)과 일개 궁인(宮人)이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매우 총명하여 다른 일은 상세히 기억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이 조서(昭書)는 어찌하여 죄다 기억하지 못하고 유독 열 몇 자만 기억하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다만 덕양군(德讓君) 등의 말이 긴요한 말이 되기 때문에 지금 기억할 수 있다."
하니, 말하기를,
"사안(士安)이 들어오자 감추었다고 하는데, 그 사촌(四寸)을 속이면서 너에게 보여 주었단 말이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대가 덕우(德雨)의 집에 앉아 있을 때 나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힘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덕우(德雨)가 보낸 은 30냥 40냥은 나의 물건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네가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선복(船卜)191) 이 도착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많이 돕겠다.’고 하므로 네가 말하기를, ‘부자(富者) 박창윤(朴昌潤)이 황해 수사(黃海水使)가 되자, 어떤 사람이 논박(論駁)하므로, 박창윤이 「만약 이 사람을 제거한다면 마땅히 많은 선조(船租)를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홍용조(洪龍祚)를 사주하여 박창윤을 위해 분을 풀어 주게 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선조(船租)가 마땅히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말하기를,
"이는 갑자기 만들어 낸 말이다. 너를 만난 일이 없었으니, 무슨 주고받은 말이 있었겠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또 갑자기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 은밀(隱密)한 일을 남인(南人) 박정(朴正)에게 누설하였는가?’ 하므로, 내가 화를 내며, ‘박가(朴哥)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너는 이 말을 어디에서 들었느냐?’라고 하니, 네가 웃으며, ‘장사방(張四方)이 점을 쳐 보고는 네가 박정(朴正)에게 누설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말해본 것일 뿐이다.’ 하였다. 내가 또 꾸짖기를, ‘귀신을 믿으면 망하는 법이다. 너는 반드시 큰 화(禍)를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말하기를,
"네가 나의 ‘낙일시(落日詩)’를 보았다고 하는데, 외어 전해 주었는가? 써서 보여 주었는가?"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외어 전해 주지 아니하였느냐? ‘바야흐로 반쯤 떨어진 것을 어찌할 수 없네.[無可奈何方半墜]’라고 한 것이 너의 시(詩)가 아니냐? 국가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할 때 시(詩)의 뜻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흉참(凶慘)하지 아니한가?"
하니, 말하기를,
"그 시(詩)는 계사년192) 에 지은 것으로 정유년193) 에 외어 전하였으니, 어떻게 뜻이 있다 할 것이며, 어떻게 흉참(凶慘)하다 할 것인가? 네가 재차 연동(蓮洞)으로 찾아와 만났을 때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사람이 삼남(三南)의 변장(邊將)이 되고자 하여 인삼(人蔘) 두 근을 가지고 이것을 뇌물로 쓰고자 하는데, 만약 그 소원을 이루어 준다면 마땅히 길지(吉地)를 얻어 바치겠다.’고 하였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 북도(北道) 사람의 인삼과 은(銀)을 봉(封)하여 너에게 주었더니, 네가 즉시 받았다. 그때 이건명(李健命)이 병판(兵判)이 되고 김운택(金雲澤)이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판서(判書)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참판에게 말하였으나 일이 또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내가 인삼과 은을 되돌려 받아 그 사람에게 주었다."
하니, 말하기를,
"그때 즉시 물리치고 받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너를 무상(無狀)하다고 생각하여 절교하였다. 그리고 봉안역(奉安驛)에서 서로 만났을 때 네가 ‘안심사(安心寺) 뒤에 명당(明堂)이 있고 장단(長湍) 심복사(心福寺) 뒤에 명당이 있는데, 안심사(安心寺)의 산은 마땅히 정가(鄭家)의 기물(器物)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지극히 위태로왔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너를 흉인(凶人)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나는 함흥(咸興)과 태백산(太白山)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없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김보택(金普澤)의 집에 있을 때 김용택(金龍澤)이 갔다가 돌아와 나에게 말하기를, ‘사복(士復)이 언문(諺文)으로 된 가사(歌詞)를 지어 대궐(大闕)에 유입(流入)시켜 요동시킬 계책을 삼고자 하는데, 등서(謄書)를 끝내지 못하였다. 네가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이 가사(歌詞)를 가지고 급히 구야(久也)에게 전해주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내가 김용택(金龍澤)의 집에서 잤는데, 잠자리에서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가사(歌詞)가 이미 도착하였었다. 남인(南人)을 욕하고 헐뜯는 말이 아님이 없었으며, 은연중에 성상(聖上)을 요동시키기를 꾀한 말이 있었다. 내가 그 가사를 백망(白望)에게 전해 주었는데, 네가 어찌 기망(欺罔)할 수 있단 말이냐?"
하니, 말하기를,
"나는 애초에 가사(歌詞)를 지어낸 일이 없었다. 네가 계원(啓元)·덕우(德雨) 두 사람을 증거로 삼으니, 두 사람에게 물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이번에 고변(告變)한 여러 적(賊) 가운데 김민택(金民澤)·김성행(金省行)·서덕수(徐德修)는 면목(面目)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나머지 너희 무리들은 정미(情味)가 난숙(爛熟)하였고 만나서 술을 마신 것이 그 몇 번인지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 만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과연 사리에 맞는 말이냐? 네가 내 집에 왔을 때 비록 깊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네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돈이 많은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한 몸의 즐거움은 음식(飮食)과 여색(女色)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너는 한만(閑漫)한 시구(詩句)를 지어서 이로움이 있는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는 반드시 부여(扶餘)로 나를 찾아오라.’ 하였는데, 이 또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냐?"
하니, 말하기를,
"나는 너의 집에 간 일이 없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희지(李喜之)는 한 마디 변명하는 증거가 없이 대충 「보지 아니하였다」,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또 근거없는 한만(閑漫)한 말로 갈등(葛藤)을 일으켜 의란(疑亂)하고 현혹시키는 계책으로 삼으니, 그 정상(情狀)이 지극히 간교하고 사악하다.’고 하여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형문이 제7차에 이르자, 공초(供招)하기를,
"정인중(鄭麟重)은 평상시에 서로 친하게 지냈고, 김용택(金龍澤)은 매부(妹夫)이며, 이천기(李天紀)는 친구이고, 이기지(李器之)는 사촌(四寸)입니다. 조흡(趙洽)은 몇 차례 만나보았고, 심상길(沈尙吉)은 평소에 서로 친하게 지내지는 아니하였으나 김용택의 집으로 나가 모였을 때 한 번 만났으며 그 뒤에 또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의인(洪義人)·홍철인(洪哲人)은 작년 겨울에 이기지의 집에서 만났습니다. 세 건(件)의 일이 어떠한 일인데, 한두 번의 면분(面分)이 있는 사람과 여러 차례 서로 의논하겠습니까? 낙일시(落日詩)를 외어 전한 일의 여부(與否)는 애초에 미처 기억이 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처음의 공초에서 저뢰(抵賴)194) 한 것이고, 목호룡(睦虎龍)이 외어 전한 뒤에야 비로소 곧 기억할 수 있었으므로 제가 지은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지은 ‘속영정행(續永貞行)’을 나래(拿來)할 때 중로(中路)에서 빼앗으려고 했던 정상은 이와 같은 때에 사람들의 눈에 구애됨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정행(永貞行)’195) 은 곧 당(唐)나라 순종(順宗) 때의 일로서 순종이 비록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나, 풍음(風瘖)을 앓아 말을 하지 못하여 우 소용(牛昭容) 무리가 권세를 휘두른 것에 지나지 아니하였던 것이었으니, 이번에 의작(擬作)한 것은 애초부터 성궁(聖躬)을 무함(誣啗)하고 헐뜯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이희지는 여러 차례 엄중하게 형신(刑訊)하였으나, 시종 저뢰(抵賴)하고 있습니다. 또 가도사(假都事)가 수색하여 바친 문서(文書) 안에 속영정시(續永貞詩)가 있었는데, 그 뜻을 살펴보건대 자못 지극히 음흉하였으며 성조(聖朝)를 무함하고 헐뜯었으니, 더욱 통완(痛惋)한 데 관계됩니다. 청컨대 이것을 문목(問目)에 첨가해 넣어 다시 엄중하게 형신을 가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여덟 차례의 형추(刑推)에 영정행(永貞行)은 곧 이천기(李天紀)가 지은 것이라고 납초(納招)하고, 그 나머지는 불복(不服)하였다. 영정행시(永貞行詩)에 이르기를,
"신축년196) 12월 초하루에
명릉(明陵)197) 의 침랑(寢郞)198) 이 빈 창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문득 선왕(先王)께서 보좌(寶座)에 앉으심을 바라보니,
우위(羽衞)199) 가 엄숙하게 좌우에 늘어서 있었네.
대신(大臣)을 전해 부르고 또 잇따라 재촉하니,
중사(中使)는 바람처럼 소기가 입에 있었네.
다만 몇 사람 엎어지고 자빠지며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희미하여 누가 누군지 알기도 어려웠네.
옥음(玉音)이 종소리처럼 전계(殿階)를 울리면서,
종팽(宗祊)이 장차 넘어지려 하는데 경(卿)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제공(諸公)들 물러나 어디로 가려는가?
얼수(孽竪)가 역절질하면 크게 죽음이 마땅하다.
전(殿) 위와 전 아래에 불빛은 대낮 같은데,
위사(衞士)들이 일제히 소리치고 천령(千靈)이 부르짖는다.
순식간에 머리 둘이 문 밖에 내걸리니,
곁에 있는 사람들 황문(黃門)200) 의 머리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네.
나라에 큰 변고(變故) 있은 지 이레가 지나자.
당화(黨禍)가 갑자기 한(漢)나라북시(北寺)201) 와 같아졌네.
만황(蠻荒)202) ·궁발(窮髮)203) 의 도깨비들 기뻐하고,
역엄(逆閹)·군간(群奸)이 뱀·지렁이처럼 서로 얽혀 있네.
밤에 조서(詔書) 지어 아침에 벼슬 제수(除授)하니,
옛날에 들었던 영정(永貞)의 일이 오늘날 다시 있도다.
여우 울고 올빼미 지저귀듯 하여 못하는 일 없어서
번개불 번쩍이듯 날뛰며 다시 지주(指嗾)하네.
긴 무지개 여러 날 태양을 꿰뚫는데,
덕성(德星) 뒤섞여 남두(南斗)를 의지하고,
학가(鶴駕)가 창황하게 문을 나오려고 하니,
슬픈 조서(詔書) 세 번 내려 성모(聖母) 위해 울었도다.
궁위(宮闈)의 일 비밀스러워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듣건대 급변(急變)은 주액(肘腋)에서 생긴다 하네.
강성한 세력은 산처럼 타올라 위(魏)에 객(客)이 된 것204) 보다 더하다.
뿌리는 이미 깊어져 힘으로 취하기 어려운데,
하루 저녁에 몰아내니, 어찌 그리도 신속한가?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한 일인가? 하늘이 그렇게 시킨 일이네.
넋이 달하나 감히 독기(毒氣)를 부리지 못하니,
군색하게 몰림에 마치 신명(神明)이 지키는 듯하도다.
취미(翠眉) 궁녀(宮女)가 세수도 화장도 아니한 채
향백(香帛)으로 머리를 싸고 울면서 뛰어 나오는데,
순식간에 천둥 번개 한꺼번에 탕석(蕩析)하니,
선령(先靈)의 몰래 도우심 진실로 우연한 일 아니었네.
꼭뚝각시 줄 끊어지자 진면목이 드러나고,
도깨비들 햇살 비치자 으숙한 소굴을 찾는도다.
환관(宦官)의 화(禍) 예전부터 나라를 망치고 말았음은
한(漢)나라·당(唐)나라 앞에 있고 황명(皇明)이 뒤에 있네.
천토(天討)가 이처럼 성대한 것은 아직 듣지 못했으니,
종사(宗社)는 아아! 억만년 오래 지속되리.
어느 집 여자 무당 새 귀신에게 기도하리오.
봄밤 거리에 자리 깔고 질장구[缶] 두드리며 노래하네."
하였다. 이번 역절(逆節)에서 이희지는 모주(謀主)가 되는데, 형장(刑杖)을 참다가 경폐(徑斃)하여 정형(正刑)할 수 없었으므로 여정(輿情)이 이를 분개하였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노적(孥籍)을 행하였다.
