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인
임금이 효령전(孝寧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상건(李尙建)을 잡아 가두었다.
이보다 앞서 정언(正言) 이진순(李眞淳)이 국자 당상(國子堂上)을 논죄(論罪)하는 일을 정계(停啓)하자 물의(物議)가 비난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사간(司諫) 김계환(金啓煥)이 수작(酬酢)하여 그 정계를 권하므로 감히 입락(立落)에 대해 시비하지 못하였다 하여 인피하였으며, 정언(正言) 정수기(鄭壽期)가 김진상(金鎭商)의 상서(上書)에 대한 비답(批答) 가운데 ‘부정(不正)’이란 두 글자를 도로 거두라는 청을 상소로 논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그 당시의 서답에는 이 두 글자가 없었으므로 혼매(昏昧)하고 잘못하여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 하여 인피하고는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 처치(處置)하기를,
"이미 정계(停啓)했다가 도로 발계(發啓)하였으니, 자신에게 무슨 손상될 바가 있겠습니까? 사사로이 한 말은 더욱 혐의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햇수가 오래되어 잘못 기억한 것은 원래 대답한 것이 아니니, 이것으로 경솔하게 언관(言官)을 체직(遞職)시킬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출사(出仕)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일 을묘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정수기(鄭壽期)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오서종(吳瑞鍾)은 은을 모아 뇌물을 써서 환국(換局)을 도모한 죄를 이미 승복하였으니, 사율(死律)에 두는 것은 법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환국(換局)을 도모한 것은 향곡(鄕曲)의 한낱 보잘것 없는 자가 마음먹을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은화(銀貨)를 많이 모은 것 또한 비천(卑賤)한 한 명의 기려(覊旅)337) 가 홀로 마련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함께 모의하여 힘을 합쳐서 경영하고 배치한 데에는 반드시 도운 자가 있을 것이니, 진실로 낱낱이 캐물어 끝까지 핵실(覈實)하고 엄하게 징계함이 마땅할 것인데, 경솔하게 앞질러 작처(酌處)해서 곧바로 정형(正刑)하고자 하니, 옥체(獄體)에 어긋남이 있고 여정(輿情)을 크게 거스름이 있습니다. 청컨대 국청으로 하여금 다시 엄한 형장(刑杖)으로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알아낼 것을 기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이 상소하여 영의정 조태구(趙泰耉)를 공격하였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흉역(凶逆)이 변고(變故)가 삼사(三事)338) 의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주상께서는 위에서 고립되어 위태하고 군정(群情)은 아래에서 어수선하게 놀라고 있으니, 믿고 의지할 바는 단지 한두 대신(大臣)일 뿐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일제히 분개하고 근심하며 불공 대천(不共戴天)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목욕(沐浴)하고 역적(逆賊)의 토죄(討罪)를 청하는 의리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대신(臺臣)이 이이명(李頤命)을 처참(處斬)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은 뒤에 대신(大臣)은 즉시 청대(請對)하여 잡아다 국문하여 정상을 캐낸 뒤에 처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대신(臺臣)이 청한 바는 명백하고 직절(直截)하여 진실로 역적을 토죄하는 정당함을 얻었는데, 대신(大臣)이 이처럼 위곡(委曲)한 것은 진실로 여정(輿情)에 불쾌하기는 하였으나, 또한 국옥(鞫獄)의 보통 체모에 해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괴이하게도 영상 조태구는 감히 역신(逆臣)을 구해(救解)하는 말을 하였는데, 심지어 연일(連日) 약원(藥院)에 있었던 것을 그 아들의 역모(逆謀)를 알지 못한 증거로 삼았으니, 아! 또한 놀랄 만합니다. 손바닥에 글씨를 쓴 것이 역적 정인중(鄭麟重)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니, 여러 역적들이 이이명을 추대(推戴)하고자 하였음이 진실로 이미 낭자하였으며, 흉모(凶謀)를 주장한 자가 곧 그 아들과 조카였으니, 어찌 아들과 조카가 추대를 모의하였는데도 그 아비로서 모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비록 역적 이이명으로 하여금 스스로 해명하게 하더라도 결단코 감히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신(大臣)의 말이 연석(筵席)에서 한 번 나오자 여항(閭巷)의 부녀자나 어린아이들도 발끈하여 노기(怒氣)를 얼굴과 말씨에 드러내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군신(君臣)의 의리는 이륜(彝倫)을 지키는 데에 근본을 두고 있으므로 찬역(簒逆)의 적(賊)은 사람들이 함께 죽이는 바인데, 이번 역적 이이명은 과연 어떤 악역(惡逆)이 되겠습니까? 비록 지극히 어리석고 미천한 자라고 하더라도 그 살점을 씹어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서 군부(君父)의 원수를 시원하게 갚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대신(大臣)의 말이 곧 이처럼 평서(平恕)하니, 사람들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여항(閭巷)의 부녀자나 어린아이가 분노하는 바인데도 대신(大臣)은 태연하였습니다.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어찌 부녀자나 어린아이만 못하겠습니까마는, 진실로 사의(私意)에 가리워지고 그것이 고질이 되어 빼앗기는 바가 있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이른바 사의(私意)란 무엇입니까? 적신(賊臣) 조태채(趙泰采)는 곧 대신(大臣)의 종제(從弟)입니다. 연차(聯箚)한 죄가 실로 세 역적과 함께 한 군데로 돌아갑니다. 대신(臺臣)이 처음에 조금 등급을 나누었다가 끝에 가서 함께 감처(勘處)한 것은 대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변서(變書)가 올라오자 조태채의 이름이 처음에 역적의 초사에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니, 일종의 의논은 혹시 그 죄범(罪犯)이 이이명·김창집(金昌集)보다 조금 가벼운 것인가 의심하였고, 대신(大臣) 또한 그가 혹시라도 죽음에서 면할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이명·김창집 두 역적이 처참(處斬)·정형(正刑)으로 감률(勘律)된 뒤에 차례로 등급을 나누어 보았더니, 조태채도 응당 사사(賜死)해야 하는 죄과(罪科)에 해당되었습니다. 조태채의 율(律)을 감하려면 마땅히 이이명·김창집의 율을 먼저 감해야 하고, 그 율을 감하려면 마땅히 그 죽음을 먼저 늦추어야 할 것이므로, 대신(大臣)이 적당한 말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갑자기, ‘약원(藥院)에 있었으므로 알지 못하였다.’는 말을 경솔하게 진달하였던 것이니, 아! 또한 놀랍습니다.
