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무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약방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양호(兩湖)236) 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였으나 운송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폐지하여 가끔 침몰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이광좌(李光佐)가 일찍이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어 잘 변통을 더해 조복 미포(漕復米布)237) 를 설치해서 혹 배[船]를 만드는 데 보조하고 혹은 양곡(糧穀)을 운반하는 데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으니 영문(營門)과 운송 판관(運送判官)이 제마음대로 빌어 써서 허소(虛疏)한 폐단이 많다고 합니다. 청컨대 호조(戶曹)에서 양호에 관문(關文)238) 을 발송하여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적간(摘奸)하게 하되, 범죄에 따라 엄중히 감률(勘律)하여 앞으로 경계하도록 하소서. 압령 조운 차원(押領漕運差員)239) 이 잇따라 세 차례 흠축(欠縮)없이 상납하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도록 정식(定式)하였는데, 일찍이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병조(兵曹)로 하여금 잇따라 세 번 잘 운납(運納)한 자를 상고해 내어 별도로 상을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2일 기묘
황익재(黃翼再)를 장령(掌令)으로, 박정(朴涏)을 겸필선(兼弼善)으로, 홍성보(洪聖輔)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7월 3일 경진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명항(吳命恒)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변비(邊備)의 긴급은 군량(軍糧)만한 것이 없으므로 서관(西關)의 수세(收稅)를 일찍이 다 봉류(捧留)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었는데, 여러 해가 지남에 따라 묵고 썩어서 도리어 폐단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사(京司)에서 돈으로 사서 취용(取用)하여 거의 다 탕갈(蕩竭)되었으니, 산성(山城)의 군량이 또한 매우 한심합니다. 이제부터는 세곡(稅穀)을 다시 팔지 말고 성읍(城邑)에 있는 것은 절대 옮겨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군량으로 의주(義州)의 단련사(團練使)가 거두어 들일 것은 또한 조금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으로 사들여 군량에 보충하고, 이 밖에 혹 남은 것이 있으면 전부 군자(軍資)에 귀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장기(長技)는 오직 조총(鳥銃)만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데, 서관(西關)의 포예(砲藝)가 정통하고 능숙하지 못하니, 청컨대 별무사(別武士)240) 의 도시(都試)241) 에서 으뜸을 차지한 이와 각 무예에서 몰기(沒技)242) 한 사람은 직부(直赴)243) 하게 하소서. 지금 만일 절목(節目) 중에 조총을 첨입하여 또한 몰기를 직부하도록 허락하되 다른 무예에서 으뜸을 차지한 자로서 반드시 조총 2, 3분(分) 이상 입격(入格)한 자를 분수(分數)를 합계하여 거수(居首)로 정하고, 혹 조총에 분수가 없는 자는 거수하지 못하게 한다면, 사람마다 격려되어 반드시 조총을 익힐 것입니다.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7월 4일 신사
임금이 어깨 아래 종기가 난 곳에 침(針)을 맞았는데, 약방 제조(藥房提調) 등이 여러 의원을 거느리고 입직(入直)하였다.
전(前) 우윤(右尹) 어사형(魚史衡)이 졸하였다. 어사형은 중궁전(中宮殿)의 조부(祖父)이다. 중궁전이 발상(發喪)하고 굵고 거친 베로 3일 동안 띠를 띠었다가 탈복(脫服)하니, 예조(禮曹)에서 《오례의(五禮儀)》를 들어 마련한 것이었다.
김중기(金重器)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제주(濟州)에 죽실(竹實)이 났다. 한라산(漢拏山)에는 전부터 분죽(紛竹)244) 이 숲을 이루었는데, 잎은 크고 줄기는 뾰족하여 노죽(蘆竹)이라 이름하였다. 옛부터 씨를 맺지 않았었는데, 4월 이후로 온 산의 대나무가 갑자기 다 열매를 맺어 모양이 구맥(瞿麥)245) 과 같았다. 이때 제주도의 세 고을이 몹시 가물어 보리농사가 흉작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바야흐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따서 전죽(饘粥)을 만들어 먹고 살아난 자가 많았는데,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한 것이다.