박내정(朴乃貞)을 집의(執義)로, 이진순(李眞淳)·조원명(趙遠命)을 정언(正言)으로, 이진망(李眞望)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강현(姜鋧)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강현은 사람됨이 아첨을 잘하고 행기(行己)가 공정하지 못하여 겉으로는 공검(恭儉)한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실제로 탐오(貪汚)하였다. 일찍이 당인(黨人)들에게 미움을 받아 죄로 여러 해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끌어다 청반(淸班)에 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1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강현은 사람됨이 아첨을 잘하고 행기(行己)가 공정하지 못하여 겉으로는 공검(恭儉)한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실제로 탐오(貪汚)하였다. 일찍이 당인(黨人)들에게 미움을 받아 죄로 여러 해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끌어다 청반(淸班)에 둔 것이다."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과 김치룡(金致龍)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김치룡이 여러 신하들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여 외관(外官)이 즉시 부름을 받고 나오지 못하는 폐단을 아뢰었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때 유명응(兪命凝)이 성주 목사(星州牧使)에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이배(移拜)되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간 지 한 달 남짓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여 유명응이 감영(監營)에 나아가지 못한 채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므로, 새 목사 또한 부임(赴任)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헌납(獻納) 윤회(尹會)·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청대(詩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사상이 상주문(上奏文)을 읽고, 합계(合啓)하기를,
"사흉(四凶)의 죄가 주벌(誅罰)을 감당할수 있겠습니까? 몰래 적(賊) 조성복(趙聖復)을 사주하여 시험해 보는 상소를 불쑥 올렸고, 갑자기 조정에서 호소하던 일을 중지하여 겸해 협박하고 위협하는 글을 올렸으니, 흉모(凶謀)·역절(逆節)이 남김없이 죄다 드러났습니다. 변서(變書)를 성상께서 듣기에 이르러서는 흉괴(凶魁)의 자지(子枝)205) 가 얼키설키 관련되었으며,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으로써 한다는 배포(排布)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유비(劉備)의 유무(有無)는 문답할 즈음에 뜻을 붙인 것이고, 손바닥에 글자를 쓴 것은 은밀한 곳에서 약속을 맺은 것이었는데, 적(賊) 백망(白望)이 쓴 ‘양(養)’자는 곧 이이명(李頤命)의 자(字)였으니, 몰래 추대(推戴)하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천기(李天紀)가 깨닫고서 웃음을 터뜨리고 정인중(鄭麟重)이 감히 결안(結案)에다 실토(實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습니다. 이 적(賊)은 이사명(李師命)의 아우로 나라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던 것이니, 도행 역시(倒行逆施)206) 하는 것은 곧 그가 평소에 쌓아온 바로서, 30년 동안 빚어온 화기(禍機)를 가지고 오늘날 찬탈(簒奪)하려는 계책을 삼았던 것입니다. 어찌 한 시각이나 드러누워 숨을 쉬게 하여 종사(宗社)에 헤아릴 수 없는 화(禍)를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이명을 참형(斬刑)에 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박필몽·윤회·이경열 등이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잇따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이사상이 또 상주문을 읽고 말하기를,
"김창집(金昌集)은 본래 매우 간특(奸慝)한 사람으로서 무릇 국본(國本)을 동요시키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는 데 관계된 계책에 힘을 다하여 주장하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이번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긴요하게 나오는 자들은 자손(子孫)이 아니면 곧 인친(姻親)이나 문객(門客)이었으니, 음흉한 정절(情節)이 저절로 서로 관통(貫通)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아들 김제겸(金濟謙)은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할까 미리 염려하여 이홍술(李弘述)을 몰래 사주해서 〈목호룡을〉 박살(撲殺)하여 입을 다물게 할 계책을 삼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불궤(不軌)를 도모한 정상은 비록 가리어 숨기려 할지라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정인중이 어떠한 흉역(凶逆)입니까? 그런데도 낙점(落點)을 아끼시던 날 억지로 승천(陞遷)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그들이 역모(逆謀)의 정절을 같이하고 뜻을 다하여 취허(吹噓)207) 한 정상은 많은 사람이 가리키는 바이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 적(賊)이 부범(負犯)한 것을 논하건대 고묘(告廟)를 힘껏 저지하고 차자(箚子)로 절목(節目)을 청한 것 외에도 일마다 용서하기 어려운 악역(惡逆)이 아닌 것이 없으니, 하루라도 살아 숨쉬는 것을 용납한다면, 반드시 하루나마 종사(宗社)에 근심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김창집을 정형(正刑)하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을 잇따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경열이 상주문을 읽고 말하기를,
"이건명(李健命)은 이이명(李頤命)과 이사명(李師命)의 종제(從弟)로서 김창집(金昌集)의 혈당(血黨)인데, 항상 원한을 품고 딴마음을 몰래 쌓아 왔으며, 삼흉(三凶)과 마음을 같이하여 정절(情節)이 치밀하였습니다. 지난 겨울의 예사롭지 않은 하교(下敎)는 오늘날 신하된 자라면 누군들 피를 뿌리고 울음을 삼키며 구제하여 바로잡을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건명은 유독 어떤 심장(心腸)을 가졌는지 전지(傳旨)를 거두기를 청한 데 대한 원한을 품고는 예봉을 옮겨 급히 공격하고, 여러 재신(宰臣)들의 항장(抗章)에 분노하여 제멋대로 꾸짖어 욕하였으며, 차자를 올려 절목(節目)을 청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하였습니다. 지난번 주청사(奏請使)가 되었을 즈음에는 ‘양잉(兩媵)’이란 말을 지어내어 무욕(誣辱)이 성궁(聖躬)에 미쳤으니, 임금을 속인 부도(不道)한 죄는 진실로 이미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족당(族黨)·인아(姻婭)가 이번에 또 역모(逆謀)에 긴요하게 나왔습니다. 더욱이 평지수(平地手)를 주장한 적(賊)은 가까이 아들과 조카에게서 나왔고,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추대(推戴)하려는 계책은 사촌 형제를 넘지 아니하였으니, 모역(謀逆)과 찬탈(簒奪)은 자연히 그 한 가문(家門) 내의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그가 감히 ‘홀로 범한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전후의 죄를 논하건대 진실로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역적입니다. 조태채(趙泰采)는 음휼(陰譎)하고 남활(濫猾)하며 권세(權勢)를 탐하여 즐기는데, 지난해 삼흉(三凶)과 틈이 벌어짐을 조금 보였으나, 청도(淸途)·현질(顯秩)로써 그 아들 조관빈(趙觀彬)을 유혹하니, 마침내 삼흉(三凶)가 한편이 되어 치밀하게 투합(投合)하고는 도리어 군부(君父)를 버렸습니다. 지난번에 역적 조성복(趙聖復)의 투소(投疏)로 갑자기 비상한 하교(下敎)가 있게 되자, 진신(搢紳)과 여대(輿儓)208) 가 달려가 울부짖으며 반한(反汗)209) 하기를 바랐는데, 조태채는 권사(權辭)로 자주 농간(弄奸)을 부려 여러 재신(宰臣)들을 눈앞에서 속여서 조정(朝廷)에서 호소하는 것을 준엄하게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밤을 틈타 차자(箚子)를 올려 절목(節目)을 정할 것을 청하였으니, 음흉한 실정과 반역(反逆)의 정상을 삼흉(三凶)에다 비교해 보건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자입니다. 더욱이 이번 흉역(凶逆)의 변괴(變怪)가 이미 주액(肘腋)에서 나와 관련된 무리들이 혈탕(血黨)이 아님이 없으니, 조태채만 홀로 어찌 하루라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건명·조태채를 안율(按律)하여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윤종(允從)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사상이 다시 읽고 합계(合啓)하고 여러 신하들이 각각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임금이 여전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지금 위망(危亡)이 조석(朝夕)에 박두해 있는데, 신(臣) 등이 교목 세신(喬木世臣)210) 으로서 나라가 망한 뒤 어찌 차마 구차하게 살겠습니까? 오늘은 죽기를 기약(期約)하였으니, 비록 꼬박 밤을 새워서라도 준청(準請)을 얻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힘써 다투었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이경열이 전계(前啓)를 진달하며 홍우전(洪禹傳)을 삭판(削版)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신계(新啓)에 대략 이르기를,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李天紀)는 이미 모두 승복(承服)하였으니, 역률(逆律)을 시행함은 왕법(王法)에 있어서 당연하므로, 대신(大臣)들이 수의(收議)하면서 논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역적 백망(白望)은 미처 승복(承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두 가지 조항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역적에게 경중(輕重)이 있다고 한 것은 아니었고, 성상의 처분도 이에 윗 조항으로 시행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세 시신(尸身)을 모두 거열형(車裂刑)211) 에 처해야 함을 다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백망만 홀로 정형(正刑)하고, 김용택·이천기는 도리어 육시(戮尸)를 더하지 아니하여 왕장(王章)212) 이 편벽되게 폐지되었으므로, 여의(輿議)가 모두 격분해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김용택과 이천기를 아울러 곧 육시(戮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박희진(朴熙晉)이 말하기를,
"그때 윗 조항에 의거하여 시행하라는 하교가 명백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들이 상세히 살피지 못하여 지금까지 거행하지 못한 채 시신(尸身)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백망의 예(例)에 의하여 육시(戮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홍술(李弘述)이 육현(陸玄)을 박살(撲殺)한 정절(情節)이 죄다 드러났습니다. 지금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로 보건대 여러 적배(賊輩)들이 모역(謀逆)한 절차를 목호룡이 참여해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이홍술이 그가 상변(上變)할 것을 의심하고, 여러 적들과 서로 의논하여 장살(杖殺)해서 입을 막을 것을 기필하였으나, 이천기가 힘써 주선함으로 인하여 계획이 마침내 정지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홍술이 애초에 역모에 간섭하지 않았다면, 목호룡의 상변(上變)을 자기가 무슨 절실하게 염려할 바가 있다고 흉도(凶徒)와 마음을 같이하여 반드시 베어서 제거(除去)함으로써 그 입을 열 길을 끊으려 하였겠습니까? 그가 병권(兵權)을 잡고 군흉(群凶)과 체결(締結)하여 음흉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책을 관통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지난날 비망기(備忘記) 중에 ‘몰래 불측(不測)함을 품었다.’는 하교(下敎)가 이에 이르러 더욱 징험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악역(惡逆)을 저지른 무리는 결코 금오(金吾)에 맡겨 등한(等閑)하게 안치(按治)할 수 없으니, 청컨대 이홍술을 국청(鞫廳)으로 옮기고 여러 적(賊)들과 함께 일체(一體)로 엄중하게 국문하여 사정을 캐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홍철인(洪哲人)의 이름이 고변서(告變書)에 나온 날 금오랑(金吾郞)이 즉시 그 집에 달려갔더니, 홍언도(洪彦度)가 감히 은닉할 계책을 내어 바야흐로 홍의인(洪義人)의 적소(謫所)에 갔다고 일컬으면서 방자하게 기만하고 왕명(王命)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오랑(金吾郞)이 명천(明川)까지 가기에 이르렀었는데, 홍철인은 그 집에 몰래 숨어 있으면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나와 흉당(凶黨)과 교통(交通)하며 난만(爛熳)하게 모의하였습니다. 시일이 오래 된 뒤에야 비로소 자현(自現)213) 하였으니, 그 정상이 절절이 흉패(凶悖)합니다. 망명(亡命)에 관한 한 조항을 문목(問目) 가운데 첨가해 넣고, 엄중하게 형신(刑訊)하여 정상을 캐낼 것이며, 그 아비 홍언도(洪彦度) 또한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국(拿鞫)하여 엄하게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여러 적들이 승복한 뒤 미처 행형(行刑)하기도 전에 일시에 경폐(徑斃)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는 있지 아니한 일입니다. 지난번 백망(白望)이 담을 넘은 것과 현덕명(玄德明)이 스스로 목을 찌른 것은 모두 수졸(守卒)이 동정(同情)한 소치입니다. 이것을 이미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였으므로, 맡아 지키는 무리들이 징계되어 두려워 하는 바가 없는 것이며, 이번에 세 죄수가 같은 날 경폐(徑斃)한 것도 의심을 부른 단서가 없지 아니합니다. 이처럼 국사(鞫事)가 한창 베풀어지고 죄수가 감옥에 가득한 날을 당하여 별도로 엄하게 막고 징려(懲勵)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 당시의 구료관(救療官) 및 해당되는 군졸(軍卒)을 수금(囚禁)하여 구핵(究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잇따라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인중이 승복한 뒤 다만 실정(實情)을 안 율(律)만 쓰고 노륙(孥戮)의 법을 쓰지 아니하였으니, 신은 적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대저 실정(實情)을 안다는 것은 그 모의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 실정만을 아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인중은 역모(逆謀)가 낭자하여 손바닥에 글자를 쓰고 독약을 쓰기로 한 정절(情節)이 일맥상통한데도 지금 곧 억지로 실정을 아는 죄과에만 두었으니, 실형(失刑)이 이보다 클 수가 없습니다. 능히 쟁집(爭執)하지 못한 여러 대간(臺諫)이 이미 모두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으니, 공의(公議)의 엄격함을 대개 볼 수 있습니다. 수노 적산(收孥籍産)214) 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으니, 청컨대 모역 죄인(謀逆罪人) 정인중을 한결같이 이천기·김용택 등의 예(例)에 의거하여 흔쾌하게 감률(勘律)해서 왕법(王法)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김제겸(金濟謙)·김민택(金民澤)·이기지(李器之)는 모두 흉얼(凶孽)의 집안 자손[子枝]으로서 친당(親黨)과 서로 연결하여 권세의 기세(氣勢)가 대단해서 생살(生殺)의 권한을 잡고 있는데, 그 무리들의 모역한 정절(情節)을 목호룡이 참여해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상변(上變)할 것을 염려하여 이홍술과 모의하고는 반드시 박살(撲殺)하여 입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비록 이천기가 이헌(李瀗)에게 보냄으로 인하여 일이 드디어 정지될 수 있었지만, 흉악한 일을 행한 정절은 이에 이르러 숨기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김민택이 은을 모으고 모의에 참여했다는 말이 이미 옥안(獄案)에 드러났고, ‘말마다 반드시 치중(致仲)을 일컬었고, 일마다 반드시 치중에게 물었다.’는 말이 목호룡의 초사(招辭)에 낭자한데, 치중(致仲)은 김민택의 자(字)입니다. 그 정범(情犯)을 논하건대 실로 그 무리의 괴수가 됩니다. 이기지는 이미 잡아다 가두었으니, 청컨대 김제겸·김민택을 잡아와서 이기지와 일체로 엄하게 국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적(賊) 조성복(趙聖復)의 한 상소가 진실로 연차(聯箚)의 효시(嚆矢)가 되어 안팎에서 화응(和應)하여 천위(天位)를 동요시켰으니, 죄역(罪逆)이 차고 넘쳐 종사(宗社)에 관계되었습니다. 지금 대역(大逆)을 바야흐로 토죄(討罪)하는 날을 당하여 그 정절이 관련된 자가 저절로 드러날 수 있고, 흉모(凶謀)를 몰래 사주한 자 또한 캐낼 수 있으니, 국문(鞫問)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단지 대옥(大獄)이 완결되지 아니한데 구애받아 성명(成命)이 아직도 지체되어 간와(奸囮)215) 가 깨어지지 아니하니, 여정(輿情)이 더욱 격분(激憤)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죄인 조성복(趙聖復)을 빨리 국청(鞫廳)에 명하시어 안핵(按覈)해서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사상이 말하기를,
"다른 계사(啓辭)를 모두 윤종(允從)하셨으나,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의 일을 반드시 윤허하신 뒤에라야 왕법(王法)이 펴질 수 있고, 옥체(獄體)가 완전해질 것입니다."
하고, 박필몽 등이 또한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사상이 다시 사흉(四凶)에 대한 계사를 진달하고, 박필몽(朴弼夢)이 말하기를,
"백망(白望) 등을 사흉에 비한다면 지엽(枝葉)이 됩니다. 지금 근본(根本)을 버려두고 지엽(枝葉)을 다스리니, 왕법(王法)이 어찌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차 국가의 끝없는 화(禍)가 될 것인데 성상께서 어찌 지난(持難)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윤회(尹會)·이경열(李景說)이 서로 잇따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오려고 하자, 박필몽(朴弼夢)이 성난 목소리로 크게 말하기를,
"오늘은 비록 밤을 지새더라도 준청(準請)받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습니다."
