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1권, 경종 3년 1723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2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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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경진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가 현도(縣道)를 통해 다시 소(疏)를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이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연이어 소장을 올려 해면을 바람이 이와 같이 지나칠 수 있는가? 모름지기 목이 타듯 기다리는 나의 뜻을 본떠 마음을 돌리고 조정에 나와서 합(閤)에 누워 치도(治道)을 의논하여 밤낮으로 생각하는 이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명령하여 개유하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다시 소(疏)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신화(新化) 초에 잘못 대임(大任)을 맡았는데, 병이 고황(膏肓)083)  에 얽혀 있는지라 사생(死生)의 관문을 드나들면서 잠시 나가 임무에 수응한 바 갑자기 병이 다시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데도 국사(國事)의 어려움 때문에 잠시 물러났다 곧 다시 나아가니 거취(去就)가 의거할 만한 것이 없었으며,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며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정사가 문란해졌으니, 보상(輔相)의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이 비록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臣)이 어찌 감히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그 불안을 떨칠 수 없는 피맺힌 정성이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봉공(奉公)하는 데 있으나, 마음속으로 믿고 한 말이 곁에서 듣는 자의 귀를 쉽사리 거슬리게 하고, 아무런 정실(情實)도 없는 일에도 그 심적(心跡)을 의심받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신(臣)이 평소에 수립(樹立)한 것이 없고 정지(情志)가 아직 믿음을 얻지 못한데 연유한 소치입니다. 되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괴리(乖離)되는 조짐이 어찌 근심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뜻이 진정(鎭靜)시키려는 데 있어 묘당(廟堂)에 미루어 올리지 않으려고 했기에 천거할 즈음에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따랐을 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 일찍이 그 사이에서 계교(計較)하지 않았는데, 이에 혹은 조화하려는 뜻이 없다고도 하고, 혹은 드러나게 좌지우지함을 보였다고 하니, 이는 모두가 본래의 뜻이 명백하게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연소한 사람들의 서로 헤아려 알지 못한 데 대하여 무어라 하겠습니까?
지부(地部)의 수망(首望)에 주의(注擬)한 것은 먼저 차자(箚子)에서 그 곡절을 아뢰었습니다. 전관(銓官)의 문차(問差)는 대개 그 자급(資級)과 경력의 오래 됨과 차례를 보고 취한 것인즉, 이른바 지나친 곡절이 있었고 상량(商量)을 아꼈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수기(鄭壽期)가 중서(中書)의 말망(末望)에 의망(擬望)된 것과 이정제(李廷濟)의 재능이 번임(藩任)에 합당함은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인정한 것인데, 물정(物情)을 놀라게 했다고 하니, 진실로 생각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공평하기 어려운 때를 당하여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처하여 모든 계책과 일이 같은 조정 사람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비방과 나무람을 받지 않은 바 없었습니다. 신은 작년 이래로 세 번이나 대언(臺言)을 받아, 가면 갈수록 한층 더 심각해져, 지금 운운(云云)한 바는 전혀 서로 용서하지 않고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리니, 신을 위한 계책은 단지 구학(丘壑)으로 물러나 세상일을 사절(謝絶)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뭇사람들의 의혹이 풀릴 것이고, 뭇사람들의 노여움이 해소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정실(情實)이 드러나는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이 사람들의 말을 만난 이래로 훌쩍 국도(國都)를 버리고 떠나니, 서운한 생각이 갈수록 더욱 심하다. 경은 교목 세신(喬木世臣)으로 의리로 보아 휴척(休戚)을 같이해야 할 것인데, 언제나 강사(江舍)로 물러나 국사(國事)를 대수롭지 않게 본다면 나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모름지기 이 지극한 뜻을 체념(體念)하여 안심하고 사직(辭職)하지 말며 목이 타는 듯한 나의 소망(所望)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개유(開諭)하게 하였다.

 

3월 2일 신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이 병이 매우 심하여 교외(郊外)로부터 도성(都城)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라고 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권이진(權以鎭)이 반유(泮儒) 김범갑(金范甲) 등이 상소하여 그의 외조(外祖)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의 향사(享祀)에서 내친 것 때문에 상소하여 신변(伸辨)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권이진은 송시열의 외손(外孫)인데, 그의 당(黨)은 곧 송시열을 공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에게 용납받지 못했는데도, 시배(時輩)에게 발을 붙였다. 시배 또한 송시열을 배척하고 헐뜯는 자가 많았는데, 권이진은 몹시 두려워하면서 변명함이 없어 그들의 도움을 받으니, 사람들이 혹 비루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3월 3일 임오

이진유(李眞儒)를 승지(承旨)로, 김시혁(金始㷜)을 보덕(輔德)으로, 권익관(權益寬)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3월 4일 계미

증광 전시 문과(增廣殿試文科)를 설시하여 박사수(朴師洙) 등 41명을 뽑고, 【원액(元額)은 40명이다.】  무과(武科)에서 이진룡(李震龍) 등 1백 36명을 뽑았다. 【원방(元榜)은 28명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82면
【분류】인사-선발(選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이 졸(卒)하니, 나이 75세였다. 임금이 특별히 거애(擧哀)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원로 대신(元老大臣)이 오랫동안 성 밖에서 살고 있어 바야흐로 돈독하게 권면하여 기필코 소원(疏遠)한 마음을 돌리려고 하였는데, 한 번 병이 들자 갑자기 세상을 떠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놀라움과 슬픔이 지극하다 보니, 눈물과 콧물이 옷깃을 적신다."
하였다. 이어 관판(棺板)을 가려서 보내도록 명하고, 3년을 한정하여 녹봉(祿俸)을 주게 하였다. 김우항은 별다른 재능이 없어서 젊은 시절에는 성예(聲譽)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늦게야 서서히 경렬(卿列)084)  에 이르러, 양전(兩銓)을 거쳤으며 특지(特旨)로 정승에 임명되자 비로소 시망(時望)을 얻으니, 사람들이 장자(長者)로 일컬었다. 대개 그 평소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지론(持論) 또한 화완(和緩)하여 강경하고 과격한 것을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년085)   과옥(科獄) 때 그의 말을 호시(嚆矢)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실대로 대답하고 청촉(請囑)하는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당(黨)이 이를 연유로 소외(疏外)시켰으나, 말절(末節)에 하자가 없었고 신축년086)   당화(黨禍)에 초연하였으니, 완전한 사람이라고 이르기에 충분하였다.

 

3월 5일 갑신

오명항(吳命恒)을 승지(承旨)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고, 박사수(朴師洙)를 전적(典籍)에 단부(單付)하고 이진룡(李震龍)을 빙고 별제(永庫別提)에 단부하였다. 【문과(文科)와 무과의 제1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8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진유(李眞儒)가 소(疏)를 올려 전사(前事)를 정리해 아뢰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신(臣)이 두 대신(臺臣)을 척보(斥補)한 것을 들어 엄한 말로 크게 배척하면서 스스로 전첩(專輒)한 것을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고 견책(譴責)을 더하여 체직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명언(李明彦)이 세 대신(臺臣)을 외직에 출보하고자 한 것은 본래 양쪽을 공평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신이 이명언의 뒤를 이어 전석(銓席)에 들어갔으니, 즉시 김동필(金東弼)을 출보(出補)시켜 그 일을 결말지어야 마땅했던 것입니다. 또 유수원(柳壽垣)의 소(疏)는 신진(新進)으로서 일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행위로 귀착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또 외보(外補)하여 조정(調停)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진실로 한 번의 정사(政事)에서 함께 보외(補外)하지 못한다면, 의논이 쉽게 분열을 가져올 것이므로 재품(裁稟)을 진달한 것은 실상 감히 자전(自專)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전첩(專輒)한다는 죄과(罪科)에 빠지리라고는 일찍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신의 성근 바탕과 옹졸한 성품으로 스스로 전첩(專輒)했다는 지목을 얻었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환급(還給)하라고 명하였다.

 

3월 6일 을유

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여러 의원을 거느리고 입진(入診)하였다. 약방제조(藥房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지금부터 법식을 정하여 모든 의원이 이틀 간격으로 입시(入侍)하여 진맥(診脈)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3월 8일 정해

매상(昧爽)부터 묘시(卯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밤 1경과 2경에 달무리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정사효(鄭思孝)가 이미 사폐(辭陛)하였는데, 대관(臺官) 심준(沈埈)이 하직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하여 정사효가 거느린 하리(下吏)를 불러다가 꾸짖었다. 이에 정사효가 소(疏)를 올렸는데, 소가 도착하자 정원(政院)에서 물리쳐 내렸다. 비국(備局)에서 재촉하여 출발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자 정사효가 비로소 부임(赴任)하였다. 방백(方伯)은 수령(守令)과 현격하게 달라서 일찍이 대관을 찾아다니며, 하직 인사를 하는 규례가 없었으니, 심준의 이러한 거조는 크게 사체(事體)를 잃었으므로 물론(物論)이 비난하였다.

