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8권, 경종 2년 1722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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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을유

효령전(孝寧殿)260)  의 삭전(朔奠)을 왕세제(王世弟)가 섭행(攝行)하였다.

 

경상도(慶尙道)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발생하였으며, 서리가 내렸다.

 

진수당(進修堂)에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을 때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이 말하기를,
"두 차례 친히 기도하셨으나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지 아니하고 있는데, 각도(各道)의 장계(狀啓)를 잇따라 보건대, 한재(旱災)가 똑같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성탕(成湯)의 육책(六責)261)  의 뜻을 본받으셔서 수성(修省)을 더욱 더하시고, 한가한 여가에도 항상 친히 기도하셨던 때와 같이 대월(對越)262)  ·인외(寅畏)263)  하는 생각을 늦추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승지 박희진(朴熙晉)이 말하기를,
"전후의 소장(疏章)에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이 자못 많습니다.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은 대우하는 것이 자별(自別)한데, 좌의정 최규서(崔奎瑞)와 대사헌 정제두(鄭齊斗)의 상소를 봉입(捧入)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또한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사체(事體)에 있어서 지극히 미안합니다. 청컨대 속히 비답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전(前) 현감(縣監) 김시발(金時發)을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핵실(覈實)하고 정죄(正罪)할 것을 청하였는데, 김시발은 곧 이이명(李頤命)의 사위이다. 이이명을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한 뒤 의금부에서 급히 관문(關文)을 사사(賜死)하는 도사(都事)가 도착하는 곳에 보내자, 역졸(驛卒)이 나는 듯이 전하여 공주(公州)의 차령(車嶺)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김시발이 건강한 노복(奴僕)을 거느리고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관문을 빼앗아 제마음대로 뜯어 보고 역졸을 구류(拘留)하여 곧은 길로 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성환 찰방(成歡察訪) 황윤후(黃允垕)가 이것을 장문(狀聞)한 것이다.

 

삼성 죄인(三省罪人) 옥세(玉世)가 복주(伏誅)되었다.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전답(田畓)과 재물을 서로 다투는 일로 형과 동모(同謀)하여 숙모(叔母) 승옥(承玉)을 타살(打殺)하였고, 그 타살한 흔적을 숨기려고 새끼줄로 목을 매어 부엌의 서까래에 매달아 둔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5월 2일 병술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영단(靈壇)에 규벽(圭璧)264)  을 꽂고 친히 기도하신 것이 두 번에 이르렀으나, 비가올 듯하다가 오지 않는 채 하늘의 감응(感應)이 막연합니다. 청컨대 중신(重臣)과 대신(大臣)을 보내어 차례로 비를 빌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한재(旱災)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민사(民事)가 갈민(渴悶)하다. 국청 죄수를 한결같이 시일을 끌고 있으니 옥수(獄囚)를 형추(刑推)해서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나머지 옥수는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예로부터 죄수를 구휼할 때 역옥(逆獄)을 경솔하게 앞질러 소석(疏釋)한 일은 없었으므로, 성교(聖敎)를 감히 봉승(奉承)할 수 없다는 뜻을 진계(陳啓)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신(大臣)·금부 당상(禁府堂上)·옥당(玉堂)·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여 국옥은 다른 죄수와 다르므로 가뭄을 걱정하여 경솔하게 석방할수 없다는 뜻을 힘써 진달하고, 이어서 그 가운데 정범(情犯)이 조금 가벼운 자에 대해서는 작처(酌處)하되, 홍철인(洪哲人)은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고, 이상건(李尙健)은 정배하고, 백망(白望)의 종 학손(鶴孫)과 백망을 위해 서찰(書札)을 왕복(往復)한 궁인(宮人)은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현덕명(玄德明)·김수천(金壽天)은 감사(減死)하여 절도에 정배하고, 이삼석(李三錫)은 방송(放送)하고, 조성복(趙聖復)은 절도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할 것을 청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을 안율(按律)해서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홍우전(洪禹傳)을 삭판(削版)하는 일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윤정주(尹廷舟)를 원찬(遠竄)하는 일에 대해서는 약간 조어(措語)를 첨가해 이르기를,
"오랫동안 보장(保障)265)  의 땅을 차지하여 몰래 승도(僧徒)와 결탁하였으니 심적(心跡)을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지금 역옥(逆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날에 이르러서는 경련(京輦)에 출몰하여 행동거지가 궤비(詭秘)하였습니다……."
하고, 회령 부사(會寧府使) 유정장(柳貞章)·순천 군수(順川郡守) 우홍귀(禹洪龜)·재령 군수(載寧郡守) 우홍채(禹洪采)·안악 군수(安岳郡守) 최진추(崔鎭樞) 등을 삭판(削版)하는 일에 대해서는 약간 조어(措語)를 첨가해 이르기를,
"유정장(柳貞章)은 흉적(凶賊) 김창집(金昌集)의 심복(心腹)으로서, 일찍이 황해 병사(黃海兵使)가 되었을 때 김창집의 서종(庶從) 김창엽(金昌燁)을 데리고 가서 미전(米錢)·어염(魚鹽)을 배에 가득 실어 보냈습니다. 또 정주(定州)에 부임했을 때에는 저들에게서 명구(名駒)266)  를 사서 김제겸(金濟謙)에게 보냈습니다. 우홍귀(禹洪龜)는 흉적 김창집을 붙좇아 외람되게 이름난 고을을 차지하였는데, 내려갈 때 김제겸이 노둔한 말 한 필을 보내 주며 그 값을 넉넉하게 갚도록 하자, 우홍귀가 마음에 달갑게 여겨 받아 가지고 가서 부임한 그 다음날 관마(官馬)의 값이라고 핑계 대어 3백 관(貫)의 돈을 민결(民結)에서 함부로 거두어 급급하게 실어 보냈습니다. 최진추는 본래 이희지(李喜之)의 압객(狎客)으로, 그 서녀(庶女)를 바쳐 이관명(李觀命)의 서부(庶婦)로 삼고는 이를 인연(寅緣)하여 교분을 맺어 큰 고을에 임명될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 이희지가 이정식(李廷植)을 내려 보내자 1천여 관(貫)의 돈과 물화를 짐바리에 실어보낸 정상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가, 대신(臺臣)이 억지로 청하니 이에 모두 따르고, 사간원(司諫院)의 전계(前啓)는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새로 아뢰기를,
"역신(逆臣)을 사사(賜死)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급박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번에 약(藥)을 가지고 간 도사(都事)가 도중에 길이 서로 어긋나 흉괴(凶魁)로 하여금 오랫동안 왕장(王章)을 피한 채 경련(京輦)에 가까이 오게 하였으니, 실로 전에는 있지 않고 변고(變故)입니다. 비록 후원(喉院)의 계품(啓稟)으로 인하여 이미 왕부(王府)로 하여금 감죄(勘罪)하게 하였으나, 가벼운 죄수와 같이 보고 대략 박벌(薄罰)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당해 도사(都事)를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하소서. 벽사 찰방(碧沙察訪) 박태준(朴泰俊)은 흉역(凶逆)이 난육(卵育)한 부류로서, 이번에 역적 이희지를 나래(拿來)하는 도사(都事)가 달려가 배소(配所)에 도착하였으나, 박태준이 산촌(山村)의 은밀하고 궁벽한 곳에다 감추어 두고 왕인(王人)으로 하여금 뒤따라 가서 체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도사(都事)가 칼을 뽑아 들고 내놓을 것을 독촉한 뒤에야 비로소 그 있는 곳을 고(告)하였으니, 그가 왕명(王命)을 업신여기고 국적(國賊)을 용납하여 비호한 죄를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국청으로 하여금 나국(拿鞫)하여 엄중히 추문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죄인 김창집(金昌集)이 지난 달 29일 성주(星州)에 도착하여 사사(賜死)된 일을 장문(狀聞)하였다.

 

적인(賊人) 이상기(李尙起) 등 5명에게 행형(行刑)하였다.

 

5월 3일 정해

서명균(徐命均)을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서명균은 고(故) 현상(賢相) 서종태(徐宗泰)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지론(持論)이 화평(和平)하여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습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에 중비(中批)267)  로 전부(銓部)의 좌이(佐貳)268)  에 발탁 임명하자, 서명균은 심단(沈檀)·김일경(金一鏡)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상소하여 힘껏 사양하고, 또 기사년269)  의 당인(黨人)과 함께 용납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진달하니, 심단과 김일경이 깊이 원한을 품고는 도리어 꾸짖는 것이 몹시 패리(悖理)하였다. 윤지술(尹志述)이 피살(被殺)되자 서명균이 시휘(時諱)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항소(抗疏)하여 선비를 죽인 잘못을 논하였는데, 기사년(己巳年)의 당인들이 원망을 품고 떼 지어 일어나 역적을 비호하는 것으로 몰아대었으며, 마침내 박필몽(朴弼夢)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뒤 소장(疏章)이 공거(公車)에 번갈아 올라 걸핏하면 서명균을 죄주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전조(銓曹)를 맡은 자도 또 심단과 김일경의 위세와 공갈을 두려워하여 감히 끌어 임용하지 못한 채 일절 지색(枳塞)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또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2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267] 중비(中批) : 전형(銓衡)을 거치지 않고 임금의 특지(持旨)로 관원을 임명하는 일.[註 268] 좌이(佐貳) : 행정 육조(六曹)의 참판(參判)과 참의(參議). 기타 각 관사(官司)의 차석(次席)을 이르는 말.[註 269]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사신은 논한다. "서명균은 고(故) 현상(賢相) 서종태(徐宗泰)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지론(持論)이 화평(和平)하여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습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에 중비(中批)267)  로 전부(銓部)의 좌이(佐貳)268)  에 발탁 임명하자, 서명균은 심단(沈檀)·김일경(金一鏡)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상소하여 힘껏 사양하고, 또 기사년269)  의 당인(黨人)과 함께 용납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진달하니, 심단과 김일경이 깊이 원한을 품고는 도리어 꾸짖는 것이 몹시 패리(悖理)하였다. 윤지술(尹志述)이 피살(被殺)되자 서명균이 시휘(時諱)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항소(抗疏)하여 선비를 죽인 잘못을 논하였는데, 기사년(己巳年)의 당인들이 원망을 품고 떼 지어 일어나 역적을 비호하는 것으로 몰아대었으며, 마침내 박필몽(朴弼夢)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뒤 소장(疏章)이 공거(公車)에 번갈아 올라 걸핏하면 서명균을 죄주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전조(銓曹)를 맡은 자도 또 심단과 김일경의 위세와 공갈을 두려워하여 감히 끌어 임용하지 못한 채 일절 지색(枳塞)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또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된 것이다."

 

역적 이영(二英)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이 공초(供招)하기를,
"아무개가 은 2천 냥을, 아무개가 은 5백 냥을, 아무개가 은 70냥을 내었는데, 백망(白望)이 이영(二英)에게 주어 그 사촌인 궁녀(宮女) 이씨(李氏)와 같은 성(姓)인 궁인(宮人) 백씨(白氏)와 지 상궁(池尙宮)에게 바치게 해서 독약을 쓰는 일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이것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발명(發明)하여 공초를 바쳤다. 다시 추문(推問)하는 문목에 이르기를,
"은자(銀子) 1백 냥을 백망이 봉(封)해 둔 정상을 목호룡이 눈으로 직접 보았고, 지씨(池氏)는 원래 백망이 평생 구실로 삼던 사람으로 이미 궁중의 제일 상궁(尙宮)이었으니, 어찌 알지 못할 이치가 있겠느냐? 백망이 스스로, ‘이씨(李氏)·백씨(白氏)와 몰래 결탁하고, 또 이영(二英)을 시켜 몰래 내통하게 하였다.’고 낱낱이 직고(直告)하였는데, 전일의 초사 가운데, ‘원래부터 사촌(四寸) 이씨(李氏)가 궁인이 된 일이 없다.’고 범연하게 발명하였으니, 덮어 숨기고자 하는 정상이 너무 간교하다."
하였으나, 초사(招辭)를 여전히 굳게 은휘(隱諱)하였다.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여 한 차례 형문하였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그 어미 업이(業伊)가, ‘이씨 궁녀는 이영(二英)의 사촌(四寸)이 아니고 곧 육촌(六寸)으로, 그 이름이 묵세(墨世)인데, 바야흐로 대전(大殿)의 궁인이 되었습니다.’라고 공초하고, 묵세가, ‘과연 육촌이며, 이영이 계집종 철이(鐵伊)를 시켜 부르기에 재차 가서 만나고 백망과 수작하였습니다.’라고 공초하자, 이것을 가지고 다시 추문하였더니 공초하기를,
"백망이 묵세(墨世)를 만나 보고자 했으므로 서로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수작(酬酢)한 뒤 저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므로, 처음 초사에 감히 직고(直告)하지 아니하였으나, 지금 비로소 실토하겠습니다. 지난해 11월 무렵에 백망이 묵세에게 말하기를, ‘내간(內間)에 어떤 기별(奇別)이 있으면 이렇게 저렇게 서로 통하여 판(板)을 바꾸도록 하라. 내가 서로 친하게 지내는 양반이 좋은 벼슬을 하면 나 또한 요(料)를 먹을 수 있다.’고 하자, 묵세가 답하기를,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나인[內人]이 어떻게 나랏일을 알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은자(銀子)는 백망이 언제나 책권(冊卷)이라고 일컬으며 출입할 때 소매 속에 넣고 왔다가 소매 속에 넣고 나갔으니 몹시 비밀스러웠으며, 그 처남(妻男)이 모은 돈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하였는데, 국청에서 전후로 공사(供辭)를 변환(變幻)한 정상이 교사(巧詐)하다 하여 형신(刑訊)을 가하였다. 무수리[水賜] 승업(勝業)과 면질(面質)시키자 승업이 말하기를,
"지난해 8월과 12월에 네가 술병과 작은 서찰을 무릇 세 차례나 백씨·이씨 두 궁인에게 나누어 보내고는 나와 철이(鐵伊)의 어미로 하여금 전해 주게 한 것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이영(二英)이 한참 동안 잠자코 말이 없었다. 승업(勝業)이 꾸짖기를,
"너는 어찌하여 직고(直告)하지 않고서 나로 하여금 이런 지경을 당하게 하느냐?"
하니, 이영이 말하기를,
"과연 이런 일이 있었으나, 처음에 직고(直告)하지 아니한 것은 백씨가 백망의 족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열(白烈)이 와서 자던 일과 서찰을 왕복하고 술병을 출입했다는 등의 말은 네 말이 모두 옳다."
하였다. 다섯 번째의 형신에서 제2도(度)에 이르러 비로소 지만(遲晩)하였는데,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백망이 조흡(趙洽)의 2천 냥, 심상길(沈尙吉)의 은 2백 냥, 홍의인(洪義人)의 은 50냥, 이희지(李喜之)의 은 70냥을 저에게 주어 궁녀 이씨·백씨에게 바치게 하고, 다시 지 상궁에게 전해 주어 독약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망이 묵세(墨世)를 만나 보고자 하였으므로 제가 서로 만나게 해 주었으며, 백열은 네 차례 저희 집에 유숙(留宿)하며 백망과 상면(相面)하였습니다. 소찰(小札)을 자주 왕복한 정상은 백열이 이미 곧바로 공초하였는데, 백망 및 백망의 딸과 누이가 모두 지 상궁과 서로 친하게 지내며 왕래하였고, 지 상궁 또한 자주 백망의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저는 술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좋은 술이 있었는데, 백망은 번번이 술단지를 지 상궁과 그 아들 창귀(昌貴)의 집에 보냈습니다. 백망이 차고 있는 주머니 속에는 항상 환약(丸藥) 3개가 있었는데, 소합원(蘇合元)은 그가 스스로 월경(月經)에 타서 마셨고, 황색 환약은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단단히 풀로 봉하여 필갑(筆匣)에 넣고 또 주머니 속에다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주머니는 평상시에 비봉(秘封)하였고, 밤에 잘 때면 반드시 이부자리 밑에다 두어 저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저는 그것이 몇 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월(年月)은 기억하지 못하나, 지 상궁이 그의 집에 나왔을 때 백망이 직접 가지고 가서 그대로 주어 보낸 일을 참여해 알았음은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5월 4일 무자

국청(鞫廳)에서 박태준(朴泰俊)을 의금부(義禁府)로 이송(移送)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최규서(崔奎瑞)의 상소에 답하기를,
"전후의 비답에서 이미 내 뜻을 다 말하였으니, 다시 어찌 말을 하겠는가? 경(卿)은 모름지기 전후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 것이며, 뜻을 바꾸어 길에 올라 나의 생각하고 그리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상소가 봉입(捧入)된 지 넉 달만에 지금 비로소 비답을 내린 것이다.

 

조성복(趙聖復)을 정의(旌義)에 안치(安置)하고, 윤정주(尹廷舟)를 고성(固城)에다 위리(圍籬)를 가하였으며, 현덕명(玄德明)을 나주(羅州)에, 홍철인(洪哲人)을 위원(渭原)에, 김수천(金壽天)을 제주(濟州)에, 학손(鶴孫)을 대정(大靜)에, 이상건(李尙建)을 삼수(三水)에 정배(定配)하였다.

