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정축
진시(辰時)부터 오시(午時)까지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11월 2일 무인
이봉상(李鳳祥)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이진순(李眞淳)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부여 현감(扶餘縣監) 이만근(李萬根)이 고을 사람이 새로 얻은 경보(京報)295) 에 이집(李楫)의 상소에 비답(批答)이 있는 것을 보고 한 말과 지적한 뜻이 몹시 비상(非常)하였습니다. 아! 군부(君父)의 비지(批旨)가 얼마나 중대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에 감히 터무니없이 거짓말로 속이고 은밀히 서로 주어 듣는 이를 현혹시키고 인심을 공동(恐動)시켰으니, 요악(妖惡)하고 음흉한 무리를 왕법(王法)으로 쾌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만근을 나문(拿問)하여 내력을 찾아 내어 조사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단지 말단(末端)의 일만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와 관반(館伴) 조태억(趙泰億)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해 즉시 사은사(謝恩使)를 보낼 수 없다는 뜻으로 또 칙사(勅使)에게 게첩(揭帖)해 돌아가 고하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정전(正殿)에 별연(別宴)을 베풀어 정성을 다해 접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이광좌가 이어 말하기를,
"자전(慈殿)께서 8도(八道)의 방물(方物)을 재량하여 경감하라고 명(命)하셨으니, 이는 국가를 위한 계획한 백성의 고통을 진념하신 성덕(盛德)에서 나왔으나, 전하(殿下)께서 일국(一國)으로 봉양(奉養)하시는 정성을 조금도 펴실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다시 조용히 진품(陳稟)하여 상례(常例)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1월 3일 기묘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청하기를,
"소유(疏儒) 윤현(尹俔)·정만원(鄭萬源)을 ‘유종(儒宗)을 무욕(誣辱)하고 선정(先正)을 오멸(汚蔑)한 죄’로 아울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5일 신사
4경(四更)에 화성(火星)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정재춘(鄭再春)을 전적(典籍)에 단부(單付)296) 하고, 박수회(朴受繪)를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에 단부하니, 식년(式年) 문무과(文武科)에 첫째 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11월 6일 임오
청사(淸使)가 입성(入城)하였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교영(郊迎)하고 환궁(還宮)하여 청사를 접견하였는데, 왕세제가 어가(御駕)를 수행하였다.
11월 7일 계미
청(淸)나라의 조서(詔書) 때문에 죄인의 사면(赦免)을 널리 반포하고 백관(百官)에게 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유필원(柳弼垣)을 교리(校理)로, 이진수(李眞洙)를 설서(說書)로 삼고, 이의만(李宜晩)을 발탁하여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11월 8일 갑신
임금이 관소(館所)에 임하여 칙사(勅使)를 보았다.
김일경(金一鏡)을 발탁하여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김동필(金東弼)이 소론(疏論)한 이후로 교문(敎文) 문자(文字)의 뜻이 헤아리기 어려움을 세상에서 다 알았으나, 즉시 그 죄를 성토(聲討)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에 도리어 특별히 사랑하여 관직을 줌이 이와 같았다. 비록 그 내달리는 기세(氣勢)는 누구도 감히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만약 이성중(李誠中)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비교한다면 마땅히 부끄러워 죽을 겨를이 없을 것이다.
11월 9일 을유
홍정필(洪廷弼)을 집의(執義)로,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권이진(權以鎭)을 부사(副使)로, 윤순(尹淳)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단지 윤현(尹俔) 등의 일만 따랐다.
11월 12일 무자
청사(淸使)가 도성(都城)을 출발하였는데, 왕세제(王世弟)가 교외(郊外)에서 전송(餞送)하였다. 두 칙사(勅使)가 입경(入境)한 후로 뜻을 다해 폐단을 없앴으며, 또한 규정 밖의 물건을 찾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대신(大臣)을 보내어 정전(正殿)에서 별연(別宴)을 베풀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고 닷새동안 머물다가 즉시 돌아갔다.
11월 13일 기축
진시(辰時)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사시(巳時)부터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고, 밤 1경·2경에 달무리하였다.
윤연(尹㝚)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응교(副應敎)로, 이현장(李顯章)을 수찬(修撰)으로, 김일경(金一鏡)을 지돈녕(知敦寧)으로 삼았다.
