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9권, 경종 2년 1722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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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계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존호(尊號)를 대비전(大妃殿)에 올리니,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삼성(三聖)을 받들어 제향을 올리니 남았던 슬픔이 더욱 절실하고, 존호(尊號)를 올리어서 융례(隆禮)를 드리니 구전(舊典)을 준행했도다. 윤발(綸綍)을 백성에게 선포하여 강수(岡壽)를 자천(慈天)에게 비노라. 생각하건대 태모(太母)께서는 온하화고 어짊을 크게 하여 우리 선왕(先王)의 신극(宸極)440)  에 짝하였다. 두 후비(后妃)를 본받아 좇으니 국풍(國風)이 제휴(齊休)함을 기리었고, 은혜가 육궁(六宮)에 미치었으니 가도(家道)를 잡은 것이 진실로 정대(正大)하였다. 20년 동안 교화를 도왔으니, 음교(陰敎)가 천지에 천명하였으며, 3년을 거상(居喪)하니 지극한 행실은 규달(閨闥)에 드러났다. 중월(中月)의 제도를 겨우 끝내고, 동조(東朝)의 예를 존숭히 하였다. 옥간(玉簡)과 금장(金章)을 어찌 그 만분의 하나라도 찬술(撰述)할 수 있겠는가? 청사(靑史)의 동관(彫管)은 영구히 머물러 백천년토록 환양(渙揚)하게 하였다. 이에 사방(四方)에 널리 고하고 아름다움을 온 나라와 함께 경축하였다. 억조창생이 손뼉치고 기뻐하며 어진 은혜를 우러러 고루 즐기었고 이에 사령(赦令)을 반포(頒布)하니, 내 정성을 표하여 기쁨을 기록하노라. 이 달 초1일 새벽 이전부터…… 하노라. 아!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호생(好生)의 마음으로써 어진 은혜를 베풀었고, 효도(孝道)를 미루어 충성(忠誠)으로 옮겼으니, 온 백성에게 지극한 뜻을 본받게 하노라.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하라."
하였는데, 홍문 제학(弘文提學) 김일경(金一鏡)이 지어 바친 것이다.

 

이경열(李景說)을 장령(掌令)으로, 김상규(金尙奎)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睦使) 유준(柳濬)은 사람됨이 욕심이 많고 비루한데다가 수단이 또 교활(狡猾)하여 일찍이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있을 때에 재해를 받은 논밭 8백 결로 사복(私腹)을 채운 일이 작년에 수의(繡衣)441)  의 서계(書啓) 속에 들어 있었으며, 현착(現捉)한 문서(文書)에는 간교한 장물(贓物)이 낭자하였습니다. 그를 상대해서 논의하기에 미쳐 마침 사전(赦典)을 만났으므로, 비록 그 일을 끝까지 캐어 밝힐 수는 없었으나, 남도(南道) 사람들의 원망과 비방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다시 흉년에 수령의 임무를 맡겨 거듭 생민(生民)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요사이 양사(兩司)의 많은 관원이 갑자기 병고(病故)를 핑계하여 계사(啓辭)를 빠뜨리게 되는 일이 많으니, 한심(寒心)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양사의 많은 관리(官吏)로서 공고(公故) 밖에 계사를 빠뜨리는 인원(人員)은 모두 명하여 체차(逓差)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일만 그대로 따랐으며, 현고(現告)한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을 체차(遞差)하였다.

 

9월 2일 갑신

국청(鞫廳)에서 이숭조(李崇祚)를 옥(獄)에 가두었다.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나숭겸(羅崇兼)이라고 이름하는 자가 상소(上疏)하여 신사년442)  의 옥사(獄事)를 번안(翻案)하기를 청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받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서명연(徐命淵)·이명언(李明彦)을 승지(承旨)로, 이거원(李巨源)을 지평(持抨)으로, 조익명(趙翼命)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9월 3일 을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단의 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를 추책(追冊)하니,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과인(寡人)을 진위(震闈)에서 도왔으니, 아름다운 덕행을 추사(追思)하였고, 위호(位號)를 곤극(坤極)에 바르게 하여 마침내 이장(彝章)을 거행하였다. 진실로 나의 회포(懷抱)가 감창(感愴)했는데, 이에 나라의 경사(慶事)를 반포하노라. 생각하건대 내가 어린 나이에 요조(窈窕)한 짝이 있음을 힘입어 고가(故家)의 유규(類規)를 이어받아 좇으며 항상 범칙(範則)을 준수하였다. 영고(寧考)를 노경(老境)에 공손히 섬기어 은덕과 자애를 독실히 받았는데, 어찌 갑자기 선령(仙齡)에 인색함을 뜻했겠는가? 마침내 큰 창업에 같이 하지 못하였음을 차탄(嗟歎)했노라. 상복[苴麻]을 겨우 벗고 삼전(三殿)의 부례(祔禮)를 이미 이루니, 금옥(金玉)이 바야흐로 빛나도다. 양궁(兩宮)의 성대한 의식을 이에 거행하니, 물채(物采)는 청금(靑襟)에 바뀌었고, 예복(禮服)은 황상(黃裳)에 베풀었다. 총총한 누관(樓觀)에서 눈물을 흘렸으니 어찌 내려보고 올려보는 나머지 감회를 견디겠는가? 장추궁(長秋宮)의 자리에 나가 멀고 가까운 이와 더불어 다 아름답게 하였다. 이에 슬픔과 기쁨이 마음속에 교차(交叉)함이 간절하여 옛일을 잊지 못하고, 특별히 은유(恩宥)를 베풀어 백성에게 미치었으니, 다 같이 유신(維新)에 참여하였다. 이달 초3일 새벽 이전에서부터……한다. 아! 효제(孝悌)하고 유순(柔順)했으니 더욱 옛날의 어진 보필을 추억하였고, 자상(慈詳)하고 측달(惻怛)했으니 인하여 오늘의 홍사(洪私)를 추이(推移)하였다.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는데, 홍문 제학(弘文提學) 김일경(金一鏡)이 지어서 바친 것이다.

 

윤행교(尹行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광도(李廣道),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赫) 등의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다. 윤각(尹慤)을 엄형(嚴刑)하여 실정(實情)을 알아내는 일과 각 아문(各衙門)과 여러 궁가(宮家)에 속한 민결(民結)의 면세(免稅)는 원전(元田)의 출세(出稅)에 의거하고, 화전(火田)은 지부(地部)의 정식(定式)에 의하는 일과, 심공(沈珙)을 파직(罷職)하는 일과, 말단(末端)의 일은 모두 그대로 따랐다.

 

9월 4일 병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책봉(冊封)하니,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도(道)는 처음을 시작하는 데서 비롯하여 바야흐로 나라를 다스리는 교화에 힘을 쓰는데, 전례(典禮)를 융성하게 하여 곤위(壼位)에 나아가니, 이에 진책(進冊)하는 의식을 정제(整齊)하고 곧 파고(播告)하는 말을 선포하여 가열(嘉悅)443)  의 뜻을 보이노라. 생각하건대 후비(后妃)는 착한 덕행으로 과인(寡人)의 배필이 되었는데, 정일(靜一)하고 단장(端莊)하니, 육궁(六宮)이 그 아름다운 법칙을 복응(服應)하였고, 화순하며 효제(孝悌)하니 이성(二聖)께서 그 순성(純誠)을 사랑하셨다.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시탕(侍湯)하였고, 몸이 여의도록 슬퍼하며 상담(祥禫)444)  에 예를 다하였다. 좌우에서 협찬하여 삼조(三朝)의 초기부터 시종(始終) 고루 다스렸으니, 백세(白世)의 오랜 세월을 영구히 기대(期待)하였다. 황상(黃裳)은 진실로 착하고, 붉은 병풍[丹扆]은 엄격하게 임하였다. 관저(關雎)의 노래를 일으키어 전형(典刑)을 온 나라에 관람하여 점칠 만하였고, 휘적(翬翟)은 채색을 떨치었으니 어찌 온 나라가 같이하는 경사를 더디게 하겠는가? 연주하는 팔음(八音)의 풍악은 화기를 천지에 인도하였으니, 삼유(三宥)의 은전을 반포하여 신민(臣民)에게 관전(寬典)을 쓰노라. 이 달 초4일 새벽 이전부터…… 한다. 아! 그대는 실가(室家)에 마땅하니 간대(艱大)한 서업(緖業)을 지키었고, 우리 나라를 보존했으니 혜택이 백성에게 끼쳐지도록 하노라.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는데, 홍문 제학(弘文提學) 김일경(金一鏡)이 지어서 바친 것이다.

 

승지(承旨) 김치룡(金致龍)·서명연(徐命淵)·이정제(李廷濟)·이명언(李明彦)이 아뢰기를,
"신 등이 엎드려 전라 감사(全羅監司) 권중경(權重經)의 소(疏)를 보건대 지난번 대각(臺閣)에서 파직(罷職)하기를 계청(啓請)한 데에 대해 발노(發怒)하여 사기(辭氣)가 갑자기 바뀌어 허벽(許璧)의 소장(疏章)을 가지고 천리와 인정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처분(處分)이 이미 엄격한 뒤에 허벽을 편들어 조금도 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이미 지극히 방자합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스스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해연(駭然)합니다. 권중경(權重經)은 선조(先朝)에 득죄(得罪)한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스스로 결백하다는 등의 말을 오늘날 인군에게 아뢰는 말에 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마음을 추구(推究)해 보면 진실로 무엄(無嚴)합니다. 도신(道臣)의 소장(疏章)은 물리칠 수 없으므로 부득이 받아들였지마는, 권중경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광도(李廣道),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김상규(金尙奎),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유명응(柳命凝)은 성질이 본시 유선(柔善)하고 염정(恬靜)하여 여유가 있으나, 재구(才具)가 부족하여 도임(到任)한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도 성적(聲績)이 들리지 않으며, 정사가 많이 해이(解弛)해져 이미 탄압할 희망이 없습니다. 더구나 큰 흉년을 만나 백성의 생계(生計)가 더욱 어려우니, 앞으로 주진(賙賑)하는 책임을 그대로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고 그 대신할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소(李炤)445)  가 연좌(連坐)된 것은 관계가 지극히 중대한데도 특별히 방면(放免)하라는 명이 갑자기 뜻밖에 나왔으니, 다만 왕장(王章)에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석방(釋放)하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소서. 길주 목사(吉州牧使) 경성회(慶聖會)는 위인이 용렬하고 비루한데다가 또 매우 쇠약하고 잔열하나, 흉적(凶賊)에게 아첨하여 대선(臺選)을 차지하려고 꾀하였으니, 물정(物情)이 침을 뱉아 욕설을 한 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처음 정평(定平)에 부임(赴任)하여 한 가지도 잘한 실상이 없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본주(本州)에 차례를 뛰어넘어 제수(除授)받았습니다. 그러나 폐첩(嬖妾)에게 고혹(蠱惑)되어 내아(內衙)에 깊숙이 거처하여 한 번도 백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대소(大小)의 정령(政令)을 오로지 서동생의 손에 내맡겨 두니, 뇌물이 횡행(橫行)하여 폐해를 끼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결단코 변상(邊上)의 중지(重地)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국청(鞫廳)에서 전인좌(錢仁佐)를 옥(獄)에 가두었다.

 

9월 5일 정해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광도(李廣道),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김상규(金尙奎),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조성복(趙聖復)은 지난 겨울에 하나의 상소(上疏)로 감히 제일 먼저 시험해 보는 계책을 삼고,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하였으니, 그 계획적으로 간사한 꾀를 부리고 마음을 쓴 것은 죽여도 모자랄 것입니다. 차자(箚子)로 청한 절목(節目)을 가지고 시험하여 직접 봉행(奉行)하려고 한 것을 살펴보면, 조성복은 진실로 사흉(四凶)의 앞잡이가 됩니다. 또 여러 흉적(凶賊)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심상길(沈尙吉)이 소(疏)를 짓고 장세상(張世相)이 뇌물을 구하여 40금을 부쳐 주었다.’고 한 말을 살펴보면, 조성복은 진실로 장세상 등의 효시(嚆矢)가 됩니다. 그가 현저하게 사흉(四凶)에게 화응하고 몰래 장세상에게 협동하여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전후로 통모(通謀)한 정상은 밝게 드러나서 숨기기 어렵습니다. 그 허수아비가 되고 앞잡이가 됨을 구별(區別)할 수는 없으나, 국문(鞫問)으로 시작하여 천극(栫棘)으로 끝나는 것은 크게 실형(失刑)이 되니, 결단코 감사(減死)하는 데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정의(旌義)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한 죄인 조성복을 다시 국청으로 하여금 나래(拿來)하여 엄중하게 형신(刑訊)하고 구문(究問)하게 해서 시원하게 전형(典型)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9월 6일 무자

간원(諫院)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간원 정언(諫院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홍계적(洪啓迪)의 죄(罪)는 죽음으로도 모자랍니다. 화심(禍心)을 깊이 간직하고 나라에 해독(害毒)을 끼치는 도적이 되어, 진실로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두 역적과 더불어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었습니다. 역적 조성복(趙聖福)의 소장(疏章)이 한 번 올라오자, 천위(天位)가 불안하였고, 종사(宗社)가 망하려고 하여 애통한 마음으로 대신(大臣)에게 도움을 구하였더니, 홍계적(洪啓迪)이 중간에 서서 저지하였으며, 대신이 청대(請對)하여 뜻이 광구(匡救)하는 데 있게 되니, 홍계적이 온갖 계책으로 저해하여 위로 군부(君父)를 조절(操切)하고 아래로 간쟁(諫諍)하는 길을 두색(杜塞)한 것이 하나도 홍계적이며 둘도 홍계적이었습니다. 성교(聖敎) 가운데에, ‘몰래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 [陰懷不測之心]’는 여섯 글자는 이미 이 역적의 정상을 굽어 통촉하신 것이니, 그의 부범(負犯)을 논하면 천극(栫棘)의 형전(刑典)은 오히려 말감(末減)으로 돌아갑니다. 조송(趙松)을 죽일 만하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이미 역적 조송의 초사(招辭)에 나와 낭자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진실로 홍계적이 처음에 역적 내시[逆閹]와 교통하여 폐위와 시해(弑害)를 시행하려고 꾀한 흉모(凶謀)에 참여하여 듣지 않았다면, 조송이 은화를 훔친 것이 저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고 원수처럼 몹시 질시(嫉視)하여 죽이려고 하는 데에 이르렀겠습니까? 곧 이 한 조항으로서도 모역(謀逆)에 정실을 같이한 자취를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衛籬安置)한 죄인 홍계적(洪啓迪)을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나래(拿來)해서 엄중하게 추국(推鞫)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염우(廉隅)란 한 절조는 진신(搢紳)의 대방(大防)이니, 그를 방치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지난번에 신필회(申弼誨)가 이조 판서를 공격하여 내쫓은 것은 과연 사사로운 협잡에서 나왔으니, 대각(臺閣)에서 신필회를 책벌(責罰)한 것과 조정에서 이조 판서를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한 것에서 비록 공의(公議)의 소재(所在)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이조 판서의 직임은 서관(庶官)과 다른데, 자기와 당색(黨色)이 다른 자가 배척한다고 핑계하여 자정(自靖)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있다면 마침내 구차한 데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이조 판서 이조(李肇)를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유준(柳濬)·홍계적(洪啓迪)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9월 7일 기축

국청(鞫廳)에서 이덕준(李德峻)을 옥(獄)에 가두었다.