 

5월 5일 기축

신시(申時)에서 유시(酉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정언(正言) 이진순(李眞淳)과 장령(掌令) 신유익(愼惟益)이 홍철인(洪哲人) 등을 작처(酌處)할 때 쟁집(爭執)하지 못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 명하였으나, 신유익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서명우(徐命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이 찬역(簒逆)한 죄는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바인데 이의(異議)가 겹쳐 생겨나 죄가 사사(賜死)하는 데에 그쳤으니, 처분이 전도(顚倒)되어 실형(失刑)이 더할 수 없이 큽니다. 아!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추대(推戴)하려 했던 정상이 이미 드러났고, 한 가문에서 흉심(凶心)을 품어 반역(叛逆)하려 한 자취가 더욱 밝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밀지(密旨)를 얻으려 도모한 것이 동당(同黨)의 상변(上變)에 뒤이어 나왔고, 폐출(廢黜)하려 한 음험한 계획은 궁성(宮城)에 군사를 배치할 때 이미 정하여졌습니다. 지난날 민암(閔黯)은 죄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나 오히려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였는데, 하물며 이 두 흉인의 죄는 이보다 만 배나 되는 경우이겠습니까? 삼척(三尺)의 법은 결코 휘어 굽히는 바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니, 청컨대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수노 적산(收孥籍産)하게 하소서.
흉역(凶逆)의 무리가 어느 세대(世代)엔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요악(妖惡)하고 음흉함이 어찌 역적 이희지(李喜之)에게 견줄 자가 있겠습니까? 비록 장세상(張世相)의 초사(招辭)를 보더라도 그가 가사(歌辭)를 지어 성궁(聖躬)을 무훼하고 선지(先旨)를 거짓으로 꾸며내어 몰래 폐출을 도모한 정상이 낭자하여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속영정행(續永貞行)’에 이르러서는 꿈을 빙자하여 하늘에 계신 선왕의 혼령을 교무(矯誣)하고 성궁(聖躬)을 욕보여 심지어 당(唐)나라 순종(順宗)의 혼란(昏亂)함에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대개 순종은 풍질(風疾)을 앓는데다 또 벙어리가 되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비(伾) 문(文)의 당(黨)270)  이 때를 틈타 국정(國政)을 장악하여 제멋대로 위복(威福)을 제멋대로 농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역적은 드러나게 성명(聖明)의 맑은 교화(敎化)를 영정(永貞)271)  의 시위(尸位)272)  로 돌렸습니다. 그 중에 ‘꼭뚝각시가 줄이 떨어지자 진면목이 드러났다.[傀儡索墜露眞面]’라는 구절은 성궁(聖躬)을 오욕(汚辱)한 것이 더욱더 음흉(陰凶)하였는데, 그 뜻은 전적으로 ‘꼭뚝각시’란 말로 감히 견줄 수 없는 곳에다 견주고, ‘줄이 떨어졌다.’는 말로 두 환시(宦寺)의 죽음에다 비겼던 것입니다. ‘진면목이 드러났다[露眞面]’는 세 글자는 그 비긴 것이 더욱 지극히 절패(絶悖)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지난날의 처분(處分)이 모두 능히 성상의 결단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두 환시가 죽은 뒤에 그 본색(本色)을 숨기지 못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밤에 조서(詔書)를 지어 아침에 벼슬을 임명하니, 지난날 들었던 영정(永貞)이 오늘 다시 있도다.’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서는 거짓 조서나 가사의 뜻과 정확히 서로 들어맞으니, 흉역(凶逆)한 마음이 남김없이 탄로나서 승복(承服)을 기다리지 않고도 환하여 숨길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 어미의 편지에, ‘사기(事機)가 거의 이루어진 것이 마치 이미 지어 놓은 밥과 같으니, 4월 10일 후에는 저절로 좋은 도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삼수(三手)란 흉악한 계획의 포치(布置)가 이미 정해져 집안의 부녀자들이 충분히 듣고 익히 알지 않았다면, 어찌 언서(諺書)에 올려 기일(期日)을 지적하고 확실히 말하는 것이 이처럼 낭자한데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 어미와 누이의 언찰(諺札)이 현발(現發)되자, 뒤따라서 즉시 자결(自決)하여 마치 역모(逆謀)를 참여해 안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취를 없애는 데 이를 수 있겠습니까? 역적 이희지는 비록 형장(刑杖)을 맞고 죽었지만 역률(逆律)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국청으로 하여금 수노 적몰(收孥籍沒)하게 하소서.
지열(池烈)의 죄악은 이루다 베어죽일 수 없음이 있습니다. 허다한 여러 역적들의 흉모와 뇌물이 모두 다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으며, 약속과 맹세가 정녕(丁寧)하고 정절(情節)이 치밀하였으니, 비록 이영(二英)이 승복한 초사(招辭)로 살펴보더라도 그가 환약(丸藥)을 가져다 준 정상이 남김없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만약 살아 있다면 만 갈래로 참(斬)하여 온 나라의 분심(憤心)을 풀어 삼척(三尺)의 법을 바로잡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만, 유독 한스럽게도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어 길거리에 내거는 율을 시행할 수가 없으므로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고 여정(輿情)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빨리 수노 적몰(收孥籍沒)을 더하소서. 한 번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궁금(宮禁)에 뇌물을 많이 쓴 뒤로 주액(肘腋)의 변고(變故)는 아직도 근심스런 것이 많습니다. 지열(池烈)의 절친(切親)이 더러 액례(掖隷)로 있는데, 더욱 원한과 독기(毒氣)를 품은 채 스스로 서로 근심하고 의심하여 그 계책을 꾸미는 바가 이르지 아니하는 곳이 없습니다. 환약을 가져다 주었다는 말이 이미 이영의 초안(招案)에서 나왔으나, 이른바 환약이 어떤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역적 지열이 이미 죽었으므로 비록 끝까지 핵실(覈實)할 수 없다 하나, 이러한 무리들은 결코 한 시각이라도 궁액(宮掖)에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열이(烈伊)의 족속을 한결같이 모두 태거(汰去)하여 화근(禍根)을 막으소서.
역적 이희지를 나래(拿來)하러 간 도사(都事)가 영암(靈岩)에 이르자, 군수(郡守) 문덕린(文德麟)이 소매 속에서 본군(本郡)에 원찬(遠竄)된 죄인 홍석보(洪錫輔)의 소찰(小札)을 꺼내 보이며 역적 이희지의 집에서 수색해 찾아낸 문서(文書) 가운데 언찰(諺札) 한 장과 시고(詩稿) 한 장을 내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사가 길을 떠날 즈음에는 홍석보가 또 뒤따라 겸인(傔人)을 보내어 도중에서 그 시고(詩稿)와 언찰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게 하였는데, 언찰은 곧 이희지 어미의 편지였고 시고는 곧 역적 이희지가 지은 ‘속영정행(續永貞行)’이었습니다. 만약 홍석보가 애초부터 역적과 정상을 같이한 일이 없었다면 시고와 언찰의 있고 없음을 그가 어떤 연유로 함께 알았겠으며, 재삼 주기를 청한 것이 이처럼 간곡하였겠습니까? 끝까지 핵실하여 실정을 알아 내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국청으로 하여금 나국(拿鞫)해서 엄하게 신문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고, 역적 이희지와 홍석보의 일만 윤허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이제(李濟), 정언(正言) 정수기(鄭壽期)·이진순(李眞淳)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죄인 이이명(李頤命)을 사사(賜死)하라는 전지(傳旨)와 관문(關文)이 차령(車嶺)에 치도(馳到)할 즈음에 이이명의 사위 김시발(金時發)이 위협하여 관문을 빼앗아 제마음대로 뜯어 보고, 그것을 가지고 있던 자를 위협하고 꾸짖어 억지로 멀리 돌아가는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우관(郵官)이 이 사실을 치보(馳報)하였으니, 도신(道臣)이 된 자라면 마땅히 놀라서 척념(愓念)하여 한편으로는 장문(狀聞)하여 김시발을 잡아들이고 한편으로는 따로 가지고 가는 자를 정하여 급속하게 치통(馳通)했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범연(泛然)하게 곧장 의금부(義禁府)에 보고한다는 뜻으로 재순(再巡)하는 우장(郵狀)에 제송(題送)하였으니, 그 느슨하고 소홀하여 직무를 감당하지 못한 잘못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세근(李世瑾)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국청죄인(鞫廳罪人) 홍철인(洪哲人)은 목호룡(睦虎龍)의 상변(上變) 가운데 긴요하게 들어가 있는데, 이르기를, ‘여러 역적들이 모여서 모의하였을 때 홍의인(洪義人)·홍철인 또한 와서 같이 참석하였으며, 매화점(梅花點)이란 말이 있었다.’라고 하였고, 목호룡의 초사(招辭)에 또, ‘이희지(李喜之)·이기지(李器之)·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홍의인·홍철인 등 여섯 사람이 백망(白望)에게 은을 주어 지 상궁(池尙宮)과 열이(烈伊)에게 바쳐서 그들로 하여금 약을 타서 행흉(行凶)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그 간범(干犯)한 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그리고 이홍술(李弘述)이 육현(陸玄)을 박살(撲殺)하였을 때 현덕명(玄德明)은 홀로 그 지휘를 받아 정적(情跡)이 음비(陰秘)하였는데, 포청(捕廳) 소속(所屬)들이 거의 다 곧바로 공초(供招)하였으나 유독 현덕명만은 완악하여 승복(承服)하지 않았으니, 정상이 가증스럽습니다. 또 육현이 피살(被殺)된 일은 목호룡을 죽이려고 모의한 일과 한 가지에서 나왔는데, 모역(謀逆)한 여러 정절이 남김없이 탄로났으니, 국옥(鞫獄)을 끝까지 구명(究明)하기 전에는 결코 경솔하게 앞질러 작처(酌處)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홍철인·현덕명을 모두 그대로 가두어 두고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정상(情狀)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유용(柳綗) 등이 상소하여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육시(戮尸)하고,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정형(正刑)하기를 청하니, 입계(入啓)하였다.

 

심공(沈珙)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세덕(李世德)을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역적 이기지(李器之)가 물고(物故)되었다. 처음 잡혀 왔을 때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니, 발명(發明)하여 공초(供招)를 바치기를,
"목호룡이 시명(詩名)이 있다 하여 제가 한 번 만났는데, 언뜻 들으니 남인(南人)의 얼족(孽族)이라 하였고, 또 그 사람이 불길(不吉)하다 하였으므로 그 사람을 한 번 만났던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뒤에 그 사는 곳을 물었더니 어떤 왕자궁(王子宮)의 담 밖에 사는데 그곳의 도장(導掌)이라고 하였으므로 저는 몸이 오싹하도록 싫어져서 이어서 절교(絶交)하였고, 또 목호룡을 아는 친구들에게 권하여 절교하게 하였습니다. 백망(白望)은 일찍이 만나서 면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며, 김용택(金龍澤)의 집에서 이희지(李喜之) 등과 늘어 앉아 둔갑법(遁甲法)을 얻기를 원했다는 따위의 말은 모두 터무니없이 꾸며낸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다시 목호룡을 추문(推問)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제가 이기지와 서로 만난 뒤 이기지가 저로 하여금 어영 도제조(御營都提調)의 군관(軍官)이 되게 하였으나, 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역적들이 백망과 상의(相議)하였을 때 이기지 또한 그 가운데 들어가 모의와 계획을 참여해 들었음은 여러 역적들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기지와 서로 만났을 때 제 집은 사온동(司醞洞)에 있었고 그후에 체부동(體府洞)으로 집을 옮겼으며 또 당피동(唐皮洞)으로 옮겼으니, 왕자궁의 담 밖이라는 말은 절대로 사실에 가깝지 아니합니다. 저의 성(姓)이 ‘목(睦)’이었으므로 여러 역적들이 언제나, ‘그 성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하였고, 이기지 또한 의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얼굴은 검은데 말은 달콤하니, 마음속에 있는 말을 언급할 수 없다.’고 하며 언제나 건성으로 대접하였으니, 비록 서로 절교한 일은 없었지만 친밀함은 다른 역적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백망과 함께 김용택의 집에 앉아 있다가 이기지와 서로 만났는데, ‘일찍이 만나서 면대하지 못했다.’는 말은 더욱 매우 맹랑합니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이기지를 다시 추문하였으나 초사에서 또 발명하였다. 면질(面質)시키자, 목호룡이 이기지를 향하여 말하기를,
"네가 아무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느냐?"
하니, 이기지가 말하기를,
"그 말은 맹랑한 것이다."
하며 수백 마디 말로 서로 힐문(詰問)하였으나, 끝내 귀일(歸一)되지 않았다. 또 다시 이기지를 추문하니, 그 초사에 이르기를,
"제가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어 처음의 초사에서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이제 비로소 말하겠습니다. 제가 이미 목호룡과 절교한 뒤 백가(白哥)가 김용택의 집에 출입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차례 김용택에게 간절히 말하며 절교하게 하였더니 처음에는 분노하다가 끝내는 숨겼습니다. 그래서 입이 아프도록 힘껏 다투었으나 정의(情義)만 서로 잃게 되었습니다. 또 목호룡이 이천기(李天紀)의 집에 왕래한다는 것을 듣고 역시 절교하게 하였더니, 절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절교하라고 권한 말을 목호룡과 백망에게 말하였으므로 원한을 쌓은 것이 지극히 깊었습니다. 그리고 기해년273)   봄에 증광 초시(增廣初試) 때문에 반촌(泮村)274)  에 나가 거접(居接)하여 여름을 넘기고 가을로 접어들 때까지 있었고, 회시(會試) 뒤에는 즉시 신문(新門) 안으로 옮겼으며, 선대왕(先大王)께서 승하하신 뒤에는 저의 아비가 사행(使行)에 차임(差任)되었으므로 북경(北京)에 따라갔으니, 여러 사람들과 왕래하지 아니한 정상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언문(諺文)으로 된 가사(歌詞)는 제가 아는 바가 아니고, 목호룡이 말한 바 제가 김민택(金民澤) 등과 더불어 포장(捕將)을 사주해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더욱 맹랑합니다."
하였다. 세 번째로 다시 추문하는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목호룡과 재차 서로 만나 즉시 서로 절교하였다면, 비록 길거리에서 상봉하여 보고도 못본 체한 일이 있더라도 목호룡이 어찌 반드시 괴이하게 여기며 글을 보내어 너무 박대함을 책망하였겠느냐? 그리고 김용택과 내종제(內從弟)가 되어 담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백가(白哥)의 일로 더불어 분쟁(忿爭)하고 심지어 집을 옮기기까지 하였으니, 만약 백가와 김용택 등의 음비(陰秘)한 정상을 알지 못하였다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겠느냐? 이른바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있다.’는 것이 어떠한 정절(情節)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초사에 이르기를,
"당초에 목호룡을 배척하여 절교하였던 것은 그 죄악으로 인하여 절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왕자궁의 도장(導掌)이라 하여 절교한 것이니, 왕래하지 못하게 하자 목호룡이 편지를 써서 교유(交游)하기를 애걸하였던 것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됩니다. 전일의 초사에 ‘차마 하지 못할 바’라고 했던 것은, ‘백가가 김용택의 집에 출입하였다.’고 말한다면, 김용택이 바야흐로 사지(死地)에 있는데, 또 하나의 증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만 백가가 김용택의 집에 출입한다고만 들었는데, 백가는 곧 왕자궁의 소속(所屬)이었으므로 절교하게 하였던 것이며, 분노하여 다투고 상의한 일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들을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집을 옮긴 일은 다만 ‘그 당시 전적으로 김용택을 피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공초(供招)한 바가 군색한 둔사(遁辭)라 하여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는데, 형문이 세 차례에 이르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으며, 그 초사에 이르기를,
"선대왕(先大王)의 국휼(國恤) 전에 김순행(金純行)이 와서 말하기를, ‘목호룡이란 자가 이삼석(李三錫)에게, 「김용택 등 두세 사람이 어유귀(魚有龜)를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하였다는데, 그대의 이름 또한 그 속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듣고서 몹시 놀랐다. 그러나 평소에 그대가 잡류(雜流)와 사귀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내가 목호룡과 한두 번 만나고는 즉시 절교하였으므로 그 사람이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을 것이니, 이번에 구무(講誣)하는 것은 대개 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리고 비록 김용택 등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니, 김순행이 말하기를, ‘내가 이 말을 듣고, 「목가(睦哥)가 바로 남인(南人)의 얼족(孽族)이니, 반드시 교구(交構)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로써 이해한다.’ 하였는데, 김순행은 곧 어유귀의 매부(妹夫)입니다. 그 뒤에 제가 김순행이 한 말을 김용택에게 말하며, ‘내가 매번 그대에게 목호룡·백망과 절교하라고 경계하였는데, 그대가 이런 괴이(怪異)한 말을 들었으니, 내 말이 어찌 징험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하였더니, 김용택이 화를 발끈 내며, 이는 반드시 그대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나를 협지(脅持)해서 전에 했던 말을 사실로 만들려는 것이다.’라고 하기에 저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물러났습니다. 김용택은 저의 말을 듣고 믿지 못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그 말을 목호룡에게 전하였을 것입니다. 목호룡의 초사 가운데 있는, ‘저가 고변(告變)할까 의심하였습니다.’라고 한 것은 반드시 이 한 가지 일을 가리키는 것이니, ‘더불어 같이 모의하였으므로 고변(告變)할까 의심하였다.’는 말을 타파(打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전일의 초사에서 김순행을 운운한 것은 목호룡의 초사와 서로 들어맞아 정절(情節)이 완전히 드러났다 하여 문목을 첨가하여 다시 추문하였다. 네 번째 형문의 제1도(度)에 곧바로 공초(供招)하기를,
"제가 북경(北京)으로 갈 때 이천기가 찾아와서 만났는데, 이미 내가 김용택에게 말을 전한 사실을 이미 듣고서 말하기를, ‘목가(睦哥)를 제거하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쉽사리 제거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더니, 이천기가 말하기를, ‘덕우(德雨)275)  가 치중(致仲)276)  에게 말하여 이홍술(李弘述)에게 통한다면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홍술은 치중과 정의(情義)가 긴밀하지 못하니, 들어줄 것을 기필(期必)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헌(李瀗)과 서로 친하게 지내고 이헌의 아버지 이우항(李宇恒)은 이홍술과 서로 친하게 지내니, 체포하여 제거하도록 언급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자.’ 하므로, 제가, ‘만약 제거한다면 좋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해 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김민택을 만났더니, 김민택이 말하기를, ‘계원(啓元)의 무리가 괴이(怪異)한 사람과 사귀었는데, 지금은 곧 제거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으니, 어찌 가소롭지 아니한가?’ 하므로 제가, ‘만약 제거할 수 있다면 그대는 덕우(德雨)의 무리가 청하는 대로 제거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김민택이 웃었습니다. 그 뒤에 제가 북경(北京)에서 돌아오자 이천기와 김용택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목호룡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이홍술에게 그 말을 전했는가?’ 하니, 이천기가, ‘그렇다. 목호룡이 우리들이 저를 의심한다는 것을 듣고 겁을 내길래 내가 권술(權術)로 살리는 수단을 써서 그에게 찾아가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다시 제기(提起)하지 아니하였으니, 제가 목호룡을 반드시 제거하려고 한 일은 곧 김순행이 전한 말을 들었던 소치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이삼석(李三錫)이 공초한 바로 인하여 이기지의 초사로 다시 김민택을 추문하였더니, 그 초사에 이르기를,
"이기지가 말한 바는 전혀 일찍이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더불어 면질(面質)한다면 허실(虛實)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두 사람을 면질시키자, 이기지가 말하기를,
"장(杖)을 맞은 다리가 죄다 부서졌으니, 내가 어찌 너를 돌보겠느냐? 윤지술(尹志述)의 일은 그대가 힘써 제지할 수 있었는데 도리어 맡겨 두었으므로, 그때부터 내가 일찍이 너에게 원한을 품었다. 김제겸(金濟謙)은 애초에 서로 알지 못하였으나, 너는 이 말을 한 것 같다. 나의 한 가지 생각은 단지 경솔하게 승복하여 항양(桁楊)277)  을 면하고 감사(減死)로 정죄(定罪)되어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죽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어유귀(魚有龜)를 죽이려고 모의했던 것은 모역(謀逆)은 아니나, 네가 김용택과 함께 참여했고 이천기와 서로 친하게 지내어 그 일을 알고 있는 듯하였으므로, 과연 허망한 말을 꾸며 하였다,"
하였다. 국청에서 사설(辭說)을 변환(變幻)하면서 끝내 승복하지 아니하니, 정상이 통완(痛惋)하다 하여 다시 엄형(嚴刑)을 가해서 지만(屬晩)으로 취초(取招)할 것을 청하였는데, 다섯 차례 형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으니, 경폐(經斃)할까 염려하여 형문을 정지하였다. 여섯 번째의 형문에 이르러 제1도(度)에 곧바로 공초하기를,
"김민택과 면질하였을 때 사설(辭說)을 바꾼 한 가지 사실은 과연 죄를 아는 것이 됩니다. 그 중에서 진실된 사상(事狀)은 4월 28일 납초(納招)한 가운데 바른 대로 공초하였고, 목호룡을 제거하고자 한 일은 정상을 알았던 죄를 지만(屬晩)합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음흉한 정절(情節)을 끝내 명백하게 승복(承服)하지 않는다 하여 형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낼 것을 청하였는데, 일곱 차례의 형문에도 승복하지 않다가 이때에 와서 물고(物故)된 것이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정우관(鄭宇寬)이 상변(上變)할 일이 있다고 일컬으며 발고(發告)를 청하였다. 국청에서 문목(問目) 밖의 잡스런 초사(招辭)를 허락하지 아니하자, 장령(掌令) 신유익(愼惟益)과 정언(正言) 이진순(李眞淳)이 옥체(獄體)로 보아 한 번 추문(推問)함이 마땅함을 상소하여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추문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5월 6일 경인

비가 왔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형조 판서(刑曹判書) 박태항(朴泰恒)·공조 판서(工曹判書) 한배하(韓配夏)·지춘추(知春秋) 심단(沈檀)·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집의(執義) 서명우(徐命遇)·부교리(副校理) 박필몽(朴弼夢)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 광렬 인경 왕후(光烈仁敬王后)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효장 명현(孝莊明顯)’이라 하고, 효경 인현 왕후(孝敬仁顯王后)는 ‘의열 정목(懿烈貞穆)’이라 하였으며, 혜순 왕대비전(惠順王大妃殿)은 존호(猷號)를 ‘자경(慈敬)’이라 하였다.

