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2권, 경종 3년 1723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2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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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무신

전(前)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적소(謫所)에서 졸(卒)하였는데, 나이가 67세였다. 송상기는 성품이 자상하고 온화하며 지론(持論)이 화평(和平)하여 일찍이 남을 해친 일이 없었다. 문장이 넉넉하고 탁 틔어 지필(紙筆)만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시켰고, 평소의 생활이 소박하여서 가난한 선비 같았다. 일찍이 정승의 물망에 올랐으나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타고난 성품이 너무 유약한데다가 종형(從兄) 이유(李濡)에게 그르쳐진 바 되어 존호(尊號)를 올리는 청(請)에 참여하였으니, 명절(名節)에 흠이 됨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신축년210)  의 소(疏)는 그의 죄가 아니었다. 김창집(金昌集)과 종형제(從兄弟)였지만, 그의 의논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대의(臺議)가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위 이천기(李天紀)가 위언(危言)을 지어내어 공동(恐動)시키는 바람에 경솔하게 진소(陳疏)하였다가 훗날 자못 더욱 후회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헌부(憲府)211)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대부(大阜)의 목관(牧官)을 첨사(僉使)로 바꾼 뒤 불법으로 재물을 착취하여 열 집 중에 아흡 집이 비었습니다. 홍원(洪原)의 목장(牧場)도 한 번 각각 설치한 뒤로 크고 작은 공억(供億)을 터무니 없이 판출(辦出)하니, 비단 목졸(牧卒)이 흩어질 뿐 아니라 말들이 민전(民田)을 짓밟습니다. 청컨대 첨사를 혁파(革罷)하고 전과 같이 목관을 가려서 차임(差任)하며, 홍원 또한 대부에 붙여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청주 토포사(淸州討捕使) 이경지(李慶祉)는 조송(趙松)의 처질(妻姪)인데, 역적 김창집(金昌集)에게 연줄을 대어 교제하려고 수백 금의 값으로 이름난 노새를 사서 김제겸(金濟謙)에게 보냈다고 소문이 낭자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지평(持平) 심준(沈埈)이 상소(上疏)하여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책을 의논하는 자가 민폐(民弊)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데,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각도(各道)의 도망간 자와 물고(物故)된 자를 비록 일시에 탈하(頉下)212)  하기는 어려우나, 만약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나이 60세를 기준으로 모두 탈하하여 탕감한다면 십수 년 동안의 도망한 자와 물고된 자는 저절로 탕척(湯滌)하는 데 들 것이니, 이 어찌 민심(民心)을 굳게 결속시키는 방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 흉당(凶黨)이 세력을 잡고 있을 때에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는 설(說)을 부르짖었는데, 가혹하고 급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하고, 자상하게 백성을 애휼(愛恤)하는 자를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여 방백(方伯)의 포폄(褒貶)과 어사(御史)의 논계(論啓)에 있어서 수령(守令)의 애휼은 논하지 않고 다만 세금 징수에 포흠(逋欠)이 없는 것만을 거론하도록 청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나라를 망치는 말이었습니다. 근래에 또 내직(內職)을 중히 여기고 외직을 가볍게 여기는 폐단이 있습니다. 청컨대 삼사(三司)의 관원으로써 군현(郡縣)에 보직(補職)시켜 그 중에서 우수한 자를 발탁하되, 차례를 따지지 않고 임용하여 외직에 있어서는 탄압(彈壓)하는 보람이 있고 내직에 들어와서는 일이 통달되는 효과가 있게 하소서. 경사(京師)는 사방(四方)의 근본인데, 방역(坊役)이 너무 고통스럽고 무거우니, 무릇 민폐에 관계되는 것은 속히 변통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논사(論事)하는 것을 받아들여 시행하는 일은 없고 일례(一例)로 비답하는 것도 또한 달이 넘고 일이 지나간 후에 있으니, 대소(大小)가 해이해져 진언(進言)이 빈말이 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전후(前後)의 소장(疏章)을 모두 정리해 취사(取舍)할 것을 살피고 조목별로 아뢰게 하여 명쾌하게 처결(處決)하게 하소서. 또 정성을 다하여 덕을 닦으며 경연(經筵)을 자주 여시는 것이 천견(天譴)에 응하여 재앙을 막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고, 마지막으로 신임(申銋)을 육지로 나오게 한 것과 김시발(金時發)을 조율(照律)한 것과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의 형살(刑殺)이 아직도 지연(遲延)된 것과 김재로(金在魯) 등을 구별하여 양이(量移)한 실책을 논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이 말이 매우 절실하니,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겠다. 변통(變通)할 만한 일은 주사(籌司)를 시켜 상확(商確)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6월 2일 기유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이 끝난 뒤에 옥당관 이현장(李顯章)이 아뢰기를,
"고(故) 승지(承旨) 홍명형(洪命亨)은 병자년213)   난(亂) 때 고(故)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성루(城樓)에 올라 분신 자살하였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 바로 증직(贈職)을 했고 선왕(先王)께서는 또 정려(旌閭)를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명(易名)214)  의 은전(恩典)은 아직 시행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증시(贈諡)를 허락하시어 풍화(風化)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吏曹)에서 복주(覆奏)하자 시행을 허락하였다.

