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3권, 경종 3년 1723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2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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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병오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파직하고 윤행교(尹行敎)로 대신하였다. 이때 연안(延安)에 수령(守令)을 자주 바꾸어 고을이 더욱 피폐(疲弊)해졌으므로,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전조(銓曹)로 하여금 음리(蔭吏)307)  를 가려서 보내게 했는데, 이진망(李眞望)이 따르지 않으니, 이광좌가 아뢰어 파직(罷職)시킨 것이다.

 

임금이 또 연좌(連坐)된 종신(宗臣)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 등의 직첩(職牒)을 도로 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작환(繳還)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2일 정미

밤 1경(更)에 유성(流星)이 하늘 한복판의 엷은 구름 사이로 나와서 북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두세 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고 광채가 땅에 비쳤다.

 

임금이 또 도인승기탕(桃人承氣湯)을 복용했다.

 

이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자리가 비어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대신할 사람을 차정(差定)하고 명하였다. 대신이 ‘개정(開政)을 기다려서 차출(差出)하는 것이 전례이나 참의(參議) 윤행교(尹行敎)가 밖에 있다.’고 말하고 먼저 변통하기를 청하므로, 윤행교를 체직(遞職)하고 심공(沈珙)을 대신할 사람으로 했는데, 심공 또한 밖에 있어 또 체직하여 윤행교가 다시 낙점(落點)을 받았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부득이 차자(箚子)로 참판(參判) 정제두(鄭濟斗)를 체직하고 그 대신을 차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때마침 개정(開政)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3일 무신

결안(結案)한 죄인 이시필(李時弼)을 감사(減死)하여 정선현(旌善縣)에 정배(定配)하였다. 이시필은 내의원(內醫院)의 의관(醫官)이다. 늙은데다가 귀까지 먹었는데, 술을 마신 뒤에 여러 의관을 대하여 비방하고 욕하는 말이 많았다. 여러 의관들이 잡아다 승여(乘輿)308)  를 지척(指斥)했다 하면서 조신(朝紳)들 사이에 전파하니, 대관(臺官) 이보욱(李普昱)이 발계(發啓)하여 핵실(覈實)하기를 청하였다. 이시필의 침의(鍼醫) 이득영(李得英) 등을 끌어대었는데, 이득영 등이 처음에는 우물쭈물했지만 끝에 가서 증거가 성립되었으므로, 마침내 국청(鞫廳)으로 옮겨 신문(訊問)하였더니 두 차례에 드디어 자복(自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판의금(判義禁) 강현(姜鋧) 등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그가 비록 승복(承服)은 했지만, 그 정상(情狀)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으니, 혹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거나 혹은 길이 유배시켜 사면하지 않는다면 성덕(聖德)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적산(籍産)309)  을 또한 작처(酌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시필이 당한 바는 비록 망령되고 패려(悖戾)하다 말할 수 있으나, 대신(大臣)의 연주(筵奏)가 지극히 마땅하니 감사하여 정배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신치운(申致雲)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권상하(權尙夏)에 대한 계사를 고쳐서 말하기를,
"역적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날을 당하여 신인(神人)이 깜짝 놀랐고 중외(中外)가 물끓듯 하였는데, 권상하는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고묘(告廟)해야 한다는 명이 있어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함에 미쳐서는 김창집(金昌集)은 저지해 막고 권상하는 의논을 수합하지 아니하여 안팎에서 화응(和應)하였으니, 정적(情跡)이 절통(絶痛)합니다. 오직 저 무군(無君) 부도(不道)의 심사는 그가 전수(傳授)한 차례인데, 이는 이희조(李喜朝)가 헌장(憲長)에 있으면서 군부(君父)의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정호(鄭澔)가 흉소(凶疏)를 올려 난적(亂賊)의 죄를 드러나게 쟁송(爭訟)한 것과 더불어 저절로 한 꿰미에 꿰어낸듯 일찍이 다름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관작을 추탈(追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大司諫)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위가 삼공(三公)을 거쳤으면 생사(生死)를 막론하고 반드시 합계(合啓)를 기다려야 하는데, 독계(獨啓)로 논죄(論罪)하였으므로 크게 상례(常例)에 어긋났고,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신치운(申致雲)이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지난번 흉역(凶逆)한 무리의 무군(無君)·무부(無父)의 의논이 세상에 횡행하자, 마침내 의리(義理)가 캄캄하게 막히고 인륜(人倫)이 무너지는 데 이르러 거실(巨室)과 세족(世族)이 문을 닫고 역모(逆謀)를 꾸몄습니다. 만약 그 근본을 캐보면 모두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도둑질한 부류가 문예(文藝)만 외면서 그 간사함을 꾸미는 데에 말미암았던 것이니, 사악한 말과 치우친 말은 적신(賊臣)을 계도(啓導)하는 효시(嚆矢)310)  가 되었고, 흉악하고 패려(悖戾)한 언론(言論)은 역당(逆黨)의 전모(前茅)311)  가 되었습니다. 양관(兩觀)312)  의 주벌(誅伐)로 혁연(赫然)히 올바름을 밝혀야 하나,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의 여얼(餘孼)이 아직도 권상하를 의지하여 연수(淵藪)로 삼으므로, 신(臣)이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제일 먼저 논계(論啓)하여 그의 세상을 속이고 나라에 화(禍)를 끼친 죄를 바로잡으려 하였더니, 간장(諫長)의 상소가 갑자기 튀어나와 공공연하게 흠을 들추어 냈습니다. 시험삼아 근래의 일로 말한다면 목내선(睦來善)의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한 뒤에 도로 거두어 들일 것을 독계(獨啓)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곧 이 한 가지 일로 전례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신(諫臣)이 억지로 별다른 의견을 내어 쓸데없는 말로 깊이 배척하였으니, 뜻한 바가 어디에 있는지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정제 또한 인피하여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격식(格式)과 관례는 대단히 엄중하여 한 번 대각의 체모를 잃으면 나중의 폐단이 염려스럽습니다. 목내선의 경우 본래 방귀 전리(放歸田里)한 죄인으로 죽은 뒤 양사(兩司)에서 그의 직첩을 환급(還給)하는 것을 다투었으니, 몸이 상신(相臣)의 지위에 있던 자와는 조례(條例)를 같이하여 논할 수가 없습니다. 끌어다 비유한 것이 가히 너무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만합니다."
하였다. 장령(掌令) 윤빈(尹彬)이 처치(處置)하여 두 사람 다 출사(出仕)시키니 공의(公議)가 떠들썩하게 비난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권상하(權尙夏)는 젊었을 때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성취가 없었다. 비록 사람됨이 평온(平穩)하여 자못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나 학문과 식견은 보통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었으니, 또한 세상을 속이고 나라에 화(禍)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신치운(申致雲)은 ‘문예(文藝)만 외어 간사함을 꾸몄다.’는 등의 말로 지목하니, 그가 권상하를 알지 못함이 심하다 하겠다. 더구나 악역(惡逆)이 얼마나 큰 죄이며 추탈(追奪)이 얼마나 무거운 형률인가? 가령 권상하가 신축년313)   후까지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나라를 원수같이 여기고 군주(君主)를 배반한 죄가 이미 밖에 나타난 것이 없었으면 용이하게 더하는 것이 부당한데, 더구나 신축년 이전에 죽은 자를 어찌 역당(逆黨)으로 같이 돌릴 수 있겠는가?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뒤 잠잠하게 한 마디도 말이 없었으니, 먼 훗날 진실로 산인(山人)이 조호(調護)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겠으나, 처음부터 일찍이 상신(相臣)의 직임(職任)에 자처(自處)하지 않았으니, 고묘(告廟)의 의논에 답하지 않은 것이 또한 떳떳하였다. 연소한 한 대신(臺臣)이 이미 죽은 대신(大臣)에게 악역(惡逆)의 이름을 억지로 씌워 곧바로 추탈(追奪)하는 형전(刑典)을 청하였는데, 한 사람도 그의 그릇되고 망령됨을 배척함이 없고, 마음속으로 그의 그름을 알면서도 입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당론(黨論)의 해독(害毒)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는가?"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05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편사(編史)