아! 사랑하여 그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동당(同堂)339) 의 형제는 진실로 지친(至親)이 되니, 대신(大臣)이 조태채를 돌보아 보호하며 생의(生議)에 붙이고자 하는 것은 비록 혹 정리상 면하지 못할 바라 하나, 다만 조태채의 죄가 어떤 곳에 관계되며, 동당을 군부(君父)에 견주어 경중(輕重)이 어떠합니까? 대신(大臣)이 비록 대의 멸친(大義滅親)340) 하기를 옛사람이 했던 것처럼 하지는 못한다 하나, 또한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맡겨 혹시라도 사정(私情)을 용납함이 없어야 마땅할 것인데, 지금 황망하게 전도(顚倒)되어 이런 큰 착오를 저질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지난날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유(庭籲)를 갑자기 정지하고 연차(聯箚)를 마침내 올리자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아주 짧은 순간에 결판이 났습니다. 대신(大臣)이 피눈물을 뿌리고 마음을 썩이며 입술을 태우고 혀를 말리면서 죽음을 무릅쓴 채 청대(請對)한 것은 과연 무슨 일 때문이었으며, 그때 연차(聯箚)한 여러 역적들은 당연히 죽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죽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대신의 그날 마음을 뒤미처 생각해 보건대 단지 군부(君父)가 있는 줄만 알고 동당을 돌보아 줄 뜻을 가질 겨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일이 지나가자, 이 생각은 점차 해이해지고 가슴속에는 공의(公議)와 사정(私情)이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마침내 공의가 사의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고 여러 사람에게서 노여움을 취할 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사(私)라는 한 글자는 실로 허다한 병패(病敗)의 근원이 되니, 그에게 무너진 기강을 정돈하고 무너진 정국(政局)을 수완(修完)하는 것을 책임지워 성상께서 의비(倚毗)하시는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난날 지성(至誠)·대충(大忠)하는 한 마디로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국가에 다시 오늘이 있으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비록 공(功)이 사직(主稷)을 보존했다고 하더라도 또한 지나치지 아니할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공(功)으로 죄를 속죄(贖罪)하여 예(禮)를 갖추어 물러나고 사제(私弟)에서 허물을 반성하여 중외(中外)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우규(右揆)341) 를 칙려(勅勵)하여 국사(鞫事)에 마음을 다 기울이도록 하되, 역적(逆賊)을 토죄(討罪)하는 대의(大義)에 조금이라도 엄하지 아니한 것이 없도록 하여 조정이 높아지고 기강이 서게 하소서."
하였다.
6월 3일 병진
이조(吏曹)의 별세초(別歲抄) 단자(單子)에 이연(李㮒)342) ·이환(李煥)343) ·이혁(李爀)344) 등의 직첩(職牒)을 돌려주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경열(李景說)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목호룡(睦虎龍)이 김용택(金龍澤)과 면질(面質)하였을 때의 문안(文案)에,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는 다만 6, 7명이 일을 함께 하였으나, 주상을 폐위(廢位)시키려는 모의는 참여해서 아는 사람이 많으며, 김진상(金鎭商)·홍용조(洪龍祚)는 그 외영(外影)이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부자(富者) 박창윤(朴昌潤)이 황해 수사(黃海水使)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말이 많으니, 이희지(李喜之)가 몰래 대간(臺諫) 홍용조를 사주하여 박창윤이 미워하는 사람을 탄핵(彈劾)하게 하였다. 그래서 바야흐로 4백 석(石)의 조(租)를 배로 운반해 오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네가 말한 것이 아니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박창윤 자신이 죽었으므로 조(租)를 수송한 한 가지 조항은 비록 구문(究問)할 곳이 없습니다만, 박창윤이 황해 수사가 되었을 때 옹진 현령(瓮津縣令) 신혼(申混)과 세상에서 다 같이 아는 혐의가 있었고, 홍용조가 대직(臺職)에 있을 때 과연 신혼을 탄핵한 일이 있었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목호룡이 말한 바는 실로 근거가 있습니다. 이른바 외영(外影)이란 것은 그 정범(情犯)을 논하건대 삼수(三手)의 여러 흉적(凶賊)들에 비하여 혹 내외(內外)·심천(深淺)의 구별이 없지 아니하나, 통탄스러운 것은 이름이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이 되었으면서 실제로는 흉당(凶黨)의 외원(外援)이 되어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멀리서 바라보고 뜻을 받들어 왼쪽을 치고 오른쪽을 물어뜯기를 오로지 가리켜 부리는 대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역적들이 복법(伏法)된 뒤에 이르러 외영(外影)으로 화응(和應)한 무리들을 차례로 엄하게 징계(懲戒)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김진상은 다른 범죄로 아주 먼 변방에 투패(投配)되었고 홍용조는 범한 바가 더욱 현저하니, 청컨대 아주 먼 변방에 안치(安置)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용천 부사(龍川府使) 임욱(任勗)은 목호룡과 조흡(趙洽)이 면질했을 때의 초사에 긴요하게 나왔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은 2백 냥을 이천기(李天紀)에게 주어서 이이명(李頤命)에게 벼슬을 구하였는데, 또 벼슬을 얻지 못하게 되자 곧장 이이명의 이름을 들어 경조(京兆)에 정장(呈狀)하겠다는 뜻으로 이천기를 공갈하였으므로, 이천기가 부득이 중간에서 주선하여 마침내 용천 부사에 차임(差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임욱이 역적 무리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교통(交通)하여 뇌물을 쓴 정상을 이를 들어 알 수 있으니, 청컨대 먼 곳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6월 4일 정사
왕세제(王世弟)가 관소(館所)에 가서 청사(淸使)를 전송하였다. 이번 칙사(勅使)가 왔을 때 호조(戶曹)에서 몰래 은(銀)을 5천 1백 냥 주었고, 으레 주는 것과 다른 물건은 주지 않았다.
서명백(徐命伯)을 영암군(靈巖郡)에 정배(定配)하였는데, 서덕수(徐德修)의 아비이다. 그리고 감사(減死)의 율(律)을 써서 조상경(趙尙絅)을 안주(安州)로, 김제겸(金濟謙)로 부령(富寧)으로 찬축(竄逐)하고, 유경유(柳慶裕)를 무장(茂長)에 정배하였다.
6월 5일 무오
밤 3경, 4경에 건방(乾方)과 곤방(坤方)에 불빛과 같은 기운이 있었다.
개가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왔다.
6월 6일 기미
진주사(陳奏使) 겸 주청 정사(兼奏請正使) 이하의 관원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이건명(李健命)에게 전민(田民)345) 을 사급(賜給)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조익명(趙翼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새로 이건명(李健命)의 상사(賞賜)를 정지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은 세 대신(臺臣)의 처치(處置)가 타당함을 잃어 물의(物議)가 그릇되게 여긴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정언(正言) 정수기(鄭壽期)는 금부 당상(禁府堂上)인 이의현(李宜顯)과 황귀하(黃龜河)의 계사(啓辭)에서 조어(措語)를 삭제하고 율명(律命)을 줄여서 낮추어 장석(長席)의 비난과 배척을 받았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집의(執義) 양정호(梁廷虎)는 세 대신(臺臣)을 처치할 때 왕복하여 상의하고 무릅쓰기 어려웠던 형세에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사간(司諫) 김계환(金啓煥)과 정언(正言) 이진순(李眞淳)은 응당 체직(遞職)되어야 함에도 억지로 출사(出仕)한 것은 또 혐애(嫌碍)하는 단서가 있다 하여 인피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치하기를,
