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임자
간원(諫院) 【정언(正言) 유수(柳綏)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대각(臺閣)에서 사람을 논평할 때 중도(中道)를 얻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하니, 말이 알맞지 않으면 사람을 복종시키지 못합니다. 전(前) 좌랑(佐卽) 윤순(尹淳)은 지망(地望)과 재학(才學)으로 본래 동류들에게 추앙받았는데, 지난 겨울 종국(宗國)이 장차 위태로움을 당할 적에 비로소 두서너 명의 사우(士友)와 서로 약속하여 진소(陳疏)하고, 중간에 하향(下鄕)하여 마침내 일을 같이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혹 일을 피한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그 뒤에 언의(言議)의 출처(出處)가 비방(誹謗)을 초래하는 단서가 없지 않았으나, 이로써 참작하여 조금 규경(規警)을 더하였으니, 담당한 자는 스스로 말이 없어야 옳을 것인데,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은 그의 평생(平生)을 들어 일필(一筆)로 구단(句斷)하고, 천고(千古)에 없는 자질구레한 지목을 모아 낭자하게 늘어놓고는, ‘세상에서 요인(妖人)이라고 일컫고 왕실(王室)에 해독을 끼쳤다.’는 등의 말까지 하였으며, 죄안(罪案)을 구성(構成)하게 되어서는 아주 간악한 사람과 크게 간특한 사람을 자거(刺擧)한 것과 같음이 있었습니다. 청조(淸朝)의 대각(臺閣) 위에 이와 같은 풍습을 전적으로 맡겨서 조장(助長)할 수 없으니, 청컨대 장령(掌令) 박징빈(朴徵賓)을 체차(遞差)하소서.
사흉(四凶)을 주토(誅討)하자는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완급(緩急)이 고르지 못하여 점차 의논이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대개 흉역(凶逆)의 남은 위세는 아직도 사람을 엄습할 수 있는 연유로 해서 돌아다보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서로 의심하여 멀리하는 마음이 생겨서 크고 작은 탄론(彈論)이 혹 과격(過激)하여 중도에 맞지 않는 폐단이 있으니, 전(前)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이 대사성(大司成) 김일경(金一鏡)을 상소하여 공박한 일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대저 김일경은 이름이 문형(文衡)의 천망(薦望) 가운데에 있었으나, 혐의를 멀리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동료에게 서찰을 보내면서 말을 자못 가리지 않아 처사(處事)가 거칠고 경솔하였으니, 진실로 몹시 놀랍습니다. 따라서 이로써 규핵(糾劾)해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지난 겨울에 올린 한 소장(疏章)은 진실로 사직(社稷)을 부익하고 임금을 호위한 공로가 있었으니, 비록 그를 본시 시기하여 미워하는 자라도 한때의 과오(過誤)로써 그가 수립(樹立)한 공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황(張皇)하게 한 소(疏)를 올려 시기를 틈타 비방하였는데, 서찰(書札)의 한 조목을 빙자하여 별반(別般)의 죄과(罪過)를 연출(演出)하고는 가혹하게 취모 멱자(吹毛覓疵)626) 하여 우수한 사한(詞翰)을 훼상(毁傷)시켰고, 재물을 탐(貪)한다고 지목하여 가득찼던 군저(軍儲)를 전부 썼다고 하였습니다. 만족하게 여길 줄 모르고 거리낌이 없어서 치장(鴟張)하고 괴란(乖亂)시킨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뜻이 구무(構誣)하는 데 있으니, 말이 지극히 위태하여 두렵습니다. 아! 난역(亂逆)을 주토(誅討)하는 것이 아직도 끝장이 나지 않았는데, 가장 먼저 토역(討逆)하기를 일삼은 사람을 먼저 쳐서 제거하려고 하니, 이러한 습관이 길들여져 가는데도 조금이나마 경려(警勵)하는 바가 없다면, 흉역(凶逆)이 가만히 웃을 뿐만 아니라, 장차 조상(朝象)이 궤열(潰裂)되는 데에 이르러서 세도(世道)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전 대사간 김동필(金東弼)을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고 단지 말단(末端)의 일만 그대로 따랐다.
충청도(忠淸道) 보은현(報恩縣)에 사는 권홍(權泓)의 처(妻) 김씨(金氏)는 집에 불이 났는데, 10여 세 된 여아(女兒)가 미처 피하여 나오지 못하자, 김씨가 그 아이를 구출(救出)하기 위해 불을 무릅쓰고 다시 들어갔다. 그의 장녀(長女)는 나이 22세이고, 그의 아들 권계풍(權啓豐)은 나이 20세인데, 그 어미가 다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화염(火焰)을 무릅쓰고 뒤따라 들어가 동시에 소사(燒死)하였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휼전(恤典)을 거행하고 정포(旌褒)627) 를 더하게 하였다.
대계(臺啓)로 국청 죄인(鞫廳罪人) 조흡(趙洽)의 문목(問目)을 내어서 다시 추국하여 결안(結案)하였다. 거역(拒逆)한 곡절(曲折)을 한 차례 시형(施刑)하였으나, 복종하지 않으니, 의례(議啓)하기를,
"엄중하게 형신(刑訊)하는 아래에서 끝내 결안에 납초(納招)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다시 가형(加刑)을 청해야 마땅한데, 다만 생각하건대 당초의 고변(告變)이 전부 죽음 속에서 살기를 구하는 계책에서 나왔으니, 그 죄상(罪狀)을 논하면 비록 털끝만큼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발된 여러 사람은 모두 승관(承欵)하여 복법(伏法)되었습니다. 당초에 있었던 죽음을 용서하자는 말도 또한 이미 천청(天聽)에 상달(上達)되었으니, 지금에 와서 곧바로 결안(結案)하는 것은 끝내 실신(失信)하는 데 돌아감을 면하지 못합니다. 전에 의논한 바에 의거하여 감사(減死)하여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되, 물간 사전(勿揀赦前)628)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제조(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이르기를,
"송(宋)나라 가정(嘉定) 연간(年間)629) 에 학사(學士) 진덕수(眞德秀)가 금려(禁廬)에서 수직(守直)하다가 금인(金人)이 장차 멸망할 조짐이 있음을 듣고는 밤에 일어나 방황(彷徨)하면서 국가(國家)에 이로부터 일이 많겠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송(宋)나라는 금(金)나라에 대해 백 년 동안이나 깊은 수구(讐仇) 관계에 있었으니, 완안(完顔)630) 이 스스로 위망(危亡)에 떨어짐이 어찌 송조(宋朝)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마는, 대개 성문(城門)이 실화(失火)하면 앙화가 못 속의 물고기에 미치니, 이것을 진덕수가 깊이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한결같이 직무를 게을리했는데, 개태(開泰)631) ·경정(景定)632) 연간에 진덕수의 말이 하나도 징험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송나라는 드디어 다시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사세(事勢)가 이것과 대략 서로 비슷하니, 대저 중국에 일이 있는 날에는 곧 우리 나라에서 폐해를 받을 징조입니다. 강희(康熙)가 이미 죽은 뒤에는 십중팔구 화란(禍亂)이 일어날 것인데, 내란(人亂)이 이미 일어나면서 혹 다른 적(敵)이 다시 생기거나 혹은 진인(眞人)이 처음으로 일어난다면, 저들은 그대로 중토(中土)633) 에 웅거할 수 없어서 반드시 영고탑(寧古塔)을 소혈(巢穴)로 삼을 것입니다. 대저 산해관(山海關)의 밖은 동북으로 심양(瀋陽)을 상거(相距)하고, 심양의 서북(西北)은 모두 몽고 지방(蒙古地方)인데, 몽고가 만약 그 잔비(殘憊)634) 함을 틈타서 그 귀로(歸路)의 한 부분을 끊으면, 저들은 나아가서 영고탑(寧古塔)에 도달할 수 없고, 물러가서 다시 산해관(山海關)에 들어갈 수 없으니, 그 형세는 혹 봉황성(鳳凰城)으로 달아나거나, 혹은 남쪽으로 금복주(金復州)에 나가거나, 혹은 애양(瞹陽)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금복주는 우리의 선사포(宣沙浦)와 마주 대하였고, 애양(瞹陽)은 우리의 서쪽 변방 강변(江邊)의 7군(郡)과 대치(對峙)한 땅이므로, 만약 이로부터 길을 취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러 고을을 약탈(掠奪)하고, 곧바로 설한령(薛罕嶺)을 경유하고 함경도(咸鏡道)를 경유하여 다시 두만강(豆滿江)을 건너서 북으로 장백산(長白山)의 곁에 도달할 수 있어서 영고탑(寧古塔)의 지름길이 됩니다. 이것은 지난해에 호차(胡差) 목극등(穆克登)이 엿보았던 곳이니, 이것이 그 첫째로 근심할 만한 것입니다. 가령 피인(彼人)들이 중로(中路)에서 막아서 끊는 근심이 없어서 순조롭게 영고탑에 돌아간다면, 저들의 경계(境界)인 선춘령(先春嶺) 이남은 우리 북로(北路)와 서로 연화(煙火)를 볼 수 있고, 일대(一帶)의 두만강으로 대략 저들과 우리의 경계를 한정하였을 따름이니, 만약 무산(茂山)·갑산(甲山) 사이에 이르게 되면, 곧바로 텅비어서 거침이 없는 사람이 없는 땅입니다. 그리고 길이 남관(南關)에 접하는 가장 지름길이 되니, 만일 근심이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이를 제지하겠습니까? 이것이 그 둘째로 근심할 만한 것입니다.
