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1권, 경종 3년 1723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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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신해

연접 도감 당상(延接都監堂上) 이태좌(李台佐)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상칙(上勅)은 곧 경자년053)  에 나왔던 자인데, 탐욕이 한정이 없어 그 요구하는 바를 반드시 경자년을 예(例)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대개 그 때는 산릉(山陵)에 조문을 드리는 일로 구색(求索)을 조종하였기 때문에 따로 준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는 또 통관(通官)이 얻은 은(銀)까지 억지로 빼앗았으니, 이미 사람의 도리로 책(責)할 수도 없으나 또한 말썽을 일으킬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고, 이어 역관(譯官)이 잘 주선하지 못한 죄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상칙과 부칙(副勅)에게 각각 별도로 천 금(千金)씩을 주겠습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오명항(吳命恒)이 아뢰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제두(鄭齊斗)가 소사(疏辭)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정관(政官)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통(變通)하여 체개(遞改)한 것은 유일(遺逸)을 후하게 예우(禮遇)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그 소에 대해 오랫동안 답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그 직(職)을 그대로 두고 상소의 비답에서 체직을 허락하시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이태좌도 계속하여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당초 체개(遞改)를 명령한 것이 실제로 유현(儒賢)을 예우(禮遇)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연신(筵臣)이 다시 그대로 둘 것을 청한 것은 마치 평범한 신료의 진퇴(進退)하는 것처럼 여김이 있었다. 이에 상하(上下)가 함께 실수하게 된 것이다.

 

2월 2일 임자

다시 이명언(李明彦)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2월 3일 계축

윤연(尹㝚)을 사간(司諫)으로, 남태징(南泰徵)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금천 현감(衿川縣監) 정건주(鄭建柱)에 대한 계달(啓達)은 정지하였다.

 

사직(司直) 이삼(李森)이 소(疏)를 올려 녹훈(錄勳)을 사양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맹부(盟府)의 원훈(元勳)은 실로 여론(輿論)을 따른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신광하(申光夏)를 금군 별장(禁軍別將)으로 삼았다.

 

2월 4일 갑인

청(淸)나라 사신이 경성(京城)을 떠나니,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하였다. 상칙(上勅)의 엄청난 욕심이 한정이 없어 온갖 방법으로 요구하고 일마다 말썽을 일으켰다. 경서(經書)를 요구하여 가지고는 부칙(副勅)의 책 모양과 장단(長短)을 비교하는가 하면, 역관(譯官)을 꾸짖어 연회의 예(禮)를 행하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며, 비(碑)054)  를 관람하는 행차에도 나오지 않았다. 먼저 예단(禮單)과 따로 주는 것을 요구하고 역배(譯輩)의 언어와 동정을 정찰하였으며, 행동거지가 경솔하여 편안히 앉아 있지 않았다. 또 별도로 준 은(銀)이 만(萬)의 수효에 차지 않는다고 크게 화를 내어 손으로 수역(首譯)을 치는 등 거조(擧措)가 해괴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연경(燕京)에 채 못미처 길에서 병으로 죽으니, 저쪽 사람들도 또한 시원하다 했다고 한다.

 

간원(諫院)에서 【헌납(獻納) 권익관(權益寬)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論)하기를,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宮人)이 여러 적(賊)과 화응(和應)하여 어선(御膳)에 독(毒)을 섞었다는 것은 김성절(金盛節)이 직접 공초(供招)한 바입니다. 일찍이 연주(筵奏)와 대계(臺啓)로 인하여 매번 조사해 내라는 비답을 내렸는데도 아직 출부(出付)하는 거조가 없어, 금달(禁闥)055)  의 주액(肘腋)056)   사이에 흉적(凶賊)이 가면을 쓰고 살고 있게 만들었습니다.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동안에도 화근(禍根)이 제거되지 않고 있으니, 종사(宗社)의 우환과 신인(神人)의 분노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김성절의 공초(供招)에서 이른바 ‘약을 진어하신 뒤에 누런 물을 토해냈다.’는 말은 약원(藥院)의 일과 서로 부합(符合)하니, 약을 쓴 일월(日月)을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이 비록 한두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직임(職任)과 관호(官號)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적을 끝까지 핵실하지 못한다면 신(臣)은 종사의 안위(安危)가 안정되지 못함이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김성의 궁인 중에서 의심스럽고 유사한 자는 모조리 국청(鞫廳)에 회부하고 그 정범(正犯)을 분명히 조사하여 쾌히 왕법(王法)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지난날 흉당(凶黨)들이 몰래 불궤(不軌)를 꾀할 적에 은전(銀錢)을 모으기를 도모하면서 백방(百方)으로 경영한 흔적이 왕왕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적술(賊述)057)  이 훈장(訓將)의 직임을 띠고 호조(戶曹)와 통의(通議)하여 관서(關西)의 전세(田稅)를 매득(買得)하고는 장교(將校) 조흥필(趙興弼)·석지견(石之堅)으로 하여금 그 일을 분장(分掌)하게 하고, 남는 돈은 적술이 사사로이 취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1천여 금을 철산 부사(鐵山府使) 이오(李悟)에게 전해 주어 은밀한 곳에 녹여 두었을 것이니, 분명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모두 잡아 국문하여 엄단(嚴斷)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2월 5일 을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절사(節使)를 9월에 보낼 것으로 정탈(定奪)하였습니다. 세 사신(使臣)을 겸해 보냄은 처음에 숭덕 황제(崇德皇帝)의 조지(詔旨)로 인한 것이라 하니, 전례에 의하여 정조(正朝)에 입송(入送)하되, 조지를 매거(枚擧)하여 저쪽에 이자(移咨)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이삼(李森)·신익하(申翊夏)가 훈록(勳錄)을 극력 사양한다면, 엄한 말로 책유(責諭)를 더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패초(牌招)를 명하였다. 조태구가 은례(恩禮)를 더하여 돈독하게 부를 것을 청하고,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가 또 예로써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와 진선(進善) 윤동수(尹東洙)를 초치(招致)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은 곧 선조(先朝)의 국구(國舅)이고 전하(殿下)께는 외가(外家)의 의(義)가 있습니다. 김춘택(金春澤)의 모든 아우와 자질(子姪)이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定配)되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광성 부원군의 차자(次子)는 죽었으나 처자(妻子)가 있으니, 우선 권도(權道)로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또 어린아이들과 출계(出繼)한 사람도 뒤섞여 정배된 것은 법(法)의 뜻에 어긋남이 있으니, 특별히 방환(放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의 부인(夫人)은 봉양할 사람이 없어 어렵게 살아가고 있으며,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부인도 상화(喪禍)를 당한 이래로 생계가 곤궁합니다. 모두 월름(月廩)을 계속해 주어서 고휼(顧恤)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집의(執義) 홍정필(洪廷弼)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論)하기를,
"흉역(凶逆) 이기지(李器之)의 아들 이봉형(李鳳馨)은 자폐(自斃)했다고 하지만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 당시 검험관(檢驗官)이 흉역의 친속(親屬)으로서 이웃 고을과 바꾸어서 거행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혹이 오랫동안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금번 구포(購捕)를 논계(論啓)하는 날을 당하여 더욱더 먼저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해당 검시관(檢屍官)을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핵실하소서.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익한(李翊漢)의 명론(名論)이 본래 가볍고 경력 또한 적어서 목민(牧民)의 작은 재주로는 비록 혹 일컬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道)를 살피는 중임(重任)은 마땅히 구차하게 제수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다. 이봉형이 거짓말로 죽었다고 속이고 종을 대신 검시(檢屍)하게 했다는 설이 낭자하게 전파되었다. 이것이 대계(臺啓)가 나온 까닭인데, 조사할 때에 이르러서는 분명하게 핵실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을사년058)  에 당인(黨人)들이 다시 들어오자 이이명(李頤命)의 아우 이익명(李益命)이 비로소 방자하게 소(疏)를 올려 이봉형이 망명(亡命)한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이봉형을 불러 보고 즉시 벼슬을 제수하였다. 사형수가 망명하고 시체를 바꾸어서 검험(檢驗)한 것은 전대에 없던 것으로 그 정절(情節)이 요악(妖惡)한데도, 발각된 뒤에 이미 능히 정법(正法)하지 못하고 도리어 은전(恩典)을 더하였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통제사(統制使) 신익하(申翊夏)가 또 소(疏)를 올려 훈록(勳錄)을 사양하니, 임금이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2월 6일 병진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문묘 석전(文廟釋奠)에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증광시(增廣試)의 감시(監試)를 베풀어서 생원(生員) 윤상백(尹尙白), 진사(進士) 오수엽(吳遂燁) 등 2백 명을 뽑았다.

