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무신
금년 가을의 각릉(各陵)의 전알(展謁)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전례대로 이날 봉행(奉行)할 것을 품계(稟啓)하였는데, 임금의 안후(安候)가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8월 2일 기유
사헌부(司憲府)에서 문망(文望)과 풍력(風力)이 없다며 충청 도사(忠淸都事) 이세주(李世柱)의 체차(遞差)를 논하였다.
강현(姜鋧)을 판의금(判義禁)으로, 권익관(權益寬)을 문학(文學)으로, 홍정필(洪廷弼)을 부응교(副應敎)로, 이재항(李載恒)을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삼았다.
8월 4일 신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약방 제조(藥房 提調) 이태좌(李台佐)는 방자하고 무엄하니, 우선 파직하라."
하고, 다시 나국(拿鞫)하여 엄하게 추문(推問)하라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최석항(崔錫恒)이 누누이 아뢰어 도로 거둘 것을 청하자, 임금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한참 지나서야 웃으면서 윤허하였다. 대개 이태좌는 연석(筵席)에서 조섭(調攝)하는 도리를 여러 번 진달하였는데, 말이 매우 진실하고 지극하여 혹 마음을 거스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었다.
홍문록(弘文錄)255) 을 작성하였다. 오수원(吳遂元)·조덕린(趙德麟)·홍정상(洪廷相)·이진급(李眞伋)·이헌장(李獻章)·조진희(趙鎭禧)·조최수(趙最壽)·김홍석(金弘錫)·이광보(李匡輔)·강박(姜樸)·조지빈(趙趾彬)·박필기(朴弼夔)·이거원(李巨源)·이보욱(李普昱)·성덕윤(成德潤) 등 15인을 선출하고, 도당(都堂)에서 윤용(尹容)·이광덕(李匡德)·이진수(李眞洙)·신치운(申致雲)·윤광익(尹光益) 등 5인을 더 기록하였는데, 이헌장만 홀로 누락되었다. 이헌장은 본래 합당하지는 않았으나, 세력 있는 자의 연줄을 가지고 붙좇아 진출하려는 자가 외람되게 참여함이 많았으므로, 공의(公議)가 떠들썩하였다.
8월 5일 임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보욱(李普昱)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의관(醫官) 이시필(李時弼)은 여러 의관들이 빽빽하게 모여앉은 가운데 와서 감히 나라에 대한 흉악한 말을 함부로 발설하였으니, 만일 일분(一分)이라도 신하된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무엄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엄형(嚴刑)으로 국문하여 율(律)에 의해 정죄(定罪)하소서, 양근 군수(楊根郡守) 이침(李梫)은 1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백성을 침학(侵虐)하고, 칙용(勅用)이란 핑계로 결세(結稅)를 거듭 징수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이시필과 이침의 일만 윤허하였다.
박천 군수(博川郡守) 유성징(柳聖澄)에게 통정(通政) 박천 군수(博川郡守)의 품계(品階)를 더하라고 명하였으니, 선치(善治)했기 때문이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진검(李眞儉)이 포장(褒奬)한 계문(啓聞)에 의해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논상(論賞)하였다.
8월 6일 계축
사간원(司諫院)에서 또 논하기를,
"서흥 현감(瑞興縣監) 송성원(宋性源)은 흉역(凶逆)이 귀양가던 날 문득 관아(官衙)의 저축을 바닥내면서 연달아 선물을 보내어 문안하였으므로, 고을의 재물이 텅텅 빌 정도로 소모되어 백성들이 명을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가 다음날 그대로 따랐다. 송성원은 관직에 있으면서 이미 대단히 흠잡을 정사(政事)가 없었고, 또 오고 가는 적객(謫客)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동류들에게서 의혹과 비방을 크게 받았는데, 탄핵(彈劾)이 갑자기 일어나 찬적(竄謫)을 주급(周給)했다는 것을 죄로 삼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겼다.
