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0권, 경종 2년 172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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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계축

밤에 남방(南方)과 곤방(坤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유언통(兪彦通)을 정언(正言)으로, 이태좌(李台佐)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을 때 입시(入侍)하여 승지        이명언(李明彦)이 이르기를,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은 국가에 사친(私親)이 되어 봉사(奉祀)하는 사체(事體)가 중대합니다. 이세정(李世禎)은 죄명(罪名)이 지극히 무거워서 진실로 승습(承襲)하여 봉사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지 못한데, 이제까지 특별히 이홍술(李弘述)의 조카라 하여 봉사하도록 윤허하셨으니, 이미 지극히 해연(駭然)합니다. 더구나 이제 이명좌(李明佐)는 흉역(凶逆)으로 베어 죽였으니, 종사(宗嗣)를 옮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덕흥사(德興祠)가 바야흐로 그 집에 있으므로, 향화(香火)가 돈폐(頓廢)되었다고 하니, 진실로 미안(未安)합니다. 마땅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어진이를 가려서 입후(立後)490)                  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명언이 또 아뢰기를,
"양녕 대군(讓寧大君)은 세자(世子)로서 세종(世宗)에게 양위(讓位)하여 태백(泰伯)491)                  의 지덕(至德)과 다름이 없으므로, 그 사당(祠堂)을 지덕(至德)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손(子孫)이 중간에 끊기어 향화(香火)를 올릴 주인이 없어 연전에 조정에서 이미 어진이를 뽑아서 끊긴 대를 잇도록 하였는데, 아직도 사우(祠宇)를 세우지 못하였다고 하니, 또한 마땅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입후(立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10월 2일 갑인

양사(兩司)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 사간(司諫) 정해(鄭楷)·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부원(府院)의 전계(前啓) 또한 따르지 않았다.

 

평안도(平安道) 순안(順安) 땅에서 천둥하였다.

 

10월 3일 을묘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사간(司諫) 정해(鄭楷)·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합계(合啓)하여 조태채(趙泰采)를 안률(按律)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독(煩瀆)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육시(戮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제신(諸臣)이 서로 이어서 힘껏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김시엽(金始燁)이 전계(前啓) 3건을 독주(讀奏)하고, 정해(鄭楷)가 또 전계(前啓) 3건을 독주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김일경(金一鏡)이 진언(進言)하기를,
"지난번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김성(金姓)의 궁인(宮人)을 국옥(鞫獄)에 출부(出付)하는 일을 진달하였더니, 성상께서 번요(煩擾)한 가운데에 망각(忘却)하였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신이 즉시 출부(出付)함이 마땅하다고 한 지 이제 10일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적요(寂寥)합니다. 군정(群情)이 억울(抑鬱)해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그것을 과연 유념(留念)하고 계십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임금의 덕(德)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달려 있는데 경연을 폐각(廢閣)하고 행하지 않으시니, 진실로 매우 민울(悶鬱)합니다. 성체(聖體)가 강녕(康寧)하시지 못하고 일기(日氣)가 몹시 더운 때에는 비록 개강(開講)하기 어렵겠지만, 지금은 절기(節期)가 초겨울이 되었고, 또 심하게 추운 데 이르지 않았으니, 바로 자주 강연(講筵)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연접(延接)하여 경의(經義)를 토론하고 치도(治道)를 자방(咨訪)함이 마땅합니다. 또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습니다. 정의(情義)가 어찌 접견(接見)이 드물고 잦다 하여 얕고 깊겠습니까마는, 만약 또한 당(堂)에서 자주 접견하여 도유 우불(都兪吁咈)492)  하면, 상하의 사이에 친애하는 마음이 더욱 유연(油然)하게 생길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이봉년(李鳳年)이 이르기를,
"《서전(書傳)》에 이르기를, ‘학문에 힘쓰면 그 덕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닦여진다.[典于學厥德修罔覺]’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유신을 자주 접견하여 강토(講討)하고 자방(咨訪)하면, 그 학문을 성취하고 치도(治道)를 보익(補益)함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10월 4일 병진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 담운(淡雲) 사이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에 들어갔는데, 형상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는 3, 4척 정도이며, 빛깔은 희고 광채가 땅을 비치었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20번이나 정사(呈辭)493)  하니, 전교하기를,
"근간(懃懇)한 뜻을 여러 번 베풀었는데, 사직하는 서독을 계속하여 올리니, 놀란 나머지 도모할 방도를 잃어 효유할 것이 없다. 아! 오늘날이 어떠한 시기인가?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달마다 일어나는데, 사방(四方)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어서 빙문(騁問)할 바가 없음을 탄식한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모르는 사이에 오열(鳴咽)하게 된다. 경(卿)은 교목 세신(喬木世臣)494)  으로서 의리로 휴척(休戚)을 같이 하였으니, 그 한결같이 괄시(恝視)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모름지기 목마른 듯한 뜻을 몸받아 다시는 정세와 병으로 사직(辭職)하지 말고, 속히 나와 논도(論道)하여 아침 저녁으로 생각하고 그리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그대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양사(兩司)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정언(正言) 유언통(兪彦通)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국청(鞫廳)의 석방된 김유경(金有慶)은 일찍이 의주 부윤에 부임하였을 때에 역적 이정식(李正植)을 편비(偏裨)로 삼아 막하(幕下)에 두고, 흉역(凶逆)을 친애한 정상은 이미 인심(人心)의 의혹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우홍채(禹洪采)를 결안(結案)한 초사(招辭)가 나오자, 더욱 의심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개 우홍채와 김창도(金昌道)가 은화를 모을 즈음에, ‘만약 영문(營門)에서 획급(劃給)한 관문(關文)을 얻었다면, 추이(推移)하여 빙자할 길이 있을 만하였다.’ 하였으니, 비밀히 모의하며 정적(情跡)이 음비(陰祕)하였습니다. 도모하여 얻었다는 말이 막 역적의 입에서 나왔고, 획급하라는 영(令)이 과연 영문의 관문에서 나와 이록(移錄)한 문서(文書)가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이 있으나, 곡물(穀物)이 간 곳은 끝내 분명하지 않으니, 이것을 물정(物淸)이 모두 해혹(駭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임방(任埅)은 기사(耆司)의 관문(關文)을 만들어 주었다 하여 찬배(竄配)하는 형률을 더하였는데, 하물며 이 김유경(金有慶)이 범한 것은 이보다 큰 것이겠습니까? 그 정상을 논하면 병예지전(屛裔之典)495)  을 시행함이 합당하니, 청컨대 원찬(遠竄)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금년에 전국의 흉겸(凶歉)은 근래에 없었던 것입니다. 듣건대 해조(該曹)의 연분 사목(年分事目)496)   또한 전재(全災)497)  ·9분재(九分災)로 주었다고 하는데, 9분재(九分災)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전연 낫[鎌]을 대지 않은 곳입니다. 그리고 7, 8분(分)에 이르러서도 처음부터 거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 듣건대 각도의 연조(年條)를 비교해 보았더니, 기전(畿甸)498)  의 을미년499)  과 호남(湖南)의 경진년500)  과 호서(湖西)의 기축년501)  은 바로 전후(前後) 수십 년 이래로 가장 풍등(豐登)한 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금년을 이 해에 비교하여 한번 사목(事目)을 반하(頒下)한 뒤로 민심(民心)이 소연(騷然)하여 원망과 비방이 하늘에 사무치고, 토붕(土崩)의 근심이 조석(朝夕)에 박두해 있습니다. 묘당(廟堂)의 제신(諸臣)은 비록 경비(經費)를 염려하나, 경비의 부족은 오히려 제도(制度)로써 조절하는 방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민심이 분리되고 방본(邦本)이 쇠퇴해지는 것은 장차 무엇으로써 구원하겠습니까? 가을철이 벌써 지나고 연분(年分)을 마감(磨勘)하는 기일도 멀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미쳐서는 변통(變通)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청컨대 각도(各道)의 연분 사목(年分事目)을 급히 명하여 도로 정지하게 하고, 2, 3일 안으로 다시 소상(消詳)하게 분재(分災)를 더 주고, 비교한 연조(年條)를 개정(改定)하도록 성화(星火)같이 각도에 발송하여 지난한 백성의 몹시 괴로와하는 위급함을 풀어 주게 하소서."
하니, 말단(末端)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이덕수(李德壽)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자는 계청은 정지하였다.

 