"처치(處置)가 타당함을 잃어 물의(物議)를 초래하였고, 경솔하게 앞질러 감률(勘律)한 것은 대례(臺例)에 어긋남이 있으며, 정론(停論)을 참여해 들었으니 형세가 그대로 있기 어렵고, 애초에 이미 정계(停啓)하였으니 마땅히 낙과(落科)에 두어야 합니다. 청컨대 모두 체차(遞差)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7일 경신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친제(親祭) 때 병조와 도총부(都摠府)의 관원(官員)은 모두 시위(侍衛)하러 입참(入參)하지만 도무지 배곡(拜哭)하는 절차가 없으니, 망극(罔極)한 정(情)을 조금이나마 펼 수가 없으며, 받은 최복(衰服)이 저절로 변제(變除)346) 가 없는 데로 돌아가므로 또한 단서(端緖)가 없는 데에 관계됩니다. 이것은 마땅히 조가(朝家)에서 지휘하는 바가 별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위(侍衞)의 임무에 대하여 생각해 보건대 불우(不虞)에 대비하고 비상(非常)한 일을 살피는 것이니,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출궁(出宮)한 이후부터 환궁(還宮)하기 이전까지 상례(祥禮)를 또 마치면 밖에서 곡(哭)하는 예(禮)가 없으니, 생각건대 미처 출궁하기 전에 굽혀 변통(變通)을 내리시어 한 번 슬픔을 펼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혹자는, ‘곡읍(哭泣)에는 정해진 횟수가 있고 공체(公體)는 더욱 엄한데, 제례(祭禮)를 시작하지 아니하여 신자(臣子)로서 어찌 감히 먼저 곡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데, 이 말도 그럴 듯합니다만 또한 그렇지 아니한 것이 있습니다. 국가의 향사(享祀)에는 배읍(拜揖)에 절차가 있고, 여러 집사(執事)에 이르러서는 먼저 사배(四拜)하는 예(禮)가 있으니, 여러 시위(侍衞)들이 먼저 곡배(哭拜)하고 뒤에 시위하는 것은 이런 예(例)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제멋대로 행하는 것은 진실로 감히 할 수 없겠지만, 조가(朝家)에서 변통하여 허락한다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국상(國祥)을 변제(變除)하는 날 시위(侍衞)하는 여러 신하들은 대부분 숭품(崇品)의 중재(重宰)들인데, 도무지 한 번도 곡(哭)함이 없는 것은 정례(情禮)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시위(侍衞)란 비상(非常)한 일을 경비(警備)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중하니, 곡읍(哭泣)하는 등의 일은 그 사이에 행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대가(大駕)가 미처 출궁(出宮)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이 먼저 합문(閤門) 밖에서 기다리게 되니 그 전에 앞질러 전곡(展哭)하는 예(禮)를 행할 수는 없으며, 전하께서 곡림(哭臨)하시고 옷을 바꾸어 입으실 때에는 시위하는 장사들이 각기 운검(雲劍)과 보검(寶劍)을 가지고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재전(齋殿)의 문 밖에 늘어서서 감히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니, 또한 전곡(展哭)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상께서 제사를 마치고 환궁(還宮)하신 뒤에도 시위하는 장사(將士)들은 또한 제사를 마친 뒤 홀로 배곡(拜哭)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가(大駕)가 출궁(出宮)하기 전에 한 번 슬픔을 펼 수 있게 할 것을 말하고 여러 집사(執事)들이 먼저 사배(四拜)하는 예(例)를 인용하기에 이르렀으나, 시위(侍衞)는 제관(祭官)과는 사체(事體)가 다르니, 제례(祭禮)를 미처 시작하기 전에는 결단코 먼저 배곡(拜哭)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왕조(王朝)의 전례(典禮)는 지극히 엄중하니, 사세(事勢)의 구애되는 바 있어 정(情)을 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례의(五禮儀)》에 애당초 마련하지 않았던 것은 궐문(闕文)이 아니라 사세(事勢)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소사(疏辭)가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6월 8일 신유
임금이 효령전(孝寧殿)에 상제(祥祭)를 행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를 올리고 도성(都城)을 나갔으니, 김홍석(金弘錫)이 상소하여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아! 사직(社稷)의 위태함이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과 같고 춘저(春儲)가 위태로와 사위(辭位)하였을 때 그 부지(扶持)하고 도운 것은 이 원보(元輔)가 있는 데 힘입었으니, 충성스런 마음과 위대한 공로는 옛날의 대신(大臣)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만한데, 지금 이에 뜻밖의 말로 느닷없이 공격하여 물리쳐서 조정에 편안하게 있지 못하게 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괴귀(怪鬼)한 무리들이 준절하고 각박한 것에만 힘을 써서 국사(國事)를 파괴한 것이 매양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6월 9일 임술
옥당(玉堂) 【교리(校理) 여선장(呂善長), 부교리(副校理) 이명의(李明誼), 수찬(修撰) 윤유(尹游)·이현장(李顯章)이다.】 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의 상소로 말미암아 어제 궐외(闕外)의 곡반(哭班)에서 들 것에 실려 도성(都城)을 나가 곧바로 강교(江郊)로 향하였다고 하니, 신 등은 저윽이 국사(國事)와 세도(世道)를 위해 지극히 근심스럽고도 한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지난해 10월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수 있겠습니까? 흉신(凶臣)의 위세(威勢)가 서서 천위(天位)가 장차 기울어지려 하자 충성(忠誠)을 진달하고 바친 사람이 모두 장차 사라져 없어질 형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대신(大臣)이 거친 들판으로 멀리 내쫓겨 있는 가운데에서 몸을 떨쳐 일으키고 놀라운 조짐이 불꽃처럼 타오를 즈음에 병을 무릅쓴 채 수레에 올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늠연(凛然)하게 한 몸의 생사(生死)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군간(群奸)들이 저지하여 가로막는 것조차 헤아리지 아니한 채 합문(閤門)을 두드려 입대(入對)해서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게 하여 한 오라기 머리카락과 같던 위기에서 천일(天日)을 부지(扶持)하고 국세(國勢)를 태산(泰山)처럼 편안하게 회복시켰으니, 오늘날 종사(宗社)가 있게 된 것이 그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두 환시(宦侍)의 일이 발생함에 미쳐서는 눈물을 흘리며 양궁(兩宮)에게 정성을 진달하고 역엄(逆閹)과 요비(妖婢)를 모두 왕법(王法)으로 정형(正刑)하여 성상의 덕이 빛나게 하고 춘궁(春宮)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그 전후에 수립(樹立)한 것을 보건대 정충(精忠)은 금석(金石)을 꿰뚫을 수 있고 사업(事業)은 간책(簡冊)에 빛날 만합니다. 이는 다만 성상께서 길이 의비(倚毗)하시는 바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선대왕(先大王)의 척강(陟降)하신 영혼께서도 반드시 위에서 장차 기뻐하실 것이며, 천하 후세에서도 또한 반드시 ‘조정에 어진 재상(宰相)이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그때 쇠패한 정국(政局)의 끝머리를 당하여 자신이 번거로운 온갖 일을 도맡았으니, 무릇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 어찌 한 가지 한 가지가 모두 타당하겠습니까? 서로 어렵게 여기고 위복(違覆)하며 옳다 그르다 했던 것은 본디 서로 돕는 뜻에 해롭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김홍석은 연주(筵奏) 때 말하는 사이에 나왔던 몇 글자를 점출(拈出)하여 곧장, ‘약원(藥院)에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였다.’는 말로 도리어 실상을 뒤집어 억제하고 있습니다. 말 밖에서 뜻을 헤아려 설명에 설명을 덧붙여 마치 사사롭게 비호하여 먼저 제멋대로 늦춘 것이 있었던 것인 양 하니, 아! 또한 심합니다. 그때의 연주(筵奏)를 신 등이 또한 입시(入侍)했던 여러 신하들로부터 상세하게 들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그때 약원(藥院)에 있었으니, 알고 알지 못하고는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한 것은 애당초 털끝만큼도 역괴(逆魁)에게 용서를 더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약원을 들어 말했던 것이 비록 긴요한 것은 아니라 하나 말하는 사이에 차질이 생겼던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무슨 큰 일이겠습니까? 또 크고 지극한 충성으로 공(功)이 사직(社稷)을 보존했음은 대신(臺臣) 또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일이 지나간 뒤에 갑자기 뒤미처 제기하여 상정(常情) 밖의 기구(崎嶇)한 말을 하며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지 않은 채 공공연하게 제멋대로 꾸짖고 욕하여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편안히 있을 수 없도록 만든 뒤에야 그만두고자 하는 것입니까?