 

윤행교(尹行敎)·박희진(朴熙晉)을 승지(承旨)로, 김계환(金啓煥)을 수찬(修撰)으로, 송인명(宋寅明)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9월 8일 경인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지평(持平) 김상규(金尙奎)를 체차(遞差)하고, 장령(掌令) 이광도(李廣道)·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을 출사(出仕)하게 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상규는 이미 경상 감사 유명응(柳命凝)을 체차하는 장계에 연명(聯名)하고 인피(引避)하기를,
"물의(物議)를 뒤미쳐 듣건대 모두 말하기를, ‘유명응은 재임(在任)한 지 오래지 않아서 성적(聲績)이 이미 드러났는데, 그 논열(論列)한 바는 진실을 잃었음을 면하지 못하고, 계사(啓司) 가운데에 대신할 이를 가려 뽑으라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대체(大體)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처음에 상세하게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따라서 참여하여 비척(非斥)하여 논의(論議)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발계(發啓)한 이광도(李廣道)와 연참(聯參)한 이거원(李巨源)이 모두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이에 이르러 처치하기를,
"이미 참여하였다가 곧바로 인피하였으니, 마침내 구차한 데에 관계되지만, 소문(所聞)에 따라서 논핵(論劾)한 것은 대체로 잘못이 없습니다. 그 스스로 소란을 일으킨 것이 자신에게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9월 9일 신묘

해가 떠오르자 빛이 붉었으며, 밤에는 번개가 치고 크게 천둥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집의(執義)로, 윤유(尹游)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부제학(副提學) 박필몽(朴弼夢), 사간(司諫) 이세덕(李世德), 장령(掌令) 이광도(李廣道),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이현장(李顯章), 부교리(副校理) 여선장(呂善長)·이명의(李明誼), 부수찬(副修撰) 이승원(李承源) 등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조태채(趙泰采)의 일을 쟁론하여 밤을 새웠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간관(諫官)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권응(權譍)의 일·임방(任埅)의 일·이소(李炤)의 일·경성회(慶聖會)의 일·이조(李肇)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헌관(憲官)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신구(申球)의 일과 유명응(兪命凝)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역적(逆賊) 우홍채(禹洪采)가 복주(伏誅)되었다. 우홍채는 김창집(金昌集)의 친근한 자로서 장세상(張世相)의 집에 사환(使喚)하였다는 말이 이우항(李宇恒)의 말에서 나왔고, 김창집의 말에, ‘우홍채가 장세상의 집을 왕래하며 자못 전한 것이 있으니, 마음이 쾌활함을 어느 결에 깨닫겠다.’는 등의 말이 김성절(金盛節)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처음 초사(招辭)에서 발명한 말이 지극한 피사(詖辭)·둔사(遁辭)였으므로, 재삼 다시 추국(推鞫)하였으나 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마침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세 차례 형문하자 비로소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였는데,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지난해 6월에 김성행(金省行)이 저에게 말하기를, ‘노론(老論)은 천지(天地)와 더불어 무궁한 길이 있으니, 그대는 나와 모름지기 한 곳에 가자.’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누구냐?’ 하니, 김성행이, ‘장 지사(張知事)의 집이다. 국가의 장단(長短)과 흥망(興亡)이 이 환관(宦官)에게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또 그 연유를 물었더니, 김성행이 이르기를, ‘서서히 이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르기를, ‘나보고 찾아가서 보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김성행이 이르기를, ‘나는 재상(宰相)의 자제(子弟)로서 왕래하기 편하지 않으나, 너는 승전색(承傳色)으로서 무인(武人)을 왕래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 너는 출입하는 데 불편하지 않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함께 장세상의 집에 갔더니, 폐의(弊衣)를 입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무인(武人) 같았으며, 또 환자(宦者) 3인이 있었는데 종용(從容)하지 못했습니다. 일어나 올 때에 김성행이 장세상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의 얼굴을 익숙히 보아 두었다가, 뒤에 다시 오거든 잘 대접하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제가 혹 혼자 갔으나 모두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7월 초승에 김성행이 또다시 가서 내간(內間)의 소식을 탐지하도록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이미 나로 하여금 탐지하게 하고는 그 근본의 일을 알지 못하게 하니, 나는 갈 수 없다.’ 하자, 김성행이 이에 이르기를, ‘이기지(李器之)는 그 아비가 화(禍)를 당할까 염려하지만, 궁중(宮中)에서 독약을 쓴 일이 있음을 나도 또한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러한 흉악한 말을 하는가?’ 하니, 김성행이 부도(不道)한 말로써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인하여 장세상의 집에 가서 차마 직접 독약을 쓴 일에 대해 묻지 못하고, 다만 묻기를, ‘내가 사삼(士三)446)  의 말을 들어서 아는데, 내간(內間)의 일은 요사이 다시 어떠한가?’ 하니, 장세상이 이르기를, ‘내간의 일은 벌써 정제(整齊)되었으니 모름지기 염려하지 말고, 외간(外間)의 일이나 잘하는 것이 마땅하다. 양국(兩局)의 대장(大將)을 반드시 우리 사람으로 삼은 후에야 비록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근심이 없을 것이다. 훈장(訓將)은 진실로 좋으나 어장(御將) 또한 모름지기 사람을 얻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제가 돌아와 김성행에게 전하였더니, 김성행이 이르기를, ‘어장(御將)을 마땅히 탄핵(彈劾)하여 체차(遞差)하도록 도모(圖謀)하겠다.’ 하였으니, 대저 그 뜻은 오로지 이우항(李宇恒)에게 있었습니다.
5, 6일 뒤에 다시 김성행을 보고 물었더니, 김성행이 이르기를, ‘그를 탄핵하여 체차하기를 의논하였더니, 불가(不可)하다고 하므로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공사(公事)로 인하여 황혼(黃昏)을 당하여 나아갔더니, 김창집(金昌集)이 이르기를, ‘낭청(郞廳)이 누구냐?’ 하더니, 저임을 알고서 불러 들였습니다. 김창집이 홀로 누워 있다가 말하기를, ‘들으니 그대가 장세상의 집을 왕래하였다는데, 그러하냐?’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사삼(士三)이 스스로 가기 어렵다 하며 저에게 가서 묻도록 하였으므로, 과연 갔었습니다.’ 하였습니다. 김창집이 이르기를, ‘장세상이 무어라고 하던가?’ 하므로, 제가, ‘내간(內間)의 일은 벌써 정제(整齊)되었으니, 외간(外間)의 일이나 잘하라.’고 한 말을 전하였더니, 김창집이 〈듣고〉 웃었는데 그 뒤에 어장(御將)이 과연 체차(遞差)되었습니다. 김성행의 말을 들으니 김창집은 반드시 이우항(李宇恒)으로 그를 대신하려고 하였는데, 이건명(李健命)이 지난(持難)하므로 여의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김창집의 집에 갔더니, 김창집이 이르기를, ‘요즘음에 또 장세상을 찾아가서 보았더냐?’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장세상이 입번(入番)하여 찾아가 보지 못하였고, 다만 조송(趙松)이 전한 장세상의 말을 들으면 내사(內事)는 이미 근심이 없으니, 비록 탄박(彈駁)이 있더라도 나가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김창집이 또 웃었으니, 김창집의 마음이 쾌활하다고 한 말은 대저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루는 조송을 보았더니, 말하기를, ‘전포(錢布)가 부족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이 보장(報狀)을 내어 보이라.’ 하고, 소찰(小札)을 아노(兒奴)로 하여금 한 곳에 보내어 보장을 가지고 오게 하였습니다. 제가 보았더니 바로 황해 병사(黃海兵使) 유성추(柳星樞)가 성역(城役) 때문에 포목(布木) 20동과 쌀 수백 석을 얻기를 청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김창집의 집에 갔으나, 김창집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제가 김성행에게 말하고서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김성행이 저를 불러서 그 보장(報狀)을 가지고 가서 제사(題辭)를 받도록 하였는데, 김창집이 이르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는 이미 회감(會減)한 것이 많은데, 또 어디에 쓰려고 이를 얻기를 청하였느냐?’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사삼(士三)의 말을 들으면 쓸 곳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김창집이 즉시 허제(許題)하였으니, 김성행이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堂上)에게 회시(回示)하지 말고 조송에게 직접 주도록 하였습니다. 금년 2월에 김창도가 저를 재령(載寧)에 와서 보고 이르기를, ‘김시태(金時泰)·김시정(金時鼎)이 바야흐로 환국(換國)하기를 도모(圖謀)하지만, 가진 물건이 없어서 비록 진곡(賑穀)을 팔더라도 반드시 서로 도와야 한다.’ 하고 김시정(金時鼎)의 소찰(小札)을 전해 주기에 뜯어보았더니, 첫 머리에 비록 상면(相面)하지는 않았더라도 지기(志氣)가 상합(相合)하다는 뜻을 말하였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의 구전(口傳)에 의하여 잘 도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진곡(賑穀) 밖에는 달리 추이(推移)할 길이 없음을 말하니, 김창도(金昌道)가 이르기를, ‘만약 감영(監營)에서 획급(劃給)하는 것이 있으면 그대는 마땅히 내주겠는가?’ 하므로, 제가 이르기를, ‘만약 영문(營門)의 명령이 있으면 어찌 거행(擧行)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뒤에 감영(監營)의 관문(關門)이 과연 도착하여 안악(安岳)의 쌀 5, 60석을 사용한 뒤에 본군(本郡)에 이록(移錄)하도록 하였으니, 받은 사람과 쓴 곳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는데, 그 관문(關文)이 반드시 재령군(載寧郡)에 있을 것이니, 상고하여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미 김성행과 장세상의 집을 왕래하며 독약을 쓴 일을 탐지(探知)하였으니, 모역(謀逆)에 동참(同參)한 것이 적실(的實)함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9월 10일 임진