[註 310] 효시(嚆矢) : 일의 맨 처음 시작.[註 311] 전모(前茅) : 척후(斥候) 또는 앞잡이를 뜻함. 춘추 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의 전군(前軍)에서 사용한 기(旗)로서 적(敵)을 발견하면 이것을 높이 들어 후군(後軍)에게 알렸던 데서 유래함.[註 312] 양관(兩觀) :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의 사구(司寇)가 된지 7일 만에 다섯 가지 큰 악(惡)을 경유한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양관 아래에서 죽였다. 양관은 왕궁의 중문 위에 있는 두 누(樓).《공자가어(孔子家語)》 시질(始詄). ☞[註 313]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사신은 말한다. "권상하(權尙夏)는 젊었을 때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성취가 없었다. 비록 사람됨이 평온(平穩)하여 자못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나 학문과 식견은 보통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었으니, 또한 세상을 속이고 나라에 화(禍)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신치운(申致雲)은 ‘문예(文藝)만 외어 간사함을 꾸몄다.’는 등의 말로 지목하니, 그가 권상하를 알지 못함이 심하다 하겠다. 더구나 악역(惡逆)이 얼마나 큰 죄이며 추탈(追奪)이 얼마나 무거운 형률인가? 가령 권상하가 신축년313)   후까지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나라를 원수같이 여기고 군주(君主)를 배반한 죄가 이미 밖에 나타난 것이 없었으면 용이하게 더하는 것이 부당한데, 더구나 신축년 이전에 죽은 자를 어찌 역당(逆黨)으로 같이 돌릴 수 있겠는가?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뒤 잠잠하게 한 마디도 말이 없었으니, 먼 훗날 진실로 산인(山人)이 조호(調護)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겠으나, 처음부터 일찍이 상신(相臣)의 직임(職任)에 자처(自處)하지 않았으니, 고묘(告廟)의 의논에 답하지 않은 것이 또한 떳떳하였다. 연소한 한 대신(臺臣)이 이미 죽은 대신(大臣)에게 악역(惡逆)의 이름을 억지로 씌워 곧바로 추탈(追奪)하는 형전(刑典)을 청하였는데, 한 사람도 그의 그릇되고 망령됨을 배척함이 없고, 마음속으로 그의 그름을 알면서도 입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당론(黨論)의 해독(害毒)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는가?"

 

12월 4일 기유

밤 4경(更)에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자쯤 되었으며, 색깔은 붉고 광채가 땅에 비쳤다.

 

심수현(沈壽賢)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2월 5일 경술

진향사(進香使) 오명준(吳命峻) 등이 복명(復命)하였다.