 

3월 9일 무자

밤 1경(一更)과 2경에 달무리하였다.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니, 왕세제(王世弟)가 어가(御駕)를 따랐다.

 

3월 10일 기축

밤 1경(一更)에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천제(天際)로 들어갔다.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임순원(任舜元)을 승지(承旨)로, 남취명(南就明)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유술(柳述)을 사간(司諫)으로, 송진명(宋眞明)을 교리(校理)를 삼았다. 전적(典籍) 박사수(朴師洙)를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렸는데, 등과(登科)하기 전에 자궁(資窮)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 소(疏)를 올려 녹훈(錄勳)한 일을 논(論)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번의 책훈(策勳)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처음에 국구(國舅)를 추천했다가 이미 굳이 사양하자 그대로 따랐고, 또 두 장수에게 돌렸다가 다시 대계(臺啓)를 윤허하였습니다. 잠깐 정했다가 도로 파(罷)한 것은 한갓 사체(事體)만 손상시켰고, 동쪽을 지목하였다가 서쪽으로 미루며 끝내 머물러 둘 수 없으니, 끝에 가서는 단훈(單勳)으로 감정(勘定)하여 맹제(盟祭)가 장차 임박했습니다. 국조(國朝) 3백 년에 역옥(逆獄)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나, 일찍이 고변(告變)을 한자가 원훈(元勳)이 된 예(例)는 없었으니, 단록(單錄)의 불가함을 이에서도 이미 볼수가 있습니다. ‘훈(勳)’이란 한 글자를 마치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피하여 사체(事體)가 구차스러워짐을 돌아보지 않고 반드시 대충대충 미봉(彌縫)하려고 하니, 신(臣)은 실로 개연해 하는 바입니다. 대신(大臣)이 노영손(盧永孫)을 끌어대어 예(例)로 삼고 있으나, 옥사(獄事)의 크고 작음이 피차(彼此) 이미 다르고, 그 녹훈된 바가 4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수효에 이르렀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로소 대계(臺啓)로 인해 삭훈(削勳)하여 단지 노영손만 남아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단훈의 근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대저 목호룡(睦虎龍)은 상변(上變)한 일 외에는 다시 기미(幾微)를 앞서서 정찰(偵察)한 공이 없었은즉, 모든 적(賊)을 신문(訊問)하고 끝까지 흉절(凶節)을 캐내어 나라를 태산(泰山)·반석(磐石)처럼 안정되게 한것이 어찌 오늘날 기록할 만한 공훈이 아니겠습니까? 선묘조(宣廟朝) 기축년087)   옥사(獄事) 때 위관(委官) 이하 고(故) 상신(相臣) 정철(鄭澈) 등의 여러 사람이 일대(一代)의 명신(名臣)이 아닌 이가 없었으나, 몸소 훈적(勳籍)에 참여하고 감히 사양하고 피하지 못했던 것은 대개 녹훈(錄勳)을 국가의 중대한 일로 여기고, 상변(上變)한 사람만 구차하게 단록(單錄)하여 군부(君父)와 더불어 동맹(同盟)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논의하는 자들이 비록 기축년 뒤에 옥관(獄官)의 녹훈을 막았다는 것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러하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빨리 2품(品) 이상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로 하여금 조당(朝堂)에 모이게 하고 안옥(按獄)한 여러 신하의 녹훈(錄勳)이란 한 가지 일에 대해 가부(可否)를 순문(詢問)하시어 속히 감정(勘定)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소가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어도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맹제(盟祭)의 이의(肄儀)가 이미 임박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홍중우(洪重禹)가 소를 올려 이보욱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고, 이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연길(涓吉)을 조금 물리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에 아울러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맹제의 날짜가 이미 임박하였으니, 물리지 말라."
하였다.

 

3월 11일 경인

밤 3경(三更)부터 5경(五更)까지 달무리하였다.

 

