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축
권첨(權詹)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일경(金一鏡)이 다시 김동필(金東弼)과 대변(對辯)할 것을 진소(陳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김동필이 처음 소(疏)에는 다만, ‘교문(敎文)에다 인용해 비유한 것이 마땅함을 벗어났다.’ 하고, 분별하여 지적하지 않았는데, 신(臣)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으며, 혹 화심(禍心)을 가지고 김동필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자가 있으나, 김동필도 또한 다른 뜻이 없음을 가는 곳마다 스스로 밝혔습니다. 이제 갑자기 신이 스스로 겸손하여 의례적으로 한 말을 앞뒤를 잘라내고 교묘하게 꾸몄으며, 또 다시 ‘망발(妄發)’이란 두 글자를 만들어 내어 난데없이 삽입하여 제멋대로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기만하면서 스스로 지어내고 스스로 불러내니, 그 뜻이 갈수록 더욱 치밀합니다. 신이 반복해 생각하건대 처음부터 인용해 비유한 데 있어서 잘못이 없었으니, ‘망발’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해당 문자(文字)를 김동필이 명확하게 말하고 곧바로 지척(指斥)한들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그런데 반은 실토하고 반은 숨기며 발설하려 하다가 발설하지 않으니, 신은 적이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침척(侵斥)한 말을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김동필이 앞의 일을 소리(疏理)268) 하면서 곧바로 잘라 말하지 못하고, 또 사람들에게 한 말이 조금 미봉(彌縫)하는 데 관계되었으므로, 김일경이 더욱 방자하게 그 기염을 떨쳐 돌아보고 꺼림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고 놀랐다.
9월 2일 무인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임하여 닷새 동안 계속 관무재(觀武才)하였는데, 왕세제(王世弟)가 모시고 옆에 앉아 있었다. 또 10운(韻)의 배율(排律)로 문신(文臣)을 시험하여 전(前) 사정(司正) 이일제(李日躋) 등 네 사람을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면대(面對)해 말[馬]을 주고, 그 이하는 호표(虎豹) 가죽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헌납(獻納) 이광도(李廣道)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전(前) 부사(府使) 심정보(沈廷輔)는 양자(養子)가 일찍 죽었는데, 첩의 아들 심사맹(沈帥孟)이 그 어미와 정호(鄭澔)의 첩이 은밀히 저주(阻呪)한 글을 내었습니다. 정호의 첩은 곧 심사맹의 동생의 처모(妻母)입니다. 심정보는 도리어 심사맹을 보전하려는 계획을 하여 그 첩으로 하여금 약을 먹여 스스로 죽게 하여 마침 그 일을 깊게 조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심사맹과 정호의 첩을 청컨대 그 관청으로 하여금 수금(囚禁)하여 엄한 형률로 끝까지 국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의금부(義禁府)의 죄수(罪囚) 목호룡(睦虎龍)·이중환(李重煥)이 대사(大赦) 때문에 풀려나 그들의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치 못하였다.
9월 3일 기묘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사(武士)를 시취(試取)할 때 종반(宗班)과 문신(文臣)에게 과녁에 화살을 쏠 것을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를 호위 대장(扈衞大將)으로 삼았다.