 

12월 6일 신해

반궁(泮宮)314)  에 황감(黃柑)을 하사(下賜)하고 잇따라 시사(試士)하여 이유신(李裕身) 등 여섯 사람을 뽑았는데, 수석(首席)을 차지한 자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리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분수(分數)를 주라고 명하였다.

 

유봉휘(柳鳳輝)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연(金演)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김일경(金一鏡)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심중량(沈仲良)을 승지(承旨)로, 이진유(李眞儒)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권두경(權斗經)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빈(尹彬)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권익관(權益寬)을 발탁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으니, 대신(大臣)의 건백(建白)으로 의망(擬望)에서 채택한 것이었다.

 

12월 7일 임자

밤 1경(更)과 2경에 달무리하였다.

 

12월 8일 계축

전(前) 현감(縣監) 황하신(黃夏臣)이 옥(獄)에서 죽었다. 이에 앞서 어떤 사람이 어비(御批) 한 본(本)을 가짜로 만들어서 호서(湖西) 지방에 전파한 일이 있었는데, 대개 그 말한 내용에 ‘임금이 마음속으로 국옥(鞫獄)의 남형(濫刑)이 많았던 것과 찬적(竄謫)이 너무 지나친 것을 뉘우치고 깨달아 혹은 문안(文案)을 몰입(沒入)하라 명하고, 혹은 여러 신하들을 용서하여 석방할 것과 또 세 환관(宦官)을 출축(黜逐)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이만근(李萬根)이 비로소 고을 사람을 통해 얻어 보았는데, 대관(臺官) 이진순(李眞淳)이 듣고 먼저 이만근을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였다. 설국(設鞫)하기에 미쳐 황하신이 공초하기를,
"금년 9월에 일찍이 알지 못하던 한 상한(常漢)이 어린 종을 통해 만나보기를 청하기에 병이 있다며 사절하였더니, 곧바로 창 밖에 와서 죄로 귀양온 병조(兵曹)의 이속(吏屬)이라 하면서 조보(朝報) 가운데에서 베껴 낸 비지(批旨)를 가지고 와서 보였는데, 자획(字畫)이 난잡하였으므로 옮겨 베껴 동생 황하민(黃夏民)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수상함을 깨닫고 그대로 곧 불에 태웠으니, 그 전파된 것은 곧 조카 황상질(黃尙質)이 베낀 것입니다. 찾아 온 그 사람의 성명은 전연 알 수 없고 얼굴은 비슷하게 기억하는데, 그때 이웃 사람 남중로(南重老)가 마침 참견한 일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스스로 위조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황하민의 집에 가서 물었겠으며 황상질 또한 무엇 때문에 또 조용석(趙龍錫)에게 질문했겠습니까?"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여러번 더 자세히 캐묻고 또 남중로와 황하신을 잡아다가 대질(對質)시키니 초사(招辭)에 약간의 어긋남이 있었다. 마침내 황하신이 그 사람의 성명을 현고(現告)하지 않는다 하여 일차 형신(刑訊)하였으나, 대답한 바가 종전과 같았다. 이진순이 상소하여 잠시 형신을 정지하고 찾아와서 보여준 사람을 기포(譏捕)할 것을 청하였지만, 미처 비답을 내리지 않아서 그 아들이 또한 격고(擊鼓)315)  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는데, 황하신이 갑자기 죽었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을 인솔하고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계제(階梯)가 이미 끊어졌고 사건의 실상을 캐내 조사할 길이 없으니, 청컨대 황상절과 남중로 등은 석방하고,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용모(容貌)를 물색하여 널리 기포(譏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황하신은 본래 성실하고 신중하다고 일컬어졌으니, 가짜 비지(批旨)를 스스로 짓지 아니한 것은 세상이 다 알았다. 대신(大臣)도 또한 차자(箚子)로 아뢰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나이 일흔이 넘어서 항양(桁楊) 아래에서 죽으니, 원통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12월 10일 을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윤빈(尹彬)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청하기를,
"이시필(李時弼)을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고,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의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여필용(呂必容)을 승지(承旨)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중희(金重熙)를 사간(司諫)으로, 이진수(李眞洙)·윤서교(尹恕敎)를 정언(正言)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부교리(副校理)로, 여선장(呂善長)을 수찬(修撰)으로, 김후연(金後衍)을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삼았다. 김후연은 대비(大妃)의 동생이다. 이광좌(李光佐)가 구례(舊例)를 끌어대어 바로 6품(六品)으로 올려 줄 것을 청하였으니, 부부인(府夫人)을 봉양하기 때문에 이렇게 제수했던 것이다.

 

12월 11일 병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이어 청하기를,
"이연(李㮒)·이환(李煥)·이혁(李爀) 등은 지금부터 다시는 세초(歲抄)에 써서 들이지 말고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써 있는 직명(職名)도 또한 삭제해 버리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사감과(賜柑科)의 부제(賦題)316)  는 이것이 올해 식년 회시(式年會試)에 처음으로 나온 글제였습니다. 그 잘 살피지 않은 데 대해 마땅히 경책(警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예문 제학(藝文提學) 이조(李肇)를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가 다음날 윤허하였다.

