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인
국청(鞫廳)에서 김시태(金時泰)·김성절(金盛節)을 옥에 가두었다.
8월 2일 을묘
박필몽(朴弼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명언(李明彦)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부응교(副應敎)로, 윤순(尹淳)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현장(李顯章)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양사(兩司) 【집의(執義) 정해(鄭楷),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김중희(金重熙),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광보(李匡輔), 사간(司諫) 양정호(梁廷虎),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이다.】 에서 합사(合辭)하여 이건명(李健命)은 정형(正刑)하고, 조태채(趙泰采)는 안율(按律)하고,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은 수노 적산(收孥籍産)하기를 청하였으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玉堂)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 수찬(修撰) 여선장(呂善長), 부수찬(副修撰) 이명의(李明誼)이다.】 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빨리 양사(兩司)의 계청을 따르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4흉(四凶)을 안율(按律)하라고 청한 것은 마침내 너무 과중(過重)하다."
하였다. 국제(國制)에 양사(兩司)에서 대청(臺廳)에 나아가 전계(傳啓)하면,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나와 계초(啓草)를 받아서 주서(注書)가 등서(謄書)하고 승지는 정원(政院)에서 승전색(承傳色)을 청하여 입계(入啓)하게 하였었다. 합사(合辭)에 이르러서는 양사(兩司)의 장관(長官) 이하가 대청(臺廳)에 늘어앉아 곧바로 승전색에게 청하여 전계(傳啓)하고, 계초는 대관(臺官)이 스스로 쓰며, 승지와 사관은 단지 대청에 나아가 승전색이 입계하는 것을 같이 접할 따름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전계(前啓)를 모두 따르지 않았다.
8월 3일 병진
밤 1경(一更)에 흑운(黑雲) 한 줄기가 곤방(坤方)으로부터 일어나 간방(艮方)을 가리키었다.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양사의 계청을 따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다시 거듭 청하는 것은 과당(過當)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8월 4일 정사
국청(鞫廳)에서 백시구(白時耉)·유성추(柳星樞)·우홍채(禹洪采)·이명좌(李明佐) 등을 옥에 가두었다.
8월 5일 무오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상건(李尙建)이 물고(物故)되었다. 이상건은 곧 백운산인(白雲山人) 이태화(李泰華)라고 일컫는 자이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하루는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문 밖에 내도(來到)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속리산(俗離山)의 석굴(石窟) 가운데에서 왔다.’고 하므로 나가 보았더니, 이태화(李泰華)였는데, 스스로 둔갑술(遁甲術)에 능숙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뒤에 정인중(鄭麟重)이 은화를 내지 못하여 여러 적(賦)이 색출(索出)하였으나, 어찌할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태화를 초치(招致)하여 요술로 은자를 얻도록 하니, 이르기를, ‘귀신(鬼神)을 부리어 은화를 얻으려면 주인(朱印)이 찍힌 종이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홍의인(洪義人)이 선공 봉사(繕工奉事)가 되어 도장이 그의 집에 있었으므로, 후지(厚紙)에다 공인(空印) 십수 장을 찍어서 주었더니, 이태화가 호조(戶曹)의 둔별장첩(屯別將帖)을 위조하여 철원(鐵原) 땅에 방매(放賣)하였습니다. 본쉬(本倅)가 그 인문(印文)을 알아보고는 그 별장(別將)을 잡아 가두고, 이태화(李泰華)를 매우 급히 찾으니, 이태화가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도주(逃走)하여 사실대로 홍의인(洪義人)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래서 홍의인이 본쉬(本倅)에게 서찰을 보내어 무사(無事)하게 되었으니, 환술(幼術)로 은화를 모으는 일은 한 바탕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발론하여 문목(問目)을 삼았더니, 은휘하고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았다.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여 한 차례 형문(刑問)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그 뒤에 국청에서 청대(請對)하여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아뢰기를,
"이것은 역옥(逆獄)에 간범(干犯)한 일이 아닙니다. 당초에 정인중(鄭麟重)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환술(幻術)로 은자(銀子)를 판출(辦出)하게 하려 하였으나, 환술의 효험이 없었고, 별장첩(別將帖)을 위조한 것만 발각되었을 따름입니다. 요술(妖術)로써 뭇사람을 미혹시킨 죄(罪)는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다시 나국(拿鞫)하여 열한 차례 형문(刑問)하였으나, 한결같이 버티며 자복하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경폐(徑斃)하였다.
8월 6일 기미
임금이 효령전(孝寧殿)에서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따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이 재삼 진청(陳請)하는 것은 너무 과중(過重)한 데 관계된다."
하였다.
8월 7일 경신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고,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부(府)·원(院)의 전계(前啓) 또한 따르지 않았다.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회복하였다. 비국(備局)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 황욱(黃昱) 등과 양호(兩湖)의 유생(儒生) 김수귀(金壽龜) 등의 상소(上疏)를 품처(稟處)하라는 명으로 인해 복주(覆奏)하기를,
"그윽이 생각하건대 두 현신(賢臣)의 도덕(道德)·학문(學問), 행의(行誼)·지절(志節)은 진실로 여러 조정에서 예로써 존경하였고, 한 시대에서 종앙(宗仰)하던 바인데, 이제까지 구무(構誣)하는 말은 오로지 흉적 신구(申球)와 역적 김창집(金昌集) 무리의 어진이를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음계(陰計)에서 나왔습니다. 경외(京外)의 장보(章甫)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호유(呼龥)한 것이 수만 마디의 말뿐이 아니었으니, 이것은 한 나라의 공송(公誦)하는 여론(輿論)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개진(開陳)하여 변석(辨釋)한 것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다시 남음이 없었으니, 신 등은 다시 조목을 나누어 논열(論列)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수십 년 이래로 아버지와 스승의 경중(輕重)에 대한 하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堅持)하시는 바가 지극하여 좌우(左右)에서 현혹시키는 데에 흔들려 빼앗긴 적이 없었습니다.
재신(宰臣)의 상소(上疏)에 답한 비지(批旨)에, ‘그 유소(儒疏)에서 말한 것은 근사함을 보지 못하겠는데, 어찌 무훼(誣毁)하는 죄목에 곧장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하교는 일성(日星)과 같이 빛났으니, 말초(末梢)의 처분(處分)이 우리 선왕(先王)의 본의(本意)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단연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두 현신(賢臣)을 원수같이 보았다 하니, 처음에는 감히 무훼(誣毁)의 침척(侵斥)을 가하지 못했는데, 얕은 데에서부터 깊이 들어가서 반드시 선정(先王)을 해치려는 계책을 이루니, 여러 사람의 말에 이끌려 마침내 증모(曾母)가 투저(投杼)하는 것과 같은 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일월(日月)의 밝음이 하루아침에 돌이켜 살필 것을 두려워하여, 무릇 송사와 변정(卞正)에 관계된 소장은 국가의 금령을 베풀어 한결같이 모두 퇴각(退却)하여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끝내 한 가지의 사실(事實)도 드러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중외(中外)에서 억울(抑鬱)해 하는 바가 오래 될 수록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아! 한 번 사문(斯文)이 윤상(淪喪)하면서부터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흉역(凶逆)의 형세가 점차 하늘에 사무치게 되고,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하게 되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고(黨錮)의 화(禍)411) 가 일어나서 한(漢)나라가 망하였고, 위학(僞學)의 금령(禁令)412) 이 나와서 송(宋)나라가 전복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시험삼아 우리 조정의 옛일로써 말하면,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모두 간임(奸壬)의 구함(構陷)을 받아 중종(中宗) 선조(宣祖) 양묘(兩廟)의 세상에서도 오히려 후명(後命)의 화(禍)와 추탈(追奪)하는 원한을 면치 못하였는데, 인종(仁宗)과 인조(仁祖)께서 설원(雪寃)하고 복관(復官)하셨습니다. 일찍이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었다 하여 중난(重難)하게 여기지 마시고 시원하게 공의(公議)를 따르소서.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은 오직 두 임금께서 이미 시행하신 의전(懿典)에 있습니다. 송(宋)나라 신하 사마광(司馬光)이 논한 바 ‘왕안석(王安石)과 여조겸(呂祖謙)이 건의(建議)한 바는 선제(先帝)의 본의(本意)가 아닌 것이니, 이것을 불에 타는 이를 구제하고 물에 빠진 이를 건지는 것과 같이 고치라.’고 한 것은 바로 오늘날을 위하여 준비(準備)한 말입니다. 한결같이 경외(京外)의 유생(儒生)들이 청(請)한 바에 의하여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은 모두 그 관작(官爵)과 증시(贈諡)를 회복하고, 원액(院額)을 다시 설치하고, 문집(文集)의 간행(刊行)을 윤허하심이 마땅하니, 이로써 해조(該曹)와 해도(該道)에 분부(分付)하여 즉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8월 8일 신유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고,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부(府)·원(院)·전계(前啓) 또한 따르지 않았다.
8월 9일 임술
대사간(大司諫) 이명언(李明彦), 부제학(副提學) 박필몽(朴弼夢), 집의(執義) 정해(鄭楷), 사간(司諫) 양정호(梁廷虎),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김중희(金重熙),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광보(李匡輔),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이현장(李顯章),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 수찬(修撰) 여선장(呂善長)·조익명(趙翼命), 부수찬(副修撰) 이명의(李明誼)가 복합(伏閤)413) 하여 이건명(李健命)을 정형(正刑)하고 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하고,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은 수노 적산(收孥籍産)하기를 거듭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무릇 세 번 아뢰었으나,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날이 어두워서야 바야흐로 물러갔다.
8월 10일 계해
임금이 효령전(李寧殿)에서 동가제(動駕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드디어 숙종 대왕(肅宗大王)·인경 왕후(仁敬王后)·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신주연(神主輦)을 모시고 태묘(太廟)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조복(朝服)차림으로 따랐다. 이날 저녁 임궁이 재궁(齋宮)에서 유숙하였다.