 

동당 관시(東堂館試)는 으레 식당 도기(食堂到記)059)  가 3백 점에 준(准)한 자 50명을 취하여 왔는데, 작년 이후로 재유(齋儒)들이 흉소(凶疏)에 참섭(參涉)하였다 하여 일체 벌을 주었다. 성균관(成均館)에서 점수에 준하지 않은 자를 가려내어 관시(館試)에 응시를 허락하도록 품계(稟啓)하고 예조(禮曹)에서도 또 대신(大臣)과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영의정 조태구와 우의정 최석항이 의논하여 이뢰기를,
"그 계달에 의하여 변통(變通)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7일 정사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친히 사직 대제(社稷大祭)에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임금이 장차 친히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대신(大臣)의 진달(陳達)로 인해 섭행(攝行)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가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따뜻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개유하였다. 소가 들어온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므로, 대신(大臣)과 연신(筵臣)이 여러 차례 말하자 이제 비로소 비답을 내린 것이다."

 

2월 8일 무오

양사(兩司)에서 거듭 합계(合啓)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掌令) 정계장(鄭啓章)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흉적(凶賊) 임창(任敞)의 몇 해 전에 올린 한 장의 소(疏)는 비록 등철(登徹)되지는 않았다 하나, 그 소 가운데 차마 듣지 못하고 차마 말하지 못할 설화(說話)가 세상에 모두 전파(傳播)되어 흉역(凶逆)의 속셈이 환하여 가릴 수가 없습니다. 또 그가 고쳐서 올린 소어(疏語)를 보건대 본분을 넘고 의(義)에 어긋난 말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임홍망(任弘望)은 비록 지친(至親)이란 사정(私情)이 있었지만, 그래도 감히 그의 악(惡)을 덮어 가리지 못하고 그 화(禍)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소(疏)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은즉, 그 말의 불경(不敬)함과 부도(不道)함을 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죄를 논(論)한다면 실로 적술(賊述)060)  보다 더한데도, 그 죄를 찬배(竄配)에 그쳐 지금까지도 편안히 쉬고 있게 하니, 홀로 적술만이 억울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 지난날 흉당(凶黨)들이 전하(殿下)를 위해(危害)하려고 꾀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습니다. 김춘택(金春澤)은 음(陰)으로 주동하고 임창(任敞)과 박규서(朴奎瑞)는 드러내어 말하는 등 온갖 계책으로 경영(經營)해 반드시 제마음에 뜻한 대로 하였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누가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을 깔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김춘택과 박규서는 모두 제집에서 죽고 법(法)에 의거해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의 분노를 풀 수 있는 방도는 오직 적 임창을 정형(正刑)하는데 있으니, 결단코 하루라도 용서하여 실형(失刑)했다는 비난을 초래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속히 방형(邦刑)을 바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감훈(勘勳)하는 법은 반드시 성상께서 친히 원훈(元勳)을 정하신 연후에 그 원훈으로하여금 서차(序次)를 감정(勘定)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례(舊例)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전하께서 이미 친히 정하신 일이 없고, 다만 대신(大臣)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드디어 이삼(李森)을 1등으로, 신익하(申翊夏)를 2등으로 삼았으니, 이는 이미 국조(國朝)의 구례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의 작은 공로를 가지고 구차하게 감록(勘錄)하여 국가(國家)의 성전(盛典)을 마침내 초초(草草)하게 미봉(彌縫)하는 데로 귀착되게 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한 입으로 해괴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청컨대 이삼과 신익하를 녹훈(錄勳)하라는 명을 환침(還寢)하시고, 스스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여 다시 원훈을 정하소서. 죄인(罪人) 홍석보(洪錫輔)는 전후 거짓을 꾸미며 가리려고 하다가 도리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당초 국청(鞫廳)에서 본부(本府)로 이송(移送)한 것이 공의(公議)에 크게 어긋난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 죄범(罪犯)이 환히 드러나 여지가 없습니다. 청컨대 국청으로 이송하고 엄하게 신문하여 그 실정(實情)을 캐내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김춘택(金春澤)의 여러 아우와 아들과 조카들 가운데서 구별하여 석방(釋放)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중부(中部)의 사비(私婢) 시월(十月)이 한 태(胎)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졸(卒)하니, 나이 76세였다. 임금이 특별히 그의 죽음을 가엾이 여기는 교지를 내리고 관판(棺板)을 하사하였다. 이어 해조(該曹)에 명하여 제수(祭需)와 예장(禮葬)을 청평위(靑平尉)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정재륜은 고(故) 명상(名相) 정태화(鄭太和)의 아들로 효종(孝宗)의 부마(駙馬)이다. 기국(器局)이 준위(俊偉)하고 또 계책과 사려(思慮)가 있었으며 분수 밖의 일체의 분화(紛華)한 풍습을 극력 제거하고 검약(儉約)을 힘써 숭상하였다. 따로 초옥(草屋)에서 거처하면서 그 의복이 한결같이 검소하여 의젓하게 모든 부마에게 존경하고 본받는 바 되었다. 4조(四朝)를 내리 섬겼고, 국조(國朝)의 고실(故實)을 많이 알아 사람들이 많이 질문하여 의혹을 풀기도 하였고, 조정의 사대부(士大夫)들도 또한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그러나 처사(處事)가 괴상하여 교정(矯情)061)  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으며, 남의 은미(隱微)한 일을 살피기를 좋아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병통으로 여겼다.