 

12월 12일 정사

이인복(李仁復)을 승지(承旨)로, 송진명(宋眞明)을 헌납(獻納)으로, 이광도(李廣道)를 장령(掌令)으로, 이보욱(李普昱)을 지평(持平)으로, 이중술(李重述)을 보덕(輔德)으로, 김시경(金始烱)을 문학(文學)으로, 이성신(李聖臣)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홍정필(洪廷弼)의 처치(處置)는 크게 공의(公議)를 어겼으므로 진계(陳啓)하여 논박해 파직한 것은 진실로 대각(臺閣)의 체모를 얻었는데, 교리(校理) 이승원(李承源)이 한 장의 소장(疏章)을 올려 쓸데없는 말로 변명하며 구하여 이처럼 명의(名義)를 멋대로 뒤집는 말이 있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단지 이승원의 일만 따랐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진연(進宴)하는 일에 대하여 누차 앙청(仰請)하였으나, 따르시지 않으시므로 조용하게 다시 청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진상(進上)은 풍년을 기다려 하라고 분부하시니 또한 부득이 뜻을 받들었다."
하였다. 대개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여러 번 자전(慈殿)께 품청(稟請)할 것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3일 무오

밤 4경(四更)·5경에 달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화성(火星)을 둘렀다.

 

종부시(宗簿寺)에서 계청(啓請)하기를,
"황해도(黃海道) 장연(長淵)의 공한지(空閑地)를 절수(折受)하여 백성을 모아 경작하게 하고 세금을 거두어서 본시(本寺)의 수용(需用)에 보충하게 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각 아문(衙門)의 절수는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데, 종부시는 여러 종친(宗親)을 단속하는 데 불과하니 재곡(財穀)에 대해서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따라서 본받으니 듣는 자들이 놀랍게 여겼다.

 

12월 14일 기미

밤 2경(二更)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집의(執義) 이제(李濟)가 상소하여 청하기를,
"행약(行藥)한 궁비(宮婢)를 빨리 유사(有司)에게 넘겨 쾌하게 왕법(王法)을 바루고,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에게는 작처(酌處)의 명을 도로 정침(停寢)하여 엄중하게 국문(鞫問)해 실정을 알아내게 하며, 이시필(李時弼)은 그대로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법(法)에 의해 처단(處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시필이 좌죄(坐罪)된 바는 부도(不道)한 말에 관계되니, 감사(減死)한 율(律)은 참작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에 대해서는 궁중에 반드시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나 실로 찾아낼 길이 없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을 판윤(判尹)으로, 조익명(趙翼命)을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12월 15일 경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함흥 판관(咸興判官) 정형진(鄭亨晉)은 사람됨이 혼미(昏迷)하고 용렬하며 몸가짐이 비루하고 자질구레하여 만세교(萬世橋)를 개수(改修)한 뒤 썩은 나무를 민간(民間)에 나누어 주고 억지로 황모(黃毛)를 바치게 했으니, 규정된 조목 외에 마구 징수한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대동 찰방(大同察訪) 장두주(張斗周)는 본래 관서(關西)의 미천(微賤)한 사람으로 우속(郵屬)317)  들을 같은 동배(同輩)로 여겨 서로 너나들이하고 지내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단지 새로 아뢴 것만 따랐다.

 

윤헌주(尹憲柱)를 용천부(龍川府)로 정배(定配)하였다. 윤헌주는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탐욕스럽다는 이름이 있었고,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재직했을 때는 더욱 재화(財貨)를 탐낸다고 일컬어졌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않았을 때는 가난하여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없었는데, 그 뒤에 가택(家宅)이 크고 광활하며 의복과 기물이 사치하고 화려하여 어느 사이에 부가옹(富家翁)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아 더럽게 여겼다. 문지(門地)가 또 미천(微賤)한데도 외람되게 북번(北藩)에 임명되자 물의(物議)가 놀랍게 여겼다. 감영(監營)에 있을 때는 기교(奇巧)한 짓을 많이 했고, 또 재화(財貨)를 옮겨 파는 데 수단이 있어서 공물(公物)을 마음대로 주물러 그 이익을 배로 거두고는 제 주머니에 듬뿍 채워 넣었으므로 비방하는 말이 낭자하였다. 대관(臺官)이 논핵(論覈)하자 북평사(北評事) 이명의(李明誼)가 그일을 조사하였는데, 능히 꼬투리를 찾아내지 못하였으니, 대개 그의 수단이 능란하고 자취를 없애는 데 교묘하여 재곡(財穀)을 분산(分散)시켜 두고 이민(吏民)과 후하게 결탁했기 때문이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언주(讞奏)하여 대략 두어 건의 일을 들고 불법(不法)으로 재물을 탐냈다고 논(論)하였으나, 죄가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는 데에 그치니, 세상의 인심은 불쾌하게 생각함이 많았는데, 북쪽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의 선치(善治)를 칭송한다 하였다.

 

12월 16일 신유

2경(二更)에서 5경까지 달무리하였다.

 

의금부(義禁府) 죄인(罪人) 김시발(金時發)에 대하여 의계(議啓)로 인해 또 형(刑)을 덜도록 분부하였다가 승정원(承政院)에서 작환(繳還)하니, 임금이 다시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번에 진향사(進香使)가 이미 돌아오고도 3일 만에 비로소 회자(回咨)를 바쳤으니, 그 사신(使臣)의 직분(職分)을 훼손시키고 사체(事體)를 손상시킨 것이 큽니다. 벌(罰)이 문비(問備)318)  에만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새로 아뢴 것만 따랐다.

