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기묘
일식(日食)이 있었다. 정원(政院)에서, 관상감(觀象監)에서 석 달 전에 미리 고하지 않았다 하여 해당 관원을 잡아다가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경기(京畿)유학(幼學) 김홍석(金弘錫)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살아서는 동지(同志)가 되고 죽어서는 도의(道義)를 함께 전하여 진실로 백세(百世)에 바뀔 수 없는 정론(正論)이 되었으니, 하찮은 후생(後生)이 한 번 추켜세우고 한 번 내리 깎음으로써 사사로이 높이고 낮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은 겉으로 학문(學問)의 이름을 빌리고 입으로 이이와 성혼의 도(道)를 외어 세상을 속이고 발신(發身)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당시 크고 작은 문자(文字)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성혼에 대해서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포양(褒揚)하였으니, ‘양현신연보서(兩賢臣年譜序)’도 바로 그가 찬(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선정신 윤선거(尹宣擧) 부자와 틈이 생긴 뒤로는 성혼이 윤선거의 외조(外祖)라는 이유로 공공연히 성혼에게로 노여움을 옮겨 간독(簡牘) 사이에 이르기까지 왕왕 조금 깎아내리는 뜻을 비치었습니다. 그러다가 성혼의 후손 고(故) 현령(縣令) 성지선(成至善)이 윤선거의 고제(高弟)로서 동문(同門)인 고(故) 장령(掌令) 나양좌(羅良佐) 등과 더불어 사문(師門)의 무함(誣陷)을 소변(疏卞)하기에 이르렀으므로, 크게 화를 내어 그의 제자 이희조(李喜朝)에게 답한 편지에 공공연히 성혼을 무욕(誣辱)하였습니다. 마침내 사론(士論)이 일제히 분하게 여겨 대변하는 소(疏)를 올리려고 하자, 그가 먼저 소를 올려서 스스로 해명하는 체하면서 ‘갑오년190) 주본(奏本)에 대한 의논은 어쩔 수 없이 화의(和議)를 주장한 것이다.’라는 내용을 만들어 내었고, 또 김장생(金長生)의 말을 끌어대어 이르기를, ‘임진년191) 이후에 의심할 만한 바가 없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말로 결론짓기를, ‘이를 근거로 삼는다면 선사(先師)도 역시 우계(牛溪)가 부득이한 입장에서 말했음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臣) 등은 청컨대 그 주본(奏本)의 내용이 본래 화의(和議)가 아니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고양겸(顧養謙)은 당시 대권(大權)을 쥐고서 마음대로 높이고 낮출 수가 있었으니, 크게는 정절(旌節)192) 을 바꾸어서 유정(劉綎)을 소환하기로 하였고, 작게는 주청(奏請)을 막아서 관문(關門)을 닫고 통행(通行)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위기가 매우 급박한 판이었으니, 그와 맞서 나라의 존망을 도외시함이 옳았겠습니까? 아니면 부득이 그의 말을 억지로 따라 그의 노여움을 풀게 만듦으로써 거의 망하려는 나라의 명맥을 보존함이 옳았습니까? 이것이 선묘(宣廟)께서 호택(胡澤)을 접견할 때에 부득이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된 까닭입니다. 성혼이 주본(奏本)의 대지(大旨)에 대한 물음을 받았을 때 대답하기를, ‘고 총독(顧摠督)193) 이 우리 나라로 하여금 왜(倭)의 봉공(封貢)을 주청(奏請)하게 하니, 이는 의리로 보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집 때문에 상주(上奏)하지 않을 수 없다면, 마땅히 「소방(小邦)은 왜노(倭奴)와 불공 대천의 원수로서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화친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 그들을 속국(屬國)으로 용납하여 소방으로 하여금 원수를 잊고 원한을 푸는 치욕을 없게 하고 조석(朝夕)의 위험을 풀어주신다면, 역시 천조에서 내려 준 은혜입니다.」라고 진청(陳請)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을 꾸민다면 의(義)에 있어서 어긋남이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성혼이 진대(進對)했던 대략입니다. 김장생이 성혼을 존모(尊慕)한 것이 문하의 제자(弟子)들만 못하지 않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만일 의심스런 점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성혼의 생전에 한번도 질의(質議)하지 않고, 죽은 뒤에 단지 뒷공론으로 몰래 송시열에게 전수(傳授)하여 무현(誣賢)하는 구실로 삼는단 말입니까? 또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성혼의 묘표(墓表)를 찬(撰)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행동은 반드시 의(義)로써 하여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바꾸지 않았으며, 지킨 바 출처(出處)의 정도(正道)는 신명(神明)에게 물을 만하다.’고 하였고, 결론지어 말하기를, ‘김집이 일찍이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고, 또 부사(父師)로부터 출처(出處)와 언행(言行)에 대하여 익히 들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장생이 만일 그 주본(奏本)을 의논한 일에 대하여 화의(和議)라 하여 헐뜯었다면, 김집은 어찌 부사(父師)에게 익히 들은 말이라며 찬양했고 유독 송시열만 헐뜯는 말을 들었단 말입니까?