 

평안도(平安道)의 군제(軍制)를 구식(舊式)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전(前) 감사(監司) 권업(權𢢜)이 조가(朝家)에 장품(狀稟)하여 본도(本道)의 군제를 변통(變通)하려 했는데 미처 시조(施措)하기 전에 갈렸으므로, 이진검(李眞儉)이 교대해 부임하여 다시 옛날대로 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대개 이르기를,
"보인(保人)에게 한 필(疋)을 감한 경우는 늙고 도망한 자가 많고 장정(壯丁)이 거의 없는데, 갑자기 무학(武學)으로 올려 그대로 전졸(戰卒)로 삼는다면, 점열(點閱)과 조련에 소비되는 양미(粮米)와 군장(軍裝)·복색(服色) 등 허다한 용비(冗費)062)  가 2필을 바칠 때보다 감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장건(壯健)한 군교(軍校)와 바꾸어 정할 때 감색(監色)의 농간도 반드시 없으리라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요 또 군관(軍官)의 색목(色目)과 군액(軍額)을 내려서 정하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적지 않을 것이니, 온 도(道)의 민심(民心)을 거듭 잃을 것입니다. 본도(本道)의 군액이 20여 만이나 되니, 진실로 잘 정습(精習)한다면 적(敵)을 막기에 족할 것입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한갓 병액(兵額)만을 넓혀 폐단을 낳게 하겠습니까? 오늘을 위한 계책은 군관(軍官)의 칭호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무예(武藝)를 교습(敎習)시키는 것인즉, 평상시에는 포(布)를 거두고 난(亂)에 임해서는 효력을 독책(督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일체 싫어하고 피하는 곳으로 몰아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원군(元軍)으로서 본래 1필을 바치던 자는 앞서의 조령(朝令)에 의하여 각각 한 사람의 보(保)를 갖게 하고, 원보(元保)로서 일찍이 2필을 바치던 자는 계속 병영(兵營)에 예속시켜 모두 1필을 감해 주되, 무학으로 승격시키지 말 것입니다. 1필을 감해 주는 대신 각색(各色)에 보충하여 주는 자는 종전에 의하여 그대로 둘 것이며, 군교(軍校)가 바치는 베[布]는 각각 그 고을에서 직접 봉납(捧納)하게 하고, 명칭을 ‘납포 군관(納布軍官)’이라 하여 소요(騷擾)를 진정(鎭定)시키도록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용천(龍川)과 만부(灣府)는 순치(脣齒)의 관계로서 관방(關防)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곳입니다. 처음에 별영(別營)을 설치한 것은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니, 지금 지킬 만한 변경(邊境)의 땅을 버리고 물러나 내지(內地)에 이속(移屬)시킨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옛 그대로 두고 파하지 말며 난(亂)에 임하면 그대로 지켜 병영(兵營)으로 달려가지 말게 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게 하소서. 그리고 덕천(德川)은 역로(歷路)의 요해처(要害處)에 자리잡고 있으니 계속하여 영장(營將)을 두고, 영변(寧邊)과 은산(殷山)과 맹산(孟山)으로 하여금 전과 같이 부속(附屬)시켜 간로(間路)063)  를 방수(防守)하게 하소서. 또 선천(宣川)은 수륙(水陸)의 인후(咽喉)064)  로서 좌현(左峴)의 검성(劒城)이 뒤에 있고 가도(椵島)와 신미도(身彌島)가 앞에 벌려져 있어서, 의주(義州)와 용천이 혹 수비에 실패할 경우 선천이 그 다음 차례가 될 것입니다. 그 형승(形勝)이 차단하기에 족할 것이므로 작년부터 이미 육군 방어사(陸軍防禦使)로 바꾸어 정하였으니, 광주(廣州)와 수원(水原)의 예에 의하여 독진(獨鎭)으로 만들고, 온 고을의 군졸(軍卒)을 모두 다 여기에 예속시키며, 빨리 영장(營將)을 파하여 그 지휘(指揮)와 관할(管轄)을 전담하게 한다면, 후일에 힘을 얻는 곳이 여기보다 나을 데가 없을 것입니다. 수로(水路)의 경우 선사(宣沙)에 첨사(僉使)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수로를 위한 것이었는데, 선사의 수방(水防)065)  을 파한 뒤로는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삼화(三和)의 방병선(防兵船)을 선사에 환속(還屬)시키고 수군(水軍)의 경우 분속(分屬)시킨 것을 군관(軍官)에게 획급(劃給)하여 모두 그대로 예속시켜, 영종(永宗)·소강(所江)의 예에 의하여 품질(品秩)이 높은 무신(武臣)을 각각 따로 가려서 보내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기를,
"관서(關西)의 군액(軍額)이 비록 20여 만이라고 하지만 단속과 지휘를 받는 군사는 실제로 많지 않아서 생판 항오(行伍)도 알지 못하니, 창졸간에 몰아낸다면 어떻게 싸움을 하겠습니까? 지금 보인에게서 2필씩을 받는 것을 1필로 감하고 올려서 무학으로 삼되, 점차 군교(軍校)로 나아가게 하여 정예한 장정으로 만들고, 아울러 단결과 조련을 행하면 모두 정졸(精卒)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1만 명에 가까운 전병(戰兵)이 없는 가운데서 생겨나게 되어 훗날 완급(緩急)에 기필코 힘을 얻을 것이니, 조가(朝家)에서 그 시행을 허락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농사가 큰 흉작이니, 우선은 구식(舊式)에 의하도록 하면서 조가에서 고쳐서 분부(分付)하기를 기다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영장(營將)과 방어사(防禦使)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전 사람들이 설치한 것에 모두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9명의 영장이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당초에 창설(刱設)한 본의(本意)를 깊이 통찰하지 못하고 갑자기 변경하여 조치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사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옛 제도를 따라서 쓰도록 하고 방략(方略)을 따로 강구(講究)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관서(關西)의 군제(軍制)는 평소에 그 모양을 이루지 못했는데, 권업(權𢢜)이 여러 번 번임(藩任)을 지내면서 사무(事務)에 익숙한지라 그 제도에 약간의 변통(變通)을 가(加)한 것이다. 그 실행에 과연 지장이 없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이진검은 분별이 없고 소루하여 전혀 일을 알지 못한 나머지 봉행(奉行)하기를 꺼려 경솔하게 정침해 버렸던 것인데, 묘당에서도 또한 따라 허락하였으니, 의논하는 이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2월 10일 경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여러 번 소(疏)를 올려 극력 사직하여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체직을 허락하고 이조(李肇)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광좌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옮겨 제수하였다. 그리고 여필용(呂必容)을 승지(承旨)로, 유술(柳述)을 사간(司諫)으로, 조원명(趙遠命)을 헌납(獻納)으로, 이진순(李眞淳)을 보덕(輔德)으로, 정사효(鄭思孝)를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삼았다.