9월 4일 경진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을 실록 총제관(實錄摠裁官)으로, 송진명(宋眞明)을 헌납(獻納)으로, 이명의(李明誼)를 부응교(副應敎)로, 이진순(李眞淳)을 사간(司諫)으로, 김시혁(金始㷜)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9월 6일 임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처음으로 연대(筵對)에 나아갔다. 먼저 양역(良役)의 폐단을 진달하고,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두 사람이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밤낮으로 강확(講確)해서 변통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의 옥사(獄事)에 참여하기 여려움은 최석항(崔錫恒)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고, 인하여 작처(酌處)269)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사형(死刑)을 감해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할 것을 명하였다. 헌납(獻納) 송진명(宋眞明) 등이 간쟁(諫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9월 7일 계미
진하 정사(進賀正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과 부사(副使) 서명균(徐命均)·서장관(書狀官) 유만중(柳萬重)이 복명(復命)하였다. 이어 황제(皇帝)가 내린 서책(書冊)·필묵(筆墨)·기완(器玩)을 올렸다. 황제가 특별히 1년 동안의 공물(貢物) 가운데 면포(綿布) 8백 필(匹), 달피(獺皮) 1백 장(張), 청서피(靑黍皮) 3백장, 백면지(白綿紙) 천 권(千卷)을 감하고, 또 정사(正使)를 불러 우악한 예(禮)로 대우하면서, ‘지금부터 종반(宗班)이 사신으로 오면 정식(定式)으로 접견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9월 9일 을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친히 상(賞)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이는 자급(資級)을 더하였고, 어떤이는 수령(守令)을 제수하였으며, 변장(邊將)·군병(軍兵) 등에게는 포(布)를 차등있게 내리고, 종신(宗臣)과 문신(文臣)에게 혹은 말을, 혹은 활을 내렸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윤각(尹慤)과 유성추(柳星樞)를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0일 병술
먼동 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유필원(柳弼垣)을 응교(應敎)로 삼고, 이명의(李明誼)를 승급시켜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춘제(李春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교리(校理) 강필경(姜必慶)은 평소 인망(人望)이 가벼운데, 요행히 당록(堂錄)에 들어 바로 교리에 제배(除拜)되었으니, 더욱 외람된 데 관계됩니다. 충훈부(忠勳府)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남태징(南泰徴)은 마침 인재(人材)가 없는 때를 만나 외람되게도 본임(本任)을 욕되게 하였는데, 수단이 교활하다는 비난과 놀랄 만한 행동 때문에 전파되는 말이 또한 많으니, 아울러 개정(改正)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돌아온 세 사신(使臣)이 또한 입시(入侍)하였으니 대신(大臣)이 주달(奏達)했기 때문이었다. 밀성군(密城君) 이직(李樴)이 아뢰기를,
"옹정(雍正)이 제위(帝位)를 이은 것을 두고 혹, ‘교조(矯詔)270) 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또 재물을 탐하고 이익을 좋아하여 피해가 장사하는 사람들에까지 미쳤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혹은 ‘여염(閭閻)에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익히 알아 정령(政令)의 사이에 총명하게 관찰함이 견줄 데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신(臣) 또한 인견(引見) 때 그 영민한 기상(氣象)이 나타나고 말소리가 크게 밝음을 보았으며, 시위(侍衞)도 자못 엄숙하였습니다. 또 도하(都下)의 백성들도 별탈없이 순조롭게 있으니 당장에 위태롭고 의심할 염려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공물(貢物)을 면제한 일은 상명(常明)의 힘이 많았습니다."
하고, 도승지(都承旨) 김시환(金始煥)이 이어 상명의 내력에 대해 진달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 나라 의주(義州) 사람의 자손으로 그의 증조가 정묘년271) 에 오랑캐에게 붙잡혀 갔는데, 그 어미가 강희(康熙)에게 보육(保育)의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자손들이 강희에게 애휼(愛恤)받게 되었고, 상명이 이에 세직(世職)을 이어받아 바야흐로 조창 총관(鳥鎗摠管)을 맡고 있는데, 통관(通官) 무리들이 다 그의 부하였습니다. 또한 새 임금에게 치우친 사랑을 받아 새로 총탁(寵擢)을 입고 좌우에서 친근히 모시고 있는데, 역관들이 중간에서 왕래할 때 그가 말하기를, ‘내 몸은 비록 이곳에 있으나 마음속으로 근본을 잊지 않고 있으니, 본국의 모든 일에 대하여 극력 주선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기색(氣色)을 보았더니, 왕(王)과 집정 대신(執政大臣) 융과(隆科)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고 상량(商量)하였던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직(樴)이 또 역관 등에게 논상(論賞)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전후로 봉사(奉使)했던 신하들이 걸핏하면 상명(常明)으로 인해 비록 일을 한때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인국(隣國)의 폐신(嬖臣)을 사사로이 사귀는 것은 이미 정대(正大)한 도리가 아니다. 또 상명이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이미 타국(他國)의 신하가 되었는데, 감히 외교(外交)를 하였으니, 그 사람됨이 신중(愼重)하지 못함을 또한 알 수 있다. 만약 저들과 우리의 사이에 이로움이 끝이 나고 틈이 벌어지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총애가 쇠하고 의심이 생길 경우 어찌 이런 일들이 상명의 죄가 되지 않고 환란(患亂)이 우리 나라에 미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가 있겠는가? 아! 경계해야 할 따름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0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註 270] 교조(矯詔) : 가짜 조서(詔書).[註 271] 정묘년 : 1627년 인조 5년.
