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2권, 경종 3년 1723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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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경술

약방(藥房)에서 여러 의관(醫官)들을 데리고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성상께 자주 기(氣)가 치밀어 오르는 증세가 있다고 하니, 더욱 조섭하셔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의관들로 하여금 하루 건너 한 번씩 진찰하게 하소서,"
하고, 또 유의(儒醫)도 불러 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이 소대(召對)할 때에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유시모(柳時模)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아산 현감(牙山縣監) 송수량(宋秀良)은 조미(糶米)를 갑절로 거두어 들이고 재결(災結)을 사사로이 이용했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금천 군수(金川郡守) 이중국(李重國)은 춘분(春分) 뒤에 그 처(妻)를 데리고 가면서 첩(妾)의 행차라고 속였고, 뇌물을 받고 짐짓 살옥(殺獄)을 풀어주었으며, 군정(軍丁)을 찾아내어 아전과 이익을 나누었으니, 청컨대 또한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송수량과 이중국의 일만 따랐다.

 

4월 2일 신해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남포 현감(藍蒲縣監) 손석조(孫碩祖)는 수백 결(結)의 재결(災結)을 사용(私用)하였고, 또 감히 선정(先正)을 헐뜯고 욕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고 단지 손석조(孫碩祖)의 일만 윤허하였다.

 

진하 정사(進賀正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부사(副使) 서명균(徐命均)·서장관(書狀官) 유만중(柳萬重) 등이 임금에게 하직하고 떠났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부사(副使) 이만선(李萬選) 등이 복명(復命)하였다. 강희제(康熙帝)의 부음(訃音)이 온 뒤로 민심이 흉흉하여 진정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오명항(吳命恒)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고, 박사유(朴師遊)는 단망(單望)으로 전적(典籍)에 임명(任命)하고, 유덕징(柳德徵)은 군자 주부(軍資主簿)에 단망으로 임명하였으니, 이들은 문과(文科)·무과(武科)에서 각각 일등(一等)으로 뽑힌 사람이었다.

 

4월 3일 임자

2경(二更)에 유성(流星)이 하늘의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서 동쪽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크기는 주먹만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또 병으로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임금이 답하기를,
"지극한 뜻을 남김없이 다하였는데 다시 무슨 효유(曉諭)를 많이 하겠는가? 빨리 조정으로 돌아와서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서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病)을 치료하게 하였다.

 

4월 4일 계축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연경(燕京)의 걱정스러움과 나라 안의 허술한 상황을 갖추 아뢰고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를 돈소(敦召)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최석항이 말하기를,
"그러면 정원(政院)에서 별도로 개유(開諭)하여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교(上敎)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또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비지(批旨)를 속히 내려 직무(職務)를 비워두지 않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역적(逆賊)의 부자 형제에 대하여 추탈(追奪)하라는 계달(啓達)을 비록 이미 윤허해 따르셨지만, 대계(臺啓)에 언급한 오단(吳端)의 일은 뒤에 개본(改本)158)  하여 관작(官爵)을 모두 쓰도록 하였고 죽은 사람에게 증시(贈諡)까지 하였은즉, 조정에서 본래 추탈(追奪)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원향(院享)은 선비들이 스스로 마련한 것이니,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닙니다. 지금 만일 예전에 없던 규칙을 처음 만들어 시행한다면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추삭(追削)과 서원(書院)을 훼철(毁撤)하는 등의 일은 모두 거두어들임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 이진유(李眞儒)가 이어 서원(書院)의 폐단을 잇따라 진달하고 인하여 첩설(疊設)159)  이나 외람되게 향사(享祀)하는 것을 훼철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최석항이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鞫廳罪人) 조성복(趙聖復)·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는 일찍이 작처(酌處)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차자(箚子)로써 아뢰기도 하고 또는 직접 여쭙기도 하여 지난번에 윤허(允許)를 받았는데,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환수(還收)하셨습니다. 대옥(大獄)으로 처리하여 모조리 죽인 나머지 요행히 면한 한두 사람이 있다 해도 그리 큰 실형(失刑)에는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게다가 설국(設鞫)한 지 일 년이나 되었고, 또 때마침 만물(萬物)이 생육(生育)하는 봄과 여름이라 다시 설국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본받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진유(李眞儒)가 그에 대해 반대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명령이 한결같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고 법(法)이 공평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징계되지 않는다. 하물며 형살(刑殺)이 인주(人主)가 가진 큰 권한임에랴? 이 세 사람의 죄는 경중(輕重)이 서로 다르니, 정범(情犯)을 헤아려 임금이 스스로 결정해야 진실로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 대신(大臣)이 작처(酌處)를 청하면 허락하고 내일 대신(臺臣)이 안치(按治)를 청하면 또 윤허하여 처분(處分)이 전도(顚倒)되고 듣는 자들이 갈수록 의혹하니, 통탄(痛歎)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진유의 경우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윤종(允從)할 필요가 없다고 청하는데, 인주(人主)의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일의 옳고 그른 것을 보아 따르든지 말든지 할 뿐이다. 어찌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로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조짐을 열어주기에 꼭 좋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87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158] 개본(改本) : 원본(原本)을 고침.[註 159] 첩설(疊設) : 중첩하여 설치함.
사신은 말한다. "명령이 한결같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고 법(法)이 공평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징계되지 않는다. 하물며 형살(刑殺)이 인주(人主)가 가진 큰 권한임에랴? 이 세 사람의 죄는 경중(輕重)이 서로 다르니, 정범(情犯)을 헤아려 임금이 스스로 결정해야 진실로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 대신(大臣)이 작처(酌處)를 청하면 허락하고 내일 대신(臺臣)이 안치(按治)를 청하면 또 윤허하여 처분(處分)이 전도(顚倒)되고 듣는 자들이 갈수록 의혹하니, 통탄(痛歎)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진유의 경우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윤종(允從)할 필요가 없다고 청하는데, 인주(人主)의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일의 옳고 그른 것을 보아 따르든지 말든지 할 뿐이다. 어찌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로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조짐을 열어주기에 꼭 좋을 것이다."