임금이 장차 회맹 단소(會盟壇所)에 행행(行幸)하려 하니, 대사간(大司諫) 남취명(南就明)이 청대(請對)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역적을 토멸하고 회맹(會盟)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거조입니까? 그런데도 조정의 의논이 귀일(師一)되지 못하고, 갑을(甲乙)이 정해지지 않아 마침내 이에 단훈(單勳)으로 감정(勘定)하여 대충대충 미봉(彌縫)하고 말았습니다. 무릇 목호룡(睦虎龍)은 한 천례(賤隷)로서 역당(逆黨)에 들어갔다가 그 흉모(凶謀)가 실패하여 드러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상변(上變)하여 죽지 않을 수 있었으니, 훈적(勳籍)의 끝에 끼게 하는 것 또한 다행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국구(國舅)와 대신(大臣), 그리고 장신(將臣)까지도 단지 공을 사양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아 심지어 사직(社稷)을 지키고 역적을 토멸한 공훈을 한 천수(賤竪)에게 미루어 돌림으로써 차마 우리 전하(殿下)로 하여금 그를 상대로 맹세하는 피를 제천(祭天)하는 단(壇)에서 마시게 하니,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감히 할 바이겠습니까? 대신(臺臣)의 수의(收議)하자는 청(請) 또한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대신(大臣) 이하가 오직 급급하게 성례(成禮)하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만약 오늘날의 신자들의 조금이나마 충분(忠憤)한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말고삐를 끊고088) 수레바퀴를 더럽히는 뜻을089)   생각해야 할 것인데도, 후사(喉司)의 신하들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곧바로 이의(肄儀)를 청하고 또 재숙(齋宿)을 청하였으니, 해당 승지(承旨)에게 마땅히 경책(警責)을 더하시고, 이어 회맹의 날짜를 물리도록 명하시되, 2품 이상으로 하여금 수의(收議)하여 다시 감정(勘定)하게 하소서."
하자, 도승지(都承旨) 이세죄(李世最)가 말하기를,
"단훈(單勳)이 비록 구차하고 간략한 듯하지만, 만약 명백하게 응당 녹훈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처음부터 왜 누차 정했다가 누차 고쳤겠습니까? 맹단 제천(盟壇祭天)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무겁고 이의(肄儀)가 이미 이루어져 법가(法駕)가 장차 출발하려 하는데 어떻게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두 사람이 다투어 마지 않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도 또한 기록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남취명이 승지가 대신(臺臣)과 더불어 쟁론(爭論)하는 것은 전(前)에 있지 아니했던 일이라 하여 이세최를 추고하기를 청하니, 이세최가 추창(趨蹌)해 나갔다. 남취명이 다시 앞서 한 말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밤 4경(四更)에 임금이 친히 회맹제(會盟祭)를 단소(壇所)에 행하였다. 이틀 전에 전설사(典設司)에서 대차(大次)090)                  를 단(壇) 밖의 남쪽에다 동쪽으로 가깝게 서향(西向)하여 설치하고, 공신(功臣)의 막차(幕次)는 동남쪽에다 북향(北向)하여 설치하였으며, 찬만(饌慢)은 단의 동쪽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하루 전에 액정서(掖定署)에서 판위(版位)를 단 아래 한복판에다 북향하여 설치하고, 전의(典儀)가 모든 공신 및 배제관(陪祭官)의 자리를 판의 남쪽에다 북향하여 설치하였는데, 서쪽을 위로 하였으며 모두 매등(每等)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마련하였다.          【동반(東班)·서반(西班)의 신구 공신(新舊功臣) 및 적장(嫡長)과 중자(衆子)를 나누지 않고 작차(爵次)로 차례를 삼았으며, 종친(宗親)은 매품(每品)마다 반열 서쪽에 따로 자리를 설치하였다.】         또 전의(典儀)·알자(謁者)·찬인(贊引)의 자리를 동계(東階)의 서쪽에다 북쪽으로 가깝게 서쪽으로 향하되 북쪽을 위로 하여 설치하고, 장생령(掌牲令)이 대뢰(大牢)와 소뢰(小牢)와          【소·양·돼지이다.】         맹생(盟牲)을          【돼지이다.】         끌고 서소(誓所)로 갔다. 전사관(典祀官)이 재인(宰人)을 인솔하고 대뢰·소뢰를 상의(常儀)대로 도살하고, 맹생감(盟牲坎)은 단의 북쪽 임지(任地)에 설치하였는데, 바야흐로 깊이가 물건을 용납하기에 충분하였으며, 혈반안(血盤案)은 단 아래 서쪽에다 설치했다. 그날 아직 행사하기 전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올라가서 신위(神位)를 단상(壇上)에다 남향(南向)으로 하여 설치하였는데, 자리는 왕골로 하였다. 서문(誓文)은 신위의 오른편에 올려두고,          【점(坫)이 있다.】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초[燭]와 함께 신위 앞에 설치하였다. 그 다음에 생갑(牲匣)을 서쪽을 위로 하여 설치하였으며,          【소를 먼저 하고 다음에 염소로, 그 다음에 돼지로 하되, 모두 왕골자리를 깔았다.】         작(爵) 하나가 생갑 앞에 있는데,          【점이 있다.】         준(尊)을 단상(壇上) 동남쪽 모퉁이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작멱(勺羃)을 덮었으며, 세(洗)는 동계(東階)의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하였다. 뇌(罍)는 세의 동쪽에 있는데, 작비(勺篚)를 얹어 세의 서남쪽에 있고 건(巾)으로 채웠다. 그리고 술잔을 씻는 비(篚)는 술잔으로 채웠다.
3각(刻) 전에 전사관(典祀官)이 재인(宰人)을 거느리고 맹생(盟牲)을 잡고 집사관(執事官)이 쟁반에 피를 담아 안(案)에 두었다. 2각(刻) 전에 모든 제관(祭官)과 배제관(陪祭官)·집사관(執事官)이 각각 그 복식을 갖추고,          【제관은 제복(祭服), 배제관은 조복(朝服)을 입었다.】         모두 외위(外位)로 나아가서 동서(東西)로 평상시의 의식(儀式)대로 나누어 섰다. 1각(刻) 전에 전의(典儀)가 알자(謁者)와 찬인(贊引)을 인솔하고 들어가서 단의 남쪽 배위(拜位)로 나아가 겹줄로 북향하고 서쪽을 위로 하여 네 번 절하고 나서, 본래의 위치로 갔다. 찬인(贊引)이 독서문관(讀誓文官)091)                  과 집사관을 이끌고 자리로 나아가자, 전의(典儀)가 ‘사배(四拜)’라고 말하고,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사배’를 외치니, 독서문관 이하가 모두 네 번 절하였다.          【무릇 찬인의 노창(臚唱)은 모두 전의(典儀)의 말을 이어받는다.】         찬인이 관세(盥洗)하는 위치로 이끌고 나아가서 손을 씻고 닦기를 마치고 나서 각각 그 자리로 나아갔다. 알자와 찬인이 모든 공신 및 배제관을 인도하여 들어가 자리로 나아가자, 집사관이 작세(爵洗)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술잔을 씻고 그 술잔을 다 닦은 뒤에 비(篚) 안에 담아서 이를 받들고 중계(中階)로 나아가서 준소(樽所)에 두었다. 전사관이 찬(饌)의 진설을 마치자 좌통례(左通禮)가 대차(大次)로 나아가서 중엄(中嚴)을 아뢰니, 찬례(贊禮)가 행사(行事)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나오니, 찬례가 규(圭)를 잡을 것을 청하였으므로 도승지(都承旨)가 규를 올렸다. 이에 찬례가 인도하여 판위(版位)에 이르러 북향하고 서니, 전의가 ‘사배(四拜)’라고 말하였다. 찬례가 꿇어앉아 사배하기를 청하고, 제 위치에 있는 자도 함께 절할 것을 청하였다.          【먼저 절한 자는 하지 않는다.】         찬례가 다시 인도하여 관세하는 자리에 이르러 북향하여 서니, 찬례가 규를 꽂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규를 꽂고 손을 씻고 닦기를 마친 뒤 도로 규를 잡았다. 찬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남계(南階)로부터 올라가서 준소(樽所)로 나아가서 향하고 서니, 집준자(執樽者)가 멱(羃)을 들었고, 좌승지(左承旨)가 술을 따랐다. 이에 우승지(右承旨)가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찬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임금이 신위(神位) 앞으로 나아가서 북향하고 서서 홀(笏)을 꽂고 꿇어앉으니, 제 위치에 있는 자도 모두 꿇어앉았다. 좌승지가 향(香)을 받들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향로를 받들어 꿇어앉아 올리니, 임금이 세 번 향을 사르고 향로를 신위 앞에 올렸다. 좌부승지(左副承旨)가 작(爵)을 올리니, 임금이 받아서 전헌(奠獻)하며 그대로 우부승지(右副承旨)에게 주어 신위 앞에 올렸다. 찬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임금이 동계(東階)로부터 내려와서 제자리로 되돌아와 꿇어앉으니, 제자리에 있는 자도 모두 꿇어앉았다. 우승지가 혈반(血盤)을 올리니, 임금이 규를 꽂고 삽혈(歃血)하였고, 모든 공신도 또한 차례로 삽혈하였다. 삽혈이 끝나자 독서문관(讀誓文官)이 신위의 오른쪽으로 나아가 북향하고 꿇어앉아 서문(誓文)을 읽었는데,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열면서 일찍부터 예의(禮義)를 본령(本領)으로 잡았고, 성신(聖神)이 교화를 넓히시어 이치에 크고 밝게 맞았다. 그리하여 강상(綱常)을 유지해온 지 어언 3백여 년,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천지(天地)처럼 확연하여 위구(委裘)092)                  에도 아직까지 조회(朝會)하였고 노마(路馬)093)                  는 치열(齒列)이 없다. 그러나 과매(寡昧)에 이르러 흉역(凶逆)을 만났도다. 아! 저 늙은 역적들이 감히 군주의 권한을 침범하여 노가(魯家)094)                  와 진경(晉卿)095)                  처럼 번갈아 삼사(三事)096)                  의 자리를 차지하여 바야흐로 내가 시창(尸鬯)097)                  할 때부터 이미 불리(不利)한 생각을 품고 있었으나, 영왕(寧王)098)                  께서 혁림(赫臨)하고 계신지라 두려워 감히 방자하게 굴지를 못하였는데, 내가 신임하고 의심하지 않자 저들이 더욱 거리낌 없어서 말로는 동심(同心)이라 했지만 도리어 다른 뜻을 길러 왔다. 그리하여 능(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재앙의 불꽃이 크게 타올라 내가 즉위한 것을 업신여기고 왕의 자리를 마음대로 희롱하였으니, 할아비는 손자를 사주하고 아비는 자식을 조종하며, 족친(族親)이 뿌리를 박고 동당(同黨)이 바둑알처럼 깔렸었다. 태화(太和)가 바야흐로 한창인데, 영정(永貞)099)                  에다 감히 견주어 헐뜯고 무함하는 말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몰래 늙은 장수를 사주하여 부사(副師)를 바꾸어 두고는 날을 기약하여 군사를 동원해 천위(天位)의 동요(動撓)를 시도하였다. 추대(推戴)를 밀의(密議)한 것이 손바닥에 쓴 글자에서 낭자하게 드러났고, 은화(銀貨)를 널리 모아 은밀히 부시(婦侍)와 체결(締結)하여 삼수(三手)의 흉모(凶謀)를 차례로 시험하였다. 적전(赤箭)100)                  에 짐독(鴆毒)을 감추고, 현복(玄服)101)                  에 비수(匕首)를 싸기도 하였으며, 나를 혁(奕)102)                  처럼 보아 거짓 교지(敎旨)로 초(草)하기까지 하였다. 안으로는 정신(鼎臣)103)                  이 턱을 움직이어 지시하고 밖으로는 장신(將臣)의 귀를 가려서 흉흉(凶凶)한 의기(意氣)를 감히 가리켜 일컬을 수가 없었다. 정반(庭班)104)                  을 갑자기 걷어치우되, 한 사람이 외치면 천 사람이 응답하였고, 연명(聯名)한 차자(箚子)를 밤에 들이어 제 마음대로 조절(操切)하였다. 흉악한 족속의 방자한 난동이 망(莽)·조(操)·온(溫)·의(懿)105)                  와 같아서 조정 안의 급한 변란이 누란(累卵)의 형세보다도 위태하였으니, 아마도 신의 비호(庇護)가 아니었더라면 거의 나라가 유지되지 아니했으리라.
하늘이 바야흐로 재앙을 뉘우치고 사람도 진언(進言)함이 있어서 탐색해 잡고 심문해 징험하니, 종적(蹤跡)이 이와 같았다. 그 간정(奸情)과 역절(逆節)이 완전히 드러나 숨겨진 것이 없어서, 요망한 무리의 허리와 머리가 모두 길거리에서 처단되어 왕법(王法)이 쾌히 베풀어지니, 인강(人綱)이 떨어지지 않았고, 요망한 기운이 바람에 소탕되었다. 국세(國勢)가 산악처럼 우뚝하게 섰으니, 이는 실로 성충(誠忠)에 힘입음이라, 그 노고를 어찌 잊으랴? 땅을 나누어 공로에 보답하고 은사(恩賜)을 넉넉하게 할 것이며, 다시 경종(景鍾)106)                  에 새기고 금궤(金櫃)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동반(銅盤)에 피를 담고 현점(玄坫)107)                  에 벽(璧)108)                  을 세워 저 푸른 하늘에 약속하고 이 맑은 물에 맹세한다. 옛 장덕(長德)의 운잉(雲仍)109)                   또한 반차(班次)에 나와 더불어 휴척(休戚)을 함께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다짐하니, 진실로 이 맹세를 변한다면, 신(神)께서 감지(監止)를 내리실 것이다."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부복(俯伏)했다가 일어나 사배(四拜)하였으며, 제자리에 있는 자들도 모두 절하였다. 예(禮)가 끝나니 찬례(贊禮)가 임금을 인도하여 임금이 도로 악차(幄次)에 이르러 규를 놓고 면복을 벗었다. 찬인(贊引)이 모든 공신과 배제관을 이끌고 차례대로 나가자, 독서문관(讀誓文官)이 서문을 가져다 희생 위에 놓고 구덩이에 묻은 뒤 흙을 채웠다. 찬인이 독서문관 이하 모든 집사를 이끌고 함께 배위(拜位)로 되돌아가서 사배한 뒤 차례차례 나갔다. 전의(典儀)가 알자(謁者)와 찬인을 인솔하고 또 사배한 뒤 나갔고, 전사관(典祀官)이 드디어 찬(饌)을 거두고 물러나니, 임금이 비로소 환궁(還宮)하였다. 왕세제(王世弟)도 또한 어가를 따라 제사에 참여하였다.