사신은 논한다. "전후로 봉사(奉使)했던 신하들이 걸핏하면 상명(常明)으로 인해 비록 일을 한때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인국(隣國)의 폐신(嬖臣)을 사사로이 사귀는 것은 이미 정대(正大)한 도리가 아니다. 또 상명이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이미 타국(他國)의 신하가 되었는데, 감히 외교(外交)를 하였으니, 그 사람됨이 신중(愼重)하지 못함을 또한 알 수 있다. 만약 저들과 우리의 사이에 이로움이 끝이 나고 틈이 벌어지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총애가 쇠하고 의심이 생길 경우 어찌 이런 일들이 상명의 죄가 되지 않고 환란(患亂)이 우리 나라에 미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가 있겠는가? 아! 경계해야 할 따름이다."
비국(備局)에서 청하기를,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와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봉휘(柳鳳輝)에게 양역(良役)의 변통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고, 문무(文武) 낭청(郞廳) 각각 두 명을 차출(差出)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9월 11일 정해
권익관(權益寬)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9월 12일 무자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승지가 시장(試場)이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속히 대신(臺臣)에게 비답(批答)을 내릴 것을 청하자, 임금이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이하원(李夏源)이 읽어서 아뢰니, 임금이 즉시 비답을 내렸다.
대사헌(大司憲) 이진검(李眞儉)이 상소하여 강필경(姜必慶)·남태징(南泰徵)을 구하니, 정언(正言) 이춘제(李春躋)가 인피(引避)하며 더욱 힘써 공격하였다.
장령(掌令) 박징빈(朴徴賓)이 상소하여 윤순(尹淳)의 일에 대하여 시비를 가려 밝혔는데, 더욱 방자하게 무함하여 추잡하고 어긋난 말이 많았다.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9월 13일 기축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세 번이나 체직(遞職)해 줄 것을 고하니, 비국(備局)에서 잉임(仍任)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9월 14일 경인
이진검(李眞儉)·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이광도(李廣道)를 장령(掌令)으로, 심준(沈埈)을 필선(弼善)으로, 유봉휘(柳鳳輝)를 좌빈객(左賓客)으로, 김시환(金始煥)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승원(李承源)을 집의(執義)로, 이광세(李匡世)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9월 16일 임진
삼경(三更)에서 5경(五更)까지 달무리하였다.
임금이 구선남극단(癯仙南極丹)을 복용하였는데, 이공윤(李公胤)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이것은 약성(藥性)이 대단히 높은 약제(藥劑)인데 이름을 변경한 것이었다.
9월 17일 계사
약방(藥房)에서 임금의 기후(氣候)가 미령(未寧)하다 하여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엄교(嚴敎)로 정원(政院)에서 자주 공사(公事)를 출납한다며 도승지(都承旨) 이진검(李眞儉)을 파직하고 이어 속히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최석항(崔錫恒)과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그의 무죄함을 아뢰고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니,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추고(推考)하라 명하였다. 승지 심중량(沈仲良)이 ‘급작스레 성내는 것’을 경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최석항·이광좌 등이 숙종조(肅宗朝) 정사년272) 의 전례를 인용해 대비전(大妃殿)에 진연(進宴)하되 쓸데없는 비용을 아주 줄이고 되도록 간략하게 설행(設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시기를 11월로 정하였다. 다음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자전(慈殿)께 아뢰었더니 행하지 말라 분부하셨다. 또한 억지로 청하기 어려우니 정리(情理)에 심히 서운하였다."
하였다.
여필용(呂必容)을 승지(承旨)로, 이보욱(李普昱)을 정언(正言)으로, 여선장(呂善長)·윤유(尹游)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9월 18일 갑오
밤 4경(更)과 5경에 달무리하였다.