아! 남이 자기를 비난하는데 대해 화를 내어 남의 선인(先人)을 이처럼 심하게 욕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성혼의 아들 증(贈) 판서(判書) 성문준(成文濬)까지 싸잡아 무욕(誣辱)하기를, ‘파문(坡門)194) 의 여러 사람들이 자못 정인홍(鄭仁弘)에게 붙어서, 모두 송강(松江)195) 을 탓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문준의 순수한 성품은 하늘에서 타고났고, 성경(誠敬)에 대한 학문은 가정에서 얻은 것입니다. ‘이름을 듣고 발탁했다.’는 비지(批旨)는 인묘(仁廟)께서 신하를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이었으며, 효우(孝友)로 일컬어진 것은 성혼이 아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어짊이 이와 같은데, 정인홍에게 붙었다는 말이 가당하기나 하겠습니까? 기축 역옥(己丑逆獄)196) 때에 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었는데, 최영경(崔永慶)이 난데없이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와 국옥(鞫獄)에 갇히게 되자 정철이 구해(救解)하여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재차 국문받을 때 정철은 이미 위관에서 체직되었습니다. 이미 위관에서 체직되었는데 최영경을 얽어 죽였다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정철을 모함한 것은 이미 너무나도 만부당한 일입니다. 하물며 쭉 산야(山野)에만 있던 성혼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다만 성혼이 정철과 친한 벗이라는 까닭으로 정인홍이 그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되레 정철을 무함하던 죄목으로 또 성혼을 무함하였고, 화(禍)가 죽은 뒤에까지 미쳤으니, 성문준이 성혼의 아들로서 억울하고 비분한 마음이 마땅히 어떠했겠습니까? 무신년197) 에 성혼의 문인 신응구(申應榘)가 스승을 위해 신변(伸卞)할 때 겸하여 정철이 정말 군자(君子)임과 그가 무고를 당했음을 쟁변(爭辨)했는데, 조그만 실수도 약간 언급하여 성혼이 이이(李珥)를 변론(辨論)한 것처럼 그 경솔한 곳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해지는 사이에 갈수록 알맹이가 달아나 정철의 아들 고(故) 참판(參判) 정홍명(鄭弘溟)이 고 참판 이명준(李命俊)에게 보낸 편지에 지나치게 의심하고 서로 탓한 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문준의 마음에 조금도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자 묵은 의심은 말끔히 사라졌고, 교의(交誼)도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정홍명의 조카 고(故) 장령(掌令) 정양(鄭瀁)이 그 문집(文集)을 수집할 때 그 편지는 빼버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그 당시의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고(故)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도 근거없는 비방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서 성문준이 신응구의 소(疏)를 만류하지 못한 것을 그르다 하였는데,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이 또 너무 지나치자, 성문준이 글을 써서 지극히 명백하게 스스로를 변명했고 문집(文集)에도 환히 실려 있으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아! 김창협(金昌協)은 바로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인데, 그 할아버지가 성혼을 추앙하던 뜻을 잊어 버리고, 송시열의 여론(餘論)에 빌붙어 망령되게 의논을 덧붙여서 임의대로 주었다 빼앗았다 하며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 3현(三賢)의 도덕(道德)을 열서(列書)하여 찬미(贊美)하되, 유독 성혼만은 꼽지 않아 조종(操縱)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의 말로써 비록 경중(輕重)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용심(用心)의 외람되고 패려함은 족히 통분해 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또 그의 할아비 김상헌은 성혼의 묘비(墓碑)에 ‘평소에 몸을 잘 단속하고 법도를 지켰으며, 언행(言行)에 있어서 본받을 점이 아닌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을 썼는데, 그가 감히 이처럼 헐뜯었으니, 할아비를 배반하고 현인(賢人)을 업신여긴 죄는 이루 다 벌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송시열과 김창협의 문집이 모두 이미 세상에 간행(刊行)되었으니, 빨리 송시열과 김창협의 직명(職名)을 추탈(追奪)할 것을 명하소서."