 

12월 17일 임술

조원명(趙遠命)을 집의(執義)로, 오명신(吳命新)을 교리(校理)로, 이사상(李師尙)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윤유(尹游)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당(朴鏜)과 성주 목사(星州牧使) 정건일(鄭健一)에게는 통정(通政)의 품계(品階)를, 김해 부사(金海府使) 박동상(朴東相)에게는 가선(嘉善)의 품계를 더하니, 잘 다스리고 진휼(賑恤)을 잘했기 때문이었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윤빈(尹彬)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근래에 장법(贓法)이 엄하지 아니하여 마땅히 팽아(烹阿)319)                  의 법을 베풀어야 할 자도 끝내는 모두 아무 일이 없는 데로 귀착되니, 탐관 오리(貪官汚吏)를 징계할 수가 없고, 나라의 기강(紀綱)이 점점 해이해집니다. 죄인 임도(林燾)는 간장(奸贓)이 낭자하여 문서(文書)가 모두 어사(御史)의 수색해 올린 것 가운데에 들어갔는데도 금오(金吾)의 의언(議讞)은 곧바로 장배(杖配)로 결단하였습니다. 청컨대 금오 당상(金吾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임도는 의금부로 하여금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실정(實情)을 알아내게 하소서. 사흉(四凶)의 죄범(罪犯)은 똑같이 반역(反逆)이니, 치죄(治罪)함에 있어서 마땅히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인데, 조태채(趙泰采)만 유독 노륙(孥戮)의 형벌을 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관빈(趙觀彬)이 김제겸(金濟謙)과 투합(投合)했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고, 조태채가 역모(逆謀)에 빠진 것도 대개 또한 조관빈이 길을 연 것입니다. 선인문(宣仁門)에서의 한 일을 누군들 종사(宗社)를 부지(扶持)한 성대한 거조로 칭송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조태채의 여러 아들들은 이 일을 분해하고 원망하여 지친(至親)인 대신(大臣)320)                  을 원수처럼 보아 서로 관계를 끊고, 또 대신의 상사(喪事) 때 성복(成服)을 한 여러 친척들에게 관계를 끊는다고 알렸습니다. 나라를 원망하고 임금을 원수처럼 여겨 밤낮으로 췌마(揣摩)321)                  하였는데, 지금까지 편안하게 누워서 쉬고 있으니, 여정(輿情)이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조태채의 세 아들을 절도(絶島)에 나누어 귀양보내소서.
고(故) 사인(士人) 이정영(李廷煐)의 아내는 곧 조태채의 딸입니다. 그 아비가 역모에 빠져 죽음을 당하자, 종사(宗社)를 부지한 대신(大臣)에게          【조태구(趙泰耉)를 지칭한 것이다.】         원망을 돌려 항상 작은 수레에 허수아비를 싣고 죽이는 형상을 하였으며, 또 토역(討逆)한 여러 신하의 형상을 그려 벽 위에 걸어두고 자신이 활 시위를 잡아 당겨 쏘았습니다. 또 그의 계집종을 시켜 남편의 자형(姊兄)인 김동필(金東弼)        집의 두 여종과 짜고 같이 모의하여 흉물(凶物)을 김동필의 집에 묻었으며, 또한 그 시아버지 임원군(林原君) 이표(李杓)와 그 남편의 동기(同氣) 여러 집에까지 미쳤는데, 정상(情狀)이 마침내 드러나자 파낸 것이 낭자(狼藉)하였습니다. 흉역(凶逆)한 속셈이 절로 그 내력이 있으니, 이후 다 주벌(誅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 여종이 이미 죽어 성옥(成獄)할 길이 없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단지 새로 올린 계사(啓辭)만 따랐다.

 

12월 18일 계해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아뢰기를,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지극히 흉악한 정상(情狀)이 삼수(三手)처럼 참독(慘毒)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의 묵묵한 도움에 힘입어 요악한 난적(亂賊)들의 목과 허리를 베어 모두 부월(鈇鉞)322)  에 복주(伏誅)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행약(行藥)한 궁인(宮人)은 아직까지도 채 잡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종사(宗社)를 걱정하는 염려와 신민(臣民)이 울분(鬱憤)해 하는 정성이 풀릴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대계(臺啓)로 인하여 여러 번 윤종(允從)하시는 말씀을 내리셨는데, 해가 바뀌고 세월이 지나도 아직까지 조사해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흉악한 짓을 한 정절(情節)이 역절(逆節) 【김성절(金盛節)이다.】 의 초사(招辭)에서 죄다 드러났고, 누런 물을 토해 내셨음이 약원(藥院)의 비답(批答)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착착 서로 들어맞아 그 달과 날짜를 상고할 수 있으며, 그 때 어선(御膳)을 맡았던 여관(女官)도 또한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혹자는 성명(聖明)께서 죄가 없는 자가 섞여 들어갈까 염려하신다 합니다만, 지금 만약 출부(出付)하신다면, 국청(鞫廳)에서도 또한 성상(聖上)께서 흠휼(欽恤)하시는 인덕(仁德)을 체념(體念)하여 밝게 사실을 조사해 낼 것입니다. 옛날 인조 대왕(仁祖大王) 때 궁중(宮中)에 흉물(凶物)을 묻은 자취가 있었는데, 그때 대신(大臣) 최명길(崔鳴吉)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무릇 전하(殿下)의 궁중에 있는 자는 모두 내직(內職)을 삼가지 못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유사(攸司)에게 출부하시어 하나하나 안문(按問)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이에 의해 출부하시어 정범(正犯)을 조사해 알아낸다면 몰래 숨어 있는 재화(災禍)의 기틀을 영원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행약(行藥)한 궁인(宮人)으로 김성(金姓)을 가진 자를 유사에게 출부하시어 정상(情狀)을 밝게 조사하여 왕법(王法)을 쾌히 바로잡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니 또 번거롭게 말라 하교(下敎)하였다.