국청(鞫廳)의 대신(大臣) 이하가 청대(請對)하니, 양사(兩司)에서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수라간(水剌間)의 나인[內人]을 조사해 내는 일을 의계(議啓)한 바가 있는데, 비답(批答) 가운데에 수라간에는 김성(金姓)의 짝 정이(貞伊)가 없으니, 김성은 이제 물을 만한 단서가 없다고 하교(下敎)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종묘(宗廟)를 받들고 아래로 억조 생령(億兆生靈)의 주인이 되시니, 만약 하나의 요악(妖惡)하고 불령(不逞)한 무리가 있어 흉계를 도모(圖謀)하여 좌우(左右)의 근밀(近密)한 곳에 엎드려 있는 데 이르면, 그 화변(禍變)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날짜가 이미 드러나 있고 이것은 지난해 12월 14일이 명백하니, 그날에 수라간(水剌間)의 나인[內人]을 모두 국청(鞫廳)에 보내어 명확하게 정범(正犯)을 핵실(覈實)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은 이를 위하여 청대(請對)하였습니다."
하고, 판의금(判義禁) 이광좌(李光佐)는 이르기를,
"이제 이 역변(逆變)은 전고(前古)에 없었던 것으로서, 천지(天地) 사이에 마음이 놀라고 뼈가 아픈 변고이니, 어찌 독약을 쓰는 것과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신 등이 다시 역적(逆賊)의 초사(招辭)를 상고해 보니, 필정(弼貞)이 김 상궁(金尙宮)이 아닌 것은 하나의 명확한 증험(證驗)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김성절(金盛節)의 초사(招辭)에 이미 이르기를, ‘김 상궁(金尙宮)으로 인하여 독약을 썼다.’ 하였고, 또 아래 조항에 필정(弼貞)이라고 한 일이 있으니, 명확히 이는 두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수라간 나인[水剌間內人]을 기록한 적기(籍記)를 가져다가 이른바 김 상궁이라는 하나를 지적(指摘)하여 처분(處分)하면 죄인(罪人)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동의금(同義禁)        김시환(金始煥) 이하가 서로 잇따라 말하고, 양사(兩司)와 승지(承旨)가 또 잇따라 진달하니, 임금이 묵연(默然)히 오래 있다가, 최석항과 이광좌가 또 반복(反覆)하여 진달하자, 임금이 이에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니,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재배(再拜)하였다. 이광좌가 인하여 진언(進言)하기를,
"폐장(閉藏)하는 달에 뇌변(雷變)이 예사롭지 않은데, 인사(人事)에 무슨 잘못한 것이 있어서 하늘의 경계가 이와 같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개기(改紀)하신 지 벌써 10개월이 되었으나, 모든 일을 도모한 것이 전보다 크게 다름이 없어 혜택이 아래에 내리지 않았으니, 민생(民生)의 원망과 탄식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국저(國儲)가 애통(哀痛)하여 황정(荒政)을 어찌할 줄 모르지만, 호조(戶曹)·병조(兵曹)와 선혜청(宣惠廳)이 모두 완전히 비었으므로, 사가(私家)에서는 동(東)에서 빌리고 서(西)에서 구걸하여 조석(朝夕)을 구차하게 보내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두려워하여 진작(振作)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비록 신 등이라도 만약 경책(警責)하지 않는다면, 태만(怠慢)한 마음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하였다. 최석항이 이르기를,
"하늘과 사람의 사이는 멀지 않으니, 재구(災咎)가 오는 것은 반드시 초래하는 바가 있습니다. 금년의 한황(旱荒)은 전국이 똑같은데, 호조(戶曹)의 재정(財政)이 텅비어서 주진(賙賑)할 계책이 없습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나라에 3년 동안 지탱할 저축(儲蓄)이 없으면, 나라는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 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3년의 결핍(缺乏)뿐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과 옛것을 서로 잇대는 것도 또 미칠 수가 없으니, 이때를 당하여 어찌 한결같이 옛것만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수령(守令)을 선택하는 것 외에 다른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생민(生民)의 고락(苦樂)은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데에 매었고, 수령의 출척(黜陟)은 도신(道臣)에게 있으니, 만약 전조(銓曹)를 엄격하게 신칙하여 각별히 선택하여서 차임(差任)하는 것도 또한 백성을 구제(救濟)하는 근본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삼가 보건대 선조(先朝)에서는 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시면 늘 백성의 고통을 진휼하고 관사(官事)에 마음을 다하라는 뜻을 곡진하게 하교(下敎)하시었으며, 감사(監司)가 하직(下直)할 때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인대(引對)하시고 간곡하게 경칙(警飭)하시니, 제신(諸臣)이 감동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각자가 면계(勉戒)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조(先朝)께서 이미 거행하신 전례에 의하여 모든 감사(監司)·수령(守令)이 하직(下直)하거나 다시 내려갈 때에는 반드시 모두 인견하시고 면유(面諭)하여서 보내면 그 공효가 아마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응하지 않으니, 대신(大臣) 이하가 물러나 엎드렸다.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 정언(正言)        조익명(趙翼命)이 합계(合啓)를 진주(進奏)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으며, 장령(掌令)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창언(金昌彦)은 김창집(金昌集)의 서종(庶從)으로서 그의 복심(腹心)이 되어 흉모(凶謀)에 참여하여 안 정상이 여러 역적(逆賊)들의 공초(供招)에 드러났습니다. 김성절(金盛節)의 결안(結案)한 공초를 가지고 말하면, 김창언이 김창도(金昌道)·우홍채(禹洪采)로 하여금 역적(逆賊) 김창집(金昌集)을 위하여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어가게 한 말이 낭자(狼藉)할 뿐만 아니라, 곧 이 한 조항은 김창언이 역엄(逆閹)과 체결하여 불궤(不軌)를 공모(共謀)한 정상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공초(供招)한 것을 보더라도 이미 이르기를, ‘김창도(金昌道)는 바로 이우항(李宇恒)의 복심(腹心)으로서, 안으로는 장세상(張世相)과 체결하고 밖으로는 이우항과 연결하여 김행(金省行) 이하를 노예(奴隷)와 같이 사환(使喚)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김창도가 독약을 쓴 일을 주장(主掌)한 사람이다.’ 하였는데, 만일 김창언(金昌彦)으로 하여금 처음에 정실을 함께 한 일이 없었다면 이러한 음흉한 정절(情節)을 어찌 이와 같이 낱낱이 상세하게 알았겠습니까? 그가 비록 이르기를, ‘단지 김창도의 결안(結案)으로써 알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절대 사리가 맞지 않습니다. 그 흉역(凶逆)한 무리와 협동하여 삼수(三手)의 계책을 시행하고자 꾀한 것이 절절이 탄로(綻露)되어 하나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청컨대 엄중하게 형문(刑問)하여 시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납(獻納)·정언(正言)이 전계(前啓)를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김치룡(金致龍)·박희진(朴熙晉)·윤행교(尹行敎)·이명언(李明彦) 등이 뇌변(雷變)으로써 아뢰기를,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어젯밤에 뇌변(雷變)이 예사롭지 아니하여 수성(收聲)하는 철에 갑자기 일어나 요란하게 울리고 번쩍번쩍 빛나며 성하(盛夏)와 다름이 없었으니, 신 등은 머리를 모아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나, 그 소이(所以)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방금 성명(聖明)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며 치리(治理)를 유신(維新)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음진(陰沴)이 물러가고 휴상(休祥)이 저절로 이르러야 할 것이나, 진혁(震虩)한 재앙(災殃)이 이와 같음은 두려워할 만합니다. 변괴(變怪)는 헛되어 일어나지 않으니 또한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된 것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겠습니까? 적이 보건대 전하께서 등극(登極)하신 처음에 군흉(群凶)이 조정(朝廷)에 포열(布列)해서 방자(放恣)하여 거리낌이 없었는데, 전하께서는 신통한 무덕(武德)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 저절로 쓰러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이미 정상(情狀)을 모두 알아내어 공손히 천토(天討)를 거행하고 옛사람을 불러 거두시었으니, 이는 진실로 군신(君臣) 상하가 정백(精白)한 한 마음으로써 밤낮으로 칙려(勅勵)하고 서로 경계(警戒)하여 일월(日月)같이 밝은 덕(德)을 펴서 아름다움을 짝하는 성대함을 이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다시 전궤(前軌)를 따라서 하루 걸러 소대(召對)하여 토론(討論)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소장(疏章)을 주독(奏讀)해도 비지(批旨)를 내리지 않으시고, 보상(輔相)과 유현(儒賢)을 돈소(敦召)하는 예를 빠뜨리셨으며, 사폐(辭陛)하는 수령 또한 대하여 신칙(申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팔도에 똑같이 흉년(凶年)이 들어 백성의 생명이 거의 죽게 되어 나라의 근본이 무너지려 하니, 애통(哀痛)한 윤음(綸音)과 은휼(隱恤)의 정사를 조석(朝夕)으로 거행하여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이를 구제하는 데 겨를하지 못하는 것과 같음이 있어야 마땅할 것인데, 아직도 민민(泯泯)하여 거의 서로 잊은 것과 같으니, 신 등은 성의(聖意)가 어디에 계시어서 인순(因循)하고 공묵(恭默)하여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천지(天地)가 교합(交合)한 후에야만 물이 이루어지고, 상하(上下)가 교합한 후에야 온갖 일이 이루어집니다. 군신(君臣)의 사이는 부자(父子)와 같고, 한 나라의 안은 한 집과 같으니, 부자 사이가 화흡(和洽)하면 집안이 복(福)되고, 군신 사이가 소융(昭融)하면 나라가 상서(祥瑞)롭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이후로부터 깊이 성려(聖慮)를 더하여 상하의 사이에 특별히 교부(交孚)하는 의리를 살피시어 소대(召對)하고, 입시(入侍)하는 즈음에 강확(講確)한 윤음(綸音)을 밝게 내리시고, 소장(疏章)을 계달(啓達)한 뒤에는 즉시 따르고 따르지 않는다는 교시(敎示)를 보이시고, 물러가 쉬고 있는 보상(輔相)과 세속을 떠나 은거하고 있는 유현(儒賢)을 특별히 정성과 예절을 다하여 반드시 초치(招致)할 것을 기필하소서. 구황(救荒)하고 휼민(恤民)하는 계책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일일이 진거(振擧)하여 온 나라의 백성으로 하여금 흉역(凶逆)을 소제(掃除)한 뒤에 다시 변혁(變革)하는 도리를 시작하여 전보다 판이(判異)함을 환히 알게 한다면, 재앙(災殃)이 바뀌어 상서(祥瑞)가 되는 아름다움이 이에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이 외람되게 근밀(近密)한 반열(班列)에 있어 감히 마음속의 정성을 다하니,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재구(災咎)가 예사롭지 않아서 근심하고 두려움이 바야흐로 깊은데, 그대들의 진계(陳戒)가 몹시 간절하니, 유심(留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1일 계사

이광좌(李光佐)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조(李肇)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정제(李廷濟)를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삼았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정석오(鄭錫五),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엄격하게 과조(科條)를 정하여 제도(諸道)의 영문(營門)에서 요리(料理)하는 폐단을 각별히 금단(禁斷)하고 드러나는 대로 논죄(論罪)하되, 염문(廉問)하는 서계(書啓) 가운데에 첨입(添入)하여서 생민(生民)의 해를 제거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엎드려 영남 유생(嶺南儒生) 이덕표(李德標) 등의 상소를 보건대 소(疏) 가운데 대의(大意)는 허벽(許壁)·이삼령(李三齡) 등의 상소와 똑같지만 쓴 말이 위험하기는 허벽과 이삼령보다 갑절이나 됩니다. 또 아래 조항에는 역적을 치죄(治罪)한 일을 첨입(添入)하여 두 대신(大臣)을 몰아세워 배척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흉참(凶憯)합니다. 그 꾸며낸 뜻을 보건대 오로지 조정을 구함(構陷)하는 계책에서 나왔으니,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진실로 위태하고 두렵습니다. 지난번 이삼령과 나숭겸(羅崇謙)의 소장(疏章)을 이미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이 소장도 진실로 전에 하교하신 바에 의하여 도로 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본원(本院)을 침욕(侵辱)함이 한정(限定)이 없으므로 또한 감히 원중(院中)에서 직접 내어 주지 못하겠습니다. 어찌해야 할는지 감히 계품(啓稟)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9월 12일 갑오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정석오(鄭錫五),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고(故) 승지(承旨) 김보택(金普澤)은 김춘택(金春澤)의 아우이고, 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의 형(兄)이며, 또 조사명(趙師命)의 사위[婿]입니다. 음흉(陰凶)하고 비특(奰慝)함이 바로 그 기량(伎倆)인데, 집을 흉하게 하고 나라를 해치는 악당이 한 가문(家門)에 모여있으니, 그가 집에서 편안히 죽을 수 있는 것만도 또한 다행이었습니다. 이러한 군흉(群凶)은 모두 제거하여야 마땅하니, 조정이 청명(淸明)한 날을 당하여 이와 같이 흉측하고 사악한 괴수(魁首)를 추후하여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월 10일 뒤에 스스로 좋은 도리(道理)가 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 아내의 언문 편지에서 드러나서 국안(鞫安)에 밝게 등재(登載)하였으며, 그 일의 정상(情狀)이 탄로(綻露)된 뒤에 미쳐서는 그의 아내가 마침내 멸구지책(滅口之策)으로서 자결(自決)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아!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을 비록 무식한 부녀(婦女)라 하더라도 또한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가 이와 같이 명확하게 말하였으니, 김보택이 평소에 흉도(凶道)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화기(禍機)를 빚어낸 정상(情狀)을 적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토죄(討罪)하는 도리에 있어 이미 죽었다 하여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소서.
복법(伏法)된 죄인(罪人) 우홍채(禹洪采)의 결안(結案)한 초사(招辭)를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이르기를, ‘김시태(金時泰)·김시정(金時鼎)의 형제가 바야흐로 환국(換局)을 도모(圖謀)하였으나, 가진 물건이 없어서 김창도(金昌道)로 하여금 서찰(書札)을 가지고 우홍채(禹洪采)에게 도움을 구하니, 「저는 진곡(賑穀) 밖에는 달리 추이(推移)할 길이 없다. 만약 영문(營門)에서 획급(劃給)하라는 명령이 있으면 어찌 봉행(奉行)하지 않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김창도와 수작(酬酢)한 뒤에 과연 영문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안악(安岳)의 쌀 5, 60석을 내어 쓴 뒤에 본군(本郡)에 추이(推移)하였다.’라는 말이 낭자(狼藉)할 뿐만 아닙니다. 비록 황해 병사의 미포(米布)의 일로써 보더라도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우홍채(禹洪采)가 김성행(金省行)이 쓸 곳이 있다는 말을 직고(直告)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제급(題給)하였다고 하니, 이제 이 안악(安岳)의 쌀 5, 60석을 도신(道臣)이 무단히 획급(劃給)한 것은 그 사이의 정적(情跡)이 매우 의심할 만합니다. 청컨대 그 당시의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유경(金有慶)을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나국(拿鞫)하여 엄문(嚴問)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봉산 군수(鳳山郡守) 양빈(梁彬)은 본시 흉적(凶賊)의 사인(私人)으로서 추천받아 외람되게 명읍(名邑)에 제수받았습니다. 지난번에 죄인(罪人) 김운택(金雲澤) 형제가 서관(西關)447)  에 귀양갔을 적에 많은 은전(銀錢)을 가지고 그의 일가로 하여금 중로(中路)에서 주게 하였고, 또 김용택(金龍澤)의 재산(財産)을 적몰(籍沒)할 때에 본군(本郡)에 있는 전답(田畓)을 처음에는 몰수(沒數)하여 타량(打量)하였다가, 도리어 역가(逆家)의 사사로운 청탁을 들어주어 태반(太半)을 덜어버리고 상사(上司)에 거짓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낭자(狼藉)하게 이르는 뒤에 미쳐서는 자취를 엄폐(掩蔽)하는 계책을 삼고자 하여 역적 이이명(李頤命)의 집 물건이라고 일컬었다가 추후(追後)에 드러났으니, 흉당(凶黨)과 체결(締結)하여 정적(情跡)을 주무(綢繆)하여 간곡히 보호하는 데 마음을 써서 나라를 속이고 환롱(幻弄)한 죄(罪)가 아주 절통(絶痛)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세복(李世福)을 금부(禁府)에서 결장(決杖)하여 유배(流配)하였다. 이세복은 조송(趙松)의 생질(甥姪)이며, 이홍술(李弘術)과는 삼촌 숙질(三寸叔姪)이 된다. 그 사이에 두 번째 형문(刑問)을 받으며 곤장 6도(度)만에 바른 대로 공초(供招)하기를,
"지친(至親)인 까닭에 그 맡겼던 은자(銀子)를 전하여 줄 즈음에 과연 사환(使喚)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 24일과 25일 사이에 이명좌(李明佐)가 벽장(壁莊)에서 은화(銀貨) 2백 냥을 내어 그의 종 구음법응(九音法應)에게 봉하여 주고, 또 저로 하여금 데리고 가게 하면서 저에게 말하기를, ‘육현(陸玄)의 일은 이제 장차 현덕명(玄德明)을 잡아서 묻는다고 하는데, 잡언(雜言)의 폐해가 있을까 두려우니, 너는 이 은화(銀貨)를 너의 외숙(外叔)에게 전해 주고, 현덕명에게 뇌물(賂物)을 주어 꾀어내도록 하라.’고 하므로, 제가 과연 그 말에 의하여 그 은화(銀貨)를 조송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금년 4월 이후에 적삼촌(嫡三寸)이 국청(鞫廳)에 옮겨 갇혔으므로 제가 이명좌와 연결하여 같이 의막(依幕)에 갔더니, 그때에 장세상이 바야흐로 국청에 들어갔었습니다. 이명좌가 마음으로 그윽이 근심하여 저에게 말하기를, ‘지난번에 너로 하여금 조송에게 전하게 한 은자(銀子)는 현덕명에게 보낸 물건이 아니고, 그 실제로는 장세상에게 들여 보낸 것이다.’ 하였는데, 이 일은 대개 종조(從祖)를 위하여 앙화(殃禍)를 늦추려는 계책으로서, 내간(內間)에서 주선(周旋)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시사(時事)에도 또한 대답한 바가 없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이제 국옥(鞫獄)이 바야흐로 벌어져 혹 드러날 단서가 없지 않으니, 진실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제가 전에 가져갔던 은자(銀子)가 과연 장세상에게 쓴 것임을 비로소 알았으니, 교통하며 정상(情狀)을 알았던 죄(罪)를 지만(遲晩)합니다."
하니, 1등을 감하여 장(杖) 1백에 유(流) 3천 리에 처하였다.