 

3월 12일 신묘

녹훈 도감(錄勳都監)에서 계품(啓稟)하기를,
"목호룡(睦虎龍)을 단록(單錄) 3등으로 하고, 훈호(勳號) 가운데서 ‘갈성 효력(竭誠效力)’이란 네 글자는 줄여버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3일 임진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임어하여 교축(敎軸)을 반포하니, 노부(鹵簿)110)  의 진열과 고취(鼓吹)의 설치를 모두 의식대로 하고, 이어 교지(敎旨)를 선포하였으니,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왕법(王法)에 난역(亂逆)의 주토(誅討)보다 엄한 것은 없고, 공로(功勞)의 수보(酬報)를 방전(邦典)에서 중하게 여긴다. 이에 대려(帶礪)111)  의 맹세를 거듭하기 위하여 윤발(綸綍)의 어음(語音)을 펴노라. 길이 생각하건대 보잘것 없는 내가 참람하게도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암려(闇廬)112)  에 있으면서 도(道)를 생각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고침이 없어야 한다는 성인의 법을 따른 것이었고, 낭묘(廊廟)에서 성적(成績)을 독책하였으니 또한 옛것을 구하라는 경훈(經訓)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바로 거족(巨族) 대가(大家)에서 나올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일찍이 내가 저궁(儲宮)에 있을 때 이미 동요(動撓)할 계책을 꾸몄는데, 사복(嗣服)한 뒤에 이르자 더욱 반측(反側)113)  의 마음을 품었다. 처음에는 영고(寧考)의 지명(至明)하심을 두려워하여 화심(禍心)을 행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과매(寡昧)한 내가 고립(孤立)된 것을 얕잡아보고 음모(陰謀)가 더욱 깊어만 갔다. 무릇 은밀한 곳에서 경영한 바는 하늘을 뒤덮을 악역(惡逆)이 아닌 것이 없었으니, 손바닥 위에 쓴 글자는 흉괴(凶魁)를 몰래 추대(推戴)한 것이었고, 대궐 안에 군사를 배치한 것은 그 지수(指授)가 오로지 노적(老賊)에게서 나왔다.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여 악을 이루니, 여기(厲氣)가 한집안에 모였고, 교만과 방자함이 이미 넘치자 간사한 마음이 열렸으니, 밀계(密計)가 연석(聯席)에서 합치되었다. 끝내는 네 번째의 차자(箚子)가 갑자기 올라왔으니, 실로 삼수(三手)를 몰래 배치한 빌미가 되었다. 조아(爪牙)로 의부(依附)하는 자가 점점 불어나자 수미(首尾)의 포치(布置)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금백(金帛)을 가지고 밤중에 달린 것은 환관(宦官)과 궁첩(宮妾)과 교통하고자 한 것이었고, 귀역(鬼蜮)114)  이 백주에 횡행한 것은 요인(妖人)과 사사(死士)의 체결(締結)을 위한 것이었다. 독약(毒藥)을 먼 나라의 저자에서 사왔으니, 이 어찌 차마 마음에 싹틔울 수 있는 것이며, 번득이는 칼날을 몰래 숨겼으니, 장차 어느 곳에서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던가?
위태로웠도다. 계책은 독하고 뜻이 악하였으니, 생각할수록 뼈에 사무치도록 놀랍고 마음이 섬뜩하다. 오랫동안 복(福)을 주고 위세를 떨치는 권세를 휘둘러 부도(不道)한 일을 자행하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에 된 일이겠는가? 서서히 이루어져 도모하기 어려운 데 이르렀던 것이다. 차츰차츰 갉아먹어 살갗까지 침식(侵蝕)해 들어왔으니, 사기(事機)가 이미 주액(肘腋)까지 핍박하였고 섶을 쌓고 불을 지르니, 화란(禍亂)이 종팽(宗祊)115)  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급서(急書)로 상문(上聞)함에 힘입어 드디어 죄인(罪人)을 즉시 잡았고, 원사(爰辭)116)  를 일제히 승복하자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남김업이 토로(吐露)했다. 원악(元惡)을 아울러 섬멸하여 며칠 되지 않아 위의(危疑)했던 일들이 안정되기에 이르렀고, 요망(妖妄)한 무리의 허리와 머리는 날카로운 도끼[斧]에 기름칠을 해도 말이 없었고, 그 나머지의 지얼(支孽)은 천망(天網)에 부딪쳐 다함께 부숴졌다. 생각건대 이처럼 확청(廓淸)한 경사는 모두가 발고(發告)한 공에서 연유된 것이다. 숨은 것을 찾아내고 깊은 것을 캐내어 여러 역적의 정형(情形)이 누설(漏洩)됨이 없으니, 충성을 다 바쳐 의(義)로 향하는 한 가닥 정성이 가상(嘉尙)하도다.
아! 그 차츰차츰 꾸며온 지 30년인데, 이제 하루동안에 깨끗이 소탕할 수 있었다. 흉악한 자를 제거하고 재앙을 그치게 하니, 국세(國勢)는 반석(盤石) 같은 안정을 누리게 되었고, 공(功)을 상주고 훈호(勳號)를 내리니, 명수(名數)117)  는 모토(茅土)118)  의 법을 상고하였다. 철권(鐵券)119)  을 반포하여 공적(功績)의 등제(等第)를 기록하는 것은 대개 옛 법을 쓴 것이며, 운대(雲臺)120)  에 나아가 초상을 그리고 단청(丹靑)을 올림은 영원히 전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날을 가려 깨끗한 마음으로 의식을 거행하고, 하늘에 고(告)하여 삽혈(歃血)121)  하며 거듭 맹세하였다. 욕의(縟儀)를 갖추어 거행하였으니, 모두 상헌(常憲)을 따른 것이다. 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보전함을 귀하게 여기니, 너희는 씻고 털어주는 특별한 이 은사(思私)를 잊지 말라. 은총의 명령이 새로우니 충순(忠順)한 마음으로 공경히 복종할 것이며, 융숭한 마음을 바꾸지 않아 후인에게 미칠 것을 기약하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생각건대 마땅히 다 알 것이다."
하고, 또 공신 목호룡에게도 교서(敎書)를 선포하였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맹제(盟祭)의 준여(餕餘)122)  를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열린 모든 공신(功臣)의 여복연(餘福宴)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김범갑(金范甲)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도봉 서원(道峰書院)은 곧 선정신(先下臣) 조광조(趙光祖)를 타령(妥靈)123)  한 곳이었는데, 일찍이 병자년124)  에 송시열(宋時烈)을 아울러 향사(享祀)했으니, 어찌 식자(識者)들이 놀라 탄식하고 사림(士林)이 답답해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아! 춘추 대의(春秋大義)란 송시열이 세상을 속이는 패병(欛柄)125)  이었습니다. 효종(孝宗)께서는 실효(實效)를 구하셨는데, 송시열은 허성(虛聲)으로 응했고, 효종께서는 성의(誠意)로 대우하셨는데 송시열은 거짓으로 이용하였습니다. 평생의 기량이 다만 한 세상을 속이는 데 있었고, 실제 사업에 이르러서는 척촌(尺寸)만큼도 일컬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가 글을 보내어 그 빈말일 뿐 실상이 없음을 깊이 배척했으니, 그 심지(心地)가 회휼(回譎)함과 대의(大義)의 허식적인 것을 식자(識者)의 공안(公眼)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대체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현묘(顯廟)께서 사위(嗣位)하신 초년을 당해서는 영안(永安)의 조서(詔書)126)  를 받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나아가기 어려운 사단으로 핑계대더니, 경신년127)   재기(再起)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일언 반구도 대의(大義)에 대해서는 언급한 일이 없었으니, 어찌하여 그 앞뒤가 한결같이 이처럼 상반되었는지요? 더구나 그가 찬(撰)한 고(故) 상신(相臣) 김유(金瑬)의 묘명(墓銘)에 주화(主和)한 일절(一節)을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에 이르러 그의 평생토록 고집한 바의 대의(大義)가 그의 허성(虛聲)과 더불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으니, 진실을 가장하여 허위를 파는 모습이 도처에서 탄로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아! 주자(朱子)를 모의(模擬)하는 것이 곧 송시열의 일생 동안의 기양(技癢)128)  이었습니다. 