 

장령(掌令) 윤회(尹會)가 이경지(李慶祉)는 죄가 무거운데도 처벌이 가볍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니, 처치(處置)하여 체직(遞職)하였다.

 

박필몽(朴弼夢)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3일 경술

기우제(祈雨祭) 헌관(獻官)인 판서(判書) 이조(李肇), 익양군(益陽君) 이단(李檀)에게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고, 그 나머지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그때 한 달이 넘도록 몹시 가물다가 이에 이르러 큰 비가 쏟아졌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심준(沈埈)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이경지(李慶祉)는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정죄(正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엄하게 국문(鞫問)하소서. 김재로(金在魯) 등은 죄명(罪名)이 지극히 무거워 가벼이 의논할 수 없는데, 억지로 피차(彼此)를 구분하여 처분이 전도되었습니다. 청컨대 양이(量移)하여 방송(放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양주(楊州)의 석실 서원(石室書院)은 곧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제향하는 곳인데, 지난번에 흉당(凶黨)들이 김수항(金壽恒)과 그 아들 김창협(金昌協)을 외람되게도 추배(追配)하는 열(列)에 끼이게 하였으므로, 사림(士林)들의 놀라움과 통분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습니다. 만일 역적 김창집(金昌集)의 아비와 그 아우가 지금 살아 있다면 마땅히 연좌(連坐)의 율(律)을 베풀었을 것인데, 현사(賢祀)에 종향(從享)하기까지 하여 나라의 법을 무너뜨리고 유궁(儒宮)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대계(臺啓)가 일어나게 된 까닭입니다. 김수항 부자는 말할 만한 명절(名節)이나 학술(學術)이 없으며, 역적 김창집이 처벌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빨리 배향에서 내쫓는 법을 거행하게 하소서. 서원(書院)을 설치하는 것은 대개 후학(後學)들이 선현(先賢)을 존모(尊慕)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정호(鄭澔)가 이에 괴산(槐山) 땅에 한 채의 원우(院宇)를 지었는데, 길거리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정 판서(鄭判書)의 생서원(生書院)이라고 하며, 동향(同鄕)의 무뢰배들과 이웃 고을의 피역(避役)하는 무리들이 모두 거기로 달려와 빌붙으니, 죄진 자가 숨는 하나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전후로 선정(先正)을 무함하는 상소를 하는 무리에게 식량을 도와주었으니, 그 용심(用心)과 행사(行事)가 진실로 간특합니다.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속히 허물어 버리게 하소서."
하였으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김수항 부자가 석실 서원에 잇따라 제향(祭享)되자 사람들이 김씨(金氏) 사우(祠宇)라 일렀는데, 대개 비웃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창협의 문장과 학식 역시 원향(院享)을 따로 세움직한 것인즉, 어찌 역적의 족속이라고 하여 배향(配享)에서 내치라고 추론(追論)할 수 있겠는가? 정호의 생서원에 대한 말은 반드시 그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자에게서 나왔을 것인데, 대각(臺閣)의 언의(言議)가 너무 심하게 하는 것만 힘쓰고 사실의 본질은 궁구(窮究)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한 시대를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유명응(兪命凝)·서명연(徐命淵)을 승지(承旨)로, 서종하(徐宗廈)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6월 4일 신해