 

간원(諫院)  【대사간(大司諫) 남취명(南就明) 간원 정언(諫院正言) 유시모(柳時謨)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조성복(趙聖復)·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에 대한 작처(酌處)의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批答)을 내려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문형(文衡) 자리가 비자, 전(前) 대제학(大提學)        강현(姜鋧)이 천망(薦望)을 주관하였는데, 비위를 맞추려고 김일경을 수망(首望)으로 하였으나 권점(圈點)할 때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점수(點數)가 김일경과 같았다. 그때 상신(相臣)이 직서(職序)로써 차례를 삼는 것은 고례(古例)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대저 김일경이 수망(首望)에 있는 것을 미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일경이 이 때문에 유감을 품었는데, 그 뒤에 정수기(鄭壽期)가 강현을 탄핵하니 김일경이 이사상(李師尙)의 편지에 답하기를, ‘강태(姜台)가 문형을 천망하는 데 자기들의 뜻과 다르다고 하여 병(兵)·형(刑) 양태(兩台)가 정수기를 사주(使嗾)하여 논박하게 한 것이다.’ 하였는데, 강태는 강현을 가리킨 것이고 양태는 이광좌와 조태억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 글이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되자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모두 불안감을 품었다. 급기야 이광좌가 체직되고 조태억이 대신하게 되자, 마침내 그 일이 드러났는데, 정수기 역시 소를 올려 변론하였고,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이 김일경을 소척(疏斥)하였으며, 또 그가 말을 지어내어 남을 헐뜯고 배척한 정상을 논박하였다. 김일경이 드디어 대변(對辨)하기를,
"신(臣)은 지극히 어리석어 자신을 위한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게 임금의 원수는 꼭 토죄(討罪)하고 나라의 역적은 반드시 죽여 다만 종사(宗社)를 붙들어 안정시킬 것을 기약하였습니다. 한편 거실(巨室)160)                  에 죄를 얻을 것은 염려하지 않은 채 이리저리 거의 1년 동안 방황한 것이 오늘의 화(禍)가 생긴 원인이 되었습니다. 중신(重臣)의 소(疏)가 한 번 나오자 좌우(左右)에서 번갈아 공격하여 죄를 성토하는 소리가 낭자합니다. 아! 교문(敎文)의 찬진(撰進)은 신(臣)의 소임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태학사(太學士)가 병(病)으로 정고(呈告)하고 예원(藝苑)은 소명(召命)을 어겨 신(臣)만이 승패(承牌)하여 예궐(詣闕)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마침 저녁 무렵이었고 한밤중까지 빈청(賓廳)에 앉아 창졸간에 응제(應製)하다 보니 문장이 거칠고 졸렬하며 해괴한 말이 많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글귀의 출처(出處)나 자획(字劃)의 방변(傍邊) 같은 것을 창망중에 기억해 내지 못하면 자리에 앉았던 제우(儕友)가 간혹 가리켜 주기도 하였으니, 그날의 사실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합니다. 신을 논박하는 사람들의 이른바 ‘필요없는 말을 끼워 넣었다.[揷入剩語]’느니, ‘비유가 잘못되었다.[引喩乖謬]’느니 하는 등의 말은 신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작자(作者)가 무심코 쓴 글을 보는 이가 애써 꼬집어내서 융설(瀜洩)로써 모후(母后)를 이끌어대고 거간(拒諫)으로써 군부(君父)에게 말했다는 것은 모두 장차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것이니, 그 계책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어느날 이사상이 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수기의 재소(再疏)에 「강현은 문형(文衡)에 낙천(落薦)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문형의 천망(薦望)을 감당하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즈음에 마침 풍문(風聞)으로 전해져 온 말이 있기에 과연 마음 내키는 대로 써서 회답하였는데, 뜬소문을 가벼이 믿은 것이 너무 경솔하였습니다. 어찌 그 책임을 모면하겠습니까? 이사상은 정(情)이 형제와 같은 터이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우연히 소문이 잘못 전해져 신에 대한 큰 죄안(罪案)이 되었고 장독(章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신은 사체(事體)와 도리(道理)가 과연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 원인을 깊이 따져 본다면 모두 신의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김동필은 또 논의(論議)가 사리에 어긋나고, 함부로 남을 공격하는 방자한 행동이 모두 신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하였는데, 신은 헌직(憲職)에 있는 동안 토역(討逆)한 일 외에는 한 번도 탄핵한 일이 없으니, 함부로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젊고 새로 진출한 대각(臺閣)의 연의(言議)에 신이 혹 참여하여 주장한 것으로 의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임(將任)에 걸맞지 않는다는 데 이르러서는 신도 역시 스스로 알고 있으며, 건축 공사가 크게 벌어졌다고 말한 데 대해서는 참으로 그 곡절이 있습니다. 다만 신의 집 정원 안에 터를 닦고 재목을 다음어 두어 칸 사옥(祠屋)을 세웠던 것인데, 이것 때문에 신을 허물한다면 신이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함원군(咸原君)161)                  의 재소(再疏)는 신을 매우 급하게 꾸짖었습니다. 신이 그동안 입으로 대답하거나 상소로 진달했던 것은 대개 이삼석(李三錫)의 공사(供辭)를 거론(擧論)했던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애석합니다. 함원군은 어찌하여 사건의 곡절을 초문(招問)한 뒤 즉시 변진(辨陳)하지 않고 마침내 노여움을 신에게 옮기는 것입니까? 집에서 노여워하고는 저자에서 분풀이를 하는 격이 되었으니, 어찌 애꿎지 않겠습니까? 그날 그 말이 옳다고 하신 명교(明敎)는 바로 성상의 속마음에 간직하고 계시던 바를 쾌히 보이신 것인데, 함원군은 신이 억지로 그렇게 작정했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 된 일입니까? 더구나 품백(稟白)하여 윤허받은 일을 전지(傳旨)에 써 낸 것이 오늘 일이 아니며, 국구(國舅)도 일찍이 정원 당랑(政院堂郞)을 역임하였는데 어찌 아득히 잊어버리고 신의 허물이라고 배척하며 심지어 임의로 행했다고 한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신의 벼슬을 깎아버리시어 물러나 분수를 지키게 해 주소서."
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간 것은 지난 겨울이었는데, 오랫동안 비답이 없다가 대신(大臣)과 연신(筵臣)들이 여러 번 말을 하자, 이제 비로소 비답을 내린 것이다. 김일경은 사람됨이 거칠고 패려궂으며 기가 세었다. 집에서는 행검(行檢)이 없고 관직에 있어서는 재물을 탐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겼다. 뜻을 얻자 원훈(元勳)으로 자처(自處)하여 은혜를 믿고 권력을 휘둘렀다.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거스르면 곧 헐뜯고 꾸짖으며 그의 무리들을 시켜서 탄핵하여 제거하였다. 장임(將任)에 제수되려고 계획하였고 집을 호화스럽게 꾸며서 원장(垣墻)이 궁실(宮室)과 같았으니, 물정(物情)이 통분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교문(敎文)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훙칙한 마음을 속에 품고 있음을 의심하였으며, 그를 구해(救解)한 사람들도 역시 ‘그 글과 사람이 매우 거칠고 패려궂어 고사(故事)를 인용함에 있어 말을 가리지 않았다.’고 말한 데 불과하였다. 아! 만일 그가 무심코 과오를 저질렀다면 인죄(引罪)하고 고칠 것을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의기 양양하게 스스로 옳다며 말한 이를 공척(攻斥)하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알기 어렵지 않다.