하고, 또 성문준을 성혼의 파산 서원(坡山書院)에 추배(追配)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5월 2일 경진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당후 가관(堂后假官)198) 을 뽑는데 거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며 정원 당랑(政院堂郞)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신계(新啓)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조태구(趙泰耉)가 의약(議藥)을 위해 비로소 향리에서 올라와 입시(入侍)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약이(藥餌)를 드시라는 뜻으로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제조(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호조(戶曹)의 세입(稅入)이 해마다 크게 줄어들고 있는데다 칙사(勅使)를 맞이하는 일을 이미 세 번 겪었으며, 아직도 두 번이 남아 있습니다. 경비(經費)를 합산하면 예단(禮單)과 몰래 주는 은(銀) 외에도 칙사에게 수용(需用)되는 잡물(雜物)이 거의 8만 냥(兩)이 넘고, 여러 가지 방물(方物)들을 합하여 계산하면 목면(木綿)으로 5백 동(同)이나 됩니다. 본조(本曹)의 한 해의 비용과 공물(貢物)·별무(別貿)199) 등 응당 지급(支給)할 값을 합하면 돈 14만 냥과 목면 8백여 동이 되는데, 금년의 세입과 비교하여 본다면 돈이 11만여 냥이나 부족합니다. 지금 돈을 만들 수 있는 방도는 주전(鑄錢)하는 것뿐인데, 구리의 값이 비싸서 이익이 매우 적습니다. 다만 본조에 마침 생동(生銅)200) 이 있고 동래(東萊)에도 역시 저장하여 놓은 것이 있으니, 추이(推移)하여 주전한다면 아마 경비에 보탬이 될 듯하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고 신(臣)도 또한 스스로 결단할 수 없어서 종당(從當)에 사유를 갖추어 진품(陳稟)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주전(鑄錢)하는 일도 역시 폐단이 많아서 공장(工匠)에게 급료로 줄 포목(布木)의 경비(經費)가 호번(浩繁)하니, 필경에는 남는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개 전화(錢貨)는 변방 고을에서 통행(通行)되는데, 주전은 더 없는데도 쓰이는 곳은 갑절로 많아집니다. 신(臣)이 관서(關西)에 대죄(待罪)할 때 감영에 저장하여 둔 돈이 창고(倉庫)에 가득 쌓인 채 돈꾸러미의 실이 썩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급 비록 여러 번 객사(客使)를 겪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남아 있는 저축이 있을 것입니다. 양서(兩西)에 유치(留置)한 미곡(米穀)으로 관서 감영의 돈과 바꾸게 한다면 주전할 필요도 없이 국용(國用)에 보탤 수 있을 것이니, 지부(地部)와 본도(本道)가 상의하여 가져오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태좌가 또 한재(旱災)에 대하여 아뢰고, 청하기를,
"성상께서 더욱 두려운 생각을 가지시어 늘 전쟁 중에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반드시 먼저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니, 조태구가 말하기를,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 실효(實效)가 없으면 한갓 형식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검소한 생활을 궁중(宮中)으로부터 시작하되 내탕(內帑)에 혹 남은 저축이 있어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민력(民力)을 펴게 하신다면,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태구가 이어서 병의 실상을 아뢴 뒤 걸퇴(乞退)하기를 애써 청하였는데, 임금께서 하교(下敎)하기 전에 또 실록청 총재(實錄廳摠裁)의 임무도 사직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조태구는 나라의 수상(首相)으로 있는 동안 사람들의 말에 곤욕을 치러 여러 달 향리로 물러가 있다가 전석(前席)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임금께서 애틋하게 그리는 뜻이 있지 않았고 내일 물러나 돌아간다는데도 만류하는 하교도 없었으므로, 물정(物情)이 실망하였다.
이교악(李喬岳)을 동래(東萊)로 유배하였다.
박사익(朴師益) 등을 양남(兩南)의 여러 고을로 유배하였다.
5월 3일 신사
진시(辰時)부터 오시(午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차자(箚子)로 총재관(摠裁官)을 사직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사퇴에 대하여 지성으로 만류하는 하교가 없었습니다. 총재(摠裁)의 임무를 도로 주는 것이 마땅하니, 다시 돈독히 권면하여 반드시 돌아오기를 기약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영상이 조정에 돌아왔기에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는데, 갑자기 사퇴하겠다고 하므로, 놀란 나머지 어찌할 줄을 몰라 형용할 말이 없다. 차자의 마지막 부분의 일은 마땅히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5월 4일 임오
진시(辰時)와 사시(巳時)에 햇무리가 졌고, 묘시(卯時)에 또 햇무리가 졌다.
오랜 가뭄 때문에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覔山)·한강(漢江) 등지에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교리(校理) 송진명(宋眞明)이 소(疏)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날 흉당(凶黨)이 국권(國權)을 천단했을 때 수차에 걸쳐 홍문록(弘文錄)을 자기들과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언제나 서너 사람이 권점(圈點)을 쳐서 구차스럽게 끝내곤 하였으니, 심지어는 도록(盜錄)하였다는 설(說)까지 길거리에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지금 신록(新錄) 때를 당하였으니, 청컨대 일찍이 거친 자를 모으되 산질(散秩)된 자를 견복(牽復)하기도 하고 외읍(外邑)에 있는 자를 소환하기도 하여, 충분히 상의하고 자세히 살펴서 그 일을 중하게 다루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지난번 즉위하시던 초기에는 바람처럼 신속하고 우레처럼 위엄이 있으시어 정채(精彩)가 대단히 새로왔으므로, 아침나절이 다 가기도 전에 위험을 안정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처음과 같지 않게 되어, 연대(筵對) 때 침묵이 너무 지나치고 장주(章奏)하는 사이에 비답을 번번이 아끼십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따르실지 않으실지 옳게 여기실지 않으실지에 대해 모두 분명하게 개시(開示)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소서. 그리고 또 삼주(三晝)의 법강(法講)201) 도 일체 폐하셨고 하루건너 하는 소대(召對)도 거의 예과(例課)와 같습니다. 또한 바라건대 때때로 법강을 열어 성학(聖學)이 날로 진보되고 치화(治化)가 날로 새로워지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하원(李夏源)은 문아(文雅)하고 염정(恬精)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번(嶺蕃)202) 은 본래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고, 또 거듭 흉년이 든 때를 당하였으니, 오활한 선비로는 결코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빨리 변통(變通)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또 신유익(愼惟益)을 서장관(書狀官)으로 구차스럽게 의망(擬望)한 잘못을 논하고, 이어서 심탱(沈樘)·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의 망중(望中)에서 빼내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고 명백하게 지시한 것은 없었다.
