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9권, 경종 2년 1722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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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갑신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召對)할 때에 승지(承旨) 황이장(黃爾章)이 아뢰기를,
"팔도[八路]에서 장문(狀聞)하여 한재(旱災)가 몹시 심하다고 하니, 성상(聖上)께서 근심하고 걱정하심이 마땅히 어떠하시겠습니까? 지난번에 역적(逆賊)을 바야흐로 엄중(嚴重)하게 다스렸을 때에는 인심이 기뻐하고 좋아하여 우택(雨澤)이 자못 흡족(洽足)하였는데, 요사이 옥사(獄事)를 다스림이 조금 해이(解弛)해져 가뭄이 도로 혹심(酷甚)해졌으니, 하늘과 사람이 접응하는 즈음에 또한 살필 만합니다."
하고, 옥당(玉堂)의 이명의(李明誼)는 이르기를,
"지난번에 왕법(王法)을 결단(決斷)하여 우택(雨澤)이 잇따라 내렸었습니다. 지금 한재(旱災)가 비록 참혹(慘酷)하다 하나, 예전에도 군사(軍師)를 일으키자 비가 내리고 옥송(獄訟)을 판결(判決)하자 비가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만약 온 나라의 여정(輿情)에 부응(副應)하여 왕법으로 죄인의 주륙(誅戮)을 결행(決行)하면 하늘이 비를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예전의 무슨 재해(災害)는 무슨 일에 응하였다는 말은 본시 깊이 파고들어 억지로 갖다 붙이는 데에서 나왔다. 더구나 혹 비가 내리거나 혹 가뭄이 든 것을 오로지 옥사(獄事)의 엄격하고 해이한 데에 돌리고, 정녕코 임금에게 주달(奏達)하여 이로써 성청(聖聽)을 움직이려 하였는데, 그 또한 말단에 속한 일이니, 듣고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7월 2일 을유

양사(兩司) 【지평(持平) 이광보(李匡輔)·정언(正言)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前) 승지(承旨) 이정주(李挺周)는 비루(卑陋)하고 교활(狡猾)하여 권흉(權凶)을 아첨하여 섬겼는데, 일찍이 해읍(海邑)으로부터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이배(移拜)되어서는 진휼(賑恤)하는 밑천을 마련한다고 칭탁하고 경외의 상고(商賈)와 체결하였습니다. 마침내 은전(銀錢)의 이익금을 셀 수가 없었으나, 상납(上納)을 핑계대어 모두 사탁(私槖)에 돌리니, 서토(西土)380)  의 사람들이 모두 은 부윤(銀府尹)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비록 평일에 좋아하였던 대간(臺諫) 또한 그 더러운 소문을 가리고 숨기기가 어려워 장죄(贓罪)로 안치(按治)할 것을 발론(發論)하여 거의 팽아(烹阿)의 솥381)  에 들어가기에 이르렀으나, 특별히 이이명(李頤命)의 혈당(血黨)인 까닭에 좌우(左右)에서 숨기고 비호하여 마침내 무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 이기지(李器之) 무리의 역절(逆節)이 탄로(綻路)되기 전에 어두운 밤에 왕래한 종적(蹤跡)이 음비(陰秘)하였는데, 16인이 원배(遠配)하는 날을 당하여 홀로 누락(漏落)되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해악(駭愕)하고 분개(憤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탐학(貪虐)하고 음사(陰邪)한 무리를 하루라도 도성(都城) 아래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소서.
무안 현감(務安縣監) 송택상(宋宅相)은 사람됨이 추비(麤鄙)하고 처신이 음사(陰邪)하여 결과(決科)382)  하는 데 올바르지 못하였음을 입이 있는 이는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흉당(凶黨)이 위세(威勢)를 떨친 뒤로부터 아첨(阿諂)하여 붙좇는 작태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서, 선류(善類)를 무함(誣陷)하는 말이 심지어 외직(外職)에 제수되어 하직(下直)하는 즈음에 발단되기까지 하였으니, 결단코 청조(淸朝)의 사대부 반열(班列)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사은 부사(謝恩副使) 김치룡(金致龍)은 인망이 본시 경박하고 일에 임하여 어두운 까닭에 승진시켜 탁용(擢用)한 뒤에 물정(物情)이 마땅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송택상(宋宅相)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옥당관(玉堂官)을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7월 3일 병술

밤 이경(二更)에 유성(流星)이 천변성(天弁星) 위에서 나와 서방(西方)에 들어갔는데, 형상은 바리때와 같고 빛은 붉었다.

 

양사(兩司)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여 각각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명하여 경수(輕囚)를 석방(釋放)했는데, 오랜 가뭄 때문이었다.

 

