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정미
밤 2, 3경(更)에 번개가 쳤다.
10월 2일 무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비국(備局)의 개좌(開坐)가 심히 드무니, 청컨대 까닭없이 나아가지 않는 당상관(堂上官)은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수의(首醫) 이시성(李時聖)은 매양 의약(議藥)할 때면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의견을 쓰고 여러 의원의 의논을 힘껏 저지했으니, 청컨대 도태(淘汰)시켜 영원히 다시는 의약하는 자리에 두지 말라고 명하소서. 사복시(司僕寺)의 제원(諸員)이 말먹이는 역(役)을 나누어 정하여 피해가 인족(隣族)에게 미치니, 청컨대 본시(本寺)에서 포(布)를 거두어 사서 쓰고 다시는 나누어 정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말단(末端)의 두 건의 일만 윤허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단지 노흡(盧洽)의 일만 따랐다.
정언(正言) 이광세(李匡世)가 인피(引避)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이론(理論)을 망령되게 진달했던 나머지 열흘이 지나도록 비답(批答)을 아끼시니, 황공하고 부끄러워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유신(儒臣)과 요대(僚臺)가 소(疏)에서 신이 윤취상(尹就商)과 심단(沈檀)의 일을 논한 것을 들어 서로 잇따라 비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윤각(尹慤)은 윤취상에게 조카가 됩니다. 조카가 국청(鞫廳)에서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났는데, 삼촌은 중권(重權)을 맡아 태연하게 조금도 황송해 하고 비통해 하는 뜻이 없으니, 능히 손가락질하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두 신하에 대해 혹은, ‘의리를 지키는 데 흠이 없다.’고 허여하고, 혹은 ‘시비(是非)를 물을 수 없다.’고 하니,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의리를 지키는 데 과연 온당하지 못함이 있는데도 특별히 위급하고 곤란한 시기에 책임을 맡은 까닭에 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심단을 구호함에 이르러서는, ‘임창(任敞)에게 〈사형을〉 바로 단정한 것이 법의(法意)에 어긋남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각(臺閣)의 법을 지키는 의논이 이와 같으니, 더욱 그 뒷날의 폐단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직(辭職)하지 말라 답하였으므로,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재이(災異)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책면(策免)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온비(溫批)를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3일 기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단지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고 이시성(李時聖)을 태거(汰去)하는 일만 윤허(允許)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대각(臺閣)은 보통 관료(官僚)와는 절로 다름이 있으므로 비록 패초(牌招)를 어긴 죄가 있더라도 일찍이 곧바로 금추(禁推)283) 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약 정원(政院)에서 정상(情狀)과 병세(病勢)를 구별하여 곧바로 금추를 받는다면, 대간(臺諫)을 체직(遞職)하고 수금(囚禁)하는 것이 모두 정원의 손에서 나올 것이니, 뒷폐단에 관계됩니다.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연석(筵席)에서 아뢰었거나 전지(傳旨)를 받든 승지(承旨)를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정원에서 곧바로 금추를 받으라.’는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이때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진신(搢紳)들 사이에 패초를 어기는 것으로 고치(高致)로 삼았는데, 임금이 한결같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이익한(李翊漢)이 연중(筵中)에서 그 폐단을 극력 진달하여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로서 패초를 어긴 자를 정원에서 곧바로 금추를 받들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므로 두세 대신(臺臣)이 소명(召命)을 어기자, 정원에서 정식(定式)에 의해 체직(遞職)하고 금추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간관(諫官)이 논했던 것이다.
10월 4일 경술
밤 2경(更)에서 5경까지 번개가 쳤다.
송진명(宋眞明)을 헌납(獻納)으로, 조태억(趙泰億)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윤유(尹游)를 부교리(副校理)로, 양득중(梁得中)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양득중은 별천(別薦)으로 진출하여 대망(臺望)에 통했다.
10월 5일 신해
묘시(卯時)에 천둥하고, 밤 2경(更)에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같고 꼬리는 서너 자[尺]였으며, 빛깔은 붉었다. 번개가 쳤고 밤 3경에도 번개가 쳤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임하여 친히 동향 대제(冬享大祭)의 향(香)을 전하였다.