5월 6일 갑신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명소(命召)를 돌려보내니, 임금이 연달아 사관(史官)을 보내어 그것을 전수(傳授)하였다. 그러나 조태구가 소(疏)를 올려 힘써 사양하니, 임금은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5월 7일 을유
이진망(李眞望)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여선장(呂善長)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세최(李世最)를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윤혜교(尹惠敎)를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다.
5월 8일 병술
동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사시(巳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5월 9일 정해
밤 1경(一更)에 달무리가 졌다.
청사(淸使)가 경성(京城)을 떠났다. 부칙(副勅) 액진명(額眞明)은 성품과 행동이 괴팍스럽고 탐욕이 한정이 없어 특별히 요구하는 것들을 글로써 제시하였는데, 물종(物種)이 너무 많았다. 역관(譯官) 이세만(李世萬)이 전례를 들어 거절하자, 이에 크게 노하여 하인을 시켜 이세만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으르렁대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선물로 받은 물품을 언제나 은(銀)으로 바꾸어 달라고 청하고 손수 저울질을 했다고 하였다.
5월 10일 무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중경(權重經)을 체직하고, 전(前) 감사(監司) 한세량(韓世良)을 잉임(仍任)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 이하원(李夏源)은 몸가짐이 염결(廉潔)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잘 지켰습니다. 유신(儒臣)이 소(疏)에서 ‘문아(文雅)하고 성품이 염정(恬靜)하다.’고 논하며 허여(許與)하였으니, 가볍게 체직(遞職)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속히 부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호조 판서 이태좌(李台佐)은 경비(經費)가 바닥났음을 진달하고, 여러 군문(軍門)에서 돈 4만 냥을 빌려 와 다음에 올 칙사에게 들 비용에 대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양역(良役)의 폐단을 크게 논하고 각읍(各邑)의 수령(守令)들 중에 빠진 인원을 즉시 보충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감사(監司)에게 신칙하여 곤장을 치거나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극변(極邊)으로 멀리 정배(定配)한 아홉 사람 중에서 신사철(申思喆)은 노모(老母)가 있으며, 김희로(金希魯)는 형제가 모두 귀양갔는데, 또한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그 도내(道內)에서 조금 내지(內地)로 옮겨 주어 모자(母子)가 서로 의지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이태좌가 이어 말하기를,
"그 중에서 김취로(金取魯) 또한 노모가 있으니, 청컨대 한결같이 내지로 이배(移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윤회(尹會)·정언(正言) 조지빈(趙趾彬)이 합계(合啓)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윤회가 이어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다만 홍석보(弘錫輔)의 작처(酌處)를 환수(還收)하라는 청만 따랐다. 또 논하기를,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징휴(李徵休)는 유취장(柳就章)과 혼인을 맺고 역적 김창집(金昌集)에게 아부하였으며, 일찍이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있을 때 전관(前官)이 비축하여 둔 진곡(賑穀)을 모두 자신이 비축한 것에 집어넣고서 영문(營門)에 거짓 보고를 올려 외람되게 상전(賞典)을 받고 곤임(閫任)에 승진되었으니, 물정(物情)에 크게 어긋납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깎아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논하기를,
"봉산 군수(鳳山郡守) 이진화(李震華)가 나이를 줄여 고을 원의 자리를 얻어내려 도모한 것도 참으로 해괴한 일인데, 재읍(災邑)에 감해 준 포(布)를 모두 바치게 하여 임의로 사용(私用)하였습니다. 그리고 좌수(座首) 강옥(姜沃)과 결탁하여 공사(公事)를 농간하였고 무고(無辜)한 사람을 장살(杖殺)하였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역시 그대로 따랐다. 조지빈(趙趾彬)도 역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은 권중경(權重經)의 삭탈(削奪)에 대한 일만 따랐다. 또 논하기를,
"봉상시(奉常寺)의 공물(貢物)을 첨가해 주는 것을 역적(逆賊) 김창집(金昌集)이 제조(提調)로 있을 때 전복(典僕)·숙수(熟手)에게 옮겨 주어 원공인(元貢人)으로 하여금 공연히 생업을 잃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본시(本寺)로 하여금 원공인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여 민원(民怨)을 그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논하기를,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은 어버이의 나이가 이미 일흔을 넘었다 하여 사임(使任)을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하였는데, 며칠 만에 도로 맡으라고 특교(特敎)를 내렸으니, 처분(處分)이 뒤바뀌어 듣는 사람이 모두 의혹을 가집니다. 청컨대 그대로 차임(差任)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1일 기축
진시(辰時)와 사시(巳時)에 햇무리가 졌다.