곧 그의 문집(文集)을 보면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반드시 주자로 자처하고, 한 가지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주자에 견주었습니다. 아! 주자와 송시열은 현(賢)·사(邪)와 의(義)·이(利)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할 정도가 아닌데, 반드시 곧 빙자하고 가탁하였으니, 이는 왕망(王莽)이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본받는다고 한 것과 어찌 그렇게 서로 같습니까? 저 송시열은 이름을 훔치고 값을 찾아 잠시 왔다가 잠시 가기도 하더니, 종말의 국면(局面)이 번복(飜覆)될 즈음에는 앞장서 나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빠뜨리고 자기에게 빌붙는 자는 끌어올려 주는 등 제 하고 싶은 대로 권세를 탐하고 즐겼으며, 훈척(勳戚)과 단단히 결탁하여 함께 악(惡)한 일을 서로 이루었습니다. 무고(誣告)한 간적(奸賊)을 부호(扶護)하고 사류(士類)의 청의(淸議)를 배격함으로써 세도(世道)는 점점 붕괴(崩壞)되고 인심(人心)은 날로 함닉(陷溺)하게 서서히 만들더니, 신축년129)  의 화변(禍變)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흉역(凶逆)들이 기세를 떨치고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웠던 것도 모두 송시열이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 송시열의 가슴속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오직 한 조각의 기심(忮心)130)  뿐이었으니, 바른이를 상해하는 수단이 쇄록(瑣錄)의 편(篇)에 더욱 드러났습니다. 문자(文字)를 따내어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고, 김창집(金昌集)·신구(申球) 등 여러 역적에게 술법을 전하여 병신년131)  의 화(禍)를 빚어내게 하였으니, 일찍이 유자(儒者)로 일컬었던 자가 또한 이러한 소인배(小人輩)의 사람으로 함해(陷害)하는 버릇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까? 아! 송시열은 남을 추욕(醜辱)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던 것입니다. 윤선거(尹宣擧)는 곧 송시열의 외우(畏友)였습니다. 무너져 내리는 물결속에 지주(砥桂)라 포장(褒章)하고 천지(天地) 사이의 해와 별이라고 일컬었으니, 그의 경복(敬服)한 바가 지극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저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이 그 본원(本源)을 의심한 뒤로부터 비로소 분한 마음을 내기 시작하여 공공연하게 추악한 욕을 함부로 하였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비난한 사람에게 노여운 마음을 품고 도리어 남의 부모를 비방하는 것은 비록 여항(閭巷)의 어린아이라도 또한 하지 않는 법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은 송시열과 같은 조정에서 서로 좋아지내는 사이였는데도 혹 한두 가지 그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언제나 추악한 욕을 서로 더하였으며, 저 윤휴(尹鑴)에 이르러서는 본래 하나의 간신(奸臣)이었은즉, 간사한 자라고 공격해도 좋고 흉얼(凶孽)이라고 배격해도 좋은데, 송시열은 그가 살고 있던 동리의 이름이 개곡(介谷)이라 하여 윤휴를 일러 구(狗)라 하기도 하고 혹은 견(犬)이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추악하고 패려(悖戾)한 말은 비록 도시(屠市)의 사이에 악소년(惡少年)으로 하여금 하라고 해도 또한 얼굴에 땀을 흘리고 부끄러운 줄을 알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그의 문집을 가져다 보소서. 그러면 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흉휼(凶譎)함이 송시열과 같고 험피(險詖)함이 송시열과 같은 사람을 도봉 서원에 함께 제향한다면 선현(先賢)에게 욕을 끼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을 것이니, 출향(黜享)하는 거조가 어찌 하루가 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송시열을 입향(入享)할 때 고(故) 상신(相臣) 윤지선(尹趾善)이 소를 올려 다투어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하였으니, 이로써 보더라도 당초에 합향(合享)한 것은 실제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해조(該曹)에 명하시어 송시열의 원향(院享)을 철거(撤去)하게 하소서.
하였다. 소가 들어온 지 오래 되었으나 회보(回報)하지 않자, 사도(四道)의 유생(儒生)과 생원(生員) 최탁(崔鐸) 등이 또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심각하고 참혹하여 심지어 이르기를,
"지난 무진년132)  에 장차 책례(冊禮)를 행하려고 하자, 송시열이 이에 감히 소를 올려 다투었는데, 그때 선왕(先王)께서 특별히 비망(備忘)을 내리시어 ‘드러나게 부족(不足)하게 여기는 뜻이 있다.’ 하시며 준엄하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일종(一種)의 불령(不逞)한 무리들은 거개 다 그의 말을 존신(尊信)하였습니다. 그래서 창규(敞奎)133)  의 무리가 앞에서 창도(倡導)하고 이집(頤集)134)  의 당(黨)이 뒤에서 계속하여, 흉당(凶黨)들이 기세를 떨치자 종사(宗祀)가 거의 위태로울 뻔하였습니다. 그 정절(情節)을 추구해 보건대 다만 이 불만(不滿)과 부족(不足)한 마음에서 싹터 나온 것인즉, 송시열이 비록 악역(惡逆)은 아니라 하더라도 악역이 나오게 된 것이 반드시 송시열에게서 연유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시열이 장기(長鬐)에 천극(栫棘)되었을 때 시를 지어 이르기를, ‘천리 밖에도 또한 오랑캐 땅인데, 4, 5년 이래 태평성대를 노래 부르네. 노랫소리 피리소리 크게 울리는 달밝은 밤, 옛 신하 도리어 영정행(永貞行)을 읊조리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록 희적(喜賊)135)  이 지은 영정행의 장황한 사설(辭說)과는 다름이 있다 하나, 그가 비난하고 경멸한 것이 또한 어찌 난적(亂賊)의 효시(嚆矢)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또 회보하지 아니하자, 성균관(成均館)에서 계품(啓稟)하기를,
"비지(批旨)를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시어 허다한 유생(儒生)들이 장차 과시(科試)에 나아갈 수가 없으니, 마땅히 처분(處分)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고, 승지(承旨)도 또한 여러 번 말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비로소 답(答)을 내리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조(李肇)가 연중(筵中)에서 진백(陳白)하기를,
"송시열을 병향(並享)할 때에 이미 물론(物論)이 있었으니, 선대왕(先大王)의 본지(本旨)가 있는 바를 우러러 알 수 있는데, 그대로 지금까지 미루어 왔습니다. 많은 선비들의 공의(公議)가 이미 발론되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고,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도 또한 그대로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도봉 서원의 병향은 공공(公共)의 의논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니, 기뻐하지 않는 자의 은밀한 논의는 본래 있음직한 일이다. 하지만 김범갑 등이 때를 타 꾸짖고 헐뜯으면서 심지어 신축년136)  의 화를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과연 이것이 참된 시비(是非)가 되겠는가? 사향(祀享)의 중전(重典)은 이미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을 거친 것인데, 한 예관(禮官)의 용이한 진청(陳請)으로 하루아침에 철파(撤罷)했으니, 몹시 전도(顚倒)된 일이다.