 

12월 19일 갑자

밤 5경(更)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달무리하였다.

 

황해도(黃海道) 서흥현(瑞興縣)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세 번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조정빈(趙鼎彬)을 정의현(旌義縣)에, 조관빈(趙觀彬)을 흥양현(興陽縣)에, 조겸빈(趙謙彬)을 거제부(巨濟府)에, 이정영(李廷煐)의 처(妻)를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하였다. 이들은 조태채(趙泰采)의 자녀이다. 조태채의 정상은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무리와 차등이 있으므로 처음에 사형을 논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도 마침내 과중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물며 이미 역률(逆律)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그 자녀들을 절도(絶島)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또한 심하지 않겠는가? 또 이정영 처가 범한 바는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조사하여 정법(正法)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단지 성옥(成獄)할 길이 없다 하여 곧바로 투비(投畀)를 청하였다. 찬류(竄流)의 화(禍)가 부녀자에까지 미쳤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인가? 대개 그때 전하는 말에 조녀(趙女)가 장차 여러 원수들의 집에 흉물(凶物)을 묻으려 하기 때문에 김일경(金一鏡) 등이 그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대관(臺官)을 부추겨서 그 일을 이루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12월 20일 을축

삼사(三司)에서 또 세 번 아뢰었으나, 임금이 또한 따르지 않았다.

 

윤혜교(尹惠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진희(趙鎭禧)·구명규(具命奎)를 지평(持平)으로, 김상규(金尙奎)를 교리(校理)로, 이제(李濟)를 보덕(輔德)으로, 신치운(申致雲)을 문학(文學)으로, 이정걸(李廷傑)을 사서(司書)로, 이조(李肇)를 우빈객(右賓客)으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이진유(李眞儒)와 사간(司諫) 김중희(金重熙) 등이 복합(伏閤)하여 청(請)을 준허(準許)받지 못하였으며 연명(聯名)으로 인피(引避)하였다. 옥당(玉堂)에서도 또한 소장(疏章)을 올리고 바로 나갔다.
사신은 말한다. "일이 진실로 간쟁(諫諍)할 것이라면 비록 날마다 복합(伏閤)하되, 견거(牽裾)323)  하고 절함(折檻)324)  하며 시일이 지나더라도 떠나지 않고, 청(請)을 허락받지 못하였으면 물러가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만약 언책(言責)이 있는 자가 그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리로 떠나갔다면, 역비(逆婢)를 조사해 내기 전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인데, 잠깐 물러났다가 잠깐 나아가는 것이 아이들의 장난 같았으니, 이렇게 하고서 어찌 족히 상청(上聽)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0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323] 견거(牽裾) :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신비(辛毗)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노(怒)하여 일어나자 신비가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강력하게 간했다는 고사(故事).[註 324] 절함(折檻) : 전한(前漢) 때의 명신(名臣) 주운(朱雲)이 성제(成帝)에게 애써 간(諫)하자, 성제가 화를 내어 주운을 죽이려고 어사(御史)를 시켜 끌어내리게 하니, 주운이 난간을 붙잡고 서서 버티며 계속 간하다가 난간이 부러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고사(故事).
사신은 말한다. "일이 진실로 간쟁(諫諍)할 것이라면 비록 날마다 복합(伏閤)하되, 견거(牽裾)323)  하고 절함(折檻)324)  하며 시일이 지나더라도 떠나지 않고, 청(請)을 허락받지 못하였으면 물러가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만약 언책(言責)이 있는 자가 그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리로 떠나갔다면, 역비(逆婢)를 조사해 내기 전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인데, 잠깐 물러났다가 잠깐 나아가는 것이 아이들의 장난 같았으니, 이렇게 하고서 어찌 족히 상청(上聽)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고, 잇따라 휴퇴(休退)·치사(致仕)325)  를 바라니, 임금이 온후(溫厚)하게 타이르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현장(李顯章)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박정(朴涏)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12월 22일 정묘

밤 1경(更)에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위에서 나와 우림성(羽林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병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서너 자쯤 되었으며, 색깔은 붉고 광채가 땅에 비쳤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과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 등이 2품(品)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 계청(啓請)하기를,
"행약(行藥)한 궁비(宮婢)에 대하여 빨리 명백한 조사를 명하시고 출부(出付)하시어 쾌히 전형(典刑)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의 이 계사(啓辭)는 실로 종사(宗社)를 위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조사해 보았더니 어선(御膳)을 맡은 궁인(宮人) 중에는 비슷한 자가 없었다."
하였다.