 

2월 11일 신유

밤 2경(二更)과 3경(三更)에 달무리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연일현(延日縣) 임곡강(林谷江) 어구에서 어선(漁船)이 침몰하여 60명이 동시에 빠져 죽으니, 임금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論)하기를,
"안귀서(安龜瑞)의 사주(私鑄)는 그가 혼자 꾸민 일이 아니고, 모두 흉당(凶黨)이 전화(錢貨)를 긁어 모아 체결(締結)·교통(交通)하고 불궤(不軌)의 모의(謀議)를 도모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청(捕廳)의 군관(軍官)이 당초 방수(防守)하지 않고 자재하게 한 것은 드러나게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으니, 예사롭게 감죄(勘罪)하고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각별히 엄한 형벌로 구문(究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재차 계달(啓達)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안귀서를 대계(臺啓)로 인해 포청으로 하여금 잡아 오게 하였더니, 동교(東郊)에 이르러 말 위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옥중(獄中)에서 죽었던 것이다. 그 뒤 포청으로 아뢰어 압래(押來)한 군관을 가두어 다스릴 것을 청했기 때문에 대계(臺啓)가 드디어 나왔던 것이었다.

 

2월 12일 임술

밤 1경(一更)과 2경에 달무리하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고 양사(兩司)도 또한 함께 들어왔다. 강(講)을 마치자, 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다만 정우관(鄭宇寬)과 이기지(李器之) 등의 아들을 상금(賞金)을 걸어 체포하게 할 것과 이오(李悟) 등을 잡아다 문초할 일만 따랐다. 이삼(李森) 등에게 감훈(勘勳)하는 것을 정침하기를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승지 오명항(吳命恒)이 그 불가함을 극력 진달하자, 임금이 비로소 그대로 따랐다.

 

2월 13일 계해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저들이 황태후(皇太后)로 존숭한 뒤에는 으레 황제(皇帝) 앞에 하례하는 표(表)가 있었습니다. 문서(文書)는 지금 아직 나오지 아니했습니다마는, 미리 방물(方物)을 준비하고 표문(表文)을 찬출(撰出)하여 연경(燕京)에 간 뒤에 이를 예부(禮部)에 물어서 진정(進呈)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2월 14일 갑자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임어(臨御)하여 풍운 뇌우(風雲雷雨)의 제사에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승지 이진유(李眞儒)가 호기(湖畿) 지방의 역로(驛路)가 조폐(凋弊)한 상황을 갖추어 아뢰고, 이조(吏曹)에 신칙하여 우관(郵官)을 가려서 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모든 신하들의 소장(疏章)을 일찍이 분류(分類)하여 초계(抄啓)한 일이 있었으나 또한 처분(處分)이 없었으니, 청컨대 모든 승지로 하여금 펼쳐서 읽게 하고 구별하시어 비답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2월 15일 을축

밤 2경(二更)에 달이 태미원(太微垣) 안으로 들어갔다.

 

비국(備局)에서 따로 수령(守令)에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고, 가려 뽑아서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7일 정묘

미시(未時)와 신시(申時)에 햇무리하였다.

 

2월 18일 무진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복과(復科)된 사람인 이진급(李眞伋) 등을 6품(六品)으로 올려 주고, 그 가운데서 이헌영(李獻英)에게는 예(例)에 의하여 증직(贈職)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최석항이 녹훈(錄勳)에 관한 일 때문에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사상(李師尙)이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감훈(勘勳)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최석항에게 하순(下詢)하였다. 이에 최석항이 대답하기를,
"금번의 국옥(鞫獄)은 처음부터 원훈(元勳)으로 기록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었으니, 소(疏)를 올린 일곱 신하나 논계(論啓)한 16명의 대관(臺官)은 조관(條款)이 자별(自別)한지라, 거론(擧論)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장(捕將)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드러나게 기록할 만한 공이 있는데, 대관들이 삭훈(削勳)할 것을 논계하였으니, 노영손(盧永孫)의 예(例)066)  에 의하여 단훈(單勳)으로 감정(勘定)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도 또한 단훈으로 감정할 것을 말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심단(沈檀)이 말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은 처음에 역모(逆謀)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원훈(元勳)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사체(事體)를 중히 여기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자, 최석항이 말하기를,
"만약 상변(上變)한 사람을 가지고 동맹(同盟)할 수 없다고 한다면 도리어 애초부터 녹훈(錄勳)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비록 녹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번 옥사가 어찌 허술하게 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단훈으로 감정하라고 명하였다. 심단이 이잠(李潛)에서 포증(褒贈)할 것을 거듭 청하고, 심지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 박태보(朴泰輔)가 선후(先后)를 위해 사절(死節)했기 때문에 증직(贈職)과 정려(旌閭)를 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인데, 이잠은 성상(聖上)께서 위의(危疑)하던 날 봉장(封章)하여 충직하게 항거하고 죽으면서도 뉘우치지 않았으니, 이는 이른바 태자(太子)를 위하여 죽은 자입니다. 표정(表旌)의 은전(恩典)에 있어서 박태보와 더불어 마땅히 이동(異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증직하고 장려하여 조금이라도 천양(泉壤)의 원혼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이잠은 그 일이 당저(當宁)067)  에 관계되는지라 박태보의 일과는 다른 바가 있습니다."
하고, 최석항은 이르기를,
"먼저 진소(陳疏)를 일삼은 지절(志節)이 가상하니, 포증(褒贈)은 옳겠지만, 정려는 그 합당한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포증을 명하였다. 판윤(判尹) 윤취상(尹就商)이 북도(北道) 관애처(關隘處)에 특별히 수목(樹木)을 기르도록 하고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금벌(禁伐)을 엄하게 계칙(戒飭)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제도(諸道)에도 계칙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論)하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남태징(南泰徵)은 지난번에 남곤(南閫)에 제수되어 여지없이 일을 그르쳤고, 군문(軍門)으로 승진함에 이르러서는 탄핵하는 소장(疏章)이 준엄하게 발론되어 꾸짖는 말이 대신(臺臣)에게까지 미쳤는지라, 제명(除命)이 내리자, 물정(物情)이 놀라고 분노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내섬시 봉사(內贍寺奉事) 이중태(李重泰)와 목릉 참봉(穆陵參奉) 이징귀(李徵龜)는 외람되게 사적(仕籍)에 통하여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러워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고 단지 홍순택(洪舜澤)의 수적(收籍)과 조영복(趙榮福)을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낼 것과 조성복(趙聖復)·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 등을 참작하여 조처할 것과 김시발(金時發)과 홍언도(洪彦度)에게 형벌을 면제하고 배소(配所)로 떠나도록 하는 일과, 이중태와 이징귀 등을 태거(汰去)하는 일만 윤허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와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명언(李明彦)이 함께 정석(政席)에 나갔는데, 이명언이 정주(政注)하는 사이에 의견이 어긋난다고 하여 곧 바로 일어나자 이조 또한 이어 나가 각각 인혐(引嫌)하는 소(疏)를 올렸다. 이명언이 소로 이르기를,
"지난날 대각(臺閣)의 한두 신하가 혹은 소장(疏章), 혹은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어긋나고 과격한 말이 많아 진신(搢紳)들 사이에서 그 시비(是非)를 서로 다투었습니다. 저 김동필(金東弼)의 소에 이르러서는 편안하지 못한 사단을 야기함이 한층 더하였으므로, 신(臣)이 과연 약간의 책벌(責罰)을 가함으로써 들뜬 분위기를 진정 시키려는 뜻에서 동료들 간에 수작(酬酢)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뒤 두 대관(臺官)이 차례차례 척보(斥補)되었으나 홀로 김동필보다 뒤진 것은 그 서명(敍命)이 방금 내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료(長僚) 또한 신의 조정(調停)하려는 행동이 나라를 위한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르기는 하였으나, ‘사사롭게 좋아지낸다.’는 뜬 의논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어 천천히 후일을 기다려 다시 소상(消詳)함을 더해 보자고 핑계하고는 시종 미루면서 즐겨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으니 염의(廉義)로 헤아려 보건대 결단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조도 소(疏)를 올리기를,
"요당(僚堂)이 김동필을 외직(外職)으로 척보(斥補)한 일을 정석(政席)에서 발언하기에 신(臣)은 논박하며 파직했다가 서용(敍用)되었는데, 또 다시 척벌(斥罰)한다면 끝내 너무 심한 데 관계된다는 이유를 들어 미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하여 개설(開設)하면서 되도록 화평(和平)한 분위기로 돌리려고 힘썼으나, 요당이 강경하게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고는 갑자기 곧바로 일어났습니다. 척보하는 한 가지 일이 무슨 대단하게 긴급(緊急)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미 연 정사를 끝내 중간에 걷어치우기에 이르렀으니, 거조(擧措)하는 사이에 전도(顚倒)됨을 면하지 못합니다. 신은 실로 개연(慨然)해 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의 말뜻이 흉패(凶悖)하였으나, 당시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김동필의 한 소(疏)가 비록 간략하게 제기해 논하기는 하였으나, 또한 철중 쟁쟁(鐵中錚錚)068)  이라고 이를 만하였다. 당초 논박하여 파직한 것이 김일경에게 빌붙은 당(黨)에게서 나온 것인데, 다시 척보(斥補)하려 하니, 방자하고 기탄없음이 심하다. 이명언이 실제 화(禍)를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김일경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진흙 구덩이 속에서 싸우는 짐승의 꼴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