하고, 인하여 또 번갈아 말하면서 힘써 간쟁(諫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박희진(朴熙晉)이 말하기를,
"사흉(四凶)을 이르시는 것입니까?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만을 이르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이이명·김창집의 일은 이미 윤허 받았으나, 이건명·조태채의 일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이사명 등이 다시 일체로 윤종(允從)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이이명이란 대역(大逆)을 잡아올 때 단지 금오랑(金吾郞)만을 보낸다면 지극히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선전관(宣傳官)을 아울러 보내되, 표신(標信)을 가지고 길을 따라 군사를 동원시켜 호송(護送)해 와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이사상이 말하기를,
"바깥의 의논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적(賊)은 나포(拿捕)에 응할지 기필할 수 없으니, 선전관을 아울러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괄(李适)의 변사(變事)를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신하가 되어 추대(推戴)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평상시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도 도리어 찬탈(簒奪)하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지금은 도마 위의 고기가 되었으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환란(患難)을 막는 도리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선전관에게 표신을 주어 내려보낸 뒤에라야 군사를 동원시켜 호송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파하고 나왔는데, 유시(酉時) 초에 입시(入侍)하여 물러나오자, 밤이 거의 삼경(三更)이나 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이명은 곧 고(故) 명상(名相)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다. 문학(文學)에 뛰어난데다가 또 재지(才智)가 있었으므로 젊어서 중망(重望)을 지고 검은 머리에 태사(台司)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남활(濫猾)하고 음밀(陰密)하여 겉으로는 골계(滑稽)216) 한 듯하였지만, 속으로는 실로 흉휼(凶譎)하였다. 그 형 이사명(李師命)이 죄로 죽은 뒤에 한쪽편 사람들이 문득 나라를 원망하여 불령(不逞)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여 평소 위태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정유년217) 가을 독대(獨對)한 뒤 사람들이 말이 더욱 왁자해지며 부도(不道)한 것으로 지목하였으나, 주상(主上)께서 대리(代理)하여 드디어 즉위하셨을 때까지 나라에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하여, 이희지(李喜之) 등 여러 역적들이 모두 이이명의 자질(子姪)과 문객(門客)으로부터 나오고, 흉모(凶謀)·역절(逆節)이 낭자하여 죄다 드러나자, 온 나라의 여정(輿情)이 모두 분완(憤惋)함을 품었다. 다만 이이명이 역절(逆節)에 직접 참여한 자취가 미처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므로, 모두 처참(處斬)하는 것은 너무 급작스럽다고 여겼으나, 대신(大臣)이 사사(賜死)를 청하였다. 그 후 여러 적들의 초사가 더욱 다시 흉참(凶慘)하고, 주장하고 지휘한 것이 대부분 그의 집에서 나왔으니, 삼척(三尺)의 법으로 결단한다면 사사(賜死)도 또 실형(失刑)이 될 것이다. 김창집(金昌集)은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고, 선정신(先正臣) 김상헌(金尙憲)의 증손(曾孫)인데,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어리석고 경솔했으며 학식(學識)이 전혀 없었다. 김수항이 죄도 없이 기사년218) 에 죽은 뒤로 유언(遺言)이 있다고 일컬으면서 현관요직(顯官要職)을 두루 거치며 권세를 탐하고, 성색(聲色)으로 호사를 누리며 조금도 화(禍)를 입은 집 자제(子弟)로 자처(自處)함이 없이 제멋대로 하여 꺼림이 없었다. 게다가 그 아들 김제겸(金濟謙)은 이익을 좋아하며 교만하고 패리(悖理)한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조만간에 실패를 당할 것을 알았지만, 그는 바야흐로 태연스레 있으며 깨닫지 못하였다. 정유년(丁酉年)에 대리(代理)한 뒤 사람들이 고묘(告廟)를 청하자 김창집이 저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목호룡이 상변(上變)하자 그 손자 김성행(金省行) 또한 고발한 가운데 있었고, 장세상(張世相)과 교결(交結)한 정상이 밝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었다. 양사(兩司)에서 드디어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였으나, 대신(大臣)의 말로 참작하여 사사(賜死)하였다. 대저 양흉(兩凶)은 관계됨이 지극히 무거워 죄를 용서할 수 없었으나, 다만 조정의 처분이 능히 공명 정대(公明正大)하지 못하였음이 한스러웠다. 처음에 양흉(兩凶)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나왔으니, 오로지 잡아다 국문(鞫問)하되, 그 사증(辭證)이 모두 밝혀지기를 기다렸다가 법에 의거하여 사시(肆市)219) 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버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공정한 마음으로 선처(善處)하여 결코 사사로운 뜻을 뒤섞어서는 안되는데, 지금 이에 국청(鞫廳)에서 잡아오기를 청하여 역절(逆節)의 정상이 죄다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두세 대관(臺官)이 밤을 틈타 청대(請對)하여 공동(恐動) 협박함으로써 곧장 극률(極律)을 베풀었으니, 이미 법의(法意)를 잃은 것이다. 대신(大臣)이 청한 바 사사(賜死)도 또한 역적을 다스리는 마땅한 율(律)이 아니므로, 사체(事體)가 전도(顚倒)되고 거조(擧措)가 망란(忙亂)하여 성급하게 전제(翦除)220) 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11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205] 자지(子枝) : 자제(子弟).[註 206] 도행 역시(倒行逆施) : 도리를 거슬러 일을 행함.[註 207] 취허(吹噓) : 추천함.[註 208] 여대(輿儓) : 하인(下人).[註 209] 반한(反汗) : 임금이 내린 명령을 취소하거나 고치는 일.[註 210] 교목 세신(喬木世臣) : 여러 세대(世代)를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運命)을 같이하는 신하.[註 211] 거열형(車裂刑) : 극형(極刑)의 하나.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서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註 212] 왕장(王章) : 왕법.[註 213] 자현(自現) : 자수.[註 214] 수노 적산(收孥籍産) : 그 처자를 연좌시켜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註 215] 간와(奸囮) : 간인(奸人)의 소굴.[註 216] 골계(滑稽) : 남을 웃기려고 우스갯 소리를 함.[註 217] 정유년 : 1717 숙종 43년.[註 218]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219] 사시(肆市) : 죄인을 처형하여 그 시체를 저자에 놓아 두는 것.[註 220] 전제(翦除) : 전초제근(翦草除根)의 줄임. 풀을 베어내고 뿌리를 뽑아 발본색원(發本塞源)하는 것.
사신은 논한다. "이이명은 곧 고(故) 명상(名相)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다. 문학(文學)에 뛰어난데다가 또 재지(才智)가 있었으므로 젊어서 중망(重望)을 지고 검은 머리에 태사(台司)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남활(濫猾)하고 음밀(陰密)하여 겉으로는 골계(滑稽)216) 한 듯하였지만, 속으로는 실로 흉휼(凶譎)하였다. 그 형 이사명(李師命)이 죄로 죽은 뒤에 한쪽편 사람들이 문득 나라를 원망하여 불령(不逞)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여 평소 위태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정유년217) 가을 독대(獨對)한 뒤 사람들이 말이 더욱 왁자해지며 부도(不道)한 것으로 지목하였으나, 주상(主上)께서 대리(代理)하여 드디어 즉위하셨을 때까지 나라에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하여, 이희지(李喜之) 등 여러 역적들이 모두 이이명의 자질(子姪)과 문객(門客)으로부터 나오고, 흉모(凶謀)·역절(逆節)이 낭자하여 죄다 드러나자, 온 나라의 여정(輿情)이 모두 분완(憤惋)함을 품었다. 다만 이이명이 역절(逆節)에 직접 참여한 자취가 미처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므로, 모두 처참(處斬)하는 것은 너무 급작스럽다고 여겼으나, 대신(大臣)이 사사(賜死)를 청하였다. 그 후 여러 적들의 초사가 더욱 다시 흉참(凶慘)하고, 주장하고 지휘한 것이 대부분 그의 집에서 나왔으니, 삼척(三尺)의 법으로 결단한다면 사사(賜死)도 또 실형(失刑)이 될 것이다. 김창집(金昌集)은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고, 선정신(先正臣) 김상헌(金尙憲)의 증손(曾孫)인데,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우며 어리석고 경솔했으며 학식(學識)이 전혀 없었다. 김수항이 죄도 없이 기사년218) 에 죽은 뒤로 유언(遺言)이 있다고 일컬으면서 현관요직(顯官要職)을 두루 거치며 권세를 탐하고, 성색(聲色)으로 호사를 누리며 조금도 화(禍)를 입은 집 자제(子弟)로 자처(自處)함이 없이 제멋대로 하여 꺼림이 없었다. 게다가 그 아들 김제겸(金濟謙)은 이익을 좋아하며 교만하고 패리(悖理)한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조만간에 실패를 당할 것을 알았지만, 그는 바야흐로 태연스레 있으며 깨닫지 못하였다. 정유년(丁酉年)에 대리(代理)한 뒤 사람들이 고묘(告廟)를 청하자 김창집이 저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목호룡이 상변(上變)하자 그 손자 김성행(金省行) 또한 고발한 가운데 있었고, 장세상(張世相)과 교결(交結)한 정상이 밝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었다. 양사(兩司)에서 드디어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였으나, 대신(大臣)의 말로 참작하여 사사(賜死)하였다. 대저 양흉(兩凶)은 관계됨이 지극히 무거워 죄를 용서할 수 없었으나, 다만 조정의 처분이 능히 공명 정대(公明正大)하지 못하였음이 한스러웠다. 처음에 양흉(兩凶)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나왔으니, 오로지 잡아다 국문(鞫問)하되, 그 사증(辭證)이 모두 밝혀지기를 기다렸다가 법에 의거하여 사시(肆市)219) 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버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공정한 마음으로 선처(善處)하여 결코 사사로운 뜻을 뒤섞어서는 안되는데, 지금 이에 국청(鞫廳)에서 잡아오기를 청하여 역절(逆節)의 정상이 죄다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두세 대관(臺官)이 밤을 틈타 청대(請對)하여 공동(恐動) 협박함으로써 곧장 극률(極律)을 베풀었으니, 이미 법의(法意)를 잃은 것이다. 대신(大臣)이 청한 바 사사(賜死)도 또한 역적을 다스리는 마땅한 율(律)이 아니므로, 사체(事體)가 전도(顚倒)되고 거조(擧措)가 망란(忙亂)하여 성급하게 전제(翦除)220) 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의금부 죄인(義禁府罪人) 현덕명(玄德明)과 김진석(金震錫) 등을 국청(鞫廳)으로 옮겨 가두었다.
4월 18일 임신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처참(處斬)·정형(正刑)하라는 명(命)을 환수(還收)하였다. 이어 나국(拿鞫)하여 정상을 알아낸 뒤에 처단(處斷)하라고 하였으니,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와 우상(右相)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진달한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두 사람의 죄상(罪狀)은 지금 논할 만한 것이 없는데, 나국(拿鞫)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곧장 정형(正刑)하게 하였으니, 실로 법(法) 밖의 일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데, 어찌 법을 벗어나 살인(殺人)할 수 있겠습니까? 이이명이 여러 적(賊)들의 초사(招辭)에서 나왔고, 손바닥에 글자를 쓴 일을 정인중(鄭麟重) 또한 이미 승복(承服)하였으나, 그 당시 이이명은 오랫동안 약원(藥院)에 직숙(直宿)하고 있었습니다. 무상(無狀)한 자제(子弟)들이 비류(匪類)와 체결(締結)하여 이런 흉역(凶逆)한 일을 한 것이니, 이이명이 알았거나 몰랐거나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닙니다. 국청에서는 사단(事端)이 그 사람에게 미치기를 기다린 연후에 바야흐로 나국(拿鞫)을 청하려고 하였으므로, 아직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그 법이 있기 때문인데, 법을 벗어나 곧장 처참(處斬)하는 것은 3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며, 이번의 처분은 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신이 어찌 이사람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애석함을 가지겠습니까? 육시(戮屍)에 관해서 수의(收議)할 때 신 또한 법을 가지고 말했던 것은 대개 이 점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최석항은 말하기를,
"역적 백망(白望)이 손바닥에 쓴 ‘양(養)’자는 곧 이이명의 자(字)입니다. 이것이 비록 변서(變書)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글자를 쓴 일로 나국(拿鞫)을 청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국옥(鞫獄)이 수습된 뒤에 진달하여 처리하려고 했었는데, 대계(臺啓)가 먼저 나왔습니다. 계사(啓辭) 가운데 있는 김창집의 문객(門客)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 자손으로 말한다면 ‘김제겸(金濟謙)이 이홍술(李弘述)을 사주했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에 나오지 않았으며, 김성행(金省行)의 일도 역옥(逆獄)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무릇 역옥은 필서(匹庶)에 대해서도 반드시 나국하여 실정을 캐낸 후에야 결안(結案)하여 처참(處斬)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모두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니, 어찌 경솔하게 처단(處斷)할 수 있겠습니까? 나문(拿問)한 뒤 사실이 과연 이와 같다면, 결안 취초(結案取招)221) 하여 명백하게 전형(典刑)을 드러내 보이더라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정범(情犯)이 어떠한지를 묻지 아니하고 자복(自服)하는 원사(爰辭)를 기다리지도 아니한 채 곧장 반역(反逆)의 극형(極刑)을 가하려 하니, 신은 이것이 무슨 법례(法例)이며 무슨 거조(擧措)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형정(刑政)은 나라의 대사(大事)인데,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와 같은 3백 년 동안 없던 일이 있을 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 없으므로, 감히 이처럼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국옥(鞫獄)의 일로 논계(論啓)한 것이 많은데, 신이 국옥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어찌 소홀하게 한 잘못이 없겠습니까? 대언(臺言)의 공척(攻斥)이 이와 같아 소신(小臣)이 죄를 입었으니,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치(按治)하게 한 뒤에야 국체(鞫體)를 바야흐로 엄정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조태구가 말하기를,
"소신(小臣)은 최석항과 더불어 같이 국사(鞫事)를 안치(按治)하였는데, 최석항의 인혐(引嫌)와 이와 같으니, 신이 어찌 홀로 태연하게 있을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모두 죄를 입어 공의(公議)에 사과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헌납(獻納) 윤회(尹會)·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사상이 말하기를,
"신 등이 이이명(李頤命)을 처참(處斬)하고 김창집(金昌集)을 정형(正刑)하는 일로 논계(論啓)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는데, 오늘 대신(大臣)이 청대(請對)하자 그 진달한 바로 인하여 도로 정지하셨다고 합니다. 원정(原情)을 결안(結案)하여 나래(拿來)한 뒤 일이 만약 ‘죄상이 암매(暗昧)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대신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라고 말하지만, 역적의 정상이 낭자한 사람을 어떻게 구신(舊臣)이라 하여 용납하고 비호할 수 있겠습니까? 혼조(昏朝)의 정인홍(鄭仁弘)이 어찌 일찍이 삼사(三事)222) 를 거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계해년223) 뒤 곧바로 정형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3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겠습니까? 대신이 진달한 바는 대단히 사실과 어긋납니다."
하고, 박필몽은 말하기를,
"대신이 이른바 실정을 캐낸 뒤에 정법(正法)한다는 것은 보통 격례(格例)로 말한다면 어찌 고집하는 바가 없겠습니까마는, 역적(逆賊)이 하나만이 아니니, 안치(按治)하는 방도 또한 어찌 한 가지 예만 있겠습니까? 양흉(兩凶)은 비록 이번의 역옥(逆獄)이 없다 할지라도 죄는 진실로 베어야 마땅한데, 역옥이 일어난 뒤로 흉악한 일을 행한 정절(情節)이 십분 낭자해졌습니다. 이이명으로 말한다면, 손바닥에 쓴 ‘양(養)’자나 ‘세상에 유비(劉備)가 없다.’고 한 것은 그 뜻이 추대(推戴)하는 데 있었으니, 그것이 역적의 정상이 됨을 어찌 추핵하기를 기다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흉적(凶賊)은 완악하고 잔인하며 반드시 평문(平問)224) 하는 아래에서는 승복하지 않을 것이니, 나문(拿問)한들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이며, 만약 승복하지 않는다면 장차 그 억울함을 말하고 버려 둘 것입니까? 또 거병(擧兵)·범궐(犯闕)하는 역적이 있어도 또한 나국(拿鞫)을 기다린 후에야 벨 수 있다는 것입니까? 추대하여 찬탈(簒奪)하는 것이 거병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 아들 이기지(李器之)가 지금 바야흐로 형신(刑訊)을 받고 있어 엄휘(掩諱)할 수가 없는데, 무슨 다시 그에게 물을 만한 숨은 정상이 있겠습니까? 대신은 3백 년 동안 없던 바라고 말하지만, 이 역적은 다만 3백 년 동안 있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벽(開闢)한 이후로 없던 대역(大逆)입니다. 어찌 보통 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대신은 또, ‘이이명이 그때 약원(藥院)에 있었으니 자제(子弟)의 일을 어찌 반드시 관계하여 알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이는 은연중에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 애초부터 역심(逆心)이 없었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있었다면 비록 멀리 절도(絶島)에 있었다 하더라도 또한 더불어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자질(子姪)과 친당(親黨)이 같이 모의한 일을 어찌 약원에 있었다 하여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명주(明主)는 오로지 이치로 정탈(定奪)할 수 있으니, 대신의 말이 비록 중대하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그 사리(事理)를 보아 처리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굽혀 따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실로 개연(慨然)해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경열은 말하기를,
"어제 대계(臺啓)를 윤종(允從)하신 것은 실로 종사(宗社)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대신의 말로 인하여 즉시 환수(還收)하셨으니, 억울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대역(大逆)을 어찌 보통 격례(格例)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말은 결코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고, 윤회는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처참(處斬)과 정형(正刑)을 청한 것은 사사로운 분노가 있어서가 아니며 의리(義理)에 있어서 실로 적당하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앞서의 성명(成命)에 의거하시어 사람들의 말을 꺾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사상이 말하기를,
"하교(下敎)가 이와 같으니, 역적을 다스림은 장차 이로부터 해이해질 것이므로 국체(國體)가 망극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대신의 한때의 깊이 생각하지 아니한 말에 중점(重點)을 돌리시고, 삼사(三司)의 공론(公論)을 도리어 어기시는 것입니까?"