10월 5일 정사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의 상참(常參)에 나아가니, 아뢸 것이 있는 관원은 전(殿)에 오르고, 양사(兩司)에서 청대(請對)하여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추보(追報)하는 일로써 품백(稟白)하기를,
"영상(領相)의 뜻은 이미 춘초(春初)에 올린 차자(箚子) 가운데에 진달하였고, 이제 변개(變改)할 의견이 없습니다. 신은, ‘만약 사당(祠堂)을 세우고 액호(額號)를 세운다면, 칭호(稱號)를 강정(講定)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미 칭호를 정하였으니,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명언(李明彦)의 소장(疏狀)에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정하자는 말이 있었는데, 대개 그가 논한 것은 다 원용(援用)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로써 정행(定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대로 시행(施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최석항이 이르기를,
"사우(祠宇)는 별도로 다른 곳에다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본궁(本宮) 안의 터가 약간 넓다고 하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서 영건(營建)하게 하소서. 묘소(墓所)의 수직군(守直軍)은 15명으로 작정(酌定)하되, 잡역(雜役)을 제하여 급복(給復)502)                  하고 제수(祭需) 또한 신비(愼妃)와 인빈(仁嬪)의 예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承旨)        박필몽(朴弼夢)이 뒤로 이 일을 상소(上疏)하여 논하는 자는 일체 받아들이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동의금(同義禁) 김시환(金始煥)이 이르기를,
"어유룡(魚有龍) 등의 차계(箚啓) 가운데에 환첩(宦妾)이 이름을 안다는 등의 말은 터무니없이 창출(創出)한 것이니, 마음을 씀이 무상(無狀)합니다.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모두 그의 무함을 받았으니, 그 정상(情狀)을 논하면 아주 절통(絶痛)합니다. 그러나 옥관(獄官)이 그의 공척(攻斥)을 많이 받았으므로, 혐의하여 안치(按治)하지 않고 수계(囚繫)한 지 해가 지났는데도 구경(究竟)할 기약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저 무리의 공사(供辭)에 정절(情節)이 죄다 드러났으니, 한결같이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은 마땅하지 못할 듯합니다. 대신(大臣)에게 하문(下問)하여 참작하여 정죄(定罪)하는 것이 불가(不可)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최석항(崔錫恒)이 참작하여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유중무(柳重茂)가 이르기를,
"죄상(罪狀)이 지중(至重)하여 악역(惡役)의 버금에 해당하니, 절도(絶島)에 투비(投畀)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이 무리의 죄명(罪名)은 얼마나 중대(重大)합니까? 김시환(金始煥)은 자신이 옥관(獄官)이 되어 이미 그 임금을 속인 부도(不道)한 죄를 안핵(按覈)하지 못하고, 도리어 앞질러 작처(酌處)하기를 청하였으니,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옥관(獄官)으로 하여금 의언(議讞)503)                  하여 상주(上奏)하는 것은 법례가 그러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최석항(崔錫恒)이 이르기를,
"무릇 녹훈(錄勳)하는 법규는 임금이 원훈(元勳)을 정한 뒤로부터 원훈이 마땅히 녹훈해야 할 사람을 감정(勘定)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하(啓下)504)                  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상변(上變)한 사람 외에 달리 녹훈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중종조(中宗朝)에도 또한 단지 상변한 사람만 녹훈하였으니, 이제 목호룡(睦虎龍)만 녹훈하고, 초자(超資)하여 부직(付職)505)                  하는 것은 스스로 구례(舊例)가 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삼수(三手)의 역당(逆黨)은 진실로 천고(千古)를 통하여 보아도 없던 정절(情節)인데, 마침내 녹훈(錄勳)은 목호룡(睦虎龍) 한 사람만 감정(勘定)하여 세상의 여론도 불평(不平)이 많습니다.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는 대신(大臣)의 집을 왕래하며 상확(商確)한 것이 있는데도 오늘의 연석(筵席)에서는 끝내 한 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녹훈(錄勳)하는 대사(大事)를 어찌 이와 같이 초초(草草)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한배하(韓配夏)가 이르기를,
"이것은 진실로 대옥(大獄)인데, 상변(上變)한 자는 단지 목호룡(睦虎龍) 한 사람뿐이니, 오직 한 사람만 천거(薦擧)하는 외에 어디에서 다시 사람을 얻겠습니까? 또 어찌 구차하게 비슷한 사람을 억지로 충당하여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이것은 국가의 대사(大事)이므로, 신이 사서(私書)로써 한배하(韓配夏)에게 물었더니, 한배하가 말하기를, ‘널리 물의(物議)를 들으니, 지금 이 녹훈(錄勳)은 초초(草草)하게 할 수 없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전석(前席)에서 진달한 것은 신에게 비답한 것과 크게 다름이 있으니, 진실로 그릇되었습니다. 정여립(鄭汝立)은 전(前) 수찬(修撰)으로 호남(湖南)에서 모역(謀逆)하였는데, 이것은 호미로 창을 삼은 무리가 시골에서 일어난 데에 지나지 않았으나, 선묘(宣廟)께서 진노하셔서 끝까지 다스려 복법(伏法)한 뒤에 안옥(按獄)한 대신(大臣)을 모두 훈록(勳錄)하는 데에 넣었습니다. 이제 이 역당(逆黨)은 모두 세력 있는 집안의 대가(大家)에서 나왔고, 우상(右相)은 홀로 안치(按治)한 지 전후 8개월 만에 구핵(鉤覈)한 바가 자세하고도 명확하였으므로, 외간(外問)에서 모두 대신(大臣)은 마땅히 원훈(元勳)을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자, 최석항이 이르기를,
"안국(按鞫)한 제신(諸臣)을 녹훈(錄勳)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일찍이 인묘조(仁廟朝)의 정식(定式)이 있습니다. 심기원(沈器遠)의 옥사 같은 것은 황헌(黃瀗)이 그의 모의를 알고는 밤에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에게 고하고, 구인후는 그 당시의 상신(相臣) 김유(金瑬)에게 고하여서 발각된 까닭에 구인후·김유가 모두 녹훈(錄勳)되었고, 유효립(柳孝立)의 옥사는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그 모의를 알고 좌상(左相) 홍서봉(洪瑞鳳)에게 말하여 발각된 까닭에 훈적(勳籍)할 때에 허적은 1등을 삼고, 홍서봉은 2등을 삼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역모(逆謀)를 발각한 공로이며, 당초에 안옥(按獄)하였다 하여 한 것이 아닙니다. 신묘년506)                  에 김자점(金自點)의 옥사도 처음에 형찰(詗察)하여 상변(上變)한 일이 없고, 내간(內間)으로부터 발각(發覺)되어 점차 옥사를 이루었으므로, 국옥(鞫獄)에 참여하였던 제신(諸臣)은 끝내 녹훈(錄勳)한 일이 없었습니다. 경신년507)                  의 대옥(大獄)은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이 5개월 동안 안옥(按獄)하였으나, 또한 녹훈에 참여한 일이 없었으니, 대개 조종조(祖宗朝)의 정식(定式)을 경솔하게 변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간의 여론으로 말한다면, 지난 겨울 7신(七臣)의 소장(疏章)은 진실로 종사(宗社)를 안정시킨 큰 공로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 대관(臺官)이 논계(論啓)하여 16인을 변경에 귀양 보냈는데, 모역(謀逆)한 사람이 그 가운데에서 많이 나왔으니, 그 공로를 모두 녹훈(錄勳)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나, 신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난 겨울의 대처분(大處分)은 성단(聖斷)이 혁연(赫然)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공로를 신자(臣子)에게 돌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김일경(金一鏡)의 말과 같다면 위 항목의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훈록에 참여시킨 뒤에야 바야흐로 감훈(勘勳)하는 체통(體統)에 합당하다 하겠습니까? 공명(功名)을 논하는 즈음에 누군들 원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선조(先朝)께서 이미 정한 영갑(令甲)을 갑자기 변개할 수 없으며, 또 구차하게 널리 녹훈하는 것 또한 조정의 수치가 될 뿐일 듯합니다."
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국옥에 참여하여 이삼석(李三錫)의 초사(招辭)를 들으니, 그가 목호룡(睦虎龍)의 말을 들었는데,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508)                  에게 전하기를, ‘또는 국가에 휴척(休戚)의 의리가 있는데, 이 나라가 모두 멸망할 화(禍)가 조석(朝夕)에 박두해 있는 날을 당하여, 어찌 변(變)을 방비할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함원 부원군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한 조항은 이삼석(李三錫)을 조상(朝堂)에 불러서 물어 보면, 스스로 녹훈(錄勳)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어찌 노영손(盧永孫)만을 단록(單錄)하던 전례를 인용하여 초초(草草)하게 목호룡 한 사람만 녹훈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최석항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훈부 당상(勳府堂上)으로 하여금 이삼석(李三錫)을 불러서 물어 보게 하여 그 허실(虛實)을 알아내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일경(金一鏡)은 그 소두(疏頭)509)                  의 공로와 국옥(鞫獄)에 참여한 노고를 끼고 망령되게 분수에 지나친 녹훈을 바라고, 지척의 전석(前席)에서 먼저 안옥(按獄)한 대신(大臣)을 거론하고 다음으로 변(變)을 예방한 국구(國舅)를 원용(援用)하였다. 그러나 좌우(左右)로 추천하고 인용한 것은 뜻이 실지로 자신에 있었으니, 사람이면 누군들 대신(大臣)의 거론을 알지 못했겠는가? 7신의 상소(上疏)를 말한 것은 그의 심장(心臟)을 엿보아 속내를 알아내었다고 할 만한데, 선조(先朝)의 정례(定例)를 인용하여서 그 외람된 녹훈을 굳게 막은 것 또한 흔쾌하다고 하겠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고 염리(廉吏)를 장려하기를 청하였다. 이어서 증(贈) 참판(參判) 이명준(李明俊)·고(故) 감사(監司) 송정규(宋廷奎)·고(故) 목사(牧使) 김두남(金斗南)·고(故) 도정(都正) 강석범(姜錫範)의 빙벽(氷檗) 같은 조행을 천거하면서도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여 조정에서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고, 승지(承旨) 박필몽(朴弼夢)이 고(故) 판서(判書) 윤지인(尹趾仁)의 청렴 결백한 절조를 이어서 진달하고, 그 처(妻)에게 늠료(廩料)를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양건(兩件)을 독주(讀奏)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승지(承旨)와 옥당(玉堂)에서 반복하여 번갈아 아뢰고 힘껏 쟁집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의 전계(前啓)도 따르지 않았다. 김유경(金有慶)을 원찬(遠竄)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처음에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는데,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김유경은 출입(出入)하고 시종(侍從)하는 사람으로서 의주 부윤이 되어서도 역적 이정식(李正植)을 막비(幕裨)에 두었고, 황해도 감사가 되어서도 감영(監營)의 곡식을 획급(劃給)하여 적당(賊黨)의 요구에 곡진하게 부응하였으니, 어찌 죄(罪)가 없다고 하여 오래도록 유윤(兪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 이르기를,
"이 계청은 신이 제일 먼저 꺼낸 것입니다. 김유경의 죄는 조금도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유윤(兪允)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정해(鄭楷)·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가, 동료(同僚)가 이덕수(李德壽)를 삭판(削版)하라는 계청을 성급하게 정지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정언(正言) 유언통(兪彦通)이 대각에 이제 막 들어와 소솔(疏率)하여 정계(停啓)하였다 하여 인피하고,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이 혐의를 무릅쓰고 처치를 담당한 것은 불가(不可)하였다고 인피하고는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로 3년 동안 친히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본 적이 대개 많지 않았으므로, 군신(群臣)이 늘 조회의 성의(盛儀)를 보지 못하였다 하여 겸결(歉缺)하게 여기었는데, 이제 양복(陽復)의 달에 갑자기 상참(常參)을 행하여 보고 들음이 미치는 곳마다 용동(聳動)하지 않음이 없으니, 분발하는 성심(聖心)을 다 축하함이 오늘부터 비롯되었다.

 

이중술(李重述)을 지평(持平)으로, 조진희(趙鎭禧)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국청(鞫廳)에서 조성복(趙聖復)을 옥(獄)에 가두었다.

 

10월 6일 무오

묘시(卯時)·진시(辰時)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고,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510)  에 나타났으며, 밤에 금성(金星)이 남두(南斗)의 제3성(第三星)을 범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처치(處置)하여 아뢰기를,
"요석(僚席)의 주착(做錯)이 자신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참여하여 소상(消詳)하지 않았으니, 대례(臺例)에 어긋납니다. 동료(同僚)가 관례로 인피(引避)하는 것을 어찌 반드시 이끌어 혐의하겠습니까? 청컨대 사간(司諫) 정해(鄭楷)·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은 출사시키고, 정언(正言) 유언통(兪彦通)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7일 기미

양사(兩同)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사간(司諫) 정해(鄭楷)·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헌납(獻納) 이명의(李明誼)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원(府院)의 전계(前啓)도 모두 따르지 않았다.