7월 4일 정해

관학 유생(館學儒生) 황욱(黃昱) 등이 상소(上疏)하여 이제까지 흉역(凶逆)이 어진이를 무함(誣諂)하고 바른 이를 독해(毒害)한 정상(情狀)을 살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의 원한(寃恨)을 시원하게 씻어서 사정(邪正)의 한계를 분별하고, 삭탈(削奪)하였던 관작(官爵)을 추복(追復)하고, 인하여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거행(擧行)하기를 청하였다. 소장(疏章)이 들어가니,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7월 5일 무자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진수당(進修堂)에서 인견(引見)하니,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지평(持平) 이광보(李匡輔)·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교리(校理) 이명의(李明誼)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왕비(王妃)의 책례(冊禮)를 마친 뒤에 전하(殿下)께서 백관(百官)의 모임을 정조(正朝) 및 동지(冬至)의 회의(會議)와 같이 하심이 있었고, 또 상수(上壽)하는 글이 있었으며, 왕비께서도 명부(命婦)의 모임에 또한 상수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해조(該曹)에서는 진실로 전교(傳敎)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신묘년383)  ·신축년384)  ·병진년385)   세 해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모두 권정례(權停例)로 거행하였습니다. 대저 《오례의(五禮儀)》의 찬성(撰成)이 국조(國朝)의 풍형(豐亨)한 날에 있었으므로, 비록 이로써 재록(載錄)하였다 하나, 해마다 흉년이 거듭된 나머지에 한재(旱災)의 참혹(慘酷)함이 또 이와 같아서 앞으로 민사(民事)를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러한 때의 진연(進宴)은 마침내 중난(重難)한 데에 관계되니, 삼조(三朝)의 이미 거행한 전례에 의하여 특별히 권정례(權停禮)를 거행하도록 명하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였다. 이조(李肇)가 고(故) 유현(儒賢) 윤증(尹拯)의 손자 윤동원(尹東源), 박세채(朴世采)의 손자 박필전(朴弼傳), 민이승(閔以升)의 아들 민윤창(閔允昌)은 상격(常格)에 구애(拘碍)하지 말고 곧바로 자의(諮議)에 의망(擬望)하고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최석정(崔錫鼎)의 손자도 특별히 관직(官職)을 제수하고 부묘(祔廟)386)  하고 배향(配享)하여 연시(延諡)387)  할 때 관대(冠帶)를 차리고 입참(入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允許)하였다. 이광보(李匡輔)·구명규(具命奎)가 합계(合啓)를 독주(讀奏)하니, 대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간쟁(諫爭)하였으나, 윤허(允許)를 얻지 못하고, 또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김치룡(金致龍)을 개정하는 일만 그대로 따랐다.

 

7월 6일 기축

이보욱(李普昱)을 지평(持平)으로, 이명의(李明誼)를 헌납(獻納)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양사(兩司) 【지평(持平) 이광보(李匡輔)·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이다.】 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광주 부윤(廣州府尹) 윤유(尹游)를 박론(駁論)하기를,
"자력(資歷)이 이미 낮고, 언의(言議)와 재유(才猷) 또한 일찍이 대략이나마 조단(朝端)에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승탁(陞擢)을 더하니, 물정(物情)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모두 따르지 않았다. 윤유(尹游)는 언의(言議)와 재유(才猷)로 당시에 칭송(稱頌)받았다. 이것이 묘당(廟堂)에서 천거하여 초탁(超擢)한 까닭인데, 홍문관(弘文館)과 대각(臺閣)의 5품(五品)을 거치지 않았다고 핑계하여 가로막고, 아울러 그의 언의와 재유를 꼬집고 헐뜯었으니, 이 어찌 공심(公心)이라 하겠는가?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8일 신묘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효령전(孝寧殿)에서 거행하였다.

 

7월 10일 계사

이보다 앞서 사직(司直) 신경제(申慶濟)가 토역(討逆)이 엄중하지 못함을 소론(疏論)하고, 옥사(獄事)를 안핵(按覈)한 대신(大臣)을 헐뜯어 배척했는데, 사의(辭意)가 지극히 심각했다. 이에 이르러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대변(對辨)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취복(取服)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정형(正刑)을 더한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남이 있고 또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므로, 법에 의거하여 국문(鞫問)하여 결안 취초(結案取招)388)  한 뒤에 전형(典刑)을 밝게 바로잡으라는 뜻으로써 청대(請對)하여 진달(陳達)하였으니, 바로 토역(討逆)을 엄중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형신(刑訊)은 반드시 면질(面質)하여 말이 궁색해진 뒤에야 비로소 형신(刑訊)하기를 청하는 것이니, 만약 이름이 적(賊)의 공초에서 나왔다 하여 증좌(證左)를 묻지 않고 즉각 엄형(嚴刑)을 더한다면, 사람으로서 누군들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罪人)을 본부(本府)에 이송(移送)하는 것은 조관(條貫)이 각각 달라서 겸하여 중론을 채택(採擇)하려는 것이니, 신이 어찌 감히 내렸다 올렸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이르기를,
"신이 안옥(按獄)하고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침저(侵詆)를 받은 것이 전후에 한 번만이 아니었으나, 요체는 일에 의거하여 일을 논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별달리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신경제(申慶濟)가 추후하여 제론(提論)한 정외(情外)의 말에 이르러서는 죄안(罪案)을 억지로 꾸며 만든 것이니,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비록 죽이더라도 오히려 가볍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정외(情外)의 말을 깊이 혐의(嫌疑)할 필요가 없으니, 안심(安心)하여 사직(辭職)하지 말고 빨리 출사하여 정사(政事)를 봄으로써 나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또 차자(箚子)를 올려 인혐(引嫌)하니,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신경제(申慶濟)의 소장(疏狀)을 돌려주라 명하고 이르기를,
"소사(疏辭)가 지극히 통완(痛惋)하니,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7월 11일 갑오

삼사(三司)에서 집의(執義) 정해(鄭楷),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광보(李匡輔), 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 부교리(副校理) 유필원(柳弼垣),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 부수찬(副修撰) 권익순(權益淳)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의 일로 반복하여 쟁론(爭論)하였으나, 끝내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정해·이명의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조익명(趙翼命)·정수기(鄭壽期)를 수찬(修撰)으로, 유필원(柳弼垣)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7월 12일 을미

양사(兩司)에서 연이어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단지 이정주(李挺周)의 계사(啓辭)만 윤허(允許)하였다. 새로 아뢰기를,
"독약(毒藥)을 구매(購買)하여 온 사람을 즉시 잡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좌우(左右)의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중전(重典)에 의하여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13일 병신