8월 11일 갑자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부제(祔祭)를 거행하고 인정전(仁政殿)에 환어(還御)하니, 왕세제(王世弟)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기로(耆老)·군민(軍民)·한량인(閑良人) 등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영구히 살지 못하시고, 선장(仙仗)414) 이 궁궐[彤闈]을 영원히 떠나시니,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주[神龕]를 청묘(淸廟)415) 에 올려 모시었다. 삼전(三殿)의 성대한 의식[縟儀]을 가지런히 거행하고 팔역(八域)에 윤음(綸音)을 선포하노라. 생각하건대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탄강(誕降)하신 지 50년에 홍공(鴻功)과 성렬(盛烈)을 남기셨고, 후사(後嗣)에 미쳐서는 천백세(千百世)토록 영구히 연익(燕翼)과 홍모(弘謨)를 끼치셨다. 대보단(大報壇)에 분필(芬苾)416) 을 올리어, 우리의 의기(義氣)를 더하였고, 장릉(莊陵)417) 에 송백(松栢)을 심어 사람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격앙시켰다. 일찍이 일월(日月)이 바뀌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누가 다시 천지(天地)에 유감이 있는가? 침질(寢疾)이 항상 더하셨으나, 염려는 더욱 백성[黎黔]에게 매었으며, 예절(禮節)을 나열하여 다시 베푸시니 정성은 은사(隱士)에게 변개(變改)하지 않으시었다. 성대한 일은 서루(西樓)의 선무(先武)를 이으니 악해(嶽海)의 축수(祝壽)가 바야흐로 깊었으며, 유제(遺制)는 장릉(長陵)의 우허(右虛)를 본받으니 검석(劒舃)의 그림자가 닫혔도다. 편안히 밖으로는 상복(喪服)을 벗었고 홀연히 안으로는 궤연(几筵)을 옮기었다. 상률(商律)은 가을에 되니 하늘의 별과 달이 천연[荏苒]하였고, 은례(殷禮)는 제사를 드리는 데 있으니 종묘 안의 훈호(焄蒿)가 처창(悽愴)하였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모(聖母)를 같이 제향(躋享)하니, 소자(小子)의 추감(追感)이 더욱 깊어졌고, 수명[寶算]이 길지 못하니 복리(覆履)의 면면(綿綿)함을 잃은 것을 한탄하였고, 임금의 기거[玉度]가 더욱 조촐하지 덕(德)은 광복(光復)하는 경사(慶事)를 드러냈다. 금여(金輿)와 옥련(玉輦)이 치도(馳道)의 동서(東西)에서 서로 맞이하였으며, 작선(雀扇)과 우모(羽旄)도 신악(神幄)의 전후(前後)에서 나누어 호위하였다. 의장(儀章)은 엄숙하고 조용하였으며, 변두(籩豆)는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바로 금년 8월 11일 갑자(甲子)에 공손히 황고(皇考) 숙종 현의 광륜 예성 영렬 장문 헌무 경명 원효 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과 황비(皇妣) 광렬 효장 명현 인경 왕후(光烈孝莊明顯仁敬王后)와 황비(皇妣) 효경 의열 정목 인현 왕후(孝敬懿烈貞穆仁顯王后)를 모시어 종묘[太廟]에 제부(躋附)하고, 승배(升配)하는 이전(彛典)을 이미 이루었으니, 다 청명(淸明)한 홍휴(洪休)를 마침내 보았도다. 몸소 서직(泰稷)을 진설하여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갱장(羹墻)에 붙이고,418) 귀에 가득한 갱장(鏗鏘)은 들어도 종고(鍾鼓)보다 즐겁지 않다. 천지[穹壤]가 끝이 없으니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데 곤면(袞冕)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한 마음이 개탄함을 더하였네. 정문(情文)이 결여하지 않고, 제사드리는 일이 매우 밝았다. 동동(洞洞)한 경계(警戒) 마음에 있으니, 찬작(瓚爵)을 받들어 슬퍼하였고, 양양(洋洋)한 영혼 위에 있는 듯했으니, 옥궤(玉几)의 도양(導揚)함을 상상(想像)했도다. 깊은 정성 미루어 선대(先代)를 받들었고, 크나큰 사은(私恩)을 쏟아 백성에게 미치게 하노라. 이달 11일 새벽 이전부터 운운……이라. 아! 일국(一國)이 모두 효도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니 선조(先朝)가 덮어 기르는 깊은 은혜를 생각하였고, 만백성이 골고루 이륜(彛倫)을 밝혔으니 오늘날 함육(涵育)하는 지극한 뜻을 몸받았도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는데, 홍문 제학(弘文提學) 김일경(金一鏡)이 지어서 바쳤다.
숙종 대왕(肅宗大王) 묘정(廟庭)의 칠사 배향신(七祀配享臣)에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남구만(南九萬)·좌의정(左議政) 문순공(文純公)·박세채(朴世采)·우의정(右議政) 충정공(忠正公) 윤지완(尹趾完)·영의정(領議政) 문정공(文貞公) 최석정(崔錫鼎)을 배향(配享)한 교서:
"왕은 말하노라. 부묘(祔廟)하는 예식을 거행하여 성대한 의식[縟儀]을 갖추었고, 배무(配廡)하는 신하를 정하여 명덕(名德)을 잘 골라 뽑았다. 내 뜻을 먼저 정하였더니, 첨모(僉謀) 또한 같았으므로, 이에 구장(舊章)을 상고하여 대호(大號)를 환양(渙揚)하였다.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남구만(南九萬)은 산하(山河)의 드문 기질이요, 금옥(金玉)의 뛰어난 재기를 모았다. 한 평생에 직절 청명(直節淸名)419) 을 드날렸으니, 문장(文章)은 그의 나머지 일이었으며, 만년의 심우(深憂)와 원려(遠慮)로 종사[宗祊]는 그의 순성(純誠)에 힘입었다. 대개 한결같은 절조는 이험(夷險)을 가리지 않았으니 조처하고 결단함에 정채(精彩)가 드러났으므로 천 년 만에 계합(契合)했으니, 예우(禮遇)가 처음부터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정부[廊廟]에서의 주선(周旋)은 가모(嘉謨)와 가유(嘉猷)가 밀물(密勿)하였고, 강호(江湖)에 염퇴(斂退)하여서는 어찰(御札)과 어시(御詩)가 빈번(頻煩)하였다. 마음을 안다는 온화한 유음(綸音)을 내렸으니, 미더운 동덕(同德)의 원보(元輔)이었도다.
좌의정(左議政)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도 이문성(李文成)420) 의 뒤에 태어나, 온연(溫然)히 정백자(程伯子)의 풍채를 닮았도다. 옛 성인(聖人)의 뒤를 이어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았고,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공(覇功)을 축출하는 것으로써 직임을 삼았다. 학문(學問)에 뜻을 두어 현성(賢聖)이 되기를 바랐으니 부지런히 50년을 공부(工夫)하였으며, 그 임금이 요(堯) 순(舜)과 같은 성군(聖君)되기를 원했으니 누누이 천만 마디의 장소(章疏)를 올렸다. 홀로 세교(世敎)를 부지하였으니, 진실로 퇴파(頹波)에 우뚝 솟은 지주(砥柱)의 공훈이 드러났다. 겨우 정승의 자리[台司]에 오르자 이미 백발(白髮)과 창안(蒼顔)의 슬픔을 느끼었다. 한 노인(老人)도 남겨 두지 않았으니, 거의 황천(皇天)이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의정(右議政) 충정공(忠正公) 윤지완(尹趾完)은 침응(沈凝)하고 돈확(敦確)한 융포(隆褒)가 있었고, 광명(光明)하고 위엽(煒燁)한 큰 절의가 있었다. 정색(正色)하고서 헌폐(軒陛)에 서면 백료(百僚)가 그의 엄정함을 모두 꺼려하였고, 몸을 받들어 구학(丘壑)에 돌아가는 데 미쳐서는 육정(六丁)도 그의 용맹스런 결단(決斷)을 만류하지 못하였다. 물의(物議)를 진압(鎭壓)한 도량을 말하면, 교악(喬岳)과 태산(泰山)보다 우뚝하였고, 사직(社稷)을 도운 충성을 말하면,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 중하였다. 백성[蒼生]은 기용(起用)이 늦은 것을 탄식하였고, 임금[聖主]은 몸소 맞이할 마음이 있었다.
영의정(領議政) 문정공(文貞公) 최석정(崔錫鼎)은 나라의 동량(棟樑)이요 사림(士林)의 영수(領袖)이었다. 일심(一心)으로 왕실(王室)을 도와 명주(明主)를 위해 근심하였고, 중서(中書)에서 열 번 고과(考課)하여 홍휴(洪休)를 도왔도다. 문학(文學)은 재유(才猷)로써 성취하였으니, 천하의 임무를 경륜할 만하고, 사업(事業)은 경술(經術)에 근본하였으니, 태평(太平)의 규범을 비식(賁飾)하지 않음이 없도다. 5색(五色)의 실로써 의상(衣裳)을 지었으니, 산룡(山龍)이 밝게 빛나고, 구성(九成)421) 의 악(樂)으로 덕(德)에 화합하니, 운봉(雲鳳)이 높이 날았다. 이는 진실로 서세(瑞世)의 명신(名臣)이니, 어찌 한 시대를 구제하는 어진 보필에 그치겠는가? 하늘[雲鄕]의 신선(神仙)·의장(儀仗)이 서로 잇따라 세상을 떠나니, 거의 진췌(殄瘁)하는 아픔이 간절하였고, 승하(昇遐)의 행차(行次)를 만류(挽留)하지 못했으니, 문득 종상(終喪)의 복제(服制)가 다하였다. 이에 종묘에 승부(陞祔)할 즈음에 마침내 배식(配食)할 현신을 간선하였다. 제언(諸彦)은 선조(先朝) 때에 가장 많았으니 기숙(耆宿)422) 의 간선(揀選)에 든 자가 없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의 천거가 모두 석보(碩輔)에 속했으니 그 덕행(德行)을 상고하여 알 수 있었다.
이에 경(卿) 등을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니 침전(寢殿)에서 집수(執手)한 때를 추모하니, 금고(今古)의 일이 어제와 같도다. 옥루(玉樓)에서 눈물을 흘리던 날을 상상하니, 은혜가 어찌 유명(幽明)에 간격이 있겠는가? 덕용(德容)이 의희(依俙)하니, 포륜(蒲輪)의 부소(赴召)를 상상(想像)하였고 성광(聲光)이 어른거리니, 황연(怳然)히 견여(肩輿)로 입조(入朝)하는 것과 같도다. 향화(香火)가 크게 퍼지는 사이에 다시 풍운(風雲)이 제회(際會)하는 성대함을 보았도다. 아! 군신(君臣)은 일체(一體)이니 척강(陟降)의 뜰에서 같이 모시었고, 조두(俎豆)는 천추(千秋)토록 영원히 증상(蒸嘗)의 천신[薦]을 흠향하리로다. 만일 정상(精爽)이 어둡지 않거든 은연중에 복을 내리기 바라노라.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지어다."