 

4월 5일 갑인

진시(辰時)에서 미시(未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이세덕(李世德)을 부교리(副校理)로, 장한상(張漢相)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공신(功臣)의 적장(嫡將)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렸다. 녹훈 도감(錄勳都監)에서 아뢰기를,
"회맹제(會盟祭) 때 공신 적장 중에 가설(加設)한 납속 통정(納粟通政)·납속 가선(納粟嘉善)의 부류는 이미 사적(仕籍)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혼입(混入)하여 승자(陞資)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납니다. 바라건대 학생(學生)의 예(例)에 준하여 70세가 된 자는 절충(折衝)에 승자시키고, 70세 미만(未滿)인 자는 표리(表裏)162)  를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5, 6품(品)으로 일찍이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자는 승자(陞資)한 예가 있습니다. 경신년163) 등록(謄錄)의 경우 신완(申琓)·심추(沈樞)·최후량(崔後亮)·이함(李咸)은 모두 4, 5품으로서 일찍이 대호군을 역임한 이들인데, 심추·최후량은 다 승자하였으나 신완·이함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혹은 승자하고 혹은 못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정식(定式)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의 구혁(具爀)·신필하(申弼夏)·홍응몽(洪應夢) 등은 모두 5, 6품으로서 대호군을 역임한 사람들이니,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승자시키라고 명하였다가 뒤에 대신(大臣)의 진백(陳白)으로 도로 거두었다.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의 소대(召對)에 함께 입시하였다.

 

4월 6일 을묘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여러 의관을 거느리고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전에 청하였던 것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평(持平) 황정(黃晸)이 소(疏)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고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리어 국옥(鞫獄)을 빨리 완결지을 것을 청하였다. 또 이교악(李喬岳)이 선정(先正)을 무욕(誣辱)한 죄를 논하여 극변(極邊)으로 정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탐라(耽羅)의 기근(饑饉)은 계축년164)  ·갑인년165)  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으니, 창고의 곡식을 풀어 기민(飢民)을 진휼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갑인년의 선위 어사(宣慰御史)를 보냈던 예에 의하여 근시(近侍)를 보내어 시재(試才)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제도(諸道)에 수의(繡衣)166)  를 빨리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4월 8일 정사

충청도 서천(舒川) 등지에는 우박이 왔고, 영춘현(永春縣)에는 눈이 내렸으며, 평안도 이산(理山)·은산(殷山)·양덕(陽德)·개천(价川)·맹산(孟山) 등의 읍(邑)에는 새알 만큼 큰 우박이 내려 한 치[寸] 가량이나 쌓였다. 전라도 무안현(務安縣)에도 팥알 만한 우박이 내렸으나 곧 그쳤다. 경사도 거창현(居昌縣)에는 눈이 쌓이고 서리가 내려 추운 겨울과 다름이 없었다. 모두 도신(道臣)들이 모두 장문(狀聞)한 것이다.

 

어사(御史) 김중희(金重熙)·김시혁(金始㷜)·이거원(李巨源)·이진순(李眞淳)·유수(柳綬)·김상규(金尙奎) 등을 삼남(三南)의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어 보냈다.

 

임금이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일전에 돈소(敦召)한 것은 대신(大臣)을 예대(禮待)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사직하겠다는 글만 계속해 올라오니 나의 성의(誠意)가 부족하여 조정에 나올 기약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차라리 꼼짝 않고 잠들고 싶을 따름이다. 아! 대신(大臣)의 직책(職責)은 근력(筋力)을 가지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중외(中外)의 재정(財政)이 바닥나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고만 있는데, 경(卿)의 훌륭한 도량으로 어찌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많은 말을 안할 터이니, 경은 더 이상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지 말고 즉시 나와 일을 보도록 하여,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에 부응하여 주기 바란다."
하고, 이어서 함께 올 승지(承旨)를 시켜서 영상(領相)에게 개유(開諭)하게 하였다.

 

4월 9일 무오

이사상(李師尙)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양정호(梁廷虎)를 사간(司諫)으로, 윤동수(尹東洙)를 장령(掌令)으로, 김시엽(金始燁)을 지평(持平)으로, 박희진(朴熙晉)을 승지(承旨)로 삼고, 이진유(李眞儒)를 발탁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이사성(李思晟)을 발탁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삼았다.

 

목호룡(睦虎龍)에게 집 한 채를 주었는데, 이것은 적몰(籍沒)해 들인 이홍술(李弘述)의 집으로 옛 법을 따른 것이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황정(黃晸)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이교악(李喬岳)의 상소 안에 있는 여덟 자(字)는 곧 하나의 고변서(告變書)로서 그 마음속을 살펴보건대 실로 흉역배(凶逆輩)들과 동일한 속셈입니다. 청컨대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재단(齋壇)에 친림(親臨)하시어 대려(帶礪)167)  를 거듭 맹세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경사이며 얼마나 거룩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여러 공신(功臣)의 적장(嫡長)으로서 태연스레 불참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박사익(朴師益)의 경우 혹은 각질(脚疾)이 있다느니 초상집에 출입했다느니 핑계를 대었고, 윤홍(尹泓)의 경우 이장(移葬)을 핑계로 일부러 시골로 내려갔으며, 강계부(姜啓溥)·이방화(李邦華)·권경(權炅)·윤봉의(尹鳳儀) 등은 몸에 병이 있다는 거짓 핑계로 마냥 누워 있었습니다. 모두들 사당(私黨)을 도우려는 생각뿐이요 군적(群賊)을 토죄(討罪)하려는 의리(義理)가 전혀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4월 10일 기미

1경(一更)·2경에 달무리가 졌다

 

반송사(伴送使) 오명준(吳命峻)이 압록강(鴨綠江)의 얕은 여울을 깊이 파낼 것을 청하니, 묘당(廟堂)에서 허락하였다. 압록강에 얕은 여울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그냥 건너 다녔다. 오명준이 말하기를,
"병자년168)  ·정축년169)   이후로 저 사람들이 이 여울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지만, 이 곳은 적(賊)이 다니는 지름길입니다. 만일 그 중에서 가장 깊은 곳의 서너 칸을 4, 5척(尺) 정도 파낼 경우 입번군(入番軍) 4, 50명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거리에 불과하나, 후환(後患)은 영원히 끊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여름 장마철에 물이 많이 불게 되면 물길이 파이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하고, 이 일을 장문(狀聞)하니,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의논한 바가 합당합니다. 청컨대 본부(本府)에 신칙하여 조금 한가해질 때를 기다려 바로 흙을 파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만약 행하기에 어려운 단서가 있다면 또한 자세히 살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 사람은 나라안에만 나고 자라 산천(山川)의 원근(遠近)과 도로의 형편을 까마득히 알지 못한다. 몇 해 전에 목극등(穆克登)이 정계(定界)하고 돌아갈 때 지름길을 마치 익숙한 길처럼 찾아다녔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일찍이 알지 못한 길이었으니, 이는 틀림없이 정탐꾼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러니 압록강 일대의 얕은 여울이 한 군데 뿐 만이 아니라는 것을 병자년·정축년 이후에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또 4, 50명의 군인이 하루 만에 능히 파낼 수 있다면 하루 만에 메울 수 있지 않겠는가? 더욱이 장마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물길이 쉽게 바뀌어 깊었던 곳이 얕아지기도 하고 얕았던 곳이 깊어지기도 하니, 어찌 4, 5척 정도 흙을 파낸 것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참으로 어린아이들의 소견이며 묘당에서 시행을 허락한 것도 가소로울 뿐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88면
【분류】건설(建設) / 역사-편사(編史)