죄인(罪人) 홍철인(洪哲人)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나포(拿捕)한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를 점출(拈出)하여 국문(鞫問)하였더니, 공사(供辭)에서 극구 발명(極口發明)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다시 추국(推鞫)하니, 목호룡(睦虎龍)이 대답하기를,
"홍의인(洪義人)·홍철인은 이천기(李天紀)에게 여러 가지로 아첨하며 죽기를 한하여 끼어 들어갔으며, 밤낮으로 같이 모의(謀議)하여, 크고 작은 일을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김용택(金龍澤)은 늘 기뻐하지 않고 매화점(梅花點)이라며 꺼리었으니, 매화점이라는 말을 홍철인(洪哲人)이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홍철인·홍의인(洪義人) 또한 같이 은자(銀子) 50냥을 내고서 늘 이르기를, ‘강촌(江村)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 하였고, 폐출(廢黜)하는 일을 모의(謀議)한 곡절(曲折)은 홍철인이 이이명(李頤命)의 집에서 많이 들었다고 늘 말하였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감히 은휘(隱諱)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로써 다시 추국(推鞫)하였으나, 홍철인이 또 굳게 은휘하였다. 면질(面質)시키자, 목호룡(睦虎龍)이 홍철인을 향하여 이르기를,
"그대가 무슨 일로 인하여 백망(白望)을 알게 되었는가?
하니, 이르기를,
"이천기(李天紀)의 집에서 본 듯한데, 친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그대는 대소(大小)의 급수(急手)와 지 상궁(池尙宮)의 말을 아느냐?"
하니, 이르기를,
"허언(虛言)이다."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한 가지 긴요한 말이 있어 내가 마땅히 묻겠다. 너희 형제(兄弟)가 은화(銀貨) 50냥을 강촌(江村) 사람에게 빌려서 계원(啓元)389)  에게 주고서 일찍이 상환(償還)하지 못하였다고 근심한 말을 네가 속일 수 있느냐?"
하니, 이르기를,
"사복창(司僕倉) 근처의 박지화(朴枝華)에게서 섬 곡식[租石]을 대출(貸出)한 일이 있었는데, 너는 이것을 트집잡아 말하느냐?"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네가 진실로 모역(謀逆)하지 않았다면, 어찌 계원(啓元)의 집에서 고변(告變)한 사람이 화(禍)를 당한 일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나에게 위협하였느냐?"
하니, 이르기를,
"나는 원래 고변한 사람을 하나하나 꼽은 일이 없다."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너는 지 상궁(池尙宮)에게 은자(銀子)를 준 일을 알며, 그 사이의 정절(情節) 또한 알지 못하느냐?"
하니, 이르기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덕우(德雨)390)  ·숙휴(叔睢)391)  ·백망(白望)이 한편이 되고 너의 형제와 계원(啓元)과 내가 한편이 되었는데, 늘 백망의 급수(急手)의 일은 의심할 만한 바가 있다 하여 서로 저훼(沮毁)하여 말하기를, ‘덕우(德雨)가 반드시 백망에게 속아서 은자(銀子)를 잃은 일이 있었다.’ 하였다."
하니, 이르기를
"이 일은 원래 알지 못한다."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나와 너희들이 밤낮으로 말한 것이 모두 모역(謀逆)하는 일이었는데, 너는 어찌 알지 못한다고 하느냐?"
하니, 이르기를,
"너는 나를 역모(逆謀)하였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 역적질을 한 것이냐?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은자(銀子)를 역적(逆賊)에게 주어 대급수(大急手)와 소급수(小急手)로 인군을 시해(弑害)하려고 모의(謀議)한 것이 역적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니, 이르기를,
"누가 보았느냐? 너무 절통(絶痛)하구나."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사정(事情)의 절차(節次)는 다른 사람의 납초(納招)와 문적(文籍)에 상고할 만한 일이 분명한데, 역적의 절차를 네가 어찌 가리어 덮겠느냐?"
하니, 이르기를,
"사정은 무슨 일이며 절차는 무슨 일이냐? 은자(銀子)를 낸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이 만일 있거든 내어 놓아라."
하였다. 목호룡이 이르기를,
"은자를 낸 사람이 있으니 그 하나가 바로 너다……."
하였다. 그 뒤에 재차 다시 추국(推鞫)하였으나, 또 전과 같이 발명(發明)하였다. 마침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여 두 차례 형문한 뒤에 형문을 정지하고, 우선 옥(獄)에 가두었는데, 한해(旱害)로 인하여 여수(慮囚)392)  하였을 때 대신(大臣)이 별달리 잡아두어도 드러날 단서(端緖)가 없다 하여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기를 진달(陳達)하였다. 그런데 대계(臺啓)로 인하여 도로 옥(獄)에 가두고 세 차례 형문(刑問)을 받은 뒤 경폐(徑斃)393)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에게 차자(箚子)에 비답을 내리기를,
"남에게 침척(侵斥)을 받은 말이 비록 예사롭지 않다 하나, 전후에 돈면(敦勉)하여 남김없이 누명을 씻었으니, 경(卿)의 너그러운 도량으로써 어찌 족히 개의[介懷]할 것인가?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즉시 나와서 정사(政事)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국청(鞫廳)이 비로소 개좌(開坐)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고,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윤유(尹游)의 일은 정지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정형(正刑)한 죄인 김일관(金一觀)이, 역적(逆賊) 이홍술(李弘述)이 습진(習陣)한 뒤에 군병(軍兵)을 돌려 대궐(大闕)을 침범(侵犯)할 것을 모의하였다고 분명하게 공초(供招)를 바치었고, 죄상(罪狀)을 낱낱이 들어 아는 자가 세 사람에 이르렀으나, 국청(鞫廳)에서는 그 거병(擧兵)하는 월차(月次)가 조금 차이가 난다고 하여 입계(入啓)하는 문안(文案)에 등재하지 않고 드디어 지극히 흉악하고 몹시 악독한 역절(逆節)로 하여금 이제까지 내버려두고서 형문(刑問)하지 않았으니, 나라 사람이 놀라서 분하게 여김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대저 김일관(金一觀)이 처음에 이미 이르기를, ‘11월 초9일 습진(習陣)을 파한 뒤에 거병(擧兵)하여 대궐을 침범하기로 계책을 정하였으나 갑자기 환국(換局)으로 인해 단지 3일을 격하여 일이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문랑(問郞)이, ‘환국(換局)은 바로 12월에 있었는데, 11월이라고 말하니, 어찌 허망(虛妄)하지 않은가?’고 힐문하였더니, 김일관(金一觀)이 ‘정신이 혼미하여 12월을 11월이라고 잘못 들어서 대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처음에 고한 달수가 비록 혹 조금 차이(差異)가 났더라도 단지 3일을 격해 환국(換局)으로 인하여 성사(成事)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이미 매우 분명하며, 말의 조리(條理)가 모두 맞으니, 흉역(凶逆)을 도모한 정절(情節)을 이에 의하여 알 만합니다. 또 김일관의 말 속에, 이홍술(李弘述)의 서제(庶弟) 이홍매(李弘邁)의 아들은 을축생394)  으로 무인(武人)인데, 그 흉역의 정상에 함께 참여했으니, 나문(拿問)하면 알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비록 혹 그의 명자(名字)를 잊었더라도 벌써 이미 상세하게 그 사람을 고한 까닭에 며칠 전에 연중(筵中)에서 대신(大臣)과 금당(禁堂)이 진달(陳達)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국체(鞫體)에 있어 국문(鞫問)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나머지 정절(情節)을 아는 두 사람 또한 핵문(覈問)하고 이홍매(李弘邁)의 아들에게도 일체로 정죄(正罪)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청컨대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나국(拿鞫)하여 엄중하게 핵실(覈實)하여 시원하게 왕법(王法)을 시행(施行)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14일 정유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대계(臺啓)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국좌(鞫坐)를 열지 않았다. 그 차자(箚子)에 이르기를,
"김일관(金一觀)이 승복(承服)하여 이르기를, ‘김창도(金昌道)의 말을 듣건대 지난해 11월 초9일에 이홍술(李弘述)이 습진(習陣)을 빌미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할 뜻이 있었다.’고 하니, 참국(參鞫)한 제신(諸臣)으로 경악(驚愕)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추대(推戴)한 사람은 처음에는 홍철인(洪哲人)·이기지(李器之) 중에 하나라고 말하였는데, 문랑(問郞)이 다시 힐문(詰問)하였더니, 또 이 정승(李政丞)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추대(推戴)가 어떠한 일이기에 신문(訊問)에 따라 변개(變改)하여 세 번이나 그 이름을 고치는 것입니까? 또 동참(同參)한 사람을 물었더니, 바로 이홍매(李弘邁)의 아들로서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미 모역(謀逆)하였다고 하면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모의하였다는 것 또한 이치에 근사하지 않으며, 또 군사를 일으킬 흉계(凶計)를 꾸미었다가 어찌하여 중지하였으냐고 물었더니, 환국(換局)으로 인하여 성사(成事)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개기(改紀)는 12월 초6일에 있었으므로, 날짜가 서로 틀리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물었더니, 정신이 혼미(昏迷)하여 잘못 기억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추대(推戴)한 사람은 그 이름을 세 번이나 고치고 같이 모의한 사람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며, 군사를 일으킨 날은 또 이와 같이 도착(倒錯)되므로, 당상(堂上)과 상의하여 처음에 의계(議啓)하는 속에 재록(載錄)하지 않았다가, 그 뒤에 연중(筵中)에서 간략하게 이 뜻을 진주(陳奏)하였습니다. 대저 국옥(鞫獄)에서 한 말은 말을 전하며 어긋나는 바가 많으나, 방외(方外)의 사람들이 별안간 군사를 일으켜 추대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내 결말을 구명(究明)하는 바가 없다면, 의혹(疑惑)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원소(原疏)는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7월 16일 기해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 대신(大臣)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니, 간원(諫院)에서 처치(處置)하기를,
"나핵(拿覈)을 계청(啓請)한 것 또한 근거한 것이 있으나, 대신(大臣)의 차사(箚辭)를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자, 계청(啓請)한 대로 하게 하고, 논한 전계(前啓)는 따르지 않았다.