이진검(李眞儉)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유필원(柳弼垣)을 부응교(副應敎)로, 권이진(權以鎭)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승지 오명항(吳命恒)이 아뢰기를,
"평안(平安)·황해(黃海)의 두 병영(兵營)은 은화(銀貨)가 흉역배(凶逆輩)들의 사용(私用)으로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죄인(罪人)들이 비록 완악하고 잔인하여 곤장에 맞아 죽었더라도 허다한 공화(公貨)를 어찌 역적 집안이 부요(富饒)하게 되는 밑천이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탐장(貪贓)한 물건은 적몰(籍沒)하는 법규도 있으니, 청컨대 그들의 간교하게 모은 장물(贓物)을 적몰하여 양서(兩西)의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수요(需要)에 보태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옥당관(玉堂官) 오명신(吳命新)·윤유(尹游) 등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무사(無私)’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누누이 개진(開陳)하였다. 오명항이 그 뜻을 계속하여 진달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난번 오서종(吳瑞鍾)과 유경수(柳慶綏)를 아울러 안국(按鞫)한 것은 사경(邪逕)을 엄격히 방비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듣자니 이중환(李重煥)은 김천 찰방(金泉察訪)으로 있을 때 역마(驛馬)를 목호룡(睦虎龍)에게 빌려 주고서 잃어버렸다고 했다가 뒤에 역적 이천기(李天紀)의 집에서 찾아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데 관계되어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합니다. 그런데도 대각(臺閣)에서는 말 한 마디 없고, 비국(備局)에서도 낭청(郞廳)으로 차임(差任)했으며, 전조(銓曹)에서도 기성(騎省)203) 에 의망(擬望)하였습니다. 청컨대 이것으로 전조에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홍석보(洪錫輔)를 다시 국문(鞫問)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으로 차자(箚子)를 올리자, 임금이 차사(箚辭)가 마땅하다고 비답하고, 도로 성명(成命)을 거두었다.
경상도 영천군(永川郡)에서 사비(私婢)가 사내아이 세 쌍둥이를 낳았다고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5월 12일 경인
오시(午時)에서 유시(酉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심단(沈檀)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승원(李承源)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임금이 한재(旱災) 때문에 정전(正殿)을 피한 뒤 감선(減膳)하고 철악(徹樂)하게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아! 보잘것 없는 내가 즉위한 이래 비상(非常)한 재앙과 놀라운 현상이 없는 해가 없었고, 홍수·가뭄·바람·우박 등의 참혹함이 거의 달마다 곡식을 해쳤다. 인애(仁愛)한 하늘이 두려움을 주고 경계하여 잘못을 고쳐 주려는 것이니, 후세(後世) 임금들이 반성하여 본받아야 할 바이다. 아! 시(詩)에 이르기를, ‘하늘은 바야흐로 성을 내고 계시니, 그처럼 떠들지 말라.’ 하였고, 또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안일(安逸)하고 즐거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요(堯) 순(舜) 같은 성인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아침 밥을 먹을 겨를이 없었으니, 정사(政事)에 부지런하던 사실이 서책에 분명히 실려 있다. 그런데 요즈음의 시사(時事)에 대해 말한다면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고 기와가 부숴지는 형국이고, 언론(言論)에 대해 말한다면 마음속의 말을 먼저 뱉아 버리는 뜻이 있다. 깊은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차라리 꼼짝 말고 잠이나 들었으면 좋을 듯싶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인재(人才)를 수습하고 충언(忠言)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선(善)으로 나아오게 하는 깃발을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진언하는 말이 쓸 만하면 채용하고, 말이 쓸 만하지 않으면 그냥 둘 것이다. 승지(承旨)는 대신 교서(敎書)를 짓되, 마땅히 정부(政府)로부터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도록 하라. 말이 비록 광망(狂妄)하더라도 나는 너그러이 용납할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자식이 아비를 대하는 것 같으니, 어찌 할 만한 말이 없겠는가? 당고(黨錮)의 화(禍)204) 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한 집안에서도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호오(好惡)가 서로 상반되기도 하였다. 아! 정지(情志)가 막혀 버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경(卿) 등은 모두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의리로 보아 좋고 나쁜 것을 함께 겪어야 되는데, 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어찌하여 심력(心力)을 다하지 않는가? 왕실(王室)을 도와서 조종(祖宗)의 돌아가신 신령을 위로한다면, 그대의 선조(先祖)들이 반드시 기뻐할 터이니, 어찌 그 수(壽)를 함께 받지 않겠는가? 아! 지금 내린 재이(災異)는 모두 무덕(無德)한 나의 소치이니 천지 신명에 대하는 정성이 내 마음에 절실하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경외(警畏)하는 마음을 더욱더 가지도록 하겠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약방 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이달 10일은 태종 대왕(太宗大王) 기신(忌辰)인데, 옛부터 이날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아서 ‘태종우(太宗雨)’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이날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한재(旱災)가 혹심하니, 민사(民事)가 딱하고 염려스럽습니다. 그리하여 내외(內外)의 저축(儲蓄)이 텅 비었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비용을 절검(節儉)하시어서 하늘에 대응하는 실천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5월 13일 신묘
재신(宰臣)을 보내어 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山川)·우사(雨祀)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8로(八路)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전라도 진도군(珍島郡) 등지(等地)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였다. 경상도 함안군(咸安郡) 등에는 우박이 내려서 소와 집짐승들이 죄다 죽었고 사람도 동사(凍死)하였다. 선산(善山) 등의 읍(邑)에도 우박이 내렸다. 개령(開寧) 등 현(縣)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천둥 같았다. 강원도 평창(平昌) 등 읍에도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사발 만하였다. 이상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한 것이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 전무(前廡)에 나아가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신임(申銋)을 육지로 옮겨 위리(圍籬)를 풀게 하고, 조상경(趙尙絅)·임방(任埅)·김유경(金有慶)·조영복(趙榮福)·유숭(兪崇)·윤정주(尹廷舟) 등은 양이(量移)205) 하게 하고, 윤재중(尹在重)·권응(權譍)·유하기(兪夏基)는 감등(減等)하고, 구정훈(具鼎勳)·김영행(金令行)·이방화(李邦華)·김창발(金昌發)은 방송(放送)하였다. 현재 갇혀 있는 죄인(罪人) 이수민(李壽民)은 감사(減死)한 뒤 절도(絶島)로 정배하게 하고, 또 형조(刑曹)의 죄가 가벼운 죄수 및 여러 도(道)로 유배한 죄인 중 죄가 가벼운 자는 모두 용서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5월 14일 임진
여필용(呂必容)·홍중우(洪重禹)·박휘등(朴彙登)을 승지(承旨)로 삼고, 오명항(吳命恒)을 발탁하여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삼았다.