심단(沈檀)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9월 19일 을미
좌상(左相)·우상(右相)이 입대(入對)를 청하였는데, 진연(進宴)의 일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자전(慈殿)께서 하교(下敎)하심은 진실로 겸손한 성덕(盛德)과 비용을 생각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나, 이번의 진연은 응당 행해야 할 전례(典禮)입니다. 지금 만약 정지한다면 전하(殿下)의 애일(愛日)273) 하는 정성에 어찌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다시 곁에서 거듭 여쭈어 자전께서 듣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특별히 잘 다스리는 수령(守令)을 선택하여 차례차례 차견(差遣)하는 것이 백성을 구제하는 제일의 급선무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말하기를,
"금란(禁亂)이 도리어 도민(都民)의 폐단이 되니, 청컨대 출금(出禁)하는 삼사(三司)274) 에다 신칙하여 서로 이졸(吏卒)을 규찰(糾察)해 드러나는 대로 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고(故)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은 결백한 행실과 굳은 절개가 당시의 첫째가는 부류가 되었는데, 그 아들 한지(韓祉)도 어질어 관직을 맡으면 언제나 충성을 다했으나 또한 일찍 죽으니, 한태동의 처(妻)가 늙은 나이에 혼자된 몸으로 곤궁하게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정재숭(鄭載嵩)은 선조(先朝) 때 깨끗한 덕행(德行)을 지닌 어진 재상이었는데, 그의 처가 병은 없으나 집이 몹시 가난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월름(月廩)을 주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라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9월 20일 병신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막 나아가 엎드리자마자 임금이 엄교(嚴敎)로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을 나국(拿鞫)하여 엄하게 처단하라 명하고, 또 옥당 유필원(柳弼垣)과 윤유(尹游)를 나추(拿推)하라 명하였다. 승지(承旨) 양정호(梁廷虎)가 진달(陳達)하려 하자, 임금이 갑자기 파직하라 명하였다. 얼마 안되어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일시의 화증(火症) 때문에 갑자기 지나친 행동이 있었다."
하였다. 승지·사관(史官)·옥당이 다시 입시하고 여러 신하들이 다시 들어오니, 임금이 이어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품의(稟議)하게 하여 재결(裁決)하였다. 옥당에서도 또한 강독(講讀)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양정호 등이 번갈아 좌상(左相)의 충성스럽고 근실한 정상을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대(請對)하여 도로 거두어 들일 것을 진청(陳請)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곡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진검(李眞儉)이 계속하여 아뢰니, 임금이 또 엄교를 내려, ‘최석항은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내고, 이진검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는데, 이광좌가 입이 쓰도록 힘껏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도로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최석항이 금오(金吾)275) 에서 대명(待命)하였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대명하지 말라고 돈유(敦諭)하였다.
신축년276) 처음 안팎에서 기대하는 풍문(風聞)이 떨쳐 힘써서 한 번 새롭게 하는 정치를 바랐는데, 그 뒤에 한결같이 침묵(沈默)하여 도유 우불(都兪吁咈)277) 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간혹 과격한 거동만 있었으니, 대개 많은 사람이 입시하거나 혹 연석(筵席)에서 시간을 끌면 화열(火熱)이 문득 치밀어 올라가 그러한 것이었다. 전석(前席)에서 억지로 다투어 준청(準請)278) 함이 많았으므로, 대간(臺諫)이 반드시 청대하여 논계(論啓)하였는데, 따르고 위배하는 사이에 또한 참작하였던 것이 있으니, 상신(相臣)을 진실로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면, 혹 가히 다스려지기는 할 것이나 상하가 조화되는 도리는 막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비로소 나온 바를 알지 못하여 근심하고 번민하였는데,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바야흐로 거만하게 공신(功臣)을 자처하면서 조정의 권한을 조롱하여 기세를 한창 떨치고 있었으나, 정축(鼎軸)279) 을 맡은 자가 이미 역량(力量)이 없어 능히 억제하지 못하였고, 묘당(廟堂)에서 추천하는 것도 또한 그들이 하고자 하는데로 따랐으니, 시사(時事)는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봉휘(柳鳳輝)가 병으로 해직(解職)되어 이태좌(李台佐)로 대신하고, 유봉휘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유봉휘(柳鳳輝)의 신축년280) 상소는 당인(黨人)에 대해 분을 느끼고 미워한 데에서 나와 말하는 사이에 조금도 동궁(東宮)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변호하지 않았으니, 조정(朝廷)에서 연달아 포장(褒奬)하고 발탁(拔擢)을 더한 것은 심히 상량(商量)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처의(處義)도 또한 세상을 염피(斂避)하는 것이 마땅한데, 벼슬을 제수하면 곧 출사(出仕)하여 조금도 피하고 사양하며 황공하게 여기는 뜻이 없었다. 평소에 다리병으로 마음대로 걷지를 못하여 억지로 부축을 받아 공소(公所)에 나아가니 바라보는 자들이 놀랐고, 학식(學識)이 있는 자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9월 21일 정유
묘시(卯時)에서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고 사시(巳時)에 햇무리하였다. 밤 1경(更)에 혜성(彗星)이 여수(女宿)의 도수 안에 나타났는데, 빛깔은 희고 꼬리 흔적이 15일 동안 있다가 사라졌다. 4경에 화성(火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상소하여 체직(遞職)을 청하고, 인하여 교외(郊外)로 나가 명소패(名召牌)를 도로 들으니, 임금이 답하기를,
"한때의 화증(火症)으로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었으므로 연중(筵中)에서 이미 뉘우쳐 깨닫는 실마리를 보였다. 경(卿)의 너그러운 도량(度量)으로 무엇을 괘념(掛念)하는가? 빨리 들어와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라 명하였으며, 또 사관을 보내어 명소패를 도로 주었다.