11월 14일 경인
미시(未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는 배(背)가 있었으며, 색깔은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1경에서 3경까지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11월 15일 신묘
밤 1경에서 2경까지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숙종(肅宗)의 어필(御筆) 간행(刊行)이 이루어졌으므로, 구관 당상(句管堂上) 익양군(益陽君) 이단(李檀) 등에게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11월 17일 계사
이진망(李眞望)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윤유(尹游)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송택상(宋宅相)을 장령(掌令)으로, 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조세망(趙世望)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초복(初覆)297) 을 행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죄수의 죄범(罪犯)을 여러 신하들에게 차례로 물은 뒤에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으니, 전례가 이와 같은 것이다. 대사간(大司諫) 윤연(尹㝚)과 지평(持平) 조지빈(趙趾彬)이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윤연은 이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핵(論劾)하기를,
"대흥 군수(大興郡守) 심수준(沈壽浚)·태안 군수(泰安郡守) 허기(許夔)·용인 현령(龍仁縣令) 유호징(柳虎徵)·간성 군수(杆城郡守) 강성복(姜聖復)은 합하여 장청(狀請)하지 않았으니,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지빈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전(前) 감사(監司) 홍우전(洪禹傳)은 성상(聖上)께서 대리(代理)하시던 날 삼사(三司)의 상소·차자(箚子) 및 병조(兵曹)의 공사(公事)를 동궁(東宮)에 들이라는 명으로 인해 감히 한 소(疏)를 올려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힘껏 청하면서, ‘놀랍고도 의혹스러우며 근심스럽고 한탄스럽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돌아보고 꺼림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러했겠습니까?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라 명하소서. 본부(本府)에서 감찰(監察)의 월령(月令)을 복구(復舊)하는 일로 두 대관(臺官)이 계목(啓目)에 연명(聯名)하였으니, 후사(喉司)의 신하가 끝내 봉입(捧入)을 허락 하지 않은 것은 옛 규례(規例)에도 없던 일입니다. 제 마음대로 저지하는 것은 뒷 폐단에 크게 관계되니,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채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11월 18일 갑오
강현(姜鋧)을 판의금(判義禁)으로, 강필경(姜必慶)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권세항(權世恒)을 승지(承旨)로, 이조(李肇)를 세제 좌빈객(世弟左賓客)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11월 19일 을미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훈국(訓局)에서 민전(民田)을 모아 들인 것은 대가(代價)를 주고 토지를 사는 것과 구별이 있는데, 근래 그 세금을 더 징수하므로 그대로 묵고 버려진 것이 많습니다. 청컨대 각 아문(衙門)에서 모아 들인 둔전(屯田)은 남징(濫徵)하지 못하게 하여 그 폐단을 덜게 하소서. 나주(羅州)·광주(光州)·능주(綾州)·장흥(長興)·남평(南平)·화순(和順) 등 여섯 고을의 장인(匠人)의 포(布)를 1필(匹)씩 더 거두었으므로 일찍이 비국(備局)에서 조사를 하여 정식(定式)하였었는데, 조정만(趙正萬)이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을 때 전과 같이 남봉(濫捧)298) 하여 유산(流散)하는 백성이 많았습니다. 청컨대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6읍(邑)을 엄중히 신칙하여 정식에 의해 시행하게 하되, 만일 법을 범한 수령(守令)이 있다면 일체로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단지 새로 아뢴 것만 따랐다.
