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0권, 경종 2년 1722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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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임오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 등의 읍에서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고 물에 빠져서 죽고 불에 타서 죽은 자가 30인에 이르니, 명하여 본도(本道)에서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상차(上箚)하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운택(金雲澤)을 엄중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는 일은 양사(兩司)에서 함께 말하여 어제 이미 윤허를 받았으니, 국청(鞫廳)의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즉시 거행(擧行)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엎드려 생각하건대 국옥(鞫獄)을 안치(按治)하는 도리는 저절로 차례가 있습니다. 반드시 사증(辭證)이 구비되고 맥락(脈絡)이 분명한 뒤에야 바야흐로 비로소 형신(刑訊)을 청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예로부터 통행(通行)하던 전례입니다. 이제 독약을 쓰는 일을 주장했다는 말이 김성절(金盛節)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는데, 그 근인(根因)을 물었더니, 김성절이 말하기를, ‘저도 이숭조(李崇祚)의 말을 듣고서 알았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숭조와 전인좌(錢仁佐)·형의빈(邢義賓)·이덕준(李德峻) 등이 모두 회금(灰金)의 심복(心腹)으로서, 독약을 쓴 일과 한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제 만약 이 사람들에게 추문(推問)한다면, 일일이 드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으므로, 나래(拿來)하여 엄중하게 형신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엄중히 형신하였으나 끝내 실토하지 않은 채 서로 잇따라 장폐(杖斃)하였습니다. 이덕준(李德峻) 한 사람만 아직 운명(殞命)하지 않았는데, 그 형색(形色)을 보면 죽음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으나, 한 마디도 김운택(金雲澤)의 일에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계제가 이미 끊어져서 다시 반힐(盤詰)568)  할 곳이 없는데, 단지 김춘택(金春澤)의 아우에게만 악역(惡逆)을 모의하는 데 관습(慣習)이 되었다 하여 형신(刑訊)을 더 거친 것은 안옥(按獄)의 대체에 흠절이 있으며, 또한 장차 훗날의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이니, 국청(鞫廳)에서 아직 형신하기를 청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조흡(趙洽)이 한 말에 이르러서도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니, 오늘의 신자(臣子)가 감히 죄인에게 발문(發問)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독대(獨對)한다는 말이 여러 차례 여러 흉적(凶賊)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나, 신은 참국(參鞫)한 제신(諸臣)과 상의하여 처음에 의계(議啓)하는 가운데에 제론(提論)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문목(問目)에 첨입(添入)하자고 한 것은 신이 처음에 염려하여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대저 김운택의 집은 그의 형(兄) 김춘택 이래로부터 세상에서 지목(指目)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흉참(凶慘)한 말이 난역(亂逆)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공의(公議)가 일제히 분개해 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신이 김운택(金雲澤)에 대해 대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석하게 여겨 용호(容護)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삼가는 것은 사례(事例)이고, 염려하는 것은 후폐입니다. 이에 명주(明主)의 앞에 한 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자세히 살펴서 받아들이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김운택(金雲澤)을 형신하기를 청한 것은 진실로 대체(臺體)를 얻었다. 경(卿)은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명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이진급(李眞伋)·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등에게 복과(復科)569)  하도록 명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한배하(韓配夏)가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진백(陳白)하기를,
"임진 과옥(壬辰科獄) 때에 삭과당한 자인 오수원(吳遂元)·이진급·이헌영·이헌장 4인은 모두 이제까지 흉당(凶黨)에게 미움을 쌓아 왔으므로, 터무니없는 죄를 억지로 꾸며서 단련(鍛鍊)하여 옥사(獄事)를 이루었습니다. 지난번에 국수(鞫囚)가 이야기한 단서(端緖)가 잇따라 미침으로 인하여 이 옥사를 날조(揑造)한 정상이 명백하게 문안(文案) 가운데 있으니, 성명(聖明)께서도 반드시 그 원통한 정상을 통촉(洞燭)하셨을 것입니다. 오수원(吳遂元)의 일은 방금 추조(秋曹)에서 신문(訊問)하였고, 이빈흥(李賓興)은 스스로 신리(伸理)할 수 있으나, 이진급(李眞伋)이 무단(無端)히 발거(拔去)된 것은 지극히 원통한 것이었으니, 이헌영(李獻英) 형제(兄弟)의 일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그가 제술(製述)한 문자(文字)가 가호(佳好)하다고 하여 억지로 미리 꾸미었다고 말하고, 다시 시험하도록 청하였으나, 선대왕(先大王)께서 곡진히 미은(微隱)을 살펴서 하교하시기를, ‘미리 꾸미었다고 함은 이미 드러난 것이 없고, 다시 시험함도 국조(國朝)에서 없었던 것이니, 이제 창행(創行)하기 어렵다.’고 하니, 이에 그 계책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시권(試券) 가운데에 ‘공(龔)’자의 자체(字體)가 시관(試官)이 쓴 공자와 조금 다르다 하여 간계(奸計)를 썼다고 하며 모두 방(榜)에서 빼어버릴 것을 청하였는데, 성비(聖批)에 또 ‘글자 모양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간계를 쓴 것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방에서 빼어 버리라는 논계(論啓)는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교하였으므로, 저 무리 또한 부득이 그 계청을 정지하였던 것입니다. 세월이 오랜 뒤에 역신(逆臣) 이이명(李頤命)이 다시 시험하기를 청하고, 즉시 응명(應命)하지 않는다고 핑계대어 끝내 삭과(削科)570)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선비의 이름을 가지고 만약 다시 시험에 응하였으면 장차 어찌 저들을 썼겠습니까? 이헌영(李獻英)은 이제 이미 한(恨)을 품은 채 죽었고, 이헌장(李獻章)만이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 3인의 일은 처음에 이빈흥(李賓興)의 옥사(獄事)에 관계되지 않았으니, 반드시 그 구경(究竟)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신화(新化)되어 청명(淸明)한 날을 당하여 소설(昭雪)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당하니, 모두 복과(復科)하도록 명하여 그 원통함을 신설(伸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이 이르기를,
"세 사람을 이미 복과(復科)하였는데, 오수원(吳遂元)의 일도 또한 매우 지극히 억울합니다. 추조(秋曹)에서 이빈흥(李賓興)을 구문(究問)하였더니, 옥사(獄事)의 허실(虛實)을 알 수 있었는데, 연달아 본조(本曹)의 당상(堂上)이 모두 모이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아직까지 거행(擧行)하지 않았으니, 신칙해서 개좌(開坐)하여 속히 끝까지 핵실(覈實)한 뒤에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진 과옥(壬辰科獄)은 진실로 원통하였다. 그 가운데에 이진급(李眞伋)은 한후(限後)에 시권(試券)을 바쳤다 하여 발방(拔榜)을 당하였으니, 이것이 나라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기는 까닭이나, 이미 발거(拔去)한 뒤에는 그 사체에 있어서 반드시 복과(復科)하여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만약 오수원(吳遂元)·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세 사람을 복과하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것이다. 다만 한배하(韓配夏)가 진달한 것은 어찌 너무 급하지 않겠는가? 세 사람의 일은 억울함을 품는 것이 같으니, 마땅히 복과(復科)함도 같아야 한다. 진실로 조당(朝堂)에서 첨의(僉議)하여 일체로 복과를 청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이제 바로 이헌장이 복과를 도모하였다는 말에 견제되고 동요되어 추조(秋曹)에서 조사하는 일의 출장(出場)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수원(吳遂元)을 한편에 버려둔 채 이헌장 (李憲章)만을 서둘러서 먼저 청하였으니, 국체(國體)를 무너뜨려서 사람들의 논의(論議)를 초래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저 이헌장은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만, 대관(大官)571)  의 처사가 이와 같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60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사법(司法) / 역사-편사(編史)


[註 569] 복과(復科)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방문(榜文)에서 지워 낙제시켰다가 다시 합격시키는 것.[註 570] 삭과(削科) : 과방(科榜)에서 삭제함. 곧 과거 급제를 취소하는 것.[註 571] 대관(大官) : 대신.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진 과옥(壬辰科獄)은 진실로 원통하였다. 그 가운데에 이진급(李眞伋)은 한후(限後)에 시권(試券)을 바쳤다 하여 발방(拔榜)을 당하였으니, 이것이 나라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기는 까닭이나, 이미 발거(拔去)한 뒤에는 그 사체에 있어서 반드시 복과(復科)하여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만약 오수원(吳遂元)·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세 사람을 복과하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것이다. 다만 한배하(韓配夏)가 진달한 것은 어찌 너무 급하지 않겠는가? 세 사람의 일은 억울함을 품는 것이 같으니, 마땅히 복과(復科)함도 같아야 한다. 진실로 조당(朝堂)에서 첨의(僉議)하여 일체로 복과를 청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이제 바로 이헌장이 복과를 도모하였다는 말에 견제되고 동요되어 추조(秋曹)에서 조사하는 일의 출장(出場)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수원(吳遂元)을 한편에 버려둔 채 이헌장 (李憲章)만을 서둘러서 먼저 청하였으니, 국체(國體)를 무너뜨려서 사람들의 논의(論議)를 초래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저 이헌장은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만, 대관(大官)571)  의 처사가 이와 같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11월 2일 계미

김일경(金一鏡)·임순원(任舜元)을 승지(承旨)로, 윤동수(尹東洙)를 지평(持平)으로, 유수(柳綏)를 정언(正言)으로, 심단(沈檀)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1월 3일 갑신

양사 【집의(執義) 정수기(鄭壽期)·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지평(持平) 성덕윤(成德潤)·헌납(獻納) 조원명(趙遠命)·정언(正言) 유수(柳綏)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상소(上疏)하기를,
"요즈음 조정의 체통(體統)이 높지 못하므로, 비록 일이 중대하고 체통이 큰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각각 논주(論奏)하여 문득 시행하기를 청하고 있는데, 일찍이 묘당(廟堂)을 거쳐서 어렵고도 신중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지 않는다 하여 식자(識者)들이 병통으로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대신(臺臣)이 양전(量田)572)  의 일을 논하고 곧바로 신안(新案)은 놔두고 구안(舊案)을 그대로 쓰기를 청하였는데,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단한 실착(失着)입니다. 그윽이 엎드려 듣건대 어제 연중(筵中)에서 중신(重臣)이 또 세 사람을 복과(復科)하는 일을 청하였는데, 또한 대신(大臣)과 의논하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방백(方伯)의 승자(陞資)를 승선(承宣)573)  이 또 홀로 청하였으나 조금도 의난(疑難)하지 않으셨으니, 이 어찌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저 양전(量田)의 존폐(存廢)는 진실로 한 나라의 중대한 거사이며, 세 사람을 복과(復科)하여 2품의 품질을 초수(超授)한 것은 관계되는 바가 또 어떻겠습니까? 차례로 논청한 것을 묘당(廟堂)에서는 참여하여 들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사체(事體)는 진실로 전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대소(大小)가 서로 유지하여 대강(大綱)을 들어서 세목(細目)을 펴야만 바야흐로 치모(治模)를 이룰 수 있으니, 이것은 이치가 분명해서 논설(論說)을 기다리지 않아도 명백한 것입니다. 신이 이 두 가지 일을 행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조정의 대체(大體)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깊이 유념하시고 예찰(睿察)하셔서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거듭 품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양전(量田)하는 일 또한 상확하여서 복주(覆奏)하게 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소사(疏辭)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하여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가 이판(吏判)의 소어(疏語)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고 퇴대(退待)하였다.

 

강원도(江原道) 이천부(伊川府)의 아전 신득리(申得利)란 자가 큰 곰에게 물렸는데, 신득리가 손으로 쳤으나 힘으로 대적(對敵)할 수 없어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신덕윤(申德允)이 앞으로 나가 주먹을 휘둘러 곰을 때려 죽이고 그 아비를 구출(救出)하였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여 그 효행을 정포(旌褒)하기를 청하였다.

 