정시(庭試)의 활 쏘는 규칙을 개정하라 명하였다. 처음에 무과 전시(殿試)의 규칙은 1기(技)만 취하라고 명하였는데, 화살 수가 너무 헐하였으므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조(李肇)가 그 규칙을 조금 엄격하게 하기를 소청(疏請)하였으나, 오랫동안 답하지 않다가, 승지(承旨) 이진검(李眞儉) 등이 여쭈어 ‘유엽전(柳葉箭)으로 기추(騎蒭)해서 두 번 맞히게 하여 2기(技)를 취한다.’는 것으로 법식을 개정하였다.
10월 6일 임자
밤 1경(更)에 안개가 끼었고, 5경에는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두세 자[尺] 정도로 빛깔이 붉었다. 안개가 끼었다.
이익한(李翊漢)·박필몽(朴弼夢)을 승지(承旨)로, 윤회(尹會)를 장령(掌令)으로, 최시옹(崔是翁)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최시옹은 역시 양득중(梁得中)과 같은 부류이다.
10월 7일 계축
동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정시(庭試)를 행하여 문과(文科)에서 김상성(金尙星) 등 5인을, 무과(武科)에서 박지발(朴枝發) 등 1백 22명을 뽑았다.
김시경(金始慶)·이진망(李眞望)을 승지(承旨)로, 이승원(李承源)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0월 8일 갑인
밤 2경에 유성(流星)이 좌기성(左旗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서너 자[尺] 정도였다. 빛깔로 붉고 광채가 땅에 비쳤다. 3경에서 5경까지 번개가 쳤다.
10월 9일 을묘
감시(監試)와 회시(會試)를 설행하여 생원(生員) 박필현(朴弼顯)과 진사(進士) 이광의(李匡誼) 등 2백 명을 뽑았다.
서양국(西洋國)의 문신종(問辰鍾)284) 을 관상감(觀象監)에 내려 새로 만들게 하였다. 이것은 진하사(進賀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돌아올 때에 청(淸)나라 임금이 우리 나라에 보낸 것이다. 그 법(法)이 매우 정밀하고 교묘하여 밤이나 낮이나 비올 때나 흐릴 때나 쉽게 시각을 추측할 수 있는데, 관상감에서 모형을 따라 새로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0월 10일 병진
4경에서 5경까지 번개가 쳤다.
10월 11일 정사
심수현(沈壽賢)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지빈(趙趾彬)·박필기(朴弼夔)를 지평(持平)으로, 성덕윤(成德潤)·이정걸(李廷傑)을 정언(正言)으로, 유수(柳綏)를 헌납(獻納)으로, 유명응(兪命凝)·김동필(金東弼)을 승지(承旨)로, 김상규(金尙奎)를 문학(文學)으로, 김중희(金重熙)를 보덕(輔德)으로, 윤성시(尹聖時)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전랑(銓郞)은 당하관(堂下官)의 통색(通塞)을 주관하므로 세상에서 극선(極選)이라고 일컫는데, 사람됨과 문벌이 어떠한지를 묻지 않고 오직 논의(論議)함의 엄격하고 너그러움에 따라 먼저하고 나중에 하였으니, 그 작위(爵位)를 더럽힘이 윤성시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다.
10월 12일 무오
정언(正言) 이진급(李眞伋)이 진소(陳疏)하여 그의 과명(科名)을 지워버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너는 혐의할 바가 없다.’고 비답하였다. 이진급은 복과(復科)된 후에 시골에 물러나 있었는데, 무릇 제수하는 명령이 있었으나 한 번도 명소(命召)에 응하지 않았다.
사서(司書) 박필기(朴弼夔)와 문학(文學) 이거원(李巨源)이 번갈아 상소(上疏)하여 서로 헐뜯었는데, 오랫동안 회보(回報)하지 않다가 비로소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대개 박필기는 스스로 김창집(金昌集)의 지친(至親)이 된다는 이유로 토역(討逆)의 논의를 규피(規避)하였는데, 대관(臺官)이 되자 훈척(勳戚)·대가(大家)들이 대대로 나라의 운명을 잡은 죄를 소론(疏論)하여 스스로 시의(時議)에 빌붙었다. 이거원이 그 심적(心跡)을 배척하였으므로 또 상소하여 변명한 것이다.
총융사(摠戎使) 이삼(李森)이 병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목욕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병부(兵符)285) 를 지닌 채 왕래하라 명하였다.