지금 조정(朝廷)은 처음 시작되어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온갖 책임이 몰려 드는 바가 다만 원보(元輔)의 한 몸에 있는데, 한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하여 급히 나라를 떠나 버리니, 국사(國事)는 아득하여 어찌할 수가 없고, 조정의 기상은 갈수록 더욱 한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식견이 있는 이들은 근심하고 한탄하며 실로 쉴 곳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전하께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사람은 한둘의 충성을 다한 노신(老臣)에 불과한데, 뜻밖의 헐뜯음을 당한 지 거의 열흘에 가까우나 아직도 위안(慰安)하는 하교가 없으니, 신 등은 저윽이 전하를 위하여 개탄하고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명지(明旨)를 내리시되, 특별히 정성과 예를 더하여 즉일로 돈독하게 부르셔서 국체(國體)를 높이고 국사(國事)를 다행스럽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돈독하게 부르라는 청은 진실로 매우 마땅하다.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도성을 나가며 올린 차자에 답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정도에 지나침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또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함께 오도록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는 ‘태묘(太廟)에 부(祔)한 뒤 환궁(還宮)할 때 나례(儺禮)347) 를 올리고, 기로(耆老)·유생(儒生)은 교장(敎場)에서 각각 가요(歌謠)를 올리며, 길거리에서 결채(結彩)348) 하고, 궐문(闕門) 밖 좌우에 채붕(彩棚)하는 일’을 계품(啓稟)하였으나, 임금이 마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대개 신축년349) ·병진년350) 에 부묘(祔廟)한 뒤 예조의 계품으로 인하여 거행하지 않았던 고사(故事)를 쓴 것이다.
6월 10일 계해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김홍석(金弘錫)의 상소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진소(陳疏)하기를,
"직책이 태사(台司)351) 를 더럽히고 있으면서 이미 백료(百僚)를 감독하여 거느리며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연소(年少)한 대관(臺官)에 규검(糾檢)받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상(領相)은, ‘이이명(李頤命) 자신이 약원(藥院)에 있었고, 흉모(凶謀)를 알고 알지 못하고는 외인(外人)이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는데, 연설(筵說)이 와전(訛傳)되어 이처럼 떠들썩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대신(臺臣)의 소어(疏語)는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으니, 경(卿)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1일 갑자
이사상(李師尙)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계환(金啓煥)을 집의(執義)로, 유필원(柳弼垣)을 부교리(副校理)로, 이기성(李基聖)·김중희(金重熙)를 장령(掌令)으로, 이광보(李匡輔)·박필기(朴弼夔)를 정언(正言)으로, 이덕수(李德壽)·윤연(尹㝚)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심공(沈珙)을 응교(應敎)로, 권첨(權詹)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봉년(李鳳年)을 헌납(獻納)으로, 이세덕(李世德)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지평(持平) 김홍석(金弘錫)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청대(請對)하여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을 논척(論斥)한 것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비난하고는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지평 조익명(趙翼命)이 처치(處置)하기를,
"말을 비록 가려 쓰지는 아니하였지만 고집하는 바가 또한 중대하니, 대체(臺體)로 헤아려 보건대 가볍게 체차(遞差)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출사(出仕)시키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그러나 전계(前啓)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는 것을 처서(處暑) 무렵에는 잠시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6월 14일 정묘
이진유(李眞儒)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명의(李明誼)를 헌납(獻納)으로, 정해(鄭楷)를 사간(司諫)으로, 이세덕(李世德)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시환(金始煥)을 수찬(修撰)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이조 정랑(曹正郞)으로 삼았다.
6월 15일 무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기성(李基聖)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복법(伏法)된 죄인 김창도(金昌道)의 결안(結案)한 초사(招辭)에 이기지(李器之)와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중군(中軍) 이삼(李森)은 장략(將略)이 있으나 반드시 더불어 일을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므로, 영상(領相)이 연동(蓮洞)의 이상(李相), 낙동(駱洞)의 조상(趙相) 및 좌상(左相)과 함께 상의하여 병판(兵判) 이만성(李晩成)에게 말해서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내보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네 대신(大臣)이 상의하여 유취장(柳就章)을 중군(中軍)으로 삼는 일을 훈장(訓將)에게 분부(分付)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충분히 상의하여 체결(締結)하고 화응(和應)한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기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멀리 찬축(竄逐)한 죄인 이만성과 정배(定配)한 죄인 유취장을 나국(拿鞫)하여 엄하게 심문하게 하소서.
전(前) 통제사(統制使) 이수민(李壽民)은 통영(統營)에 있을 때 권세(權勢)에 의지하여 탐욕스러움이 더욱 방자하였는데, 그 당시 암행 어사(暗行御史)의 장계(狀啓)에는 심지어 군무(軍務)를 완전히 폐지하고 오로지 요리(料理)만 일삼고 있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었습니다. 그 사당(私黨)이 짐작하여 말감(末減)352) 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그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시직(尸職)353) 한 죄를 환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흉적(凶賊)이 적소(謫所)로 떠나는 날에는 심지어 원문(院門)을 나가 영송(迎送)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통제사가 원문을 사사로이 나갈 수 없음은 법례(法例)가 그러한데, 비록 다른 사람이 말려서 제지하였기 때문에 계획을 마침내 중지하였으나, 그 심기(心氣)가 꼭 들어맞아 적괴(賊魁)를 편든 정상이 절절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두 흉적(凶賊)이 천극(荐棘)에 있을 때에는 배로 끊임없이 실어날라 오로지 흉적을 환양(豢養)하는 것으로 일삼았습니다. 지금 국사(鞫事)가 미처 종결되지 아니하여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흉적의 여얼(餘孽)을 하루라도 연곡(輦轂) 아래에서 숨쉬며 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죄인 이정소(李廷熽)는 사람됨이 요악(妖惡)하고 처사(處事)가 비루하고 패리(悖理)한데, 일찍이 영남(嶺南)의 우관(郵官)으로 있을 때에는 불법(不法)을 많이 자행하여 일기(馹騎)354) 를 받거나 물리칠 즈음에 오로지 뇌물이 많고 적은 것만을 보았습니다. 그의 아비 이상휴(李相休) 또한 우관(郵官)으로 임소(任所)에서 죽자, 부물(賻物)이라 칭탁하여 두 우역(郵驛)에서 억지로 거두어 들였으므로, 우졸(郵卒)들이 지금까지도 원망하여 욕하고 있습니다. 그의 할아비 분묘(墳墓)가 공주(公州)에 있는데, 혈(穴)이 짧고 땅이 좁아서 제부(諸父)·군종(群從)이 항상 할아비의 분묘 가까이에 장사지낼 것을 경계하였으므로, 이정소는 한갖 산에 대한 욕심만 내어 반드시 그 아비를 입장(入葬)시키고자 그 장사지내는 날을 굳게 숨긴 채 몰래 스스로 할아비의 분묘에 바싹 가까이 다가들도록 투장(偸葬)하고는 그 계체(階砌)355) 를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부형(父兄)이나 지친(至親)으로 하여금 모두 혈(穴)을 내려다 볼 수 없도록 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패륜(悖倫)하고 무식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또 그가 대각(臺閣)에 들어갔을 때에는 경주(慶州)에 있는 적당(賊黨)에게 많은 뇌물을 후하게 받고 그 당시 영장(營將)을 삭판(削版)하라는 계사(啓辭)를 내기까지 하였는데, 그 후 적(賊)의 초사(招辭)에서 이미 인연(夤緣)하여 대관(臺官)에게 뇌물을 써서 토포사(討捕使)를 파직시킬 것을 도모한 정상은 낱낱이 실토하였습니다. 적의 초사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눈이 있는 자는 모두 보았습니다. 이처럼 불법을 저지른 사람은 문외 출송(門外黜送)의 박벌(薄罰)에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먼 지방에 귀양 보내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고, 다만 이만성과 유취장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6월 17일 경오