하였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지제교(知製敎) 이정제(李廷濟)가 지어 바친 것이다.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거듭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진하(陳賀)를 파한 뒤에 임금이 겨우 입내(入內)하니, 삼사에서 즉시 복합하였는데, 날이 어두워서야 바야흐로 물러갔다.
심공(沈珙)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8월 12일 을축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네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그대로 내일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8월 13일 병인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 판의금(兼判義禁) 이광좌(李光佐),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태좌(李台佐),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태억(趙泰億), 공조 판서(工曹判書) 한배하(韓配夏), 한성 판윤(漢城判尹) 윤취상(尹就商), 지의금(知義禁) 박태항(朴泰恒),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 호조 참판(戶曹參判) 이정(李楨), 예조 참판(禮曹參判) 유중무(柳重茂),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삼(李森), 한성 좌윤(漢城左尹) 김시환(金始煥),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세최(李世最), 대사성(大司成) 이사상(李師尙), 행 부호군(行副護軍) 신익하(申翊夏)·이휘(李暉)·윤우진(尹遇進), 행 부사직(行副司直) 이만선(李萬選)·대사간(大司諫) 이명언(李明彦), 부제학(副提學) 박필몽(朴弼夢), 집의(執義) 정해(鄭楷), 사간(司諫) 양정호(梁廷虎),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김중희(金重熙),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광보(李匡輔),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이현장(李顯章), 부교리(副校理) 여선장(呂善長), 수찬(修撰) 조익명(權翼淳), 부수찬(李修撰) 이명의(李明誼), 도승지(都承旨) 남취명(南就明), 좌승지(左承旨) 임순원(任舜元), 우승지(右承旨) 김치룡(金致龍), 좌부승지(左副承旨) 조경명(趙景命),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희진(朴熙晉),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정제(李廷濟)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최석항이 진언하기를,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청한 것은 온 나라의 공변된 의논입니다. 신 등이 삼가 2품(二品) 이상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삼사(三司)로 하여금 먼저 아뢰게 하고, 신들이 잇따라 진계(陳啓)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최석항이 돌아보고 이르기를,
"삼사(三司)에서 먼저 아뢰시오."
하니, 이명언이 이건명(李健命)을 정형(正刑)하라는 장계를 진독(進讀)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하라는 장계를 읽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을 수노 적산(收孥籍産)하라는 장계를 읽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최석항이 이르기를,
"이이명·김창집의 흉역(凶逆)한 정상은 전후의 추안(推案)에 죄다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유취장(柳就章)의 초사(招辭)에 이르러서는 더욱 지극히 낭자(狼藉)하여 복합(伏閤)하는 장계를 죄다 늘어 놓았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미 그의 역절(逆節)을 아셨으므로, 자진(自盡)하라는 명을 쾌히 내리셨으니, 수노 적산(收孥籍産)의 한 조목은 스스로 이 역률(逆律) 가운데에 차례로 응당 시행해야 할 절목(節目)입니다. 또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고 반사(頒赦)하는 것은 더욱 시기에 미치어 거행(擧行)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제까지 지연(遲延)하여 끝날 기약이 없으니, 청컨대 흔쾌하게 공공(公共)의 의논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최석항이 이르기를,
"이건명(李健命)의 죄상은 전후에 역적(逆賊)들의 초사(招辭)에서 남김없이 죄다 드러났습니다. 이정식(李正植)은 그의 복심(腹心)이며 친속(親屬)으로서 승복(承服)하여 납초(納招)하였는데, 심지어 비망기(備忘記)를 만약 내리거든 곧바로 거행(擧行)하라는 말이 이건명의 입에서 발설되기까지 하였다고 하니, 그 역절(逆節)을 논하면 김창집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삼사(三司)의 소청은 승복(承服)을 기다리지 말고 곧바로 정형(正刑)하자는 것입니다. 비록 법의(法意)를 다하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공의(公議)가 이와 같으니, 청컨대 흔쾌히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이 이르기를,
"연차(聯箚)는 이 급수(急手)의 장본인(張本人)인 조태채(趙泰采)에 관계된 장계이니, 또한 윤허하여 따르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서로 힘껏 간쟁(諫爭)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오늘 입시(入侍)한 신료에는 혹 역적(逆賊)의 지친(至親)도 있으나, 모두 감히 돌아보지 못하고 뜻을 같이하여 입대(入對)하였습니다."
하자, 조태억(趙泰億)은 이르기를,
"죄인(罪人) 조태채(趙泰采)는 곧 신의 당형(堂兄)423) 이니, 신(臣)이 이 일에 대하여는 참섭(參涉)할 수 없습니다. 또 김일경(金一鏡)이 역적의 지친이라고 공척(攻斥)하였으니, 신은 문을 닫고 죄(罪)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광좌(李光佐)는 이르기를,
"신은 사사로운 일이 외람되어 처음부터 감히 친혐(親嫌)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쟁집(爭執)이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갑자기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사관(史官) 송인명(宋寅明)은 어전(御前)의 지근(至近)한 자리에서 자주 앙시(仰視)하여 지극히 무엄(無嚴)하니, 먼저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창황(蒼黃)하게 총총걸음으로 나갔으나, 임금의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으므로, 최석항(崔錫恒)이 잠시 물러가 기다렸다가, 낮수라[晝水剌]를 올린 뒤에 다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여러 신하들을 지휘하여 물러갔는데, 날이 이미 미시(未時)가 되었다. 신시(申時)에 다시 들어와 반복(反復)하여 진청(陳請)하였는데, 임금이 눈여겨 보고서도 발락(發落)하는 바가 없었다. 날이 이미 어두워지자, 최석항이 연로(年老)한데다 자주 기거(起居)하였으므로, 피로가 극심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르기를,
"첨계(僉啓)와 노적(孥籍)에 대한 일은 청컨대 유음(兪音)을 듣고서 물러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노적(孥籍)과 합계(合啓)한 일을 모두 윤종(允從)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최석항이 이르기를,
"합계(合啓)도 두 가지가 있는데, 이건명(李健命)의 일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건명의 일이다."
하였다. 최석항이 물러가 복주(伏奏)하기를,
"노적(孥籍)과 이건명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또 일어나 간쟁(諫爭)하기를,
"조태채(趙泰采)의 일은 어찌 아울러 윤허하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명의(李明誼)가 성덕(聖德)을 앙면(仰勉)하여 이르기를,
"곧은 마음을 굳게 지키면 진실로 요개(撓改)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8월 14일 정묘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선전관(宣傳官)과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내어 보내어 이건명(李健命)이 있는 곳에 나아가 참형(斬刑)에 임석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또 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박필몽(朴弼夢)이 강경하게 간쟁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과중(過重)하다."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묵세(墨世)가 물고(物故)되었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이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역적 백망(白望)이 말하기를, ‘은자(銀子)를 절취한 궁녀(宮女) 이영(二英)에게 주어 그의 사촌(四寸)인 궁녀 이씨(李氏)에게 바쳐서 독약을 쓰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영(二英)의 어미 업이(業伊)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궁인(宮人) 이씨(李氏)는 이영의 사촌이 아니라 바로 6촌이며, 이름이 묵세(墨世)로서 방금 대전(大殿)의 나인(內人)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문목(問目)을 만들어 그 은화(銀貨)의 수량이 얼마이며 어느 곳에서 독약을 쓰려 하였는지를 깊이 캐어 힐문(詰問)하였더니, 초사(招辭)에 말하기를,
"이영(二英)이 그의 비녀(婢女) 철모(鐵母)를 보내어 보기를 요구하여 제가 이영의 집에 갔더니, 이영이 그의 남편 백망(白望)을 보도록 하므로, 제가 피하여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이영이 저를 붙들어 말리며 반드시 서로 보게 하고, 백망이 문밖에서 절을 하므로, 부득이 서로 만나 보았으며, 전후(前後)에 염람(染藍)으로 인하여 가 본 것이 두 차례였고, 은화(銀貨)를 주어 독약을 쓴 일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 이영(二英)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이른바 백망(白望)이 묵세(墨世)에게 말하기를, ‘내간(內間)의 아무가 기별(奇別)424) 을 탐지(探知)하고, 조목조목을 서로 통지(通知)하여 환국(換局)에 관한 말을 얻도록 하라.’고 일렀던 것으로 다시 추국(推鞫)하였더니, 초사(招辭)에 말하기를,
"백망(白望)이 저에게 이르기를, ‘남인(南人)이 들어올 것 같으면 내가 마땅히 득식(得食)하는 임무(任務)를 맡을 것이니, 내간(內間)의 소식(消息)을 만일 알 만한 길이 있으면 탐지하여서 알려라.’고 하므로, ‘내 몸이 침방(針房)에 있으니, 어찌 알겠는가?’라고 답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영(二英)의 용비(傭婢) 승업(勝業)과 면질시키자, 말이 막히었으므로, 국청(鞫廳)에서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형문을 다섯 차례 한 뒤에 국청 대신(鞫廳大臣)이 청대(請對)하고 작처(酌處)하여 감사(減死)해서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게 하였는데, 곧바로 대계(臺啓)로 인하여 그대로 옥(獄)에 가두고 형문(刑問)을 더하여 전후(前後) 13차례 행하였으나, 한결같이 버티고 자복하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경폐(徑斃)하였다.