10월 13일 기미
심중량(沈仲良)을 승지(承旨)로, 송진명(宋眞明)을 헌납(獻納)으로, 강필경(姜必慶)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광도(李廣道)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부제학(副提學) 이사상(李師尙)이 상소하여 생각한 바를 진달하기를,
"일전(日前)에 연중(筵中)에서 갑자기 비상한 엄교(嚴敎)를 내리셨다가 노여움이 바로 풀리시어 뉘우치는 하교(下敎)를 곧바로 내리셨는데, 시행하시는 즈음과 언동(言動) 사이에 이런 조포(粗暴)한 거동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니, 원하건대 뜻을 다해 살피시어 항상 스스로 경계하여 깨달으신다면, 마음이 침착하여 동요되지 않아 다시는 기뻐하고 성냄이 중용(中庸)에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윤취상(尹就商)을 극력 구호하고 이광세(李匡世)를 배척하였는데, 소장(疏狀)이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비로소 답을 내렸다.
행 사직(行司直) 김일경(金一鏡)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여러 신하들과 서로 의논하고 말씀하실 때에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일찍이 분별하지 않고 한결같이 우물쭈물하여 시일만 끄시니, 죄있는 자는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고, 죄없는 자는 변명해 밝힐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 사흉(四凶)의 흉역(凶逆)의 불길같은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땅을 뒤덮어 참으로 뿌리를 단단히 박아 움직이기 어려운 위세(威勢)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하(殿下)께서 경사(卿士)와 계획하지 않으시고 맹렬한 천둥과 휘몰아치는 바람 뒤에 하늘이 맑고 땅이 평온하게 하셨으니,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처럼 강대(剛大)함을 분발하시고 엄확(嚴確)을 밝고 바르게 하시다가, 곧바로 이처럼 쓸쓸하고 적막하게 하시어 바깥 사람들의 가벼운 의논을 불러 일으키시는지요? 요즘 천노(天怒)가 급작스럽고 엄교(嚴敎)가 비상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황송하고 의혹되어 성의(聖意)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스스로 후회하시어 모든 것을 한때의 화증(火症)으로 돌리시자, 대소 신민(臣民)이 놀라서 걱정하고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혹은, ‘우리 임금께 정말 병이 있는가? 이 병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나랏일이 어떻게 될까?’ 하거나 혹은, ‘우리 임금이 거의 40년 동안 이런 빌미[祟]가 없었는데, 지금 이것은 무슨 병인가? 반드시 원인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득 소인(小人)의 마음으로 망령되게 가만히 천심(淺深)을 엿보아 방자하게 굴고 게으름을 피우며 다시는 돌아보고 꺼림이 없으니, 간교한 생각을 품고는 이루고자 하여 꾀하여 기회를 타고 계략을 부리는 자가 또 어찌 불쑥 그 사이에 나오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을 구함(構陷)한 자가 교문(敎文)·사찰(私札)을 이상한 보물이나 얻은듯이 여기니, 구어(句語)를 끄집어내고 사서(私書)를 들추어 내어 사람을 모함하려는 계책으로 삼은 자가 어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의 손에서 나왔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경(卿)은 혐의할 바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임(職任)을 살피라."
하였다. 김일경은 일단 교문의 일이 난 뒤로부터 크게 의심하고 겁을 내어 혹 말이 그 일에 관계되면 문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이것이 장차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하고, 도리어 구함(構陷)하는 죄과(罪科)로 돌렸다. 그 마음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었으나, 단지 이광좌(李光佐) 등 몇 사람이 엄중하게 진압한 데 힘입어 은연중에 움직일 수 없는 형세가 있었으므로, 끝내 감히 그 흉억(凶臆)을 드러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10월 14일 경신
밤 1경(一更)에 한 줄기의 기운이 건방(乾方)에서 일어나 달 옆을 가로 지나서 바로 손방(巽方)을 가리켰는데, 그 길이가 하늘 끝까지 뻗쳤고 너비가 한 자[尺] 정도였다. 빛깔은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는데, 한참 있다가 사라졌다.
청국(淸國)의 정사(正使)로 산질 대신(散秩大臣) 종실(宗室) 증성(曾成)과 부사(副使)로 내각 학사(內閣學士) 악탁배(鄂托拜)가 ‘강희제(康熙帝)의 부묘(祔廟)로 인해 사면(赦免)하는 조서(詔書)와 인수 황태후(仁壽皇太后)의 시호(諡號)를 반포하기 위하여 나온다.’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상문(上聞)하였으므로, 이태좌(李台佐)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수찬(修撰) 이승원(李承源)이 향리(鄕里)에서 올라와 큰 길가의 흉년이 든 상황을 상소로 진달하고, ‘지부(地部)286) 에 명해서 여러 도(道)에 신칙(申飭)하여 재실(災實)을 정밀히 핵실(覈實)하여 분재(分災)287) 를 헤아려 줄 것’을 청하니, 지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고 비답(批答)하였다.