 

2월 19일 기사

정언(正言) 유수원(柳壽垣)를 올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를 배척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무릇 개기(改紀)한 이래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천재(天災)가 겹쳐 이르고 민생(民生)은 곤궁합니다. 이 기강(紀綱)의 퇴폐(頹廢)와 정령(政令)의 문란은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져 하나도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일찍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전하께서 이미 홀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시어 흉당(凶黨)을 물리치고 재보(宰輔)에게 위임하시고는 단공(端拱)069)  하며 그 공적의 성취를 독책(督責)하셨은즉, 시사(時事)가 이 지경에 이른 허물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입니다. 아! 저 대신(大臣)이 무슨 말로 감히 둘러대겠습니까? 신축년070)   섣달은 곧 전하의 시정(施政) 초기였는데, 첫 연석(筵席)에서 대양(對揚)071)  한 것이 이미 여정(輿情)에 어긋났고, 다만 뜬 의논에 동요된 것만 보았을 뿐, 일찍이 국시(國是)를 근엄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명을 받고 안옥(按獄)함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을 핑계대었고 끝에 가서 결말을 지은 것은 더욱 책임이나 때운 것에 가까왔으므로, 인정(人情)이 답답해 하고 물의(物議)가 들끓어 올랐습니다. 이미 사람들로부터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고, 또 그 덕량(德量)도 넓지 못하여, 이에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으면서 연로(年老)한 처지에서도 도리어 편벽되고 사사롭다는 지목(指目)의 돌아감을 싫어하지 아니하여, 괴리(乖離)된 형세를 조화하는 데 뜻이 없고 사람을 이끌어 쓸 즈음에는 노골적으로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지부(地部)072)  의 수망(首望)을 의망(擬望)하는 데도 지나친 곡절(曲折)이 있었고, 전관(銓官)의 문차(問差)073)  에도 처음부터 상량(商量)을 아꼈으니, 어쩌면 그 월조(越俎)074)  의 혐의와 추거(推車)075)  하는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아니한단 말입니까? 조정(朝廷)이 본원(本源)이 되는 곳임을 생각하건대, 두뇌(頭腦)의 부정(不正)함이 이와 같은지라, 드디어 청의(淸議)는 펼쳐지지 못하고 정기(正氣)가 막히고 사그라졌습니다. 오직 덮어주고 호도(糊塗)하는 것을 주(主)로 삼아 그것을 가지고 헛된 모습을 빌어 부귀(富貴)에만 안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의사를 굽혀 승봉(承奉)하고 극구(極口) 찬동하여 호법(護法)하는 것으로 삼는 자도 있어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성은 내어도 감히 말은 하지 못하게 하니, 오늘날에 세도(世道)를 식자(識者)들이 어떻다고 말하겠습니까? 인군(人君)의 직분은 오직 정승을 얻는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정신(精神)·역량(力量)·거조(擧措)·규모(規模)로 보건대 전하(殿下)께서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명(聖明)께서는 면려하시고 분발(奮發)하시며, 근심하고 근로(勤勞)하는 일들을 총괄해 살피시어 하늘에 나라의 운명을 장구하게 누리도록 기구(祈求)하는 계책으로 삼으소서.
근일(近日) 비당(備堂)의 계하(啓下) 가운데 품질(品秩)이 아경(兒卿) 이상인 자는 거의 빠진 사람이 없으니, 외잡(猥雜)하다는 비방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정수기(鄭壽期)가 처음 영선(瀛選)에 든 것만 해도 이미 극히 근사하지 않은데 동벽(東壁)과 중서(中書)는 더욱 인망(人望) 밖에서 나왔습니다. 이정제(李廷濟)의 간사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를 사대부(士大夫)의 모습이 전혀 없는데도 필경 우화(羽化)076)  하였으니, 모두 권문(權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능력도 없이 사국(史局)에 들어갔는가 하면 참람하게도 웅번(雄蕃)에 임명되었는데, 조태채(趙泰采)가 복법(伏法)될 때는 감히 천 리 길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짐바리에 가득하게 부의물(賻儀物)을 보냈으니, 만약 일분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차마 했겠습니까? 결단코 조적(朝籍)에 둘 수 없으니, 빨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베풀게 하소서. 또 홍치중(洪致中)은 한평생의 행동거지가 송도(松都)에서 승소(承召)하던 날 탄로났습니다. 국가(國家)의 안위(安危)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는데도 고관(高官)과 숭질(崇秩)을 제마음대로 하였으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는 지목이 어찌 털끝만치도 근사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억지로 이견(異見)을 세우려고 구차하게 인피(引避)하니, 인척과 벗들이 분주하게 내달리며 신탈(伸脫)을 주선하였고, 전후 세 번의 인피(引避)는 한 장의 종이로 찍어낸 것과 같았습니다. 그 구차스럽게 안면(顔面)만을 따라 대체(臺體)를 추락시킴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또한 함께 견벌(譴罰)을 베풀어 공의(公議)를 펴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정수기가 영관(瀛館)에 합당하지 않다는 배척은 지극히 과당(過當)하다."
하였다. 조태구가 당시 정권을 잡았으나, 본래 식견과 국량(局量)이 없어서 신감(辛甘)을 조제(調劑)하거나 들뜬 말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으나, 단지 김일경을 부식(扶植)하지 아니하여 그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기필코 쫓아내려고 하였다. 유수원이 어리석고 일을 잘 알지 못했는데, 사주를 받고 무함하고 비방하여 원로(元老)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병퇴(屛退)하여 조정의 효상(爻象)이 반환(泮渙)하게 만들었으니, 마음의 소재(所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유수원은 곧 유봉휘(柳鳳輝)의 종질(從姪)이다. 혹자는 그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는데, 유봉휘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스스로 맹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조카의 장주(章奏)를 어찌 아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통탄스러운 일이다. 정수기는 김일경을 공격하는 데 매우 힘썼고, 이정제도 또한 김일경의 무리에게 빌붙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겨누었던 것이니, 김일경이 기세를 올림이 이와 같았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유수원(柳壽垣)의 소(疏) 때문에 인죄(引罪)하고 차자(箚子)를 올린 뒤 이어 성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관(臺官)의 말이 너무 지나치니, 어찌 족히 입에 담을 것이 있겠는가?"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개유(開諭)하였다.