약방(藥房)에서 연일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의 환후(患候)는 담화(痰火)가 상초(上焦)215)  에 꽉 막혔다 하여 감수산(甘遂散)을 올렸다. 약방 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찌는 듯한 더위가 점점 심해지니, 공사(公事)를 가지고 이틀에 한 번씩 입시하는 것이 조섭(調攝)하는 데 방해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사흘 간격으로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창(任敞)을 죽였다. 임창을 배소(配所)에서 잡아와서 금부(禁府)에서 결안 취초(結案取招)하니, 거역하고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금부에서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취초할 것을 계청(啓請)하자,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윤지술(尹志述)의 예(例)에 따라 바로 정형(正刑)216)  할 것을 상소로 청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반드시 결안(結案)을 기다렸다가 죄인을 정형(正刑)하는 것이 곧 정해진 법입니다. 한때의 특교(特敎)를 끌어대고 예(例)로 삼음으로써 앞으로 무궁한 폐단을 열 수는 없으니, 마땅히 왕부(王府)217)  로 하여금 엄하게 신문하여 결안을 기다려 정형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 심단이 다시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그동안 흉역(凶逆)들이 화기(禍機)를 빚어온 것이 무릇 몇몇 해가 되었는데, 흉언(凶言)과 역설(逆說)은 역적 임창이 실제로 그 창수(倡首)가 됩니다. 그의 첫 상소는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으므로 당시의 흉당(凶黨)들까지도 오히려 감히 그 글을 봉입(捧入)하지 못하고 그대로 덮어 숨겨 두었으나, 입이 있는 자 모두 그 말을 전하고 귀가 있는 자 모두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 뒤 깎고 고쳐서 올린 소(疏) 역시 부도(不道)하고 망측(罔測)한 말로써 가득 찬 악(惡)이 역적 이건명(李健命)에 비하여 더 가볍고 무거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건명은 결안을 기다리지 않고도 복법(伏法)되었는데, 어찌하여 임창에 대해서만은 유독 의문을 가진단 말입니까? 임창의 나이 일흔인데 한결같이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반드시 경폐(徑斃)하고 말 것입니다. 선조(先朝)에 조사기(趙嗣基)도 곧바로 정형(正刑)하였으며, 가까운 일로도 윤지술과 이건명의 전례가 있습니다. 대개 죄가 대벽(大辟)218)  에 해당되는 자로서 죄가 환히 드러나 여지가 없으면 결안의 한 절차는 구애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곧바로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역시 그대로 따랐다. 승지 이익한(李翊漢)이 말하기를,
"이태좌가 결안(結安)을 기다려 정법(正法)하라고 청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는데, 지금 심단의 청대(請對)로 인하여 또 정형하라고 명하시니, 처분이 전도(顚倒)될 뿐 아니라 진실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심단이 말하기를,
"대신들과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지금 바로 정형하지 않는다면 이후로 장(杖)을 참으며 불복(不服)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익한이 또 쟁론(爭論)하고, 심단이 바로 처단할 것을 힘써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동의금(同義禁) 이명연(李明彦)이 소(疏)을 올려 논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판의금의 연주(筵奏)가 마땅하다. 다시 신문할 단서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죄는 진실로 악역(惡逆)에 관계되지만 법(法)은 가벼이 고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결안 취초(結案取招)한 뒤에 비로소 정형(正刑)하니, 이것은 우리 나라의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윤지술을 특명으로 정형한 것은 역시 법을 벗어난 것이었는데, 그 당시 여러 신하들이 능히 쟁론하지 못하였고, 그 뒤 이건명(李健命)을 이참(莅斬)한 것과 임창을 직참(直斬)한 것은 한때 시원하기는 했겠지만, 뒷날 무궁한 폐단을 열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95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편사(編史)


[註 216] 정형(正刑) : 사형.[註 217] 왕부(王府) : 의금부.[註 218] 대벽(大辟) : 사형.
사신은 말한다. "죄는 진실로 악역(惡逆)에 관계되지만 법(法)은 가벼이 고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결안 취초(結案取招)한 뒤에 비로소 정형(正刑)하니, 이것은 우리 나라의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윤지술을 특명으로 정형한 것은 역시 법을 벗어난 것이었는데, 그 당시 여러 신하들이 능히 쟁론하지 못하였고, 그 뒤 이건명(李健命)을 이참(莅斬)한 것과 임창을 직참(直斬)한 것은 한때 시원하기는 했겠지만, 뒷날 무궁한 폐단을 열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은 다만 대부 첨사(大阜僉使)를 혁파(革罷)하는 일과 이경지(李慶祉)를 잡아다가 국문하는 일과, 김수항(金壽恒) 부자를 배향에서 내치는 일과 정호(鄭澔)의 생서원(生書院)을 철훼(撤毁)하는 일만 윤허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조지빈(趙趾彬)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강봉의(姜鳳儀)·조종세(趙宗世) 등은 응지(應旨)란 핑계로 서로 이어서 소(疏)를 올렸는데, 오로지 신사년219)                  의 일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일종의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백방으로 번갈아가며 엿보다가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이 전하(殿下)의 마음을 움직이고 군신(君臣)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조종세의 소어(疏語)는 윤기(倫紀)가 없어 강봉의보다 더한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투비(投畀)220)                  의 법이 강봉의에게만 미쳤으니, 청컨대 조종세도 함께 변원(邊遠)으로 정배(定配)하소서. 옥서(玉署)221)                  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할 때에 이 문제를 전혀 제기하여 언급하지 않다가 필경에는 논죄(論罪)하였는데, 한 사람은 논하고 한 사람은 논하지 않았으니, 너무 소루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성좌(李聖佐)는 역적 김창집(金昌集)의 인척으로서 연줄을 대고 사적(仕籍)에 올라 주군(州郡)의 수령을 역임(歷任)하여 탐독(貪黷)을 자행(恣行)하였습니다. 또 광주(光州)를 맡고 있을 때는 잘 다듬어진 집 재목을 역적 홍계적(洪啓迪)의 배소(配所)에 보냈습니다.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고 장법(贓法)을 신칙하는 데 있어서 결코 그냥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니, 임금은 단지 김춘택(金春澤)의 자질(子姪)을 종전대로 유배지로 보내는 일과 조종세(趙宗世)를 원배(遠配)하는 일과 옥당을 추고하는 일과 이성좌(李聖佐)를 삭판(削版)하는 일만 허락하였다.

