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1권, 경종 3년 1723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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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신사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제도(諸道)의 장문(狀聞)이 모두 마음 아프지 아니함이 없다. 근년 이래로 기근(饑饉)이 거듭 닥친데다가 농사가 또 흉년이라 하니, 금의 옥식(錦衣玉食)이 편치 않아 밤이나 낮이나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경외(京外)의 저축도 이미 바닥이 났다 하니, 생각이 이에 미치자, 차라리 잠이나 들어 꼼짝도 말았으면 싶다. 내가 이제 묘당(廟堂)과 함께 황정(荒政)에 대해 의논하고 궁구하여 우리 백성을 되살아나게 할 계책을 마련하고 있으나,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어 떠도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니, 약간의 저치미(儲置米)로 장차 어떻게 구제하고 약간의 고르지 못한 군사로 장차 어떻게 나라를 비어(備禦)할 수 있겠는가? 오늘을 위한 계책으로는 바른 말을 받아들이고 좋은 방도를 물어서 나라를 위태로와지기 전에 보전하고 정치를 혼란해지기 전에 제어하는 것인즉, 이 어찌 화기(和氣)를 이끌어 맞아들이는 길이 아니겠는가? 옛적에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그냥 대(代)를 이은 보통의 군주(君主)였다 하나, 화창한 봄이면 진휼(賑恤)할 것을 의논하였고,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면서도 몸소 병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은 마음이 사륜(絲綸)001)  의 내용에 애연하게 나타났다. 세수(歲首)에는 언제나 권농(勸農)의 교서를 내렸으나, 한갓 형식적일 뿐이었고 실효(實効)는 전혀 없었다. 슬프게도 나의 백성들이 굶주려 부황이 든 나머지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차자를 양육하며 종신토록 배불리 먹는 즐거움이 없으니,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잊고 밥을 먹어도 맛을 잊는다. 말이 이에 미치니, 절로 머리가 아파오고 얼굴이 찌푸려져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으면 싶다. 나의 죄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참상을 면하게 하려 하는데, 문득 한 마디 말이 있어 북쪽에서 자문(咨文)이 난데없이 들이닥치고 와언(訛言)002)  이 떼를 지어 일어나고 있다. 화복(禍福)과 이해(利害)는 멀리서 예측하기 어려우나, 음우(陰雨)에 대비하는 계책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가 없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는 항상 망한다.’는 말은 바로 오늘날의 일을 가리킨 것이다. 전날 발표하지 않았던 것을 발표하여 온축(蘊蓄)해 두었던 자강(自强)의 계책을 모두 펼쳐 보이라. 이것이 곧 내가 구구하게 바라는 바이니, 다시 상량(商量)을 더하고 팔도(八道)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도 또한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이때 대소 신료들이 정조(正朝)의 진하(陳賀) 때문에 바야흐로 대정(大庭)에 함께 모여 있었는데, 사륜(絲綸)이 내려지자 모두들 깜짝 놀라며 보았고, 진작(振作)된 새로운 정치를 볼 것을 희망하였다.

 

유간(柳諫)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은 비록 명문 벌족(名門閥族)의 출신이기는 하지만, 일찍이 명망을 쌓지 못하였습니다. 승진하고 발탁하는 것이 명분 없어 여론(輿論)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월 2일 임오

유시(酉時)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무과(武科)의 규칙은 마땅히 그때에 가서 계하(啓下)하는 것이나, 외방(外方)의 거자(擧子)들은 어떤 기예(技藝)에 응시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그 재예(才藝)의 장단도 헤아리지 않은 채 경중(京中)으로 분답하게 모여드니, 주객(主客)이 다 피곤하게 됩니다. 이번 과거의 규칙을 청컨대 미리 계하하여, 그 기예를 헤아려 올라올 수 있게 함으로써 그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3일 계미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환관(宦官)은 황의(黃衣)를 입고 늠료(廩料)를 먹으며 문을 지키고 쇄소(灑掃)003)  하는 데 불과할 뿐인데, 내관(內官) 최홍(崔泓)이 군부(君父)를 거스리니, 극히 무상(無狀)하다.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처단하라."
하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전후에 걸쳐 내관의 일 때문에 엄한 하교를 잡아다 다스린 일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마는, 필경에는 감죄(勘罪)한 것이 매번 실상이 없는 데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아마도 징계하여 다스리는 방도가 아닌 듯합니다. 최홍이 범한 바가 그 경중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군부를 거스른 죄로 다스린다는 것은 중대한 데 관계될 것 같으니, 마땅히 상량(商量)을 더하여 적당한 데로 귀착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의 발락(發落)004)  이 없었다. 임금이 또 사관(史官) 신치운(申致雲)의 걸음걸이가 느려서 자못 거만스런 모습이 있다 하여 처음에는 파직(罷職)을 명하였다가 다시 잡아다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진유가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가 공사를 품달하여 재가한 뒤 옥당관(玉堂官) 이세덕(李世德)이 《강목(綱目)》을 강(講)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이세덕이 검박함을 숭상하고 용도를 절약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정사를 행하는 도리를 갖추어 아뢰고, 이진유도 계속 진달한 바가 있었다. 임금이 지난날 빈청(賓廳)을 인견(引見)했을 때 옥당에서 입시하지 않았다며 엄교(嚴敎)를 내려 이세덕을 잡아다 추문(推問)하라고 하니, 이진유가 말하기를,
"지난날 빈청을 인견하신 것은 곧 청대(請對)005)  였고, 일차(日次)006)  가 아니었습니다. 청대는 삼사(三司)가 입시하는 규정이 없는데, 이 때문에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실로 과중(過重)합니다. 청컨대 그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역시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또 걸음걸이가 느리다며 옥당관 이현장(李顯章)을 추고(推考)하라고 하교하였다.

 

1월 4일 갑신

사간(司諫) 이진순(李眞淳)이 전(前) 판서(判書) 홍치중(洪致中)의 계사(啓辭)에 이론(異論)을 제기하고, 인피(引避)하며 이르기를,
"홍치중의 평소 말과 의논은 지나치게 모가 난 일이 없고, 전날의 처사(處事)도 또한 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직에 나와 직책을 맡았을 때 장처(長處)도 없지 않았는데, 탄핵을 당해 침폐(沈廢)된 지 시일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차 분별하여 수용(收用)하려는 것 역시 성대(聖代)의 관후(寬厚)한 뜻에서 나왔는데, 이번에 대계(臺啓)007)  가 버텨 마지 않습니다.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으며 교활하고 간사하다.’는 등의 제목(題目)에 이르러서는 쓴 말이 지나치게 심각하여, 사람을 논(論)하되 평서(平恕)로 한다는 도리가 아주 부족하니, 구차하게 함께 참여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장령(掌令) 유간(柳諫)이 처치(處置)하여 체직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5일 을유