11월 20일 병신
4경(更)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11월 21일 정유
김동필(金東弼)·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유필원(柳弼垣)을 부응교(副應敎)로, 윤성시(尹聖時)를 부교리(副校理)로, 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유수(柳綏)를 필선(弼善)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금부 당상(禁府堂上) 강현(姜鋧)과 이진유(李眞儒) 등이 청대(請對)하여 어비(御批)를 위조한 죄인 황하신(黃夏臣)·황상질(黃尙質)을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訊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청하기를,
"의관(醫官) 이시필(李時弼)도 일체 설국(設鞫)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허락하였다. 이만근(李萬根)의 공사(供辭)에 ‘조용석(趙龍錫)에게서 얻어 보았다.’ 하였으므로 조용석에게 물었더니, 황상질을 끌어대었고, 황상질은 또 그 숙부(叔父)인 황하신에게서 나왔다고 하였다. 의금부에서 황하신을 잡아들일 것을 청하고, 이어 설국(設鞫)할 것을 청하였는데, 황하신을 채 핵실(覈實)하지도 않고 앞질러 이런 청을 한 것은 옥체(獄體)에 어긋남이 있으니, 대개 그 일을 확대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상신(相臣) 역시 그 실수를 알고서도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다른 일이야 논해 무엇하겠는가? 이진유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황이장(黃爾章)은 본도(本道)에 거듭 흉년이 들었다면서 장수(長水)에 정배(定配)된 사람인 민창도(閔昌道)를 다른 도(道)에 이배(移配)할 것을 장청(狀請)하였습니다. 하지만 도내(道內)에 찬배(竄配)된 자가 단지 민창도 한 사람뿐이 아니니, 한 사람을 장청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아주 잃는 일입니다. 청컨대 감사(監司)를 추고(推考)하고, 호남(湖南)의 고을에 겹쳐 유배(流配)된 자와 멀고 가까운 것이 고르지 못한 자를 여러 도(道)에 나누어 유배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드디어 전라도(全羅道)에 찬적(竄謫)된 사람인 이희조(李喜朝) 등 12인을 여러 도에 이배(移配)했는데, 이희조는 영암(靈巖)에서 철산(鐵山)으로, 어유룡(魚有龍)은 영암에서 사천(泗川)으로, 김여(金礪)는 영암에서 하동(河東)으로, 이중협(李重協)은 해남(海南)에서 경원(慶源)으로, 박사익(朴師益)은 태인(泰仁)에서 청하(淸河)로, 조도빈(趙道彬)은 옥구(沃溝)에서 안음(安陰)으로, 이병상(李秉常)은 부안(扶安)에서 함양(咸陽)으로, 권응(權譍)은 부안에서 개령(開寧)으로, 이익명(李益命)은 광주(光州)에서 길주(吉州)로, 민창도는 장수에서 문경(聞慶)으로, 황선(黃璿)은 무장(茂長)에서 양덕(陽德)으로, 신무일(愼無逸)은 김제(金堤)에서 영원(寧遠)으로 각각 옮겼다. 이진유가 본도의 장청(狀請)을 빙자하여 아울러 여러 적소(謫所)를 옮겼는데, ‘적객(謫客)이 한 도(道)에 모두 모여 있으면 인심을 혹란(惑亂)시키고 쉽게 화변(禍變)이 생기게 한다.’고 하면서 이런 대단히 심한 이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때 여러 사람이 유배(流配)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북으로 분주하게 귀양을 갔는데, 그 중에서 이희조는 늙고 병들어 미처 배소(配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길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희조는 유일(遺逸)로 직질(職秩)이 아경(亞卿)에까지 올랐고 일찍이 예우(禮遇)를 받았다. 아무리 그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 세상에 넘친다 하더라도 당화(黨禍)가 산림(山林)에까지 미쳐 원한이 날로 깊어지니, 그 실패를 서서 기다릴 수 있겠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명(命)에 응하여 조정(朝廷)으로 돌아와 병으로 사직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임금이 온후한 비답(批答)을 내려 조리(調理)하게 하였다.
11월 22일 무술
밤 4경(四更)에 달무리하였다.
11월 23일 기해
삼복(三覆)299) 을 행하였다. 승지(承旨)가 죄안(罪案)을 읽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리기를,
"내관(內官) 최홍(崔泓)은 사람됨이 흉패(凶悖)하고 마음씀이 무상(無狀)하니, 나국(拿鞫)하여 엄중히 문초(問招)하라."