 

6월 5일 임자

약방(藥房)에서 연일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은 감수산(甘遂散)을 하루에 한 알씩 먹었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평산 부사(平山府使) 박태도(朴泰道)가 군정(軍丁)을 뽑을 때에 뇌물을 공공연히 거두고, 재결(災結)을 실결(實結)로 처리하여 백성이 그 피해를 입었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군위 현감(軍威縣監) 민진강(閔鎭綱)·현풍 현감(玄風縣監) 이정(李淨)은 역적 김창집(金昌集)의 상(喪)에 조문(弔問)하고 호상(護喪)하였으며, 괴산 군수(槐山郡守) 이직(李溭)·문경 현감(聞慶縣監) 황태하(黃泰河)는 친히 담여군(擔輿軍)을 거느리고 달려가 호상하였습니다. 청컨대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6월 6일 계축

여필용(呂必容)·심중량(沈仲良)·양정호(梁廷虎)를 승지(承旨)로, 이세덕(李世德)를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졸(卒)하였다. 수(壽)는 64세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현덕(賢德)을 잃으니, 그 놀랍고 슬픈 감회를 어찌 말로써 다 비유할 수 있으랴?"
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관판(棺板) 1부(部)를 골라 보내게 하고 3년을 한정하여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몸소 거애(擧哀)하였고 세제(世弟)도 역시 거애하였다. 조태구는 고(故) 상신(相臣) 조사석(趙師錫)의 아들로 타고난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외모가 단정하였다. 화현(華顯)의 관직을 역임(歷任)하였고, 경반(卿班)의 지위에 올랐으며,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어받자 맨 먼저 정승으로 뽑히었다. 여러 음흉한 무리들이 극성을 떨 때를 당하여 실로 고줏대 같은 명망을 지녔고, 몸을 떨쳐 궐문(闕門)에 호소(呼訴)함에 미쳐 위험을 돌려 평안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세운 공덕이 뛰어나 시대의 여망(輿望)에 흡족하였다. 그리하여 상하(上下)가 모두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는데, 병이 이미 깊어 중무(衆務)를 처리할 수 없었고, 또 역량(力量)이 없어 시끄러운 잡음을 진압할 수 없었다. 특히 지금 막 생겨나는 의논들과 다른 의견을 가졌기 때문에 도리어 그들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낭패를 당하고 시골로 물러가 은거(隱居)했으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평소 청렴하고 소박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으며, 여러번 번임(蕃任)을 맡았는데도 집안에 털끝만큼도 보냄이 없었다. 다만 타고난 성품이 좀 유약하여 자못 타인의 부탁을 잘 받았으므로 관직에 있을 때에 치적(治蹟)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헌부(獻府)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전(前) 정랑(正郞) 이중환(李重煥)은 일찍이 김천 찰방(金泉察訪)으로 있을 때에 남에게 역마(驛馬)를 빌려 주었다가 해가 지난 뒤에 흉역(凶逆)의 집에서 돌려 받았습니다. 일이 국옥(鞫獄)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엄하게 핵실(覈實)하여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 김유경(金有慶)·윤정주(尹廷舟) 등은 죄명(罪名)이 매우 중하니, 청컨대 양이(量移)하라는 명령를 환수하소서. 광흥 봉사(廣興奉事) 유진정(柳晉禎)은 본디 얼신(孽臣)의 서얼(庶孽)로서 그의 외조(外祖)의 이름을 고쳐서 시권(試券)에 써 넣었습니다. 그리고 세도 있는 집안과 관계를 맺어 사적(仕籍)에 함부로 통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이중환·유진정의 일만 따랐다.

 

6월 7일 갑인

밤 1경(一更)에서 5경(五更)까지 곤방(坤方)·손방(巽方)·간방(艮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6월 9일 병진

임금이 대빈(大嬪)의 사묘(私廟)에 거둥하였다. 거기에 숭품(崇品) 종신(宗臣) 2명이 입시(入侍)하였으니, 이것은 선조(先朝) 때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222)                  의 사우(祠宇)를 전배(展拜)하던 때의 예(例)이다. 그러나 그 당시와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함에도 종부시(宗簿寺)에서 그것을 예로 원용할 것을 청하였으니, 무식함이 심한 것이다. 대신(大臣)과 승지(承旨)가 비가 오기 때문에 기한을 물리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김중회(金重熙)를 사간(司諫)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보덕(輔德)으로, 홍시구(洪時九)를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았다.