 

조영복(趙榮福)을 선산부(善山府)로 귀양보냈다.

 

2월 20일 경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와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명언(李明彦)이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기니, 임금이 모두 체직을 윤허하고 유봉휘(柳鳳輝)와 이진유(李眞儒)로 대신하였다. 홍중우(洪重禹)를 승지(承旨)로, 이중술(李重述)을 사간(司諫)으로, 윤성시(尹聖時)를 헌납(獻納)으로, 유시모(柳時模)·심준(沈埈)을 정언(正言)으로, 이세덕(李世德)을 집의(執義)로, 이조(李肇)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오명준(吳命埈)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증광 문과(增廣文科)와 증광 무과(武科)의 복시(覆試)를 하루를 물리어 시행하였다. 전관(銓官)의 인혐(引嫌)으로 인해 감시관(監試官)을 차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성복(趙聖復)을 다시 국문할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大臣)의 유고(有故)로 매일 탈(頉)이 있음을 품(稟)하였고,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도 혐의가 있어 국문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뜻을 차자(箚子)로 진달하니, 임금이 ‘국좌(鞫坐)가 시간을 끌어 결말을 지을 기약이 없으니, 다시 사단(辭單)을 올리지 말고 뜻을 편안하게 가지고 국문에 참여하라.’는 뜻으로 답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개유하였다.

 

이잠(李潛)에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증직(贈職)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잠은 명가(名家)의 자제로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젊은 시절에 거업(擧業)에 종사하다가 일찍이 과시가 임박하여 그의 친당(親黨)으로서 현귀(顯貴)한 자가 마땅히 장두(狀頭)에 두겠다는 뜻을 은밀히 보이자, 드디어 시지(試紙)로 술을 사서 한 번 크게 취하고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또 기사년077)  에 곤위(坤位)가 무너지던 날을 당해서는 과거를 아주 그만두고 시골에서 살면서 시끄러운 세상과 뜻을 끊었다. 그의 소(疏)를 보건대 중정(中正)한 도(道)로 재어본다면 진실로 미흡하겠지만, 그 곧고 격렬한 언론이 두려워하지 않고 꺾이지 않은 것이 저와 같았다. 살펴보건대 이잠은 항소(抗疏)를 올려 곧바로 당인(黨人)의 기탄(忌憚) 없음을 배척하고 자기 한 몸의 이해(利害)는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나, 말은 중정(中正)을 얻지 못하였다.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 비록 과중(過重)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제의(提議)할 만한 것이 아니니, 심사(心事)를 밝혀 주는 것은 그대로 옳다 하겠지만, 증직(贈職)하여 포장(褒奬)한다는 것은 도무지 의리(義理)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심단(沈檀)이 심지어 박태보(朴泰輔)에게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지극히 무엄(無嚴)하였다. 하지만 일찍이 한 마디 변척(卞斥)도 하지 않고, 최석항(崔錫恒)은 도리어 유도하여 성사시켰으니, 어찌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8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077]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잠은 명가(名家)의 자제로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젊은 시절에 거업(擧業)에 종사하다가 일찍이 과시가 임박하여 그의 친당(親黨)으로서 현귀(顯貴)한 자가 마땅히 장두(狀頭)에 두겠다는 뜻을 은밀히 보이자, 드디어 시지(試紙)로 술을 사서 한 번 크게 취하고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또 기사년077)  에 곤위(坤位)가 무너지던 날을 당해서는 과거를 아주 그만두고 시골에서 살면서 시끄러운 세상과 뜻을 끊었다. 그의 소(疏)를 보건대 중정(中正)한 도(道)로 재어본다면 진실로 미흡하겠지만, 그 곧고 격렬한 언론이 두려워하지 않고 꺾이지 않은 것이 저와 같았다. 살펴보건대 이잠은 항소(抗疏)를 올려 곧바로 당인(黨人)의 기탄(忌憚) 없음을 배척하고 자기 한 몸의 이해(利害)는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나, 말은 중정(中正)을 얻지 못하였다.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 비록 과중(過重)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제의(提議)할 만한 것이 아니니, 심사(心事)를 밝혀 주는 것은 그대로 옳다 하겠지만, 증직(贈職)하여 포장(褒奬)한다는 것은 도무지 의리(義理)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심단(沈檀)이 심지어 박태보(朴泰輔)에게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지극히 무엄(無嚴)하였다. 하지만 일찍이 한 마디 변척(卞斥)도 하지 않고, 최석항(崔錫恒)은 도리어 유도하여 성사시켰으니, 어찌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과천(果川)의 향려(鄕廬)로 돌아가서 명소(命召)를 환납(還納)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다시 전해 주게 하였다.