하고, 박필몽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대신(臺臣)의 말을 들으시면 대신의 말을 따르시고, 대신(大臣)의 말을 들으시면 대신의 말을 따르시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사리(事理)에 있어서 능히 자세히 분간하고 깨달으시지 못하여 그런 것이입니다.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을 논할 것 없이 오로지 사리를 깊이 궁구(窮究)하시어 그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것을 판단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양흉(兩凶)은 비록 이번의 옥사(獄事)가 없었다 하더라도 죄가 이미 차고 넘쳤으며, 안율(按律)하자는 청(請)이 지금에 와서 비로소 나온 것이 아니니, 그들이 어찌 만에 하나라도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大臣)은 역옥(逆獄)이 일어난 뒤에 비로소 대계(臺啓)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적을 제거하지 아니한다면, 종사(宗社)의 위망(危亡)이 조석(朝夕)에 닥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신 등의 천 마디 말에 성상께서는 단지 ‘번거롭게 하지 말라.[勿煩]’는 두 글자만 내리시니, 성의(聖意)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억울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가부를 분별(分別)하시어 하교(下敎)하시는 바가 있다면, 비록 윤종(允從)하지 않으시더라도 신 등이 환히 알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사상이 이건명을 안율(按律)하자는 계사(啓辭)를 읽어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박필몽이 말하기를,
"작년에 성상께서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반한(反汗)하시자, 신하된 자로서 누가 기뻐 춤추지 아니하였겠습니까마는, 그들이 감히 청대(請對)한 중신(重臣)에게 에한(恚恨)225) 하여 봉입(捧入)한 승선(承宣)을 공격하여 배척하였으니, 다만 이 한가지 일에서도 역심(逆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사(奉使)하였을 때에는 ‘양잉(兩媵)’ 등의 말을 까닭없이 지어내어 무욕(誣辱)이 성궁(聖躬)에 미쳤으니, 한(漢)나라 법으로 논한다면 마땅히 ‘대불경(大不敬)226) 의 주형(誅刑)’에 의하여 복주(伏誅)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즉시 윤종하지 않으셨으므로, 역당(逆黨)이 기세를 올려 흉악한 계획을 느닷없이 발생시켰습니다. 나라의 위란(危亂)은 실로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결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사상이 또 조태채를 안율(按律)하자는 계사(啓辭)를 읽어 아뢰고, 박필몽이 말하기를,
"조태채는 애초에 화심(禍心)이 없어서 대략 삼흉(三凶)과 다름이 있었으나, 마침내는 확실하게 투합(投合)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관망(觀望)하는 무리였으니, 삼흉(三凶)의 흉모(凶謀)를 그가 어찌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 계책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종사(宗社)는 비록 망극하겠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회를 틈타 합세(合勢)했던 것이니, 흉참(凶慘)함이 지극합니다. 어찌 천지 사이에 숨을 쉬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따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또 답하지 아니하였다. 이경열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승지(承旨) 조경명(趙景命)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이 아뢴 조태채의 일을 발락(發落)받지 못했으므로, 대신(臺臣)들이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와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대계(臺啓)로 국옥(鞫獄)을 논한 일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다 하여 국청(鞫廳)에 참석하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를 아뢰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개유하기를,
"조금도 편안하지 못한 단서가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국청에 참석하라."
하였다.
동지 겸 주청 부사(冬至兼奏請副使) 윤양래(尹陽來)와 서장관(書狀官) 유척기(兪拓基)가 들어왔는데, 상사(上使) 이건명(李健命)은 죄를 입어 복명(復命)하지 못하였다. 봉전(封典)이 순조롭게 성사되었으므로 중외(中外)에서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4월 19일 계유
국청(鞫廳)에서 이홍술(李弘述)을 잡아 가두었다.
4월 20일 갑술
호조(戶曹)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삼남(三南) 산군(山郡)의 전삼세(田三稅)227) 의 작목(作木)228) ·관작지(官作紙)229) 는 원래 인정(人情)230) 이니, 군자감(軍資監)에 주지 말고 모두 본조(本曹)에 소속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호조에서 전세목(田稅木)231) 을 봉납(捧納)할 때 매 1동(同)마다 1냥씩을 하리(下吏)의 인정(人情)으로 삼았다가, 중간에 군자감 창속(倉屬)에 소속시켰는데, 이때에 와서 호조에서 도로 돌려받은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정채(情債)는 치세(治世)의 일이 아니고 서리(胥吏)가 용사(用事)하면서부터 처음으로 이러한 폐단을 연 것이다. 국가의 정공(正供)도 오히려 백성을 수척하게 할까 염려하는데, 이런 과외(科外)의 구실을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해 내겠는가? 선배(先輩)가 이른바 ‘우리 나라는 서리(胥吏) 때문에 망한다.’고 한 것은 대개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관장(官長)이 된 자가 폐단을 혁파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또 각기 그 소속을 위해 이처럼 서로 다투고 징렴(徵斂)하도록 인도하니,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14면
【분류】재정-전세(田稅) / 재정-잡세(雜稅) / 군사-병참(兵站) / 역사-편사(編史)
[註 227] 전삼세(田三稅) : 전지(田地)를 근거로 하여 부과하는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호포(戶布)의 삼세(三稅).[註 228] 작목(作木) : 전세(田稅)를 받을 때 곡식 대신에 무명으로 환산하여 받는 것. 또는 그 무명.[註 229] 관작지(官作紙) : 조세(租稅)에 붙여 받는 세(稅)의 한 가지로, 관(官)에서 문서(文書)를 만드는 데 쓰이는 종이값으로 받아들이는 것.[註 230] 인정(人情) : 관리에게 주는 뇌물 따위.[註 231] 전세목(田稅木) : 작목(作木).
사신은 논한다. "정채(情債)는 치세(治世)의 일이 아니고 서리(胥吏)가 용사(用事)하면서부터 처음으로 이러한 폐단을 연 것이다. 국가의 정공(正供)도 오히려 백성을 수척하게 할까 염려하는데, 이런 과외(科外)의 구실을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해 내겠는가? 선배(先輩)가 이른바 ‘우리 나라는 서리(胥吏) 때문에 망한다.’고 한 것은 대개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관장(官長)이 된 자가 폐단을 혁파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또 각기 그 소속을 위해 이처럼 서로 다투고 징렴(徵斂)하도록 인도하니,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하다."
국청(鞫廳)에서 일정(一貞)을 잡아 가두었는데, 장세상(張世相)의 계집종이다.
수인(囚人) 조흡(趙洽)이 서덕수(徐德修)·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 등을 고발(告發)하였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이 각각 은화(銀貨)를 냈는데 도합 2천여 냥의 은자(銀子)를 담당하여 백망(白望)·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에게 내어주면서 독약(毒藥)을 쓰는 일을 도모하게 하였으며, 그 후 각기 3백 냥의 은자(銀子)를 내어 저에게 주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조흡이 이 때문에 잡혀왔으나, 공사(供辭)에 굳이 숨겼었다. 국청(鞫廳)에서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니, 대답하기를,
"은화 1천 2백 냥을 김용택과 이천기에게 그가 이미 내어준 뒤에 8백 냥을 그가 백망에게 주는 것을 제가 눈으로 보았으며, 그가 또 일찍이 전에 모역(謀逆)하는 말을 또한 죄다 저에게 털어놓았으니, 그가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은휘(隱諱)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십리(往十里)에서 그를 데리고 같이 도성(都城) 안으로 들어올 때 심상길(沈尙吉)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였으며, 은 3백 냥은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다. 면질(面質)시키자, 목호룡이 조흡을 향하여 말하기를,
"옛말에 ‘늙은 소를 죽이되 시체로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물며 국군(國君)의 경우이겠느냐? 너희 부자(父子)는 그 악(惡)을 같이 이루었고, 전후(前後)의 모역(謀逆)이 모두 너희 집안에서 나왔는데, 너는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느냐?"
하니, 조흡이 말하기를,
"두 세대(世代)의 모역한 자취를 낱낱이 말해 보아라."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은 2천여 냥을 담당하여 스스로 내었고, 악역(惡逆)을 모의한 것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말하기를,
"2천여 냥을 어찌 목양(睦良)에게 주었을 리가 있겠는가? 목양이란 김용택이 항상 목호룡을 목양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나 또한 알고 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너는 사사로이 나에게 준 것이 아니다. 모역을 하려고 먼저 덕우(德雨)에게 주고 그 다음에 계원(啓元)에게 주었는데, 그 수량이 1천 2백 냥에 꽉 찬 뒤 네가 덕우에게, ‘나는 무슨 액(厄)이 있길래 다만 은만 내고 일의 통한 것은 보지 못하니 옳겠는가?’라고 하였더니, 덕우가 부득이하여 백망을 데리고 와 너와 서로 만나게 하였다. 그리고 덕우·백망 및 내가 함께 너의 집으로 가서 너에게 1천 냥을 내라고 독촉하자, 네가 서피구(鼠皮裘)를 벗고 열쇠를 가지고 누각(樓閣)에 올라가서 은 4백 냥을 꺼내 주었으니, 이것은 기해년232) 겨울의 일이었다. 그 후에 네가 또 은 2백 냥을 유삼(油衫)233) 주머니에 넣어 나에게 주었으니, 이것은 경자년234) 봄 무렵의 일이었다. 후에 또 1백 50냥을 백망에게 주었는데, 네가 왕십리(往十里)에서 정상(停喪)하였을 때 내가 심길보(沈吉輔)와 함께 가서 너를 데리고 들어왔다. 너는 또 은 3백 냥을 나에게 주었는데, 관상장이 박섬(朴暹)에게 내 관상을 보게 하고는 보냈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말하기를,
"은화(銀貨)에 관한 말은 절대로 근거가 없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또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을 때 김성절(金盛節)을 데리고 가서 각기소리(角其所里) 여덟 개를 만들고 그 안에다 기화(奇貨)를 가득 담아 김해(金海) 김순(金洵)에게 보내어 내통(內通)할 계제(階梯)로 삼았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고,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되었을 때에는 이우항(李宇恒)과 더불어 힘을 같이하여 천여 냥이란 많은 은을 내어서 조송(趙松)에게 주며 장세상(張世相)과 통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이번에 백망에게 들어간 은이 거의 2천 5백 냥에 이르는데, 또 드러난 효험이 있지 않게 된다면 나의 일은 헛수고[徒勞]라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말하기를,
"내 아버지가 비록 무상(無狀)하여 김순(金洵)에게 은을 주었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김성절(金盛節)이 아직 살아 있으니, 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송은 이우항의 전갈(傳喝)을 와서 전하였을 때 한 번 보았고, 그 후에는 다시 서로 본 일이 없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또 말하기를,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은 2백 냥을 가져다 계원(啓元)에게 주었는데, 그 사람이 끝내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이이명(李頤命)의 이름으로 경조(京兆)에 정소(呈訴)하겠다는 뜻으로 공갈하였다. 그래서 계원(啓元)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용천 부사(龍川府使) 한 자리를 얻어내기를 도모하다가, 은을 가지고 도로 갚으려는 계책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 사람의 성명(姓名)을 직고(直告)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니, 말하기를,
"용천 부사 임욱(任勗)은 내가 얼굴도 알지 못하고, 원래 이런 일이 없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백망을 너 또한 알지 못하느냐?"
하니, 말하기를,
"백망은 이미 서로 알고 있다고 고(告)하였다."
하였다. 국청에서 조흡이 한 가지도 변명(卞明)하지 못하고, 또한 어긋나는 단서가 있다 하여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형문이 3차에 이르러 위차(威次)를 베푸니, 발고(發告)하기를,
"지난해 겨울부터 일종의 역당(逆黨)의 정절(情節)을 탐지(探知)하고 그때 즉시 고발하려고 하였는데, 흉당(凶黨)이 조정에 가득하고 화염(禍焰)이 바야흐로 치성(熾盛)하였습니다. 조중우(趙重遇)를 박살(撲殺)한 일로 보건대 제가 한 마디라도 입 밖에 낸다면 다만 제 한 몸이 참혹하게 흉화(凶禍)를 입을 뿐 아니라 장차 종사(宗社)와 국가(國家)에 화(禍)를 초래(招來)할 것이므로, 두려워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도 애매한 일로 이런 악명(惡名)을 썼으므로, 몸은 비록 죽더라도 충의(忠義)의 귀신이 되고자 하여 이번에 상변(上變)한 것입니다.