11월 4일 을유

임금이 희정당(熙政黨)에 나아가 초복(初覆)574)  을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국옥 죄수(鞫獄罪囚) 유성추(柳星樞)·이덕준(李德峻)을 참작하여 처치하되 모두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이수민(李壽民)은 금부(禁府)에 돌려 보내어 본죄를 조사하여 처치하고, 홍성주(洪聖疇)는 정배(定配)하기를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조흡(趙洽)을 감사(減死)하고 정배(定配)하는 일은 전에 품정(稟定)한 것에 의해 해부(該府)로 하여금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무릇 역모(逆謀)에 동참(同參)하였다가 발고(發告)한 것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옥에 갇히기 전에 동당(同黨)을 고발한 경우를 이릅니다. 만약 조흡(趙洽)이 많은 은화(銀貨)를 내어 독약을 쓴 흉모에 난만(爛熳)하게 동참하였다가 발각되어 옥에 갇힌 뒤에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고자 하는 계략으로 비로소 곧 그의 지당(支黨)을 고발하였다면, 어찌 이로써 갑자기 면사(免死)하기를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최석항이 이르기를,
"집법(執法)에 대한 말이 괴이함이 없음은 이와 같습니다. 조흡이 고발한 것은 목호룡(睦虎龍)과도 조관(條貫)이 각각 다릅니다. 악역(惡逆)을 긴절하게 범한 김창도(金昌道)·이정식(李正植)·정우관(鄭宇寬)·서덕수(徐德修)의 무리는 모두 취복(取服)하여 정형(正刑)575)  되었으니, 또한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다 하여 감사(減死)하는 길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김일경(金一鏡)이 이르기를,
"조흡(趙洽)이 발고(發告)한 것은 옥에 갇힌 뒤에 있었으니,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구한 계책이 됩니다. 그래서 단지 감사(減死)만 의논하였을 따름입니다. 만약 애초에 과연 발고하였다면 녹훈(錄勳)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발한 것이 악역(惡逆)을 긴절하게 범하지 않은 무리가 없으니, 진실로 감사(減死)함이 마땅합니다. 또 그 당시에 조흡이 적당(賊黨)을 많이 고발하여 그 죽음을 속죄(贖罪)하였으므로, 위관(委官) 이하 안옥(按獄)한 제신(失臣)이 아울러 모두 허여(許與)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러 사형을 베푼다면, 실신(失信)하는 데 돌아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자, 이광좌(李光佐)가 이르기를,
"실신(失信)이라고 하는 것은 사사로이 말할지언정 공체(公體)에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후폐를 염려하여 이를 말하더라도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반드시 장차 요행을 바라고 이르기를, ‘비록 발각(發覺)된다 하더라도 만약 지당(支黨)을 고발하면 살아날 수 있다.’고 한다면, 징외(懲畏)할 것이 없으니,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만약 조흡(趙洽)의 고발(告發)이 없어서 저 역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 종사(宗社)를 위한 염려가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또 사흉(四凶)의 죄(罪)도 조흡의 초사(招辭)로 인하여 더욱 드러나서 왕법(王法)을 흔쾌하게 바로잡았으니, 더욱 어찌 그의 죽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발락(發落)하지 않았다. 최석항이 또 조성복(趙聖復)을 다시 배소(配所)에 도로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최석항이 이르기를,
"이제 이 역옥(逆獄)이 발생한지 1년이 되어 갑니다. 승관(承欵)하여 정법(正法)된 자가 20여 인으로 많아졌고, 장폐(杖斃)한 자와 연좌되어 죽은 자가 또 30여 인이 넘습니다. 대저 천도(天道)는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위협에 의해서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면 차라리 〈죄 있는 자를 용서하여〉 법을 깨는 일이 있어도 할 수 없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공경하고 공경하여 형벌을 불쌍히 여기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옛적에 성왕(聖王)은 안옥(按獄)하는 도리를 이와 같이 조심하고 삼갔습니다. 죄상(罪狀)이 이미 드러나 끝까지 캐물어 실정을 알아낸 자는 법(法)으로 단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초(末梢)의 지엽(枝葉)에 이르러서는 설령 요행히 면한 자가 있더라도 호생지덕(好生之德)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국옥 죄인(鞫獄罪人)은 관계된 바가 비록 지극히 중하다 하나, 그 가운데에 정범(情犯)이 의심할 만한 자는 십분 조심하고 삼가하여 평반(平反)576)  하는 데 돌아가도록 힘쓰면, 진실로 죄수를 불쌍히 여기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김일경이 또 함원군(咸原君) 어유귀(魚有龜)를 원훈(元勳)으로 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김일경이 이르기를,
"어유귀를 원훈으로 삼는 일은 이미 하교(下敎)하셨습니다마는, 목호룡(睦虎龍)의 1등은 도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회맹제(會盟祭) 또한 조금 물려서 설행(設行)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정언(正言)·유수(柳綏)가 합계(合啓)를 독주(讀奏)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박징빈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 또 조성복(趙聖復)을 다시 절도(絶島)의 배소(配所)에 다시 보내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고, 그대로 명하여 국청(鞫廳)에서 엄중하게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유성추(柳星樞)는 많은 은화(銀貨)를 내어 흉도(凶圖)를 도와서 이루게 한 정상이 제적(諸賊)의 결안(結案)에 번갈아 나왔는데, 전후(前後)에 공초한 것은 다른 일을 핑계대어 변환(變幻)하며 한결같이 스스로 변명한 단서가 없었으므로, 세 차례나 신국(訊鞫)을 더한 뒤에 무단(無端)이 형문(刑問)을 정지하였습니다. 반드시 부생(傅生)의 의논577)  을 하려는 것은 크게 안옥(按獄)하는 체통에 어긋나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고, 그대로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다시 엄중하게 형신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내기를 기필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유수(柳綏)가 또 조성복을 다시 배소(配所)에 도로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덕준(李德峻)을 국문(鞫問)한 것은 오로지 회금(灰金)의 복심(腹心)이라 하여 독약을 쓴 일에 참여하여 안 일을 알아내려는 것인데,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갑자기 연석(筵席)에서 내리셨으니, 옥체(獄體)가 어긋나고 손상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급히 감사(減死)하고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정지하고, 그대로 엄중하게 가두어 놓고 다시 신문(訊問)하되, 김운택(金雲澤)이 승관(承欵)하기를 기다리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처치하여 아뢰기를,
"구량(舊量)을 쓰기를 청한 것은 뜻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데 있으니, 중신(重臣)의 소어(疏語)를 어찌 반드시 혐의하겠습니까? 청컨대 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를 출사(出仕)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5일 병술

이세최(李世最)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시혁(金始㷜)을 사간(司諫)으로, 서종하(徐宗廈)를 장령(掌令)으로, 이익한(李翊漢)을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심공(沈珙)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국수(鞫囚)를 참작해서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였으므로 편안하지 못하다 하여 진차(陳箚)하여 걸해(乞骸)578)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유성추(柳星樞)의 일은 겨우 환수하라는 계청으로 인하여 이미 성명(成命)을 정지하였으나, 경(卿)은 혐의할 것이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 것이며, 속히 국사(鞫事)를 완결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시(諭示)하였다.

 

부원(府院)의 전계(前啓)를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제주도(濟州島) 안에 크게 기근이 들어 영남미(嶺南米) 4천 석과 호남미(湖南米) 3천 석을 들여보내어 진휼하게 하였다. 명하여 진상마(進上馬)와 별어승마(別御乘馬)를 중지시키어 그 마료(馬料)를 분양(分養)하여 진자(賑資)로 보충하게 하였으니, 목사(牧使) 최완(崔烷)의 장청(狀請)으로 인함이었다.

 

11월 6일 정해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자, 입시(入侍)하였다.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먼저 임금 앞에 나아가 엎드리자, 임금이 성난 음성으로 말하기를,
"옥당(玉堂)의 신하는 행보(行步)가 너무 느려서 자못 지극히 무상(無狀)한데, 승지(承旨)는 어찌하여 청죄(請罪)하지 않느냐? 교리(校理) 이명의(李明誼)·수찬(修撰) 이승원(李承源)을 모두 나추(拿推)하라."
하니, 이명의 등이 창황(蒼黃)하여 물러 나갔다. 승지(承旨) 김동필(金東弼)이 이르기를,
"저 두 신하도 또한 어찌 공경하여 근심하는 예(禮)에 어둡겠습니까? 이것은 한때 소홀한 과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추(拿推)할 죄(罪)가 아니니,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성낸 노여움을 그치지 않고 이르기를,
"내가 젊은 임금이라서 감히 그렇게 하는 것이냐?"
하였다. 김동필이 이르기를,
"형벌을 씀이 너무 지나치면 마땅하지 못하니, 단지 나추(拿推)하라는 명을 거두시고, 경책(警責)함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면 그대로 하라."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업봉(業奉)을 방송(放送)하고, 이수민(李壽民)을 본부(本府)에 이송(移送)하였다.

 

11월 7일 무자

홍성주(洪聖疇)를 정주목(定州牧)에, 조흡(趙洽)을 경흥부(慶興府)에 귀양보냈으니, 조흡은 감사(減死)의 율(律)을 쓴 것이다. 홍성주는 곧 홍순택(洪舜澤)의 종 업봉(業奉)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철물교(鐵物橋)의 홍 동지(洪同知)라고 이른 자이다. 나치(拿致)되어 처음 공초(供招)하기를,
"홍순택과 상대(相對)하였을 때에 약사(藥事) 때문에 장차 큰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하였더니, 홍순택도 또한 이르기를, ‘우리들은 장차 다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를 면질(面質)시키자, 홍순택이 스스로 변명하지 못한 채 반은 실토하고 반은 감추었다. 장폐(杖斃)한 뒤에 국청(鞫廳)에서 다시 홍성주(洪聖疇)를 추국한 문목(問目)에 이르기를,
"이미 그 약(藥)을 홍순택(洪舜澤)이 사온 것을 알았으면, 약이 간 곳을 알지 못할 리가 만무(萬無)하다."
하니, 공사(供辭)하기를,
"그 약이 간 곳을 다시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말이 매우 모호하여 전연 사리에 맞지 않았는데, 형문(刑問)을 받은 지 두 차례 뒤에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기를,
"비록 족친(族親)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음비(陰祕)한 일을 언급(言及)할 리는 없을 것같고, 장폐(杖斃)하게 되면 혹 성조(聖朝)의 흠휼(欽恤)하는 도리에 있어 어긋남이 있을 듯하니, 참작하여 정배(定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정언(正言) 유수(柳綏)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연차(聯箚)가 한 번 나오니 온 나라에서 일제히 분개해 하였고,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하니 만민(萬民)이 다 경하하였습니다. 비록 사흉(四凶)의 혈당(血黨)과 심복(心腹)이라 하더라도 감히 비호하는 계책을 이루지 못할 것인데, 그 당시에 좌부승지(左副承旨) 유숭(兪崇)은 본시 사악하고 아첨하는 성품으로 마침 회좌(會坐)하여 직숙하는 때를 만나자, 혹 차비(箚批)가 엄준(嚴峻)할까 두려워하여 성의(聖意)의 천심(淺深)을 엿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연차(聯箚)를 도로 내리라는 뜻으로써 급급히 진계(陳啓)하기를, ‘대신(大臣)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고 하였으니 현저하게 화응(和應)한 흔적이 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이 곧바로 함경 감사[北藩]에 초천(超遷)되어 공로(功勞)를 수보(酬報)하는 바가 있는 것과 같았으니, 그 정상을 논하면 아주 통완(痛惋)합니다. 다른 죄로써 박벌(薄罰)하는 것은 징책(懲責)하기에 부족하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8일 기축

간원(諫院) 【헌납(獻納) 조원명(趙遠命)·간원 정언(諫院正言) 유수(柳綏)이다.】 에서 전계(前啓)한 조성복(趙聖復)의 일을 거듭 아뢰니, 그대로 따르고, 유숭(兪崇)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또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의 출사(出仕)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박징빈은 유성추(柳星樞)를 감사(減死)하고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계청하였을 때에 자성(慈城)의 은화를 평안 병사의 은화라고 잘못 일컬었고, 주어(奏御)하는 문자(文字)를 상오(爽誤)한 잘못 때문에 인피(引避)하고 퇴대(退待)하니, 처치하기를,
"연중(筵中)에서 쟁집(爭執)한 것은 이미 대체(臺體)를 얻었으며, 몇 자의 차오(差誤)는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11월 9일 경인

양사(兩司) 【사간(司諫) 김시혁(金始㷜)·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홍순택(洪舜澤)이 역적 이이명(李頤命)의 행차(行次)에 따라가서 몰래 독약(毒藥)을 매입한 정상을 직접 보고서 자세하게 말한 자는 업봉(業奉)이었고, 서울에 돌아온 뒤에 역적 이희지(李喜之)와 역적 이이명이 뒷방에서 약값을 문답(問答)하는 말을 훔쳐 듣고서 직초(直招)한 자는 김성절(金盛節)이었습니다. 전후의 정절(情節)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으니, 장형(杖刑)을 참다가 경폐(徑斃)되었다 하여 역률(逆律)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청컨대 왕부(王府)579)  로 하여금 급히 수노 적산(收孥籍産)580)  의 형전(刑典)을 거행하게 하소서.
지난 겨울에 성상(聖上)께서 천위(天位)에 불안하셔서 신자(臣子)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재차 내리시니, 대소 신민(大小臣民)으로서 진실로 조금이나마 우리 전하께 북면(北面)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분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일제히 소리질러 힘껏 쟁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올바른 이를 구원하는 까닭을 생각하면,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581)  하고 백료(百僚)가 정유(庭籲)하여, 청(請)을 허락받지 않고는 물러가지 않은 후에야 바야흐로 신자(臣子)의 직분(職分)을 다할 수 있는 것인데, 아! 저 사흉(四凶)은 겉으로 공의(公議)를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책임만 모면하는 계책을 삼고, 속으로는 흉도(凶圖)를 품은 채 곧바로 반열(班列)을 거두는 의논을 창도하였습니다. 아무개 외에는 모두 그림자같이 따르고 메아리같이 응하면서 조금도 달리하는 뜻이 없었으니, 이 무리는 단지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만 있는 줄 알고 군부(君父)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마음이 이에 드러났습니다. 주모(主謀)한 사흉은 이미 복법(伏法)되었으니, 뜻을 같이하는 무리로서 서로 화응하여 나라를 저버린 당역(黨逆)의 무리를 문출(門黜)하는 박벌(薄罰)로써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정청(庭請)하고 의논을 마쳤을 때 경재(卿宰)와 대관(臺官)으로서 합사(合辭)에 유낙(唯諾)했던 자들을 모두 원찬(遠竄)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조흡(趙洽)은 천금(千金)의 아들로서, 은화(銀貨)를 많이 내고는 삼수(三手)의 여러 흉적(凶賊)과 체결하여 모역(謀逆)한 정상이 죄다 남김없이 탄로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형신(刑訊)하는 아래에서 끝내 엄휘(掩諱)하기 어렵게 되자, 실정에 함께 참여했던 여러 흉적을 이끌어 고발하고는 고변(告變)이라 일컬으며 감히 삶을 희구하는 계책을 냈으나, 그가 고변한 것은 곧 실정을 말한 결안(結案)입니다. 당초에 국청(鞫廳)에서는 역절(逆節)을 깊이 알아내는 데에 급하여 죽음을 용서하겠다고 허락하였으므로, 지금 와서 참작하여 처리하자는 청은 대개 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국옥(鞫獄)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중합니다. 진실로 조흡(趙洽)으로 하여금 역절(逆節)이 발각되기 전에 상변(上變)하게 하였더라면 진실로 그 공(功)이 있겠지만, 그가 이미 옥에 갇혀 있으면서 신문(訊問)받은 뒤에 이른바 발고(發告)하였다는 것은 실토하여 승관(承欵)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로써 부생(傅生)의 의논을 하여 전형(典刑)을 면할 수 있게 한다면, 왕법(王法)을 굽혀서 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청컨대 급히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정침하고, 그대로 국청으로 하여금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조흡(趙洽)의 아비 조이중(趙爾重)은 본시 흉적(凶賊)의 복심(腹心)으로서, 음모와 비계(祕計)를 더불어 알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기지(李器之) 무리의 은화(銀貨)의 주인(主人)이 되었으니, 평안 병사로 있었을 때에 8천 냥을 수습(收拾)하여 올려 보냈다는 말이 이미 역적 이정식(李正植)의 결안(結案)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정범(情犯)을 논하면 유취장(柳就章)과 다름이 없는데, 단지 역옥(逆獄)이 발각되기 이전에 죽었다 하여 전형(典刑)을 결단하여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질(官秩)이 이와 같고, 도리어 무죄(無罪)한 사람과 같으니, 여정(輿情)이 놀라서 분개해 하지 않는 지가 없습니다. 청컨대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11일 임진