 

6월 10일 정사

공산(公山)223)  의 남편을 죽긴 죄인 순화(順化)를 잡아 와서 삼성 추국(三省推鞫)224)  을 베풀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다시 감수산(甘遂散) 2알을 복용하였다.

 

6월 11일 무오

밤 3경(三更)에서 5경(五更)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약방에서 또 입진하였다. 임금이 감수산(甘遂散) 3알을 더 복용하였다.

 

임금이 수서(手書)를 내리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에게 하유(下諭)하였는데, 은근하고 간절한 말로 빨리 조정에 나오라고 하였다. 이태좌(李台佐)·김일경(金一鏡) 등이 진백(陳白)했기 때문이었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청하기를,
"여러 능(陵)과 전(殿)의 헌관(獻官)은 종반(宗班)이나 문반(文班)·무반(武班)을 막론하고 각별히 가려서 차정(差定)해야 할 것입니다. 대소(大小) 신료(臣僚) 중에 까닭없이 정고(呈告)하거나 위패(違牌)하는 사람은 일체 감죄(勘罪)할 것을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단지 말단의 5건의 일만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동성군(東城君) 목호룡(睦虎龍)의 아직 등철(登徹)되지 않은 상소에 이중환(李重煥)이 말을 빌려준 죄를 신구(伸救)하였는데, 그의 공(功)이 사직(社稷)을 보존했다며 크게 칭찬했고, 또 심지어 ‘신(臣)을 충의(忠義)로써 격려하고 신(臣)에게 계획을 가르쳐주어 여러 역적을 제어하고 삼수(三手)225)  를 막도록 하였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또 이중환의 공을 국청(鞫廳)에 고(告)하였으나, 끝내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마치 그가 이중환을 마땅히 수공(首功)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상을 과연 이미 국청(鞫廳)에 직고(直告)하였으나, 공훈을 정할 때에 수록(收錄)하지 않은 것처럼 여김이 있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분명히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민진강(閔鎭綱) 등과 목호룡의 일만 따랐다.

 

6월 12일 기미

동틀 무렵부터 묘시(卯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여 감수산(甘遂散)을 올리는 것을 정지시켰다. 임금이 교지를 내려 수의(首醫) 이시성(李時聖)·권성징(權聲徵)이 걸음이 느리다 하며 모두 잡아다가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박희진(朴熙晉)을 승지(承旨)로, 이현장(李顯章)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이순곤(李順坤)은 나이 일흔이 넘어 노쇠(老衰)하여 쓸모가 없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이순곤의 일만 따랐다.

 

6월 13일 경신

동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원로(元老)를 이제 잃고 나니, 어려움과 위태로움이 눈에 넘칩니다. 청컨대 좌상(左相) 최규서(崔奎瑞)를 불러와 나빠져가는 시국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원로를 이제 잃고보니 놀라움과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다. 좌상도 집에서 나오지 않으니, 국사(國事)를 생각하매 눈물을 흘릴 만하다 하겠다. 다시 돈독하고 정성스런 예를 더하여 꼭 불러올 것을 기약하여 함께 나랏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6월 14일 신유

승지를 보내어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놓아주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형조 좌랑(刑曹佐郞) 이경(李坰)은 권문(權門)에서 자라나서 함부로 사적(仕籍)에 오르고 외람되게 낭서(郞署)에 참여되었으니, 같은 동료(同僚)들이 반열(班列)에 함께 있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임금을 박태도(朴泰道)와 이경의 일만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새로 제수(除授)한 괴산 군수(槐山郡守) 권성중(權聖重)은 처음 진잠(鎭岑)에 부임하여 있을 때에 군포(軍布)를 거두는 실적이 꼴지가 되어 잡혀 오기까지 했는데, 금오(金吾)226)  에서 막 풀려 나오자마자 곧 큰 군(郡)으로 승진되었으니, 이는 바로 싫어하여 피한 속셈을 맞추어 주기에 꼭 족한 것입니다. 청컨대 군포를 완전히 다 바칠 때까지 기한을 정하여 진잠에 유임(留任)시키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철원 부사(鐵原府使) 남익화(南益華)는 함부로 본임(本任)에 제수되었는데, 공무(公務)는 팽개치고 날마다 성악(聲樂)을 베풂으로 사람들이 모두 놀랍고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이수악(李壽岳)은 감사(減死)면 되는 것을 되레 내지(內地)로 정배했고, 강봉의(姜鳳儀)·조종세(趙宗世)는 변원(邊遠)이면 되는 것을 되레 극변(極邊)으로 정배했습니다. 금부(禁府)와 형조(刑曹)의 해당 당상(堂上)을 모두 추고(推考)하고, 율(律)에 의해 배소(配所)를 고쳐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마지막의 두 건의 일만 윤허하였다.