 

9월 13일 을미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으며,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첨사(僉使) 이명룡(李命龍)은 역적 김창집의 처당(妻黨)의 지친(至親)으로서, 그의 양육을 받고 심복이 되어 크고 작은 모계(謀計)에 은밀하게 돕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주무(綢繆)하여 정적(情跡)이 궤비(詭丕)한데, 세도(勢道)를 부려 관직(官職)을 팔아 크게 뇌유(賂遺)하는 길을 여니, 무뢰(無賴)한 무리가 그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곤수(閫帥)와 수령(守令)은 모두 정한 값이 있어서 뇌물을 실어 보내는 수레가 끊이지를 않았는데, 사용처(使用處)가 음회(陰晦)하니,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소문(所聞)이 자자(藉藉)한 지 진실로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무릇 역적 김창집의 일이 패망(敗亡)한 뒤에 미쳐서는 그가 감히 작년 납월(臘月)에 진신(搢紳)의 상소(上疏)가 장차 일어날 즈음에, ‘만약 내 말을 채용(採用)하여 소두(疏頭)를 박살(撲殺)하였으면 어찌 오늘날의 화(禍)가 있었겠느냐?’는 등의 말을 방자하게 창도(倡道)하였고, 또 이번의 국옥(鞫獄)을 가지고 역적(逆賊)을 쳐서 옥사(獄事)를 이루었다고 하면서 조신(朝紳)을 일일이 꼽아가며 온갖 말로 헐뜯었으며, 국가를 몹시 원망함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극히 흉악한 무리는 결단코 하루라도 도성(都城)에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전 첨사(僉使) 이명룡(李命龍)을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안성 군수(安城郡守) 조수(趙修)는 본시 외람되고 교활한 성품으로 권흉(勸兇)의 집에 붙좇아 의탁하여 일찍이 철원 부사(鐵原府使)가 되었는데, 그때 이전미(移轉米)를 봉납(捧納)하지 않은 일로 경사(京司)에서 파직(罷職)하여 나국(拿鞫)하기를 계청(啓請)하자, 그는 바로 경리청(經理廳)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은밀하게 부탁하여 천여 관의 전문(錢文)을 받아내어 경사(京司)에 비납(備納)하고, 인하여 그 당시의 수상(首相)인 김창집(金昌集)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인 민진후(閔鎭厚)에게 요구하여 탑전(榻前)에 속이어 아뢰기를, ‘조수(趙修)는 본래 잘 다스리는 수령(守令)인데, 이제 이러한 나국(拿鞫)하고 파직(罷職)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그 부모(父母)를 잃은 것처럼 여기고 남녀가 모두 날라서 이제 모두 납부하였으니, 나문(拿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방자하게 엄복(掩覆)하고는 잉임(仍任)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정상이 진실로 가증스럽습니다. 본군(本郡)에 제수(除授)되자, 임소(任所)에 있는 날은 매우 적고 오랜 동안 서울에 체류(滯留)하며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두 흉적(兇賊)의 사이에 왕래(往來)하였는데, 매양 군(群)에서 상경(上京)할 때에는 그의 행동거지가 사람의 이목(耳目)에 번거로움을 혐의스럽게 여겨 큰 길로 다니지 않고 문득 산길을 따라서 종적(蹤跡)이 궤비(詭秘)하니,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였습니다. 또 이건명(李健命)을 위하여 그는 스스로 읍내(邑內)의 동편 멀지 않은 자리에 산을 점거하고는 관아에서 값을 주고 산을 산 문권(文券)을 만들어 이건명에게 바쳤으니, 온 고을 사람으로서 알지 못하는 이가 없습니다. 지난 겨울 개기(改紀)한 뒤에 사흉(四凶)이 합계(合啓)한 보고를 듣고는 바로 감히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창언(倡言)하기를, ‘제가 바야흐로 다른 사람을 안율(按律)하였으니, 다른 사람 또한 안율(按律)할 것이다.’ 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후욕(詬辱)하며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리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불법(不法)하고 음비(陰鄙)한 무리는 결단코 자목(字牧)의 직임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안성 군수(安城郡守) 조수(趙修)를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9월 14일 병신

부제학(副提學) 박필몽(朴弼夢),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 지평(持平) 정석오(鄭錫五)·이거원(李巨源),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 정언(正言) 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이현장(李顯章), 부교리(副校理) 여선장(呂善長)·이명의(李明誼), 부수찬(副修撰) 이승원(李承源)·윤유(尹游) 등이 청대(請對)하고, 승지(承旨) 이명언(李明彦)이 입시(入侍)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조태채(趙泰采)의 일로써 반복(反覆)하여 쟁간(爭諫)하니, 임금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박필몽이 분연히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이 역적을 오래 머물러 두어 주살하지 않으시는데, 오늘날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이미 풍습(風習)을 이루었습니다. 신은 이 습관이 끝내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하니, 이명언은 이르기를,
"박필몽의 말은 격렬함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역적(逆賊)을 토죄(討罪)하는 대의(大義)를 지금 사람들이 어찌 모두 알지 못해서 갑자기 풍습(風習)을 이루겠습니까?"
하였다. 박필몽이 이르기를,
"이명언의 말은 잘못 되었습니다. 지난번 2품 이상이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제신(諸臣)이 진달(陳達)한 것은 모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두 역적과 이건명(李健命)의 일만을 논하였을 따름이고, 조태채(趙泰采)에 이르러서는 전혀 한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대저 풍습(風習)은 난적(亂賊)에 대해 결정하지 못한 채 일을 삼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분완(憤惋)하였습니다."
하니, 조익명이 이르기를,
"박필몽의 말은 충분(忠憤)에 격동되어 난역(亂逆)에 대해 고식책(姑息策)만 쓰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고, 이명언은 그 말을 혼동(渾同)하여 역적을 비호하는 죄과에 돌아갈까 두려워한 까닭에 이와 같이 쟁난(爭難)한 것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난적(亂賊)의 죄(罪)를 흔쾌하게 바로잡으신다면, 비록 박필몽의 말과 같이 풍습(風習)이 이미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경열(李景說)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청(鞫廳)에서 물고(物故)된 죄인 이만성(李晩成)은 경폐(經斃)됨으로 인하여 음흉(陰凶)한 정절(情節)을 마침내 끝까지 알아내지 못하였는데, 그가 장수를 바꾸려는 모의에 간여한 것이 여러 적(賊)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버렸어야 하고, 친척(親戚)도 마땅히 절연(絶緣)하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은 한갓 세속에서 좋아하는 사정(私情)에 이끌려 바로 이만성의 시신(屍身)을 둔 곳에 몸소 가서 조곡(弔哭)하여 천명(天命)에 따라 죽은 사람같이 보았으니, 듣는 자가 해이(駭異)하게 여겼습니다. 공의(公議)를 막기 어려우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거원(李巨源)이 나아가 복주(伏奏)하기를,
"오늘 김연(金演)의 파직(罷職)을 청하는 일을 발계(發啓)하였는데, 신이 자구(字句)의 사이에 경중(輕重)을 참량(參量)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논박(論駁)하여 체차(遞差)하라는 말이 요석(僚席)에서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신을 경시(輕視)하여 그러한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체직(遞職)해 주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사직(辭職)하지 말라."
하였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정석오(鄭錫五)가 모두 인혐(引嫌)하고 물러갔는데, 이거원(李巨源)의 말로 인해서였다. 윤성시(尹聖時)가 전계(前啓)했던 이상(李翔)의 일을 주달하였는데, 임금이 미처 발락(發落)하기 전에 윤성시가 이르기를,
"이상이 음옥(淫獄)에 간증(干證)한 정상(情狀)이 그 당시의 추안(推案)에 밝게 실려 있으나, 다만 문족(門族)이 강대(强大)함으로 인하여 가히 신설(伸雪)하기를 청하였으니, 이 장계(狀啓)는 즉시 윤종(允從)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곧 잠자코 있는데, 승지(承旨)가 발락(發落)을 청문(請聞)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는 너무 지리(支離)하다.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를 우선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이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承旨) 이명언을 먼저 파직(罷職)하라."
하자, 이명언이 총총 걸음으로 물러 나갔다. 박필몽(朴弼夢)이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전에 없던 지나친 거동을 하십니까? 대간(臺諫)이 논계(論啓)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직분입니다. 어찌 지리(支離)하다 하여 견책하여 파직할 수 있겠습니까? 승선(承宣)의 신하가 군부(君父)의 과거(過擧)를 직접 보고서 감히 작환(繳還)하는 의리를 본받았는데, 더구나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환수(還收)하소서."
하자,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군부(君父)는 미안(未安)한 마음이 있더라도 함묵(含嘿)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가? 부제학(副提學)은 소견(所見)을 대답하라."
하였다. 박필몽이 이르기를,
"옛 인군(仁君)은 땀이 흘러 용삼(龍衫)을 적시었으나, 싫증이 나서 피로한 것을 알지 못한 이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도 바로 지리(支離)하다 하여 대각(臺閣)을 체차하시고, 또 특별히 환수(還收)하기를 청한 승지(承旨)를 파직하셨으니, 전하(殿下)의 이 거조(擧措)는 대단히 지나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부제학(副提學) 박필몽(朴弼夢)을 우선 파직(罷職)하라."
하니, 박필몽이 총총 걸음으로 물러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체(事體)가 무엄(無嚴)하다."
하였다. 이명의(李明誼)가 이르기를,
"옛날에는 인신(人臣)으로서 견거(牽裾)448)  하고 절함(折檻)449)  한 자 또한 있었습니다. 오늘 세 신하의 일은 무슨 죄줄 만한 단서가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殿下)의 희로(喜怒)가 중도(中道)를 잃으셨으므로, 근심하여 감히 진달(陳達)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세 신하를 체파(遞罷)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명의가 영구(營救)하는 것은 지극히 무엄(無嚴)하다."
하였다. 이명의가 이르기를,
"인군에게 책난(責難)하는 것은 공손하다고 하는데, 이것을 어찌 영구(營救)라고 하십니까? 신의 경악(經幄)에 대죄(待罪)하면서 전하로 하여금 이러한 과거(過擧)가 있게 하였으니, 신 등의 죄(罪)입니다. 대간(臺諫)은 언책(言責)으로 자임(自任)하고, 경악(經幄)은 논사(論思)를 관장하고, 후사(喉司)는 출납(出納)을 맡았으니, 이제 이 세 신하가 진달한 것은 모두 그 직분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청컨대 신 등의 직책을 파면하고 세 신하를 체파(遞罷)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제신(諸臣)이 서로 이어서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다. 기사관(記事官) 송인명(宋寅明)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이란 인주(人主)의 언동(言動)을 써서 후세(後世)에 전하는 자입니다. 이제 전하의 이 거조(擧措)를 사책(史冊)에 쓴다면 후세에서 장차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승지(承旨) 윤행교(尹行敎)도 추후로 입시(入侍)하여 또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조익명(趙翼命)이 이어서 아뢰기를,
"간원에서 이세복(李世福)을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기를 계청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제신(諸臣)이 드디어 물러 나갔다. 정원(政院)에서 세 번 아뢰어 환수하기를 청하고, 옥당(玉堂)에서도 차자(箚子)로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백시구(白時耉)가 물고(物故)되었다. 김성절(金盛節)이 승복(承服)한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평안 병사의 은자(銀子) 4천 냥을 받아 왔습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조송(趙松)이 기로소(耆老所)의 공사(公事)를 수득(受得)하여 평안 병사의 은화(銀貨) 4천 냥을 대출(貸出)하였습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는데, 처음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평안 병사가 도임(到任)한 달에 기로소(耆老所)의 차인(差人) 서윤흥(徐允興)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은화(銀貨) 4천 냥을 대출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정우관(鄭宇寬)이 현보(懸保)450)                  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생각에 기로소의 사체(事體)는 다른 상사(上司)와 저절로 다른 까닭에 위거(違拒)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고 여기고, 이를 함부로 준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다시 추국(推鞫)한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그 은자(銀子)를 내어 준 곡절이 이미 지극히 수상(殊常)한데다 현보(懸保)한 자는 역적(逆賊) 정우관(鄭宇寬)이요, 받아서 이용(利用)한 자는 또 서덕수(徐德修)·김성행(金省行)의 무리이니, 그 사이의 사정(事情)이 더욱 지극히 수상(殊常)하다."
하니, 그 공사(供辭)에 누누이 억울하다고 말하며 끝내 실토하지 않았다. 또 서윤흥(徐尹興)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정우관(鄭宇寬)이 백시구(白時耉)와 친밀하였다 하여 은화(銀貨)를 빚내도록 도모하고, 내려갈 때에 영의정(領議政)에게 청촉하는 서간(書簡)을 받았다는 말로써 다시 추국(推鞫)하였더니, 공초(供招)한 바가 군색한 둔사(遁辭)였으며, 다만 경솔하게 말했다 하여 드디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형문(形問)한 지 두 차례에도 버티고 승복(承服)하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경폐(徑斃)하였다.

 

9월 15일 정유

임금이 문묘(文廟)에 전알(展謁)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문사(文士)를 시험한 다음 장전(帳殿)에 나아가서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포시(晡時)에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입시(入侍)하여 세 신하를 체파(遞罷)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미소(微笑)를 짓고 윤허하였다. 문과(文科)에 성덕윤(成德潤) 등 7인을 뽑고, 무과(武科)에 황이영(黃爾英) 등 19인을 뽑았다. 땅거미가 져서 환궁(還宮)하니, 문무 거인(文武擧人)이 머리에 꽃을 꽂고 앞에서 인도하였다.