[註 168] 병자년 : 1636 인조 14년.[註 169]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 사람은 나라안에만 나고 자라 산천(山川)의 원근(遠近)과 도로의 형편을 까마득히 알지 못한다. 몇 해 전에 목극등(穆克登)이 정계(定界)하고 돌아갈 때 지름길을 마치 익숙한 길처럼 찾아다녔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일찍이 알지 못한 길이었으니, 이는 틀림없이 정탐꾼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러니 압록강 일대의 얕은 여울이 한 군데 뿐 만이 아니라는 것을 병자년·정축년 이후에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또 4, 50명의 군인이 하루 만에 능히 파낼 수 있다면 하루 만에 메울 수 있지 않겠는가? 더욱이 장마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물길이 쉽게 바뀌어 깊었던 곳이 얕아지기도 하고 얕았던 곳이 깊어지기도 하니, 어찌 4, 5척 정도 흙을 파낸 것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참으로 어린아이들의 소견이며 묘당에서 시행을 허락한 것도 가소로울 뿐이다."

 

4월 11일 경신

지평(持平) 황정(黃晸)이 공신(功臣)의 적장(嫡長) 중에서 회맹(會盟)에 참가하지 않은 이를 구별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한 일 때문에 물의(物議)의 비난을 받고 인피(引避)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전(前) 부사(府使) 이명희(李命熙)·전 군수(郡守) 윤득인(尹得仁)·전 좌랑(佐郞) 이현록(李顯祿)·전 참봉(參奉) 이징귀(李徵龜)·전 찰방(察訪) 김창발(金昌發)을 일체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또 소(疏)를 올려 병을 구실로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남취명(南就明)·서명연(徐命淵)을 승지(承旨)로, 윤회(尹會)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문신 전강(文臣殿講)170)  을 행하고, 수석을 차지한 세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

 

4월 12일 신유

도정(都政)을 행하여 이진망(李眞望)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유명응(兪命凝)·오명항(吳命恒)·이정제(李廷濟)를 승지(承旨)로, 유필원(柳弼垣)을 검상(檢詳)으로, 송성명(宋成明)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김시혁(金始㷜)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사상(李師尙)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징휴(李徵休)를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정수기(鄭壽期)를 보덕으로, 오수원(吳遂元)을 시서(司書)로, 박찬신(朴纘新)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4월 13일 임술

계속하여 도정(都正)을 행하였다. 윤유(尹游)을 수찬(修撰)으로, 한세량(韓世良)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명언(李明彦)을 대사성(大四成)으로, 이헌장(李憲章)을 정언(正言)으로, 서종하(徐宗廈)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북도(北道)의 오을족보(吾乙足堡)를 호타리(胡打里)로 이설(移設)하였다. 오을족보는 단천(端川)에 있었는데, 옛날에 번호(蕃湖)들이 내왕하던 요충(要衝)이었다. 그러므로 국초(國初)에 보(堡)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오랑캐의 왕래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번호(藩胡)의 근심이 사라진 뒤로는 허진(虛鎭)이 되고 말았다. 또 지세가 매우 험하고 땅이 척박하여 사람들이 생활할 수가 없었으므로, 불과 토병(土兵) 몇 호(戶)가 있을 뿐이었다. 호타리(胡打里)는 성진(城津)의 남쪽에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가까워 오래전부터 이설(移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런데 전(前) 감사(監司) 윤헌주(尹憲柱)가 이르기를,
"성(城)을 지킬 만한 높은 산이나 큰 내가 없고 만약 성진(城津)이 수비에 실패한다면 호타리는 형세가 고립되어 적을 방비하기 어려울 것이니, 옮기는 것은 불편합니다."
하였으므로, 묘당(廟堂)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다시 그 이해(利害)에 대하여 물었다. 감사(監司) 한세량(韓世良)이 이르기를,
"생리(生理)가 오을족(吾乙足)에 비하여 서로 다를 뿐 만이 아니라, 성진으로부터 30리(里) 사이에 모두 12개의 고개가 있으며 곁에 험조(險阻)한 곳이 많아, 매복을 두기에 적당합니다. 장수만 적임자를 얻는다면 충분히 전승(全勝)할 수 있으니. 청컨대 이설(移設)하여 성진의 후원(後援)이 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장항(獐項) 서북(西北)에 이른바 예별덕(乂別德)이란 곳이 있는데, 그 사면은 절벽이고 큰 내가 절벽을 끼고 흐릅니다. 그리고 윗부분은 평탄하고 사방으로 바싹 접근해 있는 산봉우리도 없습니다. 여기다 불과 3백 보(步) 정도의 성을 쌓는다면, 그 나머지 부분은 돌로 쌓지 않더라도 기어 오를 수도 없는 형세이며, 또한 샘물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이동(梨洞)·쌍청(雙靑) 두 보(堡) 중 하나를 예별덕으로 이설(移設)하여 마천령(磨天嶺)의 후원이 되게 하소서. 만약 이설하기 어렵다면, 청컨대 단천부(端川府)로 하여금 마곡창(磨谷倉)을 예별덕으로 옮겨 양식과 무기를 많이 저장해 놓고 마천령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며, 만일 마천령이 수비에 실패할 경우 물러나 보전할 수 있는 계책으로 삼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변사(備邊司)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성진은 한 진(鎭) 외에는 다시 막을 만한 곳이 없고 호타(湖打)는 산록(山麓)이 험하게 둘러 막고 있습니다. 지형(地形)이 가장 좋은 곳을 따로 선택하여 양식과 무기를 저장해 둔다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을족보는 전의 분부대로 호타리로 이설하는 것이 편리하고, 예별덕은 그리 높고 험준하지도 않으니 산성(山城)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마천령이 수비에 실패하면 탄환(彈丸)처럼 조그만 보(堡)가 후원(後援)이 될 수 없습니다. 이동(梨洞) 같은 곳을 마천령이나 상갈파(上葛坡) 등의 여러 길이 모이는 곳이고, 쌍청(雙靑)은 또 황토령(黃土嶺) 아래에 있어서 황토기(黃土岐)와 더불어 서로 보호하니 모두 옮길 수가 없습니다. 마곡창의 경우 만약 마천령의 수비를 접제(接濟)하는 것이라면 예별덕이 비교적 조금 멀기 때문에 수송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예별덕으로 물러나 보호하려는 계책이라면 영(嶺)을 버리고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은 만에 하나도 좋은 점이 없으니, 아직은 그냥 두고 마곡에는 특별히 곡물(穀物)을 더 보관하여 두었다가 긴급할 때 이용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남병사(南兵使) 신명인(申命仁)도 역시 이런 뜻으로 계문(啓聞)하여 일체로 분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4일 계해