 

10월 8일 경신

조경명(趙景命)·심공(沈珙)을 승지(承旨)로, 이세덕(李世德)을 집의(執義)로, 이광도(李廣道)를 정언(正言)으로, 박필몽(朴弼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여선장(呂善長)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0월 9일 신유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명회(李明會)는 곧 이명좌(李明佐)의 아우요, 이명익(李明翼)의 형이며, 이홍술(李弘述)의 종손(從孫)인데, 또 그의 사람됨이 더욱 지극히 음휼(陰譎)하고 간특(奸慝)하여, 여러 흉적(凶賊)과 체결하여 밤낮으로 왕래하며 종적(蹤跡)이 주무(綢繆)한 정상은 온 세상에서 함께 지목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이홍술(李弘述)의 역절(逆節)이 죄다 드러난 뒤에 이명좌·이명익이 또 교통하며 정상을 안 죄(罪)로 혹 죽이거나 혹은 유배하였는데, 이명회만이 홀로 법망에서 누락되어 여정(輿情)이 다 분개해 함을 면하지 못하니, 그대로 연곡(輦轂)의 아래에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배천 군수(白川郡守)        윤득인(尹得仁)의 사위 유씨(兪氏) 성(姓)의 사람은 윤득인의 임소(任所)에 따라가서 관비(官婢)를 희압(戱狎)하는 즈음에 어떤 통인(通引)511)                  이 몰래 엿보자, 이로 인해 노하여 함부로 매를 때려 치사(致死)케 하였습니다. 그의 아비가 영문(營門)에 나아가 소송하였는데, 감사(監司)가 별도로 사관(査官)을 정하지 않고, 단지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자, 윤득인(尹得仁)이 죽은 사람의 친척을 위협(威脅)하여 고한(辜限)512)                  이 지난 뒤에 죽었다는 뜻을 억지로 봉초(捧招)하도록 하고는 영문(營門)에 거짓 보고하여 옥사를 이룰 수 없게 하였습니다. 삼장(三章)의 법(法)513)                  은 살인(殺人)보다 엄중한 것이 없는데, 감사와 수령이 사사로운 뜻을 부정하게 좇아서 주차(周遮)하고 엄치(掩置)한 정상은 모두 지극히 해악(駭愕)하게 여길 만합니다. 청컨대 그 당시의 감사(監司)는 파직(罷職)하고, 배천 군수        윤득인(尹得仁)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며,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수금(囚禁)하고 사문(査問)을 행하여 율(律)에 의하여 감죄(勘罪)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유경(金有慶)을 숙천부(肅川府)에, 어유룡(魚有龍)을 영암군(靈巖郡)에, 이중협(李重協)을 해남현(海南縣)에, 박치원(朴致遠)을 고성현(固城縣)에 귀양 보냈다. 어유룡 등이 옥(獄)에서 나올 때 홀로 이중협만이 그의 종제(從弟) 이중술(李重述)에게 이르기를,
"내가 옥(獄)에 갇혀 있을 때에 국옥(鞫獄)의 사정(事情)을 대략 듣고 본 바가 있는데, 그 흉모(凶謀)가 낭자(狼藉)한 것이 참으로 역적이었다. 이제까지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워서 이 무리들이 행한 일이 이와 같은 줄도 모르고 무리를 좇아 물결만을 따르다가 마침내 대륙(大戮)514)  에 빠졌으니,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느냐?"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중추(領中樞) 김우항(金宇杭)에게 별유(別諭)하였다. 김우항은 선조(先朝)의 노대신(老大臣)인데, 추보(追報)하는 일을 수의(收議)할 때에 김일경(金一鏡)에게 공척을 당해 교외(郊外)에 퇴거(退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의 연백(筵白)으로 인하여 하유(下諭)하여 개석(開釋)하고, 명하여 즉시 조정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김우항은 병(病)으로 사양하고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10월 10일 임술

김동필(金東弼)·정해(鄭楷)를 승지(承旨)로, 이명의(李明誼)를 부교리(副校理)로, 이기성(李基聖)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삼았다. 종성(鍾城)은 북변(北邊)의 거진(巨鎭)이니, 변경이 무사(無事)하다고 하여 그 수령(守令)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노쇠하고 잔열한 이기성을 이 직임에 가려서 제수(除授)하였으니, 지방을 다스리고 변방을 방어하는 책무를 그가 감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변민(邊民)이 반드시 장차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비웃을 것이니, 탄식(歎息)을 금할 수 있겠는가?

 

양사(兩司)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지평(持平) 이중술(李重述)·김시엽(金始燁),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북한(北漢)이 백성에게 폐해를 끼친 지 또한 이미 오래되었는데, 다행히 성단(聖斷)의 혁연(赫然)함에 힘입어 경리청(經理廳)에서 요판(料辦)한 폐해를 혁파하니, 외방(外方)의 민원(民怨)이 조금 풀리었습니다. 그러나 금위영(禁衞營)·훈국(訓局)·어영청(御營廳)·삼군문(三軍門)의 보미(保米)515)  를 북한(北漢)에 수납(輸納)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옛적에, ‘그 한 가지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였던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북한(北漢)에 성(城)을 삼을 곳은 산꼭대기에 있으므로, 도로(道路)가 몹시 험준하여 백성이 수운(輸運)할 즈음에 왕래하기 지극히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하루 동안 역(役)으로 한 짐을 나르는 데 이틀간의 노고가 소비되는데, 운반하여 납부할 때에 미쳐서도 주관(主管)하는 하인배(下人輩)들이 오로지 정해진 수량보다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만 일삼으니, 1곡(斛)을 납부하는 데 또 반곡(半斛)의 쌀이 소비됩니다. 또 일찍이 전에 봉류(棒留)한 쌀은 군향(軍餉)이라고 핑계되어 벌써 여러 해를 경과하여 부패(腐敗)한 것이 반은 넘으며, 줄어든 것도 또한 많습니다. 만약 다시 수년(數年)이 지나면 반드시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소모되어 또 다 없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금년에는 흉년의 참혹함이 근래에 없었던 경우이겠습니까? 무릇 민폐(民弊)에 관계되는 것은 별도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북한(北漢)에 봉류(棒留)한 삼군문(三軍門)의 보미(保米)는 매년 봄을 기다려 개색(改色)516)  하여 내주고, 금년조(今年條)의 보미는 구례(舊例)에 의하여 내영(內營)에 수납(輸納)하게 하여 흉년의 민폐를 제거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명봉(趙鳴鳳)은 일찍이 성상께서 대리(代理)하시던 날에 마침 궁관(宮官)의 반열에 끼어 있었는데, 고묘(告廟)517)  의 시행을 청하는 진소(陳疏)가 정원(政院)에 이르러 승지와 사관(史官)에게 차례로 보이는 즈음에 별안간 군흉(群凶)이 저지하는 말을 듣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어 초소(初疏)를 산개(刪改)한 정상을 뭇사람이 눈으로 다 보고는, 분완(憤惋)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힘써 고묘(告廟)를 저지한 역적 김창집(金昌集)은 이미 불궤(不軌)의 장본(張本)이 되었으니, 그가 이미 올렸던 소(疏)를 뒤미쳐 고쳐서 흉역에게 아첨을 구한 죄(罪)를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씨(張氏)를 추존(追尊)하여 옥산 부대빈(玉山府大嬪)이라 하였으니, 장씨는 임금의 생모(生母)이다. 예조(禮曹)에서 추보(追報)하는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고, 조목을 열거하여 올리기를,
"길일(吉日)을 가리어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하고,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제주관(題主官)을 차송(差送)케 하고, 사우(祠宇)의 간가 제도(間架制度)는 한결같이 신비(愼妃)의 사우(祠宇)와 같게 할 것이며, 물력(物力)은 호조·병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별도로 감역관(監役官)을 정하여 조성(造成)케 하소서. 사중삭(四仲朔)518)  의 시제(時祭)는 초정일(初丁日)을 채용하되, 기제(忌祭)와 사우(祠宇)에서 아울러 거행하고, 사절일제(四節日祭)는 묘소(墓所)에서 행사(行祀)하소서. 그리고 모든 제사(祭祀)는 모두 내시(內侍)로 하여금 축문(祝文) 없이 설행(設行)하게 하고, 제수(祭需)는 해조(該曹)와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인빈(仁嬪)의 예와 같이 봉진(封進)하게 할 것이며, 묘소의 수직군(守直軍)은 15명으로 정하여 급복(給復)하고 호역(戶役)을 면제하게 하소서."
하였다.

 

10월 11일 계해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임금이 전경 문신강(專經文臣講)519)  을 친히 시험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진언(進言)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을 대계(臺啓)로 인하여 나래(拿來)하였는데, 사체로 보아 마땅히 엄중하게 추국(推鞫)하여야 할 것이나, 대저 안문(按問)하는 규례는 반드시 은휘(隱諱)한 정상이 있은 뒤에야 바로 형신(刑訊)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조성복은 죄상(罪狀)이 저의 소중(疏中)에 죄다 있으므로, 곧장 정법(正法)520)  하여도 옳으며, 달리 구문(鉤問)할 단서가 없습니다. 형신(刑訊)을 더하는 것은 안옥(按獄)하는 대체에 어긋남이 있고, 전날에 작처(酌處)했던 것 또한 이 때문이니, 전례에 의하여 절도(絶島)에 천극(栫棘)521)  하는 것이 성조(聖朝)의 관대(寬大)한 법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최석항이 또 이르기를,
"국수(鞫囚) 홍계적(洪啓迪)을 더 형신(刑訊)하라는 의계(議啓)를 비록 이미 계하(啓下)522)  하였으나, 홍계적의 죄는 두 조목이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애통(哀痛)한 교서를 두 번 내리시어 도움을 대신(大臣)에게 구하셨는데, 홍계적이 갑자기 봉환(封還)하자 대신이 청대(請對)하였으니, 대개 천위(天位)를 도와서 편안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홍계적이 방자한 마음으로 저지하였으니, 그 죄(罪)를 논하면 비록 중전(重典)에 두더라도 진실로 족히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국옥(鞫獄)을 안치(按治)하는 데는 스스로 격례(格例)가 있습니다. 흉역(凶逆)을 음모하고도 실토(實吐)하지 않는 자는 바야흐로 신문(訊問)할 수 있으나, 지금 홍계적은 두 조목의 일을 애당초 감히 공사(供辭)에서 은휘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신문하는 것은 아마도 옥체(獄體)가 못되는 듯합니다. 단지 조송(趙松)을 죽일 만하다는 말만은 신문(訊問)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조송의 입에서 나와 홍의인(洪義人)과 홍계적이 수작(酬酢)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조송과 홍의인이 모두 이미 장폐(杖斃)되었으니, 빙거하여 물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형문(刑問)만 더하니, 후폐(後弊)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승지(承旨) 이명언(李明彦)·정해(鄭楷)·심공(沈珙)·김동필(金東弼)·이봉년(李鳳年) 등이 참작하여 처치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번갈아 진달하였다. 임금이 은미하게 발락(發落)523)  하니, 제신(諸臣)이 듣지 못하였다. 심공(沈珙)이 이르기를,
"그대로 형문(刑問)을 더하라는 하교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이 이르기를,
"전하께서 장차 탄신(誕辰)에 친림(親臨)하시어 하례를 받는 것은 전하께서 혹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탄신(誕辰)의 진하(陳賀)에는 선조(先朝) 때부터 친림하는 법이 없습니다. 또 전사(前史)를 살펴보건대 당 태종(唐太宗)이 이르기를, ‘생일(生日)은 부모(父母)가 구로(劬勞)하신 날인데, 어찌 이 날 연락(宴樂)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태종의 이 말은 다 좋은 것이 되니, 이제 친림하여 하례를 받는 것은 정지(停止)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최석항이 이르기를,
"이명언의 말이 진실로 옳으니, 권정(權停)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의관(醫官) 방진기(方震夔)는 처상(妻喪)의 발인(發靷) 때에 감히 방상씨(方相氏)로서 전도(前導)하였고, 반혼(返魂) 때에는 4면(面)을 주렴(朱簾)으로 가린 육인교(六人轎)를 사용하니, 행로(行路)의 조사(朝士)로 하여금 사부가(士夫家)의 혼거(魂車)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여 말을 머무르고 회피(回避)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만일 오늘날 국가에 조금이라도 기강(紀綱)이 있다면 보잘것없는 한낱 의관(醫官)이 분수에 어긋난 제도를 참칭하여 방자하고도 무엄(無嚴)함이 어찌 감히 그러하였겠습니까? 그 상하를 분변하고 등위(等威)를 엄히 행하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별도로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명회(李明會)를 부안현(扶安縣) 위도(蝟島)에 유배하였으니, 대계(臺啓)를 따른 것이었다.