10월 15일 신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칙사(勅使)가 또 오는데 서로(西路)는 시들고 피폐하여 책응(責應)할 수 없으니 구제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듣건대 저들이 으레 종실(宗室)을 소중하게 여겨 우리 나라의 종반(宗班)이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접대함이 다름이 있었다 합니다. 이번의 칙사도 또한 저들 나라의 종실이라고 하니, 도감(都監)에게 명하여 특별히 접대하게 하고, 인접(引接)할 때에도 또한 거짓이나마 넉넉한 예로 대우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청하기를,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을 돈면(敦勉)하여 즉시 조정(朝廷)에 나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리(閭里)가 시녀(侍女)를 선택하는 일 때문에 대단히 소란스럽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일찍이 이런 폐단을 염려하여 단지 내수사(內需司)의 소속만 선택하고 양가(良家)의 자녀는 가리지 말게 하라고 이미 정식(定式)하였습니다. 지금 또한 전례에 의하여 내수사에 신칙(申飭)해서 엄하게 금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대사성(大司成) 이진유(李眞儒)가 서원(書院)을 겹쳐 설립하는 것과 양정(良丁)을 모집해 들이는 폐단을 진달하면서 여러 도(道)에 신칙하여 향교(鄕校)와 서원에서 양정을 모입(募入)한 것을 일체 도태시켜 군액(軍額)으로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16일 임술
밤 3경과 4경에 달무리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김수(金洙)는 일찍이 남병사(南兵使)에 임명되었을 때 역환(逆宦) 장세상(張世相)이 귀양가는 날을 당하여 밤을 이용해 사람을 보내고 영중(營中)으로 맞아 들여서 무릎을 맞댄 채 밀어(密語)를 나누었는데, 장세상은 패도(佩刀)를 풀어 김수에게 주었고, 김수는 또한 그에게 전별(餞別)하는 노자(路資)를 매우 후하게 주었습니다 김수가 평일에 만약 장세상과 교결(交結)한 일이 없었다면 그 친밀한 것이 반드시 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조사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김수의 일만 따랐다.
10월 17일 계해
밤 4경(更)에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3일 간격으로 입시(入侍)하는 정식(定式)이 있었는데, 승지 심중량(沈仲良)이 하교(下敎)를 기다려 입시하되, 반드시 3일 간격으로 하지 않을 것을 정식으로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우의정(右議敎) 이광좌(李光佐)가 승지를 추문(推問)하고 종전대로 거행하되, 때가 되면 곧 시각을 아뢰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승지가 품계(稟啓)하자 임금이 입시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공사는 연달아 흘러 들어오는데, 승지가 날짜를 걸러 입시하는 것이 비록 실효(實效)는 없겠으나, 이로 인하여 신료(臣僚)를 인접하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심중량의 한 마디 말이 임금의 권태(倦怠)를 느끼는 생각을 계도(啓導)하여 끝내 폐각(廢閣)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일종의 아첨하는 작태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옥당(玉堂)을 소대(召對)하게 하였다.
이정제(李廷濟)를 승지(承旨)로, 권익관(權益寬)을 보덕(輔德)으로, 조석명(趙錫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송진명(宋眞明)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박필몽(朴弼夢)을 발탁하여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10월 19일 을축
황해 병사(黃海兵使) 조세망(趙世望)이 장계(狀啓)로 주성(州城) 밖에 호(壕)를 팔 것을 청하였는데, 민사(民舍) 1백 9호를 한꺼번에 모두 철거한다면 반드시 소요를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묘당(廟堂)에서 내년 추수(秋收)를 기다려 백성을 옮긴 뒤 미곡(米穀)을 제급(題給)하고 비로소 호를 파도록 허락하였으나, 뒤에 실행하지 않았다. 성(城)이 있으면 호(壕)가 있어야 적을 수어(守禦)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본래 그 제도가 없었고, 유독 황주(黃州)에만 옛부터 기지(基址)가 있어서 사는 백성들이 메우고 집을 지어 살아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임무를 받은 자가 원망을 초래할까 꺼려 인순(因循)만을 일삼았으니, 이것이 속담에 이른바. ‘고려 공사 삼일(高麗公事三日)288) ’이란 것이다.