 

3월 14일 계사

정수기(鄭壽期)를 사간(司諫)으로, 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또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 오지 않으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경(卿)은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과인(寡人)과 더불어 휴척(休戚)을 같이하였으니, 젊은 사람의 과격한 말에 어찌 마음걸려 할 것이 있겠는가? 모름지기 한 몸이 되어 서로 의지하는 의(義)를 생각하여 속히 나와 논도(論道)하라."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개유하고 이내 함께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체직을 바랐다. 대략에 이르기를,
"옛날 선조조(宣祖朝)의 평난 공신(平難功臣)137)  을 녹훈(錄勳)할 때는 참국(參鞫)한 여러 신하들이 과연 훈적(勳籍)에 들어갔으니, 이는 일찍이 정식(定式)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조(仁祖)께서 개옥(改玉)하신 뒤에 이르러서는 옥사를 다스린 모든 신하들은 감록(勘錄)을 허용하지 말도록 하고, 그것을 그대로 성헌(成憲)으로 삼았으니, 인조조(仁祖朝)의 다섯 공신(功臣)138)  에 모두 거론(擧論)한 일이 없었습니다. 효종조(孝宗朝)에 일어났던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도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가 있었으나 처음부터 녹훈을 감정하지 않았으며, 선조(先朝) 경신년139)  의 옥사에도 또한 참록(參錄)한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사조(四朝)에서 이미 행한 정규(定規)를 따르지 않고 멀리 2백 년 전의 평난 공신의 고사(故事)를 취한다면 국체(國體)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큰 옥사가 있고 난 뒤에 녹훈(祿勳)할 사람이 없다 하여 구차하게 숫자만 채운다면, 어찌 사체(事體)를 무너뜨려 손상시키고 후세에 비난을 끼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언관(言官)의 청을 넉넉하게 용납하는 것이 대의(大意)는 본시 좋으나, 그 일이 조정을 부정(不靖)하게 만든 사단과 관계된다면, 파직(罷職)의 박벌(薄罰)은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신(臣)이 근심하는 바는 세도(世道)를 위한 것이요, 이진유(李眞儒)가 여러 대관들의 보임(補任)을 청한 것도 조정(調停)하려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다만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경솔한 병통을 면하지 못했으니, 한 번 서로 규제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녹훈하는 일은 진실로 사체를 얻었으니, 경(卿)은 편안하기 어려운 사단이 없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일전에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 소(疏)를 올려 단훈(單勳)의 실책을 논(論)하고, 아울러 그가 청하여 유수원(柳壽垣)을 파직시키고 특별히 이진유를 체직시킨 것을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3월 15일 갑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3월 16일 을미

밤 1경에 달에 양이(兩珥)가 있었고, 1경부터 5경까지 달무리하였다.

 

토역 정시(討逆庭試)를 설행하여 문과(文科)에서 박사유(朴師游) 등 13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유덕징(柳德徵) 등 4백 78인을 뽑았다.

 

충청도(忠淸道) 천안(天安)의 광덕사(廣德寺)가 불타고, 단양군(丹陽郡)의 아사(衙舍)140)  와 민가(民家) 1백 40호가 같은 날 불탔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자 불탄 민인(民人)에게 1년을 한정하여 신역(身役)을 감면해 주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건백(建白)한 것이다.

 

3월 17일 병신

임금이 삼리혈(三里穴)에 뜸을 떴다. 각부(脚部)에 마비(麻痺)의 증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 18일 정유

고변(告變)한 사람 목호룡(睦虎龍)에게 역적의 집 한 구(區)를 주었다. 대개 구례(舊例)를 따른 것이었다.

 

3월 19일 무술

매상(昧爽)으로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이진순(李眞淳)을 집의(執義)로, 유수(柳綏)를 지평(持平)으로, 성덕윤(成德潤)을 정언(正言)으로, 이세덕(李世德)을 사간(司諫)으로, 윤유(尹游)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또 뜸을 떴다.

 

3월 20일 기해

매상(昧爽)으로부터 진시(辰時)에 이르기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임금이 또 뜸을 떴다. 제조(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연이어 환제(丸劑)를 복용할 일을 누누이 진청(陳請)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3월 21일 경자

매상(昧爽)으로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고,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하였다.

 

임금이 상신(相臣) 및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정제(李廷濟)는 거듭 대신(臺臣)에게 탄핵을 당했습니다만, 이정제는 정상(精詳)하고 명민(明敏)하여 일찍이 선조(先朝) 때 특별히 은총과 포상(褒賞)을 받았습니다. 또 죄인(罪人)을 부문(賻問)했다는 일은 더욱 맹랑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그 직임을 보도록 하는 것은 예(禮)를 갖추어 부리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으니, 청컨대 우선 체직을 허락하고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재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잘 가려서 자급(資級)을 올려 의망(擬望)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계속해 말하기를,
"윤순(尹淳)은 문예(文藝)와 재식(才識)이 동류(同流)보다 훨씬 뛰어나고 이정제는 재능과 인망이 본래 알려졌으며 황정(荒政)에도 예리한 뜻을 두어 왔는데, 이에 전혀 근거없는 일을 가지고 극력 헐뜯고 욕하였습니다. 심지어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율(律)로 단정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대계(臺啓)는 마땅히 엄하게 배척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양역(良役)을 인족(麟族)에게 침징(侵徵)하는 것은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데, 열읍(列邑)의 수령(守令)들이 걸핏하면 재황(災荒)이 있다 하여 공동(恐動)하고, 감사(監司)는 세초(歲抄)를 정지할 것을 청하여 궐액(闕額)을 숱하게 많이 생기게 하니, 그 징수가 인족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청컨대 제도(諸道)에 하유(下諭)하여 각 고을을 독려하게 하여 세초의 한정에 구애되지 말고 시일을 두고 비는 대로 보충하고 메꾸어서 궐액(闕額)이 없게 하소서."
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조(李肇)도 이광좌의 말이 옳다고 하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관서(闕西)의 열읍(列邑)은 조폐(凋弊)함이 특히 심합니다. 그 중에서 귀성(龜城)·운산(雲山) 두 고을은 백성들이 모두 유산(流散)하여 8천 호였던 귀성은 지금 3천 호도 차지 않고 5천 호였던 운산은 지금은 단지 2천 호 뿐입니다. 반드시 민력(民力)을 늦추어 주어야 인민을 다시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이니, 두 고을의 전세(田稅)를 청컨대 3년을 한정하여 반감(半減)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집의(執義) 이진순(李眞淳)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김여(金礪)를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라는 일과 임창(任敞)을 빨리 처형하라는 일과 평안 병사(平安兵使) 남태징(南泰徵)을 파직(罷職)하라는 등의 일만 따랐다. 또 논(論)하기를,
"금번 역적의 정절(情節)은 실로 전고(前古)에 없던 변(變)입니다. 옥지(玉趾)141)  로 친림(親臨)하시어 대려(帶礪)의 맹세를 밝히시고, 옛 공신(功臣)의 후예(後裔)들도 일제히 와서 참여하게 한 것은 실로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뜻이었는데, 일종(一種)의 음사(陰邪)한 무리들이 토복(討復)의 의(義)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용납하고 두호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자신이 적장(嫡長)이면서도 무단히 불참하였으니, 청컨대 훈부(勳府)로 하여금 이름을 지적하여 현고(現告)하게 하고,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平安道) 자산(慈山) 땅에 금(金)이 산출되어 박권(朴權)이 감사(監司)로 있을 때부터 채취하자는 청이 있었으나, 묘당(廟堂)에서 ‘저 나라에서 금공(金貢)을 감한 것이 우리 나라의 소산(所産)이 아니라는 이유였는데, 혹 간사한 백성이 연시(燕市)에 몰래 팔아서 쉽사리 사단(事端)을 일으킬 것이라’고 염려하여 막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감사 이진검(李眞儉)이 다시 묘당에 청하자, 복계(覆啓)하여 허락하였으나, 끝내 채굴하지 않았다.

 

3월 22일 신축

윤유(尹游)를 헌납(獻納)으로, 황정(黃晸)을 지평(持平)으로, 김중희(金重熙)를 필선(弼善)으로, 강현(姜鋧)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유필원(柳弼垣)을 수찬(修撰)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김여(金礪)를 영암군(靈巖郡)에 귀양보냈다.