8월 15일 무진
양사(兩司) 【대사간(大司諫) 이명언(李明彦), 집의(執義) 정해(鄭楷), 사간(司諫) 양정호(梁廷虎),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 지평(持平) 구명규(具命奎)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간사한 무리가 선류(善類)를 장해(戕害)한 것이 예로부터 어찌 한정(限定)이 있겠습니까마는, 만약 그 문자(文字)를 들추어내어 죄안(罪案)을 구성(構成)하면 전에는 유자광(柳子光)이요, 뒤에는 신구(申球)입니다. 유자광은 그래도 조문(弔文)을 끄집어내어 어지럽히고 의심(疑心)하는 밑천으로써 빙자(憑藉)하였으나 신구는 거짓을 억지로 끌어대어 하나같이 문집(文集)의 본의(本意)를 뒤엎었으니, 신구는 또 유자광의 죄인(罪人)입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유신(儒臣)에게 대답한 비지(批旨)에, ‘문집을 가져다 보았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근사(近似)한 바가 있었는가?’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일월(日月)의 밝음이 이미 귀역(鬼蜮)의 정상을 통촉하신 것이었습니다. 역적(逆賊) 김창집(金昌集)이 앞장서서 차자(箚子)를 올려 신구(申球)의 처지를 간곡히 두둔했으니, 어찌 호분(豪分)이라도 유현(儒賢)에게 고자(顧藉)할 뜻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또 이르기를, ‘무훼(誣毁)함이 아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죄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성감(聖鑑)이 매우 밝고 사람의 말이 두려운 때문이었습니다. 참설(讒說)을 받아들이고 판본(板本)을 훼철(毁撤)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는 데에 이르러서는 흉심(凶心)과 화계(禍計)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변론(辨論)하는 장소(章疏)를 배척해 막아서 정론(正論)과 직언(直言)으로 하여금 위에 들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화난(禍難)이 점차 천양(泉壤)에까지 미치는 데에 이르렀으니, 통한(痛恨)이 사림(士林)에 맺혀서 6, 7년 동안 침침(駸駸)한 긴 밤이었습니다. 이제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이미 복법(伏法)되었으니, 저 흉적(凶賊) 신구(申球)가 역적 김창집에게 아첨하여 붙좇으며 은밀한 사주를 받아 어진이를 무함(誣陷)하고 선정(先王)을 독해(毒害)하는 데 달갑게 허수아비 노릇 한 것을 엄격히 징토(懲討)를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군자 판관(軍資判官) 이지규(李志逵)는 윤지술(尹志述)이 복법(伏法)된 뒤에 조문(弔文)을 지어가지고 가서 조곡(弔哭)하였는데,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怨望)하겠는가?’라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생각을 글자로 얽은 것이 몹시 패악하고 윤리(倫理)가 없습니다. 또 홍산 현감(鴻山縣監) 황상정(黃尙鼎)은 역적 이희지(李喜之)의 시신(屍身)이 돌아오는 날에 몸소 그 상가(喪家)에 나아가 역군(役軍)을 배정(排定)하고, 선주(神主)를 만들어 주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그 당파(黨派)를 두둔하고 국법(國法)을 멸시하는 풍습(風習)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이지규(李志逵)·황상정(黃尙鼎)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부여 현감(扶餘縣監) 권응(權譍)은 흉적(凶賊) 이희지(李喜之)의 집이 관문(官門)과 서로 바라다보이는 곳에 있는데, 체결하여 왕래 한 정적(情跡)이 친밀(親密)하더니, 역적의 시신(屍身)이 돌아오는 날에 이르러서는 몸소 가서 조곡(弔哭)하였으며, 재산(財産)을 적몰(籍沒)하라는 명령이 내린 뒤에도 즉시 봉행(奉行)하지 않았습니다. 역적 이희지의 집안은 본시 나라와 필적하는 부호(富豪)라고 일컬어졌는데, 한결같이 적(賊)의 아우 이의지(李毅之)의 청촉을 따라 재산과 전답(田畓)·노비(奴婢)를 임의(任意)로 내어주었고, 뒤좇아 문권을 만들고는 이미 팔았다고 거짓 핑계하여 몰수(沒收)하여 들인 수량이 거의 절반을 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흉역(凶逆)을 고호(顧護)하고 국법(國法)을 경멸한 죄(罪)를 엄중하게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정배(定配)하소서. 또 호조 정랑(戶曹正郞) 윤세현(尹世顯)·사옹 직장(司饔直長) 황상정(黃尙鼎)·상의 직장(尙衣直長) 한택규(韓宅揆)·전(前) 참봉(參奉) 박광세(朴光世)는 모두 음사(陰邪)한 무리로서 흉적(凶賊)의 집에 붙좇아 선정(先正)을 추욕(醜辱)하고, 어진이를 독해(毒害)하는 모든 일을 앞장서서 담당(擔當)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그대로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모두 명하여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만성(李晩成)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김창도(金昌道)의 결안초사(結案招辭)에 이르기를,
"중군(中軍) 이삼(李森)이 장략(將略)은 있으나 반드시 같이 일하는 데 참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영상(領相)이 연동(蓮洞)의 이상(李相), 낙동(駱洞)의 조상(趙相)및 좌상(左相)과 상의하고, 병판(兵判) 이만성(李晩成)에게 말하여 충정 병사(忠淸兵使)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간(臺諫)이 논계(論啓)하기를,
"진실로 흉묘(凶謀)에 참여하여 아는 것이 없었다면 그 어찌 흉적(凶賊)의 지휘를 기꺼이 받았겠습니까? 그가 충분히 상의하여 체결(締結)하고 화응(和應)한 정상이 밝게 드러나 엄폐하기가 어려운데, 국청(鞫廳)에서 즉시 잡아오기를 청하지 않은 것은 벌써 옥체(獄體)에 어긋났습니다. 엄중히 핵실(覈實)하여 실정을 알아내는 것은 단연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드디어 잡아오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다시 추국(推鞫)하였으나, 발명(發明)하여 공초(供招)를 바치고, 옥에 갇힌 지 석달 만에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다. 대저 이만성은 경자년425) 의 대상(大喪) 뒤에 본병(本兵)426) 으로 있으면서 금려(禁旅)를 보내어 대궐 안을 호위(扈衞)하였다. 이때에 인심이 어수선하고 두려워하여 혹 예사롭지 않은 일이 있을까 염려하였는데, 이만성(李晩成)이 기미(機微)를 알고 병력(兵力)을 내어서 새 임금을 호휘하였다. 그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타고난 상도(常道)를 지키는 데에 근본하여 위의(危疑)한 즈음에 여러 번 본병(本兵)에 재임(在任)하였는데, 비록 자신을 질투(嫉妬)하고 미워하는 자라도 일찍이 음비(陰秘)한 일로써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던 것 또한 이 한 가지 일을 넌지시 거론한 것이었다. 이제 그의 역모(逆謀)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단지 하나의 곤임(閫任)을 차정(差定)한 데에 연좌되어 갑자기 병조 판서로서 체포(逮捕)되어 국옥(鞫獄)에서 오랫동안 갇히었다가 끝내 유사(瘦死)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미 형정(刑政)의 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위관(委官)도 마음속으로 그의 원통함을 알고 진실로 관대함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부의(浮議)에 유혹받아 머리를 움츠리고 결단(決斷)을 내리지 못하여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없도록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역량(力量)의 약함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이만성(李晩成)은 중간에 일찍이 사임(辭任)하고 전리(田里)에 돌아가 도성(都城) 안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시의(時議)에 서로 어긋난 뜻이 있는 듯하였는데, 병권(兵權)을 잡기에 이르러 마침내 문망(文網)에 빠지게 되었다. 예로부터 명리(名利)의 관두(關頭)에서 끝내 환하게 깨닫지 못하는 자는 도도(滔滔)함이 모두 이러하였으니, 어찌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8월 16일 기사
역적 이헌(李瀗)이 복주(伏誅)되었다. 이헌은 곧 이우항(李宇恒)의 아들이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역적(逆賊)의 무리가 다른 날 고변(告變)할까 염려하여 포장(捕將)을 사주하여서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천기(李天紀)가 이헌으로 하여금 포장을 찾아가서 보게 하여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헌이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장세상(張世相)에게 주기 위하여 관곡(官穀)을 팔아 돈 6백여 냥을 먼저 주고, 평안 병영(平安兵營)에서 보내 온 은화(銀貨) 4백 냥을 관곡의 모흠(耗欠)된 수량에 이용(移用)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처음 초사(招辭)에서 발명(發明)하므로 의논하여 형문(刑問)하기를 계청(啓請)하였다. 아홉 차례 형문하자, 비로소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였는데,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정유년427) 사이에 풍덕 부사(豐德府使)가 되었을 때에 들으니, 장세상(張世相)이 장차 독대(獨對)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먼저 이이명(李頤命)에게 통지하자, 이이명이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오래지 않아 과연 독대가 있으므로, 이로부터 비로소 장세상을 신임(信任)하게 되었으며, 외방(外方)에서 은화를 모아서 들여보내어 장세상으로 하여금 지 상궁(池尙宮)에게 청촉(請囑)을 꾀하도록 하였습니다. 조송(趙松)·정우관(鄭宇寬)의 무리가 저에게 말하기를, ‘이이명이 은화를 얻기 위해 이수민(李壽民)을 통영(統營)에 차송(差送)하여 김용택(金龍澤)으로 하여금 사정을 통지하게 하고, 한편으로 채은(債銀)을 찾아서 썼다.’고 하였습니다. 이수민(李壽民)이 통영(統營)에 내려간 뒤에 늘 이후에 마땅히 구하여 보내겠다고 일컫고는 끝내 보내지 않으니, 조송(趙松)의 무리는 매양 기만(欺瞞)당했다 하여 통한해 하였습니다. 이수민은 저로 하여금 그 채무(債務)를 함께 상환(償還)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저는 잘 사환(仕宦)하기 위하여 풍덕(豐德)에 있을 때에 돈 1백 냥을 내어서 상환하였습니다. 대저 이이명은 동궁(東宮)을 폐하려는 마음을 품은 지 오래되었는데, 대개 등극(登極)한 뒤에 제가 화난(禍難)을 당할까 두려워 하였습니다. 정유년에 칙사(勅使)가 왔을 때에 제가 풍덕(豐德)에서 올라와 이이명을 찾아가서 보았더니, 내간(內間)의 소식을 듣고, 또 이르기를, ‘내전(內殿)으로부터 장차 동궁을 폐위(廢位)하는 일이 있다고 요사이 들은 것이 있는데, 나는 믿지 않는다…….’ 하였는데, 대개 제가 조송과 정우관의 무리로 인하여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물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집이 이이명과 절린(切隣)이 되므로 언제나 왕래하였는데, 이들의 음모(陰謀)는 이이명이 주관(主管)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집안으로 하여금 장세상(張世相)에게 연락을 취하게 하였는데, 신의 아비 이우항(李宇恒)은 항상 집에 있었지만, 저는 외방에 있었던 적이 많았으므로 그 자질구레한 곡절은 상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은화를 모으는 일은 지 상궁(池尙宮)이 본시 노론(老論)의 궁녀(宮女)로서, 그가 스스로 마음을 다하면서 별도로 뇌물(賂物)을 많이 요구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들어간 것이 매우 많은 데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지난해 1월에 제가 여주 목사(驪州牧使)로서 시사(時事) 때문에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였을 때 이이명(李頤命)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으나, 찾아가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정우관(鄭宇寬)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이명(李頤命)이 독약(毒藥)을 사가지고 와서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서덕수(李德修)에게, 한 갈래는 이기지(李器之)·이천기(李天紀)의 무리에게 주었는데, 이 무리가 망령되게 먼저 시험하여 이소훈(李昭訓)의 초상(初喪)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겨울의 일은 다만 이홍술(李弘述)·김시태(金時泰)의 무리가 은화(銀貨)를 내었다고 들었을 따름이고, 저는 은자(銀子)가 없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대저 정유년 이후로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이 장세상(張世相)과 지 상궁(池尙宮)으로 인하여 매양 동궁(東宮)을 폐위(廢位)할 일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고, 기해년428) 과 경자년429) 사이에는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의 무리가 밤낮으로 경영(經營)한 것을 제가 여주(驪州)로부터 입경(入京)하여 간간이 얻어 들었습니다. 지난해 어느날 이천기(李天紀)가 찾아와서 독약을 쓰는 일은 낌새가 허술하여 이제까지 성사(成事)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7월에 제가 출옥(出獄)하여 귀양갈 때에 서덕수(徐德修)가 와서 보고 이르기를, ‘이기지(李器之)가 보낸 독약(毒藥)을 이소훈(李昭訓)에게 써서 제거하는 계책을 삼으려 한다.’고 하였는데, 금년 봄에 방환(放還)된 뒤에 서덕수가 와서 보고는 자못 겁을 내는 빛이 있었으니, 대저 독약을 쓰는 흉계(凶計)를 성사하지 못한 채 혹 패로(敗露)하고, 그의 무리가 모두 대계(臺啓)를 만나 찬축(竄逐)되어 비록 일을 도모하려고 하더라도 다시는 세력이 없을까 두려워한 까닭입니다. 제가 모역(謀逆)에 동참(同參)하였음이 적실합니다."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제 국청(鞫廳)에서 평안 병사의 은화(銀貨) 한 조목을 가지고 죄수에게 자세하게 캐어 물었더니, 이른바 기로소(耆老所)의 관문(關文)은 곧 임방(任埅)이 서명(署名)한 것이며, 그의 자제(子弟)와 겸인(傔人)이 값을 정하여 뇌물(賂物)을 받았다는 말이 추안(推案)에서 번갈아 나왔습니다. 역적 정우관(鄭宇寬)은 실지로 그 첩문(帖文)을 받아 은화(銀貨)를 얻고자 꾀했으니, 그가 흉역(凶逆)과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며 재화(財貨)와 뇌물을 많이 받은 정상이 남김없이 죄다 탄로(綻露)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은화(銀貨)는 역적이 손수 충분히 쓰게 하여 거의 그 흉도(凶圖)를 마음대로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바야흐로 엄중하게 징토(懲討)하는 날을 당하여 결단코 하루라도 도성(都城)의 아래에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행 사직(行司直) 임방(任埅)을 원찬(遠竄)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지규(李志逵)를 낙안(樂安)으로, 황상정(黃尙鼎)을 임피(臨陂)로 귀양보냈다.