이제 어찌 단지 소요(騷擾)만 염려하며 경동(警動)하여 진작(振作)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으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실덕(實德)을 닦고 혜정(惠政)을 베풂으로써 굳게 민심(民心)을 결집(結集)시키고, 부의(浮議)를 억제하고 충실(忠實)을 숭상함으로써 인재(人才)를 수습(收拾)하고, 비용을 줄이고 절검(節儉)을 숭상함으로써 완전히 민력(民力)을 기르는데 있습니다. 월인(越人)이 10년을 생취(生聚)635) 한 것과 같이 하고, 제인(齊人)이 시관(試官)을 책실(責實)한 것과 같이 하고, 위인(衞人)이 대포(大布)·대백(大帛)을 입은 것636) 과 같이 하면, 그 자강(自强)하는 도리에 혹자가 절반은 넘었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성상(聖上)께서 대지(大志)를 분발하셔서 빨리 원모(遠謀)637) 를 넓히시고, 크게 왕언(王言)을 탄발(誕發)하여 정신(廷臣)에게 두루 하문(下問)하셔서 꾀하는 것이 있으면, 오늘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단서가 또한 어찌 나라를 일으키고 계성(啓聖)하는 하나의 큰 기회가 되지 않을는지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12월 2일 계축
이진유(李眞儒)를 승지(承旨)로, 이진순(李眞淳)을 사간(司諫)으로, 김연(金演)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윤연(尹㝚)을 부응교(副應敎)로,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을 진위 겸 진향 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김시환(金始煥)을 부사(副使)로, 이승원(李承源)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헌주(尹憲柱)는 낭서(郞署)638) 로 있을 때부터 오로지 이익을 차지하는 것만 일삼았으므로, 이미 집안을 일으켰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성주(星州)의 수령이 되어서는 진곡(賑穀)을 거짓 증대하여 지나치게 승자(陞資)하는 은전을 입으니, 사람들이 침을 뱉아 꾸짖었는데,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요즈음 함경 감사가 되어서는 수단(手段)이 이미 익숙해지고 탐심(貪心)이 더욱 방자하여졌는데, 가장 드러난 것으로 말하면, 진상(進上)의 수체(首髢)639) 는 스스로 정한 수량이 있는데, 넘치게 정하였다고 빙자하여 큰 고을은 40병(柄)에 이르도록 많고, 적어도 10여 병(柄)에 밑돌지 않았습니다. 수체를 무역하는 값은 모두 민간(民間)에서 내는데, 각 고을에서 모아 거둔 잡곡(雜穀)의 수량이 혹 8, 9백 석(石)에 이르거나, 혹은 3, 4백 석(石)에 이르렀으나, 기일(期日) 내에 와서 바친 수량을 응당 바쳐야 하는 수량과 비교하면 몇 갑절 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미 납부한 것을 가져다가 먼저 봉진(封進)하고, 미처 바치지 않은 고을에 이르러서는 1병(柄)의 값을 억지로 4승포(四升布) 30필을 징수하고, 이미 바친 고을에 이급(移給)한다고 핑계대지만, 간 곳이 명확하지 않으니, 이것이 그 첫 번째 죄(罪)입니다.
영고(營庫)640) 에 내려 오는 부파목(腐破木)641) 1백여 동(同)을 개색(改色)한다고 핑계대어 북관(北關)의 열읍(列邑)에 나누어 보내고, 1필마다 6승포(六升布) 2필을 환납(換納)하게 하는데, 와서 바칠 때에는 강제로 7, 8승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바친 뒤에는 진자(賑資)를 요판(料辦)한다고 핑계대어 하루 안에 2백여 동의 세포(細布)를 죄다 내어 절반은 관서(關西)에 보내고, 절반은 경도(京都)에 보내었는데, 모두 간 곳이 없었으나, 값을 경상(京商)에게 주어 물건을 바꾸어 무역한 것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창고에 두었던 추단목(麤短木)으로 수량을 충당하였으니, 이것이 그 두 번째 죄입니다.
청차(淸差)가 나왔을 때에 준 소·돼지·물고기·소금 등의 물종(物種)은 모두 영문(營門)에서 방납(防納)642) 하는데, 그 방납하는 값의 곡물(穀物)을 강제로 염가(廉價)로 정해서 포목(布木)을 무역(貿易)하여 올려 보내게 하고, 각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혹 자주 탐묵(貪墨)한 자가 있으면, 이를 질책(叱責)하여 문보(文報)에 나타내 보이고서 편안히 이를 받고도 염연(恬然)히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그 세 번째 죄입니다.
감사(監司)가 순력(巡歷)할 때에는 비국(備局)에서 내려보낸 으레 하사하는 변군(邊軍)의 의자(衣資)와 시재(試才)에 상(賞)으로 주는 물종이 있는데, 태반(太半)을 줄여서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고산(高山)의 신점(新店)에서 은(銀)을 무역하여 전부 제 주머니에 넣었으니, 이것이 그 네 번째 죄입니다.
명천(明川)·경성(鏡城)의 두 고을에서 베어낸 관판(棺板) 1백여 부(部)를 민정(民丁)을 조발(調發)하여 선소(船所)에 끌어 운반하게 하여 계속 실어 왔으니, 이것이 그 다섯 번째 죄입니다.
진상(進上)하는 황모(黃毛)는 생김새가 조금 길면 으레 2조(條)로 쓰는 것을 1조(條)로 합작(合作)하는데, 각읍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합조(合條)하지 말도록 하여 강제로 3조를 받고, 그것을 봉진(封進)할 때에는 그 1조를 덜어서 사용(私用)하였으니, 이것이 그 여섯 번째 죄입니다.
각 고을의 염분(鹽盆)에서 한 달에 2석(石)을 받는 것은 전례(前例)가 그러하였는데, 기민(饑民)을 위협하여 나무를 베어다 소금을 굽게 하고는 한 달에 15석(石)을 받았으니, 이것이 그 일곱 번째 죄입니다.
남북(南北) 열읍(列邑)의 공장(工匠)들을 영문(營門)에 불러 모아 열사(列肆)643) 와 같이 뜰 가운데에 나누어 앉히고, 유철(鍮鐵)의 기명(器皿)을 밤낮으로 두들겨 만들고는 배로 운반하고 수레로 실어 날라서 죄다 그의 집에 들였으니, 이것이 그 여덟 번째 죄입니다.
북관(北關)에는 별마지(別麻紙)를 분정(分定)하고, 남관(南關)에는 고정지(藁精紙)를 분정하여 큰 고을은 5, 6백 권(卷)에 이르고, 작은 고을은 2, 3백 권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부족(不足)하게 여겨 또한 진보(鎭堡)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승두(升斗)의 피곡(皮穀)으로 겨우 값을 주어, 승도(僧徒)와 지장(紙匠)의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하였으니, 이것이 그 아홉 번째 죄입니다.
본도(本道)에서 복태(卜駄)644) 가 왕래하는 것을 금지한 국법이 지극히 엄준(嚴峻)한데다가, 또 고산(高山)에서 점열(點閱)하는 일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두려워하고, 또 범금(犯禁)을 꺼려하여 무릇 모리(牟利)에 관계된 물건과 부정하게 얻은 재물을 상고(商賈)와 체결(締結)하여 암암리에 서로 바꾸고, 그로 하여금 경제(京第)에 가서 납부(納付)하게 하고는 영고(營庫)에서 상환(償還)하였으니, 이것이 그 열 번째 죄입니다.
그 징려(懲勵)하는 도리에 있어서 별양(別樣)으로 거듭 구핵(究覈)해서 북인(北人)의 마음을 위안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전 감사 윤헌주(尹憲柱)의 장오죄(贓汚罪)를 유사(攸司)로 하여금 고율 감단(考律勘斷)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헌주(尹憲柱)의 탐오(貪汚)함은 곧 온 세상에서 모두 침을 뱉아 더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윤헌주가 일찍이 출신(出身)하기 전에 처음 관직(官職)에 나아가 부장(部將)이 되었을 때에 을해년645) 과 병자년646) 에 큰 흉년을 만나니, 조가(朝家)에서는 값을 덜어서 도민(都民)에게 쌀[米]을 팔았다. 이에 윤헌주는 교묘하게 명목(名目)을 만들어 거짓으로 증가하여 성책(成冊)하고, 값을 주고서 쌀을 받아다가 다시 팔아서 이익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두미(斗米)의 값은 2백 전(錢)이었으니, 드디어 이로써 집안을 일으켰다. 그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을 노려 사복(私腹)을 채운 것이 이와 같았으니, 달리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이제 이 대계(臺啓)에서 늘어 놓은 것이 혹 잗단 데에 관계되고 혹 이치에 가깝지 않아서 죄를 구하는 것과 같음이 있지만, 윤헌주의 기량(技倆)이 본시 스스로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괴이(怪異)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6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물가-물가(物價)
[註 638] 낭서(郞署) : 중요하지 않은 공무에 종사하는 관리.[註 639] 수체(首髢) : 여자가 성장(盛裝)할 때 머리 위에 얹는 어여머리.[註 640] 영고(營庫) : 감영의 창고.[註 641] 부파목(腐破木) : 썩어 못쓰게 된 포목.[註 642] 방납(防納) :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농민이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납공인(納貢人)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배나 불려서 받던 일.[註 643] 열사(列肆) : 줄지어 있는 점포.[註 644] 복태(卜駄) : 짐바리.[註 645] 을해년 : 1695 숙종 21년.[註 646] 병자년 : 1696 숙종 22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헌주(尹憲柱)의 탐오(貪汚)함은 곧 온 세상에서 모두 침을 뱉아 더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윤헌주가 일찍이 출신(出身)하기 전에 처음 관직(官職)에 나아가 부장(部將)이 되었을 때에 을해년645) 과 병자년646) 에 큰 흉년을 만나니, 조가(朝家)에서는 값을 덜어서 도민(都民)에게 쌀[米]을 팔았다. 이에 윤헌주는 교묘하게 명목(名目)을 만들어 거짓으로 증가하여 성책(成冊)하고, 값을 주고서 쌀을 받아다가 다시 팔아서 이익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두미(斗米)의 값은 2백 전(錢)이었으니, 드디어 이로써 집안을 일으켰다. 그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만을 노려 사복(私腹)을 채운 것이 이와 같았으니, 달리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이제 이 대계(臺啓)에서 늘어 놓은 것이 혹 잗단 데에 관계되고 혹 이치에 가깝지 않아서 죄를 구하는 것과 같음이 있지만, 윤헌주의 기량(技倆)이 본시 스스로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괴이(怪異)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다시 전사(前事)를 이끌어 진소(陳疏)하고, 걸해(乞骸)647)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대언(臺言)이 과중(過中)함을 이미 통촉(洞燭)하였으니, 잇따라 소장(疏章)을 올려 이와 같이 걸면(乞免)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전후(前後)의 유지(諭旨)를 몸받아 안심하고 대죄(待罪)하지 말 것이며, 정사를 논하여 나의 갈망(渴望)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승지(承旨)를 보내어 전유(傅諭)하도록 명하였다.