독약을 쓰는 것은 스스로 해당되는 사람이 있는데, 서덕수(徐德修)·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 세 사람이 주관하였습니다. 먼저 동궁(東宮)의 별실(別室)에 시험한 뒤 서덕수가 심상길(沈尙吉)을 찾아왔는데, 그때 심상길이 마침 저의 집에 와 있었으므로, 서덕수가 뒤따라 와서 심상길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어제 동궁 별실의 상(喪)이 난 것을 아느냐?’고 하자, 심상길이 ‘나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병이 없었는데도 갑자기 죽은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서덕수가 ‘그 약이 신통한 효험이 있어 다른 곳에 다시 시험해 보려고 하는데, 반드시 천여 금(金)이 있고 난 뒤에야 시험해 볼 수가 있겠다. 전라 병영(全羅兵營)에서 만약 오는 것이 있으면 꼭 나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심상길이 ‘미처 오지 않았다.’ 하자, 서덕수가, ‘그렇다면 우선 다른 데서 빌어서 주고, 오기를 기다려 다시 갚는 것이 어떠하냐? 나는 바야흐로 김민택(金民澤)과 김성행(金省行)의 집으로 가서 서로 의논한 뒤 그대로 장세상(張世相)을 만나볼 계획이다.’ 하였습니다. 심상길이 말하기를, ‘김민택의 집에 가거든 전에 보낸 1백 냥의 은자(銀子)와 대호지(大戶紙) 15권(卷) 부채 30자루를 우선 추이(推移)해서 쓰도록 해라. 그러나 장세상이 만약 입번(入番)했다면 네가 어떻게 만나볼 수 있겠느냐?’고 하니, 서덕수가, ‘궐문(闕門) 밖에 내관(內官)을 불러 만나는 곳이 있으니, 정우관(鄭宇寬)이라 이름하는 자로 하여금 불러내게 한다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우관이란 자는 곧 김운택(金雲澤)의 가신(家臣)으로서 서덕수·김창도·이정식의 무리와 결탁하여 동당(同黨)이 되었는데, 그 무리들이 언제나 ‘정령(鄭令)’이라고 일컬었으니, 당상관(堂上官)인 듯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식전(食前)에 김창도와 이정식이 저를 찾아와, ‘어제 사민(士敏)이 찾아왔었는가?’ 하였는데, 사민이란 곧 서덕수의 자(字)입니다. 제가, ‘과연 왔었다.’고 하자, 김창도와 이정식이, ‘너 또한 동궁 별실(別室)의 상(喪)이 난 것을 알고 있느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손님이 있어 시끄러웠으므로 눈짓으로 나오게 하자, 두 사람이 중문(中門) 안에 서서 말하기를, ‘이미 효험을 보았으니 조 상인(趙喪人)도 또한 서로 도와줄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큰 화(禍)가 장차 닥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큰 화가 비록 생긴다 하더라도 너희들의 대신(大臣)이 죽을 것이고, 나에게는 조금도 해(害)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좋은 일이 있을지라도 너희들의 대신이 있다. 두세 대신의 집에서 은을 모은다면 천금(千金)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냐?’고 하였더니, 두 사람이, ‘힘이 다하여 어쩔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홍술(李弘述)의 집에 가서 요구하지 않는가?’ 하자, 두 사람이 ‘이홍술의 집에 가서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았다.’고 하므로, 제가, ‘어찌하여 윤각(尹慤)의 집에는 찾아가 구하지 않느냐? 윤각은 좌상(左相)의 힘을 의지하여 벼슬이 병참(兵參)·총융사(摠戎使)에 이르렀으니, 어찌 은 천 냥을 아끼겠느냐?’ 하였더니, 김창도가, ‘이기지(李器之)의 사환(使喚)으로서 윤각을 찾아가 물었더니, 단지 3백 냥만 주었으므로 1백 냥은 이기지의 이름으로 내고, 1백 냥은 이천기(李天紀)의 이름으로 내었으며, 1백 냥은 홍의인(洪義人)의 이름으로 내었다. 상주(喪主)는 유독 어찌하여 전혀 마음이 없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사람들은 형세(形勢)가 있으므로 마련해 낼 수 있었지만, 나같은 사람이 어찌 마련해 내겠는가?’라고 하였더니, 두 사람이 ‘상주(喪主)가 이미 겁을 내었으니 우리들은 가겠다.’ 하였습니다.
또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는 한 가지 조항은 사흘 동안의 정청(庭請)을 파한 뒤 김창도가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번 사흘 동안 정청한 것은 지극히 가소로운 일이다. 우리 집 대감께서 이렇게 하여 대사(大事)가 이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후에도 또 좋은 묘리(妙理)가 있다.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도록 도모한 뒤 궁성(宮城)을 호위하여 소론(少論)으로 하여금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들이 훈신(勳臣)이 된다면 어찌 좋지 않겠느냐? 군정(軍情)은 이미 수습되었고, 또 중군(中軍) 이삼(李森)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내었으며, 그 대신을 유취장(柳就章)으로 삼았으니, 다만 날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일 뿐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 독대(獨對)에 관한 한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적소(謫所)로 갈 때 이정식과 동행하였는데, 덕원(德源) 읍내(邑內)에 이르러 이정식이 저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전날 독대(獨對)한 연유를 알고 있는가?’ 하므로, 제가, ‘나는 이미 독대 때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니, 더욱이 어떻게 그 근본을 알겠는가?’라고 하자, 이정식이 ‘용렬(庸劣)함이 막심하다. 그때 이미 독대하는 일을 배포(排布)하여 이 판부사(李判府事)에게 들여보냈는데, 은 1천 냥이 부족했던 까닭에 바꾸어 세울 수가 없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하겠느냐? 그때 만약 일이 이루어졌더라면, 오늘날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고, 이어서, ‘그대 집안의 영감(令監)도 용렬하다. 독대했을 때 그대 집안 영감께서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되었는데, 은 1천 냥을 요구하였으나 올려 보내지 않았으므로, 그때 바꾸어 세우려는 계책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지난해 남소동(南小洞) 이 판서(李判書)의 과옥(科獄) 때 우리들이 가사(歌詞)를 지어서 연소(年少)한 시녀(侍女)에게 가르쳐 주고, 선대왕(先大王)께서 병을 앓고 계실 때 장지(莊紙) 밖에서 어렴풋이 부르며 지나가게 하였더니, 선대왕께서 들으시고 그 시녀를 불러 물으셨다. 그 시녀가 처음에는 은휘(隱諱)하는 척하다가 매질을 당한 뒤에 비로소 고(告)하기를, 「병든 어미를 보려고 밖에 나갔더니, 새로 가사(歌詞)가 있었으므로 과연 외었습니다.」 하니, 선대왕께서 한 편 전체를 다 외라고 명하셨는데 이로부터 이 판서의 옥사(獄事)가 꺾였었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정식은 곧 이건명(李健命)의 서사촌(庶四寸)이고, 김운택(金雲澤)의 오촌(五寸) 조카이며, 이만성(李晩成)의 절족(切族)인데, 권문(權門)에 드나들고 궁금(宮禁)과 체결(締結)하여 정우관·서덕수·김창도의 무리와 더불어 언제나 장태(張台)를 일컬었으니, 장태(張台)는 곧 장세장(張世相)의 칭호였고, 정우관은 장세상의 집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김운택이 감진 어사(監賑御史)가 되었을 때 제 아비가 바야흐로 평안 병사가 되었는데, 김운택이 품지(稟旨)하는 일로 즉시 상경(上京)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내려가므로 제 아비를 묻기를, ‘어찌하여 속히 돌아가느냐?’ 하였더니, 김운택이 ‘나라에 오래지 않아 마땅히 큰 일이 있을 것인데, 참섭(參涉)하고 싶지 않으므로 즉시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제 아비가, ‘무슨 일이냐?’고 하자, 김운택이, ‘오래지 않아 마땅히 나올 것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오래지 아니하여 독대(獨對)하는 일이 과연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 아비가 항상 저에게 말하기를, ‘김가(金家)는 괴이(怪異)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런 일들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정식이 항상 말하기를, ‘궁인(宮人) 한 사람과 가장 친밀한 사이인데, 바야흐로 석열(石烈)의 교대(交代)가 되었으니, 모든 일이 더욱 좋아졌다.’고 하였는데, 그 성명(姓名)은 잊어버려 기억이 나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조흡이 발고(發告)한 사람들을 모두 도사(都事)를 보내어 잡아오고, 이른바 석열(石烈)과 교대한 궁인(宮人)을 즉시 국청에 출부(出付)하도록 명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궁인은 석열(石烈)과 교대한 다수의 성명을 상세히 알아내어 아뢰라는 일로 하교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김창도(金昌道)·정우관(鄭宇寬)·서덕수(徐德修) 등을 잡아 가두었다.
4월 21일 을해
윤연(尹㝚)을 교리(校理)로, 윤순(尹淳)을 수찬(修撰)으로, 홍만우(洪萬遇)를 검상(檢詳)으로, 이정신(李正臣)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박내정(朴乃貞)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서명우(徐命遇)를 집의(執義)로, 윤취상(尹就商)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윤취상은 사람됨이 흉험(凶險)하고 교만하며 패리(悖理)하여 여러 차례 얼굴을 바꾸었다. 이름이 고변서(告變書)에 들어가고 조카 윤각(尹慤)이 바야흐로 역적으로 국문을 받고 있었으나, 자신은 장임(將任)을 띤 채 의기양양하고 태연자약하니, 공의(公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사간원(詞諫院) 【사간(司諫) 이제(李濟)와 헌납(獻納) 윤회(尹會)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아니하므로, 권업(權𢢜)의 계사를 정지시켰다. 이에 앞서 정언(正言) 조원명(趙遠命)이 사흉(四凶)의 등급을 나누자는 계사에 예사롭게 따라서 참여하였다가, 간장(諫長)의 상소에 대하여 태연하게 있기 어렵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이때에 와서 사간원에서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와 우상(右相) 최석항(崔錫恒)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며칠 전 청대하여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나국(拿鞫)한 뒤 정법(正法)하는 일을 진달하고 윤허를 받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건대 그 죄가 밝게 드러나 이미 살 수 있는 길은 없지만, 일찍이 삼사(三事)를 지낸 사람에게 고략(拷掠)의 형(刑)을 시행한다면 끝내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더욱이 또 일찍이 전후의 명(命)이 중로(中路)에 많이 미쳤고, 조정의 여러 의논도 대개 다 이와 같으니, 선조(先朝) 때 이미 행하였던 예(例)를 따르고 ‘반수 가검(盤水加劒)235) ’의 뜻을 취하시어 참작해 처분하신다면, 혹시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진실로 좋으니, 고략의 형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대신(大臣)의 차자를 아뢰었는데, 임금이 즉시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대로 두고 나왔다.
역적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이 물고(物故)되었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이희지(李喜之)의 언문(諺文)으로 된 가사(歌詞)를 궁중(宮中)에 유입(流入)시켰는데, 모두 성궁(聖躬)을 무욕(誣辱)하는 말이었고, 또 거짓 조서(詔書)의 초본(草本)을 장세상으로 하여금 국상(國喪) 때 임하여 곧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헌(李瀗)이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을 때 관곡(官穀)을 돈 6백여 냥으로 사들여 장세상에게 주었는데, 이천기(李天紀)가 직접 장세상의 집에 간 일은 이천기가 감히 은휘(隱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천기가 저에게 편지를 보내, ‘용신(冗臣)이 만약 나오면 반드시 꼭 찾아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이것을가지고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공초(供招)하기를,
"최숙빈(崔淑嬪)의 상(喪)에 산을 보러 다닐 때 목호룡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고 같이 왕래하였으며, 소훈(昭訓)의 상(喪)에 묘자리를 구하러 다닐 때에도 더불어 동행하였습니다. 이천기는 목호룡이 그 사람을 칭찬하였으나, 저는 서로 알고 지낸 일이 없었습니다. 4, 5년 전 집을 팔려고 할 즈음에 이천기가 집을 사려고 무인(武人)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집을 보기를 원하였으므로 종을 시켜 가리켜 주게 하였으며, 그 후로 다시 서로 통한 일은 없었습니다. 목호룡이 동반(同伴)한 사람인 백건익(白建益)의 아들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제가 또한 더불어 서로 알았습니다. 그 사람의 어미가 이씨(李氏) 성인 나인[內人]과 숙질(叔姪)이 되기 때문에 아무때나 출입하였고, 이씨 성의 나인이 병 때문에 밖으로 나올 때 백가(白哥)가 때때로 혹시 왕래하였으므로 제가 본궁(本宮)의 서제소(書題所)236) 에 앉아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질책(叱責)하였으며, 별달리 궁중에 출입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고, 이 밖에는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국청에서 초사(招辭)가 서로 어긋난다 하여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니, 대답하기를,
"내수(內竪)237) 가 역적과 교통(交通)한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가 기꺼이 승복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천기와 서로 내통하며 은밀히 모의한 것은 제가 귀로 들은 것이 아니고 곧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장세상은 직질(職秩)이 높은 내관(內官)이므로 교만하여 저를 업신여기며 애초에 용접(容接)하지 않았는데, 제가 이천기의 말로써 조용히 찾아가 만나고 또 조송(趙松)이 이우항(李宇恒)의 은자(銀子)를 그에게 준 정상을 말하자, 그가 조심스럽게 접대하며 심복(心腹)에다 두었습니다. 궁금(宮禁)에 통할 수 없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또한 저에게 말한 것이 많습니다. 제가 장세상에게 묻기를, ‘너는 이천기와 어떻게 서로 친밀(親密)하게 되었는가?’ 하니, 장세상이, ‘이천기의 조카로서 가산 군수(嘉山郡守)가 된 자가 있는데, 내가 가산(嘉山)의 내관(內官)으로 주선한 바가 있어 서로 방문하여 즐겁게 지냈고, 그 사이에 조송(趙松)으로 인하여 또 서로 통한 일이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천기를 데리고 장세상의 집을 찾아가자 두 사람을 방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저는 대문(大門) 밖으로 나와 이천기가 장세상과 서로 모의(謀議)하고 나오기를 기다린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천기는 은 70냥과 부채·간지(簡紙) 몇 폭을 저로 하여금 가지고 가서 장세상에게 전해 주게 하였는데, 저는 전해 주어 사사롭게 쓰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이천기가 장세상과 교통(交通)한 것은 국상(國喪)이 나는 날 지 상궁(池尙宮)으로 하여금 안에서 거짓 조서(詔書)를 내리고 장세상이 중간에서 봉행(奉行)하도록 하려는 계책일 뿐이었으니, 대급수(大急手)나 소급수(小急手)에 비하면, 그 죄가 조금 가볍습니다. 그러나 장세상이 주상(主上)을 무욕(誣辱)하는 말을 김민택(金民澤)의 집에서 차마 말하고, 또 저에게 말하여 이천기에게 전하게 하였으니, 죄상이 차고 넘칩니다. 이른바 주상(主上)을 무욕하는 말이란 애초에는, ‘주상께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산란하여 무지(無知)하다.’는 것이었는데, 환국(換局)한 뒤에는 또 말하기를, ‘그날 밤 나는 승전색(承傳色)으로 입시(入侍)하였으니, 주상께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산란함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요괴(妖怪)한 나인[內人]이 연소한 중궁(中宮)에게 청촉해서 이런 거조(擧措)를 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장세상을 죽여 그 살을 씹고자 합니다……."