8월 17일 경오
국청 죄인(鞫廳罪人) 양익표(梁益標)·이명좌(李明佐)가 복주(伏誅)되었다. 양익표는 처음에 유취장(柳就章)이 승복(承服)한 초사(招辭) 가운데에 훈국(訓局)의 중군(中軍)을 주선하였다는 말로 인하여 나포(拿捕)되었다. 그의 처음 공초(供招)에서 그가 왕래하며 주선(周旋)한 정적을 엄휘(掩諱)할 수 없는데도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한 사정(事情)을 알면서도 발명(發明)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양익표(梁益標)가 공초(供招)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궁성을 호위(扈衞)한 것은 모역(謀逆)하는 근저(根抵)가 되는데, 양익표가 역괴(逆魁)의 복심(腹心)으로서 왕래하며 전언(傳言)하였으니, 흉모(凶謀)와 비계(秘計)를 알지 못할 이치가 만무(萬無)합니다. 청컨대 다시 추국(推鞫)하게 하소서."
하였다. 다시 추국하였으나 또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지 않으니,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세 차례 형문하자, 거짓말로 꾸며댄 공초가 있었으니, 곧 김춘택(金春澤)·김민택(金民澤)의 집안과 서로 친숙(親熟)한 수말(首末)이어서 입계(入啓)하지 않았다. 네 차례 형문하기에 이르러 지만(遲晩)하였는데,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는 한 조목은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이 서로 함께 모의하여 정청(庭請)이 파한 뒤에 즉시 거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유취장(柳就章)이 동관(同官)인 까닭에 저에게 말하기를, ‘훈국(訓局)의 중군(中軍)이 지금 비어 있고 모든 대신(大臣)이 바야흐로 궁성을 호위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때에 이 임무를 반드시 나로 차출(差出)하도록 대신에게 제성(提醒)할 것 같으면 그대도 다른 날에 공로가 있을 것이니, 시험삼아 나를 위하여 도모하여 달라.’ 하였습니다. 제가 곧 비변사(備邊司)에 갔더니,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은 자리에 있었고, 이건명(李健命)은 측간(厠間)에 갔다가 방금 돌아왔으며, 조태채(趙泰采)는 벌써 의막(依幕)에 나가 있었습니다. 제가 유취장이 중군(中軍)에 적합하다는 뜻을 고하였더니, 김창집이 이르기를, ‘나도 진실로 이 사람으로 차출(差出)하려고 하였다.’고 하였고, 이이명과 이건명이 이르기를, ‘진실로 적합하다.’고 하였습니다. 김창집이 이르기를, ‘모름지기 우리들의 말을 훈장(訓將)에게 가서 전하고, 즉시 차하(差下)한 뒤에 궁성을 호위하는 일을 즉각 거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즉시 훈장의 집에 가서 전하였더니, 이홍술(李弘述)이 이르기를, ‘유취장(柳就章)은 내가 이미 정하였다. 이제 마땅히 차출(差出)할 것이니, 궁성을 호위하는 일을 내가 어찌 잘 거행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제가 이미 궁성을 호위하는 모의(謀議)를 알고 중군을 차출하는 일로 왕래하며 말을 전하였으니, 정상을 아는 죄(罪)가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이명좌(李明佐)는 이홍술(李弘述)의 종손(從孫)이다. 김성절(金盛節)이 승복한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장세상(張世相)이 정우관(鄭宇寬)으로 하여금 김시태(金時泰)에게 말하게 하기를, ‘만약 은화 3천 냥을 얻어서 쓰게 되면, 전화위복(轉禍爲福)할 수 있다고 하므로, 김시태가 이명좌에게 물었더니, 이명좌가 대답하기를, ‘집에 1천 5백 냥이 있었는데 여러 생질(甥姪)에게 흩어주고 남은 것은 단지 7백 냥뿐이다. 만약 다시 수합(收合)하면 천금(千金)은 충당할 수 있겠지만, 직접 장세상(張世相)을 만나 보고 곡절(曲折)을 상세하게 물은 뒤에 내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김시태(金時泰)가 말하기를, ‘이명좌가 장세상을 찾아가서 만나고는 정우관(鄭宇寬)으로 하여금 7백 금을 가지고 가서 장세상에게 주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성절이 김시태와 면질(面質)하였을 때에 김시태가 이르기를,
"내가 지난해 12월에 이홍술의 의막(依幕)에 갔다가 나올 때에 이명좌(李明佐)를 만나 같이 행랑방(行廊房)에 들어갔는데, 조용히 말하기를, ‘우리 종조(從祖)께서 이우항(李宇恒)과 취합(聚合)한 은자(銀子)를 조송(趙松)에게 많이 주었는데, 조송이 많은 수량을 소모하였으므로, 내가 관가에 정장(呈狀)하여 추심(推尋)하여 내려는 뜻으로 조송에게 공갈(恐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상봉(相逢)하여 은화를 추심한 일을 물었더니, 이명좌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조송은 노예와 같이 사환(使喚)하였으므로, 정우관(鄭宇寬)으로 하여금 바야흐로 환국(換局)하는 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은휘하고 바른 대로 고(告)하지 않았다. 김시태(金時泰)와 면질(面質)시켜 서로 쟁변(爭辨)할 즈음에 자못 의심할만한 단서가 있으므로,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한 차례 형문(刑問)하자 거의 다 실토(實吐)하였지만, 아직도 은휘하고 있으므로 두 차례 형문(刑問)하니,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조송이 처음에 종조(從祖)의 의막(依幕)에 가서 은화 3백 냥을 받았고, 제가 또 조송의 생질(甥姪) 이세복(李世福)으로 하여금 종조의 집에 가서 4백 냥을 가져가게 하였으니, 전후에 낸 것이 합하여 7백 냥이 됩니다. 모두 조송에게 보내어 장세상(張世相)에게 쓰도록 하여 환국(換局)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김시정(金時鼎)과 정우관(鄭宇寬)을 찾아가서 보고 그의 밀어(密語)를 따라 묻기를, ‘환국(換局)하는 일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하니, 정우관이 이르기를, ‘장세상에게 들여 보낸 은화(銀貨)는 내전(內殿)에서 도모한 일이 있는데, 멀지 않아 일이 성사(成事)되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상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시태가 와서 말하기를, ‘시사(時事)에 좋은 기회가 있는 것이 명확하다. 오늘 저녁에 그대 집의 대감(大監)께서 마땅히 패초(牌招)받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요동(搖動)하지 말고 속에 융복(戎服)을 입고 소로(小路)를 따라 예궐(詣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바야흐로 영상(領相)의 의막(依幕)에 도로 나가서 또한 이 일을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벌써 종조(從祖)의 은화를 내어 장세상에게 전송(轉送)하고, 또 정우관(鄭宇寬)을 보고 장세상이 도모하는 일을 물었으니, 궁금(宮禁)에 교통(交通)하며 환국(換局)을 도모하는 모의에 동참(同參)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하였다.