진시(辰時)에서 오시(午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나아가 말하기를,
"삼가 세수(歲首)의 비망(備忘)을 보았더니, 말씀의 뜻이 측달(惻怛)하였습니다. 무릇 신린(臣隣)으로서 누군들 감격하고 용동(聳動)하지 않겠습니까? 성교 중에서도 주진(賙賑)과 비어(備禦)의 방도를 몹시 걱정해 마지 아니하셨는데, 오늘날 급무로써 어찌 이 두 가지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는 항상 망하게 된다.’는 깨우침에 이르러서는 연안(宴安)을 짐독(鴆毒)008)  에 비유하신 경계를 볼 수가 있으며, 어려움이 많으면 거의 나라를 일으키는 아름다움을 점친 것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이 한 생각을 연충(淵衷)009)  에 깊이 간직하시어 조금이라도 중간에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세덕(李世德)이 청대(請對)에 불참한 것은 본래 그의 죄가 아니며, 신치운(申致雲)이 감옥에 갇힌 것은 끝내 관대함이 부족합니다. 청컨대 소석(疏釋)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말하기를,
"조참(朝參)은 비록 성대한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 날마다 강연(講筵)을 열어서 자주 유신(儒臣)을 접하시는 것만 못합니다. 비단 계옥(啓沃)010)  의 유익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民間)의 질고(疾苦)와 이치(吏治)의 득실(得失)도 또한 조용히 토론(討論)할 수 있으니, 수제 치평(修齊治平)의 길이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아뢰기를,
"최홍(崔泓)의 죄명(罪名)의 경중은 작정(酌定)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청컨대 그 율(律)을 비의(比擬)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고신(告身)을 빼앗으라고 명했다. 진위 정사(陳慰正使)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이 공화(公貨)를 행중(行中)에 빌려 줄 것을 청하자, 이태좌(李台佐)가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일찍이 정축년011)  에 연경(燕京)에 봉사(奉使)했을 때 맡은 바 일이 봉전(封典)이란 중대한 일이었는데도 가지고 갔던 공화를 쓰지 않고 마침내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최석정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개(使价)012)  가 은화(銀貨)를 많이 휴대하면 모욕을 당하기 꼭 알맞다. 만약 맨손에 채찍만 잡고 간다면 저들도 또한 요구한 바가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봉사의 사체를 안다고 이를 만합니다. 이번은 다만 진위(陳慰)하기 위해 진향(進香)할 뿐이니 돈을 써야 할 우려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은(銀) 1천 냥을 획급(劃給)했다가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쓰고 쓰지 않으면 도로 가지고 오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최석항도 그 의논을 따르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장령(掌令) 유간(柳諫)과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 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희조(李喜朝)를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자는 일에 대해 김시엽과 이진유(李眞儒)가 극력 윤허(允許)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드디어 그대로 따랐다. 또 김보택(金普澤)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할 것과 이성채(李星彩) 부자(父子)를 먼 곳으로 정배(定配)할 것과 순천(順天)과 여수(麗水)의 현(縣)을 폐지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방편을 따라 변통(變通)하게 할 것과 이수악(李壽岳)을 수금(囚禁)하여 명백하게 핵실(覈實)할 것과 남병사(南兵使) 신명인(申命仁)을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말 것 등의 일을 윤허하였다. 이진유가 또 말하기를,
"김춘택(金春澤)의 여러 아우와 자질(子姪)들을 한결같이 모두 섬으로 귀양보내자는 청은 마침 간원(諫院)에서 입시(入侍)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연계(連啓)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뜻에 비추어 본다면, 모두 빨리 윤종(允從)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윤허하였다.

 

1월 6일 병술

금부(禁府)의 의주(議奏)로 인해 김시발(金時發)·홍언도(洪彦度)·문덕린(文德麟)에게 형(刑)을 면제하고 의논하여 조처하라고 명하니, 정원(政院)에서 작환(繳還)하기를,
"김시발은 이적(頤賊)013)  의 사위로 왕부(王府)의 비첩(秘牒)을 함부로 뜯어보고 급히 전달해야만 하는 우졸(郵卒)을 구속하여 묶어두었습니다. 홍언도는 홍철인(洪哲人)을 숨겨두고 바야흐로 홍의인(洪義人)의 적소(謫所)에 갔다고 둘러대며 제멋대로 속이고 군주의 명령을 거역하였습니다. 문덕린은 희적(喜賊)014)  에게서 수탐(搜探)한 문서를 도사(都事)의 면전(面前)에서 애걸하며 사사롭게 돌려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죄상은 국옥(鞫獄)에 관계되는 것인데, 형을 면제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다시 엄한 형벌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7일 정해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밤 1경(一更)에 달무리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차자(箚子)를 올려 병세를 진달하고 하반(賀班)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하여 견책(譴責)을 청하였다. 또 잠계(箴戒)를 붙여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세수(歲首)에 권면하고 경계한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어찌 뜻을 더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희조(李喜朝)를 영암군(靈巖郡)에 귀양보냈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 춘향 대제(春享大祭)에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1월 8일 무자

권이진(權以鎭)을 승지(承旨)로, 이세덕(李世德)을 사간(司諫)으로, 이하원(李夏源)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수량(李遂良)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이성 현감(利城縣監) 송시징(宋時徵)은 본래 서쪽 변방의 비미(卑微)한 사람인데, 외람되게 자목(字牧)의 직임에 제수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정령(政令)을 게으름만 피우며 살펴보지 않고, 낮추고 높이고 조종하는 것을 오직 뇌물에 의해 처리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송시징의 일만 윤허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김춘택(金春澤)의 여러 아우와 자질(子姪)을 모두 섬에 유배시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마는, 그 중에는 나이가 차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수교(受敎) 가운데 역적(逆賊)에 연좌(緣坐)된 두세 살의 아이는 정배(定配)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종으로 삼는 자는 이 한정에 두지 아니한다는 문구(文句)가 있으니, 이것이 비록 심상(尋常)한 정배와는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율문(律文)에 이미 의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정배를 명하였다.

 

1월 9일 기축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가 가지고 갈 문서(文書)에다 강희(康熙) 62년으로 써 넣었습니다만, 지금은 새 황제(皇帝)가 연호(年號)를 개원(改元)하여 이미 등래(謄來)하였고 또 칙행(勅行)이 이미 박두하였으니, 조서(詔書)의 반포(頒布)는 사행(使行)이 강(江)을 건너기 전에 있을 듯합니다. 이미 개원한 것을 알았는데도, 계속 강희란 연호를 쓰는 것은 혹 탈을 잡힐 염려가 없지 아니합니다. 사행 문서에다 연호를 옹정(雍正) 원년(元年)으로 고쳐 써넣는 것이 합당할 것 같으니, 새 연호로 따로 한 문서를 갖추어서 사행에게 함께 부쳤다가 저들이 도착한 뒤 형세를 보아서 진정(進呈)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승지(承旨)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윤헌주(尹憲柱)가 저지른 장오(贓汚)·불법(不法)의 죄를 논했습니다마는, 윤헌주가 공사(供辭)에서 조목조목 발명(發明)했으니, 마땅히 조사를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한 번 본도(本道)의 사핵(査覈)을 거치고 나면 언제나 모두 얼음처럼 풀리고 말았는지라, 일찍이 선조(先朝) 때는 따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제주 목사(濟州牧使) 윤창형(尹昌亨)의 탐장(貪贓)을 안핵(按覈)한 바 있습니다. 지금 흉년을 당하여 따로 사성(使星)015)  을 보내는 것은 폐단이 있고, 북평사(北評使) 이명의(李明誼)가 바야흐로 도내(道內)에 있으니, 이내 안핵하는 직임을 차임(差任)하여 조사하는 일을 주관하게 한다면, 아마도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의만(李宜晩)이 회덕(懷德)·진잠(鎭岑)·서산(瑞山) 세 고을의 민막(民瘼)016)  을 장계(狀啓)로 진달하기를,
"회덕의 양호(良戶)는 2백 70인데, 군액(軍額)은 천(千)을 넘고, 진잠은 민정(民丁)은 겨우 2백인데도, 군액은 8백을 넘으며, 서산의 양호는 1천 2백인데 군액은 4천을 채우고 있습니다. 또 갖가지 미포(米布)의 포흠(逋欠)이 많기 때문에 백성들이 명령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유산(流散)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 궐액(闕額)을 백성은 많고 군정(軍丁)이 적은 고을로 이송(移送)하게 하소서. 그리고 혹 기유년017)   이후에 새로 나온 각색(各色)의 군보(軍保)를 삭감하거나 혹 이웃 고을의 양정(良丁)을 떼어 주어 옛날의 포흠진 미포(米布)를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기를,
"회덕은 공주(公州)와 청주(淸州)란 큰 고을과 더불어 경계를 접하고 있고, 두 고을의 양정은 조금 여유가 있으니, 본도(本道)의 감사로 하여금 적당하게 헤아려 회덕의 궐액을 공주와 청주의 두 고을로 이송하게 하고, 또 본도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으로 하여금 군관(軍官) 등의 잡색 명목(雜色名目)을 덜어내어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고을에서 이 세 고을의 궐액을 채워 보충하게 할 것이며, 또 서산의 거두지 못한 쌀 3백 석을 탕감하게 하소서."
하였다.