진위 정사(陳慰正使)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이 어버이의 나이가 70세가 되었다고 실정을 아뢰어 체차(遞差)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개차(改差)하도록 허락하였다.
12월 3일 갑인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을 진위 정사(陳慰正使)로 삼았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운택(金雲澤)이 물고(物故)되었는데, 곧 김춘택(金春澤)의 아우이다. 김성절(金盛節)이 승관(承欵)한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하루는 조송(趙松)의 집에 가서 정우관(鄭宇寬)을 만났더니, 정우관이 독약을 쓴 일에 대해 말하기를, ‘이 일은 이희지(李喜之)·이기지(李器之)와 김운택(金雲澤)이 주장(主張)하고, 나로 하여금 장세상(張世相)에게 전해주게 한 계제이다.’ 하므로, 제가 묻기를, ‘약값은 어떻게 모았는가?’ 하였더니, 조송(趙松)이 말하기를, ‘전인좌(錢仁佐)는 김운택의 복심(腹心)으로서, 여러 해 동안 먹여 살렸는데, 회금(灰金)의 소청으로 통수(統帥) 이수민(李壽民)의 군관(軍官)이 되자, 경자년648) 의 국휼(國恤) 초상(初喪) 때에 1백여 동(同)의 정목(正木)을 보내와서 훈국(訓局)의 방납체(防納體)로써 덜어 내어 썼다.’ 하였습니다. 또 이세복(李世福)의 말을 들으니, ‘회금(灰金)이 이숭조(李崇祚)의 아들 이용석(李龍錫)으로 하여금 서찰을 이홍술(李弘述)의 의막(依幕)에 보내어 은자(銀子) 1백 냥을 구해 갔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이로써 문목(問目)을 내었더니, 발명하여 공사(供辭)를 바친 것이 공초(供招)한 것과 서로 어긋나므로, 다시 김성절을 추국하자, 그가 공사(供辭)하기를,
"저는 당시에 단지 김민택(金民澤)이 일을 주장한 것으로만 인지(認知)하였을 뿐인데, 정우관(鄭宇寬)의 말을 듣게 되면서부터 김운택·김민택을 모두 들어서 세었습니다. ‘운택(雲澤)’이라는 두 자를 만약 듣지 못하였다면,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감히 명자(名字)를 들었겠습니까? 전인좌(錢仁佐)의 일 또한 조송(趙松)의 말을 들으면, 회금(灰金)의 청탁으로 통막(統幕)이 나갔던 것이며, 통영(統營)의 백동의 정목(正木)에 대한 일도 조송(趙松)이 또한 말하기를, ‘회금(灰金)이 훈장(訓將)과 상의한 뒤에 통영의 가장(假將)에게 통하여 방납(防納)해서 실어 와서 상납(上納)한 것인데, 그 나머지를 가져다가 각항의 수용(需用)에 썼습니다. 약값 또한 그 가운데에 있는데, 이러한 일은 이우항(李宇恒)이 모두 획책(劃策)하여 회금에게 통하였으니, 회금(灰金)이 주선(周旋)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여 전인좌(錢仁佐)·이숭조(李崇祚) 등을 구문(究問)하고, 그대로 가두기를 청하였는데, 대계(臺啓)로 인하여 형문(刑問)을 네 차례 베풀었으나, 그래도 굳게 은휘하여 불복(不服)하다가 죽었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부칙(訃勅)을 접대할 식찬(食饌)과 포진(鋪陳)은 모두 소식(素食)을 쓰고, 붕희(棚戱)는 베풀지 않는다는 뜻을 빈신(儐臣)에게 알려 주었다.
12월 4일 을묘
사은사(謝恩使)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 등이 피국(彼國)의 지경에 들어가 치계(馳啓)하기를,
"군관(軍官)을 봉황성(鳳凰城)에 들여보내어 칙사의 기별을 탐문(探問)하게 하였는데, 마성(馬姓)의 갑군(甲軍)에게 들으니, 황제(皇帝)는 지난 달 13일에 붕서(崩逝)하였고, 15일에 제4자(第四子)가 즉위(即位)하였으며, 16일에 발상(發喪)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칙사(勅使)는 30일 사이에 봉성(鳳城)에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호황(胡皇)이 죽을 때마다 반드시 변란(變亂)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다. 이 장계(狀啓)를 보면, 붕서(崩逝)한 날짜가 의주 부윤[灣尹]이 보고한 것과 서로 어긋나고, 칙행(勅行)도 기일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구(疑懼)하였으며, 도민(都民)은 놀라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서로(西路)649) 는 더욱 심하였다고 하였다.
12월 5일 병진
날씨가 추워지니, 명하여 승지(承旨)를 보내어 전옥(典獄)에 가서 적간(摘奸)하고,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12월 6일 정사
예문 제학(藝文提學) 유봉휘(柳鳳輝)를 명초(命招)하였는데, 병(病)으로 명(命)에 응하지 못하니, 이조(李肇)로 대신하게 하였다.
12월 7일 무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또 사소(辭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전후(前後)의 비답에 이미 지극한 뜻을 다하였는데도 성의(諴意)를 믿지 않고 조정에 나올 기약이 없으니, 몹시 놀랍고도 또 부끄러워 할 말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객사(客使)가 올 날이 가깝게 닥쳤는데, 낭묘(廊廟)에 사람이 없으니, 한결같이 괄시(恝視)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연소(年少)한 대관의 말을 깊이 혐의함은 마땅하지 못하니, 모름지기 국사(國事)만을 생각하고 안심(安心)하여 길에 올라 조석(朝夕)으로 삼가는 나의 마음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고, 사신(史臣)을 보내어 유시(諭示)하였다.
12월 8일 기미
밤에 달무리 하였다.
12월 9일 경신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하원(李夏源)·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진검(李眞儉)이 칙사(勅使)가 초10일쯤 의주[灣上]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치계(馳啓)하여 알리니, 인심(人心)이 조금 진정되었다.
12월 10일 신유
오명준(吳命峻)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시엽(金始燁)을 지평(持平)으로, 유필원(柳弼垣)을 교리(校理)로, 이현장(李顯章)을 수찬(修撰)으로, 오명신(吳命新)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집의(執義) 이중술(李重述)이 피혐(避嫌)하고, 말하기를,
"요즈음 헌직(憲職)에 있으면서 김운택(金雲澤)을 형신(刑訊)하도록 청한 일을 논계(論啓)하였더니, 대신(大臣)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 불가함을 논하기를, ‘조흡(趙洽)이 한 말은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니,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감히 죄인에게 발문(發問)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독대(獨對)한 일을 결코 외간(外間)에서는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조흡이 초사(招辭)에서 말한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초에 논계(論啓)한 것은 그가 먼저 알게 된 연유를 알아내려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니, 어찌 일찍이 털끝만큼이라도 선조(先朝)에게 관섭(關涉)한 단서가 있다고 대신(大臣)이 혼륜(混圇)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감히 발문(發問)할 수 없다고 말하고, 또 ‘기기(忌器)’ 두 글자로 거듭 논하여 마지않았으니, 신은 그윽이 미혹됩니다. 한 죄수(罪囚)를 논계하였다가 거듭 대신(大臣)의 비난[非斥]을 받았으니, 어찌 전연(靦然)히 무릅쓰고 의거할 수 있겠습니까? 또 본부(本府)에서 지난 겨울에 정청(庭請)하여 논의를 마쳤을 때에 제신(諸臣)의 원찬(遠竄)하자는 계청을 유락(唯諾)하신 바가 있습니다. 신의 종형 이중협(李重協) 또한 삼사(三司) 가운데의 사람이었습니다. 의논을 마쳤을 때를 당하여 가볍게 정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앞장서서 이론(異論)을 제기하였는데, 이제 이 대계(臺啓)에서 삼사(三司)를 뒤섞어 거론하여 널리 논죄(論罪)하기를 청하였으니, 안연(晏然)히 연계(連啓)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니, 이중술(李重述)이 퇴대(退待)하였다.
12월 11일 임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청하 현감(淸河縣監) 이보명(李保命)은 역적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의 지친(至親)으로서, 잡기(雜歧)로 발신(拔身)하여 분수에 넘치게 본 직임에 제수되니, 오로지 탐학(貪虐)만 일삼았습니다. 대소(大小)의 사송(詞訟)과 군정(軍丁)의 봉초(捧招)를 오로지 뇌물이 많고 적은 것으로써 결단하고, 상고(商賈)와 체결(締結)하여 왜공미(倭貢米)를 동래(東萊)에 방납(防納)하면 원래 한 섬의 쌀도 배로 운반한 일이 없었으나, 강제로 뱃삯으로 수백 냥(兩)을 연해의 포민(浦民)에게 거두어 전부 사복(私腹)을 채우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두 역적이 남쪽으로 귀양간 뒤에는 온갖 물건을 공급(供給)하느라고 창고(倉庫)를 다 기울여 실어 보냈으며, 그가 복법(伏法)되자 장구(葬具)와 제수(祭需)를 끊임없이 실어 보내니, 남쪽에서 온 사람은 분개하여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문성 첨사(文城僉命) 오중한(吳重漢)은 본시 시전(市廛)의 거간꾼으로서, 오래도록 역적 이이명(李頤命)이 길러서 은밀히 복례(僕隷)같이 부리다가, 연달아 금위영(禁衞營)의 철물 감관(鐵物監官)에 임명하니, 역적 이이명이 집을 경영[經起]함을 당하여서는 관료(官料)를 공공연히 주었습니다. 그리고 군마(軍馬)를 사사롭게 부리다가 마침내 주장(主將)에게 발각되자, 곤죄(棍罪)를 집행하여 태거(汰去)하니, 장교(將校)가 모두 모인 가운데에서 함부로 성명(姓名)을 부리며 꾸짖어 욕하였는데, 말씨가 몹시 패악(悖惡)하니, 듣는 자들이 귀를 가리고 사람들이 모두 분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런데도 세도만을 의지하고 여러 번 태거(汰去)되었다가 도로 잉사(仍仕)하였습니다. 또 역적 이이명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청나라에 갔을 때 이기지(李器之)·양익표(梁益標)와 문얼(門孼) 이언지(李彦之) 등의 이름 밑에 부쳤던 은화(銀貨)의 전수(全數)를 가져다 쓴 정적(情跡)이 음밀하였으나, 역관(譯官)의 입을 통해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이희지·이기지가 국청에 나아가자, 가화(家貨)를 반이(搬移)하고는 속수 무책으로 국옥(鞫獄)만을 기다렸습니다. 비록 두 역적이 장폐(杖斃)됨으로 인하여 요행히 원인(援引)됨을 면하였으나, 그의 부범(負犯)을 논하면 16인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와 같은 흉예(凶穢)한 무리는 결코 그대로 요진(饒鎭)을 줄 수 없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고, 처치하여 아뢰기를,
"대신(大臣)의 차주(箚奏)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데, 혐의를 무릅쓰고 구해(救解)하였으니, 몹시 대체(臺體)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집의(執義) 이중술을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처치한 일만 그대로 따랐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한범석(韓範錫)을 체차하라는 계청은 정침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사소(辭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아! 오늘날이 어떠한 때인가?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핍하여 국세(國勢)를 믿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경(卿)은 너그러운 도량을 가졌으니, 크게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어찌 차마 팔짱을 낀 채 평소와 같이 괄시(恝視)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일체(一體)로 서로 기다리는 뜻을 생각하여 다시는 정세(情勢)로 사직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 논도(論道)하여 나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전유(傅諭)하고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 또한 진소(陳疏)하여 걸해(乞骸)하니, 비지(批旨)를 우상(右相)의 비답과 같이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고, 어의(御醫)를 보내었다.