8월 18일 신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제조(提調) 한배하(韓配夏)가 입시(入侍)하였다. 조태구가 이르기를,
"어제 신이 김성절(金盛節)의 초사(招辭)를 보고 성궁(聖躬)에 독약(毒藥)을 시험하였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흔들리고 뼈가 부스러짐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황천(皇天)이 도우시어 다행히 즉시 토하시었지만 혹 여독(餘毒)이 장부(臟腑)에 머물러 있으면, 신민(臣民)의 통박(痛迫)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였겠습니까? 의서(醫書)에 이르기를, ‘독을 마신 경우 비록 이미 3년이나 오래 되었더라도 다시 발생하는 근심이 있다.’고 하였으니, 해독(解毒)하는 약제(藥劑)를 복용(服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듣건대 ‘경자년430) 10월 사이에 성상께서 갑자기 크게 담수(痰水)를 토하시었는데, 거의 반 대야에 이르렀으며, 색깔이 몹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달에 입직(入直)한 의관(醫官)의 일기(日記)에는 반드시 상고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니, 그 날짜에 당일(當日)의 수라간(水剌間)의 나인(內人)으로 김성(金姓)이라는 자를 조사하여 낸다면 어찌 알아내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배하가 이르기를,
"그날 수라를 진어(進御)하신 뒤에 즉시 구토(嘔吐)하시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조태구가 이르기를,
"신이 사복(嗣服)하시는 처음에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궁녀(宮女)를 가려 내보낸 일을 진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궁중(宮中)에는 집사(執事)와 나인(內人) 외에 한잡인(閑雜人) 또한 반드시 많을 것이니, 만약 근신(謹愼)하는 자를 가려서 수라(水剌)의 임무를 다스리도록 하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은 자는 점차로 가려 내보낸다면 그 은복(隱伏)하는 근심을 방비하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물러나온 뒤에 약방일기(藥房日記)를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경자년 12월 15일 약방의 계사(啓辭)에, ‘어제 황수(黃水)를 토했는데, 거의 한 되 정도에 이르렀으므로, 내어보였다.’는 일이 있으므로, 마침내 아뢰기를,
"15일로써 보면 성상께서 황수를 토하신 것은 과연 경자년 12월 14일입니다. 이로써 조사하여 상고하면 증거하여 핵실(覈實)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궁인(宮人)을 조사해 내기를 계청(啓請)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김성(金姓)의 나인을 조사하였으나, 없었다."
하였다. 또 조사해 내기를 청하니, 이르기를,
"원래 없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또 조사해 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의계(議啓)하니, 비답하기를,
"나인(內人)을 조사해 내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나, 노론(老論)을 타도(打倒)하려는 계책(計策)은 더욱 지극히 근거가 없으니, 이 뒤로 이와 같은 문자(文字)는 써서 들이지 말라."
하였다. 이 때에 여러 적(賊)들이 차례로 승복(承服)하였는데, 김성절(金盛節)의 초사(招辭)에 이르러서는 더욱 음참(陰慘)하니, 인정이 바야흐로 독약을 쓴 궁인(宮人)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하여 분하게 여기었다. 그런데 의계에 대한 비답이 뜻 밖에서 나왔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의혹해 하였으나, 그 단서를 알지 못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궐하(闕下)에서 왕명을 기다리자,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니, 전교하기를,
"대명(待命)하지 말라."
하였다. 최석항이 드디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엎드려 의계(議啓)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비록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하나, 지극히 황공(惶恐)하고 송구(悚懼)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약(藥)을 쓰고 담수(痰水)를 토했다는 말이 이미 죄인(罪人)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니, 마음이 놀라고 뼈가 아픔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반드시 조사해 내어서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국체(鞫體)에 있어 그만둘 수 없으며, 신자(臣子)의 정리(情理)에 있어서 한 하늘 아래 함께 사는 것은 부당(不當)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역적을 징토하는 일이 어찌하여 일어났습니까? 종사(宗社)를 위하고 성궁(聖躬)을 위해서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그 사이에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한때의 하교(下敎)는 깊이 혐의(嫌疑)할 것이 못되니, 경(卿)은 대죄(待罪)하지 말고 속히 출사(出仕)해서 정사를 보살펴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이광좌(李光佐) 이하가 연명(聯名)하여 진소(陳疏)하니, 비답하기를,
"경(卿) 등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집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죄인(罪人) 이수민(李壽民)을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대사간(大司諫) 이명언(李明彦)을 출사(出仕)시키도록 계청하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윤대영(尹大英)을 체차(遞差)시키도록 계청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명언이 피사(避辭)하기를,
"국좌(鞫坐)에서 윤각(尹慤)의 일로써 완의(完議)할 즈음에 우견(愚見)을 약간 보이고 힘껏 쟁집(爭執)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처치(處置)하기를,
"당초에 완석(完席)에서 이미 쟁집(爭執)한 바가 있으니, 이로써 경솔하게 언관(言官)을 체차(遞差)시킬 수 없습니다."
하였다. 윤대영(尹大英)은 피사(避辭)하기를,
"완석(完席)에 대수롭지 않게 응하여 끝내 한 마디 말도 쟁집(爭執)한 바가 없었으니, 공의(公議)의 준척(峻斥)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처치하기를,
"마땅히 쟁집하여야 할 데에 쟁집하지 아니하여 공의에 비난받았으니, 그 대체(臺體)에 있어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8월 19일 임신
햇무리하고, 달무리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이언환(李彦瑍)·금부 도사(禁府都事) 이하영(李夏英)이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서 이건명(李健命)를 처참(處斬)하는 데 입회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용석(李龍錫)·이명익(李明翼)을 옥(獄)에 가두었다.
8월 20일 계유
햇무리하였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이진순(李眞淳)·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장령(掌令) 김중희(金重熙)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4흉(四凶)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罪)는 사람마다 주륙(誅戮)할 수 있으니, 무릇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자는 누군들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을 깔고 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인(舍人) 심공(沈珙)은 한갓 문란(門闌)의 사정(私情)에 끌려 목욕(沐浴)의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대신(大臣) 이하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는 때를 당하여 대론(大論)을 피하고자 도모하여 관직(館職)을 체차(遞差)하려고 하루 안에 반드시 천전(遷轉)하고야 말았습니다.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은 버려둔 채 서로 잊고서 청관(請官)과 미직(美職)만을 내가 스스로 한다면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음을 용납하겠습니까? 공의(公議)가 더욱 격렬해져 끝내 버려 두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고, 또 국청 죄인(鞫廳罪人) 윤각(尹慤)을 엄중하게 형문(刑問)하여 사실을 알아내기를 청하였으니, 모두 따르지 않았다.
8월 21일 갑술
국청에서 김창언(金昌彦)을 옥(獄)에 가두었다.
8월 22일 을해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 대사간(大司諫) 이명언(李明彦)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김성(金姓)의 궁인(宮人)을 조사해 내는 일을 반복(反覆)하여 개진(開陳)하였는데, 임금이 묵연(默然)히 응답하지 아니하다가 끝내 윤허하였다. 또 전번에 내린 의계(議啓)에 대한 비지(批旨)를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김덕기(金德器)를 옥(獄)에 가두었다.
8월 23일 병자
국청에서 홍순택(洪舜澤)을 옥에 가두었다.
8월 24일 정축
임금이 명릉(明陵)431) 에 거둥하여 친제(親祭)하고, 익릉(翼陵)432) 과 경릉(敬陵)433) 을 지나다 전알(展謁)하고 미시(未時)에 환궁(還宮)하였다.
8월 25일 무인
국청(鞫廳)에서 이세복(李世福)·이후경(李厚敬)·이언지(李彦之) 등을 옥(獄)에 가두었다.
8월 26일 기묘
역적 김성절(金盛節)이 복주(伏誅)되었다. 이헌(李瀗)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철산(鐵山)에 정배(定配)된 죄인(罪人) 김시태(金時泰)가 평산(平山)의 적소(謫所)에서 두루 찾아보고 이르기를, ‘나는 몸을 숨기고 지휘하였으며, 김성절로 하여금 사이에 있으면서 사환(使喚)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어 이르기를,
"이른바 지휘(指揮)하였다는 것은 무슨 일이며, 사이에 있으면서 사환(使喚)하였다는 것은 무슨 일이냐?"
하니, 처음 초사(招辭)에서는 은휘하고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았다. 또 이헌(李瀗)을 다시 추국한 초사(招辭)로써 추문(推問)하였더니 여전히 굳게 은휘하였다. 이헌과 면질(面質)시키자, 서로 쟁집(爭執)하여 끝내 귀일(歸一)되지 않았으나, 여러 흉적(凶賊)과 관련된 소위(所爲)가 서로 드러났으므로,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한 차례 형문(刑問)하자, 비로소 모의에 참여하여 은을 모으고 궁금(宮禁)에 교통하였다고 납초(納招)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기를,
"김성절이 이미 은을 모아 교통하였다고 하니, 결안 취초(結案取招)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가 참여하여 같이 일을 한 자가 김창도(金昌道)·정우관(鄭宇寬)의 무리이며, 참여하여 교통한 자가 바로 장세상(張世相)이었으니, 흉역(凶逆)의 정절(情節)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다시 엄중하게 형문(刑問)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 법에 의하여 처단(處斷)하소서."
하였다. 세 차례 형문(刑問)을 시행하자, 모역(謀逆)한 일을 승복(承服)하여 이르기를, "장성(張姓)의 역관(譯官)이 독약(毒藥)을 사서 가지고 왔으며, 김성(金姓)의 궁인(宮人)이 성궁(聖躬)에게 시험하여 썼습니다……."