김창집(金昌集)의 아우 김창업(金昌業)은 집안이 본시 부요(富饒)한데다가, 또 김창집의 세도(勢道)를 빙자하여 별서(別墅)를 동교(東郊)의 밖에 크게 지었고, 10리나 되는 금경지(禁畊地)를 개간하여 천백(阡陌)582)  을 연긍(連亘)하였으며, 백 년 동안 양송(養松)한 산(山)을 점거하여 원림(園林)을 장점(粧點)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전리(箭里)의 열무(閱武)하는 장소를 차지하려고 그의 형을 종용(慫慂)하여 드디어 공지(空地)를 백성에게 허여한다는 뜻을 연중(筵中)에서 진백(陳白)하고는 비옥한 토지를 죄다 그의 소유(所有)로 만들었다. 김창집이 패망하자, 대관(臺官)이 논계(論啓)하여 도로 진폐(陳廢)하는 일을 청하니, 경조(京兆)에 내렸는데, 이에 이르러 한성부에서 낭관(郞官)을 보내어 적간(摘奸)한 뒤에 아뢰기를,
"열무장(閱武場) 안과 장대(將臺) 아래에 김창업이 둑을 쌓고 기경(起耕)한 곳이 많이 있는데, 절반은 수해로 진폐(陳廢)되었고, 절반은 이제 바야흐로 기경(起耕)하고 있었습니다. 불천(佛川)의 하류(下流)에는 전부터 솔밭[松田]이 있었는데, 소나무가 해충으로 손상되었다고 핑계대어 또한 기간(起墾)하였으며, 청량산(淸涼山)의 한 동학(洞壑)도 여러 해 동안 소나무의 벌목을 금지한 곳인데 제멋대로 개간하여 만든 전지가 면적이 매우 넓고 크다 합니다. 군병(軍兵)이 열무(閱武)하는 장소와 금표(禁標)하여 양송(養松)하는 땅이 이 어찌 사가(私家)의 경작하는 곳이 되겠습니까? 김창업이 법령을 무릅쓰고 기경(起耕)하여 멋대로 자기 물건을 만든 것이 진실로 대계(臺啓) 가운데 논핵(論劾)한 것과 같으니, 일이 지극히 놀랄 만합니다. 마땅히 그 죄가 있어야 하는데, 김창업이 죽어서 이제 논할 수는 없으나, 그가 둑을 쌓고 함부로 기경한 등처를 청컨대 한결같이 모두 도로 진폐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내년 봄을 기다려 소나무를 심고 도벌을 금지하여 양목(養木)하는 일을 해도(該道)의 감역(監役)에게 엄중히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 정언(正言) 유수(柳綏)이다.】 에서 거듭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그 가운데에 민진원(閔鎭遠)은 가율(加律)583)  하여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 홍시구(洪時九)가 영종 첨사(永宗僉使)가 되어 선갑도(先甲島)에서 사사로이 주전(鑄錢)한 죄인(罪人) 변위신(卞煒信)·황춘선(黃春善) 등을 잡고, 아울러 그 기계(器械)·장물(贓物)과 포청(捕廳)에 보냈더니, 대장(大將) 정이상(鄭履祥)이 그 실상을 안치(按治)하여 와주(窩主)를 뒤따라 잡았습니다. 그런데 안귀서(安龜瑞)를 장차 궁핵(窮覈)하려고 할 즈음에 김창집(金昌集)이 급급히 청대(請對)하여, 바로 정이상은 노쇠하여 도적을 다스리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이르고는 무단(無端)히 아뢰어 체차하였습니다. 역적 이이명(李頤命)의 무리가 또 주전(鑄錢)할 뜻을 연석(筵席)에서 청하자, 그 당시 사람들이 자자(藉藉)하게 모두 말하기를, ‘안귀서(安龜瑞)의 이 거사는 이미 거실(巨室)의 지휘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포청(捕廳)에 비록 이미 깊이 조사하여 실상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무사(無事)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승관(承欵)하여 추조(秋曹)에 이송(移送)하게 되어서는 시일만 천연(遷延)한 채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리지 않았으니, 필경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았습니다. 아! 사주(私鑄)는 나라의 중률(重律)이며, 삼척(三尺)이 지극히 엄중하니, 꺾이고 굽히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흉역 김창집(金昌集)이 아뢰어 포장(捕將)을 체차(遞差)하고, 역적 이이명(李頤命)이 주전(鑄錢)하기를 청한 것은 하나는 치죄(治罪)를 지체하려는 것이었고 하나는 미봉(彌縫)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그 사이의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할 만한 바가 있었고, 더구나 삼수(三手)의 역모(逆謀)가 다 은화(銀貨)와 전재(錢財)에서 나왔으니, 안귀서(安龜端)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미 16명의 흉역(凶逆) 가운데 1인입니다. 또 포청(捕廳)의 문안(文案) 가운데에 흉적 조송(趙松)·역적 정우관(鄭宇寬)의 이름이 간련(干連)할 초사(招辭)에 번갈아 나왔으니, 안귀서도 본시 흉당(凶黨)에 출입(出入)하며 간계를 꾸미고 재화를 농간한 정상이 소명(昭明)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정배 죄인(定配罪人) 안귀서(安龜瑞)를 다시 좌우 포청(左右捕廳)으로 하여금 군교(軍校)를 보내어 즉시 나래(拿來)하고, 합좌(合坐)584)  해서 장신(杖訊)하여 그가 사사롭게 주조(鑄造)한 정절(情節)과 전화(錢貨)의 간 곳을 일일이 끝까지 핵실하게 한 다음 율(律)에 의하여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였으니,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달 5일 병술(丙戌)에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엎드려 듣건대 어제 김일경(金一鏡)의 무언(誣言)한 바로 인하여 갑자기 신의 이름을 끄집어 내어 녹훈(錄勳)하는 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저 녹훈(錄勳)은 사체(事體)가 엄중하므로, 그 사람의 그 공적이 명백하게 그러나서 암매(暗昧)한 것이 없은 뒤에야 바야흐로 녹훈(錄勳)할 수 있으며, 녹훈을 받은 자도 또한 말이 없어야 옳은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 단록(單錄)의 약(弱)함을 염려하고, 마땅히 녹훈할 사람이 없음을 혐의하여 부추겨서 국안(鞫案) 외에서 합당하게 날조하고, 어렵게 여겨 허무한 가운데에서 찾아서 오래도록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밤낮으로 생각하여 간예하지 않은 사람을 의의(擬議)하여 천일(天日) 아래에서 속이고, 훈권(勳券)을 확대시키기를 요구하여 청문(廳聞)을 의란(疑亂)시켰으니, 그 계책이 교밀(巧密)합니다. 대충 들은 것들을 빙의(憑依)하여 증거로 끌어댄 것은 오로지 이삼석(李三錫)의 무망(誣罔)한 말에 있었으니, 이것은 한 말로써 변파(辨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상참(常參)에서 인견(引見)할 때에 김일경(金一鏡)은 이삼석이 옥중(獄中)에서 한 바가 없는 말을 꾸며 대어서 말하기를, ‘이삼석이 신에게 말한 것이 있으며, 신도 또한 대답한 것이 있습니다.’고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그 옥안(獄案)과 서로 어긋남을 아뢰고, 그가 애초에 면대하여 말한 것이 없음을 밝히니, 또 그 말을 바꾸고는 갑자기 창출(創出)하여 다시 말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이 일찍이 모가(某家)에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목호룡에게 일찍이 그 실상을 본 적이 없었고, 그도 일찍이 신의 집에 발이 미치지 않았으니, 한 번 핵실(覈實)하면 변정(卞正)하여 밝힐 수 있는데, 김일경이 이르기를, ‘하늘은 속일 수 있지만, 홀륜(囫圇)585)  하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진실로 사실이 있었다 여긴다면, 청컨대 이삼석(李三錫)을 초문(招問)하소서. 성교(聖敎)를 유윤(兪允)하지 않으셨으면 이는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여러 가지로 설계(設計)하여 훈부 당상(勳府堂上)에게 몰래 부탁하고, 또 이삼석(李三錫)이 서둘러 희망하는 실상을 탐색하고는 별안간 부정(府庭)에 잡아다 놓고 신의 이름을 주로 들어서 힐문(詰問)하여 신에게 오욕을 끼친 것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한배하(韓配夏)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함이 심합니다. 성명(成命)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김일경(金一鏡)의 지휘(指揮)를 받아 여러 가지로 유문(誘問)하여 억지로 한 장의 문서(文書)를 만들었고, 김일경은 또 그가 공초(供招)한 한 장의 종이를 횡탈(橫奪)하여 진귀한 것처럼 깊이 간직하였다가, 그 말을 이어받아 천청(天聽)에 주달(奏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저 이삼석(李三錫)이란 자는 단지 하나의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입니다. 한 번 국청(鞫廳)에 출입(出入)한 뒤로부터는 문득 공명을 바라는 어리석고 허망한 마음이 생기어, 당로(當路)에게 아부하여 허언(虛言)을 만들어 내되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신이 초문(招問)에 대답한 것을 얻어보니, 허실(虛實)을 변환(變幻)하여 절절이 서로 어긋났습니다.
국청(鞫廳)의 납초(納招)에는 신이 약방(藥房)에 있고 의막(依幕)에 있지 않아서 이야기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르기를, ‘위언(危言)으로써 신에게 면고(面告)하였다.’고 하며 신이 저를 대하여 수답(酬答)한 것과 같은 것이 있듯이 하였으니, 이는 그 무망(誣罔)한 것의 하나입니다. 저가 평생 친밀하였던 자는 곧 유취장(柳就章)·유정장(柳貞章) 등이었는데, 기영(畿營)586)  의 독채(督債)에 곤경을 당하자, 빌어 먹고자 하여 자취를 유취장의 곤영(閫營)에 의탁하고는 이제 이르기를, ‘화(禍)가 두려워 도피(逃避)하였는데, 어유귀도 또한 옳다고 했다.’고 하니, 이것이 그 무망(誣罔)한 것의 둘입니다. 지난번에 국옥(鞫獄)이 바야흐로 한창 벌어졌을 때를 당하여, 이삼석(李三錫)의 이름이 국초(鞫招)에서 나왔음을 듣고, 그 연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저가 마침 녹료(祿料)를 신이 있던 어영청(御營廳)에 부치었으므로, 그 곡절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이 일찍이 이야기한 것은 반드시 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나에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제 비로소 들어 알았다. 설혹 나문(拿問)하더라도 너는 이미 나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사실에 의거하여 고(告)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잡아다 옥에 가두니, 과연 ‘신이 의막(依幕)에 있지 않은 까닭으로 고하여 알린 바가 없었다.’고 하였다가, 이제는 이르기를, ‘힘써 겁먹지 않고 곧바로 고하였다.’고 하여 신이 지휘(指揮)한 것이 있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무망한 것의 셋입니다. 경자년587)  의 국휼(國恤)을 당하였을 때에 별감(別監)·포수(砲手)로 별도로 수위(守衞)를 삼았다는 등의 말은 더욱 지극히 음교(陰巧)합니다. 이것은 군문(軍門)에서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것인데, 이제는 바로 주합(湊合)하여 말하면서 신이 진품(陳稟)하여 주선(周旋)한 것이 있는 듯이 하였으니, 이는 무망(誣罔)한 가운데에 더욱 큰 것입니다. 또 그가 지난해 겨울에 위기 때문에 고하였다가 이른 것은 오로지 맹랑(孟浪)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그 말의 허망함이 이와 같고, 그 일의 중대함이 이와 같으니, 그 조정(朝廷)의 사체(事體)에 있어서 곧 신에게 빙문(憑問)하고 그 허실을 살피는 데는 진실로 마땅히 충훈부(忠勳府)에서 함문(緘問)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초치하여 힐문(詰問)함이 옳으니, 청컨대 잡아다 핵문(覈問)하는 것 또한 옳습니다.
이제 사실(事實)은 신문(訊問)하지 않고, 오직 꾸며낸 허언(虛言)만을 신문하여 별안간 진품(陳稟)하여 억지로 공로(功勞)가 있다고 이르고는 훈명(勳名)을 더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목호룡(睦虎龍)이 이미 이삼석(李三錫)과 서로 친밀하고, 이삼석은 일찍이 이 모문(某門)을 출입(出入)한 사람이니, 그 말을 전하고 전하지 않음과 그 일의 알고 알지 못함은 묻지 않은 채 이것만을 빙자하여 말하고 파착(把捉)하여 공로를 삼으면, 천청(天聽)을 현혹시키고 한 세상을 무란(誣亂)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니, 그가 불러다가 교유(敎誘)하여 광란(誑亂)하고 섬숙(閃倐)한 정상에서 더욱 그의 종사(縱肆)하고 무엄(無嚴)함을 볼수 있습니다. 아! 신의 정적(情跡)이 위태하여 소인들이 기뻐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바로 녹권(錄券)을 빌어 목호룡·이삼석의 상투(常套)로 몰아 넣으니, 신이 오멸(汚衊)을 당한 것은 진실로 말할 겨를이 없으나, 조정(朝廷)을 욕되게 함이 크니, 원하건대 이 소장(疏章)을 왕부(王府)에 내리셔서 이삼석(李三錫)을 나수(拿囚)하여 이 수조(數條)를 가지고 다시 반문(盤問)을 더하되, 그 가운데 군병을 수위(守衞)하게 하였다는 말은 더욱 지극히 중대하니, 신이 어떤 때를 당하여 품백(稟白)하였고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주선(周旋)하였는지 등의 조목에 대해 별도로 엄핵(嚴覈)을 더하소서. 신이 만약 기은(欺隱)하는 것이 있으면 신의 불충(不忠)한 죄(罪)를 다스리고, 이삼석의 말이 과연 허망(虛罔)하면 별도로 중감(重勘)하여 무망(誣罔)한 무리를 경계(警戒)하소서. 위록(僞錄)을 삭제하기 전에는 대죄(待罪)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어영(御營)의 밀부(密符)를 해탈(解脫)하여 장교(將校)로 하여금 대신 바치게 하고, 그대로 고향길을 찾으며 신극(宸極)을 첨망(瞻望)하니, 한갓 송결(悚缺)한 마음만이 더합니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녹훈(錄勳)의 명은 경의 재덕(才德) 때문이니, 진실로 이 소망에 합당한 것이었다. 뜻밖에 저척(詆斥)을 당한 것은 혐의할 것이 못되니, 경은 안심(安心)하여 사직하지 말라. 도로 명소(命召)를 내리니, 속히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계사