12월 13일 갑자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2경(更)부터 4경까지 달무리 하였다.
유술(柳述)을 집의(執義)로, 조익명(趙翼命)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원명(趙遠命)을 수찬(修撰)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납향 대제(臘享大祭)650) 는 마땅히 이달 20일에 거행하여야 하는데, 칙사(勅使)가 16일에 입경(入京)하여 행제(行祭)하므로, 장차 성복(成服)한 뒤 제복(除服)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비록 크고 작은 제사(祭祀)는 모두 정지 한다는 글이 있지만, 막중한 대제(大祭)를 정폐(停廢)하기 어려우니, 단지 음악만 정지하고 그대로 행제(行祭)하는 것이 권의(權宜)에 합당할 듯합니다마는, 사전(祀典)의 대체가 중하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헌의하기를,
"예조의 계사(啓辭)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14일 을축
오시(午時)651) 부터 신시(申時)652) 까지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왕명(王命)을 받고 조정에 나왔으나, 오히려 대소(臺疏)의 공척을 원인(援引)하여 다시 안국(按鞫)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진차(陳箚)하여 간곡히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객사(客使)가 벌써 박두하여 수응(酬應)할 일이 다단(多端)하다. 국옥(鞫獄)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이 스스로 담당하여 국좌(鞫坐)에 나갈 것이니, 칙사를 대접하는 데만 오로지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하고, 사신(史臣)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임금의 환후(患候)가 편치 않으므로 아직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는 것을 정폐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평복(平復)되었으므로 정원(政院)의 계품(啓稟)으로 인하여 다시 전과 같이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양사(兩司)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말단(末端)의 김상석(金相奭)을 삭천(削薦)하는 일만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윤헌주(尹憲柱)의 논계(論啓)에 첨개(添改)하여 조어(措語)하였는데, 이르기를,
"신이 전일에 윤헌주의 장오(贓汚)하고 불법(不法)한 죄(罪)를 논핵하여 이미 윤종(允從)을 받았습니다마는, 추후하여 듣건대 신이 논핵한 것은 윤헌주에 있어서도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대저 참람하게 기용(器用)을 만드는 것은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인데, 그가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하나의 와상(臥牀)을 만들었습니다. 상(牀)의 양쪽 모서리에 용(龍)을 새겨서 올라 앉으면 두 용두(龍頭)가 일시에 입을 열게 하고 왜홍(倭紅)으로 칠하여 그 기교(奇巧)를 다하니, 보는 사람들이 용상(龍牀)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제도가 어상(御床)보다 넘침이 있었으니, 비록 이사명(李師命)이 흉악하고 교활하다 하지만 오히려 감히 하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감조(監造)한 자는 곧 본영(本營)의 심약(審藥)인데, 체차되어 돌아올 때 실어온 자는 본부(本府)의 아전인 김취경(金就京)이라고 이름하는 자입니다. 생각하건대 여기에 연좌된 자는 죽여도 여죄(餘罪)가 있으니, 이것이 그가 첫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청차(淸差)가 개시(開市)653) 하였을 때 그가 친신(親信)하는 조성(趙姓)의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6동(同)의 정목(正木)을 회령부(會寧府)에 영송(領送)하고, 본부(本府)의 병방(兵房)으로 하여금 피중(彼中)의 물화(物貨)와 환무(換貿)하게 하였으므로, 북인(北人)들이, ‘고 감사(賈監司)’라고 일컫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그가 두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본영(本營)의 성기고(城基庫)에 전해 오는 전화(錢貨)도 모두 각 고을에서 수합(收合)하여 성지(城池)를 개축(改築)할 때에 고군(雇軍)의 품삯에 대한 밑천으로 삼은 것으로, 해마다 불어나서 그 수량이 거의 만 냥(萬兩)에 이르렀는데, 1전(錢)도 남기지 않고 수량 전체를 실어 오고, 감영(監營)의 환모(還耗)654) 와 피곡(皮穀)을 덜어내어 채워서 미봉(彌綘)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세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함흥(咸興) 지옹자(地瓮子)와 선덕(宣德)의 두 진(津)에 일찍이 해망 감관(海望監官)이 있었는데, 중방(中房)으로 그 임무를 차정(差定)하고, 왕래하는 선척(船隻)을 세어서 징세(徵稅)하니, 전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은 속공(屬公)을 핑계대어 전체의 선척을 죄다 탈취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또 물금첩(勿禁帖)655) 수천여 장(張)을 만들어 군관(軍官)·색리(色吏)와 아노(衙奴)에게 발송하여 남북 연해(沿海)의 어부(漁父)들의 처소에 흩어 주고, 한 첩(帖)에 강제로 건접어(乾鰈魚) 15급(級)을 받고는 아울러 모두 배로 원산(元山)에 운반하다가 돈을 만들어 실어 왔습니다. 그런데 첩(帖)을 팔 때에 군관과 아노의 무리가 사사롭게 받은 수량은 거의 첩가(帖價)보다 넘기 때문에, 그물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는 자는 빈 손으로 돌아가기를 면하지 못합니다. 만약 첩(帖)이 없이 고기를 잡는 자가 있으면, 잡아다가 엄중히 형추(刑推)하고 강제로 속목(贖木)을 징수하니, 해민(海民)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네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일찍이 전에 중한 값[重價]을 받고 한 여종을 회령(會寧)에 사는 사람에게 팔았는데, 그가 도백(道伯)이 되자 불러들인다고 핑계대어 회령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매주(買主)를 잡아다 가두게 하고, 도로 그 종을 탈취하였으니, 이것이 그가 다섯 번째 엄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일찍이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에 탐독(貪黷)한 일이 한 가지만이 아니므로, 입이 있는 이는 모두 말하고 귀가 있는 이는 모두 들었는데, 오직 이 북관(北關)에서 범한 것이 가장 낭자(狼藉)합니다. 더구나 우리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북로(北路)를 진념(軫念)하는 것이 다른 곳보다 자별(自別)하였는데, 한낱 윤헌주(尹憲柱)의 탐학(貪虐)으로 인하여 인심(人心)을 많이 잃어 국가에 원성(怨聲)이 돌아왔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더욱 지극히 통완(痛惋)합니다.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이로써 문목(問目)을 첨입하여 속히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평시 영(平市令) 홍서하(洪敍夏)·종묘 직장(宗廟直長) 이귀령(李龜齡)·사옹 직장(司饔直長) 권병(權炳)은 모두 향곡(鄕曲)의 보잘것없는 무리로서, 권흉(權凶)을 붙좇아 분수에 넘치게 사적(仕籍)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한 지 오래었으나,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금부 도사(禁府都事) 송위(宋煒)·익릉 참봉(翼陵參奉) 이현기(李顯箕)는 행신(行身)과 처사(處事)를 때에 따라 반복하고 변환(變幻)하는 정태(情態)는 선비가 모두 대신 부끄럽게 여기니,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오중한(吳重漢)을 도배(島配)하는 일과 말단(末端)의 두 가지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12월 15일 병인
밤에 달무리하였다.