권이진(權以鎭)을 승지(承旨)로, 윤빈(尹彬)을 정언(正言)으로, 이거원(李巨源)을 문학(文學)으로, 조원명(趙遠命)을 사인(舍人)으로, 송진명(宋眞明)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박번(朴蕃)을 회령(會寧)에, 나정일(羅廷一)을 단천(端川)에 귀양보냈다. 박번 등은 유생(儒生)이라고 핑계하며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 부자를 배척했는데, 몹시 패리(悖理)한 말이 많았다. 정원(政院)에서 물리치자 대신(臺臣)이 발계(發啓)하여 원배(遠配)할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8월 8일 을묘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괴원 분관(槐院分館)에서 취사(取捨)가 공정하지 않아 외람되고 잡스런 것이 많으니, 청컨대 해당 장무관(掌務官)은 삭출(削黜)하고, 참좌(參坐)한 세 사람은 모두 파직하소서. 목천현(睦天顯) 등은 도태해 버리고 선발한 가운데 이일제(李日躋) 등은 괴원의 전례에 의해 조용(調用)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진위 정사(陳慰正使) 오명준(吳命峻)과 부사(副使) 홍중우(洪重禹)·서장관(書狀官) 황정(黃晸)이 사조(辭朝)하였다.
황해도(黃海道) 수군(水軍)의 조련(操鍊)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도신(道臣)이 전선(戰船)이 썩었다며 정지를 청하자,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허락한 것이다.
8월 9일 병진
서명연(徐命淵)·이하원(李夏源)을 승지(承旨)로, 홍정필(洪廷弼)을 사간(司諫)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시혁(金始㷜)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권익관(權益寬)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사상(李師尙)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이사상은 비록 시문(詩文)의 재능은 있으나, 성질의 본래 거칠고 사나운데다 욕심이 많고 비루하여 출신(出身)한 초기부터 하자가 있어 청류(淸流)에게 용납받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일경(金一鏡)과 합세하여 외람되게 옥서(玉署)의 우두머리에 두니, 물정(物情)이 놀라와하지 않음이 없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광좌(李光佐) 또한 입시(入侍)하여 각 군문(軍門)에 구근(久勤)256) 을 참하관(參下官)의 천전(遷轉)하는 예에 의하여 45개월로 정식(定式)할 것을 청하고, 고(故) 상신(相臣) 이덕형(李德馨)의 5세손 이흥인(李興仁)과 고 장신(將臣) 김응해(金應海)의 후손 김준(金浚)은 모두 권무과(勸武科)257) 에 합격했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이나 혹은 장관(將官)을 제수(除授)하여 성취(成就)가 있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삼군문(三軍門)258) 의 장관은 내삼청(內三廳)259) 에 다섯 자리를 각각 두고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에도 또한 각각 세 자리를 두었는데, 재주가 있는 사람을 취하여 차정(差定)해 임명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8월 10일 정사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이진순(李眞淳)을 보덕(輔德)으로, 이진유(李眞儒)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이광도(李廣道)를 헌납(獻納)으로, 박장윤(朴長潤)을 지평(持平)으로, 윤동수(尹東洙)를 사복(司僕)으로, 박징빈(朴徵賓)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8월 11일 무오
잇따라 도목 정사를 시행하였다. 강필경(姜必慶)을 교리(校理)로, 윤성시(尹聖時)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명의(李明誼)를 부응교(副應敎)로, 서명걸(徐命杰)을 정언(正言)으로, 이승원(李承源)을 필선(弼善)으로, 김동필(金東弼)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삼았다. 김동필은 그의 상소(上疏)가 있은 후로 일체 폐고(廢錮)되었다가 이제 와서 비로소 관직에 제수된 것이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명항(吳命恒)이 장계(狀啓)를 올려 겸제마(兼濟馬)의 법을 고치자고 청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대개 칙사(勅使)가 돌아갈 때 그 복물(卜物)을 수송하기 위하여 중화(中和)부터 의주(義州)까지 항상 말 5백여 필(匹)을 준비하고, 아울러 인부를 구종(驅從)시켜 매월 후한 급료를 주었는데, 이름하여 ‘겸제마(兼濟馬)’라 하였다. 또 양정(良丁)을 모아 전향 군관(轉餉軍官)이라 일컬으며 그에 대한 포(布)를 거두어 각 역참(驛站)에 나누어 주고 역참에는 별장(別將)을 두었다. 혹 빚으로 돈을 꾸어 주고 혹은 급료로 변통하기도 했는데, 법이 오래되고 폐단이 생겨서 민심이 억울하다 말하므로 오명항이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청하기를,
"관향사(管餉使)260) 의 둔전(屯田)을 마위전(馬位田)261) 에 나누어 주되 각역(各驛)의 마위전과 같이 하며, 숫자가 서로 들어맞지 않으면 본영(本營)에서 경영하여 토지를 사서 그 수효를 채워 줄 것입니다. 전향 군포(轉餉軍布)는 1년 동안 거두는 것이 2백 동(同)262) 이니, 반은 감영(監營) 안의 장사(將士)에게 급료로 주는 밑천을 삼고, 반은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수용(需用)으로 삼는다면 일이 매우 편의(便宜)할 것입니다."