 

1월 10일 경인

밤 1경(一更)과 2경에 달무리하였다. 4경에 천둥이 울렸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니, 세제(世弟)가 어가(御駕)를 따랐다.

 

청국(淸國)의 등극 반사 칙사(登極頒赦勅使) 액화납(額和納)과 광복(廣福)이 나왔다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치문(馳聞)하였다.

 

김춘택(金春澤)의 여러 아우와 자질(子姪)을 전라도(全羅道)의 여러 섬에 나누어 정배(定配)하였다. 김춘택의 정상(情狀)은 온 나라 사람들이 지탄하는 바이니 병이 들지 않고도 제 스스로 죽어야 마땅하겠지만, 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무슨 미워할 것이 있겠는가? 역옥(逆獄)에 연좌(緣坐)된 것도 오히려 용서가 허락되는데, 지금 한결같이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流配)하니, 모자(母子)가 헤어지매 울부짖는 소리가 화기(和氣)를 범하였다.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겠는가? 이 논의를 창시한 자는 또한 불인(不仁)하다 할 것이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춘택처럼 음흉한 자가 제집 창 아래서 죽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지 아니함을 적이 괴이하게 여길 것인데, 지금 보건대 하늘이 과연 그 악함을 두텁게 하여 그 재앙을 더한 것이다. 만약 김춘택으로 하여금 일찍이 상형(常刑)을 받게 하여 그 자제(子弟)들이 대략이나마 악한 자는 반드시 화(禍)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였더라도, 그 화가 어찌 이와 같이 혹독하였겠는가? 합문(闔門)018)  의 음모를 부녀자들도 또한 알았을 것이니, 만약 한법(漢法)019)  으로 다스리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다 죽였을 것이니, 이번에 해도(海島)로 나누어 유배한 것도 또한 관대한 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 사람만이나마 법을 굽혀 용서함으로써 광성(光城)020)  의 제사를 주재하게 하여 하늘에 계신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혼령을 위로하게 했어야만 마땅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조정(朝廷)의 잘못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75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가족-친족(親族) / 역사-편사(編史)


[註 018] 합문(闔門) : 집안.[註 019] 한법(漢法) : 대역 부도(大逆不道)를 다스리는 한대(漢代)의 법률.[註 020] 광성(光城) :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춘택처럼 음흉한 자가 제집 창 아래서 죽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지 아니함을 적이 괴이하게 여길 것인데, 지금 보건대 하늘이 과연 그 악함을 두텁게 하여 그 재앙을 더한 것이다. 만약 김춘택으로 하여금 일찍이 상형(常刑)을 받게 하여 그 자제(子弟)들이 대략이나마 악한 자는 반드시 화(禍)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였더라도, 그 화가 어찌 이와 같이 혹독하였겠는가? 합문(闔門)018)  의 음모를 부녀자들도 또한 알았을 것이니, 만약 한법(漢法)019)  으로 다스리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다 죽였을 것이니, 이번에 해도(海島)로 나누어 유배한 것도 또한 관대한 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 사람만이나마 법을 굽혀 용서함으로써 광성(光城)020)  의 제사를 주재하게 하여 하늘에 계신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혼령을 위로하게 했어야만 마땅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조정(朝廷)의 잘못이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전례에 의거하여 따로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지 말고 평양(平壤)의 영위사(迎慰使)로 하여금 그대로 머물러 청사(淸使)를 기다렸다가 연례(宴禮)를 정감(停減)한데 대하여 사의(謝意)를 표하게 하는 뜻을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하유(下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11일 신묘

밤 1경(一更)부터 5경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진위사(陳慰使)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과 부사(副使) 김시환(金始煥)과 서장관(書狀官) 이승원(李承源) 등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선온(宣醞)하였다.

 

1월 12일 임진

매상(昧爽)으로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고, 밤 1경부터 5경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헌부(憲府)에서 【장령(掌令) 유간(柳諫)이다.】  전계(前啓)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문출 죄인(門黜罪人) 조영복(趙榮福)은 본래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루한 자로서 적집(賊集)021)  의 이웃에 살았는데, 아첨하여 복종해 섬기며 스스로 그 비굴함을 잊은 채 자신이 그의 시종(侍從)이 되어 손수 요강을 바쳤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그 비루함에 침을 뱉았습니다. 적집(賊集)이 사화(士禍)를 빚어내던 날에는 하나의 전령(傳令)하는 졸개가 되어, 감히 한 장의 소(疏)를 올려 선류(善類)를 얽어 해치려고 했으며, 심지어 두 현신(賢臣)의 선정(先正)이란 칭호까지 배척해 버릴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선정’이란 두 글자는 본시 아랫사람이 처음 만들어 쓴 말이 아니라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맨먼저 칭도(稱道)하신 성교(聖敎)이며 사림(士林)들이 받들어 따라 쓴 것이니, 또한 관작(官爵)처럼 주고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적집(賊集)이 정법(正法)되었고 선정이 설원(雪寃)한 뒤이니, 흉당(凶黨)에게 아첨하여 정인(正人)을 모해하던 무리로 하여금 하루라도 연곡(輦轂)022)   아래서 드러누워 숨을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의 소(疏)를 올려 진달하기를,
"내관(內官) 최홍(崔泓)의 죄는 무거운데 율(律)은 가벼우니, 청컨대 다시 감률(勘律)하게 해 주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판돈녕(判敦寧) 홍만조(洪萬朝)가 소(疏)를 올려 치사(致仕)하기를 구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3일 계사

매상(昧爽)으로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고, 오시(午時)부터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신시(申時)에는 햇무리하였는데, 좌이(左珥)가 있었고, 밤 1경(一更)부터 4경까지 달무리하였다.

 