양사(兩司) 【사간(司諫) 이진순(李眞淳)·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김포 군수(金浦郡守) 이서태(李瑞泰)는 더 많이 보고한 재결(災結)이 2백 결(結)에 이르렀는데, 민간에게 나누어 준 것은 그 수량이 매우 적었으며, 잡역(雜役)으로 징수한 돈이 전에 비하여 갑절 더하였습니다. 그리고 패선(敗船)의 증미(拯米)656) 수백 석을 가려 두고, 썩어서 상한 남은 쌀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고는 실속없이 성책(成冊)하며 그 사용(私用)한 자취를 엄폐하였습니다. 이른바 가려 둔 수백 석은 간 곳이 명확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탐학(貪虐)하고 불법(不法)한 사람은 자목(字牧)의 직임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전(前) 병사(兵使) 이휘(李暉)는 일찍이 옹곤(雄閫)657) 과 유읍(腴邑)658) 을 역임하면서 오로지 가렴 주구(苛斂誅求)하여 제몸을 살찌우는 것만 일삼고, 집에 전포(錢布)를 쌓아 둔 채 물쓰듯 하였습니다. 널리 점유한 전토(田土)가 경기·충청도에 퍼져 있는데, 아직도 아정(阿鼎)659) 에 안치(按治)하는 법에 벗어나 있으니, 오래도록 물정(物情)의 분완(憤惋)을 초래하였습니다. 작년에 무소(武所)에서 시강(試講)할 즈음에는 그가 친한 사람과 뇌물(賂物)을 보낸 사람은 정(丁)자조차 알지 못하는 자도 모두 다 통(通)660) 을 매기고, 그 나머지 본시 모르는 사람은 비록 잘 독해(讀解)하더라도 문득 반드시 조(粗)를 매겼으므로, 중외(中外)의 원망과 비방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조카를 양자를 삼아 데려다 기른 지 십수 년이 지난 뒤에 양자의 동생인 이제항(李齊恒)이 문과(文科)에 등제하자, 이제항을 양자로 고치려고 하였으니, 놀랍고 가증스러운 자취가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탐도(貪饕)하며 불법(不法)하고 의리를 어겨 윤기(倫紀)가 없는 사람은 융원(戎垣)의 장병(將兵)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재해(災害)로 군포(軍布)를 견감한 것은 실로 조정의 진휼(軫恤)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나, 외방(外方)의 영문(營門)에서 더러 일체(一體)로 봉행(奉行)할 수가 없습니다. 각 영문(營門)에서 상납(上納)하는 것은 장령(將令)에 의하여 감하여 받고, 영문에 소속된 진졸(鎭卒)661) 에게는 다 2필(匹)을 받는데, 이와 같이 구별(區別)하여 하나는 받고 하나는 받지 않으니, 지극히 놀랄 만한 것입니다. 또 황해 병영(黃海兵營)에서 진졸(鎭卒)의 군포(軍布)를 강제로 세목(細木)으로 받는 것은 이미 잘못된 규례입니다. 2필을 판비하는 값이 6냥 전(錢)에 이르는데, 이는 곧 3필(匹)의 역(役)이 되어 배(倍)나 감당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각도와 해영(該營)에 분부(分付)하여 재년(災年)의 진졸의 군포는 한결같이 서울에 바치는 예에 의하고, 감징(減徵)하는 승수(升數) 또한 서울에 바치는 예에 의하여 수봉(收捧)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아 시행하여 민폐(民弊)를 제거하소서."
하니, 말단(末端)의 세 가지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오중한(吳重漢)을 남해현(南海縣)에 유배하였다.
등극 칙사(登極勅使)의 패문(牌文)이 나왔다고 의주 부윤(義州府尹)·평안 감사(平安監司)가 치계(馳啓)하여 알렸다.
12월 16일 정묘
이광좌(李光佐)를 원접사(遠接使)로, 권익관(權益寬)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다.
전부 칙사(傳訃勅使) 액진나(額眞那)·오이태(吳爾泰)가 서울에 도달하니, 임금과 왕세제(王世弟)가 백포(白袍)에 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를 갖추고 칙사를 모화관(慕華館)에서 맞이하여 먼저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여 환궁(還宮)하고, 칙사(勅使)는 숭례문(崇禮門)을 경유하여 이어서 이르렀다. 또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공손히 맞이하니, 칙사가 전(殿)에 올라 칙서(勅書)를 안상(案上)에 놓았다. 임금이 4배(四拜)하고 분향(焚香)하여 서계(西階)로부터 전(殿)에 올라 북향하여 서니, 칙사가 ‘제서(制書)가 있다.’고 일컬었다. 꿇어앉아서 받고 제자리로 내려갔다. 선칙(宣勅)한 칙서(勅書)는 곧 강희 황제(康熙皇帝)의 유조(遺詔)였는데, 이르기를,
"이제까지 제왕(帝王)이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데는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는 것으로써 첫째의 임무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조종을 본받는 실제는 원방의 백성을 순종시키고, 가까운 인국을 잘 다스려서 창생(蒼生)을 편안하게 양육하는 데 있다. 사해(四海)가 함께 하는 이로움으로 이로움을 삼고, 천하(天下)를 하나로 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위태하지 않은 데에서 나라를 보위하고, 어지럽지 않은 데에서 정치를 도모하되,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하여 자나깨나 쉴 겨를이 없으면, 구원(久遠)한 국가의 계책을 이루는 데 거의 가까울 것이다. 짐(朕)은 나이가 70에 이르고, 제위(帝位)에 있은 지 61년이 되지만, 실로 천지(天地)와 종사(宗社)의 말 없는 도움에 힘입었으며, 짐(朕)의 양덕(涼德)662) 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사책(史冊)을 두루 보건대 황제(黃帝) 갑자년에서부터 지금까지 4천 3백 50여 년에 3백 1인의 제왕(帝王)이 함께 하였지만, 짐(朕)과 같이 오랫동안 재위(在位)한 자는 매우 적었다. 짐(朕)은 임어(臨御)한 지 20년에 이르도록 시세(時勢)를 미리 헤아리지 못하였고, 30년에 이르도록 30년의 시세를 미리 헤아리지 못하고 40년에 이르렀으며, 이제 61년에 이르렀다. 《상서(尙書)》 홍범(洪範)에 기재된 1은 수(壽)라 하고, 2는 부(富)라 하고, 3은 강녕(康寧)이라 하고, 4는 유호덕(攸好德)이라 하고, 5는 고종명(考終命)이라 하였으니, 5복(五福) 중에 고종명(考終命)을 다섯째로 열거한 것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제 짐(朕)의 나이가 벌써 구로(耉老)에 올랐고, 부(富)는 천하에 두었고, 자손(子孫)은 1백 50여 인이고, 천하(天下)가 안락(安樂)하니, 짐의 복(福) 또한 후하다고 할 것이니, 곧 더러 미리 헤아리지 못한 것은 있었으나, 마음 또한 태연(泰然)하다. 생각하건대 짐이 등극한 이래로 비록 감히 스스로 이풍 역속(移風易俗)663) 하고 가급 인족(家給人足)664) 하였다고 할 수는 없으나, 위로는 삼대(三代)의 명성(明聖)한 임금을 본받아 천하[海宇]를 승평(昇平)하게 하고, 인민을 낙업(樂業)하게 하려고 부지런히 힘써 쉬지 않고 일하였다. 삼가 조심하여 공경하고 근신하며,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쉴 겨를이 없이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수십 년이 지나도록 하루처럼 마음과 힘을 다하였으니, 이 어찌 겨우 ‘노고(勞苦)’ 두 글자만으로 포괄할 수 있겠는가?
전대(前代)의 제왕(帝王)으로 혹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면, 사론(史論)은 대개 주색(酒色) 때문에 초래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모두 서생(書生)이 기평(譏評)하기를 좋아한 것이다. 비록 순전(純全)하고 진미(盡美)한 임금이라도 또한 반드시 하자(瑕疵)를 찾아낼 수 있으니, 짐(朕)이 이제 전대(前代)의 제앙(帝王)을 위하여 분명히 가려서 말하면, 대개 천하(天下)의 일이 많은 것으로 연유하여 고달프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초래한 것이다. 제갈양(諸葛亮)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고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된 자는 오직 제갈양과 같이 할 수 있어야 하나, 만약 제왕(帝王)의 자견(仔肩)665) 이 매우 중대하다면 방관하여 맡길 수 없으니 어찌 신하(臣下)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신하는 벼슬살이할 수 있으면 벼슬살이하고, 그만둘 수 있으면 그만두고, 연로(年老)하면 치사(致仕)666) 하여 돌아가 아들을 안고 손자를 얼르면서 오히려 유유 자적(悠悠自適)하겠지만, 임금이 된 자는 평생 동안 부지런히 일해도 끝내 휴식(休息)할 날이 없다. 순(舜)임금과 같은 이는 비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스렸다고 일컬으나 몸은 창오(蒼梧)에서 죽었고, 우(禹)임금은 4년이나 배를 타느라고 손에 못이 박히고 발이 갈라져서 회계(會稽)에서 끝을 마치었다. 이와 같이 모두 정사(政事)에 근로(勤勞)하여 순행(巡行)하며 두루 돌아다니느라 편히 쉴 겨를이 없으니, 어찌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숭상하여 청정(淸靜)함을 스스로 지키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역(周易)》 둔괘(遯卦) 육효(六爻)에 일찍이 인주(人主)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임금은 편안히 쉴 곳이 없음을 볼 수 있으며, 퇴장(退藏)667) 하여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이것을 위함이다.
예로부터 천하(天下)의 올바름을 얻은 이로서 우리 조정의 태조(太祖)·태종(太宗)과 같은 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천하를 취할 마음이 없었으나, 일찍이 군병이 경성(京城)에 미치자, 모든 대신(大臣)들이 다 이르기를, ‘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는 이르기를, ‘명(明)나라와 우리 나라는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이제 취하려고 마음먹으면 매우 쉽겠지만, 생각이 중국(中國)의 임금에 관계되니 차마 취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뒤에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경성(京城)을 공파(攻破)하여 숭정(崇禎)668) 이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신민(臣民)이 서로 이끌고 와서 맞이하여 바로 틈구(闖寇)를 전멸(翦滅)하고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전례(典禮)를 상고하고 조사하여 숭정(崇禎)을 안장(安葬)하였다.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사상 정장(泗上亭長)이었고, 명(明) 태조(太祖)는 황각사(皇覺寺)의 중[僧]이었다. 항우(項羽)가 군사를 일으켜 진(秦)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천하(天下)는 졸지에 한(漢)나라로 돌아갔으며, 원말(元末)에 진우량(陳友諒) 등이 봉기(蜂起)하였으나 천하는 갑자기 명(明)에 돌아갔다. 우리 조정은 전열(前烈)을 계승하여 하늘에 순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였으며, 이어서 구획(區劃)을 두었으니, 이 때문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를 보면 진주(眞主)를 위하여 구제(驅除)하여야 한다. 무릇 제왕(帝王)은 스스로 천명(天命)이 있으니, 마땅히 수구(壽耉)를 누릴 자에게 수구를 누리지 못하도록 할 수 없으며, 태평(太平)을 누릴 자에게 태평을 누리지 못하도록 할 수 없다.