하였다.
8월 12일 기미
먼동이 틀 무렵부터 묘시(卯時)까지 안개가 끼었고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까지 햇무리하였다.
8월 14일 신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을 하나의 행사로 합하여 일찍이 재자관(䝴咨官)263) 을 보냈는데, 예부(禮部)에서는 방계(防啓)264) 하였으나, 황제(皇帝)가 특별히 허락하였으니, 또한 은혜에 사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청컨대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사표(謝表)를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15일 임술
전강(殿講)에 입격(入格)한 유생(儒生) 이세열(李世說) 등 6인에 차등 있게 분수(分數)를 주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임금의 환후(患候)가 평상시와 같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진하(進賀)하고 반교(頒敎)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8월 17일 갑자
좌의정(左議政) 최규서(崔奎瑞)를 호위 대장(扈衞大將)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최석항(崔錫恒)이 연중(筵中)에서 아뢰었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처분이 없다가 최석항이 승지(承旨)로 하여금 써서 내기를 청하니, 좋다고 하교(下敎)하였다.
전(前)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석연(金錫衍)이 졸(卒)하였다. 김석연은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동생인데, 젊을 때부터 부귀한 집안의 자제(子弟)로 자못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다가 음관(蔭官)에 임명되면서부터 태도를 바꾸어 통렬(痛烈)하게 옛 습성을 연마하여 경근(敬謹)하다는 명망으로 벼슬이 경재(卿宰)에 이르렀다. 일찍이 조신(朝臣)과 사귀며 자제(子弟)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음식은 간략하고 검소한 데 힘써 궁중(宮中)에서 하는 양식의 사치스런 풍습이 없었다. 늦게 장임(將任)을 맡아서는 거의 20년 동안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군비(軍費)가 차고 넘쳤으므로 나라에서 의뢰하는 바가 있었다. 어릴 때는 그의 조부 영의정(領議政) 김육(金堉)이 여러 손자 중에서 가장 사랑하였으며, 정공(鄭公) 태화(太和)는 그를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기며 ‘김씨의 문호(門戶)를 보전하는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졸했을 때의 나이는 76세였다. 임금이 은졸(隱卒)265) 의 교서(敎書)를 내리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1등의 예장(禮葬)으로 거행하라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작환(繳還)하기를,
"재신(宰臣)은 원래 예장의 전례(典禮)가 없습니다. 법제(法制)로 헤아려 보건대 중도(中道)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명하기를,
"풍양군(豐陽君) 장선징(張善徵)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또 아뢰기를,
"장선징은 종1품(從一品)이었으니, 이와는 구별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제수(祭需)를 넉넉하게 주고, 3년을 한정하여 녹봉(祿俸)은 그대로 주라 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일품직(一品職)으로 증직하여 수고와 공로에 보답하고 청렴을 포창하며, 해조로 하여금 3등 예장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평안도(平安道) 희천군(熙川郡)에 우박이 내렸는데 콩알만하였고, 이산군(理山郡)에도 우박이 내려 동서 남북 사방 2백 리 사이에 서너치 정도 쌓였는데, 종일 녹지 않았고 크기는 비둘기알만하였다.