하였다. 나인(內人)을 사핵(査覈)하였더니, 김성(金姓)이 많아서 별로 명백(明白)하게 드러낼 길이 없고, 정유년434) 의 부경 역관(赴京譯官) 가운데에는 원래 장성(張姓)의 사람이 없었다. 이로써 다시 추국(推鞫)하였으나, 명백하게 지목(指目)하여 고하지 않았다. 또 한 차례 형문을 다하자,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서덕수(徐德修)의 말을 들으면 정유년에 금평위(錦平尉)435) 의 사행(使行) 때 이기지(李器之) 부자(父子)가 역관(譯官) 장판사(張判事)라고 일컫는 자로 하여금 독약(毒藥)을 사서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그의 이름과 거주(居住)는 묻지 않았습니다. 이번 귀양갈 때에 마침 그때에 사행의 역마두(驛馬頭)였던 오성(吳姓)이라는 사람을 만나 물었더니, 이르기를, ‘그 행차(行次)에 역관(譯官) 장성(張姓)은 단지 한 사람뿐이었으니, 만약 수역(首譯)에게 물으면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기지가 서덕수에게 이르기를, ‘약의 일은 우리 아버지 또한 이미 알고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인군을 폐위(廢位)하는 비망기(備忘記)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오직 생사(生死)를 돌보지 않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그 약은 정우관(鄭宇寬)으로 하여금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여보내게 하였고, 장세상은 수라간(水剌間)의 차지(次知)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하였는데, 김 상궁이 많은 은화를 요구하고는 한 차례 성궁(聖躬)에게 시험해 썼으나, 곧바로 토하여 냈습니다. 이기지(李器之)의 무리가 말하기를, ‘약(藥)이, 맹독(猛毒)이 아니니, 마땅히 다시 은화를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조송(趙松)의 집에 가서 정우관(鄭宇寬)을 만났는데, 정우관이 독약을 쓴 일을 저에게 말하기를, ‘이 일은 이희지(李喜之)·이기지가 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과 전적으로 주장(主張)하고, 나로 하여금 장세상(張世相)에게 전해 주는 계제(階梯)로 삼았으니, 내가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습니다. 제가, ‘약값은 어떻게 거두어 모았느냐?’고 물었더니, 조송이 말하기를, ‘전인좌(錢仁佐)는 김운택(金雲澤)의 복심(腹心)으로서 여러 해동안 길렀는데, 회금(灰金)의 청탁으로 통수(統帥) 이수민(李壽民)의 군관(軍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자년436) 의 국휼 초상(國恤初喪) 때에는 정목(正木) 1백여 동(同)을 실어와서 훈국(訓局)의 방납체(防納體)로써 덜어내어 쓰고, 그 부족한 수량은 유성추(柳星樞)가 신입(新入)으로서 김성행(金省行)에게 뇌물(賂物)을 준 것이 많이 있었으니, 대개 그의 한 평생의 소원은 평안 병사(平安兵使)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정식(李正植)이 김창집(金昌集)의 말로 유성추(柳星樞)를 유혹하여 전후에 낸 것이 매우 많았으며, 또 평안 병사 백시구(白時耉)가 낸 은화(銀貨)로 그 부족한 수량을 충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11월에 두약(痘藥)을 구하기 위해 약방(藥房)에 들어갔더니, 김창집(金昌集)이 바야흐로 도제조(都提調)로서 납약(臘藥)437) 을 감제(監劑)하고 있었는데, 김성행(金省行)·김창도(金昌道)는 모두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저녁에 김창집이 나올 때에 김창도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를 따라서 함께 교동(校洞)의 우소(寓所)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저도 같은 친족인데 끝내 말이 없으므로, 마음속으로 그윽이 괴이하게 여기었습니다. 그 뒤에 제가 김창언(金昌彦)을 만나보고 이 일을 말하고, 또 이르기를, ‘김창도가 요즈음 수상(殊常)한 일이 있다고 하던데, 대감(大監)이 이로 인하여 후대(厚待)하여 그런 것인가?’고 하였더니, 김창언이 이르기를, ‘형(兄)은 아직도 김창도의 일을 알지 못하는가? 근래에 시사(時事)가 어수선한 까닭에 대감을 위하여 김창도·우홍채(禹洪采)로 하여금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어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르기를, ‘김창도는 인사(人事)가 형편이 없는데 어찌 이러한 일을 위임(委任)할 수 있는가?’ 하니, 김창언이 이르기를, ‘대감을 위하여서는 죽음도 또한 사양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르기를, ‘나는 바야흐로 직임이 있어 형세가 하기 어렵기 때문에 김창도로 하여금 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김창도를 만나보고 이르기를, ‘이 일은 성사(成事)되면 이롭겠지만,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데, 어찌 급속히 하지 않고 이와 같이 늦추어 하는가? 하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김창집을 찾아가서 보고 이르기를, ‘김창언의 말을 듣건대 김창도로 하여금 장세상한테 들어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은 몹시 위태로운데, 대감께서는 어찌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니, 김창집(金昌集)이 이르기를, ‘나는 한결같이 김제겸(金濟謙)이 직사(職事)에 분주하니,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김창언(金昌彦)이 김창도(金昌道)로 하여금 장세상의 집을 왕래하게 하니, 나도 또한 어찌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또 12월 초3일에 김창집을 찾아가서 보고 이르기를, ‘듣건대 초6일에 대소(大疏)가 들어가면 시사(時事)가 반드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대감(大監)께서 반드시 먼저 화(禍)를 받을 것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였으나, 김창집은 조금도 안색(顔色)이 변하지 않은 채 이르기를, ‘이번에는 근심이 없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르기를, ‘비록 김창도(金昌道)로 인하여 장세상(張世相)에게 얻어 들은 바가 있다 하니, 만약 혹 차질(蹉跌)이 있으면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 뒤로 여러 차례 왕래하였으나, 모두 종용(從容)하지 않았습니다.
13일 새벽에 김창집(金昌集)을 의막(依幕)에 가서 보고, 그의 아우 김창홉(金昌翕)의 상사(喪事)를 위로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대감(大監)께서는 초3일에 한 제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김창도(金昌道)가 무엇을 잘 탐색하고 있다고 장세상(張世相)을 믿고 스스로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시더니, 이제 어떻습니까?’ 하니, 김창집이 대답하지 않고, 인하여 이르기를, ‘네가 김시태(金時泰)를 만나 보았느냐? 김시태의 말을 들으면 이홍술(李弘述)의 집에서 얻은 은화를 장세상에게 주어 바야흐로 환국(換局)을 도모한다고 하는데, 너도 또한 알았느냐?’고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김시태와 이명좌(李明佐)가 이홍술을 위하여 비록 도모하는 것이 있더라도 죄(罪)를 받고 옥(獄)에 들어간 사람이 어떻게 감히 도로 대장(大將)이 될 수 있겠습니까? 대감(大監)께서도 이와 같은 생각은 하지 마십시요.’ 하였습니다. 김창집이 이르기를, ‘김시태는 정녕(丁寧) 나의 행차(行次)가 떠나기 전에 반드시 들어온다고 말하였다. 이번 일은 박상검(朴尙儉)의 무리가 중간(中間)에서 하는 것이니, 만약 이로써 임금에게 아뢴다면 마땅히 다시 처분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달 초6일에 김시태의 집에 갔더니, 정우관(鄭宇寬)이 자리에 있었는데, 김시태가 정우관을 눈짓하여서 보내고는 인하여 한숨을 쉬며 탄식(歎息)하여 말하기를, ‘어찌할 수 없다. 잠시 전에 장세상(張世相)이 정우관을 보내었는데, 말하기를, 「만약 3천 냥의 은화를 얻어 썼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김성행(金省行)이 서덕수(徐德修)와 같이 일하면서 황해 병사(黃海兵使) 유성추(柳星樞)가 보낸 은화 6백 냥과 평안 병영의 은자(銀子) 4천 냥을 받아 와서 장세상에게 많이 주지 않은 까닭에 사기(事機)를 잃어 박상검(朴尙儉)을 먼저 제어할 수 없었다.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나, 이 즈음에 만약 3천 냥의 은자를 얻는다면 주선(周旋)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르기를, ‘영감(令監)은 어찌 이홍술(李弘述)에게 가서 묻지 않으십니까?’ 하니, 김시태가 이르기를, ‘이홍술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지금 7백 냥을 얻을 수 있지만, 그 나머지는 판비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르기를, ‘만약 먼저 1천 냥을 준다면 장세상이 장차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먼저 사기(事機)를 탐지한 뒤에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시태가 이르기를,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김시태가 이홍술의 의막(依幕)에 갔기 때문에 제가 이튿날 김시태를 찾아가서 보았더니, 김시태가 이르기를, ‘이홍술(李弘述)의 종손(從孫) 이명좌(李明佐)는 곧 그의 양손(養孫)의 형(兄)이며, 집안 일을 주관하는 자이다. 이명좌가 이르기를, 「집에 1천 5백 냥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여러 생질(甥姪)에게 나누어 주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7백 냥뿐이나, 만약 다시 수합(收合)한다면 천금(千金)은 충당할 수 있겠지만, 나로 하여금 장세상을 몸소 보고서 곡절을 상세하게 물은 뒤에야 내줄 수 있다」고 하였다.’ 하므로, 제가 김시태(金時泰)에게 묻기를, ‘이런 물건은 중간에서 소모시키기나 쉬우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니, 김시태가 이르기를, ‘필정(必貞)·석열(石烈)이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와 안팎으로 부동(符同)하였으니, 장세상(張世相)이 만약 은화를 가지고 들어가면 온유한 말로 달랠 사람은 온유한 말로 달래고 억제(抑制)할 자는 억제할 수 있게 하여야 일을 성취(成就)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11일에 또 김시태를 찾아가서 보고 은화를 구한 여부(與否)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명좌(李明佐)가 장세상(張世相)을 찾아가서 보고 정우관(鄭宇寬)으로 하여금 7백 금을 가지고 가서 장세상에게 주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3일에 제가 새문[新門] 밖 김창집(金昌集)의 의막(依幕)에 가서 김시태(金時泰)를 만나보았더니, 김시태가 말하기를, ‘소훈(昭訓)의 장사(葬事)는 14일로 정하였으며, 장세상(張世相)이 12일에 산소(山所)에 나갔다가 돌아온 뒤에야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날 정우관을 조송(趙松)의 집에서 만났더니, 정우관이 이르기를, ‘여러 대신(大臣)들이 발행(發行)하기 전에 모조(某條)를 주선(周旋)하면 다시 환국(換局)할 수 있으니, 아직은 늦게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14일에 정우관이 사람을 장세상(張世相)에게 보내어 돌아오기를 최촉(催促)하였는데, 아직 좋은 기별(奇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창집·이명의(李明誼)이 15일에 부득이 길을 떠났습니다. 17일에 정우관이 김시태(金時泰)에게 급하게 고하기를, ‘은자(銀子)를 보내지 않아 일이 아직도 성사(成事)되지 않았다.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가 큰 변란(變亂)을 일으킬 형세가 있으므로 장세상이 이제 바야흐로 설득(說得)시키고 있는데, 은자(銀子)를 더 얻은 뒤에야 할 수 있다.’고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김성행(金省行)이 황해 병사의 허다한 은자(銀子)를 받아 어느 곳에 썼기에 내주지를 않는가? 이제 마땅히 김창도(金昌道)를 초치(招致)해서 김성행에게 말하여 이 은화(銀貨)를 가져다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김시태가 사람을 보내어 김창도를 초치하였더니, 김창도는 총융청(摠戎廳)의 은자(銀子)일 때문에 문 밖의 윤각(尹慤)의 의막(依幕)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김창도가 말하기를, ‘윤각(尹慤)이 전에 이미 은화 3백 냥을 낸 까닭에 김창집이 즉시 비국 당상(備局堂上)에 계하(啓下)하였는데, 윤각이 대간(臺諫)의 논평(論評)을 받은 뒤에 김창도가 은화의 문서(文書)를 마감(磨勘)하는 일로써 의막(依幕)에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19일에 또 김시태(金時泰)의 집에 갔으나, 김시태가 있지 않으므로 도로 조송(趙松)의 집에 가서 정우관(鄭宇寬)을 초치(招姪)하였더니, 정우관은 서덕수(徐德修)의 집에 갔으며, 조송이 인하여 정우관이 말을 전하기를, ‘장세상(張世相)이 말하기를, 「수일 안으로 반드시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기다리라.’ 하고 인하여 은자(銀子)를 더 보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인하여 작년 4, 5월 사이에 조송을 송고(松古)의 앞 길에서 만나 보고 인하여 이르기를, ‘요사이 어디에 갔었는가?’고 하자, 조송(趙松)이 이르기를, ‘호동(壺洞)의 장수(將帥)를 위하여 평안 병사를 찾아가서 오래 머물렀다가 왔다.’고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무슨 일로 인하여 갔었는가?’ 하니, 조송이 이르기를, ‘기로소(耆老所)의 공사(公事)를 받아가지고 평안 병사에게 은화(銀貨) 4천 냥을 대출(貸出)하러 정우관·서윤홍(徐允興)과 같은 일로 왕래하였다.’고 한 일이 기억났습니다. 저는 일찍이 이 정상을 아는 까닭에 12월의 일이 발단된 후에 이르러 인하여 조송에게 묻기를, ‘평안 병사의 은자는 지금 어느 곳에 있기에 이때에 쓸 수 없는가?’ 하니, 조송이 이르기를, ‘이 은화는 벌써 전일에 대출(貸出)하여 쓴 물건을 상환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정식(李正植)이 황주성(黃州城)의 역사(役事)를 주관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관서(關西)의 요군목(遼軍木) 20동을 획급(劃給)하고, 황해 병사 또한 쌀 50석과 돈 5백 냥을 주었으나, 이정식(李正植)이 중간에서 많이 소모하였으며, 서덕수(徐德修)가 상처(喪妻)하였을 때에 3백 냥을 주고, 이헌(李瀗)이 귀양갈 때에 1백 냥을 주었다. 이와 같이 다 써버려 이때에 가져다 쓸 수가 없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조송이 이르기를, ‘양주(楊州)에 나가서 이우항(李宇恒)을 만나보면 일을 의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김창집이 조송을 신임하지 않고, 저 또한 김창집의 뜻을 이우항에게 전한 까닭에 조송이 자못 기뻐하지 않는 안색(顔色)이 있었습니다. 김제겸(金濟謙)은 늘 저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을 맡길 만한데, 일찍이 삼목(三木)과 서로 친하여 이 때문에 결점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대개 삼목이란 이삼(李森)의 이름을 파자(破字)한 것이엇습니다. 제가 정우관을 김시태의 좌상(座上)에서 만난 뒤에 김시태가 처음으로 복심(腹心)의 말을 꺼냈습니다.