헌부(憲府)의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핵(論劾)하기를,
"지평(持平) 성덕윤(成德潤)은 대각(臺閣)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지났으나, 끝내 의견을 내어 한 가지 일도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다른 사람을 따라서 진퇴(陳退)하였으나, 또한 별달리 쟁론(爭論)한 일이 없더니, 마지막으로 허둥지둥 진소(陳疏)하여 구차하게 책임을 면하고는 체직(遞職)하기를 꾀하는 계책을 삼아 대각(臺閣)의 기풍을 무너뜨렸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심단(沈檀)이 역가(逆家)에서 몰입(沒入)한 재산(財産)과 가사(家舍)를 진휼청(賑恤廳)에 이송(移送)하여 기전(畿甸)의 민역(民役)에 보충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다. 이에 이르러 진휼청에서 복주(覆奏)하여 내년 봄에 납부할 대동미(大同米)588)  의 절반을 견감(蠲減)하여서 그 몰입(沒入)한 재산이 설혹 부족하더라도 본청(本廳)에서 길거(拮据)하여 보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금부 도사(禁府都事) 송식(宋湜)이 진도(珍島)에 치도(馳到)하여 죄인(罪人) 조태채(趙泰采)를 사사(賜死)하고 계문(啓聞)하였다.

 

11월 13일 갑오

밤 4경(更)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김중희(金重熙)를 정언(正言)으로, 구명규(具命奎)를 지평(持平)으로, 조태억(趙泰億)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명의(李明誼)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정수기(鄭壽期)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이때 국좌(鞫坐)가 그동안 많이 정지되었다. 또 대신(大臣)이 진차(陳箚)하여 판의금(判義禁) 이광좌(李光佐)가 당시에 이조 판서를 겸대(兼帶)하였는데, 여름의 도정(都政)589)  을 지금까지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우선 국좌(鞫坐)를 정지하고 도정(都政)을 먼저 거행하기를 청하였다. 교리(校理) 권익순(權益淳)이 상차(上箚)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옥(鞫獄)은 사체(事體)가 도정(都政)에 견주어 더욱 엄중한데, 이로 인하여 엄연(淹延)함은 불가합니다. 대정(大政) 전에 으레 해조(該曹)에서 거행한 일이 많았고, 날짜도 거의 열흘이나 걸립니다. 잡과(雜科)로 인하여 국좌를 정지한 지 벌써 5, 6일이 지났는데, 전후를 통계하면 장차 반 달에 이르고 있습니다. 도정(都政)이 끝난 뒤에 즉시 국좌(鞫坐)를 여는 것 또한 기약할 수 없는데, 시일을 지연(遲延)하여 내버려 두고 추문(推問)하지 않으면, 엄동(嚴冬)에 죄수가 얼어서 그대로 병들어 죽게 될 것이니, 장차 실정을 다 말하게 하여 정법(正法)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국수(鞫囚)는 단지 몇 사람만 남았으니, 불과 며칠 동안에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국사(鞫事)를 완결한 뒤에 도정(都政)을 행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도정(都政)을 천취(遷就)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국옥(鞫獄)을 끝내는 것은 기약하지 못하지만, 며칠 기다렸다가 수습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김시혁(金始㷜)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14일 을미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정고(呈告)590)  하기를 60번에 이르렀는데 명하여, 승지(承旨)를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으나, 조태구가 병(病)으로 응명(應命)하지 않았다.

 

11월 15일 병신

월식(月食)하였다. 5경(更)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11월 16일 정유

이중술(李重述)을 집의(執義)로, 유필원(柳弼垣)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윤동수(尹東洙)를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윤동수는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의 종손(從孫)이다. 유염(濡染)591)  하고 훈도(薰陶)하여 학행(學行)으로 명망이 있었다. 여러번 천섬(薦剡)에 올라서 또한 대성(臺省)을 제수하였다. 이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학문(學問)을 한 사람은 비록 혹 목전(目前)의 효험은 있지 않더라도 현사(賢士)가 조정에 있으면, 백료(百僚)가 삼가 본보기로 삼을 것이니, 진실로 치도(治道)에 비익(裨益)됨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학문을 일으켜 행하지 않으며, 설사 있더라도 조가(朝家)에서도 현용(顯用)하지 않으니, 조정에 현사가 없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윤동수와 같이 독서(讀書)하고 수행(修行)함이 남보다 크게 뛰어난 자에게 만약 진선(進善)의 직임(職任)을 제수하고 경련(京輦)에 초치하여 주연(冑筵)592)  에 출입하게 하면, 그 보익(輔益)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므로, 이 제수(除授)가 있었다.

 

이보다 앞서 정언(正言) 이광도(李廣道)가 삼남(三南)에서 신량(新量)에 대해 민원(民怨)이 있음을 아뢰어 논하고, 신량을 버리고 구량(舊量)을 채용하기를 청하였었다. 그리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상확하여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제 이 신량(新量)은 이미 3년이 지났지만, 민간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대저 양전(量田)의 어려움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마는, 기유년593)  의 양전(量田)으로 말하면, 토품(土品)의 기름지고 메마름과 등수(等數)의 높고 낮음을 일일이 고르게 바로잡지 못하여 민원(民怨)이 오늘날에도 줄어 들지않고 있는데, 시행한 지 50년 동안 점차 이정(釐正)하였습니다. 신량(新量)의 고르지 못한 것이 비록 각도가 똑같다고 하나, 만약 선동한 백성의 비방으로 인하여 갑자기 3년 동안 이미 시행한 양전(量田)을 갑자기 버리면, 조가(朝家)의 거조(擧措)가 전도(顚倒)될 뿐만 아니라, 중간(中間)의 간교한 폐단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신량(新量) 중에서 가장 억울함을 일컫는 곳과 산골의 따비밭과 묵정밭 가운데 기자(起字)에 섞여 기록[混錄]되어 해마다 원전(元田)과 다름없이 징세(徵稅)한 것은 모두 이정(釐正)하되, 각별히 정밀하게 조사하여 허실을 서로 입는 폐단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니, 청컨대 이로써 삼남(三南)의 도신(道臣)에게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경상도(慶尙道)의 진주 진영(晉州鎭營)에서 가두어 다스리던 적인(賊人) 70여 명이 옥문(獄門)을 깨부수고 옥졸(獄卒)을 구타하고서 도망하였는데, 곧 군교(軍校)를 보내어 곧바로 추포(追捕)하여 전에 이미 승관(承欵)한 자 4인은 참수(斬首)하였고, 인하여 체포하지 못한 자는 4인이라고 도신(道臣)이 치계(馳啓)하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11월 17일 무술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여 박태항(朴泰恒)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김일경(金一鏡)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사상(李師尙)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다시 상소(上疏)하여 훈록(勳錄)을 사양하니, 대답하기를,
"원훈(元勳)이라는 이름을 너무 지나치게 겸양(謙讓)하는데, 한결같이 강박하는 것도 마땅하지 못하여 부득이 체개(遞改)하니, 모름지기 속히 들어와 나의 간절히 바라는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선공감 역(繕工監役) 심윤(沈潤)은 향리에 살면서 무력(武力)으로 억압하여 불의를 많이 행하고, 자취를 서원(書院)에 의탁하며 재화(財貨)를 모아서 사사롭게 쓰니, 한 고을의 인사(人事)로서 대신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외람되게 음사(蔭仕)594)  를 얻게 되자,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리(私利)를 도모하며 야비하고도 잗단 비리(非理)를 행한 일은 한 가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태거(汰去) 하소서.
동복 현감(同福縣監) 이현경(李顯慶)은 사람됨이 경망하여 전연 일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본현(本縣)에 제수되자, 술에 빠져서 관아(官衙)의 일을 폐지하고 간리(奸吏)에게 정사(政事)를 위임하여 여러 가지로 침어(侵漁)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관정(官庭)에 억울함을 호소하면 머리를 꺼둘러 축출하고, 관례(官隷)가 마을에서 소란을 부려도 금단(禁斷)하지 않으니, 온 지경 안이 떠들썩하고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조흡(趙洽)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11월 18일 기해

윤성시(尹聖時)를 수찬(修撰)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연(尹㝚)을 응교(應敎)로, 김동필(金東弼)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여필용(呂必容)을 승지(承旨)로, 김일경(金一鏡)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이수량(李遂良)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가 도성(都城)을 나간 뒤부터 장부(將符)595)                  를 환납(還納)하고 환수(還授)한 것이 거의 수십 차례에 이르렀고, 사관(史官)이 평일에 왕래하며 원훈(元勳)을 체개(遞改)하였으나 오히려 명에 불응(不應)하였다. 또 다시 장부(將符)를 바치니, 임금이 명하여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근시(近侍)로 하여금 돈유(敦諭)하게 하는 것은 바로 국가에서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특별한 예(禮)입니다. 국구(國舅)가 비록 존귀하다 하나, 지벌(地閥)로서는 폐부(肺腑)의 친척이고 직임으로서는 장병(將兵)의 신하인데, 대신(大臣)의 예(禮)로 대우함은 너무 지나칩니다. 전에 없던 일에 관계되는데 이제 갑자기 시작하여 행하시면 사체(事體)를 삼가고 아끼는 도리에 어긋날까 염려되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정침(停寢)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단지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전수(傳授)하게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조흡(趙洽)을 도로 옥(獄)에 가두었다.

 

11월 19일 경자

이명언(李明彦)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수령(守令)을 자주 체차(遞差)하는 폐단에 대해 논청(論請)하기를,
"삼화 부사(三和府使) 이수량(李遂良)·정평 부사(定平府使) 이언상(李彦祥)·정산 현감(定山縣監) 박필건(朴弼健)·함안 군수(咸安郡守) 조호신(趙虎臣)은 청컨대 모두 잉임(仍任)596)  시키소서. 새로 부임한 순천 부사(順天府使) 오수경(吳守經)은 사람됨이 변변치 못하여 전연 모양이 없습니다. 앞으로 진정(賑政)을 결코 이 사람에게 책임지울 수가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전(前) 창성 부사(昌城府使) 민창기(閔昌基)는 사람됨이 근간(勤幹)한데, 도임(到任)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신병(身病) 때문에 파직(罷職)당하였으나, 자취는 염피(厭避)한 것이 없습니다. 몇 달 안에 세 차례나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어, 읍폐(邑弊)와 민막(民瘼)이 이루 말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지 말고 잉임(仍任)시키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구명규(具命奎)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사이 국청(鞫廳)에서 역수(逆囚)를 토죄(討罪)하여 다스리고 있는데, 그것이 엄중합니까, 용렬합니까? 그것을 서둘러 하고 있는 것입니까, 늦추어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난번 대각(臺閣)에서 일에 따라서 논쟁(論爭)하지 않은 경우, 국적(國賊)이 스스로 옥문(獄門)을 나온 지 또한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대관(臺官)이 힘써 잡아서 옥(獄)에 가두면 국청(鞫廳)에서는 잠깐 보고는 형신(刑訊)을 면제하고 있는데, 대신(大臣)이 세 번이나 상차(上箚)하기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금오(金吾)에서는 병(病)을 핑계하여 국옥(鞫獄)이 정폐(停廢)된 지 대저 몇 달이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관아에 나아가면 용이하게 파좌(罷坐)하고 잠깐 국좌(鞫坐)를 열었다가는 바로 폐지하여 거의 아이들이 장난하는 것과 같으니, 역적(逆賊)이 실토(實吐)할 이치가 없으며, 옥사(獄事)가 완결될 날이 없습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수레에 올라 역적(逆賊)을 토죄하는 것을 중신(重臣)에게 바라지는 않으나, 이미 나온 뒤에 이와 같이 마음대로 하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잡과(雜科)에서 재주를 시험하는 것이 역옥(逆獄)을 핵토(覈討)하는 것과 경중(輕重)이 어떠하기에 감히 국옥을 정지하기를 청하여 이를 버리고 저기에 나아가는 것입니까? 내국(內局)의 제거(提擧)가 옥관(獄官)과 서로 방해됨이 고례(古例)는 그러하였으나 이 직임의 제수를 구하였으니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로운 것이 있지 않은데도 전례를 어기면서 구한 것은 그가 과연 금오(金吾)를 면하고자 꾀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추보(追報)하는 한 가지 일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사람의 의견(意見)은 본시 각자 똑같지 않으므로 각기 소견(所見)을 논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신(重臣)의 지난번의 한 상소와 같은 것은 전연 착락(着落)한 것이 없는데도 벌써 그 사우(祠宇)를 세워서 풍향(豐享)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명호(名號)에 이르러서는 거론(擧論)할 필요조차 없다고 단정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전례(典禮)이며, 이것이 무슨 의리(義理)입니까? 사우(祠宇)는 이미 세웠는데, 신주(神主)만 홀로 이름이 없다면, 장차 이름 없는 신령을 사당에 제사지내려는 것입니까? 이름 없는 사당에 제사지내고 이르기를, ‘이는 우리 임금을 위하여 사친(私親)을 추보(追報)하는 바탕이다.’ 한다면, 그것이 과연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오직 이름 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서 나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미루어 우리 임금께서 낳은 은혜를 생각하여 보답하는 데 미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 패려(悖戾)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아홉 차례나 패초(牌招)597)  를 어기고 교만하게 잘난 체하는 습성 같은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 됩니다. 전후의 거조(擧措)가 이와 같은데 한 번도 경계하여 다스리지 않는다면, 신은 나라의 기강을 진숙(振肅)598)  하는 바가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조신(朝臣)이 지일(至日)599)  에 국옥을 정지하자는 뜻으로 진소(陳疏)하였는데, 인묘(仁廟)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대개 국적(國賊)은 하루라도 늦추어 다스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제 잡과(雜科) 때문에 국옥을 폐지한다는 것은 전에 듣지 못한 것인데, 더구나 국옥(鞫獄)을 폐지하고 도정(都政)을 설치한다는 것은 더욱 뜻밖입니다. 세간 천하(世間天下)에 어찌 역옥(逆獄)을 가지고 한만(汗漫)하게 보게 만들고, 즉시 끝내지 않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감히 이것을 간략하게 진달하니, 후일(後日)을 경계(警戒)하소서."
하였다.