 

7월 17일 경자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이 만윤(灣尹)395)                  으로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 추보(追報)하는 일을 상소하여 논하였는데, 그 소장(疏狀)에 대략 이르기를,
"의리가 있는 곳에는 은혜를 염오(厭惡)하는 것이 있으나, 은혜와 의리는 병행(並行)하는 것이고 편벽되게 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어미를 절연(絶緣)하는 의리가 없음을 선유(先儒)가 논(論)하였으니,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는 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정자(程子)의 복의(濮議)396)                  와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이라 일컫고, 또 대원군(大院君)의 묘우(廟宇)를 본제(本第)에 세운 전례를 써서 별도로 사묘(祠廟)를 황화방(皇華坊) 본방(本坊)에 세우고, 향사(享祀)하는 한 조목은 인빈(仁嬪)의 예에 의하여 거행하고, 묘소(墓所)를 수호(守護)하는 등의 일 또한 참작하여 마련한다면, 정리(情理)가 모두 마땅하여 지나치게 높여서 핍존(逼尊)하는 혐의가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이 소장(疏章)을 내려서 속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널리 고례(古禮)를 채택하고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대례(大禮)를 완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당시에 많은 신료들이 망령되게 임금의 뜻이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는 데에 있음을 헤아리고, 혹 그것이 지나치게 융성할까 염려하여 위호(位號)를 작정(酌定)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고, 또 청의(淸議)를 두려워하여 머뭇거려 감히 발설하지 못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이 제일 먼저 소진(疏陳)한 것은 대개 그 역량(力量)을 자임(自任)한 것이었으나, 추보(追報)하는 한 가지 일이 어찌 옥서(玉署)397)                  의 장(長)으로 입조(入朝)하여 제일의 사업으로 삼는데 합당하겠는가? 그 식견(識見)이 없음이 심하였다.