 

임금이 특명(特命)으로 여원군(礪原君) 이주(李柱)에게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은 자제(子弟) 중 한 사람에게 대가(代加)227)  하게 하였다. 사묘(私廟)에 전배(展拜)할 때 특별히 입시(入侍)한 종신(宗臣)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분에 넘치는 상(賞)이라고 했지만 감히 말하는 자는 없었다.

 

보덕(輔德) 이덕수(李德壽)가 논박을 당한 데 대하여 진소(陳疏)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批答)으로 답하였다. 이덕수는 훌륭한 문사(文士)이었다. 뜻이 활달하여 조그마한 일에 구애되지 않았고, 또 귀가 먹어 세속의 형편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같은 당인(黨人)이 권세를 잡고 있던 날 잇따라 옥서(玉署)와 대직(臺職)에 제수하였으나, 오로지 모면할 것만을 일삼았고, 일찍이 말 한 마디를 꺼낸 적도 한 가지의 일을 논박한 적도 없었다. 또 김창집(金昌集)과는 통혼(通婚)한 정의(情誼)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모르는 사람은 자못 의심하고 헐뜯기도 하였다. 조익명(趙翼命)의 무리들이 삭판(削版)하라는 논박까지 내어 놓았지만, 말이 해괴하고 패리(悖理)한 것이 많았으므로 공의(公議)가 그르게 여겼는데, 이에 이르러 소(疏)를 올려 스스로 변명한 것이다.

 

6월 16일 계해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옥당관 조익명(趙翼命)·이세덕(李世德)이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폐단을 진술하고 또 비가 왔다고 하여 계구(戒懼)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지 말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올린 봉장(封章) 가운데 오명준(吳命峻)이 군역(軍役)의 변통(變通)에 대해 논한 것이나 이진유(李眞儒)가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에 대해 논한 것이나, 윤성시(尹聖時)가 여러 가지 고질적인 폐단에 대해 논한 것들은 속히 비답을 내려 주심이 마땅하고 곧바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성상의 속마음으로 결단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부제학(副提學) 이진유(李眞儒)가 응지(應旨)하여 진소(陳疏)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일찍이 무자년228)  에 춘방(春坊)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 입춘일(立春日)에 여러 동료와 더불어 연명(聯名)으로 상서(上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대강은 네 가지였는데, ‘정성과 공경심을 가지고 본원(本源)을 바로잡는 것, 토론(討論)을 부지런히 하여 학문을 넓히는 것, 검소한 생활을 숭상하여 완호(玩好)를 끊는 것, 궁료(宮僚)와 친히 지내고 근습(近習)229)  을 멀리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이것들을 가납(嘉納)하시며 심지어 ‘참으로 나의 병통을 알아 맞추었다. 마땅히 자리 곁에다 놓아 두겠다.’고 답하셨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그것을 추리하고 부연해 말을 만들고 조목조목 진계(陳戒)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채(情債)의 폐단을 논하고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영감(令甲)230)  을 거듭 엄하게 밝히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또 첩설(疊設)한 서원(書院)을 조사해 찾아내어 없애버리고,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여 염리(廉吏)를 채용할 것을 청하였다 겸사서(兼司書) 윤성시(尹聖時) 역시 응지(應旨)하여 일을 논하였는데, 맨 먼저 비용을 절약하여 재물을 넉넉히 하는 도리를 말하며 궁중(宮中)에서부터 시작할 것을 청하였다. 또 여러 궁방(宮房)이나 여러 아문(衙門)에서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논박하고, 차인(差人)을 정배(定配)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역(良役)의 해(害)에 대해 진달하기를,
"원군(元軍)이나 보인(保人)을 막론하고 스스로 각각 1명씩을 얻게 하여 1필(疋)의 공납(供納)을 나누어 주고, 조정에서는 쓸모없는 군사를 도태시켜 그 액수(額數)를 채우게 하소서. 수륙(水陸)의 여러 군대는 부근의 읍(邑)으로 배정하되 힘든 곳과 편한 곳을 헤아려 바꾸어 정해 군제(軍制)를 이룩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 소(疏)가 들어간 지 오랫동안 답이 없다가 이때에 와서 한꺼번에 비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의논하여 처리할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경주(慶州)에 있는 신라왕(新羅王) 시조(始祖)의 묘호(廟號)를 ‘숭덕(崇德)’이라 걸게 하고, 이어 예관(禮官)을 보내서 고제(告祭)를 행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조태억(趙泰億)이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있을 때 상소하여 ‘숭인전(崇仁殿)이나 숭의전(崇義殿)의 예(例)에 의하여 전호(殿號)를 특별히 걸게 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참봉(參奉) 2명을 차출(差出)하여 향사(享祀)할 때 일을 맡아 보게 할 것’을 청하자, 비답을 내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오랫동안 복주(覆奏)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예조 참판        이사상(李師尙)이 아뢰기를,
"신라왕의 시조 및 경순왕(敬順王)의 묘(廟)에 간혹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나타나는데, 다만 전호(殿號)가 없고 전수(典守)도 없으니, 진실로 조태억이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드디어 본도(本道) 감사로 하여금 신라의 후손으로서 참봉 2명을 차출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직첩(職牒)받게 하였으니 양식도 잇달아 주도록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를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권익관(權益寬)을 헌납(獻納)으로, 유필원(柳弼垣)을 응교(應敎)로, 이승원(李承源)·오명신(吳命新)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6월 18일 을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등이 무더운 여름인데 여전히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은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데 방해가 될까 두렵다고 말하였다. 이때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추녀 끝의 낙수 소리가 시끄러우니, 큰 소리로 아뢰라."
하였다.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오직 한마음으로 대월(對越)231)  하는 데 있습니다. 정전을 피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지엽적인 일일 뿐입니다. 가을도 아직 멀었으니, 청컨대 정전으로 환어(還御)하소서."
하고, 여러 차례 번갈아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태좌가 또 말하기를,
"좌의정 최규서(崔奎瑞)에게 친히 어찰(御札)을 내리시어 따로 돈독하게 부르소서. 듣자니 최규서는 뜰에 거적자리를 깔아 놓고 뜨거운 여름 햇볕을 쬐면서 앉아 있다고 합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 몸을 해칠까 염려스러우니, 진념(軫念)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효유(曉諭)하라고 명하였다.