8월 19일 병인
밤에 2경(更)부터 오경(五更)까지 달무리하였다.
8월 20일 정묘
복상(卜相)266) 을 명하여 이광좌(李光佐)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이승원(李承源)을 수찬(修撰)으로, 여선장(呂善長)과 윤유(尹游)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조(李肇)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8월 23일 경오
예조(禮曹)에서 처음에 왕세제(王世弟)가 바야흐로 조섭(調攝)중에 있었으므로 진하(進賀) 때에 행례(行禮)를 임시로 정지하였는데, 동궁(東宮)에서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사부(師傅) 최석항(崔錫恒)에게 의논하여 하례(賀禮)를 친행(親行)할 것으로 정식(定式)하였다.
8월 25일 임신
동틀 무렵에 서리가 내렸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새 임명을 사양하니, 임금이 따뜻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효유(曉諭)하였다.
8월 26일 계유
장령(掌令) 유수(柳綏)가 인피(引避)하기를,
"장령 박징빈(朴徵賓)과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동필(金東弼)의 소(疏)는 신(臣)이 지난 겨울에 올렸던 한 계사(啓辭)를 제기하여 비난과 배척을 뒤섞어 더하였습니다. 대저 두 사람의 언의(言議)는 모두 실수한 바가 있었는데, 박징빈이 윤순(尹淳)을 논핵(論劾)한 것은 너무 심각한 데 힘써 말을 가리지 않은 것이 많았고, 김동필이 재신(宰臣)을 소척(疏斥)한 것은 오로지 허구 날조를 일삼아 뜻이 심히 아름답지 못하였으므로, 신이 한 사람은 체직(遞職)하고 한 사람은 파직(罷職)할 것을 아뢰었으니, 조금 경중(輕重)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반성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기를 크게 돋구어 침범하며 배척하니, 사정과 형세로 논하건대 정말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직(辭職)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처치(處置)하여 가마[轎]를 탔다는 이유로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8월 27일 갑술
홍정필(洪廷弼)을 수찬(修撰)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정언(正言)으로, 유수(柳綏)를 필선(弼善)으로, 김유(金濰)를 장령(掌令)으로, 조태억(趙泰億)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명의(李明誼)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8월 28일 을해
밤 5경(更)에 유성(流星)이 오제 좌성(五帝座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서너 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고 광채가 땅에 비쳤다.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가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은 불충(不忠)하고 보잘것없는 나머지 말이 군부(君父)에게 신임받지 못하고, 마침내 향리(鄕里)에 드러누워 상상(上相)의 영화만 도박(賭博)해 취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신이 감히 조금이라도 무릅쓰고 나아가려는 뜻을 싹틔웠다면, 선조(先朝) 때 20년 간이나 물리쳐 도망했던 것과 근래 열여섯 번이나 사소(辭疏)로 옥신각신하는 것이 모두 색가 요은(索價要恩)267) 네 글자를 성취한 것이 될 것입니다. 진실로 일분(一分)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두었다면 감히 이와 같은 결정에 뻔뻔스럽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후의 손독(巽牘)에 이미 내 뜻을 다 말하였다. 경(卿)은 어찌 돌아보지 않고 나를 이처럼 버리는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념(體念)하여 즉시 길에 오를 것이며, 안심하고 정사(政事)를 의논하여 현재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였다. 최규서가 전후로 상소하여 사직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나, 지금 비로소 답을 내린 것이다.
8월 29일 병자
임금의 환후(患候)가 회복되었으므로 왕세제(王世弟)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進賀)하였다. 동궁(東宮) 또한 하례(賀禮)를 받았고, 대사령(大赦令)을 널리 반포하였다. 예관(禮官)이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人材)를 뽑되, 정사(庭試)로 정하여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홍만조(洪萬朝)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대빈(大嬪)의 사우(祠宇) 조성 감역관에게 명하여 제주관(題主官) 【신주(神主)의 글씨를 담당해 쓰는 사람.】 은 아울러 육품으로 승직시키고, 그 나머지는 차등 있게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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