 

7월 18일 신축

여러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지평(持平) 이광보(李匡輔)가 함께 입시하여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으며, 이홍매(李弘邁)의 아들을 핵문(覈問)하는 일과 오서종(吳瑞鍾)을 정형(停刑)하는 일과 유경유(柳慶裕)를 나국(拿鞫)하여 질문(質問)하는 일은 윤허하였다. 또 논하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권중경(權重經)이 방면(放免)하고 방면하지 않는 계본(啓本) 가운데에 정배 죄인(定配罪人) 허벽(許壁)을 품질(稟秩)에 두어 시험해 보는 계책을 삼았으니, 방자하고도 무엄(無嚴)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또한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남취명(南就明)이 나아가 엎드려 이르기를,
"대신(臺臣)이 허벽(許壁)의 일로써 감사(監司)를 핵파(劾罷)하였습니다. 허벽(許壁)은 등철(登徹)되지 않은 상소(上疏) 때문에 이미 변방에 병출(屛黜)되었으며, 또 이와 같은 소장(疏章)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정탈(定奪)398)  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일전에 전(前) 전적(典籍) 이삼령(李三齡)·정전(鄭𦒜) 등 4인이 연명(聯名)한 상소 또한 신사년399)   옥사(獄事)의 신원(伸寃)을 청하여 날마다 승정원에 이르렀습니다. 해방 승지(該房承旨)도 이제 바야흐로 입시하였으니, 명백(明白)하게 하교(下敎)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승지(承旨) 이정제(李廷濟)는 이르기를,
"이삼령(李三齡)의 상소는 허벽(許壁)에 견주어 무엄(無嚴)함이 더욱 심합니다. 오로지 시험해 보는 계책에서 나왔으나, 선조(先朝)께 간범(干犯)한 죄(罪)를 알지 못하니, 지극히 통완(痛惋)합니다. 허벽의 소장(疏章)은 이미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받아들이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하였다. 승지(承旨) 조경명(趙景命)이 이르기를,
"허벽의 상소를 이미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고, 또 변경(邊境)에 내쳤으며, 이삼령의 상소도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후 이와 같은 소장은 한결같이 모두 퇴각(退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하였다.

 

7월 19일 임인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경(卿)이 안옥(按獄)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심리하였으니, 어찌 지나치게 혐의할 단서가 있겠는가? 안심(安心)하고 사직(辭職)하지 말고, 즉시 출사(出仕)하여 논도(論道)해 밤낮으로 바라는 바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김시형(金始烱)을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일경(金一鏡)이 이거원(李巨源)을 소척(疏斥)하기를,
"이미 체차(遞差)하였다가 도로 잉임(仍任)하게 하였으니, 갑자기 출사(出仕)하여 행공(行公)하는 것은 대체(臺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김시형(金始烱)이 상소하여 이거원을 매우 장허(奬許)하자, 김일경(金一鏡)이 노하여 매우 힘써 상소하여 꾸짖으니, 김시형이 이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처치(處置)하기를,
"헌관(憲官)을 소구(疏救)하는 것은 이미 고집하는 것이 있는데, 재신(宰臣)의 대장(對章)을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1일 갑진