1월 14일 갑오

사시(巳時)에서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고, 밤 1경부터 4경까지 달무리하였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을 등극 진하 정사(登極陳賀正使)로, 서명균(徐命均)을 부사(副使)로, 유만중(柳萬重)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또 정수기(鄭壽期)를 부응교(副應敎)로, 조익명(趙翼命)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명의(李明誼)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고, 박징빈(朴徵賓)을 출보(出補)하여 이성 현감(利城縣監)으로 삼았다. 박징빈은 특히 한 향곡(鄕曲)의 비천하고 자질구레한 무리일 뿐이었는데, 남의 사주(使嗾)를 받아 윤순(尹淳)을 논핵(論劾)하매 전혀 근거없는 일을 날조(揑造)하였고 오로지 모욕하는 것을 일삼았다. 당시 김일경(金一鏡)이 한창 기세(氣勢)를 올리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였고, 일대(一隊)의 청류(淸流)들은 은밀히 의논하면서도 감히 발설하지 못했는데, 김일경에게 빌붙은 자들이 기회를 타서 모함하고 알력을 일으켜 조정의 의논이 갈수록 더욱 어긋나고 있었다. 전관(銓官)이 척보(斥補)한 것은 그 뜻이 조정(調停)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나, 너무 느슨하게 처리한 데서 실수를 한 것이니, 어떻게 인심(人心)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옥당관 윤유(尹游)가 문의(文義)를 근거로 아뢰기를,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명언(李明彦)이 만부(灣府)023)  에 있을 때 대졸(代卒)을 세우고 시험삼아 둔전법(屯田法)을 시행했더니, 자못 거둔 바가 있었고, 만약 여러 해 시행한다면 족히 저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단 의주(義州)만이 아니라 변방의 고을로서 노는 빈 땅이 있고 겸하여 대군(待軍)으로 세울 자가 있을 경우 왕왕 이 법을 시행하여 변방의 곡식을 모은다면 음우(陰雨)에 대비하는 한가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그 편부(便否)를 상량(商量)하여 시험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군문(軍門)의 둔전(屯田)은 모두 민전(民田)에서 수세(收稅)하는 것인데, 혹 별장(別將)을 내보기도 하고 혹 장관(將官)을 보내기도 하여 가혹한 징수(徵收)로 백성들이 그 폐해(弊害)를 당하고 이(利)는 개인의 전대 속으로 돌아가니, 군문에는 도무지 도움되는 것이 없습니다. 또 수어(守禦)·총융(摠戎) 양청(兩廳)에서는 초군(哨軍)의 세초(歲抄)024)  를 이 무리에게 맡겨 두고 있으므로, 뇌물을 바치고 부탁을 받는 등 존탈(存頉)을 제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정(軍政)은 본래 이미 허술해졌는데다 각 고을에서 장정을 뽑을 때에 늘 서로 방애가 되는 것을 근심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장관 등의 무리를 보내어 세(稅)를 거두게 하지 말고, 세초도 모두 본관(本官)에게 맡겨서 실정에 따라 징세(徵稅)하도록 하며 궐액에 따라 메워 보충하게 하소서. 그러면 군문에도 손실이 없고 민폐(民弊)도 자못 제거될 것입니다. 이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확실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검덕(儉德)을 힘쓰고 밝혀서 몸소 솔선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오명신(吳命新)이 각로(各路)의 봉수(烽燧)가 허술한 폐단을 진달하고, 청하기를,
"때때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불시에 적간(摘奸)하고, 변상(邊上)의 봉수는 한 곳을 더 설치하되, 만약 급한 경보(警報)가 있을 때 본래 설치한 연대(煙臺)에서 혹시 거화(擧火)를 하지 못할 경우 가설(加設)한 곳에서 따로 경보하게 하면 응변(應變)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신품(申稟)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산 노루의 진상(進上)이 각 고을의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민간(民間)에서 값을 거두어서 주원(厨院)025)  의 이속(吏屬)에게 빚을 주는데,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청컨대 제도(諸道)로 하여금 죽은 것으로써 산 것을 대신하고 영구히 법식(法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承旨) 이진유(李眞儒)가 말하기를,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이 김동필(金東弼)의 소(疏)에 대한 비답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하여 내내 몸을 움츠린 채 엎드려 있습니다. 김일경에게 비록 병통(病痛)이 있기는 하나,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은 곧 그가 평소부터 쌓아온 바입니다. 김동필이 만약 사서(私書)의 한 대목을 가지고 그 혐의를 멀리할 수 없음을 논(論)한다면, 이는 실로 김일경이 착오한 실수라서 본시 불가할 것이 없으나, 지금 그의 평생을 들어 결단하되 탐오하고 혼탁하다 지목했고 또 문자(文字)를 따내어 꾸짖었으니, 김동필의 소는 진실로 무상(無狀)한 것입니다. 이미 이로 인해 견책을 받아 파면되었다면, 그 소는 답을 내릴 필요가 없으니, 청컨대 성상께서 도로 내어주시고 김일경의 소도 또한 즉시 비답을 내리시어 힘써 나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윤순(尹淳)이 신축년026)   겨울 김일경이 진소(陳疏)했을 때 마침 성묘(省墓)하러 간 것은 고의적으로 회피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그 뒤에 말하고 의논하는 사이에 또한 비방을 초래할 단서가 없지는 않았으나 거개 다 이는 본정(本情) 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징빈(朴徵賓)은 그의 평생을 들어 탄핵하였고 심지어 자질구레한 명목을 더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나도 몹시 옳지 못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개기(改紀)한 시초에 즈음하여 조정에서 화협(和協)에 힘쓰는 것이 마땅하거늘, 경박하고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난데없이 시끄러운 사단을 일으키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윤순의 문한(文翰)과 재망(才望)은 그 동류들 사이에서 훨씬 뛰어나니, 쉽게 얻지 못할 사람입니다. 공의(公議)가 이미 대계(臺啓)를 잘못이라 하고 있으니, 줄곧 폐기(廢棄)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 임금이 항상 편치 않아서 수답(酬答)에 권태로운 나머지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를 거개 다 유중(留中)027)  하였고, 혹은 몇 달을 지나도 답하지 않았다. 김동필이 소를 올려 김일경이 지은 교문(敎文)을 논한 일에 대해서도 또한 채 답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오히려 명백하게 통척(痛斥)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이진유가 구해(救解)하기에 급하여 도리어 그 소를 무상하다고 하면서 곧장 비답을 내리지 말고 도로 내 줄 것을 청하였으니, 그의 당(黨)을 두호하는 무엄한 버릇을 어찌 이루 성토(聲討)하겠는가?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병이 매우 심하여 상소(上疏)하여 사정을 진달하고, 그의 종손(從孫) 수찬(修撰) 정석오(鄭錫五)를 그 아들 정효선(鄭孝先)의 뒤를 잇게 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자 복계(覆啓)하기를,
"정효선 부처(夫妻)가 모두 죽었으므로, 이는 법(法)을 벗어난 일입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후사로 세우도록 명하였다.

 

어의(御醫)를 보내어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병을 보게 하고, 또 약물(藥物)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1월 15일 을미

밤 2경(二更)부터 4경까지 달무리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論)하기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박세정(朴世挺)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전혀 일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또 나이도 쇠모(衰耗)하여 구차하게 자리만 채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가렴 구주만 일삼고 융무(戎務)028)  는 팽개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어저께 서소문(西小門)에 자물쇠를 내린 뒤에 어떤 놈이 밤을 타서 때려부수고 자물쇠를 뽑아내어 거의 문이 열리기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발각되어 포청(捕廳)에서 지금 조사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수직(守直)하던 부장(部將)을 잡아 가두고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부장의 죄를 다스리는 일만 윤허하였다.

 

임금이 서총대(瑞葱臺)에서 내시사(內試射)를 행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전일상(田日祥)이 편전(片箭)에서 몰기(沒技)029)  하였으므로 가자(加資)하라 명하고, 황전(黃腆)이 유엽전(柳葉箭)에 수석을 차지했으므로 급제(及第)를 내리라 명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윤각(尹慤)은 여덟 차례, 유성추(柳星樞)는 여섯 차례를 형신(刑訊)을 더하였으나, 모두 앞서의 공초한 것과 가감(加減)이 없었다. 의계(議啓)하여 이르기를,
"유성추는 그 발명(發明)한 바가 의거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만, 윤각은 모든 증인이 다 죽어 계제(階梯)가 이미 끊어졌으니, 죽을 때까지 엄하게 국문(鞫問)하는 것은 또한 상례(常例)가 아닙니다. 청컨대 전례에 의거하여 작처(酌處)하되 감사(減死)하고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성복(趙聖復)을 일곱 차례 형신을 더하였으나 또한 앞서의 초사와 같았으므로, 의계하여 이르기를,
"누차 엄하게 형신했지만 이미 취복(就服)하지 아니하였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감사하고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는 것이 혹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備邊司)에서 학행(學行)·재국(才局)과 지략(智略)과 담용(膽勇)이 있어 장임(將任)을 감당할 자를 경재(卿宰) 이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로 하여금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의 건백(建白)으로 인한 것이었다.

 

1월 16일 병신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신시(申時)에는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그리고 밤 2경(二更)과 3경에는 달무리하였다.

 

오명항(吳命恒)을 승지(承旨)로, 윤순(尹淳)을 교리(校理)로, 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죄인(罪人) 조성복(趙聖復)·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의 작처(酌處)에 대한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며 이르기를,
"조성복의 소(疏)는 사흉(四凶)의 앞잡이가 되어 연차(聯箚)의 근저(根柢)가 되었으니, 그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나 털끝만큼도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윤각의 경우 총융청(摠戎廳) 은자(銀子) 3백 냥에 대한 설은 역적의 공초에 여러 번 발설된 것으로서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았습니다. 유성추의 경우 새로 들어와 많이 내어보낸 정상은 김성절(金盛節)의 바친 초사(招辭)에 나온 것으로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근래 국좌(鞫坐)가 정폐(停廢)된 것 때문에 해를 넘기도록 편히 누워 쉬고 있습니다. 지금 한 번 신문한 뒤 곧장 작처(酌處)를 청하였으니, 뭇사람의 심정을 크게 거스른 것입니다."
하고, 이어 사간(司諫) 이세덕(李世德)과 장령(掌令) 유간(柳諫)은 법에 의거하여 고집해 다투지 못한 과실을 논하며, 모두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말단의 일만 윤허하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승지 이세최(李世最)가 여러 신하들이 패초(牌招)를 어기는 폐단을 갖추어 진달하고, 임금이 혹은 파직(罷職)을 명하고 혹은 금추(禁推)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월 17일 정유

밤 2경(二更)부터 5경까지 달무리하였다.