양사(兩司) 【사간(司諫) 정해(鄭楷)·장령(掌令) 이기성(李基聖)이다.】 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모역(謀逆)한 죄인 정우관(鄭宇寬)이 이미 승복하여 복법(伏法)된 뒤에 수노(收孥)하는 법을 즉시 거행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평소에 용력(勇力)이 절륜(絶倫)하고 견줄 데 없이 흉악하고 교활하다고 일컬어지는데, 먼저 망명(亡命)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법(王法)이 폐이(廢弛)해진 것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깊은 근심거리가 되니, 시급하게 체포하여 화근(禍根)을 끊지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에 포도청(捕盜廳)에서 미처 근포(跟捕)하지 못한 것은 그 책임을 면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좌우의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모두 추고(推考)하고 해당 군관(軍官)을 종중 결곤(從重決棍)하되, 다시 신칙(申飭)해서 기간 내에 꼭 기포(譏捕)하여 국법(國法)을 바로잡게 하소서. 음관(蔭官)은 적당한 사람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사당(私黨)만 쓰는 것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윤봉오(尹鳳五)·김치후(金致垕)처럼 사문(斯文)에 죄를 얻어 사류(士類)에게 버림받은 자가 세도(勢途)에 아첨하여 붙좇아 외람되게 사적(仕籍)에 통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세마(洗馬) 윤봉오와 영소전(永昭殿)참봉(參奉) 김치후를 모두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의 두 건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가, 정언(正言) 박필기(朴弼夔)가 옥당(玉堂)의 연차(聯箚)를 상소하여 배척하면서 ‘굽혀서 대신(大臣)을 위해 도리어 언자(言者)를 공격하였다.’고 했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사간(司諫) 정해(鄭楷)가 처치(處置)하기를,
"옥당에서 올린 차자의 본뜻은 대개 조정(調停)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간신(諫臣)의 소어(疏語)에 어찌 반드시 혐의할 것이 있겠습니다? 청컨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6월 18일 신미
이거원(李巨源)을 지평(持平)으로, 권익관(權益寬)을 부교리(副校理)로, 박필몽(朴弼夢)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6월 19일 임신
이제(李濟)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양사(兩司) 【사간(司諫) 정해(鄭楷)·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이다.】 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경신년356) 의 옥사(獄事)는 역절(逆節)이 낭자하였는데,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 등이 관련된 죄명(罪名)은 더욱 지극히 무거웠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여러 차례 사령(赦令)을 거쳤으나, 일찍이 거론하지 아니했던 것은 징토(懲討)와 제방(隄防)을 엄준(嚴峻)하게 보이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인·환·혁 등의 직첩(職牒)을 도로 돌려주라는 명(命)을 환수(還收)하소서. 이번의 흉역(凶逆)은 실로 전고(前古)에 있지 아니한 변고(變故)로서, 흉모(凶謀)·밀계(密計)가 남김없이 밝게 드러나고 요요 난령(妖腰亂領)357) 이 차례대로 복법(伏法)되어 여정(輿情)을 조금이나마 풀고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었으니,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원악대대(元惡大憝)358) 가 아직도 주벌(誅罰)에서 도피하고 있습니다.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두 역적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추대(推戴)한다는 이름을 지고서 진병(陳兵)하는 모의를 맨먼저 창도하였으니, 이는 실로 역당(逆黨) 중의 거괴(巨魁)입니다. 당초에 사사(賜死)한 것은 이미 지극히 실형(失刑)한 것이며, 노적(孥籍)의 상전(常典) 또한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응당 시행해야 할 율(律)을 미쳐 이 적괴(賊魁)에게 감률(勘律)하지 아니한 채 경솔하게 경하(慶賀)하는 예(禮)를 태묘(太廟)에 행한다면, 군정(群情)의 분완(憤惋)은 진실로 말할 수 없거니와 국체(國體)의 전도(顚倒)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는 일을 우선 정지하고 시원하게 역률(逆律)을 베풀기를 기다린 뒤에 거행하도록 하소서.
국본(國本)을 미리 세우는 것은 종묘(宗廟)를 중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전대(專對)359) 의 임무를 받은 자가 사리에 근거하여 진주(陳奏)하고 준청(準請)을 기약함은 사리상 당연한 것인데, 지난번 자문(咨文)을 찬술(撰述)한 사람은 감히 ‘위약(痿弱)’이란 두 글자를 제멋대로 성궁(聖躬)에 더하였으며, 피인(彼人)과 문답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위질(痿疾)이란 말을 다시 되풀이하였습니다. 또 ‘좌우의 잉속(媵屬)’이란 등의 말을 터무니없이 꾸며내어 군부(君父)를 크게 무욕(誣辱)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되어 감히 마음속에 발동하여 입 밖에 낼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 형과 아우는 명분(名分)이 바르고 말이 순(順)하니, 진청(陳請)할 즈음에 어찌 할 말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드시 환온(桓溫)360) 이 제혁(帝奕)361) 에게 더한 ‘위(痿)’자를 주문(奏文)에다 쓰고 문답할 때 거듭 ‘잉어(媵御)’ 등의 말을 제맘대로 부연(敷衍)하기에 이르러 그 거짓을 사실로 만들었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조금이라도 일분(一分)의 돌아보고 꺼리는 뜻이 있었다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을 업신여겨 부도(不道)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고 성상을 무함(誣陷)한 죄를 엄하게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돌아오는 주청 부사(奏請副使) 윤양래(尹陽來)와 서장관(書狀官) 유척기(兪拓基)을 아주 먼 변방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의 두 건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지난날 권흉(權凶)이 국권(國權)을 천단(擅斷)하자 채수(債帥)가 낭자하였습니다. 전(前) 통제사(統制使) 이수민(李壽民)은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의 문(門)에 이[蝨]처럼 붙좇아 외람되게 곤얼(閫臬)의 직임을 차지하였는데, 지난해 국휼(國恤)이 났던 초기에 도감(都監)에 바칠 군목(軍木) 3백 동(同)이라고 핑계대어 그가 친신(親信)하던 사인(私人)으로 하여금 경중(京中)으로 수송하게 하였으나 간 곳이 분명하지 아니합니다. 아! 흉당(凶黨)이 은밀한 길로 물화(物貨)를 씀이 삼수(三手)362) 와 교통(交通)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끝까지 간 곳을 핵실(覈實)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수민을 나국(拿鞫)하여 엄하게 신문하게 하소서.
며칠 전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에, 대신(大臣)에게 품의(稟議)하였더니 대신 또한 옳다고 하므로 빨리 의언(義讞)할 것을 권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심단에게 금오(金吾)의 장관(長官)자리를 맡겼는데, 무릇 의언하는 바를 어찌 모두 반드시 대신에게 품(稟)하는 것이며, 대신이 말한 바는 시비(是非)를 논하지 않고서 또한 모두 ’예예’ 하면서 반드시 따르는 것입니까? 이는 대개 심단이 대신이라고 스스로 해명하면서 은연 중에 다른 사람에게 대항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 것이니, 그 또한 교묘하게 하려다 도리어 졸렬하게 된 것이라 이를 만합니다. 아! 목내선(睦來善)은 집안에서 죽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행운이라 할 만합니다. 만약 심단 또한 선후(先后)의 신자(臣子)라면 지금와서 어찌 뒤미처 용서는 법에 일분(一分)이나마 용납해 의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언(臺言)이 이미 나온 뒤에 이에 감히 억지로 분소(分疏)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몹시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습니까? 이미 목내선에게 엄하게 막지 않았으므로 정(楨)의 옥사(獄事)를 구해(救解)하는 자가 또 잇따라 일어났는데, 아직도 방계(防啓)하는 일이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만약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지 아니한다면 이의징(李義徵)·민암(閔黯)의 무리가 또한 하려는 마음을 먹을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 크게 한심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추고(推考)라는 박벌(薄罰)에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판의금(判義禁) 심단을 파직하소서.