 

숙종(肅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는 공신(功臣)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좌의정(左議政) 박세채(朴世采)·영의정(領議政) 최석정(崔錫鼎) 네 사람으로 완권(完圈)하였다. 초계(抄啓)할 때 어떤 의논은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가 누락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5월 7일 신묘

국청 죄수 심진(沈榗)과 국청 죄인 정우관(鄭宇寬)이 공초(供招)하기를,
"장번 내관(長番內官) 최홍(崔泓)·박재원(朴載遠)·김구준(金九俊)·김몽상(金夢相)·함우춘(咸遇春)은 모두 박상검(朴尙儉)의 동당(同黨)이며, 최홍은 모수(謀首)입니다. 나인[內人] 석열(石烈)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 김 상궁(金尙宮)에게 수양(收養)되었다고 일컫는데, 수양딸이란 핑계로 입번(入番)하면 구중 궁궐(九重宮闕)을 제멋대로 출입하며 이런 여자들과 같이 흉악한 모의를 하고 밖으로 나가면 이런 내관(內官)들과 모의하였습니다. 외조(外朝)에서는 윤취상(尹就商)·원휘(元徽)·심익창(沈益昌) 등이 모의하였는데, 심익창의 집에 밤낮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윤취상은 궁금(宮禁)에 출입하는 무녀(巫女)와 교결(交結)하고 은화(銀貨) 수천 냥을 그 무녀에게 주어 나인 석열 등과 교결하게 하였으며, 독약(毒藥)을 사서 석열에게 주게 하여 지난해 11월 무렵에 대비전(大妃殿)에 짐독(鴆毒)278)  을 써서 동궁(東宮)을 모해(謀害)할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대궐 안에서 그 모의가 발각되고, 박상검·석열 등이 죽은 뒤 그 흉모를 성사시킬 수 없게 되자, 이 사람들이 다시 계획을 세우고 또 무녀로 하여금 은화 수천 냥을 주어 나인 등과 체결(締結)해 최홍 등과 모의하였으니, 4월 4일 남인(南人) 등을 위해 정국(政局)을 뒤바꾸면 경외(京外)에서 합세(合勢)하여 군대를 일으켜 폐주(廢主)하기로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인해 나라가 시끄러워져서 성사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변고(告故)가 생겨 종사(宗社)가 장차 망할 뻔했으니, 천만 년 이래로 어찌 이와 같은 역적(逆賊)이 있었겠습니까? 서둘러 체포해 죄를 다스려 3백 년 종사를 보존하소서. 저는 이 일에 같이 참여한 까닭으로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윤취상·심익창 및 최홍 등과 최홍의 양녀(養女) 김 상궁을 잡아들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나인의 양녀(養女)는 원래부터 이럴 이치가 없다."
하였다. 국청에서 다시 정우관을 추문(推問)하니, 그 초사에서 또 원휘(元徽)·심단(沈檀)·심익창이 박상검과 석열(石烈)에게 은(銀)을 쓴 일을 거론하고, 또 말하기를,
"소론(少論)은 끝내 동궁(東宮)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니 형세로 보아 남인(南人)을 불러 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남인이 들어온 뒤 대비전(大妃殿)과 동궁을 해치고 주상(主上)과 중궁전(中宮殿) 또한 장차 차례로 폐출하려 했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 훈련 대장(訓鍊大將) 윤취상의 병부(兵符)을 빼앗고 잡아 가두었으며, 심익창과 입번 내관(入番內官) 김구준(金九準)·박재원(朴榟元)·김몽상(金夢祥)·최홍(崔泓)·함희춘(咸熙春) 등도 모두 잡아 가두었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동의금(同義禁) 김일경(金一鏡)이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였다.

 

5월 8일 임진

밤 1경(更)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병판(兵判) 이광좌(李光佐)가 훈국(訓局)을 겸찰(兼察)하였는데, 이광좌가 패초(牌招)279)  받고 대궐에 나아가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훈국(訓局)의 임무는 국구(國舅)가 맡는 것이 좋다.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가 겸찰하는 일을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최홍(崔泓)이 공초(供招)하기를,
"성상께서 탄생하신 처음에 보양관(保養官)을 내관(內官) 가운데 근후(謹厚)한 사람으로 가려서 보호하는 반열(班列)에 둘 것을 청하였기에 제가 외람되게도 그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을 다해 보호하였으니, 전후 33년 동안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일월(日月)에 질정(質正)할 수 있으며, 무릇 모든 액정(掖庭)의 소속들도 이런 혈성(血誠)을 품고 있음을 모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각질(脚疾)이 있어 보통의 기거동작(起居動作)에도 걸어다니기가 어렵고 힘들었으며, 출번(出番)할 경우 비록 지척(咫尺)에 있는 가까운 이웃일지라도 또한 왕래할 수가 없었으니, 어찌 장세상(張世相)의 집에 자주 왕래한 일이 있었겠으며, 장세상의 집에 이미 왕래하지 아니하였다면 이른바 정우관(鄭宇寬)을 또한 어찌 한 번이라도 얼굴을 대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른바 유 상궁(兪尙宮)·김 상궁이란 두 상궁은 궐내(闕內)에서 내외(內外)가 현격하여 일찍이 그 면목(面目)을 알지 못하였으니, 생각건대 어찌 수양(收養)한 양녀(養女)로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윤취상(尹就商)·원휘(元徽)·심익창(沈益昌)·심단(沈檀)·김일경(金一鏡)의 다섯 사람에 이르러서는 또한 얼굴을 알지 못하여 아주 캄캄한 바이니, 정우관의 이른바, ‘같이 모의한 괴수(魁首)’라는 따위의 말은 자연히 터무니없는 데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고, 박재원(朴載元)·함희춘(咸熙春)·김몽상(金夢祥)·김구준(金九準) 등의 공사(供辭)는 모두 ‘본래 정우관을 알지 못하니, 그 말은 모조리 무망(誣罔)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박재원은 말하기를,
"정우관은 흉적(凶賊) 장세상의 당(黨)으로서 감히 죽을 곳에서 살아날 계책을 내어 애매한 사람을 무고(誣告)한 것입니다."
하였다. 윤취상은 공초하기를,
"심익창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정우관은 그 얼굴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이름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최홍은 환관(宦官)이고 저는 무장(武將)이니, 생각건대 어찌 영향이 서로 미친 일이 있겠습니까? 심단과 김일경이 괴수라고 한 말은 지금 비로소 처음 듣는 것이니, 발명(發明)할 것이 못됩니다."
하고, 심익창은 공초하기를,
"윤취상은 면목(面目)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심단은 비록 동종(同宗)이라 하지만 저의 형이 순창 군수(淳昌郡守)가 되었을 때 참혹하게 탄박(彈駁)을 받았고, 김일경은 전처(前妻)의 사촌 처남(四寸妻男)이지만 제가 유배되었다가 방석(放釋)되었을 때 환수(還收)하라는 계청(啓請)을 이 사람이 선동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평상시에 면목을 보지 못하였으니, 괴수란 말은 더욱 지극히 근거가 없습니다. 박상검(朴尙儉)은 동내(洞內)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가 편발(編髮)할 때 당음소시(唐音小詩) 및 통감(通鑑) 약간 권을 가르쳤기 때문에 단지 그 면목을 알았던 것뿐이고, 정우관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 지난해 10월 그믐께 서로 만나 수작(酬酢)했다는 말은 자연히 탈공(脫空)280)  됩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정우관은 본래 사수(死囚)로서 죽을 곳에서 살아날 계책을 만들어 내었는데, 다만 여러 사람을 거짓으로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임금을 속이는 부도(不道)한 말이 또한 지극히 낭자하였습니다. 역적 백망(白望)·이희지(李喜之)와 동일한 권투(圈套)이니, 마땅히 빨리 엄형(嚴刑)하고 정법(正法)할 것을 청해야 하겠습니다마는, 감히 마음대로 단정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하고, 등대(登對)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아뢰기를,
"죄인 정우관(鄭宇寬)이 감히 죽을 곳에서 살아날 계책을 만들어 내어 이에 상변(上變)을 청하였는데, 그 가운데 있는 사전(四殿)을 모해(謀害)하려 했다는 말은 마음을 놀라게 하고 뼈에 사무쳐 시급하게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여러 사람들을 잡아들였는데, 각자가 바친 초사(招辭)에서 끌어댄 환관(宦官) 다섯 사람은 모두 정우관을 알지 못한다고 공초(供招)하였습니다. 그리고 심단(沈檀)과 김일경(金一鏡)은 곧 정우관이 그 무리들의 괴수라고 하였으나 도리어 감히 얼굴을 안다고 하지 못하였고, 원휘(元徽)·윤취상(尹就商) 또한 정우관의 초사 가운데에서 긴요하게 끌어댄 자들인데 원휘는 이미 죽었고 윤취상은 정우관이 또한 ‘서로 얼굴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그 발고(發告)한 바가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님이 없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러한 동당(同黨)이 있겠으며, 이러한 고변(告變)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찌 추대하여 괴수(魁道)로 삼았는데 그 도당(徒黨)이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수천 냥의 은자(銀子)를 석열(石烈)에게 들여 보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정우관이, ‘밖에서 준비해 준 자는 원휘이고, 중간에서 전해 준 자는 박상검(朴尙儉)이며, 안에서 받아 쓴 자는 석열(石烈)이다.’라고 핑계대었는데, 이 세 사람이 모두 죽어서 계제(階梯)가 이미 끊어졌으니,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을 가탁(假托)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할 계책으로 삼았음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그리고 절통(絶痛)하게 여길 만한 것이 있습니다. 성상께서 내리신 판부(判付)를 최홍(崔泓)의 소위(所爲)라 하고, 또 이번의 처분과 크고 작은 벼슬의 제배(除拜)를 한결같이 그 무리들이 주선한 것으로 핑계대었으니, 그가 임금을 속인 부도(不道)한 마음은 장세상(張世相)이 교무(矯誣)한 것이나 역적 이희지의 시어(詩語)와 똑같습니다. 또 그가 말하기를, ‘지난해 12월 모의(謀議)하였을 때 김일경이 소두(疏頭)가 되었으니, 마땅히 이참(吏參)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김일경이 소두가 되어 봉장(封章)한 것은 12월 6일에 있었으니, 김일경을 구허날무(構虛揑無)하고 추후에 꾸며대는 데 급급한 나머지 스스로 그 일의 선후와 말이 어긋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놈의 고(告)한 바는 구구절절 무망(誣罔)한 것이니, 너무나도 절통(絶痛)합니다. 본죄(本罪) 가운데에 문목(問目)을 첨가해 넣어 엄하게 국문(鞫問)해서 실정을 알아내고, 고발된 각 사람들은 원사(爰辭)가 명백하여 정확히 근거가 있으니 모두 분간(分揀)하여 방송(放送)하게 하소서. 그리고 두 금당(禁堂)이 이미 터무니없는 무함과 날조를 받았으니, 청컨대 개석(開釋)하여 출사(出仕)할 것을 권면하고 국문에 참여하게 하소서."
하고,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은 말하기를,
"정우관은 본래 장세상의 심복(心腹) 사인(私人)으로, 그가 갇힌 뒤에 옥사(獄事)를 저패(沮敗)시켜 장세상을 위해 보복(報復)하려는 데 반드시 감심(甘心)하고자 하여, 안으로는 간여하지 않은 환시(宦寺)를 끌어들이고 밖으로는 의중(倚重)하는 숙장(宿將)을 무함(誣陷)하였습니다. 급기야 다시 추문(推問)할 때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금오(金吾)의 두 당상관(堂上官) 이름을 들어 괴수(魁首)라고 하며 반드시 축출해 내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백망(白望)의 남은 음모입니다. 그가 화심(禍心)을 품고 국사(國事)를 무너뜨려 어지럽히려는 정상이 불을 보듯 환합니다. 또 거듭 추문했을 때 공초(共招)한 바에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다 언급하였으며, 심지어 지난 겨울의 처분을 그 무리들이 주선한 바라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 말단의, ‘중외(中外)에서 합세(合勢)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는 등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방이 터지듯 온갖 것을 드러냈으니, 신 등이 간사한 정상이 패로(敗露)되어 옥사(獄事)를 구성하기 어려움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나, 다만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므로 추문을 계청(啓請)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옥정(獄情)의 본말(本末)이 대략 이와 같아서 지금 다시 물을 만한 단서가 없으니, 갇혀 있는 여러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방송(放送)하소서. 정우관이 임금을 속인 부도(不道)한 죄와 남을 악역(惡逆)에 빠뜨린 죄는 문목(問目)에 첨가해 넣어서 엄한 형신(刑訊)으로 실정을 캐내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하도록 하소서. 금오의 두 당상관이 억울하게 무함받은 것은 앞에서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이제 만약 이것을 혐의로 여겨 끝내 행공(行公)하지 않는다면 그의 축출하려는 계책을 적중시키게 되어 장차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특별히 개석(開釋)을 더하시어 즉시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납(獻納) 윤회(尹會)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렀는데,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세근(李世瑾)을 나문(拿問)하는 일은 그대로 따르고 그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의 일을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홍우전(洪禹傳)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하고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노적(孥籍)하고 지열(池烈)을 노적하고 그 족속(族屬)을 태거(汰去)시킬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국청(鞫廳)에서 이정식(李正植)을 잡아 가두었다.

 

윤성시(尹聖時)를 교리(校理)로, 유필원(柳弼垣)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명의(李明誼)·권익관(權益寬)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5월 9일 계사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수노 적산(收孥籍産)하라는 전지(傳旨)를 환수(還收)하라고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복역(覆逆)하고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힘써 다투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0일 갑오

관학 유생(館學儒生) 유용(柳) 등의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처분(處分)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후로는 이러한 상소는 봉입(捧入)하지 말라. 그리고 이 상소는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태학(太學)의 많은 선비들의 상소에 대해 비답(批答) 없이 돌려준 전례는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즉시 다시 봉입(捧入)하도록 명하시어 명백하게 비지(批旨)를 내리소서."
하니, 이에 원소(元疏)를 다시 봉입하라 하고는 비답을 내리기를,
"처분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고, 교리(校理)        윤순(尹淳)·윤연(尹㝚), 겸문학(兼文學)        심공(沈珙) 등의 전후 상소에 대해서는 한 종이에다 같이 비답하기를,
"그대들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2월에 윤순이 상소하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복(嗣服)하신 지 3년 동안 연석(筵席)에 임어하신 것이 겨우 너댓 차례였고, 전후로 강연(講筵)을 열 것을 청하였으나 다만 유의(留意)하겠다는 성교(聖敎)를 받았을 뿐이었으며 끝내 불러 접견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의 장독(章牘)이 날마다 공거(公車)281)                  에 오르되 봉함(封緘)되어 한 번 들어가면 한 달이 넘도록 아득하게 회답이 없습니다. 정호(鄭澔)의 상소와 같은 경우에는 역엄(逆閹)의 일을 빙자하여 원망하는 뜻으로 전하를 모욕하고 흉언(凶言)으로 조정의 신하들을 무함(誣陷)하였으니, 그가 임금을 업신여기고 다른 사람을 무함(誣陷)한 죄에 대해 혁연(赫然)한 위단(威斷)을 시행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한 마디 말씀의 가부(可否)가 없었습니다. 정운주(鄭雲柱)의 상소는 조정을 경함(傾陷)하여 마음을 쓴 것이 아름답지 못하므로 대계(臺啓)를 이미 윤허하셨으니, 천의(天意)를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본래의 상소를 오랫동안 도로 내리지 아니하심으로 인하여 그 사사로운 붕당(朋黨)으로 하여금 잇따라 일어나서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니, 몰래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부리고 현저하게 제멋대로 경탈(傾奪)하는 습관이 허벽(許璧)·이덕배(李德培)와 같은 괴귀(怪鬼)한 무리들의 명분을 범하고 의리에 어긋난 설(說)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만약 엄중하게 징계하고 통렬하게 다스리지 아니한다면 기회를 틈타 날뛰는 근심이 이르지 아니하는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떻게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겠습니까? 어머니도 없고 군부(君父)도 없이 아울러 윤기(倫紀)를 간범(干犯)하였으니, 기사년282)                  ·신축년283)                  의 사람은 그 죄가 하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마땅히 옛 방비(防備)를 그대로 두고 새로 빨리 토벌(討伐)을 행하신다면 의리가 확연히 열려 크게 밝아질 것이니, 이 죄는 벨 만하고 저 죄는 용서할 만하다고 여긴 까닭이 아닙니다."
하고, 하단(下端)에서 박치원(朴致遠) 등의 감처(勘處)를 정지하고 유사(攸司)로 하여금 각별히 엄하게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3월에 윤연(尹㝚)이 상소하여 승정원에서 허벽 등의 상소를 물리친 것을 논하기를, ‘언로(言路)에 관계됨이 있다.’ 하고, 이어서 양쪽으로 신필회(申弼誨)·조최수(趙最壽) 등을 공격하였다. 심공(沈珙)이 상소하여 윤연을 공격하기를,
"허벽 등의 흉소(凶疏)는 실로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차마 들으실 수 없는 말이 바야흐로 승정원(承政院)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비록 권중경(權重經)과 같은 자라 하더라도 또한, ‘모두 물리침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지금 유신(儒臣)은 사설(辭說)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오히려 그것이 봉입(捧入)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 뜻의 소재를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요즈음 여윈 돼지가 깡총깡총 뛰어284)                   다른 사람의 집안과 나라에 화(禍)를 끼치려는 조짐이 현저하게 있으므로, 세도(世道)를 위해 근심하고 분개하는 사람이 일언반구라도 혹 제방(隄防)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뜻에 대해 언급하면 떼 지어 일어나서 배척하고, 심지어 경악(經幄)의 신하까지 이에 흉언(凶言)을 끌어다가 올리는 것을 제일의 급무(急務)로 삼고 있습니다. 애석합니다. 어찌하여 의리의 막히고 어두워짐이 이런 극도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하니, 상소를 모두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똑같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리고 전혀 분석(分析)하는 바가 없어 옳고 그름이 뒤섞였으므로 많은 신하들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앞서 전라 감사(全羅監司) 유명홍(兪命弘)이 장계(狀啓)하며 밀서(密書)를 봉(封)해 올리고, 광양현(光陽縣)에 정배(定配)한 죄인 김승석(金承錫)이란 자를 압송(押送)하였는데, 승지(承旨) 조경명(趙景命)·박희진(朴熙晉)이 청대(請對)하여 가지고 들어가 임금 앞에 개봉하여 올렸더니, 국청(鞫廳)에 내려 주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국청에서 아뢰기를,
"김승석의 공사(供辭)는 지극히 허탄(虛誕)하였으니, 하늘에 제사지내고 귀신에게 기도하여 적병(賊兵)을 구득(求得)했다는 말은 실성(失性)한 사람과 같습니다. 청컨대 형조(刑曹)로 이송(移送)하여 몇 차례 엄하게 형신(刑訊)한 뒤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끌어들인 최수만(崔壽萬) 또한 본도(本道)로 하여금 세 차례 엄하게 형신한 뒤에 절도(絶島)로 이배(移配)하여 요언(妖言)으로 뭇사람을 미혹시킨 죄를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1일 을미