 

간원(諫院)에서 【헌납(獻納) 권익관(權益寬)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집(頤集)030)  과 여러 역적들은 오랫동안 국병(國柄)를 도적질하고는 오로지 같은 무리들을 감싸고 당여(黨與)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일삼았는데, 복법(伏法)된 뒤에 이르러서는 그 복심(腹心)과 혈당(血黨)들이 우러러 바라보던 자를 잃게 되어 은밀히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화(禍)를 즐기고 난(亂)을 생각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아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문출 죄인(門黜罪人) 김재로(金在魯)·전(前) 도승지(都承旨) 신사철(申思喆)·전 대장(大將) 장붕익(張鵬翼)·전 부사(府使) 김취로(金取魯)·전 사간(司諫) 김고(金槹)·전 현감(縣監) 김영행(金令行)·전 경력(經歷) 김희로(金希魯)·전 경력 강욱(姜頊)·별제(別提) 구정훈(具鼎勳) 등은 온 가족이 시골로 내려갔는데도 자신은 서울에 엎드려 있고, 혹은 가마를 타고 자취를 숨기며, 왕래하면서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혹은 부실(富室)로서 재물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고 혹은 최복(縗服)031)  의 몸으로 가만히 은밀한 자리에 참여하는가 하면 어두운 밤을 타고 회합하는 등 그 정적(情跡)이 은밀하여 여정(輿情)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참으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북쪽에서 자문(咨文)이 오는 것을 빙자하여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고 이리저리 전파시키며 중외(中外)를 선동하니, 근래 서울의 소동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온 것입니다. 대개 나라를 원망하고 난(亂)을 다행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먼저 민정(民情)을 동요시키려고 하니, 그 정상(情狀)의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가 지난달 16인과 더불어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간악한 싹을 미리 꺾는 일이야말로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북쪽으로 귀양보내는 것이 오늘날 정사의 급무입니다. 청컨대 김재로 등을 모두 극변(極邊)의 먼 곳으로 귀양보내되, 즉일(卽日)로 압송(押送)하여 화(禍)의 근원을 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조흡(趙洽)을 경흥부(慶興府)에 정배(定配)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흡이 여러 적(賊)들을 발고(發告)하여 흉모(凶謀)가 더욱 드러나게 하였고, 또 처음에 죽음을 용서하는 것으로 허락하였기 때문에 조가(朝家)에서 실신(失信)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 특별히 감사(減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난만(爛漫)하게 역모(逆謀)에 동참했고, 이른바 발고하였다는 것도 취수(就囚)032)                          된 뒤에 있었던 것이었은즉, 이는 죽음 가운데서 생(生)을 구하는 계책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며 자신(自新)033)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정절(情節)을 논한다면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목을 벤다고 하더라도 본시 아까울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군의(群議)가 어긋남을 불러왔고 또한 후일에 법으로 삼게 할 수도 없었던 까닭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76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편사(編史)


[註 032]              취수(就囚) : 옥에 갇힘.[註 033]              자신(自新) : 허물을 고치고 새 길로 들어섬.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흡이 여러 적(賊)들을 발고(發告)하여 흉모(凶謀)가 더욱 드러나게 하였고, 또 처음에 죽음을 용서하는 것으로 허락하였기 때문에 조가(朝家)에서 실신(失信)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 특별히 감사(減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난만(爛漫)하게 역모(逆謀)에 동참했고, 이른바 발고하였다는 것도 취수(就囚)032)                          된 뒤에 있었던 것이었은즉, 이는 죽음 가운데서 생(生)을 구하는 계책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며 자신(自新)033)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정절(情節)을 논한다면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목을 벤다고 하더라도 본시 아까울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군의(群議)가 어긋남을 불러왔고 또한 후일에 법으로 삼게 할 수도 없었던 까닭이다."

 

원접사(遠接使)가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서울에 들어온 뒤에 일곱 차례의 연향(宴享)을 감하려고 도모한 것을 칙사(勅使)에게 탐문하게 하였는데, 저들이 상(喪)을 당하였기 때문에 짐짓 그렇게 하는 것으로 말하였더니, 칙사가 말하기를,
"대국(大國)에서는 27일 만에 제복(除服)한 뒤에는 평상시처럼 풍악을 사용하고, 연향을 베푸는 것도 조금도 방해될 것이 없다. 다만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경외(京外)의 연향은 이미 감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새 황제께서 만약 연향의 예절(禮節)을 물으실 경우, 전혀 본 바가 없이 돌아가게 되면, 응대(應對)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다만 관소(館所)에 베풀고 친림(親臨)하여 연향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러한 뜻으로 연접 도감(延接都監)에 이문(移文)하자, 연접 도감에서는 아뢰기를,
"청컨대 사옹원(司饔院)과 해당되는 각사(各司)에 분부하여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18일 무술

정계장(鄭啓章)을 장령(掌令)으로, 김시혁(金始㷜)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와 고(故) 우의정(右議政) 윤증(尹拯)에게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였다. 연신(筵臣)의 진청(陳請)에 의한 것이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헌납(獻納) 권익관(權益寬)도 또한 입시하였다. 승지 이진유(李眞儒)가 아뢰기를,
"지난날 소대 때 앞으로 가까이 와서 읽고 아뢰라고 명하셨는데, 혹 강토(講討)하는 데 불편함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로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권익관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단지 평안 병사(平安兵使) 윤오상(尹五商)의 파직(罷職)과 김재로(金在魯) 등을 극변(極邊)에 귀양보내는 일만 따랐고, 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의 계청은 정지하였다.

 

1월 19일 기해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박세정(朴世挺)에 대한 계청은 정지하였다.

 

김재로(金在魯)를 이산군(理山郡)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장기현(長鬐縣)으로, 장붕익(張鵬翼)을 종성부(鍾城府)로, 김취로(金取魯)를 울산부(蔚山府)로, 김고(金槹)를 경성부(鏡城府)로, 김영행(金令行)을 기장현(機張縣)으로, 김희로(金希魯)를 위원군(渭原郡)으로, 강욱(姜頊)을 삼수군(三水郡)으로, 구정훈(具鼎勳)을 동래부(東萊府)로 귀양보냈다. 이때 인심(人心)이 여전히 위의(危疑)하여 장임(將任)에 있는 자가 널리 형찰(詗察)을 더하여 왔는데, 지난 겨울에 16인에 대한 계달이 요행히 적중하였기 때문에 발계(發啓)한 대신(臺臣)은 스스로 자신의 공(功)으로 삼았고, 그의 무리가 혹은 과장(誇張)하여 마땅히 훈적(勳籍)에 올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권익관(權益寬)도 또 남의 지고(指告)를 받아서 아홉 사람을 찬배(竄配)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생판 근거없는 죄를 얽어서 증거를 잡아내지 못하였다. 김영행에 이르러서는 그 언의(言議)가 역당(逆黨)과는 전혀 상반되어 조태구(趙泰耉)의 신축년034)   사업을 경앙(景仰)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수작(酬酢)하였으니, 이에서도 그 허망한 일단(一端)이 이미 나타난 것이다. 또 풍설을 선동하였다고 말한 것은 더욱더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조정(朝廷)이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고 겁을 내어 백성의 뜻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 허물을 때를 잃은 자에게 돌리니, 어찌 심히 가소롭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많이 억울하게 여기면서도 그 날카로운 칼날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밖에 말을 내는 자가 없었으니, 여기에서 시세(時勢)의 위험하고 두려움을 알 수 있다.