심공(沈珙)을 응교(應敎)로, 이명의(李明誼)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진순(李眞淳)을 헌납(獻納)으로, 황이장(黃爾章)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역적 유취장(柳就章)이 복주(伏誅)되었다. 유취장은 처음 김창도(金昌道)의 결안 초사(結案招辭)에 나와서 잡혀 왔는데, 국청(鞫廳)의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네 대신이 상의(相議)하여 중군(中軍)의 일을 훈장(訓將)에게 분부(分付)하였는데, 진실로 흉모(凶謀)에 참여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면, 어찌 흉적(凶賊)의 신임(信任)이 이와 같았겠느냐? 그 체결(締結)하여 화응한 정상이 밝게 드러나 엄폐(掩蔽)하기가 어렵다."
하였으나, 처음의 초사(招辭)와 두 번째 초사에서 모두 완강하게 은휘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유취장(柳就章)은 본래 김창집(金昌集)의 복심(腹心)이며 친밀한 사람으로서, 훈국(訓局)의 중군(中軍)을 무단(無端)히 작과(作窠)400)  하고, 이홍술(李弘述)에게 말하여 반드시 저로써 대임(代任)하려 한 것은 오로지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할 때 임사(任使)하는 데에 편하다는 뜻이었으니, 음모(陰謀)와 비계(秘計)를 반드시 알지 못할 리 없는데, 다시 추국하는 아래에서 지엽적인 쓸데없는 말로 극구 발명(極口發明)하였으니, 청컨대 이로써 다시 추국하소서."
하였다. 다시 추국(推鞫)하였더니, 교묘하게 말을 꾸미어 납초(納招)하므로,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여 3차에 이르니, 비로소 사실대로 공초(供招)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지난해 10월 초승에 김창집(金昌集)을 찾아갔더니, 김창집이 이르기를, ‘근래에 사기(事機)가 수상(殊常)하니, 군문(軍門)의 장관(將官)은 친신(親信)한 사람으로써 포치(布置)하는 것이 마땅한데 영공(令公)이 중군(中軍)을 거치지 않았으니, 중군으로 삼으면 진실로 좋겠다. 어영 중군(御營中軍)은 외임(外任)으로 나갈 길이 없고, 다른 군문은 비록 빈자리가 있더라도 내 힘이 미치는 곳이 아니니, 만약 훈국(訓局)에 빈자리가 있으면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 이삼(李森)이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되어 중군 자리가 났는데, 그날은 곧 종일 정청(庭請)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익표(梁益標)가 대궐에 들어왔으므로, 저는 총부(揔府)의 의막(依幕)에 있다가, 함께 상견(相見)하기를 요구하고, 대신(大臣)의 분부(分付)를 얻기를 청하였습니다. 양익표(梁益標)가 마침내 비변사(備邊司)에 가서 여러 대신이 앉은 자리에서 김창집(金昌集)에게 고(告)하기를, ‘훈국(訓局)의 중군(中軍)은 유취장(柳就章)이 적합합니다.’ 하자, 김창집이 이르기를, ‘정말로 적합하다.’ 하였고, 그 나머지 두 대신 또한 이르기를, ‘적합하다.’ 하였습니다. 양익표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여러 대감(大監)의 뜻으로 훈장(訓將)에게 말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모두 이르기를, ‘좋다’고 하였으므로, 양익표가 드디어 이홍술(李弘述)에게 전하여 저로써 계하(啓下)401)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홍술에게 투자(投刺)402)  하고 말하기를, ‘중군(中軍)의 차례에 해당한 적임자가 없지 않을 것인데, 반드시 저를 삼았으니, 진실로 황감(惶感)합니다.’ 하자, 이홍술이 이르기를, ‘차례에 해당되는 이는 신익하(申翊夏)인데, 이미 대신(大臣)에게 막힌 까닭이다.’ 하고, 인하여 묻기를, ‘중외(中外)의 군정(軍情)이 어떠한가? 정청(庭請)이 파한 뒤에 노론(老論)이 매우 위험하니, 한편으로 군병(軍兵)에게 궐문(闕門)을 수직(守直)하게 하고, 한편으로 노론(老論)에게 해로운 환시(宦寺)들을 대신이 아뢰어 죽인 다음 다시 청정(聽政)을 청할 것이다. 선위(禪位)를 전하는 일의 경우 군병이 그것을 청종(聽從)하겠는가?’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군사(軍士)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니, 대장(大將)이 전령(傳令)하여 부른다면, 평시에 어찌 따르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장관(將官)이 청종(聽從)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홍술(李弘述)이 대답하지 않고 잠시 후에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 그러나 군병(軍兵)이 이미 집합한 뒤에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 뒤 하루 만에 제가 김창집(金昌集)을 찾아갔더니, 김창집이 이르기를, ‘그대가 자주 주장(主將)을 만났으니, 조용히 만나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비록 자주 만날 수는 없었으나, 또한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비록 편안히 만날 수는 없었으나, 또한 종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김창집이 이르기를, ‘대장(大將)과 군졸(軍卒)이 서로 잘 알게 되면 어찌 좋지 않겠느냐?.......’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동참(同參)한 일은 없었으나, 실정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罪)가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403)  합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실정(實情)을 안 율(律)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대계(臺啓)로 인하여 형(刑)의 시행을 정지하였는데, 다시 동정(同情)으로써 국문하여 취복(就服)하니, 결안(結案)을 고친 뒤에 처참(處斬)하였다.

 