10월 20일 병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농사가 흉년이 들고 수재(水災)까지 있어 전답이 복사(覆沙)의 피해를 많이 입었으므로 굶주려 떠돌아 다니는 자가 벌써 많다고 하니, 듣건대 놀랍습니다. 청컨대 제도(諸道)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을 신칙하여 구활(救活)하는 방책을 미리 강구해서 때늦은 폐단이 없게 하소서. 또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니 놀랍고 참혹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적자(赤子)의 전련(顚連)289) 이 이에 이르렀는데, 나라에서 능히 구제하지 못하니, 전하께서 들으시고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부관(部官)이 대수롭지 않게 보고 즉시 거두어 묻지 않고 길거리에 버려 두었으니, 지금부터 돌아다니는 거지로서 벌거벗은 자는 해부(該部)에서 호조(戶曹)에 보고하여 빈 섬[空石]을 넉넉하게 주고, 각 마을[里]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되, 혹 병들어 죽으면 곧바로 깊이 매장하게 하고, 만약 잘 거행하지 않으면, 청컨대 부관(部官)의 죄를 논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진연(進宴)을 자전(慈殿)께 거듭 요청하여 명년 봄을 기다려 설행할 것을 진달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또 말하기를,
"청(淸)나라에서 방물(方物)을 많이 감하였고, 사신(使臣)을 불러보고 특별히 유시(諭示)하고 증여(贈與)한 것이 늘 정해진 격식(格式)의 밖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별사(別使)를 보내어 은혜에 사례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절사(節使)를 보낼 날이 가까이 닥쳐와 형세상 그 전에 미치기 어렵겠으므로, 절사와 겸하게 하도록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별사를 보내지 않은 것은 끝내 흠절(欠節)과 궐전(闕典)에 관계됩니다. 이러한 일의 상황으로 자문(咨文) 하나를 지어 예부(禮部)에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양사(兩司)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조지빈(趙趾彬)이 또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 등의 직첩(職牒)을 돌려주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하여 그 명을 도로 거두고, 전지(傳旨)를 받든 승지(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을 청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宮人)에 대한 아룀을 따를 것을 청하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나아가 다시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심준(沈埈)을 헌납(獻納)으로, 윤순(尹淳)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10월 22일 무진
유필원(柳弼垣)을 집의(執義)로, 박준(朴㻐)을 장령(掌令)으로, 김상규(金尙奎)를 부수찬(副修撰)으로, 강필경(姜必慶)을 필선(弼善)으로 삼고, 권이진(權以鎭)을 승직(陞職)시켜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10월 23일 기사
자문(咨文)을 연경(燕京)에 보내어 난두(欄頭)290) 를 혁파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우리 나라의 사신(使臣)이 돌아올 때 일행 중에서 원역(員役)들이 산 물화(物貨)를 형편에 따라 품삯을 주고 수례를 빌어 더디게 가거나 빠르게 가는 것이 우리 쪽 사정에 달려 있었는데, 기사년291) 무렵부터 요인(遼人) 호가패(胡嘉佩) 등이 난두를 설치할 것을 청하여 품삯의 이익을 독점하였고, 해마다 액수(額數)를 덜고 세은(稅銀) 2천 냥(兩)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가고 머물고 지체하고 빨리 가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였고, 걸핏하면 여러 달을 체류했기 때문에 노자(路資)를 낭비하고 구갈(裘褐)292) 이 시기를 어겨 물화가 못쓰게 되어 교역(交易)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혹은 포자(包子)293) 를 뚫고 물화를 훔쳐 허다하게 침해한 것이 해마다 점점 더하여 인중(人衆)이 뒤섞이고, 또 몰래 서로 사고 파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 금단(禁斷)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청주(淸主)가 호부 시랑(戶部侍郞) 오이태(吳爾泰)·형부 시랑(刑部侍郞) 마이제(馬爾齊)·급사중(給事中) 무원(繆沅) 등으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역관(譯官) 한영희(韓永禧)·유재창(劉再昌)·김택(金澤)·김경문(金慶門) 네 사람을 보내 호가패·동명형(蕫名珩)·이현룡(李顯龍) 등과 함께 봉황성(鳳凰城)에서 분변하여 밝히니, 과연 자문(咨文)의 말과 같았으므로, 마침내 호가패 등의 직임(職任)을 혁파하고, 석 달동안 목에 칼을 씌워 각각 채찍 1백 대를 때렸으며, 봉황성의 성수위(城守尉)가 우리 나라의 사무를 전담하여 처리하면서도 아울러 엄중히 조사해 게보(揭報)하지 않았다 하여 전임 수위 오이도(吳爾都)에게서 이급(二級)을 박탈했다. 사신이 갈 때 무역하는 포자는 종전처럼 편리한 대로 품삯을 주고 싣게 하고, 그 진공(進貢)하는 포자는 그대로 역참(驛站)의 수레를 움직여 끌어 운반하게 하니, 난두(欄頭)의 폐단이 이로부터 비로소 혁파되었다. 당초 설치했던 것이 강희(康熙)의 뜻에서 나왔으므로 난두들이 황제의 내탕(內帑)에 세금을 바치고 궁액(宮掖)들과 결탁했던 것인데, 일단 그 이득(利得)을 잃자, 분노와 원한이 크게 일어나 헐뜯는 소리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다 하였다.