 

국청(鞫廳)에서 김유경(金有慶)을 옥(獄)에 가두었다.

 

김시엽(金始燁)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처치(處置)하기를,
"처음에 어긋남을 배척한 것은 실로 집심(執心)하는 바가 있고, 이미 참여하였다가 바로 피혐한 것은 잘못이 저쪽에 있는데, 동료(同僚)의 자리에서 소란(騷亂)을 일으키고 본사(本事)에 대해서는 제기(提起)하지 않은 채 이를 이끌어 혐의하는 것은 모두 부당(不當)한 데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 지평(持平) 정석오(鄭錫五)를 모두 명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고, 이어서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을 논박하여 체차하였는데, 이르기를,
"처음에는 역당(逆黨)을 두둔하다가 요의(僚議)의 비난(非難)을 당하였고, 끝내는 처분한 것을 반박(反駁)하였으니, 크게 대체(臺體)를 무너뜨렸습니다."
하니, 전계(前啓)는 따르지 않고, 처치(處置)한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9월 16일 무술

경상도(慶尙道) 진사(進士) 이덕표(李德標) 등이 또 상소(上疏)하여, 신사년451)  의 옥사(獄事)를 신원(伸寃)하고, 임창(任敞)을 엄국(嚴鞫)하고, 이잠(李潛)을 추장(追奬)하기를 청하고, 정원(政院)에 소장을 바치었는데, 정원에서 계품(啓品)하니, 전교하기를,
"들이게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건명(李健明)을 수노 적산(收孥籍産)하는 것은 의계(議啓)한 대로 시행(施行)하라는 명을 지난달 28일에 내리셨는데, 바로 명을 내린 다음날 예조(禮曹)에서 이건명의 아들로서 교형(絞刑)에 처한 죄인 이면지(李勉之)의 아들 이효산(李孝山)을 그의 6촌 아우 이성지(李性之)에게 입후(立後)하는 뜻으로 회계(回啓)하여 판하(判下)하였다고 하니, 신은 지극히 해혹(駭惑)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이성지는 바로 이면지와 같은 부모에서 낳은 형제로서, 다른 사람에게 출계(出繼)한 자이고, 이효산은 방금 〈역적의 아들로서〉 종으로 삼는 죄목(罪目)에 들어 있는데, 만약 이성지의 양자가 되면 법에 연좌(緣坐)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부(判付)를 이미 내린 뒤에 입안(立案)을 해조(該曹)에 만들어 내었고, 해조에서는 그의 원하는 바를 허락하여 따랐으며, 후사(喉司)에서는 전례에 따라 받아들여 응당 연좌(緣坐)되어 노복이 될 자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빠져 나가게 하였으니, 국법(國法)이 이로부터 크게 무너지고, 후폐(後弊)가 장차 무궁한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이성지의 계후 문서(繼後文書)를 급히 명하여 효주(爻周)452)  하고, 당해 당상(當該堂上)과 당해 승지(當該承旨)는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고, 또 장령(掌令) 이광도(李廣道)·지평(持平) 정석오(鄭錫五)의 출사(出仕)를 청하기를,
"자리가 멀리 떨어져서 분명히 듣지 못한 것은 이상(異常)한 일이 아니며, 잘못 인정하고 혐의하는 것은 원래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일과 처치(處置)한 일만 그대로 따랐다.

 

집의(執義) 이덕수(李德壽)가 상소(上疏)하여 세 신하를 체파(遞罷)한 일을 간략히 논하여 진계(陳戒)한 바가 있었는데, 말미(末尾)에 이르기를,
"신이 또 듣건대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이 이만성(李晩成)을 조곡(弔哭)하였다고 하여 파직(罷職)하라는 계청이 있기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대저 이 만성의 죄는 매우 명백하지 않으니, 여러 죄수(罪囚)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김연이 진실로 옛부터 〈이만성과〉 두터운 정의가 있었다면 한 번의 문상(問喪)이 어찌 해롭겠습니까? 난포(欒布)는 팽월(彭越)을 조곡(弔哭)하였으나 한(漢)나라에서 일찍이 죄주지 않았고, 선정신(先正臣) 김안국(金安國)은 친하였던 벗으로 국옥(鞫獄)에서 걸려 죽은 자가 있었는데, 외로운 넋을 조상(弔喪)하고 그의 집을 구휼하니, 세상에서 그의 덕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대저 군자(君子)의 허물은 후덕한 데에서 잘못되고 자애한 데에서 잘못되며, 소인(小人)의 허물은 각박한 데에서 잘못되고 잔인한 데에서 잘못되는 것입니다. 이제 김연의 허물 또한 후덕함과 자애한 데에서 잘못된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니, 또 어찌 논계(論啓)하여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심공(沈珙)이 논핵(論劾)을 당하였을 적에 신은 마음으로 그의 본정(本情)은 용서할 만함을 알았습니다. 이제 김연이 당한 것은 심공에게 비유하면 같지 않으니, 미루어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대저 사람의 죄를 가혹하게 들추어내는 것은 본시 쇠퇴한 세상의 습속(習俗)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국옥(鞫獄)이 거의 다 수습되었으니, 광대(廣大)한 덕(德)을 품고 돈중(敦重)한 은의를 계속해서 인심(人心)을 진정(鎭定)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옛적에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그 도리가 대개 이와 같았으니, 신은 김연에게 사사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소(疏) 가운데 진계(陳戒)한 말이 절실(切實)하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7일 기해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 등이 피혐(避嫌)하기를,
"대저 이만성(李晩成)이 역모(逆謀)에 동참(同參)한 정절(情節)은 추안(推案)을 상고하고 대계(臺啓)를 참작하면 낭자(狼藉)할 뿐만 아닌데, 다만 형신(刑訊)을 더하지 않고 지레 먼저 죽은 까닭에 영호(營護)하는 논계가 대각(大閣)의 위에서 일어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통탄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방금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있는 이봉상(李鳳祥)을 무단히 내직(內職)으로 옮겨 고의로 작과(作窠)453)  하는 바탕으로 삼고, 적도(賊徒)가 꺼려하는 이삼(李森)을 서둘러서 출보(出補)하여 흉역(凶逆)의 계책에 굽혀서 부응하였고, 마침내 임사(任使)하기에 편한 유취장(柳就章)으로 이삼을 대신하여 차출(差出)하였으니, 그 화응(和應)한 자취가 진흙 속에서 싸우는 짐승과 같음이 있습니다. 그가 비록 대신(大臣)의 분부(分付)로 인하여 이삼을 내보냈다고 스스로 해명하는 말은 하지만 소찰(小札)의 공촉(控囑)으로 사람을 곤임(閫任)에 차제(差除)함은 이미 주무(綢繆)한 혐의가 있습니다. 하물며 그 소찰(小札) 가운데에 삼목(三木)을 충청 병사로 삼아 보낸다는 말이 즉일로 전파(傳播)된 것이겠습니까? 그 파자(破字)한 은어(隱語)는 은밀하게 서로 부탁한 것이 동모(同謀)하지 않고서야 과연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더구나 종사 대계(宗社大計)의 말은 재상(宰相)이 말하고 명관(名官)이 전하였는데, 삼사(三司)에서 이를 듣고 대계(臺啓)에서 발설(發說)하기에 이르렀으니, 음모와 흉계는 안문(按問)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스스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왕법(王法)을 끝내 시원하게 펴지 못하여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들이 모두 구수(仇讐)를 함께 토벌할 의리가 있는데, 어찌 옛부터 정의가 돈독하다 하여 갑자기 죽은 이를 조곡(弔哭)하고 산 이를 위문하는 절차를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김안국(金安國)이 국옥(鞫獄)에 걸려 죽은 이를 존휼(存恤)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가 범한 정상이 과연 이만성(李晩成)과 같은 자였다면, 선정(先正)이 어찌 기꺼이 죽은 이를 조상(弔喪)하고, 그 집을 구휼하였겠습니까?
난포(欒布)·팽월(彭越)에 이르러서는 더욱 사리에 어긋나니, 이 말을 따를 경우 비록 죄(罪)가 흉역(凶逆)에 관계된다 하더라도 만약 혹 경폐(徑斃)하여 우연히 복법(伏法)을 면하게 되면, 토적(討賊)의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일체 순편한 방향으로 보아 주어 왕래(往來)하고 교제(交際)하기를 평일과 다름없이 한 뒤에야 바야흐로 광대한 덕을 품고 돈중(敦重)한 은의를 이루는 도리에 가합(可合)하겠습니까? 우료(右僚)가 대헌(臺憲)에 있으면서 공의(公義)를 돌보지 않고 한낱 법망에서 누락된 대죄인을 위하여 변명(辨明)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 등은 그윽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한 번 개탄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미 사람의 죄를 가혹하게 들추어 내었다고 공척을 받았으니, 어찌 일각(一刻)인들 안연(晏然)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집의(執義) 이덕수(李德壽)는 처신이 거칠고 더러우며, 마음씀이 궤휼하고 간사하였습니다. 일찍이 흉적(凶賊)의 위세를 떨치던 때에 세교(世交)를 칭탁하여 역적 김창집(金昌集)에게 붙어서 친구를 팔아 아첨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그의 칭찬을 받아 두루 삼사(三司)를 역임하였습니다. 단지 말 잘하는 것만을 자랑하고 한번도 말을 하지 않다가, 흉당(凶黨)이 복법(伏法)된 뒤에는 머리를 쳐들고 의기양양해서 흔적을 엄폐(掩蔽)하고자 하여 역적 김창집의 부자는 죄가 육시(戮尸)하는 데 합당하다고 하니, 보는 자들이 그의 얼굴을 눈여겨 자세히 보았고 듣는 자들이 손뼉을 치며 웃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대장(臺章)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밀히 돌아보는 옛모습을 오히려 그대로 간직한 채 진계(陳戒)를 핑계대어 한 소장(小章)을 올려서 이만성(李晩成)을 영구(營救)하며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장수를 바꾸는 데 간여하여 김창집의 서촉(書囑)을 받은 일을 이만성이 스스로 밝히지 못하였는데, 이덕수가 바로 밝히려고 하였으나, 죄명(罪名)이 매우 명백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역당(逆黨)을 두둔하여 어렵게 소어(疏語)를 만들어 이리저리 둘러대었는데, 겉으로는 논핵을 당한 두 신하를 영구(營救)하였으나, 실제로는 역적을 비호하는 사사로운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으니, 이덕수의 한 몸이 백천(百千) 가지로 변환(變幻)한 전후의 심적(心跡)이 남김없이 탄로(綻露)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수미(首尾)가 서로 엇바뀌어 추악하고 비루하고 염치가 없는 사람을 대각(臺閣)의 위에 두어서 진신(搢紳)에게 수치를 끼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세복(李世福)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오서종(吳瑞鍾)이 물고(物故)되었다. 처음에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오서종이 유경유(柳慶裕)와 합모(合謀)하여 많은 은냥(銀兩)을 백망(白望)에게 주고, 공공연히 말하기를, ‘동궁(東宮)이 이소훈(李昭訓)의 상사(喪事)로 인해 노론(老論)이 이소훈(李昭訓)을 약(藥)을 써서 죽인 데에 발노(發怒)하여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번국(翻局)하고서 다시 남인(南人)을 불러 들이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백망(白望)의 초사(招辭)에 목호룡(睦虎龍)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원휘(元徽)·김 참판(金參判)·유경유(柳慶裕)·심수관(沈壽觀)·오서종(吳瑞鍾)·장우상(張宇相)의 무리가 서로 함께 일을 모의(謀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공사(供辭)에 그 역옥(逆獄)에 상관(相關)하지 않았다고 발명(發明)하자, 국옥(鞫獄)이 수습되기를 기다린 뒤에 품처하기를 계청(啓請)하였다. 5월이 된 뒤에 여러 차례 다시 추국하였더니, 초사(招辭)가 하나도 증명(證明)하여 근거할 만한 단서가 없고, 한만(閑慢)하고 긴요하지 않은 말로 교묘하게 꾸며서 납초(納招)하니, 마침내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다. 1차 형문(刑問)하여 곤장 6도(度) 만에 바른 대로 공초하기를,
"적신(賊臣) 조성복(趙聖福)이 소장(疏狀)을 낸 뒤에 성상께서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교지(敎旨)가 있었고, 저는 권 참판(權參判) 소하(疏下)의 소두(疏頭)로서 방금 국문(鞫問)을 청하는 논계(論啓)를 받았습니다. 역적 백망(白望)이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만약 은자(銀子)를 얻고 그 출입을 묻지 않으면, 노론(老論)의 흉역(凶逆)한 일을 내가 마땅히 궐내(闕內)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 노론(老論)을 몰아내는 일을 주선(周旋)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을 사는 일로써 1백 냥(兩)의 은자(銀子)를 다른 사람에게 빚을 내었다가 두 차례에 50냥씩 주었으며, 그 뒤에 또 와서 요청하였는데, 수응(酬應)할 도리가 없어서 또 유경유에게 은화(銀貨) 1백 냥을 꾸어서 지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잇따라 줄 물건이 없는데다가, 또 점점 그 허망(虛罔)함을 깨닫고 다시는 준 것이 없습니다. 그 뒤에 역적 백망(白望)이 가끔 왕래하였으나, 그에게 이미 발목을 잡힌 일이 있으므로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백망이 육현(陸玄)의 일로써 장차 옥에 갇힐 것을 알게 되어서 저는 그가 혹 잡언(雜言)을 하여 전날에 은자(銀子)를 준 일이 탄로될까 염려하여 그에게 관곡(款曲)함을 보이고 함께 만나기를 약속하고는 술을 먹인 일까지 있었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부대시(不待時)로 행형(行刑)하기를 청하였는데, 대계(臺啓)에 이르기를,
"은자(銀子)를 모아 뇌물을 쓰고 환국(換局)을 도모(圖謀)한 죄(罪)를 이미 승복하였으니, 사율(死律)에 처하게 함이 법에 있어서 당연(當然)합니다. 다만 환국(換局)을 도모(圖謀)한 것은 향곡(鄕曲)의 한 보잘것 없는 자가 마음먹을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많은 은자(銀子)를 모으는 것 또한 비천한 한낱 나그네가 홀로 착수(着手)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동모(同謀)하여 힘을 합해서 경영(經營)하고 배포(排布)한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곡절(曲折)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일일이 반문(盤問)하고 끝까지 핵실(覈實)하여 엄중하게 징치(懲治)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경솔하게 먼저 짐작하여 처리하는 것은 옥체(獄體)에 어긋남이 있고 여정(輿情)에 크게 거스르는 바가 있을 것이니, 청컨대 다시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엄중한 형벌을 더하여 국문(鞫問)해서 실정을 알아내도록 기필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형문(刑問)한 지 전후하여 16차례나 되었으나, 한결같이 버티고 자복하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경폐(徑斃)하였다.