국청(鞫廳)에서 다시 홍석보(洪錫輔)를 추문(推問)하기 시작했다. 홍석보가 공초(供招)하기를,
"언찰(諺札)에 대해서는 과연 문덕린(文德麟)에게 편지로 물었던 일이 있었으나, 시편(詩篇)은 당초에 들은 바가 없고 오로지 문덕린의 무고(誣告)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또 편지를 전해 준 사람인 박후응(朴厚應)을 증인으로 끌어들였다. 문덕린은 말하기를,
"박후응은 홍석보의 말을 도사(都事)에게 전하였고, 언찰(諺扎)이나 시편(詩篇) 등이 있다는 말에 대하여서는 저는 모릅니다."
하고, 박후응은 말하기를,
"홍석보가 저를 시켜서 문덕린에게 말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언찰과 시편을 추심(推尋)하기 위하여 국청(鞫廳)에서 드디어 홍석보와 문덕린을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니, 문덕린이 비로소 실토(實吐)하고 홍석보도 자복(自服)하였다. 홍석보는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문덕린은 극변(極邊)으로 정배하였으며, 박후응은 원지(遠地)로 정배하였다. 홍석보는 사람됨이 경망스럽고, 또한 술을 좋아하였다. 형추(刑推)하여 문서(文書)를 수탐(搜探)하려고 한 것은 반드시 실정을 알고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었고 그에게 본래 다른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인(時人)들이 그를 중률(重律)에 두고자 하였고, 승복받은 뒤에 끝까지 추구(追究)하지 않은 것은 역시 이진유(李眞儒)의 힘이었다. 홍석보는 이진유와 종형제(從兄弟)가 된다고 한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소(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위에 고립(孤立)되어 계시고 국세(國勢)는 아직도 위태로운 지역에 처해 있는데, 흉역(凶逆)의 남은 무리들은 위세가 아직도 왕성하여 친척과 당원(黨援)이 날이 갈수록 방자해지므로, 언제나 왕실을 생각하면 한방중에도 팔뚝을 걷어 붙이게 됩니다. 아! 사흉(四凶)처럼 하늘을 뒤덮는 거괴(巨魁)와 옥(獄)을 메운 교활한 역적들을 싹 쓸어 주토(誅討)한 것은 모두 성상(聖上)의 위단(威斷)이 아닌 것이 없는데, 나라 안에서 말이 왁자하여 모두 신이 핵정(覈正)한 것에서 말미암았다며 거실(巨室)에 미움을 사고 원수처럼 여기는 것이 날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치나 보는 무리들이 신이 외롭고 약한 것을 업신여겨 덫을 만들고 함정을 파 신을 기다린 것을 하나 둘로 세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의 흉소(凶疏)는 바로 연차(聯箚)의 뿌리였는데, 당장 죽어 싹을 뽑지 못하였으니, 이미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더구나 은(銀)이 장세상(張世相)에게 들어가고, 글이 심상길(沈尙吉)에게서 나온 정상이 국안(鞫案)에 분명히 드러났으니, 모역(謀逆)한 정절이 털끝만한 의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각(臺閣)에서는 곧장 단죄를 청하지도 않았고, 묘당(廟堂)에서는 급작스레 작처(酌處)을 의논하였으니, 신(臣)은 이것이 무슨 법례(法例)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국옥(鞫獄)을 담당한 자들은 조성복에 비하면 지엽(枝葉)에 불과할 뿐이거늘, 어찌 감히 옥관(獄官)의 자리에 눌러 앉아서 차마 이와 같이 구차스럽고 졸렬한 거조를 한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당한 일이 비록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 해도 이미 개석(開釋)하였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4월 15일 갑자

진시(辰時)에 팥알 만한 우박이 내렸다. 신시(申時)에 또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개암[榛子]만 하였다.

 

경기의 광주(廣州)·지평(砥平)·양성(陽城)·안산(安山)·양천(陽川)·교하(交河)·가평(加平) 등 7읍(邑)에 큰 바람이 불었고, 비와 우박이 뒤섞여 내렸는데, 우박은 새알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가 잇따라 소를 올려 고사(固辭)하니, 임금이 따뜻한 말로 비답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개유하였다.

 

4월 17일 병인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강원 도사(江原都事) 유봉명(柳鳳鳴)을 체개(遞改)할 것을 청하기를,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벼슬길에 오른데다가 이력(履歷)도 없어서 제목(除目)171)  이 내려지자 물의(物議)가 떠들썩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이헌장(李獻章)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은 천성이 음흉하고 행실이 거칠어 지난번 역적 이이명(李頤命)이 권력을 잡고 있던 날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사는 뜻을 잃은 명관(名官)이 무리를 불러모아 도적질을 한다.’는 말을 지어냈습니다. 권흉(權凶)의 집에 아첨하기 위해 한 도(道)의 착한 사람들을 무해(誣害)하였으니, 그 죄는 이루 다 죽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접때 북병사로 있으면서는 한정필(韓廷弼)을 데리고 가서 청나라쪽의 재목(材木)을 벌채하도록 했다가, 마침 목차(穆差)가 정계(定界)하러 왔을 때 발각되어 일이 터지게 되자 한정필에게 죄를 덮어씌웠으므로, 도신(道臣)이 효수(梟首)를 계청(啓請)하였으니, 한정필의 죽음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장한상의 죄는 파직(罷職)에만 그쳤으니, 북로(北路)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또 다시 북변 방수(防守)의 책임을 맡기시니, 중외(中外)의 물정(物情)이 해괴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신익하(申翊夏)가 졸(卒)했다. 신익하는 훈신(勳臣) 집안의 아들로서 젊어서 과거에 올랐고, 조정에서 권면하여 기용(起用)하였다. 사람됨이 단정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여 법도를 지켰다. 군심(軍心)을 깊이 얻어 무장(武將) 가운데 비교할 만한 사람이 드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무겁게 의지하였다. 바야흐로 향용(嚮用)172)  하려는 차에 갑자기 죽었으므로,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통영(統營)에 재직한 지 3개월 만에 정적(政績)이 이미 드러났고, 졸함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이 슬퍼하며 사모했다.

 

4월 18일 정묘

4경(四更)에 달이 남두 제5성(南斗第五星)을 범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김시엽(金始燁)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홍석보(洪錫輔)의 작처(酌處)를 환수(還收)하고, 다시 엄하게 신문(訊問)하게 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유봉명(柳鳳鳴)의 일만 윤허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금부 도사(禁府都事) 김천여(金天與)는 어릴 때부터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신년173)  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여러 문생(門生)들이 항장(抗章)하여 신변(伸辨)하려고 하였더니, 김천여는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끝내 연서(聯署)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도리어 몰래 소어(疏語)를 초록(抄錄)해 선정을 해친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외람되게 군수(郡守) 자리를 얻었으므로,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침을 뱉고 욕을 합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은 단지 장한상(張漢相)과 김천여의 일만 윤허하였다.