 

6월 19일 병인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였다. 옥당관 오명신(吳命新)이 서울의 저자와 팔도의 장시(場市)에 쓰이는 두승(斗升)232)  의 규격이 달라서 농간(弄奸)하는 폐단이 불어나고 있다며 중외(中外)에 신칙하여 일정한 규격을 만들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도인승기탕(桃仁承氣湯)을 복용했는데, 유의(儒醫) 이공윤(李公胤)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공윤은 의술이 비록 조금 정밀하기는 했지만, 사람됨이 망령되고 패려하여 가까이할 사람은 못되었다. 또 감수산(甘遂散)이나 승기탕(承氣湯)은 준열(埈烈)한 약제로서 시험삼아 쓰는 것이 부당한데도 경솔하게 올리니, 식자(識者)들이 염려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은상(恩賞)은 중대한 특전으로서 여러 신하들이 임의로 번거롭게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연 중에 승선(承宣)이 혹은 동궁(東宮)이 입학(入學)할 때의 보덕(輔德)이라고 하여 가자(加資)를 청하고, 혹은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의 나이가 80세가 되었으므로 품계를 변경시켜야 한다고 진청(陳請)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모두 외람되고 잗단 데로 귀착됩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은 권성중(權聖重)을 잉임(仍任)하는 일과 승지를 추고하는 일만 허락하였다.

 

6월 20일 정묘

청사(淸使)가 황태후(皇太后)의 유조(遺詔)를 반사(頒賜)하는 일로 나온다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장문(狀聞)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더욱 정성을 돈독히하여 좌상(左相) 최규서(崔奎瑞)를 소치(召致)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장교(將校)들은 거개가 다 신수(身手)가 좋은 사람들인데, 서울로 올라와 벼슬을 구하니, 그 형세가 진실로 난처합니다. 그 중 노고가 많은 자를 청컨대 구근(久勤)233)  으로 조용(調用)하소서."
하자,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구근도 정원(定員)이 적어서 먼 도(道)의 사람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머물다가 간혹 헛되이 돌아가기도 하니 도리어 원망만 불러 일으킵니다. 강북(江北)의 세 역참(驛站)에서 오래도록 노고를 쌓은 이를 청컨대 본조(本曹)에서 따로 살펴서 조용할 것을 구식으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시환(金始煥)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수량(李遂良)을 북병사(北兵使)로, 오명신(吳命新)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오명준(吳命峻)을 진위 정사(陳慰正使)로, 홍중우(洪重禹)를 부사(副使)로, 황정(黃晸)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으니, 청국(淸國) 황태후(皇太后) 상(喪)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21일 무진

밤 5경(五更)에 달무리가 졌다.