영돈녕(領敦寧)        어유구(魚有龜)가 상소하여 훈국(訓局)을 겸찰(兼察)하는 임무를 해임(解任)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장임(將任)을 겸찰케 한 것은 뜻한 바가 있기 때문이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경열(李景說)과 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이다.】 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의 수노 적산(收孥籍産)을 환수(還收)하라는 명을 빨리 정지하소서. 상주 목사(尙州牧使) 조정만(趙正萬)은 지난번 개기(改紀)하던 초기에 밤낮으로 빨리 달려와 사흘 만에 도성(都城)에 들어와서는 역적 김창집의 집에 은밀하게 숨어 들어 깊은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치밀하게 모의하였으니, 정적(情迹)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위(李瑋)는 홍계적(洪啓迪)과 체결(締結)하고 역적 김창집에게 아첨하여 붙좇았는데, 패리(悖理)한 상소와 흉악한 차자를 많이 대신 지어주고 이를 계기로 현감(縣監)을 거쳐 군수(郡守)에까지 올랐으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기명(李基命)은 경내(境內)의 사류(士類)로서 일찍이 독대(獨對)를 토죄(討罪)하기를 청하는 상소에 참여하였거나 이번의 역적(逆賊)을 토죄하는 상소에 참여한 자를 고의적으로 다른 일에 의거하여 잡아 가두어 옥(獄)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는 역적 이이명(李頤命)의 가까운 서족(庶族)으로서 태연하게 관직에 있으면서 방자하고 무엄한 것이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그리고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상건(李尙建)과 학손(鶴孫)을 청컨대 다시 나국(拿鞫)해서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어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양정호(梁廷虎)를 집의(執義)로, 이의만(李宜晩)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다.

 

5월 12일 병신

역적 이정식(李正植)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조흡(趙洽)의 초사(招辭)로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숨기고 곧바로 공초(供招)하지 않았는데, 조흡과 면질(面質)시키자 말이 막혔다. 1차의 형문(刑問) 제20도(度)에야 곧바로 공초하였는데,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저는 서덕수(徐德修)와 7촌의 친척이 되고 김창도(金昌道)와는 사돈 간이 되며 장세상과는 평소에 절친하게 지냈으므로, 무릇 관계된 정절(情節)을 두루 통하여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제가 지난해 11월 무렵에 김창도와 함께 장세상의 집에 갔더니 장세상이 말하기를, ‘이소훈(李昭訓)이 독약(毒藥)을 마시고 바야흐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하는데, 이 여자가 죽는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뒤 이소훈의 상(喪)이 나자 장세상이 저와 김창도에게 말하기를, ‘이 약을 더 얻는다면 또 쓸 곳이 있는데, 반드시 1천 냥의 은자(銀子)가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백 냥이 부족한데, 이수량은 모름지기 조흡에게서 얻어 오기로 되어 있다.’ 하므로 제가 과연 조흡을 찾아가서 만나 보고 1백 냥을 얻어 장세상에게 전해 주었고, 김창도는 추후에 1백 냥을 찾아다 서덕수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창도가 저에게 이른바 약을 쓸 곳을 말했는데, 곧 상궁(上躬)을 가리켰습니다. 대저 역당(逆黨)의 무리들이 항상 성상(聖上)께 병환이 있다고 하였는데, 병환이 곧 헛말로 전해졌던 것임을 듣자 죄다 죽을까 겁을 내어 이런 독약을 쓰는 흉계(凶計)를 꾸몄던 것입니다. 당초에 조흡의 아비 조이중(趙爾重)이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되었을 때 장세상·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 등과 서로 체결하여 음계(陰計)를 행하기로 도모하고, 둔답(屯畓)을 산다고 핑계대어 은자(銀子) 8천 냥을 영중(營中)에서 수합(收合)하여 흉당(凶黨)에게 올려 보냈으며, 크고 작은 흉계를 배포(排布)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장세상이 일찍이 저에게 말하기를, ‘지금 청정(聽政)하는 일에 차질이 생겼는데, 안에서 비망기(備忘記) 한 장을 도모해 얻으면 마땅히 전의 판부(判付)대로 거행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미 길이 끊어졌으니,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는 일은 장동(壯洞)의 영상(領相) 집에서 나왔는데, 영상이 이삼(李森)의 용력(勇力)을 꺼려하여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유취장(柳就章)이 호위할 즈음에 임사(任使)하기에 편하므로, 대신(大臣)이 훈장(訓將) 이홍술(李弘述)에게 분부(分付)하여 중군(中軍)으로 삼았던 것인데, 이홍술이 김창집과 뜻이 같고 마음이 맞는 까닭에 이런 거조(擧措)를 한 것이었습니다. 대개 이 옥사(獄事)의 실정은 장세상이 괴수(魁首)가 되고 정우관(鄭宇寬)이 심복(心腹)이 되어 궁인(宮人)과 체결해서 음흉한 정절을 같이 모의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저는 기괄(機括)285)  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유후장(柳厚章)과 조송(趙松)을 잡아 가두었다.

 

양사兩司 【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 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 정언(正言) 정수기(鄭壽期)·이진순(李眞淳)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하여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수원(水原)·홍원(洪原) 등의 목장(牧場)은 원래 남양(南陽)의 목관(牧官)에 소속된 것인데, 한 번 따로 목관을 설치한 이후부터 폐단이 특별히 몹시 많아졌습니다. 목장 안에 염분(鹽盆)을 많이 설치하여 우마(牛馬)를 몰아내고 그 풀을 길러 소금을 굽는 재료로 쓰니, 수백 마리의 우마(牛馬)가 이미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자, 목장을 빠져 나와 민전(民田)을 짓밟고 벼를 뜯어먹어 목장 주위의 여덟 개 면(面)의 수십 리나 되는 땅이 그 해(害)를 참혹하게 입었습니다. 전(前) 감목관(監牧官) 정치(鄭治)는 역적 김창집(金昌集)의 사주를 받고 목장 안에 있는 수초지(水草地)를 떼내어 태반을 역적 김창집을 위해 논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그도 역시 이익을 같이 얻으므로 역사(役事)를 엄중하고 급하게 독촉하여 매질이 낭자하니, 둔민(屯民)과 목자(牧子)들이 모두 생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권흉(權凶)에게 아첨하여 붙좇아 백성을 학대하며 이익을 노린 죄를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홍원(洪原)의 목장을 전처럼 남양(南陽)의 목관(牧官)에 소속시키고, 전 감목관(監牧官) 정치(鄭治)는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말단의 일은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5월 13일 정유

역적 김창도(金昌道)가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국청(鞫廳)에서 조흡(趙洽)의 초사(招辭) 가운데, ‘독약을 쓰는 것은 동궁(東宮)의 별실(別室)에서 먼저 시험하기로 하였고, 한 궁인(宮人)이 가장 친밀한데 바야흐로 석열(石烈)의 교대(交代)가 되었다.’는 말과, ‘장세상(張世相)의 뜻을 김상(金相)에게 통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었다.’는 등의 말로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8월 자부(子婦)를 만나기 위해 이정식(李正植)의 집에 가서 비로소 서덕수(徐德修)와 서로 만났는데, 서덕수가 말하기를, ‘나는 왕세제(王世弟)의 빈궁(嬪宮)과 지친(至親)이 되어 지금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예폐(禮幣)할 일이 많이 있으므로 채물(債物)을 넉넉하게 얻어 본가(本家)로 보낼 일」로 분부하심이 있었다. 그러나 나 또한 마련하기 어려우니, 그대가 도모해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내 집 근처에 부자가 살고 있으나 몹시 인색해서 반드시 빌려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이정식이, ‘다만 물어보기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함께 조흡의 집으로 가서 채물(債物)을 요구하였는데, 조흡이 단지 백 냥의 은자만 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은을 소매에 넣고 곧장 이정식의 집으로 갔더니, 서덕수가 또한 아직 머물러 있었으므로 빌린 은을 전해 주고는 돌아왔는데, 그후에 들여보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조흡에게로 가서 동궁 별실의 상사(喪事)를 전해 말하였다는 것은 원래 이런 일이 없었고,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한다는 등의 말은 절대로 꿈 속에서도 생각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장세상은 김 정승(金政丞)의 둘째 손자의 집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으므로 혹 서로 만난 일이 있었는데, 항상 ‘영상(領相)에게 청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비국(備局)의 엄제(嚴題)를 얻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조흡과 면질(面質)시키자, 조흡이 김창도를 향하여 말하기를,
"서덕수가 내 집에 왔다가 돌아간 뒤 네가 이정식과 함께 와서 묻기를, ‘어제 서덕수를 만났는가?’라고 하므로, ‘만났다.’고 하였다. 네가 말하기를, ‘동궁 별실에서 초상(初喪)이 난 일을 들었는가?’라고 하므로, ‘들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손님이 있었으므로 너희들이 나에게 눈짓을 하여 같이 나가 중문(中門) 안에 서서 너희들이 말하기를, ‘장세상이 은 1천 냥을 만약 마련해 보내지 아니하면 큰 화(禍)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큰 화가 비록 일어난다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담당할 것이고 비록 좋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대신이 담당할 것이다. 두세 대신의 집에서 어찌 마련해 내기가 어렵다고 나에게 와서 요구하는가? 어찌하여 윤각(尹慤)에게 요구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였더니, 네가 말하기를, ‘윤각이 단지 3백 냥만 주었기 때문에 이기지(李器之) 등 세 사람이 각자 내었다. 상주(喪主)는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마련해 낼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네가 이정식과 함께 일어나 가면서, ‘상주가 겁을 내는구먼 겁을 내.’라고 하였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김창도가 말하기를,
"서덕수를 만났다는 말은 과연 그러하였으나, 나는 장세상과 친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나에게 천금(千金)을 요구할 리 있겠는가? 윤각이 은을 주었다는 일은 더욱 근거가 없다. 만약 은을 내었다면 신영(新營) 감관(監官)의 문서(文書)가 보존되어 있을 것이니,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세제(世弟)의 별실(別室)에서 상(喪)이 났다는 말은 과연 말했었다. 그리고 지난해 8월에 내가 이정식과 함께 너에게 채물(債物)을 요구하였더니, 네가 말하기를, ‘내일 오면 추이(推移)해 찾아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갔더니 네가 백 냥을 내어 주었으므로, 내가 과연 가지고 왔다."
하였다. 조흡이 말하기를,
"내가 즉시 내어 주지 않았던 것은 대개 그 은(銀)이 내 물건이 아니라 곧 심상길(沈尙吉)이 전라 병사(全羅兵使) 심진(沈榗)이 보낸 은을 나에게 맡긴 것이므로, 그 주인에게 말하고 나서 내어 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날 내가 있던 자리에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거짓이다. 네가 왔을 때 문관(文官) 이정소(李廷熽)가 자리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겠느냐?"
하니, 김창도가 말하기를,
"이것은 그렇다."
하였다. 조흡이 말하기를,
"이첨지(李僉知)는 집이 멀었기 때문에 먼저 백 냥을 주었고, 또 백 냥은 봉화(烽火) 때 너에게 찾아 주었다. 그때 비랑(備郞) 김상벽(金相璧)이 마침 왔다가 참견(參見)하였는데, 너는 지금 ‘다음날 아침에 가지고 갔다.’고 하니, 이 또한 거짓이다."
하니, 김창도가 말하기를,
"이미 가지고 왔으니, 밤이건 아침이건 무슨 상관이냐? 김상벽이 참견했다는 말은 과연 네 말과 같다."
하였다. 조흡이 말하기를,
"네가 정청(庭請)286)  을 파한 뒤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감(大監)께서 가소로운 일을 하셨다.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진 뒤 즉시 봉행(奉行)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사흘 동안 정청하여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또 좋은 묘리(妙理)가 있으니,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도록 도모한 뒤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여 소론(少論)으로 하여금 대궐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들이 훈신(勳臣)이 된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군정(軍情)을 수습하는 일은 우리 대감께서 잘 처리하셨으니, 이삼(李森)을 내보내어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고, 유취장(柳就章)을 중군(中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네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
하니, 김창도가 말하기를,
"호위(扈衞)라는 말은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다. 유취장이 중군(中軍)이 되었다는 말은 추후에 너에게 언급한 말이다."
하였다. 조흡이 말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비망기를 내리지 않는 것이 지극히 고민스럽다. 지난번 우리 대감을 찾아 뵈었더니, 「네가 언제나 비망기가 마땅히 내려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내려지지 않느냐?」 하므로, 「오늘 아니면 내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지 않았느냐? 그 후에도 비망기가 오랫동안 내려지지 아니하자 대감에게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서 장동(壯洞)에 가는 것이 고민스럽다고 하였다. 네가 이 말을 하지 않았느냐?"
하니, 김창도가 말하기를,
"대감이 아무리 피열(疲劣)하다 할지라도 어찌 서육촌(庶六寸)에게 이런 말을 했겠는가? 전혀 맹랑한 말이다."
하였다. 조흡이 말하기를,
"너는 이정식과 함께 항상 장세상의 집에 왕래하였고, 정우관(鄭宇寬)은 그 집에 있었으므로 모든 일을 같이 모의하여 언제나 정령(鄭令)이라고 일컬었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니냐?"
하니, 김창도가 말하기를,
"정우관은 과연 알았다."
하였다. 조흡이 말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한 상궁(尙宮)이 대궐에서 나오면 알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인데 지금 듣건대 그 사람이 석열(石烈)과 교대(交代)하였다고 하니, 내 일이 좋아질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수작(酬酢)할 때 사람이 많은 것을 혐의하여 네가 나의 이불 위에 기대어 부채로 사람을 가린 채 귓가에 대고 몰래 말하였다. 너는 이 일이 기억나지 않느냐?"
하니, 김창도가 말하기를,
"본래 아는 궁인(宮人)이 없었으니, 너의 말은 근거가 없다."
하였다. 다시 추문(推問)하는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궁성(宮城)을 호위한다는 말과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지 않는다는 말을 끝내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였고, ‘이삼(李森)을 내보내어 충청 병사로 삼고 유취장을 중군(中軍)으로 삼는 것이 좋다.’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무슨 좋고 좋지 않고를 논할 만한 것이 있느냐?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무슨 뜻이냐? 그리고 장세상과 왕복한 것은 무슨 일이고, 도촉(圖囑)한 것은 어떠한 계획이었으며, 치밀하게 교통(交通)하였다는 것은 어떠한 모의였느냐?"
하였는데, 초사(招辭)에서 또 발명(發明)하였다. 국청에서 전후의 면질 때 말이 많이 막혔다 하여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는데, 2차에 이르러 지만(遲晩)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제가 장세상과 같이 모의하여 소훈(昭訓)을 독살(毒殺)하고 바야흐로 다른 곳에 시험하려고 은자(銀子)를 구한 일은 이 정식이 이미 상세하게 바로 대로 공초(供招)하였으니,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 대저 독약을 쓰는 일은 서덕수(徐德修)가 정우관(鄭宇寬)과 한 마음으로 교결(交結)하였으며, 서덕수가 독약을 쓰는 일을 위해 은자를 구하고자 하였으므로, 제가 과연 조흡에게서 구해다 서덕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독약을 쓰는 음밀(陰密)한 길과 독약의 출처(出處)는 서덕수에게 물어 보면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은자를 얻으러 조흡의 집에 갔더니, 조흡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모두 낸다면 비록 천여 냥이라도 내가 마땅히 내겠지만, 또 개연(慨然)한 바가 있으니, 나의 아버지가 통수(統帥) 및 평안 병사가 되었을 때 천여 냥이란 많은 은화(銀貨)를 내어 대사(大事)를 도모하였으나 아무런 공효(功效)가 없었다. 지금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의 무리가 또한 하는 바가 있다 하며 번번이 요구하지만 내가 어디에서 마련해 내겠느냐? 윤각(尹慤)은 집안이 본래 부유한데다가 또 바야흐로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니, 힘을 내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만약 훈장(訓將)·총융사(摠戎使)로서 은을 낸 모양으로 이천기·김용택·이기지(李器之)·홍의인(洪義人)의 무리로 하여금 문서를 만들어 명백하게 보여 주게 한다면 나 또한 마땅히 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홍의인의 집으로 가서 조흡의 말을 가지고 말을 꺼냈더니, 홍의인 형제가 말하기를, ‘며칠 전에 이천기를 만났는데, 이천기가, 「내가 이기지를 만났더니, 이기지가 지금 은자 3백 냥을 윤 총융사(尹摠戎使)에게서 얻었으니, 윤 총융사 또한 은을 낸 가운데 들어 있다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정식(李正植)이 사람을 보내어, ‘서 서방(徐書房)이 바야흐로 와 있으니, 반드시 곧 와야겠다.’고 하므로, 제가 찾아 갔더니, 이정식이 말하기를, ‘서 서방이 와서 말하기를, 「청정(聽政)하는 일은 비록 성사되지 않았으나, 비망기(備忘記)는 또 반드시 내려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좋지 않으냐? 이미 좌상(左相)에게 말씀드렸으니, 너도 또한 영상(領相)께 말씀드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서덕수에게 물어보았더니, 서덕수가 웃으면서, ‘사실이 아닌 말을 내가 어찌 발설했겠는가?’ 하므로, 제가, ‘그렇다면 이것을 영상(領相)께 말씀드리겠다.’ 하고, 이어서 즉시 장동(壯洞)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영상이 바야흐로 약방(藥房)에 있었으므로 밤을 틈타 다시 찾아가 말하기를, ‘서덕수의 말을 들으니 장차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로 긴요하지 아니한 정청(庭請)은 다시 하지 마시고 즉각 봉행(奉行)하소서.’라고 하였더니, 영상이 말하기를, ‘비록 정청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나를 역적으로 여길 것인데, 하물며 즉각 봉행하는 경우이겠느냐?’ 하였습니다. 제가 돌아와서 이정식에게 이렇게 전하자, 이정식이 말하기를, ‘이것을 긴요하지 않다고 하나, 좌상(左相)은 이것을 옳다고 하였다. 너의 집 대신(大臣)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다시 영상의 집에 가서 말씀드렸더니 영상이 말하기를, ‘좌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서로 의논하여 거행하겠다.’ 하였습니다. 며칠 뒤 또 찾아갔더니, 영상이 ‘너희들이 장차 비망기가 내려질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내리지 않으니 어찌된 것이냐?’ 하고 다른 날 또, ‘어제 이기지(李器之)가 너와 이정식·조송(趙松)·정우관(鄭宇寬) 등이 작당(作黨)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고 하므로, 제가 ‘우리들은 그렇지 않은데 이 진사(李進士)는 목가(睦哥)·백가(白哥)와 모의하는 일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이 낭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기지의 집에 찾아가서 물어 보았더니, 이기지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이러한 일이 생수(生手)가 아닌데, 어찌 모르겠느냐’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심자팔(沈子八)287)  은 입이 가벼워 모든 일을 죄다 목호룡(睦虎龍)에게 누설시켰으니, 장래에 고변(告變)하는 일이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기지가 영상을 만나서 말하기를, ‘시사(時事)가 매우 위태하니 비망기가 내려지기를 기다려 궁성을 호위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영상이 ‘이 일이 좋다.’ 하였습니다. 또 이기지가 말하기를, ‘훈장(訓將)에게는 내가 마땅히 알릴 수 있으나, 중군(中軍) 이삼(李森)은 장략(將略)이 있어 반드시 일을 같이 하지 않을 것이므로 몹시 꺼리고 있다. 그래서 정청(庭請)을 마치던 날 영상이 연동(蓮洞)의 이상(李相)과 낙동(駱洞)의 조상(趙相) 및 좌상(左相)과 궐중(闕中)에서 상의(相議)하고는 병판(兵判) 이만성(李晩成)에게 말하여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냈고, 그날 밤 4경(四更) 초에 정청(庭請)을 파하자 네 대신(大臣)이 비변사(備邊司)에 모여서 상의하여 유취장(柳就章)을 중군(中軍)으로 삼는 일을 훈장(訓將)에게 분부(分付)하여 궁성을 호위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대개 거행할 즈음에 소론(少論)으로 하여금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소장(疏章)을 막고자 하는 뜻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정식이 저와 함께 조흡의 집에 갔는데 이정식이 저를 책망하기를, ‘너의 집 대신(大臣)의 일을 너는 말하지 말라. 시사(時事)를 청정(聽政)하며 어찌하여 사흘 동안이나 정청(庭請)하여 일이 마침내 성사되지 못하게 하였는가? 만약 소론(小論)이 때를 만나서 너의 집 대신은 먼저 죽을 것이다. 좌상(左相)은 영상(領相)이 먼저 창도(倡導)하면 반드시 즉각 거행할 것인데, 너의 집 대신은 너무나 흐리멍덩하여 정청(庭請)하는 일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정우관·이정식·조송(趙松)·김민택(金民澤)·김성행(金省行)·서덕수 등이 서로 체결(締結)하여 치밀하게 모의하였는데, 이정식·정우관·김용택은 은을 모으며 일을 도모한 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고, 서덕수·김성행이 지난해부터 당(黨)을 같이한 정상은 이정식과 연혼(連婚)한 뒤로부터 점차 들었으며, 저 또한 그 가운데 동참(同參)함을 면하지 못했으니, 모역(謀逆)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좌승지(左承旨) 남취명(南就明)이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는 날 입번(入番)한 옥당(玉堂)도 같이 입시하게 하여 소대(召對)의 규례를 보존시킬 것을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겸하여 옥당(玉堂)의 소대를 행하였으니, 대개 고례(古例)가 아니었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부수찬(副修撰) 이명의(李明誼)가 아뢰기를,
"비록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는 날이 아니라 할지라도 특별히 소대(召對)하겠다고 하교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유필원(柳弼垣)이 말하기를,
"때때로 주강(晝講)을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7월에 이르러 마땅히 병세(病勢)를 살펴보아 하겠다."
하였다.