하였다. 면질(面質)시키자, 목효룡이 장세상을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이미 역적 이천기와 더불어 체결(締結)한 일의 자취가 이미 드러났는데, 어찌하여 바른대로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말하기를,
"내관(內官)은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받고 있는데, 어찌 보잘것없는 역수배(逆竪輩)에게 가담하겠는가? 나는 일찍이 이천기와 서로 알고 지낸 일이 없었고, 네가 이천기를 칭찬하는 것을 듣고서야 알았다. 중간에 왔다갔다 한 것은 네가 스스로 한 것이며, 내가 아는 바 아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나는 애초에 이천기를 통하여 너와 교제를 맺었는데, 네가 말하기를, ‘이천기의 조카로서 가산 군수(嘉山郡守)가 된 자가 있는데, 내가 가산의 내관(內官)으로 서로 친하게 지냈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천기가, 「조송(趙松)이 이우항(李宇恒) 등의 은 2천여 냥을 장세상에게 전해 주지 않고 중간에서 훔쳐 먹었으므로, 항상 한탄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하자, 네가, ‘조첨사(趙僉使)는 무상(無狀)한 사람이다.’ 하였다. 내가 또 너를 협박하기를, ‘내가 이천기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장세상을 중시하는가?」 하였더니, 이천기가, 「궁중(宮中)의 일은 장세상이 제일 잘 안다고 한다. 내가 조송을 통하여 길을 트기 전에 들으니, 관서(闕西)의 선비를 시험하는 어제(御題)를 장세상이 먼저 서제(書題)에게 누설하여 그 족속(族屬)이 과거(科擧)를 차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어찌 이런 권세(權勢)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고 하였더니, 네가 비로소 조심스레 심복으로 대접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말하기를,
"네가 모두 지어낸 것이니 나는 대답할 것이 없다. 이천기는 한 번 이덕홍(李德弘)과 함께 집을 사는 일로 우리 집에 왔었는데, 이것이 어찌 서로 친한 것이라 하겠느냐? 이덕홍이 가산 군수가 되었을 때 나는 의약 승전색(議藥承傳色)으로 줄곧 대궐안에 있었고, 일찍이 밖으로 나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조송의 은에 이르러서는 원래 한 푼도 서로 준 일이 없다. 서관(西關)의 과거(科擧)는 나의 족속(族屬)이 원래 과거를 차지한 일이 없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지난해 이천기가 너희 집에 갔을 때 네가 이천기와 더불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수작한 일이 또한 없었더냐?"
하니, 말하기를,
"그때 네가 이천기를 데리고 와서 말하기를, ‘이천기가 바야흐로 방문 밖에 와있다.’고 하기에 내가, ‘왔으면 왔지 어찌하여 꼭 너를 통하여 말을 전하느냐?’고 하였다. 네가 즉시 나가려고 하므로 내가 만류하였더니, 네가, ‘내가 여기 머물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이천기가 과연 들어오지 않았더냐?"
하니, 말하기를,
"왔거나 오지 않았거나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주상(主上)과 중궁 전하(中宮殿下)의 일을 나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말하기를,
"나는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환국(換局)하고 며칠 뒤 내가 너희 집에 갔을 때 평안도(平安道)의 무인(武人)으로 키가 큰 사람이 왔었는데 네가 나가게 하였다. 내가 묻기를, ‘네가 입번(入番)하였다가 막 나왔다고 하는데, 네가 언제나 주상께서 정신이 흐릿하고 마음이 산란하여 전혀 지각(知覺)이 없다고 하였으나, 이번의 처분(處分)은 어찌하여 한결같이 맹렬(猛烈)한가?’ 하자, 네가 답하기를, ‘그날 밤 내가 승전색(承傳色)으로 입시하여 눈으로 직접 그 일을 보았으니, 차라리 죽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다. 주상께서 어찌 요괴(妖怪)한 나인[內人]이 연소한 중궁(中宮)께 청촉하여 이런 거조(擧措)를 만들어 낸 줄 아시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말하기를,
"네가 까닭없이 지어낸 것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광성 부부인(光城府夫人)의 호상(護喪) 때 승전색(承傳色)으로서 김민택과 더불어 밤중에 수응(酬應)한 일이 또한 없었더란 말이냐? 김민택이 이천기에게 말하였고, 이천기는 나에게 말하였다."
하니, 말하기를,
"나는 김민택과 서로 만나본 일이 없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이천기가 ‘장환(張宦)은 참 노론(老論)이어서 혈성(血誠)을 가지고 치중(致仲)과 주상의 어리석고 정신이 흐릿하고 마음이 산란한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장환(張宦)의 마음은 성실하여 바뀜이 없으니, 대사(大事)를 끝까지 부탁할 수 있다.’ 하면서 정녕하게 말하였으니, 네가 감히 은휘(隱諱)할 수 있겠는가?"
하니, 말하기를,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에는 마치 염찰하며 지나가는 어사(御史)와 같음이 있었는데, 어찌 정분(情分)으로 찾아왔겠는가?"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비록 겉으로 너를 섬겼지만, 너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면 언제나 너의 살점을 씹어먹고자 하였다. 환수(宦竪)란 소쇄(掃洒)하는 일을 맡는 데 불과한데, 너의 권세는 장상(將相)을 기울이고 뜻은 종사(宗社)를 기울이고자 하였다. 이러한데도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너희 집에 갔을 때 현덕명(玄德明)이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봉상시(奉常寺) 공물 주인(貢物主人)의 일로 현덕명에게 부탁하여 영상(領相)에게 주선하도록 하였더니, 현덕명이 간 후에 네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말이 경솔하다. 내가 영상의 사촌(四寸)인 김창도(金昌道)로 하여금 나의 뜻을 영상에게 전하게 한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만무할 것이다. 또 강진(康津)의 전답(田畓)을 한학(韓㰒)이 서로 소송하는 일은 곧 여러 사대부(士大夫)와 수천의 생령(生靈)들이 대대로 전해오는 산업(産業)의 터전인데, 네가 하루아침에 비리(非理)로 송사에 이길 수 있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강진의 전답에 대해 이긴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려웠으니, 대감(大監)이 어렵다고 할 만하였다.’ 하자, 네가, ‘이홍술(李弘述)이 만사(萬事)를 제치고 나의 편이 되어서 이 송사에서 이겼으니, 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느냐?’ 하였다.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권세가 장상(將相)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하니, 말하기를,
"공물(貢物)의 일은 과연 너의 말과 같으나, 강진(康津)의 전답을 소송한 일은 문서(文書)가 분명하여 이겼던 것이니, 어찌 청탁한 일이 있었겠느냐? 이는 곧 허무한 말이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장세상을 면질(面質)시키자, 구절구절 굽힘을 당하였다 하여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형문이 4차에 이르자 직초(直招)하기를,
"저는 목호룡과 서로 친하게 지냈고, 목호룡은 이천기와 함께 항상 저희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희지(李喜之)는 언문(諺文)의 가사(歌詞)를 지어 성궁(聖躬)을 무훼(誣毁)하였으며, 또 중간에서 거짓 조서(詔書)를 초(草)하여 나인 지 상궁(池尙宮)·열이(烈伊) 및 저로 하여금 국상(國喪) 때 임하여 내리게 하였는데, 목호룡이 이 일로 발고(發告)한 것입니다. 또 ‘조송(趙松)이 무상(無狀)하여 이우항(李宇恒) 등이 모은 은 2천여 냥을 그로 하여금 저에게 전해 주게 하였으나 중간에서 훔쳐 먹었다.’고 하는 것은 제가 끝내 경동(驚動)하거나 발명(發明)한 단서가 없었으니, 평일에 뇌물을 받고 체결(締結)한 정상을 또한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환국(換局)한 며칠 뒤 목호룡이 찾아와 묻기를, ‘그대가 항상 「주상(主人)께서 하시는 일이 시원하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번의 처분(處分)은 어찌하여 한결같이 맹렬(猛烈)한가?’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그날 밤 나는 입번(入番)하는 중관(中官)으로 입시(入侍)하여 그 일을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무훼(誣毁)하는 말이 양전(兩殿)에게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목호룡이 찾아왔던 것과 제가 입번했던 것은 과연 적실(的實)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처분이 어찌 죄다 건단(乾斷)에서 나오겠느냐?’는 등의 말로 답하였으니, 저의 흉악하고 패리한 말과 수작(酬酢)했던 일을 이에 의거해 알 수 있습니다. 서덕수(徐德修)·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정우관(鄭宇寬)의 무리가 서로 독약을 쓸 계책을 모의한 것을 조흡(趙洽)이 또 발고하였는데, 서덕수와는 더불어 서로 친하게 지냈고, 정우관은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왕래하며 서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정식은 조카들의 동접(同接)이었으므로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김창도 또한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제가 입번(入番)하였을 때 정우관이 대궐 밖의 처소(處所)로 찾아와 만났는데, 그 무리들이 왕복하는 일이 없지 않았으니 저 또한 어찌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두세 가지 고할 일이 있습니다. 서덕수의 무리가 한 바는 대개 법기(法氣)가 있어 변작(變作)하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제가 죄다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은 곧 이치 밖의 일을 작용(作俑)238)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도촉(圖囑)한 것은 할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 죽어도 남은 죄가 있으며, 이른바 도촉이란 밀계(密計)의 일입니다. 그 무리들은 무상(無狀)하여 아주 치밀하게 나인[內人] 지 상궁·열이와 교통(交通)하였으니, 거짓 조서의 일은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정식의 무리가 열이에게 거짓 조서를 들여보냈는데, 독약을 쓰는 일이 나오자 백망(白望)으로부터 저에게 들여보내었으니, 모역(謀逆)하였음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는데, 미처 결안(結案)하기 전에 죽어 버렸다. 국청에서 백망 등의 예(例)에 의하여 육시(戮屍)하고 노적(孥籍)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국청(鞫廳)에서 각인(各人)이 발명(發明)한 초사(招辭)로 다시 조흡(趙洽)을 추국(推鞫)하니, 초사의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해 8월 무렵에 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이 저희 집에 왔을 때 문관(文官) 이정소(李廷熽)가 먼저 자리에 와 있었는데, 이정식 등이 말하기를, ‘장세상(張世相)에게 줄 은자(銀子)는 반드시 1천 냥에 차야만 들여보낼 것인데, 2백이 차지 아니하였다.’고 하며 이 수량을 빌기를 요구하므로 제가 즉시 1백 냥을 내어 주었더니 이정식이 가지고 갔으며, 봉화(烽火) 때 또 1백 냥을 김창도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서덕수(徐德修)·김창도 등과 김성행(金省行)이 매일 이정소의 집에 모였는데, 저는 상인(喪人)인 까닭에 모임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김창도의 이른바 예폐(禮幣)를 구상(求償)하는 일은 전혀 꾸며낸 말이며, 동궁(東宮)의 별실(別室)의 상(喪)이 난 일은 김창도의 무리가 정녕 저에게 한 말입니다. 그리고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는 일은 그 무리들이 비망기(備忘記)를 도모하여 얻어낸 뒤 이런 거조(擧措)를 만들어 소론(少論)으로 하여금 대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는데, 김창도가 저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영상(領相)이 나에게 말하기를, 「너희 무리들이 항상 비망기(備忘記)가 마땅히 내려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내려지지 아니하는가?」 하므로, 내가 답하기를, 「전부터 우리 무리들이 경영하는 일에 하나라도 어긋나는 단서가 있었습니까? 비망기가 내려지는 것은 오늘이 아니면 내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수작(酬酌)하였으나 그 뒤 비망기가 내려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대감(大監)에게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 장동(壯洞)으로 가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분명하게 말을 전하였으니, 그가 어찌 발명(發明)할 수 있겠습니까? 정우관은 과연 면식이 없으나, 김창도의 무리가 언제나 ‘정령(鄭令)’이라고 일컬으며, 모든 일을 같이 모의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김수천(金壽天)을 잡아 가두었다.
4월 22일 병자
밤 5경(五更)에 목성(木星)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이 연명(聯名)으로 올린 차자 가운데 ‘이미 중로(中路)에 명이 미쳤던 바가 있으니, 반수 가검(盤水加劒)하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는데, 대개 사사(賜死)를 가리킨 뜻이었으나, 비지(批旨)도 ‘차사(箚辭)가 진실로 좋으니 고략(拷掠)의 형(刑)을 시행하지 말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어떤 율(律)로 거행함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가검(加劒)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지평(持平) 박필몽(朴弼夢)이 청대(請對)하여 진수당(進修堂)에 입시(入侍)하였다. 남취명이 말하기를,
"두 죄인의 일에 대해 ‘가검(加劒)’하라는 비지(批旨)를 내리셨는데, 율문(律文)에는 가검(加劒)하는 일이 없습니다. 대간(臺諫)은 처참(處斬)을 청하였고, 김일경(金一鏡)은 이참(莅斬)을 청하였는데, 대신(大臣)은 ‘반수 가검(盤水加劒)’을 청하였으니, 곧 사약(賜藥)을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에 또 ‘반수(盤水)’란 두 글자가 없으니, 신 등은 의혹스러워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명백하게 하교하신 뒤에야 전지(傳旨)를 봉입(奉入)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였다. 그때 영상·우상이 연명으로 올린 차자에 이르기를,
"신 등이 두 죄인을 작처(酌處)하는 일로 차자를 올려 논하였더니, 성상의 비답에 ‘차사(箚辭)가 참으로 좋으니 고략(拷掠)의 형을 시행하지 말라.’고 하교하셨는데, 승정원의 계품(啓稟)으로 인하여 곧 가검(加劒)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개 ‘가검’이란 두 글자가 신 등의 차어(箚語)에서 연유된 것이기는 하나, 신 등의 본래의 뜻은 고의(古義)를 대충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선조(先朝)의 법을 따른다.’고 한 것은 대개 사약(賜藥)을 가리킨 뜻이었습니다. 신 등이 급하게 서둘러 글을 짓느라고 비지(批旨)를 살피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신 등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가자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차사(箚辭)가 마땅하니, 의거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卿) 등은 안심하고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고, 작은 종이에 써서 향안(香案) 위에 두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소환(小宦)으로 하여금 가져다 보이게 하니, 이사상은 말하기를,
"차자에 대한 비답을 살펴보건대 실형(失刑)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하교를 내리셨습니까?"
하고, 박필몽은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차사(箚辭)를 애초에 분별하여 아뢰지 아니하였으므로, 신은 사약(賜藥)이란 말이 되는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의 차자를 보건대 앞서의 차자에서 사사(賜死)를 청한 것이라고 말하니, 어찌 이와 같은 한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추대(推戴)하려 한 역모(逆謀)가 만약 사사(賜死)에 그치게 된다면, 나라에 어찌 처참(處斬)하는 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사상은 말하기를,
"오늘날 법을 쓰는 것이 비록 머리와 몸뚱이를 다른 곳에 떼어 놓는 것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죽는 것은 똑같으며 사약 또한 죽는 것입니다. 다만 형정(刑政)이 한번 치우쳐지면 역적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해 보소서. 어찌하여 매번 대신의 말로 국사(國事)를 그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결단코 그렇지가 아니합니다."