임금이 사단(社壇)에 갈 때에 보련(步輦)을 타고, 양산(凉傘)을 물리쳤다. 왕세제(王世弟)도 어가를 따라가서 친히 기우제를 지냈으나 비를 얻지 못하고 아침에 환궁(還宮)하였다.
5월 16일 갑오
간원(諫院)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신임(申銋)·임방(任埅)·조영복(趙榮福)을 양이(量移)하라는 명령의 환수(還收)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판돈녕(判敦寧) 홍만조(洪萬朝)가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지 4년 동안 전에 없던 재앙이 해마다 나타나 경계를 보이니, 대개 아래에 있는 인사(人事)가 미진한 데가 있으면 위에 있는 하늘이 바로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능(陵)을 살피고 묘(廟)를 배알하시는 일 외에 문묘(文廟)나 진전(眞殿)206) 등에 헌작(獻酌)하는 예는 차례차례 몸소 행하셨으나, 오직 사묘(私廟)에만은 한 번도 임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땅히 행하여야 될 예(禮)를 빠뜨리고 행하지 않으니, 중외(中外)에 군정(群情)이 의아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인심(人心)을 저버리고 천의(天意)에 부합될 수 없는 법이니, 오늘의 재앙은 진실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대원군(大院君)의 묘(廟)에 몸소 제사지내시니, 그 당시 식자(識者)들이 말하기를, ‘오로지 정통(正統)만을 생각한다고 하여 어찌 사친(私親)에 대한 정(情)까지 끊을 수야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절실한 말입니다. 더욱이 상(喪)을 당하여 전곡(展哭)한 것은 곧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오늘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시던 초기에 즉시 사묘(私廟)에 배알할 것이라.’ 하였는데, 1년, 2년 시간이 지나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으니, 비단 구중(九重)에 계신 전하께서 사모하는 정을 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저승에 계신 영혼께서도 틀림없이 전하의 행차를 버라는 정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책으로 신인(神人)을 위열(慰悅)하여 화기(和氣)를 이끌어 들이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다른 말을 그만두고 이에 대해 간곡히 말씀드린 것이니, 청컨대 사묘(私廟)에 거둥하시어 온 나라 신서(臣庶)의 의혹을 풀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이 합당하니,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아! 홍만조(洪萬朝)는 직위가 1품에 이르고 나이가 80살이 지났는데, 다시 무엇을 더 바라 차마 이와 같이 아첨하는 태도를 짓는가? 이에 사묘(私廟)에 거둥하지 않은 것을 재앙을 불러들인 단서로 삼았으니, 그 혼모(昏耄)하고 무식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만으로도 족히 그의 평생을 단정할 수 있다.
5월 17일 을미
밤 1경(一更)과 2경에 달무리가 졌는데, 토성(土星)과 목성(木星)을 둘렀으며 양이(兩珥)가 있었다.
임금이 특교를 내려 가뭄을 걱정하고, 친히 북단(北壇)에 나아가 기우(祈雨)를 하려고 대신(大臣)에게 물었다. 묘당(廟堂)에서 아뢰기를,
"북교(北郊)에 나가 친히 기도한 일은 일찍이 전례(前例)가 없습니다. 교외(郊外)에서 밤을 새우는 것도 극히 어려운 일이니, 청컨대 우선 며칠 지켜 보다가 태묘(太廟)에 가서 기도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농단(農壇)으로 정해서 행하라고 명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응지(應旨)하여 진계(陳戒)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정령(政令)과 동정(動靜)에 잘못한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후(仁厚)한 성품은 남음이 있되 강과(剛果)한 성품은 부족하고, 높은 자리에 단정하게 않아 계시지만 가부(可否)의 말씀을 들을 수 없으며, 법강(法講)을 오랫동안 거두시어 위령(威令)이 떨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옥(鞫獄)을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대신(臺臣)의 계달(啓達)이나 대신(大臣)의 상주(上奏)에 따라 따르고 어기심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독약을 쓴 일이 어떠한 역절(逆節)입니까? 그런데 상선 궁인(尙膳宮人)과 독을 시험한 흉악한 비녀(婢女)를 조사해 낼 기약이 없어 중외(中外)의 의혹과 신민(臣民)의 울분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법(法)을 집행하심이 확고하지 못하고 일을 당하여 과단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크게 경동(警動)하시고 크게 진작(振作)하시어 뜻을 굳게 가지시며, 시비(是非)를 분명히 가리소서. 이것이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주의를 더하겠다고 답하였다.