 

역관(譯官) 황하성(黃夏成)이 의서(醫書) 《적수현주(赤水玄珠)》 1질(秩) 51책(冊)을 사사롭게 사서 내의원(內醫院)에 바쳤는데, 내의원에서 일을 계문(啓聞)하니, 사역원(司譯院)으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시상(施賞)하게 하였다.

 

10월 12일 갑자

박희진(朴熙晉)을 승지로, 김시혁(金始㷜)을 헌납(獻納)으로, 정수기(鄭壽期)를 사간(司諫)으로, 이세최(李世最)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유필원(柳弼垣)을 부교리(副校理)로, 심단(沈檀)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그리고 목호룡(睦虎龍)을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삼았으니, 경신년524)  에 상변(上變)했던 정원로(鄭元老)의 예에 의하여 가선(嘉善)의 품계에 초탁(超擢)하여 이 직(職)을 제수한 것이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빨리 조성복(趙聖復)을 배소에 도로 보내라는 명을 중지하고, 그대로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쾌하게 전형(典刑)을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10월 13일 을축

간원(諫院)  【사간(司諫) 정수기(鄭壽期)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시번(李時蕃)은 본시 명가(名家)의 족친(族親)으로서, 이제까지 흉적의 집안에 투적(投跡)하여, 이력(履歷)이 부족한데도 외람되게 기보(畿輔)를 맡았으며, 명진(名鎭)에 제배한 지 오래지 않아서 바로 외곤(外閫)의 중임(重任)을 제수하였으니, 그가 인연하여 출입하고 부탁한 추비(麤鄙)525)  한 정상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본주(本州)에 도임(到任)한 뒤에는 한갓 재물을 탐하는 것만 일삼아 민원(民怨)이 갈수록 심해졌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귀성 부사(龜城府使) 김정하(金鼎夏)는 본시 용렬하고 비루한 사람으로서, 비록 권관(權管)·진장(鎭將)을 삼더라도 결코 감당할 수 없는데, 이러한 흉년에 들어 진휼을 의논하는 날을 당하여 이와 같은 사람을 자목지관(字牧之官)에 두면, 백성이 해(害)를 받는 바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본읍(本邑)은 바로 변방의 중지(重地)인데, 여러 차례 비인(匪人)을 겪어 민읍(民邑)이 잔파(殘破)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러한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을 보내면, 이는 변경의 백성을 거듭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성화(聖化)가 개기(改紀)한 뒤에 경악(經幄)의 장석(長席)에 출입한 자는 수인(數人)에 지나지 않으니, 까닭없이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하는 것은 불가(不可)합니다. 새로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제수된 이명언(李明彦)은 비록 그 정사(情事) 때문에 승선(承宣)526)  에서 체차(遞差)되기를 원하여 외직에 보임하기에 이르렀다 하나, 매우 의의(意義)가 없습니다. 흉년에 재해가 심한 고을에서 만일 이러한 사람을 얻으면 집안에 누워서 고을을 다스릴 것이니, 구임(久任)527)  시키면 백성이 그 은혜를 입을 것이나, 이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지 않아서 형세가 장차 도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전조(銓曹)에서 비록 명관(名官)을 위하여 그의 소원에 곡진히 부응하였다 하나, 유독 민사(民事)의 불쌍함과 정격(政格)이 어그러짐은 생각지 않는 것입니까? 청컨대 체차(遞差)하고, 이조(吏曹)의 당해 당상(當該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국청(鞫廳)에서 홍순택(洪舜澤)의 종[奴] 업봉(業奉)을 옥에 가두었다.

 

지평(持平) 이중술(李重述)·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인피(引避)하고 아뢰기를,
"오늘 국좌 죄인(鞫坐罪人) 홍계적(洪啓迪)의 일을 완의(完議)528)  할 즈음에 후일 등대(登對)할 때에 품처하겠다는 것으로 의계(議啓)하려고 하였는데, 그 당부(當否)를 하문하시므로, 신 등이 말하기를, ‘홍계적이 군부(君父)를 조절(操切)한 죄(罪)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모두 죽일 만하다고 합니다. 조송(趙松)을 죽일 만하다는 말에서 흉역(凶逆)의 정상이 더욱 명백하니, 이미 국청(鞫廳)에서 법에 의거하여 형문(刑問)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엄중하게 형신(刑訊)하여 실정을 다 말하도록 기필함이 마땅한데, 한 번 형문(刑問)를 더한 뒤에 갑자기 그대로 가두기를 청하였으니, 국체(鞫體)에 어긋남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물정(物情)에도 크게 어그러집니다.’ 하고, 여러 차례 쟁집(爭執)하다가 일제히 일어나서 끝내 회청(回聽)하지 않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무릇 국좌(鞫坐)의 규례는 반드시 양사(兩司)에서 귀일(歸一)하여 거수(擧袖)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바야흐로 완의(完議)를 이루는데, 이제 바로 상규(常規)를 파탈(擺脫)하고 구차하게 의계(議啓)하였으니, 실로 전에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이것은 신 등이 피연(疲軟)하여 경시(輕視)당한 소치(所致)가 아님이 없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사직(辭職)하지 말라."
하니, 이중술·조진희가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10월 14일 병인

달무리하였다.

 

박필몽(朴弼夢)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김시혁(金始㷜)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의 각 진보(鎭堡)의 방군(防軍)에게 급대(給代)하는 포(布)는 다달이 회계(會計)하고, 내려준 실수(實數) 외의 남은 포는 비국(備局)에 보고하는 것이 바로 새로 반포한 사목(事目)인데, 성책(成冊)하여 수보(修報)할 즈음에 간위(奸僞)가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달마다 받는 것은 명목(名目)을 만들어 전체의 수량을 취용(取用)하니, 보고하여 온 남은 포는 미수(未收)한 유(類)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문(移文)이 왕복하며 인족(隣族)을 침어(侵漁)한 폐단이 한이 없는데도, 비국(備局)에서는 한갓 허부(虛簿)만 가지고 있어 전혀 실효(實效)가 없습니다. 심지어 수군 대장(水軍大將) 이하까지 모두 하기(下記)529)  가 있어서 비국(備局)에 보고하게 하는 등 절목(節目)이 번쇄하여 사체(事體)를 상손(傷損)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다시 상확(商確)을 더하여 수보(修報)의 절목(節目)을 즉시 혁파하게 하소서.
삼남(三南)530)   연해(沿海)에 있는 생민(生民)이 고달프고 파리한 것은 실로 진보(鎭堡)의 신설(新設)이 많은 데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적로(賊路)의 요해지(要害地)에 모두 이미 방수(防守)를 설치하였는데, 신설한 곳은 백성이 스스로 둔(屯)을 설치해서 보(堡)를 삼았거나 혹은 감목(監牧)으로 인해서 진(鎭)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방군(防軍)을 할급(割給)하여 한 아문(衙門)을 만들고는 포를 거두어 급대(給代)하기를 한결같이 제진(諸鎭)의 군액(軍額)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역(役)이〉 증가(增加)되어 한 사람이 혹 여러 역을 겸하니, 불쌍한 우리 백성이 어떻게 보존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남군(南郡)에 있으면서 여러 군데에 신설한 진(鎭)을 직접 보았더니, 세도 있는 집안의 문얼(門孼)이 처음에는 별장(別將)·목관(牧官)으로 내려온 다음 인연(夤緣)해서 청촉(請囑)을 꾀하고는 승진하여 첨사(僉使)가 되면, 난만하게 그 번포(番布)531)  를 사용하고, 외람되게 그 이력(履歷)을 차지하니, 일이 매우 통해(痛駭)합니다. 삼남(三南)이 이와 같으면 다른 도(道)도 알 만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순문(詢問)하여 신설(新設)한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곳을 일일이 조사해 내어 혁파(革罷)하게 하소서.
지난날 역적 김창집(金昌集)이 국정을 맡아 볼 적에 그의 아우 김창업(金昌業)은 재화와 이익을 탐하는 사람으로서, 그 기세(氣勢)를 빙자하여 전리(箭里)의 열무(閱武)하는 장소와 성곽 밖의 소나무를 기르는 땅에다 전답(田畓)을 만들고, 백성을 모아서 경작하고 개간하였는데 나라의 금령이 있지 않으니, 제멋대로 자기의 물건으로 만들습니다. 일의 통완(痛惋)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청컨대 경조(京兆)532)  로 하여금 낭청(郞廳)을 보내어 일일이 적간(摘奸)해서 전례에 의하여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영천 군수(榮川郡守) 조영록(趙榮祿)은 곧 역적 조송(趙松)의 적질(嫡姪)입니다. 조송이 만약 실정을 말하여 복법(伏法)되면, 조영록도 수사(收司)533)  하는 가운데에 있어야 마땅한데, 단지 조송이 장형(杖刑)을 참다가 경폐(徑斃)534)  함으로 인하여 비록 연좌(緣坐)의 율(律)을 시행하지 못하였으나, 그가 흉역(凶逆)의 지친(至親)으로서 어찌 감히 그대로 자목지임(字牧之任)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고, 처치(處置)하여 아뢰기를,
"완석(完席)535)  에서 쟁집(爭執)하였으니, 이미 대체(臺體)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인혐(引嫌)하는 것은 자못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되니, 청컨대 지평(持平) 이중술(李重述)·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를 출사(出仕)시키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명하여 대제학(大提學) 조태억(趙泰億)을 불러 훈호(勳號)를 찬정(撰定)하게 하였는데, 조태억이 명(命)에 응하지 않고 상소(上疏)하여 간략하게 이르기를,
"신은 감훈(勘勳)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하여 마음에 의혹되는 것이 있습니다. 개국(開國)한 이래로 20명의 공신(功臣)이 매양 3등이나 혹은 4등에 있었고, 일찍이 1인만 단록(單錄)한 경우는 있지 않았으니, 대개 과거(科擧)에 반드시 갑(甲)·을(乙)·병(丙)의 3등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절제(節製)536)  에 단지 한 사람만 뽑는 것과 같은 경우에는 3등의 체격(體格)을 이룰 수 없으므로, 홀로 창제(唱第)할 수 없어서 드디어 직부 전시(直赴殿試)537)  케 하는 규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녹훈(錄勳)하는 데 단지 한 사람만 녹훈하면, 장차 목호룡(睦虎龍)으로 1등을 삼겠습니까, 2등을 삼겠습니까, 또한 3등을 삼겠습니까? 전례(前例)에 감훈(勘勳)할 때에는 10자(字)의 장호(長號)538)  를 찬출(撰出)하되, 많은 자는 혹 12자(字)나 되었으며, 적어도 또한 8자(字)에 밑돌지 않았습니다. 또 1등은 그 명칭을 전부 사용하였고, 2등은 그 2자(字)를 덜었으며, 3등은 그 4자(字)를 덜었으니, 법례(法例)가 그러하였습니다. 근례(近例)에 상변(上變)한 자는 으레 3등을 삼았으니, 이제 목호룡 또한 3등을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등과 2등은 없고 단지 3등만 녹훈(錄勳)함이니, 이미 매우 의의가 없습니다. 만약 단지 3등만 녹훈하면 10자의 장호(長號)는 소용이 없고, 단지 마땅히 6자(字)·4자(字)로 지어야 할 따름이니, 개국(開國)한 이래로 일찍이 이런 규례는 없었습니다.
이제 언자(言者)가 비록 노영손(盧永孫)의 단록(單錄)을 가지고 예로 들지만, 이는 옳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노영손은 처음에 많은 사람과 같이 녹훈(錄勳)되었는데, 이미 녹훈한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삭훈(削勳)하고 단지 노영손만 두었으니, 이것은 오늘날 원용(援用)할 만한 예가 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묘당(廟堂)과 맹부(盟府)539)  로 하여금 공의(公議)를 널리 채택하여 다시 상세하게 감훈을 더하여 대려(帶礪)540)  의 중전(重典)을 초초(草草)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명호를 의논하여 찬정(撰定)할 수 있을 것인데, 이와 같지 않으면 전에 없던 일을 신은 할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이 소장(疏章)을 내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소사(疏辭)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조흡(趙洽)을 옥에 가두었다.