 

11월 20일 신축

밤에 달무리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지평(持平) 구명규(具命奎)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동교(東郊)로 물러가니, 명소(命召)를 환납(還納)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수(傳授)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 또한 강교(江郊)로 나갔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니,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빙고 별검(永庫別檢) 서주세(徐冑世)는 본시 향곡(鄕曲)의 보잘것없는 무리로서 사론(邪論)을 부탁하여 반천(泮薦)을 점유하기를 꾀하였고, 또 지난해에 역적 윤지술(尹志述)이 귀양갈 적에는 성균관 유생의 권당(捲堂)600)  을 핑계하여 소회(所懷)를 글로 써서 바치어 요적(妖賊)을 권장하고 치켜 세운 어의(語意)가 몹시 패려하였으니, 그 정상(情狀)을 추구하면, 윤지술(尹志述)과 다름이 없습니다. 개기(改紀)한 뒤에 사론(土論)이 일제히 일어나서 유적(儒籍)에서 이름을 지워버렸는데, 안연(晏然)히 재직(在職)하며 조금도 자처(自處)하는 뜻이 없습니다. 장릉 참봉(莊陵參奉) 이순간(李順幹)은 본시 이익을 탐하는 거간꾼의 무리로서 행실이 추악하고도 패려하여 향당(鄕黨)에 끼지 못하는데, 분수를 무릅쓰고 현관(賢關)601)  에 참여해서 사의(邪議)를 고창(鼓唱)하여 어진이를 죽이고 올바른 이를 독해하는 여러 논의에 소매를 걷어올리고 우두머리로 일컫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연하여 출세하여 외람되게 사적(仕籍)에 통했는데, 관직에 있으면서 비쇄(鄙瑣)함과 능졸(陵卒)을 침학(侵虐)한 것은, 오히려 이는 자질구레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사악하고 더러운 무리들은 그들이 비천하다고 해서 내버려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밤 2경(更)에 대비전(大妃殿)에서 언문 교서를 정원(政院)에 내리기를,
"대전(大殿)께서, 5, 6일 전부터 치통(齒痛)이 있었는데, 어제부터는 볼 부분이 부어서 수라(水剌)를 전혀 진어(進御)하지 못하고 있으나, 의관(醫官) 또한 불러 보지 않으시니, 지극히 민망하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약방(藥房)을 불러 입직(入直)시키고, 의관(醫官)은 즉시 제조(提調)에게 보고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조태구(趙泰耉)는 병(病)이 중하여 휴가를 받았고, 제조(提調)        이광좌(李光佐)는 언사(言事)를 당하여 강교(江郊)에 있으므로, 부제조(副提調)        임순원(任舜元)이 유문(留門)하였다가 들어와 여러 의원(醫員)을 거느리고 입진(入診)하였다.

 

11월 21일 임인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상후(上候)가 미령(未寧)하다는 것을 듣고, 병든 몸으로 가마를 타고 대궐 밖에 이르러서 기거(起居)를 받들었고, 영돈녕(領敦寧) 어유귀(魚有龜) 또한 들어와서 명소(命召)를 받지 못하여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명하여 대명(待命)하지 말게 하였다.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이 성덕윤(成德潤)을 논핵(論劾)하여 체차(遞差)한 뒤에 사간(司諫) 김시혁(金始㷜)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급급하게 논박하여 탄핵하면 독후(篤厚)함을 잃게 됩니다."
하니, 박징빈(朴徵賓)이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고 퇴대(退待)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세최(李世最)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당초에 규경(糾警)한 바가 깊은 뜻이 없었습니다. 간신(諫臣)의 소척(疏斥)은 혐의할 필요가 없으니, 청컨대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1월 22일 계묘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상소(上疏)하여 문형(文衡)602)  을 사직(辭職)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신이 맡은 문형(文衡)의 직임은 의리가 반드시 체차되어야 합니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무슨 말인들 다하지 못하겠습니까? 여름 사이에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이 대관(臺官) 정수기(鄭壽期)에게 탄핵받았을 적에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대사성(大司成) 이사상(李師尙)에게 서찰(書札)를 보내기를, ‘강태(姜台)의 일은 병조(兵曹)·형조(刑曹)의 양태(兩台)가 정수기(鄭壽期)를 사주하여서 논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병조·형조의 양태(兩台)란 곧 이광좌(李光佐)와 신(臣)이 바로 병조·형조에 있었던 까닭에 지목하였던 것입니다. 그때에 김일경은 문형(文衡)에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고, 이광좌와 신 또한 천망(薦望) 가운데 들었었는데, 김일경의 서의(書意)는 신 등을 강현(姜鋧)이 저를 먼저 하고 자기를 뒤로 한 데에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음이 있습니다. 정수기(鄭壽期)를 사주(使嗾)하여 강현(姜鋧)을 탄핵(彈劾)하기에 이르렀다는 데 이르러서는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할망정 조정에서 인군을 섬긴 지 20년이 되어 본말(本末)을 볼 수 있으니, 더럽게 이런 일을 만드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천일(天日)께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하물며 이광좌(李光佐)와 같이 어진이가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정수기(鄭壽期)는 평생 동안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지주(指嗾)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온 조정에서 아는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 이 말을 듣고는 요사이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거짓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또 김일경은 이미 지위(地位)가 재상의 반열에 올라서 반드시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것은 전하는 자의 잘못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찍이 한 마디 변리(卞理)하지 않았습니다.
이광좌(李光佐)가 문형(文衡)에서 체차(遞差)되어 신이 대신하게 되자, 이 서찰(書札)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과연 전일(前日)에 들은 것과 같았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경해(驚駭)하고 불안(不安)하여 사실에 의거하여 진장(陳章)하려고 하였더니, 한두 친우(親友)가 그 일은 변정(卞正)할 것이 못되고 사서(私書)를 보내는 것도 마땅하지 못하다고 힘써 말하였습니다마는, 다만 이 서찰(書札)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김일경(金一鏡)에게 물었더니, 김일경이 이러한 일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였으며, 정수기(鄭壽期)가 이사상(李師尙)에게 물었더니, 이사상이 이르기를, ‘과연 이 서찰(書札)이 있었는데, 병조·형조 두 판서의 말은 곧 강자정(姜子精)이 연출(演出)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강자정은 곧 강현(姜鋧)의 아들입니다. 경재(卿宰)와 명관(名官)이 금중(禁中)에서 수작(酬酢)한 바가 이와 같이 낭자(狼藉)하였으니, 사서(私書)라고 이를 수 있는데, 듣고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하여 끝내 자처(自處)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신 등으로 하여금 과연 계획적으로 간사한 꾀를 부림이 서찰 가운데에 이른 것과 같음이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간사하고 음흉하고도 사특함이 장차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지 않은데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터무니 없이 거짓을 더하면, 그 뜻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신은 이 직임이 전혀 맞지 않는데다 사람의 말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대로 무릅쓰고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삼관(三館)의 직임을 삭탈(削奪)하소서."
하였다.

 