7월 22일 을사

국청(鞫廳)에서 김시정(金時鼎)을 가두었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만성(李晩成)을 바야흐로 중군(中軍)을 환차(換差)한 일로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였더니, 김창집(金昌集)의 소찰(小札)로 인하여 차견(差遣)하였다는 뜻을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였으니, 그가 몰래 흉모(凶謀)에 참여하였음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차례로 신문(訊問)하여 끝까지 핵실(覈實)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한데, 국청(鞫廳)에서는 바로 도배(島配)할 것을 청하였으니, 의혹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훈국(訓局)과 어영(御營)은 경중(輕重)이 자별(自別)한데, 금영(禁營)의 중군(中軍)을 겨우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계청(啓請)하여 내천(內遷)404)  하고, 곧바로 훈국(訓局)의 중군으로 그 대신 차견(差遣)하여 하나는 지방관이 되어 나가고 하나는 내직으로 전임(轉任)되었으니, 이미 지극히 의심할 만합니다. 역치(易置)405)  한 일은 이미 김창집(金昌集)의 지휘(指揮)에서 나와 유취장(柳就章)으로 삼았는데, 유취장은 또 모역(謀逆)에 동참(同參)했다는 뜻을 낭자(狼藉)하게 승복(承服)하였으니, 그가 몰래 흉모(凶謀)에 참여하여 배열하고 포치(布置)한 자취가 남김없이 탄로(綻露)되었습니다. 또 한 명관(名官)이 삼사(三司)가 회좌(會坐)한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홍치중(洪致中)이 이만성(李晩成)을 찾아가서 연차(聯箚)를 철유(輟籲)한 일로써 사리에 의거하여 책망하였더니, 이만성(李晩成)이 성을 내어 대답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이니,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하였는데, 이른바 대계란 것은 무슨 일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그 정적(情跡)이 주무(綢繆)하고, 안팎으로 화응(和應)한 바가 소상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 두 조목을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문목(問目)에 첨입(添入)하여 엄중히 추국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제 곧 듣건대 국청 죄인(鞫廳罪人) 유취장(柳就章)을 실정을 알았다는 것으로 감률(勘律)하여 입계(入啓)하였다고 하는데, 신은 여기에 저윽이 깊이 의혹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군병(軍兵)을 모아서 궐문(闕門)을 나누어 수직한다는 계책은 이미 이홍술(李弘述)과 충분히 상의하였고, 장교(將校)와 군병(軍兵)의 청종(廳從)할지의 여부도 더불어 밀의(密議)하였다고 하였는데, 곧 이 두서너 조목의 말은 바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여 군부(君父)를 폐출(廢黜)하자는 뜻이니, 흉역(凶逆)의 정절(情節)이 남김없이 탄로(綻露)되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정상(情狀)을 알았다는 말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로써 감률(勘律)하였습니다. 자신이 부장(副將)이 되어 흉계(凶計)를 같이 의논하였는데, 실정을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감률한다면 역적(逆賊)을 토죄(討罪)하여 정법(正法)하는 뜻에 어긋나서, 청컨대 감률(勘律)하여 법에 의하여 처단(處斷)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7월 23일 병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헌부(憲府)의 계사(啓辭) 가운데에 죄인(罪人) 이만성(李晩成)을 도배(島配)한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고, 인하여 훈국(訓局)과 금영(禁營)에서 내직(內職)으로 옮기고 외직(外職)으로 내보낸 것을 논하여 의심할 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치(易置)한 계책이 김창집(金昌集)에게서 나왔고, 유취장(柳就章)이 또 낭자(狼藉)하게 승복(承服)하였으니, 그가 몰래 흉모에 참여한 자취가 남김없이 탄로(綻露)되었으며, 또 한 명관(名官)이 삼사(三司)가 회좌(會坐)한 가운데에서 전한 홍치중(洪致中)과 이만성(李晩成)이 문답(問答)한 말이 있다 하여 이 두 조항을 문목(問目)에 첨입(添入)하고, 엄중하게 추국(推鞫)하여 실정을 알아내기를 청하며 논계(論啓)해서 윤허를 받았으니, 국청(鞫廳)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즉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모든 죄인(罪人)의 국문(鞫問)은 반드시 발고(發告)한 자의 말과 혹 다른 죄수의 공사(供辭) 및 혹 그의 공사 가운데서 서로 어긋나는 단서(端緖)를 점출(拈出)해서 문목(問目)으로 삼는 것이 자연히 전해져 온 규례입니다. 이제 만약 외인(外人)이 사사롭게 수작(酬酢)한 것을 문목(問目)에 첨입(添入)한다면, 예전에 그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훗날의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계(臺啓) 가운데에 윗 조목의 말로써 발문(發問)하되, 그 재신(宰臣)이 문답(問答)한 한 조목은 문목 가운데에 넣지 않는 것이 아마도 안옥(按獄)하는 대체(大體)에 합당(合當)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대계(臺啓) 가운데에 발론한 문목(問目)의 한 조목은 넣지 말라는 말이 진실로 매우 마땅하다."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헌부 지평(憲府持平) 이보욱(李普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 임창(任敞)이 흉소(凶疏)를 올렸었는데, 처음 올린 소장은 등철(登徹)되지 않았으나, 역적(逆賊)의 속마음은 윤지술(尹志述)보다 지나침이 있었으니, 그 부범(負犯)한 것을 논하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후사(喉司)에서는 그 자취를 엄폐하려고 미봉(彌縫)하여 내어주고, 다시 고치어 꾸며서 올리게 하였습니다. 비록 이미 등철된 경우라 하더라도 분수를 범하고 의리에 어그러져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 정상(情狀)을 미루어 본다면 지극히 요악(妖惡)하였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持平) 이광보(李匡輔)를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광보는 국좌(鞫坐)에서 유취장(柳就章)을 조율(照律)할 때에 힘껏 쟁집하지 못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이에 이르러 처치(處置)하기를,
"당초에 완석(完席)에서 이미 쟁집(爭執)하여 고쳐서 감률(勘律)하기를 계청(啓請)하였으니,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국구(國舅) 어유귀(魚有龜)가 상소(上疏)하여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소장(疏章)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한 명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다. 곧 황욱(黃昱) 등이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의 무함받은 것을 신설(伸雪)하도록 청한 소(疏)를 가리키는데, 말마다 모두 선조(先朝)를 끌어대어 협지(脅持)하고 조절(操切)하였으니, 그 말의 당부(當否)는 논하지 않더라도 척리(戚里)가 정사에 간여하는 것이 어찌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7월 24일 정미

삼사(三司)에서 집의(執義) 정해(鄭楷),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광보(李匡輔),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 수찬(修撰) 이명의(李明誼)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광보가 합계(合啓)를 독주(讀奏)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고, 전계(前啓)를 잇따라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으며, 이진순이 전계를 독주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간(司諫) 양정호(梁廷虎)를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양정호 또한 유취장(柳就章)을 조율(照律)할 때 쟁집(爭執)하지 못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리니, 처치(處置)하기를,
"당초에 완석(完席)에서 서로 논난(論難)한 것이 있었는데, 이로써 경솔하게 언관(言官)을 체차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진계(陳啓)가 끝나자, 이명의(李明誼)가 나아가 아뢰기를,
"어제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관소(館疏)를 품처(稟處)하게 한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할 것을 상소하여 청하였는데, 그 사의(辭意)가 전인(前人)의 뜻을 이어받으며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옛날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변경하였는데, 왕안석의 무리는 바로 전인(前人)의 사업을 이어받아 실천할 것을 창도하여 마침내 원우(元祐)의 군자(君子)를 함정에 빠뜨렸습니다.406)   이에 나종언(羅從彦)407)  이 말하기를, ‘이른바 3년 동안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일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그 마음을 말한 것이니, 일이 만약 옳지 못하면 고치는 것이 효도가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의 조광조(趙光祖)는 중종조(中宗朝)에 화(禍)를 당하였는데, 인종(仁宗)께서 신원(伸寃)하였고, 유관(柳灌) 등은 명종조(明宗朝)에 무함(誣陷)을 당하였는데 선조(宣祖)께서 신원하였으며, 성혼(成渾)은 선조조(宣祖朝)에 무참(誣譖)을 당하였는데 인조(仁祖)께서 신원하였습니다. 대개 이 세 신하(臣下)가 무왕(誣枉)을 당한 것은 모두 그 당시 간흉(奸凶)한 무리의 소위(所爲)이고, 세 임금[三聖]의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뒤의 사왕(嗣王)께서 그 원한을 추후하여 신설(伸雪)하고 그 관직을 회복시켰으니, 성덕(盛德)이 빛나고, 인심이 화합하였습니다.
윤증(尹拯) 부자(父子)의 일에 이르러서는 선대왕(先大王)이 부사(父師)의 경중(輕重)으로 의논을 고집한 지 거의 30년 만에 마침내 흉역(凶逆)의 무리가 터무니 없는 말을 날조하니,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투저(投杼)408)  한 것과 같은 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를 모아 특별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선처(善處)하는 도리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유귀(魚有龜)는 국척(國戚)으로서 사론(士論)에 간예(干預)해서 갑자기 하나의 소장(疏章)을 올려 마치 맞아 싸우는 듯하였으니, 그 조짐을 자라게 할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엄중하게 계칙(戒飭)을 더하소서."
하였다. 지평(持平) 이광보(李匡輔)·이보욱(李普昱),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 등이 서로 잇따라 척리(戚里)는 조론(朝論)에 간여할 수 없다는 뜻을 말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7월 25일 무신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임창(任敞)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는 일은 그대로 따랐다.