 

10월 15일 정묘

밤에 달무리하였다.

 

임금이 유생(儒生)에게 강경(講經)을 친히 시험보이고,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정내복(丁來復)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 입격(入格)한 8인에게는 혹 초시(初試)를 주거나 혹은 지(紙)·필(筆)·묵(墨)을 주었다. 임금이 명하여 시위(侍衞)한 제신(諸臣)에게 자리를 내려 주고 앉도록 하였으니, 대개 일전에 문신(文臣)이 전강(殿講)할 때에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가 시위(侍衞)하며 전상(殿上)에서 각질(脚疾)이 있어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곧 앉았는데, 승지(承旨)가 추문(推問)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오늘 이 명령이 있었으니, 제신(諸臣)이 다 체하(體下)의 인(仁)을 우러러보았다. 지평(持平) 이중술(李重述)·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헌부(憲府)의 전계(前啓)를 따르지 아니하니,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덕준(李德峻)은 이입신(李立身)의 손자로서, 대대로 회금(灰金)의 복심(腹心)이 된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회금(灰金)이 독약(毒藥)을 썼던 일을 한 번 잡아다 신문할 것 같으면, 일일이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이 이미 김성절(金盛節)의 결안(結案)한 초사(招辭)에서 나왔습니다. 또 국안(鞫案)으로 따로 둔 문서(文書) 가운데에 양익표(梁益標)·심진(沈榗)이 공초한 것을 보면, 이숭조(李崇祚)가 말하기를, ‘「너는 한갓 영상(領相)의 권애(眷愛)만 믿고 사환(仕宦)할 수 있겠느냐?」라는 등의 말로 이덕준으로 하여금 그에게 공갈(恐喝)하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김가(金家)에 왕래하였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숭조·이덕준이 가끔 은(銀)을 모아서 장세상(張世相)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등의 말을 그에게 언급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덕준은 늘 국가의 병환(病患)이 예사롭지 않으나, 노론(老論)은 반드시 염려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고 하였으니, 곧 이 세 조목은 그가 회금(灰金)과 협동하여 불궤(不軌)를 함께 도모한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음을 알 만한데, 국청(鞫廳)에서는 아직도 형신하기를 청하지 않고 있으니, 안옥(按獄)하는 체통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이 세 조목을 문목(問目)에 첨입(添入)시켜 엄중하게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의 전계(前啓)를 따르지 않았다. 조성복(趙聖復)의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미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으므로, 박필몽(朴弼夢)이 진언(進言)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을 전일에 발배(發配)하였을 적에 인심(人心)이 지극히 분완(憤惋)해 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제 단서가 더욱 다시 드러나서 소장(疏章)은 심상길(沈尙吉)이 지었으며 장세상에게 뇌물(賂物)을 주었다는 말이 역적의 초사에 낭자(狼藉)하여 결코 용서하기 어려우니, 빨리 대언(臺言)을 따르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홍계적(洪啓迪)이 부범(負犯)한 것은 인신(人臣)의 극죄(極罪)가 아님이 없습니다.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그의 음회(陰懷)하고 불측(不測)한 마음을 굽어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조송(趙松)을 죽일 만하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벌써 역적 조송이 스스로 밝힌 초사(招辭)로 인하여 남김없이 탄로(綻露)되었습니다. 과연 역엄(逆閹)과 교통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상관(相關)한 일이 없었다면, 조송이 은화를 훔친 것을 어떤 연유로 듣고 알았기에 지극한 원한을 품고 죽이고자 하였겠습니까? 국청(鞫廳)에서 이미 형신하기를 청하여 재차 신국(訊鞫)을 더한 뒤에 달리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었는데, 이제 말할 계제가 이미 끊겼다고 핑계대어 갑자기 후일(後日)에 품처(稟處)하기를 청하였으니, 흉역(凶逆)은 더욱 징계되어 두려워할 바가 없고 여분(輿憤)을 끝내 저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빨리 품처(稟處)하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그대로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다시 엄중하게 형신(刑訊)을 더하여 실정을 다 말하기를 기필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교하기를,
"본궁(本宮)의 사우(祠宇)를 지을 곳이 매우 합당하지 못하니, 밝고 넓은 곳을 다시 더 정결하게 골라 아뢰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추보(追報)하는 의절(儀節)은 비록 액호(額號)를 세우고 사우(祠宇)를 지어서 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군하(群下)가 짐작하여 헤아려서 품정(稟定)하면, 임금은 그대로 따를 뿐이다. 일찍이 조사(措辭)하여 하교(下敎)한 바가 없었으므로, 임금의 뜻이 어떠한지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후일에 대한 지나친 염려가 있어서 택지(擇地)하여 사우를 영건하라는 하교를 받기에 미치어 융숭한 예를 다하는 성정(聖情)을 볼 수 있었으나, 이에 그칠 따름이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리고 간사(奸邪)한 무리의 분수에 지나침을 바라는 말도 또한 점점 종식시킬 수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57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추보(追報)하는 의절(儀節)은 비록 액호(額號)를 세우고 사우(祠宇)를 지어서 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군하(群下)가 짐작하여 헤아려서 품정(稟定)하면, 임금은 그대로 따를 뿐이다. 일찍이 조사(措辭)하여 하교(下敎)한 바가 없었으므로, 임금의 뜻이 어떠한지 헤아리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후일에 대한 지나친 염려가 있어서 택지(擇地)하여 사우를 영건하라는 하교를 받기에 미치어 융숭한 예를 다하는 성정(聖情)을 볼 수 있었으나, 이에 그칠 따름이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리고 간사(奸邪)한 무리의 분수에 지나침을 바라는 말도 또한 점점 종식시킬 수 있었다."

 

10월 16일 무진

정수기(鄭壽期)를 수찬(修撰)으로, 유술(柳述)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봉사(奉祠)를 개정(改定)하는 일에 대해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헌의(獻議)하기를,
"봉사손(奉祀孫) 이정한(李挺漢)은 아들이 없어서 그의 삼촌질(三寸姪) 이홍일(李弘逸)로 계후(繼後)하게 하고, 승습(承襲)하여 도정(都正)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홍일이 죽으니 그의 아들 이세정(李世禎)이 계송하여 도정(都正)이 되었습니다. 이세정이 죽었으니, 그의 아들 이명좌(李明佐)가 마땅히 승습(承襲)하여야 하는데, 이제 이 국옥(鞫獄)에서 승복하여 정법(正法)되었으므로, 법으로 마땅히 파계(罷繼)하여야 합니다. 연신(筵臣)은 말하기를, ‘이세정은 이미 이 과옥(科獄)에 간범(干犯)한 사람이니, 봉사(奉祀)함은 부당하다.’ 하였고, 예관(禮官)은 말하기를, ‘이세정이 비록 봉사(奉祀)할 수는 없으나, 또한 그 부자(父子)의 윤상(倫常)을 아울러 끊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니, 이홍일을 먼저 파양하고, 다시 이정한(李挺漢)을 계후(繼後)하게 하여야 바야흐로 이종(移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홍일을 무단(無端)히 파계(罷繼)하여 이세정의 그 윤상(倫常)을 끊음은 사리(事理)로 헤아려 보면 모두 난처한 데 관계됩니다. 또 생각하건대 이홍술은 죄가 악역(惡逆)을 범하였다 하여 노적(孥籍)하기에 이르렀으니, 이홍일이 이홍술의 형(兄)으로서 비록 출계(出繼)함으로 연유하여 요행히 연좌(緣坐)를 면하였다 하나, 위로 대원군(大院君)의 제사(祭祀)를 모시는 것은 그 법리(法理)에 있어서 실로 중난(重難)합니다. 이홍일 이하 아들과 손자를 모두 파계한 뒤에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대원군의 장파(長派) 자손 가운데에서 그 대수(代數)를 헤아려 지극히 합당한 사람을 뽑아서 이정한(李挺漢)에게 출계(出繼)하여 봉사(奉祀)하도록 함이 거의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명하여 의논한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10월 17일 기사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장령(掌令) 한재원(韓在垣)·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가 말하기를,
"국청 죄인(掌廳罪人) 윤각(尹慤)은 정범(情犯)이 낭자(狼藉)한데, 무단(無端)히 형신(刑訊)을 정지해서 크게 군정(群情)을 어겼으므로, 이로써 위복(違覆)하고 끝내 거수(擧袖)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신(大臣)은 이전의 견해를 바꾸지 않고 의계(議啓)하기에 이르렀으니, 피연(疲軟)하여 경시(輕視)당하고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인피(引避)하고 퇴대(退待)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전인좌(錢仁佐)가 물고(物故)되었다. 전인좌는 곧 김운택(金雲澤)의 심복(心腹)으로 신축년541)   겨울 16인을 나누어 정배(定配)한 가운데에 든 자이다. 회금(灰金)의 소청으로 통수(統帥) 이수민(李壽民)의 군관(軍官)이 되었고, 경자년542)  의 국휼(國恤) 때에는 정목(正木) 1백여 동(同)을 들여와 덜어내어 썼었다. 회금(灰金)이 독약을 쓴 일과 하였던 일을 만약 한 번 잡아다 국문(鞫問)하게 되면 드러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김성절(金盛節)이 승복한 초사(招辭)에서 나왔고, 차정 군관(差定軍官)은 과연 청촉(請囑)을 내었다는 말이 또 이수민(李壽民)의 초사에서 나왔다. 국청(鞫廳)에서 이것을 뽑아내어 문목(問目)을 삼았더니, 거짓을 꾸며 납초(納招)하였는데, 간교한 정상이 환하게 탄로되어 형문을 받은 지 7차만에 죽었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을 때 입시(入侍)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합계(合啓) 2건을 독주(讀奏)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제신(諸臣)이 번갈아 주청하고 서로 쟁간하여 거의 수백 마디를 말하기에 이르렀으나, 준허(準許)를 얻지 못하였다. 사헌부(司憲府)의 전계(前啓) 3건을 모두 따르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아뢰었던 이상(李翔)의 일도 따르지 않았으며,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의 직첩(職牒)을 환수하는 일만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조성복(趙聖復)을 형신(刑訊)하는 것은 이미 대계(臺啓)대로 윤허하시고 성명(成命)을 내리셨는데,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길 만합니다. 속히 엄형(嚴刑)으로 국문(鞫問)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그러면 이것을 속히 거행하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김일경·박필몽(朴弼夢)·이명의(李明誼) 등이 또 독약을 쓴 궁인(宮人)을 조사해내는 일을 반복하여 힘껏 쟁간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앞서 조사해 내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하교를 내리시니, 성교(聖敎)가 무엇에 연유하여 전후로 다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조진희(趙鎭禧)와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독약을 쓴 역비(逆婢)를 진작 조사해 내라는 일을 성상께서 개가(開可)하신 뒤로부터 오래도록 적연하니, 신 등은 민울(悶鬱)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여러 차례 연중(筵中)에서 누누이 우러러 아뢰고는 성명(聖明)께서 기다렸는데, 이제 갑자기 번독(煩瀆)하게 하지 말라고 하교하시니, 신 등은 한결같이 갑절이나 근심하고 개탄하였습니다. 안으로 곽현(霍顯)543)  의 음모(陰謀)를 품고 몰래 주액(肘腋)544)   아래에 처하여, 종사(宗社)의 무궁한 근심이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끝내 시각을 늦추어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청컨대 조사하여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전형(典刑)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제신(諸臣)이 다시 전설(前說)을 거듭 아뢰고 쟁론하여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빨리 소청을 윤허하시고, 빨리 소청을 윤허하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김일경이 일어나서 절하고 이르기를,
"빨리빨리 조사하여 맡기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하였다.