 

죄인(罪人) 이명익(李明翼)을 금부(禁府)에서 결장(決杖)하고 정배(定配)하였는데, 이명익은 이홍술(李弘述)의 손자이다. 서윤흥(徐允興)을 다시 추국(推鞫)하였더니,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올봄에 능행(陵幸) 하루 전에 이명익이 종용(從容)히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께서 장차 형신(刑訊)받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만약 은화(銀貨)를 얻으면 마땅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네가 반드시 2백 냥의 은자(銀子)를 구해오라.’ 하였습니다. 제가 쓸 곳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간(內間)에 쓰면 도모할 수가 있다. 일이 성공하면 비록 집을 팔아서라도 즉시 도로 갚을 것이다.’ 하므로, 제가 허락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이명익이 종 수독(愁獨)을 보내어 여러 차례 보내달라고 독촉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였더니, 공사(供辭)하기를,
"나졸(羅卒)에게 뇌물을 쓰는데 쓸 은냥(銀兩)을 서윤흥(徐允興)에게 꾸어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서윤흥이 이것을 가지고 모역(謀逆)과 환국(換局) 등의 일에 쓰려는 것처럼 말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허망한 것입니다. 저의 형(兄)이 잡류(雜流)에게 기만당하여 환국(換局)을 도모(圖謀)하는 일에 은화(銀貨)를 많이 소비하였지만, 저는 연소(年少)하여 전연 알지 못하였습니다. 형이 도모하였던 일에 이르러서는 동기(同氣)의 사이에 때로 혹 들은 일이 있으니, 실정(實情)을 알았던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율(照律)하게 하기를 계청하였다.

 

죄인(罪人) 김덕기(金德器)를 태천현(泰川縣)의 배소(配所)에 도로 보냈다. 김덕기는 장세상(張世相)의 양자(養子)이다. 김성절(金盛節)이 김시정(金時鼎)과 면질(面質)한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내가 매양 그대의 집에 가면, 김창도(金昌道)가 번번이 자리에 있었는데, 그대의 집과 장세상의 집이 멀지 않으므로, 스스로 상통(相通)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김덕기를 잡아와서 추문(推問)하면 김창도·우홍채(禹洪采)·김시태(金時泰)의 무리가 장세상과 교통(交通)한 일을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공사(供辭)하기를,
"비록 장세상의 양자라 하더라도 본시 뜻이 서로 맞지 않아서 각집에서 살았으므로, 장세상의 소위(所爲)에 원래 참여하여 아는 일이 없었으며, 평일(平日)에 왕래하는 사람 또한 서로 알지 못합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기를,
"은휘하고 바른 대로 공초하지 않으니, 정상은 비록 가증스럽습니다. 그러나 원래 사죄(死罪)가 아니니,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 결말(結末)을 기다리소서."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그를 다시 추문(推問)할 단서가 없다 하여 도로 배소(配所)에 보냈다.

 

9월 18일 경자

왕세제(王世弟)가 입학(入學)하였으니, 태학 박사(太學博士) 조태억(趙泰億)이 처음으로 《소학(小學)》을 가르쳐 주었다.

 

국청(鞫廳)에서 홍계적(洪啓迪)을 옥(獄)에 가두었다.

 

박필몽(朴弼夢)을 승지(承旨)로, 김일경(金一鏡)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제두(鄭齊斗)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정석삼(鄭錫三)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양사(兩司)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 정언(正言) 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논계하기를,
"알성(謁聖)할 때에 수권관(收券官)이 진작 들어오지 않아 즉시 편차(編次)하지 못하였으니, 만연하게 대령(待令)하지 않은 정상이 진실로 지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가 집의(執義) 이덕수(李德壽)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처치(處置)하기를,
"동료의 소(疏)가 사리에 어긋나서 대간(臺諫)의 탄핵이 이미 일어났으니, 가혹하게 들추어 낸다는 배척을 어찌 혐의(嫌疑)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모두 명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세복(李世福)을 흥양현(興陽縣)의 나로도(羅老島)에 유배하였다.

 

9월 19일 신축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동위(銅闈)454)  가 제사를 주관하니, 경사(慶事)는 이미 저위(儲位)를 정하는데 데에 넘치었고, 태학[璧沼]에서 경서(經書)를 배우니, 예(禮)는 다시 주연(胄筵)에 융성하였도다. 삼대(三代)의 유제(遺制)를 공경하여 준수하니, 만백성이 함께 아름다움을 기뻐하였다. 우리 조정(朝廷)에서 숭유(崇儒)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건대 사군(嗣君)이 입학(入學)하는 전장(典章)이 있었으니, 현릉(顯陵)455)  의 성대한 의식을 처음으로 거행하셔서 성조(聖朝)에서 학문을 존중하신 때에 있었으며, 효묘(孝廟)456)  께서 장년(壯年)에 입학하신 것 또한 종번(宗藩)으로서 책봉(冊封)을 받은 뒤였다. 대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근본이 여기에 있었으니, 학업을 숭상하며 스승을 높이는 규범이 반드시 앞서리로다. 세자[貳極]의 어짊을 돌아보니, 진실로 중륜(重輪)457)  의 칭송이 화협(和協)하였다. 하늘에서 효우(孝友)를 타고났으니 더욱 삼조(三朝)에 근간(懃懇)을 다하였고 문학을 온습하여 날로 진취(進就)하니, 사보(四輔)458)  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았도다. 생각하건대 왕위를 미리 세워 택우(宅憂)하는 날을 당하니, 성규(晠規)는 복제(服制) 마치는 기일을 기다렸도다. 이에 길일[吉辰]을 가리어 마침내 상례(常禮)를 닦았다.
교문(橋門)459)  에 임하여서 연(輦)을 거두고 먼저 성사(聖師)460)  를 배알했으며, 뒤에 스승[凾丈]에게 경례하니, 아래로는 유사(儒士)와 같았도다. 쇄소(灑掃)·응대(應對)의 절차는 이미 《소학(小學)》을 배울 나이가 넘었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요체는 이제 곧 대인(大人)의 도리를 강론하였다. 이는 일물(一物)을 성실하게 행하여 삼선(三善)461)  을 얻는 것이니, 또한 열성조(列聖朝)를 거치면서 겨우 아홉 번 있었던 일이로다. 의리는 명륜(明倫)에 있는데, 이 경사는 진실로 세상에 드물었다. 의문(儀文)을 잘 구비하였으니, 원근(遠近)에서 서로 기뻐하였다. 어찌 다만 한 시대의 이목(耳目)을 용동(聳動)시킬 뿐이겠는가? 해택(解澤)을 팔역(八域)에 미치게 함이 마땅하리로다. 이달부터……하게 한다. 아, 우리 나라에 제도가 있어온 이래로 감히 조종(祖宗)이 끼친 모훈(謨訓)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온 나라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우리 아우의 호학(好學)함을 알게 하리로다. 이에 마음을 펴서 고하여 목을 늘이고 기다리는 정성에 답하노라,"
하였는데, 대제학(大提學) 조태억(趙泰億)이 지어서 바친 것이었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정석삼(鄭錫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근래에 대각(臺閣)의 거조(擧措)가 체례(體例)에 어긋난 것이 많습니다. 장령(掌令) 이광도(李廣道) 같은 자는 경상 감사를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며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가려서 차임하라는 말이 있었으니, 대각(臺閣)이 비록 중하다 하나, 마침내 묘당을 지휘(指揮)하는 사람은 아니니, 사체(事體)를 알지 못함이 심합니다. 그리고 요대(僚臺)가 인구(引咎)하는 데 미쳐서 이광도는 스스로 반성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말을 허비하여 변명(卞明)하였으니 매우 미안(未安)한 데에 관계됩니다. 낙과(落科)에 두는 것이 마땅한데,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했으니 매우 뜻밖입니다. 또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연(金演)을 논죄(論罪)할 적에 전(前) 지평(持平) 이거원(李巨源)이 조어(措語)에 소상(消詳)함이 있음으로 인하여 경솔하게 이론(異論)을 내세우는 말을 꺼내어 처음에는 이미 따라서 참여하였다가, 종말에는 또 인피(引避)하여 거조(擧措)가 전도(顚倒)되었습니다. 조사(措辭)하여 체차하기를 청한 것은 대체(臺體)에 당연(當然)하지만, 말은 하는 즈음에 너무 적합하지 못하였습니다.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에 이르러서는 논박하여 체차하라는 말로 대석(臺席)에서 동료 대간을 면척(面斥)하였는데, 공좌(公坐)의 풍채(風采)는 있을망정 말을 이와 같이 경솔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석(僚席)에서 서로 공경하는 의리가 남김없이 허물어졌으니, 또한 모두 낙과(落科)에 두는 것이 마땅한데, 억지로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한 것은 부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너무 편벽되어 공평하고 진실됨을 잃었으니,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장령(掌令) 이경열(李景說)·이광도(李廣道), 정언(正言) 조익명(趙翼命)·조진희(趙鎭禧)를 모두 명하여 체차(遞差)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정석오(鄭錫五)가 집의(執義)의 소(疏) 및 형제(兄弟)가 모두 양사(兩司)에 있는 것으로써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9월 20일 임인

헌부(憲府)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정석오(鄭錫五)를 처치(處置)하기를,
"위 조항의 인혐(引嫌)은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고, 양사(兩司)에서 모두 인피하는 것도 법례(法例)에 없으니, 청컨대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고 처치한 일만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옥당 부교리(玉堂 副校理) 여선장(呂善長), 옥당 수찬(玉堂 修撰) 이승원(李承源)이다.】 에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어제 사간(司諫) 정석삼(鄭錫三)이 여러 대신(臺臣)을 논박(論駁)하여 체차(遞差)하라고 한 계사(啓辭)를 보건대 진실로 지극히 해탄(駭歎)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대각(臺閣)의 논사(論事)는 차라리 격렬할지언정 변함이 없어야 하고, 항식(恒式)에 구애되지 않아야 하는데, 다만 대체(大體)를 보아 소절(小節)은 논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번 헌신(憲臣)의 일이 비록 그 언어(言語)와 문자(文字)의 사이에 혹 평온(平穩)함이 부족한 듯하였으나, 원래 지적(指摘)하여 논할 만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치(處置)한 간신(諫臣)에 이르러서는 더욱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었는데, 이제 바로 어렵게 말을 만들어 날짜가 오래된 뒤에 일부터 논핵(論劾)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무사(無事)한 가운데에 풍파를 일으켰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제 종일(終日) 합사(合辭)하여 징토(懲討)함이 바야흐로 엄숙하였는데, 정석삼은 새로 대각(臺閣)에 들어와 단 한 마디의 말도 토역(討逆)하는 의논에 미치지 않았으면서 바로 많은 대신(臺臣)을 격축(擊逐)하여 대론(大論)을 저패(沮敗)함으로써 제일의 의리를 삼았습니다. 무슨 특별한 의사(意思)가 있어서 이와 같이 매우 급급하게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그 거조(擧措)를 논하면 매우 해괴하였으니, 청조(淸朝)의 언의(言議)하는 자리에서 바로 이와 같은 풍습(風習)이 있을 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대신은 이미 체차(遞差)할 만한 의의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하나의 어긋난 논박으로 인하여 갑자기 모두 체차(遞差)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신 등은 더욱 개연(慨然)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네 대신(臺臣)을 체차하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인하여 정석삼(鄭錫三)을 파직하여 대각(臺閣)의 기풍을 부지하시고, 기회를 엿보다가 불쑥 꺼내는 의논을 물리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9월 21일 계묘