11월 23일 갑진

양사(兩司) 【대사헌(大司憲) 이세최(李世最)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정언(正言) 유수(柳綏)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 고(故) 수찬(修撰) 홍만우(洪萬遇)의 상소 가운데 독대(獨對)한 뒤에 외방에 있는 대신(大臣)의 진계(陳戒)하지 않는 것과 청정(聽政)할 때에 국병(國柄)을 담당한 정승이 힘껏 고묘(告廟)하는 일을 저지한 두 가지 일을 대략 논하였으니, 의리가 교연(較然)하여 달리 털끝만큼도 지척(指斥)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정언(正言) 김여(金礪)는 바로 감히 흉론(凶論)을 도와서 유신(儒臣)을 구죄(構罪)해서 끝내 찬축(竄逐)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진실로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아! 세상을 버리고 산에 은거한 사람을 조호(調護)하지 아니하여 나라를 저버린 죄(罪)를 면하기 어렵게 하였고, 권흉(權凶)이 국본(國本)을 요동하여 끝내 불궤(不軌)를 도모하게 하였으니, 김여(金礪)가 충언(忠言)을 배격하고 스스로 권흉(權凶)에게 아첨한 죄(罪)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소서.
홍춘희(洪春熙)는 곧 병자년(丙子年)603)  의 국옥(鞫獄)에 장폐(杖斃)된 사람인 홍기주(洪箕疇)의 아들이고, 이번 국옥에서 감사(減死)한 사람인 홍성주(洪聖疇)의 조카이니, 일종의 흉역(凶逆)을 스스로 전래(傳來)함이 있습니다. 또 이희지(李喜之)·심상길(沈尙吉)·전인좌(錢仁佐)·김창도(金昌道)의 무리와 결탁하여 혈당(血黨)이 되었으니, 음모와 흉계를 참여하여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대저 제적(諸賊)이 복법(伏法)된 뒤에는 몰래 의관(衣棺)을 주고 수렴(收歛)하도록 하여 정적(情跡)이 음비(陰祕)하다는 전설(傳說)이 낭자(狼藉)합니다. 이와 같은 당역(黨逆)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결코 연곡(輦轂)의 아래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없으니, 청컨대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소서.
전(前) 좌랑(佐即) 윤순(尹淳)은 타고난 성품이 간사하고 마음가짐이 몹시 험악하여 조그마한 지혜와 조그마한 변론으로 교활하게 온갖 형상을 다하였습니다. 별안간 숨었다 별안간 나타나 만단(萬端)으로 현혹(眩惑)시키고, 음양(陰陽)의 색태(色態)를 잘하여 시세(時勢)에 따르기만을 오로지 일삼으니, 말을 듣고 눈동자를 보면 끝내 길사(吉士)가 못되며, 아첨하여 술수를 부리므로 세상에서 요인(妖人)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경상(卿相)의 집에 붙어서 등창을 빨고 치질을 핥듯이 몹시 아첨하고, 부박(浮薄)한 무리와 체결하여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가 시속에 아첨하며 뒤돌아보고, 경영(經營)하여 억측하는 것은 사류(士類)를 헐뜯어 이간하고 왕실(王室)에 해를 끼치는 계책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난 겨울에 7신(七臣)이 항소(抗疏)하였을 적에 겉으로는 청류(淸流)를 핑계하여 억지로 강개(慷慨)한 체하면서 큰 소리를 쳤으나, 속으로는 의심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는 실제로 양다리를 걸친 채 암암리에 서찰(書札)을 보내어 누설(漏泄)시켜 그 상소(上疏)를 저패(沮敗)하려고 꾀하였으니, 일이 거의 국가(國家)가 모두 멸망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을 피해 도망하기를 반복(反覆)하는 정태(淸態)는 진실로 차마 바라 볼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개기(改紀)한 뒤에 이르러서는 요로(要路)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더욱 방자하고 악독하게 중상(中傷)하려는 생각을 오히려 그칠 줄을 몰랐으며, 화(禍)를 사류(士類)에게 전가시키려는 것이 아침 저녁이 아니었으니, 예전에 이른바, ‘많은 군자(君子)가 이루기에는 부족하여도 한 소인(小人)이 패망시키기에는 남음이 있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아주 가깝습니다.
이만성(李晩成)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빙자(憑藉)한 말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홍치중(洪致中)이 흉론(凶論)을 다르게 한 자취를 증명하고자 처음에 삼사(三司)가 조좌(稠坐)한 가운데에서 창언(唱言)하였는데, 대계(臺啓)가 일어나게 되자, 분주(奔走)하게 애걸(哀乞)하고 구차(苟且)하게 미봉(彌縫)하고는 관음 보살(顴音菩薩)을 구송(口誦)하였다는 말이 온 세상에 전파(傳播)되어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분개해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요사(妖邪)하고 회호(回互)한 사람을 결코 하루라도 청조(淸朝)의 법종(法從)하는 반열에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削除)하소서."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말단(末端)의 두 건(件)의 일만을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한 계사(啓辭)는 전연 윤순(尹淳)에게 방불(彷彿)하지 않고 도무지 별반인(別般人)의 모양이니, 볼수록 사람으로 하여금 웃게 한다. 대개 신축년604)  에 진신(縉紳)이 항소(抗疏)한 날 윤순(尹淳)은 김일경(金一鏡)과 같이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시골에 있으면서 즐겨 나가지 않았다. 김일경이 제일 먼저 뜻을 이룰 적에 기사년605)  의 당인(黨人)과 섞여서 구별이 없었는데, 윤순이 예전 것을 막고 새로운 것을 토죄하자는 논의를 창도(唱導)하였으니, 마침내 김일경(金一鏡)과 판연(判然)히 달랐다. 사람이 모두 ‘이 계청(啓請)은 김일경의 손에서 나왔으며, 발계(發啓)한 자는 특히 그가 구사(驅使)하였다.’고 말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유수(柳綏)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장흥 부사(長興府使) 유준(柳濬)은 지난번 기읍(圻邑)을 제수하였을 적에 대신(臺臣)이, ‘일찍이 김해부(金海府)에 부임하였을 때 재결(災結) 8백 결(結)을 사용(私用)하였다.’ 하며 탐장(貪贓)하고 불법한 정상을 논핵(論劾)하였습니다. 탄핵한 먹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곧 호남(湖南)의 웅읍(雄邑)을 주어 제목(除目)606)  을 내리시니,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철원 부사(鐵原府使) 최도장(崔道章)·인동 부사(仁同府使) 이징서(李徵瑞)는 모두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의 수령(守令)으로서, 혹은 도임(到任)한 지 오래지 않아서 원읍(遠邑)에 이배(移拜)되거나 혹은 과기(瓜期)607)  가 아직도 멀었는데 다시 구천(舊踐)을 제수하였습니다. 이는 한갓 영송(迎送)하는 데 번거롭기만 하고, 주진(賙賑)하는 데에 해로움이 있으니, 청컨대 모두 잉임(仍任)하게 하소서."
하니, 전계(前啓)한 가운데에서 조이중(趙爾重)·안귀서(安龜瑞)의 일과 새로 아뢴 두 건(件)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11월 24일 을사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前) 전적(典籍) 이성채(李星彩)와 그의 아들 이유춘(李囿春)이 3백 전(錢)으로 최복인(縗服人) 윤시택(尹時澤)을 사서 과장(科場)에 들어가 온과(溫科)에 대신 찬술하게 하였다는 말이 이미 삼도(三道)의 통문(通文)에 나와 있으므로, 대간(臺諫)이 조사하여 처리하기를 청하고 윤허를 받았는데, 이것은 단지 이성채(李星彩)의 박과(薄過)608)  일 따름입니다. 이성채는 자신이 역적 이천기(李天紀)의 비부(婢夫)가 되고, 또 그 아들을 적인(賊人) 이희지(李喜之)에게 부탁하여 수학(受學)하였다고 칭탁하여 부지런히 왕래하며 체결하여 심복이 되고, 흉도(凶圖)와 음계(陰計)를 협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희지(李喜之)·이천기 (李天紀) 두 역적을 나국(拿鞫)하였을 적에는 스스로 의구심(疑懼心)이 생겨 관직을 버리고 하향(下鄕)하였으며, 또 이희지의 시신(屍身)을 매장(埋葬)할 적에는 몸소 스스로 가서 호상(護喪)하기를 친척과 다름이 없이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당역(黨逆)으로서 멸법(蔑法)한 사람을 하루라도 연곡(輦轂)의 아래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이성채 부자(父子)를 모두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소서. 주서(注書) 김상석(金相奭)은 본디 명칭(名稱)이 없는데다가 또 문한(文翰)이 모자란데, 요행히 흉당(凶黨)의 천섬(薦剡)을 받아 오래도록 물정(物情)의 해소(駭笑)를 초래(招來)하였으니, 청컨대 삭천(削薦)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나주 토포사(羅州討捕使) 한범석(韓範錫)을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이배(移拜)하였는데, 영흥(永興)은 나주(羅州)와 상거(相距)가 도리(道理)로 거의 수천 리에 가깝습니다. 재해를 입은 고을의 부마(夫馬)가 원지(遠地)에서 유체(留滯)하는 것이 진실로 매우 염려스러우니, 청컨대 체차(遞差)하고, 그 대신 서울에 있는 무고(無故)한 사람을 각별히 가려서 뽑아 보내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실록 도청(實錄都廳)과 각방(各房)의 당상(堂上)이 한갓 천취(遷就)하기만 일삼아 부좌(赴坐)하는 것이 아주 드물며, 간혹 부좌하더라도 잠시 갔다가 금세 파하므로 일의 미안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음을 논술(論述)하고,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황해도(黃海道)의 두전(豆田)에 급재(給災)하였으니, 감사(監司) 이진망(李眞望)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그 장청에 이르기를,
"황해도가 비록 흉년이 들었다고 하나 지나치게 전재(田災)를 주면, 조세(租稅)가 크게 줄어들어 상정(詳定)이 더욱 다하여 온 도(道)가 바닥이 나도록 저축(儲蓄)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덕준(李德峻)이 물고(物故)되었다. 이덕준은 이입신(李立身)의 손자다. 처음에 김성절(金盛節)이 결안(結案)한 초사(推辭)에 이르기를,
"회금(灰金)이 독약을 쓴 것과 한 일은 이덕준을 붙잡아 추문(推問)하면 일일이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고, 여러번 불러서 추문하였으나 굳게 은휘하였다. 뒤에 또 대계(臺啓)로 인하여 양익표(梁益標)의 공사(供辭) 가운데에, ‘이숭조(李崇祚)가 이덕준(李德峻)을 시켜 저에게 공갈(恐喝)하였기 때문에 이로부터 김가(金家)를 왕래하였으며, 이숭조·이덕준은 이따금 은화(銀貨)를 모아서 장세상(張世相)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과 이덕준이 매양 말하기를, ‘국가의 병환(病患)이 예사롭지 않아도 노론(老論)은 반드시 염려할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을 문목(問目)에 첨입(添入)하고, 형문을 다섯 차례 시행한 뒤에 대신(大臣)이 참작해서 처리하기를 진달하니,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였었다. 그러나 대계(臺啓)는 엄중히 가두어 놓고 다시 신문(訊問)하되, 김운택(金雲澤)이 승관(承欵)하기를 기다리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대계(臺啓) 가운데에, ‘다시 신문하라[更訊]’는 두 자가 있는 것은 마땅히 형문을 더하자는 것이지만, 당초에 형신을 베푼 것은 김운택의 음사(陰事)를 알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김운택을 이미 엄중히 형신(刑訊)하였으니, 이덕준에게 가형(加刑)하는 것은 옥체(獄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김운택(金雲澤)이 실정을 다 말하는 동안 우선 형신을 정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경폐(徑斃)하였다.

 

11월 25일 병오

부교리(副校理) 정수기(鄭壽期)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태억(趙泰億)이 문형(文衡)을 사임하는 상소(上疏)에 이르기를, ‘김일경(金一鏡)이 이사상(李師尙)에게 서찰(書札)을 보내어, ‘강태(姜台)의 일은 병조·형조의 두 판서(判書)가 정(鄭)을 사주(使嗾)하여 노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이른바 정(鄭)은 곧 신을 지목한 것이니, 진달하기를 청합니다. 신이 지난해에 자세히 강현(姜鋧)의 평생의 행사(行事)를 알고서는 마음에 항상 옳지 않게 여겼습니다. 신(臣)이 소명(召命)을 받고 입경(入京)한 뒤에 그가 도청 당상(都廳堂上)이 되어 실록(實錄)을 편찬하는 중임을 맡았다는 것을 듣고, 신이 곧 개연(慨然)하여 이 어찌 마땅한 사람인가?’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는 정신이 혼미하고 착란하여 편집하고 연찬하는 데 적의함을 잃었으므로, 신은 곧 말하기를, ‘이를 감당하는 자는 진실로 감한(憾恨)함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계되지 않는 재신(宰臣)이 문형(文衡)의 기괄(機栝)609)  을 만들고는 몰래 스스로 틈을 엿보아 농간을 부리며 공공연히 제멋대로 추욕(醜辱)하는 바가 이에 이를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뒤에 두었음을 한스럽게 여겨 사주해서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간특(奸慝)한 일이며, 남의 지시를 받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탄핵하여 공격하는 것이 또 얼마나 추악하고도 더러운 행실인데, 분개한 나머지 말을 꾸며내어 방자한 마음으로 사람을 무함하였으니, 이 어찌 천만 뜻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비록 백수(白首)의 쇠약해진 나이에 새로 귀하게 된 이의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배회할망정 다른 사람을 이와 같이 비천하게 보는 자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데, 하물며 어찌 자신이 이러한 태도(態度)를 하였겠습니까? 저 두 신하가 조정에서 벼슬하며 임금을 섬긴 데는 모두 본말(本末)이 있습니다. 영진(榮進)하는 것은 본래 정하여져서 평탄한 길의 앞에 거칠 것이 없었는데, 한 번의 천망(薦望)에 조금 뒤처진 데에 원한을 품고, 몰래 서로 부추켜서 남의 손을 빌어 탄론(彈論)하였으니, 사리(事理)를 헤아리건대 과연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대저 경재(卿宰)로서 다른 사람을 사주하고, 대각(臺閣)으로서 남의 사주를 받은 것이 과연 그 말과 같다면, 조체(朝體)를 손상시켜서 욕되게 하고 진신(縉紳)을 오멸(汚衊)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재신(宰臣)은 누가 전한 것을 들었으며, 어디에서 얻었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말한 자는 비록 시원하더라도 받은 자는 홀로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문형(文衡)은 저절로 좋은 관작(官爵)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다투는 마음을 사람마다 모두 자기와 같다고 여기는 자는 앞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며 위협하면서도 오히려 또 부족하게 여겨서 입에 더럽게 피를 뿜는 바가 국외(局外)의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또한 매우 가소롭지 않겠습니까?
아! 만일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총영을 받아도 경계하는 것과 같이 하고, 머뭇거리며 물러나 남에게 양보하기를 옛사람이 왕준(王濬)610)  을 경계한 도리로써 자처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명신(名臣)의 자(字)를 잡는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도리어 탐천(貪天)하는 공(功)으로 삼아 큰 훈로(勳勞)를 담당하고, 조금이라도 그 마음에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포효(咆哮)하고 규갈(叫喝)하여 좌충우돌하며 기세가 당당해서 감히 누구도 어찌하지 못한다고 여기니, 식견(識見)이 있는 명류(名流)가 간혹 이를 많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장(助長)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아마도 재신(宰臣)의 훌륭한 계책을 얻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문함(文銜)과 무부(武符)를 일시에 겸관(兼綰)하여 관직 또한 영화스러우니, 분수가 이미 찬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족함을 알지 못하고 점차 상층(上層)을 바라며 헛된 말을 만들어 반드시 사람을 곤혹하게 하여서 그 지위를 탈취하려고 하니, 어찌 그 뜻이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1월 26일 정미