 

10월 18일 경오

국청(鞫廳)에서 홍성주(洪聖疇)를 옥에 가두었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에 조성복(趙聖復)의 일을 진달(陳達)하여 윤허받았는데, 어제 연신(筵臣)의 진달한 바로 인하여 대계(臺啓)를 윤종(允從)하셨으니, 국청(鞫廳)에서 즉시 봉행(奉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신은 이 일에 끝내 의난(擬難)한 바가 있습니다. 대개 조성복의 소장(疏章)은 진실로 연차(聯箚)한 근본이 되었으니, 여정(輿情)이 다 분개해 함을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니, 대각(臺閣)의 집법(執法)하는 의논을 누가 불가(不可)하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그 정상을 추구해 보면 비록 지극히 절통(絶痛)하나, 연차(聯箚)에 이를 비교하여 절목(節目)을 정하였다는 말과 같은 것은 오히려 차이가 있습니다. 한 조항만 지목하고 사주하여 이제 다시 형문(刑問)할 단서가 없는데, 한결같이 형문을 더하여 끝내 장폐(杖斃)하는데 이른다면, 신은 과연 안치(按治)하는 도리에 합당한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문목(問目)을 첨입(添入)한 가운데에, ‘심상길(沈尙吉)이 소(疏)를 지었다.’고 한 것에 이르러 서로 문서(文書)를 가져다 상고해 보면, 이정식(李正植)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심상길이 간예(干預)하였다.’고 하였으나, 소(疏)를 지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장세상(張世相)에게 뇌물(賂物)을 준 일은 조성복이 옥 중(獄中)에 갇혀 있을 때에 이정식이 밖에서 심상길에게 말하였으며, 조성복이 다시 귀양간 뒤에 심상길의 아들이 4, 50냥을 찾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조성복은 처음에 이미 옥 중에 갇혀 있었고, 뒤에 또 다시 귀양갔으니, 어찌 미리 알았다고 하여 신문(訊問)하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대저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니, 분노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돌이켜 보건대 제신(諸臣)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바다를 건너가 잡아 왔다가 즉시 도로 귀양보냈으니, 거조(擧措)가 전도(顚倒)됨을 또한 알지 못함이 아니며, 당초에 작처(酌處)하였을 때에 식자(識者)들의 의논이 대저 똑같았고, 또 별양(別樣)의 사단(事端)이 있지 않았으니, 구핵(究覈)할 수 있다면 이제까지 신문(訊問)한 것이 끝내 그 사의에 합당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의견은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감히 그 소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신(留神)545)  하시어 재처(裁處)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을 신문(訊問)하는 것은 진실로 매우 마땅하니, 지금에 와서 환수(還收)하는 것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윤각(尹慤)의 은화(銀貨) 3백 냥의 일은 세 번이나 역적의 초사에서 나와 문안(文案)에 낭자합니다. 그가 역당(逆黨)과 체결(締結)하여 몰래 흉도(凶圖)를 도운 정상이 밝게 드러나서 엄폐하기 어려운데, 특히 완악하고 잔인한 까닭에 여러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저뢰(抵賴)하며 자복하지 않았으니, 그 정상을 논하면 더욱 지극히 절통(絶痛)합니다. 그런데 이제 아직 그대로 옥(獄)에 가두어 두자는 계청(啓請)이 갑자기 범죄 사실을 승복하기도 전에 일어나 무단(無端)히 형문(刑問)을 정지하여 크게 군정(群情)을 거슬렸습니다. 청컨대 다시 엄형(嚴刑)을 더하여 정상을 알아내기를 기필하소서."
하였는데, 처치하여 아뢰기를,
"완석(完席)에서 쟁집(爭執)하는 것은 대체(臺體)에 당연한데, 이로써 혐의하는 것은 이미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장령(掌令) 한재원(垣韓在)·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를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르지 않고, 처치(處置)한 일만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유술(柳述)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이명·김창집의 역절(逆節)과 조태채의 죄악(罪惡)은 진실로 이는 신인(神人)이 함께 분노하고 왕법(王法)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므로, 육시(戮屍)하라는 계청을 수십 차례나 올리고 안율(按律)하라는 계청을 열람하신 지 반 년 만에 마침내 성비(聖批)에 오직, ‘번거롭게 하지 말라[勿煩]’는 두 글자만 내리셨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는 무릇 대신(臺臣)의 말에 처음에는 윤종하고 허락하셨다가, 계속해서 대신(大臣)이 논박하여 아뢰는 것이 있으면, 갑자기 다시 굽혀서 이를 고치셨으니, 따르고 따르지 않으심이 여러 번 변하여 서지(舒遲)하고 참담(慘澹)함이 무상(無常)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이이명·김창집을 안율(按律)하는 즈음에 사검(賜劍)하고 사약(賜藥)하는 그 명령이 한결같지 못하여 마침내 실형(失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홍계적(洪啓迪)을 잠깐 형문하였다가 별안간 정형(停刑)하고, 조성복(趙聖復)을 급하게 귀양보냈다가 곧바로 국문(鞫問)하는 것은 국체(國體)를 훼상(毁傷)시킬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장차 집덕(執德)이 견고하지 못하다 하여 천심(淺深)을 우러러 엿보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아! 3년의 흉역(凶逆)은 옛날에도 없었던 것이며, 그 연유한 것을 궁구해 보면, 제적(諸賊)의 초사(招辭) 가운데의 이른바 회금(灰金)이라는 것이 진실로 근간[根株]이 됩니다. 대개 그 은밀한 곳과 비밀한 길에서 화근을 쌓고 독기를 불어 넣었는데, 김춘택·김보택에서 시작하여 김운택·김민택에서 하늘을 뒤덮을 만하였으니, 역심(逆心)과 역장(逆膓)을 한 꿰미에 꿰어서 전해 온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가인(家人)과 부녀(婦女)에 이르러서도 또한 찬시(簒弑)하는 일을 평소에 늘 다반사(茶飯事)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밥을 짓는 것보다 쉽게 익는다는 말이 김보택의 처(妻)의 입에서 나왔으니, 그 합문(閤門)의 내외(內外)에서 남녀 소장(男女少長)이 대가(大家)와 합세하여 난만하게 모역(謀逆)한 정상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민택이 흉측하고 잔인하여 장폐(杖斃)됨으로 인하여 김운택은 신국(訊鞫)을 거치지 않은 채 오히려 수좌(隨坐)의 율(律)에서 도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아우와 자질(子姪)이 또 연곡(輦轂)546)  에 널리 퍼져서 마음가짐이 날로 위태하고 일을 꾀하는 것이 날로 깊습니다. 만약 이 무리를 하루라도 머물러 두면 국가에 하루의 근심이 되니, 마땅히 삼묘(三苗)547)  를 분배(分背)한 뜻을 의방하여 한결같이 모두 원지(遠地)에 귀양보내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참시(斬屍)하라고 청한 것은 과중(過中)함을 면치 못한다."
하였다.

 

10월 19일 신미

강원도(江原道) 통천(通川)에서 백성 박세운(朴世雲) 등 11인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보다 앞서 부연 사행(赴燕使行)548)                  이 돌아올 때에 복물(卜物)549)                  도 동시에 책문(柵門)을 떠나 왔다. 기사년550)                   연간으로부터 가패(加佩)라고 이름하는 자가 난두(欄頭)551)                  라고 칭탁하여 고재(雇載)의 이익을 독점하였으므로, 복물(卜物)이 지체되어 잃어버리는 근심이 있었으며, 또 연복(延卜)이 계류할 즈음에 사사로이 서로 매매(買賣)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마침 심양 주장(瀋陽主將)이 방(榜)을 걸어 조선(朝鮮)의 객상(客商)을 기편(欺騙)552)                  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 등이 이 기회에 난두(欄頭)를 엄중하게 막고자 하여 사역원(司譯院)에서 수본(手本)을 비국(備局)에 바치고, 이러한 뜻으로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기를 청하니, 비국에서 계달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자문(咨文)을 지어서 사행(使行)에게 부송(付送)하게 하고, 다시 저들에게 가서 사정(事情)을 상탐(詳探)하여 자문을 예부(禮部)에 바치게 하였다.

 

날씨가 추어졌으므로, 명하여 박의(薄衣)553)  를 입은 군사(軍士)에게 유의(襦衣)를 내려 주게 하니, 전례(前例)를 채용한 것이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독약을 쓴 역비(逆婢) 김성(金姓)의 궁인(宮人)을 조사해서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전형(典刑)을 바로잡는 일은 양사(兩司)의 합계(合啓)로 인하여 이미 윤허받았으니, 김성(金姓)이라고 이르는 궁인(宮人)을 국청(鞫廳)에 출부(出付)하여 추핵(推覈)하는 바탕을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나인[內人]의 일을 사문(査問)하는 것은 수다한 김성(金姓)의 사람 가운데 지적(指的)한 이름이 없으니, 조사하여 알아낼 길이 없다."
하였다.

 