대신(大臣)을 태묘(太廟)에 보내어 토역(討逆)하였음을 고유하니,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천지(天地)에 용납하지 못할 죄(罪)에는 난역(亂逆)이 으뜸이 된다. 그래서 《춘추(春秋)》에는 무장(無將)462)                  의 주벌(誅罰)이 있어서 전형(典刑)이 후세에 전해졌다. 이에 흉도(凶徒)를 알아내어 명명(明名)을 선포(宣布)하였다. 내가 일찍이 험난(險難)함을 갖추 겪고 이 간대(艱大)한 업적(業績)을 끼쳐 주었다. 이사명(李師命)과 홍치상(洪致祥)의 요악(妖惡)한 유언비어(流言蜚語)는 무진년463)                  의 연매(燕禖)의 처음부터 있었고, 역적(逆賊) 임창(任敞)·박규서(朴奎瑞)가 기회를 틈타 불쑥 꺼낸 음사(陰邪)한 흉언은 신사년464)                  의 고변(蠱變)하던 즈음에 있었다. 고감(敲撼)하고 공동(恐動)하는 계책은 백 가지 형상이었고, 핍박하며 헐뜯는 말은 만단(萬端)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선대왕(先大王)의 사랑하는 은택(恩澤)이 옛사람에 능가(凌駕)함을 힘입어 나 소자(小子)의 불초(不肖)한 양덕(凉德)으로 하여금 오늘까지 이르게 함을 얻었다. 혹 이도(異圖)465)                  를 조금 저지하였다고 하나, 어찌 적정(賊情)의 망측(罔測)함을 뜻하였겠는가? 30년을 온양(醞釀)한 지 오래였으니, 흉도(凶徒)가 번성하였으나, 한둘의 신하가 그 누구를 꺼려 하였겠는가? 교만한 기풍이 더욱 횡행하였다. 공급(孔伋)466)                  과 구순(仇荀)의 유직(遺直)이 남아 있었으니,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윤선거(尹宣擧)·최석정(崔錫鼎)의 죽음이 슬펐고, 양기(梁冀)·곽현(霍顯)·왕망(王莽)·조조(曹操)의 고간(故奸)이 있으니,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의 방자함을 한탄하였다. 왕실(王室)의 우익(羽翼)을 제거하여 조정이 비어 사람이 없었고, 사당(私黨)이 복심(腹心)을 배포(排布)하여 관작(官爵)을 팔아 검사(劍士)를 모집하였다. 홍수(紅袖)467)                  와 인연하고 황문(黃門)468)                  과 체결하였다. 은화(銀貨)와 전재(錢財)로 궁중[禁掖]에서 마음대로 뇌물을 썼으며 요인(妖人)과 검객(劍客)을 모두 집안[門墻]에 모아 길렀다. 깊은 궁중에서 하나의 비수(匕首)를 가졌으니, 밖으로는 예양(豫讓)469)                  이 측간에서 칠을 했던 것을 본받았고, 천금(千金)으로 중국에서 독약을 구입(購入)하여 안으로는 곽현(霍顯)이 술잔에 독약을 쓴 것을 도모하였다. 진(秦)나라의 이사(李斯)는 조고(趙高)를 위하여 깊이 교제하였고, 진(晉)나라의 왕돈(王敦)은 전봉(錢鳳)의 협조(夾助)가 있었으니, 누구인들 놀라고 마음 아파하지 않았겠는가? 만대(萬代)의 중악(衆惡)이 모두 모이었고, 그 고기를 저며 먹고 가죽을 깔기를 모두 소원했으니, 돌아보건대 팔역(八域)의 여정(輿情)이 울분(鬱憤)하였다. 변서(變書)가 역력하니, 역절(逆節)이 분명하도다. 이이명(李頤命)은 손바닥 가운데에 양자(養字)를 써서 추대(推戴)하는 모약(謀約)이 이미 드러났으며, 주머니 속에 있던 교조(矯詔)의 초고(草稿)는 폐출(廢黜)의 정상(情狀)이 환하게 드러났도다. 은어(隱語)를 써서 제거하고자 하여 몰래 국구(國舅)의 성명을 부르며 맹서하는 말을 하고서 죽음을 결심하여 일변(日變)의 길흉(吉凶)을 점험(占驗)하였다. 이것은 유자(猶子)470)                  와 총아(冡兒)471)                  가 아니면 모두 사사(死士)472)                  와 숙장(宿將)473)                  이었다. 일전에 서찰(書札)을 엄수(閹竪)474)                  에게 얻어 독대(獨對)하는 기일을 알았고 한밤중에 주사(籌司)에 모여서 밀모(密謀)를 정하였다. 김용택(金蘢澤)은 인아(姻婭)475)                  를 맺은 친밀(親密)로 한결같이 지휘(指揮)를 들었고, 이천기(李天紀)는 한 마을의 친구임을 빙자하여 몰래 약속을 받았다. 김일관(金一觀)이 말을 꺼낸 것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더욱 여러 역적의 귀심(歸心)을 볼 수 있다. 김창집(金昌集)은 김창도(金昌道)로 하여금 정우관(鄭宇寬)을 따라 교통(交通)하게 하고, 상궁(尙宮)을 몰래 사주하고 김성행을 조종하여 서덕수(徐德修)와 서로 결탁하게 하고는 소훈(昭訓)을 먼저 죽였다. 궁중(宮中)에 인척(姻戚)과 연결하여 동정(動靜)을 살펴서 형세를 이루고, 중군(中軍)을 종처럼 부렸으니 생살(生殺)을 천단(擅斷)하여 위엄을 세웠다. 하나의 서찰(書札)로 다시 대궐[重宸]을 도모하여 지속(遲速)을 장세상에게 자주 탐지하였고, 삼목(三木)를 반드시 외곤(外閫)에 내보내여 이만성(李晩成)에게 조종을 요청하였다. 만약 궁성(宮城)에 군사를 베풀어 호위하게 한 일이 이루어졌더라면, 어찌 궁중의 뜰에 유혈이 낭자함을 면하였겠는가? 다행히 먼저 명령을 내려서 개기(改紀)하였으니, 신감(神鑑)이 소명(昭明)하였고, 소망(小望)을 기다려서 길이 지체되고 모반하는 뜻을 자행(恣行)하려 하였으니, 아! 또한 참혹하였도다.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이건명(李健命)은 이이명(李頤命)의 형(兄)이 되고 저는 아우가 되니, 한 집안에서 성행(性行)이 비슷하였다. 김창집이 영상(領相)에 있고 자신은 좌상(左相)에 있으면서 자리를 연결하여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고는 이국(異國)에 선포(宣布)하여 감히 우리 나라를 헐뜯어 터무니 없는 거짓을 꾸였는데, 잔얼(殘孽)도 저주(詛呪)하여 오히려 원흉[首惡]이 농동(儱侗)476)                  하다고 배척하였다. 조태채(趙泰采)는 본시 득실(得失)을 근심하는 비부(鄙父)로서, 찬역(簒逆)을 도모하는 흉당(凶黨)에 밀부(密付)하였는데, 인정(人情)이 한 하늘 아래에 함께 있는 것을 분통하게 여겼으니, 네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왕법(王法)은 삼척(三尺)의 지엄(至嚴)함을 게재(揭載)하였으니, 그 또한 용서할 수 없다. 대저 사흉(四凶)의 연차(聯箚)는 진실로 삼수(三手)의 음모(陰謀)에서 비롯되었다. 임부(林溥)는 모해(謀害)로서 진사(陳辭)하였으니, 본시 근거가 없는 맹랑(孟浪)한 말이 아니었고, 이잠(李潛)은 칼날을 되돌릴 것을 염려하였으니 나무 섶을 옮기는 무릉(茂陵)이라고 이를 만하다. 원흉(元兇)이 복죄(伏罪)되었으니, 마침내 인심(人心)이 기뻐하게 되었고, 잔당(殘黨)이 옥(獄)에 가득하니, 천망(天網)477)                  에서 도망하기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겠다. 전후에 승복(承服)한 자가 20여인이고, 차례로 안문(按問)한 것이 7, 8개월이 되었다. 요요(妖腰)와 난령(亂領)은 동시(東市)에 끌려가서 말이 없었고, 사설(蛇舌)과 효음(梟音)은 하늘을 우러러 은휘(隱諱)하지 못하였다.
이미 역적(逆賊)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이홍술(李弘述)·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이희지(李喜之)·이기지(李器之)·이영(二英)·심상길(沈尙吉)·장세상(張世相)·이헌(李瀗)·정우관(鄭宇寬)·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서덕수(徐德修)·이우항(李宇恒)·유취장(柳就章)·김성절(金盛節)·우홍채(禹洪采)·심진(沈搢)·김일관(金一觀)·김극복(金克復)·양익표(梁益標)·이명좌(李明佐) 등은 정법(正法)으로 처치하였다. 모의(謀議)는 모두 세도 있는 대가(大家)와 거실(巨室)에서 나왔고, 화물(貨物)은 모두 병사[列閫]와 수령[雄藩]한테서 자뢰하였다. 열 가지 백 가지의 비장(秘藏)을 수색하여 갑(匣) 속에 있는 패검(佩劍)을 겸하여 얻었고, 16명의 간세(奸細)를 귀양보냈으니, 은화(銀貨)를 쓰면서 연줄을 찾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계동(季冬)에 사용한 약(藥)이 효과가 없었으니, 독성(毒性)이 맹렬하지 못함을 한탄하였고, 초하(初夏)에 기회(機會)를 몰래 살피었으니, 짓는 밥이 이미 끓는 데에 비유하였다. 나는 고굉(股肱)의 구신(舊臣)으로서 믿었는데, 저들은 도리어 좌우(左右)의 근밀(近密)에서 급변(急變)을 일으켰다, 선조(先朝)의 총권(寵眷)을 차마 저버렸으니, 거슬리는 창자는 가로 뒤틀렸고 오늘의 형장(刑章)이 용서하지 못하니, 내 마음이 상하고 슬프도다. 그러나 일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어 이미 화색(禍色)의 소저(消沮)함을 보았고, 경사(慶事)는 신민(臣民)에게 흡족(洽足)하였으니, 어찌 덕음(德音)의 환발(渙發)을 더디게 하겠는가? 이 달 21일부터……하도록 한다. 아! 온갖 사악함이 깊이 숨겨지고 많은 잔당(殘黨)들이 깨끗이 숙청(肅淸)되었다. 천기(天氣)가 맑고 밝아 만물(萬物)과 더불어 다시 바루어졌고, 큰 혜택[霈澤]을 널리 입혔으니, 모두 기뻐하리로다."
하였는데, 홍문 제학(弘文提學)        김일경(金一鏡)이 지어서 바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역(討逆)하고 반교하는 것은 국가의 대문자(大文字)인데, 시임(時任)·문형(文衡)이 고의로 피하여 담당하지 않은 것은 이미 개연(慨然)하게 여길 만하다. 그런데 김일경은 추패(麤悖)한 성품과 황잡(荒雜)한 문장을 가지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주먹을 떨치면서 전례를 뛰어넘어 스스로 담당(擔當)하였으니, 시론(時論)이 진실로 이미 이를 염려하였다. 그가 제진(製進)함에 미쳐서 종무(鍾巫)와 사구(沙丘)로 대를 맞춘 글귀는 비록 사람의 권개(勸改)로 인하여 고쳤지마는, 종무(鍾巫)라는 글자를 벌써 그 사소(辭疏)와 당차(堂箚)의 대술(代述)한 가운데에 사용하였으며, 궁궐의 뜰에 유혈이 낭자[喋血]하였을 것이라고 한 것은 그 출처(出處)가 어떠하기에 은연(隱然)히 삽입(揷入)하였는가? 대개 간직했던 화심(禍心)이 이와 같이 문자 사이에 밝게 드러났으나, 세상의 문자(文字)를 보는 이들이 범홀(汎忽)히 넘기는 자가 많아 그의 흉악한 마음을 명백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오로지 두서너 사람만이 보고서 해탄(駭歎)하며 사사로이 서로 몰래 의논(議論)하였으나, 돌아보건대 지위가 낮아 어찌할 수 없었다. 경악(經幄)의 사이에서도 또한 일찍이 이것을 논할 뜻이 있었으나, 또 중간에 있으면서 힘껏 저지하는 자가 있어서 그만두었다. 대저 이 일이 있으면서부터 삼층(三層)의 의논이 있었으니, 당사(黨私)에 가리워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기 편을 두둔하고 도리어 사람의 말이 있는 것을 의심하는 자도 있었고, 그 두 마음[異志]이 있음을 깨닫고는 지나치게 근심하고 깊이 조심하여 감히 갑자기 척절(斥絶)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으며, 그 적심(賊心)과 흉간(凶肝)을 환히 내다보고는 반드시 시기를 기다려 토벌하려는 자도 있었다. 간장(諫長)        김동필(金東弼)이 시험삼아 약간 논박하였는데, 분연(紛然)히 떠들고 괴이하게 여겼으며, 심지어는 그 죄를 성토(聲討)하여 외방(外方)에 보직(補職)하려 하였으니, 전지(銓地)에서 크게 시끄러워 정석(政席)을 중도에 파(罷)하게 되었다. 이어서 이조에 들어온 자도 또 감히 연백(筵白)하여 김동필(金東弼)을 파출(罷黜)하고 남읍(南邑)에 단부(單付)하였다. 그 방자하게 전횡함이 이와 같이 거리낌이 없었으니, 동일한 심장(心腸)을 볼 수 있으며, 그 기세의 치장(鴟張)과 세도(世道)의 패란(悖亂)함도 또한 알 수 있다. 비록 그러하나, 김일경(金一鏡)의 역절(逆節)이 밝게 드러나서 마침내 정형(正刑)에 처치된 뒤에는 당세(當世)의 사람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함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엄복(掩覆)한 죄과에 대하여 말이 없어야 마땅할 것이다.

 

정해(鄭楷)를 사간(司諫)으로, 이명의(李明誼)를 현납(獻納)으로, 조경명(趙景命)을 승지(承旨)로, 윤행교(尹行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9월 22일 갑진

미시(未時)에 우박(雨雹)이 내렸는데, 모양이 소두(小豆)478)  와 같았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밤 2경(更)에도 번개가 쳤다.

 

9월 24일 병오

박희진(朴熙晉)을 승지(承旨)로, 조원명(趙遠命)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익명(趙翼命)을 수찬(修撰)로 삼았다.