 

2월 22일 임신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소(疏)를 올려 유수원(柳壽垣)이 조태구(趙泰耉)를 공박한 일을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상(領相)이 조정에 선 지 40년에 스스로 본말(本末)이 있었고, 국가(國家)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자신을 잊고 순국(徇國)하는 충성이 있었습니다. 접때 그 날의 청대(請對)한 거조가 없었던들 위망(危亡)의 재앙은 털끝만한 차이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 국가가 조금 편안해지고 조정이 화평을 되찾은 뒤에는 번갈아 서로 공격하면서 오직 미치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리하여 극도로 허구 날조하여 기필코 핍박하여 쫓아내고자 하니, 이 무슨 마음이며 이 무슨 꼴입니까? 영상이 소(疏)를 남겨둔 채 도성 밖으로 나갔는데도 또 힘써 만류하는 거조가 없으시니, 전하(殿下)께서 원로(元老)를 대우하시는 도리가 어찌 그렇게도 지나치게 박(薄)하십니까? 특별히 분명한 교지를 내리시어 개석(開釋)하시고, 소환(召還)하여 조야(朝野)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하고, 이어 말하기를,
"비당(備堂)은 모두 인망(人望)이 쏠리는 바로서, 이정제(李廷濟)는 명민(明敏)하여 직임에 합당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신(臣)이 천거한 바이니, 무릇 허물이 있다면 신이 실로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영상이 조정에 선 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잊고 순국(徇國)하는 충성이 있었은즉, 뜻밖에 나온 남들의 말이 어찌 족히 입에 담을 만한 것이랴? 차자(箚子)의 사연이 참으로 의견이 있으니, 어찌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卿)이 천거한 사람도 이 직임에 합당하니, 더욱 불안해 할 단서가 없다. 안심(安心)하고 정사를 논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 개유(開諭)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소(疏)를 올려 유수원(柳壽垣)을 배척하여 이르기를,
"정수기(鄭壽期)의 사한(詞翰)과 숙망(宿望)은 사우(士友)들이 추중(推重)하는 바인즉, 근사하지 않다고 이른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영관(瀛館)에의 참록(參錄)과 동벽(東壁)에의 통의(通擬)는 신(臣)이 모두 주장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외람되게 선출한 죄를 단정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그대는 혐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모든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오명항(吳命恒)이 조신(朝臣)들의 패초(牌招)를 어기는 폐단을 갖추어 아뢰고, 선조(先朝)의 구례(舊例)에 의해 특별히 견책하여 파직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23일 계유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구명규(具命奎)·박징빈(朴徵賓)·김동필(金東弼) 등이 부정(不靖)한 사단(事端)을 야기하여 서로가 배척하며 일이 없는 가운데서 일을 만들어내었으니, 언의(言議)의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논할 것도 없이 그 죄는 꼭 같습니다. 이명언(李明彦)이 척보(斥補)하자는 논계를 앞장서서 주장하여 구명규와 박징빈은 이미 외읍(外邑)에 제수되었으나, 김동필은 장료(長僚)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사(政事)를 그만두고 곧바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유수원의 소(疏)가 또다시 뜻밖에 튀어나와 기필코 각각 형적(形跡)을 남겨서 제뜻대로 분열(分裂)을 이루고야 말려고 하니, 또한 무슨 뜻입니까?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조정(調停)의 논의를 주장하면서 피차(彼此)를 모두 척보(斥補)한 일이 있었으니, 김동필과 유수원을 모두 외읍(外邑)으로 척보하여 그 일을 좋아하는 풍습을 징계하게 하소서."
하고, 이어 적합한 주·현(州縣)에 자리를 만들어서 단부(單付)078)                  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성 현감(利城縣監)        박징빈은 벌(罰)을 내린 것이 너무 지나치니, 조금 가까운 고을에 제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진유가 물러나 김동필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유수원은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단부(單付)하고, 박징빈은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옮겼다. 그리고 정수기를 사간(司諫)으로, 이진순(李眞淳)을 집의(執義)로, 박필몽(朴弼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현장(李顯章)·오명신(吳命新)을 부교리(副校理)로, 유필원(柳弼垣)·박정(朴涏)을 교리(校理)로, 이세덕(李世德)·송진명(宋眞明)을 수찬(修撰)으로, 목호룡(睦虎龍)을 동성군(東城君)으로 삼았다.

 

함흥(咸興)의 순릉(純陵)에 불이 나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알려 왔다. 임금이 변복(變服)하고 정전(正殿)을 피하였으며, 감선(減膳)·철악(撤樂)하였다. 3일에 위안제(慰安祭)를 행하고 예조의 당상관과 낭관을 보내어 불이 난 곳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2월 24일 갑술

반송사(伴送使) 오명준(吳命峻)이 의주(義州)의 소통사(小通事) 하명제(河明諸)가 칙행(勅行)의 은(銀) 50냥을 훔쳤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국경에서 효시(梟示)된 뒤에 장계로 알려 왔다.

 

2월 25일 을해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무릇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는 규례는 자리가 있는 대로 의망(擬望)하여 낙점(落點)을 받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특별히 출보하는 경우가 아니면 일찍이 자리를 만들어서 단부(單付)한 예(例)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해에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는 삼학사(三學士)를 병출(屛黜)할 것을 청하고 자리를 지정하여 멀리 출보한 일에 있어 공의(公議)가 지금까지도 놀라고 탄식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진유(李眞儒)는 좌이(佐貳)079)  의 관원으로서 도리어 이러한 풍습을 본떴습니다. 만약 규경(規警)하는 방도가 없다면 곧 그릇된 예(例)를 이루어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이며, 또 조정의 체통도 이로 인해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박징빈(朴徵賓)은 이성(利城)에 잉임(仍任)시키고 김동필(金東弼)은 체개(遞改)하소서. 그리고 유수원(柳壽垣)은 경박하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조정을 궤열(潰裂)하게 만들었으니, 우선 파직하고, 광주(光州)와 예안(禮安)의 전임 수령은 잉임하게 하소서.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는 그 본의가 비록 재억(裁抑)하는 데 있었다 하더라도 전첩(專輒)080)  의 혐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이처럼 전에 없던 행동을 했으니, 마땅히 본직(本職)을 갈아서 경솔하게 날카로운 과실을 경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금후로는 괴격(乖激)하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조정을 괴란(壞亂)하는 무리는 모두 무거운 벌을 베풀어서 세도(世道)를 유지(維持)하고 조론(朝論)을 화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를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전에 입계(入啓)한 여러 신하들의 소장(疏章)을 연이어 정원(政院)에 내리시며, 혹은 환급(還給)하라 명하시고 혹은 이미 처분(處分)을 거친 것이라고 비답하셨는데, 중신(重臣)이나 삼사(三司)에서 일을 논(論)한 소장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함이 있으니, 형세로 보아 장차 구별하여 앙품(仰稟)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살펴보건대 이때 이진유가 조정의 권세를 제마음대로 휘두르고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사당(死黨)이 되었는데, 김동필이 소를 올려 김일경을 공격한 것을 미워한 나머지 망령되게도 선정(先正)이 조정(調停)한 논의를 끌어대어 김동필을 외지로 척보(斥補)하였던 것이니, 이에서 춘궁(春宮)을 위하여 마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아! 통탄스런 일이다.