7월 5일 임오
윤행교(尹行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7월 6일 계미
청국(淸國)의 정사(正使)인 통정사(通政使) 도란(圖蘭)과 부사(副使) 두등 시위(頭等侍衞) 각라(覺羅) 등 75인이 입성(入城)하였는데, 왕세제(王世弟)가 칙사(勅使)를 모화관(慕華館)에서 연접하였다. 임금의 몸이 편안하지 못한 까닭으로 대행(代行)한 것이다. 임금이 오대(烏帶)와 참포(黲袍)로 칙사를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는데, 대통관(大通官)이 칙서(勅書)를 아뢰므로 도승지가 받아서 드리려고 하니, 칙사가 국왕이 몸소 받기를 청하였다. 승지 여필용(呂必容)이 말하기를,
"칙사는 마땅히 몸소 전해야 합니다."
하니, 정사가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드디어 몸소 받고 종기 때문에 성문(城門) 밖에 나가서 맞아들일 수 없었던 뜻과 또 성조 곡림(哭臨)을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 이미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중간에서 주선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7월 7일 갑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약방 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이번의 상칙(上勅)은 기력(氣力)이 있고, 부칙(副勅)은 젊은데다 영민(英敏)하니, 종전의 여러 칙사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승지(承旨)를 보내어 특별히 정성을 보이시고, 혹 어찬(御饌)을 내보내는 것이 아마도 원방(遠方)의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양국(兩國)의 교린(交隣)은 오로지 역관(譯官)을 의지하는데, 근래에 한어(漢語)와 청어(淸語)를 잘하는 자가 대단히 적으므로, 접견 때 상사(上使)의 말이 매우 많았지만 통관(通官)이 능히 상세히 전하지 못하여 양사(兩使)의 기색이 대단히 불쾌한 것 같았으니, 전후의 칙사가 성을 내고 폐를 일으켰던 것이 또한 반드시 역관배들이 능히 칙사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지 않았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양성하고 교육시키는 방도를 오랫동안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해원(該院)에 신칙하여 격려하고 권장하여 흥기(興起)시키는 방법을 더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論)하기를,
"이번에 칙사(勅使)를 영접할 때에 동서의 반행(班行)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고, 각사(各司)의 관원도 또한 ‘진(進)’자를 쓰고도 참석하지 않은 자가 많았습니다. 청컨대 공적인 사정 외의 인원은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진’자를 쓰고도 참석하지 않은 자를 조사해 내어 도태해 버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7월 8일 을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약방 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종기(腫氣)를 앓는 사람이 꺼리는 바는 노기(怒氣)를 발동하는 데 있습니다. 노기가 발동하면 다시 발생하기 매우 쉬우니, 청컨대 ‘정(靜)’자 한 글자를 조섭(調攝)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고,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에게 만일 과실이 있어도 음성을 돋구고 안색에 보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조용히 조섭하는 가운데에서는 더욱 조심하고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대개 임금이 담화(痰火)가 오르고 내리는 증세가 간혹 말하는 즈음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진계(陳戒)한 것이다.
조원명(趙遠命)을 헌납(獻納)으로 삼고, 유수원(柳壽垣)을 출보(出補)하여 낭천 현감(狼川縣監)으로 삼았다.
7월 9일 병술
사시(巳時)에서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임금이 정전(正殿)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처음에 한재(旱災) 때문에 정전을 피하였는데, 마침 종기의 증세가 있어서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이 ‘행각(行閣)246) 은 바람을 받기 쉽고, 또 비가 이미 흡족하므로 전례를 고집해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여 여러 번 환어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다가 추절(秋節)이 되어 예조(禮曹)에서 아뢴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왕세제(王世弟)가 관소(館所)에 임하여 칙사(勅使)를 만나고 다례(茶禮)를 파한 뒤에 환궁(還宮)하였다.
7월 10일 정해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여러 의원들이 창구(瘡口) 위의 멍울이 맺힌 곳에 또 침을 맞아야 한다고 하므로 약방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청하였다.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려 ‘당초에 종기를 잘 터뜨리지 못하였다.’ 하여 여러 의원을 물리치고, 또 이태좌를 파직하라 명하였다. 드디어 추출(趨出)하였는데, 왕세제(王世弟)가 거듭 진달하니, 비로소 도로 거두어 들이라 명하였다. 이태좌가 들어와 사례(謝禮)하니 다시 의원을 불러 진찰하였다.