 

1월 20일 경자

윤연(尹㝚)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지난 12월에 금산(金山) 등지에서 뇌동(雷動)과 지진(地震)이 있었다는 것을 장계(狀啓)로 알렸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1월 21일 신축

청(淸)나라 사신 액화납(額和納)·광복(廣福)이 서울에 들어와서 옹정(雍正) 원년(元年)의 삭(朔)을 반포하였다. 임금이 칙사를 서교(西郊)에서 맞고, 환궁(還宮)하여 조칙(詔勅)을 받았다. 접견(接見) 때 상칙(上勅) 액화납이 큰 소리로 부르짖고 어지러운 말투로 머리를 흔들며 손을 휘저어 행동거지가 상도(常度)에 어긋나니, 보는 이들이 놀랐다.

 

1월 22일 임인

명소(命召)035)  ·통부(通符)036)  를 다시 만들어 옹정(雍正)의 연호(年號)를 썼다. 옛 명소·통부는 다 불태웠다.

 

청나라 조서가 있었다 하여 진하(陳賀)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사면령(赦免令)을 내렸다. 백관(百官)에게 자급(資級)을 더하였다.

 

1월 23일 계묘

오명준(吳命峻)에게 자급(資級)을 올려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임금이 장차 관소(館所)에 친림(親臨)하여 잔치를 베풀려고 엄숙한 의장(儀裝)을 이미 갖추었는데 상칙(上勅)이 부칙(副勅)의 병이 있다는 핑계로 기필코 물러서 행하려고 하였다. 빈신(儐臣)들이 여러번 개유(開諭)를 더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고 날도 이미 저녁이 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상신(相臣)이 부득이 퇴정(退定)할 것을 품계(稟啓)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빈신이 역설(譯舌)을 엄하게 신칙하여 사리에 의거해 잘 개유하지 못하였다 하여 빈신은 추고(推考)하고 차비 역관(差備譯官)은 무겁게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4일 갑진