 

5월 14일 무술

역적 서덕수(徐德修)가 복주(伏誅)되었다. 서덕수는 애초에 조흡(趙洽)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는데, 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가 승복한 초사에서도 모두 서덕수가 독약을 쓰는 흉모(凶謀)에 동참(同參)하였다고 말하였다. 1차의 형문(刑問) 제6도(度)에 지만(遲晩)하였는데,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지난해 5월에 제가 장세상(張世相)과 소훈(昭訓)을 독살(毒殺)하는 일을 상의(相議)하고, 6월 무렵에 은 3냥을 이정식을 시켜 장세상에게 들여보내어 도모해 행하게 하였으니, 독약은 2백 금(金)으로 백망(白望)이 산 곳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장씨(張氏) 성의 역관(譯官)에게 사서 동궁(東宮)의 주방 나인[廚房內人] 이씨(李氏)로 하여금 음식에 섞어 쓰게 하였습니다. 역관(譯官)과 나인[內人]에 대해서는 다만 장세상의 말만들었으므로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소훈(昭訓)을 독살(毒殺)한 뒤 이정식이 와서 장세상의 말을 전하기를,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졌으니, 과연 좋다. 그 독약은 효과가 있으므로 다른 곳에 시험해 보려고 하는데, 은자(銀子) 1천 냥이 있고 난 뒤에야 쓸 수 있으니, 반드시 꼭 얻어내도록 도모하라.’고 하였으므로 제가 조흡의 집에 가서 이 뜻을 언급하고 인하여 은 2백 냥을 구했습니다. 또 심상길(沈尙吉)의 집에서 듣건대 은 1백 냥과 대호지(大戶紙) 15권(卷), 부채 30자루가 김민택의 집에 있다고 하므로, 인하여 김민택의 집으로 가서 더불어 독약을 쓰는 일을 모의하고 은자와 종이·부채를 먼저 가져다 쓸 뜻을 언급하였더니, 김민택이 말하기를, ‘심상길이 보낸 것은 나 또한 쓸 곳이 있으나, 그대의 일이 이와 같으니 먼저 가지고 갈 만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즉시 종을 시켜 장세상의 집에 전하여 보내고, 장세상에게, ‘이것이면 또한 넉넉히 쓸 수 있겠는가?’ 하자, 장세상이 말하기를, ‘이 밖에 또한 다른 물건이 있어야만 거의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가, ‘모름지기 조심하고 신중하고 치밀하게 해야 할 것이다.’하였더니, 장세상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또 일을 많이 겪어보았으니, 어찌 잘하지 않겠는가? 전일에 썼던 독약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추이(推移)해 쓸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저는 김창도·이정식과 일찍이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청정(廳政)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노론(老論)은 장차 실패할 것이다. 그러니 비망기(備忘記)가 만약 내려진다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제가 궁액(宮掖)과 친척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내간(內間)의 일을 저절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는 일은 김창도가 와서 말하기를, ‘김창집(金昌集)·이기지(李器之) 등이, 「비망기가 만약 내려진다면 즉시 궁성을 호위하여 안팎을 엄하게 끊게 하고, 또 상소하여 시끄럽게 다투는 근심을 막아야 한다.」 하였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여러 역적의 무리와 함께 모역(謀逆)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의 대신(大臣) 이하의 관원들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죄인 서덕수(徐德修)가 이미 지만(遲晩)하여 결안 취초(結案取招)하였으니, 마땅히 법에 의거해서 처단(處斷)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덕수는 빈궁(嬪宮)과 숙질(叔姪) 사이가 되니, 지금 만약 법을 그대로 따른다면 빈궁의 동기(同氣) 친족이 장차 노륙(孥戮)의 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서덕수의 아비는 곧 증 찬성(贈贊成) 서종제(徐宗悌)의 장자(長子)이므로 장차 그 종사(宗祀)가 끊어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일이 몹시 가엾고 딱합니다. 조가(朝家)에서 처분(處分)하는 도리에 있어서 다른 죄인과 차이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다만 그 자신만 죽이고 연좌(緣坐)하는 등의 일은 특별히 시행하지 말게 하되,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한다면 왕법(王法)에 손상될 것도 없고 사은(私恩)도 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양사(兩司)에서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하는 일과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수노 적몰(收孥籍沒)하는 일에 대한 합계(合啓)를 독주(讀奏)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서덕수 아비의 연좌(緣坐)를 감등(減等)하라는 명을 빨리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고, 전일에 아뢴 이상건(李尙建)·학손(鶴孫)·조정만(趙正萬)·이위(李瑋)·이기명(李基命)의 일은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또한 서덕수의 아비를 의율(依律)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전일에 아뢴 합계(合啓)한 대관(臺官)의 일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박치원(朴致遠)·현덕명(玄德明)의 일은 모두 그대로 따랐다. 최석항이 아뢰기를,
"사은 정사(謝恩正使) 조태구(趙泰耉)는 수상(首相)으로서 멀리 나가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니, 청컨대 체차(遞差)를 허락하여 종반(宗班)으로 차임해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김일관(金一觀)·홍석보(洪錫輔) 등을 잡아 가두었다.

 

5월 15일 기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김홍석(金弘錫).】 에서 아뢰기를,
"사직(司直) 정호(鄭澔)는 성품은 사갈(蛇蝎) 같고 정상은 귀역(鬼域)과 같아서 평생의 기량(伎倆)이 오로지 정인(正人)을 해치고 어진이를 죽이는 데 있었습니다. 지난날 개기(改紀)하던 초에 한 장의 상소를 올렸는데 말뜻이 흉패(凶悖)하였으며, 환옥(䆠獄)을 빙자해서 일망타진하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바로 송상기(宋相琦)가 자지(慈旨)를 교무(矯誣)한 것과 동일한 기관(機關)이었습니다. 그리고 등대(登對)했던 여러 신하들이 곧바로 정법(正法)을 청했던 것을 한 가지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너무나도 상정(常情)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춘궁(春宮)의 하령(下令)과 자성(慈聖)의 언교(諺敎)에 진실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흉엄(凶閹)의 죄는 진실로 한 시각이나마 숨을 쉬며 사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으니, 곧바로 정법(正法)을 청한 것은 도리에 당연하였으며,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하게 추문해서 정절(情節)을 구핵(究覈)하는 것은 스스로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는 상법(常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즉시 또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정상을 털어놓고 복법(伏法)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여기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지적하여 의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도리어 기화(奇貨)나 얻은 것과 같이 여겨 뜻을 다 써서 조절(操切)하였으니, 그 마음먹은 바가 진실로 이미 간교하고 참혹하였습니다. 사흉(四凶)의 천극(栫棘)288)  과 윤지술(尹志述)의 복법(伏法)에 이르러서는 모두 무군(無君)·범상(犯上)한 죄 때문이었으니, 그 또한 귀가 있다면 어찌 들어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이에 감히 ‘무슨 사단(事端)으로 인하여 심한 죄악이 있다는 것입니까?’하였고, 심지어 ‘사적(史籍)에 실려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 바’라 하여 드러나게 배척하였으며, 이어서 말하기를, ‘신 또한 선조(先朝)의 구물(舊物)이니, 출척(黜陟)과 영욕(營辱)을 의리상 홀로 달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전하께서 까닭없이 구신(舊臣)을 물리쳐 내쫓는다는 것으로서, 비난하고 조롱하며 원망하는 말이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었으니, 그가 만약 전하에게 북면(北面)289)  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가 임금을 업신여기고 역적의 당류(黨類)가 된 죄는 반드시 죽여야 할 바인데, 왕장(王章)을 더하지 이니하여 지금까지도 숨쉬며 살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의 말이 떠들썩하고 공의(公議)가 더욱더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우선 극변(極邊)에다 멀리 찬축(竄逐)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일에 아뢴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노적(孥籍)하는 일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역적 정우관(鄭宇寬)이 복주(伏誅)되었다. 정우관은 애초에 조흡(趙洽)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는데, 잡혀와 여러 번 공초(供招)하였으나 저뢰(抵賴)하였고, 중간에 갑자기 고변(告變)을 일컬으며 문목(問目) 밖의 흉패(凶悖)한 말을 많이 하였으나 일이 모두 터무니없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다섯 차례 형문(刑問)을 받자 비로소 지만(遲晩)하여 납공(納供)하였는데,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동당(同黨)의 사람들이 이미 잡혀 들어갔으므로 저도 이미 잡혀들어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을 곳에서 살아날 계책을 꾸며 이것을 가지고 서덕수(徐德修)에게 의논하였더니, 서덕수가 말하기를, ‘네가 만약 갇힌다면 헛되이 죽을 수는 없으니, 차라리 고변(告變)하여 살아날 계책으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고변을 하고자 하더라도 고변(告變)할 자료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였더니, 서덕수가 말하기를, ‘아무 조목(條目)에 연고를 핑계대어 훈장(訓將)을 잡아들인다면 거의 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므로, 제가 ‘어떤 연고를 빙자하여 핑계대면 붙잡아들일 수 있으니, 어찌 잘해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갇힌 뒤에 이르러 과연 ‘가기이방(可欺以方)290)  ’의 뜻으로 거짓말로 발고(發告)하였습니다.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을 두루 거론(擧論)한 것은 대개 가탁하여 몰아냄으로써 옥사(獄事)를 늦추려는 계책으로 삼았던 것이었으며, 판의금(判義禁)은 수당상(首堂上)이었고 김 참판(金參判)은 이름을 아는 재상(宰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관(內官) 등을 발고(發告)한 데 이르러서는 모두 이름을 아는 내관들이었으므로 과연 거짓으로 끌어댄 것이며, 판부(判付)로 제배(除拜)하였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뜻이 내관들을 함해(陷害)하는 데 있었으므로 이런 윗사람을 속이는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냈던 것입니다. 제가 이미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였으니, 여러 역적들과 흉역(凶逆)을 모의(謀議)한 정절(情節)을 또한 어찌 감히 은휘(隱諱)하겠습니까? 저는 시골에서 올라와 장세상(張世相)의 집에 붙어 살았는데, 서덕수(徐德修)·이정식(李正植)·김창도(金昌道) 등이 장세상과 서로 친하게 지내며 왕래하였으므로 저도 또한 더불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서덕수와 김창도가 이정식의 집에 있으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과연 가서 보았더니, 이정식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일을 영공(令公)에게 속일 수 없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시사(時事)가 이와 같으니 주상(主上)께서 몹시 어려울 것이다. 주상께서 만약 살아 있다면 노론(老論)은 장차 죄다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정식의 궤(櫃) 속에서 한 개의 봉(封)한 물건을 꺼내어 저로 하여금 장 지사(張知事)에게 전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제가 어떤 물건인지를 물어보았더니 그는 약물(藥物)이라고 하였는데, 종이로 겹겹이 싸서 봉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손으로 만져 보았더니 곧 환약(丸藥)이었는데, 크기는 큰 콩알만 하였고 개수는 수십 개쯤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대궐 안의 장세상이 입직(入直)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려 전해 주었더니, 장세상이 말하기를, ‘누가 보냈느냐?’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정식의 무리가 보낸 것이라고 말하자, 장세상이 즉시 화가 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보더니 나오게 하였습니다. 어느날 장세상이 저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청정(聽政)하는 일을 노론(老論)이 봉행(奉行)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아니한 것이다. 장래에 노론은 반드시 씨도 남지 않을 것인데, 만약 한 장의 비망기(備忘記)를 도모해 얻어 즉시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제 막 이 일을 서덕수에게 언급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 서덕수 무리를 이정식의 집에서 만났더니, 서덕수의 무리가, ‘호위(扈衞)하는 일은 영상(領相)과 훈장(訓將)이 상의하여 계책을 정하였는데, 이미 중군(中軍) 이삼(李森)을 내보내어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고 유취장(柳就章)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제가 성상을 부도(不道)하게 무욕하고 다른 사람을 악역(惡逆)에 빠뜨리며 여러 역적들과 모역(謀逆)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조흡(趙洽)의 칼[枷]을 풀어 주었는데, 그가 고(告)한 여러 역적들이 모두 승복하고 복주(伏誅)되었기 때문이었다. 홍석보(洪錫輔)는 일의 실정(實情)을 구명(究明)한 후에 본부(本府)로 이송(移送)하였다.

 

5월 16일 경자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삼았다. 어사형(魚史衡)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는데, 국구(國舅)의 아버지이다. 심공(沈珙)을 검상(檢詳)으로, 이집(李㙫)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삼았다.

 

정호(鄭澔)를 이산(理山)으로 찬축(竄逐)하였다.