7월 11일 무자
청(淸)나라 사신이 성 밖에 나갈 때에 왕세제(王世弟)가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송별하였다. 전후의 칙사(勅使)들은 모두 재물을 탐내어 싫어함이 없었는데, 이번의 두 칙사는 자신을 단속하는 데 뜻이 있었고, 또 부고(訃告)를 전하러 왔다고 말하면서 여러 곳의 연향(宴享)을 일체 정지하게 하고, 상례적으로 주는 물품도 열 가지 중에서 일고여덟 가지는 감하게 하였으며, 별도로 구한 여러 물품도 처음에 값을 정하여 갚아 주려고 하였으나, 빈신(儐臣)이 역관(譯官)을 통하여 굳이 간청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인삼(人蔘)과 능화(菱花) 등은 끝내 받지 않았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종전의 칙사는 제멋대로 요구하여 혹 사람들에게 매질을 하기까지 하고, 혹은 노색(怒色)을 띠며 반드시 얻고야 말았으니, 그대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어찌 듣지 못했겠는가? 이제 만일 받아간다면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일반일 것이다."
하였는데, 부칙(副勅)의 말씨가 더욱 준엄하였다. 상칙(上勅)이 또 작은 부채를 하나 내놓고 시인(詩人)이 제목을 정하여 시(詩)를 지어 줄 것을 청하므로, 시인 홍세태(洪世泰)로 하여금 사운(四韻) 율시(律詩)를 지어서 주게 하고, 사자관(寫字官)으로 하여금 써서 주게 하였으니,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청렴 결백함을 찬양한 말을 얻어 자기 나라에서 자랑하고자 한 것이었다. 나흘을 머물다가 곧 돌아갔는데, 이는 근래에 없었던 바로서 들으니 옹정(雍正)이 새로 즉위하여 단속함이 또한 엄하다고 하였다.
7월 12일 기축
내의 도제조(內醫都提調) 최규서(崔奎瑞)를 체차(遞差)하고 최석항(崔錫恒)을 단망(單望)247) 으로 대신하였다. 최규서는 어서(御書)로 돈소(敦召)하는 명을 받았으나 추명(趨命)할 뜻이 없었는데, 임금의 안후(安候)가 편안하지 못함을 듣고 광주(廣州) 땅에 도착하여 엿새 동안 머물다가 병이 심하여 되돌아갔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제조(提調)의 인원을 갖추어 숙직(宿直)하지 못함을 진달(陳達)하므로 체차를 윤허하였다.
7월 14일 신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 都提調) 최석항(崔錫恒)이 창종(瘡腫)에서 금하고 꺼리는 것 중에서 요긴한 것을 한 통(通) 써서 올리면서 좌우(左右)에 두고 살펴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보욱(李普昱)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7월 15일 임진
이현장(李顯章)을 교리(校理)로, 송진명(宋眞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수(柳綏)를 장령(掌令)으로, 박필기(朴弼夔)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7월 16일 계사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를 불러 하교(下敎)하기를,
"수의(首醫) 이시성(李時聖)이 엄교(嚴敎)가 있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근신(謹愼)하지 않으니, 나국(拿鞫)하여 정죄(定罪)하라."
하였다.
7월 17일 갑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칙사(勅使)를 맞이할 때 불참했던 관원을 조사하는 즈음에 감찰(監察)이 제 마음대로 내렸다올렸다 하여 세력이 있는 자는 다 미봉(彌縫)하고 다만 하잘것없는 잡기(雜歧)의 녹관(祿官)으로 구차하게 그 수를 채웠습니다. 청컨대 해당 감찰을 먼저 파직하고 소임 헌리(憲吏)를 해조(該曹)에 이송하여 엄형(嚴刑)으로 거듭 구핵(究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권익순(權益淳)이 장계(狀啓)를 올려서 위화도(威化島)에 백성의 경작을 허락하고 그 세금을 거두어 군량에 보탤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그 곳이 책문(柵門)과 연화(煙火)가 서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일을 일으킬 것이 염려스럽다고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8일 을미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별무사(別武士)를 시험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이보욱(李普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장흥고(長興庫)와 와서(瓦署)의 제조(提調) 황흠(黃欽)과 내자시 제조(內資寺提調) 권성(權𢜫)은 한결같이 개기(改紀)한 뒤로 갑자기 조정에 서려는 바람이 없어 시골에 은퇴하여 성안에 들어올 뜻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자리를 비워둘 수 없으니, 청컨대 모두 개차(改差)하소서. 형조 판서(刑曹判書) 오명준(吳命峻)은 제 위치를 벗어나는 혐의(嫌疑)를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복상(卜相)하라는 청을 하였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감찰(監察)을 파직하는 것 및 황흠 등과 오명준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약방 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올해 삼남(三南) 지방에 수재(水災)가 있었는데,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의 재해를 보고한 것이 실제보다 휠씬 많아 전결(田結)이 크게 줄었습니다. 식년 경시관(式年京試官)248) 을 각별히 가려 보내어 시사(試士)하는 여가에 재실(災實)을 돌아다니며 살피게 하소서."