5월 18일 병신
재신(宰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심준(沈埈)을 지평(持平)으로,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이진유(李眞儒)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옥당(玉堂)에서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려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군덕(君德)의 성취는 그 책임이 경연(經筵)에 있는데, 해를 넘기도록 폐해 둔 채 한 번도 개강(開講)하지 않고 있으며, 하루건너 소대(召對)하는 일도 또한 형식에 따라 숫자만 채울 뿐이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통렬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혁연하게 뜻을 분발하소서. 그리하여 경악(經幄)을 자주 열고 신하를 빈번히 인접(引接)하시어, 경전(經傳)의 토론과 득실(得失)의 자문을 통해 전하의 학문에 날로 진보되게 하시고, 정치와 교화가 날로 새로워지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듣고 결단하는 일이 분명해야만 시비(是非)가 정해지고, 시비가 정해져야만 쟁론(爭論)이 진정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지(批旨)에 매양 분명한 구별이 모자라고 따르거나 거절하시는 사이에 어떤 일은 전도(顚倒)에 가까와 처분이 서로 뒤바뀜이 새기고 지우듯 합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본래 결정한 시비(是非)를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지키지 못하시어 국체(國體)에 손상이 나게 하고 듣는 사람들을 의혹하게 하십니까?"
하고, 또 청하기를,
"정성과 예절을 더욱 돈독히 하여 곧바로 원로(元老)들을 부르시고, 당사(黨私)를 억제하여 척벌(斥罰)을 분명히 보이시며, 대신(大臣)을 돈면(敦勉)하여 국옥(鞫獄)을 빨리 완결지으시고, 전조(銓曹)에 특별히 신치하여 염리(廉吏)를 등용하게 하소서."
하고, 말미에 다시 논하기를,
"양서(兩西)가 조잔(凋殘)하고 피폐하여 장차 버리는 땅이 되어 가니, 마땅히 더욱 신역을 감면하여 특별히 돌보아 주소서. 그리고 한두 군문(軍門)을 혁파(革罷)하여 군액(軍額)의 도고(逃故)에 보충하고, 2필(疋)씩 내는 군역(軍役)을 양감(量減)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찌는 듯한 가뭄의 재앙이 이 지경에 이르러 마음을 태우는 근심이 바야흐로 깊다. 그대들이 계옥(啓沃)207) 한 것이 절실하니, 유념하겠다. 아랫 조항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곧바로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형조 판서 오명준(吳命峻)이 상소하여 양역(良役)의 폐단을 진달하였다. 1필씩을 감(減)하되, 제반 긴요하지 않은 명색(名色)은 혁파(革罷)하여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도록 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되 잡다한 비용은 모두 없애버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5월 19일 정유
임금이 농단(農壇)에 거둥하여 사단(社壇)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왕세제(王世弟)도 어가를 따라갔다. 친히 기도한 뒤 여러 승지(承旨)가 입대(入對)하여 연(輦)을 타고 환궁(還宮)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5월 21일 기해
밤 5경(五更)에 흰구름 한 줄기가 기운처럼 서쪽에서 일어나 곧장 동쪽으로 뻗었는데, 길이는 10여 자이고, 넓이는 한 자쯤이었다. 한참 뒤에 사라졌다.
이승원(李承源)을 헌납(獻納)으로, 이기복(李基福)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정언(正言) 조진희(趙鎭禧)가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승지 심중량(沈仲良)은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려 휴가를 받은 것이 두 차례에 이르렀는데, 쓸데없는 말로 번거롭게 품의하여 패초(牌招)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실로 이전에 없던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종중 경책(從重警責)함이 마땅합니다. 김시경(金始慶)은 심지어 벼슬을 삭탈하자고 청하기까지 한 사람들의 말을 들었는데, 한번 형식적으로 사직하고는 돌아서서 즉시 출사(出仕)하였으니, 염우(廉隅)가 도무지 없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퇴폐한 풍속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파직을 청하는 논의는 너무 지나치다고 비답하였다.
5월 22일 경자
밤 5경(五更)에 달무리가 졌다. 사시(巳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가 졌다.
5월 24일 임인
홍중우(洪重禹)·박희진(朴熙晉)·심공(沈珙)을 승지(承旨)로, 서종하(徐宗廈)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5월 25일 계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영상(領相) 조태구(趙泰耉)를 다시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양역 변통(良役變通)에 대한 일로 다투어 그 득실(得失)을 논하였으나, 결론을 짓지 못하고 파하였다. 장령(掌令) 윤회(尹會)·정언(正言) 조지빈(趙趾彬)이 합계(合啓)하였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윤회가 이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혜청(惠廳)에서 축조한 인천(仁川)·안산(安山)의 해언(海堰)은 재화(財貨)만 허비하고 백성들의 전답에 피해만 끼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즉시 허물어 버리고 그 일을 맡은 자를 잡아 가두어 엄형(嚴刑)하게 하소서."