 

5월 17일 신축

모역(謀逆)의 정절(情節)을 알고 있던 죄인 김일관(金一觀)이 복주(伏誅)되었다. 조흡(趙洽)이 이정식(李正植)과 면질(面質)하였을 때 조흡이 이정식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대부분 귀양갔을 때 했던 일을 단지 정우관(鄭宇寬) 한 사람에게만 부탁하였는가?"
하니, 이정식이 말하기를,
"정우관과 김일관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으니,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김일관이 이 때문에 잡혀 들어왔는데, 무슨 일을 부탁하였느냐고 캐물었으나 숨기고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았다. 1차의 형문(刑問)에서 절반은 실토하고 절반은 숨겼는데, 제3차에 이르러서 어지럽게 공초(供招)하기를,
"김창도(金昌道)가 저에게 말하기를, ‘이기지(李器之)가 훈장(訓將) 이홍술(李弘述)·심상길(沈尙吉)·조흡(趙洽)·이천기(李天紀)·홍의인(洪義人)과 더불어 역적질을 모의하였는데, 지난해 11월 9일 습진(習陣)을 빌미로 군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뒤죽박죽 어수선한 말이 도무지 귀착(歸着)되는 바가 없다 하여 조사(措辭)를 시행하지 않았는데, 4차에 이르러 위차(威次)를 베푸니, 비로소 승복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저는 김창도와 문(門)을 마주 대하여 살고 있는데, 이정식(李正植)·정우관(鄭宇寬)은 김창도의 집에서 만나 서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정식이 귀양갔을 때 부탁한 일은 정우관이 이를 주관하였고 저는 참섭(參涉)하지 않았으나, 이천기(李天紀)의 사주(使嗾)를 몰래 받아 환국(換局)의 음모(陰謀)를 도모하였는데, 이것은 정우관이 한 일과는 조건이 각기 달랐습니다. 제가 지난해 6, 7월 무렵에 이기지(李器之)의 집에 갔더니, 이기지가 어떤 사람과 문을 잠그고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가 몰래 들었더니, 이기지가, ‘그대는 한 나라의 영상(領相)의 손자가 되어 서덕수·이정식·김창도의 무리와 서로 결탁해 무슨 일을 했는데 이 무리들이 중간에서 훔쳐 먹었다고 사람들의 말이 몹시 떠들썩한가?’라고 하였는데, 제가 탐지(探知)해 보았더니, 이 사람은 김성행(金省行)이었습니다. 그래서 뒤에 김창도와 함께 이 일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김창도가 김성행에게 이를 전하자, 김성행이 크게 놀라 김창도의 집에 와서 저를 불러 서로 만나고는, ‘나는 이기지와는 당류(黨類)가 조금 다르니, 네가 들은 것을 경솔하게 이기지에게 누설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창도는 항상 말하기를, ‘훗날 논공(論功)할 때 정우관은 마땅히 선천 부사(宣川府使)가 될 것이고, 나는 마땅히 첨사(僉使)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저는 이로 인해 김성행·김창도·이정식·정우관의 무리와 절친하게 지냈고, 이기지·이천기와는 본래부터 서로 친하였으므로 여러 역적들이 한 일에 대해 참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 절차의 깊은 부분은 역적 무리들이 언제나 사람됨이 허술하다 하여 죄다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 역적들이 모의한 일을 이미 충분히 듣고서도 즉시 발고(發告)하지 아니하였으니,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하였음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정언(正言) 이진순(李眞淳)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역적 이기지(李器之)는 역괴(逆魁) 이이명(李頤命)의 아들로서, 삼수(三手)의 흉모(凶謀)를 주장하였는데, 최후의 귀착(歸着)되는 곳은 그 아비를 추대(推戴)하는데 있었으니, 지극히 흉악한 정절(情節)이 진실로 이미 여러 역적들의 초사(招辭)에 낭자하였습니다. 몰래 이홍술(李弘述)을 사주하여 목호룡(睦虎龍)을 모살(謀殺)함으로써 국구(國舅)를 해치려고 꾀했던 일을 감추고자 하였음을 그가 또한 바른 대로 공초하였으니, 다만 이 한 가지 조항만으로도 곧 승복한 것이 됩니다. 또 김창도(金昌道)의 결안(結案)을 살펴보건대, ‘나는 서툰 솜씨가 아니다.’라고 한 말에서 현저하게 스스로 담당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는 계책을 또 역적 김창집(金昌集)과 상의하였으니, 그 역절(逆節)과 흉모(凶謀)가 더욱 죄다 환히 드러났습니다. 경폐(徑斃)291)  하였다 하여 역률(逆律)로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역적 이희지(李喜之)의 예에 의하여 빨리 수노 적산(收孥籍産)의 법을 거행하소서.
전(前) 참의(參議) 조상경(趙尙絅)은 지난해 선원록(璿源錄)을 개수(改修)하였을 때 그 아비의 도정(都正)의 직명(職名)을 동돈녕(同敦寧)이라고 거짓으로 썼는데,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여 가리고 숨길 수 없게 되자, 도리어 전장(銓長)에게 간청하여 동돈녕(同敦寧)에 수의(首擬)되어 거짓으로 쓴 것을 실제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전장(銓長)도 또한 그의 하는 짓에 놀라 면전(面前)에서 질책하였고, 그 당(黨)으로서 언지(言地)에 있는 사람도 거핵(擧劾)하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씀이 암담하여 공의(公議)에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한 가지 단서이고, 개기(改紀)한 뒤에는 시골에 내려간다고 핑계대고 그 집에 잠복(潛伏)해 있으면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나다니며 종적이 음비(陰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 역적 백망(白望)의 어지러운 초사 때문에 두 상신(相臣)이 대명(待命)했을 즈음에는 스스로, ‘이 기회를 읽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늙고 병든 대신(大臣)의 집에 급히 달려가서 백방으로 종용하여 신임(申銋)이 했던 것처럼 차자(箚子)를 올릴 것을 권하였는데, 하루에도 일곱 차례나 왕복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일이 과연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계책을 꾸민 일이 위험한 것은 바로 간흉(奸凶) 신임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조흡이 잡혀 들어간 뒤에는 조흡의 가속(家屬)들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서 적산(籍産)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거만(巨萬)의 재물을 안고 밤을 틈타 조상경의 집에 던져 넣었더니, 조상경은 그 후한 뇌물을 이롭게 여겨 받아서 감추어 두고는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흉계를 속에 감추고 음험하고 방자하게 구는 무리는 결코 연곡(輦轂) 아래에 머물러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 지방에서 찬축(竄逐)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간흉(奸凶)들이 나라를 좀먹어 나라의 저축이 소모되고 고갈되었으며, 부고(府庫)의 재화(財貨)는 절반이 상역(商譯)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연전에 이이명(李頤命)이 북경(北京)에 사신(使臣)으로 갔었을 때 6만 냥의 은화(銀貨)를 얻기를 청하였는데, 그때 연신(筵臣)이 너무 많다고 힘써 진달하였으나 끝내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리고 그 돌아올 즈음에는 이이명과 동료 사신의 상소에 마치 쓰지 않고 봉환(封還)할 것처럼 한 것이 있어서,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라는 사람들의 말을 막았는데, 지금 이미 3년이 되었지만 1금(金)도 관(官)에 바친 일이 없습니다. 신(臣)이 해당 아전을 불러 묻고 그 실상을 알아보았더니, 모두 상역(商譯) 무리의 이름으로 분배(分排)하여 현록(懸錄)292)  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2년 뒤에 이자를 계산하여 도로 바치는 새로운 규례로 핑계댄다 하나, 이미 ‘쓰지 않고 도로 바친다.’고 하였다면, 이는 그 무리들이 사사로이 운용(運用)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입니다. 6만 냥의 은화(銀貨)가 얼마나 중대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이 무리들의 손에 맡기고 즉시 징납(徵納)하지 아니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청컨대 그때 상역(商譯)에게 나누어 준 것을 장부를 살펴 조사해 내고 수금(囚禁)하여 엄하게 핵실(覈實)하게 하되, 즉각 각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기한을 정하여 바치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자의(諮議) 채지홍(蔡之洪)은 본래 시골 구석의 보잘것없는 무리로서, 이름을 훔친 상신(相臣)의 문에 아첨하여 붙좇아서 인연(彙緣)하여 천발(薦拔)되어 외람되게 궁료(宮僚)의 자리에 끼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한 것이 오래 되었어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곡성 현감(谷城縣監) 서행원(徐行遠)은 곧 이상(李翔)의 사인(私人)으로서, 이상을 위해 진소(陳疏)하여 신변(伸辨)하고 힘을 쏟아 사우(祠宇)를 세운 자입니다. 이상의 조카 이만성(李晩成)이 권세를 잡았던 날 이상을 위해 힘을 쓴 자를 취허(吹噓)293)  하지 않음이 없어 마치 노고를 갚고 공(功)에 보답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서행원의 미천하고 어리석음으로도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감조관(監造官)에 차임되어 출륙(出六)294)  하기에 이르러 연한(年限)이 이미 지났음을 민망하게 여겼는데, 본현(本縣)을 3년의 자리로 만든 까닭에 파격적으로 차임해 보냈습니다. 그런데 도임(到任)한 이후에 탐욕스럽고 불법(不法)한 정상은 낱낱이 세기도 어럽거니와, 요사이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찬축(竄逐)된 여러 흉적들에게 물건을 싸서 보내는 것만을 일삼아 수레로 나르는 것이 끊이지 아니하므로 이민이 지탱해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내금위 장(內禁衞將) 이복연(李復淵)은 본래 흉적 김창집(金昌集)의 사인(私人)으로서, 행실이 비루하고 패리(悖理)하였는데, 일찍이 울진(蔚珍)에 차임되자 오로지 탐욕만을 일삼아 포민(浦民)을 착취하여 한없이 징렴(徵斂)하고는 관가(官家)에 세 마리 말을 갖추어 싸서 보내는 것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가(朝家)에서 급재(給災)295)  한 전결(田結)도 민간(民間)을 가리지 않고 진자(賑資)에 보충한다고 일컬어 엄중하게 독촉하여 세금을 거두고는 죄다 자기 주머니에 돌렸으며, 몰래 황장목(黃腸木)296)  을 베어다 널빤지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이방(吏房) 장의천(張倚天)과 급창(及唱)인 종 망이(望伊)를 시켜 검사하게 하고는 발매(發賣)하여 혹은 돈으로 바꾸어 실어오기도 하고, 혹은 쌀로 바꾸어 시골에 사는 고지기[庫直] 김수철(金壽鐵)의 집에다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동래(東萊)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지 않음이 없으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의 노적(孥籍)을 환수(還收)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새로 계청(啓請)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처럼 국가(國家)에 일이 많고 바야흐로 엄중하게 역적(逆賊)을 토죄(討罪)하는 날을 당하여 자신이 대직(臺職)에 있는 자라면 마땅히 한 목소리로 합사(合辭)하여 준청(準請)을 기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간(司諫) 이제원(李濟元)은 억지로 하기 어려운 질병과 불안한 정세(情勢)가 없이 외람되게 긴요하지 아니한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가, 비답(批答)을 받지 못했다고 핑계대어 도감(都監)의 자리에는 때때로 혹시 나아가기도 하지만 대신(臺臣)의 청대(請對) 및 조가(朝家)의 소명(召命)은 곧 모두 어겨 피하고 있습니다. 헌납(獻納) 윤회(尹會)는 비록 집안에 의심스런 질병이 있다고는 하나 자신은 감염된 일이 없는데, 재차의 입시(入侍) 때 여러 차례 청하였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소대(召對)의 명을 내렸는데도 까닭없이 패초(牌招)를 어겼으니, 목욕(沐浴)하고 고(告)하는 의리297)  에 전혀 어둡고, 현저하게 규피(規避)하는 자취가 있습니다. 청컨대 모두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소서.
지난날 권흉(權凶)이 국권(國權)을 잡자 사인(私人)·압객(狎客)이 웅곤(雄閫)을 두루 차지하여 사경(私徑)을 몰래 열고는 뇌물을 도맡아 나르니, 병영(兵營)·수영(水營) 등 여러 영(營)의 은화(銀貨)·전포(錢布)가 한결같이 완전히 바닥이 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평안 병영(平安兵營) 한 곳을 가지고 말해 본다면, 병신년298)  ·정유년299)   무렵에 중기(重記)300)  에 기록된 은(銀)이 6, 7만 냥에 밑돌지 않았는데, 근년 이래로 한결같이 텅텅 비어서 간 곳이 명백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의 말이 낭자합니다. 신이 조흡(趙洽)과 이정식(李正植)이 면질(面質)한 문안(文案)을 보았더니, 임방(任埅)이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을 때 은 4천 냥을 빌려주는 것을 허락하는 일로 평안 병사 백시구(白時耉)에 관문(闕文)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수량대로 내어 주었으나 기로소에서는 실제로 받아두고 조관(照管)301)  한 일이 없었으므로, 한 당상관(堂上官)이 관문을 보내어 평안 병사에게 사문(査問)하였더니, 전체의 수량을 도로 봉입(捧入)하였다고 답하였습니다. 대개 9천이란 은화(銀貨)는 적지 않은 재물에 관계되는데, 평안 병사가 다만 기로소의 한장의 관문에 의거해서 쉽사리 내어준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이미 빌려준 뒤에 본소(本所)에서 조관(照管)하지 않은 것과 평안 병영에서 빌려준 지 오래 되지 아니하여 곧 즉시 전체의 수량을 봉입(捧入)했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의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당초 평안 병사가 빌려주는 것을 허락하였을 때 역적 정우관(鄭宇寬)의 이름으로 현보(懸保)302)  하고 내어 주었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더욱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병신년(丙申年)·정유년(丁酉年) 이후의 평안 병영의 중기(重記)를 거두어 모아 은화(銀貨)·전포(錢布)의 모축(耗縮)과 연조(年條) 및 기로소에 빌려준 은을 도로 갚았는지의 허실(虛實)을 낱낱이 구핵(鉤覈)하게 하되, 곧 속히 계문(啓聞)하여 사실을 조사해서 과죄(科罪)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흉당(凶黨)의 무리가 은을 쓴 것은 김춘택(金春澤)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거의 30년이 되었는데, 수단이 점차 교활해져서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니, 아! 이(利)란 참으로 난(亂)의 시작이다. 여러 역적들이 한 짓에 대해 따져보건대, 양조(煬竈)303)  ·미오(媚奧)304)  하며 쥐처럼 날뛰고 여우처럼 교활하게 군 것이 모두 은화(銀貨)에서 나온 것인데, 마침내 국가(國家)를 흉해(凶害)하여 도시(都市)에 낭자하였으며, 부자의 아들들이 다투어 삼수(三手)를 모의한 역적이 되었던 것이니, 지난 날 모리(牟利)한 자는 모두 난역(亂逆)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춘추(春秋)》의 법(法)에 옛날의 대부(大夫)는 속수(束脩)305)  로 문안함을 경내(境內)에서 행하지 아니하고, 빙궁(聘弓)·후시(候矢)306)  가 경내를 벗어나지 아니하였으니, 아! 이것이 대개 난(亂)의 근본을 막는 바였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27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 / 역사-편사(編史)


[註 297] 목욕(沐浴)하고 고(告)하는 의리 :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篇)에 진성자(陳成子)가 제(齊)나라 간공(簡公)을 시해(弑害)하니, 공자(孔子)가 목욕(沐浴)을 하고 노(魯)나라 애공(哀公)에게 고(告)하기를, "진항(陳恒)이 그 임금을 시해했으니 토주(討誅)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한 것을 말함. 곧 악(惡)을 고발하여 시비(是非)를 가리는 정신을 견주어 말한 것임.[註 298] 병신년 : 1716 숙종 42년.[註 299] 정유년 : 1717 숙종 43년.[註 300] 중기(重記) : 관아에서 전곡(錢穀)이나 노비 등을 출납하거나 납공(納貢)할 때 이를 기록하던 장부.[註 301] 조관(照管) : 처리함.[註 302] 현보(懸保) : 보증함.[註 303] 양조(煬竈) : 한 사람이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쬐고 있으면 뒤에 있는 사람은 그 불빛을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권신(權臣)이 군주(君主)의 이목을 가리는 것을 비유한 말. 전국 시대(戰國時代) 위(衞)나라 영공(靈公)의 총신(竉臣) 미자하(彌子瑕)가 영공 대신 권력을 휘두른 것을 비난한 데서 비롯됨.[註 304] 미오(媚奧) : 오(奧)는 집의 서남방(西南方)에 있는 주인의 방으로 군주(君主)를 뜻하며, 미오는 군주에게 잘 보인다는 의미임. 원래 전국 시대 위나라 영공의 중신(重臣)이었던 왕손가(王孫賈)가 공자(孔子)에게 영공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실력자인 자기 자신, 즉 부엌[竈]에게 아첨하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임. ‘미오’ 자체는 군주에게 잘 보인다는 뜻이나, 전체적으로는 권신(權臣)에게 아첨하거나 권신이 권력을 휘두름을 뜻하는 것인 듯함.[註 305] 속수(束脩) : 묶은 포육(脯肉)으로 옛날에 예문(禮物)로 썼다고 함.[註 306] 빙궁(聘弓)·후시(候矢) : 빙문(聘問)할 때 가지고 가는 활과 화살. 빙문은 예물(禮物)을 가지고 가서 뵙는 것을 말함.
사신은 논한다. "흉당(凶黨)의 무리가 은을 쓴 것은 김춘택(金春澤)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거의 30년이 되었는데, 수단이 점차 교활해져서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니, 아! 이(利)란 참으로 난(亂)의 시작이다. 여러 역적들이 한 짓에 대해 따져보건대, 양조(煬竈)303)  ·미오(媚奧)304)  하며 쥐처럼 날뛰고 여우처럼 교활하게 군 것이 모두 은화(銀貨)에서 나온 것인데, 마침내 국가(國家)를 흉해(凶害)하여 도시(都市)에 낭자하였으며, 부자의 아들들이 다투어 삼수(三手)를 모의한 역적이 되었던 것이니, 지난 날 모리(牟利)한 자는 모두 난역(亂逆)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춘추(春秋)》의 법(法)에 옛날의 대부(大夫)는 속수(束脩)305)  로 문안함을 경내(境內)에서 행하지 아니하고, 빙궁(聘弓)·후시(候矢)306)  가 경내를 벗어나지 아니하였으니, 아! 이것이 대개 난(亂)의 근본을 막는 바였던 것이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김동현(金東顯) 등이 상소하여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책시(磔尸)307)  ·노적(孥籍)하고, 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차례로 처단(處斷)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여러 선비들의 상소가 마침내 정도에 지나친 데 관계된다. 이후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죄인 유후장(柳厚章)이 물고(物故)되었다. 유후장은 애초에 역적 백망(白望)의 계집종 하백(河白)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는데, 이르기를,
"역적 백망이 조그만 흰 항아리 하나를 가지고 유지(油紙)로 단단히 봉(封)하고는 즉시 유후장에게 보냈습니다. 그 뒤에 또 두 번이나 유후장에게 편지를 전했는데, 유후장은 곧 중문(中門)안으로 나와 직접 소찰(小札)을 받고 돌아서서 몰래 보았습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잡혀왔는데, 은휘(隱諱)하고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았다. 국청(鞫廳)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역적 백망과 교통(交通)하고 왕래한 정상을 감히 전적으로 은휘하지는 않았으나, 서찰(書札)로 모의한 일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굳게 은휘하여 말이 사리에 맞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엄하게 형문(刑問)하여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
하고, 네 차례 형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경폐(徑斃)하였다.