 

3월 23일 임인

진사(進士) 곽진위(郭鎭緯) 등이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에서 출향(黜享)하는 일을 정침할 것을 청하려고 소(疏)를 써서 정원(政院)에 이르자, 정원에서 물리쳤다. 이에 곽진위(郭鎭緯) 등이 다시 소를 올려 정원을 배척하자 비로소 품달(稟達)하고 입계(入啓)하였다. 그 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은 성대(聖代)을 만나서 지치(至治)를 도와 이르기를 기약하다가 불행하게도 뭇 소인(小人) 때문에 참소의 칼날에 화를 입어 지하(地下)에서 한(恨)을 품고 있습니다. 도학(道學)의 순정(純正)함과 시명(時命)142)  의 곤궁함이 전후로 꼭 같았으므로 사림(士林)들이 반드시 송시열을 같은 당(堂)에서 나란히 제향하였던 것이니, 그럴 만한 뜻이 있었으며, 선대왕(先大王)께서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하신 것도 또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 병자년143)  에 합향(合享)한 이후로 지금까지 무릇 몇 해가 되었지만 감히 원향(院享)에 대한 한 가지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은 다름아니라 공의(公議)를 두려워하고 선왕(先王)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때를 타고 느닷없이 튀어나와 방자하게 거리낌없이 전날 감히 하지 못하던 것을 감행하고 있으니, 또한 통탄할 일입니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나의 책무다. 나와 더불어 이를 함께 할 사람은 경(卿)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하셨으니, 이른바 실질상의 사업(事業)이란 이보다 더할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그 낭봉(囊封)144)  과 악대(幄對)에 다스리는 법도와 정벌할 계책들이 확실하게 의거할 만한 실상이 있으니,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피어린 정성으로 수치를 씻기를 도모했던 것입니다. 다만 천심(天心)이 돕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대업(大業)을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일종(一種)의 기뻐하지 않는 무리들이 은밀히 하자(瑕疵)를 찾아낼 마음을 품고는 ‘가모(假冒)’니, ‘허성(虛聲)’이니 하고 있습니다. 아! 이는 저들의 말이 아니라 곧 윤증(尹拯)의 말이며, 윤증의 말이 아니라 곧 윤선거(尹宣擧)의 말입니다.
윤선거는 한 번 강도(江都)에서 낭패한 뒤로부터 스스로 편의(便宜)한 도리(道理)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곧 죽지 않았던 것을 십분 옳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는, 이에 감히 실지(實地)의 공부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선정(先正)을 허위(虛僞)로 꾸짖어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대의(大義)’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정의 답서(答書)가 극히 엄절(嚴截)하여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인의(仁義)에 화(禍)를 끼쳤다는 설(說)을 빌린 일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윤선거의 심술(心術)이 파탄(破綻)되기에 족하였은즉, 어찌 족히 선정의 병통이 되었겠습니까? 주자(朱子)는 공자·맹자 이후의 유일한 분입니다. 송시열의 평생 심사(心事)는 주자를 법(法)받으려 한 데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김범갑(金范甲)의 무리는 도리어 주자를 빙자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맹자를 존신(尊信)한 사람으로 정자(程子)와 주자 같은 제현(諸賢)이 없는데, 정자·주자도 또한 공자와 맹자를 빙자했음을 면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현묘(顯廟)께서 사복(嗣服)하신 처음에 홍여하(洪汝河)가 제일 먼저 배알(排軋)하는 소(疏)를 올렸고, 얼마 안되어 예(禮)를 논란하는 다툼이 일어나니, 선정의 입장이 갈수록 더욱 외로와졌습니다. 막 산릉(山陵)의 일을 마치자 말자 허둥지둥 조정을 떠났으니, 그가 이른바, ‘영안(永安)의 조사를 받지 않았다.’고 운운한 두찬(杜撰)한 말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많은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선정이 장기(長鬐)로부터 돌아와서 애써 조정으로 나아갔는데, 신유년145)  에 진수당(進修堂)에 입대(入對)하여 올린 차자(箚子)와 계해년146)  에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할 것을 청해 올린 소와, 정묘년147)  에 논사(論事)한 소는 이런 의리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저 김유(金瑬)의 비(碑)도 과연 선정이 찬(撰)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이라고 말한 것은 실제 선정의 말이 아니고 곧 김유가 연대(筵對)한 말이며, 또한 오로지 주화(主和)한 일을 가리킨 것도 아니었은즉, 지금 이것을 가지고 날조하려 하고 또 뒤집어서 선정의 말이라고 이르는 것은 시례 발총(詩禮發塚)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옛부터 소인(小人)이 충현(忠賢)한 사람을 함해(陷害)할 때에 ‘훈척(勳戚)’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협박의 자료로 삼지 아니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옛날의 조여우(趙汝愚)는 송(宋)나라의 높은 훈신(勳臣)이요 종척(宗戚)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부자(朱夫子)는 일찍이 훈척이라 하여 스스로 멀리하고 의심한 바가 없었으며, 선정이 당일에 함께 사귄 사람도 모두가 척리(戚里) 중의 선류(善類)이었은즉, 또 어떻게 거절(拒絶)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신축년148)  의 변고를 서서히 만들어 냈다는 말은 더욱 지극히 참독(慘毒)합니다. 선정이 세상을 뜬 지 지금 거의 40년이 되니, 말미에 말한 일들이 선정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저 무리들의 말은 지난번 신경제(申慶濟)의 상소와 더불어 동일한 간장(肝膓)이니, 아! 또한 두려울 뿐입니다. 대개 윤선거(尹宣擧) 한 사람의 몸은 마치 둘로 갈라 나눈 것 같았은즉 마땅히 포상(褒償)할 것은 포상하고 마땅히 폄(貶)할 것은 폄할 것이니, 그 말의 저앙(低昂)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김수항(金壽恒)은 일생 동안 선정을 존신(尊信)했고 나양좌(羅良佐)는 곧 김수항의 부제(婦弟)149)  인데, 늘 두 사람의 좋은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서간(書簡)을 여러 생질[甥]에게 보내어 근거없는 말을 공공연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선정의 문을 등지고 끊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구(狗)니 견(犬)이니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윤휴(尹鑴)의 집이 구동(狗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거지에 따라 구윤(狗尹)이라고 일렀던 것이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령 윤휴가 용동(龍洞)에 살았다면 또한 용윤(龍尹)이라고 일컬었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 무리들은 또 장차 칭찬하였다고 병통으로 삼을 것입니까?
아! 이 무리들은 혈맥(血脈)이 윤휴와 더불어 유통(流通)하여 말과 논의가 절절이 부합(符合)됩니다. 기유년150)  의 서간은 윤휴가 경자년151)  에 예(禮)를 논한 설(說)과 뜻이 같고, 신유년152)  의 서간은 흉도(凶徒)가 기사년153)  에 올린 한 장의 소(疏)는 곧 노신(老臣)이 나라를 염려하는 뜻으로서 환하고 뜨거운 정성에 결단코 다른 마음이 없었는데도 흉모들의 매얼(媒蘗)로 마침내 참혹한 화란에 걸리게 하였으니, 사림(士林)들의 아픔이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신경제가 앞에서 발설하고 최탁 등이 뒤에서 이으면서 윤휴의 말을 그대로 말하고 윤휴의 행동을 그대로 행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소술(紹述)함이 스승을 계승함과 다름이 없는데, 오히려 또한 간신(奸臣)으로 지목한 것은 도과(倒戈)154)  하는 수단과 어렴풋이 의사(疑似)함이 있으니, 또한 그 사표(師表)를 잘 배웠다고 이를 만합니다. 영정시(永貞詩)는 곧 당(唐)나라 신하 한유(韓愈)가 당시의 소인(小人)을 기롱하고 질책하여 지은 것이었는데, 갑을(甲乙)의 형세로 윤휴의 무리가 반거(盤據)하던 때를 당하여 선정이 그 시를 읊었던 것은 실상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현실을 근심하고 습속을 민망스럽게 여긴 뜻이었은즉,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선정에게 죄를 얽는단 말입니까? 만약 이것을 가지고 비난하였다는 죄율을 가한다면 한 문공(韓文公)이 당연히 먼저 그 죄를 입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마음 아파할 일은 종[奴]이 되어 구차하게 목숨을 건져 명의(名義)에 죄를 얻어 선조(先朝) 때 출향(黜享)한 윤선거는 버젓이 복향(復享)되고 정론(正論)을 부식(扶植)하고 간사한 것을 물리쳐서 몸소 대의(大義)를 자임(自任)해 선조 때 숭보(崇報)했던 선정은 갑자기 출향하려 한 것이니, 오늘의 거조(擧措)가 어찌 한결같이 거꾸로 되는지요? 백세(百世)의 뒷날에 장차 오늘날을 어떠한 때로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소가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환급(還給)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다시 상소(上疏)하여 간곡히 사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5일 갑진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이진유(李眞儒)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송성명(宋成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명의(李明誼)와 조원명(趙遠命)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조지빈(趙趾彬)을 정언(正言)으로, 이하원(李夏源)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이정제(李廷濟)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전(前) 승지(承旨) 이교악(李喬岳)이 김범갑(金范甲)이 그의 스승 송시열(宋時烈)의 도봉 서원(道峰書院)의 원향(院享)에서 철거하도록 청한 일 때문에 상소(上疏)하여 송변(訟辯)하기를,
"선정(先正)은 평일에 한 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을 언제나 주자(朱子)를 본받아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밝히는 것을 제일 중요한 일로 삼았으며, 연원(淵源)과 문로(門路)를 문정공(門正公)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생을 기꺼이 사모하고, 죽을 때까지 존경(尊敬)하였으며 끝에 가서 화(禍)를 당한 것도 전후로 일치하였으니, 한 사당에 함께 제향하는 것은 예법에 있어서 또한 합당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특별히 그 소청을 윤허하셨고, 그로부터 30년 동안 조정에서도 사람들이 다른 논의(論議)가 없었습니다. 병신년155)  에 옥후(玉候)가 침엄(沈淹)하신 중에도 손수 ‘화양 서원(華陽書院)’이란 네 글자를 쓰시고 승지를 보내어 따로 제사를 내리셨습니다. 비록 일종(一種)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무리들이 있어 나양좌(羅良佐) 무리의 농락(籠絡)하는 수단과 기사년156)   당인(黨人)들의 남긴 투식을 전해 받아 기필코 선정을 오욕(汚辱)하고 죄로 얽어 헤하려 하였지만 감히 마음을 먹지 못했던 것은 특히 그들 마음에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일 뿐이었습니다. 한을 품고 원망을 쌓아가며 참고 때를 기다리다가 선어(仙馭)가 이미 멀어진 뒤에 이르러 떼 지어 일어나 때를 타 날뛰면서 허구 날조하는 것도 부족하여 다시 욕하고 더럽히고, 욕하고 더럽히는 것도 부족하여 또 다시 장찬(粧撰)을 더하니,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선왕(先王)의 ‘나의 뜻을 요동하지 말게 하라.’는 교지를 본받으시어 속히 통렬히 배척하시어 방자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소가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도록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환급(還給)하라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論)하기를,
"진사(進士) 곽진위(郭鎭緯)는 그 소(疏)에서 한 말이 추패(醜悖)하고 두서가 없어 전혀 돌아보고 꺼림이 없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의 도봉 서원(道峰書院)의 배향(配享)을 마땅히 내치느냐 마땅히 그대로 두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절로 일세(一世)의 공의(公議)가 있는 것이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선정(先正)의 부지(父子)와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군말을 끼워넣어 공공연하게 침범하고 욕을 하였습니다. 영정시(永貞詩)를 변명하는 데 이르러서는 송시열을 한유(韓愈)에게 견주었으니, 아무리 저 무리들이 송시열을 존모(尊慕)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선조(先朝)를 순종(順宗)에게 견주는 것이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러한 말을 함부로 지껄이게 한다면 희적(喜賊)157)  의 속영정행(續永貞行)이란 시도 또한 한유를 모방한 것이라고 하여 구해(救解)의 장본(張本)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 끼쳐질 해(害)가 마침내 사람의 기강(紀綱)을 멸절(滅絶)시키고 국가(國家)가 난망(亂亡)하는 데 이른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이교악(李喬岳)은 스승을 신변(伸辨)한다는 핑계로 한 장의 소를 올렸는데 억지로 문제 밖의 말을 끌어다가 선정 부자를 한없이 무욕(誣辱)하였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또 이른바 ‘한을 품고 원망을 쌓아 왔다.’느니, ‘선어(仙馭)가 이미 멀어졌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더욱 지극히 절패(絶悖)합니다. 이교악도 또한 전하(殿下)의 신자(臣子)이니, 어찌 감히 이러한 말들을 마음 속에 싹틔우고 입 밖에 낸단 말입니까? 그 무륜(無倫)·무엄(無嚴)한 죄를 징계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청컨대 먼 곳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생원(生員) 안윤중(安允中)이 소(疏)를 올려 선정을 욕했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곽진위·이교악·안윤중 등의 일만 윤허하였다.