하고, 박필몽과 말하기를,
"이이첨(李爾瞻)은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흉악하고 교활함이 특별히 심하였는데, 반정(反正)한 뒤 집형(執刑)할 만한 문안(文案)이 없었으나, 그래도 또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처참(處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역적은 드러난 문안이 많이 있으니, 약원(藥院)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하였다는 말은 절대로 사리에 가깝지 아니합니다. 비록 천 리 밖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아들의 모의를 그 아비가 어떻게 알지 못하겠습니까? 이 일은 그 무리들이 반드시 스스로 주장한 것입니다. 대신에게 만약 소견이 있다면 시비(是非)를 가리는 사이에 소견에 따라 앙달(仰達)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한 것이 없으나,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에 이르러서는 감히 사흉(四凶)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의 사촌(四寸) 조태채(趙泰采) 또한 그 가운데에 들었으니, 비록 감히 곧바로 조태채를 영호(營護)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흉(四凶)은 일체(一體)이니, 그가 어찌 감히 사흉(四凶)을 논계(論啓)하는 일에 간섭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태구의 말은 더욱 괴이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박희진(朴熙晉)이 말하기를,
"사약(賜藥)하는 장소는 그들이 도착하는 장소에 따라 거행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사상과 박필몽이 소희(所懷)로써 합계(合啓) 및 전계(前啓)를 진달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사상과 박필몽이 물러나자, 동의금(同義禁) 김일경(金一鏡)이 뒤따라 와서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진달하기를,
"두 역적에 대한 처분에 있어서 승정원(承政院)의 계품(啓稟)으로 인하여 ‘가검(加劒)’이란 두 글자를 내리셨는데, 글자의 뜻으로 보건대 칼을 더한다는 것을 이른 것이므로 신은 정형(正刑)한다는 하교로 생각하였고, 군정(群情)은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곧 대신(大臣)의 인구(引咎)하는 차자로 인하여 처분을 고쳐서 내리셨으니, 나라의 형정(刑政)의 전도(顚倒)됨이 심하였습니다. 두 흉적(凶賊)은 본래의 역절(逆節)이 만 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데, 이번의 역안(逆案)은 정절(情節)이 더욱 낭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능히 정법(正法)하지 못한다면 법이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나라의 전형(典刑)은 인주(人主)의 큰 권력[大柄]입니다. 대신이 비록 중요하다 하나, 어찌 억지로 흔들어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의 본뜻은 원래 여기에 있지 아니하였는데, 성상께서 갑자기 이런 사약(賜藥)이란 하교를 내리셨으니, 신은 놀라움과 탄식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로지 바라건대 다시 앞서의 명(命)을 거듭 내리시어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법(正法)하라."
하였다. 김일경이 말하기를,
"정법(正法)이란 정형(正刑)하란 하교이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박희진이 말하기를,
"만나는 곳에서 정형(正刑)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박희진이 죄인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에게 도사(都事)를 보내어 만나는 곳에서 모두 즉시 정형(正刑)하는 일을 써서 내니,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왔다.
사신은 논한다. "대신(大臣)에게 잘못이 있으면 대각(臺閣)에서 쟁론(爭論)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체통이 관계되는 바에 이르러서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결코 욕하고 꾸짖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그런데 지금 박필몽은 조태구에게 저[渠]란 글자를 서로 더하며 공공연하게 제멋대로 꾸짖고 욕하였으니, 사면(事面)을 파괴하고 조정을 욕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로부터 이후로 묘당(廟堂)에 체통(體統)이 엄중하지 못하였고, 권위(權威)가 아래로 대각(臺閣)으로 옮겨졌으니, 작은 일이 아니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16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대신(大臣)에게 잘못이 있으면 대각(臺閣)에서 쟁론(爭論)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체통이 관계되는 바에 이르러서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결코 욕하고 꾸짖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그런데 지금 박필몽은 조태구에게 저[渠]란 글자를 서로 더하며 공공연하게 제멋대로 꾸짖고 욕하였으니, 사면(事面)을 파괴하고 조정을 욕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로부터 이후로 묘당(廟堂)에 체통(體統)이 엄중하지 못하였고, 권위(權威)가 아래로 대각(臺閣)으로 옮겨졌으니, 작은 일이 아니다."
국청(鞫廳)에서 승업(勝業)을 잡아 가두었는데, 곧 이영(二英)에게 고용되어 무수리[水賜]라고 일컬어지던 자이다.
4월 23일 정축
역적 홍의인(洪義人)이 물고(物故)되었다. 처음 잡혀 왔을 때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발명(發明)하여 공초(供招)를 바쳤는데, 매화점(梅花點)·정승(政丞)·총융사(摠戎使) 등의 말과 ‘은을 내어 독약을 쓰고 폐출(廢黜)하는 일’과 ‘홍수(紅袖)와 모의하고 체결(締結)한 일’을 모두 거짓말로 돌렸다. 국청에서 초사가 서로 틀리다 하여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니, 대답하기를,
"매화점(梅花點)에 관한 일은 김용택(金龍澤)이 이미 실토(實吐)하였습니다. 백망(白望)과는 정분(情分)이 골육(骨肉)보다 더하여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를 서로 모의하였으니, 절친(切親)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김용택이 스스로 정승을 차지하고 백망에게는 대장(大將)을 허락한다고 한 것을 홍의인이 비웃으며 저에게 정녕하게 말하였습니다. 홍의인은 이천기(李天紀)와 독약을 쓰는 일을 전적으로 주관하였고, 김용택은 백망과 대급수(大急手)를 전적으로 주관하였는데, 지 상궁(池尙宮)에게 부채를 보내어 사람을 시켜 기찰(譏察)하게 하고 은화(銀貨)를 주도록 권한 등의 일을 그가 이미 직접 하였으니, 어찌 알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강촌인(虐村人)의 은자(銀子)를 빌고는 미처 갚지 않았다는 말도 마주 대하여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이명(李頤命) 집안의 음흉한 일에 대해서 홍의인이 말하기를, ‘국가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할 때 내국(內局)에 들어가 연상(蓮相)에게 묻기를,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아서 탈가(稅駕)239) 할 곳이 없으니 당면한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처음에는 앉아서 접대하다가, 비스듬히 누워 자리를 만지며, 「이천기가 너희 집에서 담을 하나 사이에 둔 곳으로 옮겨와서 사는가?」 하므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선공 감역(繕工監役) 이현(李絢)의 시사(時事)로 문답하였는데, 정녕한 말투로 나를 불러서 바친 글을 고쳐 주기까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와 홍철인(洪哲人)이 같이 앉아 협박한 정상이 환히 드러났고, 서찰(書札)의 초본(草本)을 이미 현납(現納)하였으니, 적정(賊情)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하였다. 다시 홍의인을 추문하니, 여전히 굳게 은휘(隱諱)하였다. 면질(面質)시키자, 목호룡이 홍의인을 향해 말하기를,
"너는 지모(知謀)가 깊고 많아서 김용택이 백망(白望)을 매우 신임하고 이천기가 나를 매우 신임하였으나, 너는 도리어 믿지 않은 채 매번 이천기에게 권하기를 ‘백망이 말하는 5백 냥의 환약(丸藥)이란 허망한 일인 듯하니, 반드시 찾아오게 하여 개에게 먼저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었다. 그래서 이천기가 그 약을 찾으니, 백망이 핑계대기를, ‘이미 홍수(紅袖)에게 들어갔다.’고 하자, 너는 언제나, ‘그 약이 남은 것이 있으면 시험해 보기를 원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무리에게 만약 불행한 변고(變故)가 있게 된다면, 그 약을 먹고 죽고자 한다.’고 하였다. 너는 또 말하기를, ‘내가 덕우(德雨)의 집에 갔더니, 구야(久也)가 바야흐로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는데, 덕우가, 「네가 만약 성공한다면 반드시 양계(兩界)의 병사(兵使)를 삼을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기지(李器之)가 너를 간웅(奸雄)이라 생각하고 백망을 악소(惡少)라 생각하여 자못 믿지 아니하므로, 내가, 「목호룡이 이미 폐출(廢黜)할 때의 조서(詔書)와 언문(諺文)으로 된 가사(歌詞)에 대하여 알고 있으니 잘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대궐에 들어가는 중에 연상(蓮相)을 뵈었더니 연상이, 「이천기가 너희 집 근처로 옮겨와 살고 있느냐?」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건대 내가 이천기로부터 들은 것인 듯하다."
하니, 홍의인이 말하기를,
"이는 절대로 사리에 가깝지 아니한 말이다. 내가 김용택과 혐의가 있고, 네가 말하기를, ‘홍의인이 백망을 믿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이런 말을 내가 어찌 입에 낼 이치가 있겠는가? 시어소(時御所)는 선공감(繕工監)에서 진배(進排)하여 입궐(入闕)하는 규례(規例)가 없으니, 이정승(李政丞)이 말했다는 것은 더욱 지극히 맹랑하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네가 이현(李絢)의 말을 나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정호(鄭澔)가 약방 제조(藥房提調)로서 마땅히 입시(入侍)하였는데, 이만성(李晩成)이 정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성상의 뜻을 탐지(探知)해 내어 대계(大計)를 정하지 아니하는가?’라고 하자, 정호가 말하기를, ‘나는 초야(草野)의 신하이니, 감히 간여(干與)할 수가 없다. 그대는 당국(當局)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 일을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하니, 홍의인이 말하기를,
"더욱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너는 선공감(繕工監)의 인(印)으로 빈 종이에다 도장을 찍어 이태화(李太華)에게 주고, 환술(幻術)로 은을 모을 바탕으로 삼지 않았느냐? 그리고 이태화가 둔장첩(屯將帖)을 만들어 방매(放賣)하다가 철원(鐵原)의 관원에게 붙잡히자, 네가 글을 철원 군수에게 보내어 주선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하니, 홍의인이 말하기를,
"이는 정인중(鄭麟重)이 전한 것이 아니다. 이천기가 집에 학질을 앓는 사람이 있다고 하며 도장 찍힌 종이를 얻고자 하므로 내가 답하기를, ‘너와 정인중에게 모두 도장이 있는데 하필 내 도장을 청하는가?’ 하였으니, 도장을 찍어준 일이 없다. 그리고 이천기는 이태화가 첩문(帖文)을 위조(僞造)했다가 철원(鐵原)에서 붙잡혔다 하여 청탁하는 편지를 얻고자 요구하였으므로, 과연 조세망(趙世望)의 글을 얻어 주었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너는 적성(積城)에서 돌아온 뒤 나를 불러 계원(啓元)에게 줄 서찰을 고쳐 쓰게 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홍의인이 말하기를,
"서찰 안에 있는 사연(辭緣)은 어떤 일에 대해 말한 것이었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지파(池婆)240) 와 서로 내통(內通)하여 독약을 쓰는 일을 자신이 직접 하는 양으로 써서 주었던 것이다."
하니, 홍의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말하기를,
"이른바 의심했다는 것은 도모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뒤에야 바야흐로 의심하게 된 것이고, 네가 애초부터 나를 믿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후에 가서 곧 크게 의심하고 염려하여 죽이려고 모의하기에 이르렀으며, 또 서찰을 빼앗아 바친 데 이르러서는 너의 계교가 교묘하다면 교묘하다고 하겠으나, 너의 마음은 진실로 역적이었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니, 홍의인이 말하기를,
"일의 곡절을 일찍이 알지 못했으니, 어찌 너를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가졌겠는가?"
하였다. 국청에서 홍의인은 달리 증명(證明)할 단서가 없고, 목호룡의 초사 또한 틀린 곳이 없지 않다 하여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였다.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대궐 안에 진배(進排)하는 규례(規例)에 시어소(時御所)는 자문감(紫門監)241) 이 담당하고 본감(本監)의 관원은 원래 진거(進去)하는 규례가 없다. 그리고 정호가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있을 때 이만성과 더불어 문답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정호는 일찍이 내국 제조가 된 적이 없다. 이 두 가지 조항은 사실과 어긋남을 면하지 못한다."
하니, 목호룡이 대답하기를,
"선공감(繕工監) 관원은 비록 시어소(時御所)에 진배(進排)하는 규례가 없지만, 자문감의 관원이 사고가 있으면 본감(本監)의 관원이 대궐에 들어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정호가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되었는지의 여부와 이만성이 이와 같이 발설(發說)한 것은 제가 이현(李絢)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곧 홍의인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긴급한 말이 아닌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꾸며댈 이치가 있겠습니까? 대개 이 역적 10여 명이 더불어 대변(對卞)하며 아주 많은 말을 하더라도 저의 말은 털끝만큼이라도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 정호 등에 관한 말은 비록 틀린 곳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곧 홍의인의 말이니 그가 어찌 감히 은휘(隱諱)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국청에서 다시 홍의인을 추문하였는데, 그 문목에 이르기를,
"매화점(梅花點)에 관한 말을 김용택이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대단히 어긋나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앞서의 공초에서, ‘이천기와 김용택은 선대(先代) 때부터의 혐의 때문에 서로 절교했다.’고 하였는데, 홍철인(洪哲人)의 공초에서는, ‘동접(同接)과 더불어 공직(供職)하는 여가에 때때로 늘 왕래하였다.’고 하였으니, 형제(兄弟)의 말이 어찌하여 이처럼 서로 어긋나느냐? 목호룡이 증거로 삼은 수찰(手札)에 이천기가 조사하여 고친 필적(筆跡)이 이미 드러나 포착되었는데, 이에, ‘시골에서 돌아왔으니, 어찌 전해 준 일을 알겠는가?’라는 등의 말로 은연중에 의란(疑亂)시키고 가리고 숨길 계책으로 삼은 것이 남김이 없이 탄로되었다."
하고, 네 차례 형문(刑問)하였으나 저뢰(抵賴)하며 자복(自服)하지 아니한 채 죽었다.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에게 사사(賜死)하였다. 임금이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두 대신(大臣)의 차어(箚語)가 참으로 좋으니 전에 하교한 바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정법(正法)하는 일은 환수(還收)하라."
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대신(臺臣)이 탑전(榻前)에서 침척(侵斥)한 일로써 편안하기 어렵다 하여 명소(命召)를 바치고 도성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가서 전유(傳諭)하고 같이 오게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서명우(徐命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은을 모으고 모의하였을 때 심진(沈搢)은 전라 병사(全羅兵使)가 되었었는데, 그 조카 심상길(沈尙吉)의 말로 인하여 수백 냥의 은화(銀貨)를 수송(輸送)하였으며, 부채와 간지(簡紙)를 백망(白望)·지열(池烈) 등에게 낭자하게 행용(行用)하였습니다. 이상집(李尙)은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되어 이우항(李宇恒)에게 4백 금(金)을 수송하고 역도(逆徒)들에게 전달해 주어 급수(急手)의 자본으로 삼게 한 것이 이미 국청의 초사(招辭)에 드러났습니다. 제마음대로 영중(營中)의 은화를 내어 흉악한 계획에 화응(和應)한 정상이 남김없이 환히 탄로되어 가릴 수가 없는데, 아직까지 잡아다 핵실(覈實)하지 아니하였으니, 옥체(獄體)에 매우 어긋납니다. 청컨대 심진·이상집·이우항을 모두 국청(鞫廳)에 명하여 잡아다 국문하고 엄하게 형문(刑問)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북한 관성장(北漢管城將) 윤정주(尹廷舟)는 요물(妖物)·천류(賊流)로서 권흉(權凶)을 아첨해 섬겨 이 직임에 임명될 수 있었는데, 한 번 임용되자 10년 동안 차지하고서는 체직(遞職)되지 않고 있으며, 향곡(餉穀)을 빌려주거나 받아들일 때 가혹하게 거두며 함부로 곤장(棍杖)을 쳐서 해독이 잔약한 백성에게 끼쳐지고 있으니,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방도로 이 사람을 시급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북한산성의 치도(緇徒)242) 의 말이 국청의 초사에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흉도의 사인(私人)으로 하여금 그대로 그 자리를 차지하여 인심의 위의(危疑)를 더하게 하는 것은 더욱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먼 지방에 정배(定配)하소서.