신축년363) 의 일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셌습니까? 권흉(權凶)이 국권(國權)을 잡자 군부(君父)를 위협해서 내쫓고자 하여 국가의 존망(存亡)이 순간에 닥쳐 있었는데, 다행하게도 건단(乾斷)을 시원하게 휘두르셔서 천망(天網)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역절(逆節)이 완전히 드러남에 따라 흉도(凶徒)가 복법(伏法)되었으니, 이는 정말 발란 반정(撥亂反正)364) 하고 개기 경시(改紀更始)365) 하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언(正言) 박필기(朴弼夔)가 상소하여 붕당(朋黨)의 화(禍)를 크게 말하고는 작년의 처분(處分)을 전적으로 국면(局面)을 서로 바꾼 과목(科目)으로 돌렸으니, 말의 무엄함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또 흉적(凶賊)의 죄상이 어찌 전단(專斷)하고 농락한 데에 그치겠습니까마는, 일찍이 한마디도 ‘역(逆)’이란 한 글자에 언급한 적이 있지 아니하니, 간신(諫臣)은 이에 대하여 또한 돌아보고 꺼리며 애석하게 여겨 비호할 것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아! 대의멸친(大義滅親)을 비록 사람마다 다 책망할 수는 없지마는 만약 일분(一分)이라도 엄외(嚴畏)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대관(臺官)이 되어 어찌 감히 ‘친혐(親嫌)으로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바야흐로 한창 역적(逆賊)을 토죄(討罪)하는 날에 입 밖에 낼 수가 있겠습니까? 대차(臺次)에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만성(李晩成)·유취장(柳就章)을 잡아올 것을 청하였을 때 대계(臺啓)에 애초부터 ‘국청에서[自鞫廳]’라는 세 글자를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제 이미 이로써 인피(引避)하고는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분명하게 발계(發啓)해야 할 것인데, 또한 다시 잠자코 있어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번거롭게 품(稟)하도록 하였으니, 처음에 잘못을 저지른데다 재차 잘못을 저질러 일을 조처(措處)하는 데 호도(糊塗)한 정상을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장령(掌令) 이성기(李聖基)를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다만 박필기·이성기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6월 20일 계유
옥당(玉堂) 【수찬(修撰) 김시환(金始煥)과 부수찬 권익순(權益淳)이다.】 에서 차자를 올려 대략 논하기를,
"성도(聖度)는 침착하고 단정하시나 연묵(淵默)이 너무 지나치시며, 진접(晉接)366) 하실 때에는 도유 우불(都兪吁咈)367) 하는 성대함이 부족하고, 수응(酬應)에는 지체되는 한탄이 많습니다. 조신(朝紳)의 장주(章奏)는 걸핏하면 유중(留中)하시고, 채납(採納)할 만한 말도 시행되지 못하며, 으레 사양하는 사람이 즉시 행공(行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규(首揆)368) 는 멀리 나갔고 좌상(左相)은 병(病)을 핑계대니, 주사(籌司)의 회좌(會坐)와 빈청(賓廳)의 대석(對席)은 몇 달 동안 정폐되고 국옥(鞫獄)은 끝이 나지 않고 있으며, 연일 탈품(頉稟)하여 개좌(開坐)할 기약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더욱 정성과 예를 독실히 하여 돈소(敦召)를 더하지 아니하십니까?"
하고, 또 빨리 합사(合司)한 계사(啓辭)를 윤허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계한 말과 돈소를 청한 것이 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거원(李巨源)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새로 필선(弼善) 정수기(鄭壽期)의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봉입(捧入)한 승지(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아니하고 말단의 일은 그대로 따랐다.
6월 21일 갑술
이경열(李景說)을 장령(掌令)으로, 구명규(具命奎)를 정언(正言)으로, 심공(沈珙)을 응교(應敎)로, 이명의(李明誼)를 교리(校理)로, 이진순(李眞淳)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양사(兩司) 【사간(司諫) 정해(鄭楷)와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이다.】 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삼척 부사(三陟府使) 이상성(李相成)은 본래 어리석고 부끄러움이 없는 비부(鄙夫)로서, 몸가짐이 거칠고 패리(悖理)하여 온 세상 사람이 침을 뱉으며 욕하였습니다. 지난해 성진령(成震齡)에게 탄핵받은 한 가지 일은 실로 씻기 어려운 허물이 되는데, 흉당(凶黨)에 아첨하여 붙좇아 진취(進取)할 계제(階梯)를 삼고는 급기야 본부(本府)를 맡게 되자 오로지 탐욕만을 일삼았으니, 백성을 침학(侵虐)하여 제 몸만 살찌운 정상은 다 들 수가 없습니다. 우선 그 중 한두 가지를 말한다면, 허다한 진휼곡(賑恤穀)을 사사로이 돈으로 바꿔 한 푼도 공사(公事)에는 쓰지 않고 모조리 제 주머니로 돌렸으며, 금산(禁山)의 송판(松板)을 낭자하게 베어내어 민정(民丁)을 조발(調發)해서 끊임없이 실어 날랐습니다. 그리고 그밖의 탐음(耽淫)하고 비쇄(鄙瑣)한 일이 한두 가지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처럼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困窮)한 날을 당하여 이와 같이 탐욕스럽고 방종하며 불법(不法)한 사람은 결코 그대로 버려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익릉 참봉(翼陵參奉) 윤재중(尹在重)은 사람됨이 간독(奸毒)하고 몸가짐이 사특(邪慝)한데, 역괴(逆魁)의 문에 아첨하여 붙좇아 그 난익(卵翼)을 받았습니다. 음모와 비계(秘計)를 참여해 듣지 아니함이 없었고, 크고 작은 소장(疏章)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외람되게도 사적(仕籍)에 통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놀라 분개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기(改紀)한 뒤에는 몰래 흉도(凶徒)를 모아 요언(妖言)을 선동(煽動)하고, 어두운 밤에 출몰하며 행적(行跡)이 궤비(詭秘)하였습니다. 이처럼 시세(時勢)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날을 당하여 연곡(輦轂) 아래에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먼 땅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국가의 저축이 빈 것이 근일(近日)보다 심한 적이 없는데, 절가(折價)369) ·방납(防納)의 폐단이 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대개 외방(外方)의 유정지공(惟正之供)370) 을 본곡(本穀)으로 하지 아니하고, 중간에서 이익을 탐내는 무리들이 주관(主管)하는 유사(有司)를 매개로 절가(折價)하여 미리 바치되, 만천(萬千)의 미곡(米斛)을 그가 스스로 조종(操縱)하고 농단(壟斷)하며, 수령(守令)이 된 자 또한 실어나르는 데 폐단을 덜 수 있는 것을 편리하게 여겨 구차하게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상(嶺上)의 일곱 고을에서 가흥(嘉興)으로 쌀을 실어나를 적에 쌀로 바치는 경우는 언제나 두세 고을에 불과하니, 이와 같은데도 그 옛날 붉게 썩도록 넉넉하던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1년의 경비가 항상 부족한 것을 근심하고 위태롭게 아침 저녁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는 것은 반드시 이에서 말미암아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일의 한심스러움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세곡(稅穀)을 절가(折價)·방납(防納)하는 폐단을 일체 금지하여 막되, 만약 드러나는 바가 있으면 주관하는 당상(堂上)은 파직하고 일을 맡은 사람은 수금(囚禁)해서 과죄(科罪)하며, 해당 수령 또한 일체로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6월 22일 을해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행 사직(行司直) 유집일(兪集一)은 본래 비루한 사나이로서 외람되게 상경(上卿)에 승진되었는데, 비록 그의 사당(私黨)이라 할지라도 또한 같은 반열(班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일찍이 중국에 가는 사신(使臣)에 채워지자 재화(財貨)를 탐내어 한정이 없었으므로 같이 갔던 상서(象胥)371) 들이 지금까지 침을 뱉으며 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국척(國慽)을 당하였을 때에는 그 집에 드러누워 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반열에 들어왔는데, 술단지가 그 뒤를 따랐으니, 이것은 모두 지난해 대장(臺章)에 나열된 바입니다. 