 

양사(兩司)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사간(司諫) 정해(鄭楷),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 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현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하늘이 나라를 도와 역도(逆徒)를 주토(誅討)하였으니, 군위(君位)가 거의 위태로왔다가 다시 편안해졌고, 종사(宗社)가 거의 기울어졌다가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무릇 모든 백성들은 토역(討逆)을 진하(陳賀)하는 거조에 기뻐하여 고무(鼓舞)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저 평일에 붙좇았던 무리들은 진실로 역모(逆謀)에 동참한 자가 아니면 또한 구염(舊染)을 벗어나서 국적(國賊)을 다 같이 원수로 여김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갓 동제(同儕)의 죽음만 슬퍼하여 도무지 기뻐하는 마음이 없고, 사차(私次)에 엎드려 있으면서 하반(賀班)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 정상(情狀)을 논하면 매우 통분(痛憤)합니다. 청컨대 이번 진하(陳賀) 때에 그 여당(餘黨)으로 일체 물러 앉아 무단(無端)히 참여하지 않은 자는 한결같이 모두 조사해 내어서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소서. 남평 현감(南平縣監) 유기하(柳其夏)는 역적(逆賊) 이건명(李健命)에게 아부하여 외람되게 명읍(名邑)에 제수되었는데, 지난 겨울 이회지(李喜之)의 무리가 죄로써 유배된 뒤에는 주인이 되어 궤유(餽遺)하고, 서문(書問)하기를 서로 잇따라 그치지 않았으니 그 정적(情跡)을 논하면 이미 지극히 통탄할 일입니다. 또 호유(湖儒)들이 유현(儒賢)을 위하여 변무(辨誣)하였을 때 그 고을 사람이 또한 그 가운데에 참여한 데 노하여 고의로 다른 일을 근거로 삼아 체포(逮捕)한 자가 사방에 널려 있었으며, 분노한 나머지 고략(拷掠)한 자가 거의 십수 인이 넘었습니다. 거조(擧措)가 전망(顚妄)되고 청문(聽問)이 모두 해괴(駭怪)하니, 그가 흉당(凶黨)을 붙좇아 장보(章甫)를 구략(敺掠)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 사간(司諫) 정석삼(鄭錫三)은 입조(立朝)하여 처신(處身)함이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었고, 머뭇거리며 형세를 돌아보아 오로지 사환(仕宦)하는 데 교묘한 계책을 삼은 것은 이미 사부(士夫)의 풍습이 아닙니다. 지난 겨울 비망기(備忘記)를 다시 내리시니,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정성을 다하여 일제히 호소하여 반한(反汗)479)  하기를 기필하였는데, 홀로 정석삼만이 흉당(凶黨)이 뜻에 거슬릴까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합사(合辭)의 소장(疏狀)에 연명(聯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추천받아 즉시 납언(納言)의 망(望)에 거의(擧擬)되었는데, 부정한 무리와 교제하고 친압하면서도 전연 악한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흉적의 적소(謫所)를 심방(尋訪)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았으니, 그가 사류(士類)에게 배척당하고, 공론(公論)에 득죄(得罪)한 지 대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지(臺地)에 무릅쓰고 있으면서 거조(擧措)가 더욱 패려(悖戾)합니다. 생각하건대 이 헌신(憲臣)은 원래 지적(持摘)할 잘못이 없는데, 무근한 사실을 날조하여 죄(罪)를 얽었으며, 간신(諫臣)에 이르러서는 더욱 엄하게 징토(懲討)할 의리가 있는데도 기구(崎嶇)하게 말하여 청대(請對)하는 기일을 단지 하룻밤을 사이에 두고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같이 공격하여 제거함으로써 대각(臺閣)이 텅 비게 하여 대론(大論)을 저패(沮敗)하였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환히 알 수 있으며, 공의(公議)가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당차(堂箚)가 논파(論罷)된 뒤에 미쳐서는 바로 다시 원계(原啓)를 보지 않은 채 단지 남의 소문(所聞)만을 듣고 얼굴을 돌리어 탄핵하였던 대신(臺臣)에게 걸애(乞哀)하였으니, 듣는 자로서 침을 뱉어 비루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 용심(用心)의 간교함과 처신(處身)의 더러움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결코 이미 시행한 박벌(薄罰)로써 그만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전(前) 사간(司諫) 정석삼(鄭錫三)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9월 25일 정미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제3성(第三星)을 범하였다.

 

왕세제빈(王世弟嬪)이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였다.

 

9월 26일 무신

유봉휘(柳鳳輝)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세덕(李世德)을 응교(應敎)로, 한재원(韓在垣)을 장령(掌令)으로, 조지빈(趙趾彬)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부(府)·원(院)의 전계(前啓)도 모두 따르지 않았으며, 단지 정석삼(鄭錫三)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하는 일만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뇌변(雷變)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고, 견책(譴責)하기를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과 같이 무사(無似)한 자가 외람되게 태석(台席)에 참여하여 마침 국가(國家)의 다사(多事)한 때를 당하여 묘당(廟堂)이 거의 빈데다가, 국옥(鞫獄)이 만연(蔓延)되어서 수습할 기약이 없으므로, 감히 스스로 노고(勞苦)를 고하지 못한 채 부지런히 극무(劇務)에 이바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있는 재황(災荒)의 참혹함은 팔로(八路)가 모두 똑같아서 장청(狀請)과 논보(論報)가 잇달고 있으나 주지 못하고, 중외(中外)의 저축(儲蓄)이 텅 비어서 남은 것이 없으므로, 진구(賑救)할 계책이 아득해서 착수(着手)할 곳이 없으니,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침식(寢食)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또 이 때 아닌 천둥 번개가 여러 번 수성(收聲)하는 절기에 일어나 진혁(震虩)하는 소리가 한여름과 다름이 없으니, 어떤 화기(禍機)가 은미(隱微)한 가운데 숨어 있어서 하늘의 경고(警告)가 이와 같이 정녕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는 것은 신 등과 같은 무리에게 책망(責望)할 것이 못되나, 그 직분(職分)을 돌아보면 보상(輔相)의 임무입니다. 현재 정석(鼎席)480)  은 비록 정원을 채웠다 하나, 좌상(左相)은 아득히 올라올 기약이 없고, 영상(領相)도 또 이미 정단(呈單)481)  하였습니다. 신이 이때에 홀로 국가의 중요한 기무(機務)를 담당하고 있으니, 무릇 휴구(休咎)482)  에 대하여 죄(罪)가 신의 몸에 있습니다. 재황으로 인하여 책면(責免)하는 것은 스스로 역대(歷代)의 통규(通規)이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위간(危懇)을 굽어 살피시고, 신의 상직(相職)을 빨리 전면(鐫免)하기를 윤허하셔서 천견(天譴)에 보답하고 사분(私分)을 편안하게 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그윽이 엎드려 하늘과 사람의 사이를 생각하건대 사이에는 터럭 하나도 용납되지 못합니다.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은 장차 어지럽든가 어지럽지 않은 때에 많이 나타나니, 대개 생령(生靈)을 사랑하여 돌보아 임금이 된 이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경구(驚懼)하고 근심하여 개도(改圖)483)  하여 위망(危亡)에 이르지 않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인군(人君)이 진실로 측신(側身)하고 수행(修行)하여 몸을 반성(反省)하고 자책(自責)한다면, 재앙이 변하여 상서(祥瑞)가 되고 화(禍)가 바뀌어 복(福)이 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상상(祥桑)이 은(殷)나라 중종(中宗)의 수덕(修德)에 말라 죽고,484)  형혹성(熒惑星)이 송(宋)나라 경공(景公)의 선언(善言)에 삼사(三舍)를 옮긴 것과485)   같으니, 전하께서도 과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반성하고 혁연(赫然)히 분발하여 일심(一心)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먹고 쉬는 사이에도 끊임 없이 지성으로 천지신명께 대하신다면 옥루(屋漏)486)  에서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도모하고, 소간(宵旰)487)  하며 곤심하여 근로(勤勞)하시고, 날마다 신료(臣僚)를 접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강구(講求)하시고,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 성덕(盛德)을 성취하시고, 모유(謀猷)가 날로 하전(厦氈)에서 증진되게 하시고, 장주(章奏)가 후사(喉司)에 지체되지 않게 하시고, 이어서 군공(群工)을 칙려(飭勵)하여 게으른 풍습(風習)을 혁제(革除)하고, 정신(精神)을 가다듬어 인협(寅協)하는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시면, 어찌 오늘날 하늘의 견고(譴告)가 우리 인군을 옥성(玉成)하는 바탕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오직 성명(聖明)께서도 유의(留意)하시고 마음을 더하소서. 또 신이 안옥(按獄)한 이래로 여러 번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편안하지 못한 단서가 전후에 한 번만이 아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지난 일을 생각하면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시지 않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제 향유(鄕儒)의 죄를 성토하는 소장(疏章)이 공거(公車)에 올라 왔으니, 원소(原疏)는 비록 미처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으셨으나, 신이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감히 한갓 성권(聖眷)만 믿고 사람들의 말을 돌보지 않은 채 안연(晏然)히 모두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신이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한 가지 단서입니다. 신이 걸면(乞免)하는 소장(疏章)에 진청(陳請)하는 바가 있음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마는, 일이 긴급한 데에 관계되므로, 감히 여기에 덧붙여 진달합니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은 시기를 넘긴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급히 설행(設行)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조(李肇)는 지난번 알성(謁聖)의 거동(擧動)으로 인하여 명을 받아 출숙(出肅)하고는 즉시 인입(引入)하여 공무를 집행하는데 뜻이 없습니다. 지금은 소비(疏批)를 이미 내렸으니, 마땅히 엄책(嚴責)을 더하여 반드시 이달 안에 거행해서 한결같이 일을 끌어 미루는 폐단이 없도록 함이 마땅할 듯하니, 모두 재처(裁處)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차자(箚子)를 살펴보고 모두 자세히 알았다. 누누이 진계(陳戒)한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황을 끌어대어 면직(免職)을 책면(策免)한 것은 본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조(李肇)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경(卿)은 모름지기 내 뜻을 본받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논도(論道)하여 목마른 듯한 소망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7일 기유

헌부(憲府)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논계(論啓)하기를,
"숭릉 참봉(崇陵參奉) 이필(李泌)·혜릉 참봉(惠陵參奉) 박규문(朴奎文)·태릉 참봉(泰陵參奉) 강명황(姜命璜)을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 사간(諫院司諫) 정해(鄭楷)·간원 헌납(諫院獻納) 이명의(李明誼)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과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승지 이명언(李明彦)이 진언(進言)하기를,
"신 등이 엎드려 영유(嶺儒) 이덕표(李德標) 등의 소장(疏章)을 보건대 신사년488)  의 일을 빙자(憑藉)하여 한없이 정신(廷臣)을 후욕(詬辱)하였는데, 본원(本院)에서 당초에 품계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대개 그 소어(疏語)에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덕표 등은 또 와서 소를 올려 옹폐(壅蔽)489)  한다는 뜻으로 본원(本院)을 침욕(侵辱)하였는데, 한결같이 물리치는 것 또한 미안(未安)한 데에 관계됩니다. 또 신 등의 뜻에 한 번 예람(睿覽)을 거쳐서 처분(處分)을 기다리는 것이 사체(事體)에 마땅하다고 여겼으므로, 조사(措辭)하여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권서봉(權瑞鳳) 등이 또 정소(呈疏)하여 이흉(二兇)을 추륙(追戮)하는 일과 사친(私親)의 사우(祠宇)·묘소(墓所)에 전알(展謁)하는 일을 논급(論及)하였으니, 그 말이 그릇되지는 않으나, 신사년의 일에 이르러서도 이덕표 등의 소장과 대체로 같고, 또한 후원(喉院)을 침욕(侵辱)한 말이 많았으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대저 저 무리가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장독(章牘)에 올린 정상(情狀)이 가증스러운데, 이 무리들이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추보(追報)하는 일절을 이제까지 거행하지 못하였고, 대신(大臣)과 재신(宰臣)이 연주(筵奏)한 뒤에도 즉히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괴귀(怪鬼)의 무리들이 얼굴을 바꾸어 잇따라 나와서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습니다. 대저 추보(追報)하는 일은 비록 저 무리의 장소(章疏)가 없었더라도 분한(分限) 안에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니, 분한 밖에서 어찌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을 때에 추보하는 일을 논계(論啓)하고, 소장(疏章) 끝에 선유(先儒) 정이(程頤)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말한 것을 인용(引用)하여 간사(奸邪)한 사람들이 은혜를 희구(希求)하여 총애를 굳게 하려는 것을 스스로의 신모(身謀)로 삼고, 의리를 해치고 효도를 손상시켜 폐하(陛下)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등의 말을 거듭하여 그치지 아니한 것은 바로 정례(情禮)를 참작하고, 사은(私恩)을 추보(追報)하여 이들의 간사(奸邪)하고 과분(過分)하게 바라는 것을 끊게 하려는 말입니다. 신 등은 추보하는 한 가지 조항을 속히 거행(擧行)하여 정례(情禮)를 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28일 경술

윤행교(尹行敎)를 승지(承旨)로, 이경열(李景說)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토역(討逆)을 진하(陳賀)하는 데 참여하지 않은 사람 허윤(許玧)·이기익(李箕翊)·이교악(李喬岳)·서명훈(徐命勳) 등을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였으니, 대계(臺啓)를 따른 것이었다.

 

9월 29일 신해

대비전(大妃殿)의 탄신(誕辰)에 왕세제(王世弟)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원(府院)의 전계(前啓)도 모두 따르지 않았다. 권중경(權重經)을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는 계청(請廳)을 정지하였다.

 

9월 30일 임자

이봉년(李鳳年)을 승지(承旨)로, 조진희(趙鎭禧)를 지평(持平)으로, 정수기(鄭壽期)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교서관(校書館)에서 《열성어필(列聖御筆)》을 간행(刊行)하여 올렸다.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사간(司諫) 정해(鄭楷)·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 등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조태채(趙泰采)를 안율(按律)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가(國家)에서 역적을 다스리는 법은 저절로 그 율(律)이 있으니, 진실로 왕장(王章)을 굽히고 상형(常刑)을 경감(輕減)하는 것은 결코 부당(不當)합니다. 지난번 역괴(逆魁)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몹시 흉악한 정절(情節)이 국안(鞫案)에 낭자(狼藉)하였는데, 이때에 성상(聖上)께서도 세 번 정형(正刑)을 명하시고 말초(末稍)의 감단(勘斷)은 사사(賜死)하는 데 그치었으니, 크게 실형(失刑)한 바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으므로, 여정(輿情)이 다 분하게 여기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여러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두 역적이 설행한 모계(謀計)의 음비(陰秘)하고 흉참(凶慘)함이 절절이 드러나서 만인의 눈으로 다 보았으니, 온 나라의 살아 숨쉬는 이로서 누군들 그 한 점의 고기를 씹어서 신인(神人)의 분통(憤痛)함을 씻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진(晉)나라 왕돈(王敦)의 기참(跽斬)한 형(刑)을 빨리 이 역적에게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겨우 삼사(三司)에서 일제히 청한 것으로 인하여 수노 적산(收孥籍産)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참시(斬屍)의 법은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인심(人心)이 불울(拂鬱)하고 국법(國法)이 무너짐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책시(磔屍)의 형전(刑典)은 일찍이 인조(仁祖)·효종(孝宗)의 두 조정에서 오히려 연좌(緣坐)된 것을 또한 세월(歲月)이 이미 오래 된 뒤에 시행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자신이 대역(大逆)을 범하였는데, 그 죽음이 상헌(常憲)에서 벗어났으니,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같은 두 역적이 홀로 오늘날 전형(典刑)에서 모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역괴(逆魁) 김창집·이이명을 모두 유사(攸司)에 명하여 빨리 참시(斬屍)를 시행하게 해서 전형(典刑)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번갈아가며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부원(府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김일경(金一鏡)이 아뢰기를,
"독약을 쓴 김성(金姓)의 궁인(宮人)을 지난번에 대신(大臣)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사출(査出)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아직도 출부(出付)한 일이 없으니, 혹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는 가운데에 잊어버려서 그러한 것입니까? 신이 바야흐로 대직(臺職)에 있어서 논계(論啓)할 수 있으나, 이미 사부(査付)하라는 하교가 있기 때문에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요(煩擾)한 가운데에서 잊었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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