하고, 또 행동 거지(行動擧止)가 거만(倨慢)하다며 여양군(驪陽君) 이기(李圻)와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망(李眞望)을 파직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을 삭출(削黜)하라 명하였다. 이어서 좌부승지(左副承旨) 김동필(金東弼)을 파직하라 하고, 조금 있다가 또 우승지(右承旨) 이정제(李廷濟)의 관직을 삭탈하라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승지(承旨)와 여러 사(司)가 인원을 갖추지 못하니, 다른 날로 물려 기다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들이라고 명하였다. 이어 죄수의 죄안(罪案)을 아뢰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은 뒤에 사수(死囚) 네 사람을 모두 율(律)에 의해 처리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이어 아뢰기를,
"남도(南道)의 산읍(山邑)은 수재(水災)가 더욱 심한데 적곡(糴穀)300) 을 독촉하기 때문에 유산(流散)하는 백성이 많습니다. 청컨대 삼남(三南)의 수재를 입은 곳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세밀히 추려내어 적곡을 징수하지 말게 하고,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은 뒤 속속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납(獻納) 심준(沈埈)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정도원(鄭道元)은 성묘(聖廟)의 늙은 잣나무를 제멋대로 찍어 칙사(勅使)의 호상(胡床)을 만들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11월 24일 경자
유필원(柳弼垣)을 사간(司諫)으로, 신치운(申致雲)을 지평(持平)으로, 이현장(李顯章)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1월 25일 신축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임하여 동지(冬至)의 하례(賀禮)를 받으니, 왕세제(王世弟)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가 다시 사소(辭疏)를 올리고, 또 금위 도제조(禁衞都提調)의 직(職)을 해면(解免)해 줄 것을 청하니, 오랫동안 답하지 않다가 비로소 온후한 비답을 내려 군문 도제조(軍門都提調)의 체차(遞差)를 허락하였다.
11월 26일 임인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집의(執義) 홍정필(洪廷弼)이 지평(持平) 조지빈(趙趾彬)을 처치(處置)하면서 낙과(落科)에 두어 공의(公議)에 어긋남이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고, 또 외람되게 제수(除授)되었다 하여 감찰(監察) 박인(朴璘)과 직강(直講) 이귀정(李龜禎)을 태거(汰去)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왕세제(王世弟)가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곤전(坤殿)께 올린 후에 승전 내관(承傳內官)이 두세 번 재촉하고서야 비로소 느릿느릿 나와 바라보는 이를 놀라게 하였으니, 그 직임을 파하소서."
하니, 임금이 새로 아뢴 것을 따랐다. 이에 앞서 조지빈이 권중경(權重經)을 논핵(論劾)하자 권중경이 상소하여 변명하였는데, 사리에 어긋난 말이 많았으므로 조지빈이 인피(引避)하였다. 홍정필은 권중경의 당여(黨與)로 조지빈을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였고, 대신(臺臣)이 또 아뢰어 홍정필을 파직하자, 교리(校理) 이승원(李承源)이 힘을 내어 상소해 홍정필을 상소로 구하였다. 심하도다! 당습(黨習)의 해독(害毒)이여.
11월 27일 계묘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신치운(申致雲)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제까지 흉역(凶逆)이 대대로 나라의 권력을 잡고 형벌과 복록(福祿)을 제멋대로 할 때에 일종(一種)의 음사(陰邪)하고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유림(儒林)의 이름을 빌어 조정(朝廷)의 권한을 잡기를 꾀하여 정신을 전하고 법을 옹호하면서 번갈아 서로 조술(祖述)301) 하였으니, 권상하(權尙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 같은 무리가 그 번성한 무리입니다. 권상하의 경우 본래 한결같이 용렬하고 비루하며 흐릿하여 도무지 취할 것이 없는데, 단지 거활(巨猾)302) 에 기대어 거짓 명성(名聲)을 주워 모았던 까닭에 조정에 있는 여러 흉역들이 같은 소리로 어질다 칭송하였습니다. 거기다 간사한 이희조와 참독(慘毒)한 정호가 흉덕(凶德)으로 참여해 모여 모두 이 세상의 재앙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음험하게도 도리에 어긋난 논의를 가지고 흉악한 위세를 드러내 놓고 도와 마침내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고 이륜(彝倫)이 깡그리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에 악역(惡逆)이 행해지자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던 것이니, 그 세상을 속이고 나라에 화란(禍亂)을 끼친 화(禍)는 홍수(洪水)와 맹수(猛獸)보다 사나왔습니다. 정호와 이희조에게는 이미 먼 지방으로 추방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였으나, 권상하의 관질(官秩)은 그전대로 있어 사림(士林)이 함께 분개하고 공의(公議)가 갈수록 격렬해지니, 그 사람이 이미 죽었다 하여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고(故) 상신(相臣) 권상하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소서.