일생 동안 탐욕을 부린 것이 곧 그의 기량(伎倆)이었으니, 비록 근래의 조그만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새로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외람되게 들어가자 교자(轎子)를 핑계대고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돈 50관(貫)을 공공연히 규례(規例)를 빗어나 억지로 취하였으므로, 동당(同堂)의 여러 재신(宰臣)들이 놀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윤기(倫紀)도 부끄럼도 없는 사람을 경재(卿宰)의 반열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전(前) 전적(典籍) 윤동형(尹東衡)은 유현(儒賢) 윤증(尹拯)의 종손(從孫)으로, 그 문하(門下)에 출입하며 은혜가 교육을 겸하였으니, 항상 의지하고 앙모(仰慕)함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어야 마땅할 것인데, 지난번 쇄사(曬史)372) 하는 길에는 도리어 권간배(權奸輩)의 지의(指意)를 받들어 송시열(宋時烈)의 문집(文集)을 싣고 갔습니다. 대개 그 문집은 유현의 부자(父子)를 헐뜯고 무욕(誣辱)하여 이르지 아니한 바가 없는데도 태연하게 싣고 가며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윤리를 손상시키고 의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인신(人臣)이 무함(誣陷)을 받아 억울함을 품은 것은 임진년373) 의 과옥(科獄)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없는 사실을 허구 날조하며 단련(鍛鍊)해 이루었던 것입니다. 재차 안문(按問)할 때를 당하여 엄중하게 더욱 신문(訊問)하고 핵실(覈實)을 하지 아니하여 흉당(凶黨)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간계(奸計)를 부리게 만들었으므로, 인심의 분울(憤鬱)해 하는 바가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대개 이 옥사의 가장 중요한 점은 전적으로 이빈흥(李賓興)에게 있으니, 만약 엄하게 국문(鞫問)을 가한다면 즉시 변명(卞明)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이빈흥을 빨리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국(拿鞫)해서 엄하게 형문(刑問)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포도청(捕盜廳)의 군관(軍官)이 국옥(鞫獄)의 죄수를 압래(押來)하는 것은 원래 국가(國家)의 상전(常典)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훈장(訓將) 윤취상(尹就商)이 잡혀왔다가 석방되었을 때 압래한 군관이 서로 곤액(困厄)하는 데에 뜻이 있었다고 핑계하면서 죄책(罪責)을 가하고자 여러 차례 화난 말을 하니, 양청(兩廳)의 대장(大將)이 그 뜻에 비위를 맞추어 군관 두 사람을 일시에 태거(汰去)하였습니다. 군관이 비록 미천(微賤)하다 하나 이미 왕명(王命)으로 인하여 소중히 여겨야 할 바가 있으니, 가령 독촉하고 핍박한 일이 있다 해도 마땅히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싹틔워서는 안될 것인데, 도리어 분노를 더하여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국법(國法)이 점차 허물어질 것이니, 청컨대 윤취상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좌우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오서종(吳瑞鍾)·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이상성(李相成)·윤재중(尹在重)과 말단의 일은 그대로 따랐다.
6월 23일 병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광보(李匡輔)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이의현(李宜顯)·황귀하(黃龜河)·유집일(兪集一)·윤동형(尹東衡)의 일은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사간(司諫) 정해(鄭楷)가, 부교리(副校理) 권익관(權益寬)이 상소하여, ‘국옥(鞫獄)이 소루(疏漏)하여 겉으로 드러난 바 두 사람은 율(律)이 편관(編管)374) 에 그치고, 서덕수(徐德修)의 연좌(緣坐)를 갑자기 정론(停論)하였으며, 조성복(趙聖復)을 경솔하게 앞질러 배소(配所)로 되돌려 보냈으나, 대각(臺閣)에서 한 사람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논한 것으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치(處置)하기를,
"참작하고 헤아려서 정계(停啓)하였으니 뜻한 바가 있었으며, 우연히 미처 논열(論列)하지 못한 것에 어찌 반드시 깊이 허물하겠습니까? 청컨대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회령 부사(會寧府使) 유정장(柳貞章)이 자살(自殺)하였는데, 유정장은 유취장(柳就章)의 아우로서, 김창집(金昌集)의 조아(爪牙)가 되어 전후로 초천(超遷)되었는데, 유취장이 국청(鞫廳)의 초사(招辭)에 나오자 곧 두려워하여 근심하며 밥을 먹지 못하였다. 어느 날 저녁 때 문을 닫고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였다.
6월 24일 정축
밤 2경(更)에 유성(流星)이 천구성(天廐星) 위에서 나오고, 5경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다. 집의(執義) 이제(李濟), 사간(司諫) 정해(鄭楷),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이광보(李匡輔), 교리(校理) 이명의(李明誼)·여선장(呂善長), 부교리(副校理) 유필원(柳弼垣), 수찬(修撰) 김시환(金始煥), 부추찬(副修撰) 이현장(李顯章)·권익순(權益淳) 등이 먼저 합계(合啓)를 윤종(允從)하라는 뜻으로 서로 잇따라 힘들게 간쟁(諫爭)하였으나, 임금은 다만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고, 혹은 발락(發落)이 없기도 하였다. 또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노적(孥籍)하는 일을 독주(讀奏)하였으나, 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잇따라 진달하였는데, 한낮이 되었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좌우를 돌아보고는 아득히 개납(開納)하는 것이 없자, 여선장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연묵(淵默)375) 이 너무 지나치신데, 신은 감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그 말을 약간 거론하여 말하기를,
"연묵이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헌관(憲官)이 이어서 전계(前啓)를 읽으니, 이기지(李器之)의 노적(孥籍)과 임욱(任勗)을 원배(遠配)하는 두 계사를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새로 아뢰기를,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죄인 이희조(李喜朝)는 변혜(辯慧)376) 의 작은 지모(智謀)를 믿고 장구(章句)의 보잘것없는 기예(技藝)로 수식하니, 사람들이 간혹 유자(儒者)로 지목하고, 그도 또한 고도(高蹈)로 자처(自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요사스럽고 간악한 도둑으로서, 무릇 어질고 올바른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침에 있어서 몰래 주관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차자로 자질구레한 기록을 올리고 섬기던 바의 신(神)과 지키던 법(法)에 이르러서는 기량(伎倆)이 완전히 드러나, 위로는 선왕(先王)의 밝음을 속이고 아래로는 역적 구(球)의 광대가 되었는데, 마침내 사화(士禍)는 기세(氣勢)가 하늘까지 넘쳐서 선류(善類)는 자취를 감추어 거의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하였으니, 말을 한다면 마음아프다 이를 만합니다. 지난해 권흉(權凶)이 국권(國權)을 잡고 군부(君父)를 협박하자 정유(庭籲)는 곧 중지되고 천위(天位)는 장차 허물어지려 하였으니, 무릇 이륜(彛倫)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새매가 참새를 내쫓는 의거(義擧)에 크게 용기를 내려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희조는 벼슬이 대각(臺閣)의 장관(長官)에 있으면서 끝내 강상(綱常)의 분의(分義)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이명·김창집 두 역적과 정지(情志)를 은밀히 맺고 성세(聲勢)를 몰래 연결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며 국가의 요인(妖人)입니다. 청컨대 아주 먼 변방에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간관(諫官)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이홍술(李弘述)을 노적(孥籍)하는 일과 이빈흥(李賓興)을 국문(鞫問)하는 일을 그대로 따르고, 그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이날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몸을 조금 돌려 오줌을 누므로 여러 신하들이 잠시 물러 가려고 하자 임금이 물러가지 말라고 명하였다. 파할 즈음에 이거원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급암(汲黯)을 만날 때 관(冠)을 쓰지 않고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 전하께서 소피를 보실 때 하교(下敎)하지도 않으셨고 환시(宦寺) 또한 서로 알린 일이 없었으니, 이는 신료(臣僚)를 접대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이만성(李晩成)을 잡아 가두었다.