20일에 장세상이 정우관으로 하여금 전언(傳言)하기를, ‘18일에 박상검(朴尙儉)의 중간에 흉계가 있는 것을 장세상이 거짓말을 하여서 제지하였다. 또 은화 4백여 냥을 썼으니,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처분(處分)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환첩(䆠妾)의 옥사(獄事)가 있었습니다. 23일 귀양갈 때에 정우관에게 부탁(付託)하고서 갔는데, 대개 정우관은 장세상이 친한 홍수(紅袖)438) 의 무리와 서로 통하는 길이 있어 일을 의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시태가 귀양갈 때에 제가 찾아가서 보고, ‘영감(令監)이 간 뒤에 나도 푼전(分錢)도 얻을 만한 길이 없으니, 어떻게 일을 도모하겠는가?’고 물었더니, 김시태가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우항(李宇恒)을 찾아가서 보았는데, 은전(銀錢)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마땅히 징봉(徵捧)439) 하여 쓰라고 하였지만, 수합(收合)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니, 사삼(士三)이 거두었던 황해 병사의 은자(銀子)는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사삼은 김성행(金省行)의 자(字)입니다. 제가 김성행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김시정(金時鼎)으로 하여금 뜻을 전하게 하였는데 또한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송에게 은자(銀子)를 수선해 내도록 독촉하였더니, 조송이 2백 금을 정우관에게서 구해 주었습니다. 이헌(李瀗)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서덕수(徐德修)가 저에게 공이 있다고 한 말은 대개 이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작년 사이에 제가 이우항(李宇恒)을 보고 이르기를, ‘김창도(金昌道)는 사람됨이 허술하니, 어찌 장세상의 집에서 부릴 수 있겠는가?’ 하니, 이우항이 이르기를, ‘이 밖에도 또 사부(士夫)로서 장세상의 집에서 부리는 자가 있으니, 곧 우홍채(禹洪采)이다. 우홍채는 대감(大監) 또한 그 위인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로써 돌아가 김창집에게 전하였더니, 김창집이 이르기를, ‘우홍채가 장세상의 집을 왕래하면서 자못 전한 것이 있으니, 마음이 활달하여짐을 어느 결에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세복(李世福)의 말을 들으면 회금(灰金)은 이숭조(李崇祚)의 아들로 하여금 서찰(書札)을 이홍술 이홍좌(李弘佐)의 의막에 보내어 은화(銀貨) 1백 냥을 찾아갔으니, 대개 전인좌(錢仁佐)·이숭조(李崇祚)·형의빈(邢義賓)·이덕준(李德峻)을 한 번 잡아서 묻는다면, 회금(灰金)이 독약을 쓴 것과 도모(圖謀)한 일을 하나하나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미 서덕수(徐德修)·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정우관(鄭宇寬)의 무리의 말을 듣고 함께 수작(酬酢)하였으니, 역모(逆謀)에 동참(同參)한 죄(罪)가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결안(結案)한 뒤에 다시 추국(推鞫)하니, 공사(供辭)하기를,
"나인(內人)은 다만 수라간(水剌間)의 차지(次知) 김 상궁(金尙宮)만을 알 뿐이고 이밖에는 진실로 들어 아는 일이 없으며, 역관(譯官)은 당초에 고하였던 장가(張歌)는 단지 전해 들었을 뿐 과연 적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원범인(元犯人)을 이제 비로소 사실대로 발고(發告)하겠습니다. 지난해 이이명(李頤命)이 광진(廣津)에서 도성(都城)에 들어왔을 때에 찾아가서 보았더니, 이희지(李喜之)가 그의 집과 절친하였던 역관(譯官) 홍순택(洪舜澤)과 같이 뒷방으로 들어가 밀어(密語)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가 창 밖에서 방에 들어갈 즈음에 몰래 엿들었더니, 홍순택이 이희지에게 이르기를, ‘약값이 부족하므로, 내가 많이 마련하여 첨보(添補)하였습니다.’고 하니, 이희지가 대답하기를, ‘일이 성사(成事)되면 그대가 자비(自備)하였던 값을 어찌 보상하지 않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더니, 이희지는 즉시 그 말을 중지하고 얼굴빛이 흙빛과 같았으며, 홍순택은 저와 서로 아는 사이인데도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곧 일어나서 갔으므로, 제가 그윽이 수상(殊常)하게 여겼습니다. 그 뒤에 김창도(金昌道)를 만나 보았더니, 김창도가 이르기를, ‘서덕수(徐德修)는 진실로 허무(虛無)한 사람이다. 이희지와 동모(同謀)하여 홍가(洪歌)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약을 사서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여보내도록 하였다.’고 하므로, 제가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 연동(蓮洞)에 가서 이희지·홍순택이 약(藥)에 대한 일로 밀어(密語)를 나누는 것을 들었는데, 나는 이희지가 본래 의술(醫術)을 숭상했었으므로, 매약(買藥)하는 말을 한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너의 말을 들어보니, 과연 홍순택이 독약(毒藥)을 사온 것이었던가?’ 하자, 김창도가 이르기를, ‘홍순택은 전부터 이 집에서 덕을 입은 것이 많아서 가장 친밀한 정상을 온 세상이 모두 아는 터이니, 약을 사온 자가 홍순택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며, 이와 같이 수작(酬酢)하였습니다. 금년에 제가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 홍순택이 칙사(勅使)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저를 찾아 왔었습니다. 저에게 교묘하게 제조한 순금 권자(圈子)가 있었는데, 홍순택이 얻고자 하여 같은 고을에 적거(謫居)하는 역관(譯官) 오만창(吳萬昌)으로 하여금 말을 건네게 하고, 그가 또 찾아와서 보았습니다. 말하는 사이에 매약(買藥)한 역관(譯官)을 포청(捕廳)에서 규사(窺伺)한다는 일을 언급하고, 또 이르기를, ‘이 일은 화액(禍厄)이 어느 사람에게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영공(令公)들은 반드시 근심하여 번민할 것입니다.’고 하자, 홍순택은 안색이 변하여 일어나 가면서도 금권(金圈)의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전일에 들었던 것이 어긋나지 않음이 더욱 증험되었습니다."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후경(李厚敬)을 석방(釋放)하였다. 처음에 김성절(金盛節)이 홍순택(洪舜澤)과 면질(面質)한 초사(招辭)로 인하여 나치(拿致)되어, 이이명(李頤命)이 광진(廣津)으로부터 도성(都城)에 들어 올 때에 이희지(李喜之)가 서울에 있었는지의 여부만을 빙문(憑問)하였을 따름이었다.
8월 27일 경진
조진희(趙鎭禧)를 정언(正言)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응교(副應敎)로, 이명의(李明誼)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8월 28일 신사
금부(禁府)에서 이건명(李健命)을 노적(拏籍)하는 일을 계청(啓請)하니,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게 하였다. 영상(領相)과 우상(右相)이 의논하기를,
"이미 역률(逆律)로 정형(正刑)하였으니, 수노 적산(收拏籍産)하는 것은 자연히 차례로 응당 시행하여야 할 일이나, 억견(臆見)으로 천단할 것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하니, 판부(判付)하기를,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8월 29일 임오
형조 판서(典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전(前) 대제학(大提學) 이광좌(李光佐)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이태좌(李台佐)를 좌빈객(左賓客)으로, 김일경(金一鏡)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삼았다.
국청(鞫廳)에서 형의빈(邢義賓) 이언지(李彦之)를 옥(獄)에 가두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실록10권, 경종 2년 1722년 10월 (0) | 2025.10.21 |
|---|---|
| 경종실록9권, 경종 2년 1722년 9월 (0) | 2025.10.21 |
| 경종실록9권, 경종 2년 1722년 7월 (0) | 2025.10.21 |
| 경종실록8권, 경종 2년 1722년 6월 (0) | 2025.10.21 |
| 경종실록8권, 경종 2년 1722년 5월 (0) | 2025.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