 

임금이 장례원(掌隸院)에 명하여 대빈방(大嬪房)의 제수 노비(祭需奴婢)를 인빈방(仁嬪房)의 예(例)에 따라 더 주도록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다시 도인승기탕(桃仁承氣湯)을 복용하였다.

 

회맹제(會盟祭)의 상전(賞典)이 비로소 내려졌다. 찬례(贊禮) 판서(判書) 이조(李肇), 봉혈관(捧血官) 승지(承旨) 박희진(朴熙晉), 독서문관(讀誓文官) 윤연(尹㝚), 왕세제(王世弟) 봉규관(奉圭官) 필선(弼善) 유만중(柳萬重), 봉혈관(捧血官) 송인명(宋寅明)을 모두 가자(加資)하고 나머지는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임금이 옥당관(玉堂官)을 야대(夜對)하였다. 《강목(綱目)》을 강(講)하는데 문사(文辭)가 아름답고 사리(事理)가 분명한 곳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문득 그 말을 외우면서 손으로 서안(書案)을 두들기니, 은은한 소리가 들렸다. 강이 끝난 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야대의 명이 내려진 뒤 옥당에서 느릿느릿 들어와 대기하였으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모두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그 실상(實狀)을 진달하니, 곧바로 추고(推考)하라고 명하고 다시 불러 들였다. 대개 강연(講筵)이 오랫동안 정지된데다가 소대(召對)도 또한 드물어 강관(講官)들이 해이한 나머지 일삼지 않았고, 이날 밤 경고(更鼓)234)  가 이미 길었으며, 옥당도 합문(閤門) 밖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22일 기사

부제학(副提學) 이진유(李眞儒)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육시(戮屍)하고 김성(金姓) 궁인(宮人)을 찾아내어 정법(正法)할 일을 번갈아가며 일어나 아뢰었다. 오랫동안 다투어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한 민진원(閔鎭遠)의 일을 거듭 아뢰자, 이진유가 말하기를,
"가율(加律)할 필요는 없고 종전대로 도로 정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청(庭請)할 때에 응락했던 여러 사람의 일도 임금이 역시 윤허했으니, 이진유가 힘써 다투었기 때문이었다. 민진원에 대하여 가율(加律)하라는 청은 오래도록 윤허를 내리지 않았는데, 이진유가 겉으로 ‘필요는 없고[不必]’란 두 글자를 빌어 속으로 찬배(竄配)하려는 계획을 성취시켰으니, 교활한 정상을 스스로 가릴 수가 없다. 이게 어찌 임금을 섬기는 성실한 도리이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놀랍고 분하게 여겼다.

 

이봉년(李鳳年)을 승지(承旨)로 김시혁(金始㷜)을 보덕(輔德)으로, 조최수(趙最壽)를 지평(持平)으로, 윤유(尹游)를 수찬(修撰)으로, 이현장(李顯章)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흡(金潝)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옥당관을 야대(夜對)하였다. 강(講)을 끝낸 뒤 선온(宣醞)을 내렸다.

 

6월 24일 신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으니, 임금의 왼쪽 어깨 및의 팔꿈치 바깥쪽에 단단한 멍울이 맺혔고 불그스레한 기운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중량(沈仲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25일 임신

약방에서 잇따라 입진하였고, 조정(朝廷)에서도 역시 후반(候班)235)  을 설치하였다.

 

6월 26일 계유

어둑새벽에서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정재흥(鄭再興)이 안릉현(安陵縣)에서 복주(伏誅)되었다. 정재흥은 역적 정우관(鄭宇寬)의 아들로서 그의 숙부(叔父) 정우굉(鄭宇宏)과 함께 성명(姓名)을 바꾸고 망명(亡命)하여 이산(理山)의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었는데, 포청 군관(捕廳軍官) 유만우(劉萬佑)가 몰래 찾아내었다. 안릉 장교(安陵將校)와 함께 정우굉을 포박할 즈음에 정재흥이 숲숙에서 칼을 들고 뛰어나와서 장교를 질러 죽이고 정우굉을 묶은 밧줄을 끊고 함께 도망하였다. 유만우가 개천(价川)까지 추적하여 마침내 잡아다가 안릉(安陵)에 가두었는데 병사(兵使)가 장문(狀聞)하니,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처참(處斬)하라고 명하였다. 유만우 등이 또 정유굉을 추적하여 잡았는데 형조(刑曹)에서 율문(律文)을 인용하여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감죄(勘罪)할 것을 청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의논하기를,
"정우굉은 역적의 친제(親弟)로서 망명(亡命)하여 달아았으니, 법에 있어서 사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드디어 교형(絞刑)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6월 27일 갑술

후반(後班)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 을해

어둑새벽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심준(沈埈)을 필선(弼善)으로, 이태망(李台望)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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