하니, 최석항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호소(呼訴)가 사실이 아니니, 다시 적간(摘奸)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그 일을 맡은 자만 가두어 치죄하라고 명하였다. 또 논하기를,
"영동 현감(永同縣監) 이영보(李英輔)는 흉당(凶黨)에 빌붙어서 어진이를 해치고 바른이를 모함하기 위해 감히 흉장(凶章)을 올렸는데, 말이 매우 패악스러웠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 깎아 버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지빈(趙趾彬)이 역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전(前) 부사(府使) 어유봉(魚有鳳)은 자칭 김창협(金昌協)의 문생(門生)이라며 그 스승에 대한 변무(辨誣)를 핑계로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한 장의 소(疏)를 올렸습니다. 외척이 조정의 의논을 간여하는 것은 본래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당역(黨逆)의 남은 무리와 한패가 되어 적괴(賊魁)와 형제간인 사람을 변호하려 하는 것이겠습니까? 전(前) 부수(副率) 이하곤(李夏坤)은 명가(名家)의 자제로서 언론과 행동을 더욱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인데, 흉당(凶黨)과 일을 같이할 수 없음과 외척과 연명(聯名)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여 사론(邪論)에 속아 따랐으니, 사부(士夫)의 수치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기복(李基福)은 청컨대 영변(寧邊)에 그대로 잉임(仍任)하여 민폐(民弊)를 없애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하곤과 이기복의 일만 윤허하였다. 이하곤은 문장이 훌륭하고 견식이 넓어 사우(士友)들에게 추중(推重)받았다. 일찍이 김창협(金昌協)을 사사(師事)하였기 때문에 그 소(疏)에 참여하였던 것이며, 처의(處義)하는 데는 실수함이 없었다. 당시 상황에 개탄하며 과거와 벼슬을 버리고 중신(重臣)과 재상(宰相)들을 풍유(諷諭)하는 데 이르렀는데, 조지빈은 그 기세를 타서 경솔하게 탄핵하니, 공의(公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서양국(西洋國)의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본감(本監)의 관원(官員)인 허원(許遠)이 연중(燕中)에 들어 갔다가 가져온 것으로 화재(火災)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어 각 군문(軍門)에 영을 내려 만들어서 비치하도록 하였는데, 지부(地部)에서 경비가 바닥이 났다며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만들자고 청하니, 임금이 역시 허락하였다.
근시(近侍)를 보내어 삼각산(三角山) 등 여러 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5월 27일 을사
양주(楊州) 유생(儒生) 조종세(趙宗世)·진주(晉州) 유생 강봉의(姜鳳儀) 등이 상소하여 신사년208) 의 옥사(獄事)를 신원(伸寃)할 것을 청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한낱 시골 유생이 망령되게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일찍이 노세재(盧世梓)·허벽(許壁)의 일 때문에 본원(本院)에서 계품(啓稟)하여 이러한 소(疏)는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이라고 말을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이사상(李師尙)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세근(李世瑾)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를 동지사 겸 진하 사은사(冬至使兼陳賀謝恩使)로, 김시혁(金始㷜)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가미조중탕(加味調中湯)을 복용한 것이 꼭 80첩(貼)이 찼다 하여 당분간 정지하라고 하였다.
5월 28일 병오
진시(辰時)에서 오시(午時)까지 햇무리가 지고, 늦게 비가 조금 내렸다.
옥당(玉堂)의 오명신(吳命新)·여선장(呂善長)·이현장(李縣章)·윤유(尹游) 등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조종세(趙宗世) 등이 구언(求言)을 빙자하여 조종을 뒤엎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서로 이어 투소(投疏)하여 대신(大臣)을 무함하고, 심지어는 조돈(趙盾)209) 으로 배척하였습니다. 저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은 대신도 꼭 조사하여 찾아내어야 한다고 누차 진청(陳請)하였고, 양사(兩司)에서도 모두 발론(發論)하여 쟁론(爭論)을 그치지 않았으니, 이는 성명(聖明)께서 굽어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이광좌(李光佐)가 작년에 상소하였던 것은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하려 했던 것뿐이었으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모자(母子)의 인륜을 끊는다는 등의 말로 극심하게 욕하고 헐뜯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이와 같은 헐뜯고 모함하는 말을 통찰하시고, 강봉의(姜鳳儀)를 변원(邊遠)으로 정배(定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의정 최석항(崔錫恒)이 강봉의의 소어(疏語) 때문에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대명하지 말라고 유시(諭示)하였다. 드디어 차자를 올려 그것이 무함임을 변명하니, 임금이 따뜻한 말로 비답하였다. 병조 판서 이광좌(李光佐) 역시 대명하니, 승지가 아뢴 바에 의하여 대명하지 말라고 하였다.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사직하지 말고 행공하라고 비답하였다.
5월 29일 정미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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