 

심중량(沈仲良)·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삼고, 권중경(權重經)을 발탁해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4월 19일 무진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이 소대(召對)할 때 함께 입시하였다. 승지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서로(西路)는 굶주림이 더욱 심한데다가 칙사(勅使)의 행차가 끊이지 않아서 고을과 역(驛)이 모두 피폐하여졌습니다. 매번 칙사의 행차가 있을 때에 영위사(迎慰使)를 차송하는 것은 대개 연향(宴享)을 위한 것인데, 칙사들이 접대를 받지 않을 경우는 그냥 돌아오므로 공연히 주전(厨傳)174)  에 피해만 끼칩니다. 일찍이 동래(東萊)에서 왜사(倭使)를 접대할 때에 그 지방 사람으로 접위관(接慰官)을 차출했는데, 이렇게 하여 폐단을 많이 줄였습니다. 또 듣건대 인조(仁祖) 때에는 도내(道內)의 수령(守令)이나 첨사(僉使)를 차송(差送)하여 조금이나마 폐단을 줄이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합니다. 금후로는 수령이나 첨사를 차송하되, 칙사(勅使)가 연향을 받지 않을 경우 차송하지 말고, 어첩(御帖)은 혹 원접사(遠接使)의 행차에 보내 준다면 아마도 폐단을 줄일 듯합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 뒤에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赦)’란 비록 소인(小人)들의 다행이라 하겠지만, 사령(赦令)을 한 번 거치고나면 무릇 도류(徒流) 이하에 관계된 죄인은 거개 죄를 용서받게 되니, 이것이 바로 광탕(曠蕩)의 뜻입니다. 그런데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관할하는 옥수(獄囚)의 경우 간혹 석방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농삿일이 한창인 계절에 죄수들을 옥에 가득 채워 둔다면 똑같이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그냥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추조(秋曹)175)  로 하여금 각도(各道)에 분부하여 속히 석방시켜서 폐농(廢農)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역시 그대로 따랐다.

 

남태징(南泰徵)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남태징(南泰徵)은 벼슬이 병사(兵使)이면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방백(方佰)을 능욕하였고, 심지어는 ‘거조(擧措)가 뒤바뀌고 사체(事體)도 알지 못한다.’는 등의 말로 제멋대로 치계(馳啓)하기도 하였다. 또 연줄을 타서 청탁을 넣어 이미 파직된 뒤에도 다시 순찰하기 위해 출발하려고 하였으니, 그 광패(狂悖)하고 거칠고 야비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를 탄핵한 글씨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어 초천(超遷)하여 마치 숭장(崇奬)하는 것과 같았으니, 등위(等威)가 날로 무너지고 기강(紀鋼)이 땅을 쓴 듯 없어졌다. 진실로 한탄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9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말한다. "남태징(南泰徵)은 벼슬이 병사(兵使)이면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방백(方佰)을 능욕하였고, 심지어는 ‘거조(擧措)가 뒤바뀌고 사체(事體)도 알지 못한다.’는 등의 말로 제멋대로 치계(馳啓)하기도 하였다. 또 연줄을 타서 청탁을 넣어 이미 파직된 뒤에도 다시 순찰하기 위해 출발하려고 하였으니, 그 광패(狂悖)하고 거칠고 야비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를 탄핵한 글씨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어 초천(超遷)하여 마치 숭장(崇奬)하는 것과 같았으니, 등위(等威)가 날로 무너지고 기강(紀鋼)이 땅을 쓴 듯 없어졌다. 진실로 한탄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또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이 당한 일이 비록 편하기는 어렵다 해도 전후로 돈면(敦勉)함이 누누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경이 충분히 헤아려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릴 것을 기약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과격한 말에 대하여 한결같이 인구(引咎)하니, 마음과 정성을 다해 국사(國事)에 진력하는 뜻에 부족함이 있다. 내 여러 말 하지 않겠으니, 경은 잘 생각하기 바란다. 하물며 지금 묘당(廟堂)에는 일이 많은데도 책응(策應)할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괄시(恝視)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속히 들어와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효유(曉喩)하였다.

 

홍언도(洪彦度)를 밀양부(密陽府)로 정배(定配)하였다. 홍연도는 바로 역적 홍의인(洪義人)·홍철인(洪哲人)의 아비로서 홍철인을 잡아 올 때 금오랑(金吾郞)이 포도 군관(捕盜軍官)과 함께 그의 집으로 달려갔더니, 홍의인의 적소(謫所)에 갔다고 제멋대로 속였다. 대계(臺啓)로 인해 네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하였다. 금부(禁府)에서 작처(酌處)를 의논하여 청하자, 임금이 참작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대계(臺啓)에서 홍석보(洪錫輔)의 작처(酌處)를 거두어 달라고 청한 것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온비(溫批)를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지평(持平) 황정(黃晸)·헌납(獻納) 서종하(徐宗廈)가 국청(鞫廳)에 참여한 양사(兩司)로서 홍석보의 작처에 대한 명령에 쟁집(爭執)하지 못했다며 인피(引避)하니, 처치하여 모두 체차(遞差)하였다.

 

4월 20일 기사

간원(諫院)  【정언(正言) 이헌장(李獻章)이다.】 에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도배(徒配) 죄인 이오(李梧)의 공사(供辭)를 보면, 그가 일찍이 고창(高敞)에 재직할 때에 진청(賑廳)에서 대출(貸出)받은 곡식을 보충하지 못하여 서관(西關)의 전세(田稅)를 얻어 장차 사람을 보내 발매(發賣)하려고 할 즈음에 훈국(訓局)의 차인(差人)이 이홍술(李弘述)의 전령(傳令)을 가지고 남은 돈 1천여 냥을 떼어 주어서 진채(賑債)를 갚았다고 합니다. 이홍술이 심복(心腹)을 배포(排布)하여 놓고 지부(地部)176)  와 결탁하여 공화(公貨)를 환롱(幻弄)하고 몰래 허비한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는데도 금오(金吾)의 감률(勘律)은 도배(徒配)에 그쳤으니, 중외(中外)의 물정(物情)이 놀라고 분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청컨대 이오를 다시 잡아다가 국문하고, 차인(差人) 석지견(石之堅)과 더불어 일체로 엄형(嚴刑)하여 정상을 캐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1일 경오

묘시(卯時)에 햇무리가 졌다.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쪽에 배(背)177)  가 있었다. 오시(午時)에서 유시(酉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할 때에 함께 입시하였다.