하였는데, 최석항(崔錫恒)도 또한 이태좌의 말을 옳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황이장(黃爾章)이 장계(狀啓)로 신설된 각진(各鎭)을 그대로 두거나 혁파하는 데 대한 이해(利害)를 조목조목 열거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였다. 그 대강에 말하기를,
"나로진(羅老鎭)의 경우 방답(防踏) 서쪽에서 가리포(加里浦)·어란(於蘭) 등의 진(鎭)에 이르기까지 수로(水路) 몇백 리 사이에 섬이 사방에서 빙 둘러 감싸고 있어 곳곳에 배를 감출 수 있으므로, 여러 곳의 요충지(要衝地)에 이미 진(鎭)을 두었으니, 그 새로 설치한 것은 관방(關防)의 대체(大體)에 도움될 것이 없고, 수비(守備)하는데 힘만 나뉠 것이며, 침어(侵漁)하는 길만 넓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이 궁핍하고 재정이 바닥난 때를 당하여 헛된 기구를 그대로 두어 사력(事力)을 낭비할 수 없으니, 빨리 설치한 진(鎭)을 도로 혁파하고 그대로 별장(別將)을 둘 것입니다. 격포진(格浦鎭)의 경우 비록 관방의 요충지라고는 하지만, 요해처를 통괄할 땅이 아니고 또한 배를 감출 곳도 없습니다. 단지 강화도(江華島)와 거리가 심히 멀지 않으므로, 당초 혹 강화도에서 이필(移蹕)한다면 이곳이 하륙(下陸)할 장소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조치하여 검영(檢營)을 두었다가, 여러 가지 의논으로 인해 도로 파직하였습니다. 50년 전에 한 번 첨사(僉使)로 승격하였다가 돌아서서 곧 파하였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경솔하게 변개(變改)하여 다시 첨사로 올렸으나, 이미 방군(防軍)을 나누어 준 일이 없고, 선격(船格)249) 도 또한 익숙하지 못해 먼 바다를 건너다가 번번이 배가 침몰하여 백 가지 병폐만 있고 한 가지 이익이 없으니, 첨사를 도로 혁파하고 종전대로 별장을 차송해야 할 것입니다.
갈두산(葛頭山)의 경우 이미 목을 거머쥐는 곳이 아니고, 또 배를 숨겨 둘 곳이 없으며, 지형(地形)의 한 줄기가 바다로 들어가 거의 1백 리나 되는데다 조적(糶糴)이 큰 폐단이 되고 있으니, 또한 도로 혁파해야 할 것입니다. 임자도(荏子島)의 경우 호남(湖南) 해로(海路)에서 우수영(右水營)이 가장 큰 요해처가 되고, 이곳을 지나 시하(柴河)의 큰 바다를 건너면 임자도가 또 하나의 큰 요해처가 되며, 임자도에서 칠산(七山)의 큰 바다를 건너면 고군산(古群山)이 또 하나의 큰 요해처가 되는데, 대개 임자도와 고군산은 모두 사면(四面)이 둘러 안고 있으므로 배를 대기 아주 좋아 남쪽에서 북으로 가는 해선(海船)이 모두 이곳에 정박합니다. 바로 마땅히 중진(重鎭)을 두어 방수(防守)해야 할 것이니, 지금 혁파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7월 19일 병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병이 좀 나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경계는 바로 지금 이때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들으니, 별군직(別軍職)을 후원(後苑)에서 친시(親試)하시고 오늘 또 신구(新舊) 별군직의 무예를 시험한다는 하명(下命)이 있었습니다. 보통 때의 열무(閱武)는 진실로 옳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종기(腫氣)의 환부(患部)는 바람을 쐬어 상처가 더할까 염려스러우니, 청컨대 잠시 완전히 합창(合瘡)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친시(親試)하소서."