6월 25일 무인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다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는데,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 힘써 그치지 않고 간쟁(諫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뢴 홍용조(洪龍祚)·심단(沈檀)의 일과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뢴 ‘묵세(墨世)·일업(一業)을 그대로 가두어 엄하게 심문하고, 이사명(李師命)을 추탈(追奪)하고, 조지겸(趙持謙)을 북향(復享)하고, 한태동(韓泰東)의 무고(誣告)를 신설(伸雪)하는 일’은 모두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6일 기묘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다시 합계(合啓)한 일을 가지고 번갈아 힘껏 간쟁(諫爭)하며 상세히 수천 마디의 말을 하였으나, 임금은 더욱 더 말이 없었다. 어려 신하들이 두세 번 되풀이하다가 날이 이미 오시(午時)를 넘었고, 또 속히 하교(下敎)할 것을 청하여 사기(辭氣)가 너무나 간절하고 급박하니, 임금이 갑자기 진노(震怒)하여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근래에 옥당(玉堂)이 무상(無狀)하여 군부(君父)를 벙어리로 여기는 것이냐? 연묵(淵默)이 너무 지나치다는 말을 어찌 감히 입 밖에 내는가? 한결 같이 모두 파직하라"
하고, 또 몹시 노하여 빨리 말하기를,
"연묵(淵默), 연묵이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파직은 박벌(薄罰)이므로 징계될 것도 없으니, 모두 나추(拿推)하라."
하고, 또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김시환(金始煥)·여선장(呂善長)·유필원(柳弼垣)·이현장(李顯章) 등 네 사람은 모두 나추(拿推)하고, 이명의(李明誼)는 그대로 두라."
하니, 옥당의 여러 신하들이 쫓겨 나왔다.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이 나아가 엎드려 간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평 이거원의 하는 일이 놀랍다. 우선 먼저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집의(執義) 이제(李濟)·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이 또 간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입시(入侍)한 대관(臺官)을 한결같이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남취명(南就明)이 앞에서 복역(覆逆)하려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복역하려면 밖에 나가서 하라."
하므로, 마침내 쫓겨 나왔다. 임금이 언제나 여러 신하들에게 임할 때에는 온화하고 화평(和平)하여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 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옥음(玉音)이 높고 거친 것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날 우레같은 위엄이 갑자기 폭발하여 소리가 전우(殿宇)를 울리니, 사람들이 서로 모두 돌아보며 얼굴빛이 변하였는데, 또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기뻐하였다.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니, 임금이 옥당(玉堂)을 나추(拿推)하고 대신(臺臣)을 모두 체차(遞差)하라는 명을 즉시 환수(還收)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연중(筵中)에서 옥당(玉堂)을 나추(拿推)하고 양사(兩司)를 특별히 체차(遞差)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놀라움과 근심을 금하지 못하여 빈청(賓廳)에 나아왔더니, 즉시 후사(喉司)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도로 정지하였다 합니다. 전환(轉圜)377) 하는 아름다움을 누가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내기는 쉬우나 제어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노(怒)하니, 인주(人主)의 일희 일로(一喜一怒)는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아니합니다. 성상께서 평소에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셨으므로 사람들이 그 순간을 엿보지 못하였으니, 오늘 이 일이야말로 어찌 성명(聖明)께 바라던 것이겠습니까? 더욱더 힘쓰시되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6월 27일 경진
처음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크게 가물었기 때문이었다.
6월 28일 신사
밤 3경(更)에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가 5, 6척(尺)이었고, 색깔이 붉었다. 5경에 유성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와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색깔은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국청(鞫廳)에서 유취장(柳就章)을 잡아 가두었다.
사간(司諫) 정해(鄭楷)·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정언(正言) 이광보(李匡輔)·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집의(執義) 이제(李濟)가 며칠 전에 엄지(嚴旨)로 특별히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가 처치(處置)하기를,
"한때의 엄지(嚴旨)는 노(怒)하신 것이 아니고 가르친 것이니, 이것을 끌어대어 혐의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6월 29일 임오
조태억(趙泰億)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박필몽(朴弼夢)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광좌(李光佐)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이광보(李匡輔)를 지평(持平)으로, 김시형(金始炯)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인신(印信)의 위조(僞造)는 일죄(一罪)에 관계되니, 법이 없는 나라가 아니면 결단코 용서할 리가 없습니다. 어보(御寶)를 위조한 죄인 권진성(權盡性)은 발각되어 체포된 뒤에도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이 그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감히 신문(訊問)하지 못하였고, 자주 조사관을 바꾸어 한 도(道)를 두루 돌아다니게 하니, 영송(迎送)·공궤(供饋)가 별성(別星)378) 과 같으므로 도내(道內)의 인사(人士)들이 이를 갈며 분노하고 욕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월옥(越獄)379) 이라 핑계대고는 그가 도망하도록 내버려 두어 그 집에서 절로 평인(平人)과 같이 드러누워 있게 하였으니, 법망(法網)의 퇴폐(頹廢)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 당시의 감사와 해당 수령을 현고(現告)토록 하여 한결같이 모두 파직하고, 권진성은 본도(本道)에 분부(分付)해서 기간을 한정해 잡아들이되, 율(律)에 의하여 처단(處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30일 계미
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였는데, 삼사(三司)의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부수찬(副修撰) 권익순(權益淳)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최석항이 아뢰기를,
"상변(上變)한 사람인 목호룡(睦虎龍)을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논상(論賞)하는 일을 저번에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맹부(盟府)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중종조(中宗朝)에 평란(平亂)하고 감훈(勘勳)하였을 때에 다만 상변(上變)한 사람인 노영손(盧永孫)만 녹훈(錄勳)하였습니다. 지금 또한 이 전례에 의하여 다만 목호룡 한 사람만 녹훈하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거원이 합계(合啓)를 독주(讀奏)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니, 최석항이 말하기를,
"대계(臺啓)가 비록 이미 준엄하게 나왔다고는 하지만, 소신(小臣)의 어리석고 막힌 소견으로는 곧바로 정형(正刑)한다면 아마도 마땅하지 못할 듯합니다. 오로지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하시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을 노적(孥籍)하자는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는 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데, 최석항이 말하기를,
"역절(逆節)이 남김없이 완전히 다 드러났으니, 대각(臺閣)의 법을 준수하자는 논의를 윤종(允從)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고, 전계(前啓)도 모두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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