 

수찬(修撰)        윤유(尹游)가 소(疏)를 올려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성복(趙聖復)이 아직도 상형(常刑)에서 벗어났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흉소(凶疏)가 한 번 올라가자 전하(殿下)를 천위(天位)에서 불안하게 만들었고, 동궁(東宮)은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죄를 지었으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비록 그의 당파에서 책임을 지려면 도리어 절도 정배(絶島定配)를 청할 것인데, 하물며 지금 그의 음흉한 정절(情節)이 다시 더 이상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방형(邦刑)으로 단죄해야 한다는 대계(臺啓)는 실로 나라의 여론을 따른 것이니, 빨리 윤허하시어 신인(神人)의 통분을 풀어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청선(淸選)의 계제(階梯)는 자세하고 신중하게 해야 마땅한데, 요즈음 장통(掌通)178)                  은 외롭고 한미(寒微)한 자들이 발적(發跡)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어 박준(朴㻐)·윤빈(尹彬)이 갑자기 춘방(春坊)·간성(諫省)에 통하였음과 이격(李格)·이시항(李時恒)이 외람되게 기조(騎曹)179)                  의 좌막(佐幕)180)                  에로 의망되었음을 배척하여,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춘방을 정밀하게 가려서 차정(差定)하고 오래 맡겨 효과를 거두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어사(御史)        김중희(金重熙)가 길을 우회하여 근친(覲親)한 잘못을 논박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소(疏)를 올려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수령(守令)이나 초사(初仕)를 신중히 가려 쓸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대각(臺閣)에서 논사(論事)한 장주(章奏)에 대하여 여러날 동안 비답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따르든지 않든지 간에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와서 간(諫)하게 하는 덕을 드러내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으로 답하였다.

 

4월 22일 신미

윤성시(尹聖時)를 헌납(獻納)으로, 이헌장(李獻章)을 지평(持平)으로, 홍정필(洪廷弼)을 교리(校理)로, 조진희(趙鎭禧)를 정언(正言)으로, 이순곤(李順坤)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4월 23일 임신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할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이 끝난 뒤에 시독관(侍讀官) 송진명(宋眞明)이 문의(文義)를 따라 말하기를,
"지난날 은 곤수(銀閫帥)·전 태수(錢太守)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국옥(鞫獄)에서 무수배(武帥輩)가 은(銀)을 내어놓은 일로 보건대 흉당(凶黨)들이 명기(名器)181)  를 혼탁하게 한 것을 알 만합니다. 우리 나라의 공명첩(空名帖)에 대한 법은 바로 벼슬을 파는 법과 같아서 나무장수나 가마 메는 교군(轎軍)까지도 머리에 금옥 관자(金玉貫子)를 단 자가 많으니, 보기에 해괴합니다. 또 사진(私賑)하는 법에도 폐단이 있습니다. 만일 의기(義氣)를 가지고 재물을 내어 백성을 구해 주었다면 곧바로 직위(職位)를 주어서 시의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관에서 조금 부유(富裕)한 집을 골라 가지고 강제로 곡식을 내어놓게 한 뒤에 한 장의 고신(告身)만 내린다면, 이는 바로 국민을 속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여러 도(道)에 신칙(申飭)하여 금지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겸문학(兼文學) 윤순(尹淳)이 소(疏)을 올려 사직 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이 당한 망극(罔極)한 일은 서책(書冊)에도 없는 것입니다. 궁기(窮奇)·도올(檮杌)182)  의 지목에다 천고(千古)의 악인을 합쳐도 오히려 부족하여, 심지어 선신(先臣)이 이사명(李師命)을 논박한 것까지 신(臣)에게 덮어씌우니, 마음과 몸이 모두 괴로와 차라리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선류(善類)에게 화(禍)를 전가시켜서 왕실(王室)에 해(害)를 끼쳤다는 등의 말은 급서(急書)183)  와 같은데, 말한 이가 반드시 신을 지목할 수는 없는 것이나 만약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 옳다면 바로 뜬소문을 가지고 불측(不測)한 데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 박징빈(朴徵賓) 한 사람뿐만이 아닐 것이니, 아! 또한 위태로운 것입니다. 그 밖에 교묘하게 무함한 것이 지극한 죄 아님이 없으니 신(臣)으로서는 변명을 구(求)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변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미 폐인(廢人)이 된 자가 어찌 변명을 일삼겠습니까? 오직 세상에 자취를 감추고 한평생 동안 허물을 반성하며 염치(廉恥)나 보존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간이 한 말을 너무 지나치게 혐의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4일 계유

정언(正言) 조지빈(趙趾彬)이 상소하여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중경(權重經)을 논박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기사년184)  당시 정권을 잡았던 우두머리는 비록 반나절 동안 간쟁하다 그만둔 사람과는 비록 차이가 있다고 하겠지만, 그 차자로 청한 바는 신하로서의 도리가 땅을 쓴 듯 없으니, 선후(先后)185)  의 신자(臣子)된 자는 감히 이 일을 가지고 거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년의 권중경의 한 상소는 지극히 패리(悖理)하고 무엄한데다가 심지어 그 할아비가 당시 올렸던 차자를 방자하게 베껴서 아뢰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선왕(先王)이 계실 때라 하더라도 결코 뒤미처 제기할 수 없는 일이거늘, 하물며 오늘날 전하(殿下)의 앞에서 감히 곧장 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선조(先朝)에 죄를 지어 사판(仕版)에서도 깎여 버림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에 30년 동안 몸을 깨끗이 가졌다는 등의 말을 소(疏)에다 써서 하자(瑕疵)라고는 조금도 없고 마치 조용하고 깨끗하게 스스로를 지킨 자인 양 하였으니, 그 또한 방자스럽고 꺼림이 없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북도(北道) 방백(方佰)의 중임(重任)에 갑자기 발탁하여 제수하시니, 묘당(廟堂)의 뜻은 비록 과거를 깨끗이 씻자는 데서 나왔겠지만 공의(公議)의 엄정함은 이것 때문에 더욱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새로 올려 준 품계도 거두시고 그 관직(官職)도 깎아서 제방(堤防)을 엄격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개납(開納)하지 않았다.