 

12월 23일 무진

밤 4경과 5경에 달무리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 등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전에 청했던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최석항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자전(慈殿)의 진상(進上)을 풍년을 기다려 복구(復舊)하라는 분부가 계셨으니, 무릇 듣는 사람이 누군들 그 절손(節損)하시는 뜻을 흠탄(欽歎)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진상의 원래 수효가 본래 과다(過多)하지 않으니, 지금 비록 복구한다 하더라도 재화(財貨)를 손상시키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천하(天下)를 가지고 그 어버이에게 검약(儉約)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에 있어서 끝내 미안함이 있으니, 삼가 원하건대 다시 아뢰어 기필코 회청(回聽)하시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자전(慈殿)께 올리는 물건이 본래 과다하지 않으니, 종전대로 복구함이 어른을 섬기는 도리에 합당할 듯하다."
하였다.

 

12월 24일 기사

진시(辰時)와 사시(巳時)에 해에 중이(重珥)가 있었는데, 안쪽의 햇무리에는 양이(兩珥)가 있었고, 바깥쪽의 햇무리 위에는 배(背)가 있었으며, 색깔이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빈청(賓廳)에서 또 계청(啓請)하기를,
"김성(金姓) 궁인(宮人)을 국청(鞫廳)에 출부(出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마침내 정경(正卿)과 더불어 입대(入對)하여 힘껏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때 백관(百官)이 정청(庭請)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대신이 수습하기 어렵다 하여 중지하였다.

 

12월 25일 경오

진시(辰時)부터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12월 26일 신미

부제학(副提學) 이사상(李師尙)·지평(持平) 조진희(趙鎭禧)·헌납(獻納) 송진명(宋眞明)·부수찬(副修撰) 이현장(李顯章)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조진희와 송진명이 거듭 합계(合啓)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조진희가 이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김제(金堤)의 늙은 아전 조태려(趙泰呂)는 가짜 비답(批答) 한 본(本)을 베껴 내어 이웃 고을에 전파하였는데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 많았습니다. 청컨대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기포(譏捕)하여 밝게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새로 아뢴 것만 따랐다. 송진명이 또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단지 윤각(尹慤)과 유성추(柳星樞)의 일만 따랐다. 이사상 등이 행약한 궁인(宮人)의 일을 반복하여 진청(陳請)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양사(兩司)의 여러 계사(啓辭)를 윤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또한 답하지 않았다.

 

유필원(柳弼垣)을 부교리(副校理)로 삼고, 윤유(尹游)를 승직(陞職)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12월 28일 계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조진희(趙鎭禧)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조세망(趙世望)은 본래 인망(人望)이 부족하고, 또 국얼(麯孼)326)  을 좋아하며, 황해 병사(黃海兵使) 장한상(張漢相)은 음흉하고 정직하지 못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았으니, 아울러 개차(改差)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유학(幼學) 홍우저(洪禹著) 등이 상소하여 권상하(權尙夏)를 신변(伸卞)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처음에 받아들이지 않으니, 홍우저 등이 마침내 승지(承旨)를 침욕(侵辱)하므로, 부득이 계품(啓稟)하기를,
"홍우저 등의 소장(疏章) 가운데 권상하를 선정(先正)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무엄하였습니다. 그리고 본원(本院)을 헐뜯고 욕한 것이 끝이 없으니, 한결같이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봉입(捧入)하라고 명하였다. 그 상소에 대략 말하기를,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은 남곤(南袞)·심정(沈貞)의 남은 술수를 이어받아 끝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로 하여금 혹독하게 참혹한 화를 입게 하였는데, 지금 와서는 사문(斯文)의 화가 더욱 맹렬하여 송시열의 사우(祠宇)는 물리치고 허목의 사우는 우뚝하니,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을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또 신치운(申致雲)이란 자가 있어 천만 부당(千萬不當)한 말로 터무니없는 사실을 조작해 억지로 갖다 붙여 선정신(先正臣) 권상하를 무함하고 욕하면서 선조(先朝)에서 총발(寵拔)한 작명(爵名)을 추탈(追奪)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권상하의 도덕(道德)은 순수(純粹)하고 덕행(德行)은 순정(純正)하여 선현(先賢)의 정맥(正脈)을 이어 받들고 사도(斯道)의 종주(宗主)가 되었습니다. 저 선조(先朝) 때부터 예우(禮遇)가 극진하여 행전(行殿)327)  에 소대(召對)해 몸소 손을 잡고 뒷수레에 태우려고까지 하셨으며, 전하(殿下)께서도 또한 일찍이 성례(誠禮)로 총애하시고 원로(元老)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치운이 아무리 혐의하고 미워할 만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제마음대로 죄를 얽어 해치고 있다 할지라도 유독 선조(先朝)께서 선철(先哲)을 본받으신 명감(明鑑)을 손상시키고 성상(聖上)께서 현인(賢人)을 좋아하시는 덕(德)에 누(累)가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른바 거활(巨猾)에 의지하여 기댄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적면(賊冕) 【신면(申冕)을 지칭한다.】 이 김자점(金自點)에게 빌붙고 신종화(申宗華)가 견적(堅賊) 【허견(許堅)을 지칭한다.】 에 의지한 것과 같은 다음에야 이런 등의 말로 지목할 수 있는 것이니, 권상하는 젊을 때부터 대현(大賢)을 스승으로 섬겼으므로, 반드시 그 독(毒)을 연원(淵源)이 시작된 데다 아울러 집중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갑인년328)  과 을사년329)  에 선정(先正)을 해치고 어진이를 죽인 무리라 할지라도 오히려 감히 간악(奸惡)하다는 이름을 더하지 못하였으니, 신치운이 아무리 흉패하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희조(李喜朝)는 젊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친한 벗과 어진 스승으로 여겼고 정호(鄭澔)의 넓고 아름다운 경술(經術)은 충정(忠正)하고 강극(剛克)하다 하였는데, 신치운은 간사하고 참독(憯毒)하다고 지목하고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죄악(罪惡)을 억지로 선정(先正)에게 더하면서 돌아보고 꺼림이 없으니, 신(臣)은 나직(羅織)330)  의 화가 장차 다시 성세(聖世)에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정유년331)  의 일에 있어서는 권상하가 스스로 변명한 소(疏)에, ‘신은 궁벽(窮僻)한 데에 살고 있기에 가장 늦게야 비로소 일월(日月)의 바뀜을 들었는데, 때가 지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어찌 가히 초야(草野)에 묵혀 사는 거칠고 미천한 행적으로 이미 지나간 일을 뒤따라 제기하여 논열(論列)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고묘(告廟)의 수의(收議)에 대해서는 ‘신이 〈의논하는 것은〉 너무나도 외람됩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대신으로 자처하여 헌의한 것이 있었습니까?
이로 보건대 선정의 자처한 의리는 각각 근거가 있었으니, 비록 무함하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말이나 되겠습니까? 신치운은 적신(賊臣) 신면의 증손인데, 역신(逆臣) 허견과 친압(親狎)했던 신종화를 할아비로 삼았고, 탈적(奪嫡)332)  하여 인륜(人倫)을 어지럽힌 신유(申輶)를 아비로 삼았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를 인류(人類)에 견주어 이에 흉역 부도(凶逆不道) 등의 말을 방자하게 함부로 선정(先正)에게 더한단 말입니까? 더욱이 ‘나라를 원수처럼 여기고 임금을 배반하고 부자(父子)의 의를 끊었다[讎國叛君絶父子]’는 일곱 글자는 바로 저들 3대(代)의 죄악을 형용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신치운이 이에 기회를 타고 선정(先正)을 욕보여 시의(時議)에 아첨하려는 계획을 행한 것이 진실로 이상한 일은 아니나, 어찌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면서 그의 말에 요혹(撓惑)되어 양조(兩朝)에서 예우하던 어진이로 하여금 지하(地下)에서 죄를 받는데도 살피지 않으실 줄 생각 했겠습니까? 바라건대 선정신 권상하의 관작을 추탈하는 명(命)을 정침(停寢)하시고, 신치운이 어진이를 무함한 죄를 밝게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윤각(尹慤)·유성추(柳星樞)의 일 때문에 혐의스럽고 곤란하다 하면서 다시 연석(筵席)에서 안핵(按覈)할 것을 말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도 또한 차자(箚子)를 올려 인혐(引嫌)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9일 갑술