 

죄인 이홍술(李弘述)이 물고(物故)되었다. 4월 19일에 이홍술을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하였는데, 전지(傳旨)하기를,
"육현(睦玄)을 박살(撲殺)한 한 조항은 사증(詞證)이 모두 갖추어졌고 정절(情節)이 완전히 드러났다. 이번에 상변(上變)한 사람인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보건대 여러 역적의 무리가 모역(謀逆)한 절차를 목호룡이 많이 참여하여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결국 상변(上變)하는 일이 있을까 의심하고 여러 역적의 무리가 몰래 서로 모의하여 장살(杖殺)해서 입을 막기로 기약하였는데, 그 계책이 거의 성사될 뻔하였으나 이천기(李天紀)가 중간에서 힘을 써서 몰래 이헌(李瀗)을 보내어 다른 근심이 없을 것이라는 뜻을 보장하며 여러 말로 완협(緩頰)308)  하였으므로, 계획이 드디어 도중에 정지되었던 것이다. 만약 애초부터 흉모(凶謀)에 간섭하지 않았었다면, 목호룡의 상변(上變)이 자신에게 무슨 절박한 염려가 있다고 흉도(凶徒)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반드시 전제(剪除)하여 발고(發告)하는 길을 끊으려 했겠는가? 그가 바야흐로 병권(兵權)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면서 군흉(郡凶)과 몰래 체결(締結)하여 음모(陰謀)와 비계(秘計)를 꿰뚫어 알지 못함이 없었으니, 이처럼 죄가 악역(惡逆)을 범한 무리는 결코 금오(金吾)에 맡겨 등한(等閑)하게 안치(按治)할 수 없다……."
하였다. 국청에서 이것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육현을 죽인 한 조항은 승복하였는데, 그 초사에 이르기를,
"김시태(金時泰)의 말을 듣고부터 육현이 궁금(宮禁)에 출입하는 일이 있었는데,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므로 부득이 적당(賊黨)으로 잡아다 다스렸습니다."
하고, 목호룡을 규포(窺捕)한 일은 발명(發明)하였다. 김시태와 면질(面質)시키자 말이 막히었으므로, 이로써 다시 추문(推問)하였더니, 그 초사에 이르기를,
"당초에 적안(賊案)에다 옮겨 썼던 것은 촉휘(觸諱)309)  하는 말이 있었으므로 감히 바른 대로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른바 촉휘라는 것은 궁금에 출입한 일로서, 두 번째 초사에 ‘여염집에 왕래하였다.’고 말했다가 세 번째의 초사에서 비로소 궁금에 출입하였다고 말한 것은 처음에 감히 경솔하게 고하지 못하고 끝에 가서야 바른 대로 진달(陳達)했던 것입니다. 규포(窺捕)했던 처음에 그가 궁금에 출입했던 일을 묻지 않고서 단지 요악(妖惡)으로 죄를 삼았던 것은 또한 촉휘(觸諱)하는 말이 포청(捕廳)의 문안(文案)에 오르는 것이 불편할까 염려한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목호룡을 규포(窺捕)한 일과 유취장(柳就章)을 중군(中軍)으로 삼아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게 한 일을 가지고 다시 추문하여 한 차례 형문하였더니, 그 초사에 이르기를,
"유취장의 일은 네 대신(大臣)이 함께 모여 말하였으므로 분부(分付)에 의해 중군(中軍)으로 차하(差下)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다섯 차례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저뢰(抵賴)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경폐(徑斃)하였다.

 

5월 18일 임인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새로 계청(啓請)하기를,
"수년 이래로 연경(燕京)에 간 역관(譯官) 중에서 장씨(張氏) 성을 가진 자를 빨리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적발해 현고(現告)하게 하고, 혹은 상(賞)을 걸어 구포(購捕)하여 국청(鞫廳)에 이송(移送)시켜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일은 서덕수(徐德修)의 결안(結案) 가운데 이른바, ‘역관으로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장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샀다.’는 말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조송(趙松)이 물고(物故)되었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이 이천기(李天紀)와 면질(面質)하였을 때 말하기를, ‘이우항(李宇恒)이 모은 은 2천여 냥을 조송으로 하여금 장세상(張世相)에게 전해 주게 하였는데, 훔쳐 먹은 것이 많았으므로, 장세상이, 「조 첨사(趙僉使)는 무상(無狀)하다. 나에게 주지 않고 스스로 먹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한 바 있고, 김창도(金昌道)가 승복한 초사에서 또한 말하기를, ‘정우관(鄭宇寬)·이정식(李正植) 및 조송(趙松)·서덕수(徐德修)·김민택(金民澤)·김성행(金省行) 등이 서로 체결(締結)하여 치밀하게 모의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서덕수의 집에서 수색해 찾아낸 문서(文書) 가운데 조송의 서찰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대단히 많은 긴절(緊切)하여 의논할 만한 것…….’이라는 것이 있었다. 국청에서 이것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내었는데, 은휘(隱諱)하고 바른 대로 공초하지 아니하였으며, 공초(供招)한 바에도 어긋나는 단서가 많았다. 형문(刑問)을 청하여 4차에 이르니, 그 초사에 이르기를,
"이정식이 이기지(李器之)의 집에 갔더니, 이기지가 말하기를, ‘이 지사(李知事)가 조송으로 하여금 장 지사(張知事)에게 은을 주게 하였는데, 조송이 은을 훔쳐 먹고 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가, 안 그런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찬(修撰) 김민택(金民澤) 또한 이런 말을 하였고, 또 반드시 훔쳐 먹지는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전파(傳播)되어 또한 장세상의 귀에 들어갔고, 조정의 재상(宰相)들 또한 들은 자가 많았으니 참판(參判) 홍계적(洪啓迪) 또한 말하기를, ‘그 놈은 죽일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잇따라 8차의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저뢰(抵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경폐(徑斃)한 것이다.

 

5월 19일 계묘

박필몽(朴弼夢)을 헌납(獻納)으로, 이세덕(李世德)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을 때 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과 같이 입시(入侍)하여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노적(孥籍)하는 일로 힘써 간쟁(諫爭)하고 한참 있다가 전계(前啓)를 또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5월 20일 갑진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우항(李宇恒)이 물고(物故)되었다. 이우항이 모은 은 2천 냥을 조송(趙松)에게 보냈으나 조송이 훔쳐 먹은 한 가지 조항이 목호룡(睦虎龍)이 이천기(李天紀)와 면질(面質)할 때 나왔으므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으나 은휘(隱諱)하고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았다. 국청에서 조송의 초사에 드러난 단서가 많이 있다 하여 형문(刑問)을 청하여 5차례 이르렀으나, 반은 실토하고 반은 숨기며 끝내 정상을 죄다 고(告)하지 아니하였다. 6차에 이르러 그 지만(遲晩)하는 초사에 이르기를,
"지난해 8월 평산(平山)에 있을 때 이정식(李正植)이 서관(西關)으로 가는 길에 도중(道中)에서 여러 사람을 두루 방문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기지(李器之)가 은자(銀子) 2백 50냥을 조송에게 내어 주고는 장세상(張世相)에게 전해 주도록 하였는데, 대개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한 가지 일을 근심하고 의심하였으므로, 이기지가 이 은화(銀貨)를 내어 장환(張宦)에게 보내고, 그로 하여금 안에서 미봉(彌縫)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해 가운데에 흑점(黑點)이 생긴 변괴(變怪)가 있었는데, 그때 천문(天文)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장단(長湍)에 살고 있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전(前) 찰방(察訪) 김진보(金鎭普)의 둘째 아들을 만나 국사(國事)를 묻고, 인하여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이와 같으니, 종사(宗社)의 안부(安否)는 장차 어떠하겠으며, 독대(獨對)한 대신(大臣)의 길흉(吉凶)은 또한 어떠하겠는가?」 하였더니, 「국가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하니 이것이 진실로 염려스러우며, 이 판부(李判府)는 걱정이 없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교통(交通)한 정절(情節)과 흉언(凶言)의 문답(問答)은 지만(遲晩)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이우항은 이미 지만(遲晩)으로 취초(取招)하였으나, 미처 결안(結案)하기 전에 지레 먼저 물고(物故)되었습니다. 법전(法典)에는 난언(亂言)으로 범상(犯上)하여 정리(情理)가 몹시 해로운 자는 참(斬)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비록 경폐(徑斃)하여 형(刑)을 시행할 수는 없지만, 율(律)에 의거해 적몰(籍沒)하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이휘천(李輝千)을 홍원현(洪原縣)에 정배(定配)하였는데, 나라를 향해 흉언(沰言)을 한 죄 때문이다.

 

국청(鞫廳)에서 김극복(金克復)을 잡아 가두었는데, 이우항(李宇恒)이 끌어댄 김진보(金鎭普)의 아들로서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던 자이다.

 

개가 돈화문(敦化門)에 들어왔다.

 

죄인 백열이(白烈伊)가 물고(物故)되었다. 백열이는 곧 대전(大殿)의 의대(衣襨)를 세탁하는 차지 나인[次知內人]이다.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여러 역적의 무리가 은을 모으므로 이를 매개로 백망(白望)과 같은 성(姓)인 궁인(宮人)에게 바쳐 그로 하여금 독약을 쓰는 일을 도모해 성사시키게 하였으며, 백망은 스스로 백씨(白氏)와 직접 만나서 약속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무수리 종 승업(勝業)의 초사에는 이르기를,
"이영(二英)의 편지와 술병을 받아 백씨(白氏)에게 들어가 전하였고, 백씨는 이영의 집에 왕래하며 혹은 며칠씩 유숙(留宿)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로 작은 서찰을 작은 보자기의 양쪽 끈에 나누어 매기도 하였는데, 한 번은 이씨(李氏)에게 전해 주고 한 번은 백씨(白氏)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백씨는 곧 이영(二英)의 남편인 백망과 같은 성입니다."
하였는데, 국청에서 이것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은휘(隱諱)하고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았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이영(二英)의 집에 유숙하며 백망과 서로 대면(對面)하여 작은 서찰을 왕복한 일은 감히 은휘하지 못하였으나, 은을 받고 독약을 쓴 일은 누누이 스스로 변명하였으니, 청컨대 다시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하였다. 다시 추문할 때 시종일관 저뢰(抵賴)하였으므로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는데, 4차에 이르러 위차(威次)를 베푸니, 공초(供招)하기를,
"제가 경자년310)  의 국휼(國恤) 때 성복(成服)하기 전에 수양모(收養母)인 수진궁(壽進宮)의 나인[內人] 김씨(金氏)를 찾아가 만났더니, 이런저런 말을 하던 사이에 김씨가 말하기를, ‘듣건대 우리 말루하(抹樓下)께서 파빈(破殯)311)  하기 전까지 지탱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친(私親)인 까닭에 말미암는다.’라고 하였는데, 말루하는 곧 대전(大殿)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듣고는 몹시 놀라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이른바 이름이 일업(一業)인 김씨(金氏)에게 추문하였더니 대답이 그 말과 같았으며, 이영의 집에 유숙한 것은 무엇 때문이고 백망과 서로 만나 무슨 말을 했으며 은밀하게 모의한 일과 왕복하며 치밀하게 꾸민 정상에 대해서는 형문이 5차에 이르렀으나, 끝내 실정을 털어 놓지 아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경폐(徑斃)한 것이다.

 

5월 21일 을사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정언(正言) 이진순(李眞淳)이다.】 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먼 지방에 찬축(竄逐)한 죄인 김운택(金雲澤)은 김춘택(金春澤)의 아우이고 김민택(金民澤)의 형으로서, 음모와 밀계(密計)를 같이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조흡(趙洽)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저의 아비 조이중(趙爾重)이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을 때 김운택이 감진 어사(監賑御史)가 되어 품의(稟議)하는 일로 상경(上京)했다가 돌아와 저의 아비에게 이르기를, 「국가에 오래지 않아 마땅히 큰 일이 있을 것이다.」 하므로, 저의 아비가 그것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김운택이, 「오래지 않아 마땅히 나올 것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이이명(李頤命)의 독대(獨對)한 일이 과연 나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일이 미처 발생하기 전에 외조(外朝)의 신하들은 미리 알 길이 없는데, 김운택이 먼저 알고 전한 말이 오래지 않아 곧 징험된 것은 과연 무슨 술책이겠습니까? 사경(私逕)을 매개로 하여 일마다 몰래 탐지(探知)한 자취가 이에 이르러 남김없이 탄로(綻露)되었습니다. 그들이 궁금(宮禁)과 교통(交通)하여 기미를 알아차리고 먼저 누설시킨 죄는 결코 이미 가벼운 벌을 시행했다고 해서 버려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아주 먼 변방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흥해 군수(興海郡守) 이최영(李㝡英)과 연일 현감(延日縣監) 박단석(朴端錫)은 모두 흉적(凶賊) 김창집(金昌集)의 심복으로서, 그 고을의 힘을 다 기울여 셀 수 없을 만큼 뇌물을 싸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김제겸(金濟謙)이 죄로 귀양간 뒤에는 민호(民戶)에 치계(雉鷄)·시탄(柴炭)을 할당해 주고 민부(民夫)를 조발(調發)하여 수백 리나 되는 곳으로 운반하게 하되, 기한(期限)에 미치지 못하면 매질이 낭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잔학(殘虐)하고 불법(不法)한 무리는 결코 자목(字牧)312)  의 직임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모두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국청(鞫廳)에서 홍철인(洪哲人)을 잡아 가두었다.

 

5월 22일 병오

이명의(李明誼)를 부교리(副校理)로, 윤유(尹游)를 수찬(修撰)으로, 이현장(李顯章)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김운택(金雲澤)에 대한 계사에서 감률(勘律)하자고 한 것을 ‘궁금(宮禁)과 교통(交通)하여 성상의 동정(動靜)을 엿보았으니, 자연히 마땅히 베풀 율(律)이 있다.’고 고쳐서 먼저 나국(拿鞫)하여 엄하게 신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후릉 참봉(厚陵參奉) 황보겸(皇甫謙)은 뇌물을 많이 써서 이건명(李健命)에게 부탁(附托)하여 직명(職名)을 얻고자 꾀하여, 빙거할 만한 것도 없으면서 단종조(端宗朝)의 상신(相臣)이었던 황보인(皇甫仁)의 적손(嫡孫)이라고 거짓으로 일컫고는 정관(政官)에게 부동(符同)하여 재랑(齋郞)을 함부로 차지하였습니다. 또 장세상(張世相)과는 심복이 되어 그 집에 머물러 거접(居接)하며 종적이 궤비(詭秘)하였으며, 장세상이 복법(伏法)된 뒤에는 밤을 틈타 달아나 직숙(直宿)하는 재소(齋所)로 가서 자취를 숨길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장세상이 이미 죽어 비록 정절(情節)을 캐물을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이 윤리에 어긋난 역당(逆黨)의 무리는 엄하게 징계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정수기(鄭壽期)가 상소하여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온양(醞釀)313)  한 조짐을 논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김익훈(金益勳)이 아방(兒房)314)  에서 밀계(密啓)한 것과 이사명(李師命)이 주상의 동정(動靜)을 엿본 것은 모두 희기(希覬)315)  하고 주장(譸張)316)  하는 데에서 나와 정절(情節)이 궤휼(詭譎)하였는데, 그 끼친 해독(害毒)과 남긴 재앙이 점차 불어나고 차츰 스며들어 방법(方法)을 전수하여 서로 받들어 하나의 명백(命脈)되었으니, 작게는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이 되었고, 크게는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희지(李喜之)·이기지(李器之)·김용택(金龍澤) 등 여러 역적들은 또 모두 그 아들·사위·아우·조카로서, 그 시초는 환득 환실(患得患失)317)  하는 모의에서 나왔으나, 끝에 가서는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아니하는 화(禍)’로 점차 변해 갔던 것이니, 그 흐름을 따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꿰미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하고, 또 이사명(李師命)의 관작을 추삭(追削)하고 이상(李翔)을 추탈(追奪)하고 조지겸(趙持謙)을 복향(復享)하고 한태동(韓泰東)을 신설(伸雪)하기를 청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지나간 일을 징계하여 앞으로의 일을 삼가고 근본을 뿌리째 뽑아 근원을 막으며, 만대(萬代) 군신(君臣)의 기강을 세우고 백세(百世) 충사(忠邪)의 구분을 엄하게 하여, 청론(淸論)이 권여(權輿)318)  하는 아름다움을 장려하고 요역(妖逆)이 작용(作俑)하는 죄를 밝힘으로써 성조(聖朝)의 포상(褒賞)하고 주벌(誅罰)하는 법을 일월(日月)처럼 빛나게 하소서."
하였다. 끝으로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인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을 논핵(論劾)하기를,
"젊어서는 문장을 잘 쓰는 재능이 있었으나 늙어서는 황폐(荒廢)해져 사국(史局)의 구례(舊例)에 대부분 소루(疏漏)한 것이 많습니다."
하고, 또 좌빈객(左賓客) 홍만조(洪萬朝)는 늙고 병들었으므로 체직(遞職)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논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일을 마땅히 마음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칙서(勅書)를 받고 난 뒤 황제에게 문후(問候)할 때 전하께서는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서시고 칙사(勅使)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서는 것이 곧 전해 내려온 옛 규례(規例)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전하께서는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서시는 것으로 의주(儀註) 가운데에 마련해 넣었으니, 이는 칙사를 향해 문후(問候)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허공을 향해 문후하는 것입니다. 사례(事例)로 헤아려 보건대 실로 의거할 바가 없으니, 이번에는 동·서로 나누어 마주 향해 서고, 황제의 문후는 한결같이 전례(前例)에 의하여 의주 가운데 마련해 넣게 하소서. 그리고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수역(首譯)에게 분부하여 칙사에게도 이 말로 언급해서 합당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5월 23일 정미

황보겸(皇甫謙)을 거제(巨濟)에 정배(定配)하였다.