짐(朕)이 어려서부터 독서(讀書)하여 고금(古今)의 도리(道理)에 대략 통효(通曉)할 수 있었고, 또 나이와 기력이 왕성할 때에는 50석(石) 무게의 활을 당기고, 13파(把)의 화살을 쏠 수 있었으며, 군사를 써서 임용(臨戎)669) 하는 일도 모두 뛰어났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일찍이 망령되게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삼번(三藩)을 평정(平定)하고 막북(漠北)670) 을 깨끗이 소탕할 때에는 모두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내었으며, 호부(戶部)의 탕금(帑金)을 운주(運籌)할 때에는 군사를 부리든가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일이 아니면 감히 망령되게 소비하지 않았으니, 모두 백성의 기름[脂膏]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순수(巡狩)하는 데 있던 행궁(行宮)에는 수놓은 비단[綵繢]을 베풀지 않았고, 처소(處所)마다 드는 비용은 1, 2만금(萬金)에 지나지 않았으니, 하공(河工)의 세비(歲費) 3백여 만에 비교하면 1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옛날에 양 무제(梁武帝) 또한 창업한 영웅(英雄)이나 나중에 모년(耄年)671) 에 와서는 후경(侯景)에게 핍박받는 대성(臺城)의 화(禍)672) 가 있었고, 수 문제(隋文帝) 또한 개창(開創)한 임금이나, 미리 그의 아들 양제(煬帝)의 악독함을 알수 없어 마침내 영종(令終)673) 하지 못하였으니, 모두가 일찍 변정(卞正)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짐(朕)은 자손(子孫)이 1백여 인이고 나이가 70인데, 제왕(諸王)·대신(大臣)·관원(官員)·군민(軍民)과 몽고인(蒙古人) 등에 미치기까지 애석(愛惜)해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짐(朕)은 나이가 늙은 사람이니, 이제 비록 수명을 다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짐 또한 유쾌하고 기쁘다. 태조 황제(太祖皇帝)의 아들에 이르러서는 예친왕(禮親王)·요여왕(饒餘王)의 자손이 현재 모두 각각 안전(安全)하니, 짐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각각 능히 협심(協心)하여 보전(保全)한다면, 짐 또한 흔연(欣然)히 편안하게 죽을 것이다. 옹친왕(雍親王)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은 인품이 귀중(貴重)하여 짐의 몸을 매우 닮았으니, 반드시 대통(大統)을 승계하여 짐의 등극한 터전을 착실하게 이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위(皇帝位)에 나아가면 전례(典禮)를 준수하여 지복(持服)674) 하되, 27일에 상복을 벗고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여 다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읽기를 끝마치어 임금이 곡(哭)하고 4배(四拜)하니, 세제(世弟)와 백관(百官)도 모두 4배하였다. 임금이 서계(西階)로부터 전(殿)에 올라 동향하여 서고, 칙사가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 서향하여 섰는데, 칙사가 제배(除拜)하고 읍(揖)만 행하기를 청하므로, 읍(揖)만 하고 파하여 자리에 나아가 앉아서 상사(喪事)를 위문하고 행차를 위로하였다. 칙사가 감사하다는 뜻으로 치사(致謝)가 많았다. 설다(設茶)하기를 청하니, 칙사가 상사(喪事)로 사양하였다. 다시 권고하고는 중지하여 다시 강요하지 않았다. 칙사(勅使)가 동계(東階)로부터 내려와 관소(館所)로 가니, 임금이 서계(西階)로부터 내려와 섬돌 끝에서 지송(砥送)하였다.
12월 17일 무진
이세최(李世最)를 도승지(都承旨)로, 이태원(李太元)을 장령(掌令)으로, 정수기(鄭壽期)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제신(宰臣)을 보내어 칙사(勅使)를 관소(館所)에서 노문(勞問)하고, 날마다 평상과 같이 하였으니, 전례(前例)가 그러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최석항이 아뢰기를,
"전(前) 판서(判書) 홍치중(洪致中)은 거듭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방금 파직되어 한산하게 지내지만, 그 사람됨이 사무(事務)에 익숙해서 벼슬에 있을 때 처리한 일에 볼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마침내 영구히 폐출하게 되었지만 진실로 애석하게 여길 만하니, 특별히 거두어 서용(敍用)하고 빈 자리가 있는 대로 임사(任使)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원접사(遠接使) 김연(金演)이 칙사를 지영(祗迎)하고 돌아와서 역관(譯官)에게 들은 것을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에게 말하기를,
"강희 황제(康熙皇帝)가 창춘원(暢春苑)에 있을 때 병세가 극심해지자,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각로(閣老) 마제(賢齊)를 불러서 말하기를, ‘제4자(第四子) 옹친왕(雍親王) 윤진(胤禛)이 가장 현철(賢哲)하니, 내가 죽은 뒤에 세워서 사황(嗣皇)을 삼고, 윤진의 제2자(第二子)는 영웅의 기상(氣像)이 있으니, 반드시 봉하여 태자(太子)를 삼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임금을 바꾸지 못하는 도리와 천하를 평치(平治)하는 요체를 윤진(胤禛)에게 훈계하겠다.’ 하고, 머리와 목에 걸었던 염주(念珠)를 벗어서 윤진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순치 황제(順治皇帝)께서 임종(臨終)하실 때 짐(朕)에게 준 물건이다. 이제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니, 너는 그것을 알라.’ 하고, 또 이르기를, ‘폐태자(廢太子)와 황장자(皇長子)는 성행(性行)이 불순(不順)하니, 전례(前例)에 의하여 구수(拘囚)하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주어서 그 몸을 마치게 하고, 폐태자의 제2자(第二子)는 짐이 매우 사랑하였으니, 그를 특별히 봉하여 친왕(親王)을 삼도록 하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서거하였다 합니다. 그날 밤 견여(肩輿)로 시신(屍身)을 싣고 경성(京城)에 돌아왔는데, 신황(新皇)이 곡(哭)하며 뒤를 따르니, 성중(城中)이 한때 우레처럼 곡(哭)하기를 고비(考妣)의 상(喪)과 같이 하였다 합니다. 13일에 상(喪)을 내고 15일에 발상(發喪)하였으며 19일에 즉위(卽位)하였으니, 그 사이의 날짜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이것은 비밀한 상(喪)이 아니라, 신황(新皇)이 여러 차례 양위(讓位)하여 지체된 것이며, 즉위한 뒤에도 처사(處事)함이 마땅하여 인심(人心)이 크게 진정되었다 합니다. 유조(貴詔)에는, ‘27일에 제복(除服)하라고 하였는데, 신황(新皇)이 너무 짧다 하여 차마 유교(遺敎)를 준수하지 못했다 합니다. 강희(康熙)의 후궁(後宮) 덕비(德妃)는 신황(西皇)의 생모(生母)로서 지금도 생존해 있으며, 14왕은 중병(重兵)을 옹위하고 서정(西征)하였는데, 본시 위명(威名)이 있는 자로서 신황(新皇)의 동모제(同母弟)라 합니다. 신황(新皇)이 즉위한 뒤에 즉시 명하여 소환(召還)하였으므로 반드시 발호(跋扈)할 염려는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태좌가 대강을 들어 오늘의 연중(筵中)에서 진달하기를,
"이 말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다 하나, 강희(康熙)가 임종(臨終)할 때에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어찌 다 옳겠습니까? 저들 오랑캐의 임금은 또 미리 국본(國本)을 정하지 않았으니, 그 여러 아들이 넘겨 보고 쟁립(爭立)할 것은 그 형세가 십중 팔구는 됩니다. 또 그것이 비밀한 상(喪)이 아니고, 인심(人心)이 크게 진정되었다는 등의 말로써 미루어 보면, 마침 의혹(疑惑)을 더욱 더하기에 족합니다."
하였다.
12월 18일 기사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니, 상칙(上勅)과 부칙(副勅)이 섬돌 끝까지 나와 맞이하였다. 동계(東階)·서계(西階)로 나누어 올라가 제배(除拜)하고 서로 읍(揖)하고 자리에 나아가 간략하게 노고를 위로하는 인사의 말을 하였다. 재삼 다(茶)를 권하였으나, 군상(君喪)이라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어서 말하기를,
"오래 앉아 계시면 노고를 드리게 되니, 청컨대 일어나 파좌(罷坐)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마땅히 파하겠습니다."
하였다. 칙사(勅使)가 먼저 일어나니, 임금도 또한 일어나 나왔다. 칙사가 섬돌까지 전송하니, 임금이 여러 번 통사(通事)로 하여금 말하여 중지하게 하였는데, 칙사가 이르기를,
"이 곳은 우리들이 주인(主人)이 되니, 반드시 섬돌 끝까지 전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드디어 섬돌 끝에서 저립(竚立)하여 임금이 문을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다시 올라 갔다. 임금이 환궁(還宮)하니, 왕세제(王世弟)가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지송(祗送)하고 지영(祗迎)하였다.
충청도(忠淸道) 문의현(文義縣)에 천둥하였고, 회인현(懷仁縣)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2월 19일 경오
3경부터 5경까지 달무리하였다.
호황(胡皇)의 성복(成服)을 거행하였다. 임금과 세제(世弟)는 대내(大內)에서 행례(行禮)하고, 백관(百官) 4품 이상은 최복(衰服)을 입고, 5품 이하는 백포(白袍)·백모(白帽)·오대(鳥帶)를 하고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행례하니, 칙사(勅使)가 이를 듣고 이르기를,
"동방(東方)은 본시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일컬었더니, 황상(皇上)을 위하여 예를 다 함이 이와 같으니, 신황(新皇)이 들으면 반드시 가상하게 여길 것이다."