헌부(憲府)  【집의(執義) 이세덕(李世德)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한 죄인 정호(鄭澔)는 사갈(蛇蝎)554)   같은 성품으로, 귀역(鬼蜮)555)  의 계략을 행하여 오직 현인을 죽이고 올바른 사람을 독살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았습니다. 지난해에 심봉의(沈鳳儀) 등이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과 향사(享祀)를 거두기를 청하는 소장(疏章)을 올리자, 서둘러 상경(上京)하여 방자한 마음으로 복계(覆啓)하기를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김창집(金昌集)의 상행(喪行)이 올라올 적에는 길가에서 맞이하여 조곡(弔哭)하였으며, 글을 지어 전(奠)을 베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사생(死生)은 명에 달려 있고, 화복(禍福)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 또한 오늘날 전하의 신자(臣子)이면, 어찌 감히 임금의 원수를 잊고 역신(逆臣)을 비호하여 이와 같이 무엄(無嚴)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시행한 병예지전(屛裔之典)으로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빨리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소서.
전(前) 현감(縣監) 유하기(兪夏基)는 곧 요인(妖人) 유상기(兪相基)의 종제(從弟)입니다. 그의 외조(外祖) 증(贈) 판서(判書) 윤문거(尹文擧)는 그의 아우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를 제사(祭祀)하는 글에, ‘원류(源流)를 칭양(稱揚)하였다.’는 한 조목을 아호(阿好)하는 사사로운 말로 돌리고, 유상기의 무소(誣疏)에 연명(聯名)하였으니, 이미 사람의 도리로 차마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겨울 개기(改紀)한 뒤에 군흉(群凶)을 천극(栫棘)하고 많은 간활한 무리를 유찬(流竄)하자, 바로 감히 있는 힘을 다하여 궤문(餽問)하고, 짐바리가 계속 잇달았습니다. 심지어 조성복(趙聖復)을 나가서 기다렸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보냈고, 이천기(李天紀)를 정성껏 대접하여 온 몸을 기울여 섬겼으며, 서로 함께 국가를 원망하면서 조정을 구욕(詬辱)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윤리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일삼았으며, 법의(法義)를 알지 못하고 흉역(凶逆)을 곡진히 비로한 사람을 결코 간략하게 파직(罷職)하는 박벌(薄罰)만 시행하는 데 그칠 수는 없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소서.
지난해 온과(溫科)에 입격(入格)한 이성채(李星彩)와 그의 아들 이유춘(李囿春)의 글은 모두 진사(進士) 윤시택(尹時澤)이 차술(借述)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윤시택은 상인(喪人)으로서 무릅쓰고 과장(科場)에 들어온 것을 사람들이 모두 보았으며, 또 이유춘이 당초에 부과(赴科)556)  하지 않고 그 집에 머물러 있었던 정상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는 것입니다. 그 과명(科名)을 바르게 하고 상제(喪制)를 중하게 하여 퇴폐한 기강을 진작시키고 쇠퇴한 습속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일이 이미 지났다 하여 버려둘 수 없으니, 청컨대 모두 유사(攸司)에 명하여 나국(拿鞫)해서 엄중히 핵실(覈實)하고, 율(律)에 의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2건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동의금(同義禁) 이사상(李師尙)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계적(洪啓迪)의 죄악(罪惡)은 조금도 은회(隱晦)할 것이 없으니, 평서(平恕)의 의논에 함께 따를 수 없습니다. 즉시 처분을 내리셔서 국옥(鞫獄)이 거듭 실형(失刑)하는 탄식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홍계적의 죄는 일이 벌써 탄로되었으니, 경(卿)은 혐의할 것이 없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0일 임신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강릉 부사(江陵府使) 성임(成任)은 관리가 되어 늙어서 이미 활리(滑吏)가 되었습니다. 토민(土民)으로서 초상(初喪)을 당한 자에게 억지로, ‘관재(棺材)는 반드시 황장목(黃腸木)을 써야 하며, 소나무는 금지한다.’고 하고는 번번이 5냥전(五兩錢)을 거두어 합계 4백여 냥(兩)이나 되는 것을 전부 사사로이 사복(私腹)을 채웠습니다. 또 금산(禁山)에서 관판(棺板) 50여 부(部)를 도벌하고는 경강(京江)에 배를 대어 반은 둑도(纛島)에 두고 반은 용산(龍山)에 두었습니다. 탐학하고 교활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고, 관판(棺板)은 한결같이 모두 속공(屬公)하여 진자(賑資)에 충당하게 하소서.
벽동 군수(碧潼郡守) 최인후(崔仁垕)는 관기(官妓)를 데리고 살면서 크게 뇌물길을 열어 놓고, 첨정(簽丁)과 결옥(決獄)을 한결같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더구나 피인(彼人)과 몰래 서로 매매(買賣)하며 속여서 실신(失信)한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나국(拿鞫)하여 엄중히 추문(推問)하고, 율(律)에 의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는데, 정호(鄭澔)의 일과 최인후(崔仁垕)의 일은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홍계적(洪啓迪)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처음에 국청(鞫廳)의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천위(天位)가 불안하고 종사(宗社)가 장차 망하려 하므로, 애통(哀痛)한 교지에 대신(大臣)에게 도움을 구하였으니, 중도를 따라서 막아서 못하게 했어야 할 것이다. 대신(大臣)이 청대(請對)한 뜻은 광구(匡救)하여 부지(扶持)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백계(百計)로 저당(阻塘)하여 위로는 군부(君父)를 조절(操切)하고 아래로는 간로(諫路)를 두색(杜塞)하였다. 조송(趙松)을 죽일 만하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역적 조송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처음에 흉모(凶謀)에 참여하여 듣지 못하였으면, 조송이 은화를 훔친 것이 저에게 무슨 관련이 있기에 죽이려는 데에 이르렀겠느냐?……"
하였는데, 공사(供辭)에 온갖 말로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천지(天地)와 귀신을 가리키면서 스스로 맹서하며 심지어, ‘자취가 죄적(罪籍)에 있으니, 토주(討誅)하기를 청하는 정성을 펴지 못하고,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도리어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빠졌다…….’고까지 하였다. 국청 대신(鞫廳大臣)의 뜻은 참작하여 처치하는 데 있었는데, 대의(臺議)가 거듭 일어나 형문을 받은 지 4차례 만에 끝내 옥중에서 병사(病死)하기에 이르렀다. 홍계적은 대개 당론(黨論)에 병든 자이다. 그의 비망기(備忘記)를 작환(繳還)하고 청대(請對)를 저지하여 막은 두 가지 일은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분개하였고, 역적 조송(趙松)의 초사(招辭)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확실하게 믿을 바가 아닌데, 이로써 흉역에 참가하여 모의하였다 하여 마침내 항양(桁楊)557)   아래에서 죽게 하였으니, 진실로 원통하다. 이것도 또한 위관(委官)이 안옥(按獄)하는 데 앉아서 횡의(橫議)를 진정시키지 못하여 초래한 것이니, 애석하다.

 

10월 21일 계유

밤에 달이 헌원(軒轅) 제3성(第三星)을 범하였다.

 

이명언(李明彦)을 승지(承旨)로, 유필원(柳弼垣)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세덕(李世德)을 부응교(副應敎)로, 유중무(柳重茂)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에 이어(移御)하였다.

 

유하기(兪夏期)를 기장현(機張縣)에 유배하고, 정호(鄭澔)를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에 안치(安置)하였으니, 대계(臺啓)를 따른 것이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형의빈(邢義賓)이 물고(物故)되었는데, 형의빈 또한 16인을 분배(分配)한 가운데에 들어간 자이다. 국청(鞫廳)의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김성절(金盛節)의 초사에 이르기를, ‘회금(灰金)이 독약을 쓴 것과 한 일을 만약 한 번 붙잡아 추문(推問)하면 드러날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회금을 지명(指名)하여 현고(現告)한 것과 독약을 썼다고 이른 것은 어떤 계책에서 나왔으며, 한일은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니, 공초(供招)하기를,
"장막(將幕)의 의리로서 혹은 날마다 혹은 며칠만큼씩 김운택(金雲澤)의 집을 왕래하였으나, 이 밖에는 원래 참여하여 아는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다시 추국한 문목에 또 이르기를,
"잡아 온 나장(羅將)이 공초(供招)하기를, ‘걸어서 홍제원(弘濟院) 근처에 이르렀더니, 어떤 사람이 형의빈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하기를, 「김성절(金盛節)은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알 것이다. 비록 얼굴을 보지 못하였더라도 이미 그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반드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그 사람의 성명(姓名)과 와서 고한 뜻을 일일이 직초(直招)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공사(供辭)가 하소연하는 소리와 같았으나, 대답하는 바를 자세히 알 수 없었다. 형문(刑問)을 받은 지 7차 만에 한결같이 굳게 은휘하다가, 마침내 경폐(徑斃)하였다.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한 칙서(勅書) 가운데에, ‘일후(日後)에 아들을 생산하는 경사가 있으면 다시 아뢰라.’는 말이 있는 까닭으로 다시 주문(奏文)을 사행(使行)에 부치었으니, 주문에 대략 이르기를,
"칙유(勅諭)한 말단(末端)에 다시 아뢰라는 교시는 진실로 곡진(曲軫)한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니 감격하고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저사(儲嗣)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명호(名號)가 한 번 정해지면, 묘사(廟社)와 신인(神人)의 의탁함이 진실로 이에 달려 있습니다. 가령 다른 날 혹 성의(聖意) 가운데에 운운한 것과 같음이 있더라도 어찌 다시 진주(陳奏)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도리를 헤아리건대 다시 의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10월 22일 갑술

김시혁(金始㷜)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중술(李重述)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國廳罪人) 김운택(金雲澤)은 본시 악독(惡毒)한 성품으로 악역(惡逆)의 모의에 관습(慣習)이 되어 무모한 사실을 꾸며 모함하고 배포(排布)하여 모주(謀主)가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흡(趙洽)의 초사 가운데에 회금(灰金)이 화근(禍根)이 되었다는 말이 생겨난 까닭은 김성절(金盛節)을 결안(結案)한 초사에서 나왔으며, 독약 쓰는 일을 주장하였다는 말은 문안(文案)에 낭자합니다. 이세복(李世福)의 공초와 이용석(李龍錫)의 초사 안에 김민택(金民澤)의 형제가 강정(江亭)에 같이 있으면서 이홍술(李弘述)의 의막(依幕)에 서찰(書札)을 전하여 은화를 구색(求索)하였다는 일과, 조흡(趙洽)이 다시 공초한 가운데에 김운택이 서관(西關)558)  의 어사(御史)가 되었을 때 그의 아비 조이중(趙爾重)과 이야기하기를, ‘국가(國家)에 오래지 않아서 장차 큰일이 있을 것입니다.’고 한 지 얼마 있다가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거사가 과연 나왔으니, 조이중이 ‘김가(金哥)는 괴이하다고 이를 만하다. 능히 먼저 이와 같은 일을 알다니.’라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절(情節)이 모두 지극히 음흉(陰凶)한데, 신문(訊問)은 유독 동모(同謀)한 지당(支黨)에만 더하고, 형신을 청하는 것은 독약을 쓴 주인(主人)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니, 옥체(獄體)에 어긋남이 있으므로, 인심(人心)이 일제히 분개하였습니다. 청컨대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어 엄중하게 형문해서 정상을 알아내어 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홍순택(洪舜澤)이 옥중에서 죽었다. 홍순택이 이희지(李喜之)와 약값에 대해 은밀한 이야기를 하였다는 말이 김성절(金盛節)의 초사에서 나오고, 홍성(洪姓)의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약을 사서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여보냈다는 말이 김창도(金昌道)의 초사에서 나왔으므로, 국청에서 이로써 문목을 내었더니, 발명(發明)하여 공초를 바쳤다. 그래서 김성절(金盛節)가 면질(面質)시켰으나, 서로 다투며 변명하여 끝내 귀일(歸一)되지 않았다. 이희지(李喜之)가 서울에 있었는지의 여부(與否)를 이후경(李厚敬)에게 물었더니, 이후경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이로써 홍순택을 다시 추국(推鞫)하였으나 오히려 또 굳게 은휘하였다. 그의 종 업봉(業奉)이 포청(捕廳)에 납초(納招)하였을 때에도 말하기를, ‘상전(上典) 홍순택(洪舜澤)이 부경(赴京)하였을 때 따라가서 홀로 항사(坑舍)에 있을 때에 매호(買胡) 이운수(李云水)라고 이름을 부르는 자가 상전을 찾아왔으므로, 그 심방(尋訪)한 연유를 물었더니, 요채(要采)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른바 요채란 한어(漢語)로 매약(買藥)을 일컫는 것이다. 이튿날에 또 상전을 만나보고 환약(丸藥) 두 덩이를 전하여 주었는데, 크기는 계란(鷄卵)만하였고 황흑색(黃黑色)이었다. 짐바리 가운데에 넣은 이래로 설국(設鞫)한 뒤에 독약을 썼다는 말이 있었음을 들었으며, 상전이 홍 첨지(洪僉知)와 이야기하며 우려(憂慮)하는 일이 있음을 우연히 처(妻)의 상전 박 동지(朴同知)에게 언급(言及)하였다……’ 하였고, 국청(鞫廳)에서 납공(納供)한 것 또한 홍성주(洪聖疇)가 공초한 바와 같았으며, 홍순택(洪舜澤)과 수작(酬酢)할 때의 약사(藥事)와 장차 큰 일이 생긴다고 이른 것도 업봉(業奉)의 초사와 같았다. 또 홍성주와 면질(面質)시켰더니 홍순택이 대답한 바를 반은 실토하고 반은 숨기니,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형문을 받은 지 5차 만에 한결같이 저뢰(抵賴)하다가 죽었다.