 

2월 26일 병자

모든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2월 27일 정축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또 명소(命召)를 환납(還納)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독하게 개유하였다. 조태구가 또 서계(書啓)하여 언관(言官)을 특별히 파면한 것이 더욱더 불안함을 더하게 한다는 것을 덧붙여 진달하고, 성명(成命)을 거두어 줄 것을 원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8일 무인

진시(辰時)부터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오명항(吳命恒)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는데, 오명항은 먼저 이미 하향(下鄕)하였으므로 다시 박필몽(朴弼夢)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천거한 것이었다.

 

송성명(宋成明)을 승지(承旨)로, 이세덕(李世德)을 집의(執義)로, 이중술(李重述)을 사간(司諫)으로, 이보욱(李普昱)을 지평(持平)으로, 조원명(趙遠命)·홍정필(洪廷弼)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2월 29일 기묘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진위 정사(陳慰正使)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과 진위 부사(陳慰副使) 김시환(金始煥)이 심양(瀋陽)에 이르러서 길에서 들은 바를 치계(馳啓)하여 이르기를,
"강희 황제(康熙皇帝)가 승하(昇遐)한 다음날 급히 말을 달려 14왕(王)에게 통부(通訃)하고, 동정(同征)하던 종실(宗室) 공연신(公延新)으로 하여금 그 무리를 대신하여 거느리게 하였으며, 또 섬총독(陝摠督) 연갱요(年羹堯)로 하여금 군무(軍務)를 협조(協助)하게 하였는데, 14왕은 파발마(擺撥馬)로 연경(燕京)으로 돌아와서 함께 상차(喪次)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강희 황제는 자녀(子女)가 많아서 모두 부요(富饒)하게 하지 못하여 모든 자녀들이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았는데, 조총(漕摠)·감무(監務) 등의 직임은 그 풍부한 자리냐 박한 자리냐에 따라 뇌물의 많고 적음을 정했다고 합니다. 또 경외(京外)의 부민(富民)의 집에서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많은 경우는 수십 만, 적은 경우는 혹 누만 금(累萬金)에 이르는데, 전원(田園)과 인축(人畜)도 또한 모두 점탈(占奪)하고 혹 주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갖가지 방법으로 침학(侵虐)하여 반드시 빼앗고야 말았는데도, 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 황제(皇帝)도 또한 일찍이 재물을 긁어모아 치부(致富)하였는데, 대위(大位)에 오르자 전날 점탈한 것을 모두 본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모든 아우들에게 칙유(勅諭)하기를, ‘짐(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비록 남의 것을 빼앗아 내 몸을 이롭게 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일찍이 사람의 목숨을 상하거나 해치지는 않았는데, 나머지 다른 아우들은 사람을 죽이거나 상하게 했다고 하니, 짐은 심히 민망스럽게 여긴다. 짐은 이미 허물을 뉘우치고 고치는 길을 도모하고 있으니, 모든 아우들 중에 과연 빈궁한 자가 있다면 호부(戶部)의 물건은 국가의 경비에 관계되는 것인지라 짐 또한 감히 사사롭게 쓸 수 없으나, 내고(內庫)에 쌓아둔 것은 모자라는 대로 골고루 지급할 수 있으니, 너희들이 빼앗은 백성들의 재물은 1년을 기한으로 하여 모두 그 주인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라. 만약 오랫동안 되돌려 주지 않아서 본주인이 와서 소송하게 만든다면 단연코 사사로운 은혜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또 정신(廷臣)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짐이 오랫동안 여염(閭閻)에 있으면서 관리(官吏)의 선악(善惡)을 익히 알고 있다. 아무는 청렴하고 아무는 탐욕스럽다는 것도 들어 자세하게 알고 있으니, 의당 물리침이 옳을 것이나, 짐이 우선은 포용함으로써 스스로 새롭게 될 길을 열어 주노니, 각자 칙려(勅勵)하여 짐의 뜻을 따르면 마땅히 탁용(擢用)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다서 전의 버릇을 답습한다면 마땅히 법(法)으로 무겁게 다스릴 것이니, 그때를 당하여 짐의 은혜가 적다고 이르지 말라.’ 하였다 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강희 황제가 이미 폐태자(廢太子)의 아들을 봉하여 왕(王)으로 삼았는데, 새 황제가 잠저에 있을 때의 궁실(宮室)·복어(服御)·금은(金銀)·장획(臧獲)과 왕부(王府)의 관속(官屬)을 모두 옮겨 주었고, 또 폐인(廢人)을 놓아주어 빈차(殯次)에 나아가서 곡읍(哭泣)하게 하고는 곧바로 금고(禁錮)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기내(畿內)에 기황(飢荒)이 들었는데도 삼왕(三王)·오왕(五王)·구왕(九王)이 쌀을 사서 쌓아두고는 발매(發賣)를 허락하지 않으며, 저자에서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쌀 1곡(斛)에 가격이 은(銀) 8냥에 이르렀지만 쌀이 있는 곳이 없어서 백성들은 사서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극(登極)한 초기에 곧 창고의 쌀 20만 곡(斛)을 풀어서 싼값으로 팔게 하고, 또 삼왕(三王) 등으로 하여금 시가(市價)를 따라 내어 팔도록 하니, 이로부터 도민(都民)이 이에 힘입어 굶주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강희 황제는 사냥을 일삼아서 응견(鷹犬)의 공납(貢納)과 거마(車馬)의 비용이 온 천하(天下)에 폐(弊)가 되어 왔는데, 조신(朝臣)으로서 만약 비응(臂鷹)081)  과 견구(牽狗)082)  의 일에 예속하게 되면, 황제의 수레에 가까이 갈 수 있다 하여 조정의 동료(同僚)에게 뽐내며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 황제는 응견의 공납을 파하도록 조서(詔書)를 내려 쓰지 아니할 뜻을 보이고는 궁중(宮中)에서 기르던 모든 진귀한 새와 별스런 짐승들을 풀어 주게 하여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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