이조 참의(吏曹參議)의 전망 단자(前望單子)를 들으니, 이명언(李明彦)에 낙점(落點)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를 차출(差出)하는 일로써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조(吏曹)의 당상(堂上)이 없었으므로 이와 같이 변통(變通)한 것이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오늘날의 국사(國事)는 매우 위태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적(諸賊)이 복법(伏法)되었으나, 여당(餘黨)은 오히려 구치(究治)하지 않았고, 팔로(八路)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온통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서무(庶務)의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것과 조정(朝廷)이 분리된 것 등 한두 가지로 셀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칙려(勅勵)하며 서로 면려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를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현재 수상(首相)은 묵은 병(病)으로 오래도록 정사를 보지 못하고 있고, 좌상(左相)은 황야(荒野)로 물러가서 조정에 나올 기약이 없으며, 홀로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만이 왕사(王事)에 현로(賢勞)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힘쓰고 있습니다. 열 달이나 안국(按鞫)하여 거의 다 수쇄(收殺)하고 일심(一心)으로 봉공(奉公)하여 바야흐로 규획(規畫)하기를 도모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대장(臺章)이 갑자기 이 즈음에 일어나니,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引嫌)하고 창황(蒼黃)히 도성을 떠났습니다. 삼공의 자리는 하나만 비어도 국세(國勢)가 위태해서 만곡(萬斛)의 많은 수량을 실은 용양(龍驤)이 중류(中流)에서 풍랑을 만나 바와 돛대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찌 한심(寒心)하지 않겠습니까?
아!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것은 곧 《중용(中庸)》 구경(九經)의 뜻인데, 우리 조정의 열성(列聖)께서 원로(元老)를 대우하였던 바가 더욱 우이(優異)하였으니, 설혹 진실로 그 지위에 불안(不安)한 정세가 있을 경우 반드시 성례(誠禮)를 돈독히 하여 소환(召還)하는 데에 기필하였습니다. 하물며 이 대신(大臣)은 사직(社稷)을 보존시킨 공이 있고, 몸에는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데, 조정을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났으나, 이제까지 위자(慰藉)하고 돈면(敦勉)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감히 정섭(靜攝)하는 가운데에 겨를하여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엎드려 원하건대 급히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즉시 소환하도록 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우상(右相)을 돈소(敦召)하였으나, 아직도 조정에 나오지 않으니, 마음이 매우 결연(缺然)하다. 너희들이 계청(啓請)한 말은 간략하되 뜻을 다하였으니, 다시 돈면을 더하여 지극한 소망(所望)에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개기(改紀)한 뒤로 조정이 숙청(肅淸)되어 선류(善類)가 떼를 지어 나왔으니, 이것이 바로 혼란에 빠진 세상을 다스려서 위태로운 나라를 편안히 할 기회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정백(精白)하여 서로 수양하고 면려하여 흉역(兇逆)을 토주(討誅)함으로써 목욕의 의리611)  를 엄중하게 하고, 사류(士類)를 수합(收合)함으로써 인협(寅協)하는 아름다움에 이르게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요즈음의 일을 살펴보건대, 조정(朝廷)의 위에는 두서(頭緖)가 정해져 있지 않고, 진신(縉紳)의 사이도 박격(搏擊)이 선행(先行)되고 있습니다. 국사(國事)를 서로 잊어버린 지경에 버려 두고, 과극(戈戟)을 동실(同室) 안에서 찾아 오늘 한 사람을 배척해 물리치고 내일 한 사람을 탄핵하니, 위저(位著)가 거의 비고 서사(庶事)가 와해(瓦解)되었는데, 그 형세는 반드시 장차 다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 국가(國家)에서 천직(天職)을 함께 하며 국사(國事)를 경영하는 경우 오로지 어떠한 사류(士類) 가운데의 사람에게 의뢰하는 바가 있으면, 자질구레한 일과 작은 과실(過失)로 인하여 공격하여 버릴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는 선조(先朝) 때부터 일찍이 중망(重望)을 받았는데, 진퇴할 때에는 시기의 오륭(汚隆)을 점쳤습니다. 하물며 그가 적심(赤心)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지키며 봉공하였음은 나라 사람이 같이 아는 것입니다. 국가의 간우함이 눈앞에 가득한 때를 당하여 국가 기무(機務)의 중임을 받았으니, 설사 시행하고 조치하는 사이에 작은 과실이 있을망정 어찌 갑자기 배척해 물리치고야 말겠습니까? 일필(一筆)로 구단(句斷)하되, 심지어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나와서 토적(討賊)하기를 중신(重臣)에게 바라지는 않았다.’는 데 이르러서는 이미 평온한 마음으로 일을 논하는 체모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가 허사(虛祠)에 제사지낸다는 등의 말을 또다시 추후로 제기하여 채용되지 못한 공언(空言)을 가지고 공공연히 방자하게 일이 지난 뒤에 고알(告訐)하였다면, 이것이 어찌 대각의 직(職)에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 국가(國家)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각각 소견(所見)을 진달하는 것은 진실로 가부(可否)를 서로 구제하는 데에 해롭지 않으니, 어찌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부족(不足)함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대신(臺臣)의 말과 같다면, 무릇 임금이 사친(私親)을 사보(思報)하는 데 관계되는 절의는 그 일의 득실을 논하지 말고 오직 봉영(逢迎)하고 승순(承順)하기에 힘쓴 뒤에야 바야흐로 임금을 사랑한다 할 수 있을 것이나, 이것은 곧 부인(婦人)과 환시(宦寺)의 충성이지 군자(君子)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아닌 것입니다. 조태억(趙泰億)은 김일경(金一鏡)이 서찰(書札)을 보내어 무함(誣陷)을 더한 일을 끌어대어 문형(文衡)을 자처(自處)하는 단서로 삼았으니, 진실로 재집(宰執)의 반열에 이처럼 사람을 크게 부끄럽게 하는 일이 있을 줄은 뜻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문형(文衡)의 직(職)은 진실로 문장(文章)과 재덕(才德)을 처음부터 갖춘 명망 있는 자가 아니면 이 선발에 참여하지 못하는데, 김일경은 갑자기 인망(人望)의 밖에서 가장 먼저 천거되었습니다. 그가 비록 글을 잘한다고 자부하며 사원(詞垣)을 거만하게 업신여겼으나, 무릇 저술(著述)에 관계된 것에서 온갖 허물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이제까지 왕언(王言)을 대신 찬술한 글로써 보건대 흉역(凶逆)한 무리의 궁박하고도 흉악한 정절(情節)을 애초에 뜻을 다하여 베껴내지 못하고 황잡(荒雜)하게 잘못 그르쳐서 사리(詞理)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또 쓸데없는 말을 삽입(揷入)하고, 사리에 어긋난 것을 인용하여 뭇사람의 평판이 떠들석하게 괴이하다고 지목하였으나 전혀 알지 못하였으니, 사령(辭令)에 익숙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국조(國朝) 3백 년 이래 어찌 이와 같은 문형(文衡)의 천거가 있었겠습니까? 스스로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자기보다 앞선 사람을 배척하여 무함하여 반드시 전후(前後)의 문형(文衡)으로 하여금 모두 불안(不安)한 마음을 품도록 하였으니, 비록 인간(人間)의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아! 김일경(金一鏡)의 한 상소(上疏)가 실로 종사(宗社)를 재전(再奠)한 공(功)이 있다 하여 성상께서 드문 은위(恩位)로 대우하시더라도 전일(前日)의 김일경으로 회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김일경으로 하여금 휴척(休戚)의 의리에 힘쓰고, 더욱 근칙(謹飭)하는 뜻을 면려하여 사류(士流)와 협동(協同)하여 바로 마음속으로 왕실(王室)을 생각하게 한다면, 조정에는 화태(和泰)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고, 그는 영예(令譽)와 충용(忠庸)이 간책(簡策)에 전해지는 광영이 있을 것이니, 누가 감히 그릇된 의논을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칠고 도리에 어긋나는 품성을 이루어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쓰고, 공로를 끼고 자만(自慢)하며 기쁜 일만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논의(論議)를 주장하여 사류(士流)를 배척하고, 조금이라도 그 뜻에 거슬리면 갑자기 제멋대로 분박(噴薄)하여 복례(僕隷)에게 하듯이 조신(朝紳)을 꾸짖는데, 다른 사람이 혹 자기를 의논하면 은어(隱語)로 꾸짖어 무함하고, 겸제(箝制)612)  하는 계책을 베푸니, 몰아대는 기염(氣焰)을 사람들이 감히 어찌하지 못합니다. 진실로 그 의욕이 이르는 곳마다 충족시키려면, 비록 문맹(文盟)을 주관하고 훈적(勳籍)에 참여하더라도 또한 만족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수어(守禦)하는 임무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중기(重寄)613)  인데, 마음을 깨끗이 씻어 삼갈 것은 생각지 않고, 더욱 방자하게 탐독(貪黷)하여 많은 단서를 일으키고는 돈을 물 쓰듯이 하여 막중한 군수(軍需)를 온통 전부 비게 하였으니, 방자하여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음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헤아려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좌충 우돌하여 조정(朝廷)을 괴란(乖亂)시키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그를 종시(終始) 보전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견파(譴罷)하여 규경(規警)614)  을 보임으로써 생각을 바꾸어 새로워지기를 꾀하는 길을 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박징빈(朴徵賓)은 어리석고 경박하여 하나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 대헌(臺憲)의 의망(擬望)은 실로 외잡(猥雜)한 데에 관계되므로, 윤순(尹淳)이 공공연히 말하여 지색(枳塞)하였으니, 이것은 온 세상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각(臺閣)에 들어간 처음에 그 옛날의 원한을 품고 손수 저격(狙擊)하여 천고(千古)의 자질구레한 지목을 모아서 죄안(罪案)을 구성하였으니, 그의 청언(聽言)·관모(觀眸)·길사(吉士)·요인(妖人) 등과 같은 말은 곧 윤순(尹淳)의 아비 윤세희(尹世喜)가 이사명(李帥命)을 논핵(論劾)한 계어(啓語)인데, 이제 갑자기 다른 글로 옮겨 베껴서 윤순을 추욕(醜辱)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대저 윤순의 재학(才學)과 아망(雅望)은 진실로 젊은 무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지만, 오직 그가 고립되어 친구가 없는 것은 추부(趨附)하는 짓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박징빈의 무리와 같이 부끄럼없이 이익만 탐하는 자가 풍지(風旨)만을 승망(承望)하여 으르렁거리며 이와 같이 헐뜯어 그치지 않으니, 조정에 있는 얼마되지 않는 명류(名流)가 마침내 비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신은 급히 박징빈(朴徵賓)을 파출하여 그가 흔단을 일으키고 사람을 무함(誣陷)하는 죄(罪)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아! 지난 겨울의 일을 아직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의 존망(存亡)이 순간에 달려 있으므로, 중외(中外)의 인정(人情)은 물이 끓고 불이 타는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십행(十行)의 교서를 외방에 있는 대신(大臣)에게 내려 도움을 구하여, ‘경(卿)에게 간절히 바라노니, 전의 일을 버리고 시원하게 시태(時態)를 씻어버리며 마음을 돌려서 입성(入城)하여 장차 망하려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라.’고 하교하여 측달(惻怛)한 그 뜻을 애연(藹然)히 말씀에 나타내셨는데, 이때에 승지(承旨) 한중희(韓重熙)는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나왔다고 핑계대어 감히 작환(繳還)하는 계사(啓辭)를 진달하고는 힘써 저지하며 일찍이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튿날 비망기(備忘記)를 잇따라 내렸으나, 한번 아뢰고는 재차 아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지시켜 우리 임금의 애통(哀痛)해 하시는 교지(敎旨)를 막고서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대신(大臣)이 왕명을 받고 입대(人對)하여 정성을 다해 천의(天意)를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종사(宗社)를 보전하여 오늘이 있었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흉역(凶逆)의 지시를 받고 위급한 날에 군명(君命)을 저지하여 막은 정상(淸狀)이 통완(痛惋)한데, 홍계적(洪啓迪)이 형문에 임한 초사(招辭)에 또다시 죄(罪)를 해방(該房)에 핑계대었습니다. 한중희(韓重熙)의 부범(負犯)은 즉시 감죄(勘罪)하여 처치함이 마땅한데, 대각(臺閣)의 위에서는 아직도 조용히 유숭(兪崇)의 전례를 따라 비망기(備忘記)를 환수한 뒤에 품계(稟啓)한 것처럼 하고, 이 일의 경중(輕重)이 어떠한가를 보고서도 도리어 극변(極邊)의 율(律)로 감죄(勘罪)하였으니, 신은 작은 것은 살피고 큰 것은 잃는 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수어사(守禦使) 김일경(金一鏡)이 김동필(金東弼)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부(符)615)  를 바치고 교외(郊外)로 나갔다. 정원(政院)에서 품계하니, 명하여 전수(傳授)하게 하였다.

 

11월 27일 무신

김일경(金一鏡)이 또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고, 그 부(符)를 도로 바치니, 또 명하여 전수(傳授)하게 하고, 대명(待命)하지 말도록 하였다.

 

지평(持平) 구명규(具命奎)의 소비(疏批)를 비로소 내렸다. 그 비답에 이르기를,
"대신(大臣)을 침척(侵斥)하고 조금도 고기(顧忌)함이 없으니,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8일 기유

김동필(金東弼)을 승지(承旨)로, 권익관(權益寬)을 헌납(獻納)으로, 심단(沈檀)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유필원(柳弼垣)을 수찬(修撰)으로, 남취명(南就明)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유수(柳綏)·사간(司諫) 김시혁(金始㷜)·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가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의 상소 가운데, ‘작은 것은 살피고 큰 것은 잃게 하였다.’는 공척으로 인하여 서로 잇따라 인피(引避)하고 퇴대(退待)하였다.

 

지평(持平) 구명규(具命奎)가 인피(引避)하기를,
"신은 본시 나약한데다 성품마저도 박속(樸遬)하여 구차하게 아첨하는 태도는 알지 못하고, 한갓 숨김없는 의리만 알고 있습니다. 망령되게 한 소(疏)를 올렸는데, 과연 사람들의 노여움을 촉발하여 가까운 장래에 전패(顚沛)616)  될 줄 이미 스스로 헤아렸습니다. 곧 엎드려 성비(聖批)를 받았는데 대신(大臣)을 침척(侵斥)하고도 조금도 고기(顧忌)함이 없으므로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고 하교하셨으니, 신은 지극히 황송(惶悚)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신(大臣)이 평일(平日)에 성심껏 나라를 다스린 것을 사람들이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대저 안국(按鞫)하는 처음에는 충성을 다하여 원성을 견디어 내더니, 옥사(獄事)의 실마리를 연 것이 누구이 힘이기에 어찌하여 근일(近日) 이래로 전후(前後)의 여러 차자(箚子)와 모든 죄수(罪囚)의 의언(議讞)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서 뭇사람의 뜻을 많이 어기는 것입니까? 이것이 신이 상소(上疏)를 내게 된 까닭입니다. 대신(大臣)은 착한 것을 취하는 도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모아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인데, 범론(汎論)의 두사(頭辭)는 억지로 허물을 삼고 중신(重臣)의 과실(過失)은 반드시 대신 담당하려고 하니, 신은 그윽이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간장(諫長)의 소(疏)에는 더욱 개석(嘅惜)한 것이 있습니다. 중신(重臣)의 전일(前日)의 거조(擧措)는 분완(憤惋)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일세(一世)에서 추풍(趨風)617)  하며 기억하는 바가 없었고, 사실(私室) 안에서 몰래 서로 비난하여도 조정(朝廷)의 위에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만약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그윽이 아첨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당언(讜言)618)  을 듣지 못하게 되고, 방자(放恣)하여 거리낌이 없어도 이를 금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신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과연 신의 소(疏)가 공의(公議)에 맞지 않으면, 마땅히 조목(條目)에 따라 상세하게 변명(卞明)하여 시비(是非)를 명확히 핵실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간신(諫臣)은 이렇게 하지 않고, 대충 구단(句斷)하여 억제한다는 등의 말로써, 죄(罪)를 시비(是非)의 밖에서 구하니, 그것이 과연 인심을 복종시키고 사람의 입을 막는 것이겠습니까? 아! 안옥(按獄)하는 것을 규피(規避)하려고 일부러 토복(討復)을 늦춘 것이 어떠한 죄과(罪過)인데, 간신(諫臣)들은 도리어 한때의 차실(差失)에 돌려서 하나의 자질구레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인심의 함닉(陷溺)619)  됨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습니까? 간신(諫臣)이 중신(重臣)을 곡진히 비호하는 데는 그 지극함을 쓰지 아니함이 없어야 마땅하나, 오히려 감히 전연 엄폐하지 못하는 이와 같은 것에서 또한 일단(一端)의 공심(公心)이 민멸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 만일 중신으로 하여금 공의(公議)의 두려움을 알게 하여 개도(改圖)하고, 본보기를 바로잡고, 지나간 일을 회개하고, 오는 일을 경계하게 하려면, 신의 상소(上疏)에 논한 것이 반드시 정문(頂門) 위의 일침(一針)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간신(諫臣)은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극력 영구(營救)하며 대각(臺閣)의 공의를 저지하고, 일세를 아첨하는 풍습에 인도하여 감히 누가 중신(重臣)에게 어찌하지 못하도록 함은 또한 무슨 마음입니까? 중신이 논하였던 추보(追報)의 한 조목과 같은 것은 더욱 통해(痛駭)한 바가 있습니다.
대저 사친(私親)을 추보하는 일은 진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당초에 성상(聖上)께서는 한결같이 공의를 따르시고 정례(情禮)를 참작(參酌)하여 어렵게 여겨 신중하게 하는 뜻을 가지시고 분한(分限)을 넘지 않으시니, 조정에 있는 신하가 다시는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신(重臣)이 별안간 새로운 의견을 창출하여 억지로 도리에 어긋난 의논을 낸 것은 또한 무슨 뜻이겠습니까? 옛적에 선조(先朝)에서는 장사(葬事)에 빈례(嬪禮)를 쓰고 보첩(譜牒)을 간행(刊行)하였는데, 중신(重臣)은 일찍이 이때에 한 마디의 말이나 반 마디의 말도 없이 간략하게 당부(當否)만을 진달하였습니다. 또 이 추보(追報)하는 일이 과연 사사롭게 후(厚)하게 하는 혐의를 범하였다면, 당초 의정(議定)할 때에는 어찌하여 즉시 소견을 진달하지 않고,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진 뒤에야 한 소장(疏章)을 올리는 것입니까? 말이 사리에 어긋난 것이 많았으니, 그 소(疏)에 이른바, ‘그대로 두는 것이 지당(至當)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신은 그가 그대로 두려고 하였던 것이 과연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각(臺閣)은 일에 따라서 논척(論斥)하는 것이 바로 그의 직분입니다. 만약 일이 사친(私親)에게 관계되었으면, 당부(當否)를 논하지 않고 일체 염피(斂避)하고서 감히 말하지 않은 뒤에야 바야흐로 대각(臺閣)의 체통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의 소(疏) 가운데에 ‘장차 허사(虛祠)에 제사지낸다.’고 한 것이 어찌 고알(告訐)하는 데에 방불(彷彿)한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간신(諫臣)은 위협하여 장찬(粧撰)하고, 또 봉영(逢迎)하여 승순(承順)한다는 것과 부시(婦寺)·군자(君子) 등의 말을 삽입(揷入)하여 한편으로는 후욕(詬辱)하는 바탕을 삼고, 한편으로는 겸제(箝制)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어찌 사리에 어긋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부모의 보살펴 기른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이치에 어긋난 의논을 함부로 낸 뒤에야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충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군자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미루어 우리 임금이 사친(私親)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이루게 함이 도리어 부시(婦寺)에 돌아감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말이 전조(銓曹)를 담당한 중신(重臣)에게 관계되면 공의(公議)를 어기면서 이를 비호하고, 일이 군부(君父)의 사친(私親)에게 관계되면 천리(天理)를 거스르면서 배척하였으니, 의리가 회색(晦塞)됨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습니까? 이미 엄비(嚴批)를 받고서도 대신(大臣)과 간신(諫臣)의 무한한 침욕(侵辱)을 받았으니, 다시 무슨 낯으로 일각(一刻)인들 무릅쓰고 머물러 있겠습니까?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사직(辭職)하지 말라."
하였으나, 구명규(具命奎)가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11월 29일 경술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임금의 병환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듣고 궐문(闕門) 밖에서 사차(私次)로 돌아가니, 전에 함께 오라고 보내었던 승지(承旨)도 따랐갔다.