부칙(副勅)이 동국(東國)의 시부(詩賦)·책문(策文) 문체(文體)를 보기를 요구하므로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책(策)하나와 부(賦) 2편과 시(詩) 3수(首)를 초선(抄選)하여 보이게 하니,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천도책(天道策)과, 민제인(閔齊仁)의 백마강부(白馬江賦),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칠석부(七夕賦)와, 고(故) 영상(領相) 이항복(李恒福)의 읍송거시재복아(泣送去時在腹兒)와 김창흡(金昌翕)의 와념소유언(臥念少游言)과 이세정(李世楨)의 답조낙모(答嘲落帽)의 시였다. 낙모(落帽)는 곧 이세정이 과장(科場)에서 손을 빌린 것인데, 세상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무고 죄인(誣告罪人) 권진성(權盡性)이 복주(伏誅)되었다. 권진성은 고(故) 상신(相臣) 권상하(權尙夏)의 종손(從孫)이다. 몸가짐이 패악(悖惡)하여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였고 어보(御寶)를 위조(僞造)하여 읍옥(邑獄)에 수감(收監)되었는데, 상변(上變)을 칭탁하므로 옮겨 가두고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변서(告變書) 속에 있는 말로 끄집어 내어 묻기를,
"역모(逆謀)를 한 자는 누구이며, 흉인(凶人)의 글 두 장은 어떤 사람이 쓴 것인가? 그리고 글 가운데 사연은 어떤 것인가? 명록(名錄)이란 어떠한 명록이며 무슨 까닭으로 형리(刑吏)와 아노(衙奴)에게 빼앗겼는가? 그리고 아노는 어느 고을 수령의 종이더냐? 모두 일일이 바른 대로 불어라."
하니, 권진성이 공초(供招)하기를,
"병술년037)   11월에 청풍 부사(淸風府使) 심정보(沈廷輔)가 김무정(金武貞)을 시켜 만나보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노론(老論)이 미리 화(禍)를 멀리하고 몸을 안전하게 할 계책으로, 이건명(李健命)이 서신으로 나에게 권유하여 바야흐로 독(毒)을 넣는 것과 자객(刺客)을 쓰는 것과 군사를 일으키는 것 등 세 가지 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하고, 심정보가 손수 은(銀)은 낸 각인(各人)의 명록(名錄)을 써서 제가 상경(上京)하는 길에 부탁하였으나, 제 자신이 위조의 죄에 빠져 회덕현(懷德縣) 옥(獄)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형리 박필명(朴必明)이 아노(衙奴)와 더불어 주쉬(主倅)의 명령이라 칭탁하고 문서(文書)를 수탐(搜探)해 갔는데, 본쉬는 곧 조정강(趙正綱)입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여 이르기를,
"심정보(沈廷輔)가 그가 어보(御寶)를 위조한 일을 적발한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인데, 혐의 때문에 발고하여 곧 나문(拿問)을 청한다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하고, 먼저 박필명을 잡아다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였다. 박필명에게 공초를 받은 뒤 다시 권진성을 추문(推問)하고, 면질(面質)시키니 권진성이 말이 막혔다. 형벌을 더하니 드디어 무고(誣告)임을 자복(自服)하였다. 이에 결안(結案)하기를,
"심정보가 청풍 부사(淸風府使)가 되었을 때 저의 어보를 위조한 죄가 발각되어 옥사가 이루어졌고 사지(死地)에 빠졌으므로, 이 때문에 혐의를 품고 죽음 속에서 살길을 구하는 계책으로 무고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박필명은 그 당시 형리(刑吏)로서 옥중에 출입하였고 본쉬(本倅)였던 조정강은 이미 사망하여 빙문(憑問)할 계제(階梯)가 없어서 문서를 찾아내 갔다는 것을 박필명에게 미루어대어 심정보를 무고한 계책을 사실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이른바 명록(名錄)의 문서는 모두 지어낸 거짓말이며, 이른바 서찰(書札)과 처음 문초할 때에 공술한 바 심정보와 더불어 수작했다는 흉언(凶言) 또한 지어낸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038)  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으며, 박필명을 놓아 보냈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옥당관 오명신(吳命新)이 말하기를,
"옛부터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은 양로(養老)와 걸언(乞言)039)  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아조(我朝)의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친림(親臨)하셨으며, 왕비(王妃)께서도 명부 노인연(命婦老人宴)에 친림하셨습니다. 또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학(大學)에 친림하시어 양로연에서 걸언하신 것은 매우 훌륭하신 거조였습니다. 대개 노인에게 걸언하는 것은 노인이라 나이와 덕이 함께 높아서 반드시 아름다운 계책과 선한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는 나이와 지위가 모두 높은데 재야(在野)에 물러나 쉬고 있습니다. 만약 지성(至誠)으로 돈독히 부르신다면 아마도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겸하여 걸언하는 의미로 자주 일을 물어보시고 은혜롭게 양로하는 도리에도 유의(留意)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1월 25일 을사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차자(箚子)를 올려 인혐(引嫌)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국청(鞫廳)의 일이 오랫동안 지연되어 해를 넘겨도 끝나지 않아, 억지로 일어나 개좌(開坐)하고 작처(酌處)할 것을 청하였더니, 대장(臺章)이 과연 나오고, 이어 완의(完議)한 두 대신(臺臣)을 배척하였습니다. 의언(議讞)을 잘하지 못한 허물이 실제로 신(臣)에게 있는데도 견책(譴責)하는 말이 유독 대신(臺臣)에게 미쳤으니 부끄러움과 불안이 이에 더욱 깊습니다. 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서명균(徐命均)을 개차(改差)한 것도 또한 편안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조(該曹)에서 성명(成命)으로 인해 신에게 묻기에, 신은 처음 통정(通政)으로 자급(資級)을 올려 의망(擬望)하려 하였으나, 승진에 응할 사람이 바야흐로 전지(銓地)에 있었고, 마침 다른 당상(堂上)으로 행공(行公)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서명균을 수망(首望)에 올렸던 것입니다. 대개 출강(出彊)040)  하는 사람은 으레 호조(戶曹)의 자급을 붙여 보내기 때문이었습니다. 묘당(廟堂)에서의 의천(議薦)은 파산(罷散)과 해유(解由)041)  도 구애되지 않는데, 해조에서 미처 함께 품고하지 않아 구애받지 않는 전례(前例)를 마침내 폐각(廢閣)되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체차(遞差)하지 말도록 거듭 명하시어 구례(舊禮)를 그대로 보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이 안옥(按獄)한 것은 시종 한곁같았은즉, 나이 젊은 대관(臺官)의 말은 족히 입에 올릴 것이 못된다. 아랫 조항에 진달한 것은 일시적인 착오이며,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니, 서명균의 호참(戶參)은 그대로 맡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이번의 역옥(逆獄)이 비록 전에 없던 대옥(大獄)이기는 하나, 당초에 정탐(偵探)하여 적발한 일도 없고, 고변(告變)한 자도 또한 인연을 타고 상달(上達)한 사실도 없었으니, 실로 주장(主張)하고 지휘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 포도 대장(捕盜大將)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기록해 둘 만한 공로가 있습니다. 대개 칼과 은화(銀貨)는 곧 대단한 장물(贓物)인데, 이삼(李森)이 기략(機略)을 베풀어 찾아냈고, 신익하(申翊夏)도 또한 그 일에 동참하였으며, 또 삼수(三手)의 흉모(凶謀)도 거의 다 핵실(覈實)하여 밝혀 냈지만, 행약(行藥)에 대한 한 조항만은 미처 적발하지 못했습니다. 신익하가 기포(機捕)한 홍순택(洪舜澤)의 종 업봉(業奉)이란 자가 형신(刑訊)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저쪽에서 약을 판 사람의 성명(姓名)과 약의 형색(形色)을 말했기 때문에 홍순택도 또한 감히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 외에 다시 진달할 말이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절반은 승복(承服)한 것이어서 이로 인해 약에 대한 근거가 남김없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그 공은 진실로 작은 것이 아니니, 이 두 사람은 녹훈(錄勳)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인해 역절(逆節)의 근원을 핵실하게 되었으니 목호룡은 녹훈하지 않을 수 없으나, 여러 사람의 논의가 모두 한 사람만의 녹훈은 불가하다 하며, 또 지존(至尊)께서 단지 목호룡과 대면하여 맹세하시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니, 그 말도 또한 옳습니다. 우상(右相)이 계달한 대로 두 사람을 감훈(勘勳)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청에서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문서(文書)를 수탐(搜探)하게 하는 것은 상례(常例)입니다. 만약 죄인을 체포할 즈음에 수색하여 얻은 것이면 본시 족히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칼과 은화를 숨겨둔 것을 기략을 베풀어 찾아내어 백망(白望)으로 하여금 변명할 말도 필요없이 저절로 밝혀져 역절(逆節)이 완전히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백망이 비록 완강하게 버티다가 경폐(徑斃)하였지만, 그 또한 이르기를, ‘칼은 김용택(金龍澤)이 준 것이고 은(銀)도 또한 그가 손수 봉하고 표시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승복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어찌 포도 대장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최석항이 이르기를,
"만약 차례로 논한다면 이삼이 마땅히 일등(一等)을 차지할 것이요, 신익하(申翊夏)가 이등(二等) 목호룡은 삼등(三等)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진신(搢紳)들 사이에 모두 의논하는 말이 ‘기미(幾微)를 밝혀 사직을 보위(保衞)한 공은 스스로 돌아갈 곳이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사흉(四凶)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리던 날을 당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한 터럭과도 같았는데, 대신(大臣)이 의(義)로 항거하고 청대(請對)하여 재차 천위(天位)를 편안히 하였으니, 대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보전해 오늘이 있기를 바랐겠습니까? 마땅히 ‘병기 위사(炳幾衞社)로 훈호(勳號)를 삼고 모두 녹공(錄功)하는 속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두 포도 대장만으로 간략하게 감훈(勘勳)한다면, 이는 심히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대신은 기록하지 아니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자, 조태구가 그 외설(猥屑)함을 지척(持斥)하고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최석항이 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이진급(李眞伋)을 복과(復科)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태구가 이어 이돈(李墩)이 무고(誣告)를 당한 정상을 진달하고 오수원(吳遂元)도 일체(一體)로 복과하여 줄 것을 청하고, 최석항도 또 그의 억울함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의 하교(下敎)가 없었다. 승지(承旨)가 뒷날 연중(筵中)에서 다시 진품(陳稟)하자, 아울러 복과를 허락하였다. 최석항이 또 대신(大臣)의 차자(箚子) 및 여러 신하들의 소(疏)에 대해 즉시 비답(批答)을 내려 줄 것을 말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이번에 북자(北咨)가 나오면서 표식(表式)042)   다섯 건을 등사(謄寫)해 보냈는데, 하나는 인수 황태후(仁壽皇太后)에게 하례하는 표식입니다. 전례(前例)로 말씀드리자면, 태후(太后)에게는 성절(聖節)의 표문(表文)이 없었는데, 예부(禮部)에서 등사하여 보내 왔습니다. 또 황태후(皇太后)에게 존호(尊號)를 올린 뒤에는 단지 표식만을 보냈으니, 존호의 칙사는 반드시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며 단지 식(式)에 의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표문을 태후에게 올린 전례가 없었으니, 이번에 등사하여 보내 온 것은 전례에 어긋납니다. 태후의 성절(聖節)은 곧 3월 사행(使行) 때 왕복(往復)하는 것이 합당하나 너무 늦어진 듯합니다. 별도로 재자관(䝴咨官)을 보내서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고 전례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청컨대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자문을 지어 사행(使行)이 떠나기 전에 즉시 발송(發送)하게 하소서. 또 새 황제(皇帝)의 생일이 곧 10월 30일이니, 성절(聖節)·동지(冬至)·원조(元朝)의 하표 절사(賀表節使)를 9월에 발송하면, 시기에 맞추어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니, 이도 또한 따로 재자관을 보내어 머물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고(故) 참판(參判) 권규(權珪)는 신축년043)   변이 있던 날을 당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소(疏)를 올렸다가 형국(刑鞫)하라는 계달(啓達)까지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개기(改紀)초에 이르러 연이어 제명(除命)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다가 바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수립(樹立)한 바가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증(褒贈)을 더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최석항이 이어 아뢰고 조태구도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증직(贈職)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태억이 또 말하기를,
"신축년에 정대(庭對)를 파(罷)할 것을 의논할 때 삼사(三司)의 여러 사람들은 확 쏠리며 그대로 따랐으나, 전(前)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은 홀로 항거하고 따르지 않았으니, 진실로 수립함이 있다고 이를 말합니다. 또 일찍이 영읍(嶺邑) 수령으로 나가 치적이 드러났으니, 특별히 밝히고 거두어 장용(奬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이잠(李潛)은 고(故) 참판(參判) 이하진(李夏鎭)의 아들로, 평생 비분 강개한 기절(氣節)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소(疏)를 올려 군흉(群凶)이 전하(殿下)를 모해(謀害)하려는 정상을 진달하였는데, 심지어는 좌우(左右)에서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날 백망(白望)의 칼이 나오고 보니 이잠(李潛)의 말이 부절(符節)을 맞춘 것과 같습니다. 그가 사생(死生)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서 항언(抗言)한 절개는 비록 옛날의 진동(陳東)044)  ·구양철(歐陽澈)045)  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도 그 소를 읽어 보면 팔뚝을 걷고 격렬(激烈)한 느낌을 갖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소본(疏本)을 등사하여 올리게 하고 한 번 예람(睿覽)하신다면, 그의 충절(忠節)을 상상하여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포증(褒贈)의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물어보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마땅히 신설(伸雪)을 더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조태억이 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혹 이잠의 소가 사주를 받아서 화(禍)를 전가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시어 정국(庭鞫)까지 하기에 이르렀지만, 이잠은 조금도 피하거나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형장(刑杖) 아래서 죽었습니다. 선조께서 또한 어떻게 미리 이이명(李頤命) 등이 망군 부국(忘君負國)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것을 예측하셨겠습니까? 지금 와서 그의 말이 과연 징험되기에 이르렀으니, 원통하다고 일컫는 말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하니, 최석항이 말하기를,
"저군(儲君)046)  을 위해 자기 한 몸을 잊고 위호(衞護)한 사람을 신원(伸寃)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증직(贈職)까지 하는 것은 그 마땅한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좌윤(左尹) 김중기(金重器)가 말하기를,
"북로(北路)는 땅이 좁고 사람도 적은데, 이른바 내노(內奴)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노를 덜어내면 군액(軍額)을 채우기 어렵습니다. 일찍이 조정의 명령으로 인해 내노로서 속오(束伍)에 편입된 자를 파하여 감하고 각 고을로 하여금 그 대신할 사람을 뽑아 보충하게 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연습시킨 군사를 하루 아침에 다 덜어내니, 또한 매우 아깝습니다. 또 들으니 내노 공미(內奴貢米)의 대신하는 것을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에서 내사(內司)로 이송(移送)한다고 합니다. 내사는 당초 잃은 바도 없으나, 속오는 바로 군정(軍政)이란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이니, 내노에게 탈(頉)을 주는 것을 허용하지 말게 하고, 그대로 존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최석항도 그 말에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중기가 또 말하기를,
"평안 감영(平安監營)에서 전에 수포군(收布軍) 중에서 장건(壯健)한 자 8천 명을 가려 따로 편오(編伍)를 만들고, 돌아가며 입번(入番)하고 재주를 시험하여 시상(施賞)하였더니, 군사들이 건장해지고 재예도 정묘(精妙)해져서 한 방면을 감당할 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으니, 참으로 아깝습니다. 지금 만약 2천 명을 더 뽑아서 1만 명의 수효를 채우고 전처럼 돌아가며 재예를 시험하게 하여 완급(緩急)의 쓰임에 대비하게 한다면, 반드시 힘을 얻는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정계장(鄭啓章)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창락 찰방(昌樂察訪) 최익수(崔益秀)는 흉역(凶逆)의 지친(至親)으로서 음비(陰秘)한 일에 참섭(參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고, 우관(郵官)에 제수되어서는 오직 탐어(貪漁)만을 일삼았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6일 병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1월 27일 정미