비지(批旨)를 위조한 것이 어떠한 요악(妖惡)입니까? 그런데도 부여 현감(扶餘縣監)이 이미 밀보(密報)하였음에도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혜교(尹惠敎)는 범연(泛然)히 제송(題送)303) 하되, 다만 기포(譏捕)하는 뜻으로 관문(關文)304) 을 추조(秋曹)305) 에 보냈으니, 사체(事體)에 있어서 규경(規警)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신축년306) 역변(逆變)에 삼수(三手)를 배치하였는데, 그 중에서 행약(行藥)이란 한 가지 부분은 지극히 흉악하고 또 참혹합니다. 이른바 ‘김성(金姓) 궁인(宮人)’이 이미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니, 그 위태롭고 두려운 것이 호랑이를 껴안고 뱀을 베고 자는 것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자는 마땅히 소리를 같이하고 말을 합하여 진상을 기어코 알아내도록 해야 할 것인데, 2년 동안 질질 끌어 오직 못쓰게 된 종이만 전하며 복합(伏閤)의 주청과 정쟁(廷爭)하는 일이 지금까지도 고요합니다. 청컨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윤혜교의 파직과 삼사(三司)를 추고(推考)하는 일만 따랐다. 대저 상신(相臣)의 추탈을 독계(獨啓)하는 것은 이미 대관(臺官)의 체모를 잃었으며, 악역(惡逆)의 죄를 권상하에게 돌리는 것이 그 의리를 이를 수 있겠는가? 당의(黨議)가 갈수록 더욱 격렬해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다만 신치운 한 사람의 실수일 뿐이겠는가? 더구나 신치운에게는 더욱 혐의를 무릅썼다는 비난이 있었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그르게 여겼다.
대사간(大司諫) 윤연(尹㝚)이 상소하여 양서(兩西)와 관동(關東)·관북(關北)에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 염탐(廉探)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유의하겠다고 답하였다.
11월 28일 갑진
이정신(李正臣)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제(李濟)를 집의(執義)로, 권익관(權益寬)을 부응교(副應敎)로, 조익명(趙翼命)·김상규(金尙奎)를 수찬(修撰)으로, 이진순(李眞淳)을 보덕(輔德)으로, 장한상(張漢相)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이때에 삼사(三司)에서 모두 신치운(申致雲)이 논계(論啓)하여 추고(推考)를 청하였다 하여 모두 인구(引咎)하고 상소하여 인피(引避)한 것이 어지러웠는데, 유독 사간(司諫) 유필원(柳弼垣)은 대각(臺閣)에 나아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여러 대관(臺官)을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여 삼사(三司)와 같이 복합(伏閤)하여 간쟁하려 하니, 대사간(大司諫) 윤연(尹㝚)이 상소하여 무릅쓰고 출사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유필원이 또 삼사(三司)에서 다만 인피하기만 일삼고 토적(討賊)의 의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아뢰어 배척하니, 윤연도 또한 유필원이 혐의를 무릅쓰고 처치(處置)한 것을 비난하였다. 장령(掌令) 윤빈(尹彬)이 여러 대신(臺臣)을 체차(遞差)하고 신치운을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행약(行藥)한 궁비(宮婢)에 있어서는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즉시 조사해 내어 정법(正法)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데, 혹은 윤허하고 혹은 윤허를 아끼어 어느덧 두 해가 지나갔다. 궁금(宮禁)의 일은 외인(外人)이 알 수가 없는데, 근거없이 떠드는 것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나, 조신(朝臣)은 능히 성의를 힘써 쌓아서 실상(實狀)을 조사할 것을 청하지 않다가, 한 사람 신치운의 선창(先唱)으로 인해 삼사(三司)가 복합하고 경재(卿宰)가 정청(庭請)하여 마침내 끝마무리없이 그쳤으므로, 식견(識見) 있는 자는 다 조정의 거조(擧措)를 애석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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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종실록13권, 경종 3년 1723년 12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3권, 경종 3년 1723년 10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3권, 경종 3년 1723년 9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3권, 경종 3년 1723년 8월 (0) | 2025.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