9월 23일 기해
밤 1경(更)과 2경에 번개가 쳤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진연(進宴)하는 일을 누차 우러러 청하였으나, 자전(慈殿)께서 허락하지 않으시어 내 마음이 몹시 실망스러운데, 거듭 청하기도 어렵다."
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차자(箚子)를 올려 다시 곁에서 간곡하게 호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간절히 만류(挽留)하기 때문에 다시 요청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였다.
9월 24일 경자
땅거미가 질 무렵에 천둥과 번개가 쳤고, 2경(更)과 3경에 번개가 쳤다.
권이진(權以鎭)과 심중량(沈仲良)을 승지(承旨)로 삼고, 유봉휘(柳鳳輝)를 승진시켜 판의금(判義禁)으로, 윤성시(尹聖時)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9월 25일 신축
밤 1경(一更)에 번개가 쳤고, 2경에 혜성(彗星)이 우수(牛宿)의 도수안으로 옮겨 갔다. 미시(未時)에는 눈이 흩날렸다.
홍정필(洪廷弼)을 부응교(副應敎)로, 이승원(李承源)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하여 전례에 의하여 문관(文官) 네 명을 따로 차정(差定)해 돌아가며 숙직하면서 간검(看檢)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혜성이 사라진 뒤 그만두었다.
9월 26일 임인
승지(承旨)를 보내어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을 돈유(敦諭)하였으나, 최석항이 명에 응하지 아니하고 또 사소(辭疏)를 올리니, 임금이 온비(溫批)를 내려 속히 입성(入城)하라 하였다.
9월 27일 계묘
2경(更)과 3경에 번개가 쳤다.
약방(藥房)에 상전(賞典)을 비로소 내렸는데, 도제조(都提調) 최석항(崔錫恒)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내리고, 자질(子姪) 한 사람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제조(提調) 이태좌(李台佐)와 부제조(副提調) 김시환(金始煥)에게는 아울러 자급(資級)을 더하고, 사관(史官)은 6품(品)으로 승진시켰다. 가주서(假注書)에게는 말을 내리고 의관(醫官)에게는 혹은 자급을 더하거나 혹은 말을 내렸다. 그 나머지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었다.
9월 28일 갑진
이승원(李承源)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소대(召對) 때 입시(入侍)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옥당관 여선장(呂善長)이 말하기를,
"장법(贓法)이 엄하지 않아서 권선 징악(勸善懲惡)할 바가 없습니다. 수령(守令)으로서 탐오(貪汚)로 죄를 얻는 자는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의망(擬望)하여 제수하지 말게 마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29일 을사
밤 1경(更)에 우박이 쏟아졌는데 모양이 팥 만하였으며, 번개가 치고 천둥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온성 부사(穩城府使) 노흡(盧洽)은 일찍이 영남(嶺南)의 영장(營將)을 맡았을 때 도적을 잡는다 빙자하고 추노(推奴)281) 를 겸하여 행했는데, 부민(富民)을 마구 침탈(侵奪)하여 받은 뇌물(賂物)이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9월 30일 병오
밤 일경(一更)에 우박이 쏟아졌는데 모양이 팥만하였고, 번개가 쳤다. 2경·3경에도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좌의정(左議敎) 최석항(崔錫恒)이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후로 범한 죄를 손가락을 꼽아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의 곤궁함이 극도에 달했는데, 구제해 살리는 계책을 조처하지 못하였고, 조정의 의론이 어지럽게 분열되어 인협(寅協)의 희망이 끊어졌는데, 조오(調娛)의 방도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날로 무너져 가고 백관(百官)이 맡은 바에 태만하여 주사(籌司)282) 의 개좌(開坐)에 인원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실록(實錄)을 편찬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러나 한 번 신칙(申飭)하고는 끝내 그 실적(實績)이 없습니다. 신(臣)이 외람되게 백관의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능히 감독하여 거느리지 못해 3년 동안의 정부(政府)에 하나도 이룩해 밝힌 것이 없으니, 이것은 모두 신의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온비(溫批)를 내려 개석(開釋)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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