 

10월 23일 을해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에 들어갔다.

 

양사(兩司) 【지평(持平) 이중술(李重述)·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성임(成任)을 나문(拿問)하는 일은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삼남(三南)559)   각 고을의 서원(書員)이 무역(貿易)하는 폐단을 논하고, 각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각 고을에 신칙하여 일체 혁파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각영(各營)에서 무역하는 폐단을 논하고, 각도의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으로 하여금 수용(需用)에 관계된 물질을 직접 영문(營門)에서 무역하여 각 고을과 각 진보(鎭堡)에 분정(分定)하는 규례를 일체 혁파하기를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0월 24일 병자

조원명(趙遠命)을 헌납(獻納)으로, 박필몽(朴弼夢)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성덕윤(成德潤)을 지평(持平)으로, 권익순(權益淳)을 교리(校理)로, 유명응(兪命凝)을 승지(承旨)로, 윤유(尹游)를 부교리(副校理)로, 이홍모(李弘模)를 돈녕 도정(敦寧都正)으로 삼았다. 이홍모는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5대손(五代孫) 고(故) 통덕랑(通德郞)        이정한(李挺漢)의 둘째 아들이다. 이홍일이 역적(逆賊) 이홍술(李弘述)에게 연좌(緣坐)되었다 하여 파계(罷繼)한 뒤에 2품 이상의 종반(宗班)이 모여서 의논하여 어진이를 뽑아 이정한(李挺漢)의 뒤를 이어 봉사(奉祀)하게 하였는데, 예에 따라 이 직첩을 제수하였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한재원(韓在垣)·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충주(忠州)의 양정(量政)이 고르지 못함을 논하고, 청하기를,
"우선 구량(舊量)을 써서 흉년에 궁민(窮民)의 원성(怨聲)을 풀어주고, 풍년을 기다려 이정(釐正)하여 삼남(三南) 각 고을의 신량(新量)이 고르지 못한 것 또한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장문(狀聞)하게 하되, 충주(忠州)의 예에 의하여 우선 구량(舊量)을 쓰게 하소서."
하였다. 또 북한(北漢)의 시장(柴場)560)  에 들어가지 못하게 금단(禁斷)한 폐단을 논하고, 빨리 혁파하도록 명하여 도민(都民)의 나무하는 길을 열어주기를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0월 25일 정축

장령(掌令) 한재원(韓在垣)이 소비(疏批)561)  를 미처 내리기도 전에 무릅쓰고 나와 참국(參鞫)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퇴대(退待)하니, 지평(持平) 성덕윤(成德潤)이 처치하기를,
"비답(批答) 받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비록 국좌(鞫坐)에 연유하였더라도 이미 물의(物議)가 있어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27일 기묘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박징빈(朴徴賓)을 장령(掌令)으로, 유필원(柳弼垣)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명의(李明誼)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사은 진주겸 동지 정사(謝恩陳奏 兼冬至正使)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부사(副使) 이만선(李萬選)·서장관(書狀官) 양정호(梁廷虎)가 사폐(辭陛)562)  하니, 명하여 인견(引見)하고 선온(宣醞)563)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지평(持平) 성덕윤(成德潤)·헌납(獻納) 조원명(趙遠命)·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수찬(修撰) 조익명(趙翼命)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고, 조태채(趙泰采)를 안률(按律)하기를 합계(合啓)한 일을 독주(讀奏)하니, 비로소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삼사(三司)의 제신(諸臣)이 차례로 번갈아 아뢰며 반복하여 힘껏 쟁간하였으나, 사의(辭意)는 대저 전에 입대하였을 때와 다름이 없었으나, ‘사개(使价)가 이미 발행(發行)하였으니, 주문(奏文)을 곧 뒤쫓아 보내야 마땅한데, 용법(用法)이 편파(偏頗)하여 조사(措辭)하는 데 어렵다는 것’을 굳게 쟁간하는 긍경(肯棨)564)  으로 삼았다. 김일경이 또 아뢰기를,
"신 등이 외람되게 삼사(三司)에 있으면서 하나의 역신(逆臣)도 토주(討誅)할 수 없으니, 장차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빨리 윤종(允從)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육시(戮屍)하는 일을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계속하여 부계(府啓) 5건을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제신(諸臣)이 김운택(金雲澤)을 엄중히 형신(刑訊)하여 실정을 알아내는 일을 반복하여 쟁론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른바 삼수(三手)의 흉역(凶逆)에 있어서 오로지 조태채(趙泰采)의 집안에 출입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역적의 초사에 나오지 않았으니, 그가 난만(爛熳)하게 역모(逆謀)에 동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때문에 감등(減等)하라는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재능(才能)도 없이 명위(名位)가 갑자기 뛰어 올랐는데, 권세를 탐하고 욕심을 부리면서도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였다. 마침내 몸이 재화의 함정에 빠졌으니, 이는 불충(不衷)의 재화(災禍)라고 할 만하다. 김일경(金一鏡)은 임금의 전석(前席)에서 핍박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이에서 시세(時勢)를 볼 수 있다.

 

10월 28일 경진

미시(未時)에 태백(太白)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대전(大殿)의 탄신(誕辰)이었다. 왕세제(王世弟)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상차(上箚)하기를,
"어제 엎드려 듣건대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특히 안율(按律)하라는 소청을 윤허하시니, 대소(大小)의 여정(輿情)이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신은 이 일에 대해 친히 들은 말이 있으므로 이에 감히 무릅쓰고 나서서 말하겠습니다. 유취장(柳就章)이 승관(承欵)하였을 때 말하기를, ‘지난 겨울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한 뒤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두 흉적이 크게 두려워하여 겁을 먹고는 이건명(李健命)의 집에 모여서 머리를 모아 모의하였는데, 이기지(李器之)가 곁에서 고하기를, 「이 일은 이와 같이 하고 그칠 수 없으니, 반드시 기수(旗手) 3, 4백 명으로 궐문(闕門)에 수직(守直)시키고, 즉시 조 판부사(趙判府事)를 맞아다 면의(面議)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자, 이건명이 얼굴을 찡그리고 이르기를, 「애초에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을 어찌 또 참여시켜 듣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때에 문랑(問郞)이 그가 승복한 말이 아니라 하여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음을 참국(參鞫)한 제신(諸臣)으로서 위로 당상(堂上)부터 아래로 낭료(郞僚)까지 아울러 모두 들었으니,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처음에 삼흉(三凶)의 음흉한 모의에 간예하지 않았음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옥(按獄)한 사람으로서 이미 이 말을 들은 뒤에 섭유(囁嚅)할 생각이 있었으나, 끝내 숨김 없는 뜻에 어긋남이 있으므로, 연감(淵鑑)의 아래에서 한 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유신(留神)565)  하시고, 재량하여 살피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차자(箚子)로 아뢴 일은 이미 어제 연중(筵中)에서 다 알았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이하가 연명(聯名)하여 상차(上箚)하기를,
"신 등이 일제히 하반(賀班)에 나아가 홀연히 엎드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의 차본(箚本)을 보고, 지극히 해혹(駭惑)하고 개연(慨然)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그 두사(頭辭)에는 바로 조태채(趙泰采)를 안률(按律)하라는 소청을 특히 윤허하셔서 대소(大小)의 여정(輿情)이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마는, 아! 한 나라의 공공(公共)한 의논을 대신(大臣) 또한 일찍이 듣지 못하거나 모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미 그 여정(輿淸)이 이와 같음을 알면서 말을 하였으니, 신 등은 그윽이 대신(大臣)을 위하여 놀라서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대저 조태채(趙泰采)를 반드시 죽여서 용서할 수 없는 죄(罪)는 벌써 앞에서 다 노열(臚列)566)  하였으니, 이제 거듭 죄를 읽을 필요가 없으나, 대신(大臣)이 유취장(柳就章)의 거짓말을 꾸며댄 초사를 인용한 것이 또한 다시 크게 사실(事實)에 어긋났으니, 신 등은 이를 진달하여 청하는 것입니다.
헌납(獻納) 신(臣) 조원명(趙遠命)이 일찍이 문랑(問郞)으로 있을 때 그 곡절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있는데, 유취장(柳就章)의 초사 안에 ‘제가 장흥(長興)의 적소(謫所)에 있었을 때 이희지(李喜之) 또한 벽사역(碧沙驛)에 정배(定配)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가서 보았더니, 이희지가 말하기를, 「지난 12월 초3일에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 이건명(李健命)의 집에 모여서 군졸을 보내어 궐문(闕門)에 수직하기를 상의하였다.……」 하였습니다. 저도 방금 평안 병사의 수망(首望)으로서 후정(後政)에 마땅히 나가야 하므로, 제가 호위(扈衞)하는 한 가지 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스스로 소문이나 억울한 죄명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이를 스스로 변명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평 현감(南平縣監) 이광보(李匡輔)가 대관(臺官)으로 참좌(參坐)하여 바로 ‘12월 초3일은 바로 이건명(李健命)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연경(燕京)에 있을 때이니, 이이명·김창집이 모였다는 것과 이건명이 얼굴을 찡그렸다는 것은 완전히 허탄(虛誕)한 것으로서 억지로 이유를 끌어내는 것’임을 깨우쳤습니다. 그래서 이로써 유취장에게 힐문(詰問)하자, 유취장이 곧 그 무망(誣罔)함을 승복하였으므로, 공초(供招)를 취할 때에 기록하여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의 사실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는데, 이제 대신(大臣)이 취하여 증거를 삼았으니, 신 등은 진실로 그가 무엇을 이르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신 등이 조태채(趙泰采)를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여 전하께서 안율(按律)하도록 흔쾌하게 윤허하신 것은 오로지 4흉(四凶)의 연차(聯箚) 때문에 역절(逆節)이 소상하게 드러난 까닭이었습니다. 대신이 드디어 제외(題外)의 허탄한 데에 돌아간 말을 끄집어 내어 이미 감죄(勘罪)567)  한 것을 가볍게 논하였으니, 대저 대신(大臣)이 평일에 나라를 몸받는 정성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지 신 등은 더욱 의아하고 해탄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차사(箚辭)는 이미 우상(右相)의 차비(箚批)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10월 29일 신사

사시(巳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신시(申時)에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중궁전(中宮殿)의 탄신(誕辰)이었다. 왕세제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금부 도사(禁府都事) 송식(宋湜)을 보내어 위리 안치(圍籬安置)한 죄인 조태채(趙泰采)를 진도(珍島)에서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정수기(鄭壽期)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양사(兩司)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지평(持平) 성덕윤(成德潤)·헌납(獻納) 조원명(趙遠命).】 에서 합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윤각(尹慤)·김운택(金雲澤)을 엄형(嚴刑)하는 일은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김운택(金雲澤)을 엄형하여 실정을 알아내라는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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