 

7월 26일 기유

이승원(李承源)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7일 경술

전(前) 대사간(大司諫) 이사상(李師尙) 등 25인의 소(疏)를 비답(批答)없이 되돌려 보냈다. 이보다 앞서 승지(承旨) 조경명(趙景命)이 아뢰기를,
"조신(朝臣)의 장소(章疏)를 정원에 머물러 두었던 것은 혹 이미 죽었거나, 혹 이직(移職)하였거나 죄(罪)를 받은 자가 많으니, 이제 비록 비답(批答)을 내려 주지 않고 되돌려 보내더라도 또한 무방(無妨)할 것입니다. 청컨대 조목(條目)을 열거하여 써서 들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마침내 써서 들이니 이날 밤에 모든 소장(疏章)을 모두 되돌려 보내었다.

 

죄인(罪人) 심진(沈榗)이 주살(誅殺)되었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이 옥사(獄事)의 요긴한 점은 모두 은화(銀貨)에 있는데, 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이 끊임없이 계속하여 백망(白望)에게 갖추어 주었으며, 심진(沈榗)이 보냈던 은자 또한 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심진(沈榗)의 조카 심상길(沈尙吉)이 승복(承服)한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임금의 병환(病患)이 바야흐로 위중한 즈음에 이천기(李天紀)의 서간에 말하기를, ‘긴요하게 쓸 곳이 있으니, 은자(銀子) 1백 냥을 마련하여 보내라.’고 하였으므로, 즉시 내주었습니다마는 김용택(金龍澤)·이천기의 무리가 깊은 곳에 주선(周旋)한 빛이 현저하게 있었으며, 묘하게 만든 부채 또한 50자루를 주었습니다. 여러 역적의 무리가 목호룡의 고변(告變)을 염려하여 심상길(沈尙吉)의 노자(奴子)로 하여금 영중(營中)에 데리고 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조흡(趙洽)의 초사에 이르기를,
"서덕수(徐德修)가 심상길을 내방(來訪)하여 이르기를, ‘전라 병영(全羅兵營)에서 만일 오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주라.’고 하니, 심상길이 이르기를, ‘김민택(金民澤)의 집에서 전에 보낸 은자(銀子) 1백 냥과 대호지(大戶紙) 15권, 부채 30자루를 우선 추이(推移)하여 쓰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처음의 초사(招辭)에서 맹랑하다고 한 까닭에 국청에서 그 초사(招辭)가 피사(詖辭)·둔사(遁辭)409)  라 하여 형문하기를 청하였다. 형문을 세 차례 시행한 뒤에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청대(請對)하여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데 따라야 한다는 뜻을 아뢰어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게 하였는데, 곧바로 대계(臺啓)로 인하여 그대로 옥(獄)에 가두고, 형문(刑問)한 지 10차례에 이르러서 비로소 바른 대로 공초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제가 전라 병영(全羅兵營)에 있으면서 특별히 포목(布木) 1동, 돈 3백 냥, 대호지(大戶紙) 13권, 간지(簡紙) 5백 폭, 부채 50자루를 조카 심상길(沈尙吉)에게 올려 보냈는데, 돈 3백 냥은 고마청(雇馬廳)에서 추이(推移)하여 절선(節扇)410)   편에 올려 보냈습니다. 대저 심상길(沈尙吉)이 저에게 편지로 통지하기를, ‘반드시 은화(銀貨)가 있는 뒤에야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노론(老論)이 장차 패망하게 되는 까닭에 지 상궁(池尙宮)에게 행화(行貨)하여 패망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상경(上京)하여 뒤미처 들으니, 심상길의 아들 심재(沈載)가 말하기를, ‘지 상궁(池尙宮)에게 썼다.’고 하였으니, 은자(銀子)를 낸 한 조목은 같이 참여한 것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7월 28일 신해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징복(吏徵復) 등이 상소(上疏)하어 어유귀(魚有龜)가 척리(戚里)로서 사론(士論)에 간예한 죄를 공척하자, 어유귀가 또 상소하여 면직(免職)되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소장(疏章)을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7월 29일 임자

명하여 특별히 원찬 죄인(遠竄罪人) 민진원(閔鎭遠)을 방면(放免)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민진원이 부범(負犯)한 것은 비록 중하지만, 예대(禮待)하는 도리에 있어 한결같이 폐기(廢棄)함은 마땅하지 못하니 특별히 석방(釋放)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대개 이명언(李明彦)의 상소(上疏)로 인한 것이었다.

 

조상경(趙尙慶)을 정언(正言)으로, 이현장(李顯章)을 부교리(副校理)로, 여선장(呂善長)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7월 30일 계축

양사(兩司) 【집의(執義) 정해(鄭楷), 사간(司諫) 양정호(梁廷虎),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김중희(金重熙),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광보(李匡輔)이다.】 에서 잇따라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원찬 죄인(遠竄罪人) 민진원(閔鎭遠)을 석방(釋放)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은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으로,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문정(文貞)으로, 우의정(右議政)        윤지완(尹趾完)은 충정(忠正)으로, 판중추(判中樞)        박세당(朴世堂)은 문절(文節)로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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