 

5월 24일 무신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극복(金克復)이 복주(伏誅)되었다. 〈김극복〉은 처음에 이우항(李宇恒)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므로 잡혀왔는데, 4차례 형신(刑訊)을 당하자 지만(遲晩)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경자년319)   5월에 이우항을 찾아가 만났더니, 이우항이 말하기를, ‘요사이 해 가운데에 흑점(黑點)이 있는데,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변고(變故)이다. 지금 국가(國家)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하니, 그것이 장차 여기에 응하는 것인가? 아니면 혹시 독대(獨對)한 대신(大臣)에게 있는 것인가?’라고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천문(天文)은 알지 못하나 주상의 병환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염려스럽다. 독대(獨對)한 대신(大臣)은 당(唐)나라 이필(李泌)320)  이 독대(獨對)한 것과 같으니 무슨 염려할 것이 있겠으며, 한 대신의 일이 천상(天象)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우항이 말하기를, ‘낭관(郞官)도 반드시 열수(列宿)에 응험(應驗)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와 같은 대신이 어찌 위로 천상(天象)에 응험하지 않겠는가? 나 또한 천문(天文)을 조금 알고 있으나, 다만 입신(入神)의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반드시 너에게 물어 오늘날의 천상(天象)의 응험을 상세히 알려 하는 것일 뿐이다. 너는 반드시 아는 바가 있을 것인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발설(發說)을 어렵게 여기며 바른 대로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만약 독대(獨對)한 대신이 죽는다면 나 또한 마땅히 죽게 될 것인데, 내가 죽는 날에는 마땅히 너를 잡아 가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변고(變故)가 혹시 환국(換局)에 대해 응험하는 것인가?’라고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비록 환국(換局)한다 하더라도 영감(令監)은 양주(楊州)의 전사(田舍)로 돌아가 이광(李廣)321)  이 했던 것처럼 하면 될 것이니,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우항과 문답(問答)한 말을 이미 바른 대로 진달하였으니, 난언(亂言)으로 범상(犯上)하였음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죄인 이상집(李尙)이 물고(物故)되었다. 당초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나오기를,
"은화(銀貨)를 마련해 준 수가 2천 몇백 냥 가량에 이르렀는데, 은의 피봉(皮封)에 평안 병영(平安兵營) 고자(庫子)의 명표(名標)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헌(李瀗)이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을 때 장세상(張世相)에게 주기 위해 관곡(官穀)을 돈 6백여 냥으로 바꾸어 먼저 주었는데, 이상집이 보내 온 은 4백 냥은 여주(驪州) 관곡의 모흠(耗欠)된 수량에 옮겨 썼습니다."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자못 굳게 은휘(隱諱)하였다. 이상집의 초사로 목호룡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더니, 목호룡이 공초(供招)하기를,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李天紀) 등이 도장을 찍은 은봉(銀封) 2봉(封)을 백망(白望)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평안 병영의 은자(銀子)가 장차 잇따라 계속해서 올라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제가 그 은봉을 직접 보았고, 귀로 그 정녕(丁寧)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개 그들은 평안 병영의 벼슬자리 하나를 얻고자 꾀하여 이상집을 삼은 다음 은을 만들어 내는 구멍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로써 다시 추문(推問)하였으나, 또 다시 발명(發明)하므로, 국청에서 아뢰기를,
"은봉(銀封)에 관한 한 가지 조항을 비록 스스로 발명하여 장사꾼들이 행화(行貨)할 때 흘러들어 온 것이라고 핑계대고자 하였으나, 피사(詖辭)·둔사(遁辭)로 말이 사리에 맞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형추(刑推)하여 엄하게 추문(推問)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형신(刑訊)을 다섯 차례까지 받았으나, 승복(承服)하지 않고서 죽었다.

 

5월 25일 기유

국청(鞫廳)의 대신(大臣) 이하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영의정 조태구(趙泰耉)는 병 때문에 입시하지 못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국옥(鞫獄)의 죄수들을 작처(酌處)하여, 김시태(金時泰)는 배소(配所)로 도로 보내고, 김제겸(金濟謙)은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고, 윤각(尹慤)은 절도(絶島)에 이배(移配)하고, 심진(沈榗)·이헌(李瀗)은 감사(減死)해서 정배하고, 주방 나인[廚房內人]은 안에서 명백히 조사하고, 묵세(墨世)는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일업(一業)은 원지(遠地)에 정배하고 조흡(趙洽)은 감사(減死)해서 정배하고, 오서종(吳瑞鍾)은 부대시참(不待時斬)322)  하고, 유경유(柳慶裕)는 참작하여 정배하며, 목호룡(睦虎龍)은 포상(褒賞)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김일관(金一觀)이 승복(承服)하였을 때, ‘이홍술(李弘述)이 장차 지난해 11월 9일에 군사를 일으켜 거사(擧事)하려고 하였는데, 성상께서 환국(換局)하셨으므로 단지 사흘 차이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또, ‘장차 이이명(李頤命)을 추대(推戴)하려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사이에 공초(供招)한 바가 착란(錯亂)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많았으므로 그의 결안(結案)에 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깥의 의논이 떠들썩하여 신문하지 않은 것을 허물로 여기므로, 감히 이번에 위절(委折)을 갖추어 진달합니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헌납(獻納) 박필몽(朴弼夢)·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 등이 합계(合啓)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박필몽이 묵세(墨世)와 일업(一業)을 그대로 가두어 두고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실정을 캐낼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고, 윤각을 그대로 가두어 둘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경열(李景說)이 심진(沈榗)·이헌(李瀗)을 그대로 가두어 두고 엄하게 형신하여 실정을 캐낼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한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밖에 전계(前啓)를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홍철인(洪哲人)과 조상경(趙尙絅)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최석항이 현덕명(玄德明)을 배소(配所)로 도로 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承旨) 박희진(朴熙晉)이 역적(逆賊)을 토죄(討罪)한 것을 진하(陳賀)하고, 종묘(宗廟)에 고(告)하여 반사(頒赦)하는 일을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받았다. 이때 청(淸)나라 사신(使臣)이 장차 오게 되어 조정에 일이 많았으므로 국옥(鞫獄)을 대략 이처럼 수습한 것이다.

 

5월 26일 경술

승정원(承政院)에 하지(下旨)하기를,
"석열(石烈)을 교대(交代)한 나인[內人]을 대궐 안에서 조사해 내었더니 없었고, 동궁(東宮)의 주방 나인[廚房內人] 이씨(李氏)를 조사해 내었더니 이씨 성이 숫자가 많아 사핵(査覈)할 길이 없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정수기(鄭壽期)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저 청의(淸議)란 온 세상의 무너진 기강을 격앙(激昻)시키고 뭇 간악(奸惡)한 자들의 간담(肝膽)을 진박(震薄)시키는 것이니, 부식(扶植)하고 장려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고(故)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謙)·고(故)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은 사류(士類)를 앞장서서 창도(唱導)하여 명론(名論)을 홀로 지키며 김익훈(金益勳)을 논척(論斥)하여 흉억(胸臆)을 자행(恣行)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대개 김익훈은 새(璽)·영(瑛)의 옥사(獄事)323)  에 대하여 스스로 공(功)이 있다고 하였으며, 그 영기(令旗)를 꾀어 부르고 아방(兒房)에서 밀계(密啓)한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정적(情迹)이 궤비(詭秘)하였으니, 조지겸·한태동 두 신하가 그 음휼(陰譎)함을 몹시 미워하여 버려두지 않고 배격(排擊)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익훈의 마음씀은 애초에 이익과 공(功)을 탐내는 데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장(譸張)324)  하는 수단이 점차 늘어나고 차츰 스며들어 문득 전승 수호(傳承守護)하는 법이 되었는데, 한번 김춘택(金春澤)에게 전승되고 재차 김용택(金龍澤)·김민택(金民澤)에게 전승되자 그 흉역(凶逆)·패란(悖亂)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거의 이른바, ‘그 아비가 사람을 죽이자 그 아들은 반드시 또 겁탈(刦奪)을 행한다.’는 경우가 되었습니다. 두 신하가 먼저 알고 홀로 깨달아 아직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은미한 조짐을 막아서 40년 사론(士論)의 기발(基鉢)을 만들었음이 더욱 드러났으니, 이처럼 흉역(凶逆)을 토죄(討罪)하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는 날을 당하여 두 신하의 사신(徙薪)325)  한 식견을 유독 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조지겸과 한태동이 김진상(金鎭商)에게 무함(誣啗)받은 것에 대하여 특별히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소설(昭雪)하는 뜻을 보여주시고, 조지겸을 조두(俎豆)에서 철향(撤享)한 것을 빨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도로 예전에 향사(享祀)하던 서원(書院)에다 배향(配享)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사명(李師命)이 평생 동안 저지른 죄악은 손가락으로 이루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척리(戚里)를 매개로 환시(宦寺)와 체결(締結)하고 몰래 사경(私逕)을 통하여 병권(兵權)을 얻으려 꾀했던 등의 일은 그가 승복(承服)한 본죄(本罪) 밖의 것으로서, 다만 이 한 가지 조항만으로도 이미 신하의 극죄(極罪)가 되며 왕법(王法)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갑술년326)  에 개기(改紀)하여 유왕(幽枉)을 죄다 신설(伸雪)하는 날에 있어서도 선대왕(先大王)의 연교(筵敎)가 지엄(至嚴)하여 처분을 바꾸지 않으셨는데, 끝내 교묘하게 꾸민 상언(上言)과 사당(私黨)이 간신히 주언(奏讞)한 것으로 인하여 갑자기 복관(復官)되기에 이르렀으니 인심(人心)이 놀라고 분개해 하는 바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사위·아우·조카는 모두 악역(惡逆)으로 복주(伏誅)되었으니, 만약 이사명이 살아 있다면 연좌(緣坐)의 율(律)을 법에 있어서 마땅히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 경영하고 배포(排布)한 음흉하고 요악(妖惡)한 정절은 이사명이 남긴 투식(套式)을 답습한 것이니, 이처럼 천토(天討)를 시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떨쳐서 엄숙하게 하는 날을 당하여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청컨대 이사명의 복구(復舊)된 관작(官爵)을 빨리 삭탈(削奪)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상(李翔)이 권문(權門)에 아부하고 의탁하여 유명(儒名)을 도둑질하고 음옥(淫獄)327)  에 간증(干證)한 정상은 그 당시 도신(道臣)의 추안(推案)에 낭자하여 30년 이래의 단서(丹書)328)  에 완연하여 죄명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문족(門族)이 강대(强大)함으로 인하여 시골의 괴이한 무리가 선창(先倡)하자, 조정의 간사한 자들이 화응하여 일어나 복관(復官)하는 것도 부족하여 치제(致祭)하기에 이르렀으니, 사림(仕林)의 분개하여 원망하는 것이 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청컨대 이상(李翔)의 복구된 관질(官秩)을 빨리 도로 삭탈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기사년329)  의 군흉(群凶)들이 윤기(倫紀)를 패멸(敗滅)시킨 것이 한정이 없었으나, 목내선(睦來善)은 감히 ‘불공 불경(不恭不敬)’ 등의 말을 다른 나라에 떠벌려 말하게 하였으니, 그가 국모(國母)를 업신여기고 신하의 의리에 어긋난 죄는 이루 다 주살(誅殺)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시 감사(減死)한 것은 이미 관대한 법이었고, 30년의 죄적(罪籍)은 방헌(邦憲)이 엄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지금 성명(聖明)께서 사복(嗣服)하시어 윤기(倫紀)가 아주 밝아졌으니, 무릇 죄가 선후(先后)에 관계된 무리들을 엄중하게 제방(隄防)하는 것은 선조(先朝)에 비하여 더욱 지극히 자별(自別)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대신(大臣)들의 말은, ‘죄의유경(罪疑惟輕)330)  ’이란 법으로 살리자는 의논에 부친 것에 불과했을 뿐이었고, 의정(議政)의 작질(爵秩)을 이 사람에게 더하는 것은 애당초 대신들이 마땅히 허락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금오(金吾)의 신하가 갑자기 그 손자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근거없는 말로 주언(奏讞)하고는 감히 복관(復官)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 제방이 한 번 무너지면 이상(彝常)이 장차 무너질 것이니, 나라 사람들의 놀라움과 분개가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목내선을 복관하라는 명을 빨리 정지하시고,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7일 신해

청인(淸人)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왕세제(王世弟)를 책봉(冊封)하였다. 임금이 왕세제와 함께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청사(淸使)를 맞이하였다.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이르러 금자 궐위(金字闕位)를 남향(南向)하여 설치하고 임금이 북향(北向)하니, 청사(淸使) 아극돈(阿克敦)과 부사(副使) 불륜(佛倫)이 칙서(勅書)를 받들었다. 칙서에 이르기를,
"황제(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성(姓) 휘(諱)에게 유시(諭示)하노라. 짐(朕)이 생각하건대 부자(父子)가 서로 전하는 것이 나라의 상경(常經)이고 형제(兄弟)가 계승하는 것은 한때의 권도(權道)인데, 이에 왕의 주청(奏請)을 보니, 침아(沈痾)331)  가 날이 갈수록 오래 되어 사속(嗣續)이 어려우므로 장차 친제(親弟) 연잉군(延礽君) 휘(諱)를 세제(世弟)로 삼고자 하였다. 정사(情辭)가 간절하고 지극하므로 짐이 청하는 바를 힘써 윤허하고 대신(大臣)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어 가지고 가게 하며, 휘(諱)를 봉하여 조선국 왕세제(王世弟)로 삼고 채폐(綵幣) 등의 물건을 내리노라. 생각건대 왕(王)은 아우 휘(諱)를 권면(勸勉)하여 이륜(彝倫)을 돈독히 하고 영원히 충성하여 순종할 마음을 품고 본지(本支)의 아름다운 경사를 번성하게 하여 종사(宗社)의 안녕을 보전하라. 왕에게 만약 매상(煤祥)의 좋은 조짐이 있고 웅몽(熊夢)의 길한 점을 얻음이 있다면 왕은 다시 아뢸 것이며, 공경하여 짐(朕)의 명(命)을 폐기(廢棄)함이 없도록 하라. 그래서 유시하는 것이다."
하고,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천운(天運)을 봉승(奉承)한 황제는 칙서(勅書)를 내린다. 짐이 생각하건대 제왕(帝王)은 먼 지방을 편안히 하여 이에 계체(繼體)한 은혜를 넓히고, 예제(禮制)는 마땅함을 따라 공회(孔懷)332)  의 경사를 독실하게 하였다. 번유(潘維)를 돌보아주고 구복(舊服)을 계승하게 하니 본지(本支)를 보존하여 연면(延綿)하게 하였으며, 아름다운 이름을 내리고 전수(前修)를 소술(紹述)하게 하니 빛이 윤발(綸綍)에 발생하였다. 그대 성(姓) 휘(諱) 곧 조선 국왕의 아우로서, 몸은 귀개(貴介)에 있고 자질은 본래 충화(冲和)하였으며, 문물(文物)의 나라에서 생장(生長)하여 위의(威儀)의 가르침을 충분히 익혔도다. 생각건대 원곤(元昆)이 아직도 사속(嗣續)하기 어렵고 동기(同氣)는 상현(象賢)333)  하는 데 적합하므로, 이에 진청(陳請)하는 정성을 윤허하고 특별히 이장(彝章)을 우악(優渥)하게 장식하여, 이에 그대를 조선 국왕의 왕세제(王世弟)로 봉하노라. 아! 아우의 도리이면서 자식의 도리를 겸하게 되니 효우(孝友)의 정성을 더욱 돈독히 할 것이며, 형을 섬기되 반드시 임금으로 섬겨 충근(忠勤)의 예절을 다하기를 힘쓰도록 하라. 크게 고명(誥命)을 받들고 총휴(竉休)를 저버리지 말지니, 공경할지어다."
하였다. 임금이 받고 내려와 팔배례(八拜禮)를 행하였으며, 드디어 잔치를 베풀었는데, 바야흐로 양암(諒闇)334)   중에 있었으므로 다례(茶禮)만 행하고 파하였다.

 

5월 28일 임자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청사(淸使)를 만났다. 돌아와 반사(頒赦)하고 백관(百官)의 진하(陳賀)를 받았는데, 왕세제(王世弟)가 책봉(冊封)받았기 때문이었다.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개제(介弟)에게 원량(元良)을 맡겼으니 기쁨이 종팽(宗祊)에 넘쳐나고, 소방(小邦)에 현책(顯冊)을 내리니 은혜가 온 나라에 가득한데, 한 사람에게 기쁜 일이 있으니 만백성(萬百姓)이 같이 즐거워하게 된다. 생각하건대 나의 청궁(靑宮)은 어려서부터 현덕(玄德)이 밝게 드러나 총명하고 효우(孝友)함은 하늘이 내리셨으니, 어찌 다만 과궁(寡躬)만이 깊이 알 뿐이겠는가? 검약(儉約)하고 겸손함이 날로 들리니, 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칭송하는 바이다. 또 문장을 익히고 학문에 힘을 쓰는 아름다움이 있는데다가 겸하여 특별히 통달하여 일을 이루는 재능이 있으니, 이에 주기(主器)가 빈 것으로 인하여 영원히 계체(繼體)의 중요함을 맡겼노라. 지난날 사속(嗣續)이 점차 늦어져 영고(寧考)께 깊은 근심을 끼쳐 드렸는데, 이제 종사(宗社)가 돌아갈 곳이 있게 되었으니, 실로 열조(列祖)께서 몰래 도우심을 힘입었다. 민심(民心)이 매인 바 명호(名號)는 비록 본조(本朝)에서 정했으나, 봉전(封典)은 일정한 법이 있으니, 진청(陳請)을 감히 상국(上國)에 늦출 수가 있겠는가? 엄숙하게 황화(皇華)를 빨리 내려 보내시니, 온발(溫綍)에 밝게 빛나는도다. 책문(冊文)과 물건을 같이 내리시되 낱낱이 모두 은혜가 이른 것이었고, 장려하고 권면하심이 겸하여 두터웠으니, 너무나도 예사로움을 벗어났도다. 욕례(縟禮)가 처음 이루어지니 뜰에 가득히 모인 사람들이 얼굴빛을 바꾸어 서로 경하(慶賀)하였고, 아름다운 빛이 더욱 드러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목을 늘이며 서로 기뻐하였도다. 일륜(日輪)이 더욱 빛나고 방명(邦命)이 따라서 더욱 굳건해졌으니, 어찌 패택(霈澤)을 아낄 것인가? 홍사(洪私)를 넉넉히 쓰리라……. 아! 삼가 정일(精一)하게 전한 것을 받고 만세(萬世)토록 중흡(重洽)335)  을 기약하며, 이에 환한(渙汗)336)  의 호령을 내어서 조민(兆民)과 더불어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이에 교시(敎示)하니, 생각건대 마땅히 잘 알 것이다.
하였는데, 대제학(大提學) 이광좌(李光佐)가 지어서 바친 것이다.

 

박필몽(朴弼夢)·여선장(呂善長)을 교리(校理)로, 권익순(權益淳)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정신(李正臣)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조태억(趙泰億)을 반송사(伴送使)로 삼아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품계(品階)를 더하고, 유중무(柳重茂)를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삼았다.

 

5월 29일 계축

유필원(柳弼垣)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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