 

옥당(玉堂)에서 진차(陳箚)하여 여러 대관(臺官)을 처치(處置)하기를,
"듣는 대로 갑자기 논계하는 것은 대례(臺例)가 그러하니, 갑자기 소란을 일으킨 것이 자신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논하는 것도 또한 중(重)하니, 어찌 전후(前後)를 비교하겠습니까? 뜻이 간곡히 용서를 구하는 데 관계되니, 혐의할 것이 못됩니다. 항소(抗疏)하여 논열(論列)하고 쟁집한 바도 중하였으니, 비지(批旨)와 대언(臺言)을 어찌 반드시 혐의하겠습니까? 청컨대 정언(正言) 유수(柳綏)·김중희(金重熙), 지평(持平) 구명규(具命奎)는 출사(出仕)시키고, 이미 같이 인피(引避)하였다가 본사(本事)를 전부 폐지한 것은 대체(臺體)에 어긋남이 있어 형세가 그대로 있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사간(司諫) 김시혁(金始㷜)은 체차(遞差)시키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석성현(石城縣)에서 어보(御寶)를 위조(僞造)한 죄인(罪人) 권진성(權盡性)을 가두어 추국(推鞫)하였다. 동추(同推)620)  하여 형벌을 시행할 즈음에 고변(告變)하려 하였다고 핑계대면서 석성현(石城縣)과 감영(監營)에다 모두 소지(小紙)에 써서 바쳤으므로, 감사(監司) 이의만(李宜晩)이 치계(馳啓)하여 알리고, 장교(將校)로 하여금 권진성을 압송(押送)시키며 바쳤던 두 종이 쪽지를 아울러 봉진(封進)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뜯어보니, 그 두 종이 가운데 석성현에서 바친 것에 이르기를,
"제가 이 옥사(獄事)에 빠진 것은 실로 역모(逆謀)를 따르지 않은 소치입니다. 흉인(凶人)이 작당(作黨)하여 역모를 세울 때에 옥중(獄中)에서 고변(告變)하였다는 이름을 혐의하여, 적(賊)의 실정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으니, 화(禍)가 망극(罔極)한 데 있었습니다. 제가 불충(不忠)한 신하가 되었으나, 비밀히 묘당(廟堂)에 부쳐서 실정을 알게 하여 거사(擧事)하는 근심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감영(監營)에서 바친 것에는 이르기를,
"흉인(凶人)의 서간(書簡)이 두 장(張)이었는데, 이름을 등록(登錄)한 한 장은 회덕(懷德)의 옥에 갇혔을 때에 형방(刑房) 박필명(朴必明)과 아노(衙奴)가 빼앗아 갔으니, 분부(分付)하여 엄중하게 가두어 도피하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다시 단단하게 봉하여 들어가 아뢰어 권진성(權盡性)을 금부(禁府)에 출부(出付)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이때에 밤이 깊어 관문(關門)을 이미 잠갔으므로, 당직 도사(當直都事)를 대궐 밖에서 불러 권진성을 금부에 가두도록 분부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변(上變)한 권진성(權盡性)은 즉시 국청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전일(前日)의 국청(鞫廳)도 아직 철파(撤罷)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국청에 이송(移送)하되, 지금은 이미 밤이 깊었으니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내일 아침을 기다려 패초(牌招)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권진성은 권상하(權尙夏)·권상유(權尙游)의 종손(從孫)이다. 그의 아비 권섭(權燮)은 허망(虎妄)하고 패악(悖惡)한데다 세력을 믿고 의지하여 불의(不義)한 일을 많이 행하였다. 부자(父子)가 한 가지로 악독하여 어보(御寶)를 위조(僞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獄)에 갇혔는데, 월옥(越獄)621)  하여 망명(亡命)하고는 제멋대로 행동하였으나, 사람들이 감히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한지(韓祉)가 일찍이충청 감사가 되어 다시 가두고 엄중하게 다스려 반드시 법을 써서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가을이 되어 직(職)을 떠나가게 되었다. 흉당(凶黨)이 패몰(敗沒)하기에 이르러 감사(監司) 이의만(李宜晩)이 또 엄중하게 추신(推訊)을 더하니, 제가 스스로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바로 이 상변(上變)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가 몇달 동안 죽음을 늦추려는 계책에서 나왔음을 알았다.

 

명하여 승지(承旨) 정해(鄭楷)를 보내어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에게 돈유(敦諭)하게 하였으나, 최석항이 인죄(引罪)하고 응하지 않았다.

 

평안도(平安道) 중화(中和)·평양(平壤)·삼화(三和)·숙천(肅川)·함종(咸從)·상원(祥原) ·강서(江西)·강동(江東)·삼등(三登)·은산(殷山)·순안(順安)·증산(甑山) 등 12고을에서 같은 날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1월 30일 신해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을 돈소(敦召)하니, 권진성(權盡性)의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일 때문이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하원(李夏源)·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진검(李眞儉)이 호황(胡皇)의 붕서(崩逝)를 치계(馳啓)하였다. 비록 전하는 소문에 얻어 들었으나, 그것이 참된 것임을 아는 까닭으로 이 장문(狀聞)이 있었다. 이어서 또 부음(訃音)을 전하는 칙사의 패문(牌文)이 나왔다고 하여 치계(馳啓)하기를,
"나온 피인(彼人)에게 물었더니, 호황(胡皇)은 이달 19일에 붕서(崩逝)하였으며, 20일에 칙사(勅使)가 회동관(會同館)에서 떠났다고 합니다."
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비록 억지로 일어나 정사를 본다 하더라도 병이 위독하여 전(殿)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임금이 명하여 소환(小宦)에게 부액(扶腋)하고 오르게 하였다. 조태구가 아뢰기를,
"호황(胡皇)이 뜻밖에 상서(喪逝)하여 부칙(訃勅)이 장차 이른다고 합니다. 서로(西路)는 연달아 흉년이 들었으므로, 객사(客使)가 경내(境內)를 압제(壓制)하면 그 근심이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이전에 사명(使命)을 받고 연경(燕京)에 갔을 때 피인들이 호황(胡皇)을 조선(朝鮮)의 황제(皇帝)라고 일컫는다는 것을 들었는데, 대개 호황(胡皇)이 우리 나라를 고휼(顧恤)하는 데 별다름이 있는 까닭이었으나, 이를 계승한 자가 매양 고호(顧護)를 더하리라는 것은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또 피국(彼國)에서 미리 태자(太子)를 세우지 않았으니, 반드시 다섯 공자(公子)가 쟁립(爭立)하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저들에게 만약 일이 있으면 우리 나라에도 또한 연급(延及)622)  되는 근심을 면하기 어려우니, 어찌 깊이 근심하고 미리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 청대(請對)는 몹시 급하게 작위(作爲)하는 바가 있어서 소요(騷擾)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西路)로 하여금 항상 군무(軍務)에 뜻을 더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신 등은 물러가 함께 상확(商確)하여 품처(稟處)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조태구가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었을 때에 영애(嶺阨)를 순시(巡視)하고 군제(軍制)를 상량(詳量)하고는 조금 변통을 더하고자 장문(狀聞)한 것이 있습니다마는, 승평(昇平)한 때를 만나 시행(施行)되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漑然)하게 여겼습니다. 피국(彼國)이 만약 무사(無事)하면 서문(西門)은 진실로 근심이 없습니다마는, 이제는 피국에서 장차 일이 있을 것인데, 재화(財貨)가 이미 다하였고 군사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서북(西北)의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각각 이민(吏民)으로 대오(隊伍)를 편제(編制)하여 만들게 하고,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의주(義州)를 방비하되, 의주(義州)를 지키지 못하면 용천(龍川)을 방어하게 하고, 용천을 지키지 못하면 철산(鐵山)을 방비할 것이며, 곽산(郭山)·선천(宣川)·정주(定州)·가산(嘉山)까지 모두 그렇게 하면, 거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 내일에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번거롭게 듣지 마시고 조용히 유의하시어 서서히 구획(區劃)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이르기를,
"저들과 우리의 두 나라는 분야(分野)가 서로 같으므로, 전부터 치란(治亂)이 대부분 서로 관계되었습니다. 피국에 만약 일이 있으면 우리 또한 어찌 근심할 만한 단서가 없겠으며 경동(驚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요(騷擾)를 부른다는 말이 옳습니다. 옛날에 주(周)나라 선왕(宣王)은 밖으로 적을 쳐서 물리치고 안으로 정사(政事)를 닦아서 부흥을 이룰 수 있었으니,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모책(謨策)은 진실로 안으로 정사를 닦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덕정(德政)을 밝게 닦아서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도리를 다하면, 비록 외우(外憂)가 있더라도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는 이르기를,
"조태억(趙泰億)의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친다는 말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언(空言)만 하고 실지가 없으니, 만약 실지에 힘쓰려면 오직 전하께서 일심(一心)으로 시행하여 완료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사치를 억제하여 재화를 절약하고, 정사에 부지런하여 덕행을 닦으시고 인재(人才)를 거두어 모아서 민심(民心)을 굳게 결속시키는 것으로 자강(自强)의 길을 삼는 것이 급무(急務)가 됩니다."
하였다. 조태구가 이르기를,
"자강(自强)의 계책은 진실로 민심을 굳게 결속시키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옛적에 윤탁(尹鐸)623)  이 진양(晉陽)의 수령이 되어 그 호수(戶數)를 덜고 민심(民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지씨(智氏)의 난(亂)에 조양자(趙襄子)624)  가 진양(晉陽)에 돌아왔는데, 진양성(晉陽城)이 지백의 군사의 수공(水攻)에 침수되지 않은 것이 삼판(三版)이었으나, 백성들이 배반할 뜻이 없었으므로 그가 이와 같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달리 민심을 수습(收拾)할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 더러 대동미(大同米)를 덜어 주겠지만, 양서(兩西)625)  에도 대동미가 없으니, 세수미(稅收米)를 적당하게 헤아려 견감(蠲減)하면 거의 조금이나마 위열(慰悅)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앞으로 닥쳐올 일을 살펴보고 상확하여 처치(處置)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아! 북경(北京)에 일이 있음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민(吏民)으로써 작대(作隊)하라.’ 하고, ‘덕정(德政)을 밝게 닦으라.’ 하고,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라.’고 하니, 목이 마른 때를 당하여 우물을 파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서서히 구획(區劃)하고, 우선 앞으로 닥쳐오는 일을 살펴보라.’고 하였으니, 이날의 나랏 일을 도모함이 어찌 그다지도 급박하게 여기는 바가 없는 것인가?

 

김연(金演)을 원접사(遠接使)로, 윤성시(尹聖時)를 문례관(問禮官)으로, 이광좌(李光佐)를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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