10월 25일 신미
밤 5경(更)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가고 안개가 끼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금년의 농사는 풍년이 아닌데, 사신(使臣)의 행차가 계속되므로, 자전(慈殿)께서 각도(各道)의 진상(進上)을 전례에 따라 판하(判下)하시며 중궁전(中宮殿)의 예로 시행할 것을 하교하시었다. 어쩔 수 없이 봉행(奉行)해야 할 것이니, 이것을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임신
먼동 틀 무렵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었다.
10월 27일 계유
밤 1경(更)에 검은 구름과 같은 한 줄기의 기운이 동쪽에서 일어나 곧바로 서쪽을 가리켰다. 길이는 하늘 끝까지 뻗쳤고 너비는 한 자 정도였는데, 한참 후에 사라졌다. 5경에 번개가 쳤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한세량(韓世良)이 졸(卒)하였다. 한세량은 자애하고 진실하며 즐겁고 편안한 성품이었다. 젊을 때부터 과장(科場)에서 명성이 있었으나 늦게 대과(大科)에 올랐고, 명론(名論)이 본래 가벼워서 관위(官位)가 엄체(淹滯)되었다. 신축년294) 에 당인(黨人)들이 흉의(凶意)를 드러내자, 홀로 항소(抗疏)하여 곧게 배척하였는데, 위태하고 두려운 말이 많아 화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개기(改紀)한 초기에 제일 먼저 발탁되어 감사(監司)에 제수되었다가 도헌(都憲)으로 옮겼으나, 채 조정(朝廷)에 돌아오지 못하고 감영(監營)에서 죽으니, 나이가 일흔 하나였다. 사람들이 자못 등용(登用)이 대단히 문란하다고 비난하였다.
10월 28일 갑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문외 출송(門外黜送)한 죄인 한중희(韓重熙)는 여러 흉적(凶賊)들이 천위(天位)를 동요시키던 날 천찰(天札)을 특별히 밖에 있는 대신(大臣)에 내려 애통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와서 돕기를 간절히 바라시자, 그때 승지(承旨)로서 담당하여 저지하게 하였는데, 그 방해하는 계책은 실로 흉도(凶圖)의 긴요한 개괄(槪括)이 됩니다. 청컨대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소서. 지난번 삼수(三手)의 역모(逆謀)는 은화(銀貨)와 전재(錢財)에 의지하였는데, 안귀서(安龜瑞)는 선갑도(先甲島)에서 사주(私鑄)한 상황을 미처 깊이 조사하지 않은 나머지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앞질러 자살(自殺)하였습니다. 그때 사주(私鑄)를 함께 모의한 자는 안귀서의 생질(甥姪) 김만영(金萬英)이니, 청컨대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장신(杖訊)을 더하여 사주한 근본 원인을 명확하게 조사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0월 29일 을해
사시(巳時)부터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윤순(尹淳)을 응교(應敎)로, 송진명(宋眞明)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승원(李承源)을 교리(校理)로, 윤서교(尹恕敎)를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박태보(朴泰輔)에게 문렬(文烈)이란 시호(諡號)를, 좌의정(左議政) 윤증(尹拯)에게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렸다.
10월 30일 병자
진시(辰時)부터 오시(午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단지 김만영(金萬英)의 일만 따랐다.
동지 상사(冬至上使)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부사(副使) 이명언(李明彦)·서장관(書狀官) 김시혁(金始㷜)이 사폐(辭陛)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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