부제학(副提學) 이사상(李師尙) 등이 다시 입대(入對)하고, 지평(持平) 조진희(趙鎭禧)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조세망(趙世望)·장한상(張漢相) 등의 일만 따랐다. 또 청하기를,
"투소(投疏)한 사람 홍우저(洪禹著)를 먼 곳에 정배(前啓)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따랐다. 헌납(獻納) 송진명(宋眞明)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단지 조성집(趙聖集)의 일만 따랐다. 이사상 등이 잇따라 궁비(宮婢)의 일을 다시 진달하여 해가 기울도록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수찬(副修撰) 이현장(李顯章)이 개강(開講)하거나 혹은 소대(召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유수(柳綏)를 사간(司諫)으로, 심수현(沈壽賢)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윤순(尹淳)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오명신(吳命新)을 부교리(副校理)로, 박태항(朴泰恒)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12월 30일 을해

조성집(趙聖集)을 죽였다. 조성집이 이미 그의 동생을 독살(毒殺)하자, 대관(臺官)이 잡아다 핵실(覈實)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형조(刑曹)에서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내고 뇌물을 받은 군졸(軍卒)은 곧바로 형률에 의해 사형(死刑)에 처하고, 조성집의 처리는 대신(大臣)에게 헌의(獻議)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대명률(大明律)》을 인용하여 응당 죽여야 할 죄가 없음을 말하니, 임금이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명하였다. 이에 대관(臺官)이 간쟁(諫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정법(正法)333)  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최석항이 또 아뢰자 임금이 도로 정침(停寢)하라 하였다. 대관이 다시 힘써 간쟁하니 임금이 마침내 그대로 따랐다. 조성집은 바야흐로 배소(配所)에 있었으므로 도사(都事)를 보내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조성집은 정상(情狀)과 법(法)으로 참작해 보면 모두 응당 죽여야 할 형률(刑律)이 없어 처음에 이미 작처(酌處)하였는데, 대관(臺官)이 반드시 죽이고야 말았다. 대신(大臣)이 끝내 구제할 수 없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여 천하(天下)를 얻는다 해도 오히려 또 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당론(黨論)으로 인하여 해쳐서 죽임이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랴?

 

이 해의 총 호수(戶數)는 1백 57만 6천 1백 38호이며, 【서울에 3만 1천 8백 59호이고 지방에 1백 54만 4천 2백 79호이다.】  인구(人口)는 6백 84만 6천 6백 39명 내에서 서울이 19만 9천 18명이고 【남자가 9만 3백 96명이고 여자가 10만 8천 6백 22명이다.】  지방이 6백 64만 7천 6백 21명이었다. 【남자가 3백 21만 5천 6명이고, 여자가 3백 43만 2천 6백 15명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08면
【분류】호구-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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