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세덕(李世德)을 사인(舍人)으로, 신익하(申翊夏)를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신익하는 본시 장수(將帥)의 집안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사자(士子)675) 의 업(業)을 일삼고 활 잡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숙종(肅宗)이 특별히 명하여 무과(武科)를 권장하니, 힘써 왕명에 응하였다. 그래서 이 직임(職任)을 제수하게 되니, 인망(人望)이 흡족하게 여겼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제조(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양서(兩西)에 흉년이 거듭하여 민력(民力)이 이미 다하였음을 갖추 진달하여 청하기를,
"각영(各營)과 각 고을에서 무역(貿易)하고 징렴(徵斂)하는 규례를 파(罷)하고, 금년의 세궤(歲餽)를 정지하면, 대소(大小)의 별성(別星)676) 에게 딸려 있는 추종(騶從) 또한 정식(定式)에 의하여 간약(簡約)히 하는 데 힘쓰고, 서북(西北)의 수령은 가끔 시종(侍從)을 차견(差遣)하고,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휼하는 일을 동찰(董察)하게 하여 병사(兵使)·수사(水使)·수령(守令)·찰방(察訪)·변장(邊將) 가운데 탐오(貪汚)한 자는 법에 의하여 무겁게 감죄(勘罪)하소서. 또 이조·병조로 하여금 염근(廉謹)한 사람은 수용(收用)하게 하고, 또 요로에 뇌물을 보내어 부탁하는 것을 금하되, 대각(臺閣)으로 하여금 듣는 대로 즉시 논계(論啓)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2월 21일 임신
양사(兩司)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헌납(獻納) 권익관(權益寬)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지난해에 김춘택(金春澤)이 비류(匪類)와 체결하여 정적(情跡)이 음비(陰祕)했던 정상을 나라 사람들이 한 가지로 지목하였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자가 그윽이 근심하던 것입니다. 세자(世子)를 모해(謀害)하였다는 말은 신사년677) 에 국수(鞫囚)의 초사(招辭)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지난날 대신(大臣)과 금부 당상(禁府堂上)은 김춘택의 혈당(血黨)이 아님이 없었으므로, 숨겨 두고서 추문(推問)하지 않아서 마침내 집안에서 죽도록 하였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김춘택의 여러 아우는 모두 악독한 성품으로 흉역(凶逆)의 모의하는 데 길들여져 김보택(金普澤)의 집에 모여 모의하였다는 말은 이미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서 나왔고, 김운택(金雲澤)의 무리가 독약을 썼다는 말이 또 김성절(金盛節)의 결안(結案)에서 나왔으며, 김민택(金民澤)이 이명익(李明翼)에게 서찰을 보내어 은화를 구하였을 때 그의 두 아우가 같이 앉아서 재량하여 글을 썼다는 말이 또 이용석(李龍錫)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심지어 부녀(婦女)들 또한 또 흉모(凶謀)를 미리 들어서 김보택의 처(妻)의 서찰 속에, ‘밥짓는 것보다 쉽게 익는다.’는 말이 이희지(李喜之)의 어미의 편지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집안이 악당(惡黨)에 물들지 않음이 없는 정형(淸形)이 이르는 곳마다 탄로되었는데, 다만 김운택·김민택의 두 역적에게만 고루 사나움을 모으고, 형의빈(邢義賓)·전인좌(錢仁佐)의 여러 흉적(凶賊)은 죽을 힘을 다해 저뢰(抵賴)하여 끝내 죄상(罪狀)을 자백받지 못하고 정법(正法)하였습니다. 통쾌하게 상형(常刑)을 거행하였으나, 신인(神人)의 여분(餘憤)을 쏟지 못하였고 종사(宗社)의 깊은 근심이 아직도 남았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여얼(餘孼)을 제거하지 않았으므로, 지모(智謀)가 더욱 깊어져서 그 독기를 부리며 스스로 방비하고, 이어서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는 사세(事勢)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날 국수(鞫囚)의 초사(招辭) 가운데에 김춘택 등이 나라를 위하여 깊이 근심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까닭인데, 오히려 또 그가 제멋대로 하도록 맡겨 두어 경련(京輦)에 포열(布列)하게 하면, 장차 어떻게 역적을 꺾고 간흉의 싹을 잘라 음모(陰謀)를 깨뜨려 버리겠습니까? 요즈음 간신(諫臣)이 이로써 진소(陳疏)하였으나, 끝내 명백한 윤유(允兪)를 내리지 않으시니, 여정(輿情)이 우울(憂鬱)해 한 지 오래되었어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김춘택의 여러 자질(子姪)을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여 화근(禍根)을 없애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정우관(鄭宇寬)의 아들 정재흥(鄭再興)을 아직도 잡지 못하였는데, 해청(該廳)에서 조령(朝令)을 업신여겨 일찍이 마음을 다하여 잡지 않았으니, 지극히 놀랄 만합니다. 그리고 이기지(李器之)의 아들 이봉형(李鳳馨)은 자진(自盡)하였다고 일컫지만, 깊이 의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노적(孥籍)하라는 명(命)이 내려진 뒤에 4일이 지나서 이봉형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으나, 이미 도랑에서 자경(自經)678) 한 것이 아니고, 단지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자진(自盡)하였다고 하니, 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망조(莽操)679) 의 집안 아이 가운데 멸성(滅性)680) 의 효도를 갖춘 자가 있었습니까? 하물며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 있는 그의 친속(親屬)이 대신 검시(檢屍)를 담당하였다고 하니, 시신(屍身)의 진위와 간사한 정상이 있었는지 그 여부를 도리어 어떻게 빙거하여 분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지목하여 의심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전파되어 그것을 수군대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沇)은 서캐처럼 보잘것없는 자였으나, 이국(異國)으로 도망해 들어가 마침내 정묘년681) 의 난(亂)을 불러 왔는데, 하물며 저 온 가족이 모역(謀逆)한 이봉형이겠습니까? 평소에 효건(驍健)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일컬었으니, 만약 끝내 잡지 못한다면 신은 초국(楚國)의 군신(君臣)이 또 병화(兵禍)에 괴로와하던 불행(不幸)에 가까울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천금(千金)의 현상을 걸어 두 사람의 종적을 구포(購捕)하여 흔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로잡으시고, 후환(後患)을 제거하소서."
하였으나, 대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회금(灰金)의 한 집안은 인품이 모두 양명(陽明)하지 못하고, 종적이 음비(陰祕)한 무리가 많다고 세상에서 지목하였는데, 김춘택(金春澤)의 형제와 같이 자신이 악역(惡逆)을 범한 것 이외에는 우는 젖내나는 어린아이들뿐이었으니, 저 무리가 어찌 알았겠는가? 유술(柳述)의 상소(上疏)에 이미 너무 심한 데 관계된다고 하였는데, 이제 이 간원(諫院)의 계사(啓辭)에서는 한결같이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이를 윤종(允從)하면 어린아이는 그 어미와 떨어지고 아우는 그 형을 이별하게 되어, 귀양보낸 절해(絶海)의 궁벽한 섬 밖에서 몹시 원통하여 부르짖을 것이다. 따라서 이 때문에 위로 천화(天和)를 범하여 공의(公議)가 참혹하게 병들게 될 것이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라도(全羅道)에는 예전에 여수현(麗水縣)이 있었는데, 중간에 수영(水營)을 그 지방에 설치하고, 그 현(縣)을 폐지하여 순천부(順天府)에 예속시켰습니다. 그런데 수영을 이진(移鎭)한 뒤에 수영은 구진(舊鎭)이라고 하면서 잡역(雜役)을 전례(前例)에 의하여 침독(侵毒)하고, 순천(順天)은 그의 소속(所屬)이라고 하면서 부렴(賦斂)682) 하는데, 기한을 작정하여 징수합니다. 한 지방의 백성이 두 곳에 끼어서 책응(責應)하게 되어 지탱하여 감당하지 못하니, 순흥(順興)·영양(英陽)·자인(慈仁) 등의 고을 예에 의하여 다시 구현(舊縣)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만일 그것이 그렇지 못하면 좌수영(左水營)으로 하여금 겸찰(兼察)하게 하여 두 아문(衙門)에서 침징(侵徵)하는 폐단을 청하고자 합니다.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민원(民願)에 의하여 장점을 따라 변통하여서 한 지방의 심한 고통의 위급한 처지를 풀어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엎드려 듣건대 어제 연중(筵中)에서 의관(醫官)은 연한(年限)에 구애받지 말고 수령(守令)에 주의(注擬)하라는 일을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다고 하니, 개연(慨然)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연한(年限)은 금석지전(金石之典)입니다. 유상(柳瑺)의 일은 선조(先朝)의 한때의 특별한 은전(恩典)에 지나지 않는데, 이제 두세 사람의 의관(醫官)을 위해 조종(祖宗)의 금석지전(金石之典)을 무너뜨리겠습니까? 성명(成命)을 내리시자 세상의 여론이 떠들썩하니, 청컨대 의관을 연한에 구애받지 말고 수령에 주의(注擬)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희담(李喜聃)은 여러 번 선혜 낭청(宣惠郞廳)이 되었는데, 더럽고도 잗단 일로 이서(吏胥)들이 대신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연달아 풍요한 고을을 맡기시니, 탐오(貪汚)한 정상을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아 꾸짖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흉년에 자목(字牧)의 직임을 줄 수는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말단(末端)의 두 가지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12월 22일 계유
호황(胡皇)의 상복(喪服)을 벗었다.
칙사(勅使)가 돌아갔다. 명하여 승지(承旨)를 교외(郊外)에 보내어, ‘부칙(訃勅)이 돌아갈 때에는 본래 전연(餞宴)하는 예(例)가 없고, 또 제복(除服)하는 날과 서로 상치(相値)하여 교외(郊外)에서 전송할 수 없다.’는 뜻을 효유하니, 칙사(勅使)가 이르기를,
"이미 관대한 예우를 받았으니, 어찌 다시 전송하러 나오시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황제(皇帝)께서 만약 물으시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승지(承旨)가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단지 예문(禮文)만을 준수합니다. 전례(前例)에 전송연을 베풀었다는 규례가 없었으니, 스스로 교송(郊送)하는 예(禮)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칙사가 이르기를,
"마땅히 우리들이 정지(停止)하도록 하였다는 뜻으로써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니,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12월 24일 을해
홍정필(洪廷弼)을 집의(執義)로, 유수원(柳壽垣)을 정언(正言)으로, 이사성(李思晟)을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삼았다.
좌승지(左承旨) 임순원(任舜元)이 상소(上疏)하여 약원(藥院)에서 잘못 의약(議藥)한 것을 논핵하고, 또 논하기를,
"수의(首醫) 이시성(李時聖)은 의술이 용렬하고 사람됨이 광패(狂悖)하니, 청컨대 이시성을 태거(汰去)하고 수의(首醫)를 골라 배치하소서."