하였다. 이태좌(李台佐) 등이 잇따라 누누이 진달하여 수천 수백 마디의 말을 하였으나, 임금이 여러번 ‘염려하지 말라’고 계유(開諭)하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왕세제(王世弟)가 나아가 말하기를,
"혹자는, ‘성상께서 별군직의 재주를 시험하는 것은 전례가 있는데, 이제 만일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신다면 위 문후(魏文侯)가 우인(虞人)과 수렵(狩獵)을 약속했다가 자신이 그만두게 하는 뜻250) 과는 다른 까닭에 성상께서 스스로 지난(持難)한다.’ 하나, 일찍이 선왕(先王)께서는 몸이 불편하실 때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후원에서 시재(試才)하였고, 그 사람됨을 보려고 하실 때는 편전(便殿)에 불러서 보셨습니다. 청컨대 선왕께서 이미 행하신 전례에 의하여 쾌히 윤허해 따르소서. 어제 행차하실 때 신이 그만두실 것을 여쭙지 못했는데, 오후 늦게는 종기의 증세가 오전과 같지 않았으니, 이 또한 신의 불충 불효(不忠不孝)한 죄입니다."
하였다. 말씨가 간곡하였으나 임금이 또한 듣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하는 수 없이 물러갔다.
김연(金演)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진급(李眞伋)을 정언(正言)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광도(李廣道)를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임금이 후원(後苑)에 거둥하여 신구(新舊) 별군직(別軍職)의 무예(武藝)를 시험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환궁(還宮)하였다.
7월 20일 정유
동틀 무렵에 안개가 끼었다.
이 가을에 삼남(三南)에 홍수가 났다. 충청도(忠淸道)의 문의(文義)·회인(懷仁)·청주(淸州)·단양(丹陽)·영춘(永春)·공주(公州) 등의 고을은 민가(民家) 1천여 호(戶)가 떠내려 갔고, 익사(溺死)한 사람이 수천 명이었으며, 무림사(霧林寺) 수백 간(間)이 일시에 물에 잠겨 승려(僧侶)와 속인(俗人)으로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았다. 경상도(慶尙道)의 거창(居昌)·대구(大丘)·밀양(密陽) 등 고을은 물에 떠내려 간 것이 1천 수백여 호(戶)였고, 익사자가 또한 1천 명을 넘었으며, 거제부(巨濟府)는 눈에놀이가 크게 발생하였다. 전라도(全羅道)의 무주(茂朱) 등 고을은 물에 떠내려 간 것이 수천 호였고, 익사한 자가 또한 그 수의 반이었다. 강원도(江原道)의 영월(寧越) 등 고을도 역시 홍수가 나서 떠내려 가거나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도신(道臣)이 모두 장문(狀聞)하였는데, 영남(嶺南)에서는 그 신포(身布)와 조적(糶糴)을 탕감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였다.
7월 21일 무술
미시(未時)와 신시(申時)에 햇무리하였다.
임금이 후원(後苑)에 행차하여 무예 별감(武藝別監)의 시재(試才)를 보았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등이 또 굳이 다투었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7월 22일 기해
어의(御醫)를 보내어 여양 부부인(驪陽府夫人)의 병을 살펴보고, 잇따라 서계(書啓)하라고 명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봉휘(柳鳳輝)가 상소(上疏)하기를,
"회맹제(會盟祭) 때의 봉혈관(捧血官)을 아울러 승서(陞敍)하는 것은 경중(輕重)을 구별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경신년251) 의 경우 어전 봉혈관(御前奉血官)을 승서하였으나, 여러 공신과 차등을 둔 것은 말[馬]을 하사(下賜)한 것이었습니다. 전례를 인용하여 앙진(仰陳)하니, 엎드려 원하건대 재량하여 처리하소서. 또 경강(京江)의 소금배[鹽船]은 원래 세금을 거두는 규정이 없고, 안팎 양전(兩廛) 사람들이 가게에서 소매로 생업(生業)을 삼은 것은 국초(國初)부터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어청(守禦廳)의 수신(帥臣)이 조세(租稅)를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선상배(船商輩)들이 군문(軍門)을 빙자하여 매매(買賣)를 독점하려고 하는 계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전 사람들이 생업을 잃는 일이 형세로 보아 반드시 닥칠 것이니, 바라건대 명하여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한 말이 적합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7월 23일 경자
임금이 또 후원(後苑)에 거둥하였다.