 

3월 26일 을사

간원(諫院)에서 【사간(司諫) 이세덕(李世德)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論)하기를,
"역옥(逆獄)의 수사(收司)는 왕법(王法)이 지극히 엄하여 부자(父子) 관계면 사형에 연좌되고 형제(兄弟) 관계면 정배(定配)에 연좌되니, 이것은 국조(國朝) 3백 년 동안 바뀌지 않았던 상헌(常憲)입니다. 《선원보략(璿源譜略)》 가운데 오단(吳端)의 관작(官爵)을 추삭(追削)했기 때문이니, 이것은 충분히 의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됩니다. 그런데 금번 복법(伏法)된 여러 역적의 아비와 형제로서 관작이 있는 자를 유사(攸司)가 심상하게 보고 대간(臺諫)도 또한 거론하지 아니하니, 국체(國體)에 있어 어떻게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청컨대 관작이 있는 자는 모두 추탈(追奪)하고, 서원(書院)이 있어 전향(專享)된 자는 헐어버리며, 부향(附享)된 자는 내치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윤시택(尹時澤)이 최복(衰服)으로 입장(入場)하고 이성채(李星彩) 부자(父子)가 차술(借述)하여 등과(登科)한 일을 본도(本道)에서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하는 관원이 편벽되게 두호하고 사사로운 정에 따라 한결같이 간사하게 속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청컨대 해당 사관(査官)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윤시택은 다시 본도로 하여금 끝까지 조사하여 그 실정을 캐내고 법에 의하여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또 전(前) 현감(縣監) 이의종(李義宗)은 그 족숙(族叔)의 재산을 탐하여 스스로 그 후사(後嗣)가 되기를 원하였고, 집이 희적(喜賊)과 가까워서 여러 해 동안 빌붙어 지내다가 복법(伏法)되기에 이르러서는 마치 사친(私親)처럼 슬퍼하였으니, 현저하게 역적을 두호하는 뜻이 있었으며, 공공연하게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습니다. 청컨대 변방 먼 곳에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창성 부사(昌城府使) 민창기(閔昌基)는 병을 핑계로 파직을 도모하려 하다가 대계(臺啓)가 그대로 두기를 청했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전최(殿最)에서 중고(中考)에 들어 기필코 체칙되고 말았으니, 청컨대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진검(李眞儉)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으나,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宮人)의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교악(李喬岳)을 경산현(慶山縣)에 귀양보냈다.

 

3월 27일 병오

경상도(慶尙道)의 진보(眞寶)·영암(靈岩) 등지와 충청도(忠淸道)의 영동(永同)·연산(連山) 등지와 전라도(全羅道)의 진산(珍山) 지방에 밤마다 서리가 내려 풀잎이 모두 마르고 벼가 손상되었다고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알려 왔다.

 

송성명(宋城明)·이진유(李眞儒)를 승지(承旨)로, 김수(金洙)를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곽진위(郭鎭緯)를 금갑도(金甲島)에, 안윤중(安允中)을 운산군(雲山郡)에 정배(定配)하였다.

 

3월 28일 정미

우박(雨雹)이 내렸는데, 모양이 팥과 같았고, 신시(申時)에는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경기(京畿)의 삭녕(朔寧)·교하(交河) 등지에 우박(雨雹)이 섞여 내렸는데, 모양이 새알과 같았다고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로 알려왔다.

 

유숭(兪崇)을 강진현(康津縣)에, 이의종(李義宗)을 철산부(鐵山府)에 정배(定配)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삼(李森)이 병으로 소(疏)를 올려 탕목(湯沐)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부절(符節)을 차고 왕래하라고 명하였다.

 

3월 29일 무신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제두(鄭齊斗)가 또 사직소를 올리고 오지 아니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고 속히 올라오도록 하였다.

 

3월 30일 기유

묘시(卯時)에 햇무리하였다.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햇무리를 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반조(頒詔)하는 청사(淸使) 액진명(額眞明) 등의 패문(牌文)이 나왔다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치계(馳啓)하니, 조태억(趙泰億)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다시 상소(上疏)하여 힘써 사직하니, 임금이 따뜻한 유지(諭旨)로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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