하였다. 대답하기를,
"당귀용회환(當歸龍薈丸)은 여러 의원이 난만히 상확(商確)하여 의정(議定)하였으니,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인구(引咎)하여, 한갓 의원의 말만 믿고 경솔하게 의약(議藥)한 죄(罪)를 받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의 의견(意見)이 이와 같으니 여러 의원과 더불어 택정(擇定)하되, 사직하지 말고 공사(公事)를 집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변민(邊民)이 내지(內地)에 이사(移徙)하여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영(令)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중법(重法)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한 번 북보(北報)가 있고부터 온 나라가 수선스럽고도 어지러웠는데, 서변(西邊)이 더욱 심하였다. 백성이 많이 이사하여 피한다고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진검(李眞儉)이 금지(禁止)하기를 장청(狀請)하므로,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게 한 것이다.
12월 25일 병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차대(次對)를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후일(後日)에 와서 기다리게 하고 인견(引見)하지 않았다. 근일에 차대(次對)를 탈품(頉稟)683) 하고 행하지 않았다가, 이제 또 차대하기를 구하였는데, 인접(引接)을 윤허하지 않으니, 군신(群臣)이 근심하며 한탄하였다.
감귤(柑橘)을 반사(頒賜)하고 반궁(泮宮)에서 시사(試士)하였다.
양사(兩司) 【사간(司諫) 이진순(李眞淳)·장령(掌令) 이태원(李太元)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서관(西關)은 요해처이니, 직임이 매우 중대합니다. 병사(兵使) 윤오상(尹五商)은 본시 재략(才略)이 없는데다가 나이가 또 쇠로(衰老)하였으며, 주색(酒色)에 깊이 빠져서 융무(戎務)를 포기하였으니, 청컨대 평안 병사(平安兵使) 윤오상을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는데, 이보명(李保命)의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前) 부장(部將) 이수악(李壽岳)은 본시 흉적(凶賊)의 가신(家臣)으로서, 세염(勢焰)을 빙자하여 많은 불의(不義)를 행하였습니다. 수백 년 전의 한 장의 문서(文書)를 가지고 황주(黃州)에 있는 40리(里)의 한 들판을 탈취하기를 꾀하였고, 이홍술(李弘述)이 형판(刑判)이 되었을 때에는 관문(關文)을 얻어 토세(土稅)를 위협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포세(逋稅)를 칭탁하여 양성(梁姓)의 사인(士人)의 처(妻)를 구수(拘囚)하였는데, 옥의 담을 뛰어넘다가 돌이 떨어져 죽으니, 그 아이가 또 젖을 먹지 못하여 잇따라 죽었습니다. 이수악은 그래도 그칠 줄을 모르고 양씨(梁氏)의 딸이 미색(美色)임을 듣고는 감히 강제로 더럽힐 계책을 꾸미니, 그 여자가 드디어 자결(自決)하여서 죽었습니다. 아! 양가(梁家)의 세 모자(母子)가 모두 비명(非命)에 죽으니, 고을 백성들이 일제히 관문(官門)에 호소하였으나, 이수악(李壽岳)은 세력(勢力)이 있는 까닭에 끝내 무사(無事)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서토(西土)의 인민으로 통탄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청컨대 이수악을 수금(囚禁)하고, 각별히 명백하게 핵실하여 율(律)에 의하여 감단(勘斷)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신명인(申命仁)은 일찍이 영곤(嶺閫)684) 에 임명되자, 오로지 탐도(貪饕)만 일삼았으며, 본직(本職)에 제수되어서는 또 이전의 습관을 계속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12월 26일 정축
황감제술(黃柑製述)에 장원한 진사(進士) 임정(任珽)에게 명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기근(饑饉)이 거듭 이르러 백성이 곤궁하고 피폐하니, 오늘의 급무(急務)는 마땅히 민심을 수습(收拾)하는 것으로 제일의 뜻을 삼아야 하는데, 민심을 수습하는 계책은 요역을 덜어 주고 부세를 가볍게 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제도(諸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금년에 재해가 가장 심하게 미친 고을은 차례로 등급을 구별하여 명년 봄의 조세(租稅)를 혹은 그 절반을 견감(蠲減)하거나 혹은 3분의 1을 견감(蠲減)하여 민심(民心)을 위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재령 군수(載寧郡守) 유만춘(柳萬春)은 부임한 이래로 한 가지도 착한 일을 한 정상은 없으며, 비루하고 잗단 거동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경내(境內)의 사비(私婢)를 관아 안에 데려다 두고는 말하는 것은 모두 따르고, 또 이성(李姓)의 토호(土豪)와 안팎으로 부동(符同)하여 뇌물을 공공연히 행하여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는데, 말단(末端)의 두 가지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아뢰기를,
"홍치중(洪致中)이 간교하게 아첨한 정상은 당초에 대계(臺啓)에서 매우 엄중하게 이를 공척하였는데, 가볍게 벌하고는 오래지 않아서 갑자기 다시 서용(敍用)하기를 의논하니, 공의(公議)가 더욱 격렬하여져서 끝내 내버려 두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홍치중을 수용(收用)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마전 군수(麻田郡守) 박수의(朴守義)는 본시 간활(奸猾)한 사람으로서, 오로지 주구(誅求)하는 정사만 행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북보(北報)가 이르자, 양미(粮米) 10여 석(石)을 깊고 궁벽한 곳에 운반하여다 두고, 먼저 피란(避亂)할 계책을 삼으니, 한 경내의 백성이 이로 인하여 더욱 소요(騷擾)하였으며, 수선스럽고도 어지러운 근심이 인근 고을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였는데, 말단(末端)의 일만 그대로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승지(承旨) 이진유(李眞儒)가 주청하기를,
"신료(臣僚)를 인접(引接)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합니다. 우리 조정에는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이 있는데, 선조(先朝)에서는 빈청(賓廳)에서 한달에 세 차례 인견(引見)하였으나, 그래도 시일이 너무 뜬다 하여 여섯 차례로 고치었으니, 정사(政事)에 부지런한 뜻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더욱 본받아야 할 것인데, 어제 대신(大臣)이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으나, 후일(後日)에 등대(登對)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조정에 사람들이 가득 찼으니, 조회에 모이고 또 돌아갔네,’라고 하였으니, 그 보다 듣는 데 있어서는 진실로 결망(缺望)됨이 있습니다. 또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접할 때가 많고 현사 대부(賢士大夫)를 접할 때가 적으니, 명왕(明王)이 경계할 바일 뿐만 아니라, 대신(大臣)이 이미 모였다가 다시 돌아간 것 또한 예경(禮敬)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진유(李眞儒)가 아뢰기를,
"소장(疏章)에 비지(批旨)를 내리지 않는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혹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고서 죽은 자도 있고, 혹은 세월이 흐르고 사물이 변천해서 논(論)할 수 없는 것 또한 있습니다. 묘당(廟堂)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면, 거의 1백여 장에 이를 것이니, 그 가운데에서 초출(抄出)하여 써 들이게 하는 것이 혹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28일 기묘
구명규(具命奎)를 공산 현감(公山縣監)으로 삼았다. 구명규는 전에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 이광좌(李光佐)를 상소(上疏)하여 탄핵(彈劾)하였는데, 그가 인피(引避)하자, 추보(追報)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논하며 의리(義理)가 회색(晦塞)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공의(公議)가 그르게 여겼으므로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구명규는 어리석고 미련하니, 박필몽(朴弼夢)의 무리를 붙좇는 것이 그들에게 구사(驅使)당한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의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인재(人才)의 별천(別薦)을 행하되, 내직(內職)으로는 시임(時任)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육경(六卿)·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일찍이 비국 당상과 장임(將任)을 지낸 자와, 외직(外職)으로는 양도(兩都)의 유수(留守), 제도(諸道)의 감사(監司)·병사(兵使)·통제사(統制使)에게 모두 각각 3인을 천거하게 하고, 학행(學行)·재국(才局)·지략(智略)·담용(膽勇)으로 천목(薦目)을 삼을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날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암행 어사(暗行御史)를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에 나누어 보내어 암행(暗行)하며 염문(廉問)하고, 출도(出道)하여 감진(監賑)하기를 청하였는데, 신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방백(方伯)은 한 도의 진정(賑政)을 주관하는데, 또 어사(御史)로 하여금 겸하여 관장하게 하면, 권한이 나뉘어져서 전일(專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또 수령이 진곡(賑穀)을 요리(料理)할 즈음에 만약 염찰(廉察)하는 일이 있게 되면 두렵고 꺼리어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니, 우선 진정(賑政)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에 보내어서 그 이치(吏治)의 득실과 진정(賑政)의 우열을 살피게 할 것이며, 돌아오는 길에 군기(軍器)를 점시(點視)하며, 재주가 있으면서도 침륜(沈淪)685) 된 사람을 찾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영중추(領中樞) 김우항(金宇杭)이 거처하는 정사(亭舍)는 아주 높고 몹시 추워서 노인(老人)이 거처(居處)하기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유시를 내려 개석(開釋)하셔서 도성(都城)으로 들어와 조섭하게 하소서. 국구(國舅)에게 의정(議政)을 추증(追贈)하는 것은 비록 고례(古例)가 아니지만, 선조(先朝)에서 광성(光城)686) ·여양(驪陽)687) 에게 모두 의정(議政)을 추증하여 이미 근규(近規)를 이루었으니, 청컨대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에게도 의정을 추증하소서. 선조(先朝)의 위양(渭陽)688) 의 친척으로 단지 김석연(金錫衍) 한 사람만 있으니, 청컨대 우대(優待)를 더하소서. 서추(西樞)의 산질(散秩)로 비록 병들어 숙사(肅謝)는 하지 못하더라도 매달 늠록(廩祿)을 반급하고, 특별히 약물(藥物)을 내려 주시어 돈친(敦親)하는 덕(德)을 빛내소서. 영원 부부인(靈原府夫人)이 상화(喪禍)가 있은 이래로 가사(家事)가 영락하여 궁핍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월름(月廩)을 주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강원도(江原道)에 세 차례나 큰 눈이 내려 고갯길이 막히고, 개천과 우물이 메말라서 백성이 모두 눈[雪]을 취하여 밥을 지었다.
12월 29일 경진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가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에 내년 봄의 조세(租稅)를 견감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대신(大臣)과 탁지(度支)689) 에서 성명(成命)을 정침하기를 주청(奏請)하자, 이로써 인피(引避)하였는데, 명하여 사직(辭職)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서종하가 퇴대(退待)하였다.
경상도(慶尙道) 금산(金山) 등 네 고을에 지진(地震)이 일어났고, 천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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