이건명(李健命)은 바야흐로 합계(合啓)하여 안율(按律)하는 가운데 있는데, 죄범(罪犯)이 중대합니다. 그런데도 어의(御醫) 이징하(李徵夏)는 이건명의 사인(私人)으로서 강을 건넌 뒤 감히 죄인의 질병을 제멋대로 치계(馳啓)하며, ‘정사(正使)는 설리(泄痢)243) 가 아주 심하나, 바야흐로 죄를 받은 가운데 있으니, 감히 전례를 따라 서계(書啓)하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니, 그 사주받아 시험해 보는 계책이 자못 지극히 통완(痛惋)합니다. 비록 승정원(承政院)에서 물리치기는 하였지만, 그 무엄한 습관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위의(危疑)한 때를 당하여 이건명의 사인(私人)을 어의(御醫)의 직임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그리고 또한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영원히 의약(議藥)하는 반열(班列)에서 태거(汰去)케 하소서. 엄정(嚴程)244) 은 한정이있고 왕명(王命)은 지체하기 어려운 법이니, 비록 보통 죄인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한 시각이라도 감히 지체해 머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건명은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 복명(復命)한 뒤 사흘 만에야 비로소 도성 밖에 도착하여 강교(江郊)에서 머물러 하루를 잔 뒤 천천히 길을 떠났습니다. 이건명의 방자하고 무엄함은 이미 말할 수도 없으나, 압거(押去)하는 도사(都事)가 머물러 지체하는 대로 내버려 둔 채 조금도 검칙(檢飭)하지 아니한 정상은 진실로 지극히 해완(駭惋)합니다. 청컨대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려 나문(拿問)해 정죄(定罪)하소서. 장단 부사(長湍府使) 최필번(崔泌蕃)은 도임(到任)한 이후 정령(政令)이 사리에 어긋난데다가 아전들이 따라서 간사한 짓을 하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움이 날로 심해져 창고의 저축이 텅 비자, 진휼미(賑恤米) 1백 석(石)을 제마음대로 내어 4마리의 준마(駿馬)를 환매(幻買)하니, 추문(醜聞)이 떠들썩하고 낭자하여 숨기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말단의 세 건의 일은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한재(旱災)가 이처럼 혹심하니 민사(民事)가 갈민(渴悶)245) 하다. 소석(疏釋)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내일 소결(疏決)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세 차례 비가 오기를 빈 뒤에도 비가 올 뜻이 더욱 아득하니, 민사(民事)를 생각하면 근심하는 마음이 타는 듯하다. 친히 사단(社壇)에 기도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으니, 복일(卜日)할 것 없이 24일로 정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니, 승정원에서 기일이 너무 촉박하다 하여 25일로 물려서 행하고, 환궁(還宮)한 뒤 이어서 소결(疏決)을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4일 무인
밤 1경(一更)에 목성(木星)이 방성(房星) 제1성과 합하였다.
정수기(鄭壽期)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를 올려 더위를 무릅쓰고 친히 기도하는 것과 세제(世弟)가 수가(隨駕)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이번에 비가 오기를 비는 것은 가뭄을 안타깝게 여기는 뜻에서 나왔으니, 경(卿)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문학(文學) 이명의(李明誼)와 설서(說書) 이광보(李匡輔)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청하기를,
"질병을 조심하는 방도와 소유(小愈)의 경계를 진념(軫念)하시어 빨리 왕세제(王世弟)에게 아헌례(亞獻禮)를 마련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세제(世弟)는 마땅히 따라가야 한다."
하였다.
4월 25일 기묘
임금이 장차 사단(社壇)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한낮의 폭염(暴炎)이 한창 뜨거웠다. 약원 제조(藥院提調) 한배하(韓配夏)와 부제조(副提調) 김시환(金始煥)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굳이 어련(御輦)을 타기를 청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끝내 따르지 아니하고 그대로 보련(步輦)으로 거둥하였다.
임금이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을 한꺼번에 사사(賜死)하는 것은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다. 며칠 전의 전지(傳旨)를 환수(還收)하니, 감사(減死)하여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김시환(金始煥)·남취명(南就明)·김치룡(金致龍)·조경명(趙景命)·황이장(黃爾章)·박희진(朴熙晉) 등이 봉승(奉承)할 수 없다는 뜻을 진계(陳啓)하고 힘써 반한(反汗)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이미 대계(臺啓)를 따라 비로소 처참(處斬)·정형(正刑)을 명했다가, 즉시 대신(大臣)의 차자로 인하여 사사(賜死)하라는 명을 내렸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갑자기 감사(減死)하라는 하교가 있어서 처분(處分)이 전도(顚倒)되었으므로, 인심이 의혹해 하며 감히 우러러 헤아리지 못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 사간(司諫) 이제(李濟), 장령(掌令) 신유익(愼惟益)·이경열(李景說), 헌납(獻納) 윤회(尹會) 등이 어가(御駕) 앞에서 청대(詩對)하고 합계(合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죄인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감사(減死)하라는 명(命)이 있었다 하니, 신 등은 지극한 놀라움과 의혹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두 흉적(凶賊)의 역절(逆節)이 추안(推案)에 낭자한 것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통촉(洞燭)하셨습니다. 당초에 사사(賜死)하라는 것도 더할 수 없이 큰 실형(失刑)이었는데, 이번에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또 천만 뜻밖에 내리셨으니, 신 등은 실로 성의(聖意)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라 하여 용서하는 바가 있다면, 지금부터 이후로 비록 왕망(王莽)·동탁(董卓)과 같은 역적이 있다 하더라도 장차 구신이라 하여 정법(正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이 두 적(賊)을 만약 왕법(王法)으로 통쾌히 바로잡지 않는다면, 흉역(凶逆)의 무리는 더욱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을 것이고 종사(宗社)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에 닥칠 것입니다. 청컨대 이이명·김창집을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거두어 정지하시고, 율(律)에 의하여 처단(處斷)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승지가 바야흐로 대계(臺啓)가 있어 감사(減死)하는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할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임금이 종묘(宗廟)의 앞길에 이르자, 승정원(承政院)과 옥당(玉堂)에서 들어와 어련(御輦)을 타도록 청하고, 왕세제(王世弟) 또한 청대(請對)하여 간절히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날 왕세제가 어가(御駕) 앞에 달려 나아가 기복(起伏)하고 진청(陳請)하였는데, 위의(咸儀)와 사령(辭令)이 모두 절도(節度)에 맞았으므로, 좌우의 보고 듣는 이들이 기뻐하며 찬송(贊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26일 경진
밤 4경(四更)에 임금이 몸소 사단(社壇)에 기도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환궁(還宮)하였는데, 여러 승지들이 어가(御駕) 앞에 입대(入對)하여 소결(疏決)을 물려서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날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소결(疏決)을 행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대신(臺臣) 등이 힘써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감사(減死)하라는 명(命)을 거두어 정지할 것을 청하고, 다시 아뢰며 번갈아 간(諫)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은 신이 이 일에 참여해 논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로부터 신하로서 이런 죄명(罪名)을 진 자가 어찌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었겠습니까? 외의(外議)가 바야흐로 사사(賜死)를 실형(失刑)한 것이라 하며 신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신은 아조(我朝)에서 관대함을 숭상하였으니, 이미 똑같은 죽음이라면 참작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의 성교(聖敎)는 여러 사람의 마음 밖에서 나왔으니, 당초 대계(臺啓)를 윤종(允從)하신 일로 살펴보건대 처분(處分)이 서로 현격하여 지극히 전도(顚倒)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사(賜死)하는 도사(都事)가 내려간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살릴 도리가 없습니다.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하시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고,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은 말하기를,
"신 등은 두 죄인의 죄상이 비록 대신(臺臣)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곧바로 처참(處斬)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선조(先朝) 때 이미 행하였던 일을 따르기를 청하였던 것이니, 대신(臺臣)이 허물하고 책망하는 것을 신은 실로 마음에 달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賜死)하라는 전지(傳旨)를 내려 보낸 지 사흘 만에 또 뜻밖에 갑자기 감사(減死)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처분이 전도(顚倒)된 것입니다. 대신의 말이 지극히 옳으니 환수(還收)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승지 남취명(南就明)은 말하기를,
"도사(都事)가 빨리 갔다면 죄인은 반드시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성교(聖敎)를 비록 내리신다 하더라도 죄인에게 이익이 없으며, 국옥(鞫獄)을 미처 마치지 아니하여 인심(人心)이 해체(解體)될 것입니다."
하고, 동의금(同義禁) 김일경(金一鏡)은 말하기를,
"어제의 비망기(備忘記)를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가지고 들어와 효주(爻周)246) 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신하들이 힘써 대여섯 차례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하가 임금 앞에서 가부(可否)를 다툴 때는 비록 견거(牽裾)·절함(折檻)247) 한다 할지라도 사리(辭理)가 위곡(委曲)하여 조용히 핍박하지 않는 뜻이 있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경·박필몽의 경우는 매번 진대(進對)하면 사기(辭氣)가 왕성하여 곧장 임금을 핍박하는 뜻이 있었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어찌 이처럼 무례(無禮)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역절(逆節)의 조짐인가?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율(律)에 의거해서 처단(處斷)할 것을 청하고, 또 각각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역적 집안의 적몰(籍沒)한 재산은 모두 백성의 고혈(膏血)을 긁어내어 얻은 것이었으니, 마땅히 호조(戶曹)로 하여금 죄다 민역(民役)에 보충하여 민정(民情)을 위열(慰悅)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날이 저물었으므로, 소결(疏決)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물러갔다.
4월 27일 신사
상주(尙州)의 삼성 죄인(三省罪人)248) 옥강(玉江) 등 2명을 나래(拿來)할 때 죽산(竹山)에 이르러 한 사람이 도망하였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해당 도사(都事)가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려 나문(拿問)해 죄를 정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해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집의(執義) 서명우(徐命遇)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유정장(柳貞章)·순천 군수(順川郡守) 우홍귀(禹洪龜)·재령 군수(載寧郡守) 우홍채(禹洪采)·안악 군수(安岳郡守) 최진추(崔鎭樞)는 모두 흉당(凶黨)의 사인(私人)으로서, 풍요한 고을에 이임(莅任)하여 그 지휘를 받으며 노예(奴隷)와 같은 바가 있었습니다. 탐욕스러움이 한정이 없어 부극(掊克)249) 이 백성에게 미쳤으며, 짐바리를 실은 수레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원망과 비방이 길에 가득합니다. 하루라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청컨대 모두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니,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司諫) 이제(李濟)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별검(別檢) 이휘천(李輝千)은 흉괴(凶魁)의 여당(餘黨)으로서, 일찍이 제관(祭官)에 임명된 날을 당하여 감히 나라에 대해 망측한 말을 공좌(公坐)에서 창언(唱言)하였습니다.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지극히 엄중하고 또 구분이 확실한 것입니다. 지난 겨울의 처분은 위단(威斷)이 혁연(赫然)하였으니, 진실로 전하를 북면(北面)하여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차마 들을 수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말을 이처럼 무엄하게 제멋대로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삼성 죄인(三省罪人)을 나래(拿來)한 도사(都事)를 나문하여 죄를 정할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교리(交理) 심공(沈珙)이 말하기를,
"옥당(玉堂)의 신록(新錄)이 이미 완성되었고, 도당(都堂)250) 에서도 장차 권록(圈錄)하려 하는데, 신록(新錄)된 여섯 사람은 곧 병신년251) 의 선록(選錄) 가운데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지난날 사람들이 권점(圈點)하였을 때 문형(文衡)이 참석하지 않았던 것은 전규(前規)가 아니라 하여 삭록(削錄)하기에 이르렀으나, 그후 차례로 참록(參錄)하여 남은 사람이 6인인데, 유독 엄경(嚴慶)만은 마침내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그래도 다시 참록될 희망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참록될 날이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이 본관(本館)에 들어와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기사년252) ·계미년253) ·병술년254) ·무자년255) 의 선록(選錄)에 모두 문형(文衡)이 없었고, 오로지 제학(提學)이 권록(圈錄)을 주관하였으니, 전례(前例)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초에 삭록(削錄)했던 것은 그 사람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례가 또 이와 같으니, 도당록(都堂錄)256) 이 완성되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7인을 특별히 다시 선록(選錄)하여 조용(調用)한다는 뜻을 대신(大臣)에게 하순(下詢)하시어 처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는 말하기를,
"당초에 삭록(削錄)했던 것은 그 사람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니었으며, 다만 제학(提學)만이 홀로 참석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근거할 만한 전례를 얻었으니, 구록(舊錄)에 의거하여 조용(調用)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김제겸(金濟謙)을 잡아 가두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지금 칙사(勅使)의 패문(牌文)257) 의 내용을 보았더니, 통관(通官)이 정해진 액수(額數)보다 더 나오고, 근수(跟隨)258) 는 75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전에 없던 일이니, 칙사의 차비 역관(差備譯官)259) 을 칙사가 만상(灣上)에 도착하기 전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히 보내어 약조(約條)에 의해 반복해 쟁난(爭難)하게 하여 한도를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4월 28일 임오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번의 가뭄은 또한 너무 혹심해서 달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아니하여 온갖 생물(生物)들이 타서 말라가고 있으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마음이 타는 듯하다. 다시 남단(南壇)에 친히 기도할 터이니, 복일(卜日)하지 말고 30일로 정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사단(社壇)에 친히 제사지내신 것이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 10리나 되는 이경(里埛)에 동가(動駕)하여 밤을 넘기신다면, 옥체(玉體)가 손상될 염려가 없지 아니합니다. 또 길가의 여사(閭舍)가 깨끗하지 못하니, 힘들여 왕래하심은 근신(謹愼)하시는데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남단(南壇)에 친히 기도하신다는 명을 빨리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친히 기도하겠다는 명은 가뭄을 근심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처음에 역적 정인중(鄭麟重)의 처자(妻子)가 물에 빠져 자살하였다고 사칭(詐稱)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포도청(捕盜廳)에서 그 아들 정박(鄭珀)을 기찰(譏察)해서 잡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상집(李尙)·김시태(金時泰)·백열이(白烈伊)·이삼석(李三錫) 등을 잡아 가두었다.
4월 29일 계미
사시(巳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계사(啓辭)로 청하기를,
"신중하게 하는 도리로 빨리 친히 기도하겠다는 명을 정지하소서. 만약 꼭 친히 행하시겠다면, 어둡기 전에 동가(動駕)하여 날이 밝은 뒤에 환궁(還宮)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친히 기도하는 것은 이미 정해졌다. 날이 어둡기 전에 동가(動駕)하여 날이 밝은 뒤에 환궁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병 때문에 어가(御駕)를 따라가지 못하고, 차자를 올려 빨리 친히 기도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거듭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친히 기도하겠다는 명(命)은 초조하고 근심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경(卿)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박필몽(朴弼夢)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세덕(李世德)을 수찬(修撰)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익명(趙翼命)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박필몽·조원명·이세덕은 모두 다시 선록(選錄)된 사람이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한배하(韓配夏)와 부제조(副提調) 김시환(金始煥)이 청대(請對)하여 친히 기도하지 말고 대신(大臣)을 보내어 대신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또 날짜를 약간 물릴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아니하였다.
의금부(義禁府)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4월 30일 갑신
임금이 친히 남단(南壇)에 기도하였는데, 비가 조금 오다가 곧 그쳤다.
이이명(李頤命)이 사사(賜死)되었다. 도사(都事)가 중로(中路)에서 길이 서로 어긋났으므로, 나래(拿來)하는 선전관(宣傳官)이 죽산(竹山)에 이르러 치계(馳啓)하자, 급히 다른 도사(都事)를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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