7월 24일 신축
동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왕세제(王世弟)가 병의 조짐이 있어 조정(朝廷)에서 후반(候班)을 설치하였다.
유시모(柳時模)를 지평(持平)으로, 윤유(尹游)를 부교리(副校理)로, 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정(李禎)은 나이가 여든에 가깝고 병이 또 깊어, 무릇 청단(聽斷)에 관계된 것을 한결같이 사람들의 청탁(請託)에 따르고 있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이정의 일만 윤허하였다.
7월 26일 계묘
묘시(卯時)에 햇무리하였다.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도 햇무리하였다. 밤 2경(更)에 유성(流星)이 관색성(貫索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의 하늘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만 하고 꼬리의 길이는 서너 자[尺]였으며 색깔은 붉고 빛이 땅에 비쳤다.
7월 27일 갑진
연안부(延安府)의 관리들이 약속을 하고 일시에 도망쳐 흩어졌으므로 부사(府使) 이유수(李有壽)가 글을 올리고 돌아갔다. 감사(監司)가 도로 유임시킬 것을 계청(啓請)하고, 또 주동자를 효시(梟示)할 것을 청하니, 묘당(廟堂)에서 엄형(嚴刑)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유수는 청렴하고 검소하며 엄하게 단속하여 직무를 이행함에 공적이있었으나, 다스림이 너무 가혹하여 관속(官屬)이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변고가 있었다고 한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별군직(別軍職)을 취재(取才)할 때 정원 외의 세 사람이 함부로 궁문(宮門)에 들어와 땅에 엎드려 번거롭게 호소하였는데, 비록 본조(本曹)에서 내관(內官)과 수문장(守門將)을 가두어 다스릴 것을 계청(啓請)하기는 했지만, 평상시에 검칙(檢飭)하지 못한 잘못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병조(兵曹)의 입직 당상(入直堂上)을 추고(推考)하고 낭청(郞廳)을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단지 말단의 일만 윤허하였다.
7월 28일 을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정덕징(鄭德徵)이 내행(內行)의 행장(行裝)을 꾸린다는 핑계로 수백 냥의 은화(銀貨)를 내주었습니다. 임관(任官)된 지 얼마 안되어 수단이 이와 같았으니, 큰 도(道)의 부요한 고을을 그대로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새로 아뢴 것만 윤허하였다.
7월 30일 정미
5경(更)에 유성(流星)이 실성(實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서너 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고 광채가 땅에 비쳤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금년 농사가 설혹 조금 낫다고는 하지만, 외방(外方)의 백성들은 10년 동안 연이어 굶주린 나머지 거의 죽을 뻔했다가 겨우 되살아났으니, 백성을 소요(騷擾)시키는데 관계되는 정사(政事)는 일체 정지한 뒤에야 여위고 병든 백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생전(長生殿)252) 에서 황장목(黃腸木)253) 을 구할 경차관(敬差官)을 발송(發送)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지금 이때 소요하게 함은 아마도 보호하고 진정시키는 도리가 아닐 듯하니, 양도(兩道)의 경차관은 우선 가을을 기다리게 하소서. 이외에 추쇄관(推刷官)254) 이 추쇄(推刷)하고, 징채(徵債)하는 것 등도 또한 모두 시행하는 것을 정지하여 휴식(休息)하는 뜻을 보임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최석항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만일 오래된 적곡(糴穀)과 묵은 포(布), 그리고 각종의 포흠(逋欠)을 우선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라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성덕(聖德)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실록13권, 경종 3년 1723년 9월 (0) | 2025.10.22 |
|---|---|
| 경종실록13권, 경종 3년 1723년 8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2권, 경종 3년 1723년 6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2권, 경종 3년 1723년 5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2권, 경종 3년 1723년 4월 (0) | 2025.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