훈호(勳號)를 찬(撰)하여 ‘수충 분의 갈성 효력 부사(輸忠奮義竭誠效力扶社)’라 하였다.

 

1월 28일 무신

헌부(憲府)에서 【장령(掌令) 정계장(鄭啓章)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기읍(畿邑)에서 칙사(勅使)의 지공(支供)을 빙자하여 백성들에게서 돈을 징렴(徵斂)하는데, 남는 것을 취하여 사사로이 써 하나의 이익을 노리는 소굴로 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금천 현감(衿川縣監) 정건주(鄭建柱)가 더욱 심하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옥당관 정수기(鄭壽期)가 말하기를,
"증(贈) 판서(判書) 박태보(朴泰輔)에게 선조(先朝) 때 비록 이미 증직(贈職)과 정려(旌閭)를 하였습니다마는, 유독 역명(易名)047)  의 은전이 아직 없습니다. 오두인(吳斗寅)과 이세화(李世華)는 모두 본직(本職)으로 증시(贈諡)하였으니, 이 세 사람은 다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포숭(褒崇)하는 방도에 있어서 또한 시호를 내리시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고(故) 참판(參判) 이세필(李世弼)은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예(禮)를 강(講)하는 데 전심(專心)하여 저술한 예설(禮說)이 권축(卷軸)을 이루었습니다. 선조(先朝) 때부터 여러 번 징소(徵召)를 더 했지만, 분수를 핑계하여 물러가 강호(江湖)에 병처(屛處)048)  하였습니다. 정유년049)  에 한번 소(疏)를 올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바를 말하자, 학사(學士)와 대부(大夫)들이 지금까지 기리고 사모하고 있습니다. 덕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본받는 도리로 응당 포상(褒尙)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시호를 내리게 하고 전조(銓曹)에서 증직(贈職)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승지(承旨) 이진유(李眞儒)가 또 치제(致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 그대로 따랐다. 이진유가 또 말하기를,
"고(故) 부수(副率) 김재해(金載海)는 일찍이 전하(殿下)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주연(胄筵)050)  에 출입(出入)하며 직접 《중용도설(中庸圖說)》을 올리자, 전하께서 문방(文房) 도구를 내리시고 법온(法醞)을 선사(宣賜)하며, 또 수찰(手札)도 내리시어 장유(奬諭)하심이 아울러 지극하였습니다. 적신(賊臣) 김운택(金雲澤)이 전하께 보익(輔翼)하는 신하가 있는 것을 몹시 꺼려 거짓을 얽어 탄핵하여 떠나게 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강관(講官)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랫동안 김재해를 보지 못했다.’고 하교(下敎)하셨으므로, 연신(筵臣)이 대조(大朝)께 진달(陳達)하여 다시 위사(衞司)의 직임을 제수하였던 것입니다. 김재해가 비록 명령에 응하지는 않았으나 지우(知遇)에 감격하였고, 정유년 이적(頤賊)051)  이 독대(獨對)하던 날 격앙(激昂)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면서 분연히 붓을 잡고 소(疏)를 초했던 것입니다. 그 곧은 말과 올바른 의논은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머리털을 곤두서게 하는데, 궁벽한 산에서 경서(經書)를 안고 뜻을 깊이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재해는 일찍이 이미 자의(諮議)에 통의(通擬)되었으니, 대헌(臺憲)의 직함을 증직하는 것이 포숭(褒崇)의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자교(慈敎)라 하여 하교(下敎)하기를,
"자전(慈殿)께 하는 각도(各道)의 진상(進上)은 중궁전(中宮殿) 때의 예(例)에 의하여 우선 그대로 감(減)할 일을 일찍이 이미 판하(判下)하였는데, 삭선(朔膳)의 가미(價米)는 내처 거론하지 못하였다. 이도 또한 일체(一體)로 감하여 마련(磨鍊)하는 일을 혜청(惠廳)에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1월 29일 기유

비국(備局)에서 흉년이 들었다 하여 제도(諸道)의 올해 봄에 시행할 수군과 육군의 조련 및 순점(巡點) 등의 일을 정지할 것을 아뢰었다.

 

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이진급(李眞伋)·오수원(吳遂元)을 복과(復科)하고 예관(禮官)을 보내고 고(故) 판서 이돈(李墩)에게 치제(致祭)하였다.

 

1월 30일 경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임어(臨御)하여 선농제(先農祭)에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윤행교(尹行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가 홍치중(洪致中)의 일로 인피(引避)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진순(李眞淳)과 김시혁(金始㷜)이 서로 이어 인피하였는데, 한 사람은 ‘내린 말이 지나치게 심각하다.’ 하였고, 한 사람은 ‘문자(文字)가 참각(憯刻)하다.’ 하였습니다. 무릇 홍치중은 겉으로 명류(名流)와의 교유(交遊)를 핑계대면서 안으로는 흉당(凶黨)과 복심(腹心)의 관계를 맺었으며, 우물쭈물하는 태도에 교묘하고, 추부(趨附)052)  하는 술법을 썼으니, 신(臣)의 계달(啓達)에 이른바 ‘교묘하고 약삭빠르고 간사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군부(君父)를 핍박하고 위협하는 의논에 앞장서서 입참(入參)하여 함께 홍계적(洪啓迪)처럼 음흉(陰凶)한 데로 돌아갔고, 천위(天位)가 동요(動搖)되는 변고(變故)에 수수 방관(袖手傍觀)하였는데도, 마침내 역괴(逆魁)에 의해 초탁(超擢)되었으니, 신의 계달에 이른바 ‘망군 부국(忘君負國)’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박벌(薄罰)을 내린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다시 분별해 쓰기를 의논하니, 대각(臺閣)에서 쟁집(爭執)하는 것은 그만둘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후(前後)의 우료(右僚)들이 오직 구해(救解)하는 것만으로써 가장 위대한 관건으로 삼고 있으니, 신은 평서(平恕)에 지나쳐서 언의(言議)를 이루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장령(掌令) 정계장(鄭啓章)이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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