 

4월 25일 갑술

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임금이 상신(相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영의정 조태구(趙泰耉)를 한 번 더 돈유(敦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형조 참판 김중기(金重器)가 무과(武科)의 거자(擧子)들이 활쏘기를 대신 치르는 폐단이 있음을 갖추어 진술하고 그 법을 엄격히 하여 뒷날의 폐습을 징계할 것을 청하고, 최석항이 극변(極邊)에 충군(充軍)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가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니,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의 사안에 대하여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조성복(趙星復)과 이오(李悟)의 사안에 대하여서도 윤허하였다. 새로 아뢰기를,
"독약을 쓴 곡절에 대하여 아직 그 근거를 다 캐내지 못하였고, 김성(金姓) 궁인(宮人)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이소훈(李昭訓)을 독살(毒殺)한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국안(鞫案)에 분명히 실려 있는데, 우선 한 차례 시험하였은즉 어찌 다만 한낱 이소훈에게만 그치겠습니까? 흉역(凶逆)들과 서로 내통하면서 성궁(聖躬)을 모해(謀害)하려는 정상은 진실로 김성 궁인과 더불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도 하나이니, 이런 역적을 제거하기 전에는 신은 아마도 성상께서 하루도 편히 주무실 수 없고 군하(群下)들의 우려도 결국 그칠 때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그 성명(姓名)은 역적들의 초사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소훈이 중독(中毒)된 것은 그 날짜가 있으니, 상선(尙膳)도 반드시 그 해당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찾아내어 국청(鞫廳)에 붙여서 사건의 진상을 안핵(按覈)하게 하고 왕법(王法)을 명쾌히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청주(淸州)의 백성이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의 분산(墳山)에 변을 일으키고, 논열(論列)한 글을 걸어 놓아 조신(朝臣)을 공동(恐動)시키고, 성주(城主)186)  를 함해(陷害)하려고 하였으니 전고(前古)에 없던 변고입니다. 목사(牧使) 정혁선(鄭赫先)은 이 일 때문에 벼슬을 버렸는데, 혹시라도 체직(遞職)된다면 간민(奸民)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에 알맞습니다. 청컨대 독촉해 도로 부임하도록 하시고 토포사(討捕使)로 하여금 변을 일으킨 사람을 기포(譏捕)해 각별히 중형(重刑)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죄인 조성복(趙聖復)은 장차 결안(結案)을 짓기 위해 초사를 받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거역하였습니다. 사안이 역절(逆節)에 관계된 것이고 죄명(罪名)이 지극히 무거우니, 청컨대 국청(鞫廳)으로 도로 이송(移送)하게 하소서."
하자.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국(鞫)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추핵(推覈)한다는 뜻인데, 지금 문초(問招)할 만한 것도 없고, 거역하여 공초하지 않는 자는 엄중히 신문(訊問)하여 법을 바르게 함이 마땅합니다. 국청으로 이송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나니, 청컨대 본부(本府)로 하여금 자복을 받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세덕(李世德)을 보덕(輔德)으로, 서종하(徐宗廈)를 필선(弼善)으로,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삼고, 이명언(李明彦)을 발탁하여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대신(大臣)의 진청(陳請) 때문이었다. 신유익(愼惟益)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서종하는 위인이 용렬하고 견식(見識)이 모자랐으며, 신유익은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으로서 지망(地望)이 낮고 한미하였다. 권강(勸講)하는 소임이나 전대(專對)187)  하는 책임에는 모두 적임자가 아니었으므로, 물정(物情)이 홉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9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187]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使臣)으로 나간 사람이 본국과 상의 없이도 지혜롭게 일에 대처하는 것.
사신은 말한다. "서종하는 위인이 용렬하고 견식(見識)이 모자랐으며, 신유익은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으로서 지망(地望)이 낮고 한미하였다. 권강(勸講)하는 소임이나 전대(專對)187)  하는 책임에는 모두 적임자가 아니었으므로, 물정(物情)이 홉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4월 27일 병자

임금이 칙사(勅使)를 서교(西郊)에서 맞이하였다. 청사(淸使) 내각 학사 예부 시랑(內閣學士禮部侍郞) 상보(常保)와 부사(副使) 두등 시위 이도(頭等侍衞伊都) 액진명(額眞明)이 입경(入京)하였다. 임금이 환궁(還宮)하여 칙서(勅書)를 받으니, 곧바로 강희제(康熙帝)의 시조(諡詔)였다. 이어 칙사(勅使)를 접견(接見)하였는데, 칙사가 임금이 황제(皇帝)의 안부를 서서 묻는 것은 잘못이라 하자.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나아가 말하기를,
"꿇어앉아 묻는 것을 아낄 바가 아니나, 나라를 세운 이래 규례가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성교(盛敎)를 받으니 매우 불안하다는 뜻으로 답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의해 하라고 명했다.

 

원접사(遠接使) 조태억(趙泰億)이 청대(請對)하였다. 양서(兩西)가 칙사의 행차를 여러 번 겪어서 여러 고을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진달하고, 관서(關西)의 세미(稅米) 중 민간(民間)에 있는 절반은 가을에 바치게 하고, 이미 수봉(收捧)한 것은 그 고을에 나누어 주어 칙사를 접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4월 28일 정축

오시(午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전해 온 칙서로 인하여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헌납(獻納) 윤성시(尹聖時)가 이소훈(李昭訓)을 독살(毒殺)한 궁인(宮人)을 찾아내어 국청(鞫廳)에 붙여 안핵(按覈)하고 정법(正法)할 일을 논계(論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국청이나 혹은 금오(金吾)에서는 마땅히 곧바로 잡아들이기를 청해야 할 것인데, 대계(臺啓)에서 이름을 지적한 일이 없었다며 지금 나흘이 되도록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므로, 여정(輿情)이 더욱 답답하게 여깁니다. 자꾸 늦출 수 없으니, 궁중에서 빨리 찾아내어 엄중히 안핵하고 정법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궁인을 조사하여 찾아내려고 하나 이름을 모르므로 찾아낼 수가 없다."
하였다.

 

죄인 조성복(趙聖復)이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금부(禁府)에서 구료관(求療官)을 다스릴 것을 계청(啓請)하고, 정원(政院)에서도 또 해당 도사(都事)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성복이 애초에 국문을 당할 때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국청(鞫廳)에서는 작처(酌處)하여 유배지로 되돌려 보낼 것을 품청(稟請)하고, 대간(臺諫)은 곧바로 정형(正刑)할 것을 청하여 바야흐로 결안(結案)하려 하였는데, 그 형 조성집(趙聖集)이 의금부의 예속(隷屬)에게 뇌물을 써서 독약을 전해 주게 하여 경폐(徑斃)188)  하게 한 것이다. 조성복이 사주(使嗾)를 받아 소청(疏請)하며 임금의 뜻을 상시(嘗試)한 것은 실로 역적이 나타날 싹수가 되었다. 그러나 대계(臺啓)는 너무 지나쳤다. 대신(大臣)이 작처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하지 못하였으니, 그 역량(力量)의 모자람이 애석하다.

 

부교리(副校理) 이세덕(李世德)이 상소하여 수령이 자주 바뀌는 폐단과 변방의 원이 내직으로 옮기는 잘못을 논하고, 또 말하기를,
"초사(初仕)에서 사람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종전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봉휘(柳鳳輝)와 참의(參議) 박필몽(朴弼夢)이 각각 소(疏)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다.

 

4월 29일 무인

임금이 관소(館所)189)  에 나아가 칙사를 접견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단지 이교악(李喬岳)을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는 일과 박사익(朴師益) 등을 멀리 귀양보내는 일만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조성복(趙聖復)이 독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하여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과 도사(都事)는 더욱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정죄(定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단지 금부 당랑(禁府堂郞)의 일만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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